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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분투기
정은숙 지음 / 바다출판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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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일의 director가 된다는 것. 누구나 한 번 쯤 꿈꾸어 보지 않았을까.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한 번 쯤은 직접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고 직접 책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생각만큼 만만한 일은 아닐지라도, 어떤 책을 보다가 이렇게 밖에 못 써? 이렇게 밖에는 못 만들어? 이러한 건방진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래도 남들보다 책을 조금 더 많이 읽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책 한 권 세상에 내놓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봤지만 어떻게 그 정도의 책을 감히 세상에 내놓을 생각을 하느냐고 반문하는 냉정한 독자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출판사 마음산책의 대표인 편집자 정은숙이 편집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기록한 것이다.

어떻게 출판인의 길에 들어섰고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에게 맞는 분야를 찾아 매진했고 한 출판사의 대표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는지 비교적 자세하고 성실히 기록하고 있다. 

편집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이렇듯 자세하게 고백한 책은 아마도 처음이지 싶다.

간혹 작가의 인터뷰 속에, 혹은 작가가 주인공인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편집인들의 모습은 작가에게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작가의 신념을 무시하고 대충 상품성만 따지는 인물들로 비춰지기 일쑤였는데 (실제로 그런 편집자들도 없진 않겠지만) 이 책 속에서 드러나는 편집자의 모습은 불교에서 말하는 천수보살이나 만수보살처럼 보인다.

그만큼 책 한 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편집자의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어떤 책을 만들 것인가에 대하여 궁리하고 모색하는 기획자로서, 좋은 책이 될 수 있는 좋은 글을 알아 볼 수 있는 독자이자 감식가로서, 저자를 배려하고 저자와 교감하는 매니저로서, 책의 얼굴을 찾아주는 예술가이자 디자이너로서, 책의 매력을 어필하는 홍보인으로서,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 총감독으로서, 편집자의 역할은 다양하고도 중요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예로 들고 있는 책의 대부분이 마음산책에서 출간된 책들이고 그 책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도 하나의 홍보 전략이 아닌가, 편집자로서의 삶 전체를 조망하기엔 다소 국소적이고 한계가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편집의 전 과정을 한 눈으로 이해할 수 있고 편집자로서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출판인이나 편집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단지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책을 기획하고 출간하는 전 과정을 볼 수 있다는 것도 꽤 흥미로웠다.

더불어, 편집자 정은숙이 사회 초년생으로 출판에 입문하여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걸고 하나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게 될 때까지 겪어왔던 시행착오의 과정을 지켜보며 편집자로서의 삶을 넘어서, 전문가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배울 수 있었다.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바탕으로 지혜롭고 열정적으로 행동할 것. 

스스로 먼저 감동 받을 줄 알고 사람들에게 그 감동을 돌려줄 것.

그녀의 이러한 조언은 꼭 편집자가 아니더라도 인생의 어느 분야에서나 통하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게으름에 빠진 무료한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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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오 마이 캡틴


키팅선생님(로빈 윌리암스 분)


토드 앤더슨(에단 호크 분)

중학생이었을 무렵에 이 영화를 tv로 처음 봤다. 꿈 많던 소녀 시절(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참...)한 마디로 필 받고 감동 먹어서 학교 도서관에서 소설로도 보고 키팅 선생님이 떠난 그 이후의 이야기까지 빌려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Carpe Diem. - 오늘을 즐겨라. 키팅 선생님이 남겼던 이 말이 하도 근사해서 방학 때 친구에게 편지나 엽서를 보낼 때 끄트머리에는 항상 저 말을 적어넣는 간지러운 짓도 많이 했다. 당시에 공공연히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님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 고 말하고 다녔으니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새삼 다가온다. 대략 십 년이 흐른 지금 몇 차례 꿈이 바뀌는 우여곡절을 거친 후 나는 결국 키팅 선생님처럼 선생님이 되었으나 키팅 선생님같은 선생님이 되지는 못했다. 기회가 되어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다면 왠지 부끄러워질 것 같다.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고등학교인 웰튼 아카데미에 영어 교사 키팅 선생님(로빈 윌리암스 분)이 부임해 오면서 영화는 전개된다. 키팅은 기존의 고답적인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학생들을 지도한다.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기 위해 학생들을 하나씩 책상 위로 올라가게 하기도 하고 교과서의 불필요한 페이지를 가리키며 직접 손으로 찢어내라고 말한다. 그는 휘트먼의 싯구를 인용하며 학생들에게 자유의 가치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상상력에 대하여 가르친다. 보수적인 학풍에 갑갑해 있던 학생들은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리 참다운 인생의 가치를 역설하는 그에게서 존경과 매력을 느낀다. 이후 키팅을 따르던 몇몇의 아이들은 그로부터 전해 들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모임을 조직하고 학교 밖으로 빠져나와 동굴 속에서 모임을 가지며 그 동안 억압되어 있었던 자유를 발산하는 기쁨을 누린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들 멤버 중의 하나였던 닐이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연극의 주연을 맡으면서 아버지로부터 전학을 가라는 명을 받게 되고, 닐은 배우가 되리라는 자신의 꿈을 이해받지 못함에 괴로워 하다가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 만다. 결국 이 사건으로 모임은 해체되며 키팅은 책임을 안고 학교를 떠나게 된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세 번 째 사진, 수줍은 소년 토드 앤더슨(에단 호크 분)이 짐을 챙겨 나가는 키팅 선생님을 향해 Captain, oh my Captain을 외치며 책상 위로 올라가는 장면이다. 반전이라면 반전일 수도 있는 것이 토드는 늘상 다른 학생들의 의견에 묻어가는 식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생활을 해 온 상당히 수줍고 소극적인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듯 눈에 띄지 않는 자신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여 주고 자신감을 키워 준 키팅을 향한 마지막 헌사로 교장 선생님과 다른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용감하게 책상 위로 올라가서 오, 나의 선장을 부른다. 그러자 키팅을 사랑했던 몇몇 학생들이 함께 책상 위로 올라선다. 교장 선생님이 당황하여 Sit down을 외치며 흥분하는 모습은 장면을 더욱 감동적이고 감칠맛 나게 하는 조미료의 역할을 해낸다. 학교란 왜 늘 이런 우스꽝스런 풍경을 자아내는 것일까.

과거의 웰튼 아카데미의 현실에 비해 현재에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더 각박해지고 치열해졌을 뿐이다. 여전히 키팅 선생님은 내 마음 속에 중요한 상징처럼 남아 있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그래도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가르친다. 이미 아이들부터가 사회로부터 무의식 중에 이식 받은 탁월한 현실 감각을 바탕으로 돈과 성공의 의미에 대해 꿰뚫고 있는 경우도 많다. 바야흐로 카드를 한 번 드르륵 긁으면 행복이 와르르 쏟아지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요즘같은 세상에 김소월의 시집 한 권이 신형 휴대폰보다 더 나은 가치를 지니고 길거리 밴드 드러머를 꿈꾸는 사람이 성형외과 의사를 꿈꾸는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이라고 과연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세상의 기득권은 꿈이 아니라 돈을 가진 자의 것이다. 가진 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가진 자의 룰을 따르지 않으면 가난한 보헤미안으로 살 수 밖에 없다. 나는 이번에 상고로 원서를 낸 아이들에게 지금부터 자격증을 닥치는대로 몽땅 따서 나중에 조금이라도 조건 좋은 곳에 취직한 다음 돈을 잔뜩 벌라는, 그지같은 조언을 했다. 그 중엔 밥보다 춤을 더 좋아하는 녀석도 있었지만 더욱 열심히 춤을 춰서 댄서가 되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인문계고로 원서를 낸, 집안 형편이 좀 낫고 공부에 취미가 있는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죽을 힘을 다해 공부해서 침체의 늪에 빠진 지역 사회를 일으키는 장본인이 되라는, 역시나 그지같은 충고를 했다. 그걸 누가 모르나? 그렇게 사는 법을 누가 모르냐고. 나는 결국 일 년 동안 아이들에게 새로운 것이라곤 눈꼽 싸라기 만큼도 가르치지 않았고 그것은 나 자신부터가 일정 궤도에 올라 그 궤도를 이탈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뻔하니 아둥바둥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만 없다면 학교는 얼마나 평화로운 곳이 될 것이냐, 라는 당최 앞뒤가 안 맞는, 누가 들으면 큰일 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생각이나 하고 앉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요즘에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가 보다. 初心 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랄까. 몇 년이나 묵었다고 이리 빨리 노쇠했는지. 처음 아이들을 마주했을 때 지나친 열정으로 중심을 못 잡고 허둥대던 그 모습 속에서 근래에 엄습해오는 매너리즘의 해법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아이들에게 다가서는 방법을 모르고 나 자신에 대한 정립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가 교사를 배출하는 시스템의 폐해를 나를 보면 정확히 알 수 있을 정도다. 다른 건 좀 부족하더라도 외모가 빼어나서 뭇 남학생들의 환심을 사는 방법도 있겠으나 어차피 아이들의 감성을 자극하게 생겨주지 않은 데다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전락하는 건 시간 문제니 그것도 물 건너 갔다. 아무튼 재충전과 재도약이 필요한 이 시기에 나부터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고 노력해야 아이들에게도 그 에너지가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은 방학 기간 동안 교직은 心術이라고, 내 마음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겠다. 어떻게 살든 그것은 각자의 몫이지만 기왕이면 오래 갈 수 있는 가치를 심어주는 교육을 해야 할 것 같다. 뚜렷한 철학을 기저로 정말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매 시간 매 초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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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12-29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갑자기 하우스가 보고 싶어집니다. 오- 윌슨!

깐따삐야 2005-12-29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보지 않는 드라마라서. ^^ 성장한 닐의 모습을 보고 싶네요.

마늘빵 2005-12-31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캡틴 오 마이 캡틴 하면서 책상위로 일어서는 저 장면.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ㅠ_ㅠ 저도 키팅선생이 되고파요. 먼저 교과서부터 찢어야되나...?

깐따삐야 2005-12-31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쿠. 저는 아마 애들 앞에서 교과서를 찢어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거에요. 워낙에 그렇고 그런 이미지라서.

BRINY 2006-01-02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제 서재에 글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깐따삐야님은 중학교 선생님이신가봐요. 저도 작년초까지는 중학교에 있었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저도 눈물 흘리면서 본 영환데, 얼마전 이 소설을 읽는 학생을 발견하고 찡했어요.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 책이 아이들에겐 공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현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모든 학생들이 책상 위에 올라간 게 아니라, 여전히 신경 안 쓰는 척, 나랑 관계 없는 척하면서 의자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는 학생들도 있던게 더 인상적이었어요.

깐따삐야 2006-01-02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 저도 예전에 이 영화를 울면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지금도 울면서 볼 것 같아요. 영화 속 키팅 선생님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울 것 같거든요. 후우-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질책은 그것이 과녁에 적중하는 만큼만 피해를 줄 수 있다. 자신이 어떤 질책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만만하게 그런 질책을 경멸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  - p. 168

따라서 웃음은 최고의 익살꾼의 손에 쥐어지면 도덕적 목적을 획득하며, 농담은 다른 사람들이 성격과 습관을 바꾸도록 촉구하는 수단이 된다. 농담은 정치적 이상을 표현하고, 더 공정하고 더 멀쩡한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 p. 224

정치적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은 기후 위성으로 기상 상태의 위기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늘 문제를 막아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거기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유용한 것을 가르쳐준다. 그 결과 피해의식, 수동적 태도, 혼란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 p. 288

물론 기독교는 세속 도시와 그 가치를 없애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도 서양에서 사람들이 부와 미덕을 구분한다면, 또 중요한 사람이냐 아니냐만 따지지 않고 선한 사람이냐 아니냐도 따진다면, 그것은 많은 부분 수백 년 동안 자신의 자원과 위신을 이용하여 지위의 의로운 분배에 대한 몇 가지 특별한 관념을 옹호해온 기독교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 p. 342

어떤 사람이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것이 많다는 뜻이다. 시인이 걸을 수 없는 것은 큰 날개 때문이다.  - p. 372

그러나 지위에 대한 요구는 불변이라 해도, 어디에서 그 요구를 채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창피를 당할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어떤 집단의 판단 방식을 우리가 이해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결국 우리가 따르는 가치와 관련이 되는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따르는 것은 두려움을 느껴 나도 모르게 복종을 하기 때문이다. 마취를 당해 그 가치가 자연스럽다고, 어쩌면 신이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거기에 노예처럼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너무 조심스러워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p. 385

 

알랭 드 보통 / 불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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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남의 관심 때문에 기운이 나고 무시 때문에 상처를 받는 자신을 보면, 이런 터무니 없는 일이 어디 있나 싶어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 p. 22

그러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냉담한 인물들,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 자리를 차지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인물들의 행동은 지위에 대한 우리의 불안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어떤 친구나 어떤 연인은 우리가 파산을 하거나 수모를 당해도 우리를 모른 체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가끔은 그 말을 믿어볼 수도 있겠지), 우리가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속물들의 매우 조건적인 관심이다.  - p. 27

우리는 적은 것을 기대하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도 있다. 반면 모든 것을 기대하도록 학습을 받으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비참할 수 있다. 루소의 벌거벗은 야만인은 가진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타지마할에 사는 후손들과는 달리 그들은 아주 적은 것을 갈망하는 데서 오는 큰 부는 누릴 수 있었다.  - p. 82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  - p. 119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 - p. 124

 

알랭 드 보통 / 불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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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학교 근처에 가고 방학이 되니 Y 생각이 났다. 그 때도 겨울이었을거다. 자취방으로 놀러간 나에게 마른 김가루를 얹은 뜨겁고 고소한 라면을 끓여줬던 것이. 한 쪽 벽면을 그득히 채우고 있던 책들과 목욕탕의 비누 냄새가 기억날 것만 같다. 하지만 지금은 Y를 볼 수 없다. 졸업을 한 뒤로 생활에 쫓겨 Y와의 연락을 잊고 지냈고 언제든 만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녀는 내가 모르는 곳으로 떠났다. 아무런 단서도 주지 않고. 예전에 쓰던 다이어리나 일기장의 귀퉁이에는 Y의 흔적이 남아있다. 색감이나 재질이 독특한 종이에 비스듬히 써 내려간 메모들. 사람을 만나는 것이 힘이 든다는 글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넌 나보다 더 했지.

Y를 처음 본 것은 새내기 시절 교양국어 시간이었다. 작가를 하나씩 정해서 조별로 발표를 하는 시간이었는데 교육학과 대표로 눈에 띄게 작은 여자 아이가 교단에 섰다. 까만 단발머리에 느릿느릿 정감 있는 경상도 사투리,  그녀의 첫인상은 매우 독특했다. 어디서 봤던 사람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한 편, 세상에 저런 케릭터를 가진 여자아이도 드물거야 싶은 독특함이 그녀에게 있었다. 그녀는 일견 평범한듯 하면서도 특이했고 특이한듯 하면서도 익숙하고 편안했다. 나는 단번에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 이후로 우리는 같은 단과대학 내에서 생활했기에 마주치면 눈웃음으로 인사를 나눴고 같은 기숙사 내에서 생활했기에 밥을 먹다가, 기숙사를 오가다가 간혹 마주치면 안녕~ 하며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새내기 시절엔 대개 그렇듯, 본격적으로 말을 건네기엔 뭔가로 둘 다 분주한 상태였다. 그러던 중 우리가 결정적으로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2학기가 되어 동아리 생활을 시작한 나는 괴물같은 선배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으로 동아리 생활의 열혈분자가 되어 있었다. 그 날도 어김 없이 동아리방에서 네눔을 쥑이네, 네년을 살리네 하고 있던 중 동아리 문이 빠꼼히 열리면서 익숙한 표정의 쬐그만 여자 아이가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어, Y잖아? 우리는 반갑게 인사했고 서로가 모르는 사이 똑같이 2학기부터 동아리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때부터 Y와 나의 활약상은 바야흐로 화려하게 펼쳐진다. 늘상 칙칙+암울+꾸리꾸리+사막사막 했던 동아리는 Y와 나, 그리고 여전히 연락이 닿고 있는 자칭, 빨강 머리 앤 H의 합작으로 완죤 개그 동아리로 탈바꿈하기에 이른다. 한 터프했던 총무 언니는 계속 그런 식이면 술을 잔뜩 먹여서 죽여버리겠다고 위협도 했으나 우리는 몰라요~ 좋아라~ 하면서 겁나 놀고 겁나 까불고 겁나 웃었다. 우울한 자태로 쇼파에 파묻혀 있던 선배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Y가 췄던 창밖을 보라, 안무는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적시면 생각나곤 한다. 몹시도 그립게. 정말 아침에 일어나기만 하면 킥킥킥, 웃음이 삐져나오던 호시절 중의 호시절이었다.

그렇듯 철모르게 즐겁기만 했던 우리도 2학년이 되고 슬슬 대학생활에 회의를 느껴가는 시기가 왔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조차 창문에 모래알 비벼대는 소리처럼 짜증났던 시기,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동아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언제든 네가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오라던 선배에게 건방진 눈으로 왜요? 라고 물었던 나는 나중에 동아리에 대한 향수병까지 앓게 되지만 당시에는 어느 곳에든 내가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버겁고 귀찮고 신경질 나기만 했다. 나는 혼자서 무한히 자유롭고 싶었다. 뒤늦게 시작된 사춘기였다. 한편 나의 탈퇴로 잠시 갈등하던 Y는 그녀가 열망하던 것이 있었기에 계속 남기로 했고 동아리와는 무관하게 우리는 가끔 만나서 같이 웃고 같이 울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도 변하고 그녀도 변하고 있었지만 그건 각자의 변화일 뿐 우리의 관계에 변화라곤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 돌연 휴학을 결심한 내가 복학을 해서 학교로 돌아왔을 때 Y는 마치 멸종 위기에 놓인 새처럼 수줍고 두렵게 변해 있었다. 사람 만나기를 극도로 꺼리고 있었고 자취방에 혼자 틀어박혀선 밥도 해먹지 않고 과자만 사다먹으며 단편소설들을 쓰고 있었다. 복학을 한 나는 다른 모든 것을 덮어둔 채 열심히 학과 공부에 매진했고 간혹 신변에 생긴 얘깃거리들을 주섬주섬 챙겨서 Y를 방문하곤 했다. 그녀도 가끔 써모은 단편소설들과 먹을거리를 사들고 내가 사는 자취방을 방문해서 밤이 늦도록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다 가곤 했었다. 밥을 잘 안해먹는 그녀를 위해, 마치 밥을 먹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자취를 하던 나는 반찬을 만들어서 주었고 그녀는 반찬이 있으면 뭐해, 밥을 안해먹는데, 라면서 번번히 거절하곤 했다. 안쓰러웠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사람들을 그냥 가끔만 만나는 것이었고 그녀의 소설들을 읽고 코멘트를 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그냥 두었다. 나처럼 시험을 준비하고 평범하게 살길 바랬으나 Y의 고집은 그녀 자신을 몰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녀 스스로 깨닫기를 바랬다. 너도 시간이 좀더 지나면 우리의 원래 자리로 돌아오게 될거야. 사는 거 별거 있더냐.

그러나 Y는 돌아오지 않았다.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와 쿵닥거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내가 어느 날 Y를 떠올렸고 그녀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수소문을 했을 땐 이미 늦은 다음이었다. 학과에 전화를 했을 땐 자퇴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겨우 예전에 살던 자취방 주소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메일을 보내면 반송되어 돌아왔다. 전화번호도 바뀌고 그녀가 보냈던 편지 겉봉에는 주소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녀가 일하고 싶은 곳이 있다고 간간히 이야기했던 그 곳에도 그녀의 이름은 없었다. Y는 아무런 단서 하나 남기지 않고 총총히 사라졌다. 서울에 가고 싶다 했으니 남동생을 돌봐주면서 어느 대학의 문예창작과라도 다니고 있을런지 기대도 해보지만 혹, 어디로 시집 가서 조용히 살고 있는지 소설을 쓰러 먼 곳으로 떠났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문득문득 Y를 생각하는 것처럼 그녀도 나를 기억해 줄 지 모르겠다. 이렇게 뻔한 생활인으로 변해 있는 나를 보면 무슨 말을 할지도 궁금하다. 나는 그녀가 이런 식으로 사라진 것이 많이 놀랍다거나 원망스럽지는 않다.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숨어 있길 좋아하는 그녀였으니까. 나는 예외가 되리란 생각은 오해였던 것 같다. 누구나 혼자이고 싶은 시간이 있다. 그것은 짧을 수도, 길어질 수도 있다. Y가 어딘가에서 건강히 잘 살아가고 있길 빈다. 그녀와 함께 했던 기쁨들, 슬픔들, 실수와 몽상으로 점철된 시간들, 우리는 왜 그렇게 무모하고 어리석고 착하고 아름다웠는지. 그리고 그녀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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