나의 다정한 마야
멀린 페르손 지올리토 지음, 황소연 옮김 / 검은숲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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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마야


나의 다정한 마야, 멀린 페르손 지올리토, 검은숲, 2018.


  어항속 물고기가 뛰노는 듯한 표지에 박힌 책 제목은 다정스러워 난 이 책을 꿀벌 마야쯤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읽고 싶어 담아 두었던 이유는 어디로 날아가고 꿀벌 마야가 아님을 알고선, 마야를 다정스럽게 부르기엔 마음이 잡히지 않아 더디게 책이 흘러가게 된다. 원제는 “가장 위대한”이다.

  이야기는 충격적인 교실 현장에서 시작한다. 한 사람만 총에 맞지 않았다. 총에 맞지 않은 단 한 사람, 마야. 총기소지 국가에서 자주 접하는 기사처럼 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의 생존자, 아니 공범자로서의 마야. 소설은 마야의 재판을 다룬다. 현재 마야는 공범으로 9개월째 구속수감되어 있다. 변호사는 무죄를 주장하고 검사는 유죄를 주장한다. 마야는 그 어디쯤에 있을까. 마야가 공범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아니, 마지막 페이지에 밝혀질 것이다. 남자친구 세바스티안이 제 아버지를 죽이도록 부추기고 총기난사까지 도운 공범, 명확한 사실은 5명이 총에 맞았고 그 중 두명은 마야가 쏜 총에 의해서다. 

  책장이 느릿하게 넘어가는 이유를 책을 읽다 깨달았다. 아직 마야를 다정한 마야로 부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걸. 첫 페이지부터 인천초등학생 살인사건의 두 명의 공범이 떠오른 탓도 클 것이다. 소설이 꼭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건만 나는 마야에게 어떤 감정을 갖는 것이 되지 않아서, 아니 어떤 판단을 해야 할지 모르겠기에 페이지가 더디게 흘러갔던 것이다. 그저 소설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면 될 것을 이미 유무죄를 판별하고서 마야를 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벌써 두 명의 희생이 마야에 의해 이루어졌기에 사건의 내막을 굳이 알 필요없다 판정지은 걸까. 아닌듯 하며 마야에 대해 단정이 거의 완료가 된 상황에 따라 마야를 보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당신은 어떠신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나는 당신이 무슨 일을 했고 여전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안다. 당신은 나를 당신이 추정하는 나의 이미지에 맞추려 한다. 내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틀에도 들어맞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출세에 목매는 학생 자치위원회 회원도 아니고, 용감한 강간 피해자도 아니고, 전형적인 대량 학살범도 아니고, 꽤 똑똑하고 꽤 예쁘장한 패셔니스타도 아니다. 문신도 하지 않았고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도 아니다. 나는 누구의 여자친구도, 누구의 절친도, 누구의 딸도 아니다. 나는 그냥 마야다.


  어떤 사건이라도 언론과 재판의 말끝하나에 달라질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건 한순간이다. 현직 변호사가 썼다는 소설은 그리하여 법정소설로서 스릴있게 이야기를 이끈다. 변호사와 검사의 증거와 추론의 핑퐁게임. 혼란과 충격에 마야의 불안한 심리. 그리고 한 공간에 있던 그들의 이야기들이 흥미있게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도 청소년 범죄의 수법이나 내용이 충격적이고 경악할 정도로 잔인해지고 그 수도 증가하고 있지만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에도 결코 빠지지 않는 건 청소년들의 마약중독과 총기발사다.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어른, 부모의 영향력과 인종차별과 부의 축적에 따른 권력형성은 그곳에서나 이곳에서나 같다. 


사회적 병폐를 소수자의 탓으로 돌릴 때 이득 보는 자들이 있다는 말은 전혀 터무니없는 음모론이 아닙니다. 그 문제의 원인이 흑인에게 있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도. 1930년대에는 그 대상이 유대인이었고, 오늘날 유럽에서는 이민자들이 되겠네요. 


  마야의 재판을 다룬 소설에서 많은 페이지를 점하고 있는 것은 미국 경제학자의 초청 강연에서의 질의응답이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부모들까지도 강당에 모여 이루어지는 토론이 길게 서술되어 있는 이유는 단지 사미르와 사바스티안이 자란 환경과 그들의 사고를 비교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부의 분배에 관한 이야기를 꺼리며 “우리가 공산주의자를 키웠군!” “사회주의자 납셨어.”라 깐죽거리는 어른이 있는 강연장, 그 모습이 너무도 익숙하다.


모든 인간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점잖고 교양을 갖춘 사람, 어쩌면 박사 학위 소지자나 할 말이고, 그렇게 말한다고 그것이 사실이 되지도 않는다. 알다시피 현실에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가치를 지닌다.


  재판을 받으며 그 일이 벌어지기까지의 지난 시간을 생각하며 마야가 깨달은 건, 모든 인간은 현실에서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같은 공간에서 죽은 어맨다와 데니스가 신문기사에 등장하는 횟수가 다른 이유라는 것을. 가난한 이와 이민자들, 인종이 다른 이들에 대해서라면 거침없이 차별을 보여주면서도 또한 보이는 곳을 향해서는 나는 몰상식하고 배려없는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 외치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아이들 역시 같은 모양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성적이고 굳건하게 모범생으로서 자세를 견지하는 사미르가 결국 아직 어리다는 것을, 그 미성숙함에 놀라게 된다. 아이는 결국 아이인 것을. 사미르처럼 이 세상을 살면서 의식적으로도 모범적이려하지 않는 세바스티안의 아버지는 어떤가. 마야, 세바스티안, 사미르, 그들의 부모들만이 통하는 그 세계가 세상 모든 총기의 안전장치를 제거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그러고보니 스웨덴 소설, 프레드릭 배크만의『베어타운』법정에서도 ‘마야’가 있었다. 그때 ‘마야’를 둘러싼 세상의 공방도 어른들의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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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 지음, 강미경 옮김 / 느낌이있는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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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함에 기대어

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 2018.


  올리버 트위스트가 처한 현실에 비해서 책 표지는 참 따스하고 예쁘다. 아마 그것이 다른 출판사의 책을 읽고 나서도 번역에 대한 불만이 겹치어 이 따스해 보이는 표지를 다시 펼쳐든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완역본이라는 것도 많은 지분을 차지하긴 하지만 어쨌든 올리버 트위스트의 마음결 같은 표지의 힘이다. 이 고전이 유치원 비리와 맞물려 생각날 땐 따스한 책표지도 소용없다.

  올리버가 살았던 시대, 그 사회 환경에선 올리버처럼 성장하고 자라나는 것이 미덕일 수가 있을까. 올리버 트위스트는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서로 읽혀진다. 그 시대 아동이 처한 현실은 찰스 디킨스가 겪은 일과 맞물려 생생하다. 하지만 아동문학과 아동 영화로 널리 회자된 것처럼 언뜻 올리버 트위스트는 그 모든 고난과 역경은 올리버 트위스트가 천성적으로 가진 선함으로 헤쳐나가는 것처럼 보이게끔 만든다. 우린 언제나 착하고 선하고 올바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이뤄지기를 응원하지만 조금이라도 그렇지 못하다면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그것 자체가 올바르지 않다고 여긴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보여주는 현실의 타개책은 오로지 개인이 가진 ‘선량함의 정도’에 따른다. 올리버 트위스트를 생각하면 미소짓게 되고 응원하게 되는 이 풍자적 이야기에 조금 주춤하게 되는 건 그런 까닭이다.

  개인이 지닌 선량함에 기대어 잘못된 일들이 바뀌기를 기대한다는 건 얼마나 소모적이며 성과없는 일인가. 이 사회는 그것을 너무도 잘 보여준다. 먼 나라 영국에서 19세기에 일어난 이 이야기의 배경이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몇십년전에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지금은 곳곳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형태, 이른바 ‘노예’처럼 지적장애인들을 부리는 일로 지속되고 있다. 개인의 선량함, 그것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인간을 오로지 믿는다는 건 사치스러운 일인 것처럼 여겨진다.


“두 아이 모두 상태가 아주 나빠 장사를 치르는 것보다 다른 데로 옮기는 것이 2파운드 싸거든요. 다른 교구에 두 아이를 떠넘길 수 있다면 말이죠. 사실 그럴 가능성이 아주 크오. 재수없게 도중에 죽지 않는다면 말이죠. 하하하!”

 

  여지없이 돈 앞에서는 선량함을 없앨 수 있는 사람, 선량함이라는 것이 없었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때로 이 선량함은 늘 피해자들에게만 끝까지 요구된다. 올리버 트위스트 시대 구빈원을 보며 형제복지원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충격이란 말이 무색할 이 사건은 특별법 제정을 청원하고 있지만 워낙 권력을 쥔 이들이 사건의 중심고리와 연결된 이들이 많아서인지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의지도 ‘선량함’도 없어 보인다. 여기에 사립유치원들의 패악이 겹치어 얹어진다. 더할나위 없이 선량하고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기 위해 감춘 얼굴. 구빈원의 시대가 아님에도, 돈을 받지 못해서도 아니고 돈을 받고 있음에도 수많은 올리버 트위스트를 양산해낸 이 거대한 구조가 그들만의 ‘선량함’. 이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그들만의 끈끈함. 너무도 뻔하게 그들의 비리와 잘못들을 당당하게 가벼이 여기는 그들만의 그 순수함. 


인간이 같은 인간을 학대하고 못살게 굴 때, 그 끔찍한 증거가 무거운 먹구름처럼 느리지만 확실하게 하늘로 올라가 나중에 우리가 저세상에서 모든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걸 한 번이라도 생각할 수 있다면! 죽은 사람이 뼈저리게 후회하는 고백을 단 한번이라도 상상할 수 있다면! 아무리 거만한 인간이라도 귀담아들을 수밖에 없는 증언을 헤아릴 수 있다면! 매일 일어나는 모욕과 부당함, 고통, 불행, 잔혹함이 있을 곳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말들이 얼마나 허황되고 소용없는 것인지 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고 한다.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웃는 얼굴을 하지만 밥을 먹을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올리면서 아흔 명이 먹을 국에 달걀 세 개를 깨뜨려 넣는 감사고 사랑이다. 명품백을 사랑하고 성인용품을 애용하느라 바쁜 사랑. 아이들은 그들에게 숫자고 볼모다. 사립유치원의 행태가 이 책 속 구빈원 직원 범블, 구빈원장, 위원회 위원들이 행태처럼 하나같이 익숙하다. 오래도록 당연처럼 이어져 온 그들의 비리,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한다고 여기는 그 순수함을 보건대 옳고 바른 교육자로서의 자세를 가지어 잘못을 깨달으라 함은 너무나 위험한 발상이다. 축적된 구조적인 문제가 잠시의 눈물 한방울로 해결될 리 없다. 같은 이유로 이런 구조 속에 놓여 고통을 견디는 올리버 트위스트와 같은 아이들에게도 마냥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과 정직과 선함만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런 상황 속에서 올리버 트위스트가 몇 번의 거짓말을 하고 몇 번의 다툼을 일으킨다면 올리버 트위스트는 책 속 결말처럼 뒤쫓기지 않고 포근하고 따스하게 지낼 수 없게 되는 건가. 이 모든 것에 회의가 든다.


내가 모두 진심으로 행복했다고 썼으나 이런 말들은 사족에 불과하다. 뜨거운 사랑과 따뜻한 인간미가 없다면, 자비를 중요하게 여기시고 만물에게 온정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세기는 어쩌면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뜨거운 사랑과 인간미로 아이들보다 돈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인간미라는 것을 알게 되는 시대다. 또한 그들이 하느님께 감사함을 갖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곳은 십자가를 달고 어떤 곳은 만자를 달았다. 어느 한곳도 빠짐없이 하트를 그려놓지 않은 곳이 없다.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아이의 순수함을 마냥 바라는 것이 이기적인 욕심이라는 생각까지 드는 시대다. 그렇게 본을 보여주는 이가 없건만! 인간의 선량함보다 인간의 악랄함을 믿으며 미래를 그려나가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드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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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멈추는 법
매트 헤이그 지음, 최필원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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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라는 죽고 싶다고 했다


시간을 멈추는 법, 매트 헤이그, 2018.


   이야기의 구성 때문에 타임슬립처럼 느껴지는 소설이다. 동화로 유명한 상을 수상한 작가의 이력이 동화느낌도 나게 한다.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주연으로 영화 제작이 확정되었다고 하니 이런 이야기가 소위 ‘먹히는’ 이야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임슬립 이야기가 계속 등장하는 것만 봐도. 이 소설은 시간여행자의 이야기라기보다 그저, 너무 오래 사는 사람의 이야기다. 너무 오래, 한 천년 정도? 그런 이가 절대 해서는 안되는 한가지가 ‘사랑에 빠지는 것’이란 규칙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절대 해서는 안된다라고 할 때 목적어는 무엇일까. 무엇을 위해 절대 해서는 안되는 것을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말하는지 그것은 ‘너무 오래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일까.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먹고 자고 사랑하고 그런 일들일텐데 사랑하지 않아야 하는 삶이란 일상의 삶을 살지 말라는 말과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삶처럼 살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 왜 그토록 오래 살아가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든다.

  보통 사람보다 15배 느린 성장속도를 가진 1581년생 톰 해저드는 다른 이들에게 40대로 보인다. 톰 해저드가 전하는 이력서를 검토해보자. 과연 무슨 일들을 했는지. 21세기 현재 그는 런던의 중고등학교 역사 선생이다. 오래 살아온 그의 이력을 볼 때 직접 경험한 역사를 전할 수 있으니 탁월한 직업선택이 아닐까 한다. 역사에는 전쟁이 있고 중세의 마녀사냥이 있다. 마녀사냥이라는 큰 타이틀로 묶일 이야기 속에 톰의 이야기가 있다. 아들보다 늙어 보이는 엄마는 당연하지만 그 아들과 나이차가 너무 나 보인다면 아들이 늙지 않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 엄마는 마녀다. 늙지 않은 아들이 악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마녀가 된다. 엄마가 아들을 늙지 않게 마법을 걸었으니까. 왜? 엄마는 마녀니까.

  “살아남으라.” 물속에 던져진 엄마의 유언이었다. 살아남은 톰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여지없이 늙지 않는 남편이 된 톰은 또다시 고통을 겪는다. 딸이 자신과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 톰의 딸을 찾기 위한 여정에는 다양한 시대와 나라를 오가는 톰의 삶이 이어진다. 딸과 자신처럼 늙지 않는 병을 가진 사람들, ‘소사이어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8년마다 완전히 정체를 바꾸며 사는 소사이어티의 일원으로 딸을 찾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바를 함께 하는 톰. 소사이어티의 두려움은 과거의 마녀사냥처럼 현대에서 생체실험 대상자가 되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를 지배하는 엄청난 무언가의 존재를 믿게 돼. 우리 마음속에 갇혀 사는 무언가를. 그건 우리를 도울 수도 있고, 망쳐 놓을 수도 있어.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조차 수수께끼로 남아 있잖아. 과학조차도 그걸 인정하고.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우린 아직도 모르고 있어.


  소사이어티가 금지하는 규칙. 사랑에 빠지지 말라. 사랑과 죽음에 대한 생각,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삶, 시간이란 무엇인지 산다는 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고뇌를 거듭함에도 톰은 다시 사랑에 빠지려 하고 있다.


나처럼 오래 살다 보면 세상에 변치 않는 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래 살면 모두가 난민이 되어 버린다. 국적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뿐 아니라 오랫동안 고수해 온 자신의 세계관이 틀렸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을 정의하는 건 오로지 인간으로 사는 것뿐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고.


  시간을 오래 살아가는 톰의 고뇌는 사람들이 살면서 행하는 생각과 전혀 다르지 않다. 단지 그 생각이 15배쯤 더 길고 오래 한다고 봐야할까. 결국 시간이란 굴레에서 인간의 해답은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삶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현재는 매 순간 속에서 영원히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직 살아야 할 현재가 많이 남아 있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얼마든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시간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면 비로소 시간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나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두려워하지도 않을 거고.


  영화는 어떻게 표현될지 모르겠지만 소설속 고뇌는 익숙하고 결말은 식상하다. 시간에 대한 인식은 새로운 무언가를 제시하기엔 ‘현재’를 소중히 하라는 말 외엔 없는 모양이다. 그리스신화에서 시빌라는 아폴론이 한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손으로 모래한줌 움켜쥐고 그만큼 살게 해달라고 했다. 젊게 해달라는 것을 잊었기에 늙고 쪼그라들며 천년을 살아간 시빌라에게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냐 물었다. 지칠대로 지친 시빌라는 “죽고 싶어”라고 대답했다. 톰이 시빌라에게 자신의 고뇌를 전해주었다면 시빌라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톰은 늙지 않고 웬만한 병은 걸리지 않는 신체를 지녔으니 시간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는 시빌라에 비해 여유롭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 시간이란 누구에게나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 걸까.


시간이란 그런 거야. 늘 한결같지 않지. 살다 보면 공허하게 느껴지는 날들도 있잖아. 그게 몇 년이나 몇 십 년 동안 지속될 때도 있고. 괴어 있는 물처럼 무의미한 시간들. 그러다가 아주 특별한 해를 맞게 되지. 그건 딱 하루일 수도 있고, 오후의 짧은 순간일 수도 있어. 모든 게 갖춰진 완벽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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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아흐메드 사다위 지음, 조영학 옮김 / 더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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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의 얼굴을 갖고 있다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아흐메드 사다위, 2018.


  아랍의 카프카로 불리는 작가의 이 소설은 메리 셜리의 프랑켄슈타인과 비교되는데 등장하는 괴물 역시도 무명이다. 무명씨의 활약을 보는 것만큼이나 탄생이 흥미롭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판타지 분위기는 이라크, 바그다드라는 도시와 연결되며 현실처럼 여겨진다.

  폭발이 끊이지 않는 미군 점령하의 바그다드에는 파편이, 시체가 넘쳐난다. 때로는 팔 하나, 다리 하나, 몸통이 하늘로 솟구쳤다 모일 곳을 찾지 못하고 흩어진다. 죽은 영혼은 흩어진 제 몸을 찾아 떠돈다. 그곳으로 사람들은 걸어 다니고, 밥을 먹고, 이라크와 이란 전쟁에서 죽은 아들을 기다리고, 어떤 이들은 누군가를 등쳐먹으려 안달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동네 깡패같기도 한 폐품업자 하디가 폭발로 흩어진 시체의 부위를 하나씩 주워 모으는 장면은 뭉클하다. 그렇게 모아진 시신의 형태를 꿰매는 건 그렇게 해두면 누군가가 장례를 치러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난폭하고 도둑놈 심보를 보이는 하디를 사람들은 한때, 누구도 상대하지 않은 적도 있었는데, 나헴의 죽음 이후로 성격이 변했다고 했으니 하디의 심성은 처음부터 공격적이진 않았던 모양이다. 폭발이 일상화된 곳에서 살지만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함께 하던 동료 나헴의 죽음에서, 어느 살점인지 분간할 수 없게 폭발해 버린 나헴이 죽던 그날의 충격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하디의 마음이 무명씨를 낳았다.

  세상에 온갖 죽음의 현장이 된 곳엔 갖가지 유령들의 소문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 바그다드의 골목골목엔 폭발로 죽을 때 온전한 제 시신에 안착하지 못한 영혼들이 떠다닌다. 호텔 경비원 자파르도 자살폭탄 테러로 죽어 제 몸을 잃은 영혼이다. 그런 자파르의 영혼이 꿰맨 시신으로 쏘옥 빨려 들어가 자리잡을 때, 이 시신은 자파르일까. 각 부위의 주인일까, 새로운 인물일까. 무명씨, 그렇게 지칭된 이 시신이 살아 움직이면서 바그다드에는 폭탄 발생 빈도만큼이나 기이한 죽음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온 생애를 바탕으로 한 산 사람들의 평가. 


죽음은 죽은 자에게 존엄의 아우라를 선물한다. 산사람들은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 미안한 마음에 죽은 자를 용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한 사람만은 절대 아부 자이둔을 용서하지 않았다. 유보된 정의된 개소리에 불과하다. 정의는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한다. 나중에는 오로지 복수의 시간뿐이다. 정의로운 신이 행하는 고문, 영원의 고문이 있을 뿐이다. 복수란 바로 그런 것이다. 반면에 정의는 이곳 지상에서, 그것도 증인 앞에서 이루어질 때만이 의미가 있다.


  분명 죽음은, 더구나 전쟁에서 폭탄이 난무하는 나라에서의 죽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에 의한 죽음이라면 죽은 것이 내가 아니라는 이유로, ‘내가’ 살아있다는 이유로 미안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의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정의일까. 괴물은 정의의 다른 이름이 되는 건가.

  분명 무명씨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자신은 살해용의자가 아니라 ‘정의’라고. 이 땅은 이미 탐욕, 야망, 과대망상, 무참한 폭력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대신한 복수, 그를 통해 정의를 이루려 한다고. 아부 자이둔에 의해 억울하게 전쟁터로 끌려가 죽음을 당했을지 모르는 아들을 수십년 동안 기다리는, 아부 자이둔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 엘시바에게는 이 괴물의 정의가 닿을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 무명씨에게 조각난 시신의 살점을 계속 가져다주는 추종자들에게도.

  법의 판결에 만족하지 못할 때가 많다. 턱없이 낮은 형량, 온갖 이유로 감형되거나 가석방되는 일 등은 정의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마음이 들지 않게 한다. 차라리 분노만큼이나 자력구제하고파 지는 일이 너무 많은데 무명씨는 그런 분노를 스스로 해결하고 있는 존재다. 정의의 이름으로 복수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기워진 신체의 주인들의 죽음의 원인을 찾아 살인하는 무명씨에 의해 자살테러범이 죽고, 모집책이 죽고, 트럭 폭탄의 알카에다 지도자 등이 죽어 나가니 어쩌면 그래도 정의가 흐른다고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무명씨가 행하는 일들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할지라도.  


무명씨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신체부위에 해당하는 사람의 복수를 하지 못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부위가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수를 완수한다 해도 피해자의 부위는 어쨌거나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다.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뜻이겠지?  


  무명씨가 알게 된 사실에 의하면 온전한 시신의 모습을 하기 위해선 결국 복수와 정의는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이야기다. 죽지 않을 사람은 없다. 테러가 진행되는 이 나라에서 어떻게 복수할 대상이 멈춰질 수 있단 말인가. 개개인에게 원한을 사지 않고 사사로운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은 과연 있는가. 무명씨의 살인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묻게 된다. 그런데 무명씨는 왜 온전한 시신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거지?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괴물의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러니만큼 괴물 이야기를 쫒는 기자의 등장이 현실성을 부여잡기 위한 장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부당국이 등장하고 점성술사가 등장하고 온갖 미신들이 난무하며 거짓말쟁이가 목격자가 되어 이야기를 전하는 이 소설의 분위기는 무엇을 믿어야 좋을지도 모른 채 이라크에서라면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착각이 들게 된다.

  끊임없이 누군가의 살점을 받아 생을 이어가는 무명씨. 각기 다른 이들의 신체부위로 형성되는 무명씨의 정체성은 어떻게 되나. 매일 바뀌는 얼굴이 무명씨일까. 신체 부위가 무명씨일까. 결국 무명씨는 모든 죄를 진 자의 얼굴을 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 범죄자가 행하는 복수는 과연 정의인가.

  이 책은 2018년 한강 작가가 수상한 맨부터 인터내셔널상 최종후보작이었다고 한다. 또한 영국 영화사에서 영화화된다고 하니 시각적으로 표현된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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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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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의 주장


베어타운, 프레드릭 배크만, 2018.


  베어타운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해 베어타운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굳이 베어타운을 설정할 필요가 없다. 사건도 마을도 모두 베어타운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이 세상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아이스하키의 명성만이 존재하는 소도시, 베어타운은 그저 세상을 조금 축소해 놓았을 뿐이다.


모두들 문화를 운운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모든 조직이 다들 자기들은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가 진심으로 원하는 건 오직 하나, 승리하는 문화뿐이다. 수네도 알다시피 모든 세상이 마찬가지지만 소규모 공동체에서는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는 승자를 사랑한다. 딱히 호감이 가는 부류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승자들은 대개 강박적이고 이기적이며 배려심이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용서한다. 이기기만 하면 그들은 좋아한다.


  작은 마을일수록 공동체가 강하다고 하지만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가에 따라  결속의 양과 질이 차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공동체 구성원 하나하나의 삶이 곧 공동체와 동일시될 때 구성원이 아니라 공동체 자체를 고수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한 마을을 옮겨다 놓은 만큼 베어타운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생생한 캐릭터의 향연이 맛깔스럽게 펼쳐지며 마을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전한다. 베어타운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니 각종 사회문제들이 산재하고 사람들 사이 우정과 사랑, 음모와 배신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성폭력도.       


가해자에게 성폭행은 몇 분이면 끝나는 행위다. 피해자에게는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이다.


그녀는 열다섯 살이니 부모의 동의 없이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나이라고 하고, 그는 열일곱 살이지만 다들 ‘어린애’라고 표현한다. 그녀는 ‘젊은 아가씨’다.


  가해자와 피해자인 청소년들을 대신해 부모와 마을 어른들의 대리전으로 이루어진 싸움은 ‘어른’의 정의와 상식으로 문제를 바라본다. 왜 공동체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지, 정의와 윤리와 상식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권력과 이익의 관점으로 보는지. 가해자가 공동체의 지지에 힘입어 어떻게 당당하게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아니 아예 죄를 짓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지의 반대편에 피해자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절대적인 악을 본 것처럼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여자아이들이 ‘기분 전환용’이라거나 오로지 ‘떡치기’를 위해 존재한다고 학습하게 함으로써 잠재적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 이렇게까지 묻는다면 글쎄, 집단사이에 갈등이 벌어졌으니 더욱 집단을 똘똘 뭉치게 하기 위해서라고,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면 될까. 그것을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사랑이 아니라 증오라고 베어타운은 보여준다. 아이스하키의 마을 베어타운은 아이스하키 우승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적이라 간주하고 그에 맞추어 사고한다. 마을의 변화와 성공이 아이스하키 우승이라면 아이스하키를 가장 잘 하는 선수는 마을을 구제할 영웅이므로 영웅은 절대로 가해자여서는 안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의리‘처럼 설명하기 힘든 단어도 없을 것이다. 의리는 항상 좋은 걸로 간주된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수많은 호의가 의리에서 비롯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저지르는 가장 나쁜 짓도 바로 그 의리에서 비롯된다는 거다.


  베어타운이 아니더라도 마을에서 집단적으로 행해진 성폭행이 얼마나 많았는가는, 그것을 어떻게 은폐하는가는, 한국에서 일어난 실제사건들이 보여주었다.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그 결과들을 가늠케 한다. 그렇다면 베어타운은, 베어타운에서는 어떻게 되었을까. 가상마을 베어타운처럼 결과 또한 가상 아니 환상이 아닐까. 삼월 말의 어느 날 야밤에 한 십대 청소년이 쌍발 산탄총을 들고 숲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일에서 시작한, 베어타운의 이야기….


나중에 검은 재킷의 사나이는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왜 그는 진실을 얘기하는 사람이 케빈인지 아니면 아맛인지 고민했을까. 왜 마야의 주장으로는 부족했을까.


  베어타운을 통틀어 이 문장에 이르러서야 감정이 폭발하게 된다. 베어타운이 아무리 마을 전체의 사람들 한명 한명에 서사를 부여하며 길게 이야기를 이어간대도 정체모를 검은 재킷의 사나이의 말이 의미하는 것만큼의 명료함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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