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인원 - 끝없는 진화를 향한 인간의 욕심, 그 종착지는 소멸이다
니컬러스 머니 지음, 김주희 옮김 / 한빛비즈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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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책의 제목을 읽다보면, 순간 이기적유전자로 읽게 된다. 이기적 ...라고 하는 순간 자동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책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처럼 인간의 위치를 다시 재조정하고자 하는 의지로 충만하다.


먼저 인간이 우주에서 가지는 위치를 보여준다저자의 표현으로 인정많은 가스인 오존의 아래에서 인간의 세상은 가능했다. 어떤이들은 우주의 모든 것이(빅뱅과 그것을 통해 만들어진 생명의 탄생에 필요한 원자들도)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데, 그런데 인간은 우주를 나가지 못하게 했을까?  


외에 우리의 미생물학적 기원부터 하여 DNA 이야기(우리는 3만개의 유전자를 가지나, 일본백합은 인간의 유전자보다 50배에 달하는 유전자를 가지며, 작은 밀은 9 5000여개 있다.) 통하여  인간중심주의의 세계관을 파괴한다. 인간의 특권의 이유로 드는. 인간의 지성에 대한 확신 역시, 곤충에 대한 여러 연구결과로 흔들린다. 단순히 곤충을 생각하지 않는 기계로 보았던 것에 저자가 인용하는 연구결과는 그렇지도 않을 있음을 보여주는 같다. 그리고, 종국에는 종이 과학이라는 문명의 이기로 저지른 결과로(지구온난화, 여러 종들의 멸종)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 예언한다.


인간의 오만함과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검토를 촉구하는 역할을 충분히 수도 있겠으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선 분량이 너무 적어 저자의 시니컬한 자세에 대한 충분힌 설명이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책의 의도가 성공적이지는 않다고 본다.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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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 은유, 기계, 미스터리의 역사
샌디프 자우하르 지음, 서정아 옮김 / 글항아리사이언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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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의사가 책이라는 문구로 소개되는 책들이 제법 된다의사가 책이라고 하면 흔히 건강서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는 않다. 책도 자신이 겪은 에피소드와 엮어서 심장에 관련된 의학기술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서술한 것이다심장이라는 몸의 기관은 예전부터 감정과 영혼등이 거하는 장소라 간주해왔다그러한 의미에서 심장을 비유하여. '~ ~ 심장'이라는 식으로 많이 지칭되고 한다. 물론 지금은 그러한 역할을 심장이 하지 않는 다는 점은 알고 있지만  그러나 생물학적 심장과 은유적 심장은 여전히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


   책의 초반에 소개 되는 다코쓰보심근증이라는 것은 '상심증후군'이라고도 불리며, 연인과의 이별, 배우자와의 사별과 같은 극도의 스트레스나 슬픔에 반응하여 심장이 급격히 약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증세는 심장마비와 유사하다. 정확한 원인은 없지만 정상적인 심장에 아드레날린 수용체가 분포하는 양상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아드레날린 수용체 분포의 밀도가 높은 곳일 수록 감정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심장은 사실상 정서적 삶의 기록지다.(p.36)'


이런 은유적 심장은 그것을 기계로 보는 관점이 서서히 확산되면사, 신비는 다소 사라지지만 여전히 심장이라는 곳은 신비스러운 기관이다책의 분량 대부분이 2부인 '기계' 할애 되어 있으며심장에 대한 의학적 접근 가능성의 발전을 보여준다 과정에서 다소 소름끼치는 과정을 거치는 경우도 많았다자기실험을 한다거나  사형수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한다거나 하는... 그런 집요함이 기술의 진보를 이루었고, 인간에게 질환에 대한 해방을 다소간 제공하고 있긴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위에서 언급한 측면이 마음에 걸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재미있었지만, 이해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자의 에피소드가 중간중간 뒤섞이며 이해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지만 기술의 기본 원리나 의학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어느정도 선에서 있을 뿐이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이러한 기술적 진보가 현재는 답보 상태에 있으며 이러한 정체에 활로를 제공할 있는 것은 패러다임을 전환시키는 것이며그것은 심장질환에 있어서 사회심리적 요인을 강조하여 보자는 것이다. 심장의 건강을 위하여는  여러 건강한 생활습관이 당연하게 필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필요한 것은 용기다.


  은유로 말해지는 것과 비슷하게 '상처받은 심장은 사람을 죽게 할수 있으며', '실존의 고통이 우리를 억누를 심장은 삶을 주도하고 방어하는 기관으로서 빠르고 인도적 죽음 선사하는 안전판이 되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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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사회신분사연구
최승희 지음 / 지식산업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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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관제와 같이 고문서를 통하여 조선후기 사회신분의 변동을 살펴보고 있다저자의 발표한 논문들을 집성한 것이나 제목과 맞는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대상 고문서는 아마 저자의 소장 고문서인 하다


2장에서 6장까지가 사회신분 구조와 관련한 글들로,  ‘유학’,’학생호의 시기에 따른 의미의 변천과  특정 향리가문의 호적을 통하여 신분변동의 추이를 살펴보고 있다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장적의 직역에 따른 단순한 통계적인 처리를 통하여는 신분변동의 정확한 모습을 포착할 없다는 것이다호적대장의  대표적인 연구자로 사카타 히로시가 있는데그는 호적대장의 분석을 통하여 양반호가 늘어나고 있음을 주장하였는데그러한 연구결과는 사실 직역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단순히. ‘유학호를 양반의 직역임을 전제하고 이러한유학 기재의 급증이 양반층의 증가라는 결론을 내버린 다소 안일한 연구였다 하겠다그러면서 2장에는 이런유학’’학생호등의 시대에 따른 신분사적 의미를 검토하고 있다


유학과 학생은 시대에 따라 범위와 신분적 지위가 변하였다고 하는데, 고려대에는 학생이 국자감, 향학, 사학등의 교육기관의 생도와 이력자들이 쓸수 있는 직역이었다벼슬없는 양반자제, 양인에게까지 있었고, 고려후기에는 양반 하층이나 양인 상층에서 학생이라는 직역을 주로 쓰고, 공민왕 이후에는 학생과 유학이 동시에 쓰였다고 한다조선초에는 고려와 비슷하게 성균관, 사학, 향교의 생도를 말하는 것으로 쓰였다. 그리고 양반상층등은 관직이나 산계등이 대가제나 음서제를 통하여 기재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그냥 유학이나 학생으로 기재된 경우 양반 하층이나 양인 상층을 뜻한다고 하였다여기서 며칠전에도 들었던 의문인데, 양반 중에서, 양인 중에서 ,하층을 가르는 기준이 무얼까 싶었던 것이다사실 양반의 경우에는 지속적으로 입사를 하는 자손이 나오는 경우그렇지 못한 경우를 기준으로 봐도 같다는 이해가 생겼지만, 양인들은 경제력그런데 그렇다고 양반 하층을 형성하는 이들과 양인 상층인 이들을 직역이 동일했다작은 의문은 있지만 당분간 해결할 없을 같으므로 잠시 뒤로 넘긴다


진년의 전쟁 이후에는 유학과 학생의 용례가 입사하지 못한 양반들을 살았을때유학’, 죽었을때는학생 쓴다고 하지만여러 고문서의 사례를 보면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살아 있는 양반에게도학생이라는 직역에 기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용례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당대인의 지적도 있었던 모양이다가령,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한 양반이 나이가 이미 지긋해졌는데도 幼學을 쓰는 맞지 하는 지적들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보통학생유학이라는 직역이 기재된 것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한 양반들을 칭하는 것이지만, 후기에 들어서는 이러한 직역이 기재되는 수가 급증하고 있다저자가 사카타 히로시의 연구에 대하여 지적한 바와 같이,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이렇게 급증해서야 이들이 지배층이라 있겠느냐는 의문이 든다.그리고 대구부장적, 울산부장적,진해현장적등을 통하여 호주의 직역에서 유학이 후기로 수록 비중이 높아지며, 그에 따라 호주의 내외4조의 직역이 학생과 산계등을 쓰고 있는 경우가 늘고 있으나,  1대의 자료만 보면 안되고 이전과 이후를 살펴보면 호주의 직역은 향리의  직역을 기재되었으나 내외4조의 직역이 학생,유학호, 산계등을 기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실질적인 신분변동이 있음을 입증한다고는 없을 같다


이러한 호적대장에서의 신분제 동요의 징후를 읽는 것과 겸하여, 임진년 전쟁 이후 빈번해진 공신 남발은 신분제 사회의 견고한 틀을 동요시켜버릴 있는 연유가 있다. 공신의 선정이 빈번해진 것은 그만큼 조선후기 접어 들면서 상황이 불안정하였다고도 있는 것이 여러차례 공신이 선정된 이유가전쟁때 왕이 피난에 공이 있다거나, 전쟁에 공이 있고반란, 역모등을 막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신 선정에는 신분의 고하가 없었음을 있는게  고관들의 이름 뒤에 천인까지 기재된 것을 보면 있다그리고 이러한 공신녹훈은 선조대에서 영조대까지 십여차례에 걸쳐 이루어졌고 중에서 39% 해당되는 이들이 중인이하의 신분층이다.(전체 37,230명에서 14,458) 그리고, 다시 중에서 23% 공사천이었다.(양인 5,959, 공사천 3,396) 공사천의 경우에 특전은 당연히 신분의 면천이었으며ㅡ, 서얼에 경우에는 한정된 품계 이내의 관직에만 제수하던 것을 풀어 주어 사실 양반 상층으로 올라가는 길을 열어둔 셈이고, 이러한 사례는 이미 자체도 많았기도 하였지만, 중인이하의 하급신분층에게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와 희망을 촉직시켰고, 당시의 정치사회적 불안정 분위기와 맞물려동요-문란-붕괴' 옳기는데 주요하였다고 저자는 평했다.


그리고,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보았던 것은 1장이었다.  1장에서는 조선시대 음서제와 대가제를 다루며, 음서제는 공신이나 2품이상 대신들의 자제들에게 일정 이상의 관직에 제수하던 것이며, 대가제는 이런 음서제의 한계(모든 양반 자제에게 실직을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양반의 자제들의 불만을 충족하기 위한 제도였다대가제는 문무 현직자가. 자궁(3 당하산계)이상이 되면 자신에게 별가된 자급(자궁이상은 가자를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 아들,사위,동생,조카등의 친족들 1명에게 있도록 것이다비록 산직이었지만 입사하였을 경우에는 그대로 인정 받았다고 한다그런데 경국대전의 법전에 규정된 바는 아니었고, 관습적으로 행해 졌다고 한다시작은 세종대에 세자(문종) 치유를 기념하여 백관들에게 산직 1자를 가한 것이고, 이후 빈번 해졌다고 한다처음에는 대가제로 나아갈 있는 산계가 건공장군(3)까지였으나, 1623 이후에는 5품계(통덕랑, 과의교위)까지만 가능했다그런데, 참상(3품과 6품사이) 있는 자가 산계는 자중에 이르기도 하였다 하여 실직과 산직의 격차가 크기도 했단다이렇듯 대가제가 가지는 폐단을 지적하면서도 결국 혁파되지 않았음을 보면 이러한 제도 자체는 양반의 존재양태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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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지방사족과 국가 경인한국학연구총서 53
최선혜 지음 / 경인문화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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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지방사족과 국가> 읽었다.


제목에서도  책의 의도를 있는 것처럼 저자는 조선전기의 사회구조를 재지사족을 기반으로 하여 그들의 성립과정 중앙과의 길항관계를 통하여 사회적 구조를 해명하는데 있다그런데, 저자는 주로 사족이라는 명칭보다는 유향품관이라는 명칭을 자주 쓰고 있다유향품관은 중앙에 관직을 거치거나, 실제 중앙에서 관직을 가지지는 않았으나 관품을 가진 자들이 지방에 정착해서 세력을 이루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어차피 사족도 벼슬을 지내던 이와 그의 가족들을 지칭하는 바였으니, 동일하게 쓰는 것도 문제는 없을 같지만그래도 사족이라는 명칭을 쓰는 같은데, 유향품관을 쓰는 지는 모르겠다.특별히 저자의 의도가 있나 싶지만서도 책에서는 별다른 설명은 없다


책을 읽으며 되짚어 보게 부분이 향리과 재지사족의 연원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점인데, 사실은 그렇지는 않다는 점을 알았다.(그런데 이게 정설로 굳어진 것인지 학자마다 견해가 다른 부분인지 역시 모르겠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일파는 파트너로 지방의 세력을 잡고 있던 향리가 아닌  사족, 유향품관을 선택하였다. 그래서, 향리를 세력을 억제하며, 유향품관에게는 지방행정의 협조를 구하고 그만큼의 혜택을 주기도 하였다대사헌 조준은 상소문에서 신분은 신분에 맞는 직무를 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였고, 첨설직, 검교직, 동적직등의 산직[유향품관] 중에서도 실로 자신이 그럴만한 사람임을 증명하지 못하면 직첩을 회수 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아마 향리들도 관품을 가진자가 있어 솎아 내는 지점도 있었을 것이고, 또한 유향품관들에게 협조를 구하는 동시에 통제를 하는 측면도 있었으리라 본다.  


그리고, 과거를 응시할만 자격을  신명색이 조사하여 응시 가능 여부를 결정하게 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그렇게 시행되었는지는 언급하지 않아 모르겠으나, 시행이 되었거나 되었거나 상관 없이 향리를 입사를 시키는 것에는 상당히 제한을 두었을 것이라 어렵지 않게 짐작이 된다유향소가 생긴 이유 역시 지방 내의 다른 세력인 향리를 견제할 목적도 있었는데, 그런 응시여부를 결정할 직임을 유향품관에게 주었다면 어떻겠는가.   


하지만 여전히 구체적으로는 크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표현되지 못한 의문점이 있기는 같다


 

중앙은 향리를 억제하고 유향품관에게 권농관이나, 면리임, 신명색 지방행정에 적극 참여하도록 하였지만, 동시 통제를 위한 방법도 강구해야 했는데 그것이 관찰사의 파견이다관찰사는 2품인 중에 파견되었는데유향품관을 통제하는 것은 수령보다는 관찰사였고, 수령의 감찰 역할도 동시 수행하였다이전에는 2품의 관찰사보다 낮는 낮은 직급의 안렴사가 파견되고 있어서 높은 직급의 유향품관을 제어할 없는 측면이 분명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주로 우리의 기존 인식으로는 훈구/사림의 대립의 이미지 때문인지 중앙에 대한 지방의 저항이라는 구도가 순간 그려지게 되는데, 그렇기 보다는 조화를 이루었다고 저자는 본다물론 책에서 인용되는 바와 같이 참람되게 지방관에게 폭력행사하기도 하는등의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지방의 세력들이 순응하였다고 있다. 중앙의 권위에 금이 갈만큼 알랑 거렸다고 생각하면 될까?


그리고, 국가가 지방의 통치질서를 안정화 시키기 위하여 자신들을 정당회시킬 있는 성리학의 이념을 안착시켜야 했는데우선적으로 국가는 유향품괌을 대상으로 삼강이념을 강조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고 한다우선 태조원년에서 부터 지방에 충신,효자,절부,의부 등을 가려 뽑아 문려정표를 내렸다. 이에 대한 혜택으로는 우선적으로 선정된 자를 발탁해서 기용한다고 하였다당시에 지방에서 발탁되어 벼슬에 갖게 기회가 있는 이들은 유향품관들이었다결국 삼강이념을 따르고 실천하도록 이끌고 싶은 대상은 유향품관이었다대두분 삼강이념의 실천자로 추천되어 상을 받은 이들은 유항품관과 그의 가족이었다. 물론 일반 백성도 있었으나, 저자의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극소수였던 같다여튼 이런 삼강이념의 정착와 안정화를 위해 노렸던 것은  군주권을 강조하고 가부장권을 옹호하는 새로운 통치제제의 구축이었다확실하게 잡더라도 지방의 세력들을 순치시킬 이유에서 였던 것이다. 물론 일반 백성들과 가장 접촉이 많은 유향품관을 통하여 자신들의 기획했던 바와 같이 완전한 성리학적 나라를 만들기 위함도 있다 것이다


또한 그들을 순치시키기 위함으로 산천제등의 정비도 필요하였다산천에 제사를 지낼 있는 자는 왕이나 왕의 대리자인 지방관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전에 지내왔던 바여서 폐하는 것은 어려웠고, 국가에서 지정된 바를 지키면 인정하는 정도에서 끝냈던 같다흥미로운 점은 유교이념을 표방한 유학자들도 뒤로는 그들이 음사라 비난했던. , 야제등을 지내고 무격인들과도 자주 교류를 하였다는 점이다그리고 음사를 유학자들이 음란하다 하였는지 알게 점이그들이 음사라 칭하는 제사에는 격을 따르지 않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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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향촌사회사 - 한국사회연구총서 8
정진영 지음 / 한길사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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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재지양반의 향촌 지배의 확립과정과 해체되어 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양반, 특히 재지양반의 형성과정이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서울과 그 수도권에 있고, 관직에 나아간 이들을 조선왕조의 다른 신분층과 구별되는 사회지배층이라고 인식한 데는 어려움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지방의 양반들은 어떤 식으로 자신을 다른 신분층과 구별되는 사회지배층으로서 인식, 확고하게 형성하여 갔는지가 최근의 궁금증이었다. 이 책은 재지양반들의 향촌지배 확립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나, 양반이라는 사회지배층의 성립과정이라는 측면으로 바라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 사회는 더 이상 이전의 왕조와는 다르게 신분제를 인정하고 있지 않으나, 여러 가지의 차이에 따라 생기는 계급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일반 일군의 무리와는 달리 사회의 지배계급들은 그들 자신을 다른 이와 다른 무언가라 여기는 의식이 있는데, 재지양반의 향촌지배권 확립의 역사 역시 차이와 배제의 역사라 할 만했다. 일단 일차적으로 그들이 차별, 배제하려 했던 계층은 이족(향리)이었다. 자신들과 족적기반이 같았던 그들은 향안과 향규 등의 제정에 따라 구별해갔으며, 결국에는 통혼권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앙권력의 대리자인 수령과는 타협, 길항적 관계를 통하여 자신들의 향촌지배를 확립, 한계지어 나갔다. 향안은 말 그대로 재지양반들의 리스트 인데, 이런 향안에 입록하기에는 어려웠고, 양반으로 인정되는 이들조차도 못 들어가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인데, 타관에서 입관한 사족이라 인정되는 이들도 향안에 입록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저자의 진단에 따르면, 16세기에 들어서는 15세기에 정착된 사회체제의 문제점이 노정되는 시기라고 하였다. 이런 16세기 접어들어 생긴 문제에 대한 재지사족의 대응을 퇴계의 <예안약조>로 살펴보고 있다. 16세기에 생긴 문제점이란 바로 민의 유망을 말했다. 그 이유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역 등의 문제였다. 민의 유망은 또 다른 민에게 역이 부가되어 그 고역이 가중되기도 하였고, 공물을 토산으로 하지 않아 방납에 따른 폐해도 존재하였다. 물론 재지사족의 수탈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당시(16세기) 자녀균분상속에 따라서 물려받은 재산이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유산을 남길 즈음에는 재산이 몇 배를 상회하고는 했다. 그들의 재산증식의 방법의 하나는 주로 토지매매에 따른 것이었다. 주로 토지를 파는 이유는 세금, 이자(환자, 장리등)의 문제가 가장 컸고, 이러는 상황에서 토지를 사는 재지사족의 입장에 더 우세였던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에 일반 민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행정단위 개편에도 그들(재지사족)이 개입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이유도 있었다. 얼마 전 읽다가 잠시 놓은 윤이후의 지암일기에도 이러한 모습이 확인된다.

 

이러한 재자사족과 수령등의 탐학과 수탈 등은 민의 유망을 유발하는 요인이었고, 그것은 당시 사회지배층이 본인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에도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그 해결이 모색되어야 했다 그 중 하나가 <예안약조>가 만들어진 것이고 그 주요 내용은 재지사족 스스로가 통제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거기에 더해서 민에 대한 통제의 내용 도도 있었다. 하지만 그 강도는 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탓인지 이 향약은 실시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향론의 불일치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이 정도도 내어 주지 못할 기득권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이후에 퇴계와 유향소가 중심이 되어 <금단규약>을 마련하였으나, 저자의 평에 따르면 이 또한 민의 유망이라는 향촌문제에 근본적인 대책일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모순점은 계속 축적되어 갔고, 향약에 더해서 동계,동약등이 생긴 연유도 하층민들의 통제가 쉽지 않았기에 주변 재지사족들과 함께 그들을 다스리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동성촌락이 생긴 이유도 이 이유가 컸다. 물론 상속의 형태가 자녀균분상속에서 장자상속으로 바뀌게 되면서 자연스레 이래이거가 줄어들었고(그러니까 장자가 아버지와 그 조상이 살았던 지역에 계속 남게 된 경향이 생겼고) 그에 따라 형성된 측면도 있으나, 그것보다는 상기 적은 바와 같이 자신들이 재지사족으로서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같이 모여 살며 자신들의 족적기반을 확고히 하는 것이 자신들의 위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중앙에의 진출도 어렵고, 더 이상 학문으로 이름을 드높인 이를 배출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강구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후기에 심상치 않은 신분변동에 따라 흔들리는 신분질서를 부여잡으려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 내부에서도 그러한 흐름은 적지 않았으니, 대표적인 예로 적서차별이다. 당시에는 서얼에 대한 차별이 줄어든 바 있었으나, 지방에서는 적서차별이 상당 부분 해소된 것이 아니라, 그 구분을 엄히 할 것을 이야기도 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서얼들의 불만은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질서의 경직성은 분동등의 향전, 농민항쟁기 시절에 생각보다 다기했던 향촌지배층의 동향의 이유가 될 것이다.

 

결국, 통하지 않으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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