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본 발해사
동북아역사재단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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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제6차인지 7차교육과정인지 잘 모르겠지만, 여튼 국정국사교과서를 통해 배울때는 고조선-고구려-통일신라,발해-고려 식의 한국사 인식을 통해 배웠던 것 같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고구려야 중국의 동북공정이 시끄럽지 않아도 관심사에서 멀게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발해사는 달랐다. 발해의 전성기 영역만을 따지고 보면, 한반도가 차지 하는 비중은 거의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지금은 남북으로 한반도가 나뉘어져 있는 상태고.  그래서 생각보다 관심의 비중이 적었지만, 그래도 발해사를 읽어야 겠다는 왠지 모를 의무감에 몇권은 사두었고, 이제서야 개설서 격인 이책을 들추어 보았다.  '다시 찾는 고구려사'와 마찬가지로 정치-외교-문화-발해사를 둘러싼 인식을 소개 해주고 있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정말 고대사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인데, 지금의 국경선을 따라 옛 역사를 소급해서 인식한다는 것에 조금은 우습다.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두고 니꺼 내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당대 고구려인과 발해인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차치하고, 개인적으로 발해사에서 깊게 인상을 받은 부분은 역시 나라의 창업과정이다. 거란인 이진충이  당의 기미지배에 반기를 들었던 틈을 타 동주과정을 거치면서 당의 추적을 물리치고 결국에서는 동모산에서 건국을 선언한다. 왠지 모르게 출애굽기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고구려-백제-신라-신라와 고려의 한반도 쟁패과정-조선의 창업을 통틀어 가장 영웅적이고 극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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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14-07-11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발해사가 궁금했던 차에 읽을 만한 개설서를 못 찾았었는데, 좋은 책 추천 감사드립니다^^

가넷 2014-07-11 20:28   좋아요 0 | URL
발해사 개설서가 없어서 이걸로 떼우기(?)는 했지만, 생각보다는 별로 였어요. 그래도 다른 대안이 별로 없다보니...;;;
 
조선왕조 개창 - 이성계와 조준.정도전의
김당택 지음 / 전남대학교출판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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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에 KBS 사극 <정도전>이 한창 인기를 올리고 있나 보다. 방영이후에 각종 포털사이트의 인기검색어에 과전법이나 정몽주 등등의 검색어가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것을 보면 더 실감이 난다. MBC의<기황후>의 왜곡논란 이후에 보이는 오랜만의 정통사극이라 더 관심이 큰 듯하다. 굳이 이 사극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드라마<정도전>에 대한 깊은 관심이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이 책을 읽어야 봐야겠다는 동인을 발생시킨 듯하다.

 

본 책에서는 조선의 건국을 고려 말의 정치상황을 살피면서 시작하고 있는데, 저자의 기본적인 생각은 조선의 건국을 고려 말의 대토지를 겸병한 권문세족에 대한 향리출신의 중소지주인 신흥사대부의 승리로 설명하고 있는 정설에 대해 그렇게 설명하기에는 힘들지 않냐 는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 기존에 권문세족으로 지목된 이의 손자가 신진사대부로 지목되기도 하는 등, 그렇게 일관된 설명체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여하튼, 이 책은 고려 말 정치상황, 그러니까 공민왕의 반원정책에서부터 시작 하는데, 이 반원정책을 실시한 당시도 그렇고 이후의 흐름을 문신과 무신과의 대결로 보고자하고 있다. 당시의 문신은 끊임없이 정방의 개혁이라던지 무신이 국토의 수호에만 힘쓰어야지, 국가의 운영에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공격하지만, 여전히 주도권을 쥘 수가 없었고, 그런 문신의 정치적인 불우함이 정도전이 이성계를 직접 찾아가 정치적 결합을 하게 한 이유로 꼽고 있다. 당시 이성계도 상당한 군사적 실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중앙정계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점도 이 결합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후에 조반사건을 계기로[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아직 이해는 안 되지만]비로소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가장 흥미를 끈 것은 최영의 요동정벌의 주도한 주요 이유 중 하나가 이성계를 견제하기 위함이라는 주장이다. 당시 요동정벌군의 구성은 팔도도통사 최영의 지휘 하에 조민수의 좌군과 이성계의 우군으로 되어 있었는데, 조민수의 좌군은 서경 양광도 경상도 전라도 계림 안동등에서 징발된 군대로 편성되었으나, 이성계의 우군의 경우 안주도 동복면 강원도의 병력으로 구성된 것으로, 이성계의 우군이 징발된 지역이 훨씬 적었던 만큼 이성계 휘하 친병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고, 당시 요동을 친다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던 만큼, 이는 요동공격에서 이성계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함 아니냐는 것이다. 최영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이성계가 그런 의도를 간파하였던, 아니던 간에 이성계로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회군하고 만다.

 

이 위화도회군은 조선건국의 분수령이 된다고 저자는 평하는데, 회군이후에 우왕을 폐하고, 최영을 유배시키는 등, 실질적으로 당시 정국운영에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럴만하다. 그런데, 이성계가 회군당시에도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마음먹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회군이후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몇몇 인사에 대해 자중하라는 이야기를 하였다는 것과 이후 창왕과 공양왕까지 4년이 지나고 나서야 양위라는 방법으로 왕에 오른 것을 보면, 분명히 위화도 회군이후 정국의 주도권까지는 쥘 수 있었지만, 결정적 이였던 것은 아닌 듯하다. 그래서 이성계파(이성계와 그를 지지한 세력을 이성계파라 이 책에서는 부르고 있다.)는 선 개혁 후개창을 택하게 되는데,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사전개혁이었다. 이 사전개혁의 최종점인 과전법의 실시 이후에 조선이 개창되었다는 것을 보면 그렇다. 실질적인 고려의 지배체제의 부정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겠지만, 당시의 실권자들의 경제적 기반을 흔들기 위해서라도 그렇지 않았는가 싶기도 하다. 본 책에서는 사전개혁을 당시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거의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당시의 민심을 얻기 위해서라도 이래저래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기 위한 중요한 프로젝트(??)가 아니었는가 싶다.

 

이 책을 읽고 이 리뷰를 작성하면서, 아주 오래전 <용의 눈물>을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 거기서 이성계로 분한 김무생 선생이 왕에 오르라는 주변인들의 요구에 자택의 방에서 고뇌에 찬 모습을 연기한 것이 기억났다. 아무리 '정통'사극이라도 결국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것이 여기에서 드러났다.

 

조선태조가 왕위에 오른 후 공양왕을 유배시켜버리고, 김저사건이나 윤이-이초사건에서 보면 태조 이성계가 결코 드라마에서처럼 신하가 어찌 왕을 폐할 수 있느냐는 고뇌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역사를 공부하고 연구하는데 있어서 이런 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결국 역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료비판과 거기에서 얻어지는 논리가 아닌가 한다. 이런 소리는 뭐 일개 독자일 뿐이므로 들을만한 가치는 없다. 이렇게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국호를 여전히 고려라 하고, 관제도 고려대의 관제를 존속시켰다. 이러한 관제를 바꾼 것은 태종대에 이르러서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당시의 주도세력 역시 이전의 지배세력과 크게 변화가 없다는 점에서 신진사대부설은 생각보다는 허술한 논리에 기반해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위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일개 독자일 뿐이므로, 신진사대부설과, 조선의 고려적 기원을 강조하는 측사이에서 과연 어는 것이 타당한지 뚜렷하게 판단할 수는 없으나, 지금 현재로 보자면 고려와 조선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그럼에도 자꾸 걸리는 것은 [신진사대부설을 강조하는 측에서도 그럴 것이라 생각되는데] 식민사학의 정체성이론이 연상되기 때문인 듯하다. 일단 이후에 고 정두희 교수의 <왕조의 얼굴>, 존 B. 던컨 교수의 <조선왕조의 기원>을 읽어가며 될 수 있는 한 정리해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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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형 법정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존 딕슨 카 지음, 유소영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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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첫 걸음은 으스스하고 분위기적인 면에서는 좋았다. 하지만 끝에가서 허무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래도 그와 함께 오컬트적인 분위기라고 해야할런지 모르겠지만, 오싹함은 남길 수 있었다. 그래도 추리소설인데...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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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하대 정치사 연구 민족문화 학술총서 54
권영오 지음 / 혜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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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에 있어서 가장 활발했었고, 역동적이었던 시기는 한반도의 쟁패를 거머쥔 중대에 해당될 것이다. 물론 좁은 식견에 따른 나의 오산일 수도 있겠지만.

 

 

본 책에 설명에 따르면 <사기>와 <유사>의 신라사 시기구분은 중대 혹은 중고를 구분하기 위하여 상대와 하대 혹은 상고와 하고를 구분한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상대와 하대/상고와 하고에 비해 유난히 짧은 기간을 생각하면 그럴 법도 한 것 같다. 물론 이런 시기구분은 당대 신라인이 그렇게 구분하였음을 증명하는 문헌자료나 금석문 자료는 나온게 없다. 그냥 고려대에 편찬된 <사기>와 <유사>의 편찬자의 사관에 따라 설정된 것일 분이다. 여하튼 그만큼 중대와 중고를 신라사에 있어서 번영의 시기로 주목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런 이유로 신라 하대는 왕위계승쟁탈전이 벌어지면서, 정치적으로도 사회경제적으로도 사회에 누적된 모순을 해결할 역량이 되지 못하고, 그런 힘의 공백을 통해서 성장한 지방 세력들에게 그 땅을 내주어 지역정권으로 전락하였다가, 결국에는 고려에 투항하는 시대로 파악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치열한 왕위계승쟁탈전이 상징하는 정치적 불안정과 왕족 귀족들의 부패, 음란이라는 이미지로 떠오르는 시대가 신라 하대인 것이다.

 

 

 

하지만 본 도서에는 하대에서 무력을 동반한 왕위계승쟁탈전이 벌어진 것은 선덕왕에서부터 흥덕왕 사후 희강왕과 민애왕 그리고 신무왕에 이르는 780년~839년, 59년간이었다. 하대에 해당하는 선덕왕~경순왕까지의 시간이 155년임을 보면, 하대 초기에 일을 가지고 하대 전체를 그러한 인식으로 보는 것은 과도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신무왕부터는 표면적으로는 왕위계승과 관련하여 무력이 동반한 쟁탈전은 벌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신라 하대를 단순히 羅末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다. 그래서 저자는 신라하대를 선덕왕~민애왕 까지를 하대초기로 왕위계승쟁탈시기로, 신무왕에서 진성여왕 2년까지는 하대의 전성기로, 그리고 진성여왕 2년 이후에서 경순왕까지를 쇠퇴기로 삼구분하고 있다.

 

 

 

나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신라의 멸망과 관련하여 진성여왕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많았나 보다. 숙부 김위홍과 사통한 것(실지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차치하고??)과 숙부 위홍의 사후에 미남자를 들여 문란케 하였다는 점을 들어 그런 듯하다. 뭐 사실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신라왕실관계라는 것이 참 음란하게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보면 유독 진성왕만을 문제 삼을 것이 무엇이냐는 점도 있거니와(저자는 정황상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신라의 멸망을 너무 강하게 진성왕을 탓으로 돌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진성왕 3년에 일어났던 농민봉기가 결정적인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다기 보다는, 탄력성을 잃은 당시 신라 지배층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 정도라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신라 지배층의 허약함을 보여준 셈이랄까. 가장 결정적인 것은 견훤의 침입에 따른 경애왕의 자살이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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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단군 부여
동북아역사재단 엮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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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단군-부여를 소개하는 좀 짫은 개설서. 언제나 그렇지만 고조선이나 단군에 대한 관심을 지대하지만, 그 초기정치체가 있었던 시간적 거리를 생각하면 고고학적 유물 유적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그게 나에게는 상당히 어렵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남긴 기록도 없는지라 고대 어떤 정치체보다 그들의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기도 하다.  이전에 송호정교수의 글에서 읽어서 대략 얻었던 고조선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기원전10세기경을 고조선이라는 정치체의 출현을 상정하고, 선진문헌인 관자에서 등장하는 점을 들어 최소한 기원전 7세기경에는 고조선이라는 정치체가 등장하였고, 기원전4~5세기경에는 연나라 진개에 의하여 밀려나갔다는 점. 그리고 위만조선의 성립과 멸망까지를 살펴볼 수 있다는 사실만 다시 되새길 수 있었다. 나머지 글은 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개설서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어려움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송호정 교수는 글을 쉽고 재미있게는 못쓰는 것 같다. 학자로서 아주 필요한 재능은 아니긴 하겠지만, 노중국 교수의 연구서는 일반사람들이 쉽게 읽지 못하고 이해도 어렵지만서도 재미있게 읽 다는 점에서는 아쉽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확실히 느낀건데 어떤 역사적 사실보다는 어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였는지 더 관심이 가는 것 같다. 단군신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자못 흥미로웠다.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단군신화를 소개한 이후로, 조선 초기 유학자인 권근은 응제시에서는 단군의 이야기 중 비합리적인 요소를 최대한 해소하였고, 그리고 한백겸 동국지리지에 이르러서는 남자남 북자북이라는 인식으로 단군이 민족원 근원으로 귀일하는 것에 의문을 가하기도 하였다.

 

부여사에 대해서는 우리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기원전 2세기경에 건국된 부여는 이후에 고구려-백제라는 정치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국사서에는 고구려와 백제를 부여의 별종으로 여기기도 했다는 점. 백제는 개로왕때 북위에 보낸 서신에서 자신들과 고구려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밝히기도 하였고, 성왕은 수도를 이전하며 남부여로 바꾸기도 하는 등, 그들의 정체성을 부여에서 찾았다. 그런만큼 부여에 대한 관심을 커야겠지만서도, 그들이 만주지역에 근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 시간적으로 그렇지만 공간적으로도 먼 나라였다. 그랬기에 많이 낯설었 던 것 같다.   고구려의 건국신화에 가려졌던 부여의 동명신화와, 그들이 3세기까지 고구려와 백제 신라와 함께 병존하였던 정치체임을 인지하게 되었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나온 <부여사와 그 주변들>을 읽어 볼까 한다.

 

여튼... 아무리 관심이 가더라도 고조선과 부여의 이야기는 많이 낯설고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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