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수첩 2009.여름 - No.26
문학수첩 편집부 엮음 / 문학수첩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여러 평론가들의 대답이 흥미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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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 시선 16
김경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구판절판


<외계(外界)>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畵家)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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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세계사 시인선 56
김승희 지음 / 세계사 / 1995년 6월
품절


<솟구쳐 오르기 ․ 10>

황금의 별을 나는 배웠다,
어린 시절의 별자리여,
마음속 어느 혼 속에
고통의 상처가 있어
그 혼돈 속에서 태어나는 별,
혼돈과 함께 태어나는 황금의 별이 있다고
나는 배웠고
그 말은 나를 매혹하였다

혼 속에 상처를 간직하지 않으면
무엇이 나를 별이게 하겠는가?
나는 고요히, 울면서,
인생이 나에게 주는 모든 쓰디쓴 혼돈
모든 쓰디쓴 상처
그 상처의 악령들을 나는 사랑하였다,
인생을 구제하는 건
상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상처의
오케스트라,
그 상처의 오케스트라 속에서만 터져나오는
황금의 별들의 찬란한 음악

(하략)-34~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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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징가 계보학 창비시선 254
권혁웅 지음 / 창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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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1>

주인집 작은형은 스물일곱에 죽었다
스물일곱 해를 골방에서 살았다
볕을 쬐면 온몸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형이 몸을 흔들면 머리카락과 피부딱지가
우수수, 쏟아지곤 했다
형은 언제나 작은 빗자루와 쓰레기를 가지고 다녔다
형은 자기가 지나친 자리를
천천히 감추는 그림자였다
황사가 곱게 내려앉은 어느 봄날,
형은 지상에서 제 몸을 거둬갔다
오후 두시에서 여섯시까지
옷을 걸기 위해 박아넣은 대못 아래서
형은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리며 부서지고 있었다
집안에 내려앉은 먼지는 대개
사람의 죽은 피부조각이다
형은 드디어 대낮에도
안방과 건넌방과 마당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28~29쪽

<벗어둔 외투>

내게서 생겨난 이 늘어진 주름은 길이다
접히는 곳마다 생겨난 그 길을 나는
척도 260으로 걸어왔는데

지금 이 육탈(肉脫), 이 빈집,

나는 매장을 원치 않으며 불타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때리는 손이며 맞는 뺨이다* 나는 내가 앙상하다
나는 다른 옷을 입고 싶다


이 얇은 피부 안에도
다음과 같은 글은 적혀 있을 것이다

물빨래는 삼가고 그늘에서 말린 후에
60도 이하에서 다림질할 것

* 보들레르의 시 '자기 자신을 벌하는 사람'에서-113쪽

<방광에 고인 그리움>

서울시 성북구 삼선동 산 302번지
우리 집은 십이지장쯤 되는 곳에 있었지
저녁이면 어머니는 소화되지 않은 채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귀가하곤 했네
당신 몸만한 화장품 가방을
끌고, 새까맣게 탄 게
쓸개즙을 뒤집어 쓴 거 같았네
야채나 생선을 실은 트럭은 창신동 지나
명신초등학교 쪽으로만 넘어왔지
식도가 너무 좁고 가팔랐기 때문이네
동네에서 제일 위엄 있고 무서운 집은
관 짜는 집,
시커먼 벽돌 덩어리가 위암 같았네
거기 들어가면 끝장이라네
소장과 대장은 얘기할 수도 없지
딱딱해진 덩어리는 쓰레기차가 치워갔지만
물큰한 것들은 넓은 마당에 흘러들었네
넓은 마당은 방광과 같아서
터질 듯 못 견딜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짐을 이고지고 한꺼번에 그곳을
떠나곤 했던 것이네 -120~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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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가득 찬 책 - 제25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137
강기원 지음 / 민음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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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도서관>

이곳엔 새 책뿐이야
책장을 열면 글자가 사라지지

'새'를 뽑아 들자
짝짓기하던 한 쌍 나란히 날아오르고
'내'를 펼치자
혀 풀린 벙어리처럼 소리 내며 흐르는 여울
'결'을 찾아보자
어디선가 다가와
돌결, 살결, 숨결, 소릿결, 나뭇결, 물결……
의 주름을 펴는 저 명지바람
'흙'은 부풀 대로 부풀어 하늘과의 경계를 지우고 있어
아지랑이 지우개로

늙을수록 지평선 커지는 어느 봄날의 도서관
반백 살의 어린아이가
수없이 보아 온 책들의 낯섦 앞에서
캄캄하게 환한 갈피 사이에서
홀로 돌아 나오는 길을 잃네
침묵의 지진계
그 미세한 떨림도 모르는 채-16~17쪽

<이별>

이별을 천천히 발음하자
이, 별이 되었다
이, 별에서
저, 별로
건너갔을 뿐이다
그리니치 자오선의 시간에서
시간 없는 시간으로
공간 없는 공간으로
돌려놓았을 뿐이다
먼지와 동갑내기가
된다는 것
중력에서 조금
벗어난다는 것
영혼의 처녀막이
찢어진다는 것
망각의 지우개가 생긴다는 것
A.D.에서 B.C.로
바뀐다는 것
태어나기 전으로
되돌아간다는 것
뿐이다-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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