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 스스로 ‘정상, 평균, 보통’이라 여기는 대한민국 부모에게 던지는 불편한 메시지
오찬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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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해!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오찬호, 휴머니스트, 2018.


  한국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삶은 아주 힘들고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한번만 돌려 생각하면 이만큼 쉬울 수도 있을까, 그런 극과 극의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다. 어쩌면 양육의 다른 가치관이 개입할 여지가 없이 방식이나 태도가 획일적이기 때문일 거다. 좌우를 쳐다보며 결국엔 모든 것이 특정한 대학에 진학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으니까. 양육이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동일시되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아이의 생각은 없는 채로 일관되고 획일적인 목표로 전진하면서 지켜야할 다른 많은 것들은 외면하려니 어렵고 힘든 건 아닐까.

  저자는 한국의 육아 문제, 한국 부모들의 육아 행태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출발선은 ‘출산과 육아’ 즉, 부모 됨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 이전, 연애와 결혼을 시작점으로 한다. 이는 한국의 육아에 관한 한 결혼 이전의 ‘무언가’에 의한 연장선이라는 저자의 통찰은 결혼한 이에게도 결혼하지 않은 이에게도 공감적 요소가 있을 것이다.

  우선 저자는 부모가 되는 선택을 한 이들에게 자식키우기는 일종의 과시적, 증명적인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비혼이 증가하는 사회에서 결혼을 왜 선택했는가에 대한, 아니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이다. 문제는 비혼에서 기혼자가 되는 그 ‘선택’이 가진 어쩔 수 없음에서 시작한다.


그만큼 비혼자들은 연애-결혼-출산에 대해 가장 현실적으로 고민한 사람이다. 이들이 드러낸 공포, 그러니까 ‘그 부모'와 다른 레일로 들어선 결정적인 계기는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존재를 미약하게 만드는 경제적 사정이고 둘째, 면역이 없기에 버티기가 힘들다고 판단한 인간관계의 문제, 마지막은 지금껏 배운 것이 너무나도 무용함을 인정해야 하는 빌어먹을 성 불평등의 세상이다. 이를 감수할 각오가 있어야 기혼자가 된다.


  현실은 특히 여성에게 독박 육아와 강요된 모성에 놓이게 한다는 것이다. 이 현실에서 충분히 탈피할 수 있기란 어렵다. 은연 중 수긍하면서 과거로부터 답습된 잘못된 관행에 길들여지고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은연 자기계발의 형태를 띠면서 흘러간다고 저자는 말한다.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했고 이를 실천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친구들이 결혼 이후 변했다. 기혼자들은 평등이라는 이론을 화석화시키고 전통적 질서, 즉 ‘기울어진 운동장’에 적응하면서 가족의 화목을 도모하고 있었다.


  저자가 관찰한 것일 테니 ‘과도한 육아 현장의 사례’는 흥미를 돋운다. 종종 기사로 접하기도 했고 익히 들어왔고 소문으로 접하기도 했던 그 사례들을 보고 있으면 역시나 답답하다. 한국에서는 ‘맘’은 유일하게 모든 것이 통용되고 이해되는 (부정적인 의미의) 만능프리패이며 이유를 막론하고 욕을 들어먹는 벌레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결코 자정되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도대체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다. 부정적인 현상은 난무하는데 그대로 굳어져서 흘러가버린다. 그리고 그 자체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이다.


자녀를 ‘내가’ 보호해야 한다는 범위를 넘어선 ‘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에는 정말로 많다. 많은 이들이 자녀보호와 자녀소유를 혼동한다. 마치 소유권이 있으니 어떻게 보호하든 간섭하지 말라는 식이다.


  저자도 상황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지만 서두에서 말했듯 특별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도대체 답없는 이 현상에 대해서 그저 느끼고, 생각하고, 깨닫는 방법만이 있을 뿐하다. 그러나, 누가 깨닫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냥 끊임없는 도돌이표, 뫼비우스의 띠 같기만 하다.


자녀소유는 ‘내 것’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올바른 사회적 가치에 자녀가 노출될 수 있도록 부모가 더 노력하겠다는 의미여야 한다. 그래야 내 아이 더 바르게 키우겠다는 다짐이 가능하고 내 아이 멋대로 키우겠다는 자기소유의 강박이 사라질 수 있다.


  그 노력이란 스카이캐슬과 같이 극단적인 현실을 맞닥뜨리게 되면 형성이 되는 건가?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한데 그동안 엄마 혼자만이 아이를 키워왔기에 문제가 되었나? 육아의 책임이 엄마에게, 모성에게 짐지워진 현실에서 이 책 역시도 이 과도한 자녀소유로서의 육아방식은 엄마가 주도하는 것으로 말한다. 동조자이자 방관자는 아빠다.

  가만 생각해보면 서양에서도 ‘모성’이 강요되었다고 얘기하고 육아는 엄마에게 독박된 현실을 부르짖으며 이러한 ‘가부장제’의 가족구조의 해체를 주장해왔다. 그럼에도 나타나는 현실은 다르다. 물론 나라마다 형성된 사회문화적인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토록 심한 차이는 어떤 이유일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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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 김영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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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같은 소리하고 있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유발 하라리, 2018.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나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라고,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노래하고 있다. 20세기에서 그린 21세기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었을지언정 무조건 살기좋은 세상이었다. 진보와 발전이란 거부할 수 없는 단어였고 기대감을 가속화·극대화시켰다. 하지만 21세기는 20세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진보와 발전이란 제한적인 단어였고 어제에서 이어진 문제는 지속적이다. 미래라고 불린 사회가 현재가 된 지금 문제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고 그에 대한 해결 방안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시각은 영향력을 갖는다. 유발 하라리도 대표적이다.

  인류가 직면한 커다란 질문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나느냐”라고 유발 하라리는 말한다. 그러니까 현재, 인류는 고통에 처해 있다는 말이겠다. 그 고통의 주원인이 그토록 21세기에 기대하던 기술혁명이라는 점은 또다른 아이러니긴 하지만 결국 익숙하게 겪어왔던 대로 기술혁명은 인간소외를 급격히 부추긴다. 총체적으로 보면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가지는 한계라 말할 수 있으며 유발 하라리는 그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21세기의 전례 없는 기술적, 경제적 파괴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는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모델을 최대한 빨리 개발해야 한다. 이런 모델들은 일자리보다 인간을 보호한다는 원칙을 따라야 한다. 많은 일자리들이 따분한 고역이고 구할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아무도 현금출납원을 평생의 꿈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고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을 보호하는 일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한계로 도태된다며 사회주의·공산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주장했고 자유민주주의는 ‘공산주의식 복지 제도’를 도입하여 마르크스가 한계로 지적한 부분을 수정하며 지속해 왔다. 물론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은 다르지만 말이다.


점점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한 가지 새로운 모델은 보편기본소득제UBI다. UBI는 정부가 알고리즘과 로봇을 지배하는 억만장자들과 기업들에 세금을 물려서 그 돈을 모은 개인에게 기본 필요를 충당할 만큼의 급료를 제공하는 데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이 빈곤층에는 실직과 경제적 혼란에 대비한 완충 역할을 할 테고, 덕분에 부유층은 포퓰리즘에 의한 대중의 격분으로부터 보호받을 거라는 구상이다.


  유발 하라리도 ‘보편기본소득제’를 제안한다. 항상 예산을 두고 다툼을 벌이는 국회는 선발시에는 ‘복지’를 부르짖으며 그것이 유용하다고 활용한다. 하지만 그 이후 실행은 복지예산을 삭감하는 것에서 보듯이 대중의 격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고 유용하게 흘러간 패턴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의 격분 역시도, 쉬이 사라졌으니까. 자유민주주의를 완벽히 포장해주는 것이 복지제도이다. 복지제도를 이렇게 갖다 쓰는 한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이는 복지제도를 혐오했다. 그것이 이용당하고 버려질 것이기에. 목적이 무엇이냐를, 본질을 파악하지 않으면 결국 당하고 만다.

  목적을 정하는 것도 인간이기에 어쩌면 유발 하라리의 인간의 겸손을 외치는 목소리도 수긍은 간다. 하지만 ‘겸손하세요’라고 해서 겸손할 수 있다면 인간의 고통이 있을 리가 없다. 유발 하라리의 말에 귀기울이고 맞다고 감탄하며, 무릎을 탁 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렵지 않은 글임에도 왜인지 명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자아성찰과 자기반성의 명상과 자기계발서로 바뀌는, 마무리되는 장르에 당황하지는 않지만 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유발 하라리의 생각과 글에 대한 매력은 책이 출간될 때마다 하강곡선을 그리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책이 나오면 읽게 되겠지. 결국 나도 늘같은 유권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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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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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그리고 적


적을 만들다, 움베르토 에코, 2014.


  제목은 기억하기에 확실한 우월을 지닌다. 에코의 에세이가 다루는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읽은 시간이 지나 기억에 떠올리는 건 역시 제목 <적을 만들다>인 것을 보니까.


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뉴욕에서 파키스탄 택시 기사로부터 이탈리아의 적은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적이 없다 답한 에코는 다시 생각한다. 이탈리아가 지닌 불행 중 하나가 적을 두지 않은 것이라고 말이다. 위와 같이 ‘적’이 지닌 가치와 ‘적’의 필요성을 논하는 에코의 의견은 오랜 역사를 통해 실례로 뒷받침되어 왔다. 하지만 ‘적’이란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해주지 않는다. 필요와 가치를 다하기 위한 ‘적’이란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 있다. 

  적을 만들지 않는 삶을 찬양해 왔던 것은 거짓이고 속임수였다. 항상 ‘적’을 만들어냄으로써 ‘적’에게 기생해왔던 것은 정치였다. 아니 권력이던가. 어쨌든 북한이란 ‘적’을 항상 필요로 했던 권력을 떠올리면 에코의 의견에 동감하게 된다. 누구를 ‘적’으로 두느냐가 정체성을 확실히 보여준다는 것을.


따라서 적이 없다면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폭넓은 유연성을 지니는데, 베로나의 스킨헤드족이 하나의 집단으로서 자신들을 식별하기 위해 그룹에 속하지 않는 자라면 누구든지 적으로 겨냥한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우리를 위협하는 적을 거의 자연적인 현상의 측면에서 규명하는 일이 아니라, 그 적을 만들어 내서 악마로 만드는 과정이다. 


  또한 세상이 수초도 지나지 않아 그것을 요구한다. no야 yes야? 이 편이야, 저 편이야? 묻고, 물음조차 없이 프레임을 씌워 제 기준에 맞춰 타인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 단답형의 말 한마디로 속전속결로 이뤄지는 타인에 대한 평가는 어떤 가치를 위해 싸우는 것일까. 난무하는 혐오의 단어와 예의를 상실한 말들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이루어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님에 틀림없다. 적이 생겨나고 있음은 확실히 불행의 조짐이다. 작은 잽을 날리며 곳곳에서 들끓는 적. 한때는 이런 적들을 한방에 훅, 날릴 수 있으리란 기대가 가득했는데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서인지 ‘적’이 쌓여간다.  

    

우리의 적이 되는 대상은(미개인들의 경우처럼) 우리를 직접 위협하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를 위협하지 않을지라도 누군가에 의해 위협적인 존재로 묘사되는 자들이다. 따라서 우리와 다르다는 것은 그들의 위협적인 태도에서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다름 그 자체가 우리가 찾는 위협의 신호인 것이다.

 

   가치가 상대적이라고 한다지만 절대적 가치는 있는 법이다. 지켜야 하는 걸 지키는 것과 없어져야 하는 것을 없애는 것, 어느 것이 더 힘든 일일까. 새삼 ‘적을 만드는 일’보다 쉬운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달력 한 장 남은 2018년, 없어야 할 것이 소멸하는 것을 보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가. 비에 씻겨가지도 않을 적이 계속 만들어진다. 쌓여만 간다. 한해의 마무리를 편안하게 하고 싶었건만 요즘 끊임없이 내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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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용서 - 적개심, 아량, 정의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강동혁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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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분노가 가득한데


분노와 용서-적개심, 아량, 정의, 마사 C. 누스바움, 2018.


  어떤 형태로든 너무나 익숙해지고 일상화되어 버린 단어, 분노. 분노와 동행하는 수많은 단어 중 용서가 붙었다. 이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 있을까.

  분노 옆에 용서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분노’를 어떻게 보느냐와 연관된다. 어떤 시대에는, 어떤 대상을 향해서는 ‘분노하라’ 외치며 분노의 정당성을 부르짖고 분노할 것을 부추긴다. 그런 시절이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다. 맘껏 분노하며 정의를 부르짖는 일이 힘겨운 세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에 분노는 정의와 어울려 다녔다. 정의가 짝꿍이었기에 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되는, 엄정하게 따져야 할 단어였다. 그 시대가 지났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대상이 사라졌다 할 수 있을까. 여전히 분노와 정의는 짝꿍으로 이어져야 할 말이기에, 용서라는 말이 다가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용서라니. 이 시대 대표적 석학으로 불리는 누스바움의 분노는 어떤 것이기에 용서와 짝을 지웠는가. 누스바움에 의해 재정의된 분노와 용서는 분노를 복수와 관련된 것으로 본다. 그리스신화의 복수의 여신과 지혜의 여신을 빗댄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를 결부시켜 이야기를 전개한다. 복수의 여신이 지혜의 여신에 의해 정의로운 분노의 신 에우메니데스로 변화했다는 이야기의 뼈대를 생각하면 누스바움이 바라보는 분노, 그러하기에 용서가 무엇인지 짐작하게 된다. 문제가 있다고 볼 때 그것은 해결되어야 하고 발현되지 않아야 할 감정이 된다. 그렇기에 분노를 극복하는 방안이 필요하고 누스바움은 그것을 용서로 본다. 하지만 역시 누스바움이 정의하는 용서에는 제한이 있다. “용서 안에 도사리고 있는 공격성과 통제, 기쁨의 부재 같은 요소”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개인적 영역, 중간 영역, 정치적 영역에서 분노와 용서가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따져본다. 용서가 거래적‧교환적으로 이뤄질 때 필연적으로 가해자가 자신의 위치를 격하시키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것이 사회의 공동선을 추구하는데 도움되지 않는 태도임을 지적한다. 참으로 어렵다. 분노도 용서도 누스바움에 따르면 누스바음이 지적하는 모든 것을 피해서 행한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선사시대의 어느 단계예서는 분노가 가치 있을지 모르는 몇 가지 혜택을 제공해주었겠죠. 심지어 오늘날에도 분노의 유용한 역할은 흔적기관처럼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지향적이고 선한 정의의 체제가 세워지자 분노라는 감정은 대단히 불필요한 감정이 되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분노의 비합리성과 파괴성을 얼마든지 깊이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누스바움은 분노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는 듯하다. 얼핏 생각할 때 개인적 차원의 분노로 전제하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누스바움은 “분노에는 미덕이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사적 영역에서든 공적 영역에서든 규범적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법체계나 사회가 정의로운 체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분노가 아니라 용서에 방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분노에 미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용서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가 아닌가,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건가 이런 생각들이 들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분노에 대한 부정적 견해로 ‘비-분노’를 강조하는 누스바움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지는 않지만 한편으로는 이 말들이 공허하게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에서 분노가 차지하는 중심성은 문화적 규범이 만들어낸 구성물이거나 개인적 소양을 함양한, 혹은 함양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분노에 선천적 뿌리가 있다는 믿음에도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도록 합시다. 하지만 우리가 타고난 것은 분노하는 성향이지, 행동을 통한 불가피한 분노의 표출은 아닙니다. 우리는 근시에서 건망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본성에 새겨져 있는 수많은 성향이나 경향을 교정하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목적을 상실한 부문별한 분노가 횡행하고 있는 지금을 보면 이 말에 수긍이 갈 수밖에 없다. 분노하는 성향은 지속하되, 행동으로의 표출이 아니라는 말이 가지는 그 이상을 사실 우리는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 그럼에도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현실의 상황들을 목격하며 알아가게 된다. 분노도 용서도 인간의 본성에 새겨져 있기에 교정해야 한다는 말을 좋은 쪽으로는 넘어가지만 삐딱하게 보게 되면 이 말에 대한 반발도 차오른다. 그 수정과 교정의 방향이 어떻게 가야하는가가 상당히 주관적이고 또한 정치적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누구나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두르는 개인적 분노 표출에 반대한다. 하지만 사회적인 형태에서의 분노는 특정 세력과의 끊임없는 싸움이다. 불가피하다는 말에서 그 불가피함의 수준은 또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이 꼬리를 문다. 분노하고 싶은데 분노할 수 없을 때가, 용서하고 싶은데 용서할 수 없을 때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 모든 것은 정의하는 방식에 따라 문제가 되고 대안이 되고 방법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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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링의 인문학 - 이상한 놈, Peeling의 인문학을 만나다, 수정증보판
유범상 지음 / 논형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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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건대

필링의 인문학, 유범상, 논형, 2014.


  여전히 인문학 열풍은 지속되고 있다. 힐링이든 필링이든 인문학 열풍이 지속되는 것에 비하면 인문학적 사고와 삶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하긴 아직도 필링보다 힐링 쪽으로 그 무게가 지워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저자는 힐링과 필링의 인문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힐링의 인문학이 개인의 내면문제에 집중하여 개인의 강점을 찾고 심리치료에 노력하는 것이라면 필링(Peeling)의 인문학은 인간을 정치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끊임없이 눈가리개를 문제 삼아 그것을 벗겨내는 것, 나를 지치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을 권력관계와 구조 속에서 찾으려는 시도다. 그리하여 전자에서 인문학은 대중들을 계몽할 대상으로 보거나 고급 교양교육과 사교의 장을 만드는 데 관여한다면 후자의 인문학은 필연적으로 정치와 만나게 된다고.


이제 인문학은 개인의 이해와 힐링(healing)을 넘어 공동체의 갈등과 구조를 필링해야 한다. 힐링은 힐링 자체로 힐링되는 것이 아니라 필링과 필링의 정치를 통해 진정한 힐링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필링의 인문학은 진정한 힐링의 조건을 만들고, 생각하는 정치적 주체를 통해 작동할 것이다. 이때 인문학은 단순히 나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조건을 변화시키는 정치적 실천이 되는 것이다.


  수없이 개인의 힐링을 도모한다 한들 내 힐링의 장소가 시끄럽고 불편하다면 궁극적인 힐링이 이루어질 수 없다.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거나 그 장소가 불편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삶 자체가 정치와 연결되지 않을 수가 없다. 정치적이다라는 말이 주는 그 부정을 함의하는 말들 때문에 정치에 대한 혐오가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정치를 삶과 분리시켜왔지만, 사실 겪어본 바에 의하면 하나하나의 삶에서 정치가 개입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정치에서 뒤돌아 더 멀리로 달아나도록 부추기는 것은 그냥 이대로의 삶으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이들 때문이란 생각이 거듭 든다.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생각당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생각하고 살아간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생각과 그에 따른 욕망은 자신의 것이 맞는지 타자의 것은 아닌지 말이다. 또한 헤아려 생각해야 할 것도 많다.


우리는 상식이라는 프리즘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그런데 상식이라는 샘은 그 시대의 가치관과 철학, 이념이라는 저수지에서 나온다. 지식・역사・상식 등은 권력관계의 산물이다. 이것의 이면에는 어떤 권력, 즉 국가든 자본이든 그들의 의지와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이나 상식은 교양이 아니라 지배의 무기이고 정치의 싸움터이고 생사의 바로미터이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매트릭스 안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지금을 지배하는 상식은 어떠한지를 생각해보면 거듭 기이하고 희한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만큼 다양한 생각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대체로 상식이라는 것, 지켜야 하는 것에 관해서 일정한 방향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상식에서 벗어난 것을 행할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너무나 당연하게 몰상식을 부르짖으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나아가 그것을 자랑스럽고 힘차게 드러내는 어떤 상식을 다양성의 이름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이 시대의 가치관과 철학, 이념’의 한 틀이라는 것을 수용해야 하는 것인가. 저자는 ‘생각당하는 삶’을 경계했는데 생각당함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한가지만을 알기 때문이구나 싶다. 함께 살아간다는 말이 지니는 무게가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책을 읽다 주먹을 굳게 쥐었던 것은 잠깐뿐 현실을 보면 고개부터 저어진다. 힐링, 필링,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정치적 무기는 어떤 철학과 상식어아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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