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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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자가 산다


야만인을 기다리며, J. M. 쿳시, 왕은철.


  은 안경을 쓴 남자가 등장한다. 이름마저 졸 대령인 졸라 졸렬하게 느껴지는 그가 등장하자마자 폭력이 난무한다. 야만인이 전쟁준비를 한다는 소문이 돌고 실제 옷가지와 먹을거리가 사라질 때면 도시는 공포에 떤다. 오래도록 제국의 변경도시, 모든 것을 관리·통치하고 있는 나이든 치안판사에 의하면 딱히 실체없는 ‘야만인’의 존재 때문이다. 수도에서 파견된 졸 대령은 제국의 변경 도시를 공포케 한 ‘야만인’을 진압하고선 잔인한 고문을 가한다. 그저 변방의 어부이거나 유목민일 뿐인 그들은 졸 대령의 ‘진실을 얘기하는 말투’를 알아채는 탁월한 능력 발휘로 죽거나, 눈이 멀거나, 장애를 안는다. 그렇게 졸 대령은 ‘야만인’을 소탕하고 수도로 돌아간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야만에는 즉각 폭력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니 ‘폭력을 기다리며’라는 말은 너무나 어색하다. '야만인‘의 존재가 그저 도시 밖의 사람들을 지칭한다는 걸 알게 되면 ’야만인‘이란 단어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고작 생김새가 조금 다른 정도가 변방인에 품는 공포와 거리낌의 이유가 되어 악마화, 야만인으로 되는 건 폭력기술을 탑재하고 사용하는 졸 대령의 행태와 확연히 대비된다. 솟구치는 야만의 열기는 '야만인’에게서가 아니라 ‘야만인’을 지칭하는 이들을 통해 시작된다.

  폭력과 야만을 뿌리고 간 졸 대령의 흔적은 변방도시 곳곳에서 드러난다. 역시 야만이란 졸 대령이 남기고 간 모든 흔적에서 찾을 수 있다. 눈이 멀고 발마저 잘린 ‘야만인’ 여자가 그곳에 있다. 제가 있던 곳으로 갈 수 없는 몸으로 폭력의 흔적을 안고 구걸하고 있다. 졸 대령의 행태에 찬성치 않았던 치안판사는 졸 대령이 폭력을 온몸에 안고 있는 이 여자에게 연민을 품으며 의식주를 챙겨주고 일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그 고문의 흔적을 씻겨주고 오일을 발라주기까지, 매우 자상한 손길로 돌보아준다.

  졸 대령의 끔찍한 고문을 목격한 나는 치안판사의 이 손길에 순간 넘어가버린다. 한 나라를 통치하는 이의 마음과 행동은 이래야 한다 생각하며 치안판사의 성정은 따스하다는 착각까지 한 것에 나의 어리석음을 한탄한다. 곧이어 나의 분노는 거세질 수밖에 없었고 ‘야만’의 속성은 잔인한 폭력 더하기 저항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지배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치안판사의 행동은 일제가 우리의 3.1운동 이후에 잠시 행한 문화통치와 다를 리 없는 그런 것 아닌가. 그렇더라도 이런 끔찍한 환경 속에서는 졸 대령보다 치안판사 같은 사람이 더 낫지 않느냐는 얘기가 들리는 듯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누구에게, 무엇이 나을 수 있단 말인가. 제도가 아니라 한 개인의 성향에 기대어 세상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 정의를 기대하는 것은 한계일 수밖에 없다.

  치안판사의 한계는 여실히 드러난다. 무엇보다 치안판사 역시 제국의 관리일 뿐이다. 자신이 관리하는 지역의 평화를 바라는 방법은 졸 대령과의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 제국의 통치 아래서 그가 임기내 이제까지 해오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제국의 관리로서 야만인의 우위에 서서 그들을 대하고 있음은 변하지 않는다.

  치안판사는 개인적으로 고문과 같은 폭력을 좋아하지 않을 뿐 그가 눈먼 여자에게 가하는 것 역시 폭력이다. 당연하게 행하는 치안판사의 성폭력은 빠질 수 없는 ‘야만’의 행태이다. 그것이 졸 대령의 기술과 함께 쓰이지 않아서 순간 착각했을 뿐. 문제는 이러한 착각이 얼마나 잘 먹힐 수밖에 없는가이다. 치안판사는 거듭 남자의 성욕은 당연한 것임을 강조하며  눈먼 여인에게 하는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이 구세주임을, 자신을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깨뜨려버리는 여인의 행동에 그리고 그로 인해 야만인과 내통한 자가 되어 제국으로부터 치욕과 고문을 겪은 이후에 치안판사의 생각은 달라진다.


나는 편안한 시절에 제국이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거짓말이고, 대령은 거친 바람이 불며 세상이 험악해질 때 제국이 얘기하는 진실이다. 제국의 통치술의 양면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때 졸 대령의 행동을 탐탁치않게 여기며 논쟁을 벌이기는 했지만 그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든 정의를 위해서든 직접적인 행동력을 보인 적은 없다. 비로소 고문당한 자의 고통과 치욕, 그가 눈먼 여인에게 주지 않았던 자유의 의미에 대해 치안판사의 끊임없는 생각이 이어진다. 존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생각한다. 그는 다르다고. 졸 대령과 같은 제국의 무리와 다르다고도 생각한다. 제국의 변방 오지에 마음속으로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한 사람은 있었다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끝장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제국의 시대를 연장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 제국은 낮에는 적들을 쫓아다닌다. 제국은 교활하고 무자비하다. 제국은 사냥개들을 이곳저곳에 파견한다. 밤이 되면, 제국은 재앙에 대한 상상을 먹고 산다. 도시가 약탈당하고, 사람들이 강간당하고, 죽은 사람의 뼈가 산처럼 쌓이고, 드넓은 땅이 황폐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 말이다. 말도 안 되는 미친 상상이지만 전염성이 강하다.


  제국의 그들이 변방 사람들을 ‘야만인’이라 부른다는 것은 곧 그들 스스로를 문명인이라 칭하는 것이다. 문명과 문명인이란 무엇인가는 야만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동일선상에서 생겨난다. 그들의 정의에 따르면 야만인이란 그들과는 조금 다르게 생긴 이들이다. 그리하여 이들로 인해 히스테리가 생기거나 동정을 일으키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의 ‘필요’에 의한 정의로는 문명인들을 침략하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진압해야 할 적이며 그것은 실제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가와는 상관없다. 야만인은 문명인, 제국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키고 연장시키는 도구일 뿐이다. 문명인은 그들이 설계한 ‘도구’를 통해 역사를 만들어가고 역사속에 존재하고자 하지만 험악한 자연에서 그들의 ‘문명’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남아프리카 태생 작가가 쓴 소설을 이 땅으로 소환하여 대입한다. 제국의 졸 대령과 같은 이들은 마치 통일과 평화라는 단어를 탐탁지 않게 여기며 북한이란 핵무기를 가지고 한국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 달라 외치는, 종북과 좌파와 빨갱이의 존재를 늘 부르짖어야 연속한다고 믿는 그 누구들을 닮지 않았는가. 천박한 망언의 제국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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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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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독이어도 오독이어도


창백한 불꽃,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문학동네, 2019.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을 처음 읽는다고 생각했다. 이 책에 대해서 창백하리만치 사전정보없이 읽었다는 말인데 몇 장 넘기지 않고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롤리타』를 떠올리게 하는. 그제야 롤리타의 작가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라는 것이 생각났다. 때때로 『롤리타』의 작가를 험버트로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창백한 불꽃』에도 훗날 충분히 착각할 만한 요소를 만들어 놓았다.

  한번 당한 끝에 작가에게 걸려들지 않겠노라 바짝 다짐을 하고 보니 시 <창백한 불꽃> 작가 존 셰이드, 그 시의 주석을 쓴 찰스 킨보트가 모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이름 속으로 들어간다. 머리말과 주석과 색인이 딸린 시, 운문인지 산문인지, 시가 중심인지 주석이 중심인지, 진실인지 허구인지 헷갈리게 흩어진 낟알을 주워 모으다 한없는 길로 들어가게 되는 소설, 『창백한 불꽃』. 이 글을 읽어나가는 방향이 전적인 독자의 의지인 것 같지는 않다. 시 <창백한 불꽃>의 가치는 찰스 킨보트로 인해 발견되었고 무엇보다 찰스 킨보트 자신의 주석만이 시의 인간적인 사실성을 제공할 수 있다는, 주석자의 중요성에 대한 단언이 이 책을 읽어가는 방향을 전혀 제시하지 않은 거라고, 제한하지 않은 거라고 할 수 있을까.

  『창백한 불꽃』에서 구현한 형식은 수많은 평론가들과 출판 관계자들에게 감탄과 찬사의 대상이다. 소설이 씌어진 1960년대에서 머언 2019년을 살고 있는 내게는 시간이 파격적 형식 가득한 작품을 읽게 해 예방주사를 놓아두었기에 경이롭고 얼이 빠질 정도는 아니어서 달뜬 찬사들에 어떤 추임새가 필요할 지 생각하게 된다. 그럴 때면 이런 책들은 일명 ‘실시간’ 혹은 지금보다는 어릴 때 읽었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몹시도 게을러진 나이의 나는 이 귀찮은 독서법에 궁시렁거리며 책장을 넘나들다 작가에겐 형식과 내용 중 무엇이 우선이었을까를 궁금해한다. 내가 보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도.

  처음엔 머리말에서 찰스 킨보트가 어떻게 떠들든 순수하게 시의 의미를 쫓아가려 했다. 허나 시란 언제나 주석에 의지하는 것이 쉬운 일이라, 고스란히 주석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시에서 생각한 이미지와 주석의 괴리가 커질수록 평범한 인간인 나는 시에서의 강렬한 이미지보다도 주석에서 발화된 이야기를 쫓아가고 있었다. 이것이 찰스 킨보트가 말한 ‘사실성’이겠구나. 최후의 말, 그것이겠구나. 언어유희는 잠시의 놀이터가 되고 다급히 이야기를 쫓아가고 있구나.

  나는 몹시도 평범한 인간, 호모 사피엔스가 그런 종이 아니던가.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것을 믿어버릴 수 있는’ 그런 종족. 이야기에 매몰되고 매몰되는 그런 종.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온전히 그가 창조한 세계를 가지고 수많은 호모 사피엔스를 “관행과 규칙을 따르게 되고 설득당하기 쉽도록” 만들어 놓는다. 주석자의 주석이 허구라는 생각이 스며들어도 주석자 자신이 망상환자가 아닌가 의문이 들지라도 카를 왕과 왕을 암살하려는 그라두스가 떠나온 젬블라라는 나라가 어디인지를 가늠하려 애쓴다.

  그렇다면 이것은 머나먼 북쪽의 나라, 젬블라의 이야기일까. 존 셰이드의 인생회고록 같은 <창백한 불꽃:네편으로 된 시>의 시행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킨보트에게서 젬블라에서 이 모든 혼란을 일으키도록 이끄는 작가 나보코프를 찾으려 애쓴다. 나보코프가 만든 게임판에 휩쓸리지 않겠다 다짐하면서도 머나먼 북쪽 나라는 러시아, 킨보트도 셰이드도 보트킨도 카를왕도 그라두스도 모두 작가인 것만 같이 느껴진다.


   내가 삶 속에서

   사슬고리와 쌀먹이새 같은 일종의 유음어 유희를.

   게임에서 상호 연관된 패턴을,

   오묘한 예술적 수완을, 게임을 하는 그들이

   발견했던 것과 똑같은 어떤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충분치 못하다. 게임을 한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5독과 오독 속에서 아찔하고 다급하다. 이 재밌는 언어유희는 번역이 아닌 채로 즉각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번역자의 주석에 의지해야 하기에 이런 류의 글을 읽을 때면 언제나 나의 언어적 한계로 인해 아쉽기 그지없다. 따지고 들면 배경지식도 한몫한다. 작가는 이 글을 읽는 동안 내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요구를 요하면서도 내 해석에 대한 만족감을 극대화시키진 않는다. 읽어도 읽어도 갈증과 창백함을 안기는 『창백한 불꽃』앞에서 독자로서, 작품을 향한 평가자로서의 입지가 흔들린다. 셰이드가 진저리치는 “읽긴 읽되 바보천치 같이 읽는 것“이 아닐까라는 염려가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킨보트일 수도, 킨보트만큼도, 킨보트일 필요도 없지만 말이다.

  킨보트는 일차적으로는 독자이다. 그러나 킨보트는 존 셰이드의 시와 삶에 과도하게 개입한다. 셰이드 부부와의 친분은 일방적이고 이웃에 인접해 살면서 원활한 스토킹을 가한다.  킨보트는 셰이드가 시를 창작할 때부터 자신이 영감을 주었음을, 젬블라 왕에 관해 쓰기를 재촉했고 설마 정말로 쓸 줄은 몰랐다며 온통 젬블라에 관한 주석으로 도배를 해놓는다. 그 방식은 마냥 무질서하지는 않아서 셰이드의 시어를 붙잡아 언어유희를 펼치며 은근슬쩍 젬블라와 연관시키고, 셰이드가 아내 이야기를 하면 주석에선 젬블라의 카를 왕의 아내 디사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왕을 죽이려는 암살자 그라두스도 언어유희와 함께 등장한다. 세 개의 이야기를 무질서한듯 질서있게 배치한 킨보트의 주석은 시를 보다 잘 이해하고 사실성을 획득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를 펼쳐놓을 수 있는 무대, 그런 것을 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킨보트는 권위있는 학자이자 시인의 시에 기생하여 제 이야기를 펼친다. 반복되는 시인의 시, ‘나는 죽은 여새의 그림자’에서 죽은 여새가 시인이라면 그림자는 셰이드가 되는 시. 결국 네편으로 된 시인 창백한 불꽃의 ‘나=죽은 여새’이기보다 ‘나=그림자’라는 등식이 어울린다. 끝내 여새는 죽지 않는가. 또한 자신을 카를 왕과 동일시하는 킨보트는 러시아 귀족 출신으로 볼셰비키 혁명으로 망명한 작가와 겹쳐진다.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번역하고 방대한 주석을 단 전적을 가지고 있는 만큼 킨보트가 작가로 등치되기에 작가도 괴이한, 괴랄한 캐릭터였을 것 같은 막연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와 함께 머나먼 북쪽 나라, 젬블라에 대한 그리움과 불안이 가득한 듯이 보여 과한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킨보트가 구축하고 있는 세계는 분명 허위의 먼 풍경이 가득해 보이지만 압도하는 형식을 걷어내고 나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필멸의 존재가 생각해야 할 삶과 죽음. 셰이드의 딸 헤이즐은 ‘새로운 패배와 새로운 비참함을 경험하고 눈물에 젖은 채’ 자살한다.  기이한 고모의 손에서 자란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고 있는 셰이드의 고통은 딸의 죽음으로 더해진다. 사후에 대한 인식도 바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한 경이를, 달콤한 충동을 느끼는 셰이드와 킨보트가 ‘죽음으로의 이행을 멈추는, 참기 어려운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이 시를 짓는 일, 언어적 유희에 휘감기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암살자 그라두스의 존재도 끊임없이 죽음을 환기시키는 인물이 된다. 강렬함이라든지 뚜렷한 신념이 느껴지기보다는 어설픈 살인자로 보일지라도 죽음이란 늘 그렇게 비장미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니까.


   삼단논법: 다른 사람들은 죽는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죽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이 소설에서 오로지 ‘사실성’을 획득하는 것은 ‘인간은 죽는다’라는 것이라 여겨진다. 필멸에 대한 자각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가중시키며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과 달리 특별한 존재로서의 강한 자기애를 발현하곤 한다. 삼단논법의 증명자가 되지 못한 셰이드뿐만 아니라 망상이, 대부분 자기과시 형태로 나타난 킨보트의 죽음에 대한 동경또한 이 같은 맥락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의 삶은 곧 죽음의 이야기다. 세상 모든 필멸의 존재가 영원의 존재이고픈 열망을 담은 것이 예술, 그리하여 언제부턴가 죽음에 대한 인식은 예술혼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시이든지 주석이든지… 5독이어도 오독이어도 거듭 창백한 불꽃을 읽고 남는 것, 그것은 인간의 살아가는 인생의 이야기는 결국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휘갈겨쓴 메시지’에서 결국 살아가야 할 나의 메시지를 찾고픈 열망에 빠진다. 나만의 시어와 주석을 단 삶의 이야기, 인생의 메시지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창백한 불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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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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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리되지 않기 위한 생존법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문학동네, 2019.


  세상을 살다보면 쉽게 규정되는 것이 있다. 환경이 삶을 정해버린다는 믿음이다. 그로 인해 당연하게 행해지는 건 사회적 약자들의 패배의식과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폭력이다.

  핸래티처럼 사회구조가 명확한 마을에는 뚜렷하게 보이는 이러한 믿음에 둘러싸여 살아가야 하는 로즈가 있다. 로즈는 이 패배의식과 폭력의 세계에서 나름의 방법을 찾아나간다. 그것은 가정(假定)을 가장(假裝)하는 일이다. 혹은 과장이랄지 몽상이랄 수 있을, 누군가에는 허세이고 허영으로 보일 그런 이야기와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아침 식사로 자몽 한 개를 먹는다는 것쯤은 매우 사소한 가장이다.

  이런 로즈를 가구 수선일을 하는 아버지도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새어머니 플로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가난한 환경의 아이가 가져야 할 태도를 로즈는 지니지 않았다. 똑똑하고 야무져 보이는 로즈라는 한 개인은 핸래티라는 마을의 가난한 환경에 맞추어 성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아버지에 의해 장엄한 매질Royal Beating.을 당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 ‘아버지가 남매를 때린다는 소문’은 장애인 베키와 프레니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쩌면 그 아이들에게도 ‘아버지가 로즈를 때린다’는 소문이 흘러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을의 아버지들은 제 자식을 때리는 일을 넘어서 다른 집의 딸들―장애를 가진 베티와 프레니에게 해당되는―에게도 폭력을 일삼았음이 틀림없다. “아이를 배고 어딘가로 옮겨졌다가, 다시 돌아와 또 아이를 배고, 또 어딘가로 옮겨지고, 또 돌아와 아이를 배고, 또 옮겨진” 프레니는 페렴으로 사망한다. 이로써 불임수술을 해줄까, 가둘까 애쓰던 이들의 프레니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었고” 베키의 아이는 “태어나 처리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우는 과정은 누군가의 삶을 통해서이기도 하고, 그로 인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가 보이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자몽 한 개’의 식사를 가정하는 일은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이거나 “처리되지” 않기 위해 로즈가 택한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아무리 겁을 내고 소심하게 굴더라도, 그 어떤 충격과 불길한 예감에 시달린다 해도, 생존법을 배우는 것은 비참하게 사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기엔 너무 흥미롭다.


  열 개의 단편으로 그려진 이야기에서 시간은 넓게 펼쳐지거나 어느 한때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각 단편은 그 자체로 완결되면서 전체적으로 로즈의 삶을 사십년에 걸쳐 펼쳐놓는다. 그 시간에 어린 로즈는 대학생이 되고 결혼과 출산과 이혼과 ‘평범한 장난질’과 사랑과 이별을 경험하는 한편, 안정되지 못한 생활을 살아가며 그 모든 순간마다 로즈의 삶에 존재하여 영향을 끼치는 플로가 있다.

  어린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한 로즈의 삶의 태도, 각각의 삶을 바라보는 로즈의 이야기는 마냥 로즈를 향한 애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로즈에 대해 한없는 연민을 갖기엔 반복되는 로즈의 행동에 오히려 로즈를 격렬하게 흔들어주고 싶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건 두가지 이유이리라.

  첫 번째는 생존법이다. 그렇다. 생존법을 배우지 않으면 ‘처리된다.’ 로즈는 핸리티 마을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식으로의 생존법을 익혀갔고 핸리티를 벗어난 이후에도 유지되었던 그 방식은 핸리티 밖에서는 유효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로즈는 마냥 어리지 않기에, 그러나 로즈는 여전히 그 생존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소모적이고 소동적인 로즈의 행동, 때론 소심하고 무모하기도 한 로즈의 행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느 틈엔가 플로와 닮아 있는 건 아닌가 싶어졌다.

  두 번째는 코페투아왕도 패트릭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로즈를 ‘거지소녀’처럼 볼 수가 없다. 로즈를 가난해서 좋다고 말하지만 패트릭은 그녀의 환경을 부정한다. 로즈에게 고상한 배경을 덧씌우려한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로즈를 거지소녀로 보는 그 감정은 그 자신을 코페투아왕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로즈와 패트릭의 간극은 너무나 크다.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해야 하는 현실적 어려움에 굴복하며 기꺼이 거지소녀가 되기로 한 로즈와 코페투아왕의 결혼의 결말은 예상가능하다.

  그러나 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 친구 남편 클리퍼드와의 장난질과 제 아이를 포기하는 일을 거쳐서라는 점은 예상치 못한 바다. 생계를 위해 로즈는 분명 열심히 노력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삶이 확연히 달라질 수는 없으며 아등바등은 지속될 뿐이다. 변하지 않는 건, 반복되는 건 그런 중에도 로즈가 남자의 애정에 기댄다는 점이다. 결혼 전부터 패트릭에 대한 사랑을 부정했지만 결혼으로 달려갔던 것처럼 로즈의 이러한 행동들은 또다른 패트릭과의 결합이 되는 건 아닐까 걱정하게 된다. 그것을 아는 로즈는 그 사랑인지도 모를 감정에 완벽히 젖어들지도 못한 채 벗어나려고 애쓰기도 한다. 이런 반복, “뭘 원하는지 알아야만 뭘 원하지 않는지 알 수 있는 건 아니야!”라고 했지만 로즈는 정말 원하지 않는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패트릭이 말한 것처럼 로즈는 ‘어떤 상태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어떤 상태란 단연 ‘희망’이 아닐까. 다만 그 희망엔 긍정보다 허망함이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희망이 과연 맞는 건가 생각하게도 된다.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단편의 제목이기도 하면서 플로와 교사에게 각각 듣는 이 말은 멸시와 조롱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지만 그래서 어린 로즈가 이 말을 들을 땐 함께 분개하기도 했지만 책을 덮은 시점에서 이 말의 어조를 다르게 느끼게 된다. “소년들은 무능해도 결국 남자가 되고 자신들이 갖춘 것보다 훨씬 큰 재능과 권위가 필요한 일”들을 하게 되는 시대에 로즈는 살아가고 있었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때에 어쩌면 패배처럼 보이는 로즈의 삶이 패배로 점철된 건 아니었다고 느끼게 된다. 호기심으로 한 생을 내달리는 일이 쉬운가, 어디.


호기심. 그 어떤 욕망보다 더 줄기차고 긴급한 것. 그 자체로 욕망인 것. 단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 뒤로 물러나 지나치게 오래 기다리면서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게 이끄는 것.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


그렇게 마법적으로 개성을 발산하며 자신을 채우고 변신하고 싶었다. 그럴 용기와 힘을 갖고 싶었다.


  로즈에게는 ‘허가’되지 않은 일들이 가득한 시대에 자신이 내달렸던 삶에 대한 해석을 로즈가 달리한다면 로즈는 분명 자신을 채우고 변신할 수 있을 것이다. 흔들리고 어리숙해 보이고 때론 참담하게도 보였던 그런 삶조차 살아낼 수 있었다는 것, 그것 자체로 용기있는 삶이었다. 자신이 살아온 순간순간의 삶에 대해 그 행동과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지금 경험과 함께 로즈는 살아나갈 무언가를 또 쌓을 것이다. 로즈의 생존법은 삶의 경험과 인식에 따라 새롭게 채워질 것임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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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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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죽음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축 저, 은행나무, 2019-01-25.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하게 한다.

     - 김광균, 추일서중 中


  폴란드를 생각하면 자동적으로 환기되는 이미지다. 폴란드는 늘 그렇게 쓸쓸한 느낌이었다. 아마도 폴란드의 역사가,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의 수많은 이들의 죽음이 떠올라서일 것이다. 그렇게 폴란드는 새겨져 있다.

  이 소설 역시도 그런 느낌들을 새긴다. 1910년대~1989년의 폴란드의 역사, 1‧2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로부터 분할 점령지였고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냉전 체제와 사회주의 시대를 살아간 개개인의 세월이, 삶이 그려져 있다. 이 시기의 폴란드는 정치적으로 휘몰아치고 휘몰아치는 때였으니 맘먹고 걸어서 1시간도 되지 않는 마을을 초토화시키기엔 충분했다. 그곳이 어디에 있든지.

  소설 속 태고는 제주와도 닮아 있다. 4월 3일, 관련 다큐들을 보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미하우와 게노베가, 미시아와 이지도르, 크워스카와 루타의 삶이, 태고에서의 시간들이 제주의 시간과 닮아 있다. 태고가 제주였고 제주가 태고였던 듯이 한 나라의 역사가, 그 역사 속 권력이 국민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놓는지를 소설은 보여준다. 쓸쓸하지만 아픔에 더 가까운 기억을 남긴다.

  소설은 독특한 서사로 이끈다. 현실과 환상, 신화와 역사가 섞여 있어 익숙한 마을 태고. 그곳은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 천사들이 동서남북의 경계를 지키고 있는 곳이지만 삶이 어떻게 피폐화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잔혹함과 야만성이 적나라하게 살아 있는 마을이다. 어쩌면 태고의 사방을 지키고 있는 천사들은 태고로부터 다른 곳을 지키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철저하게 태고를 막거나. 고립. 5‧18의 광주가 4‧3의 제주가 그러했던 것처럼 한 마을의 철저한 고립. 외부와의 소통을 허하지 않는 완벽한 감금. 정말로 대천사들은 사방에서 모든 악들이 태고에서 날뛰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던가. 악을 그곳으로 몰아넣고 다른 곳으로 퍼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었던가. 그게, 신의 뜻이었던가.

  “파멸 그리고 혼돈, 파멸 그리고 혼돈.”


 《태고의 시간들》에서 이야기는 조각조각으로 읊조리며 전체의 서사를 만든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보리수와 버섯균, 신과 천사, 집과 게임에게도 서사의 장을 할애한다. 그 조각조각의 이야기들이 맞물려 그들 시선에서 세상을 보게 하고 세상 속 그들을 보게 한다. 이야기는 촘촘하고 작게 그려지는 듯하지만 크고 깊다. 유대인 학살과 크워스카와 루카를 향한 성폭행과 집단 강간, 그 어떤 경악스러운 이야기도 마치 전설이나 신화인듯 그림을 설명하듯 담담하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어조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마을에서 기대하는 환상과 낭만에 의해 잔혹성이 강렬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남자보다 여자가,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남편보다 아내가 더 빨리 죽는” 이야기가 담겼다. “여자는 인류가 은밀히 고여 있는 그릇과도 같은 존재”이기에 “강할수록 더 많은 아이를 낳았고, 그로 인해 조금씩 약해진” 여자의 이야기가 담겼다.


“혹시 그런 생각해보신 적 없으세요? 왜 우리는 바보같이 이런 전쟁통에 애를 낳을까 하는…….”

“분명 신께서……,”

“신, 신이라……. 그분은 잘난 회계사죠. ‘인출금’과 ‘융자금’을 관리하시니까요. 둘은 서로 균형을 맞춰야 하거든요. 그래서 하나의 생명이 사라지면,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죠…….”


  태고의 경계에는 위험이 있다. ‘여행에 대한 불안’과 ‘소유하고 싶고 소유되고 싶은 욕망’과 ‘자만에 빠져 우쭐되는 것’과 ‘지나치게 영리한 척하다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이다. 욕망은 태고를 흐르는 백강과 흑강의 합쳐짐처럼 유유히 섞이어 흘러간다. 어쩌면 당연히 인간은 욕망을 지닌 존재라는 인식하에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들이 정당화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태어나고 죽음이 너무나도 당연한 듯하기에 탄생이 어떤 형태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일도 죽음이 누구에 의해, 어떤 이유로 일어나든지 상관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는 죽음이 있다는 사실인 것인지도 모른다. 대천사들은 그 죽음을 지키는 자들인 것처럼도 여겨진다. 모두 죽어야 하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건가.

  세계사적으로 볼 때 전쟁과 체제 변화의 시대에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위해는 비슷하다. 때때로 이름들과 국명을 지워버리면 어디서 벌어진 것인지도 모를 살인과 강간과 집단광기의 이야기가 있다. 그렇기에 인류의 원형은 가감없이 잔혹하고 야만적이다. 하지만 온갖 지식을 습득하고 문명을 가졌다는 시대의 이야기 역시도 원형을 품고 품어 더할나위없이 야만적이고 극단적이기는 마찬가지다.

 《태고의 시간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전하는 방식에서 다르다. 올가 토카르축이 전하는 이 원형적인 이야기 방식은 매혹적이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인간이 창조한 신이랄지, 신이 창조한 인간이랄지… 뭐, 그런저런 생각들까지도.

  

신에게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 신은 자신이 세상 속에 가두어 놓고, 시간의 굴레에 얽매어놓은 인간들처럼 죽어버리고 싶었다. 이따금 인간의 영혼은 만물을 꿰뚫어 보는 신의 시야에서 감쪽같이 벗어나서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그럴 때면 신의 갈망은 더욱 강렬해졌다. 자신 말고도 절대 불면의 질서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질서로 인해 변화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모형으로 결합된다는 사실을 신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조차 아우르는 그 질서 안에서 시간에 의해 흩어져버리는 순간적인 모든 것들이 마침내 시간의 너머에서 일제히, 그리고 영원히 존재하기 시작한다.


  소설에 담겨진 ‘신’의 이야기가 중요한가. 태고는 결국 인간의 이야기다. 인간이 행한 역사이고 인간이 당한 역사의 이야기다. 내가, 당신이, 우리가 겪는 끝나지 않는 어리석음과 욕망의 소용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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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의 항해 창비세계문학 66
진 리스 지음, 최선령 옮김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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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꿀 수 없는 어둠

어둠 속의 항해, 진 리스, 창비, 2019.


  작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자전적이며 최고작으로 뽑은 소설이라는 점에서 호기심이 배가된다. 제목에서 짐작되는 막막함과 1890년생인 작가의 생애가 더해져서 잿빛이미지를 가득 안긴다. 이 작품은 1934년 출간되었지만 자전적 소설이라고 볼 때 배경은 1910년  즈음이 된다. 1910년이라는 시간에 서 있는 한 여자의 생애가 휘몰아친다.

  진 리스는 열여섯에 홀로 영국으로 건너간 도미니카 태생이다. 당시 도미니카는 영국령이었고 진 리스의 아버지는 웨일스, 어머니는 스코틀랜드계 크리올 태생이었다. 진 리스의 이국적 외모와 억양은 진 리스가 영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녀를 괴롭히는 요인이 되었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경제적 지원이 끊기고 배우가 되고자 왕립연극학교에 다니지만 역시 언어와 왕따를 겪으며 그만두고 코러스걸, 마네킹, 누드모델 등의 일을 하며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만난 부유한 연상의 남자, 사랑했지만 그에게서 버림받고 불법 낙태수술을 받은 경험이 진 리스의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일이자 이 소설의 중심 이야기가 된다.

  애나 모건이 되어 펼치는 이야기에는 머물 곳을 찾아 몇 번을 옮겨 가는 주거지처럼 반복되어 펼쳐지는 애나 모건의 기억이 있다. 어떤 상황을 겪을 때마다 몽환과 독백으로 때로는  정신분열된 것처럼 과거로 빨려 들어가는 그녀는 현재에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붙들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국 생활은 불안정하기 그지없고 그때마다 여지없이 소환되는 것으로 보건대 과거의 그녀는 행복했던 것일까.


바깥은 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가늘고 슬픈 쓸쓸한 목소리들. 그리고 마치 살아 있는 무엇이라도 되는 듯 사람을 짓누르는 그 열기. 나는 흑인이 되고 싶었다. 난 항상 흑인이 되고 싶었다. 프랜신이 거기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 나는 그녀의 손이 부채질을 하느라 까딱까딱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녀의 손수건 밑으로 떨어지는 구슬같은 땀방울을 보았다. 검다는 것은 따스하고 유쾌하며 희다는 것은 차갑고 슬프다.

 

  분명 그녀는 현재 행복하지 않다. 서인도제도에서 자란 그녀에게 영국은 너무 춥고 어두운 잿빛의 세계였다. 반면에 서인도 제도는 따스하고 밝은 자줏빛의 세계다. 그 풍경에 대한 느낌은 단지 공간적 배경, 지리적 위치에 따른 차이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 그 세계에서 느끼는 모든 것의 총체다. 사물과 인간 관계에서 느끼는 모든 것이다. 돈 한푼 없는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중 한명으로서의 그녀는 거기에 더해 이방인으로서의 차별을 겪는다. “저주받은 소수들의 인생”이 열여덟 그녀에게 붙어진 삶의 이름이다.

  그녀는 “흑인이 되고파”하는 생각을 한다. 이미 영국으로 건너오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다. 영국에서 흑인이 되고프다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게 들리지만 서인도제도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흑인이 되고프다는 생각이 프랜신에 대한 애정 갈구인가 생각했다. 엄마 없는 상실감과 모정을 프랜신에게 얻으려 했던 소녀의 마음이 있었던 것인가 하고. 프랜신과 닮고자 하는 마음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글쎄, 모를 일이다. 애나 모건에게 가득한 서인도제도에 대한 열망은 현재 영국에서 겪는 삶에 대한 반작용일지도.

  노예인 흑인 프랜신은 백인이기에 애나 모건을 좋아하지 않는다. 애나 모건은 자신 역시도 백인인 게 싫다는 것을 프랜신에게 설명해내지 못했다. 백인이지만 영국에서 애나 모건은 이방인일 뿐이다. 그것도 몹시도 가난한 젊은 여자. 서인도에서의 애나가 되고파 했던 프랜신이 영국에서의 자신이 겪는 삶과 다르지 않다. 아니다. 애나는 ‘프랜신’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흑인’이 되고프다고 했으니 프랜신의 삶을 꿈꾸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겠다. 서인도에서 애나 모건의 삶으로 보건대 결코 될 수 없는 프랜신이다. 영국에서 그녀가 오를 수 없는 위치를 꿈꾸는 것과 같다.


“안돼요, 젊은 아가씨가 이렇게 살면 안돼요.” 도스 부인이 말했다.

사람들은 ‘젊은’이라는 말을 하며 마치 젊다는 게 무슨 범죄라도 되는 양 굴지만, 정작 늙어가는 것은 항상 그리도 무서워한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늙어서 이 모든 망할 일이 다 끝났으면 좋겠어. 그럼 도무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이렇게 침울한 기분에 빠져 있진 않을 텐데.’


  젊은 아가씨가 사는 삶. 그것은 남성에게 원조받는 삶이다. 애나에게는 분명 사랑이 있었으나 경제적 지원과 맞물린 나이 많은 남자와의 관계는 타인들에게는 ‘원조관계’로 보일 뿐이고 남성 역시도 그렇게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여기에 애나는 상처받을 뿐이다. 애나는 이 관계에 힘겨워하고 또한 좀더 당당해질 수 있으려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못한다.

  “그 추잡한 외국인들 같은 걸 말하는 건 아니니까. 외국인들 싫지 않아?”

  한 사람으로서 ‘외국인’은 싫어하지만 젊은 여성으로서는, 뭔가를 이용해 먹을 때는 외국인어도 상관없는 이들의 세계에서 애나 모건은 한없이 무기력하다. 그런 자신을 슬퍼하고 좌절하며 그녀가 다다르는 곳은……. 애나 모건의 삶을 무조건 이해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애나 모건의 상황이라면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당연시되고 있는 지금 현실을 생각해본다면 1910년대 애나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싶다. 애나가 전전하며 살아가던 영국의 어둡고 춥고 습하고 낡은 집을 떠올려 본다. 물속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현실. 나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죽음의 문턱에서 다소의 희망이라도 잡아보려는 애나 모건의 독백들이 정신없이 흘러간다.

  이 소설을 페미니즘 문학의 대표 도서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읽다 보면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애나가, 애나의 삶이? 이런 의구심을 가지고 책을 읽다 보니 때로는 책에 대한 소개문구가 책을 편하게 읽어 나가게 하는 방해자로 등극하기도 한다. 하지만 책을 덮고 생각해보니 페미니즘이란 말에 너무 호도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언뜻 페미니즘은 어떤 행동력을 요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애나는 여권주의를 위한 활동적인 삶을 피력하고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여성으로 나타나진 않는다. 그것이 페미니즘인 것도 아니다. 애나 모건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여성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문학으로 동의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 시대 식민지 출신 여성의 삶이 곧 시대의 여성의 삶의 역사로서 기록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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