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하여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3
율리 체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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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생 범띠 작가이자 법학박사인 율리 체는 도무지 가리는 소설 장르가 없다. SF, 범죄, 스릴러 등을 망라하더니, 이젠 코로나 19를 경험하면서 현 시점, 사회적 거리 두기, 마스크, 봉쇄정책 등 갇힌 시스템 속에서 사람에 대한 작가적 탐구를 시도했다. 그래서 제목 자체가 “인간에 대하여”일 수 있었겠지. 이 작품은 출간했을 때부터 꼭 사서 읽겠다고 마음먹었다가 잠깐 깜박 잊었는데 갑자기 떠올라 (화들짝 놀라서) 먼 도서관에 상호 대차 신청해 읽었다. 역시 율리 체다. 이름만 가지고도 주저 없이 책을 선택할 수 있는 작가 군 가운데 한 명.

  율리 체는 워낙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쓰는 작가라서 책을 진짜로 읽기 전에 이게 어떤 내용일 것이라는 짐작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여간 나는 그랬다.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을 쓴 작가가 <어떤 소송>은 그렇다고 쳐도, <새해>나 <잠수 한계 시간> 같은 작품도 쓸 수 있다는 것이 한 편으로는 신기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뭔가 신선한 배신감 같은 걸 경험할 수도 있다. 한 번 더 말하자면, 하여간 나는 그랬다. 이제는 율리 체, 하면 일단 아무 예단도 없이 그냥 첫 페이지를 열려고 하는데, 참 나, 그러고 보니 동화책 한 권 말고는 이제 번역 출간한 책 다섯 권을 다 읽어버렸지 뭐야.


​  독일의 뮌스터와 베를린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 대표 신경외과 전문의이자 대학 교수인 요하임 코르프마허 선생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내 없는 홀아비로 딸 도라와 아들 악셀을 성인이 되도록 키웠다. 아들 악셀은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을 통과했으면서도 하는 일이라고는 소파에 누워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뿐 도무지 생산적인 활동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무리 생각 없이 사는 인간이라도 구르는 재주 하나는 있는 법이라 조세법 전문 변호사 크리스티네라는 여성을 꼬드겨 결혼까지 해 쌍둥이를 낳아, 아내는 집안의 가장으로 모든 경제적 책임을 지고, 남편 악셀은 알고 보니 자신의 진짜 주특기인 주부(여성을 일컫는 주부主婦 말고 지아비 부를 써서 주부主夫라 쓰자) 노릇과 유아 돌보기를 아주 아주 훌륭하게,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살고 있다. 악셀의 누나 도라는 이 책의 주인공으로 대학에 다니다가 뮌스터에 있는 작은 광고 에이전시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일하면서 자신이 이 업계에 재주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일단 학교부터 때려치웠다. 견습생 하다가 인턴을 거쳐 순식간에 주니어 카피라이터로 채용되었으니 간이 부을 만도 하지. 이후 함부르크에 있는 카피라이터 양성학교 1년 과정을 마치고 여러 대형 광고 에이전시에서 경력을 쌓은 후, 급여 삭감을 무릅쓰고 주로 지속 가능 상품과 사회 생태적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기업을 지원하는 SUS-Y으로 옮겼다.

  오래 전에 사귄 첫 애인 필리프는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사회학 교수였는데 이 잡것이 양다리를 걸치는 바람에 헤어졌고, 지금도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그러니까 아직 찢어지지는 않은 두 번째 애인 로베르트 하는 일이 기온과 해수면 상승, 사막화 확대와 파괴적인 폭풍 등의 자연재해를 예방하자는 캠페인이라 자신도 지구에 해를 덜, 많이 덜 끼치는 사업에 공헌하기 위해 회사를 옮긴 것이었다. 즉 현재 애인 로베르트와 도라는 차도녀, 차도남이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좌파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로베르트와의 사랑에 진한 추억을 가지고 있는 도라의 연애전선에 구름을 끼게 만든 건, 거참 스웨덴의 큰 부잣집 딸이자 환경운동의 선봉이라고 하는 그레타 툰베리였는데, 그레타가 시작한 금요시위에 로베르트가 참여하면서 로베르트는 환영을 보듯 소녀를 바라보았고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중요한 이슈는 하여간 기온 상승과 이에 따른 재앙의 예방이었다. 얘네들은 연애만 했다 하면 동거를 하는 모양이다. 그래 도라가 분리수거에 아주 작은 실수만 해도 로베르트는 버글버글 입술 양쪽에 흰 거품을 물어가며 지랄지랄 해대기 시작했지만, 뭐 하는 일이 그 분야니까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그러다가 COVID-19 시국을 맞았다. 이후 로베르트는 갑작스럽게 기후보호 활동가에서 감염병 연구자로 변신을 해, 짧은 말로 성공했다. 각종 매체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았고, TV에도 나오기 시작했으며, 극단적 봉쇄정책과 마스크 착용,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신앙처럼 설파하기 시작했다. 책 후반부에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극단적 봉쇄를 풀려고 시도할 때는 적극적으로 이런 정책에 반대를 했으니 어찌 보면 좌파니 진보니 하는 건 자신의 진짜 정체성은 다음으로 하고, 그냥 자신이 그렇게 불리고 싶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이러스는 경제의 많은 부분에서도 충격을 주어 광고 에이전시 SUS-Y의 광고주들도 예산을 동결하며 다양한 광고 캠페인을 취소하고 조업도 단축해버려 SUS-Y의 직원도 이에 맞추어 될 수 있는 대로 재택 근무를 하게 됐고, 도라는 이런 조치가 심각할 수준인 베를린에 염증을 느껴 못생긴 강아지 ‘요헨데어로헨’만 데리고 베를린에서 조금 떨어진, 예를 들자면 오산이나 양평쯤 거리에 있는 브란덴부르크 주, 프리그니츠 군, 플라우지츠 읍 지역의 브라켄 마을로 거처를 옮겨버렸다.


​  브라켄 마을은 전형적인 독일 변두리지역으로 브란덴부르크 사람들이 특유의 무뚝뚝한 관심이라는 지역색을 굳건히 간직한 작은 동네답게 벽에도 귀가 있는 건 물론이고 밟고 선 모래 속에도 귀가 있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도라는 주민들의 이름도 모르지만 주민의 거의 대부분은 도라의 이름은 물론이고 도라가 관심 있게 하고 있는 텃밭 개간, 심고자 하는 품종인 감자 등에 관해서 훤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이 알고 있다는 걸 오직 도라만 몰랐을 뿐이지. 이들이 도라를 보면서 공통적으로 입에 올리는 말은 “당신 같은 대도시 사람들”이라는 표현이었다. 심지어 담 아래에 의자를 놓고 의자 위에 올라가면 상자 위에 선 남자와 같은 눈 높이가 되는 옆집 사람까지도.

  옆집 남자 고트프리트 프로크슈는 도라가 이사온 지 며칠 안 되어 도라의 강아지 요헨을 담 넘어로 휙 집어 던졌는데, 책이 끝날 때까지 사람들에게 귀여움만 받는 이 개 요헨이 자신의 감자밭을 분탕질 해놓아 홧김에 던져버린 거였다. 애칭 ‘고테’라고 불리는 고트프리트는 사실 별로 말이 없는 남자다. 완벽한 대머리에 몸에서 좋지 않은 냄새를 풀풀 풍기는 거한. 이 고테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면서 말한다. 진짜 좌파처럼 악수 ‘금지 조치’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난 이 마을 나치요.” 실제로 담 옆에 의자를 놓고 위에 올라가 집을 바라보니 거대한 독일국기가 벽 한쪽을 장식하고 있었다. 나중에 고테는 “이 마을에 나치는 없다.”라고 말은 하지만 도라는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할 때까지 고테가 나치다, 아니면 적어도 나치에 매우 가깝다, 라는 믿음은 바뀌지 않는다. 독일 극우파 정당인 AfD에 투표한 옛 동독 지역 브라켄 마을 주민은 총 27%로, 역시 동독 지역이었던, 그래서 AfD 투표율이 높은 모든 브란덴부르크 주의 평균보다도 몇 퍼센트 포인트가 높은 성향을 보인다. 이런 곳에서도 이민자와 난민, 동성애자에게 유난히 지랄맞은 고테. 도라는 이런 강적과 같은 블록 담의 이편, 저편에 살아야 하는 처지를 만난 것이다.

  고트프리트 프로크슈 씨는 동독 시절엔 이웃한 슈테 지역의 넓은 평야에서 논밭을 일구어 제법 먹고 살던 농부의 아들이었는데, 독일 통일 후에 갑자기 자기네 살던 땅의 진짜 주인이 나타나 하루 아침에 쫓겨나 이웃 도시에서 도시 빈민 생활을 하다, 삶에 대한 반항 때문이었는지 열서너 살 때부터 극우 스킨헤드 족과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테는 자신이 나치라는 특별한 생각도 없다. 그냥 그저 자신이 부르는 “히틀러 깃발이 거리마다 휘날린다”는 노래가사가 나치 노래라는 건 거의 생각하지 않고, 그냥 어려서부터 부르던 노래 정도로 여기고 있다. 이걸 좀 확장하면, 고테가 난민과 이민자, 동성애자에게 특별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것이 그저 어려서부터 학습이 된 시각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테는 전형적인 “무뚝뚝한 친절”을 가지고 있는 이다. 원래 농장관리자의 집이었던 도라의 집이 비어 있는 동안 매 금요일에 한 번씩 둘러보며 손도 봐주고 했었고, 도라가 와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도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도라의 침대와 의자도 뚝딱 만들어 가져다 놓고는 한 마디도 벙긋하지 않았을 정도다. 도라는 당연히 이를 알게 되고, 그의 무뚝뚝한 친절에 마음이 쓰이며,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천하의 불한당, 네오 나치, 의도를 가진 살인의 전과자인 무시무시한 거구의 냄새나는 남자와, 난데없이 등장한 그의 자그마한 딸 프란치, 도라와 도라의 개 요헨데어로헨, 이 네 등장(인)물과 중요한 조역으로 각기 좌파와 우파로 구성된 동성애 부부 톰과 슈테펜, 그리고 R2-D2라는 별명과 ‘하이니’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하인리히, 도라의 아버지 요하임(요요)박사. 여기에 엑스트라 역으로 브라켄 마을 주민들이 만들어가는 재미있고 맛있는 만찬이 펼쳐진다.


​  결론은, 동쪽과 서쪽도, 아래쪽과 위쪽도, 좌도 우도 없이, 서로를 조금이나마 좋아하여, 자신들 모두 이 지구라는 행성에 지금 여기에 함께 있다는 사실 만을 축하하자는 것.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차별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상대가 비록 네오 나치일지언정.

  나는 율리 체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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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6-17 09: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무려 법학박사님이 쓰신 소설
이라지요.

저도 흥미롭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Falstaff 2023-06-17 17:26   좋아요 1 | URL
옙. 메냐 님의 리뷰 멋있게 읽었답니다!

얄라알라 2023-06-17 13: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법학박사라니 범죄, 스릴러에는 특히 더 메리트가 있을 것 같은데 ˝율리 체˝ 이분은 사회비판(?) 적인 소설까지 전방위인가봐요

이름 보고 바로 택할 수 있는 작가를 이렇게 많이 확보하고 계신 골드문트님은 얼마나 든든하실까요?^^저는 상대적으로 문학작품을 너무 몰라서, 이렇게 플친님들께서 주시는 콩고물을 찍어 먹고 갑니다. ^^

은하수 2023-06-17 14:07   좋아요 3 | URL
저도요!~~~
콩고물... 거 참 표현이 딱 저와 어울리네요.
전 콩고물 너무 좋아요^^
저 아침에 다락방에서 무려 율리 체의 책이 제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을 봤어요.
근데 역시 책등으로 제목이 안보여서 억지로 꺼내 봤네요...!
민음사 각성하라!
헉.. 지송합니다

Falstaff 2023-06-17 17:28   좋아요 2 | URL
참 다양한 의견을 가진 작가인 거 같습니다. 아직 다섯 편 밖에 안 읽어서 뭐라 드릴 말씀은 없지만 다양합니다.
ㅎㅎㅎ 콩고물은 저도 찍어 먹고 있답니다. 이곳에는 중원의 고수들이 많아서 제 검법은 짧기가 이루 말할 바가 아니더군요. ㅎㅎㅎ

은하수 2023-06-17 14: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율리 체 저도 읽어 보겠습니댜~~~^^

Falstaff 2023-06-17 17:29   좋아요 0 | URL
옛! 응원합니다. 차근차근... 다만 형사 쉴프를 될 수 있으면 뒤로 넘기면서 말입죠. ^^

coolcat329 2023-06-17 20: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해>골드문트님의 강추로 읽고 저 또한 ‘신선한 배신감‘을 느꼈어요.
주변에 추천했고 칭찬까지 받았습니다. 갑자기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사실 이 책은 코로나 세상을 배경으로해서 읽기가 싫었답니다. 코로나가 너무너무 지겨웠거든요. ㅎㅎ

Falstaff 2023-06-17 20:10   좋아요 2 | URL
오, 읽어보셔요. 코로나보다 더 재미있는 담론이 있습니다.
차별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랄까요, 하여튼 굉장히 흥미롭더군요. 팬데믹은 그냥 작품의 한 조건일 뿐입니다.
 
켑투케 중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갈리나 켑투케 지음, 김민수 외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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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갈리나 켑투케는 놀랍게도 퉁구스족이다. 혹시 김혜린이 쓰고 그린 <불의 검> 보셨나? 나는 <불의 검>의 배경이 선사시대의 북만주 지역, 한반도 이전 시절이라고 생각했었고, 그러면 이들은 각기 몽고족, 만주족, (우리나라)한韓족으로 나뉘기 이전의 퉁구스족 아닐까 싶었던 적이 있었다. 이들의 조상은 우리 조상과 함께 저 알타이 부근에서 동쪽으로 뻗어 나와 훈족, 말갈(청나라 세운 만주)족, 거란족, 고려족으로 갈라졌고, 서쪽으로 뻗어 지금의 튀르키예에 자리 잡았으니, 이들은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에 속해서 어순이 비슷해 서로 말을 쉽게 배운단다. 켑투케는 한국 독자에게 전하는 서문에서 자신이 퉁구스족, 즉 예벤크(예벤키)족으로 소개하면서 저 먼 고대에 한국인 조상들과 역사 과정이 교차한 적이 있음을 강조한다. 서문을 통해 몽고족의 조상이 거란족이라고 한다. 다른 거 같은데. 송나라가 망할 때 거란이 세운 요나라가 짓쳐 내려왔고, 이어서 여진족의 금나라가 송과 힘을 합해 요나라를 멸했으며, 최종적으로 몽고족이 금과 송을 멸하고 원나라를 세운 것으로 아는데 말씀이지. 하여튼 그가 퉁구스족, 이 책에선 예벤크족, 이라고 하는 거만 가지고도 참 친근한 느낌이 든다. 아마 여러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 부족들의 삶을 관심있게 보아서 그랬던 모양이다.

  주로 TV 다큐멘터리로 본 예벤크족, 그 넓고 광활하고, 삭막한 눈 덮인 툰드라 지대에서 순록떼와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유목생활을 하는 원주민들의 순박한 삶의 모습. 나는 지평선이 보이는 황야지대가 나오면 그만 오금이 풀리고 만다. 그래서 내 평생 로망은 유럽의 고딕 종교건물과 조각품, 회화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사막과 평야와 너른 허허벌판 속 화다다닥 쏟아질 것 같은 별들 아래 하루 밤을 지새우는 거다. 별 아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멍때리는 것만 가지고. 그러니 동시베리아 툰트라 출신 작가가 있어서 이제 그이의 책 번역본이 나왔다는 데, 이 책을 읽어야겠어, 말아야겠어?


​  꼭 눈을 감지 않아도 좋다. 머리 속에서 정말로 내 평생의 로망, 저 툰드라 또는 시베리아 타이가 지역에서 쏟아지는 별 아래, 그냥 멍하게 누워 있다고 생각해보자. 바람 소리와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 말고는 오직 적요만이 있는 텅 빈 어둠의 공간. 이때 저 멀리 한 샤먼이 있어 11각형의 북을 두드리며 하늘과 땅 속 저승과 땅 위의 모든 영령들을 부르는 높은 음정의 노래 소리가 들려오면, 기분이 어떨까? 이에 맞춰 숲 속에선 늑대나 엘크나 수사슴 같은 밤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우우우 들려오고.

  기분 삼삼하겠지? 그래. 그럴 거다. 어디까지나 생각 속에서의 타이가 숲 속이니까. 정말 로망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기껏해야 사나흘 한시적 유희니까 말이지. 세상에 그런 건 없다. 기분 삼삼한 건 없다. 모든 곳에서는 생존을 위해 일 해야 하고, 용감해야 하고, 용감하지 않더라도 일단 무슨 일이든 벌여야 하는 법이며, 척박한 툰드라 또는 타이가 숲 속이면 그게 더욱 고생스러울 수밖에 없다.

  예벤크족도 인간종이니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 모두를 가지고 있을 터. 다만 오랜 세월, 현대문물이라고 부르는 자본주의의 손톱에 할퀴어본 적이 없어서, 그리고 하도 생활 환경이 독해서 특별한 악연이 없는 한 서로 약하고 죽어가는 이들을 아무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도와주고 명을 이어주며 살아온, 투박하지만 정 깊은 사람들이었다. 마치 저 베링 해협 근방의 이누이트족처럼. 이상하지. 살기 힘들수록 자기 것을 더 챙기고 보관하려 할 텐데 그게 아니거든. 저 함경북도 산골에서 한 번 눈이 오면 눈이 녹을 때까지 집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곳, 그곳에 어쩌다 손님이 오면, 그게 어떤 사람이던지 따지지 않고 봄이 와 눈이 녹을 때까지 집주인과 똑같이 먹여주고 재워주었다잖은가. 하물며 한참 더 높은 위도에 사는 예벤크족이라면 말해 무엇하나.


​  그러나 예벤크 사람들의 뜻과 상관없이 세월은 흐르고 역사도 같이 흘러 이제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으로 편입이 되고, 하루는 백군, 하루는 적군 치하 시절도 거치고, 스탈린의 소수민족 해체작업도 겪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백인 또는 슬라브인에 의한 인종차별도 당했는데, 예벤키 입장에서 이것들 보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어느새 예벤크족 지역인 타이가에도 작으나마 도시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작가 갈리나 켑투케는 아마도 타이가 숲속 숨(예벤키의 유목민 천막)에서 태어난 거의 마지막 세대쯤 될지도 모른다. 동시에 이들은 타이가 숲에서 나와 작은 마을에 있는 학교를 다녔던 최초의 세대일 수도 있다. 많은 남자 아이들은 학교를 4학년 또는 7학년이나 10학년까지 마치고 다시 타이가 숲으로 돌아가 사냥꾼이 되었고, 많은 여자 아이들은 절대로 타이가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으로 더 공부를 했으나 대학을 졸업해도 직업을 구할 수도 없고, 또래의 남자들도 없어서, 대학졸업 출신의 청소부가 되거나, 러시아 백인이나 금을 캐러 온 다른 민족 남자들과 결혼을 하거나 그들의 사생아를 출산했다. 그러면서 아직 한참 젊은 나이부터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리며 한 세상을 막 살기도 했다.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

  간혹 갈리나 켑투케 같은 여성도 있어서 레닌그라드, 지금의 페테르부르크까지 유학을 해 그곳에서 러시아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민속학자 또는 문인이 되어 자신의 고향인 시베리아 타이가 마을에 찾아와 예벤크족에서 내려오는 옛 이야기를 채집하기도 했겠지.

  이 책은 작가가 어린 시절에 겪고 들었던 이야기에 픽션을 보탠 297쪽짜리 중편 <제 이름을 가진 젤툴라강>과, 민속학 박사가 된 ‘나’가 예전에 샤먼이었고 누구보다 예벤크족의 언어와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던 체릭테 할아버지를 찾아가 채록한 옛 이야기를 쓴 단편 <체릭테 할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일곱 편의 짧은 이야기를 담은 《순록 없는 순록 올가미》로 되어 있다. 본문만 451페이지.

  <제 이름을 가진 젤툴라강>은 재미있는 작품이다. 어린 시절, 열살 전후에 자신의 눈으로 보고, 이야기를 엿듣거나 직접 화자로부터 들은 내용으로,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예벤크족의 살림과 전통이 이어나가는 모습을 그리면서, 어떻게 보면 라틴아메리카의 붐문학처럼 환상소설적 묘사도 있지만 그것과 차별을 두는 타이가 문화 속 샤머니즘까지, 물론 열 살 꼬마 아가씨가 보고 들은 것이니까 그렇겠지만, 지난 시절의 곤궁함을 따뜻하게 그려냈다.

  다른 두 편은 기록이랄 수도 있고, 르포 성격도 조금 있는데, 그렇다고 별로라는 말은 아니다. 일단 새로운 내용이라 저 북동쪽 오지 사람들의 삶을 알아가는 흥미도 있으며, 세상 누구들의 삶도 다 그렇겠지만 그들 특유의 삶의 희로애락이 난마처럼 섞인 모습이 장면에 따라 짠하기도 하고, 이 선을 넘어 애처롭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하고 그렇다.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착한 책이다. 골치 아픈 먹물들의 이야기만 읽다가 이 중단편집을 읽으니 버터를 잔뜩 올린 두툼한 쿠키를 목이 메게 먹은 다음에 나박김치 국물을 한 사발 들이켠 느낌이다. 진짜다. 읽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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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6-15 0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캄캄한 밤 쏟아지는 별 속에 누워있던 적이 있습니다. 강원도 어디였어요. 정말 어둠과 별 저만 있던 그런 순간이었는데 시베리아 툰드라에서 이런 경험을 한다면! 우와 대단할 거 같아요.
마지막 문장에 역시! ㅋㅋㅋㅋㅋ
진짜 동치미, 나박김치국물은 최고죠!

Falstaff 2023-06-15 14:11   좋아요 0 | URL
요즘에 안 가는데요, 산에서 혼자 텐트 치면 별이 쏟아지지요. ㅎㅎㅎ
아, 툰드라, 고비 사막, 실크 로드. 인생의 로망입니다. 흑흑...
집에 가서 국수 삶아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어야겠습니다. ^^

PersonaSchatten 2023-06-15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작가와 책 알고 가요. 일찍 돌아가셨다니 좀 속상하네요. ㅠㅠ
리뷰 잘 읽었어요. 감사드립니다.

Falstaff 2023-06-15 14:12   좋아요 1 | URL
이 책이 그리 재미있지는 않습니다. 마치 고골의 <디칸카 교외 마을의 야회>하고 비슷한 면도 있고요. 도서관 이용하시면 딱 좋을 듯합니다.
 
죽음의 가시 대산세계문학총서 184
시마오 도시오 지음, 이종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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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마오 도시오라는 일본 소설가의 이름은 처음 들었다. 요즘 활발하게 세계문학을 소개하고 있는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 184번으로 출간했는데, 전적으로 출판사와 대산 총서의 명성을 믿고 읽었다.

  시마오는 1917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부모의 고향인 후쿠시마를 오가며 성장했다고 책의 앞 갈피에 소개가 되어 있다. 1917년생 일본인 남자. 초년 운을 잘 견디더라도 애초에 아주 드문 확률로 자연사 할 팔자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시마오 역시 다를 바가 없어서 규슈 제국대학을 조기졸업한 1943년 10월에 해군 예비학생을 지원, 뤼순 해군 예비학생 교육부에 입학한다. 1944년 2월에 1기 어뢰정 학생으로 요코스카 해군수뢰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5월에 소위로 임관한다. 1944년이면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본격적으로 연합군에게 밀리던 시기, 시마오는 특공병기 ‘신요’로 배치되었다. ‘신요’라는 것에 주목해야 할 터. 신요 또는 신요 보트는 쉽게 이야기해서, 가미카제 비행대의 해상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1인용 또는 2인용 보트에 폭탄을 가득 싣고 적의 구축함 같은 대형선박에 직진하는, 자폭 공격단이다. 오키나와 근해에서 실전 투입한 적도 있고, 우리나라 제주도에도 신요 부대가 주둔했었다 하는데, 워낙 열악한 보트라 전쟁 말기에 일본 해변과 주변 도서에 배치만 했을 뿐 본격적인 전투 무력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한 인격체가 정상적인 전투요원이 아니라 백 퍼센트 사망을 전제로 하는 자살 특공대에 들어가, 틀림없이 가까운 시기에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늘 세뇌를 당한 것이 문제였다. 이렇게 지금 당장, 아니면 내일 또는 모레에 갑작스럽게 죽게 되더라도 별로 동요하지 않을 정도의 상태가 된 병사. 드디어 1945년 8월 13일, 시마오에게 특공전 출격 명령이 떨어지고, 이제 죽음의 시행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리틀보이와 팻맨이 버섯 구름을 일으켜 일본은 이미 거덜이 난 상태, 작전은 취소되고, 일본은 조건 없이 항복하고, 시마오는 죽음 바로 앞에까지 갔다가, 다시 삶으로 복귀해야 했다. 가고시마 현, 아마미 군도, 가케로마 섬에 주둔한 시마오 소위는 결국 다다르지는 못했지만 비자발적 자살과 옥쇄의 명예 대신 섬에 사는 고운 아가씨를 아내로 삼아 도쿄로 이사해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시마오의 초기 작품은 죽음을 숙명이라고 생각해야 했던 전쟁 말기의 자살 특공대 경험을 많이 담았다고 한다. 다른 한 편으로는 죽음 대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남아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전후 불안감을 드러내기 위해 초현실주의 소설을 썼단다.

  시마오 도시오의 대표작으로 오늘 독후감을 쓰는 <죽음의 가시>를 든다. 평론가들은 전형적인 일본식 사소설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글쎄, 자기 나라의 문학에 정통한 일본 평론가들의 주장이 맞기는 하겠지만, 이웃 나라의 한 독자인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로테스크한 상세 묘사가 깊고도 독한 여운을 주는 것 때문인지, 전후 데카당 문학의 하나로 봐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전후 데카당이라면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를 말하지만, 1차 대전엔 그저 명함만 걸어 놓은 일본에서 전후라면 당연히 2차 대전을 들어야 한다. 이 작품은 1960년부터 1977년까지 발표한 열두 편의 단편소설을 묶어 하나의 장편으로 엮은 것으로, 완성에 무려 17년에 걸린 역작이기도 하다.


​  화자 S 도시오는 저 남쪽의 섬에서 군복무를 하다가 섬처녀 ‘도호’와 결혼해 전쟁이 끝나고 도쿄에 정착,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둔 결혼 10년 차 소설가다. 부업인지 본업인지 하여튼 소설가 말고 한 주에 두 번 야간학교에서 세계사와 사회 과목을 가르치며 돈을 벌고, 당연히 모자란 소득은 소설이나 수필 같은 것을 잡지와 신문에 기고해 원고료를 받아 충당하며 산다. 무대가 1950년대 중순이니까 그 시절을 생각해보자. ‘나’ S 도시오는 제국대학을 졸업한 인텔리겐챠, 아내 도호는 저 멀고 먼 작은 섬 출신에 가방끈 역시 보잘것없는 촌 여자. ‘나’의 친구들 역시 좋은 교육받은 동료 작가와 잘 나가는 저널리스트. ‘나’는 당연히 이제 비상을 준비하는 작가 초년생으로 여러 문학 집단의 동인이어서 그들과의 “문학적으로 효용이 있는” 친구들과의 대화가 필요하여 날이면 날마다 형이상학적 논의를 해갔으며, 동아시아의 이런 부류들이 종종 그러했듯, 아내가 아닌 여성과 깊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작품에서는 한 마디, 입도 벙긋하지 않지만 ‘나’의 마음 깊은 곳엔 작은 섬 출신의 배운 거 없는 아내를 우습게 아는 마음이 넘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내 도호는 10년간 아이 둘을 낳고, 기르며, 남편 ‘섬기고’, 없는 살림 쪼개 꾸리느라 애면글면 했다가 이제 30대에 접어들어 자아가 생겼을 무렵. 처음엔 의심만 하고 설마, 설마 하다가, 마음 속에 짚이는 바가 있어서 수고비로 거금 5만엔과 함께 흥신소에 의뢰해 남편의 생활을 추적한다. 흥신소는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나’와 다른 여자 사이의 온갖 생활을 총천연색으로 브리핑해주고, 결정적으로 집안 청소 도중에 ‘나’의 일기장을 발견해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아내기에 이른다.

  이런 줄도 모르고 태평하게 외박을 하고 해가 꼭대기에 떴을 무렵 느긋하게 집에 들어오니, 집은 텅 비어 있고, 서재의 책상과 다다미 바닥과 벽에 잉크가 피처럼 끼얹어져 있었다. 이 한 가운데 너저분하게 내버려진 문제의 일기장. 아내와 두 아이는 멀리 떠나려다 영화관에 가 영화를 반도 보지 않고 그냥 돌아와, 1년이 넘는 지옥 같은 심판의 나날을 시작한다. 아내는 십년 너머 참다가 드디어 폭발한 것이라 주장하면서 지금 사는 게 아니라고, 죽겠다고, 똑바로 기억하라고, 당신의 내 삶의 전부였다고, 몸과 마음을 다 바친 대가가 이거라고, 신문 성 문답을 시작한다. 사흘 동안 잠도 자지 않으면서. ‘나’는 물론이고 여섯 살 신이치, 네 살 마야를 먹일 밥도 짓지 않는 아내 도호. 집요하게 계속 물고 늘어지는 심문의 결론은 맹세 3장, 여자와 관계를 끊을 것, 절대 자살하지 말 것, 아이들 양육을 책임질 것. ‘나’는 즉각 이를 맹세하고 진심으로 여자와 관계를 끊겠다고 마음먹고, 정말로 끊어버린다.

  아내는 다음 날, 일기를 쓰고 여자한테 편지를 보냈던 만년필, 그리고 여자에게 보여주었을 내의가 마음에 들지 않아 새 만년필과 내의를 사온다. 하지만 책상과 벽에 뿌려진 잉크 자국은 어떻게 하나. 몸과 마음을 씻는 의미로 목욕탕에 다녀오니 아내는 결혼할 때 입던 비단으로 지은 기모노를 입고, 얼굴과 입술에 화장을 한 채, 손님이 오면 사용하려 아껴 두었던 깃털 이불을 깔아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만 ‘나’의 가슴은 철렁 내려 앉는 거였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이제 문제는 이 일로 아내 도호의 정신이 착란 증세를 일으키기 시작한다는 것. 시도 때도 없이 착란 또는 발작이 일어나고, 그랬다하면 끈질기게 ‘나’와 여자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한 집착과 연상을 하면서 ‘나’의 귀싸대기를 후려치기 시작해 둘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는데, 시도 때도 없으며, 아이가 보거나 말거나 상관도 없으며, 아침이거나 새벽 두 세시거나도 가리지 않으며, 전철이거나 버스 안이거나 길거리거나 병원 안이거나도 없다. 결국은 ‘나’가 노끈이나 가죽 허리띠를 목에 두르고 양 손으로 잡아다녀 곧 죽어버리겠다고 힘을 주어 얼굴이 붉게 땡땡 부어오를 때까지 조르고 나서야 아내는 긴 하품을 끝으로 발작 혹은 착란 증세를 멈추는 거였다. 한 번도 아니고 수시로 이런 장면이 등장해 읽어 나가기가 매우 힘들다. 부부싸움이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원형경기장의 글래디에이터들의 검투 장면이 차라리 읽고 보기에 나을 정도다.

  이들은 도쿄 동부 변두리 고이와 역 근방에 살다가, ‘나’ 혼자 외출하는 것은 생각도 못하는 지경에까지 다다라 야간 학교로 강의를 갈 때조차 처자식을 다 데리고 가야 했으니, 거의 모든 돈벌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도호는 입원을 포함한 신경정신과 치료가 반드시 필요해서, 고이와 집을 팔고 남부 변두리, 거의 농촌 지역으로 이사를 해야 했는데, 거기서도 사달은 멈추지 않아 결국 아내와 ‘나’는 환자와 간병인으로 입원을 하고, 아이들은 남쪽 멀리 처가 식구네도 보내기로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 작품은 스토리보다, 아휴,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내 경우엔 읽으면서 고문당하는 듯한 환장하는 기분 때문에 내가 다 미쳐버리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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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몽스트르 Le Monstre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박철호 옮김 / 제철소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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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덟 개의 희곡을 담은 희곡집. 당연히 소설책인 줄 알고 아내 이름으로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서 ‘첫빠따’로 읽은 책. 크리스토프라면 당연히 이 시대의 명작에 올라야 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대표로 꼽아야 하고, 이 책으로 크리스토프의 팬이 된 독자들은 소품인 <문맹>과 <어제>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이제 나한테, “작가 이름 하나만으로 책을 선택하는” 몇 안 되는 그룹의 한 명이다. 이이가 헝가리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지역으로 망명을 하고, 프랑스 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상태로 지내다가 결국에 이방의 언어인 불어로 작품 활동을 한 시인이었다는 건 알았는데, 희곡을, 그것도 여러 편을 쓰고, 이 가운데 많은 작품을 실제로 공연까지 한 극작가이기도 하다는 건 처음 알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놀랍고, 반갑고, 독특한 세계관과 그로테스크한 표현방식을 지닌 그가 어떤 극작품을 썼는지 서둘러 페이지를 넘겼다.


​  제목 “르 몽스트르 Le Monstre”는 네 번째로 실린 작품 <괴물>이다. 실제로 공연을 한 작품들의 경우엔 초연 무대와 장소, 이후 공연의 이력 같은 정보를 제일 먼저 소개한 걸로 봐서 <괴물>은 아직 초연을 하지 않은 듯하다. 극작가 크리스토프 대표작을 꼽으라면 거의 <배회하는 쥐>를 거론한다는데, 이 책 《르 몽스트르》를 보면 대부분 작가의 이름값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비유, 풍자, 함의, 그리고 부조리 적 시각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자신이 초년 팔자에 헝가리 공산주의 치하에서 살다가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시대에 새까만 밤의 장막을 뚫고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스위스까지, “자유를 찾아” 나선 ‘헝가리언 디아스포라’의 일원으로 다양한 체제, 그리고 서구에서까지 계속된  젠더 차별을 경험한 것이 이렇게 여러 모습의 비유와 풍자를 그려내게 했을 터이다.

  첫 작품 <존과 조>는 그러나 새롭지 않았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내용. 1975년에 스위스에서 초연을 하고, 1993년에 독일어로 번역 출판했다고 하니까 내 기억 속의 장면과 <존과 조>의 유사한 내용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도저히 기억해낼 수는 없지만, 존과 조는 이 정도면 사이가 괜찮은 친구다. 둘 다 가난한 건 마찬가지. 그래도 조가 훨씬 궁상맞다. 둘이 식당에 들어가 음료와 술 등을 주문하다가 약간의 오해가 생겨 주머니에 있는 돈을 싹 긁어서 계산을 마치고, 이때 돈이 훨씬 적었던 조가 가지고 있던 복권을 현금으로 계산해서 존에게 넘겨준다. 여기까지만 봐도 다음에 어떤 내용인지 확 짐작이 가시지? 하필이면 이제 존의 소유가 된 복권이 당첨이 되고 만 것. 조의 머리는 복권이 존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존의 행운을 축하해주어야 하지만, 가슴에서는 웃기지 마라, 그건 애초 내 것이었지만 존이 만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에게 넘어간 것이 아니냐, 하는 갈등에 빠진다. 그래서 칼부림이 나느냐고? 아무리 크리스토프가 좀 엽기적인 면이 있어도 설마, 설마가 사람 잡을 지는 모르지만.


​  두 번째 작품 <엘리베이터 열쇠>는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나 페미니즘 드라마로 보는 것이 일단 제일 편하다. 주요 등장인물은 여인과 남편, 그리고 남편의 친한 친구이기도 한 의사다. 이때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기 위해서 엘리베이터를 열고 닫는 열쇠가 있어야 했던 모양이다. 예전에는 여자도 당연히 엘리베이터 열쇠 하나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부부가 사는 아파트는 통로가 오직 엘리베이터 하나밖에 없는데, 처음 입주할 당시엔 시내에서 떨어진 외곽지역, 아파트만 나서면 울창한 숲이 있고 새들과 벌레들이 밀집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도시화가 진행되어 낮이고 밤이고 훤한 불빛과 자동차의 엔진 소음이 그치지 않는다. 하루는 다리가 조금 간지럽다고 남편한테 이야기를 했고, 남편 자크는 그렇느냐고, 도시 현대화를 위해 일하는 건축가이기도 한 남편이 알겠다고 하더니 친구인 의사를 불러왔다. 의사는 아주 간단한 시술 한 번으로 다리 신경을 깔끔하게 마비시켜 이후부터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었다. 밖으로 나가봤자 풀과 나무와 새와 곤충을 볼 수 없으니 그래도 행복했다는 아내. 이제 다시 자동차 소음이 시끄럽다고 하니 남편 자크는 또 의사를 데려와 큰 고통 없는 간단한 시술로 귀머거리를 만들었고, 불빛이 피곤하다고 하자 시신경을 끊어버렸다. 이젠 슬픔에 잠겨 울부짖는 아내를 위해 마지막으로 혀를 절단하는 간단한 시술을 하는 찰라, 차라리 목숨을 가지고 갈지언정 목소리만큼은 그냥 두라는 아내의 간절한 외침을 묵살하는 남편에게 그녀는 어떻게 했을까? 이미 간단한 시술을 위해 침상에 누워 있음에도?


​  세 번째 실린 작품은 명실공히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최고의 극작품이라 굳이 이 자리에서 소개를 하느니 직접 읽어보시는 편이 나을 것이다. 네 번째 작품이자 표제작인 <괴물>, 이게 아주 의미심장하게 정치적이다.

  거의 알몸 상태로 살고 있는 원시 종족 사회. 이들은 맹수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마을 어귀에 깊은 함정을 파고 함정 속에 뾰족한 부비트랩을 설치해 빠지면 죽게 만드는 장치를 해두었다. 북아메리카 북부 지역에서도 회색곰이 집안에 침입해 위해를 가하는 걸 막기 위해 비슷한 장치를 하는 걸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 영화에선 곰 대신에 사람, 알렉 볼드윈이 빠져 허벅지에 말뚝이 박히기는 하지만. 하루는 이 함정에 엄청나게 크고 괴상한 모습을 지닌 괴물이 빠졌고, 촘촘하게 박힌 부비트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포효를 하고 있어서 마을에 큰 사달이 난다. 여태까지 본 어떤 짐승하고도 비슷하지 않은 끔찍하고 악취가 풍기고 사나워서 두려움을 일으키는 괴물. 남자들이 창을 꼬나잡고 몰려가 마구 찔러대도 괴물은 끄떡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격을 받으면 받을수록 덩치가 더 커져가기만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괴물의 등짝 위에 핀 꽃에서 퍼지는 중독성 방향에 사람들이 몰리고, 이 사람들을 하나씩 잡아먹을 때마다 엄청난 속도로 커져, 결국 옆 마을까지 완전히 잠식을 해서, 사람들은 주거지를 더 변방으로 옮겨야 했던 것. 주거지만? 당연히 아니지. 주거지를 포함한 모든 생활의 터전까지다.

  그리하여 이들이 내린 결론은 괴물의 꽃과 방향을 흠향하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의 접근을 차단하자는 것. 이를 위하여 단호한 마음으로 한 번도 괴물의 꽃과 향기를 보고 냄새 맡지 않은 젊은 용사이자 최초의 괴물 발견자인 놉을 대장으로 해서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자 하지만, 이미 괴물의 꽃냄새에 취한 사람들은 괴물에게 다가오기를 멈추지 않아, 결국 놉과 마을의 장로만 남고 모든 사람이 놉의 칼 아래 죽어버린다. 괴물 또한 사람을 잡아먹지 못해 소멸해버리고.

  이 괴물은 무엇을 대신했을까? 나는 읽으면서 저절로 자본주의를 생각했다. 자본주의가 확장함에 따라 도시 빈민의 주거지는 점점 더 외곽으로 밀려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본의 단맛에 취해 기꺼이 자신의 노동을 싼 가격에 팔아 넘기기를 계속한다. 또는 계속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뒤로 가면 갈수록, 이게 아닌데, 싶은 마음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역자 박철호의 해설을 보니, 역자도 자본주의에서 시작했지만 근본적인 것은 공포심 아니었겠는가, 주장한다. 반면에 나는 또 자연스럽게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정체성을 떠올려, 자신이 젊은 시절에 조국을 떠나게 했던 소비에트 정권을 생각했다. 자본주의가 됐건, 소비에트가 됐건, 공포심이 됐건 간에 문제는 권력이다. 그것도 한 집단을 단체로 마취시킬 수 있는 권력.

  이 괴물을, 대중의 희생 없이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다 알고 있을 듯. 알고는 있을 듯. 혹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닐까 싶을 때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런 거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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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6-10 0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펀딩으로 이런 책이 나왔었군요! 펀딩하는 줄 알았다면 했을 텐데!! 저런이런!!! 늦게라도 사러 갑니다~!

Falstaff 2023-06-10 13:43   좋아요 1 | URL
ㅎㅎㅎ 즐기셔요. 색다른 희곡들이더군요.

stella.K 2023-06-10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빨간표지가 인상적이네요. 옛날같으면 불온서적을 생각했을텐데 보는 순간 고추장을 생각했으니 격세지감인건지 아님 속세인임을 드러낸건지 알 수가 없네요.ㅠ 어쨌든 모처럼 좋은 시간이셨겠습니다.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Falstaff 2023-06-10 13:45   좋아요 1 | URL
남자들한테 ˝빨간 책˝은 요즘 말로 야설 책이었습니다. ㅋㅋㅋ 우중충한 거무튀튀한 표지를 하고 있었는데요 제목도 죽여줬습니다. 아이고, 세월이 아름다운 제목이 기억나지 않네요. ㅋㅋㅋㅋㅋ

새파랑 2023-06-11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고타 크리스토프에 골드문트님의 희곡 별 다섯이라니 ㅋ 필독서네요~!!

Falstaff 2023-06-11 16:06   좋아요 1 | URL
ㅎㅎㅎ 뭐든지 문학작품은 독자하고 맞느냐 안 맞느냐, 이게 제일 중요한 거 같습니다. 아무쪼록 새파랑 님하고도 맞는 작픔이기를 바랍니다.
아마 크리스토프의 책이니 안 읽으실 수는 없을 듯합니다만. ㅋㅋㅋㅋㅋ
 
눈먼 부엉이
사데크 헤다야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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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수도 서울에서 가장 번화하고 가장 땅값이 비싼 지역이 아마 테헤란로 일 거 같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 그곳 땅 3.3㎡이 6천만 원이라고 했던 것까지 기억이 난다. 그냥 기억이 난다는 것이지 관심도 없다. 아무리 이모네가 서초동 땅부자라도 나한테 한 평이라도 줄 리 없는데 뭐 하러 그런 데다 신경을 쓰나. 마찬가지로 이란의 테헤란에 가면 서울로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란. 예전 지명으로 하자면 페르시아다. 페르시아는 북아프리카에서 발현한 아랍하고 다르다. 전에는 종교도 달랐다. 페르시아는 원래 배화교, 조로아스터교 신자가 많지 않았나? 그러다가 6세기, 7세기 들면서 동로마에 해가 떨어지는 시점과 맞춰 페르시아도 전립선 부실한 아저씨처럼 시새푸새 해졌고, 이때를 틈타 저 남서쪽의 사막지역에서 이교도 사라센들이 막강한 힘으로 밀어붙여 급기야 페르시아 사산 왕조를 거덜내버렸다. 이후 페르시아는 무주공산이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이슬람 영향권의 이란으로 굳어지게 된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배화교를 버리고 마호메트교로 개종을 했지만 끝까지 배화교를 지키던 사람들은 (하여간 사막 종교들의 질투심이란!) 알라 말고 신이 없다는 신념으로 배화교도들을 심하게 탄압하기 시작했고 이걸 견디다 못한 이란(페르시아) 내 배화교도들은 배를 타고 인도 뭄바이 근방으로 이주했는데 이들을 페르시아에서 왔다고 해 “파르시”라 부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파르시 족으로는, 록 그룹 <퀸>의 리드 보컬 고 프레디 머큐리, 지금은 뉴욕 필하모니의 음악감독으로 있는 지휘자 주빈 메타, 그리고 어쨌든 세계 최고의 자동차 회사 가운데 하나인 인도 타타모터스 대표 타타 등이다.

  사산 왕조가 멸망한 이후에 유럽인 눈으로 볼 때 그저 그런 변두리인 아시아 지역의 야만스런 나라로 지내다가, 걸핏하면 십자군이네 뭐네 하는 유럽 연합군대한테 두드려 맞기도 하고, 사실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맞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이 때려주면서 논두렁 건달 노릇을 착실하게 하며 천 년을 잘 견뎌왔다. 그러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슬람 문화의 정체된 답답한 요소들이 사회를 질식시키고 있었다. 글쎄 테헤란에 있는 국립 축구장에 십만 명이 들어간다는데 거기에 여자가 한 명도 없다잖아. 그러다가 1925년 리자 샤 팔레비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을 하더니 칭왕을 해 왕좌를 깔고 앉았고,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다 하기 위해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일단 궁정 여성들에게 차도르를 착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암만해도 눈에 번쩍 띄는 것을 개선해야 제일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랬는데 이 팔레비 1세는 1920년대 유럽의 (위험한) 혁명 사상과 민주주의, 그리고 이란에서 앞으로 자신이 누릴 권력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개혁을 위한 수입품목에서 빼 버렸다. 그리하여 문학적으로 보면 여성들의 얼굴에서 차도르를 벗겨낸 이 시절이 오히려 깊은 어둠에서 길을 잃은 시대였다고 한다.

  1903년에 테헤란의 귀족집안에서 태어난 사데크 헤다야트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지만, 주위에서 기대하는 엔지니어링엔 영 소질도 없고 희망도 없어서 엔지니어가 되는 조건으로 1925년에 떠난 벨기에-프랑스 유학 중에 기계제도機械製圖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대신 아방가르드 예술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모파상, 체호프, 릴케, 슈니츨러, 포, 카프카 등에 더 몰두를 했다 한다. 와중에 우울증 증세가 심각했는지 1차 세계대전 당시 격전지였던 마른 강을 건너는 다리 위에서 투신한 적도 있었다. 그래 풍덩 빠지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 죽을 팔자가 아니었는지 다리 아래에 노도 젓지 않고 그냥 물결 흐름에 맡겨둔 보트가 한 척 있었고, 보트 안에는 선남선녀가 “사랑을 나누고” 있다가, 뭔가 옆에서 크게 풍덩, 하고 빠지는 소리가 나는 통에 김이 새서 고개를 들고 보니 젊고 잘 생긴 페르시아 귀족 청년이 빠져 죽고 있는 거였다. 용감한 프랑스 청년은, 다행스럽게 빨리 뛰어들 수 있게시리 옷을 벗을 필요가 없는 상태여서 곧바로 다이빙을 감행, 헤다야트를 살려주었다. 프랑스 청년은 몰랐으리라. 자기가 살린 청년이 24년 후에 스위스에서 비자 연장이 거부당하자 가스를 틀어놓고 기어이 자살에 성공하리라는 것은. 이 청년이 이란의 문학적 어둠의 시대에 찬란하게 빛을 발하던 거의 유일한 작가가 되리라는 것도.


  사실 작가 소개를 하면서 너무 말이 많았다. (나도 왜 이런지 몰라. 한 번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브레이크가 도무지 걸리지 않으니 말이지) 이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1925년부터 6년간 이어지는 유학생활에서 그가 아방가르드 예술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는 거였다.

  이 책 <눈먼 부엉이>는 이렇게 시작한다.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그러면서 이 작품은 고통에 관한 이야기라고 미리 언질을 준다. 나는 원서를 직역하면 저런 번역문이 나올 것인가, 처음부터 매우 궁금해졌다. 뭔가 들은 것 같은 구절이 있지? 유명하기는 한데 느므느므 지루한 영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떠올리는 건 나 하나? 만일 내 의견이 맞다면, 이 문장은 우리나라의 중견 소설가이기도 한 역자 배수아가 번역을 하며 우리 독자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읽힐 수 있는 표현을 쓴 거 아닌가 싶었던 거다. 이래서 소설가가 번역한 작품은 내가 안 좋아하는데, 만일 내 생각이 틀리면 배수아한테 미안하게 됐다, 직역이 ‘영혼을 잠식한다’, 라고 되어 있다면 말이다. 여기다가 고통에 관한 이야기라고 덧붙이면, 애당초 이야기 자체가 데카당, 아니면 적어도 데카당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작품일 수밖에 없을 거란 걸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데카당 문학의 매력이지만 동시에 약점이기도 한 게 미문, 아름다운 문장이다.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는 화자 나는 필통에 그림을 그려 파는 필통화가다. 하루는 아버지와 일란성 쌍둥이이자 삼촌이라고 주장하는, 하지만 친아버지일 수도 있는 작자가 사업 관련해서 집에 온 적이 있다. 이란의 신년인 노루즈 지나고 13일째 되는 날이었다. (노루즈 끝나고 13일. 책에서 계속 나온다.) 집에 마땅하게 대접할 술도 없고, 아편도 없어서 어떻게 할까, 하고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이 어려서 유산으로 받은 포도주가 식품보관소 선반에 있다는 게 생각나 의자 위에 올라섰는데, 벽에 적당한 크기의 구멍이 나 있었고, 구멍을 통해 장면과 사람 몇 명의 모습이 보이던 거였다.

  집 뒤편 공터에 곱사등이 노인이 마치 인도의 요기 같은 자세로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에 앉아 있고, 한 소녀, 아니,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검푸른 메꽃을 노인에게 건네는 모습. 검정 주름 원피스를 입은 소녀의, 단번에 두려움을 일으키는 마법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그건 지켜보는 사람에게 통렬한 비난을 던지는 눈동자로 바뀌어, 나는 그 안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나는 그(소녀의 눈동자) 안에서 ‘길을 잃어버렸다’”도 좀 흔한 표현이다. 이것도 원문에 이렇게 쓰여 있는지 궁금하다.)

  소녀는 불쑥 튀어나온 광대뼈, 넓은 이마, 눈썹이 가늘면서도 양쪽이 길게 서로 이어졌으며, 반쯤 열린 도톰한 입술의 얼굴이었다. 섬세하면서 가녀린 팔다리와 가볍게 늘어지는 몸동작을 하는 것으로 보아 쓰러질 정도로 매우 허약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때 딱 한 번 본 소녀, 여자.

  이것을 주인공 나는, 너무도 깊고 현기증 나는 절망의 심연으로 몰아넣은 잊을 수 없는 체험이며, 심지어, 작가가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는 건 습작 중이거나 데카당 작가 밖엔 없는데, “최후의 그날까지 인생에 무서운 독으로 작용할 것이며, 고통의 흉터로 이 일 이후 나의 모든 다른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한다. “찰나의 광채 속에서 아주 짧은 순간,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불운의 전모를 보았으며, 그것이 지닌 숭고한 아름다움을 알아차렸”는데, 삼촌이 가고 3일 후 문제의 포도주를 다시 선반 위로 올려 놓으려 의자에 오르니 벽의 구멍이 말끔하게 메워졌다고 말하니, 독자는 이걸 믿어, 말아? 아무쪼록 열내지 마시라. 데카당은 간혹 그런 법이니.

  작품의 시작점은 이 일이 있고 나서 두 달 나흘이 지났을 때이다.

  이제부터 작품의 나머지는 전부 여태 나왔던 사람들, 터번을 쓰고 목에 몇 겹의 숄을 두른, 썩어 검게 변한 앞니를 가진 늙은이, 소녀라기 보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은 여자, 그리고 나. 이 세 명의 변주, 그것도 무한 변주를 시작한다.

  작가 사테크 헤다야트는 그래도 앞 부분에서 독자에게 적절한 힌트를 던진다. 화자 나는 알코올과 아편을 탐닉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 실제로 ‘나’가 노루즈 끝나고 13일째 벽의 구멍을 통해 본 사람들을 두 달 나흘을 찾아 배회하고는, “아편의 몽롱한 환각 속에서만 나타나는 꿈의 형상” 같다고, 완벽하게 조화로운 육체의 선, 날씬하게 키가 큰 형상이 그러니까 아편을 피우고 있는 상태에서 본 홀로그램일 수도 있는 것이어서, 뒤에 여러 번 나오는 꿈 속 장면처럼, “한 이란 아편쟁이의 고백”일 수도 있다는 걸 독자들은 염두에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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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6-09 1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쇠락을 전립선 부실한 아저씨로 비유 ㅋㅋ
옷을 벗을 필요없는 프랑스 남자 근처에 떨어져 목숨 구한 일...ㅋㅋ
근데 소설 내용도 그렇고 결국 마지막 작가의 삶이 참 슬프네요.

Falstaff 2023-06-09 16:33   좋아요 1 | URL
앗! 재미나게 읽으셨습니까? ㅎㅎㅎ 기분 좋습니다.
제 3국의 작가들이 대부분 이이하고 적어도 공감하지 않았겠습니까. 헤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