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레인의 <생명의 도약>을 읽고 있다.   이제 겨우 1장을 읽었지만,  역시 어렵다는 것은 느낀다.  책은 저자가 진화가 발명한 10가지 발명 목록을 선정하여 풀어내는 식의 구성을 가진다.  첫번째는 물론 생명의 기원이다.  이 챕터에서 우선 '원시수프'라는 개념을 보여준다.  수업시간에 잠시스쳐지나가듯 들은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는 뭔지 알지 몰랐다.    최소 십년 전에 기사에서 관련 내용을 읽은 것도 같다. 유리 플라스크에서 행했던 실험 이야기도 기억 나니 아마 맞을 것 같다.


실험내용은 암모니아와 메탄, 수소에 전기 스파크를 주자 아미노산이 생겨 났으며, 그 아미노산은  생명체의 아미노산과 비슷한 것이었고, 실험결과가 알려지자 대서특필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곧 원시수프라는 개념은 인기가 시들해졌다고 한다. 왜?   오래된 암석에 대한 분석에서 메탄과, 암모니아, 수소가 풍부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 그랬다.  그러다가 다시 부각이 된 것은 혜성과 운석에 유기물질이 널려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몇몇 혜성과 운석에는 흙먼지와 섞인 얼음과 유기물질로 구성되고, 기체에 전기를 방전시켜 만든 아미노산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아미노산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범종설이 이런 사실에서 비롯되기도 한 것 같아 보인다.  하지는 저자는 원시수프라는 개념이 해롭다고 말한다.  원시수프에서 발생한 것이 복제물질인 DNA RNA가 아니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명의 기원은 어디서 왔을까. 저자는 열수분출공이라는 곳을 주목한다. 열수분출공이라는 곳은 생명의 기원으로 본 것이다. 여기서 사실 정신을 잃어버렸다. ㅋㅋㅋ 이점만 기억 하고 있다.  지구의 생명체 대부분은 물질대사의 화학반응이 동일하다. 크레브스 회로는 유기분자를 소비하여 이산화탄소, 수소, ATP를 만들어 내는데, 열수분출공에서 이러한 회로의 역도 가능하여 생명에 필요한 유기분자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언급되는 화학반응들이 사실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디테일은 전혀 알수 없이 넘겨짚는 것에만으로도 흥미롭기는 하지만, 그 생명의 신비를 볼 수 있는 지력의 딸림에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다.


작년에 이사할 적에 닉 레인의 책 중 <바이털궤스천>을 처리하는 것은 현명했다.  보나마나 몇장 읽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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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레리 한센의 <실크로드 7개의 도시>을 읽기 시작했다. 


앞서 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3권을 읽고 난 뒤라 그 지리적 공간에 대한 대충의 스케치가 된 상태라 생각보다는 잘 읽혀지는 것 같다.  물론 이 책을 기반으로 하는 정보를 답사기에 반영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실크로드라 명명된 길에서 발견된 고문서를 통해 7개의 도시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자 한다. 사막이라는 환경상 보존된 채로 발견되기가 쉬운 모양이다. 


  저자에 따르면 보통 실크로드라고 말해지는 지도상의 길을 다 걸어간 경우는 많이 없었고 오아시스 도시를 점으로 하여 이어져 나갔다고 한다. 상인의 행렬도 그렇게 대규모 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오아시스 도시들은 문화나 종교의 수용 면에서는 그렇게 강제적이지도 않아서 문화와 종교가 동서교차하는 것에 있어 일정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불교의 중국전파등이 중앙아시아인들의 역할을 컸다고 하는 것이 이러한 상황에 기인한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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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준호 교수의 <조선사회사연구>를  읽고 있다. 족보와 씨족을 다룬 챕터만 읽었다. 


 지금 족보의 형태로 나타난 것은 17세기 이후이고 이전에는 가계전슬, 내외보, 팔고조도등이 작성되고 있었다. 족보라면 공통의 조상으로 시작하여 뻗어나가는 가지를 중요시 하는 반면에  가계전승, 내외보, 팔고조도 등은 나를 중심으로 올라가는 형태다. 그리고 15세기~17세기에 작성된 족보의 경우에는 17세기 이후의 족보와 달리 남여차별 없이 나이순으로만 기재순서가 정해졌고, 외손도 상세히 기재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뼈대 있는 가문이라 떵떵 거리는 가문들의 구성원이 족보를 왜 그렇게 중요시 하였을까? 그것은 물론 유교적 이념의 문제, 그러니까 친척들이 남 보듯 하는 것에 대한 한탄도 이유가 되긴 하겠지만 그것 보다는 군역의 문제, 양반으로 인정받기 위한 문제가 주요 했다. 족보가 군역면제의 주요한 증서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본관에 대한 문제인데, 아직 이 부분은 다 읽지 않았지만 중국의 본관제와의 차이점이 흥미로웠다. 기본적으로 본관이 조상이 거주했던 행정구역명이란 것은 동일하지만, 조선의 경우에는 후손이 더이상 그 지역에 거주하지 않음에도 계속 이전에 조상이 거주했떤 지역명이 본관으로 쓰이는 반면에, 중국은 조상이나 본인이 어디에 거주하고 있느냐에 따라 같은 핏줄이라도 달리 쓰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기준이 모호하다고 하였으나 조선과는 다르다는 것은 뚜렷하다. 


지금 현재는 조선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보학이 중요하지만, 당대 조선의 양반들도 제일 중요한 학문 중 하나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신분변동에 따라 양반의 수가 급증했다고 보는 시선에 대하여 저자는 부정적이다. 보학에[ 밝은 이는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 말고도 전국단위로도 양반의 가문을 알았다고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양반 행세를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었겠냐는 것이다.  임란과 호란에도 신분제 등이 오히려 강고해졌다는 부분에서는 갸우뚱거리게 만들기는 하지만, 일단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더 고민해보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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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후기 향리신분 이동여부고를 읽었다. 3장에서는 저자가 소장한 남해지방에 세거한 향리가문의 고문서로 신분이동의 여부을 분석한다. 사실 단순히 1대만의 호적을 보아서는 신분 변동 여부를 알수가 없다. 2장에서 살핀 것처럼 변화되는 직역명의 추이를 보면서 이들의 신분변동의 추이를 살펴볼 있는 것이다.  4장에서 저자가 다루는 대상은 진양정씨 청천군파 중에서도 화헌공 정결의 가문이다. 화헌공은 정분과는 사촌으로, 정분은 단종대 우의정을 지냈던 인물이다. 계유정난때 사사 되었다그래서 화헌공은 화를 피해 전라도 남해로 잠적하였는데대대로 향리의 직역을 맡게 되면서 향리층으로 신분이 낮아졌다.   이런 식으로 신분이 낮아지는 경우도 있구나싶었다.    


 보통 호구 관계 자료의 경우에는  보통 호주와 처의 4(내외사조), 호를 구성하는 동거인 등이 기록되어 있다어떤 신분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호주와.4조의 직역을 보면 그들의 신분적 위치를 가늠할 수가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10대를 검토한 결과 이들이 향리의 직역을 여전히 지고 있지만, 대를 내려갈 수록 그들의 4조의 직역에 산직등이 기재되었다. 이들의 신분상승의 욕구가 대단했다고 있을 것이다아마 당시의 경제력이 어느정도 있던 이들에게는 당연한 욕구가 아니였을까그리고  외조도 중요한 것이 조선조에는 통혼권이란게 중요했다. 보통 권력층은 권력층끼리 혼맥을 잇지 않는가외조의 신분상 위치 역시. 기재된 직역과, 처의 호칭에 따라 확인했다처의 호칭은 보통 성에다가 , , 소이등을 붙혔는데 처가의 신분에 따라 달랐다고 한다(처가가 양반일 경우 호주의 처를 씨로 붙혔다고 한다성과 소이는 양반 아래 하층신분에게 붙힌 .,). 이것도 재미난 사실이다


 이들 가문의 외조를 살펴보면 초반에는 양인의 직역이 기재되다가 18세기 이후의 직역이학생으로 기재되어 양인과 양반의 사이의 신분층임을 있었다비록 양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호주의 4조들은 직역의 변화가 보이나, 정작 호주의 본인의 직역은 항상 향리의 직역이 기재가 되어 있어 신분 상승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후대로 가면 안일호장등의 직역이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향리 상층의 신분으로 까지는 올라갔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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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사회신분사연구> 2장을 읽었다.


2장은 호적대장을 통하여 '유학' '학생' 신분사적 의미의 변천을 알아본다.   유학과 학생은 시대에 따라 범위와 신분적 지위가 변하였다고 한다. 고려대에는 학생이 국자감, 향학,사학등의 교육기관의 생도와 이력자들이 쓸수 있는 직역이었다. 벼슬없는 양반자제, 양인에게까지 있었고, 고려후기에는 양반 하층이나 양인상 층에서 학생이라는 직역을 주로 쓰고, 공민왕 이후에는 학생과 유학이 동시에 쓰였다고 한다.   

조선초기는 고려와 비슷하게 성균관, 사학, 향교의 생도를 말하는 것이었고그리고 양반상층은 관직, 산계등이 대가나 문음등으로 기재될 가능성이 높았고, 그냥 유학이나 학생을 기재한 경우 양반 하층이나 양인 상층을 뜻한다고 하였다


양반, 양인을 ,하층으로 나누고 있지만 어떤 기준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다현직을 거친 조상 이후에 더이상 입사를 이루지 못한채 가문을 유지한 경우를 말한 것일까


임진왜란 이후에는 유학과 학생의 용례가 입사하지 못한 양반들을 살았을때 '유학', 죽었을때는 '학생' 쓴다고 알려져 있지만, 저자는 여러 고문서의 사례를 통해 살아있는 양반에게도 '학생' 쓰고 있음을 보여준다그리고 이런 용례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당대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가령,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한 양반이 나이가 지긋해졌는데도 幼學을 쓰는 것이 맞지 않다는 지적등이다.



그리고, 보통 호적의 직역 유학이나 학생을 경우에는 벼슬에 나아가지 못한 양반을 칭한 것인데, 후기에 들어 이러한 직역을 기재 하는데 유학을 쓰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음을 들어 신분상승이 증가 했다 보았다. 하지만 저자는 직역의 기본적인 분석이 되지 않고 일종의 편견에서 기존 연구가 이루진 것임을 지적하였다.


 대구부장적,울산부장적,진해현장적 등을 통하여  분석한 것에 따르면, 호주의 직역에서 유학의 비중이 후기에 수록 비중이 높아지고 있으며, 장적에 중인이하의 양인 호주의 내외4조의 직역이 학생과 산계를 쓰고 있는 경우와  18세기에는 생존한 사람의 직역이군관에서유학으로 개변되는   정확한 신분이 반영되지 못했으리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단순히 호적 상의 직역에서유학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났다고 하여 신분상승이 급증했다고는 없을 것이며, 그렇다고 하여 신분변동이 없다고는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징후 자체가 이미 견고한 신분제가 요동치고 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상위계층은 그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유입되는 인원이 늘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서얼 문제도 그런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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