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멸 풍경

 

  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유주환, 문학과지성사, 2014.

 

    한 해를 살아가면서 수많은 감정 스펙트럼을 경험하지만 2016년 한 해에 끝자락에 걸린 최고의 단어는 ‘자괴감’일 것이다. 그 자괴감을 아래로 내리고 오래도록 한국사회가 한국인에게 안겨준 감정은 모멸감이다. 자괴감마저도 모멸감 후에 오는 감정일 테니까. 모멸이 만연된 한국사회에서 이 책이 가져다 준 성과라면, 거듭된 모멸의 현장을 맞닥뜨리는 거랄까. 모멸은 모멸감을 낳는다. 거침없는 모멸의 현장은, 오래도록 한국사회가 그것을 당연시해왔다는 것을 반증한다. 저자는 감정이란 일정한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 형성된 마음의 습관이라 말한다. 그래서, 모멸감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모멸받지 않는 생을 위한 사회문화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까. 적어도 저자는 “감정의 행복을 도모하는 문화”를 구상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저자는 모멸감의 기본적 속성과 그 감정의 뿌리인 수치에 대해 먼저 살펴보는데 수치심이 사회통합과 자아파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욕이 바로 이 수치심의 촉발제이다. 이 모욕이 삶과 인간관계를 왜곡하고 폭력하고 있는 사례에 대해 저자는 무수히 보여준다.

   이 모멸 만연 사회에 대해 누구나 같은 진단을 내릴 것이다. 한국사회의 경쟁구조. 불균형 시스템, 경제성장을 강조하지만 분배정의는 나 몰라라 하는 사회. 학력은 높지만 지성은 쇠퇴하는, 혹독한 경쟁에서 치러야 하는 사회적 부작용과 개인적 피로감이 그 원인이리라. 저자는 말한다. 사소한 차이들에 집착하면서 경쟁에 민감한 한국인은 그렇기에 모멸을 일상화한다. 단지 사람만이 아니라 제도와 문화도 모멸감을 준다. 열등한 집단에 대한 범주화, 비인격적 관료제도 들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문자해고통보, 갑을관계 등등 모욕할 거리에 대해서 너무도 쉽게 찾아낸다. 무엇마다 ‘충’을 붙이며 비하하는 것에서도 그렇다.

   저자는 이것이 시민사회와 인권의식의 미성숙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은 너무도 ‘경제성장’ 위주로 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늘 경제성장을 외치고 기치로 내걸지만, 언제 경제가 정말로 성장한 적이 있던가. 그러면서 늘 인권과 시민사회 문화의 성장에 대해 외면한다. 어쨌든 저자는, 우리 사회는 모욕의 실체를 규명하고 모멸감을 성찰하는 언어가 빈곤하다고 말한다.

 

수치심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서 유발되는 감정이라면, 모욕감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나 방식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따라서 수치심에는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섞일 수도 있지만, 모욕감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모욕감을 유발한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서 분노나 원한 같은 감정을 갖게 된다. p64

 

   언어가 생각과 문화를 담아낸다고 할 때 한국 사회에선 무형의 폭력에 대해 둔감하다. 한국인은 타인을 모욕하는 말을 쉽게 내뱉고 또한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과민하다. 과시적이며 인정 욕구 또한 강하다. 심지어 악플 반응에서 기꺼이 즐거움을 느끼려 한다. 갈수록 만면해지는 개인주의와 인종주의 또한 모멸을 가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모멸은 사람을 비하하는 것,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멸감을 느끼는 순간, 조롱과 멸시와 차별과 오해와 동정의 시선속에서 살인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존중해야 한다고 당연히 말하고 중요성을 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위하여, 행복한 감정을 영위하고 살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자존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간에게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자존감이다. 품위를 훼손당했다고 생각할 때, 목숨을 걸고 보복하거나 그것을 회복하려고 몸부림친다. 아니면 삶의 의욕을 잃고 무기력 상태에 빠지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났을 때 적절하게 대응하는 사회를 가리켜,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라고 말한다. 정확한 정의를 내리자면 ‘구성원들이 자기가 모욕당했다고 간주할 만한 이유가 있는 조건에 맞서 싸우는 사회, 또는 그럴 만한 이유를 제공하지 않는 사회’다. p210

 

   자존감이 향상될 수 있기 위해서는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모욕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담론을 만들고 사람들의 성찰을 이끌어낸 운동과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타인을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 습관화된 문화에 대한 제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아가 인간의 자존감이 정체성이 사회적 지위와 동급으로 삼는다면 자존심이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그렇기에 회복 탄력성이 강한 긍정적 자아존중감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의 행복감을 우월감과 동일시하는 것도 지양해야 할 부분이다. 마치 행복강박관념자인 듯 행복에 집착하고 살지만 그것을 잘 들여다보면 타인과 비교한 우월감을 행복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곧 불행의 원천이 된다는 것일 인식해야 한다.

 

모멸감을 줄이려면 이러한 문화와 사회 풍토를 바꿔가야 한다. 가치의 다원화가 핵심이다.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여러 차원으로 틔워야 한다. 그럼으로써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평범함과 비범함을 나누는 기준 자체를 상대화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인간이라면 모두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바탕과 존엄함에 눈을 떠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저마다 지니고 있는 다양한 잠재력이 개발되고 꽃피울 수 있는 기회가 열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를 있는 그대로 승인해주면서 도전과 성취를 북돋아주는 관계와 공동체가 다양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p305~306

 

   결국 개인의 노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개인 하나의 변화로 행복해줄 수 있기도 하다. 자신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바꿈으로써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도 좋다 그래 좋다. 그러나 언제나 무너질 수 있는 토대속에서 이 행복감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더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개인의 변화는 사회의 변화와 함께 나아가야 한다. 개인의 변화가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간다. 사회의 변화가 개인의 보다 많은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모든 것은 사회다. 그 사회를 만든 것도 개개인의 사람이다. 다시 이 상호관계의 작용을 생각하며 ‘나 혼자’ 만의 변화가 아니라 함께하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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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희랍.로마의 분노론 (반양장) - 분노하는 인간, 호모 이라쿤두스 연구
손병석 지음 / 바다출판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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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이라둔쿠스에게 박수를


고대 희랍·로마의 분노론 : 분노하는 인간, 호모 이라쿤두스(Homo Iracundus) 연구


정의로운 분노가 부정되는 사회는 고대 희랍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유인인 아닌 노예들의 사회다. p542


  오래도록, 이러한 상태에 놓인 사회에 살고 있다. 차라리 신화속 야만의 사회가 질서있고 더 정의롭게 느껴질 만큼이다. 분노란 정의롭지 못함에서 기인하다는 생각을 갖기에 분노의 긍정성에 높은 점수를 부여한다. 그러나 사회는, 아니 정확히 권력은 체제에, 권력에 반한 분노를 평가절하하며 위험 요소로 ‘처리’한다. 그렇다. 권력에 의해 분노는 늘 처리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분노하는 인간, 호모 이라쿤두스(Homo Iracundus)여 일어나라!

  

  『고대 희랍·로마의 분노론』은 제목 그대로 고대 희랍과 로마의 철학자들에게서, 신화에서 배우는 분노에 대한 연구다. 왜 수많은 인간 감정 중에서 분노를 끌어왔는가. 그것은 분노가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통로이다. 물론 분노의 결과가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부당함에 대한 영혼의 분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부정의만 만연된다”는 점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다만 분노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다면 그것은 자연적 분노로 보기는 어렵다고 저자는 말한다. 분노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바가 저자와 같을 것이다. 통제를 벗어난 개인적 분노가 부당함에 대한 분노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필수적인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 그러한 점을 알고 있는 우리는 이 책에서 이 자연스러운 분노라는 감정에 대해서 고대의 철학자들의 책들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가 선택한 텍스트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속 영웅,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와 에뤼뉘에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 학파에 관한 내용을 텍스트로 정한다. 이들 텍스트를 통해 분노가 무엇인지, 분노의 통제와 제거는 가능한지를 탐구한다.

  사회·정치적으로 ‘분노’의 발현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이 책을 들었지만 이것 외에 텍스트를 통해 신들과 영웅들의 ‘분노’를 보는 것도 충분한 재미가 있다. 가령 전쟁 중의 아킬레우스의 분노의 측면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본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전리품인 브리세우스를 빼앗기고 분노한다. 긴박한 상황에서 그 일에 대한 분노로 더 큰 문제를 초래하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현재의 눈으로 보건대 쪼잔한, 미친 x 소리가 나오게 하지만) 영웅시대 명예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명예 박탈에 의한 것으로 본다. 그렇기에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그것이 비록 공동체 전체의 비극을 야기하게 되었긴 하지만 당시의 사회에서는 적합한 감정의 표출이라고 말한다.   

  잦은 분노를 하는 복수의 여신들의 분노에 대한 해석, 그리스 신화에서 악녀로 평가받는 메데이아의 복수에 대한 해석 또한 흥미있다. 최근의 신화해석이나 인문학 책들에서 메데이아에 대한 시선을 다르게 보는 것이 제법 있긴 하다. 이 책에서도 메데이아의 분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메데이아의 분노는 여성에게 남성과의 결혼은 불평등한 조건 하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여성의 불평등과 부자유에 대한 항변을 대변한다. 여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처럼 일생에 걸쳐 가정에서만 활동이 이루어진다. …메데이아는 여성의 목소리가 공적 영역에서는 침묵당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여성은 온전한 의미의 자율적이며 평등한 존재가 아님을 항변하는 상징적 인물인 것이다. p374


  이 책에선 사회·정치적 맥락에서의 분노와 개인적 차원의 분노의 결과에 주목하면서 공적인 영역에서의 분노의 긍정적 기능이 있음을 명확히 한다. 또한 감정이 인간성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특히 분노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대해(이러한 평가는 주로 세네카 학파의 주장이었다) 바로잡고 우리가 더 나아질 수 있는 방향, 즉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으로 분노에 대해 다루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분노는 잠들어 있는 공동체를 깨울 수 있는 계몽된 영혼의 외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 사회가 보다 더 나은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들의 분노에 눈을 감거나 눈을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당한 분노에 눈을 감는 사회는 곧 그 사회의 불의와 부정 그리고 도덕적 타락을 용인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분노해야 될 때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p542


  지속적인 촛불혁명에서 나타난 바는 국민들은 분노해야 될 때 분노했다. 최대한 정의로운 분노를 구가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다시 드러난 바는 국민들은 바르게 분노할 줄 아는데 ‘권력자’들은 이 분노를 이해하는 방식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답습해온 그대로의 사고로만 ‘분노를 바라보고 처리한다’.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을 끌어들이고 역시나 평가절하하며 ‘부정의한 분노’라는 ‘특정인의 분노’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그러니까 결국 분노에 대해 배워야 할 이들은 일반 국민들이 아닌 것이다.

  사회·정치적인 맥락에서의 분노의 의미에 대해 배우고 깨달아야 할 사람은 언제나 ‘권력을 쥔 자“의 몫이다. 그 권력을 국민이 주었다는 사실을 언제나 선거 기간에만 인식하는 이들에게 ’정치공학‘이 아니라 ’분노론‘에 대해 학습할 의무를 주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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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인문학 - 감정의 프리즘: 열정과 분노, 슬픔과 공포, 위안과 기대, 평온과 광기
소영현 외 지음 / 봄아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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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민주주의


감정의 인문학 - 감정의 프리즘: 열정과 분노, 슬픔과 공포, 위안과 기대, 평온과 광기


  우리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부정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 희노애락의 인생사에서 ‘감정’의 자연스러운 발현이 통제된다면 과연 인간은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에 대한 비난 역시도 존재한다. 어쩌란 말인지. 상투적이고 원론적인 말이 대안이 되겠다. “적당히”. 그 적당의 수준은 누가, 어떻게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래저래 치이고 마는 ‘감정’인 까닭에 오히려 적절한 상황에서 기를 펴지 못한 감정들이 분출되거나 분출되지 못하여 문제를 양산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게, 웃음도 눈물도 분노도 왜 그토록 타인의 눈치를 봐가며 학습된 감정을 표출해야 하는 건지. 감정의 자연스러움이 곧 진실이라면 이 비극적 감정의, 조작된 감정의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이 책은 감정에 관한 인문학적 탐구다. 각기 다른 전공의 세 명의 저자들의 말대로 하면 ‘감성적 사회비평’이다. 이것은 위로와 공감에서 더 나아가 “인식과 행동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비평이란 얘기다. 저자들의 목적은 이것이니 독자로서의 나는 그들의 의도에 맞는 변화가 있는가를 살펴보면 되겠다.

  상당히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책에 대한 사전 정보없이 제목으로 끌렸고 책 표지도 매력적이었다. 새해 들어 ‘감정’에 대한 새삼스런 고찰을 하다 여지없이 생각난 책이다. 이래저래 생각해보니 인문학과 사회학이 가미된 글에 대한 호감은 내 개인적 취향이구나 싶다. 그러니 감성적 사회비평 역시도 취향 저격된 셈이다.

  감정의 가장 대표적 성격이라고 할 수 있는 열정과 분노, 슬픔과 공포, 위안과 기대, 평온과 광기를 중심으로 감정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진다. 우리가 겪는 일련의 상황들, 영화이거나 소설이거나, 점성술 등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는 모든 것이 감정을 탐구하는 자료가 된다.


감정에 대한 탐색은 단지 주체가 경험적으로 인지하는 신체적 반응이나 직관의 문제만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의 관계론, 의식과 무의식의 작용, 표상된 것과 감춰진 것의 역학, 역사와 현재의 연계와 상호 간섭 방식, 욕망과 가치의 충돌, 윤리와 관습이라는 사회적 요소들이 다선적이고 중층적으로 관여하는 복잡계에 대한 총체적 탐색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p26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왜 감정에 대한 통제나 억압이 주로 이루어지는가, 자기계발서 속 감정에 대한 조언들은 왜 억제와 통제가 아니라면 특정감정에 대한 지향인가. 감정에 대한 교육은 그것만이 지향하는 특정한 방식이 있는 것인가. 어쨌든 ‘감정’을 표출하는 주체가 정말 ‘나’가 맞는가. ‘나’의 감정표출에 대한 권리도 없다면 타인의 ‘감정’에 대한 이해는 과연 가능한가. 감정의 주체가 되지 못해 나타나는 영향은 무엇인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감정 표현은 미숙하거나 유치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세상과 대면하기 위한 결의이자 선택이다. 감정의 ‘집단적 표현’이 곧 저항의 제스처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p26~27


  “‘가정폭력’은 가부장제 위계가 은폐할 수 없었던 구조적 폭력의 일면이자 한국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위계구조의 폭력적 분출(p58)”이다. 가정폭력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수치와 분노의 감정에서 보면 인종적-국가적-계급적-젠더적 차원의 위계적 폭력 구조가 연관된다. 사실 모든 감정의 면면에 계급과 성별이 가득 차 있다. 이에 대한 경험은 사실 너무도 일반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갑을관계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사회에 만연한 갑질 속에 잘 드러난다. 또한 ‘남성의 화는 합리적인 분노‘로 ‘여성의 화는 성격이상’으로 치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위계에서 보듯이 사회는 여러 방식으로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을 막고 있다. 그것의 이득이 없지 않다면 적극적인 개선을 해나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한 분위기 형성을 보건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 감정의 주인이 되는 일”이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관습화된, 위계적인 이 구조에서 벗어나는 일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노력, 이것을 저자들은 “감정민주주의 실현”이라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결코 인간답지 않으며, 그런 위험사회 속에서 인간다움을 지켜나가는 것이야말로 성자라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옹호라기보다는 인간성에 대한 패배주의적 탄식으로 다가왔다. p228


  어쩌면 너무나 익숙해서 그러려니 했던, 아니면 익숙하지만 그래서 불편했던 감정의 표현 방식들에 대해 저자들이 비평은 공감을 준다. 일상의 모든 감정들에 대한 명철한 탐구를 통해 감정의 민낯과 포장된 감정에 대해 가늠하게도 된다. 감정표출마저도 자유롭지 못한데 무슨 인간다움을 말할 수 있겠는가. 잃어버린 나의 인간다움이 통제된 감정교육만큼이나 억압되어 있구나를 생각하게끔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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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7-01-0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일단 지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해서인지... 책 내용이 마음에 와닿네요.
 


정색하고 정책


지금 일어나 어디로 향할 것인가  : 문제는 정책이다


  일찍이 이 사회를 향해 “분노하라”고 외쳤던 스테판 에셀이 생각난다. 앞장서서 “분노”의 실천을 했고 그리고 “분노만으로는 안된다”며 대안을 제시했던 사상가의 목소리가 앞뒤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듯하다.

  언젠가부터 내 온 몸에 깃든 이 분노의 메시지를 나도 모르게 조금씩 흘리고 있을 때면 이내 핀잔을 듣곤 했다. 가끔은 그러한 반응에 더욱 당혹스러울 때가 있었지만 ‘정치’라는 게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서 취향의 문제를 떠나 ‘금기’가 되는 것을 수없이 겪었다. 취향의 문제이거나 혹은 성격의 문제로 취급당한 정치이야기는 한편으론 ‘시비거는’의 단어와도 동일했다. 어느 틈에 ‘정치’라는 이야기가 이런 다양한 단어를 함축하면서도 절대적으로 하나만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을까. 정치이야기는 곧 박근혜 비판으로 인식되는 현장은 세대가 다를 때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젊은 세대라고 예외는 아니다. 정말로 취향의 공동체 속에 진입하지 않는 이상 어느 자리에서나 정치 이야기는 불편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어쩌면 당연할 듯도 하다. 그 이야기의 정점은 대통령으로 이어지게 되어있으니까. 그렇다면 정치이야기가 불편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으로 귀결되는 이야기가 불편한 것이었을까.

  정치는 한 인간에 대한 호불호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안녕을 위한 이야기라고 누누이 변명, 해명, 증명, 반박해야 하는 일은 참 답답하고 짜증나는 일이었다. 정치는 정책이며 제대로 된 ‘정책’에 대한 나의 욕구가 분노조절장애자로 성격이상자로 낙인찍히는 상황에서 차라리 속시원히 “그래 나 성격 더럽다!”라고 외쳤어야 했는데. 생각해보니 다 내가 잘못했다. 더 열내지 못한 것도 지친 것도.


 우리가 세계화에 종속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는 대다수는 무력감을 느끼고 체념하며 운명론자가 된다. 모든 희망을 잃고 정치에 무관심해지거나 울분을 터뜨리는 것이다. 세계와 유럽에 종속됨으로써 빚어지는 해악을 인식하는 혹자들은 그 종속에서 벗어나는 것, 즉 우리 프랑스를 탈세계화하고 탈유럽화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한다. 이것은 우리가 모면했다고 여기는 종속보다 고립과 폐쇄가 더 큰 해악임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23


  무력감. 체념. 오래도록 뼈에 깊이 새겨진 단어다. 원하지 않았음에도. “떠들어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라며 자기계발에나 힘쓰라던 사람들 속에서 떠들기만 하는 자괴감을 느꼈던 것도 이제 와서 후회가. 더 실컷 떠들 것을.


  사회에서 인간은 “정책”에 영향받지 않을 수 없다. 담배값 인상 정책이 미치는 영향만 해도 정책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그러니 정책은 정치와도 같다. 이것을 아는 이익집단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정책이 결정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에선 특정한 이익집단이 주무르는 정책들이 횡행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맞닥뜨리고 있다.

  스테판 에셀은 사회에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분노하라 외쳤고 더 깊은 이해와 사람들 사이의 연대가 필요함을 주장했다. 또한 포기하지 말라고도 했다. 연대, 연대, 연대! 그의 외침에 동감한 많은 이들이 나서서 분노했고 또한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이 분노하고 포기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역시 정책이다. 스테판 에셀은 이 책에서 정치를 사랑하기 위한 13가지 제안을 한다. 웰리빙정책, 불평등문제, 교육, 실업, 소비정책, 청소년정책, 문화예술 등등 필요한 개혁과 문제들을 규명하고 해야 할 이루어야 할 정책들에 대해 제시한다. 특히 웰리빙 정책은 “양과 타산과 소유의 헤게모니에 맞서 우리는 대규모의 삶의 질 정책”으로 물질적 측면이 좀더 부각되는 웰빙과는 다르다. 그의 제안들은 물론 유럽이라는 사회, 금융위기 이후의 상황이라는 시기적인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큰 틀에서는 같은 맥락이고 소소한 것들 모두 우리 현실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 궁극적으로 특정한 국가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잘 살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이끌어낸 온갖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고 대응하기 위한 방안이다.

 이제 우리 역시 “정책”에 대해 다시 환기해야 할 때다. 우리의 삶을 이끌 정책들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그것은 무엇인지. 여기, 스테판 에셀이 제안하는 정책들과 그것에 대한 메시지가 방향을 일러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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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굴해졌다

 

  겁이 많고 줏대가 없어 떳떳하지 못한 것, 비굴의 뜻이다. 한국학을 전공한 귀화한 학자 박노자는 2014년의 책에서 한국을 비굴의 시대라 일컬었다. 그가 한국의 정권에 대해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귀화한 한국인이기 이전에 외국인임이 전제된 것일까. 그의 시선은 타자의 시선일까.

  비굴을 생산한 것이 공포의 정권에 의한 것이라는 진단에 반박할 여지는 없다. 파시즘적 이라고 말하는 이 학자의 말이 다른 한국인에게서 나왔다면 그들의 지위와 안전이 보장이 되었던가를 생각하게끔 한다. 언론의 집중포화는 둘째 치고라도.

  저자는 많은 종류의 공포 중 낙오의 공포가 근저에 깔려 있고 경쟁은 폭력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공포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가? 가만히 있으면 죽어간다. 무기력도 사회적 타살의 원인이라고, 국가가 쉽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연대의 부족과 망각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모두 ‘국민 불행의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공포가 필요하지 않은 새로운 사회적 게임룰을 연대해서 정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그런 연대가 성립하자면 무엇보다 먼저 각자가 한 가지를 깨달아야 한다. 나는 물론 우리 모두 공포 속에서 산다는 것, 그러기에 다 같이 연대해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정확한 실체를 대중이 이해한다면 이 지옥을 함께 벗어나는 깨달음의 길이 펼쳐질 것이다. p49 


  다같이, 함께라는 말은 모든 것의 ‘당연한 해답’처럼 제시된다. 기승전, 함께. 하지만 언제나 제대로 이루어지 못하기에 이토록 ‘함께’를 부르짖는 것 아니겠는가. 또한, 함께의 이유와 목적이 서로 괴리될 때도 있다. 그러니 ‘함께’에 대한 방향을 찾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자유주의자는 그들의 이념이 제시하는 규준이 보편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 이념을 배태한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 바깥에 있는 사회에다가 그 규준을 들이대고 준수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그저 타자에 대한 폭력일 뿐이다. p215 


  저자인 박노자는 사회주의적 삶을 방향으로 제시한다. 물론 사회주의적 삶이라고 자본주의적 삶보다 윤택한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의 시장경제가 사회 구성원을 불안하게 만든다면 사회주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사회주의가 꿈꾸는 사회는 일단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그가 보는 사회주의란 비판적 개인을 창조하며 “집권만을 위한 정당 운동이 아니라  폐허에서 인간으로 다시 거듭나고 뜻을 되찾기 위한 실존적 운동”이다.


사회주의자들의 과제는 한정된 지구의 자원을 되도록 골고루 평등하게 분배하고, 공동체 안에 민주주의, 상호 배려, 삶의 기쁨이 가득 차도록 하는 것이다. 제한된 자원을 빨리 쓰면서 소비를 무제한으로 늘리는 것은 사회주의적 삶의 방식과 거리가 멀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자동차를 생산하여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을 추구하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환경을 보존하고, 교통 사고율을 최소화하며, 석유 같은 자원을 보존하고, 개인이 언제나 사회에 의존할 수 있도록 안정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추구한다.  p286


  저자가 사회주의 사회를 내세우는 이유는 한국이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고 한국사회가 불행하게도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중에서도 최고의 자본주의적인 신자유주의의 나라. 신자유주의 국가들이 신자유주의가 파생하는 문제에 직면하여 해결을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한국은 어떤 대안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더 자본주의적인, 더 파시즘적인 상태를 끌어올리는데 열성적이라는 박노자의 비판은 그가 단지 사회주의자라서가 아니라도 새겨볼 일이다.

  자본주의도 신자유주의도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보다 좋은 세상을 위한 제도적 선택이다. 다함께 전지구적인 위협에 대응하고 ‘인간’을 위한 삶을 부르짖는 흐름에서 한참을 벗어나 뒷걸음질치는 사회에서 비굴해지는 삶을 사는 우리에게 보내는 박노자의 안타까움에 가득 찬 비판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이 사회주의적 삶은 마냥 ‘이념’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보다 생존에 직접적인 것이며 그렇기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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