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이드데일 로맨스 대산세계문학총서 50
나다니엘 호손 지음, 김지원.한혜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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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과서에 나온 <큰 바위 얼굴>의 작가 이름은 '나다니엘 호돈'이라고 배웠는데 이제 세월이 지나니 이젠 이 사람 이름은 쓰는 사람 마음대로다. 나사니엘 호손(문학과지성사, 소담출판사), 너새니얼 호손(민음사, 문예출판사), 너대니얼 호손(푸른숲), 기타등등. 이거 뭐 대한민국 출판을 책임지는 것들이 외국어 표기에 관해선 다들 지 잘났다고 맘대로야.

 호손의 책을 한 권 정도 더 읽으려고 해서 <일곱박공의 집>을 고를까 <블라이드데일 로맨스>를 고를까 잠깐 망설이다가 아무 생각없이 집어든 책. 왜냐면 오랜만에 시내 나가 5천원짜리 커피 마시며 사람 기다리다가, 물론 술 약속 시간 맞추려고 그랬는데, 커피집이 입구 전광판에 오늘 들어온 책 474권, 이렇게 써있는 중고책 가게도 겸해서 무슨 책들이 나왔나 둘러보다가 싼 김에 산 거다. 싸서 샀다고? 하이고, 커피값 5천원은 생각 안 해? 직장생활 하면서 하도 인스턴트 커피에 입이 길들어 난 몇 천원짜리 원두커피는 맛이 없어 잘 안 먹는데, 맛없는 원두커피 값 생각하면 절대로 싼 김에 산 거 아니다. 하여간 그랬다.

 이걸로 호돈인지 호손인지 하는 19세기 초반 태생의 미국작가는 내게 작별을 고한다. 아, 호손이 그리고 <블라이드데일 로맨스>가 후져서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 그냥 내게 큰 어필을 하는데 실패했다는, 아주 전적으로 개인적인 기호에서 그렇다는 말씀. 이 양반이 1804년생. 마흔 여덟살에 출간한 이 책은 호손으로선 이색적으로 1인칭 시점에서 썼다고들 하는데 뭐 그리 관심이 있는 바는 아니고, 왜 개인적으로 내가 호손에게 실망했는가 하면, 실제로 호손이 유럽에 비해 완전 꼴보수 상태였던 아메리카에서 농촌 공동체 내의 사회주의를 실험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참가해서 경험한 것을 소설적으로 만든 것이 <블라이드데일 로맨스>라고 하지만, 그 사회주의 농촌 공동체에서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해 7개월만에 쫑을 낸 것처럼 다분히 공동체를 좀 비틀어보려는 악의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1인칭 소설이 제일 재수 없는 건 주인공 '나', 이 책에선 '커버데일'이란 작잔데,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는 무결점의 정의로운 자일 확률이 대단히 높다는 거. 하지만 곳곳에 그놈의 '나'가 견지하는 시선의 삐딱함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건 거의 전적으로 작가의 사상 자체가 그래서 그렇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긴 뭐, 이 책에선 화자 '나'가 주인공이라기보다 다분히 관찰자로 등장하고, 주인공 삼인방이라고 할 수 있는 등장인물은 (화자, 즉 작가의 시선으로 보면) 다분히 위선적이고 허황한 성격의 박애주의자 홀링스워스와 그를 둘러싼 두 여자, 제노비아와 프리실라로 이 세 사람 사이에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히고 설킨 로맨스를 그렸지만, 제일 마지막 문장, 즉 결론에 이르는 화자 '나'의 선언이 어째 좀, 당최, 여간해서, 여기까지 써놓고 온라인에서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 점 대여섯개 찍는 일. 이렇게. "…".

 마지막 문장, 혹은 '나'의 선언이 뭐냐고? 그거 아시면 책 못읽음. 그래서 안 알려드림.


 근데, 그러지 말고 호손이 쓴 다른 책 한 권 정도 더 읽어볼까? 그래 뭐 세상 별거 있나. 그깐 책이 뭐라고 단칼에 자르겠단 말을 해. 안 그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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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튤립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8
알렉상드르 뒤마 지음, 송진석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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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난 작가. 19세기를 프랑스 소설문학의 황금기로 만든 주인공 가운데 한 명. 신고전주의의 새물결 이란 공허한 선언을 완전히 뭉개버린 낭만주의의 전사. 흑인 노예 출신 어머니를 둔 물라토 출신, 그러나 나폴레옹 시절에 장군을 역임했던 풍운아 아버지가 뒤마에겐 어떤 역할을 했을까. 혹시 그래서 알렉상드르 뒤마가 쓴 역사소설들이 특히 더 재미있을까? 그건 다 프랑스 문학 평론가에게 맡기고 난 그냥 책을 즐기기만 하면 장땡이다.

 17세기 네덜란드 이야기. 바로 옆나라 프랑스에선 태양왕 루이 14세가 전성기를 맞아 오직 심심하다는 이유로 걸핏하면 네덜란드한테 찾아가 레프트 잽을 다르르르 날리곤 했던 시기. 두르려놓고는 꼭 한 마디를 보태니, "까불지마!" 네덜란드 입장에선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이 늘 그렇듯이 이리저리 눈치 보면서 명줄을 늘이기에 완전 넙치 눈깔이 되던 때, 정말 축구 하나 기막히게 잘하는 네덜란드 축구대표팀 오렌지 군단의 영도자 오렌지 가문을 중심으로 한 공국체제와 당시만 해도 혁신적인 정치제제인 공화정을 주장하던 세력간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누가 옳고 그르고의 개념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해가는 시절에 적절히 적응하고 아니고의 문제일 뿐이었다.

 당시 공화정을 주장하던 권세있는 형제가 있었으니 형 코르넬리스 드 비트, 동생 얀 드 비트. 그러나 정세는 오렌지 공 윌리엄을 등극시키면서 코르넬리스는 이미 암살음모의 누명을 쓰고 헤이그의 감옥에서 고문까지 받고 죽음만 기다리던 상태였다. 다시 말하지만 역사의 격변기엔 죽고 죽이는 사람들 양 편이 공히 정의로운 사람일 수도 있으니 오직 '자신들만의' 확신과 진리와 통찰에 의하여 행위하기 때문. 드 비트에겐 유배형이 내려지고, 사형이 아니라 유배형에 격분한 시민들은 드 비트 형제를 척살하기 위해 헤이그 감옥 앞 광장을 잔뜩 메우고 있다. 이 상황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본문만 350쪽으로, 그것도 민음사 세계문학의 럴럴한 편집으로 350쪽으로, 뒤마의 소설로 치면 매우 짧은 분량이다. 근데 그거 말고도 뒤마가 이야기를 써내려가며 순간순간을 묘사하는 재치와 직관적 순간의 포착과 그리하여 그런 것들을 통해서 독자가 전율할 수밖에 없는 실감과 재미와 흥미진진을 생각할 때, 이 작품의 스토리에 관한 더 이상의 첨언은 그야말로 낭비다. 어떻게 글을 쓰면 뒤마 만큼 술술 읽힐 수 있을까. 그것도 원어가 아니라 번역한 글이 말이다. 소설가나 소설가 지망생들은 이에 대해 한 번 숙고해볼 만하지 않을까. 문장 하나하나를 감각적이고 주머니 속에서 톡, 튀어나온 송곳처럼 쓰는 것도 좋겠지만 역시 소설의 문장들은 읽기 편하게 죽죽 힘차게 벋는 힘을 수반해야 제대로 된 맛일 터이니.

 만원 한 장이면 이 책 살 수 있다. 그럼 하루 혹은 이틀이 재미있거나 행복하다. 감동까진 아니더라도 어떤 경우보다 훌륭한 당신의 킬링 타임을 보장한다. 이거, 유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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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3-03 14: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가 이거 정말 재밌다고 하더라고요. 어릴 때 뒤마 <삼총사> 읽으면서 심장 쫄깃했던 기억이 납니다.

Falstaff 2017-03-03 14:34   좋아요 1 | URL
영화보는 거처럼 박진감도 있고 막 그렇더라고요.
재미 하나는 확실히 보장합니다. ㅋㅋㅋ

공쟝쟝 2022-07-20 14:14   좋아요 1 | URL
이 책… 재밌었어요… 킬링타임 맞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좀 아 너무 옛날 소설이다 이러면서 읽다가 뭔가 유치한 데 매력적이라서 빠져서 읽었답니다. 1800년대의 베스트 셀러 였던 거죠? ㅋㅋㅋㅋ 삼총사도 이렇게 재밌나요? ㅋㅋㅋ 누가 읽었나 하고 찾아봤는데 역시 걸드문트 님은 읽고 리뷰까지 남기셨네요 ㅋㅋㅋ 신기방기!!!

Falstaff 2022-07-20 18:39   좋아요 0 | URL
옙. 삼총사도 재미납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도 재미납니다.
삼총사 민음사 1권 보시면 쇤네가 쓴 독후감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어마어마하게도, 돈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으로 가히 뒤마의 대표작 아니겠습니까. 역시 인간은 돈이 많으면 좋아요. ㅋㅋㅋㅋ

삼총사도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오지 않을까요? ㅋㅋㅋㅋㅋ 민음사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죠.
 
유디트 / 헤롯과 마리암네 대산세계문학총서 105
프리드리히 헤벨 지음, 김영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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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얘기하는대로 이스라엘 삼국지, 즉 구약성서를 기반으로 쓴 희곡 두개를 실은 책. <유디트>와 <헤롯과 마리암네>. 유디트는 뭐하는 여잔줄 알았고 마리암네는 몰랐다. 유디트도 사실 구약을 읽어서가 아니라 서양소설을 읽는데 가끔 등장해서 아는 것이지 난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하고는 조금 거리가 먼, 돌아오지 않은 탕아다.

 그래서, 솔직히 별 감흥 없이 읽은 책. 이 책에서 가장 멋있는 건, 전적으로 기독교에 관심 없는 이방인의 눈으로 보자면 그렇다는 것인데, 바로 책 껍데기 그림이다. 당연히 구글 검색해서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어떤 모습인지 찾아냈다. 보실래?

 

크리스토파노 알로리,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의 대가리


 놀랍게도 우리나라 출판사 중에서도 메이저 가운데 메이저 문학과지성사가 이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원화는 어디에 있는지, 원화의 소유자에게 저작권료는 줬는지 아닌지를 책 어느 구석에도 명시하지 않았다는 거.


 두 희곡을 발표하고 초연을 한 것이 1840년과 48년. 당시엔 무대 위에서 남자 중의 남자, 영웅 가운데 진짜 영웅 홀로페르네스의 대가리를 자르는 것이 매우 획기적인 연출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이제는 그다지 와닫지 않는 게 사실.

 <유디트>는 알고 있는 얘기였음에도 이랬으니 <헤롯과 마리암네>는 더했으면 더하지 않았다는 건 얘기할 필요도 없다. 근데 여기서 살로메가 등장하는데, 와일드를 통해서 알고 있는 살로메하고는 완전 다르던데, 이래서 문학에서도 진화가 있다는 걸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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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첫출발 대산세계문학총서 74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선영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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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자크, 참 감탄스럽다. 19세기 초반에 절정기를 달리던 작가. 조만간 독후감 올릴 알렉상드르 뒤마도 빅토르 위고도 그렇고 입심 하나는 진짜 대단한데, 내가 이들과 또래인 푸시킨을 좋아하지만 역시 입심, 말빨, 구라 기타등등 이런 것들을 다 합쳐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솜씨는 프랑스 사람들과 누가 있어 함부로 어깨를 견주겠는가. 가만. 발자크가 1799년, 뒤마가 1802던가? 위고도 언제리 비슷하고. 그럼 발자크, 뒤마, 위고가 있어서 프랑스 소설문학이 그리 찬란한 19세기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해도 별 무리는 없는 거 같다. 다연히 뒤를 이어서 다시 한 번 눈부신 작가들, 플로베르, 모파상, 스탕달 같은 후배들이 연이어 나와주었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기초는 발자크와 뒤마, 위고 아녀?

 이거, 전적으로 19세기 작품.

 그렇다고 만만하게 보시면 안 될 것이, 먼저 제목을 보시라. "인생의 첫출발". 당신은 모르겠으나, 나는 성인이 되어 나만의 인생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뒤를 돌아다보면, 결정적인 실수 또는 창피스러운 또는 발설하지 못할 낭패 같은 것을 몇 번 거쳤는데 그런 것들이 참 다행스럽게 내 인생을 좌우할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건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근데 인생의 중요한 실패 또는 실수 같은 것도 정작 아주 사소하고 간혹 웃긴 일부터 시작하기도 하니 진짜 아이러니. 아시는 분은 아시다시피 내가 발자크를 참 좋아하는 것이, 생긴 건 어째 우락부락에다가 고집불통 심술장이 같은데 사람들의 허파와 염통 사이에 있는 화학물질을 기막히게 잘 포착해서 거기다 특급 소스를 뿌려 독자의 식탁에 올려놓는 초일류 주방장이기 때문. 염통과 허파 사이에 뭐가 있느냐고? '감정' 또는 '마음'.

 19세기 초 1820년대 세계 최고의 선진국 프랑스에서도 간선 도로엔 마차가 운송을 담당했는데 어느 날 이 마차에 복잡한 목적을 띈 승객들이 타게 되고 그들은 먼 길을 가는 동안 심심파적으로 자신의 앞으로 해야 할 것, 자신이 과거에 경험했던 모험과 정의수행의 과정, 유명한 사람들의 숭고한 열정의 댓가로 스스로의 육체에 부여할 수밖에 없었던 추악하고 수치스럽고 가리고싶기 한 상처 같은 것을, 누구는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면서까지 농담삼아 지껄이며 길을 줄이고 있다. 그 속에는 특정인과 특정인을 위해 일할 사람들과, 특정인을 사기칠 목적인 농부와, 특정인과 별 관계가 없으나 그의 치명적 약점 또는 놀림감을 알고 있는 인간들이 타고 있어 특정인으로 하여금 승객들이 앞으로 자기에게 저지르려고 하는 행위를 미리 알게 되고, 결코 꺼지지 않는 수치의 총합이 지옥불보다도 더 지독함을 알게되기도 하고, 선의로 고통을 줄여주려고 하는 친절도 힐끗 보게 된다.

 딱 여기까지. 이 책이 본문만 250쪽일 정도로 별로 두껍지 않아 내용에 관해 더 이야기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할 뿐더러 내가 아무리 재미나게 이야기하더라도 직접 발자크를 읽어가며 그의 혓바닥, 아니 손가락이겠지, 하여간 그가 만들어내는 스토리 만하겠는가. 난 이번엔 양심상 그렇게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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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킨 이야기 / 스페이드 여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최선 옮김 / 민음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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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 문학을 좀 읽어보면 1800년을 전후해서 태어난 사람들 까진 글을 쓸 때 뭔가 고딕적인 분위기르 띄는 성향이 많다는 걸 알아챌 수 있다. 어제 얘기한 오스틴의 <노생거 수도원>에서도 주인공 캐서린이 열일곱 살 먹을 때까지 주로 괴기, 심령(비슷한) 소설들을 많이 읽어 영향을 받은 관계로 온천도시 바스로 놀러가 문제의 노생거 수도원에 들렀는데 음산한 분위기 속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괴기, 심령소설의 분위기에 취해 왔다리 갔다리 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오스틴의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인물들이 주로 읽는 것들을 보면 주로 고딕 소설들. 그래서 그런가 북해를 횡단해 주로 상트 배째라부르크에 살던 20여 살 아래 작가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의 작품에서도 이런 고딕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대표적인 작품으로 <벨킨 이야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면 얼마나 좋은가마는 이건 전적으로 내 생각이니 (이 말 나오면 언제나 곧바로 언급하다시피) 어디 가서 이 말 인용하지 마시라. 개망신당할 수 있다.

 <벨킨 이야기>에 관해서 말하자면, 먼저 이반 페트로비치 벨킨이 누구냐, 하는 걸 얘기해야 하는데 푸시킨보다 한 살 많은 1798년 생 총각으로 스물 다섯살 까지 군복무를 하다가 갑자기 양친이 작고하는 바람에 작은 영지로 귀향해서 농장을 개혁하겠다는 의지로 일 잘하고 있던 집사를 해고하고 일을 도모하지만 끝내 빌빌거리다가 나이 서른살 되던 1828년 가을, 감기에 이은 열병에 걸렸는데 근동에서 제일 가는 발가락 및 발바닥 티눈 전문 의사의 끈질기고 정성어린 가료 끝에 숟가락 놓은 인간이다. 이 작자가 농장은 안 되지 살 맛도 나지 않지 하는 와중에 짧은 이야기를 몇 편 써놓은 것이 있으니 바로 <벨킨 이야기>라고 푸시킨은 설레발을 친다.

 이렇게 짧은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책의 미덕은, 바로 재밌다는 거다. 첫번째 글이 <발사>라는 제목으로 러시아 작품에서 특히 자주 볼 수 있는 결투를 주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말씀이지, 결투를 주제로 하고 있다, 까지 쓰니까 양심상 더 쓸 수 없는 거. 이게 또 짧은 이야기를 읽고 난 다음에 독후감을 쓰는 애로사항이다. 더 이야기를 하자니 이미 이 짧은 이야기를 다 들으신 거 같을 수 있고, 그러자니 말을 꺼내기만 하고 심술부리는 거 같기도 하고. 좋다, 하나만 더하자면, 결투할 때 먼저 제비를 뽑아서 누가 먼저 권총을 쏠 것인가를 정한 다음, 첫번째 인간이 맞추면 그냥 게임 끝나는데 만일 맞추지 못하면, 이때 정말 터무니 없이 맞추지 못했건, 맞줄 수 있는데 일부러 옷깃을 스치게, 아니면 쓰고 있던 모자에 구멍 만 내게 쏜다든지를 막론하고, 어쨌든 맞추지 못하면 짧은 제비를 뽑아 이제 순서가 된 두번째 사수는 만일 지금 쏘고 싶지 않으면 나중에 언제 어디서도 쏠 수 있는 모양이다. 물론 결투 전에 약속을 해야 되겠지만. 하여간 서양의 이 엉뚱한 결투문화, 울 나라에 없는 건 참 다행이다.

 <벨킨 이야기>는 위에서 얘기한 <발사>를 포함해 다섯 개의 짧은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옴니버스 작품. 물론 벨킨이라는 사람이 진짜 있어서 정말로 그가 써놓은 작품이라고 오해는 하지 않으시겠지?


 <스페이드 여왕>? 물론 이걸 읽기 위해 책을 산 게 맞다.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아주 재밌는 같은 제목의 오페라. 그것의 원본인데 어찌 읽어보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나.

 아, 실례. 이 작품에서 숨어있는 주인공이 여든 넘은 안나 페도토브나 백작부인이다. 그이가 젊은 시절 프랑스에 자주 놀러갔는데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파리의 사교계를 완전히 한 손아귀에 장악했음은 물론이고 남편마저 그이의 위세에 눌려 거의 집사 수준으로 전락했다고 한다. 한편 백작부인은 도박에도 일가견이 있었지만 주로 잃는 쪽으로 일가견이 있어 집구석을 완전 거덜내고 말아 이를 극복하고자 불사의 약과 현자의 돌을 발명해 신에게 죄를 짓고 영원히 고통받는 영원한 유대인 생 제르맹 백작에게 비싼 값을 치루고 도박에서 돈을 딸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안나 페도토브나 백작부인의 친손자 톰스키의 입에서 나오고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에선 1막의 '톰스키의 발라드'란 제목으로 들을 수 있다. 한 방 쾅!

 

 그래 어찌어찌해서 독일계 러시아인 게르만German, 러시아 발음으로 하자면 헤르만이지만 번역자 '최선'은 독일계임을 강조해서 '게르만'이라고 표기했다. 하여간 게르만이 어찌어찌해서 사랑의 꿈을 꾸고 있는 백작부인의 수양딸, 말이 좋아 수양딸이지 거의 몸종인 리자의 연모에 받기 이르고, 그걸 이용해 백작부인으로부터 도박에서 돈을 딸 수 있는 세 장의 카드를 알게 되는데, 여기서 스톱.

 인생살이가 그리 만만해? 절대로 아니지. 거기다가 허공을 떠다니는 짓궂은 유령의 윙크까지 당신의 삶을 간섭하고 있는 거야. 물론 내 삶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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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2-27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번역이 좀 아쉬웠어요. 너무 너무 옛날 말투 ㅠㅠ 그래도 작품은 참 흥미진진합니다.

Falstaff 2017-02-27 16:38   좋아요 0 | URL
맞아요, 백자평에서 봤습니다.
전 옛날 말투에 대해선 뭐 별로 거부감이 없어서요. 암만해도 날이 갈수록 꼰대가 돼가는 거 같아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