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2 - 가야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나
김태식 지음 / 푸른역사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1권에 이어서 2권은 가야의 정치체제-사회구조, 가야의 경제, 왜와의 교역, 그리고 각 가야소국들의 지명-지역의 비정등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가야에 대한 정치형태는 가야 연맹체의 존재여부와, 그리고 그 모습이 어떠한지의 견해들이 표출되었다. 가야의 소국들이 있었지만 연맹체 단계에도 가지 못했다는 설과, 10여개의 소국들이 단일 연맹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설, 그리고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대가야연맹이 북부지역에만 존재하고 가야의 남부지역은 그 체제에 포함되지는 않았다는 설, 그리고 가야 전역에 걸치는 가야 연맹체는 없었지만, 여러지역의 소지역 연맹체가 공존하고 있다는 설등이 있다. 여기서 저자의 견해는 두번째, 단일한 연맹체를 [가야소국들 사이에서]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전작인 <가야연맹사>라는 책을 안다면, 쉽게 눈치 챌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런 단일연맹체 설을 지지하는 저자는, 일단 지역연맹체론에 대해서는 단일연맹체내에서도 당연히 근처 지역 혹은 더 비슷한 성격의 가야 소국끼리 연맹을 맺고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단일연맹체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저자는 첫번째 견해, 연맹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설에 대해서는 아주 신중한 견해라고 평하였다. 문헌사료에서 가야 소국들이 연맹체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구조적으로 언급한 사실이 없다는 사실에서 시작된 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문헌사료에서 꼼꼼히 살펴보면, 광역의 소국들이 가야라는 이름에 의해 지칭되고 있고, 김해나 고령 지방의 가야 고분 유적이 규모나 내용이 다른 가야고분에 대해 월등하여, 김해와 고령이 주변지역에 대하여 서열적인 우위를 점했다는 고고학적 으로 보아도 사실인 점을 생각하면, 연맹체론을 상정하는 것은 추론가능한 것이라고 하였다. 대가야연맹은 다나카 도시아키 교수가 주장한 것으로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 제국의 발전 과정을 추구하려는 근래 한국 학계의 연구 성과를 받아들이면서도 부지불식 간에 일본의 전통적인 남한경영론의 맥을 이어받아 절충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제기된듯(39 p.)"하다고 평했다.
이런 점에서 가야 소국들 사이에서의 연맹체가 존재하였음을 상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나에게는 납득이 되었다. 그리고 6가야의 이야기는 고려시대의 전설(?)이 정착이 되어 생겨난 것으로 사실과는 다소 다르다는 것도 인지하게 되었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은 그 많은 가야 소국들 사이에서 관계인데, 연맹의 지도국인 김해의 구야국, 후기 연맹의 지도국인 고령의 대가야, 안라국등의 연맹장을 제하고는 다 비슷비슷한 지위를 유지하였던 것 같다. 대가야나 금관가야의 경우에는 왕의 칭호를 쓰기도 하였다고는 하지만, 가야연맹의 멸망 직전에 있었던 사비회의를 보건데, 통일된 관등체계가 있지도 않았고, 단일한 외교창구를 마련하지 못한 것으로 보면, 중앙집권을 이룬 고대국가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외에, 가야의 주민들은 그 지역의 특성상 당연히 어로에 의지했다고 한다. 사상이나 교역에서의 관심을 다소 떨어져서 설렁설렁 읽어서, 방금 다 읽었는데도 명확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지명-지역 위치의 비정도 아직까지 나의 관심도에서 먼 경우라서 마찬가지로 크게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다음에 다시 읽을 기회가 있다면, 이 부분은 더 집중해서 읽을까 한다.
책을 읽으면서 인상깊었던 것은 가야소국들의 위치 비정을 중요성을 말하면서 든 이야기 였는데, 그것은 이제껏 연구경향이 일제의 남한경영론에 의해서 가야의 영역을 과대하게 비정하는 측면이였다는 것이고,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야(가야연맹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야)한다는 것이고, 그에 연결하여 지명-가야영역의 비정을 강조 한 것이였다. 뭐 비록 난 관심도가 낮은 부분이기는 했지만, 상당히 인상깊었다는 점을 적어두고 싶다. 마지막 3권은 가야 각국사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한다. 바로 읽을까, 아니면 <낙랑군 연구>를 읽고 읽을까 고민 중이다. 본서의 1권에서 포상팔국의 전쟁을 이야기 하면서, 저자가 굳이 4세기에 포상팔국의 전쟁이 일어난 것이라고 여긴 이 당시 공격대상이었던 김해의 구야국이 서북한 지역의 낙랑군이 고구려에 의해서 314년 무너지면서, 선진문화를 받아 영도력을 유지하였는데, 선진문물의 유입경로인 낙랑군이 사라지면서 구야국의 영도력에 균열이 가해진 탓이라고 본 것에 흥미를 느껴서였다. 그러면서 무관심의 대상이었던 한사군의 지배형태에 관심이 조금 더해 졌다. 하도, 한사군의 성격, 위치의 비정 문제가 피(?)튀기는 논쟁점이 되다 보니 물리는 면도 있어서,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본격적으로 한사군의 하나이며 오랫동안 존재했던 낙랑군이 궁금하기도 하기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