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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회 -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엄기호, 창비, 2014.

  

  한국 사회의 관계 단절, 소통의 불가능이 어떤 양상으로 흐르는지를 파악했다. 우리가 언제 누구와 접속하며 또 언제 누구와는 단절하는지를 파악하면서 소통을 하되 소통을 하고 있지 않은 현 세태에 대해 분석하였다. 저자는 자신의 주변에서나 현장연구를 통해 만나온 사람들이 좀처럼 자신의 속내를 내보이지 않는 모습에 보면서 이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고 사례들을 수집하여 자신의 학위 논문의 주제를 ‘단속’으로 정하고 10여년간의 현장연구를 정리하여 2013년 「‘단절-단속’ 개념을 통해 본 ‘교육적’ 관계의 (불)가능성에 대한 연구」로 문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의 핵심 키워드를 토대로 한국사회 전반의 사례들을 새롭게 엮어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아파트 등 중산층 밀집지역, 노동조합 등 시민사회 등의 현장 연구가 생생한 이 책의 느낌을 살린다.

  먼저 ‘단속’이란 단어를 통해 사람들의 관계맺음의 양상을 설명한다. 단속은 자신과 다른 의견이나 타인의 고통같이 이질적인 것의 침입을 철저히 차단하면서, 동질적인 것이나 취미공동체에는 과도하게 접속하고 의존하는 사회현상을 개념화한 말이다. 즉, 차단하고[斷] 접속한다[續]는 의미의 결합이다. 아울러 타인과의 진실한 만남이나 부딪침을 피하기 위해 거리를 두고 자기를 단속(團束)한다는 의미도 지닌다.


 같고 비슷한 것에는 끊임없이 접속해 있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같이 조금이라도 나와 다른 것은 철저히 차단하고 외면하며 이에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 또한 자기를 ‘단속(團束)’하며 타자와의 관계는 차단하며 동일성에만 머무르며 자기 삶의 연속성조자 끊어져버린 상태, 이것을 나는 ‘단속’이라고 이름붙이고자 한다. p10


  한국사회는 시민 대다수가 자기가 속한 가족, 직장 내에서 소통이 매끄럽지 않음을 호소하는 한편 정작 그 불통의 당사자와는 일대일로 직접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불통 그 자체의 공간이다. 그러면서 그 스트레스를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또다른 힐링의 공간에서 해소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현실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누적되며, 현실로 돌아온 사람들은 다시 피로와 무력감에 휩싸이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처럼 자신과 다른 남의 생각을 도무지 인정하지 못하고 소통에 무력하며 자신과 친밀한 ‘취향의 공동체’에만 기대는 것이 단속사회의 대표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초조함이 지배적인 감정상태가 된 사회에서 개인들은 자신을 멈추게 하는 다름/차이와 철저히 차단하려 한다. 이런 사회의 특징은 한마디로 ‘이질공포증’이다. 이질공포증 사회에서는 외부의 낯설고 모르는 것의 침입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공동체에 활기를 불러 넣을 수 있는 문제제기도 귀찮아한다. 이런 문제제기는 생동적이고 활기는 있지만 동요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질공포증은 이런 “귀찮은 상호작요에서도 물러나 틀어박히겠다”라는 것이다. 그 결과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르고 낯선 외래의 ‘타자’를 멀찍이 거리 두려는 노력, 소통하고 조정하고 상호간 충실할 필요를 사전에 없애는 결정”이 사회를 지배한다.

   이질공포증의 사회에서는 나와 같지 않은 것에 대해 불온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자신들이 기껏 구축한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을까 경계하고 그 차이를 추방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p239


   사회학적인 주제를 인문학적인 특성이 돋보이는 글쓰기와 어우러졌다. 저자의 혜안과 유려한 글쓰기에 감탄하며 읽게 된다. 물론 오랜 시간의 연구와 관찰이 이 글의 맛을 더하였을 것이다. 익숙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글로 표현된 것을 보니 마음을 콕 집어낸 것 같다. sns에 집착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표면적으로가 아니라 통찰한 이 글은 날카로운데 부드러운 느낌이다. 생생한 현장의 사례들을 통해 저자가 분석하고 지적하는 문제들에 공감하며 또한 그가 제시하는 대안에 수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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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한 사람들에게 - 공감하라! 행동하라! 세상을 바꿔라!

원제 An Die Emporten Dieser Erde!

 

 스페판 에설 저, 유영미 옮김, 뜨인돌, 2012.

 

 

   저자는 말만 내지르는 사람이 아니다. 앞서 저자는 “분노하라”고 외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분노했다. 대한민국에는 엉뚱한 방향으로 분노하는 사람들이 가득하지만. 어쨌든 저자의 메시지들을 ‘옳게’ ‘바르게’ 이해한 이들은 분노했다. 그렇다. 그러고 난 다음엔?

아 책은 분노하라는 메시지를 던진 이후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분노하라고 해서 분노했고 분노한 사람들에게 다시 저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공감하고 행동하라고. 그래서 세상을 바꾸라고 말한다. 이 책은 또다시 저자의 연설을 글로 바꾸었고 다른 학자들과 청중들과의 대담을 함께 묶어 만든 책이다.

   1부에는 저자의 연설문으로 저자의 신랄함이 나타나며, 2부 「지금은 깨어날 때)」에서는 앙드레 마티와 청중들과의 대담으로 인류의 현안들에 대한 일관된 신념이 나타난다. 3부 「공감하라! 지속적으로 항의하라」에서는 롤란트 메르크와의 대담으로 역사, 철학, 문학, 예술을 넘나드는 해박하고 독창적인 사유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프랑스의 문필가 몽테스키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는 좋지만 가족에게 나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안 된다고 말한다. 가족에게 좋지만 조국에게 나쁜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안 된다고 말한다. 내 조국에는 좋지만 이 세계에 나쁜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안 된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자세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올바른 세계시민의 자세라 할 수 있겠지요. p78

 

 "저항, 그것은 창조이며 창조, 그것은 저항이다!“ 텍스트 속에서 읽지 않으면 굉장히 추상적인 문장입니다. 이 문장은 무슨 뜻일까요? 창조는 언제나 저항에 부딪히고 저항은 뭔가를 창조할 때만 실현된다는 것을 생각하며, 마티 씨를 비롯한 귀한 청중들과 작별을 하고자 합니다. 자, 다시 일어나 저항하고 창조합시다! p79

 

   스테판 에셀의 말은 군더더기가 없고 핵심을 명확히 하고 있기에 읽기에 편하다. 또한 그것이 연설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저자의 얘기에 빨려 들어갔는지 알 수 있을 듯하다.

   현재 서구사회에 나타나는 문제점을 정확히 집어내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오랜 시간 활동한 이의 확신과 사회에 대한 통찰과 관심이 묻어난다. 똑같은 말을 한다 해도 ‘스테판 에셀’이니까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그의 삶과 함께 저자가 말하는 목소리에 감동하게 되는 것이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경험에 대해 사람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같은 말을 전하는 것에서 울림이 다른 것이 오로지 스테판 에셀이 말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프랑스 사회에서의 울림이 그러했던 것, 스페인으로 이어진 것,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스테판 에셀이 전하는 메시지는 한결같기에 또다른 이야깃거리가, 있을 수 있긴 하겠지만, 이전의 메시지보다 강렬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것엔 대안이 따라야 하는 것이니 메시지에 대한 삶의 철학들을 파악할 수 있는 책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분노하라와 마찬가지로 연설이라는 짧은 분량을 책으로 만들어 내다 보니 느껴지는 아쉬움을 위해 여러 대담을 싣고 있다. 이런 대담 덕분에 이 책의 아쉬움이 달래 진다. 자칫, 스테판 에셀을 앞세워 책팔아 먹기로 호도될 뻔한 출판사인데, 이런 노력들 덕분에 그 점은 쉽게 가라앉혀진다.

   특히 한국어판에서는 신자유주의에 관한 사진이 있다. 사진작가인 이상엽, 정택용 씨의 사진이다. 저자가 말하는 신자유주의의 문제점과 오버랩되며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시각적으로도 각인할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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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Indignez Vous!

    

  스페판 에설 저, 임희근 옮김, 돌베게, 2011.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맞섰던 레지스탕스 투사이고 외교관을 지낸 93세 노인이 외친 연설을 출판사의 적극적인 권유로 책으로 만들어 엮은 것이다. 연설을 묶은 책이라 지극히 짧다. 연설문이라서인지 전하는 메시지가 확실하고 내용이 불충분하지 않다. 또한 힘이 있다. 거기에 저자인 스테판 에셀에 대해 소개하고 특히 인터뷰를 통해 저자의 인생과 메시지를 더 이해하게끔 해주고 있다.

   저자가 전하는 핵심은 프랑스가 처한 지금의 현실에 대해 분노하라는 것이다. 저자는 전후 프랑스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레지스탕스 정신이 반세기만에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사회 양극화, 외국 이민자에 대한 차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금권 등에 저항할 것을 주문한다. 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이며, 인권을 위협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찾아가 기꺼이 힘을 보태라고 호소한다. 대한민국에도 확실히 딱 알맞은 메시지 아닌가!

 

p22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 책은 ‘글’의 문장력 때문에, 전하는 메시지 때문에 흡인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오늘날의 사회를 살다보면 한번쯤 듣게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100세에 가까운 노인이, 젊은 시절 나치에 맞서 투쟁하고 수용소를 전전하며 목숨을 잃을 뻔했던 당사자가 오늘날의 현실을 보며 전하는 메시지이기에 더 울림이 크다. 스테판 에셀은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유대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이 프랑스에 산 덕분에 프랑스 예술가들을 보며 자란 그는 이후 1937년 프랑스인으로 귀화한다. 하지만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군에 징집된다. 1941년에 런던으로 가 드골 장군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에 합류하여 방첩・정보・행동 담당 총국에서 일하는데 1944년에 그는 게슈타포에 체포된다. 이때 그의 체포는 누군가의 밀고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특히 물 담긴 욕조에 머리를 밀어 넣는 고문을 많이 받은 모양인데, 교수형을 당하기 전날 극적으로 탈출한다. 그는 수용소 안에서 티푸스로 사망한 프랑스인과 신분을 바꿔치기 해서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수용소로 이감되던 중 탈출하고 또 다시 잡히고 또 다시 탈출했다. 2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 그는 그렇게 살았다.

 

“이렇게 삶을 되찾았으니, 이젠 그 삶을 걸고 참여해야 했다”

 

   이 말이 그의 회고록에 있다는데, 수없는 시도 끝에 그곳에서 살아남은 그의 인생에 대해 대변하는 말 같기도 하다.

   저자가 단지 지난날 나치에 대항한 레지스탕스였다는 이력만으로 이런 메시지를, 이런 말을 했다는 것 외에 그의 이력 또한 중요하다.. 저자는 이후에도 외교관 활동을 했고 유엔에서 비서직을 맡아 1948년에 세계 인권 선언문의 초안 작성에 참여하기도 했다. 유엔 주재 프랑스 대사, 유엔 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를 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러한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끊임없이 사회에 관심을 쏟고 활동을 이어나갔다. 아프리카 노동자 교육협회를 창설했고, 1996년에는 80세의 나이로 교회를 점거한 이주노동자와의 협상주재에 나서기도 했고 환경문제, 인권문제 등등에 관심을 쏟으며 관심을 쏟는 만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런 저자, 자신의 경험과 그리고 실천적인 활동이 함께 했기에 그의 메시지는 진정성이 있고 울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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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할 틈도 없이 어느새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오찬호, 개마고원, 2013.

 

   몇 년 전 임대주택에 당첨되어 서울에서 아파트 전세에 사는 것을 호사를 누리고 있다고 말하는, 몇 호선인지 모를 지하철 종점 부근에 살고 있는 두 아이의 아빠인 저자는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여러 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인터뷰도 하고 글도 쓰고. 개인 블로그는 사회문화에 대한 비평을 주로 싣고 있으며 우수 블로그로도 선정되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분이다. 그가 이러한 불로그를 운영하며 연구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며 관심가지는 것은 이렇단다.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는 사회의 ‘지적 총량’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다는 생각 아래, 현대사회가 개인의 생활스타일을

어떻게 창출하는지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세대담론으로서 이십대가 현 사회를 살면서 가지는 생각과 태도를 바라본다. 기본적으로 이십대가 사회에 대해 가지는 생각, 이들이 생각하는 사고의 틀이 어떻게 틀을 자리잡게 되었는지를 파악한다. 저자는 총 4장으로 나누어 1장에서는 이 글의 발단이 된 이십대의 생각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2장에서는 이십대가 처한 현실을 3장에서는 이십대가 왜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원인들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다. 그리고 4장에서는 이러한 현실,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며 이십대를 위해 해야 할 일, 이십대가 가진 문제의 원인을 치유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십대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경쟁논리에 갇혀 무수히 자기계발을 통해 이 길을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은 개인적인 자기계발로 바뀌어질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저자가 가지는 기본 생각이다. 무엇보다 이십대는 현재 극심한 불안에 놓여 있고 그로 인해 사회의 문제들을 자기 일로 생각하기보다 외면해 버리고 개인의 생에만 집착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지방대, 학벌 등 학력 차별을 당연시하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에 대한 관심도 적다. 이것은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노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차별을 당연시하며 ‘차별’을 하고 있는 이십대를 지배하는 담론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노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엔 이십대를 직접적으로 만나기 어려워 이십대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맞닥뜨리니 놀라울 뿐이다. 유머 반 진담 반으로 가장 무서운 것은 10대라는 말이 있었는데, 여전히 있지만, 나도 갈수록 어린 세대와 공감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끔 된다. 서로의 생각의 차이, 방향의 차이가 크다. 하지만, 이것은 저자가 말했듯이 슬픈 현실이고 분명 바뀌어져야 할 것이고,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그 길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초인’이 되어야 하는 사회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회다. 그런데도 초인적 노력으로 사회구조의 장벽을 뚫은 그 미세한 확률에다 사람을 몰아넣는 자기계발의 이야기들이 판치고 있는 세상이다. ‘자기계발서’라는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이십대들은 자기통제의 고통을 참아내고자 스스로에게 방어막을 친다. 자신이 경험하는 차별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순간 ‘자기계발의 패배자’로 낙인찍히는 사회를 살아야 하는 이십대들은, ‘사회적 차별’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 차별에 자신이 당하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남을 차별하는 것 역시 정당화한다. 그렇게 위계화된 학교서열에 대한 집착은 이십대에게 가장 통속적인 자기 방어기제가 되었다. p232

 

   이십대에 대한 담론을 펼치는데 저자는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시작하고 대화를 통해 생각을 이끌어낸다.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기에 직접적으로 그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고 의문에 대한 토론까지 이어진다. 이십대를 피상적으로 보며 논의를 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방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십대의 전부가 대학생은 아니기에 부분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십대에 대한 담론이라고 보기보다 오히려 대학생들의 담론이라고 보는 것이 더 어울릴 듯도 싶다. 어쨌든 핵심은 자기계발이 강요되는 사회에 대해 말하며 이 담론에 갇힌 이십대 대학생들의 생각들을 파헤치고 있다.

   그래도, 사회는 젊은 청춘들에 기대를 건다. 어쩌면 그러한 기대에 대한 부담이 클 수도 있겠다. 그래서일까 이십대들의 말은, 이해가 어렵다. 이해가 어렵다기보다는 그들에 대한 기대로 ‘어찌 그렇게 생각할 수가’가 되는 것일 게다. 그들의 생각이 안타깝고 답답하기 그지없다. 물론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진 않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사회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이십대의 생각의 편린을 통해서 개인이 아닌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이끌어 내고 그에 대한 의견을 펼치는 것, 지속적으로 우리 사회가 가져야 할 문제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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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바보들! 자네들은 나를 기관단총처럼 써먹어야 돼.


      노먼 베쑨이 자기 시대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쳐 해결해 나감으로써 역사의 진보에 기여한 것은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앞선 자의 길인 것이다(p14).


  이 인물사는 베쑨의 생애를 시간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물론 시작은 그의 죽음으로 출발하여 과거를 회상하는 형태이다. 베쑨이 성장하던 어린 시절과 의학을 공부하기까지의 시절을 제1부 우리 시대의 영웅에서 기록하고 있다. 제2부는 생명의 칼 정의의 칼이라는 제목으로 의사로서 결핵에 걸려 이 병을 극복하고 다양한 수술기구들을 개발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다루었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될 당시의 제목이 바로 이 제2부의 제목이다. 제3부는 스페인내전이 일고 있는 전장에서 혈액을 공급하며 활약한 모습을 다루고 있다. 제4부는 중국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병원을 세우고 의료진을 양성하는 베쑨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공저자들이 서문에서 밝혔듯이 그들은 베쑨의 일기와 편지 등을 수록하고 그의 생애를 설명하기보다는 기술하였다고 했다. 전체적으로 잔잔한 영화 한편을 보는 느낌이랄까. 도입부와 결말 부분이 일치하는 것 역시, 현재에서 과거 회상씬으로, 그 현재에서 또다시 과거 회상씬으로 연결되는 것 역시 영화적인 느낌을 갖게 했다. 그러고 저자를 찾아보니, 저자가 각본가였다. 그렇기 때문인지, 묘사적인 부분이 매우 부족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베쑨 자신의 기록으로서 그 감정이나 사고를 제시하고 있지만, 저자들의 일종의 해석이랄까. 저자의 의지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느낌이 덜했다는 것이다. 물론 서문이나 에필로그에서 기술한 노먼 베쑨에 대한 직접적인 저자의 의견이 없이도 닥터 노먼 베쑨의 삶에서 그의 인생철학에서 우리는 노먼 베쑨이 어떠한 의사이고, 혁명가이며, 사람인지를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이든 영웅이란 자기 시대가 모든 사람들에게 제기하고 있는 주요 과제들을 뛰어난 결단력과 용기와 능력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오늘날 이러한 과제들은 전세계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따라서 현대의 영웅은 그가 자국에서 활동하든 타국에서 활동하든 간에 역사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당대적인 의미에서도 세계적인 영웅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p22).


 노먼 베쑨은 의사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무기를 가지고, 즉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그 일을 통해 투쟁했다. 그는 자신의 분야인 의학에서 전문가이자 개척자였다. 그는 자신의 무기를 늘 새로이 날카롭게 갈았다. 그리고 그는 파시즘과 제국주의 반대투쟁의 선봉에 서서 자신의 능력을 초지일관의 자세로 열성적으로 발휘했다. 그가 볼 때, 파시즘이란 인류에게 그 어느 질병 못지않게 사악한 질병이었다. 그것은 무수한 사람들의 정신과 육체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의 가치 자체를 완전히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건강과 활력과 번영에 기여하는 모든 과학들을 부정해 버리는 전염병과도 같은 것이었다(p22~23).


 그 후 또 많은 세월이 흘렀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에 대한 평가 역시 변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의 명성은 감소되었고, 어떤 사람들의 명성은 증대되었다. 그러나 베쑨의 명성은 아무런 도전없이 계속 커질 뿐이다(p612).


닥터 노먼 베쑨, 1922년

(http://ko.wikipedia.org)

지금은 노먼 베쑨 기념관으로 활용되는 베쑨의 생가

<출처: http://blog.naver.com/lebendiges>


  아무래도 실제 삶을 살아간 이의 인생을 엿보게 되면, 특히 그가 영웅으로 칭송받는 이라면, 그가 살아온 인생 전체가 감동이다. 따라서 어떠한 부분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가 살아온 인생을 평가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약간의 주저함이 생긴다. 결국 나는 그의 삶에서 애처롭고 애처로운 사건에 대해 감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전기를 인물의 생애로 보지 않고 그냥 하나의 글로서 생각한다면, 그의 일기와 편지들이 생동감이 느껴져 좋았다. 1부에서의 그의 글들은 그의 내적인 변화와 비교적 개인적인 상황과 인과에 의한 변화와 각성이라면 2부 3부와 4부는 개인을 탈피하여 세계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의 변화를 보다 힘차게 각성하는 것이라 유달리 느껴진다. 실제 그가 공산당원이 되면서 하는 연설이나 병원을 설립하면서 하게 되는 연설들, 친우들에게 보내는 편지들에서 그의 현실 속에서의 생각이나 느낌이 묻어나 있어 그러한 편지들에 담긴 글이 매우 좋다.

  베쑨은 의사로서 자신의 본분을 통해서 사회적인 변혁까지를 생각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작은 의사에서 큰 의사로 변화되기까지 사회현실을 인식하며 주장하는 국민보건에 대한 그의 생각, 사회복지에 대한 생각에 대한 담긴 글들이 인상깊게 다가온다. 복지과잉시대라고 부르지만 아직 보편적 복지보다는 잔여적 복지에 대한 개념이 행해지는 이 시대에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다. 대표적인 그의 말을 덧붙인다. 


  국민보건을 확보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은 질병을 재생산하는 경제체제 자체를 변혁시킴으로써 무지와 빈곤가 실업을 없애는 것입니다. 환자 개개인이 자신의 치료비를 지불해야 하는 현재의 관행으로는 국민보건을 확보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의 관행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비효율적이며 소비적이며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것입니다. 우리 의사들과 개인 자선가들 그리고 박애단체들이 그 존속을 도와왔습니다. 그것은 19세기의 개막기에 일어난 산업혁명과 함께 이미 1세기 전에 마땅히 사멸되었어야 했습니다. 사회의 각 부문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사적 건강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건강문제가 다 공적인 것입니다. 일단의 사람들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에 걸린다면, 그것은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국민보건이라는 문제는 정부의 주요한 책임이자 의무로서 인식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p205).


  사회주의 의료제도의 반대자들이 강조하는 주요 반대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 첫째, 창의력이 사라지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아마도 인간 당나귀들은 이 현대적 야만상태 속에서 당근이 코 앞에서 자신을 유혹해 주기를 바라는 모양입니다만, 그 당근이 반드시 황금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명예의 꽃다발도 그 역할을 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관료주의화의 위험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밑에서 꼭대기까지의 민주적 조직통제에 의해 억제될 수 있습니다. 셋째, 환자 자신이 의사를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역시 가공의 신화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유감스럽게도 환자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사들 자신의 입에서 나오고 있을 뿐입니다. 예컨대 환자에게 제한된 선택권을 주어서 소수의 의사들 가운데 담당의사를 선택하도록 한다는 것인데, 만약 환자가 그 의사들 모두가 다 싫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이 의사는 이렇고 저 의사는 저렇다면서 따지고 드는 환자가 있다면, 그런 환자는 정신병원으로 보내야 할 것입니다. 암거위를 요리하기 위해 쓰는 소스는 또한 숫거위를 요리하는 데에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의사가 환자의 선택을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은 한마디로 언어도단입니다. 99%의 환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치료의 결과이지 의사의 개성이 아닙니다(p208).


  많은 페이지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쉽게 읽혀진다. 한편으로 베쑨의 삶을 단순하게 묘사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삶의 굴곡을 굳이 롤러코스터처럼 기술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 극적인 장치는 필요하리라 보는데, 매우 조용조용 다가오는 느낌이다. 그것은, 어쩌면 처연한 느낌이기도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한 것 같다.

  아마도 어떠한 사건을 중심으로 기술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인생을 그가 보낸 편지와 일기들로 정적인 느낌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은 그가 의사로서 활동한 것과 전쟁이라는 특수하고도 당시 보편적인 상황에 처한 역동적인 그의 삶을 조용히 보여주는 것으로 읽힌다. 그러면서 그보다 더 역동적인 그의 생각들이 더욱 부각되는 듯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의 생각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베쑨 자신이므로 공저자들이 그의 생각을 평가한다면 매우 어정쩡했으리라 보는데, 그만큼 그의 일기와 편지들이 수집되어 기록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다행이라고 본다.

  서문을 통해 이 책의 저자가 베쑨과 안면 없는 기자이고 그 기자에게 베쑨의 이야기를 전한 이가 친구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저자에 대한 기록을 통해 신문기자 출신인 저자가 베쑨과 친분이 있고 베쑨과 친분없는 저자의 친구가 자료를 수집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하고 다시 보니 저자는 자신과 베쑨의 친분이 있으면서도 개인적으로 본 베쑨과의 일화를 묘사하지 않고 있다는 데 놀랐다. 그 자신이 희곡이나 영화각본을 많이 쓰고 신문기자로 활동해서인지 영화적 대본 느낌과 함께 전체적으로 기사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저자가 본 베쑨의 모습이라거나, 다른 모습들을 기술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다. 오히려 베쑨 자신의 기록들을 중심으로 엮어 가다 보니 이는 자서전을 읽은 듯한 모습이다. 다른 인물에 대한 평전들을 보면, 어쩔 때는 지나치게도 저자의 개입이 흐름을 방해하기도 한다. 물론 이 책은 그런 방해를 조장하는 느낌은 없지만, 또한 같은 맥락에서 보다 베쑨을 이끌어내는 묘사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사회적인 상황에 대한 묘사가 각 장의 시작뿐만 아니라 베쑨의 일기나 편지와 함께 나타나면 더 좋았을 듯 했고, 베쑨이 죽는 장면에서 멈춰지는 것이 아니라 베쑨의 행동과 그의 존재가 변화를 이끌었던 중국 마을에 대한 이야기도 더 덧붙여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살아남은 베쑨의 가족과, 친구, 동료들에 관한 이야기가 부록으로 소개되었으면 한다거나 이 책에서 많은 등장인물들은 분명 실존인물임에도 가명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 아쉽다. 아마도 익명으로 요청받았던 듯한데 이 전기가 보다 사실적일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런 부분들에 대한 세심함이 필요했을 듯 보인다. 더구나 베쑨 자신 그의 생애에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의 일들을 이루어냈을 터인데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가 별로 없어서, 베쑨이 살았던 그 시대 그 인물들과 베쑨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도록 설명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베쑨은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오로지 홀로 각성하고 홀로 행동하는 인물인 듯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조금 언급되는 인물에 대한 주석을 통한 소개와 관련된 사진들이 첨부되었으면 하고, 무엇보다 베쑨의 기록들을 참고하고 있으니, 어느 한 장이라도 베쑨의 자필 편지나 일기를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가끔은 커피라든가 로스트 비프 또 애플파이라든가 아이스크림 같은 것들이 간절히 생각날 때가 있다네. 천국의 음식에 대한 망상이랄까……. 그리고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은 책이라네. 지금도 여전히 책이 씌어지고 있는가? 음악이 아직도 연주되고 있는가? 자네는 여전히 춤도 추고 맥주도 마시고 그림도 구경하는가? 부드러운 침대의 깨끗한 시트 위에서 잠을 잔다면 어떤 기분일까?(p572)


  전쟁속에서 이와 같은 기록을 남긴 그의 필적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내밀한 저 마음들을 함께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애틋하고, 감사한 마음에.

  바보들! 자네들은 나를 기관단총처럼 써먹어야 돼!

  이 역시도 전쟁통에서 노먼 베쑨이 한 말이다. 그의 마음과 그의 행동들이 기관총처럼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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