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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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의 근자감은 샤덴프로이데 정신?!


제0호, 움베르토 에코, 열린책들, 2018.


  잠에서 깨어나 수도꼭지에서 물이 흐르지 않는 걸 알게 되면 당연 당황할 수밖에 없지만 꽤 기민하게 반응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한때는 무언가를 꿈꾸기도 했을 테지만 이제는 변변찮은 글을 쓰며 살아가는 콜론나. 간밤 폴터가이스터 현상이 일어났을 가능성까지 가늠하는 이 남자가 4개월 전, 모든 일의 시작점을 회상하고서야 모든 행동이 이해된다. 차라리 유령출몰, 폴터가이스터 현상이 낫다. 두려움 가운데 재미라고 있으니까.

  1992년의 이탈리아에 대해 알고 있다면 소설을 이해하는데 더 좋겠다. 모른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다. 소설은 현재에도 익숙한 대한민국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기에 언제든 소환해 낼 사건, 이야기가 넘친다. 최근 더 극심한, 그 본질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는 언론의 이야기라고 하면 될까. 발행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발행되지 않을 기사를 대비하여 예비로 만들고 있는 기사. 그러므로 제0호. 제목이 가진 뜻이 이렇게 풀린다. 창간호 이전의 제호.


「그래요, 책을 한 권 낼 겁니다. 한 저널리스트의 회상록입니다. 우리 신문은 창간하기로 해놓고 끝내 창간되지 않을 신문이지만, 그 신문을 내기 위해 1년 동안 준비하면서 겪은 일을 이야기하는 책이죠.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그 신문의 제호는 <도마니>, 즉 내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정부의 슬로건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내일 얘기하기로 해요. 아무튼 내가 내려는 책의 제목은 <내일을 알려면 어제를 보라>가 될 것입니다. 멋있지 않아요?」


  끝내 창간하지 않을 신문을 기획하는 의도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닌 건가. 그러다보면 언론이 되고픈 이유는 또 뭔가라는 물음이 함께 한다.

  어디서부터가 시작되어야 하나. 발단은 마니 풀리테가 되나? 마니 플리테(Mani Pulite)는 깨끗한 손이라는 뜻으로 1992년 2월 17일 당 간부 집에서 거금을 압수수색한 계기로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진 부정부패 척결 작업을 말한다. 대대적인 부정부패의 척결이란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본이 정권을 쥐는 데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을 거라는 기대는 불필요하다는 점이다. 이 당시에 막대한 재력가가 승리했고 언론을 장악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소설은 신문을 창간하려는 막대한 재력가 콤멘다토르 비메르카테의 뜻에 따라 실무를 담당하는 편집부의 신문사 제작과정을 다룬다.


제0-1호, 제0-2호하는 식으로 12호에 걸쳐 창간 예비 판을 낼 예정입니다. 그 발행 부수는 소수로 제한하되, 기사 내용은 콤멘다토레가 직접 검토합니다. 그런 다음 콤멘다토레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몇몇 인사들에게 그 기사들을 읽어 보라고 권할 겁니다. 그럼으로써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금융계와 정계의 이른바 성역에 있는 거물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죠. 그러면 그 거물들은 신문 창간 계획을 중단하라고 콤멘다토레에게 요청하겠지요. 그 요청에 응하여 콤멘다토레는 『도마니』라는 신문을 포기하고, 그 대가로 거물들의 성역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될 겁니다.


  이를 테면 신문 『도마니』는 볼모다. 재력가 콤멘다토레의 세력 강화를 위한 협박용이다. 그렇다면 제0호는 발행되지 않을 『도마니』를 예견한 협박용이다. 이런 제안을 받아들인 시메이 주필로부터 콜론나는 고문으로서 <제0호>를 위해 일한다. 기사가 협박용이 되려면 그 색깔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황색으로 도배될 수밖에 없는. 그러므로 회의에서 논의되는 것은 어떻게 특종을 ‘만들어 내는가’에 중점을 둔 자극적이고 허접한 기사 작성법에 할애된다.


<샤덴프로이데>, 즉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이죠. 모름지기 신문은 그런 감정을 존중하고 북돋워야 해요. 그러나 현재 우리는 그런 비참한 사건에 관심을 가질 의무가 없어요. 불의에 분개하는 것은 좌파 신문에 맡깁시다. 그게 그들의 전문이니까요.


  요즘은 그런 것만도 아니네요, 라고 말해 주고 싶다. ‘불의에 분개하는 것’은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지나치게 우쪽에 붙어 있는 자들에게는 모두가 좌쪽에 있어 보이는 것일 뿐이며,  ‘좌파’가 불의에 분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불의와 사명감(?)에 따라 좌파 언론이 취하는 기막힌 역할 또한 황색 저널리즘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정의는 기계적 중립이 아닐뿐더러 불의에 참고 무력했던 자들의 뒤늦은 코스프레는 어제와 오늘의 논조가 다르기에 지속적으로 진정성을 의심하게끔 한다.

  어쨌든 소설 속 브라가도초 기자가 실종됐고 마침내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그가 취재하고 있던 기사는 기자 자신의 ‘가설’이다. 무솔리니가 로마 교황청의 도움으로 탈출했다는 것이며 이에 따라 무솔리니의 흔적을 추적한다. 브라가도초가 만나야 할 이들은 교황, 많은 정치가, 마피아, 테러리스트, 프리메이슨, CIA 등등, 무수하다. 그러나 브리가도초는 매춘업계를 취재하다 포주에게 공격받아 살해되었다는 기사가 등장했으니 콜론나로서는 물이 나오지 않는 수도꼭지에도 놀라는 것이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그 자신이 언론계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느니만큼 말이다. 콜론나는 도피했고 결심한다.

  “1인칭으로 말하는 것을 포기했고, 이제 남들이 말하도록 그냥 버려두고자 한다.”

  어차피 황색 저널리즘을 준비했던 기자로서 그런 종류의 것들을 그만두는 것은 아쉬울 데가 없다. 그러나 조금은 반성하는 자라면, 진실한 보도를 갈구하는 마음이 있는 자라면 이 말이 주는 허탈함은 알려나.

  새해가 되었고 올해도 가짜뉴스는 넘쳐날 것이다. 개인방송이 넘쳐나고 있지만 자신이 퍼뜨리는 말의 무게에 대한 자각이 없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럴 의도로 이뤄지는 경우도 많음에도 이것을 언론이 그대로 받아쓰기 하고 있으니 ‘언론인’이라는 명명이 어디에다 정착되어야 할 지 모를 일이다.

  <도마니 신문>이자 <제0호>와 같은 기사·뉴스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때때로 가장 보기 싫은 기사·뉴스는 <단독>이 붙은 것일 때도 있다. 어쨌든 오늘은 신년기자회견이 있었고 수많은 기자들을 보는데 웃음이 났다. 올 한해 그들이 작성한 기사의 면면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까. 눈감고 귀막고 쓰는 기사에 대한 자괴감을 느낀 적은 없을까. 언론사를 손에 쥐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콤멘다토레 같은 인물의 현실 등장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제법의 재벌이 언론사를 소유하고 있는 나라이긴 하지만 표면적으로라도 정의와 올바름을 추구하지 않은 채 노골적인 황색 저널리즘을 당당히 주장하는 언론사의 존재 이유를 소설을 통해 보면서 왜 이탈리아가 아직도 마니 풀리테가 진행 중인지 알겠다. 우리에게 마니 풀리테와 같은 이름은 적폐청산이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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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특별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 그림 / 작가정신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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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리처드 파커가 있다


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얀 마텔,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 (그림), 작가정신, 2017.


  많은 소설들이 미스터리, 반전을 활용한다.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 모험 소설을 띠며 낯선 곳에서 느껴지는 매혹과 환상이 가득하다. 추리 장르가 아님에도 내게 놀라움을 안겨준,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라 충격을 준, 반전으로 손꼽히는 소설이다. 아마도 영화가 나왔을 때부터 벵골 호랑이와 아이와 함께 하는 환상적인 모험을 그린 이야기로 각인되어 있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일러스트가 더해진 파이이야기는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를 준다. 야수파의 그림을 보는 듯한 원시적 색채는 두려움과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모든 생물은 광기가 있어서, 때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이런 미치광이 기질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것이 적응의 원천이기도 하니까. 그런 기질이 없으면 어떤 종도 생존하지 못할 것이다.


  모험이라 했지만 사실 치열한 생존기다. 열여섯 소년 파이, 피신 몰리토 파텔 가족이 일년 동안의 동물원 정리를 끝내고 인도를 떠나 캐나다로 가던 중 태평양 한가운데서 배가 가라앉는다. 살아남은 다섯이 구명보트에는 올랐지만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잡아먹고 하이에나를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잡아먹으며 파이와 리처드 파커만이 남는다. 파이의 가족은 모두 살아남지 못한다. 인간과 벵골 호랑이만이 바다 한가운데 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리처드 파커와 파이가 교감하는 동화같은 사이는 아니었으니 리처드 파커는 말 그대로 맹수, 벵골 호랑이일 뿐이다.

  

리처드 파커를 길들여야 했다. 그 필요성을 깨달은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것은 그의 문제나 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와 나의 문제였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또 비유적으로도 같은 배에 타고 있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터였다. 그가 사고로 죽을지도 모르고 자연사 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동물의 끈질김은 사람의 연약함보다 오래 버티게 마련이니까. 내가 호랑이를 길들인다면, 필요할 경우 그를 속여서 먼저 죽게 할 수 있을 터였다.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파이의 노력은 227일간 지속되었다. 공포와 허기와 갈증이 가득했고 지나는 배를 보며 희망을 가지는 만큼 절망 또한 몇배가 되는 나날이었다. 그리고 그만큼의 권태 또한 가득하다. 파이이야기의 모험이 여느 이야기와 다른 것은 리처드 파커와 파이가 이루는 이 평행한 거리다. 혹은 적대적인 듯 적당히 가까운 거리. 어쩌면 파이에게 리처드 파커는 미꾸라지 어항 속에 넣은 메기와 같은 존재였다.   


절망은 빛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어둠이었다. 그것은 이루 표현 못 할 지옥이었다. 그것이 늘 지나가게 해주시니 신께 감사하다. 다시 매달라고 아우성치는 매듭이나 그물 주변에 물고기 떼가 나타났다. 내 가족 생각을 했다. 그들이 이런 무시무시한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해서도. 어둠이 휘휘 젓다가 결국 물러갔고, 그때마다 신은 내 마음에 환한 빛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계속 사랑하면 됐고.


  “나는 계속 사랑하면 됐고.”

  이 말이 슬프고도 처연하게 여겨지는 글은 없을 것이다. 마침내 육지에 이르렀을 때 리처드 파커는 떠났다. 아무런 인사도 없이. 파이의 울음에 공명이 큰 건 파이가 한 227일의 날들이 가진 의미를 알기에…. 생존의 의지를 붙잡고 있던 날들에 품었던 그 모든 것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리처드 파커의 이별 장면은 떠올리자마자 아릿해진다.

  리처드 파커와 파이가 바다 위에서 함께 대치하던 나날의 이야기만큼이나 소설은 파이의 유년 시절의 이야기에 할애한다. 아니, 그것은 신과 종교에 관한 질문이었다. 힌두교도와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모두 믿는. 그러나 어른들은, 종교인들은 파이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어느 한 신만을 섬길 것을. 이 또한 종교가 가지는 궁극적 의미에 대해, 신의 존재에 대해 묻게 한다. 조난에서 구조된 파이가 들려주는 생존기에 반신반의하는 진상조사단처럼.

  내 마음에 리처드 파커가 있었다, 라고 정년을 일년 앞두고 퇴직을 권고받은 어느 분이 말했다. 술을 먹을 수밖에 없는 마음에 그날은 술을 많이 들이킨 탓도 있겠지만 그 분은 정말로 꺼이꺼이 울었다. 그러면서도 또한 상사가 리처드 파커이기도 했다고 했었나. 그때는 파이이야기를 읽지 않았던 이유로 호랑이가 나오는 아이들용 모험 이야기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때때로 그날 장면이 떠오르며 내 마음에도 리처드 파커가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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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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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단계


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작가정신, 2017.


  각각의 이야기이자 잘 맞물린 세 편의 이야기로 직조된 이 소설은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혼을 빼놓는다. 시간을 달리한 이야기마다마다에 담금질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의 슬픔이, 그것을 극복하려는 이들의 여정이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향해 나아간다.

  살아남은 자의 애도의 방식은 다르지만 그들의 최후의 목적은 같다. 분노하는 토마스, 아내의 삶을 기억하려 이야기를 짓는 에우제비우, 침팬지와 교감을 나누는 피터가 살아간 시대, 1904년에도 1938년에도 1981년에도 같은 풍경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그곳, 포르투갈에서 그들은 어떤 운명을 맞닥뜨리게 될지 인생에 가득한 물음들을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숙부가 모르는 것은 그가 뒤로 걷는 것이, 세상을 등지고, 신을 등지고 뒤로 걷는 것이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반발하면서 걷는다. 인생에서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긴 마당에, 반발 말고 달리 뭘 할 수 있겠는가?

 

  퀴블러 로스는 죽음 또는 애도의 과정을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단계로 이야기했다. 「1부 집을 잃다」를 담당하는 토마스는 일주일 사이 아버지와 아내와 아들의 죽음을 겪는다. 절망과 분노의 감정이 옹골차게 자리한 토마스의 신에 대한 분노가 이해된다. 고미술 학예사로서 17세기 고문서에서 발견한 십자고상의 소재지를 찾아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가는 토마스의 여정은 분노가 한점도 소멸되지 않는 여정이다. 신을 향한 복수로 발을 디딘 토마스가 작동법도 익히지 않은 신문물 자동차를 끌고서 1904년의 포르투갈을 누비는 모습은 혼란가득한 코믹을 연출하지만 한편으로는 재앙이다. 마치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맞는지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짓지 못할 만큼 놀랍게도 토마스는 자동차로 금발머리 한 아이를 치고 마는 것이다. ‘의도와 상관없이, 나도 모르게 일어난 일에 불과’하다 여기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치부하며 토마스는 그곳을 떠나버린다. 신이 사랑하는 아이를 거둬감에 절망하고 복수를 맹세한 토마스의 행동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게 된다. 그러니 환상이었던가 생각할 밖에.


애통은 질병이에요. 벌집을 쑤신 것마냥 슬픔의 마맛자국이 생겼고, 우린 열에 시달리고 타격에 무너졌어요. 그 병은 구더기처럼 우리를 초조하게 하고, 이처럼 달려들었죠―우린 미칠 정도로 몸을 긁어댔어요. 그 과정에서 귀뚜라미처럼 활력을 잃고 늙은 개처럼 기운이 빠졌어요.


  「2부 집으로」의 병리사 에우제비우 역시 아내의 죽음을 겪는다. 그에게 한해가 저물고 새해가 되는 시간 남편의 시신을 끌고 찾아온 여인은 “그이를 열어서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말해주세요”라며 부검을 의뢰한다. 무엇이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가 아니라 살아온 그의 삶을 알려 달라는 이 말이 주는 울림이 숙연하다. 그의 아내와 같은 이름인 그녀, 마리아를 통해 에우제비우 역시 아내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질병처럼 부여잡고 있는 애통에 대한 의미 전환을 이룬다.


죽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살해 미스터리는 늘 마지막에 해결되며 의혹이 말끔히 해소돼요. 우리 삶에서 죽음도 그래야만 해요. 아무리 어려워도 죽음을 해결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맥락을 살펴야 해요.


  2부에서는 철학적인 논쟁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마리아의 남편 라파엘의 시신 속에 품고 있는 침팬지와 새끼 곰의 모습, 그 안으로 들어가 두 침팬지를 끌어안으며 “여기가 집”이라 외치는 마리아의 모습이 각인된다. 아들이 죽던 날, 뛰다시피 뒤로 걷던 애절과 비통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있던 이방인처럼 뒤로 걸으며 살아온 라파엘의 뒤로 걷기는 분노였을까, 애도였을까. 마리아와 에우제비우가 이루는 애도의 방식은 타협의 방식이라 할 수 있을까,  죽음과 삶이 동일한 선상으로 이어지는.


삶을 돌아보는 것은 달콤 쌉싸름한 일이다. 그는 향수에 젖는다. 어떤 사진은 벅찬 기억들을 불러온다. 어느 날 저녁, 아기 벤을 안은 젊은 클래라의 사진을 보다가 피터는 울음이 터진다. 벤은 자그맣고 빨간, 주름투성이의 갓난아이다. 앙증맞은 손이 엄마의 새끼 손가락을 꽉 잡고 있다. 오도는 동요하지 않고 근심스럽게 피터를 바라본다. 침팬지가 사진첩을 내려놓고 그를 껴안는다.


  「3부 집」은 캐나다에서 시작한다. 40년을 함께 한 아내의 죽음 이후 슬픔에 빠진 피터는 모든 일들을 접고 가족도 친구도 두고 고향 포르투갈로 향한다. 그 여정의 동반자는 침팬지 오도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향해 가는 동안 오도는 피터를 피터는 오도를 닮아가며 그들은 인간과 동물을 떠난 교감과 사랑을 이룬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찾는다. 오도와 함께 하며 ‘현재의 순간을 사는 게 행복하다’는 것을 알아가는 피터의 삶이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소설을 읽는 내내 알고 싶었다. 그곳에 닿으면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그곳은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상실의 슬픔을 안고 있는 이들의 치유의 여정이 그곳에 닿았을 때 그들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러나 일찍이 예상도 됨직하다. 많은 이야기들이 어떤 특정한 장소, 인물, 물건 등의 신비한 것을 찾기 위한 길을 떠날 때마다 그들이 깨닫는 것은 그것은 마음속에 있었다, 나의 집에 있었다로 결론지어진다는 것을. 무엇을 찾으러 가는 여정이, 그 길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 그것 자체가 바로 찾고자 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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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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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가 필요한 해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문학동네.


  새해가 되었고 심지어 황금돼지해임에도 지난 해의 푸쿠가 새해로 넘어왔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들은 새해 희망과 설렘의 카운트다운을 하는 한해의 마지막 날, 이제 새해를 두시간여 앞두고 불행을 선고받는다면 나도 모르게 푸쿠를 떠올리게 된다. 새해에 생각하는 단어치고는 참, 참으로 희망적이다! 

  계속된 불운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원인이 있을 거라고. 차라리 저주라고 할지도 모를 그 어떤 것이 있어주어야만 불행에 대해 수용하든 맞서든 할 수 있다. 명명을 한 후에야 대상이 명확해진다. 푸쿠. ‘우리는 그후로 줄곧 그 염병할 저주 속에 살고 있다.’

  한 해를 울음으로 마감하고 울음으로 시작한 이들에게…. 사파! 사파! 사파!


산토도밍고에는 제독의 이름을 언급하거나 들었을 때, 아니면 푸쿠가 수많은 대가리 중에 하나를 곧추세웠을 때 내 주위에 재앙이 똬리를 트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나와 가족을 안전하게 지켜줄 유일하고 확실한 역주문이 있어. 그다지 놀랍지 않게도 그것 역시 한 단어야. (대개 집게손가락을 열심히 포개면서 내뱉는) 한 단어.

사파.


  와오! 이런 주인공을 본 적 없다. 실로 미안하지만 황금돼지해에 딱 떠올려지는 그 몸매의 소유자. 110kg 거구에 사교성과 운동신경은 없는 ‘덕후’ 감성 가득한 도미니카계 흑인 오스카 와오. 그의 덕후 기질은 만화, 영화, 게임, SF와 판타지 소설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하여 무척 바쁠 것 같은데도 언제나 사랑을 꿈꾸는 사랑에 고픈 오스카 와오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랑이 동시만 아니었더라도 한명만을 선택해야 함으로써 모두를 잃는 비극은 없었을 테다. 사랑, 이라 이름하며 동정을 떼는 것이 실천이자 당연한 것인 오스카에게 누구도 다가오지 않는 이 불행의 근원은 오스카의 누나 롤라, 어머니 벨리시아, 할아버지 아벨라르를 비롯한 데 레온 가족 삼대에서 이어진 저주, 푸쿠 때문이다.

  오스카의 불행으로 볼 때 가볍고 코믹스럽게 느껴지는 푸쿠는 어머니 벨리시아와 할아버지 아벨라르의 이야기 속에서 결코 가볍지 않음이 드러난다. 그 잔인성과 폭력성, 끈질긴 푸쿠의 면면을, 그로 인한 고통스러운 삶을 견딘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미니카에서 건너온 오스카의 가족에게 여전히 끈질기게 붙어 진행중인 푸쿠 또한 도미니카산이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도 경험하였듯이 독재자만이 가장 강력한 폭력성과 잔인성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다. 도미니카에서는 실존인물로서 트루히요가 그런 역할을 담당했다. 작가는 도미니카에서 푸쿠 탄생의 역사인 독재자의 트루히요의 31년의 활약과 함께 오스카 가족에게 닥친 모든 비극적인 서사를 유머와 풍자를 담아 들려준다.

  오스카가 빠져 있는 세계, <혹성 탈출>을 비롯한 SF판타지는 오히려 트루히요의 세계보다 아름답다. 그럴 지도 모른다. 누나 롤라는 사춘기면 으레 찾아오는 그런 반항과 방황의 기질로 변화를 찾아 헤매지만 오스카에 대한 사랑만큼은 굳건히, 흔들리지 않으며 가족의 몰락과 거듭되는 배신에 이민자로서의 힘겨운 삶, 거기에 암까지 얻은 쉴틈없는 푸쿠의 저주에도 어머니 벨리시아 역시 오스카를 사랑하고 사랑해준다. 그렇기에 오스카가 여전히 사랑을 꿈꿀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란 그런 거다. 아무리 열심히 내 행복을 모아봤자 아무것도 아닌 듯 쓸려가 버린다. 누군가 나한테 묻는다면, 난 세상에 저주 따윈 없다고 대답하겠다. 삶이 있을 뿐. 그걸로 충분하다고.

어떤 이들은 저주라고 말하겠지.

 난 삶이라고 말하겠다. 삶이라고.


  거듭 삶이라 강조하는 롤라처럼 푸쿠가 아니었던 걸까. 푸쿠의 마력에서 뻗어나지 못하고 푸쿠에 잡혀 버렸지만 오스카의 할아버지가, 어머니가, 누나가 푸쿠에 쉬이 동조했던 것은 아니다. 어떻든 저항은 이어졌다. 그 저항이 푸쿠를 중첩하였을지언정. 오스카 또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생 일대의 사랑을 눈앞에 두고서 푸쿠가 찾아와 사랑과 목숨 중 선택을 강요한다면 오스카는 무엇을 가리킬까. 오스카에겐 이미 그런 선택의 순간이 주어진 것이 푸쿠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오스카의 사랑, 동정 떼기를 코믹하게 엮어 나가는 이 이야기의 과정이, 결말이 권력이란 것이 개인의 삶 하나하나에 관여하여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처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주저하게 되는 것도 더 나아가게 하는 것도 사랑, 전진하는 사랑을 위해 필요한 것은 그리하여 끊임없이, 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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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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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되지 않는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문학동네.


  크로스비 마을은 올리브로 인해 가상의 바닷가 마을에서 다양한 색채를 띤 정감어린 실제의 마을로 느껴진다.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소설 주인공 올리브 키터리지. 작가의 이름만큼이나 낯설던 올리브는 배우고파 지는 수학 선생님으로 그녀의 거구가 얼마만큼인지 옆에 서보고픈 충동을 일으키는 존재로, 마주치면 눈흘기게 되는 동네 아주머니로, 그럼에도 늘 옆에서 같이 얘기를 나누고픈 사이로 자리한다.

  열 세편의 단편소설에서 올리브 키터리지의 삶은 계속 이어진다. 젊은 날, 중년의, 노년의 올리브가 타인의 삶 속에 등장해 그들의 삶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수많은 인생들이 그러하듯이. 삶은 각자의 인생에서 주연이고 타인의 삶에서는 조연이지만 어느 순간에나 같은 속도로 흘러가고 있으며 결코 별일없이 흘러가지 않을 감정을 안겨준다. 그 같은 속도의 흐름을 깊이 있는 감정으로 채어 놓는 작가의 글은 참으로 매혹적이다. 이런 올리브 스타일의 아줌마가 동네에 있다면 성가실 것 같은데도 말이다.


올리브 역시 그녀만의 슬픔을 견디며 살아왔다. 오래전에, 그러니까 짐 오케이시의 차가 도로를 벗어난 후에, 그리고 올리브가 몇 주 동안이나 저녁만 먹고 나면 바로 침실로 들어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통곡한 후에야 헨리는 올리브가 짐 오케이시를 사랑했으며, 어쩌면 짐도 그녀를 사랑했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는 한 번도 올리브에게 묻지 않았고, 그녀도 헨리에게 말하지 않았다. 데니즈를 향한 아프도록 절실한 감정에 대해 그가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어느 날, 데니즈가 다가와 제리의 청혼에 대해 알렸고 그는 말했다. “가.” - [약국]


  신기하게도 올리브도 남편 헨리도 각자의 마음속에 잊지 못할 사랑을, 사람을 품고서 살아왔다. 그들 삶에 기쁨이기도 하고 회한이 되기도 한 대상, 그 시절들은 흘러가 버렸고 헨리도 올리브도 부부라는 그 충실한 삶을 잘 살아가고 있다. 아니, 잘 견뎌내고 있다고 믿었다. 부부란 사실 자그마한 일에도 무수히 싸우기도 하면서 또 자그마한 일로 인해 가장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아이를 키우고 아이를 떠나보내고 쓸쓸한 노년의 삶에 서로가 위로가 되며 그렇게 오랜 시간을 적이자 동지로 살아온 헨리와 올리브의 삶이 주욱 「다른 길」로만 걸어 왔음을 알게 되는 기분은 어떨까. 이것이 삶인가 싶은.


그 가을 공기는 아름다웠고, 땀에 젖은 건장하고 젊은 몸뚱이들은 다리에 진흙을 묻히고 공을 이마로 받으려고 온몸을 내던지곤 했다. 골이 들어갔을 때의 환호, 무릎을 꺾고 주저앉는 골키퍼. 집으로 걸어가면서 헨리가 올리브의 손을 잡던 날들이 있었다. 이런 날들은 기억할 수 있었다. 중년의 그들, 전성기의 그들. 그들은 그 순간을 조용히 기뻐할 줄 알았을까? 필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정작 인생을 살아갈 때는 그 소중함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올리브는 지금은 그 추억을 건강하고 순수한 것으로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축구장에서의 그 순간들이 올리브가 지녔던 가장 순수한 추억들인지도 모른다. 순수하지 않은 다른 추억들도 있었으니까. - [튤립]


  애써 추억이라 말해보지만 그 어떤 좋았던 날들의 기억이라도 그쯤되면 이 다른 길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길을 맞닥뜨리기 위해 이 모든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른 길」이 보여주는 파국의 여운은 길다. 인질이라는 엄청난 사건과 마주했지만, 그 대상이 되었지만 헨리와 올리브에게 충격으로 전해진 것은 평생 겪을까 말까한 그 사건이 아니다. 그 사건을 통해 알게 된 오래도록 숨겨왔던, 감춰왔던 서로의 속내다. 위급한 순간에 드러난 아찔한 말들, 그 부대끼는 독설들은 생애 자체가 거짓이었다고 느껴질 만큼 강력하다. 상처 위에 상처, 그 위에 또다시 상처, 거듭된 상처의 중첩. 소설에서는 상실과 상처를 거듭 끄집어낸다.


그녀는 외로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 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 [작은 기쁨]


  돌아봐도 멈춰봐도 씁쓸하고 쓸쓸한 바닷가. 휑한 마음 가득하게 서 있는 노인 올리브의 생애가 이대로 마감되도록 작가는 두지 않는다. 결코 사과할 줄 모르며 변덕 심한 사람이라는 것이 남편과 아들의 올리브에 대한 평가이며 그래서 힘겨워했던 두 사람, 특별히 크게 싸운 것 같지 않음에도 어느틈에 벌어진 관계는 쉬이 되돌려 지지 않는다. 그녀를 필요로 한다는 아들의 말 한마디를 바랬지만 결코 이뤄지지 않았고 헨리가 죽은 후엔 외로움을 더욱 더 껴안은 채 여전한 성격을 유지하며 올리브는 살아간다.

  외로움과 고독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듯 철썩 달라붙어 있다. 칠십이 넘은 나이라고 해서 외로움에 면역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올리브는 세상을 등지고 싶어하지 않는다. 상처와 고독과 외로움에 자살을 선택하지만  「밀물」 속 젊은 케빈과 패티의 놓고 싶지 않았던 생에 대한 의지가 올리브에게서도 나타난다. 노년에 만난 사랑 때문인지, 깨달음으로 인해 젊은 올리브였다면 관심두지 않았을 성향의 잭에게 마음을 주며, 결코 알지 못했던 알려 하지 않았던 지난날을 반추하며 작은 기쁨이 필요한 삶을 깨달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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