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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재구성 - 제28회 신동엽창작상 수상작 ㅣ 창비시선 306
안현미 지음 / 창비 / 2009년 9월
평점 :
안현미 시인의 시도 처음 읽는 거다. 시 안 읽은지 20년 조금 더 됐다. 거의 마지막으로 읽은 시집이 1996년 나희덕의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니 참으로 참담한 일이다. 이제 시를 조금씩 읽기 시작하려니까 요즘 시인들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그간 시의 경향이 무척 많이 바뀌기도 했고 하여간 낯설다. 낯선 거, 이거 좋지 아니한가. 더구나 시를 포함한 문학장르에서 낯선 작품들을 새로 대할 때의 신비, 오리무중, 난감, 당황, 기쁨, 반짝!, 오줌마려운 느낌 등등. 근데 아직도 변하지 않은 거 하나. 역시 시는 서정시다, 서정시.
(* 위에 반짝! 이라고 쓴 건 전적으로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거다. 근데 지금 책을 뒤집어보니 뒷표지에 김정환의 감상문이 있는데 재수없게 첫마디가 '반짝!' 이렇게 시작한다. 그거 보고 쓴 거 아니다.)
<이별의 재구성>도 낯선 시들이지만 또한 나처럼 오래 시를 읽지 않은 사람도 즐길 수 있는 참 괜찮은 서정시, 더군다나 시인이 그렇다고 주장하든 아니든 그것과 관계없이, 인류가 시작한 이래 끊이지 않고 노래했던 '사랑시'다. 21세기적 감성이 어떠니 저떠니 하지 않는 누만년 인류의 가슴에 고여있던 진액 같은 습식濕式 사랑.
post-아현동
오늘은 아현동 산동네에 갔다
오래전 월세 들어 살던 방,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하던 방, 연탄불을 넣던 방, 이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울먹이던 방, 외롭던 방, 고맙던 방, 아주아주 춥던 방,
그 시절 내 마음에 전세 들어 살던 첫 애인을 생각하는 밤, 나의 아름다운 남동생의 흐려진 얼굴빛을 걱정하는 밤, 고단한 토끼에게 아무 약효도 없는 안약을 건네던 밤, 가난한 추억과 합체하던 밤,
아현동 산동네를 내려와 찾아간 'BAR다' 어둡고 낡은 나무계단 끝에서 화장실이 어딘지 모르고 서 있는 머리 긴 외국 남자에게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Why?"라고 물으며 괜스레 친절하고 싶던 밤, 함께 여기를 뜨자고 말하면 주저없이 따라가고 싶던 밤, 국적도 모국어도 잃어버리고 싶던 밤, 나 스스로에게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왜?"라고 자꾸 되묻던 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개를 기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열정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니? 왜? (전문)
(이제부터 잘난 척 타임. 아래의 의견 어디가서 복사하지 마시라. 개망신 당한다.)
시집은 몇개의 시적 영역boundary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 시 <post-아현동>에서 보더라도 세번째 연 끝부분에 나오는 시어 '합체. 작가의 고향이자 말 그대로 (강원도 태백에서의) 가난한 추억이 아현동의 외로움과 실패로 끝난 사랑과 합체해버린다는 것. 네번째 연의 'BAR다' 읽으면 읽는대로 나오는 소리값으로 '바다', 시집의 제목 '이별의 재구성'이 '이 별이 재구성' 할 때 '이별이 재구성'될 수 있을 거라는 것과 비슷하게 함께 여기서 뜨자고, 그래서 어두운 밤의 바다로 가자고 하면 따라갈 수 있을 거 같은 '바다'의 다른 표현인 것 등등. 시인은 시를 몇 개의 무리로 한 줌 씩 한 줌 씩 줌-인 해가며 주제를 확장하고 깊이를 더해가는 독특한 시도를 펼치고 있다.
물론 한 줌의 시로 시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했다한들 독자가 그걸 이해해줄리도 없는 것이지만 같거나 비슷한 주제를 같거나 비슷한 시어로 한 줌을 만들어 나열하는 시도는 안현미한테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것이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건 전적으로 독자 마음대로. 내 취향엔 거스르지 않았다.
물론 이 시인에 대한 불만도 있다. 이거 하나만 빼면(안 빼도 마찬가지기는 하지만) 안현미 시인의 시집을 앞으로도 계속 사 읽어볼 용의가 있는데, 무엇인가 하면 먼저 시 하나를 읽어보고 얘기하자.
외롭고 웃긴
잿빛 눈물을 훔쳤지, 거긴 외롭고 웃긴, 새장 속, 우린 대부분의 인생을 침대에서 흘려보내, 랄라, 새장 밖으로 헛되고 헛되고 헛되이 아름다운 시간들이 흘러가고, 랄라, 잿빛 눈물을 훔쳤지, 거긴 외롭고 웃긴, 세상 속, 우린 대부분의 인생을 침대에서 흘려보내, 랄라, 붐밤으로부터 봄밤까지, 무의미로부터 무의미까지, 호모 싸피엔스로부터 호모 싸피엔스까지, 눈물로부터 눈물까지, 혁명을 말하는 자도 외롭고 혁명을 말하지 않는 자도 외롭다는 걸 우리는 본능적으로 예감했지만, 거긴 외롭고 웃긴, 랄라, 우린 대부분의 인생을 침대에서 흘려보내, 스프링이 고장난 매트리스처럼, 삐걱 삐걱 삐걱, 외롭고 웃긴, 세상 속에서, 한통속으로, 흘러가는 시간들, 헛되고 헛되고 헛되이 아름다운, 랄라, 우린 대부분의 시간을 새장 속에서 흘려보내네, 앵무새 같은 우린 겨우, 젯빛 눈물만 훔치는 우린, 랄랄라 (전문)
* 혁명을 말하는 자도 외롭고 혁명을 말하지 않는 자도 외롭다 : 최창근 『인생이여, 고마워요』에서
잿빛 눈물을 훔치는. 여기서 '훔치다'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남의 것을 훔치는 일'일까 아니면 '흘려내리는 눈물을 손수건 따위로 닦는 일'일까. 속단하지 마시라. 안현미의 시어는 중의적인 것이 많기 때문에 둘 다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얘기하려고 하는 건 그것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시를 읽을 때 속으로 다음과 같은 불평을 하곤 한다.
"왜? 아예 논문을 쓰지 그랬어."
핵심을 팍팍 찌르는 단 몇 개의 시어로 만들어진 그런 시 어디 없나? 좋은 시인 안현미가 힘써 펴낸 시집 <이별의 재구성>을 즐겁게 읽으면서 짧게 던진 불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