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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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휘어잡는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문학동네, 2017.


  불현듯이 들이차는 상념. 그것은 바쁘게 서둘렀던 마음을 휘어잡고 속앓이를 하게 한다. 굳이 현재에 영향력을 행사할 리 만무한데도 과거의 기억이 가지는 힘은 크다. 때로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내 이야기를 생각하기 위한 전조가 아닌가 싶다. 여기, 소설 속 루시 바턴 역시도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글쓰기에 대한 갈망은 그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팠던 열망이다. 루시의 삶은 기억의 프리즘을 통해 보아도 아프다. 그 아픔을 루시는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외로움은 내가 맛본 인생의 첫맛이었고, 늘 그 자리에, 내 입안의 틈 속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었다.


  오래 전 오래 병상에 머물렀던 날,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회상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과거와 현재, 루시와 루시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 엄마 고향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오간다. 기억 속 이야기는 소설가가 된 루시의 소설 속 이야기 같기도 하다.


“픽션 작가로서 작가님의 일은 무엇인가요?” 그러자 그녀는 픽션 작가로서 자신의 일은 인간의 조건에 대해 알려주는 것, 우리는 누구이고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모든 삶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라고 루시는 외친다. 모든 생은 감동을 준다고 외친다. 루시가 타인의 생을 감동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루시라서가 아니라 ‘소설가 루시’이기에 그런 건 아닐까 생각했다. 대체로 타인의 이야기를 흥미있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만든 것이라고. 그러다가 생각해보니 그 자신의 삶에 박힌 그 씁쓸한 모든 기억에서 외로움을 인생의 첫맛이라 기억하는 이라면 외로움을 짝지우기 위해서라도 타인의 삶에 눈이 갔을 거라 싶다. 그러니 루시가 생각하는 방식이, 타인의 삶을 기억하고 그들의 삶을 껴안으려는 그 마음이 루시를 소설가로 이끌었구나 싶다. 모든 생이 감동이라 여기는 그 마음이란, 어떤 것일지. 소설가가 아닌 그저 한 사람의 ‘루시’로서 그 마음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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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스 형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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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버지스 형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문학동네, 2017.


  화재 현장에서 할머니를 구한 불법체류 노동자가 영주권을 획득했다. 스리랑카인 니말은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기여’한 공로로 영주 자격을 얻은 최초의 외국인이 되었다. 제주도 예멘 난민으로 급격하게 불거진 외국인 혐오는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지만 그 이유와 방식에는 차이가 있으니 이는 곧 차별과 편견의 대상이 되는 외국인에도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영주권을 얻은 이유를 써 붙이고 살아가진 않을 터이니 니말은 그의 피부색을 이유로 혐오의 시선을 받는 날들을 여전히 겪을 것이다. 한국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버지스 형제』에선 난민 문제를 중심으로 사회의 차별과 편견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은 이제는 중년이 된 세 남매의 이야기다. 형제자매는 어릴 적엔 함께 살지만 성인이 되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이들 역시도 그러하지만 가족에게 사건이 일어나자 일을 해결하려 당장 달려간다. 또한 그들은 어릴 적 함께 겪은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재를 살고 있다. 언덕 위에 차를 잠시 세워 두고 함께 타고 있던 짐, 밥, 수전의 아버지가 내린 사이 네 살 밥의 장난으로 구른 차에 아버지가 치여 사망한 일이다. 기억에도 없는 어린 날의 일이지만 이 일은 자라는 내내 밥에게 원죄를 부여하였고 그는 죄책감 가득한 소심한 성인으로 성장했다. 반면 여덟이었던 짐은 집안 가장 역할을 맡아야 했다. 어머니가 사망하고 뉴욕으로 간 짐과 밥과 달리 수전은 고향 셜리폴스에 머문다.

  수전의 아들 재커리가 마을의 소말리족 난민 공동체 이슬람교 사원에 돼지 머리를 던진 일로 그들은 고향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이 사건은 2006년 메인 주 루이스턴에서 실제 벌어진 일이라고 하는데 소설에서 재커리는 증오범죄로 기소되어 변호사 일을 하는 짐과 밥이 이 일을 해결하는 과정이 세 남매가 살아온 이야기들과 연결되면서 각각의 상황에서의 갈등을 드러낸다.

  갈등은 수전의 아들 재커리가 돼지 머리를 던진 일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갈등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그에 대한 감정만 높게, 깊게 쌓아가고 해결할 의지를 갖지 않고 싸우기 위한 대치상태로 소모적이던 상태에서 재커리가 벌인 것과 같은 특정한 ‘사건’이 드러나야 상황에 대한 다른 형태의 일들이 진행되게 된다. 문제가 있음을 소리칠 수 있고 그렇기에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들이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속 서로에 대한 비난과 혐오를 품고서 은근히 드러내왔던 문제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뚜렷해지는데 그때 소말리족과 셜리폴스 주민들의 갈등은 세세한 것까지 드러나게 된다. 짐과 밥의 가족들 간의 은근했던 갈등의 감정들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메인에 왜 소말리족이있는 거야?” 헬렌이 문을 통과해 옆방으로 가면서 물었다. 그녀가 돌아보며 어깨 너머로 소리쳤다. “족쇄를 찬 게 아니고서야 누가 셜리폴스에 가겠어?”

밥은 헬렌이 그런 식으로 말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버지스 가족의 고향을 싫어하는 티를 노골적으로 내면서도 전혀 거리낄 게 없다는 투였다. 짐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 사람들은 족쇄를 찼으니까. 가난이 족쇄지.”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시각은 결국 같은 방향으로 보인다. 짐과 밥과 수전, 그들의 배우자, 그들의 아이들을 사다리로 연결하여 애정관계와 갈등관계를 선으로 잇는다면 무수한 교차가 이뤄진다. 그들 갈등의 이면을 한발짝 깊이 들여다보면 한 개인에 대한 감정의 틀을 쌓아가는 것이 환경에서 체득한 계급의식이다. 소말리족과 셜리폴스 주민들간의 갈등은 개인간, 가족간의 갈등속에 잠긴 생각의 확장판이다. 가족이 개인에게 애정을 달리 하듯, 사회는 특정 집단에게 애정을 달리한다. 그것은 곧이어 당연한 인식으로 굳어진다. 이 처절한 계급과 인종에 관한 인식, 그것이 갈등의 차별의 편견의 혐오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상처를 준 사람들한테 더 차갑게 대해. 참을 수가 없거든. 말 그대로야. 우리가 누구한테 그런 짓을 했다는 생각만으로도 참을 수가 없어져. 내가 그랬으니까. 우리는 우리가 한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온갖 이유를 다 끌어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이 그러하듯이 이 책 역시도 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하고 따스하게 전개된다. 불안하고 두려움 가득한 밥과 그렇게 보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르지 않았던 짐에게 그리고 헬렌에게, 이 세 남매에게 아닌듯이 보였던 가족의 느낌이 서려가듯 이 사회에서 다양한 인종들이 살아가는 형태도 이 남매들처럼이 아닐까. 미국의 개인주의가 무조건 나쁘지 않고 소말리아의 지역문화와 가족주의가 무조건 답이 아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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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와 이저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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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이 뭘 안다고?!


에이미와 이저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문학동네, 2016.


  교사의 학생에 대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면 에이미가 생각났다. 하나같이 다르지 않는 똑같은 패턴의 말과 행동, 여지없는 결말, 그리고 그루밍. 한여름이란 어찌 해도 그늘을 찾게 만들고 그 볕은 얼굴을 그을리게 만든다. 소설의 배경인 무더운 여름 날씨와 셜리폴스 풍경이 습한 열기를 드리우고 숨이 막히게끔 한다.

  에이미와 이저벨의 관계도 그렇게 느껴진다. 익숙한 패턴처럼 10대 소녀는 제 엄마에게 애정은 저 멀리 두고 반항과 적대적인 감정을 갖는다. 늘 엄마들은 항상 아이에게 이것을 또는 저것을 하지 말라 다그치고, 아이는 항상 그 말에 반항하느라 관계가 어그러지긴 하지만 제 엄마가 다른 엄마이기를 현재의 모습과는 다르기를 바라는 에이미의 감정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엄마”라고 입 밖으로 나오고 난 이후에야 이저벨이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에이미가 그 말을 했다는 사실이, 이저벨에게는,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몇 주 뒤에 그윽한 밤의 어둠 속에서 이저벨은 그 말을 떠올렸는데,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와 똑같은 강도로 그녀의 가슴속에 은백색 고통의 파문이 일었다. 가만히 누워 있는데도 휘청거리는 것 같았고, 심장은 어처구니없는 속도로 질주했다. 흉물스러운 수치심 때문이었다. 그 시인의 이름을 잘못 발음한 일이 도덕적 약점이 되지는 않겠지만, 결국에는 이렇게 되었으니 어쩌란 말인가. 진실은 에이미가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다는 사실, 에이미가 의도했거나 짐작했던 것보다 더 강한 주먹을 날렸다는 사실이었다.


  삼십대에 구두공장 사무실 비서로 일하는 이저벨 굿로는 교사가 되기를 꿈꿨었고 좋은 남편을 갖기를 소망하고 구두공장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셜리폴스에 십사년째 살고 있다. 사람들과 특별하게 교류하지 않으며 홀로 에이미를 키우며 에이미의 일 하나하나 단도리하기 바쁜 이저벨은 이제 햄릿과 같은 책들을 읽으며 그런 ‘책들을 읽는 여자’임을 에이미가,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저벨 마음속에 깊이 있는 또다른 욕망.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실행할 수는 더더욱 없는 유부남 직장 상사에게 품은 이저벨의 욕망과 열다섯 에이미의 세배쯤 나이가 많은 교사에 대한 욕망은 대비된다. 감정의 깊이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실현에 있어서 말이다. 에이미와 이저벨은 지독히도 닮아 있고 그렇기에 그들의 갈등은 평행선으로만 향하는 듯 보인다. 엄마와 딸은 과연 친밀해야 하는가, 이런 생각들이 뒤섞인다. 먹먹해진다. 에이미와 이저벨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감정과 생각속에 매몰되어 버리는 일이 불안으로 인해 확장됨을 느낀다.


자신이 반대만 아는 엄마였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에이미에게 늘 무섭게 대했나? 이런 의문조차 끔찍했다. 그래서 이 아이는 겁이 많은 아이로 자랐고, 늘 고개를 숙이나? 이저벨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줄곧 스스로가 신중하고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웠다. 기분이 끔찍했다. 에이버리 클라크가 그녀의 집에 오기로 한 약속을 잊은 일보다 더 끔찍했다. 자식이 겁에 질린 채 자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녀는 딸을 흘끗 돌아보며, 그 말은 맞지 않아, 완전히 반대야, 하고 생각했다. 내가 줄곧 너를 무서워하고 있었으니까.

오, 그건 슬픈 일이었다. 올바르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도 겁에 질려 있었지. 이 세상 어떤 사랑도 끔찍한 진실을 미리 막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그대로를 물려준다는 진실을.


  이저벨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은 사춘기를 지나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에이미의 나이였다면 에이미의 생각과 행동에 공감하였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놀란 건 이래저래 이저벨의 나이가 생각보다 적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 사실이 더 마음쓰이게 된 이유였다. 에이미를 기르며, 대립하며 자신의 지나온 삶, 그리고 전개된 삶을 생각하였을 이저벨처럼 어느 순간이 시간이 세월이 훨씬 지나서야 깨닫게 되는 일들이 있다 해도 참으로 젊은 이저벨이었기에. ‘심각하고 창백한 얼굴을 한 외로운 외톨이’로 살아온 이저벨의 모습이 이 세상 거의 모든 싱글맘의 모습은 아니었을런지. 하긴 그렇게 볼만도 아니다. 이저벨은 그렇게 여기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맙소사.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해, 사랑하는 남자를 잃는 것에 대해 햄릿이 뭘 안다고?

나약함이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이니! 이저벨은 실내복을 더 단단히 여몄다. 솔직히 슬슬 짜증이 났다. 남자들은 깨우쳐야 할 것이 많았다. 여자들은 전혀 나약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먼 옛날부터 세상을 흘러가게 한 것은 여자였다. 게다가 그녀만 해도 전혀 나약하지 않았다. 지붕은 새고 차에는 윤활유가 필요한 뉴잉글랜드의 을씨년스러운 겨울 날씨에 혼자 딸을 키우는 여자에게 나약하다니, 가당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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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동조자 - 전2권
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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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앵글


동조자, 비엣 타인 응우옌, 민음사, 2018.


  베트남이 한국에 열광하고 있다. 가보지 않은 관계로 기사로 접하는 것일 뿐이지만 베트남 축구가 국제대회에서 우승했고 한국인 감독이 우승을 이끌었다며 감독의 나라에 대한 우호적이고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고 있다 한다. 하긴 히딩크로 인해 네덜란드에 우호적인 경험이 있는 한국인이라면 이 기사를 전적으로 공감할 지도 모르겠다. 축구가 뭐기에, 이 말은 항상 긍정의 의미를 띤 감탄사는 분명 아니다. 그냥 즐겨, 이 말도 있는데 굳이 따지는 것도 흥이 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모호하고 애매한 감정의 어디쯤에 있을 뿐.

  한국인이 베트남전에 참전해 난민 학살과 한국군 위안부를 운영, 아니 강간했던 역사로 베트남은 한국인에 대한 분노가 있다. 축구 우승-더구나 월드컵도 아닌-으로 상쇄될 감정은 분명 아닐 거라 생각하는데 감정의 골이 깊지 않은 것인지, 축구가 대단한 것인지, 한순간의 기쁨을 언론이 과장한 것인지, 각 사안에 따라 이성과 감정의 반응이 다른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베트남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 세상은 하나임을 자본은 국경이 없음을 진정 화합의 승리자는 자본인 것인지…. 이것들 하나하나에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음만은 확실한.

  전지구인의 화합과 동맹을 강조하지만 이건 그냥 허울 가득한 슬로건이다. 세세하게 보면 결국 나라와 민족의 구별이 있고 개인의 이익에 따른 층계가 있다. 이토록 정교하게 세분화하며 화합을 강조하는 세상에서 정체성과 이중성 어느 것이 살아가기 위한 말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둘 다 필요로 하면서 정체성은 가치있는 것으로 이중성은 고약한 것으로 치부한다. 단어에 이미 감정을 부여하고 있기에 이중성의 정체성이 되어 버린다. 여기서 이중성을 놀이에서 쓰는 ‘깍두기’라 얘기해도 될까. 게임에서 무척 부러운 자, 깍두기.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면 ‘잡종새끼’가 된다. 이 책은 그 잡종새끼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이 곧 절체절명의 이중성을 지닌 자로 고정되어 버리는 깍두기가 된 그의 이야기. 그의 양 옆에는 명확한 세계가 있고 그는 항상 그 가운데에 놓여 있다. 부모는 프랑스와 베트남을, 의형제 만과 본은 공산주의자와 반공산주의자의 경계를 주었고 전쟁은 북베트남에서 자란 그를 남베트남에서 살게 했다. 남베트남 특수부 소속 육군 대위로서 CIA 소속 비밀요원이기도 하고 베트콩 소속 고정간첩을 수행하고 있다.

  순간 순간의 선택으로 점철되었을 그의 운명을 그는 항상 부정한다. 자신이 가진 명확하지 않은 정체성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오로지 하나, 잡종새끼로 태어나 그렇게 불린  대로 살아가는 운명이었다고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것만큼 귀찮고 소모적인 일이 있을까. 하지만 급박한 상황에선 어쩐지 끊임없는 모멸을 느끼게 되는 이유가 될 것 같다.


내가 ‘우리가’나 ‘우리에게’라고 말할 때,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물으셨습니다. 파견된 스파이로서 첩보 활동의 대상인 남쪽 군인들이나 철수자들을 나 자신과 동일시하는 순간들에 그렇게 불렀던 겁니다. 그 사람들, 나의 적들을 ‘그들’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그들과 함께 거의 평생을 보내다시피 한 후에,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동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타인에게 동조하는 내 약점은 ‘잡종 새끼’라는 내 존재와 많은 관계가 있습니다. 잡종 새끼라 나면서부터 쉽게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잡종 새끼들이 잡종 새끼다운 행동을 합니다. 내가 내편과 다른 편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가치 있는 행동일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배운 것은 상냥한 내 어머니의 공이라고 믿습니다. 어쨌든, 만약 어머니가 하녀와 사제 사이의 경계를 허물지 않았더라면, 혹은 경계가 허물어지게 내버려 두지 않았더라면,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이유로 힘든 시선 속에 혼란을 겪어야 했던 그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쪽에 있었다면 그가 선택한 것을 확고하게 주장하지 못하는 삶이 되는 것의 아이러니와 혼란이 더 크게 와 닿았다. 하지만 선택임이 분명하지만 만과 본의 것과는 다른, 그 것조차도 그 자신의 선택이 아닌가. 그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늘 그렇게 자신을 확연하게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생각하고 있는 것과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이 선택을 그는 늘 자신이 잡종새끼라는 본질을 지니고 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한다. 결국 그의 삶의 결과는 정체성을 찾아 헤매고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정체성을 가지길 거부하고 있었음에 따른 것이다.


자네의 동양적인 본능을 견제하기 위해 자네는 미국인들이 나면서 배워 온 무의식적인 행동들을 부단히 연마해야만 해.


  소설의 많은 부분에서 주인공이 발끈하는 부분은 누군가가 그를 이도 저도 아닌 것으로 몰아갈 때이지만 자신이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의해 무언가를 철저히 하지 않았던 것이 그 스스로를 옭아맨 것이다. 그리고 그 옭아맴을 깨달았을 때 그는 어쩌면 확고한 정체성을 획득했다. 정체성이 가지는 의미를.

  그의 존재는 양편에 의해 맥없이 희생과 착취를 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방적인 시각을 보여주지 않는 존재가 된다. 오랫동안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시각에 의해 해석되어 왔다. 베트남인들이 그들의 목소리가 없었겠는가. 그 목소리를 제쳐두고 한국 역시 미국의 시선을 따랐다. 게임에 참여하는 깍두기처럼 이편, 저편이 되어 보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위선과 모순을 경험할 수 있었던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그 시선.

  인간은 항상 이중, 다중의 인격을 가지고 제 이익을 취하며 살아가면서도 ‘정체성’을 강요한다. 권력의 처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인이 취해야 할 정체성이란 결국 어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에 다름 아니다. 베트남 전쟁의 역사에서 내가 누구인지, 취해야할 가치는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삶의 태도와 방향을 설정하는데 힘겨워한 주인공의 간절하고 처절한 고민이 얼마나 허무하게 박탈되어 왔는지를 깨닫게 되는 과정에 감정이 이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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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뻬 씨의 핑크색 안경
프랑수아 를로르 지음, 양영란 옮김 / 마시멜로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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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색 안경을 쓰고 노란 조끼


꾸뻬 씨의 핑크색 안경, 프랑수아 를로르, 2018.


  파리는 여전히 노란조끼 시위가 한창이다. 유류세 인상 반대에서 시작되었다는 시위는 최저임금 인상, 교육제도 개편 반대, 연금제도 개선 등의 정부정책에 반대하며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확산되고 있다. 파리 정부의 친기업 정책이 시위 확산을 가속화시키는 이유라고 하는데 내일 대규모 시위가 예고된 가운데 에펠탑을 비롯한 주요 관광지는 폐쇄조치가 이뤄졌다.

  파리의 정신과 의사 꾸뻬씨는 이 상황에서 어떤 색 안경을 쓰고 있을까. 꾸뻬씨는 행복과 불행은 어떤 안경을 쓰고 삶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한다. 항상 행복을 이야기하는 꾸뻬씨는 행복에 관한 답을 찾기 위해 ‘지금’ 그가 있는 곳을 떠나 여행을 한다. 다시 돌아올 파리의 노란조끼 물결은 어떻게 되어 있을지가 궁금해진다.


옛날 옛날에 꾸뻬 씨란 정신과 의사가 살았다. 그는 사람들한테 핑크색 안경을 만들어주는 일이 자기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환자들이 주변을, 자기 자신을, 또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건 이를테면 이들에게 새로운 안경을 만들어주는 일과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꼭 새롭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환자들이 평소 끼고 있으면서 그들의 삶을 망치게 만드는 안경보다는, 삶을 덜 암울하게 덜 왜곡되게 보게 해주는 안경을 만들어주는 일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의 일에 대한 고민을 안고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통해 치유와 깨달음을 얻는 꾸뻬씨의 여행은, 생각은, 글은 고민을 안고 있음에도 가벼웁게 띄워올린 풍선처럼 느껴져서 맑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서 진중함에서 밀려난다.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는 삶에서 흔히 부딪히는 문제들로 엄청난 통찰로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기보다 도덕교과서를 보는 기분이 들게 되는. 익숙하고 반복적인 알고 있지만 실천의 문제라서 그것이 소설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감정의 정화로까지 이어지진 않는다. 이래서 비극 어쩌면 막장 요소를 열광하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감정을 드러내게끔 하니까. 아니, 행복의 문제는 단지 마음가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개인적인 차원으로 깨닫고 반성하며 치유하는 일은 할만큼 한 것 아닌가 싶기도.


비록 젊지는 않지만, 꾸뻬 씨는 자아실현이 삶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이고, 앞선 세대와는 달리 이를 악물고 자신은 이미 운이 좋았다고 자위하면서 세상을 전혀 바꾸지도 못한 채 그저 자기 의무만 다하면 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첫 세대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랄딘에 비해서는 권태를 잘 견디지만, 부모님이나 다른 세상, 다른 시대에 속하는 동갑내기들에 비해서는 못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기 삶의 뭔가를 바꿔볼 작정이었다.


  파리 시위의 이유가 무척 익숙하다. 이번 시위가 파리에서 발생했을 때 ‘파리 테러’라고 들었던 듯하다. 유럽에서 테러는 생각보다 자주 발생하니까라고 생각했지만 곧 파리 폭력 시위, 과격 시위라는 제목으로 나아가더니 ‘노란 조끼’가 등장하면서 파리 시위, 집회라는 제목을 달고서 기사들이 연잇는다. 그동안 기사를 놓친 것인지 언론의 논조가 변한 것인지 모르겠다. 어떤 이들에게 정치란, 국민을 위한 정책을 위한 고민의 방식은 어떻게 빙빙돌아 항상 그 자리로 가는가에 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가장 센 것은 돈이 되는 건가.

  ‘세상을 전혀 바꾸지도 못한 채 그저 자기 의무만 다하면 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세대’. 삶의 뭔가를 바꿔볼라치면….  새삼 폭력없던 시위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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