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호 교수의 <조선사회사연구>를  읽고 있다. 족보와 씨족을 다룬 챕터만 읽었다. 


 지금 족보의 형태로 나타난 것은 17세기 이후이고 이전에는 가계전슬, 내외보, 팔고조도등이 작성되고 있었다. 족보라면 공통의 조상으로 시작하여 뻗어나가는 가지를 중요시 하는 반면에  가계전승, 내외보, 팔고조도 등은 나를 중심으로 올라가는 형태다. 그리고 15세기~17세기에 작성된 족보의 경우에는 17세기 이후의 족보와 달리 남여차별 없이 나이순으로만 기재순서가 정해졌고, 외손도 상세히 기재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뼈대 있는 가문이라 떵떵 거리는 가문들의 구성원이 족보를 왜 그렇게 중요시 하였을까? 그것은 물론 유교적 이념의 문제, 그러니까 친척들이 남 보듯 하는 것에 대한 한탄도 이유가 되긴 하겠지만 그것 보다는 군역의 문제, 양반으로 인정받기 위한 문제가 주요 했다. 족보가 군역면제의 주요한 증서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본관에 대한 문제인데, 아직 이 부분은 다 읽지 않았지만 중국의 본관제와의 차이점이 흥미로웠다. 기본적으로 본관이 조상이 거주했던 행정구역명이란 것은 동일하지만, 조선의 경우에는 후손이 더이상 그 지역에 거주하지 않음에도 계속 이전에 조상이 거주했떤 지역명이 본관으로 쓰이는 반면에, 중국은 조상이나 본인이 어디에 거주하고 있느냐에 따라 같은 핏줄이라도 달리 쓰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기준이 모호하다고 하였으나 조선과는 다르다는 것은 뚜렷하다. 


지금 현재는 조선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보학이 중요하지만, 당대 조선의 양반들도 제일 중요한 학문 중 하나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신분변동에 따라 양반의 수가 급증했다고 보는 시선에 대하여 저자는 부정적이다. 보학에[ 밝은 이는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 말고도 전국단위로도 양반의 가문을 알았다고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양반 행세를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었겠냐는 것이다.  임란과 호란에도 신분제 등이 오히려 강고해졌다는 부분에서는 갸우뚱거리게 만들기는 하지만, 일단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더 고민해보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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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에 양반(지방양반)들의 존재양태와 신분제와 관련된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읽고 있다. 오늘부터 <조선사회사연구>를 읽고 있다. 보아하니 조선시대 신분제와 관련하여 한영우, 이성무, 유승원, 송준호 이 4명의 연구자의 이름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 같다.  아직 <조선사회사연구>를 다 읽은 것은 아닌데 상당히 강한 성격이라는 느낌이 든다 논쟁을 주저하지 않는 듯 했다... 논문에서 이런 느낌을 받기 쉬운 건 아닌데 한창 연구활동을 했을때는 어떠했을지 잠깐 궁금증이 일었다. 사실 이런게 재미긴 하다.  책을 낸 것이 정년이후 인 것 같으니까 지금은 상당히 고령일 것이다. 요즘에는 다소 소강상태라 하는데 이런 현재 논쟁을 이끌어 나가는 학자가 있을까? 일단 많이 인용되고 있는 저자 기준으로 읽어보고 있다.


이성무 교수는 재작년에 작고한 것으로 안다.  아들이 이희진 교수(한국항공대에 있던가?...)다. 한국통사를 공저하여 낸 적도 있다.  <조선사회사연구> 읽고 나서는 <조선초기 양반연구>를 읽을까 싶다. 이 책은 정말 한자투성이라 논지를 잘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이다. 


 이 주제를 읽고 있으면서 참고하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사전(http://waks.aks.ac.kr/rsh/?rshID=AKS-2013-CKD-1240001) 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과제사업으로 구축이 된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에서도 번역된 조선왕조실록을 참고 한다.  간혹 인용하는데 번역을 안하는 경우도 많아서 참고한다.   네이버 사전도 도움이 된다.  요즘에는 사진으로도 찍어서 찾아낸다.  공부하기 엄청 편해진 느낌이다.  물론 내가 공부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논문에 접근하기도 아주 편해져서 학위논문의 경우에는 학술연구정보서비스(www.riss.kr)를 이용할 수 있고, 여러 채널에서 발표하는 논문은 한국학술지인용색인(https://www.kci.go.kr/kciportal/main.kci)에서 무료료 열람할 수 있으며,  아니면  DBpia(https://www.dbpia.co.kr)를 이용하기도 한다.  학창시절에는 무료로 열람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유료로 결제해야 한다. 거기까지 갈 일은 잘 없긴 한데, 예전에 고대사 관련 궁금한게 있을때는 몇개 결제한 기억도 난다. 


 2.

 그런데, 좀 안좋은 버릇이 나온게 슬슬 다른 책들을 읽고 싶어진다. ㅋㅋ  너무 한정된 주제만 파니 그런 것 같다.  자꾸 당기는 것은 세계사 책들이나 브라이언 페이건의 책들이다. <고대문명의 이해>,<크로마뇽>,<피싱>,<인류의 대항해>등이고, <올모스트 휴먼>도 읽고 싶다. 흠흠. 이래서 내가 수준높은 독서가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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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20-04-27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로마뇽 추천이요! 재밌어요. 전 이 책 읽으면서 종교심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면서 살게 해 준 본능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넷 2020-04-29 00:06   좋아요 0 | URL
일단 읽고 있는 주제에 대한 읽기 리스트을 대충 다 채우면 우선 읽어보려고 합니다. 브라이언 페이건 책은 사두고는 대부분 읽지 못했네요...ㅋ
 





3 조선후기 향리신분 이동여부고를 읽었다. 3장에서는 저자가 소장한 남해지방에 세거한 향리가문의 고문서로 신분이동의 여부을 분석한다. 사실 단순히 1대만의 호적을 보아서는 신분 변동 여부를 알수가 없다. 2장에서 살핀 것처럼 변화되는 직역명의 추이를 보면서 이들의 신분변동의 추이를 살펴볼 있는 것이다.  4장에서 저자가 다루는 대상은 진양정씨 청천군파 중에서도 화헌공 정결의 가문이다. 화헌공은 정분과는 사촌으로, 정분은 단종대 우의정을 지냈던 인물이다. 계유정난때 사사 되었다그래서 화헌공은 화를 피해 전라도 남해로 잠적하였는데대대로 향리의 직역을 맡게 되면서 향리층으로 신분이 낮아졌다.   이런 식으로 신분이 낮아지는 경우도 있구나싶었다.    


 보통 호구 관계 자료의 경우에는  보통 호주와 처의 4(내외사조), 호를 구성하는 동거인 등이 기록되어 있다어떤 신분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호주와.4조의 직역을 보면 그들의 신분적 위치를 가늠할 수가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10대를 검토한 결과 이들이 향리의 직역을 여전히 지고 있지만, 대를 내려갈 수록 그들의 4조의 직역에 산직등이 기재되었다. 이들의 신분상승의 욕구가 대단했다고 있을 것이다아마 당시의 경제력이 어느정도 있던 이들에게는 당연한 욕구가 아니였을까그리고  외조도 중요한 것이 조선조에는 통혼권이란게 중요했다. 보통 권력층은 권력층끼리 혼맥을 잇지 않는가외조의 신분상 위치 역시. 기재된 직역과, 처의 호칭에 따라 확인했다처의 호칭은 보통 성에다가 , , 소이등을 붙혔는데 처가의 신분에 따라 달랐다고 한다(처가가 양반일 경우 호주의 처를 씨로 붙혔다고 한다성과 소이는 양반 아래 하층신분에게 붙힌 .,). 이것도 재미난 사실이다


 이들 가문의 외조를 살펴보면 초반에는 양인의 직역이 기재되다가 18세기 이후의 직역이학생으로 기재되어 양인과 양반의 사이의 신분층임을 있었다비록 양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호주의 4조들은 직역의 변화가 보이나, 정작 호주의 본인의 직역은 항상 향리의 직역이 기재가 되어 있어 신분 상승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후대로 가면 안일호장등의 직역이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향리 상층의 신분으로 까지는 올라갔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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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사회신분사연구> 2장을 읽었다.


2장은 호적대장을 통하여 '유학' '학생' 신분사적 의미의 변천을 알아본다.   유학과 학생은 시대에 따라 범위와 신분적 지위가 변하였다고 한다. 고려대에는 학생이 국자감, 향학,사학등의 교육기관의 생도와 이력자들이 쓸수 있는 직역이었다. 벼슬없는 양반자제, 양인에게까지 있었고, 고려후기에는 양반 하층이나 양인상 층에서 학생이라는 직역을 주로 쓰고, 공민왕 이후에는 학생과 유학이 동시에 쓰였다고 한다.   

조선초기는 고려와 비슷하게 성균관, 사학, 향교의 생도를 말하는 것이었고그리고 양반상층은 관직, 산계등이 대가나 문음등으로 기재될 가능성이 높았고, 그냥 유학이나 학생을 기재한 경우 양반 하층이나 양인 상층을 뜻한다고 하였다


양반, 양인을 ,하층으로 나누고 있지만 어떤 기준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다현직을 거친 조상 이후에 더이상 입사를 이루지 못한채 가문을 유지한 경우를 말한 것일까


임진왜란 이후에는 유학과 학생의 용례가 입사하지 못한 양반들을 살았을때 '유학', 죽었을때는 '학생' 쓴다고 알려져 있지만, 저자는 여러 고문서의 사례를 통해 살아있는 양반에게도 '학생' 쓰고 있음을 보여준다그리고 이런 용례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당대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가령,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한 양반이 나이가 지긋해졌는데도 幼學을 쓰는 것이 맞지 않다는 지적등이다.



그리고, 보통 호적의 직역 유학이나 학생을 경우에는 벼슬에 나아가지 못한 양반을 칭한 것인데, 후기에 들어 이러한 직역을 기재 하는데 유학을 쓰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음을 들어 신분상승이 증가 했다 보았다. 하지만 저자는 직역의 기본적인 분석이 되지 않고 일종의 편견에서 기존 연구가 이루진 것임을 지적하였다.


 대구부장적,울산부장적,진해현장적 등을 통하여  분석한 것에 따르면, 호주의 직역에서 유학의 비중이 후기에 수록 비중이 높아지고 있으며, 장적에 중인이하의 양인 호주의 내외4조의 직역이 학생과 산계를 쓰고 있는 경우와  18세기에는 생존한 사람의 직역이군관에서유학으로 개변되는   정확한 신분이 반영되지 못했으리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단순히 호적 상의 직역에서유학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났다고 하여 신분상승이 급증했다고는 없을 것이며, 그렇다고 하여 신분변동이 없다고는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징후 자체가 이미 견고한 신분제가 요동치고 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상위계층은 그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유입되는 인원이 늘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서얼 문제도 그런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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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금 1장을 읽었다.  조선시대에 음서제와 대가제를 다룬 장인데, 매우 흥미롭다. 음서는 기본 한국사 상식을 가졌다면 다들 알 것이다.  공신이나 3품이상의 대신들의 자제들에게 일정 이상의 관직에 제수하던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고려때와는 달리 왕족의 후손들은 제외가 된 것 같다.   


  조선초기만 해도 음서로 관직에 입사한 이들이 재상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후기에는 드문 일이었고 평판도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어린나이에 현직을 제수 받기도 한 것이 문제가 되어서 논의 끝에 성종대에는 문음의 자제 중 20세 이상의 자제가 매월 초에 취재에 응시하여 합격한 자는 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위에 적은 것처럼 음서로 입사한 이들은 평이 좋지 않기도 하였고, 사실상 모든 음자재에게 실직을 줄 수가 없어 한계가 분명하였다. 그래서 과거나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양반의 자제들의 불만을 충족하기 위한 제도가 대가제였다.  대가제는 문무의 현직자가 자궁(정3품 당하산계)이상이 되면 자신에게 별가된 자급(자궁이상은 가자를 할 수 없었던 것 같다.)을 대신 아들,사위,동생,조카등의 친족들에게 1명에게 줄 수 있도록 마련한 제도이다. 비록 산직이기는 하였으나, 실제 입사하였을때 산계는 그대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경국대전 등에 규정된 제도는 아니고 관습적으로 행해졌던 것 같다. 처음 시작은 세종의 세자(문종)의 치유를 기념하며 백관들에게  산직 1자를 가한 것이 었고, 이후에 빈번했던 것 같다. 이후 관직의 체계를 지나치게 문란하게 한다 하여 대가제로 나아갈 수 있는 산계는 건공장군(종3품)까지였으나, 1623년 이후에는 정5품계(통덕랑, 과의교위)까지 가능했다. 그런데 참상(정3품과 종6품사이)에 있는 자가 산계는 자궁에 이르기도 하였다 하여 실직과 산직의 격차가 큰 경우도 있었다 한다. 


대가제가 관직의 체계를 문란한다 말은 많았으면서도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도 혁파되지 않았음을 보면 이러한 제도가 양반의 존재양태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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