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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노래 푸른도서관 30
배봉기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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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이 석상은 누워 있어야 했다


사라지지 않는 노래, 배봉기, 푸른책들, 2009.


  오래도록 이스터 섬 모아이 석상은 미스터리였다. 다양한 연구와 가설이 모아이 석상을 신비화 하는데 기여했다. 2019년 새해가 되어 또 하나 추가되었다. 미국 뉴욕주립대 빙엄턴대 연구팀은 플로스원(PLOS ONE) 최신호에 모아이 석상은 마실 수 있는 물의 위치를 표시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스터 섬에 수백개의 모아이 석상이 존재하는데 대체로 석상은 민물(fresh water)이 가까운 위치에서 발견되었고 물이 없는 지역에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연구팀도 전적으로 식수위치가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111601007&wlog_tag3=daum]


  모아이 석상은 거대한 높이와 무게로 왜 만들었는지, 어떻게 만들었는지, 어떻게 이동시켰는지에 관한 궁금증은 지속되었고 지금까지 조상숭배, 종교의식, 부족간 세력형성을 이유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또한 이스터 섬의 황폐화, 몰락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모아이 석상 운반을 이유로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나무를 베어 내면서 바다로 나갈 카누를 만들 나무도 없을 만큼 섬의 자원이 급격히 고갈되었고 살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 섬은 식인 풍습이 있었고 석시 시대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다.

  이스터 섬은 태평양 남동부 칠레령으로 칠레로부터 3,500km나 떨어진 섬이다. 바다로 나가지 못한 채 침입하는 이민족에 대처해야 했던 이스터 섬 사람들. 아니 그들 자신의 명칭으로 라파 누이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인지는 모아이 석상보다도 궁금해진다. 전해지기를 처음 정착한 이들은 단이족(短耳族)이었다. 히바 섬에 살던 이들은 장이족(長耳族)과의 전쟁에서 패해 섬으로 왔지만 또다시 장이족의 침략을 받고 패함으로써 장이족의 석상 만드는데 동원되었다 한다. 장이족의 식인 풍습으로 아이들을 잡아먹었고 이것을 참지 못한 단이족이 전쟁을 일으켜 장이족을 몰아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전설에 의하면 모아이 석상이 장이족처럼 커다란 얼굴, 길다란 귀를 가지고 있음이 설명된다.

  이런 전설과 남아 있는 자료를 토대로 한 사실들에 상상력을 더하여 만든 이야기, 그것이 이 책 『사라지지 않는 노래』이다. 어찌 보면 이야기의 골계는 익숙하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순수한 원주민의 땅에 이방인이 침략하여 약탈하는 이야기. 이 세상 어느 터전이든 식민지를 건설하는 침입자들의 행태는 같고 그들에 대항하는 원주민들의 이야기도 같으니까.

  작가는 원주민을 ‘제비갈매기족’으로 이방인을 ‘회색늑대족’이라 명명했다. 실제 이스터 섬에는 조인상(Bird man) 조각이 많은데 라파 누이는 마케마케라 불리는 새의 머리를 하고 있는 창조의 신을 섬겼다 한다. 축제 때면 제비갈매기가 알을 낳기 위해 찾아오는 모투 누이 섬에서 제일 먼저 알을 찾아오는 이에게 조인이라 하여 1년을 왕과 같은 권위를 주었다고 하는 만큼 제비갈매기족이 이스터섬, 라파 누이를 상징하는 부족임을 알 수 있다.

  당연 전설처럼 이 두 부족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갔고 반목한다. 제비갈매기족이 나눔과 배려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회색늑대족은 투쟁과 탈취였다. 영원히 지배하고자 하는 회색늑대족은 자신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거대 석상을 만들고 제비갈매기족을 노예로 부린다. 두 부족 간의 갈등이 첨예하고 경계가 뚜렷하단 해도 사랑이란 스며든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렇게 삶은 이어진다. 그래도 혼란스러운 이들은 이들 혼혈족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존재했던 보다 평화롭던 시대에 대한 갈망은 강해지고 그들은 노래하기 시작한다. 섬의 아름다운 역사를. 노래가 가지는 강한 힘이 모두의 마음속을 적시어 가며 마침내 모든 부족이 갈등과 반목, 증오와 분노보다 더 아름다운 삶의 방법이 있음을 깨달으며 그 삶으로 회귀하고자 한다. 노예도 전쟁도 없는 삶, 차별이 없는 삶으로, 그것을 없애기 위해 같은 귀고리를 달고 석상을 세우지 않고 석상을 편히 눕히며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평화와 행복.


그리하여 섬은 하나의 부족으로 바다처럼 평화로우니

해와 달 아래에서 영원하여라!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면 좋으련만. 이것이 청소년 소설이기에 어쩌면 희망을 보여주며 행복한 결말로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이스터 섬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인 것을, 사실과 다른 결말이래도 상관없고 무한한 상상력으로 나아간다 한들 어떠랴.

  섬에는 일곱 번의 침입이 있었다. 이스터 섬에 사는 두 부족과 그들의 혼혈족들이 사랑과 평화를 알아가는 때에 침입한 일곱 번째의 이방인. 그들은 어느 부족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노예였으니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노예선에 태웠다. 평화를 원했던 마지막 족장 ‘큰 목소리’도 피하지 못하고 오클랜드 농장으로 팔려간다. 이곳에서 ‘큰 목소리’가 끊임없이 부르는 노래, 이스터 섬의 역사가 가득한 이 노래는 농장주의 아들 헨리에게로 전해진다. 헨리가 자라서 언어학자가 되었으니 이는 곧 침략자의 언어로 인해 기록된다. 그렇게 사라지지 않고 전해지는 노래, 이스터 섬의 역사.  

  처음 모아이 석상에 대해 들었을 때 막연하게 두려움을 느꼈다. 식인의 섬, 외계인이 만든 석상 등등의 이야기가 깊게 자리잡아 있었던 것인지 오래도록 무인도인 줄만 알았다. 그 이미지가 남아 있어서인지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한참 뒤였다. 새삼 이 섬에 관한 이야기를 되새기다 보니 두려움보다는 슬픔이 더 크게 자리한다. 거기에 소설이 얹은 결말은 씁쓸함과 분노를 더한다. 생각해보니 하와이 섬의 비극도 이스터섬 일곱번째 침략과도 닿아 있다. 인간 탐욕이 스스로의 자정 작용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은 탐욕의 크기가 다른 인간들에 의해 짓밟히고 마는 절망의 역사. 인간이라 부르기 역한 족속들이 존재하는 법이다. 탐욕의 인간이 기어이 승리하고 마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음은 영원한 사실적인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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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하게 평범한 가족에 대하여 - 2017년 내셔널 북 어워드 대상 수상작
로빈 벤웨이 지음, 이진경 옮김 / 상상의힘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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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바퀴로 달리는 가족


아주 특별하게 평범한 가족에 대하여, 로빈 벤웨이, 2018.


  그레이스, 마야, 호아킨. 세 아이가 펼치는 이야기에 결국 눈물 흘리고 말았다. 아주 특별하게 평범한 가족이라는 제목은 책을 읽기도 전에 예상 전개를 가늠케 한다. 이 아이들이 모두 입양아라는 것, 더욱이 청소년 문학이란 특성이 더해져 그 결말도 예상가능하다. 어쨌든 가슴 따뜻하게, 모두에게 희망이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세 아이의 시선에서 펼쳐지는 이 이야기에 뭉클 거릴 수밖에 없었다.

  친부모에게서 나와 서로 다른 가정으로 입양된 세 아이가 성장과정에서 겪는 혼란은 청소년들이 겪게 되는 일반적인 문제들을 집약시켜 놓았다. 하지만 미국이란 나라의 사회문화적 특성이 우리와는 무척이나 달라서인지 그 문제적 상황도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도 참 다르구나라고 느꼈다. 그것은 단지 청소년 문학이라는 이유이기 때문은 아닌 듯 보였다. 그런 면에서 입양에 대한 시각, 청소년들이 겪는 문제를 보는 방식이 위에서 내려보거나 사선으로 보는 우리네 문화적 특성에선 이런 소설의 분위기가 나올 수 있었을까 싶다. 제 아무리 청소년 문학이라도 말이다.

  자신이 입양아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세 아이에게 닥친 문제는 10대에 임신을 한 그레이스의 혼란과 고통에서 시작한다. 오로지 자신만이 책임지고 겪어야 하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 그 상황에서 또래들로부터의 비난은 여자아이 그레이스에게만 집중된다. 그 시간 동안 아이의 아버지란 존재는 없다. 책임을 지지도 같이 비난을 받지도 않는 존재다. 자신의 아이를 자신처럼 제 손으로 입양시키는 결정을 해야만 했던 그레이스에게 생모에 대한 그리움과 궁금증은 필연적이었을 게다. 그렇게 자신의 혈연들이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레이스는 형제들에게 메일을 띄운다.

  마야는 제 언니에게 온 메일을 받으며 동생이라는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 의지할 수 있는 언니의 존재를 기뻐한다. 자신이 입양된 이후로 생긴 동생은 가족사진 속에서 자신을 뚜렷이 ‘다른’ 존재, ‘이방인’이라 느끼게 하는 존재다. 그럼에도 입양아에 대한 책자를 보며 자신을 어떻게 잘 키울까를 고민하는 부모님은 동성애자인 마야의 성향 또한 이해하고 수용하며 언제나 마야를 지지해주는 존재인데 이혼을 진행 중인데다 엄마는 알콜중독 증상까지 있다.

  세 아이의 맏이인 호아킨은 여러 번 위탁가정을 전전했다. 현재 위탁 가정의 부모가 자신을 입양하려 하지만 위탁 가정에서 겪은 폭력, 파양 그리고 불운한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로 자신을 좋아하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서 자꾸 멀어지려 한다. 그렇게 마음을 닫아 둔 채 자신의 역사가 없다는 사실에, 자신의 성장 과정의 사진이 하나도 없다는 그런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스물이 되지 않는 아이들의 삶이 각자 처한 환경에 얼마나 영향을 받고 있는지 보게 된다. 그런 세 아이는 오랜 세월 한번도 만나지 않았지만 엄마가 같다는 이유로 모여 조금씩 조금씩 그들의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을 공유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흐르고 엮이는 마음들이 무척 예뻐서 세 아이에 대한 응원이 넘쳐 오른다. 각자의 성장 속에서 상처받고 고뇌하며,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들 부모, 양육자와의 관계 그리고 서로의 존재가 어떻게 영향을 미치며 내면의 변화를 일으켜주는지가 섬세하게 그려진다.


 “크리스마스에 모두가 자전거를 받았어요. 위탁아이들도요. 정말 큰 선물이었어요. 제 것은 두 바퀴 자전거였고, 전 어떻게 탈지를 몰랐어요. 그래서 위탁아빠가 보조바퀴를 자전거에 달아 줬어요. 그리고 저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어요. 넘어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보조바퀴들이 절 멈출 수 있게 해 주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자전거 타기를 배웠어요. 그래도 전 보조바퀴를 떼지 못하게 했어요. 왜냐하면 그 느낌이 좋았거든요. 알겠어요? 보조바퀴가 절 언제나 잡아 줬어요. 그게 제가 그레이스와 마야에게서 느낀 것과 비슷해요. 넘어지려고 할 때 넘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걔들이 함께 있었거든요.”


  어떨 땐 입양가족들에 대해 ‘특별하다’ 말하고 어떨 땐 ‘평범하다’ 말한다. 그것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특별과 평범이란 말이 가지는 의미는 같은 것처럼 여겨진다. 생물학적인 관계에 연연하는 한국문화, 그럼에도 ‘입양’은 잘 하는, 다시 말해 다른 가족으로 내 아이를 보내는 일은 국가가 나서서도 잘하는 이 나라에서 입양가족은 다른, 아니 ‘틀린‘ 가족이 될 것이고 입양이 자연스러운 다른 나라에선 가족구성이란 이름으로 평범할 뿐. 물론 개인의 성향이 가장 중요하게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되겠지만, 이런 포용력은 개인의 성향을 아우르는 사회문화도 바탕에 있을 것이다.

  이 책 속 세 아이의 부모들은 보통의 부모와 다르지 않다. 내 아이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고 다투고 싸우고 사랑하고 헤매고 그렇고 그런. 어른만 아이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이 여러 가족의 이야기에서 아이와 부모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음을 알 수 있다. 그건 사실 입양가족의 특징이 아니라 모든 가정의 특징이다. 특별히 입양가족이니까 어떠할 것이다라는 생각들, 그것이 특별과 평범을 가르는 기준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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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주 - 우연이라 하기엔 운명에 가까운 이야기, 2018년 뉴베리 대상 수상작
에린 엔트라다 켈리 지음, 이원경 옮김 / 밝은미래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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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한 살의 우주

안녕, 우주-우연이라 하기엔 운명에 가까운 이야기, 에린 엔트라다 켈리, 2018.


  책을 읽으면서 우주로 날아가 버렸다. 나의 열한살은 어떠했더라, 과거에 잠기어 있다보니 아이들의 이야기를 자꾸 놓쳤다. 다시 책장으로 눈을 돌려 커다란 활자의 책장을 술렁 넘겼지만 내 머릿속은 책속 아이들의 세상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그 시절과 지금 이 시절의 어디를 헤매며 무한 글자를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라도 사람들의 삶은 다르지 않고 반복되어 간다. 아이들의 세상에서도 어른들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왕따가 있고 고독이 있다.  


할 일이 무궁무궁해.

친구가 많을 필요는 없어.

친구 따위 없어도 상관없잖아.

나만 있으면 돼. 그렇지?

혼자 노는 게 제일 좋아.

그래야 성가신 일도 적지.


  열한살을 보내고 중학교로 진학하게 될 두 아이는 깊은 고뇌를 짊어지고 있다. 소심한 아이와 잘 들리지 않아 보청기를 끼고 있는 아이. 마냥 수줍고 부끄러움 많고 소심한 아이 버질은 발렌시아에게 호감을 느끼며 친구가 되고파 한다. 하지만 여지껏 한번도 말을 걸어보지 못했다. 그의 이야기 상대는 할머니와 기니피그 걸리버이다. 발렌시아는 친구들이 느리다는 이유로, 발렌시아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는 일들이 싫다는 이유로 같이 놀지 않기로 한 이후 친구를 잃어버렸다. 홀로 자연과 대화하며 외로움을 달랜다. 그 말이 참 씁쓸하게 울린다. 모두를 괴롭히는데 탁월한 역할을 하는 쳇 블런스에게 이 두 아이도 예외가 아니다. 놀림과 괴롭힘을 받는다. 그 자신 허풍쟁이에다 겁쟁이면서.

  동화속에서 가장 아이답기도 하고 전혀 아이답지 않은 존재가 카오리와 동생 겐이다. 카오리는 어린이들을 상대로 점성술을 알려주는 어른은 절대 사절을 고수하는 열한살 점성술사다. 버질이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하는 순간, 카오리는 절대 우연이 아니라 운명처럼 이어진 버질과 발렌시아의 점괘를 예언한다. 그렇게 우연인듯 운명처럼 버질은 쳇 때문에 우물 속으로 갇혀버리고 우물 속에서 버질이 나오기까지의 여정이 시작된다.

  이 책을 연애소설화 시키면 주인공을 못살게 구는 쳇이란 악역으로 인해 운명처럼 만나게 된 버질과 발렌시아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동화를 그런 익숙한 드라마로 봐버리면 신비감이 덜해지고 만다. 어떻든 이 동화가 가지는 매력이란 운명이라는 환상성, 그것이니까. 소심한 버질이 우물 속에 갇혀 아무에게도 도움을 얻지 못할 상황에서 할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를 상상하며 그 존재와 대화하며 자신을 다독이는 일, 발렌시아의 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성자 르네에게 이야기하며 홀로 외로움과 상처를 다독이는 일을 보면, 섬세하고 여린 아이들이 누군가의 한마디 말로 인해 얼마나 헤매고 있을까 안타까워진다.


“우리 동업해야겠어.” “뭐라고?” 

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카오리가 다시 말한다. 

“우린 동업을 해야 해. 나는 영적인 세계를 알고 넌 자연의 세계를 알아. 더없이 좋은 관계잖아. 그래서 운명이 우리를 친구로 묶어준 거야.” 친구.


  하지만 그날의 사건들은 이렇게 아이들의 일상의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한걸음 내딛어간다. 점성술사 카오리가 누누이 강조하듯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의 힘으로, 전 우주가 만들어내는 신비한 마력으로. 물론 어떤 큰 사건을 겪었다고 사람이 쉬이 변하지는 않는다. 우물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어준 말을 나눠보고픈 아이 발렌시아와 만났음에도 말한마디 하지 못하는 버질의 소심함은 여전했으니까. 고마워라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헤어져 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끝끝내 쳇 블런스는 그 악당의 면모를 유지하니까.

 조용하게 웃음짓게 되는 이야기에 필리핀의 할머니가 들려주는 전통 설화가 얽이면서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장마다 각각의 아이들로 화자가 달라지는 이야기 방식은 동화속에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무엇보다 허술한듯 모든 우주의 신비를 믿는 카오리라는 점성술사의 존재가 신비로운 세상을 믿고파하는 아이의 마음 같아서 응원해주고프다.

 

새로이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 보이지. 시간의 마술이란다. 오늘 믿은 것을 내일은 믿지 못할 수도 있어. 보고 있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거든.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다른 세상이 보이는 거야.


  새벽 세 시 삼십분. 이 시간 아이들이 잠들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주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별자리도 흘러가는 조용한 그 새벽. “안녕”이라는 인사말. 누군가의 내딛음이 시작된다. 동화속에서처럼 아이들이 거칠고 힘든 세상에서도 신비함을 믿어가며 긍정의 힘을 믿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점성술사를 만나러 가고픈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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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양장)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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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죽음

마당을 나온 암탉, 황선미, 2000-12-20.


  작가가 방송에서 나오는 프로그램을 봤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소설과 영화 모두 세계 여러 나라에도 번역·상영되었다. 해외 번역과 상영의 뒷얘기에서 소설의 결말이 삭제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고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진 양 놀랐다.

  이 책 첫 출간이 2000년이니 18년된 작품이다. 청둥오리 수명이 30년이라 하니 어린 초록머리가 중년을 지나고 있을 시기다. 2000년의 아이들에 비해 2010년의 아이들은, 2018년의 아이들이 특별히 동화의 결말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진 않은데, 독일에선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동화의 고전, 인어공주의 결말도 우리는 잘 감당하며 커 왔는데…

  동화로서 이 책은 인어공주가 물거품 된 것만큼의 슬픔을 준다. 단지 결말만이 아니라 읽는 내내 단조의 느낌이다. 자연이란 것이 삶과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정해놓았더라도 수없이 생각하고 겪게 되는 생과 사, 그러니만큼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아이들에게도 일찌감치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약하지 않기도 하다. 동화를 보며 아이들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슬픔이라는 감정, 죽음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왜 그랬을까.

  이 책의 부제가 ‘꿈과 자유를 향한 여정'인 줄 몰랐다. 해외 번역본 제목도 이에 맞추었다. 그래서 ’꿈과 자유‘를 주제로 했을 때 그 결말은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폐계가 꾸는 꿈, 갇힌 공장식 닭장을 벗어나 마당으로 나가는 것에서 꿈꾸기 시작한 잎싹의 삶에서 죽음이 꿈과 자유를 이루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없건만, 실패라 할 수 없건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마침표 이후 보여주지 않는 익숙한 동화의 결말로 끝맺음하려 했던 것인가 싶어 의아하다. 아니, 그림형제의 나라 아니던가. 각종 설화와 민담을 채록하며 잔혹한 부분을 수정한 그림형제였으니 독일은 그림형제가 되어 결말을 삭제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결말이 그렇게 잔혹한 동화로 느껴졌을까.

  작가는 “길들여진 오리는 자기 알을 품지 않는다.”라는 만화에서 본 문구에서 영감을 얻어 개인적인 경험을 덧대 이 작품을 썼다고 했다. 잎싹은 길들여진 자가 자기 알을 품는 것을 보여준다. 아니, 길들여진 자가 품는 꿈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길들여져 있었기에 꿈에 다가가는 여정은 더욱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성취해가는 꿈이 얼마만한 희열을 가져다주는지를, 생을 더 아름답고 가치있게 느끼게 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때로 우리는 너무나 ‘죽음’에 대해 금기를 씌운다. 자연스럽게 그에 대해 생각하고 느낄 수 있게끔 하지 않은 채 피하고 보는. 죽음에 대해 우리는 길들여진 생각만을 갖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많은 아이들이 이 책을 읽고 잎싹의 죽음에 슬퍼하며 울었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죽음을 인식할 수 있음에도 삭제된 죽음이 그것을 방해하는 것 같아서, 길들이는 것 같아서 책의 마지막을 오래도록 다시 읽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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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캐럴의 이야기



Alice-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거울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존 테일러 (그림), 마틴 가드너, 북폴리오, 2005.


  어느 누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에 주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수많은 판본이 나오고 여러 갈래로 세계로 이야기가 번져갈지언정 그 기본적인 틀은 굳건하고 그렇기에 간단하게 보이니까 말이다.

  주석달린 앨리스를 보면서 일찌감치 다층적인 말재간을 부리는 앨리스의 세계가 더욱 확장되었다. 그 시대의 배경에서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작가의 생각, 표현의 의미를 더 알게 되니까 말이다. 모자장수와 삼월 토끼는 영국의 양대 정당을 가리키고 겨울잠쥐는 국민을 상징하는 것처럼 이 이야기는 온갖 정치 풍자가 가득하다는 것도. 특히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에 의의를 둔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그 심오한 수학적 계산의 형태는 그냥 이야기로만 흘리기엔 아깝고 흥미있는 요소니까 말이다. 그에 더해 어린 시절엔 이야기 자체에 관심을 가졌다면 작가에 대한 관심도 높아간다.

  직장 상사 리델 학장과의 교류는 학장의 가족과의 교류로 이어진다. 학장의 세 딸들과 함께 정원에서 뱃놀이 등을 함께 즐겼다고 하는데, 둘째 딸의 이름이 앨리스 리델이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 둘째 딸을 모델로 지어진 이야기다. 당시 세 살 꼬마라고 하는데 아이는 이 이야기를 다 이해했을까. 세 살 아이에게 자신과 함께 놀아주고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일 것은 분명하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도도새처럼 내성적이고 말더듬는, 그리하여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루이스에게는 이야기를 들려 달라 조르고 함께 즐겁게 놀 수 있는 마음 편한 아이들이 소중했음은 분명한데, 어찌 그런 소문들에 휩싸이게 됐을까.

  널리 알려진 대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아이들에게 요청받아 즉석에서 들려준 이야기다. 후에 삽화를 그려 넣어 앨리스에게 책으로 선물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 직장 상사의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다시 책으로 선물을 할 정도라면 루이스는 아동문학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뒤늦게 발견한 건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그전부터 루이스는 다양한 방면으로 재주를 드러냈다. 수학자이자 논리학자로서의 역할, 성직자, 사진가, 시인 등 예술적 감성이 가득하게 넘쳐난 수학 교수였다. 루이스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아동성애자, 롤리타 콤플렉스-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게 된 것은 유달리 아이들을 모델로 한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들을 향한 집착과도 같아 보이는 사진과 언행들이 루이스의 기록에 제법 드러나고 이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소문들이 흐르고 넘치고 그렇기에 루이스는 사진찍는 일도 그만두었다고 한다.

  루이스는 앨리스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내긴 했던 모양이다. 앨리스의 어머니가 이 편지들을 모두 불태웠고 의절하기까지 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어서인지 알 길 없다. 루이스의 일기 중 의절하던 날들의 이야기가 루이스 가족에 의해 찢겨 있었다는 점이 더욱 궁금증을 당기게 된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어떤 글이 쓰여 있었기에. 물론 루이스가 다른 소녀들과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적도 없었고 그런 소녀들에게서 불편한 이야기가 나왔던 적은 없다 한다. 루이스가 주욱 독신이었던 것 때문에도 소문이 보태진 것일까. 결국 동화 이야기보다 작가에 대한 궁금증을 더 떠올리고 있다.  

  이 책을 보다 보면 이것이 동화가 아니라 어른을 향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수없이 달린 주석들,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며 읽기란 재미있기도 하지만 그거 자체에 매몰될 때가 있다. 덧달린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흥미. 그런데 무언가 안타깝다. 루이스의 인생이 어떨지도 모르면서 그냥 고독하고 외로움에 휩싸인 느낌이 들기도 했다가 루이스에 대한 소문을 겹치면 마냥 섬뜩한 느낌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낸 루이스와 현실의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의 간극, 두 개의 자아를 가진 것만 같은 한 사람의 생애. 그리고 이상한 나라로 거울 나라로 간 앨리스의 이야기를 재밌게 즐기면 될 터인데 외적인 부분에 솔깃해지는 가운데 그 상황의 중심에 있었을 실존 인물 앨리스가 느꼈을 감정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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