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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상고기 정치변동과 고구려 관계
장창은 지음 / 신서원 / 2008년 12월
평점 :
본 책은 신라-고구려간의 관계를 살펴보고 있다. 이들 대외관계는 전반적으로 평등적이라기 보다는 신라가 고구려에 종속된 측면이 강했다. 내물마립간 45년(200년)대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에게 원병요청을 하면서 부터는 종속적인 관계로 전락했다.
이런 신라-고구려의 대외관계 개시시점으로는 본 책에서는 조분이사금16년(245년)대에 고구려가 신라의 북쪽 변경에 침략한 것과 3년후 첨해이사금 2년(248년)대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존중하여 3세기 중반이 고구려와의 관계 개시시점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전까지는 이 기록을 믿지않고 신라가 고구려의 사신과 함께 전진에 사신을 파견한 시점(377년, 381년)에서 고구려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313년,314년에야 이르러서야 축출되는 낙랑군과 대방군과 옥저와 동예가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있다는 지리적 형세와, 244년~245년의 위나라 관구검의 공격으로 인하여 고구려가 신라을 공격할 여력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저자는 4세기전반으로 추측되는 경주월성로고분군 중에 가-5호와 가12호묘에서 고구려 계통의 유물이 발견되면서, 신라-고구려 관계 개시연대가 기존의 이해보다 소급되어 파악할 수 있다는 여지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동예와 옥저가 당시(고구려의 신라와 첫교전 시점 당시)에 고구려에 종속되어 있었고, 관구검의 고구려공격의 경우에는 관구검기공비의 해석과 삼국사기, 자치통감,삼국지 본기와 관구검전, 북사등의 중국측 사료를 분석하면서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246년설을 지지함으로써 신라와 고구려간의 관계가 3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음을 논증하였다.
이렇게 신라와 고구려간의 관계가 245년의 교전과 248년의 교섭이라는 삼국기사의 기록을 존중하여 믿는다 치더라도, 어떻게 3년사이에 그런 양상의 전향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었을까?... 물론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될 수가 있다지만, 의문점이 생기긴 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당시 신라 내부의 변화(석씨왕실의 분지화)에 따른 것으로 보았다. 아달라이사금까지의 박씨왕의 시대가 종식되고, 석씨인 벌휴이사금이 다음 왕위를 잇게 되었는데, 이 벌휴이사금에게는 골정과 이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벌휴이사금이 죽기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골정은 구도갈문왕인 옥모부인과 결혼하여 조분을 낳았고, 이매의 아들인 나해가 있었는데, 계보상으로 보면, 직계인 조분이 즉위하는 것이 맞음에도 방계인 나해가 즉위하였다. 저자는 그 이유로 골정계와 정치적 제휴를 맺고 있던 구도계 김씨의 당시 정향에 주목했는데, 벌휴이사금 7년에 백제와의 전투에서 구도가 패하였고, 부곡성주로 좌천되었다는 삼국사기의 기사에 주목하며, 구도의 정치적 실세에서 벌휴이사금의 방계인 나해의 즉위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나해에게는 이음과 우로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음은 나해이사금의 재위시 사망하였고, 우로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나해의 죽고 난뒤에 골정계인 조분이 즉위를 한다. 그렇다면, 우로가 당시에 실세를 했는가 치면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왕위를 잇지 못했다는 것에는 어떤 정치적 역학관계에서의 소외를 뜻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245년에 고구려의 공격에 우로가 출정을 나서게 되지만, 패배하였고, 그 이유로 248년에는 서불한이라는 중책에서 물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석우로가 물어나자마자 고구려와의 화친을 맺었다. 당시에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 이매계인 우로라고 추측할 수 있다면, 그 3년 사이에 맺어진 교섭기사는 당시 신라의 왕실세력의 변화에 따른 대외 노선의 변화로 보아도 무난할 것같다.
여기에서 확실히 인지해야될 것은 같은 혈연집단이라고 하여도 그 정치적 입장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같은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하는 다른 혈연집단과의 연대하여 같은 혈연집단에서 이해를 달리하는 이를 숙청할 수도 있다는 것을 더 확실히 느꼈다. 이런 점에서 어떤 왕실이나 권력자 집단에서건 가족과 친척들이 더 무서운 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수양대군은 자신의 집권을 위해 피비린내가 나는 상잔을 벌였고, 결국은 자신의 조카를 폐위하고 죽음으로 이르게 하였다. 세조의 치적이 어떠하더라도 잔혹한 사람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을 듯 하다. 그것보다는 권력의 속성이 그러하다고 하는게 더 맞을지 모르겠다.
여튼, 이런 고구려와 대외관계가 개시된 이래, 내물마립간에 이르러서는 고구려에 인질로 실성을 보내고 마립간 스스로가 노객으로 칭하고, 원병을 요청하는 등, 급격하게 고구려와 관계에 있어 종속적으로 변해갔다. 실성마립간과 눌지마립간 즉위에도 고구려의 영향력이 강하게 행사되었다. 그런데 눌지의 즉위는 석씨세력의 완전한 정치적 실세를 뜻하기도 하였다. 이후부터는 김씨의 왕위계승만이 이루어진 것이다. 고구려의 세력의 도움을 받아 즉위한 눌지지만, 왕권행사에 있어 걸림돌이 되는 고구려의 영향략을 강하게 인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던 시점에서 450년에 하슬라 성주 삼직이 고구려의 변방장수를 살해하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고구려의 항의성 침략과 눌지마립간의 사과를 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그런 의도가 어느정도 보인다는 측면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4년이 지난 454년에는 고구려가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치면서 신라-고구려 관계는 경색되었다. 이후에 433년과 434년에 맺었던 나제동맹의 실제적인 활동이 눌지마립간이 455년에 백제를 고구려가 침략하여, 이에 군사를 보내주었다는 기사에서 보인다. 그리고 일본서기의 웅략천황 8년(464년)에는 눌지마립간이 신라 왕경에 거주하던 고구려군사단을 축출했다 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일본서기의 기사를 그대로 취신하지는 않았다, 웅략천황 8년조의 기사에 신라와 고구려의 우호부터 해서 신라왕경에서의 고구려군사단 축출이 한꺼번에 기록되어 있어, 이전의 사실들을 압축한 것으로 보았고, 일본서기 자체가 임나일본부의 한반도 남방경영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왜곡되어 있어서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고 본 것이다. 이런점에서 눌지마립간의 고구려대립의 시점을 454년으로 저자는 보고 있고, 이런 축출과정을 자비왕~소지왕대의 축성과 교전기사를 해석하면서 풀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지증왕대에 이르러서 동해안로에 12성을 축성하면서 대고구려의 방위체계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는 고구려의 영향력으로에서 벗어남을 의미하고, 지증왕대 이르러서 신라의 발전의 계기가 완성될 수 있음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지증왕의 즉위가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것은 읽으며 처음알았다. 냉수리비에서는 즉위 이후인 503년까지 지도로갈문왕이라 하여 갈문왕호를 쓰고 있었다는 점은 당장에 왕을 칭하기에는 정당성의 문제가 있었다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다른 책에서는 이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한 것을 본 것으로 기억하긴 하는데, 즉위과정이 석연치 않다는 점을 설명하지 않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