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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말 걸 그랬다 


 이 엄청난 분량의 책을 쓴 저자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자료수집과 쓰는데 많은 시간

이 소요되었다고 하는데, 읽는 나 역시 그러했으므로 저자의 노고가 느껴졌다. 따지고 보면 하나하나 얼마나 공들인 것일까. 사실, 서두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부분에서 저자와는 다르게 팔레스타인에 감정이입해 탈무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저자가 그러했듯이 나는 유대와 유대인에 많은 매혹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에 관한 생각을 강하게 접어두고 탈무드의 내용으로 보고자하며 책을 읽었다. 쉽지 않더라는 것이 함정이었다. 관점이나 감정을 어디에 두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꼈다.


p69 인류 역사에서 유대인은 제국을 세우지도, 대성전을 짓지도 않았다. 다만 그들은 모든 에너지를 인간성 연구에 쏟았다.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예지 습득에 힘써 왔다. 그것은 인내와 더불어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로부터 받은 또 하나의 선물이었다.


p103~104 수천 년에 걸쳐서 기록된 인간의 행동양식, 사고방식, 반응, 기쁨이나 슬픔, 고난, 성공이라는 것을 배움으로써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라는 전체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인간의 능력이나 가능성이나 한도를 알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여러 나라로 흩어진 유랑인이 되어도 힘을 잃지 않고 늘 새로운 힘을 유지한 것은 오로지 유대인이 성서를 마음의 지주로 삼고 탈무드를 지력의 지주로 삼아서 배워왔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익숙하게 들어 와 유대인을 남다르게 여겨 온 것이 바로 위와 같은 유대인의 상황일 것이다. 이 상황 속에서 영향력있는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는 것, 그것에 ‘탈무드’가 있다는 것이 유대인 정신과 탈무드를 뛰어난 경전으로 받들게 하는 요인이라는 걸, 그래서 탈무드가 신비로워 보일 것이라는 것. 어릴 땐, 랍비가 들려주는 우화의 이야기들을 접해서 조금은 그런 적도 있다. 우화는 항상 그러니까. 하지만, 성인이 되고 보다 방대한 탈무드를 접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을 보고, 세계사를 조금 알고 세계경제를 조금 알고, 권력과 자본을 조금 알고, 그렇게 조금 알다 보니 내 세계가 너무 좁은 건가.

  세상 모든 나라들에서 자기들 나라 특유의 ‘탈무드’를 가지고 있다.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원리와 원칙이 그 안에 담겨 있을 것이다. 다만, 유대인들이 그것을 보다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아닐까. 하지만, 읽다보면 탈무드는 도덕윤리와 가치보다 어째 ‘성공'철학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지.

  솔로몬 탈무드는 크게 총 15장으로 구성된다. 전체적으로 유대인과 랍비, 탈무드에 대한 소개가 1장과 2장에서 제시된다. 3장과 4장은 유대인의 경제적인 부분인 돈과 그에 따른 철학을 살펴본다. 5장과 6장은 유대인의 발상과 유대인의 정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7장은 유대인의 세상살이, 8장은 유대인의 교육에 대해 말하고 있다. 9장에서 14장까지는 탈무드 우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9장과 10장은 각각 유대인의 예지와 지혜에 대한 우화를 11장은 걱정하지 말아라, 12장은 뿌린 대로 거두리라, 13장은 행복을 만드는 유대 사고방식, 14장은 불멸의 영원한 가르침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제목에 맞는 우화들을 엮어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15장은 토라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솔로몬 탈무드는 1장에서 8장, 15장은 저자가 탈무드와 유대인에 대해서 서술식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9장부터 10장은 우화들을 엮어 놓고 있다.

  각 장마다 소제목을 두고 있고 소제목에 또 다시 하위 범주의 제목을 두어 내용을 전개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을 보다 보면 저자가 한 단락 정도의 내용에도 소제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단락의 내용을 나타내는 핵심의미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와 같이 핵심의미를 단락마다 마다 제시하고 있어 내용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요점을 파악하게끔 해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로 인해 전체적으로 복잡하고 산만한 느낌이 들게 한다. 탈무드의 우화들이 각각이 제목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형태가 전체적으로 제시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탈무드에 대해 지금까지 알아왔던 것이 우화이다 보니, 자연스레 다양한 랍비들의 이야기, 우화부분을 재미있게 읽었다. 어릴 적 보았던 우화들도 있고 처음 접하는 우화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각각의 우화에 대해 나름의 결론과 해석은 나의 몫이기에 내가 부여한 우화의 해석을 쫓으며 즐겼다. 비교적 인상깊게 남았던 부분은 유대인의 경영원칙인 78:22의 법칙에 대한 설명이다. 유대인들의 부자철학은 유대인의 특성을 대표적으로 나타내주는 부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탈무드가 다른 나라의 그것과 차별적인 것이 바로 이 부분인 듯이 느껴지니까 더욱 그럴 것이다. 유교적인 틀에 묶인 우리나라에게 상인에게 가지는 생각이 다르기에 그 다름으로 유대인의 금전에 대한 생각들이 재미있게 읽혀지기도 했다. 원체 유대인의 경제관념을 부각하는 부분이 많다 보니 어쩌면 이것이 특징인가, 인식해서 일수도 있겠다. 이 부분은 3장이다. 3장 중 유대인의 기본 법칙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유대상술의 기본 법칙에 ‘78:22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1의 오차가 있으므로 이는 때에 따라 79:21이 되기도 하고 78.5:21.5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정사각형과 그에 내접하고 있는 원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정사각형의 면적을 100이라 한다면 그에 내접하는 원의 면적은 약 78이 되고 나머지는 22가 된다. 또 공기의 성분이 질소 78에 산소와 기타가 22인 비율로 이뤄져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람의 신체도 수분이 78, 기타 물질이 22의 비율로 이뤄져 있다. 이 ‘78:22의 법칙‘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대자연의 법칙이다.

이 법칙 위에 유대인의 상술이 성립되어 있다. 세상에는 ‘돈을 빌려주고 싶어하는 사람’과 ‘돈을 빌려쓰는 사람’이 있는데, 그 중에는 ‘빌려주고 싶어하는 사람’이 단연코 만다. 은행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돈을 빌어다가 일부 사람들에게 빌려주고 있다. 만일 ‘빌려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으면 은행은 당장 문을 닫는다. 이를 유대식으로 말하면 이 세상은 ‘빌려주고 싶다는 사람’ 78에 ‘빌려쓰고 싶어하는 사람’ 22의 비율이 성립한다. 이와 같이 돈을 ‘빌려주고 싶어하는 사람’과 ‘빌려쓰고 싶어하는 사람’ 사이에도 ‘78:22의 법칙’은 존재한다. 무슨 일이든지 성공률은 78이고 실패율은 22인 것이다. 실패율 22을 생각지 말고 나도 하면 78이 성공률 속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p249).

 

  다시 탈무드를 읽게 되면 그때는 또 다른 마음이 들게 될까. 머리가 크지 말았어야 했나. 어릴 적 아동과 청소년들이 알고 있는 그 수준의 탈무드 우화만 기억하고 있을 걸 그랬나. 탈무드를 읽는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땅을 찾은 것을 마냥 축하해 줄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탈무드에서 보라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마음을 추스르며 이 책이 조금은 정리가 되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1. 유사 내용의 카테고리 재분류

 탈무드의 내용을 보면 전체적으로 반복되는 패턴의 느낌이 든다. 그것은 유대인의 지혜를 이야기하며 유대인의 금전에 관한 탁월한 철학을 논하면서 지혜의 내용들이 금전의 내용과 연결되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많은 책의 내용이 유사한 내용을 한데 묶어 장을 통합하면 장이 줄어들어 보다 간결한 형태로 이루어질 것이다.


 

2. 제목 및 소제목 형태의 통일성

  솔로몬 탈무드는 제목이 많다. 각 장을 나누기 위해 15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각 장에서도 소제목으로 분류한데 이어 거기다가 단락단락마다 제목을 뽑아서 제시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소제목을 포함한 제목만으로도 내용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제목만으로도 많은 페이지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 제목의 형태가 전 장에 걸쳐 통일적이지 않다. 물론 특성에 따라 적절한 제목을 붙이겠지만 각 장의 제목만이라도 그 형태를 통일적으로 이어간다면 보다 더 체계적인 느낌이 들 것이다.

  아래 보는 바와 같이 어떤 장의 제목은 서술형, 의문형 종결어미 형태로 제시한다. 어떤 제목은 명사형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을 서술형태이든 의문형태이은 명사형이든 통일적인 체계로 정리한다면 제목에서 느끼는 복잡함이나 산만함이 경감될 수 있을 듯하다. 예를 들어 ‘불굴의 방패, 절대의 가치는 무엇인가’, ‘유대 부자철학은 무엇인가,’ ‘유대 역정의 발상을 찾아라’로 한다거나 간결하게 ‘유대인이해’, ‘유대정신’ 이런 형태로 말이다.

3. 책의 집필 의도 고려한 우화 삽입

  저자는 유대인과 유대인의 철학에 매혹되어 여러 탈무드를 모아 재정리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저자의 매혹이 어떤 부분이었는지 특히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무엇이었는지에 관한 논점이 점차 흐려진듯하다. 탈무드와 유대인에 대한 설명이 중심이었는지, 탈무드의 우화를 얘기하는 것이 중심이었는지 말이다. 처음 시작에서 9장까지는 우화가 설명 속에 제시되어 있다가 9장 중반부터는 우화만 제시되고 있다. 우화를 소개하고 이에 대한 설명을 하려고 했다면 조금 더 설명 부분에 우화를 삽입하여 제시하는 것이 더 좋았을 듯하다. 그리고 많은 우화들은 따로 탈무드 우화로 책을 낸다거나 아니면 솔로몬 탈무드에서 독립적인 장으로 제시하여 소제목으로 분류하여 엮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4. 탈무드 우화의 출처 제시

  솔로몬 탈무드에는 많은 우화들이 몇 장에 걸쳐 삽입되어 있다. 저자가 많은 책들을 참고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던 만큼 책 전반에 대한 참고문헌이나 자료의 출처가 명시되었으면 한다. 특히 우화들도 그 출처들이 궁금해진다. 1,000페이지 분량의 책을 저술하면서 저자의 목소리가 충분히 녹아들었겠지만 설명과 의견들을 분리하여 좀더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각주를 통해 설명을 첨가하였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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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아나기를 소명하며!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은 니체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니체가 가진 사상을 헤르메스가 되어 해석해주고 있다.  

  니체를 해석한다는 것은 니체가 천 개의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이 다양할 것이다. 니체를 해석한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의도’이고 그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가 말한 그대로를 토스하여 주는 역할이 아니라 니체가 말한 것을 두고 니체를 재창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니체의 글을 해석하고 있지만 그 많은 니체의 글들 중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 내어 그것에 대한 설명과 해석을 하고 있으니 결국 니체의 이야기가 아니라 니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저자의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이 책은 니체에 관한 해석을 담고 있는 1부와 논문 형태의 글을 추린 베버의 정치학과 차이의 정치학을 담고 있는 2부로 나뉜다. 일단 이 책의 핵심인 1부는 저자 자신이 니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정을 드러내듯 니체의 생각들을 잘 뽑아내어 전달하고 있다. 총8장으로 구성하여 1장 니체와 철학의 관계, 2장 니체의 계보학으로 도덕과 윤리의 문제, 3장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4장 니체의 근대 정치 비판을 다루고 있다. 5장과 6장은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7장은 초인 등의 니체 철학의 주요 개념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 8장은 니체 자신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니체의 저작을 토대로 말하고 있다.

  니체에 관한 총8장의 내용 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2장이다. 니체의 계보학으로 도덕과 윤리에 관한 내용이다. 이 장에서는 특히 도덕과 관련하여 강자와 약자의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다. ‘도덕’에 대해 평소 갖고 있는 생각과 맞물려 성큼성큼 다가온 부분이다.

 

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이는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의 절반일 뿐이다. 왜냐하면 삶을 속박하는 사유가 비판받아 마땅한 것처럼 사유를 속박하고 있는 삶 역시 비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삶이 구원되어야 한다면 같은 이유에서 사유 역시 구원되어야 한다. 더구나 순수한 사유의 체계가 거짓 연극에 불과한 것처럼 순수한 생이라는 것도 공상에 불과한 것이다(p49)

 

도덕학자나 도덕철학자에 대한 니체의 불만은 그들이 도덕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데에 있다(p61)

 

도덕은 자신의 행동 기준이 되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도덕은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진리보다도 훨씬 위험하다. 전쟁에 대한 공포나 공포 속에서 치러진 전쟁을 통해서 도덕은 일반성의 극대화를 요구한다. 도덕은 항상 ‘만인’을 대상으로 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 교사들의 허영심–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기꺼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고 한다.”(p63 )

 

   이 시대의 가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마냥 필요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그 자체로서 중요한 도덕에 대한 비판적 시각, 그것이 어떻게 억압이 되는지를 볼 수 있는 장이다. 그리고 또한 그동안 강자는 위험하고 약자에 대해서는 이른바 선한 것이라 대비되던 이러한 관념들이 어떻게 ‘고정’관념이 되는지를 파악한다. 도덕이 노예가 되는 개념을 살펴보는 장, 그로 인해 약자들의 논리로 강한 자를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은 깊은 생각을 던져주기도 했다.

   절판된 이 책을 찾기 위해 중고서점을 비롯하여 온-오프라인을 뒤져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당장 내 주위에선 1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변경연 사람들은 이 책들을 찾았을 텐데 소명출판사는 재판 작업의 욕구가 없을까 생각했다. 기사를 보니 소명출판사가 창립된 이후부터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이 책이라 한다. 우와, 놀랍지 않은가. 음, 역시 책이 잘 읽히더라니 생각했는데, 가장 많이 팔린 이 책의 부수는 6,000권이라고 한다.

   어떤 책으로의 인도는 철저한 전도자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렇게 절판되고 세상에 많이 퍼지지 않은 이 책으로 인도받은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확실히 니체가 이 세상에 미친 영향은 크다. 많은 이들이 니체를 ‘해석’하고 있고 다양한 니체 관련 저서들이 끊임없이 출간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정확히 ‘그것’이었다고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있을까? 심지어 니체의 초인은 히틀러의 철학 도구로 활용되기도 하였으니 어떠한 생각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읽혀지는지는 니체가 스스로 자신의 철학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시선을 따라 가다가 불편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건 ‘니 생각일 뿐이야’라거나 ‘어떻게 이것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하는 거리감을 느끼지 못할 만큼 충분히 자연스럽게 저자의 해석에 녹아들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천 개의 시선과 주름들이 있듯이 이 책도 니체에 관한 다양한 ‘관점’과 ‘해석’ 중의 하나이겠지만 니체의 입을 빌려 전하고 있는 저자의 생각들을 불편하지 않게 동조하게끔 하고 있다는 점이 일단 좋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또다른 철학자들을 중구난방으로 끌어들이고 있지 않다는 점, 핵심적인 부분들만을 추려서 개념과 철학의 전달이 간명해서 좋았다.

원저자의 책을 해석하고 있다고 하기에 니체의 글의 ‘원문’들이 많이 인용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이것은 니체에 관한 해석이란 느낌보다는 저자의 생각들을 주장하는 것이란 느낌을 더 가진 듯도 하다.

   다만, 읽고 나서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원체 니체가 써내려간 글들이 많기에 말 그대로 ‘모자라다’는 느낌의, 다른 부분도 필요하다는 점이 우선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책의 구성이 뭔가 다르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아직 어렴풋하다. 사실, 읽는 글에 대해서는 명료하게 받아들였는데 책의 구성적인 면에 대해서는 니체의 방대함 때문인지, 명료함은 덜 느꼈다. 니체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에서 구체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으로 파고들어가는 형태이든 개념을 잡고 전체적인 조망을 보는 형태이든 니체의 윤리학, 정치학, 니체의 해석학, 니체의 종교학, 니체의 자연학 등으로 그의 철학을 정리 요약하여 이해하고픈 욕구로 마치 리포트를 쓰듯이 니체의 사상과 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이런 형태로 정리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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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란트 러셀의 생애와 세 가지 열정, 서양의 지혜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 버트란트 러셀의 생애

 

    셀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자 저술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지성은 철학을 넘어 그의 저작에까지 이르러 그를 문학가에게 수상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만들어 주었다. 러셀은 1950년 권위와 개인이라는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그는 작가이기보다는 철학자이자 수학자이었던 사람이다. 아니, 윤리학, 사회학, 교육학, 역사학, 정치학, 논쟁술 등에 관한 40 여 권 이상의 책을 썼으니 대단한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1872년 영국 웨일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에서 보듯이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3rd Earl Russell은 귀족 가문,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존 러셀은 빅토리아 여왕 시절 두 번의 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러셀은 할머니 손에서 자라야 했다. 그의 부모는 일찍 사망했고 1878년에 할아버지 존 러셀도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의 할머니의 특별한 교육방침과 원칙이 러셀의 삶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삶의 원칙이 분명한 사람이었고 공교육을 거부했다고 한다. 러셀의 좌우명은 그녀의 할머니가 즐겨 외우던 출애굽기(23:2)의 성경구절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되며,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가 되었다.

   그가 할머니로부터 받은 이 영향으로 그는 사회의 부정의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했는데, 그것은 그가 98세로 사망할 때까지 이어진 할머니로부터의 가르침이었다. 러셀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하거나 아무리 큰 권력의 행위라 하여도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비판하였으며, 그것이 비판에 그치지 않고 실천적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일관성을 견지하였다. 바로 이러한 지적 정직성을 갖고 러셀은 핵무기와 베트남 전쟁을 비판하였다. 대중의 편견에 흔들리지 않고 진실을 지켜야 한다는 러셀의 태도는 이미 고대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공자도 누누이 강조한 바가 있었다.

   러셀은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실천적 지식인으로 변모해 갔다. 전쟁 중인 1916년에는 징병 반대 문건을 쓴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나 납부를 거부하여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강의권을 박탈당했고, 2년 후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6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핵무기로 인한 인류의 파멸을 막고자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조직했고, 아흔의 나이에도 시민 불복종 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러셀은 아인슈타인, T. S. 엘리엇, 디킨슨, 케인스, 화이트헤드, 조지프 콘래드, 비트겐슈타인 등 한 세기를 풍미한 위대한 사람들과 교류함으로써 20세기 지성사에서 그의 자리를 확고히 했다. 지칠 줄 모르는 지적 정열로 하루 평균 3,000단어 이상의 글을 썼고, 화이트헤드와 함께 10년에 걸쳐 『수학 원리』를 집필하는 등 수학과 철학, 사회학, 교육, 종교, 정치, 과학 분야에 걸쳐 7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생의 마지막에 출간한 자서전은 정직하고 명쾌한 문체로 자신의 인생을 놀라운 통찰로 그려 내어 오늘날까지도 자서전의 전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0년 2월 2일 밤, 98세의 나이로 웨일스에서 사망했다.

 

■ 사랑에 대한 갈망

 

   러셀은 매우 고독한 사춘기를 보냈고 몇 번의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주된 관심사가 종교와 수학이었고, 그가 자살을 하지 않은 것은 조금이라도 수학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러셀은 1890년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고 나서 1890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보다 어린 조지 에드워드 무어를 만났고 17세에는 퀘이커 교도였던 앨리스 페어살 스미스와 만났으며, 그녀의 가족과도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러셀과 앨리스는 사랑에 빠져 할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94년 12월 13일 결혼했다. 그러나 곧 그들은 1901년 파경을 맞고 1921년 이혼을 한다. 그의 어린 시절 사랑이자 아내인 앨리스와의 파경이 이유는 그가 자전거를 함께 타다가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의 장모가 잔인하게 그를 조종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후 그들이 이혼하기 전까지 별거기간 동안 러셀은 오톨린 모렐, 배우 콘스턴스 말레슨 등 여러 사람들과 열애 관계였다.

   그러나 사랑이란 무엇일까. 보통은 사랑은 이성간에 생기는 감정으로 얘기한다. 그의 인생을 지배한 사랑에 대한 갈망을 러셀은 얘기한다. 그것이 지식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순수하게 이성간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면, 정말 그런듯하다. 그의 98년의 생애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지만 그가 적어도 4번은 결혼했고 3번을 이혼했다는 것을 안다. 이십대, 사십대, 오십대를 지나 마지막 결혼은 그가 65세일 때였다. 그는 자신의 체험담을 담아 결혼과 도덕에 관한 책을 썼고, 그 책은 남녀 모두에게 억압적이지 않는 성, 사랑, 결혼의 방정식을 찾고자 노력하는 내용이다.

 

 ■ 서양의 지혜에 대하여

    

  저자인 러셀은 이 책의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철학을 해보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과거 사람들이 철학을 어떻게 해왔는가를 보여주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다”

 

   러셀은 위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그동안 철학이 전개되어 온 흐름에 따라 그 흐름을 주도한 철학자의 주장과 생애를 서술하고 있다. 간간히 철학가들이 주장하는 이론에 대해 러셀 자신의 개인적 평가를 담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처음 철학적인 질문이 제기된 것이 언제였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 누가 그것을 제기하였는지에 대해 시작하며 러셀은 철학에 관한 사유와 논증들이 변화되고 이어져 가게 되는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인간의 삶에 대한 질문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지만 특정 시대에 특정 철학사조가 나타나는 이유는 당대의 사회문화적인 상황과 연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문화적인 상황들 속에 나타나는 철학사조의 전개가 철학가들의 개인적인 특성과 관심과 맞물려 이루어나가게 되는지를 러셀의 생각을 통해서 보게 된다.

   전반적으로 시원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어서인지 어떤 장이 감동적이었다고 해야 할까. 이 책은 10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고 각 장의 내용전개는 동일한 패턴으로 흐르고 있기에 딱히 어떤 장절을 감동적이라 꼽기는 애매하다. 아마도 감동적이라 꼽는다면 특정한 철학가나, 특정한 철학사조에 대한 매력이 그 이유가 될 것이다.

어쨌든 철학의 흐름이 당대의 사회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음으로 그러한 배경을 이야기하고 철학가들의 개인의 생애에 대한 아주 약간의 이야기들을 곁들이고, 그들이 제기한 주장에 대해 자신의 논평을 곁들여 이끌어 가는 것은 그 의견에 대한 수용을 떠나 보다 흥미로울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먼저 편집에 관하여 얘기하자면, 이 책은 1990년 출간되고 현재까지 계속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판본의 변화를 주고 있지 않다. 두드러진 여백의 미는 좋아 보이긴 하지만 그로 인한 작은 글씨체나 정리되지 않고 나열된 그림의 배치가 개인적으로는 책의 가독성을 높이는데 방해가 되었다. 교과서를 읽은 지 오래 되었지만, 마치 학생들 교재용 참고서라고 할까, 그런 느낌을 받는 책이었다. 내가 서양의 지혜에 대한 지식을 좀 더 흥미롭게 얻을 수 있는 책이라는 느낌이 들 수 있는 편집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사실, 러셀에 대한 기대가 많아서 이 책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나에게 서양철학에 대한 이해를 잘 이끌어 주리라는 기대. 그는 20세기 대표적인 지성이라 불리고 무려 4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사람이다. 그러니 그의 사고나 문장들에 잔뜩 기대를 가졌다. 아마도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족도가 덜 하다는 것은. 고등학교 때 배운 국민윤리 이상의 느낌을 가지지 못한 것은 나의 이해의 부족이 크게 자리할 것이다. 그 점을 감안하고라도!

   20세기의 지성이라는 러셀의 저작에 대해 감히 어떤 문제점을 찾아내고 그에 대한 보완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러셀이 과거의 사람들이 철학을 어떻게 해왔는가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목적이라는 말이 책을 덮고 나서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책을 통해서 나는 특정한 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보다는 흘러가는 대로의 철학가들을 소개받기만 한 것이다. 아마도 부족함은 여기에서 오는 것일 게다. 좀더 깊이 있게 들어가고 싶은 부분에 대해서 더 이상 논의가 되지 않으니까 답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철학가들의 주장인 듯 러셀 자신의 주장인 듯 덧붙여진 의견에 대해서도 좀더 명확하게 분리가 되었으면 하는데 이 역시 철학가들을 명확히 알지 못하기에 정확히 분리한다거나 다른 의견을 덧대지 못한다는 점이 있었다. 이 책 한권으로는 철학이 전개되어 온 흐름에 대한 윤곽을 잡아보기는 하겠지만 러셀이 드문 드문 보태는 자기 의견에 동조가 되지 않는 점은 분명하다. 만약 흡입력이 있었다면 러셀의 주장 모두를 고개를 끄덕이며 수용하고 있지 않았을까. 철학가들의 이론을 요약하고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철학가들의 사상에 대해 부족하게 이해된 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해까지 해주도록 러셀에게 바랐다면 지나친 것일까. 다만 이 책은 보다 깊이 있게 내용을 파악하기 위한 전단계로서의 개론서의 역할에는 충분했다고 본다. 다른 철학가들과 그들의 사상에 대해 찾아 읽어보기를 재촉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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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의자 위의 노인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

 

 

 

   철학이야기는 철학사에 이름이 남은 15명의 철학자들의 사상과 그들의 생애를 기술하고 있다. 저자 스스로 “이야기”라는 제목을 달았듯이 이 책은 철학가들이 얘기하는 철학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보다는 철학가들의 생애와 그들의 철학적 주제에 이르게 되기까지의 영향과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그가 ‘이야기’라고 하게 된 이유는 이 책은 월 듀란트의 강연 원고를 기초로 제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이야기를 풀어 가는 철학자 15명,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베이컨, 스피노자, 볼테르, 칸트, 쇼펜하우어, 스펜서, 니체, 베르그송, 크로체, 러셀, 산타야나, 제임스, 듀이다. 월 듀란트는 이들 철학자들이 철학사에 영향을 준 인물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당대 철학사조와 배경을 설명하고 철학사상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하여 오랜 철학의 역사 속에 달랑 15명의 철학자들은 너무 적은 것 아닌가 생각하기 전 간간히 철학사에 이름을 내민 이들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역시 15명의 철학자들의 생애를 중심으로 그리고 그들이 저술한 책을 중심으로 각각의 철학자들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비판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월 듀란트의 문체로 철학이야기를 읽는 맛은 각 개별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철학에 대한 이해를 높여 주었다. 저자가 이렇게 적절하게 철학자들의 논리를 이어주는 것이 좋았다. 물론 철학자 개인에 대한 선호도에 따라 관심도가 달라지는 장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동일한 패턴으로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기에 특정한 장이 좋았다 말하는 것보다는 전체적으로 좋았다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특히 저자가 밝혔듯 ‘이야기’들이 좋았다. 철학자들의 생애에 대해 알지 못한 것을 따로 찾아보지 않고 소개를 해주고 있고, 특히 철학사조의 탄생과 저술과도 연계시켜 주고 있기에 나름 공감이나 이해가 더 빨랐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이 책을 저술하기까지의 노고를 어떤지를 아는 터라 이렇게 쉽고 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내용을 엮어 가는 저자에게 놀란다. 모든 장이 저자의 각고의 노력이 숨쉬고 있는 장이다. 개별 철학자들의 생애를 더욱 더 궁금하게 만들고 그들의 철학책을 읽고 싶도록 만든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되어 찾아보자라는 느낌이 아니라, 감탄과 함께 찾아보고프게 만들기에 저자에게 이 책이 많은 부와 명예를 주었던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된다.

  책을 읽어가며 서양의 지혜에 비해 편하게 읽힌다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서양의 지혜를 읽은 후 반사이익일까. 러셀의 문제일까, 월의 능력일까, 나의 문제일까. 아니면 번역의 덕일까. 하나의 책이 여러 번역가들에 의해 번역된 경우 어떤 책을 선택할 지에 대한 고민을 해결해 주는 것 중의 하나가 출판사와 번역가에 대한 것이다. 보통 여러 번역본을 비교하고 끌리는 문장에 따라 책을 선택한다. 책을 선택한 것은 아니고 주어진 것이긴 하지만, 잠시 다른 번역본을 살펴보니 이 책의 번역이 편했다. 정영목 번역가가 번역한 책들을 여러 번 읽어서인지 그의 번역체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가 하고픈 이야기는 결국, 이 책을 편하게 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월 듀란트의 이후의 삶을 경제적으로 편하게 해준 이유가 아마도 그것의 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미 많은 출간이 이루어진 책이 왜 또 번역되어 출간되는지도 알 수 있을 듯싶다. 어쩌면, 인간은 늘 수많은 철학문제를 인생에서 뗄 수 없는 모양이다. 거기서 나름 인생의 지혜와 위안을 얻는 모양이다. 좀 더 쉽고 편하게 써내려간 철학이야기가 삶에서 철학을 가까이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이 책은 월 듀란트가 성인노동자들에게 강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그는 보다 쉽고 재미있고 의미있는 내용이 전달되도록 주력하였을 것이다. 사변적인 철학보다는 이들 철학자들의 생활들에 대한 이야기로써 철학을 이야기하는 형태의 구성이 되었을 것이다. 상당히 매끄럽게 책이 읽혀지는데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아주 많은 시간 노력했기 때문이다. 각 철학자들의 철학 원전을 500번이 넘도록 읽고 이것을 집필하는데도 3년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그의 지식과 이것을 사람들과 나누고픈 그의 열정과 애정이 보다 잘 전달될 수 있었던 듯하다. 각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철학이론들이 어떠한 배경에서 나올 수 있었고, 그것이 철학가들의 삶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어 철학책을 소설책 읽듯이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라 본다.

  그러면서도 모든 철학자들의 철학사상에 대한 비판을 얻고 싶은 이 기분은 뭘까. 그렇기에 비판의 장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흥분이 된다. 그런데 월 듀란트는 몇몇 장에서 이것을 생략하고 있다. 그에게 특히 애정을 준 철학자라도 비판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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