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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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보는 눈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민음사, 2002.


  겨울에 눈이 오지 않으면 3월에 내리는 봄을 기대하게 된다. 어쩐지 봄에 내리는 눈을 보면 한겨울에 눈이 오지 않았음을 잊게 된다. 봄눈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겨울과는 너무도 달라서 환상과 몽환이 약간 섞여든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이런 느낌일까.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1968년 노벨상 수장작인 이 책의 첫 문장은 많은 이들에게 감탄할 첫문장으로 꼽힌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이미지를 극대화시키는 감각적 문장으로 쓰여 있다. 이야기, 줄거리는 모호한 잔상이 남는 소설이다.

  가와바타는 일본인으로 첫 번째, 아시아에서 두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되었다. 첫 번째는 인도의 타고르라서 어쩐지 인도는 서양에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는 까닭에 아시아에서의 첫 번째 수상작가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서양인의 동양, 더 나아가서는 일본에 대한 호기심이 작가의 노벨상 수상에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설국>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흑백이다. 어떤 칼라보다도 흑백이 강렬하다는 생각을 하게끔 되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눈쌓인 풍경은 있었는데 직접적으로 눈이 내리는 묘사는 기억나지 않는다. 일본의 목조 가옥 위로 쌓인 눈, 서린 냉기속에 피어나는 온천의 하이얀 김, 작가가 반복하여 말하는 깨끗하다, 깨끗하다, 순수하다…. 일순간 맑고 청아한 느낌이었다가 한없이 퇴폐적인 느낌에 휩싸이게도 된다. 일본문학에서 느껴지는 이미지가 퇴폐미로 선입견처럼 쌓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1950년 이전의 소설로 그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 해도 정감가지 않는 주인공 시마무라이기에 그의 시선의 끝에서 어떤 과오, 퇴폐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가도 싶다. 시대적 배경 고려는 무슨, 한량으로 시종일관 감탄만 해대는 시마무라와 남성의 보호자이거나 일만 하는 요코와 고마코의 모습을 그저 그 시대는 그러하였노라, 그렇게만 말할 수 있을까. 그러하기에 시종일관 풍경에 압도되는 듯이 탄식하는 시마무라의 그 표현들이 깨끗하다, 순수하다, 아름답다 외치는 그 모든 시마무라의 말들이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의 말처럼 헛수고로.

  여자들 역시도 풍경이 된 느낌이었다. 고마코와 요코에 대한 시선이 풍경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창밖을 바라보며 설국의 풍경을 감상하는 시마무라의 눈이 은근슬쩍 고요코와 요코에 대한 시선으로 바뀔 때 언뜻 관음증적 강박이 느껴진다. 소설 속 등장인물 모두 예사스럽지 않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건만 그렇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거대한 자연에 짓눌린 공허한 인간의 노력 같아서 애달프다. 고마코와 시마무라가 은하수를 보는 풍경이 눈에 띄었는데 풍경화된 요코의 모습, 그렇게 쳐다보는 시마무라의 시선에서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아닌 물화된 것으로 대체되는 듯이 보였다. 영화상영이 있어 많은 사람이 모여인 고치창고에서 불이 나 부상자를 구해내고 아이들을 2층에서 마구 던져내린다는 얘기를 들은 고마코와 시마무라가 고치창고를 향해 달려가다 멈춰 서서 하늘을 보며 은하수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허위의 마비’에 걸린 듯한 시마무라의 묘사가 절정에 이르는 지점이 아닌가 싶다. 


올려다보고 있으니 은하수는 다시 이 대지를 끌어안으려 내려오는 듯했다.

거대한 오로라처럼 은하수는 시마무라의 몸을 적시며 흘러 마치 땅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주었다. 고요하고 차가운 쓸쓸함과 동시에 뭔가 요염한 경이로움을 띠고도 있었다.


  풍경과 두 여인에 대한 순수와 아름다움에 대한 반복되는 예찬만큼이나 ‘헛수고’란 말도 반복된다.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남자에게 고마코와 요코의 모든 행동들이 무위로 보일 순 있겠다. 서양무용에 관해 글을 쓰는 시마무라는 직접 서양인의 춤을 본 적이 없다.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직업없는 그의 심리적 위안으로 존재하는 글. 그의 글은 오로지 인쇄물에 의지한 상상이다. ‘겪어보지 못한 사람에 대한 동경심을 품는 것과 흡사하다’고 말한다. 시마무라의 세계는 도쿄에 있고 그는 거의 일년에 한번쯤 기타마현으로 그러니까 설국의 세계를 찾아온다. 그곳엔 게이샤 고마코와 요코가 있다. 도쿄와 설국의 세계, 시마무라에게 심리적 위안으로 붙잡아 두고 있는 세계와 허위의 세계는 어디일까.


   “소용없죠.”

   “헛수고야.”


  그토록 아름답게 풍경을 바라고보 순수와 깨끗함과 아름다움을 강박적으로 찬양하는 시마무라의 말은 잠시 내 맘을 흔들기 충분했으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어디쯤에서 나는 위의 두 말을 반복하게 된다. 이제껏 시마무라가, 작가가 묘사한 설국의 세계는 모두 ‘허위의 마비로 가득찬 위험’ 가득한 곳이었으며 순수를 외치는 말끝에 오염되어 버렸다. 깨끗함, 눈처럼 흰, 순수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반복·강박적으로 듣다 보니 반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그 세계가 눈처럼 깨끗한 곳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정말로 그 풍경을 바라보던 시마무라의 눈(目) 속에 하얀 눈(雪)이 보였던가, 시마무라가 아름답고 순수한 풍경만을 보고자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랄까, 이렇게 되고 보니 역시나 나는 시마무라에게서 퇴폐적인 인간상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설국>은 1937년 출간하여 12년 동안 여러 번의 수정작업을 거쳐 1948년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강력히 생각나는데 무진기행이 1964년 발표되었으니 <설국>이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하게 한다. 때때로 어떤 소설을 읽을 때 그 시대적 배경, 당대의 사회현실을 생각하며 읽으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 보기에 이 말의 함의는 여성을 (성적)대상화하는 것이 당연했으니 그것을 불편하게 여기지 말라는 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니 불편하지 않을 수 있을지언정 굳이 그런 시대이니 불편히 여기는 것을 문제시하는 말은 때때로 너무 이상하게 들린다. 수천 번을 양보한다 해도 그 시기는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반인륜의 모범을 보여주던 때이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유일하게 참고 넘어가야 하는 것, ‘이해해줘야’ 하는 것이 오로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시각뿐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그런 일본이었으니 섬세하고 예민한 작가가 현실이 아닌 풍경 속에 압도되어 살고 싶었을까, 현실의 피폐함과 인간의 야만성에 대한 반대급부로 풍경으로 매몰되어 간 것일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모른다. 그의 연보에는 태어나자마자 몇 년 동안 그의 어머니, 아버지, 조부모의 잇따른 사망이 적혀 있다. 74세의 그는 급성맹장으로 수술·퇴원한 한달 후 가스관을 입에 물고 자살했다고 한다. 허무와 무용, 쓸쓸함의 정서가 작가 자신의 인생에서 연유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즈음 이 소설은 이미지와 감각만이 남아 한없이 덧없음으로 뒤덮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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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보이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박현주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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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가 하는, 듣는 말


뉴 보이, 트레이시 슈발리에, 박현주 (옮긴이), 현대문학, 2018-02-10.


  그림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트레이스 슈발리에의 작품은 인상적이었다. 그런 작가에 대한 기억으로 펼쳐든 책은 이번엔 셰익스피어의 변용이었다. 트레이시라면 충분히 이런 재해석을 좋아하리라 생각했지만 전적으로 작가 자신의 기획이 아니라 출판사의 기획 시리즈의 일환이었다.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아 셰익스피어 희곡을 현대 소설로 재탄생시키는 프로젝트라나. 이름하여「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앞으로도 주욱 많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현대적인 이야기를 입고서 출간될 거라는 것은 기대감을 주면서도 정반대로 기대감을 반감시키기도 했다. ‘기획출판’ 시리즈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으로 인한 반감인건가. 아무튼. 트레이스 슈발리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 <오셀로>를 선택했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74년 워싱턴 교외의 초등학교다. 단 하루, 열한살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셀로의 재현은 ‘역사가 스포’라는 말처럼 비극적인 인간의 질투를 그리고 있기에 중반을 넘어서면 끝을 보고 싶지 않아진다.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예민한 감정의 결들은 성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감정이란 이다지도 쉬이 흔들리는 것인가, 인간 감정의 그 적나라한 과정을 그리고 있느니만큼 약하고 악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놀라고 서글퍼진다.

  전학 온지 반나절 만에 유일한 흑인 소년 오세이 코코테는 학교 최고 인기학생인 ‘디’와 캐스퍼의 존경을 받는다. 또한 백인 아이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디’와는 애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기까지 한다. 운동장 한켠에서 힘으로 군림하는 ‘이언’은 이런 모습에 불편함을 느끼며 오셀로를 흔들었던 이아고처럼 ‘오’를 흔든다. ‘디’와 ‘오’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이언’이 동원하는 방법은 이간질이다. 다른 사람까지 교묘히 이용하며 ‘오’의 마음에 디에 대한 의혹과 불신을 씌우는 ‘이언’의 행동은 어떤 파국으로 나타날까.

  오는 디에 관해서는 끊임없이 불신하면서도 이언의 말은 무조건 믿는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애정관계의 오와 디는 이언의 개입 후 달라진 양상을 보인다. 오는 디에게 함부로 대하고 디는 오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그 모든 상황을 잘 설계한 이언의 힘이라 하기엔 당연하게 흘러가는 반응은 뭔가 꺼림칙하다.


하지만 디는 화가 나지 않았다. 느껴지는 감정은 죄책감뿐이었다. 자기가 사과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사과해야 할 사람인 것처럼. 오는 디에게 소리 지리고 밀어 버릴 만큼 화를 낼 권리가 있었다. 그 애는 흑인이고, 하루 온종일 모두 그 애를 그런 식으로, 다른 전학생들을 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대했다. 디는 자기 역시 그 애를 흑인이라는 이유로 흥미롭게 여겼다는 걸 알았고, 그건 반드시 좋은 이유라고 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를 피부색 때문에 좋아하다니.


  ‘디’가 독백하는 것처럼 작가는 이 바탕에 ‘인종차별’을 두었다. ‘오’는 ‘흑인’이기에 그렇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차별을 받는데 익숙한 ‘오’가 ‘디’의 애정을 흩트리는 인언의 말에 ‘디’의 행동을, ‘이언’의 말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 대신에 자신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자신이 ‘흑인’이기에 ‘디’가 막무가내로 애정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고 ‘디’의 행동은 자신을 가벼이 여기는 행동일 뿐이라고 단정짓는다. 자격지심에 가득차 ‘디’에게 함부로 대할 ‘권리’를 취득한 ‘오’의 행동이 몹시 답답하게 여겨지는 지점에서 다음 문장으로 간신히 진정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는 무지에 기인한 노골적 인종차별주의는 다루기가 쉬웠다. 신경에 더 거슬리는 건 좀 더 미묘한 빈정거림이었다. 학교에서는 친절하지만 생일 파티에 반 전체를 초대해도 오만은 초대하지 않는 애들. 오가 방으로 들어가면 뚝 끊기는 대화, 오가 그 자리에 있으면 생기는 짧은 침묵. 가끔 내뱉어 놓고 나중에 부록으로 덧붙이는 말. “아, 널 의미한 건 아니었어, 오세이. 너는 다르잖아.” 혹은 이런 발언들. “쟤는 흑인이지만 영리해.” 혹은 그게 왜 마음을 상하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


  오래도록 지속되어온 인종차별로 내재된 이 패배의식을, 더구나 열한살 아이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척 할 수 없기에 안타까움을 가진다. 아이만이 아니라 어른들 역시 ‘오’에 대한 시선은 노골적이다. 학교 선생님들은 일찌감치 ‘오’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 걱정하고, 식당에서 일하는 이들은 유일한 흑인 아이 ‘오’가 아니라 백인 아이들이 적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나 외교관의 아들인 ‘오’는 상류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백인 사회에서 ‘소수’의 존재일 뿐이다.


“인생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면, 저 애는 너무 쉽게 살겠죠. 저렇게 자라서 좋은 직업을 그냥 낚아챌 겁니다. 소수 인종 우대 정책 덕분에. 그보다 더 자격 있는 사람들이 가졌어야 할 좋은 직업을요.”


  이런 상황의 ‘오’가 애정을 주고받은 ‘디’를 특정한 존재가 아니라 일반화된 백인으로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탓하는 것은 길들여진, 여전히 진행중인 차별받는 존재가 자연스럽게 취하게 되는 삶의 방식일 수밖에 없을 지도 몰랐다. 그러니, ‘오’라는 개인이 아니라 ‘흑인’이라는 대표성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오’의 파멸은 예정되는 수순일지도.

 

“가지 마.” 오는 목소리를 높여서 반복했다. 그런 다음 이전에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자기가 쓸 거라고는, 쓰는 법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을 했다. “창녀!”

 

  굳이 ‘오’가 ‘창녀’라는 말을 내뱉었기에 ‘검둥이새끼’라는 말을 들은 것은 아니다. 이미 ‘오’가 흑인이라 불편한 이들은 그 말을 수없이 외치고 또 외치고 있었을 뿐이다. ‘오’의 충격은 ‘검둥이새끼’라는 말이었을까, ‘이언’의 간교함에 빠져 ‘디’를 오해한 일이었을까, 순간 헷갈린다. 하지만 ‘검은 것은 아름답다’라고 외치는 만큼 전자일 것이다. 흑인으로서의 자의식, 그가 순간 잃어버린 자존감에 대한 탄식과 의지의 표현으로서.

  이 소설이 인간의 파국을 가져오는 질투라는 감정을 전면에 내세우며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실제로 며칠 전 미국 뉴욕의 초등학교에서 흑인 학생에게 노예역할을 맡게 하고 노예경매제를 재연하도록 한 일이 있었다. ‘오’로 인해 여전히 진행중인 깊은 인종차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한편으로 한창 들끓는 사건 때문인지 ‘창녀’라는 말을 보다가 의아함을 느꼈다. 성인들의 카톡창과 법정에서 봄직한 이 단어가 얼마나 적나라하게 인터넷을 휩쓸고 있는지를 새삼 실감하며…. 소설 속에서 내가 대적해야 할 상대, 여학생을 조롱하고 모욕을 주는 단어는 ‘창녀’다. 그러나 내가 대적해야 할 상대가 남학생일지라도 그 싸움에서 남학생을 모욕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는 ‘창녀’ 또는 그와 같은 말이다. 직접적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말이 아니다. 나의 여자를 비난하는 말이 곧 상대를 비난하는 말로 등가된다. 이른바 ‘이언’의 꼬붕 ‘로드’가 ‘이언’의 조언을 받아 ‘캐스퍼’와 싸움을 벌일 때 ‘캐스퍼’를 향한 비난은 ‘블랑카’를 성적으로 욕하는 말이다. 질투의 감정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단어의 정점은 ‘창녀’인 걸까, 혐오와 차별의 세상에서 ‘창녀’와 ‘검둥이새끼’가 나타내는 단어의 상징을 반복하여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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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도의 링컨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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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 말할 수 있을까


바르도의 링컨, 조지 손더스, 문학동네, 2018.


  이 책에 관한 탄사에는 형식에 주목했다는 말이 많다. 문학이란 그 시작 이래로 이런 형식적 틀에서 시작되지 않았던가. 새롭다, 놀랍다기보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목소리로 이루어진 소설. 그 위에 덧붙여진 실제 사료-신문과 칼럼과 일기, 증언 등-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아름답고 의미있게 펼쳐져 흥미를 준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링컨에 관한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남북전쟁에 관한 것을 시작으로 일찌감치 어린 시절부터 정직했다는 위인전용 이야기, 가장 많은 암살에 관한 이야기 등등. 남의 나라 대통령 이야기를 굳이 열렬히 찾아 볼 만큼은 아니었기에 링컨이 매우 사랑하는 아들이 열한살에 사망했고 무덤을 찾아가 아들 시신을 꺼내어 안고서는 울었다는 이야기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매우 인상적임인 링컨의 일화이다. 작가는 이 지점을 잘 끌어내어 소설로 확장시킨다. 바르도에 머물고 있는 존재, 대통령의 아들 윌리 링컨과 경계에 머문 이들을 통해 삶과 죽음에 관한 영원한 인간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이승과 저승 사이, 그 경계가 가진 처연하고 혼란한 분위기는 열한 살 소년 윌리를 통해 더욱 부각된다. 작가가 묘사하는 바르도는 익숙하게 인지된 이미지다. 다양한 사연으로 이승에서의 생을 마감한 이들은 그 이유들로 이승의 끈을 쉬이 놓지 못한다.


나는 ‘병자’도 아니고, ‘부엌바닥에 누워’ 있지도 않고, ‘병자-상자를 통해 치료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소생을 기다리고’ 있지도 않소.


  저승이란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이기에 생에 대한 미련은 바르도에 머물고 헤맨다. 현재의 상태를 치료받으면 나을 존재로 인식하는 바르도의 영혼들. 하지만 아이들이란, 어린 영혼이란 바르도를 쉬이 지나쳐 가기 마련이다. 윌리는 다르다. 그의 아버지가 그곳에 찾아와 자신을 안아주었으므로, 곧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으므로 윌리는 바르도에 머물러야 한다. 링컨의 아들에 대한 이 사랑의 행위는 바르도의 모든 영혼들을 감탄하게 하는 아름다운 장면이었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윌리와 감흥을 받은 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행위가 된다.


그의 마음은 새삼스럽게 슬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세상이 슬픔으로 가득하다는 사실, 모두가 어떤 슬픔의 짐을 지고 노동한다는 사실, 모두가 고난을 겪는다는, 이 세상에서 어떤 길을 택하는 모두가 고난을 겪고 있다는(아무도 만족하지 않고, 모두가 부당한 대접을 받고, 무시당하고, 간과당하고, 오해받는다는) 것을 기억하려 노력해야 하고, 따라서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짐을 가볍게 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 그의 현재의 슬픈 상태가 그에게만 있는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고, 전혀 아니고, 오히려 모든 시대에, 모든 시간에, 다른 사람들 다수가 느껴왔고, 앞으로도 느끼게 될 것이며, 따라서 오래 끌거나 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런 상태에서 그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며, 세상에서 그가 차지한 위치로 인해 그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큰 해가 될 수도 있는데, 계속 낮게 가라앉아 있는 것은 도움이 안되므로 할 수만 있다면 피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그곳에는 윌리 링컨만이 아니라 미국의 남북전쟁으로 인해 사망한 이들도 있었다. 윌리 링컨이 사망한 1862년 2월 20일은 1961년 4월 시작되어 4년을 이어간 남북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의 아이의 죽음으로 오열하는 링컨의 모습에서 전쟁으로 인해 죽은 아이를 보았을 테고 어떤 이들은 그들 자신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전쟁의 책임자로서의 대통령 링컨 자신이 느꼈을 비애도 아이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산 자든 죽은 자든 어쨌든 그 모습에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다. 또한 삶에서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 심판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살 수 있나?”


 각자의 핵심에는 고난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궁극적 종말, 그 종말로 가는 길에 우리가 격어야 하는 많은 상실들. 


나는 죽었소.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소.

그리고 갔소.


  상실에 관한 가장 절정의 인식은 죽음이다. 타인의 죽음에서 그럴진대 자신의 죽음에서 느낄 이 감정은 얼마나 강렬할까. 죽음을 수용하지 못하는 심정으로 영혼으로 떠돌 미래의 나를 생각해보게 한다. 마침내 스스로 내 상태를 인정하게 되는 순간의 고통, 체념, 슬픔이 때론 미련스럽게 느껴진다. 아직, 죽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상상만 하는 순간에도 강한 집착에 머무는 것에 대한 환멸까지도 겸해지면서 왜 삶에 대한 성실함과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것엔 소홀한가, 그런 생각들이…. 그 경계에서 내가 죽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삶일 수 있을까. 바르도, 그곳 수많은 영혼들이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깨닫는 자신의 상태는 계속 머릿속을 휘집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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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의 빨간 수첩
소피아 룬드베리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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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처럼 훨훨


도리스의 빨간 수첩, 소피아 룬드베리, 문예출판사, 2018.


  도리스 알름이 세상을 떠났다. 혼자서는 먹지도, 걷지도 못하며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아흔 여섯의 할머니. 그럼에도 아흔 여섯이라면 죽음이 덜 억울할 거라 생각하기도 할 듯한 그런 나이. 눈물 흘리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위로라고 건네고, 당장 죽는 것이 이상할 것 없다고 무심히 말하는 것을 듣게 되는 나이.

  간호사의 실수로 소변주머니가 터져 도리스 할머니의 온 몸에 소변이 묻는다. 하지만 간호사는 씻기지 않고 소변을 닦아 내기만 한다. 일정에 의하면 도리스 할머니가 ‘씻는’ 날이 아니기 때문에. 티슈 몇 장을 더 뽑아 닦기만 할 뿐이다. 제니가 지적한 끝에 간호사는 실수를 인정하고 할머니를 씻기지만 보호자 없는 노인은 얼마나 무심하게 다뤄질까, 생각하게 한다. “혼자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리고 아무도 혼자 죽어서는 안 돼.” 제니의 이 말이 마음을 적신다.

  아흔여섯의 도리스 할머니가 마냥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삶이 어떠했었는지를. 그러나 도리스는 자신의 삶 속에서 많은 이름들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 그것은 그녀의 삶이고 그들의 삶이었다. 그녀에게 유일한 가족으로 남은 조카 제니에게 남긴 빨간 수첩을 남긴다. 모든 이름 뒤에 사망이라 적힌 수첩. “살아온 삶 전체를 바라보고 싶어” 쓴 글에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담겼다. 

  

일생 동안 너무도 많은 이름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지. 제니,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니? 오고 가는 그 모든 이름에 대해 말이야. 어떤 이름은 우리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고 눈물을 흘리게 하지. 또 어떤 이름은 사랑하는 이가 되거나 혹은 적이 되고. 나는 이따금 내 수첩을 들춰본단다. 수첩은 내 삶의 지도 같은 것이 되었어. 그래서 나는 네게 그것에 대해 조금 얘기하고 싶어. 너, 날 기억해줄 유일한 사람일 네가 내 삶도 함께 기억해줄 수 있도록. 일종의 유언과 같은 거지. 네게 내 기억들을 줄게. 그 기억들은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다.


  “어떤 이름은 우리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고 눈물을 흘리게 하지.”

  그 어떤 이름에 김복동 할머니가 있다. 28일 두 명의 위안부 할머니께서 소천하셨다. 참으로 죄송하게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름을 모두 알지 못한다. 다만 김복동 할머니의 이름만은 또렷하기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소식을 접한 후에 모든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처럼 느껴졌는데 현재는 스물 세분이 생존해 계신단다. 마지막까지 고통스러워 하셨다기에 마음이 무겁다. 위안부로 끌려간 때는 1940년, 14살이었고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세계 곳곳으로 끌려 다닌 끝에 돌아왔을 때는 22세였다.

  도리스 할머니 또한 1939년 발발한 2차 세계대전 속에서 고향 스웨덴을 떠나 프랑스,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생존을 오간다. 기억 속에는 그리운 이도 있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름과 끔찍하고 슬픈 일이 있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벌어지는 일이 성폭력일진대 전쟁통이라면 더더욱 맹렬하게 일어났을 그 일. 그렇게 하루도 살아보지 못하고 세상에 태어난 아이를 낳은 도리스는 그런 모든 기억들을 수첩에 기록한다.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삶이었기에. 도리스의 삶에 도움을 준 이들이 없지는 않다. 그런 그들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들 모두 하나같이 외롭고 쓸쓸하고 슬픈 모습들로 가득하다. 가족을 잃은 아픔, 가족과 화해하지 못하는 삶, 방황하고 우울하고, 숨어 살거나 성소수자로 인정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도리스는 만났다.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하는 헤어진 사랑하는 이의 이름 또한 수첩 속에 자리하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 중엔 실존 인물이 있다. 실제로 작가를 돌봐 준 도리스 할머니가 수첩을 남겼고 그 수첩에 ‘사망’이라 적힌 줄이 그어진 이름들이 있었단다. 소설 속 제니는 도리스의 빨간 수첩을 보며 할머니의 삶과 조우했던 자신의 삶을 떠올린다. 약물중독자 엄마에게서 버림 받은 상처가득한 자신의 삶과 현재의 무기력한 삶까지도. 그러나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의 사랑을 느끼며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켜주고픈 제니의 마음은 살아 움직이고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를 찾아간다. 사랑과 용기를 북돋워 준 도리스 할머니의 힘이다.

  김복동 할머니 역시 우리에게 할머니의 수첩을 남기셨다. 끝까지 싸워달라고. 여전히 일본은 사과하지 않고 위안부 합의를 자랑스러운 치적으로 여기는 이들이 권력의 핵심부에서 당당히 ‘일본편’이라 외치고 있는 현실에서 아프게 가신 할머니의 유언. 고통스런 자신의 삶의 기억을 펼쳐놓으며 일본의 만행과 위안부 피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며 인권활동가로 활동해 오신 김복동 할머니의 사랑과 용기에 감사하며 힘을 얻은 이들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새삼 어느 나라이든 100세 즈음의 노인의 삶엔 전쟁의 기억이 가득하구나 싶다. 그들 삶이 곧 근현대사의 기록이다. 급격한 세상의 변화에서 힘겹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온 모두,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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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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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파도가 왔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문학동네, 200.


  내가 느끼는 쓸쓸함과 고독, 더해진 안타까움이 자크 레니에를 향한 것인지 로맹 가리를 향한 것인지 모르겠다 싶을 즈음 책을 읽기도 전에 쓸쓸함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결론은 쉽게 지어졌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제목이 한껏 그러한 감정을 고조시켰고 ‘사람을 숨 쉬게 해주기보다는 짓눌러버리는 고독’에 가득찬 자크는 로맹 가리와 일체가 되어 버렸는데.

  열여섯 개의 이야기는 냉소와 허무를 자극했고 자크가 그러했듯 마지막까지 품었던 희미한 희망이 온전한 절망에 부딪치도록 내버려두었다. 판도라 상자 속 마지막까지 남은 희망이 저주로 귀결되어 버리는 버전인 양. 떠오르는 해에 이제 폭풍우가 끝났다 싶어 안도하는 순간 덮치는 가장 치명적인 파도라 일컫는 ‘아홉 번째 파도’, 그 또한 같다. 희망을 품지 않았다면 절망의 크기는 달라졌을 터이니.

 

하지만 그는 습관이 되어 있었다. 사람을 쓰러뜨리고 뒤엎고 바닥으로 내던졌다가, 두 팔을 뻗고 두 손을 들어올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가, 지푸라기가 눈에 띄는 순간 매달릴 시간만 남겨놓고 놓아버리는, 먼 바다에서 다가오는 강렬하기 짝이 없는 고독의 아홉번째 파도에. 그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의 유혹일 것이다.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세계의 끝, 새들이 페루의 외딴 바닷가 해변으로 찾아와 죽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전쟁, 혁명의 실패를 경험한 자크는 영혼의 위안이 되는 장소로 ‘시적이고 몽환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지만 적막하고 고독한 그곳에서 그가 받은 위안은 깊지 않아 보인다.  새들처럼 그곳에 뛰어든 그녀는 “왜 이곳 모래언덕까지 와서 죽으려는 것인지 그에게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새”다. 이때 죽음의 이유는 곧 살아야 할 이유와 같은 말로 여겨진다. 그녀는 고독에 빠진 그를 구원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할 존재다. 그렇기에 그녀가 떠나고 희망이 사라진, 의미를 잃어버린 터전에 더 이상 남아 있을 것은 없다.

  분명 깔끔한 문체임에도 로맹 가리의 글은 마음을 질척이게 한다. 단편만큼 엽편이 가득한 이 소설집에서 연이어 인간의 양면성을 확인하고 나면 ‘인간의 성정(性情)에 민감’해진다. 끝내는 「벽-짤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 속 금발머리 여인이 느꼈던 것처럼 ‘삶에 대한 총체적인 혐오감’이 밀려들어온다. 어쨌든, 버티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류트」속 백작 부인이 지켜내는 외교관 남편의 명예와 권위처럼 하찮아지는 기분이다.

  백작은 사교적이지도 않은 기질에도 불구하고 외교관으로서의 직업적인 수행을 잘 이뤄낸다. 이 모든 것은 ‘모범적이고 관례적인 모든 것을 지켜내는’ 생의 동반자 아내 덕분이다. 외교관 생활을 완료하기 전에 백작은 강렬한 예술에 대한 욕구로 골동품점에서 류트를 구매하고 젊은 류트 연주가에게 레슨을 받는다. 레슨을 거듭 받는다한들 서투른 백작의 연주 솜씨는 백작의 완벽한 예술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장롱 속 류트를 꺼내와 연주하는 백작 부인.

자신의 예술혼을 묵혀둔 채 사랑하는 남편을 위한 헌신적인 아내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여인의 이야기인듯 싶었던 「류트」는 묘한 의혹으로 거듭 읽게 된다. 나도 모르게 느껴지는 미묘함이 과한 상상이 아닐까 싶어 백작의 행동 하나하나, 아내의 말 한마디한마디, 골동품 상점 주인의 미소를 눈여겨보게 되는 맛. 로마, 지중해, 예술가, 16세기의 류트…. 로마 시대 카이사르에게 따라다녔던 그 의혹을 부추기는 이 단어들.


마치 그가 어떤 은밀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위한 그녀의 기도는 열렬하고 간절했다. 결혼생활 삼십오 년에 아이들도 다 자랐고, 자신이 말없는 애정―내밀한 부부생활에서도 표출하지 못하는 은밀하고 고통스러운―으로 감싸고 있는 그를 아무것도 위협하지 못하게 만들며 모범적인 삶의 절정에 오른 지금까지도 그녀는, 이스탄불 페라 호텔 내에 있는 프랑스 식 소성당에 가서 무릎을 꿇고 레이스 손수건을 쥔 채, 운명이 인간의 마음속에 탄생과 동시에 장치해두곤 하는 시한폭탄이 그의 내부에서 갑자기 터지지 않게 해달라고 몇 시간이고 기도하곤 했다. 하지만 완전히 노출된 햇빛 찬란한 긴 하루처럼 평생을 천직 속에서 자신의 개성을 느릿하고 차분하게 꽃피우듯 살았을 뿐인 사람을 어떤 내적 위험이 위협할 수 있단 말인가? ― 「류트」


  오래도록 감춰뒀다가 이제 폭발한 백작의 예술성은 거듭된 류트 레슨을 통해 완벽해질 법 하지만 백작 부인의 계획 아래 잘, 감춰진다. 백작 속에 있는 예술가 기질은 류트를 연주하는 것에서는 발현되지 않을 것이니까. 서투른 남편의 류트 연주를 완벽하게 포장해주는 아내의 성실함에 경의를 표한다. 그런 아내들의 꾸준하고 경직된 성실함이 세상의 진실을 가리는데 더없는 기여를 했음이다. 남편의 지위와 명예를 곧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며 지내온 아내의 불안과 초조로 일관된 기도의 이유는 가늠했지만 눈물을 머금고 지켜가는 것이 행복인가에 대한 물음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남편의 ‘예술성’이 폭발되지 않기를 희망하는 마음을 오직 신께만 드러냈을 백작 부인의 그 마음처럼 작가는 직접적인 단어나 묘사없이 이 코드를 그려낸다. 작가가 그려내는 대로 따라가며 그저 나는 절망하거나 냉소하거나 한번씩 웃기만 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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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20-04-10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저도 감명깊게 읽은 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쓴 작가 로맹 가리에 얽힌 이야기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제가 이 작가의 전기를 읽고 직접 만든 영상도 있으니,
재미삼아 한번 구경해 보세요~
https://youtu.be/vKy0n0XDJMM

모시빛 2020-04-13 12:50   좋아요 1 | URL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의 생은 참 인상적이죠.
그 생애를 풀어내는 방식 또한 그렇고요.
마침 로맹 가리의 생애가 생각나는 날이네요.
oren의 영상으로 마음을 채우면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잘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