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상처를 꺼내본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21세기북스, 2011.


  제목을 본 순간 양자역학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 게 우습게도 그런 책은 전혀 필요치 않았다. 왜 미리부터 긴장하고 그로 인해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모르겠다. 새롭게 출간될 줄 알았다면 좀 늦게 읽을 걸 그랬다. 언뜻 보았을 때 바다 위의 돌고래 사진과 연한 하늘색이 제목이 주는 압박을 줄이고 편안하게 다가왔다. 다시 보니 새와 사람이 등장하는 사진이라서 순간의 착각이 주는 이미지가 얼마나 큰가, 생각했다. 포터 이름이 그렇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새삼 베아트릭스 포터가, 피터 래빗이 떠올랐다. 아련하고 동화적인 느낌들이 이 책에서 느끼는 것인지 포터에서 느끼는 것인지 헷갈렸다.

  단편 열 편이 실린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자리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 한 지점에 머물러 있는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비밀스럽게 뭔가를 숨겨놓은 장소이며 빠르게 지나쳐가고 싶지만 참을 수 없는 냄새로 인해 온전히 그 냄새를 묻힐 수밖에 없는 곳이다.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존재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장소이자 기억. 삶에는 늘 그런 지점이 있다는 것을 그로 인해 내 생각이, 내 언어가, 내 삶이 더디게 흐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순간의 이야기들을 작가는 그리고 있다. 


잠시 후 칼러 씨가 집에서 나오더니 내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는 말했다―그것은 이후 좀체 내 마음을 떠날 줄 모르는 말이다―그는 말했다. “얘야, 이 일은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란다.” ― <강가의 개>


  아무리 칼러 씨가 네게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해준대도 그 순간에 내가 있었으므로 ‘나’는 그 일에서 그 누군가에게서 쉬이 벗어나지 못할 감정을 안고 있다. 훗날에 과거의 지점을 돌아보는 이야기는 그리하여 좀더 애틋하고 저리게 다가온다. 결코 그 순간이 바꿔질리 없기에 감정이란 그때만큼 달라질리 없기에. 하지만 머언 미래의 감정을 그린대도 달라지지 않을 거란 걸 알게 된다. 그것을 단편소설은 몇장이어야 한다는 형식에 미치지 못하는 두페이지 소설 <피부>에서 그리고 있다. 부부가 과거 낙태의 순간을 기억하는 것과 머언 날에 과거를 기억할 그들을 생각하는 일은 과거형 문장과 미래형 문장으로는 다르게 나타나지만 문장이 담고 있는 감정은 전혀 다르지 않다.


이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이다. 그러나 오늘 오후 부드러운 라임 색 카펫 위 그녀의 벌거벗은 몸 옆에 누워, 비와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만 클로이의 피부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의 이름처럼 서늘하고 부드러운, 내 젊은 아내의 창백한 피부. 바깥 거리에서 음악 소리가 커지고 클로이가 내 쪽으로 몸을 굴린다. 맨 먼저 나의 가슴에 키스하고 차츰차츰 아래로 내러간다. 나는 눈을 감는다. 조금 후면 우리는 매일 밤 그러하듯이 우리의 조그만 매트리스 위에서 함께 잠이 들 것이다. 창문 밖 종려나무들을 흔들고 지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잔인한 짓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는 안개 속의 꿈을 믿으면서. 

― <피부> 


  그렇게 보면 빛의 입자가 가는 경로를 예측하기란 알기 어렵다는 리처드 파인만의 이론은 맞지 않을 지도. 어떤 상황에서의 감정이란 시간이 흘러 정확히 닿을 지점에 가 닿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 보여주는 헤더의 감정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준의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진다. 


나이가 들면 역설에 환멸을 느끼기가 쉬워지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젊어서는 도전뿐이에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저 피곤해지거든요. 모든 물리학자에게는 자기 너머 수준의 사고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와요. 자기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준”이라고 그는 말했다.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나이가 아주 많은 로버트 교수와 느끼는 교감은 헤더에게는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다. 헤더는 자연스럽게 흐르는 이 감정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을 더 의식한다. 그것은 사회가 요구하고 사회가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것이다. 우리 삶은 사회라는 시선을 너무 의식하는 까닭에 그 시선에 맞추는 것을 ‘잘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헤더가 사회가 용인하고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사회적 시선에 맞는 콜린과의 결혼을 선택하면서 헤더가 잃어버리는 것은 영원히 헤더를 채워주거나 구원해줄 수 있는 존재다. 그 결핍을 결코 콜린이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콜린은 헤더를 채워준다. 이 이상한 결핍과 채움의 과정 속에서 헤더는 행복한 순간이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다. 하여 나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내게 그러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이 섬세하고 아린 소설을 읽으면서 과거의 행위들로 그로 인한 감정으로 영원히 지속될 상흔 속에 머물러 있는 미래의 나를 떠올리게 된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끌어안고 기억이 퇴화되기를 바라는 것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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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시간 여행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고상숙 옮김 / 북레시피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주어진 시간 상자에서


위험한 시간 여행, 조이스 캐롤 오츠, 북레시피, 2019.


  다소 예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작가 조이스 캐롤 오츠는 1938년생이다. 작가가 그리는 미래세계, SF 공간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 작가가 살아간 그 시대적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더불어 전체주의 세계가 가질 수 있는 특성이란 비슷한 분위기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인데 그보다 이 소설이 작가의 46번째 소설이라는 점이 더 인상적이었다.

  전체주의 디스토피아를 다룬 이 소설은 잘 읽힌다. 2039년의 북미연합, 개인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사회, 이런 류의 소설에서 감시, 처벌, 반역, 추방, 처형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쉬이 예상된다. 하지만 그 처벌의 결과가 과거사회로의 추방이라는 점은 이 소설이 가지는 특징이다. 아드리안은 졸업식 연설이 국가권위에 대한 도전이란 이유로 반역자로 추방된다. 추방된 곳에선 신분을 바꾸고 살아가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신분이 아니라 주어진 대로의 삶이다. 기억이란 또렷하여 아드리안은 자신이 핸드폰과 컴퓨터를 쓰며 살아가던 시대에 있었음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아드리안이 눈앞에 보는 건 종이책과 타자기를 사용하는 시대다. 마치 시간여행자처럼 아드리안은 메이 엘렌 엔라이트로 1959년 9월 23일, 1959년의 삶을 살아야 한다.

  두 사람의 자아가 내재한 아드리안은 현재의 이 상황을 무사히 넘겨 다시 자신이 살던 시대로 되돌아갈 것을 다짐한다. 아드리안은 위스콘신 주 웨인스코샤 대학생 메리로서 수업을 듣고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발설하지만 않으면 되는, 그렇기에 오히려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못한 채 추방자의 삶을 잘 버티어간다. 아드리안이 누군가. 울프만 교수를 사랑하기전까지는.

  어쩌면 이 소설이 잘 읽히는 지점은 말랑말랑하게 쓰여졌다는 점일 것이다. 서로 다른 시대, 국가가 통제하는 시스템을 적확하게 비교묘사하기보다 아드리안의 심리를 따라 그려지는 세상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 만큼 아드리안의 불안과 다짐과 사랑의 시선이 어렵게 그려질 리 없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이 소설을 가볍게, 탄탄하다는 느낌이 덜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디스토피아, 전체주의의 공포가 그로 인해 압박되고 죄어오는 느낌도 약하다.

  소설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건 스키너다. 아드리안이 심리학과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만큼 주요하게 『과학과 인간 행동』을 비롯한 스키너 이론에 대한 논의가 많다. 스키너는 행동주의 심리학자로서 인간행동은 환경에 대한 반응이라고 보며,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과 <웰든 투>로 유명하다. 소설에선 이 스키너 이론에 대한 아드리안 자신의 생각들을 채우는데 어쩌면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이 부분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아드리안 또한 메리는 스키너 이론에 대한 내내 비판적 의견을 제시한다.


살아 있는 것은 (외부에서 보았을 때) 모두 시계가 돌아가는 기제와 비슷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나는 항의하고 싶었다. 나는 나야. 나는 독특한 존재이며 그런 식으로 파악하기 힘든 존재라고.


  그러한 비판의식에서 아드리안이 계속 제기하는 것은 ‘나’, ‘자아’이다. 통제된 사회속에서 자신을 찾아가기 위한 노력처럼 아드리안은 메리가 아니라 본래의 아드리안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있다.


나는 자각 또는 자기 인식의 결여에 대한 스키너의 언급―자기 인식에 대한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인간에게는 자기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에 충격을 받았는데 이 역시 교과서가 아닌 그의 주요 저작 중에 읽은 내용이었다.

이러한 인식에는 뭔가 분명 끔찍한 게 있었다. 내가 나에 대해 모른다면 그 어느 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렌즈가 얼룩덜룩 더러운 상태이면 이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이 모두 얼룩져 보일 테니까.


  로맨스로 진행되어가는 지점에서 아드리안은 이런 자각을 더하게 된다. 그리하여 다시 소설의 분위기는 반전된다. 1959년의 시대도, 시간여행도 의문이 가득한 채 펼쳐진다. 통제된 환경을 빠져나오려는 아드리안과 울프만의 관계에 의해 사회에 대한 시각 또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외롭고 힘든 그 시대에 그것을 극복하게 해주는 울프만과의 미래를 꿈꾸는 만큼 아드리안이 갖게 되는 의혹과 불안이 실험상자 속에 갖힌 느낌을 준다. 스키너의 실험은 확장된 전체주의의 통제와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가 인식하는 자아가 환경에 최대 적응된 상태에서의 인식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꽤나 슬프고 아픈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주어진 시간 안에서 견뎌내는 거야. 어디에서 살건 한 번에 하루씩 견뎌내는 것은 똑같아. 이게 바로 우리 시공간의 축복이란다.


  자아에 대한 생각과 시간여행에 대한 생각을 전체주의 사회의 틀 안에서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이 소설이 주는 메시지는 정확하다. 


삶은 지금 현재이기 때문이다. 삶은 생각이 아니고, 투영되는 것도 아니며, 삶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삶은 현재의 그것이며 TV에 비치는 것처럼 항상 지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가 나를 위한 곳, 지금이 나를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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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덱의 보고서
필립 클로델 지음, 이희수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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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렉스 플라메

브로덱의 보고서, 필립 클로델, 2010.


  요즈음 보고서의 힘을 생각하게 된다. 기록, 증언이 가진 힘과 오랜 시간 동안 비밀유지가 되는 힘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 거짓이 조작이 공작이 어떻게 형성되어 뻗어나가는지 진실을 감추기 위한 카르텔이 얼마나 공고한지 그런 것들을.

  브로덱의 보고서는 어떤 보고서일까. 예상 가능하기도 하다. 일종의 진술서 같은 것이리라. 소설은 왜 보고서를 써야 하는가에 대한 브로덱 자신의 질문이 있다. 왜 ‘브로덱’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브로덱이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드러내지 않으려는 속뜻은 따로 있다. 내용과 더불어 보고서를 쓰는 자, 브로덱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소설을 통해 또 하나의 단어를 배운다. 안더러. 그리고 에라이그니스. 전쟁이 끝난 마을, 전쟁은 끝났지만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전쟁 이전의 상황일 수 없는 마을에 낯선 이가 나타난다. 낯선 이를 부르는 말은 매우 많은데 ‘안더러’는 그 중 하나다. 타인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안더러’를 불편해한다. 이 낯선 자, 이방인은 여인숙에 머물며 그저 그림을 그리고 전시하려 할 뿐이지만 죽는다. 이 형용할 수 없는, 이상야릇하고 안개로 휩싸인 일, ‘에라이그니스’에 대한 일을 밝히고 기록하는 것이 브로덱의 일이다.


내 이름은 브로덱이고 그 일과 무관하다.

이 말만큼은 꼭 하고 싶다. 모두들 알아야 한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브로덱의 보고서는 아니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 일’과는 무관한 브로덱의 어조가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브로덱이 전혀 무관한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주게 한다. 안더러의 이야기 위에 홀로코스트가 겹친다. 브로덱은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자’이다. 그곳은 “아주 먼 곳, 인간다움이 모두 사라진 곳, 겉모습만 인간이고 의식이 없는 짐승들만 머무는 곳”이었고 브로덱은 그 시기를 암흑으로 가득한, 검은 구렁이라고 칭하며 아직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이 브로덱이 살아 돌아올 것이라 생각지 않은,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은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브로덱은 말 그대로 ‘똥개’가 되었다.  

  왜 마을 사람들은 브로덱이 살아돌아온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안더러를 불편하게 여기는가. 단지 그들이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는 너무도 쉬운 대답이다. 하지만 본질적인 대답일 수도 있겠다. 브로덱은 그곳에서 살아 왔지만 처음부터 그곳에 있던 존재가 아니다. 전쟁은 특히 사람을 구분짓기 좋아한다.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나만을, 내 가족만을 생각하고 내 영역을 고집하고 그리고 나머지로 만들어 버리는 것, 세밀하게 타인을 나누어 버리는 일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모든 역사는 보여주었다. 브로덱이 나머지였다. 안더러였다.

  마을이 점령당한 상황에서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은 이유로 고발당한 브로덱은 자신을 수용소로 끌려가게 한 마을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곳에 그가 사랑하는 이가 있고 그곳이 그가 살아가는 곳이었으니. 수용소에 있는 동안 마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지 그리고 그의 아내가 어떤 고통을 당하게 되는지 알지 못하지만 어떻게든. 그렇기에 마을 사람들은 브로덱이 살아오지 않기를 바랐고… 안더러는 그의 그림이 마을이 가지고 있던 비밀을 보여주고 있어 두렵고 위태로웠다.


죄지은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죄가 없다는 것은 무고한 사람들 가운데 유일한 죄인과 결국 똑같다는 것을 알았다.


  이 말이 담고 있는 엄청난 무게, 이 말이 가리키는 것이 세상이 이렇게, 나쁜 일들은 벌어지고 진실은 감춰지는 이유가 아닐까. 그렇다면 왜 마을 사람들은 브로덱에게 여인숙에서 벌어진 사건을 안더러의 일을 기록하도록 했을까는 의문이 생긴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행한 일을 감추고 싶어한다. 그들의 죄를 아는 이가 있는 것은 그들에게 불편함을 넘어 두려움을 주는 일이다. 그런데도 굳이, 브로덱을 지목해 그 글을 쓰라고 하는 것은… 5.11 연구회를 조직해 5.18의 진실을 은폐‧조작‧왜곡해온 전두환 반군부처럼 ‘조작된 진실’을 원하는 것일까. 그리하여 브로덱은 사건의 진실에서 떨어진 글을 쓰는 것일까, 그렇기에 브로덱은 다른 버전의 보고서를 준비하고 이것은 그것일까.


사람들은 이상해. 별 생각 없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짓을 저지르지. 그런데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기억을 안고서는 계속 살아갈 수가 없는 거야. 내다 버려야 하지. 그럼 나를 만나러 와. 왜냐하면 그들을 편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걸 알거든. 그래서 나한테 다 얘기하지. 나는 하수구야, 브로덱. 나는 신부가 아니라 인간 하수구야. 사람들이 편해지려고, 가벼워지려고 자기들의 온갖 피고름과 쓰레기를 내다 부을 수 있는 뇌를 가진 인간. 그러고 나서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 버려. 새 사람이 되어서. 깨끗해져서.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서. 그들이 털어놓은 것에 대해 하수구가 입을 다물고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거든.


  어쩌면 브로덱의 보고서가 필요한 절실한 이유는 이 말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이유로 쓰여져 있기만 하면 그 용도가 다하는 보고서는 마을의 시장에 의해 불에 태워진다. 수용소 생활을 거치며 삶과 인간, 인간의 본성에 관한 수많은 생각을 거듭할 수 있었던 브로덱에게는 어떤 보고서가 필요할까. 덤덤하게 마음을 아리게 하는 문체로 써 내려간 브로덱의 보고서는 인간에 관한 통찰이 담겨 있는 생생한 경험담이 된다. 브로덱이 경험한 바에 따르면 사람들은―그런 일들을 저지른―“괴물이 아니라 농부이고 장인이며 소작농, 산림감독, 하급공무원들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또한 괴물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 그들을 묶어 주는 동시에 그들을 초월하는 집단, 비슷비슷하게 생긴 수천의 얼굴들로 이루어진 집단 속에 녹아들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인간이 어떤 짓거리를 하는지 나는 보았다. 모든 잘못은 그들을 끌어들이고 부추기고 그들을 발 없는 도마뱀처럼 춤추도록 지휘봉을 흔든 사람에게 있으며 군중은 스스로의 행동과 미래와 궤적에 대해 의식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다. 실은, 군중 그 자체가 괴물이다.


  마을 사람들은 안더러의 본명을 모른다. 그들은 마을을 찾아온 자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혀 불편함이 없었으니 모두 이방인을 부르는 명칭들은 실로 다양했기 때문이다. 안더러는 명확히 우리와는 달랐다고 했지만 브로덱은 안더러를 ‘나 같다’고 느낀다.  타인을 타자화시키는 것은 명명에서 시작됨을 또한번 생각하게 된다. 괴물같지 않으면서 괴물인 사람들의 일상성이 아주 아리게 느껴진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렉스 플라메와 같다.


렉스 플라메는 다른 종류의 나비들이 그들 중에 끼어드는 것을 묵인합니다. 그런데 침략자가 나타나면 렉스 플라메들은 알 수 없는 언어를 이용해 서로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안전한 곳으로 몸을 숨깁니다. 결국 그들 집안에 끼어든 나비들은 그런 정보를 얻지 못했으므로 새에게 먹히게 되지요. 렉스 플라메가 침략자에게 희생물을 바침으로써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받는 셈입니다. 아무 문제도 없고 만사가 순조로울 때는 자기네 집단과 다른 종의 나비가 한 마리 혹은 여러 마리 함께 있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저런 방법으로 그들을 이용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위험이 닥치면 본연으로 돌아가 살아남기 위해 자기 집단이 아닌 것들을 아무런 주저없이 희생시킵니다.


  그곳에 끼어든 안더러와 브로덱은 희생당한 나비이지만 각각 그림과 글로써 진실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그림은 찢겨지고 브로덱의 보고서 또한 불에 타버리지만 브로덱의 보고서가 있다는 것을 안다. 집단의 광기에 진실이 묻혀버리지 않을 수 있는 힘에 대해 생각한다. 그럴 수 있는 인간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브로덱이 희생자이자 타자인 브로덱이 진실을 담은 보고서를 써갈 수 있는, 그것을 알릴 수 있는 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브로덱이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방법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브로덱의 보고서는 안더러 사건, 마을 사람들이 한 일에 대한 증언이자 브로덱 자신이 한 일, 삶에 대한 회고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기록이란 글이란 사람이 사람을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브로덱은 소설의 처음과 끝에 같은 말을 한다. ‘내 이름은 브로덱이다’라고. 마지막에 거듭 당부한다. ‘내 이름은 브로덱, 브로덱, 잊지 말아달라고.’ 안더러는 이름 없이 ‘타인’으로 ‘이방인’으로 남아 사라진다. 렉스 플라메의 본성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렉스 플라메의 집단적 광기로 살아가지 않는 방법은 개인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일이라는 것을 작가는 기억하라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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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파친코 1~2 세트 - 전2권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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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디든, 타국

파친코. 이민진, , 문학사상사, 2018.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그들이 토해내는 외침은 증오도 원망도 아니다. 어쩐지 이 말은 체념 같기도 하고 그 무엇이든 견디고 이겨내리라는 의지 같기도 하다.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파친코』는 1910년부터 1989년을 배경으로 한다. 순자의 아버지 훈이에서 순자의 아들 노아와 모자수,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까지의 4대의 삶이 펼쳐진다. 1부는 부산 영도 바닷가에 살던 순자가 일본으로 건너가기까지의 이야기로 급박하게 읽힌다.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인물이 처한 어렵고 힘든 상황을 벗어나기를 응원하며 보게 된다. 2부는 일본생활이 중점적으로 다뤄지는데 다소 더디게 읽힌다. 등장인물이 늘어나는 만큼 고민이 짙게 드리워지는 까닭이다. 인물마다 맞닥뜨린 ‘나’라는 존재의 자각이 내게도 여러 갈래의 생각과 감정을 안긴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순자는 ‘고생’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의 삶이 고생이라는 말 외에 다른 게 없는가,라고. 노년의 순자는 그녀의 삶에도 아름다움과 영광이 반짝거리는 순간이 있었노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무엇을, 어느 순간을 그렇게 볼 수 있을까.

  그녀는 평생 동안 다른 여자들한테서 ‘여자는’ 고생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다. 그 말을 하는 여자들 역시도 고생에서 벗어나지 못했겠지만 어쩐지 ‘어린 소녀로, 아내로, 엄마로’ 고생하다가 죽는 삶에 대한 순응이 느껴진다. 고생이란 기차에서 내려올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는 건가. 양진과 순자 그리고 경희, 그들은 벗어날 수 없는 그 기차를 탄 ‘여자’이다.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생계책임은 남성, 아버지의 역할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은 ‘여자’다. 순자의 가계도를 그려보면 아버지들은 장애를 가졌거나 병자다. 순자의 아버지 훈이는 언청이이며 절름발이다. 모자수의 아버지 이삭은 결핵을 앓는다. 노아의 아버지 한수는 아버지라 불리지 못한다. 그 누구의 아버지도 되지 못한 요셉은 무능력해져가며 피폭자로서 오래도록 병상에 있게 된다. 분명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사랑을 주는 존재이긴 했지만 일찍 사망하거나 감춰진 존재가 되거나 변해간다.

  이런 상황에서 순자의 어머니 양진과 순자와 요셉의 아내 경희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전면에 선다. 겨우 끼니를 떼우는 정도가 아니라 삶이 안정될 수 있도록 밖으로 나가 적극적으로 돈을 번다. 이때의 여성들은 전통적인 역할에 갇혀 있지 않다. 어쩌면 아내와 어머니로서 모든 일을 해내야 한다는 강한 일념으로 더욱 더 치열하게 일을 했던 건지도 모른다. 경희는 어머니로서의 삶을 바랬지만 아이를 갖지 못하고 점점 피폐해지는 남편과 순자의 아이들을 돌보며 살아간다. 지식인 여성으로서 하고픈 일과 여성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한 남자의 구애를 밀어낸 경희의 삶은 결국 순자의 삶과 다르지 않다. 그것이 선택일 수밖에 없었던가 싶은 경희의 삶 또한 고생일 수밖에 없는 여자의 삶, 그 자체이다. 

  하지만 순자의 아주버님이자 경희의 남편 요셉은 다르다. 전통적인 역할인식에 갇혀 가족의 가장으로서 책임지지 못하는 상황에 자책하고 탄식한다.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제수가 하는 일에 반대한다. 요셉은 생계는 남성 책임이라는 명분에만 치중한 채로 타인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 가장으로 군림하며 가정의 모든 결정권을 쥐려 하며 여자들을 바깥으로 굴리며 일하게 했다는 비난을 감수하지 못한다. 그들이 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가부장적 사고는 완고하며 변화하지 못한다. 요셉이 가진 신앙에 기대어도 이러한 인식은 변하지 않는다. 당시 서구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지식인으로 모순되고 잘못된 사회에 대한 변화를 강렬히 열망하며 변화에 대한 의지 또한 실행력으로 보여주리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요셉은 조국을 위해서, 위대한 이상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라 생각한다. 살아남아 가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셉은 가족이 함께 겪는 힘겨운 현실에서 자의식만을 붙든 채 사회변화에 무력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언청이 유전을 두려워하는 이들로 인해 순자의 아버지 훈이는 겨우 돈을 주어 양진과 결혼한다. 같은 이유로 순자 역시도 나이가 들어도 혼인을 청하는 이들이 없다. 이때 순자는 우연히 도움을 준 일본을 오가는 생선 중매상 한수를 만나고 임신한다. 하지만 한수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먹고 한수의 첩이 되길 거부한다. 평양에서 부산으로 온 이삭은 순자의 하숙집에 머물다 순자 모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결핵을 치유한다. 살아남은 이삭은 순자와 결혼하여 아버지가 없는 아이를 돌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여긴다. 그것은 이삭의 희생이자 임신한 순자에겐 구원이 된다. 그렇게 이삭은 자신의 형 요셉이 살고 있는 일본 오사카로 순자를 이끈다. 

  일본에서 한수의 아들 노아와 이삭의 아들 모자수가 태어난다. 자손들은 모두 기독교식 이름을 갖는다. 노아, 모세, 솔로몬. 그러나 단 한번도 이름이 힘이 된 적이 없다. 종교가 그들 삶에 어떤 위로가 되어 주지 못한다. 요셉은 힘겨운 상황에서 가족들에게 권위를 내세우는 존재가 되어 갔을지언정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 암울한 시대 종교가 삶을 버텨내는 구원이자 타인에 대한 관용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전혀 이뤄지지 못한다. 기독교가 일본인의 의식을 좌우하는 종교가 아니기에 일본인에게 기독교인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들을 기대할 수 없다. 순자의 가족이 기독교인이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이삭이 순자와 결혼하는 이유를 만들어주는 용도로 보일 뿐이다. 일본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간다 해도 더없는 고통의 삶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삭의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죽음도 이것을 보여주는 한 요인으로 보인다.

  모자수는 성경의 모세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하도록 이끈 모자수. 그는 가족들이 일본에서 차별과 모욕을 당하며 살지 않도록 이끌 수 있을까. 그가 파친코에서 일하게 되는 것도 신의 뜻이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들이 겪는 모든 상황 하나하나에 의도가 있다고 할 지 모른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의 아버지 이삭은 믿었을지 모르나 살아서, 살아가야만 하는 다른 가족들에겐 전달되지 않았는지도…. 모자수는 “인생은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기대하는 파친코 게임과 같다”고 생각한다.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간대도 모자수의 삶을 확실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없다.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삶, 희망을 기대하는 것은 현재 불행이 잔뜩 굴러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좀처럼 불행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생의 아이러니란 삶 자체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어떤 일본인은 “운명이라는 말은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의 게으른 변명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조작이 이뤄진 파친코 게임에서 선택이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운명이란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의 변명이 아니다. 조작을 일궈놓은 이들이 책임지고 바로잡아야 할 ‘잘못된 일’일 뿐이다. 사람에게 행해지는 경멸과 차별도 조작의 한 맥락이 되지 않을까. 이유를 만들어 놓으면 그것 자체가 경멸과 차별의 이유가 된다.

  노아와 모자수의 삶이 부모와는 같으면서도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순자와 경희와 요셉이 조선인임을 인식하며 살아온 반면 일본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물을 수밖에 없다.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태어나 살고 있지만 각종 제도에서 노골적인 차별을 당하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경멸어린 시선과 모욕을 견디어야 하는 삶인데 더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가지는 것도 어렵다. 그나마 재력을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파친코이기에 이곳 사업장으로 조선인이 몰린다. 일본은 1952년 이후 일본에서 태어난 조선인들이 열네 살 생일이면 거주 허가를 받아야 하고 3년마다 등록증을 갱신해야 한다고 정했다. 솔로몬은 이 운명에 속해 있다. 일본인은 질서이자 법이라 하겠지만 범죄자에게 적용되는 이 절차를 적용받아야 하는 조선인에게 그것은 조작된 파친코 게임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은 삶이 결코 공정하게 이뤄질 리 없는 확증 같기만 하다. 결과적으로 노아도 모자수도 솔로몬도 파친코에서 일한다. 그것은 선택으로 불리지만 선택지가 있을 때에 온전히 선택이라는 이름이 빛을 발하는 것이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노아와 모자수가 일본에서 ‘자이니치’로서 겪는 차별과 모멸은 그들 삶의 방식과 태도를 결정하게 만든다. 노아는 열심히 공부하며 누구보다 뛰어난 학업성적을 유지하며 희망을 꿈꾸고 모자수는 자신에게 조롱을 일삼으면 패주는 등 자신을 대하는 방식 그대로 대응한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자 일찌감치 일하는 것을 선택한다. 노아도 모자수도 보통 이상의 노력과 열성으로 공부하고 일을 한다. 두 형제의 선택은 일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간으로 대접받기 위한 선택이다. 하지만 죽어라고 교육을 받아 일본인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져도 부자가 되어도 노아와 모자수를 한 인간으로 보거나 존경하는 일 따위는 없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금융권에 취직한 솔로몬 역시 일본인 상사에게 이용당하고 끝내 부당해고 당한다. 있어서는 안되는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일본인에게서 기대할 수 없다. 애당초 그럴 의도는 조선인이기에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인은 사람을 ‘조선인’이라는 존재성만으로 그들 입맞에 맞게 취급할 뿐이다.

  ‘자이니치’. 일본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노아와 모자수를 지칭하는 언어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일본사회에서 그 어떤 노력을 기울인들 구분하여 배제하기 위해 부르는 단어. 차별의 당위성이 마치 단어의 존재에 있는 듯이 ‘자이니치’라는 명명은 일본에서 살아가는 조선인의 정신을 파고든다. ‘당신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고 있나요?’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그것에 익숙해질 때보다 부정당하고 공격당할 때다. 이들을 극단의 상황으로, 하나의 답으로 몰고 가도록 이끈 자이니치라는 단어에는 조선인이기에 겪어야 하는 차별과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인이라 생각하며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하기에 느끼는 혼란과 억울함이 담겨 있다. 가령 솔로몬은 애인 피비가 일본이 조선인을 국적으로 구분하는 것을 따질 때, 일본 정부가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화를 낼 때면 일본을 옹호하게 된다. ‘이상하게도’ 그렇다고 했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말하고 사고방식을 익히며 성장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피비에게 일본편에 서서 옹호하더라도 자신이 당하는 부당한 처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항의하지는 못한다. 오로지 부당함과 이해할 수 없음은 자신의 내부에서만 행해지는 전쟁이 될 뿐이다.

  매슬로우는 인간은 단계적 욕구를 가진다고 했다. 각각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건강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 생존의 욕구라면 점차 소속과 인정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 자이니치에게는  단계적으로 충족시켜가야 할 인간의 욕구가 박탈된 상태이다. 사회에서 건강한 사회인으로 살아갈 동력을 상실하게 한다.

  노아의 극단적 선택은 소속감과 인정의 욕구를 배제당하고 더 이상 욕구를 충족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처절함을 보여준다. 노아의 비극적인 선택은 자신의 친부가 한수이며 야쿠자라는 것을 알게 된 충격보다 자신의 정체성으로는 일본에 소속될 수 없다는 좌절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 어떤 재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사회에서 존경받을 수 없는 위치의 조선인 야쿠자의 피가 자신에게 흐른다는 것은 그가 욕망하는 욕구에 대한 완전한 단절로 여겨졌을 것이다. 가족 모두를 외면한 채 잠적한 노아를 십여년의 노력 끝에 순자가 찾아냈을 때, 노아는 자살한다. 제 아내와 아이를 두고 벌인 선택이다. 그것은 가족이 자신을 찾아냈을 때 이미 결심한 것이었다. 일본인으로 살며 가족에게서 철저히 떠난 노아가 가족이 자신을 찾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자신은 일본인이라는 외침이 되는 건가. 노아의 죽음은 충격적이었을지언정 노아에 대한 이해를 더해주진 못했다.

  소설 카테고리를 어디에 놓을지도 약간 고심한다. 소설은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한국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가는 한국계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간 한국계 1.5세. 글은 영어로 쓰였고 번역되었다. 번역서이자 '전미도서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니만큼 미국문학이 맞는데 '한국인', 재미교포라는 말은 자꾸 '한국'쪽으로 당기라고 부추기는 것 같다.. 그러면서 생각해보면 파친코 속 등장인물들처럼 '재일교포'에 대해서는 확연히  '한국인'이란 말을 적용하는데 어색함을 느낀다. 이 무슨 편견이고 차별가득한 느낌일까.

   『파친코』를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일본인에게 자이니치라고 불리는 재일동포에 대한 인식을 전환할 계기가 없었을 것이다. 강제로 끌려가 되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있었건만…. 그럼 나는 그들을 재일동포로서 바라보려 한다, 이렇게 말하려니 뭔가 어색하다. 굳이 이런 다짐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내가 뭐라고 그들을 동포로 인정하겠다고 한다는 건지도. 이 생각 자체가 오만이다. 이 나라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행하는 ‘갑질’ 아닌가, 이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노아의 말이 떠오른다. 조선인이니 일본인이니 하는 국적에 신경 쓰지 않고 단지 자기 자신으로 있고 싶다는 그 말이…….

  사상가 성 빅토르 휴는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이와 같고 어디든 조국처럼 느끼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세상 어디든 타국처럼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사람이라고 했다. 어쩐지 강한 사람보다도 완성된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노아의 바람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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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곳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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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부사가 가리키는 것


내가 있는 곳, 줌파 라히리,  마음산책, 2019.


  분명 나는 소설 카테고리에서 이 책을 본 것으로 안다. 책을 펼쳐 든 순간 당황한다. 아니었나? 에세이였던가. 줌파 라히리의 5년 만의 신작소설이란 글귀를 발견한다. 뭔가 마음에서 벅차오르는 감정이 사그라든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을 좋아한 만큼 소설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사실을 최대한 뺀다 하더라도 이 신작소설에서 내가 볼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요즘 몇몇의 작가들에게서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경계의 ‘소설’이 출간되곤 하지만.

  몇 년 전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에 살며 이탈리아어를 배우며 글을 쓴다고 했고 실제 그에 관한 글을 써서 출간한다. 작가의 도전에 응원을 보내지만 독자로서의 나는 글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다. 아니 그것은 글을 읽은 후에 느끼는 감정이니 오히려 더 알싸한 기분이 든다.

  신작소설 <내가 있는 곳>에 대한 느낌, 작가의 ‘장소부사를 사용한 글짓기’를 읽는 느낌이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수업에서 선생님이 내어주신 글짓기 숙제. 나는 한글로 번역된 글을 읽는 것이므로 그것이 이탈리아어로 쓰여 있는지 영어로 쓰여 있는지 인도어로 쓰여 있는지에 대해 모른다. 그 글이 쓰여진 언어의 수준에 대해서도 가늠하지 못한다. 때론 그것 자체에 대한 감상이나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기댄 수준으로 평가를 하게 된다. 이 글이 줌파 라히리의 작품이 아니라면, 이탈리아 소설로 쓰여진 어느 무명작가의 첫 번째 글이라면, 산문이라면. 그렇다면 이 글을 보는 내 눈은 마음은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줌파 라히리의 작품이라고 하기에 선택했고 그렇기에 실망한다는 점이다.

  줌파 라히리를 지운다면, 작가의 이름을 지운다면 이 소설에 대해서 느끼는 건 무얼까. 어느 도시에서 도시를 형성하는 모든 장소에서 일상의 느낌을 풀어쓴 잔잔한 언어. 담백한 언어로 쓰여진 글. 때론 많은 이들의 일기장에 담담히 적혀져 있을 문구들….


방향 잃은, 길 잃은, 당황한, 어긋난, 표류하는, 혼란스러운, 어지러운, 허둥지둥 대는, 뿌리 뽑힌, 갈팡질팡하는.


이런 단어의 관계 속에 나는 다시 처했다. 바로 이곳이 내가 사는 곳, 날 세상에 내려놓는 말들이다.


  삶이란 일상 속에서 느끼는 모든 혼란과 방황의 감정들을 지우고 채우고 느끼며 나만의 언어로 재해석하며 의미를 채워가는 것이다. 한 여인이 성장하는 동안 가족간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맺음에서 느끼는 외롭고 쓸쓸한 감정과 기억은 장소를 불문하고 나타난다. 까페, 침대, 빌라, 바다와 같은 물리적 장소를 넘어 마음이라는 내면의 장소에서는 언제나 들쑤시는 것이다. 마침내 어디에서든, 아무 데서든 기억과 감정은 생겨나고 그것이 살아가는 이의 숙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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