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예항 / 짐승들의 유희 대산세계문학총서 182
미시마 유키오 지음, 박영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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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대표적인 탐미주의적 작가 미시마 유키오. 나는 아주 어렸을 때, 70년대 초반에 집에 있던 <금각사>를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고 읽어봤고, 쉰 넘어서 <가면의 고백>을 읽었는데 그게 다였다. 무엇 때문에 극우 골통 군국주의자가 쓴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못했던 거다. 미시마 유키오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1960년대 초반, 책의 뒷면에 쓰인 걸 그대로 인용한다면 “작가적 역량이 절정에 오른” 시기에 쓴 작품임에도, 미시마는 적어도 반 세기 정도 발달장애가 있었던 것처럼 여전히 탐미주의적, 예술지상주의적이고 만일 그게 아니라면 청소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차일디시, 좋아 좋아 영어 말고 예스럽게 얘기하자면, 구상유취한 정서를 미시마 특유의 미문으로 그려내고 있다. 만일 조선이었던 시절의 김동인이 자신의 전성기에 이런 작품을 썼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만세삼창이라도 해줄 수 있지만 1960년대, 며칠 뒤면 김승옥이 <생명연습>을 발표할 시점에 이렇게 발랄 엽기적 소설을 쓰는 이유는 도대체 뭐였을까? <오후의 예항>은 발표한 뒤에 곧바로 영역하여 영미권에서 절찬리에 읽혔다고도 한다. 독자들이야 죄 없다. 미시마의 미문은, 내용이 어떻고 주장하는 바가 저떻더라도 문장 하나만 가지고 충분하게 매료시킬 수 있을 터이니. 물론 이 독자들의 범위에서 나는 좀 빼주라.


  “그는 그것(복도에 선명하게 떨어진 햇빛)을 사랑했다. 수줍게, 열렬히. 어째서 저런 창에서 떨어지는 햇빛이 좋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것은 은혜롭고 아주 거룩한 느낌이었는데, 칼로 토막 살해당한 유아의 하얀 몸처럼 마디마디 잘려져 있었다.” (<짐승들의 유희> 1장. p.200)


​  “노보루는 있는 힘껏 새끼고양이를 들어 올렸다가 목재 위에 세차게 내리쳤다. 손가락 사이에 잡혀 있던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것은 멋있었다. 그러나 손가락에는 부드러운 털의 감촉은 아직 약하게 남아 있었다. … (중략) … 노보루가 다시 잡아 올린 것, 그것이 이미 고양이가 아니었다. 반짝이는 힘이 그의 손가락 끝까지 꽉 차서, 그는 이번에는 자기의 힘이 그려내는 분명한 궤적을 따라 집어 올려 그것을 목재에 몇 번이고 내려칠 뿐이었다.” (<오후의 예항> 1부. p.65)


​  위에 인용한 문단은 19세기 자연주의 시절이나 20세기 초의 예술지상주의 혹은 세기말주의에서나 볼 수 있고 어울리는 것이지, 60년대에 이게 뭡니까. 평상시에 생각하는 게 이런 따위니까 천황, 뭐 천황? 그냥 왕이라고 해야 마땅하리라, 하여간 절대왕권을 위한 쿠데타 비슷하게 시도하다가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으니 할복을 해버린 것이지. 할복이나 제대로 했나? 배는 갈랐지만 숨이 넘어가지 않아 할복 도우미, 가이샤쿠가 옆에서 빨리 죽으라고 목을 쳐버렸고, 단번에 잘리지 않아 여러 번의 난도질 끝에 데굴데굴 구르던 미시마의 머리통, 이 가운데 대뇌, 큰골은 아직 완전한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 테고 그러면, 어쩌면, 혹시라도 여전히 살아있는 눈을 통해 머리통이 잘린 자신의 몸통을 아주 잠깐이라도 구경하고 가지는 않았을까? 아, 나는 “토막 살해당한 유아의 하얀 몸”이라든지 통나무에 새끼 고양이를 패대기쳐서 죽이는 장면 같은 건 아주 질색이다, 질색. 이런 장면을 연상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충분하게 살기 힘든 곳이라서.


​  시절에 맞든 맞지 않든 간에 인정할 것은 인정한다. 미시마 유키오의 탐미주의적 뇌 놀림. 이건 정말 대책이 없다. 미시마 흉을 보느라 벌써 지면을 많이 써버려서 <오후의 예항>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여기에 위에서 인용한 ‘구로다 노보루 黑田登’라는 열세 살의 촉법소년이 등장한다. 아버지는 노보루가 여덟 살 때 일찌감치 차마 감지 못할 눈을 감아버리고, 어머니 구로다 후사코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일본 최고급의 수입 양품점 ‘렉스’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의 놀랄 만한 수완으로 더욱 번창시켰다. 이제 막 유행하기 시작한 테니스를 클럽에서 정식으로 배워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서른네 살의 아름다운 여성. 그러나 철저하게 수절하고 있는 과부라서 거의 매일 밤 모든 옷을 벗고 전신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나신을 비춰보는 습관이 있다는 걸, 노부로는 우연히 서랍장에서 서랍을 모두 빼고 안에 들어가 장 때문에 가려져 있던 틈 사이로 훔쳐보면서 알아냈다. 아무리 미시마 유키오라고 해도 아들이 엄마의 사생활을 전부 관찰하게 만들 수는 없어서 틈으로 볼 수 있는 엄마 방의 범위를 한정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 돈 많은 미인 과부가 언젠가는 베드 씬을 한 번 벌이지 않겠느냐, 그럼 엄마의 엑스터시를 아들이 A부터 Z까지 생 라이브로 관람을 하게 만들어야겠느냐, 하는 딜레마가 있었을 터이다.

  노부로는 바다와 선박, 그리고 항해에 관한 로망이 있다. 배의 구조와 설치물에 관해서는 상당한 지식까지 가지고 있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조금 천재성까지 있을 거라고 자부심을 느끼는 소년이라서 어머니한테 배 구경을 하고 싶다고 졸랐다. 세계적인 무역항 요코하마에서 일본 최고급 양품점을 하는 유력인사인 어머니는 선박회사 전무에게 부탁을 했고, 전무는 소개장을 써주면서 화물선 라쿠요마루 선장을 찾아가라고 일러주었다. 그리하여 이틀 전, 라쿠요마루 호에 오른 모자는 마침 선장이 외출 중이라 삼십대 단단한 체력과 체격을 갖춘 스카자키 류지 이등항해사의 안내로 배 견학을 한다. 받으면 보답을 해야 하는 게 일본식이라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도 친절한 어머니인 후사코 씨는 그랜드호텔 양식당에서 류지에게 다음날 저녁 식사를 대접했고, 비프 스테이크를 대접한 김에 자신의 입술까지 주어버린 건 뭐 한창 때의 과부가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에그머니, 열세 살 먹은 노부로가 바로 옆방에서 자는 자기 집, 자기 방, 자기 침대에까지 끌어들인 거, 이건 어쩔겨? 물론 벌써 배꼽 아래 13cm에 푸른 색 모근으로부터 검정 터럭이 촘촘하게 돋고 있는 사춘기 아들이 서랍장 속에 들어가서, 부얼부얼한 가슴 털이 아래로 쪽 이어진 곳에서 류지의 “무성한 털을 뚫고 나와 자랑스러운 듯 솟아 있는 매끈매끈한 불탑”과 엄마의 맨 다리를 보고 있었다는 것은 몰랐을 테지.

  사실 노부로는 밤마다 가택연금 비슷한 “자기만의 방에서의 연금” 중이다. 여섯 명으로 된 학교에서 마리 좋은 아이들의 모임이 있다. 대장이 있고, 1호부터 5호까지 있어, 노부로는 3호로 불린다. 하루는 대장이 꼬여서 한밤중에 몰래 나가 놀다가 엄마한테 제대로 들켜 이후부터 밤마다 엄마는 방문을 밖에서 잠궈버렸다. 덕분에 노부로는 서랍장 속의 비밀을 하게 되긴 했지만. 하여간 이 또래들은 매우 혁명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바, 모든 영웅적인 것을 숭배하고, 지질한 잡것들을 타도해야 할 것으로 구분한 것. 제일 먼저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무리는 바로 아버지란 작자들하고 선생이란 새끼들이었다. 강한 자들에게는 경배하지만 위에 인용한 것처럼 새끼 고양이 같은 약하고 구질구질한 것들은 멸해야 마땅한 거다. 그리하여 새끼 고양이를 산 채로 통나무에다 패대기를 쳐 죽인 다음에 껍데기를 벗기고 배를 갈라 장기를 적출해 붉은 심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까지 구경하는 내내 조금의 죄의식도 느끼지 못할 수 있었다. 이 여섯 명의 자칭 천재들은 스스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 형법 제41조, “14세가 되지 않은 자의 행위는 이를 처벌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제 세상이 자신들은 선한 존재, 귀엽고 아름다운 존재로 알아주는 일은 불과 몇 달밖에 남지 않아 자신들의 특권을 한 번을 써봐야겠다고 진지하게, 아주 진지하게 결심하고 있으니, 이거 진짜 미시마 유키오 맞지?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나는 당신이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거 말고도 읽을 책은 넘치고 넘친다. 그러나 선택은 당신이 하는 것. 내가 주제넘게 읽어라, 읽지 마라를 권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다. 불행하게도 미시마의 탐미적이고 감각적인 문장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걸 재료로 만들어 이 책에 담은 두 편의 소설은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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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4-08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토당토 않은 작가의 정치적
행태와 말로 때문에 도무지 정
이 가지 않는 작가입니다.

그런 선입견 때문인지 작가가
추구한다는 탐미주의에 대해
서 와 닿지가 않더군요.

Falstaff 2023-04-08 14:58   좋아요 1 | URL
이 책을 낼 때까지는 군국주의를 노골적으로 옹호하지 않았는데 뒤로 갈수록 도라이로 바뀌었지요. 제 생각엔, (어떤 기준인지는 몰라도) 병약했던 청소년기, 폐결핵 진단이 오진인 것을 알면서도 시침 뚝 떼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은 과거, 이런 것들이 점점 커져 완전히 맛이 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림의 이면 을유세계문학전집 122
씨부라파 지음, 신근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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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 소설로는 두 번째 읽는 작품이다. 만일 버마 출신 중국인이면서 태국에서 대학에 다니며 농민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농민운동에 뛰어든 민퐁 호가 쓴 <아버지의 쌀알>을 태국 문학이라고 치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걸 빼면 <그림의 이면>이 처음 읽는 태국 소설이다. 태국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작가 씨부라파는 (이하 위키피디아 및 해설/연표를 참조했음) 1905년 철도청 1등 서기 쑤완 싸이쁘라딧과 쏨분 싸이쁘라딧의 맏아들 꿀랍 싸이쁘라딧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다. 청소년시절엔 부유층 자제들이 주로 다니는 데브시린 학교에 들어갔지만 대부분의 학생과 달리 1등 서기관이었던 아버지는 여섯 살 때 일찌감치 세상 하직을 해 싸이쁘라딧 가문의 맏아들이자 외아들인 꿀랍의 교육비를 위해 엄마는 재봉사가 되어 자기는 입어보지 못할 여성복만 죽어라 만들어야 했고 여동생마저 손가락을 이상하게 비틀며 포즈를 취하는 태국 전통 무용수를 해야 했다. 아직 중등학교에 재학중이던 1923년, 열여덟 살 때 신문에 ‘선언’이란 사설을 발표하면서 본명 꿀랍 싸이쁘라닷을 버리고 씨부라파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다. 근데 씨부라파 보다 꿀랍이 그래도 어감이 더 좋지 않은가? 내 귀에만 그런가? 하여간 이후에도 신문기자 등 신문newspaper인으로, 진보적 소설가로 활발한 작품생활을 하며, 당대를 대표하는 문학인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한다.

  진보 문학인답게 1952년에는 한국전쟁(에 태국이 연합군을 파병한 일)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동하다가 평화 반란죄를 범해 13년 4개월 형을 선고받고 57년 2월 불교나라 태국답게 불기 2,500년 기념으로 사면되기까지 4년 이상을 복역하고, 같은 해에 태국의 대표적 좌파 문인 자격으로 러시아혁명 4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받아 소련을 방문한다. 이듬해에는 고리키의 <어머니>를 태국어로 번역 출판도 했다. 8월엔 태국의 “문화교류진흥단”을 이끌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초청을 받아 베이징을 방문하기도 했으니 당시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에서 유행하던 우파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씨부라파는, 이왕 베이징에 간 김에 그냥 중화인민공화국, 중공으로 망명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16년 후, 그 좋은 태국의 공기만 마시다가 베이징에서 황사 섞인 스모그를 장복해서 그랬는지 폐렴과 관상동맥질환으로 사망하니 향년 69세. 하긴, 1974년에 69세면 죽어도 그리 아까운 나이는 아니었다.


​  <그림의 이면>에서 ‘그림’은 훌륭한 아마추어나 딜레탕트 수준의 화가(지먕생)이 그린 수채 풍경화로 일본의 미타게 산 근처에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들과 오솔길, 물돌물 돌물돌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걸 그린 평범한 그림으로, 주인공 놉펀이 자기 서재에 책상에 앉았을 때 등 뒤 벽에 걸어놓은 “작품”이자 결혼 축하 선물이다. 그림에 관해 조금의 감식안만 있어도 차마 돈을 주고 사게 되지 않는 그림이지만 내가 이걸 “작품”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비록 객관적 시각에 의하면 평범할지언정 놉펀의 입장에서 그림을 바라보면 이 그림의 이면에 인생이 있고 그 인생이 자신의 마음에 새겨져 있어서 만일 정면에 걸어 둔다면 신경을 몹시도 건드릴 정도이기 때문이다. 놉펀, 사람 좋다. 사람의 신경을 건드리는 그림을 앞이건 뒤건 뭐하러 걸어 둬? 눈 앞에 보이면 신경을 그것도 “몹시” 건드릴 거 같다며? 그럼 뒤에다 걸면 그림 속에서 귀신이라도 튀어나오면 어쩌려고. 나 같으면 안 건다. 작가의 인생이 놉펀의 마음에 새겨질 정도라면 더 그렇지. 뭐 좋은 기억/추억인 모양이지?

  우리의 주인공 놉펀은 현재 일본 릿교 대학에 유학중이다. 아버지는 나 같은 서민이 보자면 재계에서 무지하게 빵빵한 거물이고, 장남이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거기서 직장을 얻어 장가들어 일본인으로 살까 걱정이 되어 놉펀을 말도 몇 번 못해본 부잣집 아가씨 쁘리와 약혼시켜버렸다. 지금은 스물두 살 청년이지만 스무 살 때. 나 참. 내가 놉펀 아빠면 쁘리하고 결혼시켜 둘 다 유학시켜버리겠네. 그러면 씨부라파로 하여금 이런 소설을 쓰지 않아도 되게 할 수 있었지 않은가 말이지. 하여간 놉펀이 이제 스물두 살의 여름을 맞아, 당시 태국까지 가는 뱃삯이 보통이 아니라 도쿄 시내에서 빈둥거려야 할 때, 아버지의 친한 친구이며 평소 놉펀도 존경해 마지않던 아티깐버디 공(公)이 홀아비 생활을 마치고 두번째 장가를 들어 국왕의 증손녀인 끼라띠 여사와 도쿄로 허니문을 와, 그들의 관광 가이드 및 도쿄에서 8주 이상 묵을 숙소 임차 등을 맡기도 했다. 아티깐버리 공은 태국에서 손꼽히는 재벌 가운데 한 명이라, 비용은 얼마가 들든지 간에 하여간 자기는 호텔이 싫으니 독채 살림집을 빌리라 해서 도쿄 교외에 있고 철도와도 멀지 않은 아오야마 지역에 외관은 서양식, 실내는 다다미방으로 된, 일본식 정원으로 잘 치장한 집을, 영어를 구사할 수 있어서 보통보다 두 배는 비싼 하녀 한 명과 함께 임대해 놓았다. 이에 만족하는 아티깐버디 공. 그리고 끼라띠 여사.

  끼라띠 여사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번 대강이나마, 원문의 1/10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특징을 소개해보면, 예상외로 젊은 여성으로 눈부시게 빛나 보인다. 자그마한 하얀 꽃송이가 있는 남색 복장에 흰 모자, 그리고 하얀 신발. 통통하지만 체구가 크지는 않으며, 풍만하고 피부가 부드러워 빛이 났다. 그래, 1930년대에는 “통통하고… 풍만하고 부드러운 피부”가 미인의 척도였다. 하, 정여사 생각나네. 비단 있지? 그걸 쓰다듬을 때 느낄 수 있는 손의 감촉. 정여사 피부가 딱 그랬다는 거 아녀?

  놉펀은 끼라띠 여사를 보고 급하게 머리를 굴려보니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스물여섯이나 일곱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아티깐버디 공은 쉰 살. 무엇 때문에 이토록 젊고 싱싱하고 아름답고 귀한 가문의 여성이 쉰 살 먹은 쉰 늙은이와 결혼을 하기로 결심을 했을까? 처음엔 이게 궁금했다. 하여간 관심이 생겼다. 독자는 21세기를 살고 있어서 까질대로 까진 상태. 한 눈에 척 보고 놉펀, 얘가, 얘가 사고 한 번 치겠구나, 딱 감을 잡는다. 다만 문제는 끼라띠 여사가 왕가의 숙녀이며 거대 부를 보유한 공公의 아내로 쉽게 놉펀에게 마음을 주겠느냐, 하는 건데, 여기에 시절이 1930년대, 동남아 출신이 유교국인 일본에 와서, 이게 되겠냐, 하는 거. 어려서부터 엄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학교 대신 서양에서 온 노처녀 독선생을 모셔놓고 서양식 교육을 받은 끼라띠 여사는 서양 여인으로부터 각종 미용, 패션 잡지를 섭렵하며 젊음을 조금이라도 유지할 수 있는 관리를 받아서 겉으로만 스물여섯, 일곱이지, (어차피 조금만 더 읽으면 나오는 거니까 밝히는데) 알고 보면 서른다섯 살, 당시 기준으로는 중년 여성이었으니 우리의 놉펀과는 열세 살 차이. 그런데도 이게 되겠어? 여사와 공의 열다섯 살 차이를 심한 터울로 봤는데, 놉펀과 여사 역시 열세 살 차이니까 말이지.


​  그래도 <그림의 이면>은 연애소설이다. 내가 줄창 연애소설은 궁극적으로 이별소설이라고 주장한 거 기억하시나?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만일 정말 연애소설이라면 열다섯 살 차이는 억지 결혼이고 열세 살 차이는 자연스런 연애가 되어야 하고, 이별 또한 해야 하는데, 문제는 얼마나 독자가 앙가슴을 치게 만들 수 있는 이별을 연출하느냐,에 연애소설의 성패가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필생의 소원이 연애소설 한 편 써보고 죽는 건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뻔하기 때문에. 남녀가 (요새는 남남하고 여여도 포함해서) 만나고, 사랑하고, 점점 뜨거워지다가 몽땅 불사른 다음 이별하는 일과성이자 일방통행을 그리 쉽게 절절하게 쓸 수 있겠어? 이미 그려놓은 보드 위를 달리는 말들인데. 이 책도 그게 아쉽다. 이야기의 배경, 달달한 문장과 애절한 사연, 구성 같은 거 다 좋다. 하지만 결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연애소설이 쉬울 거 같아? 그럼 전부 셰익스피어고 괴테고 톨스토이게?

  (톨 백작의 <안나 카레리나>가 정말 명작인 건, 자식새끼, 늙은 영감 버리고 뛰쳐나온, 인류의 문학 역사상 가장 우아하게 아름다운 여인 안나가 미치게 사랑한 브론스키 백작을 결국 배 나온 대머리 술주정뱅이로 만들었잖여? 톨 백작 말고 이 비슷하게라도 끌고 간 인간이 누가 있는지 가르쳐주시면 만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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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04-06 07: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졸라 남주들도 외모는 별루에요… (만원 대신 리뷰 만개 부탁 드림)

Falstaff 2023-04-06 20:00   좋아요 0 | URL
윽. 졸라는 연애소설이 아닌 걸로..... ㅎㅎㅎ ^^;;;

유부만두 2023-04-06 20:51   좋아요 1 | URL
아… 제겐 “제르미날”도 연애소설이었어요;;;

다락방 2023-04-06 0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전에 잠자냥 님의 리뷰 읽고 이 책 사두었는데 골드문트 님의 이 리뷰를 읽으니 사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이천번 드네요. 으하하하하. 주말엔 이 책 읽어야겠어요. 와 너무 쫄깃쫄깃 재미있을 것 같아요!!

Falstaff 2023-04-06 20:01   좋아요 0 | URL
거의 백년 전 작품이니 넘 기대를 많이 하시지는 마세요. 전 러브씬 안 나오는 연애소설은 ㅋㅋㅋ 아주 조금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다락방 2023-04-06 20:50   좋아요 0 | URL
러브씬 제대로 수시로 나올 설정인데, 아니라구요?????

Falstaff 2023-04-06 21:20   좋아요 0 | URL
넵. 이게 20세기 초 아시아 작가에 의하여 쓰여진 작품입니다. 러브씬이 나오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냥 입술 박치기 한 번 나옵니다. 설왕설래舌往舌來도 없습니다.

yamoo 2023-04-06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니까 톨 백작의 <안나>가 연애소설의 원탑이라는 야그군요! 집에 판본이 2개인데, 일단 눈에 띄는 범우사본으로 일독하야겠습니다! 마지막 괄호 문장이 아주 강력하군요! ㅎㅎ

Falstaff 2023-04-06 20:03   좋아요 0 | URL
옙. <안나....>를 따라올 작품이 동서고금을 통해 몇 개나 있겠습니까. 전 오랜 세월 ˝D > T˝ 즉 도스토옙스키 > 톨스토이 였는데요, 이게 점점 바뀌고 있는 거 같습니다. ㅎㅎ
 
리먼 트릴로지
스테파노 마시니 지음, 조원정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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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테파노 마시니는 1975년에 플로렌스에서 태어난 소설가, 극작가, 에세이스트인데,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작품이 지금 방금 내가 읽기를 끝낸 <리먼 트릴로지>, 즉 <리먼 삼부작>이라고 한다. 마시니는 플로렌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밀라노의 피콜로 극장, 플로렌스의 마치오 뮤지컬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리먼 트릴로지>를 발표하고 이게 영국과 브로드웨이에서 대박이 나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은 끝에 미국 브로드웨이 연극상인 토니 최우수 연극상까지 수상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영미 외에도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스위스, 스페인, 그리스, 아르헨티나, 알제리, 멕시코. 페루, 러시아, 그리고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무대에도 올려졌다고 위키피디아에 쓰여 있다. 우리나라에는 서울예술대학 공연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이탈리아 출신의 안드레아 파치오토 교수가 희곡 작품집 출간에 정성을 쏟고 있는 출판사 지식을위한지식(지만지)에 출판을 제안해 이를 받아들여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 등록 공인 번역사 조원정의 번역으로, ‘현대’ 이탈리아 극작가의 작품으로는 아마도 첫 출판물이라고 한다. 파치오토 교수는 책의 해설과 작가 소개도 썼다.


​  그러나 이 책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 즉 눈에 뜨일 정도를 넘어서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건 2015년에 밀라노 피콜로 극장에서 이 작품을 공연할 때 연출을 맡은 연출가 루카 론코니가 쓴 서문이었다. 책을 읽기 전에 정말 한 번 휘리릭 열어본 적이 있는데, 분명히 희곡, 드라마라고 알고 있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아서, 이거 또 문제작, 읽어내기는커녕 읽어갈수록 뇌가 헝클어지거나 심하면 꼬여버려 최악의 경우에 뇌졸중이 올 정도로 부조리하거나 형이상학적 작품 아닌가 싶어 약간 쫄아 있었다는 것을 먼저 고백한다. 이런 상태에서 진짜로 연출을 한 연출가의 허리상학적 서문을 읽는 일은 독자로 하여금 더욱 야코가 죽게 만드는 일이었다. 요즘 진보적인 희곡/연극은 극작가보다 연출가와 드라마트루기(또는 드라마터지)의 비중이 더욱 중요해지는 거 같은데, 이런 경향의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이 <리먼 트릴로지> 아니겠나 싶다. 그러니까 희곡을 놓고 이것을 어떻게 연출할 것인지, 어떤 상징을 차용, 응용 또는 창조할 것인지는 당연히 연출가의 몫이다. 연출가 론코니는 자신의 연출 경향을 매우 지적으로, 독자의 기가 죽을 정도로 현학적인 표현을 구사했다. 그랬을 뿐이다. <리먼 트릴로지>는 2008년 숨이 끊어진 미국 4위의 글로벌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 사의 탄생부터 쇠망까지를 조망한 작품으로, 이를 “흑인 노예로 유지되던 앨라배마의 ‘라인의 황금’이 결국 신성을 지닌 경제 지수가 지배하던 월스트리트의 황혼에 도달하기까지”의 바그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구라를 치니, 거 참, 입담 한 번 대단하다.


​  자, 현대, 근대도 아니고 현대 이탈리아의 극작이라고 나처럼 쫄지 마시라. 작품의 특징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희곡이며, 따라서 분명히 등장인물이 있고 특정 대사를 하긴 하다. 하지만 등장인물을 특정하지 않는다. 즉 누가 이런 대사를 하라는 것도 없고, 특별한 지문도 없다. 무대에 대한 묘사도 당연히 생략하고 오히려 소설과 드라마 사이의 경계가 달군 프라이 팬 위의 버터처럼 스스륵 녹아버렸다. 극작가 스테파노 마시니는, 내가 이탈리아어를 아는 것도 아니고, 원본을 본 것도 아니라, 이게 운문인지 산문인지도 구별이 가지 않는데, 그냥 마치 자유시를 쓰듯이 이야기를 툭툭 할 뿐이다. 한 스토리와 여러 명의 등장인물을 가지고 누구에게 어떤 대사를 시킬 것인지는 전적으로 (드라마터지의 사용여하를 포함해서) 연출가가 결정할 사항이다. 또 모르지, 연출가가 배우들을 다 모아놓고 스터디를 하는 수도 있으니. 그게 더 좋은 거 같기는 하지만 론코니 같이 콧대가 높아 보이는 먹물 연출가 같은 경우에 자만심에 기스 날까봐 그냥 고집대로 할 수도 있고. 정말이다. 자유시 같은 스토리 말고 아무것도 없다. 이러하니 그냥 스토리를 말해야 할밖에.

  2008년에 미국에서 터진 리먼 브라더스 사태는 이 투자은행의 부채 6,130억 달러가 문제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충격이 크긴 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하여 조금 덜 쇼크를 먹었다. 그건 이 사태가 터지기 십년 전에 외환위기를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어서 외화보유에 각별한 신경을 쓴 기업과 정부가 상대적으로 건실한 재무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기억한다. 혹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지만 십년 전에 얻어터진 악몽이 너무 커서 뭐 이 정도 쯤이야, 하고 넘겼을지도 모르고. 그것도 아니면 당시 내가 잘 나가던 반도체 분야에서 빵을 빌어먹고 있어서 충격 자체를 느끼는 감이 진짜로 별로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원래 미국 내의 부동산, 주로 집값의 거품이 꺼지면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관련해 수많은 미국 중산층 시민이 집도 절도 없이 홈리스나 텐트족으로 대책 없이 추락했으며, 이럴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대규모 정리해고까지 당해 졸지에 극빈층으로 떨어진 실제 장면이 당시 외신을 타고 TV를 통해 시청할 수도 있었다.

  스테파노 마시니는 이런 불행의 방아쇠를 당긴 리먼 브라더스의 탄생부터 추적하기 시작한다. 리먼 브라더스는 독일 바이에른의 림파르에서 출발해 뉴욕에 도착한 헤이움 레만 Heium Lehmann과 그의 두 형제 이매뉴얼과 메이어, 이렇게 삼형제가 앨라배마에서 연 작은 포목점에서 시작한다. 19세기 초중반에 외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은 미국 세관에서 관원이 부르기 쉽게 이름까지 멋대로 바꾸는 바람에 헤이움 레만은 헨리 리먼 Henry Lehman으로 되고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대인의 형제관계도 저 야곱의 아들 열두 형제들에서 볼 수 있듯이 개과 동물과 비슷해서 장자, 둘째, 막내 이렇게 차근차근 서열이 정해져 있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큰형 헨리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머리, 둘째 이매뉴얼은 실행하는 팔, 막내 메이어는 이 둘을 중재하는 식물인 감자로 비교한다. 왜 감자가 둘을 중재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여튼 막내 메이어가 머리 하나는 팽팽 잘 돌아가서 초기 리먼 브라더스의 이익과 사업 번창을 위해 중요한 아이디어를 많이 낸다. 그의 아이디어로 포목점은 농기구와 씨앗 같은 것도 파는 만물상이 되었다가 때마침 닥친 대화재를 기점으로 목화 중개업으로 도약한다. 게다가 메이어가 장가를 잘 들어 당시 미국 남부의 시골 부자집엔 피아노를 연주하는 딸이 하나 이상은 꼭 있던 때인데 하필이면 거의 전문 피아니스트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아가씨와 결혼해 아내 덕에 목화를 대규모로 매집하는 놀라운 영업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의 모든 물산과 돈이 모이는 곳이 뉴욕의 거래소. 장남 헨리는 아깝게 황열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고, 둘째 이매뉴얼이 뉴욕 사무소에서 목화 판매를, 셋째 메이어가 앨라배마에서 목화 수집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다가 합중국 남부에 의하여 분리독립전쟁이 발발해 목화 중개업은 사양길에 접어든다. 부자가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버틴 형제는 종전 후 메이어가 앨라배마 주지사를 만나 자신이 앨라배마를 다시 복구할 테니 자금을 대라고 배팅하는 데 성공해 드디어 유대인의 혈관 속에 유장하게 흐르는 돈놀이, 좋은 말로 금융업 진출의 기반을 닦는다. 이후 뉴욕에서 형제가 만나고, 리먼 브라더스 은행을 설립해 큰 규모로 번성시킨다. 위에서 말했다. 전통적 삶을 유지하는 유대인 형제 간에는 다툼도 없이. 이들은 나이를 먹고, 동생이 먼저 죽고, 형도 죽어서 가족은행은 2세 필립이 회장을 맡는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철도에 투자해 더 큰 돈을 모은 리먼 브라더스는 이후에도 유정油井, 석탄, 철강 등 가리는 것 없이 다양한 투자로 더욱 몸집을 불린다. 세월은 흐르고 1세대에 이어 2세대, 3세대까지 몽땅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드디어 리먼이란 이름을 쓰지 않는 리먼 브라더스의 회장이 자리에 몇 번 더 앉은 다음에 충격적인 리먼 브라더스의 서브모기지 사태가 벌어질 때까지.


​  재미는 있지만 공연하는 데 다섯 시간 이상이 걸리는 대작이란다. 그리하여 희곡 한 편이 본문만 무려 574쪽 분량이다. 글 자체가 자유시 같다고 했으니 글자 수로 따지면 그리 많은 분량이 아니라서 읽는데 부담이 되지는 않지만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나 정도는 어림없고 연극이나 극작 공부를 좀 한 탄탄한 내공을 가진 사람이면 좋지 않을까 싶다. 이런 작품을 선뜻 출판한 지만지 출판사도 대단한다. 번역의 수준은 내가 모르지만, 우리말로 바꾼 번역문 또한 매끄러워 까탈 잡을 일이 없다. 하여튼 이 작품이 현대 이탈리아 희곡 가운데 처음이라니 <리먼 트릴로지>를 시작으로 앞으로 다양한 이탈리아 희곡이 번역 출간되었으면 좋겠다. 이탈리아 영화는 자주 본 반면 희곡/연극은 거의 없었다는 걸 감안하면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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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시마 다케오 단편집
아리시마 다케오 지음, 류리수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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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유력 일간지인 아사히 신문은 지난 천 년 동안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문인으로 아리시마 다케오를 선정한 적이 있다. 나는 이이의 작품 가운데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대산세계문학총서 91번, <어떤 여자> 만 읽었는데, 아사히 신문이 무슨 마음으로 “천 년” 역사의 일본 문학 가운데 아리시마를 최고의 문인으로 선정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여자>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지만 21세기에 읽기에는 좀 심한 뽕짝기가 풍겼기 때문이다. 아, 물론 재미있는 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만 “천년 역사 가운데 최고”라는 “으마으마한” 계관을 쓰기엔 좀 그렇다는 뜻. 일본 문학이 11세기에 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장편소설이라고 주장하는 <겐지 이야기>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천 년 역사라는 건 인정하겠지만 에이, 아리시마라니 좀 과했다 싶었다. (천년 가운데 최고의 한 명인 줄 알았는데 글을 고치는 지금, 더 검색해보니까 ‘가장 뛰어난’ 문인이 무지하게 많더라. 저널리즘이 뭐 다 그렇지.)

  《아리시마 다케오 단편집》이 새로 나온 건 알고 있었다. 근데 불과 3년 전에 읽었지만 스토리가 거의 생각나지 않는 <어떤 여자>의 지은이라는 걸 기억하고는 백수가 내 돈으로 사서 읽기엔 무리라고 생각해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해서 방금 전에 다 읽었다. 마음에 들었다. 본문만 352 페이지. 하지만 딱 세 작품이다. 순서대로 <사랑을 선언하다>가 176쪽, <태어나려는 고뇌>는 일본 축마서방筑摩書房에서 낸 《아리시마 다케오 전집》에 장편소설로 분류되었다고 했으나 앞에 실린 작품보다 분량이 약간 적어 104쪽, 마지막 <카인의 후예>는 72쪽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단편소설이라고 읽는 것과 비교하면 분량이 만만하지 않고, 그래서 단편으로 치면 좀 더 복잡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읽기 전에 세 작품이 차례로 1915년, 1918년, 1917년에 발표한 점을 감안하는 것이 좋다. 즉 지금부터 한 세기 전의 동아시아 지역에서 쓰인 작품이라는 것. 당시에 아무리 탈아입구를 주창했고 심지어 유럽의 강국 러시아와 한 판 맞짱을 떠서 이긴 일본이라고 하더라도 숨막히게 고루한 의식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물론 아리시마 다케오의 의식은 당시 일본의 일반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 아리시마는 도쿄에서 대장성(지금의 재무성)의 관료 생활을 한 아버지, 요코하마 영화학교를 졸업한 신여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요코하마 세관장으로 직을 옮기자 그곳에서 소년 시절에 미국인 목사 가정에서 영어를 사용하며 지내기도 했다. 귀족 자제들이 다니던 학교에선 늘 우등을 했고, 외가와 연이 있는 삿포로 농학교, 현재의 홋카이도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기독교 세례, 군 복무를 마치고 도미, 해버포드와 하버드에서도 공부를 했으니 20세기 초반에서는 일본이라고 해도 대단한 교육을 받은 셈이다.

  아리시마는 귀국해서 소설을 쓰는 한편 문학활동에도 열심이었지만 (제국시절이니까)신민들이 놀라 자빠질 정도로 정말 열심이었던 것은 연애사였다. 그것도 남편이 있는 15세 연상의 여기자 하타노 아키코. 앞 뒤 다 제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이들은 가나자와 시에 있는 별장으로 떠나 마지막 밤의 비극적이지만 치명적으로 환상적인 몸의 의식을 치룬 후, 두 명 다 대들보에 목매달고 만다. 그리고 먼 훗날 의사 출신 소설가 와타나베 준이치는 이 사건을 기념해 유부남과 유부녀가 마지막 날 정사 도중 시안화칼륨, 즉 청산가리를 탄 포도주를 입에 머금고 상대의 입으로 전해주어 완벽하게 결합한 상태에서 자살로 끝나는 소설 <실낙원>을 쓰게 한다. (이 책이 일본식으로 되게 야~하고 재미나지만 지금은 절판이다. 어머나, 세상에. 도서관엔 있다, 있어!) 당시 일제에 의하여 강점당하고 있던 조선에서는 윤심덕이 관부연락선 위에서 연인과 함께 투신한 사건이 이와 관련이 있다고들 하는 모양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관심없다.


​  먼저 읽은 <어떤 여자>, 그리고 아리시마의 연애담을 미루어 보면, 이이의 초기작이며 원제는 그냥 <선언>인 <사랑을 선언하다>가 가장 아리시마답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나처럼 꼴랑 한 작품 읽고 거기에 작가의 바이오 정도만 훑은 다음 작풍作風이라고 책임감 없이 말할 수 있는 아마추어라면. <선언>은 1912년 9월에서 시작해 1914년 2월까지 A와 B사이에 오고 간 서간들을 모은 서간체 소설이다. 당시 일본의 여성 이름은 주로 아들 자子자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고, 일본말로 ‘코’라고 발음해 작품에 Y코 라는 여성이 자주 거론된다. 그리고 작품 말미에 Y코 양의 수기가 실려 있다. 그렇게 서른일곱 통의 편지와 Y코 양의 수기로 된 소설. 왜 우리말 제목을 사랑을 “선언”하다, 라고 했을까? 누가 누구한테 누구를 사랑한다고 선언했을까? 이것 일러드리지 못한다. 결론이라서. 다만 작품을 쓰고 벌써 한 세기 이상이 지났으니 조금 까진 독자들은 초반부터 어떤 결말이 준비되어 있는지 뻔하게 눈치챌 수 있어서 아쉬웠다. 물론 당시의 윤리를 가진 일본(또는 식민지 조선) 독자들이라면 꽤나 충격적인 결말이라고 열광할 수 있었겠지만, 더 이상은 아니라는 게, 거 참, 시간이 무섭기도 하고 뭐 그렇다.

  A는 신체 건강하고 매사 긍정적인 현재적 인물. B는 없는 집안에 고학으로 대학을 다녔는데 폐결핵에 걸려 당분간 시오바라라는 곳에 가서 학업을 중단하고 요양을 하는 중이다. A가 먼저 절친 가운데서도 베프인 B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두 명 다 생물학을 전공하는 과학도다. 혈기 왕성하고 욕망 충천한 청춘들이라 편지는 몇 번 지날 필요 없이 당연하게 연애 문제로 접어들고, A는 여덟 살 때부터 옆집에 사는 신혼부부의 새댁에게 상당한 정도로 집착하면서 여성을 향한 갈망이 시작되었으며, 열두 살 때는 누이동생이 자기 친구와 친구의 언니를 집에 데려온 적이 있었는데 그만 누이 친구 언니한테 꽂힌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지금은 얼마 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홋카이도 노보리베츠 온천에 가서 완고한 할아버지와 함께 온 고바야시 성姓을 가진 작은 사슴 같은 우아하고 연약해 보이는 소녀한테 홀랑 빠졌다고 한다. 도쿄의 고이시카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 사실 지금은 학교에 나가지도 않고 여학생들 등하교 시간에 맞춰 여학교(들) 주변을 어슬렁대며 쉼 없이 눈알을 굴리고 있었단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나가기 시작한 교회에서 문제의 여학생을 발견했다고 하니, B는 자신의 기독교 교적이 있는 교회다, 내가 도쿄에 가겠으니 여비를 보내라(B는 가난한 고학생)는 소식과 함께 정말로 도쿄로 와서, 무려 여학생을 A에게 소개를 해주니 이이가 바로 여주인공 Y코 양이다.

  문학작품이나 음악, 연극 같은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연애는 대개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는 속도라서 이로부터 일년 이내에 A는 Y코 양과 약혼을 하게 된다. 때는 20세기 초. 아무리 약혼했다고 해도 이들은 서로의 맨몸을 본 상태가 아니다. 이 정도가 지난 후 A의 고향 센다이에선 잘 나가는 사업체를 운영하던 A의 아버지가 중환에 걸리고 결국 세상을 뜨는데, 알고 보니 사업체도 이미 거덜이 났고, 비밀리에 제분소 하나만 예전 하인의 명의로 남아 있어서, A는 학업도 때려치우고 센다이에 내려와 제분소 운영과 어머니와 누이동생 N코 양의 부양에 힘을 쏟아야 했다. 반면에 학업에 뜻이 있는 B는 병세가 호전되어 요양 중에 쓴 유전학 관련 논문 여섯 편을 가지고 도쿄의 학교로 돌아가, A와 목사의 뜻을 따라 Y코 양의 집, 코바야시 가에서 머물기로 한다. 이후에도 길고 긴 편지 왕래가 계속되는데, 여기까지만 이야기해도 어떤 결말이 나올지 다 눈치 채셨지?


​  <태어나려는 고뇌>는 일본판 <데미안>이라고나 할까? 새는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기 위해 별 지랄을 다 한다. 그럼 자기만의 방과 연수 5백 파운드가 없지만, 자질이 무척이나 훌륭한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질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고 있으며,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받지 못한 예술가 지망생이 알 껍데기를 까고 예술가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용기가 있어야지 뭐. 세상에 뛰어나고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어도 평생의 의무, 즉 먹고 살고 부양하기 위한 의무 때문에 자질을 펴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무수한 사람들의 대표 선수 한 명을 소개하는 작품이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세상 사는데 빵이 먼저 아냐? 예술이 먼저인 사람은 빵을 벌어다줄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거나, 더 쉬운 방법, 부자 할아버지나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거나 해라. 괜히 천분의 일의 확률만 가지고 예술합네, 하면서 평생 궁상떨지 말고. 얼마 살지 않았지만 엄혹한 세상엔 말이지, 무엇보다, 빵이 먼저더라.

  마지막 <카인의 후예>는 다분히 자연주의적이다. “독사는 칵 죽여버려야 해.” 하는 우리나라의 <카인의 후예>하고는 다르다. <태어나려는 고뇌>에서와 마찬가지로 홋카이도의 무자비한 눈 폭풍을 배경으로 못 배우고 가난하지만 완력 하나는 죽여주는 거친 사내의 거친 삶이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어 냈다.


​  아리시마 다케오 속에는, 작품을 쓰고 벌써 백 년 이상이 지난 상태에서, 아직도 찬란한 것이 문장이다. 문장과 문장을 엮어 한 단락을 만들어 내는데, 이 단락 또는 문단이야말로 작가들이 꼬불쳐둘 수 없는 지문과 같은 것. 이 섬세함을 어찌할꼬. 물론 읽는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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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4-01 0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 듣는 작가인데 이렇게 좋은 집안에 앞날이 창창한 작가가 사랑 때문에 세상을 뜨다니 저로서는 참 이해가 안가네요. 😓

Falstaff 2023-04-01 08:47   좋아요 2 | URL
에구.... 술몸살이 장하게 나서 한 보름 끙끙 앓다가 이제 좀 회복됐나 싶어 한 10km 좀 넘게 뛰고 왔더니 삭신이 ㅋㅋㅋ 발에도 물집이 큼지막하게 잡히고 그렇네요. (흠. 운동화 바꿀 때가 된 거야!)
뭐 연애지상주의지요. 그럴 수 있고 실제로 그러긴 했는데 좋아 보이지는 않죠? 저도 그렇더라고요.

stella.K 2023-04-01 11: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황순원이 이분의 영향을 받았을까요? 카인의 후예는 황순원 표인 줄 알았는디...
이 작가 읽어보고 싶네요.
이제 지만지 책 비싸다고 해야 다른 책값이 거의 비등하게 올랐으니 더러는 사서 볼 수도 있겠다 싶네요. 지만지가 이대로만 있어준다면. ㅋ
근데 문트님 건강하시네요.
10킬로를 뛰시다니. 저는 지난 주 토욜날 모임에 갔다왔는데 4천 몇보 걸었다고 나오더군요. 그날이 가장 많이 걸었던 날이었을 겁니다. 어제도 나갔다 들어왔더니 다리가...😆

Falstaff 2023-04-01 11:38   좋아요 3 | URL
황선생이 당연히 아리시마의 <카인의 후예>를 읽었을 겁니다. 제목을 지을 때, 일본과 교류가 완전히 없었을 당시라서 아리시마의 작품을 염두에 두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황선생과 아리시마의 작풍도 완전히 다르고 작풍도 거의 반대편에 있잖아요.
ㅎㅎㅎ 은퇴 전까지는 몸이 엉망이었습니다. 완전 D 형이었습지요. 이젠 좀 괜찮고요, 못 입고 걸어놓기만 한 옷들이 전부 맞아서 길 가다가 마넌짜리 주운 기분이 듭니다.
 
시녀들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 지음, 김재선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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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5년 반 전에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 9번,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의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 어느 계단의 이야기》를 정말 흥미롭게 읽고(생각할수록 기막힌 작품이다!) 그의 다른 작품이 번역 출판된 것이 없다는 게 속이 상할 정도로 안타까웠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기다리던 부에로의 다른 책이 2022년 12월 말에 드디어 책가게에 깔려 내 눈에 띄었다. 기다리는 동안, 하, 세월 진짜 빨라, 어느새 은퇴를 한 나는 구입해 내 책장에 꽂아놓는 대신 얼른 동네 도서관에 (아내 이름으로)희망도서 신청을 하고, 책이 들어왔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자마자 득달같이 달려가 (중간에 배고파 천 원짜리 육개장 맛 컵쌀국수 하나 먹은 거 빼고) 그 자리에서 한 방에 읽은 다음, 지금 개가실에 붙은 PC에 앉아 있다. 참 좋은 세상이다.

  대산총서 독후감에도 썼듯이 1916년 스페인 과달라하라에서 태어난 부에로는 1934년의 내전 때 인민전선에 가담했다가 종전 후 팔랑헤 일당들에게 사형선고를 받았다. 공화파 입장에서도 전쟁 끝났을 때는 나름대로 복수심에 불타 인민전선 쪽 가담자들에게 마구 사형을 선고했겠지만 그 많은 사람들을 진짜로 다 죽이면 스페인 사람들의 국민 단백질, 돼지는 누가 키우고, 걔네들 안 먹는 삼겹살은 누가 한국으로 수출하나 싶어, 집행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여덟 달 정도가 지나면 종신형으로 감형, 다시 몇 년 후엔 슬그머니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진짜로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부에로의 아버지와 친형도 이때 총살당해 죽었다.

  그러나 그건 나중 일이고 부에로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와 글쓰기에 남달랐지만 그것보다 그림 그리기에 더 남달랐다고 한다. 가족들 모두 마드리드로 이사를 하고 귀여운 막둥이는 화가가 되기 위해 베야스 아르테스 학교에 들어간 때가 1934년. 마침내 꿈을 이루기 위한 첫 날갯짓을 막 하려던 참에 전쟁의 참화 속으로 끌려들어간 꼴이다. 며칠 전 독후감을 쓴 <열차는 정확했다>의 하인리히 뵐과 대단히 유사한 경우. 내전이 끝나고 근 6년여를 여러 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감방 안에서도 동료들의 초상, 정식 초상은 아니고 그저 캐리커쳐 수준 아니었을까 싶은데 하여간 그런 것들을 그려주면서 세월을 죽였을 정도였단다. 왜 이 양반의 미술 취향에 관해 말을 길게 하느냐 하면, 지금 읽은 책의 제목 <시녀들>이고, 책 좀 읽는 분께서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를 휙 떠올릴 지 모르겠는데, 여기서 말하는 “시녀들”은 1599년에 나서 1660년에 세상 뜬 스페인의 화가 디에고 로드리게스 다 실바 이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 Las Meninas>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시면, 아, 이거로구나, 라고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벨라스케스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내전 동안 연극을 포함해 실력있는 문화 예술 관계자들은 거의 대부분 이베리아 반도를 떠버리는 바람에 스페인은 이후 한동안 문화적 공백기를 맞아야 했단다. 이때 혜성같이 등장한 인물이 바로 오늘의 극작가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 그는 1947년에 <어느 계단의 이야기>를 발표하고 로페 데 베가 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연극으로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내가 읽기에는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가 미세하게 더 좋았지만 스페인에선 <…계단 …>이 먼저 성공을 하고 이어서 데뷔작인 <…어둠 속에서>가 알려졌단다. 하여간 초기작의 성공 이후에 이름이 나고, 벨라스케스 서거 3백년을 맞아 한때 화가 지망생이기도 했던 바에로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벨라스케스의 진짜 성격과 행동은 다음으로 하고, 그를 최고의 정의파로 다시 각색한 작품을 만들었으니 이게 <시녀들>이다.


​  역자 김재선이 “학회지에 실린 논문을 일부 요약하고 인용한” 내용에 따르면, 실제의 벨라스케스는 자신의 노예가 그림 기술을 익히려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고용인의 급여를 착복하기도 했고, 권력에 무한하게 아부해가면서 최고의 명예 가운데 하나인 산티아고 기사단 단원이 되고자 안달복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작품에서는 자기 노예에게 그림 기술을 알려주고, 왕을 통하여 자유인이 되게 했으며, 옛날 옛적 자신의 그림 <이솝>의 모델이 되어 준 늙은 페드로를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게 보살피려고 하며, 산티아고 기사단이 되는 것도 왕이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보답해준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럼 이게 뭐야? 이거 허위사실 적시, 즉 범죄행위 아냐? 아니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에로는 벨라스케스의 사망 3백년을 기념해 창작물에 관한 시각, 아름다움을 보는 미감, 인간 본성의 악함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지 벨라스케스가 진짜로 선하고, 냉정하고, 정의롭고, 속화되지 않은 예술혼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스페인 판 용비어천가를 쓴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2부로 되어 있다. 1부를 이끄는 것은 스페인 궁정의 사치와 위선과 질투를 포함한 음모, 그리고 헛된 짝사랑과 진실한 배우자(벨라스케스)를 향한 쓸데없는 투기 같은 것으로 꽉 메워져 있어 좀 지루할 수 있는데 2부로 넘어가면 진짜 본론이 등장해 흥미진진, 절정과 결말을 향한 행진을 시작한다. 모든 것은, 연극이니까 당연하겠지만, 오직 하나, 아름다움의 분별과 정의와 정직을 위해 복무한다. 그리고 이런 미덕이 밝혀지는 곳은 고깔모자를 쓰고 기둥에 묶인 채 화형에 처해 죽느냐, 스페인 땅에서 추방되느냐, 아니면 서양식 능지처참인 환형에 처해지느냐의 기로에 선, 이름도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종교재판 법정에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이 극작을 법정 드라마라고 해도 별 무리는 없을 터.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역사상 최고의 화가이고 고야가 나오긴 전까지, 물론 고야가 등장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어깨를 견줄 경쟁자가 없을 스페인 미술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적 인물이다. 당연히 궁중화가였으며, 궁중화가라도 같은 궁중화가가 아니라 왕을 위한 그림만 그리는 왕의 화가였다. 잘 나가니 좋겠다고? 천만의 말씀. 내 독후감에 수없이 썼다시피 밖에서 보기에 아무리 유복한 인간이라도 한 인생을 행복하게 보내기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보다 어렵다. 그는 같은 궁정화가이자 자신보다 선배 화가, 즉 벨라스케스가 궁정화가가 됨으로써 최고의 자리에서 밀려버리고 수치스럽게도 자신도 모르는 채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 본 ‘부분(색의 사용)’을 모사해 마치 자신의 창작물인 것처럼 스스로도 착각하고 있던 앙헬로 나르디에게 질투를 받으며, 나라가 어떻게 되든 백성을 갈취해 왕과 자신의 부만 쌓으면 그만인 후작은 왕이 일개 화백을 총애해 식부장관의 자리에 오른 벨라스케스를 시기한다. 그가 식부장관에 오르긴 했는데 같은 시기에 식부장관직을 희망했던 사촌 호세 니에토 벨라스케스는 디에고만 사라져주면 장관 자리가 자기한테 올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으며, 공주의 시녀 가운데 한 명인 도냐 마르셀라 데 우요아는 벨라스케스는 전혀, 전혀 관심이 없건만 자기 혼자 열라 짝사랑에 빠졌다가 그게 어긋나버리자 거꾸로 그를 구렁텅이에 빠뜨려 복수하고자 한다. 이런 삶이 행복허겄어? 사는 게 다 그렇지.

  게다가 먼 과거에 자신의 모델이 되어준 페드로 브리오네스는, 그림 속에 담긴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있던 천민 출신인데, 하인 생활을 하다가 주인 대신 도둑의 누명을 써 8년 동안 노예선에서 노를 젓는 일을 하기도 하고, 풀려난 후엔 군에 입대해 플랑드르 전쟁에 나갔다가 자기 부하들이 연대장한테 부당한 일을 당하자 격분해 결투를 신청해 상관을 살해해 수십 년 동안 도피생활을 한 반쯤 맹인이기도 하다. 이런 온갖 안 좋은 상황에 처한 벨라스케스라고 읽는 “진정한 예술인”은 자신을 향해 노골적으로 뻗어 오는 폭력적 음모에 맞서 당당하게 쌍권총을 뽑아드니,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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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3-30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부예로 바예호 새 책이 나왔군요! 이런이런! 사야지! 하고 가격 눌렀다가 깜놀.......
저도 도서관을 이용하겠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

Falstaff 2023-03-30 13:18   좋아요 1 | URL
ㅎㅎ 못보셨는지 알았습니다. 눈에 띄었으면 누구보다도 먼저 읽으셨을 분인데 싶었거든요. ㅋㅋㅋ

잠자냥 2023-04-04 10:52   좋아요 1 | URL
<시녀들>로 땡투 받으셨을걸요. 도서관에 신청하고 기다리기 답답해서 전자책으로 질렀습니다. 전자책은 그나마 좀 싸다능...ㅋㅋㅋㅋ

Falstaff 2023-04-04 13:02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