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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식탁 위의 개
클로디 윈징게르 지음, 김미정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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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에 페미나 상을 받았다고 해서 관심 솟아 읽어봤다. 작가 이름이 “클로디 윈징게르Claudie Hunzinger”라니 혹시 시댁이 몽골이나 훈족 같은 오랑캐 출신인가 잠깐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랬더니 흥미로운 인생을 산 사람이다. 70대에 이르러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동프랑스 산악지역에서 잠깐 교사 생활을 하다가 남편 프란시스를 만나 알자스 산골로 들어가 양을 치며 60년을 살았다. 딸, 아들 하나씩 두었으며, 아들 로빈은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2022년에 페미나 상을 먹은 <내 식탁 위의 개>를 읽어보면 1940년생인 작가가 여든이 넘어 쓴 작품으로, 노년의 작가가 쓴 작품이 대개 그렇듯이 실제로 자신이 살고 있는 생활을 자잘하게 묘사하고 있다. 책 속의 노부부는 저 벌판의 숨어있는 빙퇴석 지역에 홀로 서 있는 낡은 집에 사는데, 12미터 길이의 통으로 된 복층 구조의 단층집이다. 쉽게 말하자면 다락방이 있는 단층집 정도. 남편 그리그(‘구두쇠’라는 의미)는 이 다락방에 구축한 자기만의 터전에서 산다. 활자 중독 같다. 책이 워낙 많아 빽빽하게 쌓아놓는 바람에 창문까지 모두 가려버렸고, 청소도 거의 하지 않아 살금살금 걸어도 종이먼지가 풀풀 휘날릴 지경이다. 가히 책을 보관하는 저장고라 할 만하다. 아내인 화자 소피는 숲 속의 집 “부아바니”의 주거지역 가운데 초원이 바라다 보이는 창문을 가진 가장 좋은 곳에 생태계를 이루었다. 소피는 2년 전에 <동물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발표하여 나름대로 생태작가로 이름을 높였지만, 프랑스에서는 영미문학에 비해 이 분야는 변두리, 변방문학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화자 ‘나’는 변방의 소설가이다. 여든을 훌쩍 넘긴 지금도 그리그는 거의 잠시도 쉬지 않고 하여간 뭔가를 읽고 있다. 하다못해 신문이라도. 그렇게 많은 책이 쌓여 있건만 늘 택배로 새로운 책을 받아보는 일상. 근데 내가 정말 궁금한 건, 60년이 넘게 양을 치고 살았다며, 그리그는 한 번도 취직을 해본 적도 없고 열라 노동해본 적도 없다며, 근데 다 늙어서까지 어떻게 그런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리그나 소피의 부모가 꽤 부유했던 건 아닐까? 혹시 모르지, 젊은 시절에 연달아 로또에 꽈광, 두어번 얻어 터졌는지도. 별걸 가지고 다 시비라고? 부러워서 그런다, 부러워서.
식탁 위의 개. 읽기 전에 잠깐 헛갈렸다. 식탁 위에 개가 올라올 수 있는 방법? 버르장머리 없는 개가 훌쩍 식탁 위에 뛰어오른 경우. 개엄마, 개아빠들이 울룰루 배고파쪄 어쩌고 저쩌고 식탁 위에 올려놓고 미디엄 레어 안심 스테이크 잘라 먹이는 경우. 그리고 개가 그릇에 담겨 식탁에 차려진 경우 말고 또 있을까? 그러면/아니라면 이 책의 제목은 어떤 경우일까? 당신은 헛갈리지 않아? 책을 읽어보면 끝날 때까지 문제의 개 “예스”라고 이름지은 양치기 종의 개는 한 번도 식탁 위에 올라가거나 올려지지 않는다. 하여간 그렇다. 그렇다는 말이다.
작가 클로디 윈징게르는 2019년에 생태소설 <위대한 사슴들>을 출간한 적 있는데, 이것을 이 작품의 화자 ‘나’ 소피가 2년 전에 생태소설 <짐승들>이란 소설을 발표해, 리옹에서 열리는 생태문학에 관한 토론회에 남성 작가 두 명과 더불어 초청을 받는 것으로 변주했다. 이미 여든 살이 넘은 소피-그리그 부부는 자신들의 집에 “부아바니” 추방당한 숲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어주고, 그곳을 벗어나는 일이 그렇게 즐겁지 않다. 하다못해 식료품을 사기 위해서도 SUV 차량을 타고 한 시간을 운전해야 하는 터라 한 번에 겨울을 날 만큼의 통조림을 싣고 오는 정도이다. 하여간.
리옹으로 출발하기 전날. 아직 밤이 오지 않은 저녁. 온갖 서글픈 세상사에서 추방당한 것 같은 초원의 끄트머리에 있는 낡은 집. 농사를 짓는 광활한 초원과 방목장, 그리고 근사한 숲으로 싸인 공터에 거대한 빙퇴석 지대가 있으며, 이 지대 아래의 또다른 초원에 들어선 집, 오랫동안 방치된 높이가 낮고 자그마한 목골 연와조 건물과 건물에 딸린 채소밭. 그리고 노부부. 그림이다, 그림. 죄 많은 세상에서 내쫓긴 자칭 추방자는 이 잊힌 집과 초원 63아르, 약 2천평의 대지를 구입해 살기 시작한 것이 3년 전. 원래 남편 그리그는 책을 읽는 일 말고 다른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소피도 이제는 손에 기형이 와서 그렇게 즐긴 정원 가꾸기도 포기한 지 오래다. 그래도 집 주변엔 여러가지 꽃들이 자잘하게 피기를 그치지 않았다. 한 편엔 씨앗이 맺힌 디기탈리스가 있었는데, 디기탈리스가 모여 있는 무더기 아래 뭔가 눈에 띄었다. 틀림없는 도망자. 꼬질꼬질한 회색 털뭉치. 굶주려 기진맥진해 소피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커다란 밤색 눈동자의 개.
소피는 등지고 있던 현관을 비켜 옆으로 서는 것으로 개에게 집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철저히 고독한 그 모습이 너무 우아”해서. 노부부는 양치기 개 종種이 분명한 이 도망자에게 물과 먹을 것을 주고 관찰했다. 몸에 진드기가 적지 않게 붙어 있었으며, 누군가의 발길에 여러 번 거세게 걷어차인 것이 분명하게 털 아래 뱃가죽은 시커멓게 멍들었다. 게다가 암컷인 이 개의 생식기는 처참하게 찢겨 진물과 피가 엉겨 있었다. 작가는 이 모습을 이렇게 말한다.
“동물을 학대하고 성폭행하는 건 처벌받아야 할 중범죄야.”
이 말을 들은 ‘까마득한 원시 시대에서 온 듯한 그리그’는 대답한다.
“늘 일어나는 일이잖아.”
이 대사가 17페이지. 책을 더 읽어? 말어? 작가 클로디 윈징게르는 어떤 한 “남성”이 명백하게 수간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수간이 있었건 없었건, 이 단어를 듣는 것 하나만 가지고 나는 소화기 적 반발로 위산이 역류하려는 것을 감각한다. 지금 독후감을 쓰는 아침에도 같은 증상이 생기려 한다.
소피가 사랑해 마지않는 ‘예스’라는 이름의 개가 왜 걷어차여 배에 심하게 멍이 들었을까? 사람은 생각보다 잔인하다. 즐겁기 위하여 다른 목숨을 괴롭히고, 학대하고, 죽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포유류. 크고 작은 이유가 있었든, 아니면 재미를 위해서 틀림없이 어느 인간이 예스의 배를 몇 차례 걷어찼고, 생식기가 찢어지는 참혹한 상처를 냈다. 수십년, 어쩌면 한 세기 전, 이미 돌아간 내 할머니가 어린 시절에 잠자리를 잡아 배 아래부분을 잘라버리고 그곳에 풀줄기를 꽂아 다시 하늘로 날리며 시집 보내는 거라고 했듯이. 소피와 그리그, 그리고 클로디 윈징게르는 개의 생식기에 심한 상처가 난 것을 보고, 어떤 증거로 성폭행이라 확정했으며, 그 행위를 인간에 대한 소아성폭행과 연관지었을까?
음식을 먹고 치료를 받은 개 예스는 그러나 떠났다. 소피가 리옹에서 별로 의미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생태문학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자 다시 돌아왔고, 소피가 목욕을 시키고 꼼꼼하게 진드기를 잡아준 후에 함께 살기 시작했다. 소피, 그리그, 예스. 이렇게 세 생명체가 가로 세로 각 2미터짜리 대형 침대에 함께 누워.
과한 동물주의 책은 읽기 불편하다. 226~228쪽의 내용을 소개한다. 예스는 양치기 개. 당연히 보통 이상의 체구를 가지고 있으며, 무리에서 떨어진 양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몰기 위해 양의 뒤꿈치를 가볍게 물려고 하는 습성을 “인위적으로, 인간에 의하여” 물려받았다.
어느 날, 예스가 좋아서 그러는 것처럼 지나가던 등산객 커플을 따라가더니, 엄청나게 짖으면서 그 사람의 발꿈치를 물 기세로 달려들었다. 고삐 풀린 중대형 개가 어떤 모습인지 짐작하시리라. 소피가 아무리 불러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예스는 그들을 향하여 튀어 나갔다. 등산용 스틱을 들고 선글라스와 챙 달린 모자를 쓴 혼비백산한 등산객들을 쫓아. 너무 멀리 가버려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늙은 소피가 할 수 있는 한 제일 빠른 걸음으로 도착했을 때, 여자는 도요타 야리스에 올라타 있었고, 굳이 “그 여자의 애인”이라고 지칭하는 남자는 차 밖에서 한 손으로 열려 있는 트렁크 뚜껑을 잡고 있었는데, 트렁크 안에서 공포에 떠는 예스를 윽박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소피는 남자에게 겁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노인네가 나를 개보다 더 갈기갈기 찢어 놓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납게. 그랬더니 남자는 “악의에 차서” ‘나’ 소피를 비난했다. 개를 키우려면 통제를 잘 하라고. 이 미친 개를 브리가드 베르트 단속반으로 보내야 한다고. 그래서 고소장을 쓰는 데 필요할 거 같아 소피는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단다.
젊고 바쁜 커플이 오랜만에 어렵게 시간을 내 등산하려고 먼 길을 왔더니 난데없이 큼지막한 개가 마구 짖으면서 고삐 풀린 것처럼 발꿈치를 물려고 막 달려오면, 그곳이 난생 처음 가본 장소인데다가 사방 십리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어떤 마음이 드는 게 정상이었을까? 경악과 공포 아니었을까? 여자가 공포에 휩싸이는 걸 본 남자는 갑자기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기 시작했고, 지팡이를 휘둘러 미친 개, 예스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암만 생각해봐도 이런 개새끼는 단속반에 보내 살처리 하는 것이 만인의 행복을 위하는 길이어서 차 트렁크에 싣고 가려 했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피해 남녀의 입장이다. 소피, 그리그, 못된 늙은이인 작가 클로디 윈징게르는 이들, “사람” 혹은 피해자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등산 스틱을 들고 선글라스를 낀 커플이 반쯤 미친 상태이다. 읽는 사람도 설핏설핏 따라가다보면 작가의 의도에 설득당하기 마련이다. 그게 글의 힘이니까. 주차장에서 이런 꼴을 당한 젊은 등산객을 만났으면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정상적인 인간 아냐? 아니면, 적어도, 차라리, 요즘 유행하듯이:
“놀라셨어요? 괜찮아요. 우리 개는 안 무는데 괜히 지랄하셨네요.” 하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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