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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낮 2023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장재희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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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된 소설 세 작품이 마치 시(詩)처럼 느껴진다. 문장이 시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작품이 남기는 인상이 시처럼 고요하고 잔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산문을 쓸 때 시적인 문장을 동원하면 오히려 유치해 보일 수 있다. 시적인 문장을 쓴다고 시적 분위기가 감도는 이야기가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역효과만 초래할 수 있다. 게다가 서사가 필요한 대목에서, 강물은 밤새 도도히 흘렀다, 라는 식으로 시적인 처리로 마무리하는 작가를 보면 짜증이 날 때도 있다.


장재희 작가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다. 소설 문장에 시적인 문장이 별로 없다. 하지만 작품을 다 읽고 난 뒤에, 감동먹고 약간 상기해진 얼굴을 처들며 소설 속 공간에서 막 빠져나올 때, 마치 한 편의 시(詩) 세계에서 머물다 현실로 돌아오는 느낌이다.


고요하고 적막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온기를 지닌 공간과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자꾸 떠오르는 것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성복 시인의 <편지>나 이장욱 시인의 <정오의 희망곡> 등이 작품에 일정 부문 모티브로 작용했다고 한다.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는 최가은 평론가의 해설에서는 세 작품을 관통하는 소재가 어쩌면 '편지'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상대를 다 읽어내지 않음으로써 상대의 자리를 마련하려는 마음을 담은 그런 것이라고. 해설 제목이 바로 <빈 편지>이다.


뭐, 시나 편지나 비슷하다. 그런데 작가는 노래라고 표현하고 싶어 한다.


나에게 있어 소설에서 결국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건 정서나 주제, 인물이 아니었다. 그것과 상관없이 소설의 중심에는 어떤 노래가 계속 흐르고 있다는 걸, 내가 글을 쓰는 건 그 노래를 찾기 위해서가 아닐까, 찾아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126쪽 <작가의 말>에서)


개인적으로 로맨스나 감상적인 연애 감정을 읽는 것도 좋아한다. 하지만 장재희 작가의 작품이 그런 스타일이 아니라는 게 왠지 기쁘다. 작가의 감수성은 삶과 소통과 공존이라는 철학적인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세 편을 소설을 읽는 내내, 내가 조용한 사람이 된 듯한 착각에 잠시 빠질 수 있었다. 작가가 조용한 사람이고 작품이 고요하고 은은한 문샤인같기 때문이다. 좋은 시간이었다.

문샤인이 어두웠다. 모하는 화분이 놓인 창가로 다가갔다. 토끼 귀 모양의 커다란 잎 하나가 무겁게 축 처져 있었다. 처진 잎에 손가락 끝을 대었다. 은은하게 빛나던 잎은 수분을 머금은 채 검은 빛으로 변해버렸다. 잎이 무르는 건 물을 많이 줬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역시나 화분 받침대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모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특히나 문샤인은 물을 적게 줘야 하는 식물이었다. 물이 부족해서 시든 거라면 흠뻑 주면 생생하게 살아나지만, 물을 많이 줘서 뿌리가 썩은 경우는 살려내기가 힘들었다. 모하가 물은 준 건 이틀 전이었다. 아무래도 여자가 오늘 낮에 다시 물을 준 것 같았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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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본스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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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롭다. 폭력의 일상이 총알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힌다. 괴로우면서도 고요하게 엄청 웃긴다. 더 놀라운 건 반대 진영 보다 우리 편의 폭력을 주로 저격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80년대 군사정권과 운동권을 동시에 고발하는 격이다. 작가 애나 번스의 무운과 건강과 건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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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래의 미학 2023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황윤정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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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황윤정 작가의 [갈래의 미학]은 단편 소설 2개만 수록된 83쪽에 불과하지만, 표지 디자인이 곱고 종이 재질이 고급스럽고 활자는 우아하다. 아이스크림이나 작은 케이크처럼 느껴진다. 수록작은 <갈래의 미학>과 <보름>이다. 소설가 위수정의 해설도 수록되어 있다. 소설을 읽고 나서 한국소설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했다. 


우선 황윤정 작가의 담백한 문장이 눈길을 끈다. 우리가 보통 소설가의 문장이나 문체를 언급할 때에는 대개 미문인 경우가 많다. 또는 작가의 독특한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문장인 경우이다. 그런데, 황윤정 작가의 문장은 미문이라고 할 만한 게 없고 개성을 드러내는 문체라고 할 것도 딱히 없다. 상당히 정제된 문장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렇다고 문장이 단순하거나 평이한 것도 아니다. 보석 세공처럼 절제되고 우아하다. 동시에 자연스럽다. 비문이 없고 정확한 표현과 어휘 선택이 돋보인다. 멋을 부리지 않는다는 게 큰 장점이다. 근래 뜨는 몇 명 작가들의 작품은, 개인적으로, 끝까지 읽어내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감성적인 문체가 오히려 읽기 힘들게 하고 은근히 멋을 부리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황윤정 작가의 문장은 딱히 걸리는 게 없고 고요하면서도 긴장감을 유지한다. 끝까지 읽게 된다. 문체를 크게 드러내지 않고 삶의 본질과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작가라고 평하고 싶다.


표제작 단편 <갈래의 미학>은 오랜만에 접하는 소설의 미학이었다. 순수 소설은 서사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읽는 이의 마음에 감흥을 일으키는 무언가 있어야 한다. 마지막 문장까지 다 읽었을 때 잔잔한 여운이 있어야 한다. 화자인 나는, 절친 세라와 미국 여행을 떠난다. 평생 오빠만 챙기는 엄마 때문에, 그리고 피곤한 직장 생활 때문에, 느닷없이 세라의 제안을 수용하고 함께 미국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행은 인생의 라이트모티프(leitmotiv)가 된다. 라이트모티프 란 악극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중심 악상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여기에서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어떤 전조' 같은 것이다.


세라는 말했다. 이제는 연극이나 문학 등에도 쓰이는 개념인 라이트모티프가 우리의 인생 속에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리가 무심코 겪는 사소한 에피소드부터 심각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모든 순간이 어쩌면 우리의 인생을 결정짓는 일종의 중심 악상일지도 모른다고. 세라는 가면 갈수록 그런 믿음에 완전히 심취한 것처럼 보였다. 계절보다 빨리 피어난 꽃을 발견했다든지, 첫사랑이었던 선배의 결혼식 날 구두 밑창이 뜯어졌다든지,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신호를 위반한 자동차에 발을 밝혔다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세라는 씩 웃으며 마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어떤 전조를 느끼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작품 <갈래의 미학>은 화자인 '나'가 절친인 세라와의 미국 여행을 계기로 (우정과 사랑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 때문에) 멀어지게 되는 이야기다. 가슴 아프고 미묘한 라이트모티프 순간을 보여준다. 단편 소설의 미학을 간직한 이 작품은 일독의 가치가 있다.


두 번째 작품 <보름>은 우리 사회에 자주 문제가 되는 폭력적인 이슈를 다룬 작품이다. <갈래의 미학>에서는 화자가 여성이고 일인칭 시점이다. <보름>에서는 화자가 남성이고 삼인칭 시점이다. 그런데 어색한 구석이 없다. 소설가는 작품의 화자를 남성으로 하든 여성으로 하든 독자에게 어색함을 주면 안 된다. 남자 주인공인데 어딘지 모르게 여성스럽네, 작가가 여자라서 그런가 봐. 이런 의문을 남기면 안 된다. 황윤정 작가는 인물의 성별과 시점을 바꾸어도 그런 의문이나 미숙함을 드러내지 않고 아주 효과적으로 쓸 줄 아는 작가다. 절제된 문장력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성(性)을 초월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지녔기 때문인 것 같다. 부러운 재능이다. <보름>의 마지막 문장은 폭력적인 우리 사회에서도 작은 희망을 품게 한다. 막연한 바람은 희망이 아니다. 작은 실천의 첫걸음이야말로 진정한 희망이다.


작가의 말도 인상 깊다. 작가는 자동차 접촉 사고를 당한 뒤에 더 이상 운전을 할 수 없을까 봐 걱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긴 심호흡 끝에 다시 운전할 수 있었다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에게 되뇌던 한 문장 덕분이었다고 한다.

또하나의 극복해야 할 무언가를 만났다.


작가는 상대하기 벅찬 벽을 마주할 때면 그렇게 중얼거리곤 한다고.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는 회복 탄력성을 가지게 된 것은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말한다. 소설을 쓰면서 예전보다 제법 단단하고 옹골진 자아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계속 쓰고 있고, 계속 써야만 한다고 다짐하는 작가에게, 마음의 응원을 보낸다.

엄마를 요양원에 다시 데려다주고 난 뒤에 버스 안에서 우연히 세라의 딸 재이를 만났을 때 나는 이것이 어쩌면 내 인생의 라이트모티브(leitmotiv)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사고의 패턴이 지극히 세라스럽다고 느꼈고, 한편으로는 세라와 한창 어울려 지내던 이십대 중반 무렵까지는 한 번도 세라스럽게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오히려 십오 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 내심 놀라고 말았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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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포도밭 -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
이반 일리치 지음, 정영목 옮김 / 현암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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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포도밭, 이반 일리치, 현암사(2016)


신학과 철학을 전공한 작가는 원래 사제였으나 교회를 비판하여 교황청과 마찰을 겪는다. 그리고 사제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덕분에 이런 지혜로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지혜로운 책이라고? 맞긴 맞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를 처음 접하는 독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도 모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H2O와 망각의 강>으로 처음 이 작가를 접했다. 그런데 상당히 어려워서 다 읽지 못했다. 심지어 곧 이사하기 위해 책을 좀 정리할 때, 처분할 대상으로 여겼다. 그래서 알라딘중고서점에다 팔아버릴 책더미에 던져두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텍스트의 포도밭>에 접하게 되었다.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이라는 책 소개가 눈길을 끈 것이다. 온라인 알라딘 서점에서 미리보기로 앞부분을 조금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을 구매하기로 마음먹었다. 성격이 급한 나는 어느 책을 사기로 하면 당장 사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교보문고와 영풍문고에서 검색했다. 절판되기 직전인지 뭔지, 아무튼 종각 영풍과 강남 교보문고에 각 1권씩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운동하러 나간다고 뻥치고 강남으로 가서 책을 구입했다. (책 사러 간다고 하면 아내는 기겁한다. 집에 책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 이사하는데, 책을 처분해야지, 뭘 또 산다고?!)


음, 옆길로 너무 샜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오면, 아무튼 이 책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12세기 수도사들의 독서법에 대한 설명이 뭔가 내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는다. 휴대폰과 유튜브 등 전자 미디어 시대의 읽기에 대한 회의감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오랜 직장생활에서 자주 느꼈던 점이 하나 있다. The Less is More이다. 이 말을 독서와 연결한다면 “책을 많이 읽을수록 얻는 것은 더 적을 것이다”라고나. 혹은 “더 적게 읽을수록 더 많이 얻을 것이다”라고나. 이것저것 너무 많이 욕심내어 읽기 보다는 좋은 책을 골라 정독하고 묵독하고 되풀이하여 읽는 것이 더욱더 지혜로운 독서법이다. 그런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막연히 느끼고 있던 점을 이 책은 확실히 집어준다. 12세기 수도사 성 빅토르의 후고가 1128년에 쓴 최초의 독서법 <디다스칼리콘>이라는 책에 대한 설명서이기도 하다. 생소한 라틴어를 마구 건네는 저자의 글쓰기가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마음잡고 정독하니, 내가 지닌 약점들을 날카롭게 지적해준다. 여러 면에서 생각할 것들을 던져 준 책.


특히 책(혹은 문자)을 거울에 비유한 것이 인상 깊다. 페이지라는 거울을 통해 자아를 새로 발견한다는 것이다. 읽기는 눈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음독하고 기억을 위해 되풀이하여 씹어 삼키는 몸짓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 오늘날 우리는 빠르게 읽고 핵심만 간추려 따로 메모하는 정도만으로 읽기를 다했다고 여긴다. 반면 12세기 수도사들은 온 몸으로 읽고 기억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머릿속에 건설하고자 했다.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여 온전한 지식 세계를 자기나름대로 구축하는 것이다. 물론 오늘 날의 독서를 모두 이런 방식으로 전환해야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짧은 문장 이외에는 전혀 읽지 않는 21세기 현대에 12세기 수도사들의 독서법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은 것 같다.


책의 3분의 1이 넘는 각주도 하나하나 주의 깊게 읽어 볼 만하다. 각주에서 문득 깨달은 것 하나 - 우리는 엄청한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인류 최고의 테크놀로지는 역시 "문자"라는 것! 그런데, 문자가 처음 등장했을 때,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문자를 경계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사람들이 지식을 체득하지 않고 그저 문자 형태로 저장만 한다면 무척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그리스 철학자들은 믿었던 것 같다. 저자 Mr. 일리치는 이러한 문자의 양면성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 (앞으로 여러번 따져봐야 할 주제인 듯.)


책을 읽다가 중간에 벌떡 일어났다. 팔아버릴 책더미에다 던져두었던 <H2O와 망각의 강>을 되찾아 서재에 가져와 다시 꽂았다. 나중에 다시 도전해야지.


책 제목 <텍스트의 포도밭>은 의미심장하다. 눈으로만 바쁘게 읽기보다는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읽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포도알 하나하나 씹어 삼키듯이. 문장을 그렇게 대해야 한다는 의미다. 새겨두어할 독서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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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팬, 제임스 매튜 배리, 펭귄 클래식 (2008)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수많은 영화, 연극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오늘날 원작으로는 거의 읽히지 않는 작품. 작가 제임스 매튜 배리는 일련의 <피터 팬> 작품으로, 연극과 문단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인물이지만 동시에 훗날 정신분석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여러 콤플렉스를 지녔고 약간 마마보이 기질도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비판은 뒤로 하고 일단 읽기로 했다. 작품을 읽는 내내 감탄했다. 그동안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그 놀라운 액션 장면들은 원작을 각색하는 가운데 탄생한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원작에서 이미 모든 환상적인 장면들을 멋지게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피터와 웬디 일행이 네버랜드로 날아갈 때, 피터 팬이 바람에 누워 타고 간다든지 하는 장면들. 웬디를 향한 팅커벨의 질투 역시. 디즈니사가 굳이 따로 각색할 필요가 거의 없었음을 깨닫는다. 원작의 묘사를 그냥 그대로 따라 애니메이션으로 재현하면 되었을 정도라고나. 생생한 묘사도 뛰어나지만, 유머 역시 놀랍고 뛰어나다. 읽기가 즐겁다.


그런데 내가 왜 이 책을 읽게 되었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 책을 구하러 알라딘중고서점으로 애써 달려간 기억이 있다. 개인적으로 중·고등학생 시절에 친구들이 나를 피터 팽! 하고 놀린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흑역사였으나 지금은 뭐 (으쓱) 그 시절로 돌아가고만 싶다. 어쩌다 어른이라니, 괜히 되었어. 피터 팬이 부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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