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쉬는 월요일에 이마트 전자매장에 들렀다.  부모님 댁에 놓아둘 에어컨 가격조사 겸이라고 해야 하나.  뭐 당연하지만  가격이야 천차만별. 이것저것보다 전시된 애플 제품들을 보게 되었는데 참, 나도 아이폰에 아이패드 미니를 쓰고 있으나 소비자의 욕망을 자극하기는 잘 하는 것 같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정말 늙은 뒷방 할아버지가 쓸만한 2g폰을 쓰다가 11년도에 들어 나온 당시 최신작인 4s를 구입하고는 근 6년을 썼다.  

세상사람들이 금방 새로운 모델에 대한 욕망으로 빨리 바꾸는 것에 비해서는 주기가 길기는 길었다(그 외 업무 상 필요 하다거나 하는 이유로). 이전에 가지고 있던 아이폰 모델을 쓰다 떨어뜨리는 바람에  뒷면이 벌어져서 그랬지, 아마 내가 더 조심히 썼더라면 2년은 더 썼을 듯 하다. 

여튼 매장에 다녀온 이후로 새로 들일까 하는 생각에 있다가, 먼저 부모님 댁에 놓아두리라는 에어컨을 구입했다.  설치는 조금 이후가 되었는데, 벌써부터 밀린다 싶었다. 그 후에 아래께 프로 11인치로 하나 사서 어제 받아 쓰고 있다.   좋기는 좋다.  내가 쓰고 있는 태블릿pc가 미니2였으니 먼저 차이를 느낀다면 화면크기.  12.9형하고도 차이가 좀 났다. 정말 여력이 되었다면 12.9형 256기가를 사고 싶었는데.  액세서리는 스마트 폴리오 키보드와 에어팟 구입.  애플의 고가정책은 여전히 유감스럽다. 

 키보드는 좀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다. 특히 del키가 없어서 많이 불편하다. 그래도 터치감이나 반응은 좋은 것 같다. 근데 지금 손목이 아파서 많이 쓸지는 모르겠다.  또 하나 좋은 점은 스피커. 미니2만 쓰다 써서 더 그렇겠지만 소리가 시원시원하다.  블루투스 스피커 쓰는 수준이랑 비슷한 듯 하다.  

이어팟은 출시 당시 부터 느꼈지만, 참 괴기 하긴 하다. 어차피 프로 3세대는 이어폰을 끼어 넣을 단자가 부재하니. 굳이 한다면 충전단자에 넣어 이어폰을 쓸수 있는 액세서리를 판매하기는 있었는데, 불편도 불편이지만, 보기가 심히 안좋다. 그래서 샀다.  근데 구멍을 단자라고 하던가?

이렇게 구입하고 보니 정말 이제 문명이 전기 없이는 더더욱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폰, 아이패드 미니, 프로, 에어팟, 거기다 전자책 리더기인 카르타까지 충전한다고 늘어놓은 꼴을 보니... 이제 나도 보조배터리도 사서 가지고 다니긴 해야겠다.

 애플펜슬은 굳이 필요 없는 장난감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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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년 전에 <백제정치사연구>를 읽고 소장하고 싶어서 중고로 이리저리 알아 보던 중에 작년에서야 겨우 구했는데 얼마전에 그의 개정판이 거의 30년만에 <백제정치사>로 출간되었다. 저자가 몇년 전에 정년퇴임을 한 직후라 새로 개정판이 나올 것은 짐작을 못했는데 기쁜 마음이면서도 작년에 구판을 구하려고 노력한 것을 생각하면... 


 책은 구판의 출간이후  연구결과를 반영하여 대폭 개정이 된 것 같다.  어제 구입을 해서 오늘 쯤에는 도착할 것으로 알았는데 아쉽게도 오늘은 못 받을 듯. 받자마자 먼저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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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의에 의하는 한 그것이 어떠한 세계이든 세계의 실상은 공-가-중이므로 이 같이 관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차별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것이다. '공'을 떠나 '가'와 '중'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가'와 '중' 또한 그러하다. 앞서 말하였듯이 3제는 하나의 실상을 세가지 마음에 이미 세 측면이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차별의 현실은 본질적으로 공으로서 무차별[不二, 즉 中]이지만, 이 삼자는 혼연의 일체이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흔히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완정한 이상적 형태로 여긴다. 이 때 일심동체란 어떠한 경지의 세계를 말함인가?

 

 남성과 여성, 남편과 아내는 각기 독린된 고정불변의 실체로서 자신만의 고유한 속성을 갖는 것인가?..... 즉 남편과 아내가 본질적으로 둘이 아님[空]은 영원한 진실이지만 그것은 현실의 차별[假]을 떠나 수립되는 진실이 아니다. 부부 일심동체라고 함은 아마도 둘이 아니면서 둘이며, 둘이면서 둘이 아닌 상태[中]를 말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실로 말을 능숙하게 타는 이를 말과 혼연일체가 되어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자는 어떤 자인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은 말을 부리는 자이며, 말은 이에 따라 달리는 동물이라는 주객분별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空觀]. 그렇다고 이것이 말타기를 그만두었다는 말은 아니다. 주객분별의 생각을 버리고 말과 하나가 되었을 때 바야흐로 기수와 말은 자유자재로 활동한다. 말은 바르게 달리고기 수는 교모하게 몬다[假觀]. 이때 주객분별을 버렸으므로 말과 기수는 둘이 아니지만 각기 서로의 활동을 다하기 때문에 둘이다[空假相卽의 中觀] (p.360)



 아비달마논사들의 입장은 자아는 없으나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구성요소[法]는 실재한다는 아공법유를, 대승은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는 다만 가설적 상태일뿐이라는 아공법공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들의 차이를 종합하려는 것이  천태 지의대사였다. 위의 인용한 것은 지금 읽고 있는 11장 천태의 내용이다.


 누군가는 대승이 부파불교(아비달마)가 오염시킨 불교를 다시 근본불교로 되둘렸다고 판단하며 초기경전으로 대승경전을 읽는 시도를 하고 있다. 조만간 읽어보겠지만 언뜻 이해는 되지 않는다. 아비달마가 그냥 설명만 듣는 것으로도 너무 복잡하다는 건 알지만 대승의 중관과 유식도 그에 못지 않다. 양극단을 배제하는 것이[不二] 곧 중[中]라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것 또한 극단이 아닌가 싶기도. 


무아,윤희,업을 설명하고자 하는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 같다.  


개인적으로 처음 접했던 초기불교의 소박함이 더 좋으며, 대승이 내놓은 이야기 보다는 아비달마가 전반적으로 맞는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견해가 생겼다.  단순히 입문서를 보고 생긴 견해이므로 언제라도 수정이 될 가능성은 다분하지만. 


쉬는 주말이라 어제까지 '2부 인도불교'편까지만 읽고 챙겨둔 다른 소설책을 잠사 읽으려고 했는데 계속 잡힌다. 11장만 마무리 하고 보고 싶은 소설을 집었다가 다음주에 이 책은 일독을 마치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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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도 빠르게 읽는 편도 아니고(그렇다고 곱씹어 읽는 스타일도 아니다.) 책 자체도 그렇게 가볍지는 않아 거의 책의 1/2정도 읽고 있는 중이다.


아비달마를 다루는 장까지 다 읽었다. 예전에는 아무래도 주변 환경이 환경이다 보니 ('부파불교'를 소승이라 폄하 하던)대승의 입장에서 아비달마를 보게 되어 아무래도 크게 좋은 이미지는 아니였다. 


책의 저자가 아비달마불교를 연구하기도 하여 그들의 입장에서 쓰여 졌다고 볼 수도 있긴 하겠지만 이토록 그들의 이론이 번잡한 듯 해버렸는지에 대한 배경은 이해가 되었다. 성문승인 그들은 스승의 부재로 인하여 그동안 스승이 설하였던 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 할 수 밖에 없었다. 


대기설법이라 하여 그동안 스승은 듣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조금씩 교설을 다르게 남겼으니 스승이

살아계실 적에는 부동의 표준이 되어 물어볼수나 있었지만 열반이 든 이후로는 그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하여야 할 필요성에 따른 것이다. 


스승도 오로지 법과 자신에 의지하라 하지 않았던가. 


근데 좀 복잡하긴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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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권오민 교수의 <인도철학과 불교>를 읽고 있다. 저자의 말에서 밝힌 것처럼 본 책은 입문서격의 서적이다. 물론 총서 자체가 입문을 위한 책들이니 더 말할 것은 없겠다.  다만 여전히 한자로 번역된 불교용어를 쓰고 있기에 완전히 처음 접하기에는 무리가 있겠다 싶다.  하지만 이정도는 양호한 것이 예를 들어 <유식학입문>이라는 책은 한자로 번역된 불교용어가 한 페이지를 가득채우고 있으니 한글세대에게는 엄청 버거울 것이다(그래서 아직 못 읽었다.그 이유 뿐만은 아니나...).


한형조 교수의 말처럼 이제 불교도 산속에서 벗어나 속세의 민중에게로 더 다가올때가 되었다. 다른 것보다도 한자로 범벅이 되어 있는 불교의 언어를 다시 한글로 옮기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입문의 상황에 있는 (한글세대에 속하는)본인의 입장에서 투덜 거려 본 것이다.

책은 제목과 같이 인도철학과의 불교의 관계를 밝히기 위하여 쓴 것이다.  인도철학과 불교는 인도라는 지리환경적 공간과 그에 기반한 사유 속에서 나온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둘은 전통과 反전통의 관계이긴 하나 공유된 것들도 많다.  삶이란 것이 괴로움이라는 것이 그런 기본적 인식이다. 그에 대한 벗어남에 대한 방법은 차이가 있지만. 

아주 어렵지는 않으나 쉽지는 않아서 100여페이지를 읽고 있다.  현재는 <우파니샤드>를 다루는데, 살짝 지겹다. 존재에서 존재가 나올 수 있지 비존재에서 어떻게 존재가 나오냐는 물음은 여전히 물음표다. <우파니샤드>에서 나오는 한 구절은 마치 진화생물학에서 하나의 생명이 어떻게 무수한 생명으로 나뉘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을 연상시켰다.  도킨스의 <조상 이야기>도 어서 읽고 싶은데.  이럴때면 시간이 아쉽다.

 

 

 

 

 

 

 

 

 

 

 어제 막 주문한 <대지도론> 세트를 받았다. 어제 밤에 잠들기 전 1권을 잠시 열어보았다. 익히 알았던 것처럼 반야부의 <대품반야경>에 대한 나가르주나 보살의 주석서이다.  생각보다는 재미있다.  문답식으로 되어 있어 틈틈히 읽어도 상관은 없겠다. 한 30분이나 1시간 정도?  매일 이러다 보면 1년 동안은 읽으려나.  

 

 시작은 부처님이 마하반야밀다경을 설하시게 된 연유에 대한 답을 하는데, 뭐 부처님에 대한 깨달음에 의문을 가진자가 있어서,  삿된/거짓된 깨달음으로 이끄는 자가 있어서 뭐 블라블라... 이어지고, 중간에 부처님이 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나와 일곱 걸음을 걸은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선언한 것에 대한 변명? 정당화하는 답을 내놓고 있다. 뭐 요약하자면 이미 태어날때부터 깨달은 사람이었으나, 그렇게 되면 근기가 모자란 사람이 '저 분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 그런거고 나같은 범부 어렵겠구나'라는 마음에 지레짐작으로 깨달음에 대한 정진을 포기할까봐 일반 대중처럼 성장과정을 보낸 것이라는 것이다.  마치 기독교 신학에서  악이 존재하는것에 대한 독특한 변명 내지 정당화 설명을 들었던 것이 순간 생각이 났다(아마 지의 정원이란 책에서 읽었던 것 같다).

 

이전에 읽은 <불교의 탄생>에서는  이와 같은 설화를 실제로 부처님이 깨닫고 난 이후 처음 설법하려는 과정에서 했던 선언인데 전승되어 오면서 이런 형태가된 거라고 주장했던 것을 읽었는데...  잘 모르겠다. 이런 변명, 정당화에 대한 내용이 흥미롭기는 해도 종국에는 내 관심사는 크게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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