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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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회복력


레스, 앤드루 숀 그리어, 은행나무, 2019.


  “대체 아서 레스가 누구야?”


  하나, 둘, 셋… 숫자를 세어 본다. 삶의 마지막 순간 내 장례식장을 채울 사람의 숫자라고나 할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무도 없으면 좋겠어와 아무도, 없으면, 어떡하지?

  때때로 실연이란 여러 가지로 자신을 재발견하게끔 한다. 실연 후의 가장 대표적인 반응이 여행이라는 점에서 실연은 현재 상황을 환기하고 변곡점이 되는 기회다. 실연과 여행은 한 덩어리로 끈적끈적하게 붙은 상실과 집착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결정하게 한다.

  레스 역시 9년 차 연인 프레디가 보낸 청첩장을 받고 여행을 채택한다. 지금껏 가보지 않은 세계 여러 나라의 문학 행사에 기꺼이 참석하기로 했다. 물론 레스가 작가였기에 합리적 결정이었다. 오십이 되었어도 여전히 무명작가이든 아니든 레스에게 “뜨뜻미지근한 평론이나 무심한 모욕은 더 이상 그에게 상처를 줄 수 없었지만 실연은, 진짜 진정한 실연은 그의 얇은 가죽을 뚫고 예전과 똑같은 색조의 피를 낼 수 있었기에” 가능하고 필연적이었다.


선생이나 저나, 우리는 천재들을 만나봤죠.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람들 같지 않다는 걸 알고 있잖습니까? 계속해나가는 것, 자기가 천재가 아니라는 걸,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계속 살아나간다는 건 어떤가요? 내 생각엔 그게 최악의 지옥인 것 같아요.


  레스는 멕시코, 이탈리아, 독일, 모로코, 프랑스 등등에서 열린 문학 행사에 참여하면서 인생과 작가로서의 자신에 대해 새롭게 발견하고 정립한다. 그냥 ‘형편없는 작가’라고만 생각했던 자신이 ‘형편없는 게이’이기까지 하다는!

  오십년만 돌아보면 되는 아서의 인생은, 문학 기행이 펼쳐지는 장소에서 다양한 에피소드와 함께 한다. 멕시코의 행사는 천재 시인 로버트에 대한 심포지엄이었고 레스는 무대에서 30년 전에 만난 로버트의 아내 메리언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당시 로버트의 아내 메리언은 레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 로버트 좀 잘 챙겨줘.” 잘 챙겨주다 못해 로버트를 잘 챙겨간 레스는 로버트와 15년을 함께 살았다. 

  

우리 세계의 아름다운 점을 보여주는 게 우리 의무거든요. 게이 세상의 아름다움 말이에요. 하지만 레스 씨는 책의 등장인물들이 아무 보상없이 고통받게 만들어요. 내가 뭘 잘 몰랐다면 레스 씨가 공화당 지지자인 줄 알았을걸요. <칼립소>는 아름다웠어요. 아주 슬픔으로 가득했지. 하지만 너무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자기 증오에 차 있었어요. 한 남자가 어느 섬으로 휩쓸려 와서 몇 년 동안 게이 연애를 한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아내를 찾으러 돌아간다! 그것보다는 잘 쓸 수 있잖아요. 우리를 위해서. 우리에게 용기를 달라고요, 아서. 더 높은 목표를 잡아. 이런 식으로 말해서 미안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말이어서 하는 거예요.


  아서는 실연의 상처에 더해 재능없음에 대한 한탄이 가득하다. 오십의 아서는 젊음마저도 없다는 사실을 더욱 자각한다. 그럴수록 아서의 인생은 과거도 미래도 형편없는 삶으로 점철되는 듯하다. 자존감이 바닥으로 치닫고 끝없는 슬픔과 상실에 깊이 빠진 아서의 이 여행은 그래서인지 일명 ‘웃픈’ 상황의 연속이다. 제 자신의 ‘형편없음’에 매몰된 아서, 짠내 나는 아서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그럼에도 계속된 여행을 하는 아서가 놀라울 뿐이다.

  소설은 코믹한 상황 설정과 유머를 구사하며 형편없는 게이 작가의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그 설정에 비해 마냥 유쾌하게 느껴지거나 책장 넘기는 속도가 나진 않는다. 때론 누구에게나 자기연민이 필요하지만 지나친 자기연민은 독이 된다. 시작부터 일관된 아서 레스의 자기연민과 비하가 책장 넘김을 더디게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더불어 레스와 마찬가지로 나만의 지난 시간을 회상하느라 더뎌지기도 했다. 젊음. 청춘. 내 인생에 있었던 지난 시간.

  지난 시절을 회상하다 보면 레스의 인생에서 이 실연의 아픔은 결국 로버트와 프레디, 그 연인들 자체에 대한 상실감보다 지나간 인생에 대한 회한인 것만 같다. 지난 그 시절의 레스, 젊은 시절의 레스. 그 시절이 만들어낸 지금의 레스. 


아서 레스.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최고의 인생을 누렸어.

돌아갈 수는 없어. 그게 전부 나쁜 것만은 아니지. 이젠 사람들이 항상 너를 어른으로 생각할 거라는 뜻이니까. 널 진지하게 생각할 거야.


  시종일관 늙고 형편없음으로 자신을 무장한 아서 레스가 많은 사건과 사람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자신이 마냥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라는 쪽으로 생각하게끔 되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 한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제 형편없음의 근거로 삼던 아서 레스가 사소한 것에서부터 인생에 대한 긍정적 기운을 생각하는 과정. 어떤 형태로든 사람은 제 인생에서 ‘자기회복력’을 가질 시간이 필요하다. 레스는 그것을 잘 실천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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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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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킹만 사건처럼


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문학동네, 2019


  1964년은 어떤 일이 있었던 해일까. 여름, 8월에는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하는 계기가 된 통킹만 사건이 있었다. 북베트남 해군이 미 해군 구축함을 공격함으로써 두 차례 교전이 있었다. 훗날 기자가 입수한 기밀해제된 미국 안전국《펜타곤 페이퍼》에 의하면 이 사건은 조작이었다. 베트남 내전에 미국이 개입함으로써 전쟁은 더 오래, 더 참혹하게 진행되었다. 저 멀리 베트남에서 이뤄진 일을 미국인들은 알기는 할까. 목적을 위해 사건을 조작하는 일이 벌어지는 건 시대와 조국을 막론하고 마구잡이로 벌어지는 일이다.

  적어도 아무 일이 없던 해일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느낄 수는 있다. 개인의 삶에서 거시적인 사건들은 나와 무관한 일로 되어 버리기 일쑤다. 어쩜 그러한 사건들이 개개인의 삶 속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그것보다는 내 삶을 몰아치는 더 중요한 일이 따로 있다 여긴다. 하지만 저렇게 조작을 일삼는 국가에서, 그곳에서 한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비극적 삶의 원초이진 않을까, 내 삶을 몰아치는 테두리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든 1964년의 여름이 지나고 겨울. 24세의 아일린은 이런 사건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무수한 거짓말과 조작이 일어나고 있는 것만 같은 삶을. 그렇다면 먼 훗날, 그 삶을 돌아보았을 때 아일린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삶들은 아일린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무엇이 자기 아버지를 죽이게 하는 걸까요?”

   나는 비슷한 의문을 품고 몇 년 동안이나 마음속으로 논쟁을 벌여왔다. “죽이는 게,” 나는 대답했다.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어야겠죠.”

   “유일한 의지처, 맞아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건,” 그녀가 말을 이었다. “왜 어머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마약과 알콜 중독인 부모 아래 학대받으며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언제나 아일린과 같아 보이기도 한다. 마음속에 분노가 가득하며 또한 패배적인 기운을 한가득 담고 있는, 그런 모습 말이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총기사고로 경찰관을 은퇴한 뒤 알콜중독 상태에 있는 아버지를 벗어나고픈 아일린에겐 직장인 교정시설 역시 행복한 장소가 아니다. 사교적이지 못한 외톨이로서 자기혐오와 연민 속에 있는 아일린에게 행복한 장소가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아일린은 아버지에게서 직장에게서 벗어나고파 한다. 교정시설 동료 랜디에게 품는 짝사랑으로 스토킹을 일삼기도 하고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아일린의 스물 네 살에 어떤 점화가 있어야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나는 비쩍 마르고 각진 몸매에 움직임은 모나고 쭈뼛쭈뼛했으며 자세는 경직되어 있었다. 말랑하고 부글거리는 여드름 자국이 가득한 내 얼굴의 지형은 차갑고 생기 없는 뉴잉글랜드적 외피 아래에 있을 수도 있는 기쁨 혹은 광기를 흐릿하게 지웠다. 안경을 썼다면 똑똑해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진짜로 똑똑하기엔 참을성이 너무 없었지만.


나는 정말이지 지루하고 생기 없고 무엇에든 면역된 가식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항상 격분했고 부글부글 끓었으며 내달리는 생각과 살인자 같은 정신으로 살았다.


  74세가 된 아일린이 24세의 아일린의 삶을 회고하는 것임을 아는 지점에서도 아일린의 목소리는 어른의 것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시작부터 아이의 톤으로 느껴지는데 끝날 때까지 그렇다. 감정적이고 자기혐오와 연민, 파괴적이고 망상에 찬 목소리다. 하지만 그것은 아일린의 머릿속에서 존재할 뿐 실제 아일린의 ‘목소리’로 이뤄지진 않는다. 크리스마스가 속한 일주일, 그 기간 벌어진 일들은 아일린의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벗어나 입 밖으로 밀어 내게 한다. 새로 부임한 교도국장 리베카의 등장. 우아하고 매력적인 리베카에게 반해버린 아일린의 랜디에 대한 짝사랑이 리베카에게로 옮겨가게 된다. 또한 리베카 역시도 아일린을 바라본다.


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법, 더욱이 자신을 변호하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차라리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분개하는 편이 나았다. 어렸을 때도 말없는 아이였고, 앞니가 돌출될 정도로 오래 엄지손가락을 빠는 그런 유형이었다.


  아일린은 서두에서 이 글은 자신이 어떻게 ‘사라졌는가’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사라진다는 건 말 그대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보스턴 그 시골마을에서 아일린은 이미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사랑받지도 존중받지도 못한 아이가 갖는 자기혐오는 성인이 되어서도 그대로다. 그런 이들은 타인에게서 사랑받게 될 때 언제든 맹목적이게 된다. 아일린은 리베카와 함께 하며 행복감을 느낀다. 인생이 근사하다고 느낀다. 적어도 더 이상 외롭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꿈꿀 수 있는 때였다. 그때에는.


“하느님은 지어낸 이야기야.” 어머니는 우리에게 말했다. “산타클로스처럼 말이야. 아무도 너희가 혼자 있을 때 지켜보지 않아. 뭐가 옳은지 그런지는 직접 판단해라. 착한 소녀들을 위한 상이란 없단다. 뭔가 원하면 싸워서 얻어내. 바보가 되지 말고.”


  바보가 되는 일은 쉽다. 어딘가에 매몰되어 버리면, 누군가에 맹목적이게 되면 그렇게 된다. 끝없이 스스로에게 움츠려들면 그렇게 된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찾으려 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 층격적인 사건을 보고도 겪고도 그것이 충격인지 아닌지 모르면 그렇게 된다. 세상은 언제나 뒤통수 칠 준비를 마치고 있다. 세상은 언제나 조작과 음모를 예비해 놓고 있다. 착할수록 조작과 음모에 휘말려들기 참으로 쉬운 세상이다. 진정 사라지고 싶다면 아일린은 더 이상 애같은 투정과 언어로 자신을 이야기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스물넷 아일린이 갇혀 있는 내면의 아이는 사라져야 한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은 이렇다. 아름다운 곳에서 산다. 아름다운 침대에서 잔다. 아름다운 음식을 먹는다. 아름다운 곳들을 따라 산책한다. 사람들을 마음 깊이 좋아한다. 밤에 내 침대는 사랑으로 가득하다. 그 위에 나 혼자 누워 있으므로. 고통이나 기쁨으로 쉽게 울며 그걸로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않는다. 아침이면 밖으로 나가 또 하루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이런 삶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바보같이 맹목적이며 자기혐오로 똘똘 뭉친 그런 아일린이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사라지는’ 방법을 찾은 이야기, 아일린은 그런 이야기가 되려나. ‘거의 모든 것을 혐오하고 항상 너무나 불행하고 화가 나 있던’ 아일린의 오십년 후는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가득하다.’ 불완전하고 미성숙했던 한 사람의 생애가 온전히 안정을 찾으려면 그토록 많은 세월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내 삶을 위하여 언제든 스스로 ‘사라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리베카는 아일린에게 전환점이 되어 준 사람이다. 리베카는 아일린을 자신이 엮어 놓은 사건에 휘말리게 이끌었지만 결국 아일린은 그 사건을 자기중심으로 가져온다. 시작부터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질 것임을 암시하던 이야기는 사건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사건 이후로 아일린은 더 이상 아일린이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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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노래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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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기 없는 욕망

달콤한 노래, 레일라 슬리마니, arte(아르테), 2017.


  사람들마다의 인생에는 사연이 있다. 삶의 이야기, 스토리. 어떤 경우엔 그 이야기에 공감하고 이해하고 마음을 주게 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타인의 삶을 온전히 알 수 없고 그러므로 그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안다고 하는 것 또한 순간이고 일부이다.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누가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의 생애는 이해 쪽으로 쏠리기도 한다. 이것이 가지는 힘, 그럼으로써 드러날 수밖에 없는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루이즈의 생애를 생각을 복구하는 이 소설의 시작과 결말이 다른 방식이었다면 어떤 감정을 얻었을까. 루이즈가 이미 범죄자임을 제시하며 나아가는 이 소설은 오로지 ‘이유’를 ‘동기’를 궁금해하기에 결말에 이르러 궁금함이 해소됨과 더불어 답답함이 따른다. 시간적으로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 가장 마지막인데도 그건 소설의 시작에서 나온 것처럼 가장 먼 일이었던 것처럼 여겨지게 만든다. 루이즈의 상황과 감정들이 나오고 그에 따른 결과가 나왔다면 이 소설에서 갖게 되는 감정은 또 어떤 형태가 되었을까. 달콤한 노래,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든 제일 먼저의 생각이다.

  “아기가 죽었다, 단 몇 초 만에.”라는 충격적인 서술로 시작되어 몇 페이지가 넘어가기도 전에 두 아이의 죽음과 한 사람의 죽음이 드러난다. 두 아이는 보모인 루이즈에 의해 죽었다. 두 아이에게 왜 보모가 필요했는지, 루이즈눈 어떻게 보모가 되었는지, 루이즈가 두 아이에게 부모에게 만족스러운 보모였는지를 소설은 이야기한다.

  직장과 양육 사이에서 힘겨워하는 모든 여성들처럼 미리암도 힘겨워한다. 엄마로서 가져야 할 완벽한 모성, 그것을 따라가기 위해 ‘미리암’으로서의 정체성을 탈진해버린 미리암. 마침내 보모 루이즈를 고용하고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얻는 마음의 편안함과 안정감, 그러나 점점 루이즈가 집안에서 중요하게 차지하는 역할과 행동 하나하나에서 느끼는 불편함과 기묘함이 매우 공감되게 그려진다.


그녀는 자신의 성공과 자유에 아이들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한사코 거부했다. 익사자의 머리를 바닷물 아래로 끌고 내려가 진흙 속에 처박는 닻 같은 존재. 처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그녀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런 생각은 옳지 않았고 정말 절망적이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느낌, 무엇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는 느낌, 다른 것을 위해 삶의 한 부분을 희생한다는 느낌을 늘 떨쳐버릴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적인 엄마가 되려는 꿈을 포기 못하고 버티다가 일을 키운 것이었다. 모든 게 가능하다, 모든 목표에 도달할 것이다. 성질이 날카로워지지도 않고 탈진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고 끝끝내 생각하다가. 순교자 행세도 슈퍼우먼 행세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집하다가.


  두 아이의 아버지 폴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아버지로서의 역할과 자유로운 자기 인생을 누리고픈 마음 사이의 갈등과 고뇌가 드러난다. 이러한 두 부부의 구세주가 된 루이즈는 욕망한다. 그들 가족의 삶에 들어가 생활한 뒤로 자신이 그들에게 속하기를, 그들과 계속 함께 하기를. 루이즈에게도 아이가 있다. 남편이 있었다. 그러나 남편은 빚만 지워주고 떠났고 딸은 가출하여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민자로서의 루이즈는 보모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결코 행복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미리암은 루이즈와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머리에 스쳐가는 어떤 생각, 잔인하지는 않지만 부끄러운 그런 생각을 엠마에게 절대 털어놓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서로가 서로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때에만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우리 자신만의 삶, 우리 자신에게 속한 삶, 다른 이들과 상관없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우리가 자유로울 때에만.


  소설을 읽었을 때는 영화 기생충이 막 개봉한 때라서 자연스레 영화 기생충이 떠올랐다. 타인의 삶을 욕망하는 자아에 대해, 철저하게 현실을 인식시키게 만드는 계급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건강하고 올바른 욕망이 무엇인지, 계급적 소외가 만들어낼 수 있는 사건이란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래서,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였기에 벌인 사건이라 이름붙일 수 있을까. 두 아이의 죽음을.

  욕망에 따라 인식하고 그 인식에 따라 행동하는 루이즈의 모습들을 보고 있는 것은 놀랍다. 전혀 달콤하지 않은 노래를 루이즈는 끝없이 부르고 있다. 소설은 루이즈의 이러한 기괴한 욕망에 따른 결론을 격앙되지 않은 문체로 서술한다. 그래서 루이즈의 욕망조차도 핏기 가득하기 보다 검은 빛이 맴돈다. 지극히 건조하고 방관적인 문체. 그런 형상으로 사고하면서 욕망을 할 수 있구나 싶었다. 그동안 욕망이란 단어에 색을 부여한다면 지나치게 강렬한 원색을 입혔던 탓이다. 루이즈의 욕망은 색이 모두 빠져 빛바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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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힐
팸 스마이 지음, 고정아 옮김 / 밝은미래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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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그림


손힐, 팸 스마이, 밝은미래, 2018.


  제법 묵직한 책을 펼치면 까만 책장들이 연이어 이어진다. 일러스트가 가미된 책이다. 손힐의 세상은 그림과 일기로 이야기를 펼친다. 일기를 읽다가 그림을 보면 그림과 일기의 내용이 살짝 어긋난다. 등장인물도, 내용도. 곧 접점 지점을 만난다. 그러면 알게 된다. 일기와 그림은 각각 1982년과 2017년의 세상에서 살아가던 소녀의 시선을 담고 있다는 것을.

  그림은, 세상은, 온통 블랙이다. 그림에서 커다랗게 차지하고 있는 어쩌면 저택이라 불러도 될 집, 낡고 부서질 듯한 폐가의 이름이 손힐이다. 정식명칭은 손힐 복지원으로 여자 아이를 위한 보육원이다. 이곳에서 살았던 1982년의 메리는 친구를 원한다. 하지만 메리에겐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다. 그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보육원이 아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괴롭힘 당한다. 특히, 그 애가 있을 때면 더더욱.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가 손힐로 되돌아왔을 때 그리하여 메리가 가지는 공포와 두려움은 커져간다. 하지만 그 애에게 받은 고통보다 더 사랑받고 이해받고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컸을까. 메리는 친구가 되자는 그 애의 말을 믿는다. 믿는다. 그러나 괴롭힘은 여전하다. 아니, 더욱 심해져간다. 


그들이 소리를 지르며 웃을 때 나는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머리를 바닥에 찧었고 뺨에서 피가 났다. 일어나 앉으려고 했더니 손과 발뒤꿈치에 뾰족한 유리 조각이 느껴졌다. 내 밑에 깔린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차갑고 끈끈하고 많았다.

“정말로 우리가 너하고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메리는 방안에 틀어박혀 인형을 만든다. 그렇게 메리는 외로움과 고통을 달랜다. 보육원의 교사들, 아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직원들도 더 이상 메리에게, 보육원에 신경 쓰지 않는데다가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모두 손힐을 떠나야 한다. 이곳밖에 머물 곳이 없는 아이들에게, 아무도 손힐에서 살아온 아이들에 대해 관심두지 않는다. 메리도 떠나야 한다. 고통스런 그곳을.

  창너머 보이는 손힐, 2017년의 엘라는 그곳에 어른거리는 메리의 존재를 느낀다. 낯선 동네로 이사온 엘라는 언제나 외로이 지낸다. 폐허가 되어 출입금지 푯말이 붙여진 그곳에 찾아들어가고 메리의 일기를 읽는다. 엘라는 엄마와 이별한 상태고 아빠는 언제나 바빠 엘라에게 메모로만 존재하는 대상이다.

  보육원이 부모가 부재한 아이들이 기거하는 곳이라면 엘라 역시 보육원에 있지 않지만 부모가 부재한 상황에 놓여 있다. 부모의 돌봄을 필요로 하고 또래 친구들과 함께 하고픈 욕구를 가진 두 아이, 메리와 엘라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 걸까.

  “나는 다만 친구를 원했을 뿐이다.”

  메리의 일기장 속 한 줄이 가진 무게. 그림으로 그려지는 손힐의 풍경은 쓸쓸하다 못해 무섭다. 35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있지만 1980년대와 2010년대가 전혀 다르지 않은 풍경. 하루에도 수십 건의 또래에 대한 왕따를 넘어선 착취와 폭력 사건들이 일어난다. 하루에도 수십 건 부모는 제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무엇에 그렇게 눌려서인지 아이들은 서로를 그렇게 미워하고 공격하고 어른들은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간다. 그것이 아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환경이다. 그렇기에 창문 너머로 손힐을 쳐다보는 아이, 그런 아이가 있다는 건 여전히 그런 세상이라는 이야기이고 아마도 그림은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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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가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지현 옮김 / 민음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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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적 그로테스크

흉가, 조이스 캐롤 오츠, 민음사, 2018.


  원제는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가 여기 담겨 있다.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형태의 이 그로테스크함은 점점 물리학적인 시간과 공간을 연결시켜 전개된다. 공포란 눈에 보이는 시각적 자극의 반응이기도 하지만 그건 심리적인 반응이기도 하다.

  표제작인 <흉가>는 자매같은 두 아이의 흉가체험에 관한 이야기다. 어린 시절엔 왜 그다지도 무서워하면서도 흉가에서 나올 유령을, 그 음침하고 비밀스러운 기운들을 경험하고파 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흉가란 유령보다는 부랑꾼이 모이는 장소라는 것을 늘 잊고 만다.  어릴적 흉가를 찾는 행동들은 그렇게 하고픈 마음은 단지 옛날 옛날의 이야기만일까. 공포와 스릴러를 탐닉하는 것 또한 흉가를 돌아다니고픈 마음과 같은 것이라 본다. 흉가가 간직한 사연들, 그 이야기들은 오래도록 자리잡아 현재를 잠식한다. 어쩌면 미래까지도. 

    

옛날 옛날에라는 말과 함께 동화는 시작된다. 그런데 동화가 끝나고 나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뜻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단지 우리가 들은 이야기와 그 말들이 암시하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흉가」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라는 소제목이 어울린다. 심장을 뜯어내는 듯한 공포보다는 익숙한 이야기가 변형되어 기괴하다. 피와 폭력을 세부적으로 묘사하고 그것을 중점으로 하기보다는 그것에 이르기까지의 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다. 무섭다보다는 괴랄과 흉측 등등 딱히 꼬집어 말하지 못할 감정을 갖게 된다. 단 하나, 강렬하게 내비치는 피의 이미지가 있는데 그건 생리혈이다. 소설에서 공포,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는 등장인물은 “미혼모, 유린당한 처녀, 불명예와 연민과 수치를 짊어진 여자” 들이다. 그렇기에 종종 불안의 전조 단계로서 비치는 강한 생리혈이 소설속에 잔뜩 깔린다. 남자에게 혹은 아버지에게 맞은 아내와 아이의 피가 아니라 여성들 자신의 필연적인 신체적 특징으로서의 피. 그 비릿한 피는 불안과 폭력과 욕망의 전주처럼만 들린다. 또는 그런 것들이 오로지 ‘여성’의 것임을 보여주는 것도 같다.


신세 망친 여자, 망가진 여자, 모욕당한 여자, 타락한 여자, 돌이킬 수 없이 ‘여자’가 되어 버린 여자.

제셀은 이 시간과 공간에 있는 모든 처녀는 “히스테리 기질”이 있다고, 특히 장로교회 가정교사라면 누구보다도 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쏘아붙인다. 만약 그녀가 운 좋게 남자로 태어났다면, 그런 처량한 동물들은 전염병 보듯이 피했으리라고. -「블라이 저택의 저주받은 거주자들」


  그렇다. 마치 이 세상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블라이 저택이고 여성들은 저주받은 거주자들인 것처럼 비극적 상황의 주인공이 된다. 공포와 불안 심리는 여성만의 지극히도 ‘감정적’인 ‘비이성적’ ‘몰이성적’인 것처럼 반응하는 남성들이 있고 그들은 그런 여성을 혐오한다. 기껏해야 생리시 갖는 히스테리, 여성의 본질적인 성격적 결함으로 인식한다. 공포와 불안을 일으키는 ‘가해자’이자 ‘포식자’로서의 그들은 여성들의 생리혈에 대해, 꿈으로까지 나타나 죄어오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어서는 폭력의 공포를 알 리 없다. 심지어 그 폭력은 시공간을 넘어서까지 쫓아온다. 이런 불안들을 떨쳐내기 위해서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나. ‘내가 과연 자격이 있나?’ 이런 죄책감에서 거듭 벗어나기 위한 노력들에 기껏 “나를 못 믿는 거예요? 응?”이라 말하는, “중요하지 않은”일로 치부되며 “남성적인 짜증을 부리는 태도”일 수밖에 없는 그들이 알 리가 있을까.

  조이스 캐롤 오츠는 SF와 페미니즘의 세계를 잘 그리는 작가다.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가 그리는 이야기는 매우 고전적으로 느껴지는데 ‘고딕 호러’의 대표적 작가로 알려져 있다. SF의 세계가 이 소설집에서도 상당히 등장하는데 물리적인 이론들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속에서 그런 이론을 내세우는 이들은 모두 남성들이다. 그 이론적 세계를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지만 그 물리적 틀을 바탕으로 폭력당하는 직접적 체현이 여성현실이다.

  적어도 이 책이 단편집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감흥은 달라졌을 것이다. 이야기의 연결고리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진도는 더디고 답답했다. 소설 중반부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작품의 소재와 스토리와 구성이 왜 이럴까를 찾아보아야 할 정도로 이해되지 않아 힘들었는데 뒷장 작품 지면수록을 보고 다른 연도에 쓴 작품들을 묶은 소설집임을 알았을 때의 허망함이란. 거듭 찾아보았는데도 왜 굳이 장편으로 여겨졌는지 생각해보면 책의 정보를 미리 알지 않으려는 이유와 목차 구성 때문이었다. 단편이라면 굳이 4부로 나눌 필요가 있었을까. 단독 스토리임을 그대로 나타냈으면 될 것을 굳이 연결성이 없는데 4부라 나눈 편집에서 끝까지 장편이라 여기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연도별, 주제별, 소재별, 다른 스토리를 이렇게 묶은 의도가 있을까. 작가의 의도는 아닌듯하다. 각각의 단편들은 서로 다른 잡지에 다른 연도에 출간되었다. 다양한 발표지에 수록된 것을 한번에 읽는 독자로서는 매우 기쁘지만 묶음의 이 카테고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주제와 형식적인 면을 따진다고 해도 분류의 이유와 목적이 수긍되지 않는다. 공포와 스릴의 순간이 얼마나 자주 깨져버렸는지를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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