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제330호 2014.01.11
시사IN 편집부 엮음 / 참언론(잡지)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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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1년만에 시사in을 보았다. 한동안 몸이 안좋아서 자연스레 세상에 대한 관심도 적게 두었다. 국정원 개입 등 나와 너의 그리고 우리의 공간을 뒤흔드는 그 이슈를 외면했다.  올해에는 다시 열심히 살아보자는 생각에서 시사in과 한겨레21등의 시사주간지의 정기구독을 신청했다. 거기다 더해 월간지인 이코노미 인사이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도 같이 정기구독했다. 조금 더 내가 '잘'살아가기 위해 관심을 유지하려 한다. 

 

 재구독해서 처음 받은 제330호 커버스토리는 역시  작년 연말에 발표한 4차 투자활성화대책에서 언급된 '의료' 부문과 '교육'부문이 되겠다. '의료'부문에서는 자법인 허용과 부대사업의 허용범위 확장이라는 내용이 문제가 되는데, 정부는 건보의 의무가입과, 당연지정제는 건들지 않으므로, 민영화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와 반대되는 의견에는 대한민국 의료의 공공성이란 것은 건보 의무가입제, 당연지정제, 그리고 의료의 비영리화라는 원칙이 하나라도 무너지면, 의료 공공성 자체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런 반대의견에 대해 정부는 당연히 충분히 차단이 쳐져있다는 입장이다. 어차피 기사 자체에서 잘 요약 되어 있으므로,  살펴보면 :

 

"정부는 차단벽을 충분히 쳤다고 주장한다. 첫째, 자법인은 환자 진료 등 직접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 자법인 사업은 부대사업으로 제한된다. 둘째, 자법인 수익은 고유 목적사업에 재투자하도록 강제한다. 셋째, 모법인 순자산 일정 비율까지만 자법인 출자를 허용한다(모법인 의료사업 훼손 방지). 넷째, 부당 내부거래를 제한하고 지배관계 기준을 명확화한다(사익추구 남용 차단). 다섯째, 자법인의 리스크를 모법인이 감당하지 않도록 보증과 이사 겸직을 금지한다."

 

하지만,

 

"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소장은 언론 기고문을 통해, < 표 2 > 의 의료 자법인 구조야말로 SOC 민자사업 브로커들이 즐겨 쓰는 전형적인 수익 빼돌리기 모형이라고 주장한다. 자법인이 의료법인에 주는 배당금을 줄이기 위해 투자자의 돈을 고금리로 빌리는 방법이다."

라고 한다. 솔직히 잘 이해를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다만, 의료에서의 수익이 밖으로 나갈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 정도로 이해를 하였다.  이것도 이것이고, 의료라는 절대적으로 비대칭적인 구도에서는 실질적인 민영화의 효과를 보인다고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연속타로 교육의 영리화 역시 시도하고 있다. 물민영화, 철도민영화...  피로도가 너무 극심하다.  민영화를 절대악이라고 규정할 자신도 없지만, 그렇다고 민영화가 유일한 답인 것도 아니다.  민영화을 전면으로 내걸기에는 국민적인 저항감이 커서, 살라미전략으로 나오는데, 좀 이런 전략이 유용하게 먹혀 들어가는 것 같긴 하다.  그럴때 일수록 이런 언론의 중요성이 큰 것 같다.

 

가장 관심있게 본 기사가 이 커버스토리였다. 내가 좋아하는 천관율 기자의 글이라, 좋았다.   그 외에 관심있게 본 기사는 남수단의 내전을 다룬 기사였다. 파병중인 한빛부대의 장병들이 걱정된다. 일본자위대의 탄환지원과 관련해서 검색어에 며칠전에 오른 적이 있었는데, 이제서야 알았다. 남수단의 내전은 2인자들끼리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결국 보면 이권을 둘러싼 싸움인 듯 했다.  타인의 시선으로 단정해서는 안될일이지만, 너무나 많은 자원이 아프리카 민중에게는 재앙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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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중고정치사연구 경인한국학연구총서 58
김덕원 지음 / 경인문화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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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원 저, <신라중고정치사연구>를 읽고 있다.   약 한달 전에 읽었던 이정숙 저,<신라중고기정치사회 연구>와는 다르게 진지왕계, 그러니까 태종무열왕의 즉위까지의 사륜계의 정치양상을 살피고 있다. 그 시기는 572년부터 654년이고 중고기의 절반 이상에 해당되는 시기다.  이정숙의 저서를 읽고 나서 사륜계에 대한 궁금증으로 선택하게된 저서인데, 동륜계-진평왕을 중심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는 면에서 흥미롭다. 

 

 그런데 아무래도 본 연구가 사륜계의 정치활동에 중점을 보다 보니, 일정한 한계점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고대사의 사료부족이 하나의 한계점일텐데, 특히 진지왕은 4년만에 폐위 당하여서 이렇다할 사료가 없는 것으로 안다. 그 탓에 본 연구방법에서 '적극적인' 자세로 해석을 한다고 하였는데, 그 탓에 과대해석이라 느끼는 부분,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무리가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삼국유사의 도화녀-비형랑 설화에 남겨진 진지왕의 폐위 이유로 내세워진 '정난황음'이라는 것을 재검토해보아야 한다는 것인데, 도화녀의 설화에서 어떻게 진지왕의 현명한 판단력이라는 특징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것이 진지왕의 즉위와 함께 정국운영에서라던지 조력자(세력)이었던 거칠부와 김무력을 대체할 수 있는 세력(사량부 혹은 그에 대변되는 어떤 세력)을 구하고자 했던 것이라는 상징성을 제하고 생각해보면, 그것은 단순히 여인을 농락하고 잘 되지 않자 물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진자사와 미시랑의 이야기에서 진지왕의 지혜를 볼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도화녀 설화의 해석과는 다르게 그렇게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과도한 해석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그 외에 흥미로운 해석들도 있다. 그 중 하나로 진지왕의 즉위에 거칠부가 도움을 준 것은 범내물왕계의 귀족연립정권으로의 복귀라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한 것이다. 삼국사기에 진지왕대의 기록을 보면 대부분이 축성과 백제와의 전쟁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신라가 진흥왕대에 이르러 한강유역을 확보하면서, 고구려와 백제 양쪽에서 파상적인 공세를 감내해야하는 상황에 따른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거칠부는 어린 백정보다는  동륜의 죽음 이후에 가장 유력한 왕위계승자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사륜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당시 신라의 영토보전이라는 현실이 거칠부가 진지왕을 선택한 이유가 되며, 범내물왕계 귀족연합체제로 돌리기 위하였다는 것은, 거칠부가 진흥왕대 혁혁한 군공을 세운 것을 생각하면 다소 어폐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거기다 진지왕 즉위 당시에도 70대의 고령이었는데, 그럴 의지가 있었을 까 하는 것이며, 거기다 만약 진지왕의 즉위에 왕권약화와 범내물왕계 귀족연합체제의 이행이라는 목적이 있었다면, 그에 해당되는 진골귀족들이 동참했을 것인데, 같이 내물왕계 가계집단의 대표로서 정치에 참여했다고 추정되는 '노리부'라는 인물은 진평왕의 즉위에 관여하였으므로, 거칠부의 목적에 거기에 있었다면, 이렇게 정치적 지향이 달라 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저자의 생각인 듯 하다. 

 

 그런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르게 생각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거칠부 본인이 진흥왕대에서 군공을 세우면서 통일 전의 신라에서 최대판도를 이루게 되었다는 점과, 왕권약화를 위해서 정당성이 다소 결여되어 있는 진지왕을 즉위 시키는 것이 어떻게 함께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인지?   그리고 고령일지라도 권력에 대한 욕심에는 끝이 없다는 점을 보면, 나이를 이유로 대기에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물론, 책에서 그렇게 강조한건 아니였지만. 그리고 왕계내에서도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는 분지화가 이루어지는데, 범내물왕계 가계집단 내에서인들 그런 입장이 나뉘어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런 거칠부가 범내물왕계 귀족연합체제로의 복귀를 위해 [진지왕을]즉위시킨 것이 아니라는 해석 하에서 진지왕의 폐위를 동륜계과 사륜계의 대립으로 파악하였고,  동륜과 사륜를 포함하는 왕실과 범내물왕계의 귀족이라는 대립항으로 보는 연구를 비판하면서,  "부자-형제-친족간의 정치적인 갈등이 궁극적으로 왕위(권)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권력의 속성을 간과한 것으로 생각된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몇가지 단어만 바꾸면 똑같은 지적을 할 수가 있게 된다.  범내물왕계 귀족세력이란 것도 단 하나의 동일한 정치적 입장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범내물왕계 귀족연합체제'라는 목표는 같지만, 그 정도나 방법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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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상고기 정치변동과 고구려 관계
장창은 지음 / 신서원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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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책은 신라-고구려간의 관계를 살펴보고 있다. 이들 대외관계는 전반적으로 평등적이라기 보다는 신라가 고구려에 종속된 측면이 강했다.  내물마립간 45년(200년)대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에게 원병요청을 하면서 부터는 종속적인 관계로 전락했다.

 

 이런 신라-고구려의 대외관계 개시시점으로는 본 책에서는  조분이사금16년(245년)대에 고구려가 신라의 북쪽 변경에 침략한 것과 3년후 첨해이사금 2년(248년)대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존중하여 3세기 중반이 고구려와의 관계 개시시점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전까지는 이 기록을 믿지않고 신라가 고구려의 사신과 함께 전진에 사신을 파견한 시점(377년, 381년)에서 고구려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313년,314년에야 이르러서야 축출되는 낙랑군과 대방군과 옥저와 동예가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있다는 지리적 형세와, 244년~245년의 위나라 관구검의 공격으로 인하여 고구려가 신라을 공격할 여력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저자는 4세기전반으로 추측되는 경주월성로고분군 중에 가-5호와 가12호묘에서 고구려 계통의 유물이 발견되면서, 신라-고구려 관계 개시연대가 기존의 이해보다 소급되어 파악할 수 있다는 여지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동예와 옥저가 당시(고구려의 신라와 첫교전 시점 당시)에 고구려에 종속되어 있었고, 관구검의 고구려공격의 경우에는 관구검기공비의 해석과 삼국사기, 자치통감,삼국지 본기와 관구검전, 북사등의 중국측 사료를 분석하면서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246년설을 지지함으로써  신라와 고구려간의 관계가 3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음을 논증하였다.  

 

 이렇게 신라와 고구려간의 관계가 245년의 교전과 248년의 교섭이라는 삼국기사의 기록을 존중하여 믿는다 치더라도, 어떻게 3년사이에 그런 양상의 전향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었을까?... 물론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될 수가 있다지만, 의문점이 생기긴 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당시 신라 내부의 변화(석씨왕실의 분지화)에 따른 것으로 보았다. 아달라이사금까지의 박씨왕의 시대가 종식되고, 석씨인 벌휴이사금이 다음 왕위를 잇게 되었는데, 이 벌휴이사금에게는 골정과 이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벌휴이사금이 죽기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골정은 구도갈문왕인 옥모부인과 결혼하여 조분을 낳았고, 이매의 아들인 나해가 있었는데, 계보상으로 보면, 직계인 조분이 즉위하는 것이 맞음에도 방계인 나해가 즉위하였다.  저자는 그 이유로 골정계와 정치적 제휴를 맺고 있던 구도계 김씨의 당시 정향에 주목했는데, 벌휴이사금 7년에 백제와의 전투에서 구도가 패하였고, 부곡성주로 좌천되었다는 삼국사기의 기사에 주목하며,  구도의 정치적 실세에서 벌휴이사금의 방계인 나해의 즉위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나해에게는 이음과 우로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음은 나해이사금의 재위시 사망하였고, 우로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나해의 죽고 난뒤에 골정계인 조분이 즉위를 한다. 그렇다면, 우로가 당시에 실세를 했는가 치면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왕위를 잇지 못했다는 것에는 어떤 정치적 역학관계에서의 소외를 뜻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245년에 고구려의 공격에 우로가 출정을 나서게 되지만, 패배하였고, 그 이유로 248년에는 서불한이라는 중책에서 물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석우로가 물어나자마자 고구려와의 화친을 맺었다. 당시에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 이매계인 우로라고 추측할 수 있다면, 그 3년 사이에 맺어진 교섭기사는 당시 신라의 왕실세력의 변화에 따른 대외 노선의 변화로 보아도 무난할 것같다.

 

 여기에서 확실히 인지해야될 것은 같은 혈연집단이라고 하여도 그 정치적 입장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같은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하는 다른 혈연집단과의 연대하여 같은 혈연집단에서 이해를 달리하는 이를 숙청할 수도 있다는 것을 더 확실히 느꼈다. 이런 점에서 어떤 왕실이나 권력자 집단에서건 가족과 친척들이 더 무서운 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수양대군은 자신의 집권을 위해 피비린내가 나는 상잔을 벌였고, 결국은 자신의 조카를 폐위하고 죽음으로 이르게 하였다.  세조의 치적이 어떠하더라도 잔혹한 사람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을 듯 하다. 그것보다는 권력의 속성이 그러하다고 하는게 더 맞을지 모르겠다.

 

여튼, 이런 고구려와 대외관계가 개시된 이래, 내물마립간에 이르러서는 고구려에 인질로 실성을 보내고 마립간 스스로가 노객으로 칭하고, 원병을 요청하는 등, 급격하게 고구려와 관계에 있어 종속적으로 변해갔다. 실성마립간과 눌지마립간 즉위에도 고구려의 영향력이 강하게 행사되었다. 그런데 눌지의 즉위는 석씨세력의 완전한 정치적 실세를 뜻하기도 하였다. 이후부터는 김씨의 왕위계승만이 이루어진 것이다. 고구려의 세력의 도움을 받아 즉위한 눌지지만, 왕권행사에 있어 걸림돌이 되는 고구려의 영향략을 강하게 인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던 시점에서 450년에 하슬라 성주 삼직이 고구려의 변방장수를 살해하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고구려의 항의성 침략과 눌지마립간의 사과를 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그런 의도가 어느정도 보인다는 측면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4년이 지난 454년에는 고구려가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치면서 신라-고구려 관계는 경색되었다.  이후에 433년과 434년에 맺었던 나제동맹의 실제적인 활동이 눌지마립간이 455년에 백제를 고구려가 침략하여, 이에 군사를 보내주었다는 기사에서 보인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웅략천황  8년(464년)에는 눌지마립간이 신라 왕경에 거주하던 고구려군사단을 축출했다 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일본서기의 기사를 그대로 취신하지는 않았다, 웅략천황 8년조의 기사에 신라와 고구려의 우호부터 해서 신라왕경에서의 고구려군사단 축출이 한꺼번에 기록되어 있어, 이전의 사실들을 압축한 것으로 보았고, 일본서기 자체가 임나일본부의 한반도 남방경영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왜곡되어 있어서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고 본 것이다. 이런점에서 눌지마립간의 고구려대립의 시점을 454년으로 저자는 보고 있고, 이런 축출과정을 자비왕~소지왕대의 축성과 교전기사를 해석하면서 풀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지증왕대에 이르러서 동해안로에 12성을 축성하면서 대고구려의 방위체계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는 고구려의 영향력으로에서 벗어남을 의미하고, 지증왕대 이르러서 신라의 발전의 계기가 완성될 수 있음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지증왕의 즉위가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것은 읽으며 처음알았다. 냉수리비에서는 즉위 이후인 503년까지 지도로갈문왕이라 하여 갈문왕호를 쓰고 있었다는 점은 당장에 왕을 칭하기에는 정당성의 문제가 있었다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다른 책에서는 이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한 것을 본 것으로 기억하긴 하는데, 즉위과정이 석연치 않다는 점을 설명하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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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정치사 연구 - 국가형성과 지배체제의 변천을 중심으로
노중국 지음 / 일조각 / 198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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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는 아무래도 그 존속기간을 봤을때 사료적인면에 있어서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서는 많을 수 밖에 없으며, 그 탓에 그와 관련된 연구서도 많은 듯하다.  그리고, 고구려는 동북공정에 의해서 다소 대중적인[그것이 어떤 의미로든]책들도 쉽게 접하기 좋은 듯한데, 백제사나 가야사같은 경우에는 그러지 못한 것 같다.  물론 한국고대사 자체가 사료부족으로 공백이 많다지만. 

 

 본 책은 제목과 같이 백제의 정치전개과정을 연구대상으로 잡고 있다. 기본적인 연구방법은 분해론을 택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모두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냥 그대로 취신해버리지 않으며, 중국 사서인 삼국지 위서동이전을 교차검증하며 읽는다는 것이다.  즉, "삼국지 동이전의 내용을 단계화하고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분해하여 재정리하면 양 사서의 내용은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보완관계의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하나 백제사를 보는데, 참고가 될만한 것은 일본서기가 있을테지만, 워낙에 윤색이 심한 것으로 유명한지라, 특히 백제와 관련해서는 임나일본부설, 즉 남부지역의 통치라는 틀에서 바라보고 있어 좀 유념해서 보아야한다고 말했다. 일본인사학자들도 이런 틀에서 살펴보았다. 

 

 여튼, 그런 연구방법을 통해서, 백제의 정치 전개과정을 살펴보는데, 참 흥미로웠다.  마지막에 통치제도와 관련한 장에서는 완전히 집중력을 잃어버리고 말았고, 읽고 나서 [워낙에 힘들었던지]기억이 텅텅 빈듯 하다.  그냥 큰 줄기를 적어본다.

 

 백제는, 고구려의 유이민이 세운 나라로, 아마도 세력 내에서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건국설화로 시조형제설화가 있는데,  백제의 건국자인 온조와 그의 형인 비류가 같이 내려가다, 비류는 그를 따르는 이들과 현재의 인천, 미추홀에 자리잡았고, 온조는 한강하류에 자리잡았고, 후에 비류를 따르는 세력은 온조에게 다시 귀부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어떤 집단이 연맹을 형성하는데 정당화 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남하시기나 길도 달리하는 것으로 추측되며, 미추홀세력도 만만치 않았기에 이런 시조형제설화과 살아남아 전승되지 않았냐는 것이다. 어쨋든, 미추홀세력과 연맹관계에 들어가면서 자국의 명칭을 백제로 개칭하기도 하고, 웅천책을 세우면서 그 자신감을 드러낸다. 그러다가, 마한의 맹주국인 당시의 목지국을 정벌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시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소급부회한 것으로 보았다. 실지로 목지국을 정벌한 것은 247년대에 목지국이 중국군현과의 오해로 전쟁을 벌이다가 패배하면서, 약해진 그 틈에 목지국을 정벌하였는데, 그것이 고이왕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한을 대체적으로 정복한 때는 근초고왕대로 보고있다.  그리고 왕계와 관련하여서는 초기에는 부여씨와 해씨가 번갈아서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보는데, 고이왕대 이르러서 부여씨의 왕위독점을 이루었고, 그 이후에는 부여씨 내에서 직계-방계와 관련하여 왕위계승권 분립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독 백제의 왕위계승과 관련하여 신라의 하대와 같은 현상이 많아 보인 듯 했다. 그리고, 왜 아신왕이 유독 불쌍하게 사람들이 이야기 하였는지도 알게되었다.  기껏 숙부때문에 숨어지내다가 왕위에 올랐더니, 당시 담덕, 광개토왕에게 대판 깨지게 된다.  개로왕대에 이르러서는 왕도 태자도 한성이 탈탈 털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여튼 건국과정에 대한 이해는 이정도로 일단락되고, 솔직히 나머지는 단편적인 사실들만 가지고 있고 체계가 당연히 잡히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 소득이라면, 아 이런 식으로 사료비판을 거쳐서 연구를 하는 구나.. 하는 견식을 얻었다는 것? 노태돈 교수의 고구려사 연구를 잠시 보고 느낀 것이지만, 그건 일독까지도 못해봐서... 여튼 나중에 다시 읽고 싶다. 일단 다음 책으로 넘어가는게 좋을 듯하다. 내게는 좀 많이 버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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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중고기 정치사회 연구
이정숙 지음 / 혜안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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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책은 제목과 같이 중고기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변동을 다루고 있다.  중고기란 것은 삼국유사의 일연이 시대구분한 것으로, 지증왕과 법흥왕 사이에서 상고 마지막과 중고의 시작이 나뉜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김부식은 신라사를 상대-중대-하대로 삼구분 하였는데, 이 둘을 혼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여튼 중고기는 법흥왕~진덕왕까지를 이르는 시대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통일 이전의 신라에서 최고의 정복군주였던 진흥왕에서 선덕왕의 아버지인 진평왕까지의 정치사회를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으면서 진평왕에 대한 인식이 좀 달라 졌던 것 같다.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의 영향 탓도 있는 것 같고.  그런데 생각해보면, 진지왕의 폐위를 통해 오른 진평왕에 있어서 왕권강화는 틀림없이 필요한 과제로 생각하였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동륜계에 성골이라는 관념을 부여하여 협의의 왕가를 설정하였다. 여기에서 최초의 여왕 즉위의 논리가 나올 수 있는 것이였다. 당시 일본에서의 최초의 여천황이 즉위한 것도 어느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저자는 추측하였다. 그럴만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었지만, 다 읽고 나니... 이거 뭐 머리 속의 지우개가 있는지 생각이 안나는 부분이 너무도 많다. 특히 년도는 도저히 외워지지 않는다. 머리의 둔함을 탓하지만, 그거야 다시 더 읽어보면 조금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다음에 재독해야지'라는 다짐을 하고 책장을 덮었다.  그런데 그렇게 재미있게 읽었는데 별이 왜 세개일까?... 그것은 한권의 책을 다듬는데 있어 그리 주의를 기울였다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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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13-11-20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가넷 2013-11-21 18:44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올해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어서 공공도서관에서 배포되었을 것이니 아마, 쉽게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으실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