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민음 한국사 :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 - 조선 1 ㅣ 민음 한국사 1
문중양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평점 :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조선이라는 나라에 누구나 앙가감정은 가지고 있을 것 같다. 마지막에 이민족의 강점을 받게 한 "못난 조선"이라는 감정과 그래도 떨쳐버릴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한 연민과, 그래도 나은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끊임없이 조선의 위대함을 찾기도 한다. 결국은 조선초기 혹은 임진전쟁 이전의 상황은 누구도 뒤지지 않았으나, 이후에는 급격하게 흔들그렸다는 인식으로 이어지는데, 민음 한국사 시리즈의 첫권도 "때 이른 절정"이라는 부제에도 확인되는 것처럼 그런 인식하에 있는 듯도 하다. 절정에 이르면 이른 거지, "때 이른"이라는 첨언이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
차치하고, 조선은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던가,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는 다르게 한반도의 큰 전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한 왕조의 멸망과 새로운 왕조가 개창이 교차되는 지점은 괘나 흥미롭고, 흥분을 만들어낸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에 새로운 왕조의 개창은 준비되어져갔고, 결국 추대형식으로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의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런데 살펴보면 건국초기에는 왕위와 관련하여 큰 다툼이 있기 마련인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태종의 즉위도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방원이 당시에 일으켰던 난을 보고 왕자의 난이라 명명하는데, 현재는 재벌가의 형제자매간의 다툼을 두고 '왕자의 난'이라고 칭하기도 하는 것 같다. 결국 권력은 나눌 수록 좋은 것이아니라, 형제간에도 그리고 부모와도 나눌 수 없는 것이다. 태종대에 일어난 조사의의 난도 태조의 지원이 있었을 것이라는 정황추론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태종은 어찌하던간에 태조의 인정을 받아야 했으므로, 조사의 난에 연루된 대다수를 크게 처벌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유명한 고사인 '함흥차사'도 그런 이유때문에 생겨났다. 그런데 어렸을 적 생각에 아무리 왕이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가는 족족 정말 태조가 다 죽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태조는 함흥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여기저기 옮겨다녔고, 어쩔땐느 정확한 행선지를 알리지 않아, 애먹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보통 이렇게 즉위한 왕의 경우 왕권의 기반을 착실히 다지는 경우가 흔한데, 태종도 그랬다. 그리고 그런 기반으로 세종대의 문물정비를 이룰 수 있었다. 본 책의 다루고 있는 것도 주로 세종대가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물론 개국한지 얼마안된 조선이라는 자신의 나라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바빠야 했긴 하지만. 그리고 세종은 북한을 포함하여 대한민국에게도 절대적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다. 본 책에서도 과거의 군주 중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지당한 평이다. 세종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안정되게 기반을 다진 것 뿐 아니라, 한국인에게 커다란 유산을 남겼다. 이렇게 세종대에 이루어진 갖가지 문물정비는 성종대 이르러서 경국대전의 완성을 보면서, '조선적 체제'의 완성이 이루어졌다. 왕자의 난이나 계유정난이라는 왕위계승 다툼과 15세기의 끝자락에는 사화라는 커다란 파고가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14세기말에 건국된 조선은 15세기를 관통하며 자신의 자리를 잡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