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
폴 비티 지음, 이나경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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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출생해 웨스트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란 1962년생 임인년 범띠 아프리칸 미국 남자. 아버지와는 전혀 소통 없이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는데 이 책엔 오직 아버지와의 관계만 두드러져 오호, 그럴 수도 있구나 싶었다. 작가 가운데 <캐치-22>를 쓴 조지프 헬러와 커트 보니것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보스턴 대학과 대학원에서 심리학 석사를 하고 브루클린 칼리지에서 문예창작으로 예술학 석사를 추가했다. 심리학 석사. 작품 중에서 주인공이자 화자 ‘나’의 아버지가 웨스트 리버사이드 커뮤니티 칼리지 심리학과에서 20년간 임시 학과장을 지낸 인물로 설정했다. 그래서 작품 속에 중요하지는 않지만 인지부조화, 책임감 분산, 스키너의 심리상자 같은 개론 수준의 심리학 용어가 출몰하는 게 다 이유가 있다. 그것 참. 이래서 작가의 바이오를 아는 것이 작품 읽고 독후감 쓰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니까. 2015년에 발표한 <배반>은 비티의 네번째 장편소설로 같은 해에 부커상을 받은 대표작이다. 그러나 우리말 제목이 좀 불만이다. 영어 제목이 <Sellout>. 이걸 출판사 열린책들 편집부와 역자 이나경은 <배반>이라고 표기하기로 합의했고, 위키피디아는 <매진>이라 설명하고 있지만, <Sellout>은 작품 속 주인공이자 화자 ‘나’의 별명이다. 눈을 뒤집어 책을 읽어봐도 ‘배반’이나 ‘매진’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차라리 서양소설에서 항용 그러하듯이 작품의 주인공 이름/별명을 그대로 제목으로 써서 <셀아웃>이라 했으면 어땠을까? 뭐 내 의견이 그렇다는 거다. 출판사와 역자 사이의 계약이 끝나 절판 상태인 것으로 보이는데 다시 찍으면 어떤 제목일지 조금, 아주 조금 궁금하다.


  작품의 무대는 로스엔젤레스와 면한 디킨스 카운티. LA 남부 외곽 빈민지역으로 노예해방 직후인1868년에 디킨스 시로 출발했지만 LA가 거대도시로 성장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LA의 한 카운티로 흡수됐다. 지역 이름이 하필이면 ‘디킨스’? 뭔가 사연이 많을 거 같지? 세상에 사연 없는 도시가 있으면 두 개만 대봐라. 이 카운티도 당연히 사연이 많지만 그것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아 ‘디킨스’라는 이름이 딱 어울린다. 애초에 ‘디킨스 시’를 설립할 당시 주민들이 “설립헌장”에 명백하게 밝혔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이러하였다.

  “디킨스는 중국인, 온갖 피부색과 방언과 모자를 지닌 스페인인, 프랑스인, 빨간 머리, 전형적인 도시인, 재주 없는 유대인이 없는 도시로 남을 것이다.”

  이들을 제하고 남는 미국 내 인종은? 흑인. 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니그로, 깜둥이, 겁쟁이로 불리는 유색인. 이른바 흑인 커뮤니티다. 이때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는데, 백인의 연간 가구평균소득이 113,149달러일 때, 히스패닉은 6,325달러, 흑인이 5,677달러였다고. 그리하여 원래는 넓고 넓은 지역이었지만 주변 LA의 더 부유해지는 커뮤니티에 의하여 디킨스 카운티가 점점 좁아지다가 화자 ‘나’가 대학을 졸업하고 1년이 지나 디킨스 시는 말할 것도 없고, 카운티 자체도 사라져버렸다고. 그래도 다른 지역의 특히 백인이 ‘나’에게 “어디 사세요?”하고 물어봐서 “디킨스요.”라고 대답하면 물어본 사람이 즉각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물어봐서 죄송해요! 제발 나를 죽이지 말아줘요!”하고 탄원을 했단다. 한 마디로 극강의 우범지대라는 뜻이다.


  ‘나’의 아버지는 작은 말 농장의 마구간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나 꽤 유명한 사회학자이자 대학의 임시 심리학 학과장을 20년간 해 자셨으니 나름대로 입신양명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플로리다에서 사는 한 아가씨 로럴 리스쿡이 흑인을 위한 잡지의 표지 모델로 등장한 걸 보고 한눈에 반해, 1977년 9월호였는데, 잡지를 보자마자 소름끼치는 시를, 탱탱하게 발기한 페니스를 노출한 자신의 사진을 동봉해 우편으로 보내 극적인 청혼을 해서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해 ‘나’ 셀아웃을 만들었다. 심리학자는 스스로 심리분석이 필요한 인간들만 할 수 있는 학문인지도 모른다, 그렇겠지?

  이후 엄마 로럴 리스쿡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책에 나오지 않는다. 심리학자 아버지는 아들을 범죄의 온상이자 미래의 전과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한 학교에 보내는 대신 소위 홈 스쿨링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나’는 대가리가 커짐에 따라 깡마르고 멍한 검은 실험쥐로 성장했다. 주로 흑인과 백인 또는 타 유색인종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 실험에 바쳐졌다. 심리학과 임시 학과장이자 아버지의 프로젝트를 위하여 늘 사회학 실험의 재료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기보다 역할을 피할 수 없었던 ‘나’는 기상천외의 실험마다 건건이, 사실 이건 발음하는 대로 ‘껀껀이’라고 써야 제 맛인데, 하여간 실험할 때마다 건건이 실험 상대방에 의하여 몸과 마음에 깊은 물리적 타격을 입어야 했다. 그리하여 ‘나’는 ‘나’ 자신과 흑인 전체에 대한 아버지의 희망을 부숴버린, 통계학적으로 무의미한 아들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었다. 로럴 양에게 ‘나’를 낳게 한 일과 연계해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사회심리학 실험 자체가 변태 엽기적이라 실험쥐가 줘 터지지 않을 수도 없었겠지 뭐.

  키 크고 건장하고 깊고 호소력 있는 바리톤 음색의 아버지는 심리학 임시 학과장답게, 극악의 우범지대인 디킨스 카운티에서 난동을 벌이는 흑인 범죄자를 진정시키는 ‘니거 위스퍼러’ 역할을 기가 막히게 수행해 카운티의 내로라하는 흑인 지식인 가운데 한 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흑인 지식인들이 모이는 곳이 디킨스에서 가장 평화로운 장소인 ‘덤 덤 도넛’으로 작품에서 중요한 장소와 모임이지만 독후감 분량을 감안해 생략한다. ‘니거 위스퍼러’가 주로 상대해야 하는 범죄자 니거들이 피할 수 없는 집단이 있다. 바로 경찰. 또 니거 위스퍼러의 주요 활동 시간도 깜깜한 야밤이란 것도 수긍하시지? 어느 날 범, 아버지는 무척이나 어두운 밤에 털털거리는 자기 차 옆에서 총알 네 방을 맞아 절명하고 만다. 범죄자 니거에 의한 것이 아니라 LA 경찰관이 확인도 하지 않고 무턱대고 발사한 총에 복부를 맞아 죽었다. 이래서 ‘나’ 셀아웃은 정부로부터 아버지의 사망 배상금으로 2백만 달러를 받아 LA 카운티에서 가장 악명 높은 빈민 지역이자 우범지대이며 척박하기가 달 표면 같은 디킨스의 버나드 애비뉴 205번지에 있는 2에이커의 땅을 구입해 농장과 과수원, 목장을 만든다. 이름하여 도시 농장.


  특히 미국 소설에서 내가 싫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난데없이 상속받아 한 순간에 부자가 되는 거. 그게 저 에우리피데스 시절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비슷하게 작품의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는 건데, <배반>에서는 아버지가 초장에 총 맞고 죽어 ‘나’ 셀아웃이 디킨스에 정착하는 것으로 스토리가 시작되니 이 비슷한 불만이 생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직 괜찮은 농업학과가 있다는 이유로 진학한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농학과 부전공을 동물학을 공부한 ‘나’는 처음에 농장에서 타조 부화장을 만들어 래퍼, 프로 운동선수, 잘 나가는 배우한테 타조를 팔려고 했다가, 문화적으로 (특히 니거들한테)가장 가까운 식물인 수박과 마리화나를 연구하기로 결정했다. 네모난 수박을 재배하는 데 성공했지만 어째 반응이 좋지 않아 오렌지 말고 귤mandarin과 사과를 높은 당도로 생산할 수 있었다. 근데 2백만 달러의 부자가 그깟 농사가 잘 되는지 잘 안 되는지 뭐 그리 크게 신경쓸 거 있나? 하지만 한 가지.

  어린 시절 아역 배우로 수백 편의 영화에 출현한 전직 배우, 늙은 호미니가 스스로 ‘나’의 노예로 들어오기를 자처한다. 어린 시절 나름대로 은막 스타로 각광을 받았다고 착각하며 평생을 산 늙은이가 옛 시절, 흑백 분리 정책이 성행하던 자신의 황금기를 그리워해 ‘나’를 ‘주인님’이라 칭하며 조금 잘못한 것을 가지고 등에 채찍질을 하라고 안달을 하기도 했으니, 이거 미친 거 아냐?

  이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당연히 픽션이지만 이후에 쏟아지기 시작한다. ‘나’는 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나 디킨스의 공립 중학교 가운데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미국 사회 중산층 정도의 교양인으로 성장할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될까 고민하는 교감 카리스마 여사. 교감과 ‘나’는 여러모로 궁리하고 경험적으로 판단해보니, 오히려 흑백 분리가 되었을 경우에 니거들이 백인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하고 싶어 더 애를 쓰는 경향을 발견한다. 이때 늙은 노예 호미니의 생일을 맞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나’의 첫사랑이자 지금은 유부녀인 버스 운전사 마페사가 뜻을 모아 버스 안에서 생일 파티도 하고, 그가 원하는 흑백 분리를 위하여 특정 좌석에 이런 스티커를 붙인다.

  “노약자와 백인 승객 전용좌석”

  주인공의 여자가 항용 그러하듯이 현명한 마페사는 호미니의 생일이 지나도 이 스티커를 제거하지 않고 그냥 운행을 하고, 스티커 문구를 본 흑인들은 오히려 더욱 긴장해 서로 인사도 하고, 예의도 반듯해지는 등의 반응을 보인다.

  놀랍지? 기억하셔야지. 작가 폴 비티도, ‘나’의 아버지도 심리학 전공자이다. 그러나 아무 곤란 없이 생각한대로 잘 나가기만 하면 재미없지. 21세기. 버락 오바마가 두번째 임기 중인 대통령으로 재직하고 있는 시절에 흑백 분리? 인종차별? 이게 말이 되나? 그리하여 사건은 당신이 생각한 대로 흘러간다.


  분리와 평등의 문제. 21세기에 분리해서 평등해질 수 있는지에 관한 진퇴양난의 딜레마. 반면에 디킨스에서 니거들이 도모했던 “분리되고 별로 평등하지 않지만 전보다 형편은 훨씬 나아지는” 것이 미국의 헌법가치에 (합당하지는 않지만) 무엇이 문제인가를 제기한다. ‘분리’와 ‘평등’ 사이에 ‘흑인’이라는 매개변수가 들어갈 경우에.

  미국의 아프리카계 시민한테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평생 동아시아의 끄트머리에 살고, 덩치가 산만한 흑인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아시아 인들이 얻어 터지는 뉴스나 동영상에 숱하게 노출된 입장에서 뭐 지들끼리 그러거나 말거나, 알아서 하겠지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실제로 작품 속에 주로 중국인을 필두로 한 동아시아 3국 사람들은 부지런한 공부벌레 출신이라 백인을 능가하거나 동등한 수준의 연 수입을 얻는 (별로 바람직하게 묘사하지 않는) 종족으로 치부할 뿐이다. 사실이기도 하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농담과 말장난이 과하다. 대단한 입심인 건 알겠는데 참 다양하게 말이 많고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다. 어쩌면 내일 독후감을 쓸 작품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지도 모르겠다. 혹시 이것도 다인종사회의 흑인병 가운데 하나? 아니, 취소.

  그래도 재미있다. 적당히 야해서 매력적이기도 하다. 충분히 읽을 만하다. 아쉽게 품절. 헌책방이나 도서관 이용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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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05 1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다보면 뭔가 정신적으로 테러를 당할거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ㅎㅎ

Falstaff 2025-08-05 15:55   좋아요 1 | URL
테러는요 뭐. ㅋㅋㅋ 21세기 백대 소설 가운데 한 편이라니 읽어보셔도 좋을 거 같긴합니다만 추천하기는 좀 그런... 소설 아닐까 싶네요.
프로필 사진을 바꾸셨구먼요, 흠...

바람돌이 2025-08-05 15:57   좋아요 1 | URL
이토록 매일 많은 책이 나오는데 그 중에 한자리를 차지했다는거죠. 일단 보관함에 넣습니다. ^^ 프로필 사진을 개을러서 손도 인대다가 한 20년민에 바꾼듯요. 요즘 심심하니까요. ㅎ
 
간과 강 걷는사람 희곡집 6
동이향 지음 / 걷는사람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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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에 살면서 아쉬운 것 가운데 하나가 공연문화에 소외된다는 거다. 하긴 모든 문화행위가 서울에 너무 집중되어 있다! 공연이 끝나면 대강 열 시가 훌쩍 넘는데 여차하면 버스 끊기고, 열차 끊기고 총알 택시 타고 가기는 싫고, 차 몰고 가려면 복잡하고 뭐 이런 저런 핑계로 저절로 멀어지게 되더라. 그리하여 이제야 동이향이라는 극작가를 알게 되었다니, 아무리 핑계를 대더라도 너무 무심했다. 올해 쉰살. 서강대 사회학과를 졸업했으나 전공과는 무관한 학창시절을 보내 2학년 때 첫 희곡을 쓰고, 주로 연극판을 따라다녔단다. 졸업해서 잡다한 일을 하다가 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에 들어가 공부도 좀 하고, 한겨레신문사 여성월간지 기자도 하다가 망원동에서 ‘이 행성의 이행성을 위한 극장’을 운영하는 ‘극단 두’를 만들어 극작과 연출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계속 하는지는 모르겠다. 5년 전에는 확실하게 그랬다. 윤영선 연극상, 차범석 희곡상을 받은 경력이 있단다.


  동이향의 극작품을 평할 때 거의 예외 없이 어렵다거나 관념적이라는 의견을 개진한다고. 그럴 듯하다. 특정 스토리를 유지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극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독자나 관객이 즉물적으로 이해하기가 거의 가능하지 않을 듯하다. 뭐 관객이나 독자 나름이다. 작품마다 다 어렵거나 관념적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극작가의 스타일이 그렇다는 것이지 확 내놓고 난해하지는 않다. 내 경우에는 다섯 편 가운데 뒤에 실린 소품 두 편 <해와 달에 관한 오래된 기억>과 <지하철 존재론>이 낯선데 특히 <지하철 존재론>의 경우 “배우들의 신체와 움직임을 중심으로, 사운드와 공간, 말, 그리고 영상-브라운관들-을 공연의 매체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움직임, 사운드, 공간, 브라운관 같은 것들을 종이 위에 문자로 표현했으니 연출자의 의도와 설명을 듣지 않은 독자가 도무지 요령부득인 건 어쩌면 당연하다. 오래전 한때 인구에 회자되던 연극 <산씻김>의 대본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다. 씨, 그때가 그립네. 구경값도 헐해서 시간 나면 종종 극장에 들를 수 있었던 나의 20대.


  그런데 이제 나도 연식이 제법 돼서 그런가, 실제로 배우가 나와 공연을 하는 극작품에 살인과 자살(미수도 포함), 섹스가 나오는 건 점점 경원하게 된다. 물론 동이향의 작품이 다양한 주제를 갖고 있으며 그 주제를 위한 장치로 사용하고, 심지어 어렵기는커녕 웃기는 장면으로 잘 윤색되기도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걸 어쩌랴. 내가 죽음이나 자살 같은 걸 경원하는 성향도 <암전>의 등장인물 조율사 H처럼 일종의 트라우마일 수도 있으리라고 여기지 말았으면 좋겠다. 너무 자주 사용해서 단지 식상했을 뿐이니까.

  재미있는 작품들이 실려 있다. 근데 아쉽게도, 오늘 낮에 읽었지만 이제, 많이는 아니고 조금 늦은 밤에 독후감 쓰려니까 도무지 생각나는 것이 없다. 물에 빠져 죽으려 애쓰는 맥주 잘 마시는 여자 이야기 <간과 강>, 한 회사에서 스물 몇 명이 자살해버리는 <내가 장롤롤메롱문 열었을 때>, 삶(무대)의 한 가운데 갑자기 생긴 땅꺼짐에 떨어져 죽을 수 있는 <암전>. 이 정도가 떠오른다. 하지만 독후감을 읽는 분들이 혹시 오해하실 지 몰라 덧붙이자면, 그런 내용이 나온다는 것일 뿐 기본적으로는 무겁지 않게, 심각하지 않게 그리고 희곡으로 드물게 공들인 문장들로 된 작품이라는 거. 그래, 그래. 욕은 좀 나온다.

  신간 도서 서가에 있던 걸 찾아 읽었다. 도서관에서 나 말고 누가 희곡집을 희망도서 신청했을까? 궁금하다. 만나서 쐬주나 각 일 병씩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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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esum 2025-08-04 1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씻김굿은 이현화의 극본이었던가요? <불가불가> 때문에 희곡집을 읽었는데 불가불가만 기억하는 와중에 씻김굿은 아이들이 약간 충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나 느낌만 있네요… 오래 전 읽었던 걸 주인장님 때문에 다시 떠올려보았습니다.

Falstaff 2025-08-04 14:54   좋아요 0 | URL
<씻김굿>은 잘 모르겠네요. ㅎㅎㅎ 제가 과문해서... 그런데 검색해보니까 <산씻김>을 쓴 극작가가 이현화인 걸 보니 <씻김굿>이라는 타이틀로 공연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meesum 2025-08-04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ㅍㅎㅎ 산씻김을 보고 씻김굿이라고 쓴 거였어요 ㅋㅋㅋ 이거 뭐 단기기억력도 형편없음이… ㅠㅠㅠㅠ
 
247의 모든 것
김희선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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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7. 나는 정수를 발견하면 제일 먼저 그 수가 소수prime number인지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거의 본능 같다. 2, 3, 5, 7, 11, 13. 13에서 걸렸다. 247÷13=19. 빙고. 247을 소인수분해하면 1, 13, 19, 147의 약수를 가지고 있다. 소수는 아니다. 이번에 김희선은 숫자 247, 1과 자기자신 247을 빼면 오직 두 소수 13과 19만 약수로 가지고 있는 수에 관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펜데믹 이후 반드시 또다시 닥칠 미래의 펜데믹에 관한 이야기라고 광고글을 읽어, 책이 1년 전에 나왔음에도 읽을지 말지 머뭇거리다 세월만 보내고 결국 읽었다. 2백쪽이 살짝 넘는 가벼운 장편. 분량이 가볍다는 말이지 내용까지 가볍지는 않다.


  오래 전, 적어도 40년 세월이 흐르기 전의 어느 날. 강원도 W시의 한 초등학교 4학년 교실. 흰 구름이 몰려오고 습도가 높았다니 아마 여름철이었을 듯한 한낮. 곧 소나기가 쏟아질 거 같은데 교사는 칠판 가득 의미 없는 수식만 잔뜩 써넣고 있었고, 아이들은 졸고 있거나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콧구멍을 후비고 있거나, 연필로 앞에 앉은 아이의 등을 아주 살짝 콕콕 찌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때 갑자기 작지 않은 검은 비행물체가 열어놓은 창문을 타고 빠른 속도로 날아 들어오더니 맞은편 복도쪽 유리에 강하게 부딪혀 철퍼덕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는데, 이 순간 가장 높은 음정과 가장 센 음량으로 비명을 지른 사람은 모르긴 몰라도 담임선생이었을 것이다. 담임은 제일 연장자이고 반에서 생기는 모든 책임을 지어야 하는 사람인 것은 까마득하게 모른 채, 어서 치워, 빨리 저 괴물을 치워버리란 말이야, 악을 쓰듯이, 비명을 지르듯이 마치 패닉에 빠진 신경정신과 적 이상이 있는 사람처럼 부르짖었다. 학생들도 함부로 검정 비행물체에 쉽게 접근하려고 하지 않아 마치 널부러진 듯 꼼짝 않는 검은 물체는 잠깐 동안 외로운 UFO 같기도 했는데, 평소 아무 존재감이 없어서 걔가 우리반이었는지 아니었는지도 별 관심이 없던 김홍섭, 나중에 247이라고 불릴 아이가 한 손에 날개 하나씩 들고 좌악 펼쳐 보이더니, 이거 박쥐인데요, 했었다.

  기가 넘어가기 바로 직전인 담임은 홍섭에게 얼른 가져다 버리라 지시했고, 홍섭은 한 손에 날개 하나씩을 든 채 쓰레기장 쪽으로 걷다가 버리려고 보니 아직 숨을 쉬고 있어서, 사용자가 거의 없어 뽀얗게 먼지만 쌓인 과학실로 데려가 줄로 다리를 매달아 놓았다. 집에 가서 동물도감을 찾아보니 생긴 건 그렇지만 과일만 먹고 사는 박쥐라고 써 있길래, 홍섭은 다음 날부터 박쥐에게 과일을 가져다주기 시작하지만 며칠 가지 않아 박쥐는 죽어버리고 만다. 홍섭도 관심이 멀어져 그냥 그대로 잊고 말았고. 몇 주일 후, 장마철이 지나가 본격적으로 높은 습도가 계속됐을 지도 모른다. 홍섭이네 반에 과학실습을 하는 날이 와서 여자 아이 하나가 기재를 가지러 과학실에 갔는데, 말도 못하게 역한 냄새가 나는 걸 참고, W시에 사는 40년 전 아이들이 경험상 알았듯이 냄새의 원인이 죽은 동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냄새가 나는 곳을 찾아보니까, 새까만 박쥐가 거꾸로 줄에 매달려 이쪽을 향하고 있는데 복부가 일자 비슷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희고 포동포동한 벌레가 꼬물꼬물 기어 다녔고, 가끔 구더기라 불리는 애벌레가 박쥐의 복부에서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박쥐. 말레이시아가 원산인 커다란 검은 박쥐는 생김새와는 달리 과일을 주식으로 했고, 훗날 밝혀지듯 니파바이러스의 숙주가 되는 동물이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 박쥐를 직접 손으로 만진 김홍섭, 이제부터 247이라고 부를 남자는 대학에 입학하려고 재수, 삼수를 했지만 실패를 해, 그래도 돈 좀 있는 시골부자 아버지 덕에 동남아시아에 있는 국가 P의 약학대학에 유학한다. 당시 법은 P의 약대를 졸업해도 다시 돌아와 약사시험에만 합격하면 약사면허증을 딸 수 있어서 그것을 노린 것이었지만 늘 있는 듯, 없는 듯했던 247은 졸업 후 돌아와 치른 약사 시험에 불합격하고 만다. 그리하여 들어간 곳이 WCDC세계질병통제센터. 의사도 아니고, 수의사도 아니고, 약사도 아닌 일반 공무원. 그가 하는 일은 구제역, AI 등이 발생할 때마다 소, 돼지, 닭, 오리, 염소, 양 목장에 찾아가 살아 있는 동물을 살처분해 땅을 파 묻는 일이었다.

  살처분? 그렇다고 일일이 총살을 집행하거나 멱을 따지는 않고, 일단 땅을 깊숙하게 판 다음 두꺼운 비닐을 여러 겹으로 깔고 웅덩이에 소면 소, 돼지면 돼지, 가금류면 가금류를 밀어 넣는다. 이후 이산화탄소를 집중 발사해 질식사를 시키는 건데 이산화탄소가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이 마신 가스와 비교하면 청정공기하고 비슷한 수준이라 동물들이 단박에 죽지 않아 거의 생매장을 하는 수준이다. 이렇게 땅 속에 짐승을 묻어버리고 시간이 지나면 땅 속에서 박테리아들이 단백질과 지방을 분해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모든 죽은 짐승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크기로 부어오르다가 한 순간에 펑, 몸이 터져 골수와 혈장과 액체로 변한 단백질과 지방이, 비록 땅 속이지만 사방으로 분사되고, 매몰한 곳의 토지 역시 진흙 수렁 비슷하게 바뀐다. 죽음과 부패와 바이러스와 혐기성 세균만 득실거리는 수렁.

  어린 시절 니파바이러스가 몸 안에 가득 찼을 지도 모르는 박쥐를 죽을 때까지 만졌으며, 니파바이러스의 종주국이랄 수 있는 동남아에 유학해 공부하고, WCDC에 입사해 니파바이러스의 중간 숙주인 돼지 살처분에 적극적 개입을 한 247은 2020년 COVID-19의 종식 이후 과거의 펜데믹보다 훨씬 강력한 변종 니파바이러스가 다시 세상을 덮치자 국내의 가장 강력한 슈퍼전파자, 가장 강력한 인간 숙주로 밝혀졌다.


  그런데 247이 정말 그렇게 무서운 인간숙주라서 바이러스에 걸리기만 하면 제법 잘 지내다가도 갑작스러운 발병을 해 푹 고꾸라져 죽을 수 있고, 마침 그렇게, 그런 방식으로 몇십 명이 죽는 광경이 생방송으로 우연히 전국민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격리수용을 해야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을까? 247을 겨냥한 거의 모든 국민의 미움, 미움을 넘어선 증오는 하늘을 찔러, WCDC 관계자가 생각하기에, 국민의 증오가 다른 곳도 아니고 하늘을 찌른다는 말이지? 하여간 그리하여 247을 수천억 혹은 조 단위가 넘게 들지도 모르는 인공위성에 태워 지구 궤도를 돌게 만들었다.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고 나면?

  과학저널에 실렸는지는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 바이러스는 어떻게 발생했을까? 우주 공간에서 서식하다가 운석에 붙은 상태로 지구에 떨어져도 생존할 수 있는 독한 생명이 바이러스. 이런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핵산 뭉치. 생명체라고도 함부로 말하기 거북한 골치 아픈 존재. 그리하여 세계질병통제센터는 247을 대기권 밖에서 지구 궤도를 하루에 열다섯 번씩 돌게 하다가, 물론 정기적으로 급양과 위생, 즉 먹고 싸는 일은 가능하게 해주고, 극히 좁은 공간에 격리시키다가, 드디어 심판의 날이 와 247이 숨을 거두면, 인공위성을 지구에 다시 추락시켜 재활용을 하는 대신 태양계 밖으로 추진시켜 영원히 바이러스가 지구에 도착하지 못하게 조치하겠다고 발표했다.

  드디어 247이 죽던 날. 그는 인공위성에서 지구를 향해 무언가 메시지를 남긴다. 모스 부호를 통해.

  이미 극소수만 사용할 뿐인 모스 부호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안전할 줄 알아? 꿈 깨라고. 영원한 격리는 없으니까.”

  아무도 모스 부호를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한다. 훗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247이 위성 안에서 지구인에게 남긴 최후의 메시지는 이랬다고 전한다.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그리니치 표준시로 20XX년 4월 8일 오후 1시 20분에 마지막 생체 반응을 보인 247번 확진자는 WCDC가 인류를 대표하여 죽음을 애도하는 가운데 멀고 먼, 길고 긴 우주 항해를 떠난다. 그리고 며칠 후 247은 지루한 걸 견디지 못해 감히 해치를 열어 우주복도 입지 않고, 안전줄도 매지 않은 채 광활하고 어둡고 추운 우주 공간일 것인 우주선 밖으로 나와, 푸르지는 않지만 하여간 시든 풀이라도 있는 예전의 돼지 목장에 내려 죽은 자 가운데 삼일 만에 부활하는 데 성공한, 인간의 땅에 재림한 구세주가 될 수 있을까?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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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5-08-01 0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수인지 아닌지는 생각도 못 해봤어요. 13과 19를 가진 수로군요. 이 책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사람이란 참 자기밖에 모르고 저 좋을대로 생각하는 동물이죠ㅠㅠ 무서우면 물어뜯고 나만 아니면 되고… 희생양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구나 느꼈습니다. 247 인생 어쩔 거야 싶기도 했구요ㅠㅠ

Falstaff 2025-08-01 16:25   좋아요 1 | URL
예. 분량은 짧지만 여러모로 중의적이더군요.
근데....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아오 어쩔거나 이 심각한 클리셰 말입지요. ㅎㅎㅎ

hnine 2025-08-01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W시 초등학교 교실 얘기 읽으며 falstaff님 얘기인줄 알았네요 ^^
작가님이 약사 출신이시군요.
재미있겠어요.

(세번째줄 147-->247 이겠지요?)

Falstaff 2025-08-01 16:24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요, 겁이 많아서 짐승 잘 못 만집니다. 아이쿠... 147-->247이네요. 얼른 고치겠습니다 고마워요!!!
넵. 그래서 주인공 247도 P나라 약학대학 출신이고... 뭐 전작에도 좀 그런 거 나오고 그렇더군요. 자연스럽잖아요. ^^

바람돌이 2025-08-01 2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정이 재밌네요. 저는 순간 저기 가장 히스테릭하게 소리지르는 담임선생님에게 빙의했습니다. ㅎㅎ

Falstaff 2025-08-02 04:53   좋아요 0 | URL
앗, 그렇습니까? ㅎㅎㅎ 저는 그 시간에 박쥐가 날아 다녀서 좀 얼떨떨했습지요.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창비시선 405
이설야 지음 / 창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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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설야. 설야雪夜. 정말 이 한자가 맞다. 눈 내리는 밤. 누가 이렇게 이름을 지어주었을까? 나도 비슷한 이름의 여성을 한 명 안다. 안지야芝夜. 일제 시대에 한 부르주아의 혼외자로 태어나 한국전쟁 직후 수도 서울에서 고급 바의 여사장 ‘마담 빠타플라이’로 이름을 떨친 여성. 이장李章의 이복동생이자 연인. 실제 인물은 아니고 내 인생책 가운데 하나인 <원형의 전설: 圓形의 傳說> 여주인공이다. 말 그대로 인생책.  그러니 이 시집을 낸 시인 이설야가 어떤 시를 썼는 지 1도 몰랐어도 이름 하나만 가지고 내 관심을 팍, 끈 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아니, 너무 충분했다.

  1968년 인천 동구 화평동 140번지에서 출생. 어려웠던 시절 중에서도 좀 더 어려웠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에서 이웃들처럼 어렵게 살았다. 그래서 그 시절 이야기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인이라는 것이 참. 초년 팔자에 겪었던 맵고 신 맛이 시적 경험이자 자산이 될 줄이야. 학력사항은 노출이 되어 있지 않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면서도 대학의 문예창작과를 다니는 것이 꿈이었다고. 이때 지역 청년회 가운데 문예창작을 할 수 있는 단체에 가입해 시민사회단체 사람들을 만나 훗날 시인의 소위 “민중시”에 영향을 주었다고 “오 마이 뉴스”와 10년 전에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후 풍물패와 인연을 맺고,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공부에 대한 갈증을 풀기 위하여 방송통신대학과 인하대학 대학원에서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모두 수료했단다. 시를 쓰는데 그깟 가방끈이 뭐가 중요할까? 얼핏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따박따박 대학과정까지 마친 사람의 생각이고, 지상 최고 수준의 학벌사회인 대한민국에서 그렇지 못했던 사람 입장에서는 다를 수 있으니 조금도 까탈 잡지 말라. 그건 오직 그 사람의 선택에 달린 것이니.

  이설야의 기억에 강렬하게 자리한 것이 지금은 없어진 인천 화평동의 수문통 시장. 그리고 시장 앞을 흐르던 개천. “똥바다”라고 불리던 곳. 시장과 주변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 그들이 만든 분뇨를 거의 그대로 이 개천에 내버려 “똥바다”라고 했으며, 여름에 장마가 지기라도 하면 진짜 똥무더기가 둥둥 떠 개천을 면한 집의 마당은 물론이고 마루와 방에까지 들어차기도 했던 곳. 가물 때면 높은 습도로 인해 지독한 냄새가 도무지 가실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간혹 똥 대신 탯줄이나 신생아가 시멘트 포장지에 둘둘 싸여 흘러 황해 바닷가로 흘러가던 똥바다.

  하지만 이설야가 정말로 민중시를 쓰고자 했으면 좀 더 빨리 등단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가 첫번째 단독 시집 같은데 초판이 2016년이다. 이설야의 기억 속에 있는 1970년대 인천의 도시빈민촌은 이제 그저 한 시절의 기억으로 존재한다. 40년 전 겪은 가난과 소외가 이제는 더 이상 저항과 운동의 동력이 되지 않는 시절이 됐다. 당연히 시인도 이를 알아서 이설야는 그 시절 삶의 신산을 추동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세월을 노래하기만.



  못, 자국



  검버섯 같은 하늘이 점점 내려오는 저녁

  한 여자가 꽃잎을 여기저기 붙이고 돌아다녔다


  개흙이 훤한 똥바다에 삿대질하다가

  수문동시장 다락방들을 지날 때면

  고래고래 소리까지 지르다가

  만화로다방 앞에 와서는 옷을 다 벗어버렸다


  돈 벌러 중동 나간 남편이 죽었다 하기도 하고,

  아이가 열병으로 죽었다 하기도 하고,


  꽃잎이 하나둘 떨어져서야

  여자의 마맛자국이 보였다

  못 자국 같은 생(生)의 숨구멍들이 보였다


  지금은 솔빛마을이 들어서고

  도로 밑에 개흙, 죽은 물고기들,

  수문통 다락방 젖은 나무들,

  모두 묻혀버렸지만,


  비석 같은 아파트가 세워지고

  마맛자국처럼 하늘에 구멍을 낸

  달이 떠서 또

  바다로 흘러가고 있지만,  (전문. P.12~13)



  이 시에서 보다시피 1970년대 인천 화평동 수문동 시장 근처, 시인의 시적 원형原形의 장소를 기억해 노래할 뿐 “오 마이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등장한 “민중시”다운 투쟁이나 저항의 근원으로는 기능하지 않는다. 다른 시들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나는 이설야의 시를 민중시 계열로 넣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도시 서정시로 읽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이설야에게 아버지라는 존재. 겨우 시집 한 권을 읽고 뭐라 하기 어렵지만 다양한 감회를 가진 모양이다. 저번에도 말한 적 있다. 소설, 특히 여성 작가가 쓴 소설 속 아버지는 주로 가정 폭력의 대마왕으로 주폭도 모자라 고기 안 먹겠다는 딸 입 속으로 억지로 탕수육 쑤셔 넣는 등의 상상불가의 기상천외한 개썅노무새끼들이지만, 시인의 아버지는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두꺼비가 한 마리 올라온 것처럼 울룩불룩하게 핏줄이 불거진 손등을 갖고 있다. 이설야의 아버지는 어땠을까? 시인은 자기 아버지를 동인천 시장의 건달이었다고 한다. 건달이라서 집에 올 때마다 마치 사나운 말굽이 방 안을 휩쓸고 간 것 같기는 하더라도 그래도 길고 질겨 끊어내지 못하는 연이 있는 아버지였던 모양이다. 시인은 어떻게 아버지를 그렸을까? 이런 시만 읽어보자.



  백마라사(白馬羅紗)



  백마처럼 하얀 양복 입고 오랜만에 아버지가 나타났다. 사나워진 말굽이 방 안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자 백마라사에서 사온 검정 재봉실이 거미줄처럼 계속 풀려나왔다. 엄마가 손목에다 칭칭 감고 하던,


  발정 난 도둑고양이, 아기 울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들던 밤. 잠결에 아버지에게서 빠져나온 엄마의 거뭇한 아랫도리를 보았다. 피 묻은 내 얼굴이 간신히 통과한 곳, 세상의 모든 울음이 터지던 곳간.


  거래 끓던 바람이 문지방을 밟고 오면 도둑고양이와 생쥐와 지렁이들도 함께 울어주던, 백마라사 상표를 매단 하얀 양복이 무서웠던 집. 끊어진 검정 실을 간신히 이어가던 화평동 집.  (전문. p.40)



  어려운 집안 사정을 나 몰라라 하면서 흰 양복을 입고 다닌 한량이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구두도 백구두를 신고 다녔겠지? 그렇게 얌전하지도 않고, 가사에 보탬도 되지 않았던 아버지라서 엄마가 바느질 비슷한 일을 해 입에 풀칠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아버지가 집에 오면 집엔 늘 밤 고양이 소리가 났다니 금슬은 좋았던개비여? 그래서 그런지 어린 시절 유난한 상실의 기억 속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한탄이나 불만은 이이의 시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오, 철없는 한량 아버지라니.



  은하카바레



  은하카바레 뒷문에서 아버지가 나왔다

  나는 여인숙 난간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아버지는 슬픔을 달래느라

  카바레에다 밤을 억지로 구겨넣었던 것


  거미줄로 목을 감은 전봇대 불빛을

  모으느라 눈이 캄캄해지는 밤

  아버지는 불빛을 여기저기 붙이고 있었다

  그 불빛에 찔려 오랫동안 아무것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백구두 소리가 부엌문을 열면

  내 몸 어딘가 구멍이 숭숭 뚫려 쏟아질 것만 같아

  나는 해바라기 씨앗처럼 불어나는

  새까만 음악 속으로 자꾸만 숨어 들어갔다

  그 속에는 슬픔을 북북 찢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계단 한계단 내려가면 깊은 연못이

  연못 속에는 나와 얼굴이 같은 소녀들이 수장되어 있었다  (전문. P.70)



  거봐, 내가 틀림없이 백구두도 신고 다닐 거라 그랬지? 아버지가 잘 생겼던 모양이다. 카바레 출입을 했다니. 아, 오해하지 말자. 카바레 다닌다고 다 제비는 아닐 터. 춤이 좋고, 음악이 좋고, 어울림이 좋은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도 지극히 정상이니까. 그런데 만날 카바레 같은 데만 다니느라 집에 들어올 때마다 면목이 없었던지 대문 또는 현관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부엌문을 연다니 벌써 방안에서 말발굽 소리 내던 기백은 슬그머니 사라진 모양이다. 그려. 그저 수컷이라는 건 벌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부엌문이라도 감지덕지 슬그머니 스며들어야지 별거 있나 뭐. 그렇게 세월이 가고 늙는 것이지.

  자꾸 아버지 타령만 하니까 별로 재미없다. 하나만 더 읽고 끝내자.

  세월 가면 아버지도 간다. 가도 멀리 간다. 아주 간다. 하필이면



  분홍 코끼리와 검은 나비들



  철거를 기다리는 신혼집 다락방

  검정 가방 안에 아버지 이름이 찍힌 내 청첩장

  그 위에 아버지 조의금 봉투들 포개져 있다


  조문하듯 엎드려 있는 봉투들

  밤이 되면 나비가 되어

  내 꿈속을 들락거린다

  분홍 코끼리 어깨 위를 날아다닌다


  분가루 날리는 새벽녘이면

  아버지, 나비들과 함께 검정 가방 속으로 들어간다

  잘못 꾼 꿈을 따라 코끼리 발자국이 이불 위를 지나간다


  만신들의 몸인 집이 흔들린다

  집인 몸들이 봉투 속으로 하나둘 들어간다

  오래된 시간을 염하듯


  내가 다락방을 봉하고 온 조문하던 지문들

  매일 밤 검은 나비가 되어

  이사 간 집 문고리에 앉아 열쇠를 만지작거린다


  문을 열고 들어와

  침대 위를 날아다닌다  (전문. P.80~81)



  이렇게 아버지도 가고, 시인의 화평동 시대도 가고, 이제 남은 건 오직 기억, 기억뿐. 시인은 옛 시절의 가난을 회상하고 노래한다. 가난과 궁핍과 핍진乏盡의 노래라 해서 민중시로 단정하지 말자. 그건 누군가의 가슴 아픈 추억일 수 있고, 유년의 마당일 수도 있으며, 어느 시인의 시적 재산일 수도 있음이라. 시인은 그 시절을 떠올리고, 시로 쓸 때마다 왼쪽 가슴 한 쪽이 뭉텅 떨어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라서.



  (어느 시인인지 작가가 에세이에서 핍진이라는 말을 사용한 후, 글 폼나게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이 '핍진'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乏盡과 逼眞은 뜻이 매우 다르다. 아주 조심해서 써야할 말이 요새 남용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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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리얄리 2025-07-31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가족사를 세세하게 알 수 없으니 짐작 정도밖에는 못하겠지만,
시가 그리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볼 때, ‘설야(雪夜)‘라는 시인의 이름을 아버지가 지었다는 심증이 드네요.
그런데 ‘설야‘라 하니, 아마도 모든 고등학생이 공부했을 김광균의 시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유명한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말입니다..

Falstaff 2025-08-01 04:14   좋아요 0 | URL
김광균은 시 쓰다가 너무 일찍 사업을 하는 바람에 그저 <와사등> <기항지> 두 시집을 묶은 얇은 시집 한 권만 읽어 뭐라 말을 보태기 어렵네요.
그렇지요? 암만해도 한량 아버지가 따님 이름 지은 거 같습니다.
 
치료탑 행성 마로 시리즈 (Maro Series) 1
오에 겐자부로 지음, 김난주 옮김 / 에디토리얼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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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에 겐자부로가 쓴 유일한 과학 픽션. 그러나 작가가 오에 겐자부로이다.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생을 마감할 때까지 반핵운동가로 이름을 날렸던 실천적 지식인. 아직까지 유일하게 원자폭탄에 의한 피폭 경험을 가진 일본인의 후예로 핵과 방사능에 예민하고 강한 저항의식을 지녔던 인물이다. 그리하여 이이의 미래관, 세계관도 핵과 방사능에 의한 비관적 시각으로 일관한다.

  <치료탑 행성>은 미래소설. 시간적 공간은 2040년 이후의 21세기. 애초 오에 겐자부로는 <치료탑>이라는 제목으로 약 3백쪽 분량의 장편소설을 발표하고, 곧이어 2부격인 <치료탑 행성>을 발표하여 전편 이야기를 결말 짓는다. 이후 <치료탑>을 1부, <치료탑 행성>을 2부로 두 권을 묶어 한 편의 장편소설로 합본, 1991년에 <치료탑 행성>이란 제목으로 출간한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대통령 미하엘 고르바초프가 이 해 크리스마스 12월 25일에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에게 핵무기 발사 권한 등 모든 권력을 양도함으로써 74년간 세계를 양분했던 한 축 소비에트는 거대한 막을 내린다. 동시에 냉전시대 역시 공식적으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물론 당연히 이런 조짐은 몇 해 전부터 충분히 전망할 수 있었다. 이 책의 1부 <치료탑>에서도 미국과 소련에 의한 핵전쟁 위기상황은 사실상 사라졌다. 대신 1990년대 초 오에의 시각으로, 핵을 보유하지 않았던 북한이 아니라, 공식적인 핵보유국도 아니고 단 한 번도 실제 핵실험도 하지 않았으나 사실상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란 등 중동 국가와, 비공식적인 핵보유국인 이스라엘 사이에 세계대전 수준은 아닐지언정 국지적으로 심각한 핵전쟁이 일어나고, 동시에 아프리카 등 거대국가가 아닌 중소 국가 사이에서도 작은 규모의 핵전쟁이 발발했다고 가정한다.

  여기에 약 5년 전인 1986년에 당시 소련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서 발생했고, 20년 후인 2011년에 후쿠시마 원전에서 또다시 발생했듯이 세계 각국의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는데, 이번에는 거의 동시에 사고가 발생, 원자력 발전소에서 방출된 방사능이 전세계를 오염시켜 지구는 극적인 식량고갈과 자원고갈의 기로에 서게 됐다. 체르노빌-후쿠시마 이렇게 25년 터울의 사고가 아니라 한 번에 폭발사고가 난 것으로 보아, 책에서는 자세한 경위를 밝히지 않지만 독자는 이런 다발성 폭발이 우연한 사고라기보다 국제적 테러 집단이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범죄로 인식할 수도 있다. 설마 일본계 독일 작가 다와다 요코가 자기 책 <헌등사>에 쓴 것처럼 하필이면 고단위 폭탄을 잔뜩 싣고 날아가던 세계 각국의 전투기가 갑자기 오작동을 해 정확하게 원자력 발전소의 원자로에 추락했다고 믿는 순진한 독자는 없거나, 거의 없거나, 있어도 별로 없겠지? 전 지구가 방사능 낙진의 두꺼운 침강에 의하여 거의 모든 것이 오염됐고 인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인류는 여태껏 유래가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암종이 발생하는 등 방사능 피폭에 의한 다양한 이색 질병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세계적으로 우울증과 체념, 방관의 기조가 덮쳐 후천성 면역결핍 신드롬, 에이즈가 무서운 기세로 팽창했다. 21세기 말 디스토피아의 도래.

  모든 인류는 절망했다. 못살아, 못살아, 더 이상은 못살아. 근데 못 살면 어쩔건데? 이제 멀지 않은 미래에 인간과, 인간이 여태 만들어온 문화, 문명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점에 사람들은 공감했다. 그리하여 지구가 아닌 곳에 새로운 지구를 건설하기로 세계적 합의를 이루었으며, 당연히 새 지구에 전 지구인들을 다 싣고 갈 수는 없는 일이라 이 가운데 탁월한 자원을 선발해 태양계 외 항성계에 있는, 인간이 살기에 그나마 적합한 행성으로 떠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990년경 세계인구가 약 60억 정도로 아는데, 각지에서 터진 핵전쟁과 핵발전소 폭발로 인한 방사능 오염으로 10억 정도가 죽고 50억가량이 남았다. 이 가운데 딱 백만명을 선발, 지구가 가지고 있는, 이라기보다 지구에 남아 있는 거의 모든 자원을 투자해 대규모 탈출, 이른바 대탈출 프로젝트를 진행해서, 떠났다. 하지만 10년 후, 이들은 그 먼 항성계의 행성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지구로 귀환하게 되었으니, 서기력 약 2040년 앞뒤, 이제야 소설은 그 막이 올라간다.


  이제 이 책의 1부 <치료탑>을 쓰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의 세계를 기억해보자. 그때나 지금이나 세계의 자금과 군사력을 장악해서 세계경찰을 자임했던 미국. 이런 미국을 향해 일본의 거대 기업 소니Sony 주식회사의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는 일본의 중의원이자 환경청 장관을 역임한 이시하라 신타로와 함께 공전의 베스트셀러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출간했다. 일본의 버블 경제가 극점에 달했던 시기. 6~7년 후에 우리나라가 그러했듯이 일본도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아니면 터뜨리면 안 될 샴페인 뚜껑을 비튼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세상에서 달러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바로 옆 분단국가의 남쪽, 한국을 제외한 세계의 모든 나라로부터 존중받던 일본의 작가라서 가능했겠지만, 백만명을 태우고 새로운 지구로 이주하는 범세계적 “스타십 공사公社”의 일본 지부가 프로젝트 비용의 약 1/3을 부담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자. 당시 세계인구가 50억이라면, 백만명이라 해봤자 5천명 가운데 한 명을 골라 외계로 보내는 일이다. 그러니까 5천명 가운데 가장 뛰어난 한 명을 선발하는 일일뿐인데, 세상의 다른 곳은 모르겠고, 일본인구가 1억이라면 2만명의 ‘선택받은 자’가 9,998만 명의 ‘잔류자’의 것인 자원과 향유해야 할 문명을 모두 가져가는 것이 옳은 일일까? 좋다, 사회적 합의가 되었다면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면 하나 더. 내가 5천명 가운데 4,999명 중의 한명이라고 해서, 누가 나한테 그리고 4,999명한테 “잔류자”를 넘어서 “낙오자”라고 칭하면 그걸 내버려 둬야 하나? 그리고, 5천명 중에서 탁월하고 탁월한 한 명이 사라진 사회가, 핵심 한 명이 빠진 빈 자리를 메꾸지 못한다고? 누가 그래? 만일 정말로 메꾸지 못한다면 그건 사회도 아니고, 조직도 아니다.

  이런 생각, 5천명 가운데 한명으로 뽑히지 못한 4,999명을 낙오자라고 칭하는 것도 모자라, 10년 만에 새로운 지구로의 이주에 실패하고 돌아온 탁월한 자들한테 다시 세상의 헤게모니를 고스란히, 그리고 기꺼이 떠넘기는, 혹은 두 손에 들고 가져다 바친다는 발상은 일본인 아니면 쉽지 않을 것이다. 즉 일본의 소설가가 아니면 상상하기 힘든 상황.

  일본은 우리나라 고려 시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거의 비슷한 무신정권을 세워, 고려의 무신정권이 약 백 년 가량 유지한 반면 일본의 막부는 19세기까지 유지한다. 이 바람에 보통의 일본인은 쇼군과 사무라이 계급 등 상위 계급에 거의 무조건적 충성을 보이는 경향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생사 여탈이 그들 손에 있었으니까. 일본인들이 유난히 친절한 것이, 진심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하여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한데 무려 5천명 가운데 제일 뛰어난 한명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인간들이 다시 돌아왔으니 속으로는 언짢았을지언정 그들이 다시 세상의 거의 모든 권력을 쥐는 것에는 저절로, 유전자적으로 동의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말씀. 물론 너무 일반화했다는 것도 알지만, 우리나라 작가가 오에의 <치료탑> 비슷하게 썼으면 아마 초장에 거덜이 났을 걸? 당신도 나하고 같지는 않겠지만 비슷하게는 생각하리라 믿는다. 나도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오에 겐자부로가 지구에 잔류한 49억 9,900만 명의 인류한테 “낙오자” 운운할 때마다 열통이 터지는 걸 참지 못했다.


  아이씨. 아직 스토리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독후감 분량이 벌써 마감해야 할 지경까지 와버렸다.

  주인공 키다 리쓰코. 1인칭 소설이지만 독후감은 3인칭으로 쓰겠다.

  리쓰코의 큰 아버지 키다 시게 씨도 방사능 오염 때문인지 아닌지 나오지 않지만 작품을 시작하는 해, 스타십 공사의 우주선이 새로운 지구에서 다시 돌아온 해 봄의 끝무렵에 폐와 뇌로 전이된 암으로 사망했다. 과학자였으며 우주항해를 위해 스타십을 설계하고 건조하는 일본 공사 연구소 소장으로 있다가 “새로운 지구로”라는 슬로건으로 막대한 예산을 편성하자 자신의 손으로 키운 스타십 공사에서 스스로 물러나와 “대출발” 이후 혼란기에 남은 인류를 강력하게 보호하는 시스템을 고안하고 그것을 꾸준하게 현실에서 실행해온 인물이다. 그의 빈자리를 친동생 다카시가 물려받아 세계의 백만명 가운데 선정된 일본인 모두를 이끌고 스타십에 태워 새로운 지구로 떠났다. 정당한 선발인지 공사 사장의 입김인지 외아들 사쿠도 데리고. (‘사쿠’는 오에 겐자부로의 이과를 전공한 둘째 아들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가장 현명하고 정의로운 일본인 가운데 한 명이 시게 백부일 터. 그가 살아 생전 이렇게 말한다.

  “이 지구에 인간이라는 의식을 지닌 생물이 출현한 것은 실수였다.”

  이 대사를 읽고 나는 웃었다. 실수는 뭐. 인간이 지구를 망치기 시작한 건 기껏해야 6백년 정도의 시간밖에 안 된다. 앞으로 존속할 기간도 길어봤자, 아주 길어봤자 한 천년? 여태까지의 잘못을 심각하게 반성해서 지구 복원을 힘쓰더라도 원상복구한 지구에서도 끽 해봐야 3만년이다. 지구 나이가 40억살인데 그깟 3만6백년. 인간이 원자폭탄, 원자력 발전소 폭발, 수소폭탄 같은 생 난리를 친다 해도, 인간이 천년 후에 멸종한 다음에 원상복귀에 얼마나 걸릴 거 같은가? 아주 길어봤자 천만년? 지질학적, 우주공학적으로 천만년은 시간도 아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할 필요 없다. 그저 빨리 멸종만 하면 된다.


  스토리는 전부 생략해야겠다. 너무 길어진다. 그러니까 리쓰코가 주인공이고, 새로운 지구에서 헌 지구로 귀환하는 사람 가운데 공사 사장 다카시 백부의 아들, 즉 리쓰코의 사촌오빠 사쿠가 남자 주인공이라서 둘은 당연히 사랑을 하고, 사촌끼리 징그럽게 벌거벗고 잠도 자고, 리쓰코가 에이즈 검사를 한 후에 임신도 하고, 임신한 김에 결혼도 한다. 그러나 귀환자와 잔류자 사이의 결혼이 금지되어 리쓰고-사쿠 커플은 일종의 코뮌 형태의 농장에 숨어들어가고, 웃기게도 그곳에는 정신지체이지만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름도 제법 낸 작곡가 오에 히카리가 또다시 등장하는데, 히카리 나이가 벌써 여든이니, 겐자부로의 맏아들이자 작곡가이며, 오에 겐자부로가 쓰는 소설마다 등장하는 히카리가 1963년생. 이게 내가 연도를 2040년 이후라고 판단한 근거가 된다.

  사쿠는 다시 스타십 공사에 복귀해 우주로 나가, 외계의 지적 생명체와의 교신을 위해 헌신하는 이야기. 오에 겐자부로는 스스로 스타니스와프 렘의 영향을 받았다고 암시하고, 내가 읽기로는 스투르가츠키 형제의 작품 <노변의 피크닉>에서도 힌트를 얻은 것 같다.

  재미있다. 천생 문과 인간인 오에 겐자부로는 SF를 써도 여전히 악마같이 거만한 먹물의식에 푹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독자는 모르겠고, 나는 그래서 좋다. 이 책이 지금 절판 상태라서 읽으려면 헌책을 사거나 도서관에 가야 할 듯. 오에의 작품 가운데 인기가 별로 없는지 2018년 초판 1쇄 책임에도 도서관 책 치고 상태가 괜찮다. 재미있는 스토리 이야기를 하지 못해 아쉽지만, 가끔은 아쉬운 게 더 좋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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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7-29 16: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에 겐자부로가 이런 글도 썼군요^^

Falstaff 2025-07-29 16:23   좋아요 1 | URL
읽으셔도 좋을 거 같은데요, 추천까지는 하지 못하겠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