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금오신화, 김시습, 민음사(2009)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작가 김시습은 15세기에 혜성처럼 나타나 방랑자라는 유성의 삶을 살다 간 불운한 천재이다. 세조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관직의 뜻을 접었다. 그 뒤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낭랑하게 시를 읊고 청아한 휘파람을 불며 살았다. 관직에서 멀어진 삶이 그를 문인으로 이끈 게 아닐까 싶다. 그의 불운이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열매 맺은 듯 하다. 조선 땅의 비극을 작품 속에 녹여낸 솜씨는 가히 놀라운 따름이다. 예를 들면, 양 선생이란 분이 여인들과 사랑에 빠졌는데, 알고 보니 그 여인들은 모두 왜구의 침입으로 죽임을 당한 귀신이었다. 귀신들과의 사랑은 에로틱하지 않다. 그저 시를 주고받을 뿐이다. 예를 들어 요염한 오 씨 여인은 이렇게 읊는다.


함빡 내린 새벽 이슬 복사꽃 같은 뺨을 적시고

그윽한 골짜기에 봄이 깊어도 나비 올 줄 모르네

그래도 기뻐라, 이웃집에서 인연이 이뤄졌으니

새 곡조 노래 부르면 황금 술잔에 술을 따르리


그런데 다른 여인 김 씨는 위의 시들이 너무 음탕하다고 나무란다. (읽다가 혼자 웃었다.)

몸가짐이 단정한 김 씨의 시는 이런 식이다.


두견새는 오경 바람결에 울고

희미한 은하수는 동쪽으로 기울었네

다시는 옥퉁소를 불지 마오,

우리 풍정을 세상 사람이 알까 걱정스럽다오.


요약해 보자.


조선 땅에서 예와 법도를 배우며 몸가짐을 단정히 하였던 여인들이 왜적에게 해를 입어 죽임을 당한다. 귀신이 된다. 이들은 생전에 낭군을 만나 낭군의 아낙으로 높은 절개를 지니고 평생을 지어미의 도리를 다하려 했다. 그런데 억울하게 저승길로 떠나게 된 것이다. 한이 맺혀 떠나지 못한다. 어느 날 남자 선비와 우연히 만나 연정의 시를 주고받는다. 여인들은 귀신의 몸으로 남정네와 시를 읊으나, 동시에 자신들의 행동이 (귀신임에도) 얼굴 붉힐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선 시대 여인의 삶과 죽음에 깃든 비극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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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주의자 고희망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97
김지숙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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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청소년 소설 읽는 중년으로, 세상의 모든 중년이 반드시 우리나라 청소년 소설을 읽어야만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건, 지구의 미래가 우리 중년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중년이 희망과 추억을 잃지 말아야 우리 사회와 미래가 건강해지기 때문이다.

ㅎㅎㅎ


*


김지숙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잊고 지낸 청소년 시절이 절로 떠오른다. 청소년 시절의 나는 세상에 무덤덤했고, 나 자신밖에 몰랐고, 혼자 놀기에 바빴다. 친구 사귀는 문제는 늘 어려웠다. 친하게 지내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멀어진 친구도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옹졸함 때문이었는데, 친구에게 상처를 준 것 같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 어느날 나는 중학교 시절의 그 친구를 못 잊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인터넷에서 친구의 흔적을 이리저리 찾아본 적이 있다. 그러나 친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끝내 알 수 없었다. 혹시 뒤늦게 친구의 연락처를 알게 된다 하더라도, 아마 친구에게 연락하지 못할 것이다. 그 시절은 이제 지나가 버린 것이고, 되찾을 수 없다. 친구가 현재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짐작이 어렵다는 점도 연락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친구 역시 나를 예전처럼 반길지 의문이다. 현재의 나는 친구의 삶과 가치관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 가능성도 크다. 그런데도 한 권의 소설을 통해 자신의 중학교 시절을 돌이키는 일은 괜히 벅차오르는 일이다. 안녕 미소여, 안녕 조소여, 추억이여. 종말이 오면, 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곳으로 우리 모두 사라질 것이다. 우리의 삶은 그런 소멸을 향해 가는 긴 여행에 불과하니 말이다. 청소년 시절에 누가 과연 그런 종말이나 소멸을 생각한단 말인가. 놀기 바쁘지. 아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언제나 주변에 예민한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대체로 무관심했으나, 소외나 상처를 겪는 아이들이 늘 있었다. 그러니 청소년이라는 시기에 우울한 시선으로 죽음을 사색하는 힘든 친구도 분명 있었겠지. 각자 결혼한 뒤에 서로 막연히 지내던 여동생 둘과 저녁을 먹은 적이 있다. 문득 동생들과 동네에서 커피나 술을 마시며 대화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시절에도 각자의 일상을 살았을 뿐. 그런데 동생들이 나를 탓하는 말을 했다. 엄마가 오빠만 엄청나게 챙겼잖아. 뭐? 정말? 나는 기억이 없는데. 오빠는 늘 무심했으니까. 이런 식으로 과거의 가족사를 언급하는데, 서로의 기억과 해석이 달랐지만, 내가 무척 무심한 오빠였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런 시절을 보내버린 나로선 <종말주의자 고희망>의 이야기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종말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나 역시 우울한 고민에 빠져 지낸 기억들이 있었다. 좋아하던 여자아이와 우연히 같이 길을 걷게 된 순간 어떤 망설임이라든지. 같은 방 쓰던 사촌 형과 수학 문제를 두고 갑론을박하며 다툰 일. 교회 집사의 행동에 의문을 품은 일. 종교 때문에 가족과 갈등을 일으켜 네 시간 가출(?)을 감행한 일. 교회에 나가던 이유가, 결국 그림 잘 그리던 여학생 S 때문임을 스스로 깨친 순간. (S가 멀리 이사 간 뒤에 깨우친 것이지만) S를 교회에서 볼 수 없게 되자 우울증에 빠졌던 일. 그 뒤에 집사의 훈육을 증오하며 교회를 떠난 일. 가족과 종교 갈등은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해소되었지만, 여전히 우울해서 여동생들에게 만화책이나 대여해오라고 심부름시킨 일. 막내는 이현세 만화를 좋아했는데 나는 고행석 만화만 고집해서 다툰 일. 심부름은 자기가 하는데 만화는 오빠가 좋아하는 것만 빌려오라니, 울컥! (막내의 고백)


<종말주의자 고희망>을 읽다가 이런 식으로 과거의 추억에 하나씩 빠져들었다.

그러니, 모든 중년이 꼭 읽어야 한다고 감히 주장하는 바이다.


*


어느 날 갑자기 종말이 닥친다. 사람들이 사라진다. 가족과 친구들이 눈앞에서 흐려지고 소멸한다. 이런 종말 현상에서 우연히 살아남은 아이들은 왜 자신들만 남게 되었는지 고민한다. 혹시 모든 게 자신들의 잘못이 아닐까. 가족과 다툰 일 때문에? 세상을 저주했기 때문에? (동생의 죽음을 내가 초래했기에?)


그런데 이것은 주인공 고희망이 어느 사이트에 연재하는 소설의 내용이다. 소설 속에 소설이 나오는 셈이다. 고희망의 현실과 고희망의 소설이 번갈아 독자 앞에 등장한다. 고희망의 현실이 소설에 영향을 미치고, 소설 속 이야기가 고희망의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남자아이의 고백에 당황하는 모습, 멀어지는 마음과 질투 비슷한 것, 친구 지수와 나누는 유머와 우정, 갈등 등.


김지숙 작가는 우리에게 (변함없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이번 소설에서는 ‘고요한 희망’까지 선사한다. 세상을 향한 청소년들의 시선과 고민을 차분하게 다룬다. 감정의 결이 섬세하다. 우리 사회의 갈등을 상징하는 듯한 삼촌과 할머니의 상반된 입장도 편향 없이 균형있게 다룬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대를 배려할 때, 비로소 온전한 위로와 희망을 얻을 수 있다. 그게 바로 작가의 메시지인 듯하다.


*


책을 사들고

<저자 친필 사인>을 받고 싶었지만 코로나 시대이고 하여,

내가 직접 책의 속지에 <독자 친필 사인>을 했다.


- 김지숙 작가, 수고했어요! 2022. 9.29 ... 독자 시간의 검은 등 (독자 친필 사인)


(이제 이 책은 독자 친필 사인을 지닌 매우 값진(?) 책이 되어 버린 것이다. 흐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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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역사 - 시대를 품고 삶을 읊다
존 캐리 지음, 김선형 옮김 / 소소의책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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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 알려 드립니다. 첫 쪽을 넘기는 Copyright 적힌 쪽에 적힌 원서 영어 제목이 잘못 되었습니다.
A Little Book of Poetry로 적혀 있습니다. A Little History of Poetry 이게 맞아요. 2쇄 부터는 고쳐 주시길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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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독서에 필요한 자질은 느긋함, 편한 의상,

문장을 음미하는 눈,

동심, 연애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기억,

진지함, 위트, 유머, 공감,  

호기심, 상상력, 시공간 이동술,

그리고 자기만의 방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 내 멋대로의 의견


*

<세상을 밝히는 에머슨 명언 500>,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문장들> 이런 책을 읽다 보면 위에 쓴 것과 같은 글을 흉내 내기 기법으로 한 번 써보게 된다. 나름 재미있다. 써놓고 읽어보면 너무 많이 나열한 것 같아서 고개를 갸웃하기도 한다. 하지만 후세에 명언을 남기는 위대한 인물이 될 계획은 내게 아직 없다. 그래서 그럭저럭 마무리.

 

*

 

오랜만에 서점에 가니 카르스텐 두세의 <명상살인 2>가 진열되어 있다. 1편을 흥미롭게 읽은 탓에 서슴없이 책을 집어 든. 보통 진열된 여러 권 책 가운데 가장 깨끗하고 남들 손이 안 탄 책을 고르려고 이리저리 살핀다. 어차피 나중에는 때가 묻고 종이도 접히고 표지에 흠집이 생기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첫 대면에서는 가장 산뜻한 걸 골라내기 위해 세밀하게 살피는 것이다. 하물며 즐거운 미소의 저녁 시간을 선사해주는 '명상살인'인데 더욱 정성껏 살펴야 할 터.


 

서점에 가기 전에 인터넷 알라딘에 접속해서 <새로 나온 책들>소개 글차근차근 응시한다. (자세히 읽진 않고 그저 잠시 응시한다. 하하) 이번에 끌린 책은 <지루함의 심리학 - 지루함이 주는 놀라운 삶의 변화>이었는데, 막상 서점에 가보니 책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열대 책들을 구경하기로 한다. 우연히 예술적인 표지를 지닌 한 권에 눈길이 간다. 제목이 <1000개의 그림 1000가지 공감>이다. 책을 펼치니 서양미술 작품 1000개가 깔끔한 컬러 사진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진마다 간략한 해설이 적혀 있다. 내가 아는 미술작품도 있지만, 내가 모르는 작품들이 훨씬 많아 보인다. 모두 선명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그래서 이 책도 사기로 한다.


 

세 번째로 고른 책은 과학 코너에 있는 책이다. 제목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흥미를 끌지만 바닷속에서 물고기와 행진하는 인어가 그려진 표지도 매력적이다. 뒤표지 소개 글을 읽는다. "사랑과 혼돈, 과학적 집착에 관한 룰루 밀러의 경이롭고도 충격적인 데뷔작!" 정말, 정말일까? "이 책은 완벽하다. 그냥 완벽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서정적인 동시에 지적이고, 개인적인 동시에 정치적이며, 사소하면서 거대하고, 별나면서도 심오하다." 너무 심하게 강력한 추천이네. "눈을 뗄 수 없다. 놀랍다. 심지어 충격적이다! 유명한 생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인생 이야기로 독자를 매혹하기 시작하고, 그러다 아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돌아서며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책은 당신의 가슴을 사로잡고, 당신의 상상력을 장악하고, 당신의 예상을 박살 내, 당신의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결국, 이 책도 구매하기로 마음먹는다.

 


점심시간이 지났다. 직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미 늦었기에, 오히려 느긋해진다.

 


그런데 서점의 계산대에 줄이 평소보다 길다. 코로나 5명 시기라서 주말 독서 삼매경에 빠지려는 인구가 늘어난 걸까? 여하튼, 난 긴 줄의 맨 뒤에 선다.


 

내 앞에 키가 크고 젊고 앳되고 순진한 여대생 정도 된 여자애가 한 명 서 있다. 여자애가 흘끔 나를 자꾸 돌아다 본다. 나는 내가 고른 책 세 권을 왼손에 받쳐 든 채, 중년 아재답게, 중년다운 표정으로, 중년의 눈길로 먼 곳을 그윽이 바라본다.


 

톡톡, 여자애가 뭔가 결심한 듯, 내 쪽으로 몸을 확연히 돌리더니, 내가 든 책의 모서리를 살짝 건들며 말을 건넨다.

 


- 저기요, 책만 사려면 저쪽이 빨라요. 저기 저쪽이요. 바로 결.

 


나는 여자애가 가리킨 곳을 본다. 거기에는 <도서전용 카드결제-바로 결>라고 적힌 무인계산대 기계가 두 대 설치되어 있다.

 


여자애는 분명히 내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만 골라든 중년 아재인 내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게 안타까운 것 같다. 친절히 바로 결제를 알려주다니!

 


그런데 문제는

 


문제는 하필 나라는 인간이, 카드를 안 쓴다는 거다.

(년 전부터는 휴대전화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카드를 지니고 다니면 충동적인 (도서) 구매를 심하게 하거나 충동적인 음주를 하거나 하기에, 우리 집의 의사결정권자가 카드를 모두 잘라 버리라 신혼 때에 지시했던 것이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우리 집 의사결정권자는 여러 개의 내 명의로 된 카드를 들고 다니지만 나는 여전히 현금과 교통카드만 지참하고 다닌다. 코로나 백신 접종 증명도 휴대전화가 없는 탓에 종이 증명서를 발급받아 다니는 디지털 원시인이 바로 나다.

 


하필 나 같은 아날로그 아재에게 친절을 베풀다니.


 

나는 서점에서 만난 친절한 여자애에게 이렇게 말한다.


 

- , 나는 카드는 없고, 현금만 있고, 시간은 많아요


 

여자애는 무안함과 황당함을 느낀 표정으로, 아아, 하며 나를 멀뚱히 쳐다보더니 , 몸을 돌린다.



*


 

아무튼

서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참으로 이기적이 아니고 착하고 배려심이 깊은 것 같다. 어쨌든 고마운 일이다.

 


제대로 고맙다고 말을 못 했는,

 


지금이라도, 학생신경써주어 고맙!

*


<1000개의 그림, 1000가지 공감> 읽는 법

- 먼저 그림을 들여다보고 이 그림의 제목이 뭘까 추측해본다. 그리고 제목과 설명을 읽는다. 나는 이 책이 무척 마음에 든다.

(읽는 중이긴 하지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읽는 법

- 종의 기원을 쓴 다윈이 살던 시절, 그 시대의 종교와 세계관의 분위기를 감안하고 읽는다. 나는 이 책이 너무 마음에 든다.

(읽는 중이긴 하지만)

 











<명상살인 2> 읽는 법

- 1편을 먼저 읽은 뒤에 읽기를 권장한다. 명상이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깨달게 된다. 살인할 때도 평온해진다.

물론 나쁜 놈 죽이기다.

유머는 보너스!

(물론 1편 얘기고, 2편은 아직 읽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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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연 부는 찬 바람에

유튜브에 끌리던 시선, 문득 돌리니

환기위해 아내가 젖힌 묽은 창(窓) 너머

소리 없이 내리는 첫눈

아, 겨울이구나.


훗날, 21세기 시민의 부질없는 디지털 삶과 덜떨어진 사고, 엉성한 감수성을 연구하는 분들을 위해 특별히 공개하는 나의 유치찬란한 모던 시(詩) <첫눈>의 전문ㅡ 푸하ㅎㅎ


*




대니얼 데닛은 <직관펌프-생각을 열다>에서 지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논하며, 77가지의 생각도구라는 걸 소개한다. 그 가운데 1부 1장을 차지한 맨 처음의 것은 놀랍게도 “실수하기”이다. 나는 제목만 보고도 심퉁! 한다.



(‘심퉁’은 '심쿵'을 잘못 쓴 것인데, 오타 고치기 귀찮아 그냥 내비 둔 조어로, 지금 생각해보니 ‘심쿵하다’와는 매우 다른 뜻을 지녔다. 심쿵은 멋진 이성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아래로 떨어진다는 매우 낭만적인 비유다. 반면, 심퉁은 심장이 화살에 맞은 듯 퉁, 하고 튕긴다는 매우 절망적인 표현이다. 구체적으로 실수투성이의 무수한 흑역사로 점철된 비극적인 삶을 살아온 나 같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두렵고 찔리는 심정을 말한다.)



어쨌든

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1부 1장에서

첫 번째 도구의 중요성을 강하게 주장한다. 정말 뜻밖이다.


그에 따르면, 철학사의 상당 부분은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 아주 솔깃한 실수를 저지른 역사이며 그 역사를 모르면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덧붙여 우리가 실수를 감수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실수를 저질러야 할 때가 있다고 말한다. 좋은 실수를 많이 할수록 우리가 그만큼 성장한다는 뜻이다. 그는 좋은 실수를 저지르기 위한 핵심 수법도 공개한다. 그것은 실수를 (특히, 스스로에게서) 감추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수를 부인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자신의 실수가 마치 예술품인 양 머릿속에서 요모조모 뜯어보는 감정가가 되어야 한다고.




*




우리의 초고는 모호하고 엉성하며 비문투성이다. 방향을 잃고 헤매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도 우리는 꾸준히 써야 한다. 양이 질을 결정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말, 마르크스가 하고 우디 앨런이 인용한 이 말, 양이 질을 결정한다는 이 말은, 나름 내게 용기를 준다. 실수를 겁내지 말고 많이 써보라는 뜻 같아서. 재능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실수를 통해 얻을 수 있다는 ...(나름의 해석) ^^;



나는 이 말을 슬그머니 고쳐본다.

“실수의 양이 질을 결정한다.”



아, 아니다.

실수를 무한히 되풀이해선 안 된다.

다시 슬그머니 고친다.

“실수와 수정과 작은 성공의 분량들이 모여 질을 결정한다.”



그러고나서 다시 보니,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단 역시 단순한 게 더 낫다. 그냥


“양이 질을 결정한다.”




*




휴가가 많이 남아, 그걸 안 쓰고 반납한다 해도 돈으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억울해서, 뒤늦게 며칠 휴가를 내어 집에서 보낸다.

코로나도 무섭고.



내 딸은 집에 돌아와

손발 씻고나서 엄마와 함께 안방으로 들어간다.


소외당한 나는

둘이서 무슨 이야기 하는지 궁금해진다.

안방 문에 다가가 조용히 엿듣는다


둘이 하는 말이 구체적으로 정확히 들리진 않지만

큰 그림을 이해할 정도로는 들린다.



그러니까

세상에 나갔다가 돌아온 

내 딸이

엄마랑

나누는 이야기는 전부 “주변의 황당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다.


그러나 다음날, 아내가 전해 주는 이야기에는 전혀 다른 제목이 붙어 있다.


"우리 딸 원더 우먼”





*





연말 휴가 내고 요모조모 펼쳐 본 책들과 100자 평 

(* 주 : 연말에 출판된 것이 아님. 두서없이 집어 든 책들임)





지지 않기 위해 쓴다 – 바버라 에런라이크

품위 있게 세상을 바꾸는 글. 우아하게 어퍼컷을 날리는 작가. 다른 계층, 다른 세상 사람들의 터전에 스며들어 같은 방식의 삶을 직접 체험한 뒤에 글을 쓴다는 것이 매우 놀라웠다. 바버라의 다른 절판 서적을 구하기 위해 먼 곳의 알라딘 중고서점들을 가로지른 지난여름의 추억이 떠오른다.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 리사 펠드먼 배럿

최신 뇌과학 정보를 7개 강좌로 엮어 들려주는 책. 뇌과학 전성시대에 유튜브와 서점에 얼마나 많은 오류와 허구가 퍼져있는지 깨닫게 해준다. 뇌의 마법과 진정한 가치를 담았다.















멘탈이 무기다 – 스티븐 코틀러

불가능에 도전하는 기술을 소개한다. 몰입과 창의성을 높이기 위한 유용한 방법을 논하는 자기계발서인데, 쉽지는 않다. 정독해야 가치를 알 수 있다.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 – 대니얼 데닛

철학과 과학을 연계하는 글쓰기. 그가 소개하는 77가지 생각도구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지적 무기에 가깝다. 첨단무기 사용 설명서처럼 꽤 어려운 구석이 많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음미하기 시작하면 흥미진진한 주제들에 심취할 수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책임한 추천.)














STATISTICS Using Stata – Sharon Weinberg and Sarah Abramowitz

케임브리지 대학출판 서적답게(?) 쉽고 친절하다. 우울할 때 통계학을 읽거나 파이썬이나 Stata 코딩에 빠져든다. 실력은 없어도 이런 논리의 세계로 도피하는 이유는 있다. 불확실성을 다루는 방식에 매료되고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 하비에르 마리아스

세 번째 정독하는 장편 소설. 끝없이 이어지는 기나긴 우울과 페이소스가 뒤섞인 사색적인 문장들은 꼭 밤에 읽어야 한다. 작가의 호흡과 스타일에 젖어 들지 못하면 지루하고 읽기 어렵다. 하지만 일단 빠지면, 밤을 꼬박 새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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