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Falstaff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술, 밥, 책, 음악</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hu, 25 Jun 2026 15:42:19 +0900</lastBuildDate><image><title>Falstaff</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295542772587509.jpg</url><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Falstaff</description></image><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2백년 전 로맨티시즘을 즐기시라 - [전날 밤]</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53985</link><pubDate>Thu, 25 Jun 2026 05: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5398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76055&TPaperId=1735398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3/1/coveroff/893247605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76055&TPaperId=1735398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전날 밤</a><br/>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03월<br/></td></tr></table><br/>.&nbsp; 작품은 1853년 모스크바 외곽의 밀림 속에 있는 휴양지 쿤체보에서 시작한다. 있는 집 도련님들이 커다란 피나무 아래 누워있거나(안드레이 페트로비치 베르세네프), 엎드려 있다(파벨 야코블레비치 슈빈). 베르세네프는 대학을 3등으로 졸업하고 잠시 쉬고 있다. 역사와 철학 중에 하나를 더 공부하여 장래 대학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다. 목표를 위하여 5년 후에는 독일의 대학에서 박사논문을 통과시킬 예정이지만 아직은 그저 꿈만 꾼다. 슈빈은 나이가 어느 정도 차 고아가 되었다. 어머니가 죽으면서 사촌 동생인 안나 바실리예브나 스타호바에게 슈빈을 잘 돌봐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해 스타호프 집에서 대학을 다녔다. 원래는 의학을 공부했지만 1년 만에 자기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중도작파, 모스크바 미술계에서 눈여겨보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 젊은 조각가 신분이다. 작품이 시작하기 바로 전에는 어린이와 산양山羊 부조작업을 하다가 노대가들과 고대 미술품을 보고 낙담해 깨 버렸다. 자신의 예술 외에 여자의 아름다움만 사랑하는 예술가. 최근이지만 이중에서 처녀의 아름다움에 집중하고 있다. 보이나봐? 척 보고도 처녀인지 아닌지. 2백년 전 예술가답게 어딘가 한 군데 좀 삐딱하고 괴짜 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는데 중요한 조연급답게 귀여운 골통 비슷하다.&nbsp; 반면 베르세네프는 학교 다니며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했는지 이제 당분간 무위, 안일한 생활, 맑은 공기, 목표달성(우등졸업) 이후 허탈감을 달래는 휴식, 친구와의 가벼운 대화 등을 위하여 최근 쿤체보 숲 속의 다차를 하나 얻었다. 다차는 러시아에서 유행한 휴양지 건물. 부르주아들은 자기 다차가 있는 게 보통이었고 그 정도가 안 되면 베르세네프처럼 한 채 임대하면 된다. 도스토엡스키의 작품들 특히 &lt;백치&gt;에서 페테르부르크 인근의 다차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br>&nbsp; 남자만 두 명 소개했다. 그러면 이제 여자가 나와야겠지? 이 둘을 갈등의 국면으로 치닫게 만드는구나, 독자한테 이런 생각, 오해, 짐작이 들게 만드는. 그렇다. 나온다.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스타호바.&nbsp; 먼저 결혼 전 이름이 슈빈이었던 옐레나의 엄마 안나 바실리예브나에 관해 조금 언질을 드린다면, 슈빈의 5촌 이모 정도의 족보 자격으로 그를 키웠다 할 만한 은인. 일찍이 슈빈에게 예술 공부 또는 견식을 넓히기 위하여 이탈리아 여행을 권하며 큰 돈을 준 적 있지만 슈빈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좇아 소아시아 그러니까 우크라이나에 가서 돈을 탕진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슈빈은 진심으로 안나 바실리예브나를 존경하고, 은인으로 생각하지만 아름답지는 않아서 속으로는 그냥 암탉으로 여길 뿐이다. 진도가 나갈수록 선한 19세기 부르주아 여인의 전형을 연기한다. 결혼해 딸 안나 하나만 낳고 단산한 것이 불행의 시작이긴 했다.&nbsp; 아빠 니콜라이 아르툐미예비치 스타호프는 저 위대한 1812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퇴역 대위의 아들이다. 귀족의 혈통이 흐르지만 끈 떨어진 갓 신세. 아시다시피 러시아에는 이런 빌어먹는 귀족들이 무척 많다. 이 가운데 한 가문의 아들로 성장한 퇴역 중위. 이이에게는 큰 꿈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하나가 ‘유리한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일곱 살 때 고아가 되었지만 꽤 많은 영지와 저택, 귀금속 및 보석, 그리고 상당 수준의 현금을 상속받은 아름다운 아가씨였을 때 큰 파티장에서 뒷다리 제치기에 성공해 꿈 하나를 이루었다. 딸 옐레나 이후 후사가 없자 그걸 핑계로 독일 태생 과부와 긴 연애를 하고 있다. 그 과부가 자기 친지에게 쓴 편지에 그를 “나의 멍청이”라고 비웃는 건 5년 후 호호 할배가 되어 걷어 차일 때까지 알지 못했다. 왜 비중이 별로 없는 아빠를 들먹였느냐 하면, 투르게네프하고 가족 구성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해서. 작품 속 누군가 작가를 닮을 수 있는데 그게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또는 니콜라이 아르툐미예비치 둘 가운데 한 명인 거 같아서였다.<br>&nbsp; 일단 안드레이 베르세네프와 파벨 슈빈 둘 다 옐레나를 연모하고 있는 건 확실하다. 파벨은 감정이 안드레이보다 월등하게 분방하여 사람들에게 편안하고 자연스럽지만, 동시에 불쾌함이나 역겨움을 주기도 한다. 바로 어제 그런 장면을 하필이면 옐레나 앞에서 저지르고 말았다. 집에 옐레나 말고 다른 젊은 아가씨가 한 명 더 있었으니 독일 아가씨 조야 니키티시나 뮬러. 러시아계 독일 처녀이다. 스타호바네 다차에서 옐레나의 말동무나 하라고 데려왔는데 정작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불러 자기 옆에만 앉혀 놓는다. 밤이 시작되는 훈훈한 저녁 무렵, 분방한, 책이 끝날 때까지 결코 난봉꾼 수준까지 치닫지 않는 그저 분방한 파벨 슈빈이 집 복도 어두컴컴한 곳에서 조야의 두 손을 붙잡고 손등에다 열렬히 키스하는 장면을 옐레나한테 들켜버린 거다.&nbsp; 근본적으로 옐레나는 예술 방면으로 자질이 있는 편이 아니다. 예술보다는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은 학문이 훨씬 맞는다. 그러면 당연히 역사 또는 철학을 더 공부할 안드레이가 더 어울린다. 어제의 실수가 아니더라도 평소 파벨 생각도 그랬다.&nbsp; 농촌에 기반한 부르주아 가운데 한 명인 이반 투르게네프답게 여기까지 모든 장면이 자연, 학식, 예술, 이탈리아, 프록코트, 드레스, 피아노 연주 같이 벨벳 같은 부드러운 문장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스타호프네 집에서 저녁까지 먹고 베르세네프가 자기 다차로 돌아간다. 그의 뒤를 헐레벌떡 좇아오는 파벨. 그러더니 베르세네프 입장에서는 난처할 수밖에 없는 고백을 한다.&nbsp; “안드레이, 나는 옐레나를 사랑한다네. 그러나 옐레나는 자네를 사랑하지.”&nbsp; 안드레이는 조금 놀란다. 자기가 옐레나를 사랑해? 맞다. 그것 때문에 여태까지 속으로 일종의 과호흡증을 앓았다. 그런데 옐레나도 나를 사랑한다고? 아, 이렇게 행복할 수가.&nbsp; 하지만 파벨이 그녀를 사랑한다니. 파벨은 나 역시 옐레나를 사랑하는 걸 알고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나? 내 사랑을 파벨에게 양보해야 하나?&nbsp; 파벨 역시 진실한 친구. 자신이 옐레나에게 맞지 않는 점을 이야기한다. 자신은 옐레나가 보기에 너무 경박한 젊은이라고. 그녀는 진지한 사람, 양심적인 과학 신봉자의 대표자라면서. 또 앞에서 말한 조야의 손에 키스한 장면. 그것보다 바로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파벨이 조야에게 험담을 해버렸던 모양이다. 분방한 성격이니 그럴 수 있지만 옐레나가 보기엔 역겨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nbsp; 여기까지 말한 슈빈은 그만, 안드레이가 보는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하니 정작 안드레이가 민망해지기 시작한다.<br>&nbsp; 이렇게 작품이 중간 정도까지 진행되었을 때, 안드레이가 모스크바에 들를 일이 생기고, 거기까지 간 김에 유일한 학교 절친 드미트리 니카노로비치 인사로프를 만난다. 불가리아 사람. 오스만 제국의 압제에 허덕이며 사는 불가리아의 독립을 위하여 혁명을 준비하고 있다. 원래는 학문을 하고 싶어 모스크바에 왔지만 조국의 부름이 자신의 공부보다 먼저라고 생각해 귀국했고, 혁명을 준비하다 상당한 수준의 고초를 겪어 목 주변에 깊은 상처가 남았다. 일단 불가리아에서 탈출해 모스크바로 돌아와 러시아 내 불가리아 동포를 집결하고 국내 혁명전선 동지들에게 여러 지령을 내리는 중추 가운데 중추로 활약하는 인물이다.&nbsp; 당연히 자금이 충분하지 않아 작은 방 하나를 얻어 궁상스럽게 살고 있는 것이 짠해서 안드레이는 자기가 지내고 있는 다차에서 여름을 날 것을 제안하고, 인사로프는 자기가 쓸 방값을 자신이 내는 것을 전제로, 즉 친구의 호의를 무상으로 받기를 거절하는 조건으로 다차에 들어온다. 그리고 옆집, 스타호프 다차에 가서 인사를 하고, 저녁을 먹고, 대화를 하고, 대화는 대화인데 중요한 일을 수행하는 사람답게 세상 누구보다 진중하고 설득력 있는 논조로 깊은 대화를 전개해 나간다.&nbsp;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딱 눈치 채시겠지? 우리의 안드레이와 파벨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리라는 것을. 처음에야 옐레나를 포함한 스타호프 사람들이 보기에 인사로프는 배운 것만 많지 저 변방 중의 변방, 심지어 안나 바실리예브나의 머리속에서는 시베리아 옆에 있는 줄 아는 불가리아 촌놈이고, 생긴 것도 잘 생기지도 않았고, 얼핏 보기엔 그저 그런 보통 체격에, 조금 있으면 불가리안지 뭔지 하여간 다시 돌아갈 청년에 그리 관심이 없었다가, 집안에서 딱 한 명, 옐레나는 그의 진중함과 정의로움에 빠져버리기 시작한다. 퐁당.&nbsp; 철의 사나이 인사로프. 그도 사람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옐레나를 사랑하게 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인사로프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옐레나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할 일, 그냥 할 일이 아니라 조국의 해방시키는 혁명의 중요한 역할을 맡은 바, 과업에 조금도 영향을 끼치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인사로프는, 중간에 분방한 파벨이 다리 역할을 해서 어느덧 둘의 사랑을 둘 다 알게 된 상태가 되자마자, 다차가 있는 쿤체보 숲을 떠나 모스크바로 돌아간다.&nbsp;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쿤체보와 모스크바. 백 베르스타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가 둘의 사랑을 흐리게 만들 수 있을까? 하여간 이들의 앞에는 러시아가 영국-프랑스-오스만 연합에 코가 깨질 예정인 크림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3/1/cover150/893247605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730167</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한 다리만 건너 - [니들의 시간]</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52652</link><pubDate>Wed, 24 Jun 2026 15: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5265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24947&TPaperId=173526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903/0/coveroff/893642494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24947&TPaperId=1735265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니들의 시간</a><br/>김해자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br/></td></tr></table><br/>.&nbsp; 김해자는 신안 출신, 목포에서 초등과 중등학교를 마치고 한 해 재수? 하여간 고려대 국문과에 들어갔다. 4학년이던 1984년에 광주학살진상조사위원장을 맡아 학내시위를 주도하다 제적당해 훗날 복학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인터뷰 기사 말미에 학력을 고려대 국문과 졸업이라고 해놓았으니까.&nbsp; 이후 인천의 공단으로 가서 “잿빛 같은 15년”을 보냈단다. 국제작가축제의 참가자 소개를 보면 “2, 30대 시절 전자 공장과 봉제 공장에서 일하며 노동하는 자신과 동료들의 삶을 받아 적다 시인이” 됐고, “4, 50대부터는 학생, 어른, 치매 병동, 알코올 병동, 홈리스, 기초수급자 가리지 않고 찾아가 강연과 강의를 해오고” 있으며 현재는 (천안시 인근)시골에서 농사지며 이웃의 삶의 이야기를 가끔 시로 쓰고, 관계가 끊어지고 공동체가 파괴되고 약자들이 죽음으로 몰리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목도하면서 현대 문명의 대안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nbsp; 그러니까 스무 살에 받아들인 80년대 운동권의 감각을 65세인 지금까지 45년 이상 저 들의 푸르른 솔잎처럼 변하지 않고 지켜내고 있는 시인이다.&nbsp; 1980년대 중후반에 대학 재학/졸업자가 인천 공단에 취업하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을 위조하여 들어가 노동조합에 개입한 듯한데 뭐 지난 이야기 길게 하면 좋을 거 없다. 하여간 상당한 정도로 왼쪽 멀리 가 있는 건 확실하다. 시를 읽어봐도 그렇다.<br>&nbsp;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책의 초판 발행이 2023년인데 상당한 시들이 예전 투쟁시기에 머물고 있다. 직접 그것을 바로 그 현장에서 경험한 시인으로 시절의 고통과 투쟁은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질곡이겠지만 말이지. 예컨대 &lt;이름 없는 조직&gt;이란 시의 2연을 읽어보자.<br>&nbsp; “순간, 가좌동 쪽에서 본드 냄새가 불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온종일 신발 바닥에 본드칠하다 우우 몰려가 발바닥 닳도록 춤추던 송림동 카바레, 어디선가 단무지 냄새가 풍겨오는 것도 같았어요 철야 끝난 일요일 잠시 눈 붙이고 달려간 신포시장, 볼이 미어져라 먹던 왕만두 냄새, 미싱에 앉으면 만주에서 말 타고 달리는 듯하던 열여덟살 현옥이와 장덕이가 대한서림에서 책장을 넘기고, 바로 옆인 듯 애관극장에서 파업전야 같은 필름이 돌아가는데 (p.26~27, &lt;이름 없는 조직&gt; 부분)<br>&nbsp; 지금도 가좌동에 신발 공장이 있나? 만일 여전히 있다면 신발 바닥에 본드칠을 사람이 할까, 기계가 할까? 사람이 한다고 치더라도 우리나라 노동자가 할까 외국인 노동자가 할까?&nbsp; 아무래도 안 되겠다. 더 이야기하기 힘들다. 그만 두자. 시인과 나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 딱 한 다리만 건너면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러니 관두자. 이제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옛 사람들.&nbsp; 다만 벌써 40년이 훌쩍 넘은 오랜 이야기이다. 그때 타도해야 했던 건 많이 사라졌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을 지경으로. 그럼에도 시인은 여전히 80년대, 심지어 서울의 봄 광경도 시로 읊고, 1951년 전쟁당시 국방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노래한다. 누군가는 노래해야 하겠지. 그러나 나는 이제 더 이상 전쟁이나 학살, 집단 희생 같은 큰 규모의 심각한 비극은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 삶의 뒷방에서 그저 조용히 평화롭게 조근조근 책만 읽으며 살고 싶다. 이것도 잘못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nbsp; 이이의 시집 가운데 드물게 등장하는 서정시 한 수 올리고 독후감 접겠다.<br><br>&nbsp; 꽃잎 세탁소<br><br>&nbsp; 꽃양귀비 붉은 꽃잎 위에 청개구리가 엎드려 있어서 나도 납작 엎드려 뭐 하나 들여다봤더니, 제 목울대로 꽃의 주름을 펴는 게 아닌가, 그 호박씨만 한 것이 앞발 뒷발로 붉은 천 꽉 부여잡고 꽈리 풍선 불어가며 다림질하는 동안 내 마음도 꽃수건처럼 퍼지고 있었다<br>&nbsp; 개망초 하얀 꽃잎 위에 나비가 날개를 접고 있어서 나도 땅두릅 그늘 아래서 욜려다봤더니, 계란 노른자 같은 꽃술을 빨아대는 게 아닌가, 그 상추씨만 한 입으로 꽃잎을 빠는 동안 하얀 베갯잇 같은 구름이 간지러운 듯 몸을 뒤틀었다 하늘이 갓 세수한 듯 말개지고 있었다&nbsp; (전문. p.78)<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2903/0/cover150/893642494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9030060</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인간극의 결집판 또는 대단원 - [사교계의 영광과 비참 1]</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50221</link><pubDate>Tue, 23 Jun 2026 06: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5022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4896&TPaperId=173502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94/73/coveroff/893746489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4896&TPaperId=1735022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사교계의 영광과 비참 1</a><br/>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민음사 / 2026년 03월<br/></td></tr></table><br/>.&nbsp; 오노레 드 발자크의 1847년 작품. 말년의 “인간극” 시리즈인 만큼 독자는 처음부터 각오를 단단히 하고 시작하는 편이 좋다. 먼저 읽어본 자로 솔직한 의견을 말씀드리면, 발자크의 인간극 시리즈를 상당한 정도 읽어본 연후에, 적어도 &lt;고리오 영감&gt;과 &lt;잃어버린 환상&gt;은 읽은 상태에서 첫 장을 들춰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다. 정말이다. 안 그러면? 수다하게 등장하는 인물들 대다수가 전작에서 맺은 선연, 악연에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얽혀 있어 매듭을 풀기는커녕 양쪽 줄을 잡고 대롱대롱 매달리다가, 또는 무수한 각주를 동시에 읽느라고 그만 정처를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 한 명 곱게 등장했다 사라지는 인간이 없다.&nbsp; 주인공 급 등장인물을 꼽자면 인간극 중에서 단편으로 꼽는 &lt;곱세크&gt;, 유대인 고리대금 업자 곱세크씨의 조카딸로 이 책에서는 나중에 7백만프랑에 달하는 막대한 현금의 상속인이 되지만 이 가운데 한 푼도 손에 쥐기도 전에 삶을 등지는 전직 어린 창부, 현직 은행가 프레데릭 드 뉘싱겐 남작의 정부인 에스테르.&nbsp; 이미 &lt;잃어버린 환상&gt;에서도 철딱서니 없는 아름다운 청년으로 주인공 역을 맡은 바 있는 뤼시앵 샤르동. 전편에서 파리에 공부하러 갔다가 갖은 사치와 연애 행각을 벌이다 폭삭 망해 고향 앙굴렘으로 와서 다 죽어가던 찰나 선량한 사람들 덕에 기사회생한 인물이다. 이 작품에서는 다시 파리로 와 &lt;잃어버린 환상&gt;에서 한 때 연애했다가 헤어진 귀족부인들하고 원수지간이면서 새로운 귀부인과 염문을 뿌리고 있다.&nbsp; 아마도 진정한 주인공은 &lt;고리오 영감&gt;에서 인간극의 터줏대감 라스티냐크와 질긴 인연을 만든 극악무도한 악당 보트랭일 것인데, 여기서는 뤼시앵을 물심양면으로 돌보는 스페인 출신 사제이자 스페인과 프랑스 국왕 사이의 밀사라고 주장하는 카를로스 에레라 신부 참칭자僭稱者로 등장한다.&nbsp; 이 외에 조연급들도 서로 조밀하게 전작들과 연결되어 있어 발자크의 전작을 건너뛰고 읽자면 곤란을 면하지 못할 터이니 감안하시면 좋겠다. 특히 &lt;잃어버린 환상&gt;을 읽은 즉시 이 책을 시작하면 더 좋고. 마침 민음사세계문학 시리즈에서 이 작품 바로 앞에 배치한 책이 &lt;잃어버린 환상&gt;이니 이어서 다섯 권 내리 독파하는 게 장땡이다.<br>&nbsp; 두 번째로 &lt;사교계의 영광과 비참&gt;을 읽으면서 주의할 것 또는 미리 감안할 것은, 이 작품이 인간극 가운데서도 소위 “풍속연구”에 해당하는 작품이라 프랑스 고등학생들도 배우지 않을 것 같은 19세기 초의 프랑스 특히 파리의 구역과 특정 건물, 거리 같은 곳의 상세 설명에 학을 뗄 수 있다는 점. 영국에서는 몇 십 년이 지나야 등장할 헨리 제임스가 있지만 프랑스엔 19세기 초부터 발자크와 그의 후배들이 있어서 이 상세묘사에 관해서는 말 그대로 독보를 과시하고 있었던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당신이 웬만한 독서력이 없으면 콱 질려버리고 말 걸? 겁주는 게 아니라 미리 각오하시란 뜻이다. 나는 이 책이 독후감을 쓴 열다섯 번째 발자크의 작품인데 솔직히 말해 아직도 이이의 소설책을 읽을 때마다 뒷골이 뒤숭숭하다. 이거 이러다 뇌일혈 생기는 거 아냐? 이런 생각이 들어서.&nbsp; 유라시아 대륙의 제일 오른쪽 끝에 있는 나라에 사는 사람이 도대체 파리의 19세기 초에 있었던 건물과 거리, 1820년대 말에 벌써 사라진/개축한 건물의 옛 구조를 왜 알아야 하며, 거리 이름이 뭣이 중헌디?&nbsp; 그런데 여태 이야기한 두 가지 허들을 바꾸어 생각하자. 딱 이것들 두 개만 극복하면 독자는 소위 발자크 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현란한 솜씨에 넋을 잃을 권리가 생긴다. 도무지 더 이상 스토리를 풀어낼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절묘하게 또다른 이야기를 벌써 시작하고 있는 거다. 이 재미 때문에 읽을 때마다 골머리를 썩이면서까지 내 눈에 띄기만 하면 발자크를 읽어 버리곤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지. 그러니까 당신도 이를 악물고 한 번 견뎌 보시기 바란다. 읽다가, 읽다가 도저히 못 견디면 그건 당신 팔자 소관이니 내 탓하지 마시고.<br>&nbsp; 시작은 1824년. 오페라극장의 무도회. 각주에 의하면 1824년 2월 말일의 오페라 무도회에서는 가면을 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유명인이거나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다 맨 얼굴이었다고. 이 무도회에 세상물정 1도 모르는 무뇌아 수준이지만 세상천지 둘도 없는 미남 청년 뤼시앵이 유대 혈통이 가미된 절세 미녀 에스테르와 함께 등장해 사람들의 넋을 빼놓는다. 뤼시앵은 그와 지속 기간에 관계없이 연인 관계였거나 연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더라도 그냥 품에 한 번 안겨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여성들의 눈길을 받았고, 독특한 매력을 지닌 에스테르는 아주 뛰어난 아름다움의 소지자라서 오페라 극장의 모든 남성들로 하여금 혀를 쑥 빼물게 해 놓았다.&nbsp; 그런데 발자크가 쓴 작품에서 빼놓지 않고 문제를 들춰내는 데 특화되어 있는 인물 라스티냐크가 에스테르를 발견했다. 정확히 말해서 에스테르의 정체를 작지 않은 목소리로 주위의 친구들에게 떠들기 시작한 거다. 뤼시앵이 데리고 온 에스테르가 여기 오신 만장하신 신사분들의 7할 정도를 상대한 경력이 있는 매춘부라는 것을. 이러니 어떻게 되겠나? 뤼시앵과 에스테르는 죽을 맛이겠지. 그런데 아무리 노류장화라지만 열일곱 살 순정을 품고 있는 에스테르가 더 독하게 상처를 받았겠지? 이때 여태 뤼시앵의 뒤를 좇던 건장한 체격의 자객 가면, 멕시코 정의의 사자 조로가 쓴 가면을 걸친 남자가 재빨리 에스테르 뒤에 근접해 속삭인다.&nbsp; “뤼시앵은 당신을 사랑합니다.”&nbsp; 조금이라도 에스테르의 기운을 차리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에스테르는 이날 파리의 2월이면 아직 한겨울인데 파리에서도 가장 흉물스러운 구역인 랑글리드가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번개탄을 피워놓고 자살을 기도해버렸다. 극장에서 비지우라는 이름의 찌질이가 만인이 보고 있는데 자기를 향하여 “어이, 에스테르!”하고 외친 일이 너무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이것이 에스테르가 처음 시도한 자살이라 번개탄의 수가 모자랐고, 가뜩이나 외풍이 있는 방에 문도 조금 열려 있어서 죽지도 못하고 있는 것을, 아까 자객 가면을 쓴 사내, 스페인 국왕의 프랑스 밀사이지만 와 있는 도중에 정권이 바뀌어 그대로 머물고 있는 카를로스 에레라 신부가 발견해 목숨을 건져낸다.<br>&nbsp; 이 카를로스 에레라 신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앞에서 말한 바대로 일찍이 &lt;고리오 영감&gt;에서 부르주아 타유페르의 아들을 결투를 빙자해 살해하고, 라스티냐크에게 타유페르의 집 나간 딸과 결혼해 상속을 받은 후 가로채려 했다가 라스티냐크가 망설여 본전도 건지지 못한 악당 ‘보트랭’ 역으로 조연 출연한 인물로, 본명이 ‘자크 콜랭’이라고 한다.&nbsp; 카를로스 에레라 신부가 에스테르를 어엿비녀겨 살려준 것이 아니다. 그가 바란 것은 어떤 남자도 호릴 수 있는 아름다움을 지닌 에스테르의 몸. 근데 글자도 읽지 못하는 게 흠이라, 카를로스 신부는 그길로 에스테르를 수녀원에 집어넣고 1년 반 동안 글자, 숙녀로의 몸가짐, 옷 입는 법 등등에 익숙하게 교육시킨다. 비용은 전부 신부가 대고. 근데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훗날 카를로스 신부는 에스테르를 프랑스 최고 중의 최고 은행가인 뉘싱겐 남작에게 넘겨 수백만 프랑을 울궈내려 하고 있다.&nbsp; 전직 흉악범죄 미수자이며 현직 국왕의 비밀 사절 참칭자인 자크 콜랭은 사실상 도형수의 신분이다. 도형장에서 탈출해 세상의 음지에서 사는 어둠의 사나이.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발자크가 확실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는 뤼시앵을 아마도 동성애적으로 사랑했던 모양이다. 사랑을 넘어선 숭배의 단계까지 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카를로스 신부는 에스테르를 뉘싱겐 남작에게 접근시켜 뜯어낸 돈으로 뤼시앵을 그랑뤼에 공작의 영애 클로틸드에게 장가들여 후작으로 만든 다음, 궁정 귀족이 되게 해주는 것이 삶의 가장 큰 목적이다. 그 이후에 뤼시앵이 여전히 에스테르를 향한 애정이 남아 있으면 그냥 라 파보리타la favorita, 정부 또는 정부 가운데 한 명으로 삼으면 그만이고.&nbsp; 그런데 세상에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하나라도 있간디? 밥은 다 지어가는데 그만 어쩌다 훌쩍 하는 바람에 콧물이 밥솥에 빠져버리고 만다. 만사 파투가 나버리고 이야기는 어느덧 카를로스 에레라 신부이자, 악당 보트랭이자 탈옥한 도형수 자크 콜랭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국면으로 접어든다.&nbsp; 발자크를 읽다보면 이이가 워낙 많은 작품을 쓰는 바람에 앞 뒤가 잘 맞지 않는 부분이 간혹 눈에 띈다. 이걸 다 까탈을 잡으면 발자크 읽기 쉽지 않다. 그런 건 그냥 패스하는 게 좋다. 일일이 시비하기엔 발자크의 이야기 솜씨가 너무 끝내줘서.<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94/73/cover150/893746489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947392</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누구나 자기 눈으로만 본다 - [견딜 수 없는 사랑]</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48271</link><pubDate>Mon, 22 Jun 2026 04:4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4827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72832988&TPaperId=1734827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317/26/coveroff/k77283298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72832988&TPaperId=1734827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견딜 수 없는 사랑</a><br/>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03월<br/></td></tr></table><br/>.&nbsp; 매큐언을 읽은지 벌써 두 해가 지났다. 이이를 떠올릴 때마다 조금씩 놀라는 건, 이이의 작품을 꽤 많이 읽었다고 여기고 지내건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거. 이름만 눈과 입에 익어 늘 친숙한 반면 정작 작품을 들이대면 별로 안 읽은, 글 좋은 작가가 이언 매큐언이다. 내 경우에 그렇다. 뭐 어쩌겠어? 팔자 또는 이이의 나의 인연이지.<br>&nbsp; 최근에 읽은 매큐언이 &lt;나 같은 기계&gt;인데, 한정판 가정용 로봇 사용기라고 생각하면 되는 조금 SF 소설이다. 그거 읽으면서, 매큐언이 이런 장르의 작품도 쓰는구나, 과학 분야로도 상당한 조예가 있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어제 읽은 &lt;견딜 수 없는 사랑&gt;도 주인공이 양자물리학 박사. 학위 취득 후 더 공부를 하려다가 자기한테 여차하면 세계적으로 대박을 칠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이 있어 몇 해 몰두한 일이 있었다. 세상의 컴퓨터 환경을 대폭 개선할 수 있는 뭔가를 개발해 동료와 함께 사업을 시작하고 세계 특허를 신청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네덜란드에서 한 업체가 주인공 조지프, 조 로즈의 개발품을 포함하는 더 큰 방식에 대하여 가까운 과거에 이미 특허를 신청해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사업을 접으니 이미 스물아홉 살. 조 로즈는 이십대 중반에 물리학 박사를 취득한 영재 수준이었지만, 영국의 탑 클래스 영재들만 빼곡하게 모인 물리학계에서 중도 이탈 경력이 있는 스물아홉 살의 연구자에게 남는 자리는 없었다. 어디에서도 하다못해 강사 자리를 제안하는 곳도 없었다. 그냥 놀고먹을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는 조는 이후 과학컬럼니스트 프리랜서를 시작했는데, 글재주가 있었던 모양이라 각종 잡지와 신문, 방송에서 연일 초대하고, 책도 높은 판매부수를 기록해 이제 런던에 집도 장만하고, 월세집이 아니라 자기 아파트도 한 채 사고, 비싼 자동차도 타고, 프랑스 와인도 집에 박스로 쟁여 놓고 마실 수 있는 정도가 됐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대학에서 하던 연구를 계속하면서 후학들을 기르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주장하는 건 아니고, 잠재적으로 깔려 있다.<br>&nbsp; 조 로즈의 정확한 나이는 밝히지 않는다. 마흔 후반부터 쉰 초반 정도. 지금은 대학에서 존 키츠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수 클래리사 맬론과 비혼, 미 출산 동거를 하고 있다. 클래리사는 안식년을 맞아 키츠 연구에 박차를 가해 6주간 보스톤에 가서 자료를 더 파보고 돌아왔거나 아직 착륙하지 않았다. 이 6주는 조가 클래리사를 만나고 두 사람이 떨어져 있던 가장 오랜 시간이었으며, 그리 길지 않았던 기간이었음에도 로즈 박사는 클래리사가 보고싶어 안달을 했었다. 그리하여 히스로 공항에서 클래리사를 싣고 런던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칠턴스 언덕으로 소풍을 가기로 약속했다.&nbsp; 조는 소풍을 위하여 코벤트가든의 카를루치오 레스토랑에서 소풍 가서 먹을 이탈리아 요리를 테이크아웃 구입하고, 유명한 버트럼로타 서점에 들러 미리 주문한 존 키츠의 초판본 시집을, 조가 살면서 무엇을 사 본 가운데 아파트, 차에 이어 세번째로 비싼 값을 주고 클래리사 생일 선물로 구입했다. 오늘이 클래리사 생일은 아니다. 아직 몇 달 남았다. 그럼 소설이니까 이 커플이 몇 달 남은 클래리사 생일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독자는 정상이다. 소설 속에서 시간에 정신 제대로 박힌 상태로 흘러가는 법이란 없다. 소설작법 8장 5절인가 9절에 나온다. 오늘은 알려드리지. 클래리사 생일날, 클래리사의 대부와 조, 이렇게 세 명이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으며 이 책을 선물한다. 뭐 신문에 날 정도의 작지 않은 사건이 하나 생기기는 하지만, 말했듯이 소설이잖아?<br>&nbsp; 하여간 조는 히스로 공항 대기실에서 기다리다 도착한 클래리사를 만나 가볍게 키스를 하고 곧바로 칠턴스 언덕으로 향했다. 날은 좋은데 바람이 심상치 않다. 이런 날에 40만평방미터가 넘는 넓은 벌판 위로 누군가가 기구를 띄웠다. 기구가 떠 있는 150미터 상공의 바람은 또 지표하고 다를 것이 분명한데 좀 내려왔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조와 클래리사가 했을 지는 모르겠다. 자기들도 일단 심하게 부는 바람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떡갈나무 숲 속으로 들어가야 했으니.&nbsp; 바람이란 게 계속 심하게 불지는 않아 어느정도 잠잠해져 둘은 큰 떡갈나무 아래 매트를 깔고 이탈리아 음식과 1987년산 도마스 가삭의 마개를 따려고 했다. 클래리사가 병을 잡고 있고, 조가 한 손에 따개를 들고 다른 한 손이 병 입구를 포장한 검고 얇은 포일에 닿는 순간, 이 소설을 복잡하게 만들 사건이 벌어진다.&nbsp; 2백미터는 족히 떨어진 곳에서 들려온 고함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조는 와인 오프너를 떨어뜨리고 벌떡 일어나,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다음 동작을 결정하고, 즉, 떡갈나무 아래에서 이른 봄날의 풀밭과 아름다운 연인이 주는 행복을 잠깐 보류한 채 벌판에 거의 내려왔지만 강하게 불어닥친 바람에 기울어진 기구를 지탱하기 위하여 지지 말뚝의 밧줄 고리에 발을 감고, 기구 바구니와 연결된 밧줄을 잡은 채 버티고 있는 조종사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기구는 자꾸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려 하고, 기구 바구니에서는, 조가 그쪽으로 달려가면서 들으니, 기껏해야 열 살 정도 되는 아이가 히스테리 상태가 되어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nbsp; 벌판의 외곽엔 초고압 송전탑과 전기줄이 지나가고 있어 기구 조종을 하지 못하는 거대한 풍선이 송전탑이나 전선에 걸릴 수 있다는 충분한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사람이 조종할 수 없는 기구가 바구니 안의 아이를 어느 곳까지 데려갈 지도 모르고, 헬륨가스로 충만한 풍선이 그대로 상승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터져버릴 것이고, 그 이전에 아이는 얼어 죽거나, 산소 부족으로 질식해 죽을 것이 분명하다.<br>&nbsp; 그리하여 달려가기 시작한 조. 조의 눈에는 농장 경계에서 울타리 작업을 하던 두 명의 일꾼도 조가 가는 방향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고, 조와 반대편 언덕 위에 문을 활짝 연 승용차에서도 한 명의 남자가 뛰어오고 있었으며, 다른 젊은 남자도 한 명 보였다. 여기에 기구 조종사까지 합한 여섯 명의 남자들은 각자 기구와 기구 바구니에 연결된 줄을 잡고 기구를 날아가지 못하게 힘껏 당기기 시작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이 여섯 명을 통제하는 리더가 없었다는 것이었다.&nbsp; 여섯 명은 각자가 생각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모두 한 방식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했는데, 문제는 각자의 주장이 죄다 서로 달랐다는 점. 기구 고정 말뚝에 밧줄을 붙잡아 매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고, 일단 기구가 날지 못하게 한 쪽으로 당겨야 한다는 주장은 두어 명이 했던 것 같았고, 다른 두어 명은 무엇보다 바구니 안에서 울고 있는 아이부터 꺼내야 한다고 큰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세게 불어 닥치는 바람의 소리가 강해 모두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야 의사소통이 가능했는데, 그것도 여섯 명 모두 아드레날린이 극도로 분비되고 있던 와중이라 자신의 생각을 부르짖을 뿐이지 다른 목소리를 듣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그 방식대로 따라할 여유는 찾지 못했다.&nbsp; 이 사건만 묘사하려고 해도 무척 많은 분량이 필요하다. 중간은 다 생략해야겠다.&nbsp; 갑자기 돌풍이 불어닥쳤다. 나중에 방송을 들으니 시속 110km 이상의 풍속이었다고. 그래서 여섯 명의 구조자 모두 바구니와 연결된 밧줄을 잡고 버티고 있었는데, 기구가 바람에 떠오르기 시작했던 거다. (나는 여기서 밧줄 말뚝과 다리를 연결한 조종사이자 바구니 속 아이의 할아버지의 다리가 찢어질 줄 알았는데) 여섯 명 모두 밧줄을 잡은 채 기구와 함께 떠오르기 시작했다.&nbsp; 어떻게 할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여섯 명 모두 이 생각을 했겠지. 과학컬럼니스트 조 로즈는 어느 순간 힘이 빠졌는지, 벌써 지상에서 3~4미터 떠올라 겁이 덜컥 나서 그랬는지, 그것도 아니면 옆에서 밧줄을 쥐고 매달려 있던 58세의 농장 잡역부 토비 그린이 밧줄을 놓고 땅 위로 떨어지는 걸 보고 덩달아 힘이 빠져 자신도 줄을 놓쳐 버렸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투두둑. 모두 떨어졌다. 단 한 사람. 옥스퍼드에 사는 42세의 일반 개업의이며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 카운티 대회에 나갈 수준의 테니스 실력을 가지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웨스트 하이랜드 산악구조대 출신의 존 로건. 그만 끝까지 기구의 줄에 매달린 채, 기구, 바구니, 바구니 속의 아이와 함께 까마득하게 치솟고 있었다.&nbsp; 그리고, 눈으로 봐서 한 백미터 정도 높이까지 올라간 순간, 작은 작대기 모양의 존 로건은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진공상태라면 1초에 9.8미터. H = g(t^2) 2초면 39미터, 3초에 88미터. 닥터 로건은 3초가 조금 지나 양떼가 풀을 뜯는 칠턴스 언덕 부근의 넓은 벌판에 거의 선 자세로 떨어져 즉사해버렸다.<br>&nbsp; 아이는? 공황상태에 빠져 바구니에 엎드려 울기만 할 뿐 아무런 움직임이 없던 아이는, 사실 여러 명의 어른들이 고함을 치고 사나운 얼굴을 하는 바람에 문제해결능력과 생존본능이 완전히 사라지는 “학습된 무기력상태”에 빠져 있었던 거였다. 그러다 기구가 상승하고 주변이 조용해지자 차츰 정신을 차려 할아버지한테 배운 비상시 조치방법이 떠올라 바구니 안에 달린 밸브를 조종해 기구 속 헬륨을 배출해서 약 2km 떨어진 벌판에 무사하게 착륙했다. 로건 씨 외에 농장 잡역부 그린씨만 4미터 위에서 떨어지며 다리가 부러졌을 뿐 나머지는 무사했다.&nbsp; 그러나, 마음 속 상처는? 이 사건 때문에 새롭게 발병한 소위 드클레랑보 증후군은? 정말 드클레랑보 증후군이라는 질환이 있다면 말이지만. 이렇게 시작한다. 이런 배경으로 사람과 사람 사는 일이 얽히기 시작한다. 즉, 서론이 이만큼 길었다는 뜻이다.&nbsp; 생선으로 치면 이언 매큐언 정도면 준치급. 썩어도 준치다. 이름만 믿고 아무거나 읽어도 재미와 입심은 보장한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1317/26/cover150/k77283298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3172613</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영업은 독자가 한다 - [월영시장 - 설재인 연작소설집]</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43045</link><pubDate>Fri, 19 Jun 2026 05:2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4304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2667&TPaperId=1734304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659/32/coveroff/893204266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2667&TPaperId=1734304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월영시장 - 설재인 연작소설집</a><br/>설재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03월<br/></td></tr></table><br/>.&nbsp; 1989년생. 자랑은 아니지만 어려서는 머리가 커서 걸음마를 늦게 뗐다고. 뇌 용량이 크니까 공부를 제법 해 서울대 수학교육과를 졸업하고 특목고에서 수학교사를 몇 년 했다. 그런데 특목고 수학교사라는 직업이란 자라나는 청소년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 대부분이라 염증을 느껴 아무 대책 없이 사표를 내고 말았단다. 그 후겠지? 20대 중반까지는 “운동이란 ㅇ”도 몰랐던 설재인은 어쩌다 보니 복싱을 시작해 지금은 복싱을 한 세월이 수학교육을 한 시간보다 더 길다고. 즉 지금은 뛰고 때리고 막고 피하는 소설가라는 말씀.&nbsp; 책가게의 작가 소개는 이렇게 시작한다.&nbsp; “말을 최대한 줄인 채 사람을 염탐하는 몹시 음침한 사람.”&nbsp; 젊은 작가? 아휴, 아니다. 37세가 무슨 젊은 작가. 이미 완숙해서 전성기를 구가할 시기. 이 책을 냈을 때는 서른다섯. 소설쓰기 딱 좋은 시절일세.&nbsp; 《월영시장》을 재미있게 읽었다. 이이 또래의 작가군群이 쓴 소설책 가운데 오랜만에 “읽는 재미”가 쏠쏠해서 책 읽는 동안 기분이 좋았다. 저 오래전, 이 책보다 22년 전, 지금부터 24년 전 가상의 월영시장이 아니라 진짜로 영등포시장의 한 밥집 삼오식당의 “딸램” 이명랑이 쓴 명랑한 소설책 《삼오식당》이 딱 생각났다. 사는 모양이야 진짜 밥집 딸이었던 이명랑이 더 생명력이 있지만(삼오식당 주인 아주머니는 뭐 하실까? 늘 건강하시기 바란다), 설재인은 또 다른 모양새로 통통 튀는 매력이 가득했다. 이런 소설을 좀 더 많은 작가들이 쓸 수 없나? 만날 우거지 궁상 떠는 모습만 보다가 없는 사람들의 따듯하니 눙치는 은근한 궁상을 읽으니 그것 참 괜찮네.<br>&nbsp; 월영시장은 작가의 말에 의하면, 서울의 가장 서쪽, 김포공항과 담벼락을 마주한 서울 S동의 시장을 모델로 해서 썼다고 한다. 설재인이 2023년 초에 “청년머시기임대주택”에 당첨되어 (아마도 무척 기뻐서 그랬겠지?) 직접 찾아가 본 S동, 머리 위로 비행기가 1분에 몇 대씩 낮게 날기 시작하는 곳에 S시장이 있었고, 그때까지 국밥이 6천원, 소주 한 병에 4천원 하던 식당이 있었는데, 오후 한시였나 하긴 오전 열한시면 어떻고 아침 다섯시면 어떻겠느냐만, 벌써 나이 좀 자신 아저씨들이 소주 또는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있는 모습이 좋았던 모양이다.&nbsp; 그리하여 소설집의 제일 앞에 배치한 작품 &lt;딸램들&gt;의 주인공이 “40년 된 건물에 들어선 20년 된 자근포차”의 2년제 유아교육과를 다니는 “자근딸램” 동지. 동지. 사람 이름이다. 안동지. 즉 동지가 아니라는 뜻? 그건 아니고 그냥 동지. 나이 지긋한 거대한 몸에 커다랗게 외양으로 위압하지만 순하디 순한 사냥개를 끌고 산보를 다니는 가발의 사나이 김제혁 씨 같은 사람들이 이 몸집 작은 아이한테 “동지”라고 부르기 머시기하니까 그냥 “자근딸램!”하던 것이 모든 시장 사람들의 입에 붙어버린 거다.&nbsp; 이제 20대 초반의 동지가 가게 자근포차에 들어서는 걸 딱 엄마가 보더니 하시는 말씀이:&nbsp; “너 어디서 처자고 지금 기어 들어와, 기어 들어오길.”&nbsp; 동지가 냅다 내쏜다.&nbsp; “문자 보냈거든? 무려 어젯밤 9시에?”&nbsp; 흠. 문득 궁금하다. 동지가 어젯밤 9시를 “어젯밤 아홉시에?”라고 했을까, “어젯밤 구시에?”라고 했을까? 어떤 경우라도 하여간 동지, 이 기지배가 외박하고 온 건 맞지? 그러나 기대하지 마시라. 진짜로 친구 집에서 공부하고 왔다. 시험이 낼 모레다. 비록 엉망으로 망칠 예정이지만.&nbsp; 이 자근포차는 월영시장에서 아주 유명하다. 매일 아침 10시에 문을 열어서 다음 날 새벽 3시에 문을 닫는다. 설재인은 “아침 열 시에 문을 열어서”라고 할까 “아침 십 시에 문을 열어서”라고 할까? 아니면 자기는 “아침 10시에 문을 열어서”라고 쓰지만 독자는 “아침 열 시에 문을 열어서”라고 읽어 주거나, “아침 열 시에 문을 열어서” 또는 “아침 십 시에 문을 열어서”라고 읽거나 마음대로 하라고 신경쓰지 않거나, 어떤 경우일까? 아마 자기 소개에 “사람을 염탐하는 몹시 음침한 사람”이라고 한 걸 보니까 신경 안 쓰는 거 같다.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다.&nbsp; 이 자근딸램도 불만이 많다. 20여 년을 불만 가득한 생으로 살았고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다. 애정부족. 자신이 스스로 진단한 병명이다. 동지가 어려서부터 부부는 아이 돌보는 건 다음으로 하고 아침 십 시부터 새벽 삼 시까지 문을 열기 위하여, 그것도 조리된 가공음식이 아니라 물론 햄 소시지 같은 반찬도 있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을 직접 조리해 장만한 음식을 내놓는 장사에 말 그대로 매진해왔기 때문이다. 만일 동지 자신이 다른 아이들처럼 어려서부터 부모의 지극한 관심 아래 성장했다면 자기가 이 모양 이 꼴로 컸겠느냐, 하는 게 불만 가운데 상 불만.&nbsp; 근데 동지한테는 완전 골통 삼촌이 한 개 있다. 맞다 한 개. 멍멍이와 유사한 수준의 인간을 칭한다. 어떻게 딸 하나를 만들어 이름을 동윤이라고 하는데 지금 열 살. 학교도 보내지 않아 글씨도 쓸 줄 모른다. 때를 맞춰 마누라가 날랐는지 아이를 데려와 그냥 자근포차에 넘겨주고 가버렸다. 생각해보니 자기도 자기지만 동윤이한테 비교할 바가 아니다. 동윤이는 동지하고 친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독자는 이 작품의 결말이 동지하고 동윤이가 화해하는 장면이 되겠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까?<br>&nbsp; 이렇게 주로 빈민들로 구성한 월영동. 공항과 담벼락을 맞대고 있는 수준이라 고도제한이 있어 고층 건물도 없고, 높은 아파트도 없는 동네. 1분에 비행기가 몇 대나 저공비행하는 통에 무지 높은 데시벨의 항공 소음과 함께 “언제나 비행기가 성교하는 인간처럼 배를 보이며 지나”가는 동네이니만큼 빈민으로 구성된 곳에 유일하게 사람들이 비비대는 곳인 월영시장. 당연히 땀냄새, 개 오줌냄새, 음식냄새, 건강원 개소주, 고양이소주, 염소소주, 장어소주의 배릿한 냄새, 요즘말로 빈티지, 옛말로 구제 옷에서 나는 곰팡이내 같은 것도 나겠지만, 역시 돋보이는 건 비행기 소음 아래에서 단련된 사람들의 지극히 우렁차게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악쓰는 소리겠다.&nbsp; 삶의 악다구니. 그러나 건강하기도 하다. 남을 돌볼 줄 알고, 오지랖 넓다는 지청구를 들을지언정 남의 사정 좀 알아야겠고, 당연히 참견질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오래 전에는 흔히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술 한 잔도 나눌 수 있고, 가끔은 멱살을 쥐어 틀고 쌈박질도 할 수 있지만 딱 그만큼 화해술도 한 잔씩 하던 사람들. 그들을 볼 수 있는 21세기 우리나라에 몇 안 남은 동네. 월영시장이다.&nbsp; 한 배에서 나온 씨 다른 자매 형제 같은 작품들만 읽다가 설재인을 읽으니 그거 참 괜찮다.&nbsp; 눈에 힘을 줘서 다른 설재인도 또 읽어봐야겠다. 이제 전성기를 시작했으니 더 좋은 작품, 계속 써주었으면 좋겠다. 글만 쓰면 된다. 영업은 독자가 한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659/32/cover150/893204266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6593271</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1939년 세상의 시계가 멈출 무렵 지중해 - [공포로의 여행]</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41176</link><pubDate>Thu, 18 Jun 2026 05: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4117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270X&TPaperId=1734117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6535/20/coveroff/893291270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270X&TPaperId=1734117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공포로의 여행</a><br/>에릭 앰블러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02월<br/></td></tr></table><br/>.&nbsp; 에릭 앰블러, 재미있는 사람이다.&nbsp; 1909년 런던 근교에서 인형극을 하는 뮤직홀 아티스트 부부의 아들로 나서 런던 소재 공과대학에 들어가 배우다가 중도 작파하고 전기회사의 엔지니어 연수생으로 잠깐 일했다. 그러다가 애초에 부모한테 물려받은 예술인의 유전자가 힘을 발휘했는지 희곡을 쓰기 시작했고, 이어 점차 소설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한다.&nbsp; 20대에 광고대행사 카피라이터로 일하다가 그것도 때려치우고 파리에 가, 미국에서 온 패션 특파원 여성을 만나 1939년에 결혼해 19년을 살고 이혼했다. 1939년? 이해 8월에 나치 독일과 소련, 즉 히틀러와 스탈린이 서로 불가침 협약을 맺었는데, 평소 강한 반파시스트였던 에릭 앰블러는 파시즘의 확장을 가장 강력하게 저지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소련인 줄 알았다가 그야말로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게다가 독-소 조약을 맺고 보름도 지나지 않은 9월 1일에 세상의 시계가 멈춘 일이 벌어진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 2차 세계대전이 터져버린 거였다. 물론 프랑스, 영국 등 서유럽은 한 2년 전부터 전쟁의 기미를 알아채 너나할 것 없이 군비확장을 해오긴 했지만 정말로 전쟁이 이렇게 쉽게 터질 줄은 몰랐을 걸?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하고, 아직 프랑스를 향해 전차의 포구를 돌리지 않았을 무렵. 이때가 앰블러의 장편소설 &lt;공포로의 여행&gt;의 시간적 배경이다.&nbsp;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에릭 앰블러는 1940년에 이 소설 &lt;공포로의 여행&gt;을 쓰고, 1941년에 왕립 포병대의 말단 사병으로 지원 입대하니 그의 나이 32세. 이후 사진 부대를 거쳐 전쟁이 끝나고는 육군 영화 및 사진 부대장 중령 신분으로 제대했다.&nbsp; 이러니 소련에 대해 감정이 좋을 수 없을 터. 기껏 믿었다가 발등을 찍힌 경우니까 그냥 반공주의자보다 더 강력한 반공주의자가 된 것도 이해할 만하다. 민간인으로 돌아온 앰블러는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했고, 1951년부터 자기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해, 지금은 모르겠고 당시엔 스파이 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렸다고.&nbsp; 이이의 다른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한 책으로 열린책들 세계문학시리즈 248번 &lt;디미트리오스의 가면&gt;이 있다. 여태 읽은 줄 알고 그냥 지나친 책인데, 안 읽었다. 다음에 읽어야지.<br>&nbsp; &lt;공포로의 여행&gt; 역시 스파이 소설. 독일과 튀르키예, 소설 속에서는 “터키”의 스파이들이 출연하지만 주인공은 스파이가 아니고 앰블러처럼 공과대학을 졸업해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마흔 살의 몸과 마음이 건강한 남성, 그레이엄이다. 그런데도 스파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이의 직장이 “카터 앤드 블리스 컴퍼니” 영국의 거대 무기 제조회사이며, 무기 가운데 대포 관련 분야의 꽤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각종 대포를 다 연구한다. 소설 속에서는 한때 전쟁을 벌였지만 지금은 독일의 침공을 대비해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은 터키 해군의 함포 성능 개선을 위한 프로젝트에 힘을 쏟고 있다. 회사의 핵심 멤버답게 높은 연봉을 받고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시골의 아름다운 집에서 모두가 좋아하는 어여쁜 아내 스테퍼니와의 사이에 토끼 같은 아이들을 두고 있다.&nbsp; 1939년 9월이 왔다. 이건 그레이엄에게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 다만 더 많은 업무를 해야 한다는 뜻만 있었을 뿐. 그래 영국-터키 조약 3주 후에 앞에서 말한 프로젝트 건으로 터키로 출장을 가게 된 것. 목적은 터키 해군의 함포와 어뢰를 재무장하는 것이었는데, 당연히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독일과 동맹을 맺은 소련은 터키의 해군 무장 강화를 좋아하지 않았겠지?&nbsp; 하여간 그렇게 그레이엄은 터키에 갔고, 업무를 다 마쳤으며, 이제 다시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거쳐 귀국을 해야 했는데, 때를 맞춰 터키에 큰 지진이 나 1주 전에 터키 갈리폴리까지 갔다가 이스탄불로 되돌아온 터였다.<br>&nbsp; 억지로 잠깐 이스탄불에 머물러야 하는 그레이엄은 왕짜증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집에 돌아가서 스테퍼니와 함께 1월 1일, 신년을 맞아야 하겠기에. 그러려면 내일 당장 기차를 타고 다시 귀국길에 올라야 한다. 이제 터키에서의 마지막 날.&nbsp; 이스탄불 현지에 무기회사 “카터 앤드 블리스 컴퍼니”와 터키 정부의 중개인이 있다. 코페이킨. 1924년에 러시아인들 6만5천 명과 함께 이주해온 백군 출신으로 보인다. 카드놀이 사기꾼, 매춘굴 공동운영, 군복 공급 계약자를 거쳐 지금의 자리까지 온, 약삭빠르고 잔꾀에 능한 인물이다. 코페이킨은 그레이엄의 터키에서의 마지막 날을 자신이 접대해야 한다고 고집이다. 저녁은 물론이고, 내일 새벽까지 이미 르 조케 카바레의 제일 좋은 좌석을 예약했다고 알렸다. 내일 먼 길을 떠나야 하는 그레이엄은 일찍 호텔로 가서 자고 싶지만 이를 물리치기 어렵다.&nbsp; 레스토랑과 카바레. 당연히 사건은 카바레에서 시작한다.&nbsp; 카바레의 한 구석에는 파트너 없이 온 남자 손님 접대를 위한 여성들이 앉아 있다. 코페이킨이 보기에 그레이엄이 이런 방면으로는 잼병이라 자신이 여성들한테 먼저 접근해 알렉산드리아의 매춘부 출신이지만 똑똑하기 이를 데 없는 마리아를 데려온다. 그레이엄이 술도 한잔 하고, 시간이 좀 지나 마리아와 함께 춤을 추게 되었을 때, 마리아가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바에 앉은 구겨진 양복을 입은 작은 체구의 남자가 계속 그레이엄을 쳐다보고 있었다고.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전혀 감이 없는 그레이엄은 이를 무시한다. 춤을 추며 바로 접근해 그 남자를 관찰해보니 이런 생각이 더 강해진다. 저 코딱지 만한 놈이? 마리아가 다시 말한다.&nbsp; “당신이 더 강하겠지만 등에 칼이 꽂히면 그걸로 몽땅 끝나는 거랍니다.”&nbsp; 1940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이건 틀림없이 복선이겠지? 맞다. 구겨진 양복의 남자의 이름은 페토레 바나트. 전문 킬러. 소피아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알려진 독일 스파이 뮐러에게 고용되어 1주일 전에 갈리폴리에서 그레이엄을 칼로 살해하려다 아주 약간의 시간 차이 때문에 실패하는 바람에 자존심이 확 구겨져버린 프로페셔널 청부 살인자이다.<br>&nbsp; 하여간 그건 나중 일이고, 카바레 르 조케에서 그레이엄은 또 한 명의 여성을 만나니, 이 밤의 쇼 가운데 하이라이트인 커플 댄스의 주인공 조제트. 호세와 계약상 혼인 관계에 있고, 여기서 말한 계약은 비즈니스 상 계약이라는데 소설이 끝날 쯤에 알게 되는 바, 포주-매춘부의 비즈니스와 유사하다.&nbsp; 문제는 조제트가 겁나게 아름답다는 것이지.&nbsp; 하여간 카바레에서는 새벽이 될 때까지 즐겁게 놀기만 한다. 눈매가 맵고 똑똑하기 이를 데 없는 마리아가 2차 가자고 하는 걸 좀 많은 팁과 함께 기분 나쁘지 않은 말로 거절한 그레이엄은 코페이킨의 차에 타고 자기가 묵는 페기 가street 애들러 팰리스 호텔로 들어간다. 1939년 터키 호텔에서는 아무리 유명호텔이라 하더라도 늦은 밤에는 엘리베이터가 가동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 어두운 계단을 올라 3층 자기 방에 도착해 열쇠를 돌려 열고 방에 들어가 오른손으로 조명 스위치를 더듬는 순간 방 저편 어둠속에서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벽의 회 조각이 파박, 떨어졌으며, 두번째 총성이 들렸을 때는 하얗게 달군 쇠막대가 그레이엄의 손등을 지지는 느낌이 났다. 이어서 다시 한번 섬광에 이어 총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3층 창문을 통해 방에서 탈출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누군지는 당연히 모른다.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nbsp; 그레이엄은 곧바로 호텔 부지배인을 호출하고, 의사가 도착했으며, 주인공이니만큼 초장이니까 총알이 손등에 가볍게 스치기만 해 응급처치와 붕대를 감는 것으로 끝났다. 이어 도착한 지배인이 모든 편의와 비용을 대겠으니 호텔의 명성을 위하여 경찰에 신고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뭐 당연하지.&nbsp;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달려온 코페이킨. 그가 그레이엄을 싣고 다시 모처로 데리고 갔다. 터키 소속의 일종의 정보부대. 대장이 하키 대령. 하키 대령은 내일 열차를 타고 귀국길에 오르면 그레이엄, 당신은 죽은 목숨이라고, 앞에서 내가 열라 이야기한 그레이엄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한다. 대신 하키 대령이 마련한 귀국행은 허름한 증기선. 화물 운송을 전업으로 하되 승객 몇 명에 한해 저렴한 비용으로 실어다 주는 배 세스트리 레반테호였다. 모든 스토리를 알게 된 그레이엄이 세스트리 레반테 호에 올라, 선실 담당 승무원이, 코페이킨이 그레이엄에게 준 리볼버 권총이 들어있는, 슈트케이스를 들고 승객용 문으로 들어서고, 그레이엄이 뒤따라 들어가 작은 선실 5호실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 스파이 극은 시작한다. 리볼버 권총? 코페이킨이 주었다고? 소설에 나와 있으니 언젠가는 한 번이라도 쏘겠네? 글쎄. 살다보면 혹시 안 그런 날도 하루쯤 있지 않겠어? 확인은 당신이 하시라. 비록 품절을 넘어 절판 상태이긴 하지만.<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6535/20/cover150/893291270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65352008</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노터봄의 과제, 죽음과 길 떠남 - [여우들은 밤에 찾아온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39319</link><pubDate>Wed, 17 Jun 2026 05:0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3931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77576&TPaperId=1733931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6682/65/coveroff/895467757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77576&TPaperId=1733931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여우들은 밤에 찾아온다</a><br/>세스 노터봄 지음, 김영중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03월<br/></td></tr></table><br/>.&nbsp; 여덟 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2009년에 출간한 책이니 노터봄의 나이 76세 때. 계유생이지만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 지금 92세네.&nbsp; 나이 일흔여섯이면 이제 죽음이 보이려나? 그럴 수 있겠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근데 가끔 죽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는 한다. 이제 몇 년 남지 않았겠구나. 뭐 이런 생각. 가끔은 얼른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고. 사는 게 다 그런 거지.&nbsp; 나는 전혀 들춰보지 않는데 노터봄은 가끔 앨범을 넘기는 모양이다.&nbsp; 어떻게 영정사진 이야기가 나왔다. 이제는 젊은 시절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쓰고 싶다는 의견이 꽤 많다. 더 보기 좋으니까. 몇 살 때 찍은 거? 너무 젊으면 또 그러니까 한 마흔에서 쉰 사이가 좋을 듯하단다. 난 싫다. 지금쯤 찍은 게 더 좋다. 마흔에서 쉰 넘어까지 예순에도 너무 뚱뚱했다. 지금 살이 쏙 빠지니까 보기 좋다. 쪼글쪼글해도 마음에 든다. 뚱보들이여, 무지 힘든 건 내가 해봐서 아는데, 살 좀 빼 봐라.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다. 다만 입던 옷 다 버리고 새 옷 사야 해서 돈이 좀 든다. 살 빼는 게 무지 힘들어서, 그래서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진짜로 20kg 뺀 걸 자랑하고 싶다. 괜찮지? 귀엽게 봐줘.<br>&nbsp; 노터봄, 하면 여행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도 고향 네덜란드 이야기는 별로 나오지 않는다. 세계를 다니며 여러 나라 사람들과 마주치고, 어울리고, 사진찍고, 기억하고, 기념한다.<br>&nbsp; 제일 앞에 실린 &lt;곤돌라&gt;. 곤돌라니까 이탈리아 베네치아 이야기일 터.&nbsp; 막이 올라가면 암스테르담 출신 예술담당 프리랜서 기자가 베네치아에서, 캘리포니아 밀스밸리에서 온 1960년대 플라워파워 시대의 여자 아이와, 그리스 해안에서 만났다. 기자는 일종의 이혼 기념 여행이었다. 이혼한 것을 딱하게 여긴 친구들이 그리스 어느 섬에 있는 한 친구 소유의 집을 소개해주어 떠난 길이었다. 그 섬에서 만났다. 이탈리아 이름을 가진 미국인. 열여섯? 열여덟? 뒤에 정확한 나이가 나오는데 열일곱이었다. 손과 팔에 12궁 별자리를 문신한 자칭 마법사 소녀. 마녀는 그의 집에서 묵기로 했다. 같이 자되 잠자리는 하지 않는 조건으로.&nbsp; 프리랜서 기자는 이혼남. 이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욕망이 끓었단다. 기자 입장에선 약속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시도조차 안 해보는 것도 찜찜했겠다. 마녀의 머리를 잡고 키스를 했고, 입술을 떼자마자 마녀는 손으로 그를 밀어내고 마법의 힘인 것처럼 곧 잠에 빠져들었다.&nbsp; 그리스의 섬에서 며칠 지낸 기자와 마녀는 기차를 타고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 가서 하루 묵는다. 맥주집에서 슬로보비치라는 술도 마시고 빈 잔을 어깨 넘어 깨뜨려 우정을 쌓기도 했다. 다음날 다시 기차에 올라 베네치아로 갔다. 어느 호텔에 묵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마녀의 사진을 어디서 찍었는지는 안다. 원양어선도 묶어둘 수 있는 선박 계류용 말뚝. 그 위에 올라 앉은 열일곱 살짜리 작은 아가씨. 여러 사진 가운데 한 장.&nbsp; 그러나 이것이 40년 전 이야기이다.&nbsp; 세월은 흐른다. 그간 암스테르담에서 청탁을 받아 글을 하나 썼다. 많은 글을 썼는데 하필이면 이 글을 미국에 사는 예전의 그리스-유고슬라비아-베네치아 마녀가 보고 읽었다. 네덜란드 화가,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이너, 그래픽 아티스트인 야코바 판 헤임스케르크에 대해 그가 기고한 평론을. 옛 아가씨도 간혹 기자를 생각해왔는데 마침 글과 이름을 만나니 반가웠겠지. 그래서 기자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 속에는 사진도 두 장이 동봉되어 있었다. 마녀는 결혼을 했다가 이혼했으며 아들이 둘 있고, 야코바 판 헤임스케르크 같은 그림을 그리며 산다면서. 마녀의 얼굴은 명상 센터의 벽면에 걸릴 법한 얼굴의 여인. 집 인근의 수도원에서 큰 위안을 찾았으며 불교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알려왔다.&nbsp; 기자는 옛 시절의 마녀를 만나러 갔고,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드디어 만났다. 한순간 서로를 평가하는 번개같이 빠른 눈빛을 교환했으며, 극도의 날카로움이 담긴 내적 사진, 눈가 주름, 붉은 빛이 도는 머리칼, 갑작스런 연민과 다정함을 부르는 세월의 흔적 또는 할퀸 자국을 확인했다. 그녀는 편지를 써야 한다는 암시를 받아 그렇게 했을 뿐 그가 정말로 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왔다. 와 버렸다.<br>&nbsp; 마녀를 만나고 시간이 더 지났다. 20년. 그동안 마녀는 죽었다. 기자는 편지를 주머니에 넣어 베네치아에 왔다. 사진을 찍은 곳. 베네치아의 석호 계단. 마녀의 사진들 가운데 한 장을. 기자는 편지를 읽지 않은 채 석호에다 슬쩍 버렸다. 뒤에서 누군가 그걸 보고 말했다.&nbsp; “석호가 편지를 버리는 쓰레기통이로군.”&nbsp; 석호에다 편지를 버린 남자가 기자 한 명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세상 누구라도 비슷한 추억이 있었던 것이겠지.<br>&nbsp; 이렇게 죽음을 주제로 하는 작품 여덟 편. 그런데 “여우들은 밤에 찾아온다”고?&nbsp; 그렇다. 예전에 할머니가 해준 이야기. 어둠 속의 두려움. 어둠 속에서만 찾아오는 당신에 대한 두려움. 이미 죽은 당신의 이야기. 당신의 등장, 당신의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 그것 모두 그냥 여우라고 해 두자. 죽음과 죽은 다음에 관한 책. 그리하여 여우는 밤에만 찾아온다고 할머니가 저 옛날 화롯가에서 말씀하셨지. 얘야, 여우는 밤에 찾아온단다. 그러니 얼른 자거라. 자장자장 자장자장… 자장자장 자장 자장….<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6682/65/cover150/895467757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66826567</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탁월했던 미치광이 부르주아 남작님 - [비트겐슈타인의 조카]</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37408</link><pubDate>Tue, 16 Jun 2026 05: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3740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42830272&TPaperId=1733740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440/46/coveroff/k44283027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42830272&TPaperId=1733740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비트겐슈타인의 조카</a><br/>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22년 11월<br/></td></tr></table><br/>.&nbsp;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두 권을 읽었는데 모두 10년을 훌쩍 지나버렸다. 두 권 가운데 &lt;소멸&gt;은 책을 붙들고 금요일 밤 꼬박 새워 읽었다는 것 말고는 전혀 기억나지 않고, &lt;몰락하는 자&gt;는 하필이면 글렌 굴드와 동문수학하게 된 두 명의 피아니스트가 천재 굴드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게 되는 이야기 정도로만 남아 있다. 둘 가운데 한 명이 아마 목매달아 죽어버리지? 이 수준이다. &lt;소멸&gt;은 독후감 쓰기 시작한 초기에 읽어서 작품의 정보도 제대로 써놓지 않았다. 당시에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조국인 오스트리아와 대판 쌈박질 한 번 하고 정나미가 뚝 떨어져 자기가 쓴 무슨 책을 오스트리아에서 출판하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거 같다. 그게 시간이 지나니까 아 씨, 나 죽기 전에 조국 오스트리아 땅을 밟지 않을 거야, 이렇게 희뿌연 기억이 자가발전을 해 여태 오해하고 있었고. 그러니 누구나 자신의 기억을 믿으면 안 된다. 그래서 기록을 해 놓아야 하는 법이다. 일기를 써라. 일기 속엔 거짓이 없다고 할 수 없어도 제일 작은 거짓을 적었을 터이니 가장 정확한 기억일 터.<br>&nbsp; 작품은 오스트리아의 국가대표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5촌 조카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토마스 베른하르트 작가 본인. 이렇게 두 명이 주인공이고, 이 둘의 우정 주변에 있던 인물 몇 명이 조연으로 우정출연한다. 알다시피 베른하르트는 결핵을 품고 살았다. 하필이면 폐 근처에 있는 심장까지 좋지 않아 평생 고생한 거 같은데, 결국 1989년에 58세의 나이로 심장에 문제가 생겨서, 갔다.&nbsp; 죽기전에 병 때문에 황천길 제일 가까운 곳까지 갔다가 다시 온 경험이 있다. 빈Wien 서쪽에 드넓게 펼쳐진 빌헬미네 산지를 두 구역으로 나누어 불렀는데 하나는 베른하르트가 입원한 폐병 환자들을 위한 작은 구역인 ‘바움가르트너회에’이고, 넓은 구역은 ‘암 슈타인호프’라고 하는 정신질환자들을 위한 구역이었다. 이곳 병동은 전부 남자 이름을 붙인 건물이어서 베른하르트가 길어야 한 두 달 정도 더 살 수 있다고 판정을 받아 일생일대 큰 수술을 받은 곳이 헤르만 병동이었고, 하필이연 같은 시기에 약 5백미터 떨어진 암 슈타인호프의 루트비히 병동에 ‘수감’되어 악명높은 전기치료 같은 걸 감내하고 있던 이가 파울 비트겐슈타인이었다.<br>&nbsp; 파울이 베른하르트(이하 “토마스”)와 친하게 지내게 된 건 음악 때문이었다. 빈의 블루멘슈톡가세, 여기서 ‘가세Gasse’는 큰 길 말고 좁은 거리나 골목 같은 걸 칭하는 말로, 하여간 그곳에 음악에 대단한 관심, 아마도 프로페셔널한 비평을 할 수준의 소양이 있는 여성 이리나의 집이 있어서 토마스가 불쑥 찾아 갔더니 마침 카를 슈리히트가 지휘한 런던 필하모닉의 하프너 교향곡에 관해 이리나와 파울이 열라 재미있게 토론을 하고 있었나 보다.&nbsp; 책에는 슈리히트라고 성姓만 부르는데, 이이는 19세기에 출생해 20세기 중반에 전성기를 구가한 지휘자이다. 나치가 집권하고 전쟁에 돌입하자 스위스로 몸을 피했다가 종전 후 주로 독일에서 연주한 걸로. 우리나라 클래식 골수팬들 가운데 이이가 연주한 베토벤을 제일 좋아한다고 떠드는 사람도 많다. 음악 포털 “고전은 가라”에 가보시면 꽤 모여 있을 듯.&nbsp; 이 슈리히트가 언제 죽었느냐 하면 1967년 1월. 그러니까 토마스는 폐병 병동에, 파울은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을 때 죽은 사람이다. 하여간 토마스가 몇 년 전에 이리나의 집에서 자기도 무척 좋아하는 하프너 교향곡, 모차르트 K.385 공연을 직접 관람한 바로 그 공연에 대해 침을 튀었으니 방에 모인 세 명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슈리히트와 모차르트와 K.385 찬양에 날밤을 새웠다는 거 아니냐.&nbsp; 흠. 나는 모차르트 교향곡 중에서는 딱 두 개밖에 없는 단조, 그것도 우연히 둘 다 사단조 교향곡인 25번과 40번이 좋던데 말이지. 특히 40번 3악장의 미뉴에트, 경쾌한 발랄함이라니!<br>&nbsp; 그런데 토마스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 하면, 뭐 독자야 작가가 하는 말을 웬만큼 믿을 수밖에 없지만, 이 파울 비트겐슈타인으로 말씀드리자면, 당대 최고 수준의 음악과 문학과 철학과 미술과 수학과 기타 등등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뇌활동에 관한 한 거의 최고 정점에 위치한 인물로,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탁월한 자”의 수준에 완벽하게 도달한 인물이다. 그리고 겸양의 말씀이겠지만 자신,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이 파울 비트겐슈타인에 조금, 아주 조금 미치지 못하는 수준의 약간 덜 탁월한 자이고.&nbsp; 게다가 파울은 무기 제작 회사를 가업으로 하는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직접 상속자로 어마어마어마한 재산을 상속받은 백만장자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젊음을 소진한 중년이었다가 나중에는 노년이 되고 결국 그렇게 죽는 인간으로, 살면서 노동이란, 그 많던 재산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는 불쌍한 사람들한테 다 나누어 주거나 사기도 당하면서 완벽하게 거덜이 난 상태에서 이때는 벌써 낼 모래 환갑상 받을 때인데 처음 보험회사 사무직으로 ‘취직 당해’ 근무해본 것이 유일하다.&nbsp; 음악을 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아해 모든 오페라하우스의 시즌을 다 경험해보기 위하여 세계일주를 감행했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쓴 &lt;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gt;에서 체르비네타 역과 모차르트의 &lt;마술피리&gt;에서 밤의 여왕을 노래한 미국 소프라노를 애인으로 두기도 했다. 자기가 언제나 묵을 수 있는 호수가 딸린 대지가 있는데, 호수 위에 수상 무대를 짓고 그 무대에서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R. 슈트라우스의 &lt;그림자 없는 여인&gt;을 공연하는 걸 결국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되는 사람. 말러와 브루크너와 바그너 같은 대규모 편성을 좋아하다가 나중에, 내가 보기에는 너무 늦게 실내악으로 되돌아가 줄리아드 사중주단과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을 즐겨 듣게 되었을 때는 이 백만장자 거부가 방 하나에 부엌, 화장실과 작은 욕실이 달린, 언제나 고장나 있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의 꼭대기에 씻지 않은 접시가 쌓인 산더미와, 빨래하지 않은 천들이 널부러져 무더기 지어 있는 욕실에서, 부자 친척이 입다 버린 고급 비단 옷을 입고 남의 눈에 띌 새라 장 본 것을 비닐 봉지에 담아 비척거리며 계단을 올라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죽었다. 이때가 1979년.<br>&nbsp; 3년이 더 흘러 1982년.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자신이 말하기를 거의 유일한 친구였던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했던 1967년부터 1979년까지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이제 내가 읽었다. 2026년에. 그리하여 이들과 나 사이에는 화해하기 어려운 배타적인 매개체, 시간이 놓여 있다. 나름대로 받아들이려 감안은 하겠지만 그래도 쉽지는 않다.&nbsp; 이 책을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내 스타일을 버렸다. 메모하지 않았다. 대신 책갈피를 몇 장 꽂았다. 첫 번째 책갈피가 42쪽에 꽂혀있다.<br>&nbsp; “그를 만나지 못하는 동안 나는 참으로 파울의 머리가 그리웠다. 그동안 수백 개의 다른 머리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유감스럽게도 오직 앙상하고 황폐하기만 한 그 머리들 때문에 질식할 만큼 괴로웠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흔하게 마주치는 머리들을 상대하는 것은 다 자란 감자 알갱이들과 대화하는 것처럼 지루할 뿐이다.”<br>&nbsp; 그러니까 월등한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자기보다 눈썹만큼 더 월등한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제외한 오스트리아 빈에 사는 (아마도 지식계층) 사람들의 지능수준이 그저 다 자란 감자 알갱이 수준이라는 말이다. 세상을 이렇게 오만하게 살아도 된다고 인정받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정작 그렇게 인정을 받은 사람이 만약 진짜 있다면, 그 오만해도 되는 사람이 정말로 오만하게 살았을까? 오직 덜 떨어진, 좀 아는 새끼들, 혹은 아는 척하는 새끼들이나 이런 마음을 갖는 거 아냐? 여태 베른하르트 선생을 이렇게 보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거 참 진정한 개 호로새낄세.&nbsp; 그런 토마스가 경애했던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젊은 시절을 되살려보는 토마스.<br>&nbsp; “그가 한때 전 유럽, 구 유럽뿐 아니라 신 유럽의 모든 최고급 호텔까지도 최고 신사의 신분으로 들락거렸던 사람이라는 것도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또한 수십 년 동안 빈 오페라 극장에서 환호성을 지르거나 휘파람을 불어댐으로써 오페라 공연을 절정으로 끌어올리기도 하고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했던, 바로 그 당사자라는 것도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중략) 자신이 몇 번이나 파리에 갔는지, 몇 번이나 런던과 로마에 갔는지, 샴페인을 몇 천 병이나 비웠는지, 여자들을 몇 명이나 유혹했는지, 읽은 책은 도합 몇 권이나 되는지를 헤아려보곤 했다.” (p.84)<br>&nbsp; 노동하지 않고 즐기기만 한 파울 남작 비트겐슈타인. 유럽의 귀족 자재이자 은수저를 입에 물고 난 부르주아 꼭대기에서 자진해 비렁뱅이로 추락해 쓸쓸하게 죽은 자.&nbsp; 이 책의 목적은 117쪽에 직접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밝혔다.&nbsp; “내 친구 파울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내 인상을 종이에 옮기는 것이 전부.”&nbsp; 스스로 자기 둘이 대도시 스타일의 우월한 자, 탁월한 자. 그래서 일반 대중을 다 자란 감자 알갱이, 감자 덩어리도 아니고 거기에서 부스러져 나온 감자 알갱이로 알고 평생 산 두 인간의 관계 이야기를, 우리 가운데 누구는 돈 주고 사서 읽었고, 누구는 빌려 읽었다.&nbsp; 내 스마트폰에 깔린 앱 북적북적에 별 셋 반을 올렸다. 탁월한 자 가운데 한 마리인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한 문단짜리 글이 몰입감 있게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힘에만 준 별점이다. 내용에 관해서는 하나도 아깝다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토마스와 파울, 너희들 만의 샹그릴라. 그 속에서 행복하라. 나, 감자 알갱이 하나는 개똥을 밟아도 땅 위에 좀 더 있을란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440/46/cover150/k44283027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4404685</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지 - [남극]</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35571</link><pubDate>Mon, 15 Jun 2026 05: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3557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52034089&TPaperId=1733557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079/65/coveroff/k75203408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52034089&TPaperId=1733557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남극</a><br/>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br/></td></tr></table><br/>.&nbsp; 키건의 데뷔 소설집을 세번째 키건으로 읽는다. 이이가 이렇게 시작했구나.&nbsp; 이 책을 출간한 것이 서른한 살 때. 키건은 열일곱 살부터 스물네 살까지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로 건너가 로욜라 대학에서 공부했다. 젊은 시절에 6~7년이면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래서 첫 소설집 《남극》에 실린 작품의 절반 정도는 아일랜드, 절반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당연히 1960년대생 아일랜드 여성의 시점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즉 거의 모든 남성은 찌질하거나 폭력적이고, 세상의 여자들은 그들에 의하여 고통을 당해 분노하지만 견딘다. 아일랜드, 바람이 많이 불고 유사이래 기근이 많이 들어 늘 궁핍했던 섬나라. 하필이면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잉글랜드 옆에 있어 늘 침략당하고 땅을 빼앗기며 굶주림에 허덕였던 곳. 생존을 위해서라면 그래서 폭력도 혀용 또는 묵인해야 했을 터이고, 이런 땅에서 여성은 늘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 굶주림과 전쟁이 있는 곳에서 여성은 없다. 폭력 때문이다. 폭력이 모든 악의 근원이니까. 클레어 키건의 아일랜드는 21세기, 세계 1위의 일인당 국민소득을 자랑하는 가장 부유한 나라 아일랜드가 아니라 여전히 척박한 토양 위에서 궁상에 전, 삭아버린 땅이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아일랜드. 그리하여 날씨에도 딱 맞게 키건의 소설들은 그로테스크하다. 간결하면서도 서늘한 문장이라서 더욱 그로테스크하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다.<br>&nbsp; 클레어 키건, 하면 나는 제일 먼저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를 연상한다. 앞에서 말했듯 1960년대생 아일랜드 여성이라면 정말로 그런 아버지를 겪었을 수 있다. 비록 키건의 다른 책에서 나오는 개썅노무 아버지처럼 친 딸을 성폭행하는 개자식들부터 시작해 동네의 온갖 똥개새끼들 같은 아저씨들, 심지어 상습적으로 동네 소녀들을 성폭행하는 가톨릭 사제 새끼까지 밀림의 왕국이나 세렝게티-마사이마라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거기에 속수무책 당하고 마는 여성들.&nbsp; 키건을 읽으며 불편했던 것은, 폭력/완력 빼고 형편없는 남성들의 등장이 그랬듯이, 그들이 저지르는 폭력을 그냥 감당하고 마는 아일랜드 여성들의 수동성도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남극》의 &lt;자매&gt;에 등장하는 둘째 딸 루이자처럼 십대 후반, 적어도 이십대 초반 정도라면 더블린에서 잉글랜드행 배를 타고 떠나버릴 수도 있는데 말이지.&nbsp; 떠나지 않더라도 왜 기어오르지 못했을까? 가부장적 아버지/남편 그리고 폭력 때문이었겠지. 하지만 반란을 꾸미지 않으면 언제나, 영원히 그 올가미 아래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야 하는 걸?<br>&nbsp; &lt;남자와 여자&gt;에서는 기어오른다. 아내가 남편한테. 그것도 절대 남성우월주의자이자 더 할 나위 없는 가부장적인 남편임에도.&nbsp; 아빠는 여간해 움직이지 않는다. 하찮다고 생각하는 건 절대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집의 여자들, 그러니까 아내와 딸 한테는 운전도 하지 못하게 한다. 어딜 여자가 차를 운전해? 그냥 옆에 타고 있다가 차가 나갈 때 집 문을 열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내/딸이 무도회용 드레스를 입었건 청바지를 입었건 간에, 문을 열고, 차가 나간 다음 다시 문을 닫고, 다녀와서는, 역순으로, 다시 문을 열고 차가 들어온 다음에 다시 닫아야 마땅하다. 대문과 집까지 거리가 있으니 다시 남편의 옆자리에 타, 남편이 운전하는, 운전해주는 차에 타고 와야 한다.&nbsp; 오빠도 꼼짝하지 않는다. 나는 차 안에 흘린 염소똥과 양똥도 치워야 하고, 외양간의 허드레 일도 해야 하는데 공부 잘한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생 구라인 오빠는 자기 방에서 숙제한다는 핑계로 열심히 딴 짓만 하고 있다. 저녁밥을 차려놓고, “오빠한테 나와서 밥 먹으라고 해라” 엄마가 말하면 여동생이 가서 “내려가서 먹어. 이 망할 게으름뱅이 새끼야.” 하고 말한다.&nbsp; 이 가족이 송년 춤파티에 갔다. 아버지는 엄마를 두고 다른 여자를 안고 신나게 뺑뺑이를 돌지만 엄마는 한 구석에서 완전히 꿔다 놓은 보릿자루다. 게다가 마지막 순서인 경품 뽑기에서 실수도 해 이웃들한테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nbsp; 집에 올 때 차 안에서 아빠가 엄마한테 이 말을 하며 비웃기도 하고 약 올리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자기도 덩달아 창피를 당한 거 같아 열받은 게 틀림없다. 집에 왔다. 엄마더러 내려서 대문을 열라고 한다. 엄마는 차에서 안 내린다. 그냥 버티고 앉아있다. 뒤에 남매가 쳐다보고 있으니 아빠도 답답하겠지. 분명 잔뜩 화가 나서 자기가 궂은 날씨에 내려 직접 문을 여는 순간, 재빨리 운전석으로 넘어간 엄마가 차를 운전해 집까지 부웅, 아빠더러 비오는 진흙탕 길을 걸어오라는 듯이 출발해버렸다. 엄마는 TV에서 유심히 운전 교습하는 방송을 보아왔던 거였다.<br>&nbsp; 겨우 이것 가지고 가정 속 반란이야? 라고 하지 말라. 태풍도 찻잔 속의 작은 흔들림으로 시작하는 거다. 한 편 더 있다. 어떤 작품인지는 직접 확인하시라.&nbsp; 책 뒤표지에 “나는 너에게 위안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여자는 내 세대에서 끝이다.”라는 카피가 쓰여 있다. 위안? 아일랜드 남자들은 여자한테 위안 받기를 원했던 모양이지? 그리고 여성들은 그런 찌질하고도 후지며 폭력적이기까지 한 남자들한테 기꺼이 위안을 주었던 모양이고. 이게 168페이지 &lt;남자애한테는 이상한 이름&gt;에서 나오는 구절이다. 카피 가운데 “나는 남자를 아이처럼 보살피는 여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가 빠져 있다. 이 문장의 전제는 남자 또는 아일랜드 또는 키건이 바라보는 세계의 남성들이 모두 자신을 아이처럼 보살펴달라고 요구했다는 거다. 안 그랬는데도 여자가 자진해서 보살펴주었으면 스스로 자초한 일일 것이다. 세상의 남자들이 정말 나 좀 보살펴줘, 이렇게 졸랐을까?&nbsp; 지금 읽고 있는 발자크의 &lt;사교계의 영광과 비참 1&gt; 79쪽에도 비슷한 광경이 나온다. 주인공 쥘리앵을 사랑하는 (글자를 쓸 줄도 모르지만 천사처럼 아름다운)에스테르 앞에 스페인 사제가 나타나 쥘리앵과 떨어져 수녀원으로 가서 일정 기간 교육을 받으라고 한다. 그랬더니 에스테르가 신부한테 말하기를,&nbsp; “그러면 누가 그를 위로해주나요?”&nbsp; 신부가 대답하기를, “그가 어떻다고 당신이 그를 위로해야 하지?”&nbsp; 남자가 여자한테 위안/위로 받기를 원한다고? 좀 웃기다. 합의한 섹스를 원하기는 하지. 물론 “모든” 남자가 아닌 “대부분의 남자”를 일컫는 거다.<br>&nbsp; 그런데 책을 좀 더 읽어보면, 앞의 단편 &lt;남자와 여자&gt;에 주인공 화자 ‘나’가 이렇게 생각하는 장면이 나온다.<br>&nbsp; “나는 다른 집 아빠들이 아내의 외투를 들어주고, 문을 잡아주고, 가게에서 갖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보고, 필요 없다고 해도 초콜릿과 잘 익은 배를 사 오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아빠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br>&nbsp; 그렇군. 하필이면 우리집 아빠 새끼만 저 지랄이고 다른 집 아빠 님들은 안 그렇단다. 주인공이 하는 얘기니까 당연히 맞는 말일 듯. 키건의 소설을 읽고 개썅노무 아빠 두어 새끼들을 아일랜드 또는 세상 전체 아빠로 생각하면 오산이겠군. 당연하지. 아주 선량하거나 악마 같아야 소설의 주인공 자격이 있을 터이니. 그러니 사실 별 일도 아니다. 아무래도 현대 소설에서 이왕이면 주인공이 천사보다 악마인 것이 훨씬 잘 팔리겠지. 그러면 같은 값이면 악마를 캐스팅하지 뭐. 그건 좋은데 가끔 순진한 독자들은 그걸 일반화시킨다는 말이지.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다. 반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연히 당신 의견이 옳다. 다수의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은 사실 주인공으로 고려할 만하지 않다고 주장했을 뿐이다.&nbsp; 차라리 눈비오는 진흙길에 아빠를 놔두고 떠난 엄마처럼 반란을 획책하는 게 어떠냐는 것이다. 괜히 표제작 &lt;남극&gt;의 첫 문장처럼 허튼 짓 해서 코 깨지지 말고.&nbsp;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다음 주말에 그 답을 알아내기로 결심했다.”&nbsp;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대단한 거 있어? 여자나 남자나.<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079/65/cover150/k75203408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0796507</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오발탄</category><title>사랑의 이중창 Top 5</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33449</link><pubDate>Sun, 14 Jun 2026 05:4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3344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C402738601&TPaperId=1733344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410/52/coveroff/8947830437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C692737542&TPaperId=1733344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77/60/coveroff/2812436148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C102736804&TPaperId=1733344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78/49/coveroff/2052436752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C232738623&TPaperId=1733344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77/1/coveroff/2302436635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C622737307&TPaperId=1733344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2/6/coveroff/2882436080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33449'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제 노트에 약 140편의 오페라 작품에 나오는 사랑의 듀엣에 관한 메모가 있습니다. 이번 세기 초에 쓴 거니까 벌써 20년도 넘은 잡글들이군요. 오늘은 일요일 아침을 맞아, 제가 좋아하는 사랑의 이중창 가운데 다섯 곡을 골라 소개해볼까 합니다.<br><br>5. 푸치니, &lt;나비 부인&gt;<br><br>푸치니한테는 진짜 오페라스러운 무엇인가가 있다. 가슴이 저릿저릿, 등뼈부터 소름이 쪼옥 끼치는 감칠맛. 사르비아 꽃을 따 쪽쪽 빨아먹을 때의 그러한 미각을 푸치니에게서 느낄 수 있지 아니한가.<br>일본 소녀 쵸쵸상. 15세 아가씨니까 소녀라고 불러도 그리 틀리지는 않을 거다.그녀가 미국인 핑커톤한테 시집가는 날. 쵸쵸상은 자기가 가진 거의 모두를 포기하고 기꺼이 미세스 핑커톤이 되기로 한다. 근데 가문에 본조라고 하는 이름의 아저씨가 있다. 일본은 잡신의 나라. 그만큼 미신이 창궐하는 동네도 드물다. 때때로 본조를 불교의 승려로 연출하는 오페라도 있는 듯한데, 그거 정말 무식한 짓이다. 하여간 본조 아저씨가 보니, 조카딸 쵸쵸가 자기가 믿는 잡신을 버리고 기독교 나라의 서양놈한테 시집을 가니, 이건 분명히 배교 행위라, 결혼식장에서 쵸쵸상~ 쵸쵸상~ 조카딸을 불러 호통을 치며 깽판을 부린다.핑서방이 그 경황을 당한다. 이것들, 깝데기 노란 야만스런 놈들이 시방 무슨 짓거리들이야.999년 동안 임대를 한 집에서, 백인의 아내로 맞아준다면 엎드려 칭송은 못할 망정 깽판을 쳐? 에라 이 무식한 것들아, 당장 내 집에서 꺼지지 못하겠느냐! 입에 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뛴다.집 주인이 가라는데 어떻게 해. 가야지.근데, 쫓겨나는 사람들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턱이 없다. 본조 뿐만 아니라 친척들 모두가 한 마디씩 한다.쵸쵸상, 우릴 버린 년, 네년의 뱀같은 영혼은 끝내 정처없이 떠돌고 말리라!악담을 하는데, 아.... 오페라에서 악담과 저주는 언제나 틀리는 적이 없다는 거. 이거 이제는 다들 아시는 바, 비극을 예언했구나.<br>그리하여 쵸쵸상 친구들과 친척들이 몽땅 무대에서 쫓겨나가자 핑서방과 쵸쵸상만 무대에 남아, 정말 달착지근하게 노래하는 이중창.으아.... 난 &lt;나비 부인&gt; 가운데 이 장면이 제일 좋다.좋아? 물론 좋기만 한 건 아니지.이제 바야흐로 시작하는 첫날 밤의 행사.둘은 더할 수 없이 감미로운 세속의 사랑노래를 하며 신방으로 드는데, 아이구... 짠한 것.열 다섯 살의 어린 동양 애가, 털복숭이 건장한 서양인한테, 아이구.... 을매나 아팠을꼬... 내 가슴이 다 미어진다.<br>3번은 발췌반 말고 전곡반으로...<br><br><br><br><br>4. 베르디, &lt;오텔로&gt;<br><br>사랑.... 어렵다.그게 두 명이 하는 게임인데다가, 남자는 여자를 죽어도 모르고, 여자 역시 남자는 까무라쳐도 알지를 못한다. 게다가 속 마음이란 것이 곱창 뒤집어 헹구듯 홀딱 까놓고 보여줄 수 없는 거라서 복장 터지는 일이 한 두개가 아니다. 여기 까지는 보통의 선남선녀들이 겪었거나, 겪고 있거나, 앞으로 겪을 당연지사이자 사랑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숙명인데, 둘 중 하나가 또한 치유할 수 없는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이젠 정말 뒤집어지는 일만 남았다.<br>한 쪽이 심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쌍.... 물론 그 컴플렉스를 극복해서 잘 살고 있는 많은 커플을 제외한 나머지 지극히 일부의 경우엔....이해는 신뢰를 낳고, 신뢰를 바탕으로 사랑을 낳고, 사랑은 갈등을 낳고, 갈등은 오해를 낳고, 오해는 불신을 낳고, 불신은 질투를 낳고, 질투는 눈물을 낳고, 눈물은 증오를 낳고, 증오는.... 파멸을 낳으니, (무슨 성경 구절 같다. 누구는 누구를 낳고, 누구는 누구를 낳고....) 사랑의 잘못된 진화는 질투와 눈물과 파멸?<br>그걸 셰익스피어는 &lt;오셀로&gt;에서 진짜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사랑의 편지가 잘못 배달된 단 한 번의 사소한 실수가 자신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그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의식의 혼돈을.오셀로와 데스데모나는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지독한 중독 증세를 보여준다. 사랑 자체가 사실은 중독과 그리 많이 다르지 않다. 그 중독 증세로 인해 오해의 골은 깊어가고, 사랑 또한 유클리트 물리학이 적용되는지라, 뉴톤의 제 3법칙에 따라 오해가 깊어질수록 반작용으로 사랑 또한 깊어지니 이 아니 아이러니일소냐.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목졸라 죽일 수밖에 없는 건, 일찌기 최무룡과 김지미의 말대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불멸의 잠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니,죽음 만큼 확실하게 헤어지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br>우리가 &lt;오셀로&gt;에서 배우는 교훈은?1. 편지 심부름은 똘똘한 놈한테 시키자.2. 손수건 함부로 버리거나 내돌리지 말자.3. 남자 앞에서 다른 남자 얘기할 때 눈치 보자.4. 여자 앞에서 다른 여자 얘기는 죽어도 하지 말자.5. 열 받을수록 한 번 더 솔직히 얘기해보자.... 뭐 이런 건가?<br>어쨌거나, 베르디의 &lt;오텔로&gt; 가운데 1막 마지막 장면을 올리면 좋은데, 그건 그동안 너무 많이 붙인 거라 식상해서, 오늘은 로시니의 &lt;오텔로&gt; 마지막 씬, 바야흐로 데스데모나 혼자 자는 방에 오텔로가 몰래 들어와, 와따 그 년, 죽이려고 보니까 뒤집어지게 이쁘기도 하네... 아리아 한 방 때린 다음, 데스데모나가 잠에서 깨 죽을 때 까지의 이중창, 그야말로 목숨 건 사랑의 장면을 올리려다가 그냥 베르디로 가자. 내 맘이니까.<br>1번 토스카니니, 2번 카라얀 판은 평생 듣는 인생반. 3번은 젊은 시절 황금의 델 모나코가 어땠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만든 판.<br><br><br><br>3. 모차르트, &lt;돈 지오반니&gt;<br><br><br>&lt;돈 지오반니&gt;의 사랑스런 이중창이다. 너무 사랑스러워 후세 폴란드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쇼팽도 이 주제를 사용하여 초기에 관현악과 피아노를 위한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쇼팽의 경우엔, 작곡가 신출내기로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만들었다는 뒷소문이 횡행하기도 하지만.바로 돈 지오반니와 촌년 체를리나의 이중창 "내 손을 잡아요."<br>입술과 혓바닥에 참기름을 좌악 바른 돈 지오반니. 결혼식 예비 잔치에서 눈에 확 들어온 신부 체를리나를 어떻게 해서든지 자빠뜨려 보려고 꿀꺼덕, 침을 삼킨다. 그는 저 멀리 보이는 휘황찬란한 성을 가리키며, 저게 내 집이여. 나하고 살지 그래? 그렇게만 된다면 넌 저 멋있는 성의 안주인이 되는 거야. 평생 호강하면서 사는 건 두 번 얘기하면 잔소리지.무지랭이 체를리나가 보기에도 이거 잘 하면 팔자가 확 필 찬스다. 근데 신랑으로 예비된 마제토 보기가 조금 거시기하고, 귀족 놈들이 자기 같은 농민 계급의 아가씨를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겨 딱 한 번 맛을 보신 다음에 나 몰라라 하고 뻥 차버려, 시집도 안 간 아가씨 배가 남산 처럼 부풀어 오른 것을 여러번 본 바라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다.이 참에 팔자를 한 번 고쳐봐? 더군다나 이렇게 잘 생기고 매너도 죽여주는 귀족 아저씨가 결혼을 하자니 이거 참....갈팡질팡. 그러나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지오반니 나리의 달콤한 속삭임이라니. 으이그....<br>1번 푸르트뱅글러는 음질을 견딜 수 있는 분들만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br><br><br><br><br><br>2. 핸델, &lt;롱고바르디의 왕비 로델린다&gt;<br><br>예전 롬바르디아 왕국에는 참으로 한심한 남자, 베르타리도가 왕을 먹고 있었다. 아무리 한심하더라도 역시 오페라의 주인공답게 재주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여자 고르는 솜씨. 베르타리도는 롬바르디아 전 국토를 뒤져 자기 영토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현명하며 가장 정숙한 여자를 뽑더니, 다른 나라의 왕자들하고는 달리 온갖 정성을 바쳐 소위 연애를 했다. 왕자가 연애를 해? 당시엔 필요없는 절차였다. 하지만 여자 고르는 재주 딱 하나밖에 없는 베르타리도는 자기 전공과목을 십분 살려 석삼년 동안 그 처녀, 로델린다한테 공을 들였다.왜냐하면, 로델린다가 당대가 요구했던 여인의 덕목들을 정말로 잘 지킬 수 있는여자인지 관찰하기도 하고, 한 눈에 반했지만 그녀가 갖고 있는 심성이 자기한테 찰떡처럼 들어맞아 소위 성격차이로 인한 불화가 생기지 않을 것인지를 꼼꼼하게 따진 다음, 이 여자 로델린다야말로 일국의 국모로서도 손색이 없고, 한 남자의 지어미로도 까탈을 잡을 수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 기간이었던 거다. 그러니 전공이 여자 고르기였다는 건 베르타리도가 사실은 무척 소심한 사람이었다는 걸 증명하기도 하는 것.<br>베르타리도는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마누라 고르기를 무사히 마친 다음, 안타깝게도 더 이상 자기 전공과목이 세상을 무사히 살다가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데는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그냥 태평세월이겠거니, 맨날 하는 일이라곤 예쁜 마누라 궁둥이만 슬슬 쓰다듬는 것 뿐이었으니 나라 꼬라지가 잘 될 턱이 없었다. 설사 태평성대라 할지라도 백성들을 언제나 긴장하게 하지 않으면 어디선가 황룡이 쇠하는 기운이 뻗친다는 철칙을 무시한 군주의 죄를 물을 수밖에 없으리.<br>근데 반역을 일으킨 그리모알도 백작 역시 한심하긴 마찬가지. 처음부터 그는 제대로 된 반역도 되지 못할 인물이었다. 그리모알도가 왜 반역을 일으켰느냐 하면, 억눌리고 핍박받고 무거운 세금을 짊어진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무능하지만 그렇다고 나라에 망조가 들 만큼은 망가지지 않은 롬바르디아의 재건을 위해 힘줄을 돋워 자신 한 몸을 바치기 위해서도 아니고, 이웃나라가 호시타탐 롬바르디아를 넘보고 있어 이대로 있다가는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서도 아니고, 오직 하나, 총각 때부터 늘상 군침을 흘리던 로델린다의 속고쟁이를 어떻게 한 번 벗겨볼 수 있을까 하는 정념 하나 때문이었다. 원래 꿩 대신 닭이라고 로델린다가 왕한테 시집을 가버리자 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외모 하나는 빠지지 않는 에두이제로 만족하고 맘잡아 살아보려 했던 그리모알도. 이제 꼭지가 돌아 베르타리도건 에두이제건 간에 모두 제거해버리고 그저 애 하나 딸린 로델린다 만을 꿈꾸며 반역을 일으켜버렸던 거다.반역이 어떻게 됐느냐고?반역의 마지막 삼각지 전투에서 최정예인 친위대를 전멸시켰는데 시체들 틈에 찬란한 갑옷을 입은 베르타리도 왕도 누워 있었다 전한다. “전한다”는 무슨 뜻인가. 베르타리도를 죽여 그 시체를 가져온 병사에게 후한 상급을 내리겠다는 모사 그리발도의 명령을 좇다보니 이미 죽은 베르타리도 시체 주변의 반역군들이 너도 나도 베르타리도의 시신을 차지하기 위해 난도질을 쳐, 왕의 갑옷은 확실하지만 갑옷을 입었던 것이 과연 베르타리도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는 거였다.하여간 왕의 갑옷이 시체더미에서 발견되었으니 국상은 치뤄야 하는 법. 로델린다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의 갑옷과 살점 몇 개를 수습해 왕릉도 아니고, 예전에 롬바르디아를 침략했다가 죽은 훈족의 왕 무덤 옆에다가 조그만 봉분을 세우고 망해버린 왕조 앞에서 스스로 혓바닥을 콱 깨물어 죽어버리려 했다가… 참았다.이 상황에서 오페라는 시작한다.근데 사실은 베르타리도가 죽지 않았다. 충성스런 신하가 왕의 옷을 입고 대신 죽어준 것. 그리하여 궁궐 근처 자기 묘지 부근에 등장한 베르타리도는 마침 산소를 찾은 마누라 로델린다와 상봉을 하는데, 왕이란 것이 그저 아내가 정절을 지켰는지 그것에만 관심이 있다. 나라야 말아 먹었건 말건.<br> 알란 커티스 아니었으면 핸델의 오페라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을 듯.<br><br><br><br>1. 베를리오즈, &lt;트로이 사람들&gt;<br><br>세상에나... 이런 슬픔이 있을까.이별을 앞에 두고, 거역할 수 없는 이별의 명령을 받고도 인간의 눈엔 사랑의 화염이 활활 타올랐으니, 애초부터 이들의 사랑은 하염없는 비탄의 불씨에서 비롯했다. 디돈과 에네.<br>혹은 길고 긴 절망의 항해에 지친 에네. 디돈을 처음부터 한 시절의 놀이로 생각하고 벌인 엽색?아, 이런 속된 생각은 말자. 만일 그러했다면 수십 세대가 흐른 다음 어느 작곡가가 있어서 이렇도록 아름다운 이중창을 만들 수 있었겠는가.디돈. 기울어져가는 조국의 운명을 트로이에서 온 불멸의 영웅 에네에게 기대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어느덧 사랑으로 번지고, 에네, 새로운 땅으로의 항해 가운데 그녀를 만나 디돈의 탄식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사랑이 될 줄이야.아직 그들은 고통을 짐작만 할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아픔이 될 것인지 모른 채.이들의 사랑은, 이미 중년의 연배가 되어버렸으나 아직도 가슴 속에선 사춘기 시절의 애뜻함이 온전하여 이미 이 아름다운 밤의 희열 속에서조차 슬픔이 뚝뚝 묻어 떨어지니, 이별의 순간이 온들 어찌 둘의 사랑마저 식겠는가.그러나 식지 않은 사랑이 오히려 더 쓰라린 법. 아름다움 속에는 슬픔이 들어있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 이들의 이중창은 하염없이, 하염없이, 그리하여 더욱 하염없이 아름다울 뿐이다.<br>콜린 데이비스 음반 강추. 굳이 비교하자면... 비교는 뭐하러 하나? 그냥 듣자.<br><br><br><br>.<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76/99/cover150/202243663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69986</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천재는 아니라도 내가 우월하다고? - [불필요한 여자]</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30019</link><pubDate>Fri, 12 Jun 2026 05:5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3001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82135031&TPaperId=1733001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10/95/coveroff/k18213503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82135031&TPaperId=1733001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불필요한 여자</a><br/>라비 알라메딘 지음, 이다희 옮김 / 뮤진트리 / 2026년 02월<br/></td></tr></table><br/>.&nbsp; 라비 알라메딘은 1959년 요르단 암만에서 민족종교인 “레바논 드루즈” 교파 집안에서 태어났다. “레바논 드루즈”는 무슬림이 아니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처럼 천지창조와 에덴 추방 같은 것을 믿기는 하지만 라마단, 성지순례 등을 공유하지 않는다. 특히 아브라함 계통의 신비주의적 일신교로 전세계에서 백만명 미만의 신도를 보유한 소수종교라고 위키피디아에 나온다. 라비 알라메딘은 쿠웨이트와 레바논에서 성장했고, 영국을 거쳐 미국 UCLA에서 공학사, 샌프란시스코 대학에서 MBA를 취득해 전공과목으로 먹고 살다가, 뜻한 바 있어 화가와 작가로 살고 있는, 남성 동성애자라고.&nbsp; 굳이 이이의 성적 정체성을 밝히는 이유는, 작품의 주인공 알리야 살레는 72세의 노인 여성이며, 이이 주변의 주요 등장인물 역시, 절친 한나를 비롯해 어머니와 한 아파트 지붕 밑에서 사는 세 마녀, 파다야, 주마나, 마리-테레즈 등 주로 여성으로, 그냥 읽다 보면 작가 역시 당연히 여성이겠거니 짐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br>&nbsp; 알리야. 화자 ‘나’의 이름. 1937년에 아버지가 지어 주었다. 높은 데 있는 사람, 하늘이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이 이름을 아꼈고, 알리야를 그보다 더 아꼈다는 이야기를 귀에 박히도록 들었음에도 정작 알리야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이가 두 돌도 되지 않아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 아버지는 병들어 죽었다. 이때 아버지가 겨우 스물한 살. 어머니는 16세에 알리야를 낳고 18세에 과부가 됐다.&nbsp; 1930년대 말에도 이 나라 레바논은 여전히 14세기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여전히 그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도 낳지 못한 과부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알리야를 안고 다시 친정집으로 들어가고, 친정 부모에게 들들 볶이다가 남편의 동생과 두번째 결혼을 하게 됐다. 알리야는 이후에 세 명의 이부 동생이 생겼으며 새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했다. 나쁜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냥 알리야에 대해 조금도 관심이 없었을 뿐.&nbsp; 주인공이니까 당연히 공부를 아주 잘했던 알리야는 계속 공부를 하고 싶었음에도 열여섯 살이 되자 한 찌질이한테 시집가야 했고, 먼 훗날, 72세가 되도록 평생을 살게 될 아파트에 집을 얻어 신혼 생활을 시작할 때는 행복한 줄 알았다. 작품에 정확하게는 나오지 않지만 알리야가 4년 후에 이혼당할 때까지 틀림없이 숫처녀는 아니지만 숫처녀와 비슷한 수준으로 살았던 거 같다. 이슬람 여성답게 남편이 요구하면 거절할 수 없었을 테니 “당시” 10대 소녀들이 종종 그랬듯 성적으로 기피나 혐오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찌질한 남편이 그 방면으로 문제가 있었던 듯하다. 알리야는 살면서 한 번도 정식으로 남편의 물건을 보지 못했단다. 그래 하루는 밤중에 완전히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하고 슬쩍 일어나 성냥불을 켠 후 이불을 들춰 남편의 아랫도리를 확인했더니, 세상에나, 공룡이 누워있을 줄 알았는데 글쎄 지렁이가 달려 있었다. 이후에도 몇 번 다시 확인해봐도 여전히 지렁이였다고. 아마도 성기 왜소증이나 조루증세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할례를 하다가 껍데기가 아니라 작대기를 잘라 버렸을까?&nbsp; 나도 &lt;한밤의 아이들&gt;을 읽고 알았다. 이슬람권에서는 남자가 이혼을 원하면 여편 앞에서 “나는 당신과 이혼한다.” 라고 세 번(네 번?)만 외치면 이혼의 모든 과정이 끝난다. 이 지렁이 달린 찌질이도 “아는 당신과 이혼한다.”라고 외쳤을 때 알리야의 나이 스무 살. 천만 다행이었던 것이 남편이 이 말을 던지고, 알리야를 친정으로 쫓아 보낸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집에서 나가버렸다는 거. 속이 다 시원했겠지? 그러나 이후에 시댁에서도, 친정에서도 집을 자기들한테 넘기라고 요구, 강제, 지랄을 했지만 어린 알리야는 감히 버텼다. 여성이 동산이건 부동산이건 소유권을 주장하기 쉽지 않던 시절이었음에도.&nbsp; 첫번째 의문이 여기서 생겼다. 둘이 살기에 넓기는 하지만 어차피 월세집. 시집이고 친정집이고 간에 왜 이 아파트에 들어와 살겠다는 거지? 다른 아파트 구해 들어가면 되잖아. 특히 친정 어머니와 의붓 큰동생이 협박을 해가면서 집을 내놓으라고 하는 장면을 회상하는 게 이해가 힘들었다. 거액의 보증금을 전남편이 따로 낸 거였나? 그것 참. 이게 다행인 이유를 모르겠던 것.<br>&nbsp; 찌질한 남편이 50년대 말에 이혼하면서 위자료를 주었을 턱이 없고, 그렇다고 이혼 후 생활비를 보내주었을 리도 없는데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 이때 등장한 인물이 한나. 찌질한 남편의 친형과 사랑했던 사이. “사랑했던.” 과거형이니까 지금은? 여전히 숫처녀. 어떻게 그집 집구석 남자들하고 관계만 되면 숫처녀나 숫처녀 비슷하냐고? 한나는 장교, 정확하게 중위와 사랑해서 결혼하자고 굳게 맹세했다. 그런데 남자가 죽어버렸다. 이후에 한나는 결혼 약속을 굳게 마음에 새겨 마치 그 집안의 며느리인양 평생 그렇게 살았다. 한나보다 열다섯 살 더 많지만 알리야와 친밀했던 유일한 사람이 된다. 일흔두 해를 산 알리야가 아꼈던 유일한 사람으로.&nbsp; 물론 친절했다. 남자 없는 이혼녀에게 아낌없이 친절을 베풀어준 유일한 사람. 그리고 먹보.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그저 통통한 수준을 유지할 뿐 절대로 비만 체형이 되지 않는 행운을 누리던 여자. 역시 가장 큰 친절은 먹고사니즘과 관련이 있어서, 한나의 육촌 형제 가운데 지적 과시욕에 들떠 시내 골목에서 작은 책방을 연 사람이 있어서, 알리야를 이 책방에 취직시켜주었다. 이 책방에 반백년, 오십년을 다닌다. 책방이 결코 이익을 만들지 않는 사업이라 월급을 받아 월세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그래서 알리야는 자연스럽게 채식주의자 비슷하게 살았다. 키만 크고 몸에 근육은 별로 없는 꺽다리.&nbsp; 책방이라니. 물 만난 물고기. 앞에서 이야기했다. 주인공이니까 당연히 공부를 무척 잘했다고. 알리야는 손님이 별로 없는, 별로가 아니라 거의 없는 책방에서 이 책, 저 책 쉬지 않고 읽는다. 곡식과 풀만 먹고도 힘이 남아 열심히 읽는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주문을 넣는다. 두 권. 어떤 때는 세 권. 레바논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별로 없다. 두 권 가운데 한 권 팔리면 나머지 한 권은 남는다. 일정 기간 동안 팔리지 않으면, 알리야가 그냥 집으로 가져간다. 풀만 먹고 살아도 책 살 돈이 없다. 이해해달란다. 뭐 좋다. 어차피 사장도 돈 벌려고 책방 하는 것도 아니고, 처음 한 번 책 훔쳐가는 게 힘들지 이력이 나면 그까짓 거야 뭐. 그래도 도둑년인 건 확실하지만.&nbsp; 원래 공부를 잘하고, 레바논 역사를 보면 영어와 프랑스어하고 친할 수밖에 없어서 두 언어에 능숙한 알리야는 원문이 영어와 프랑스어가 아닌 책을 중역하기 시작한다. 스물두 살부터 일흔두 살, 이제 2002년이 저물고 며칠 지나면 2003년이 되는 겨울에 제발트의 &lt;아우스터리츠&gt;를 아랍어로 중역할 때까지 모두 37편. 1년에 한 편을 원칙으로 하되 때로는 분량 많은 책들도 있어서 1년이 넘어 걸린 책도 꽤 있다. 알리야는 자기가 번역한 원고를 출판하고자 하지 않는다. 중번역이 끝나면 원고를 종이 박스에 넣고 그걸 하녀방과 하녀화장실에 쌓아 놓았다. 그것으로 끝이다. 물론 나중에 뒤져 보기야 한다.그래서 이 책 속에는 다른 시인, 작가들이 쓴 시, 소설, 에세이가 많이 등장한다. 소설가의 경우 다행스럽게 많은 작품을 읽어보아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하는데 별로 문제가 없었다. 시로 말하자면, 나는 외국시를 읽지 않아 좀 곤혹스럽기는 했다. 근데 알리야가 고전음악도 많이 안다. 알아도 너무 잘 안다.<br>&nbsp; 음반도 많다. 주로 LP. 두번째 의문. 알리야가 월급 받아 월세 내면 돈이 거의 없어 풀만 먹고 산다는 얘기는 했고, 책도 사지 않고 주로 자기 직장에서 훔쳐 가져왔다는 것도 썼는데, 무슨 돈이 있어서 이 와중에 한 달에 LP 두 장을 샀을까? 해적판도 아니고 음악 좀 듣는다, 하는 사람들 말로 노랑딱지 도이치그라마폰 음반을? 좋다. 그럴 수 있다 치자. 알리야가 50년 동안 돈을 벌었으니 50년 곱하기 12개월 곱하기 LP 두 장은 LP 1,200장. 그런데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LP 1,200장 소유자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LP 1,200장이면 CD 기준으로 한 7백장 수준. 알리야가 주장하는 레바논의 문화수준에 입각해서 생각해보면 자기가 들은 LP, 그리고 가능했다면(책 속에서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랬다고 치면) 판 가게 주인남자와 나눌 수 있었던 음악 이야기, 그리고 딱 1회성인 라디오 음악방송이 유일하게 접할 수 있는 음악감상 환경일 텐데, 쇼팽의 피아노 곡부터 시작해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를 거쳐 바그너, 브루크너, 말러, 쇤베르크, 메시앙, 리게티까지 도무지 막힘이 없다. 음악 강의 한 번 안 듣고 12음 기법 이후의 현대음악을 이해했다면, 알리야는 정말 천재다. 인정 안 할 도리가 없다.&nbsp; 그리고 늙은 알리야는 이제 기력이 달리지만 주로 걸어서 이동하고, 좀 먼 거리는 택시를 이용한다. 책방이 문을 닫을 때는 아무리 헐값을 주고 샀다 해도, 집안이 거의 책으로 메워질 만큼 많은 책을 한 방에 사들였다. 1970년대 말부터 레바논은 이스라엘의 공습과 내전으로 허덕이고 또 허덕였는데, 책방도 연 날보다 문 닫은 날이 더 많았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여유로운 노년을 맞을 수 있었을까? 합당한 설명이 없다.&nbsp; 뭐 그럴 수 있지. 근데 말이 자꾸 왔다갔다 해서 문제다. 177쪽에는 또 “나는 수시로 책을 사서 읽을 책더미에 올려 놓는다.”라고 헛소리를 한다. 이건 알리야 문제가 아니라 작가 라비 알라메딘이 문제다. 더 큰 문제도 있다. 이게 제일 큰 문제다.&nbsp; 알리야는 음악, 미술, 문학, 어학에 도가 텄다. 어려서부터 잘 교육받은 라비 알라메딘이 그러하듯이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수준이다. 알리야는 자기도 모르게 고백한다.<br>&nbsp; “내가 남들과 비슷하지 않다는 사실이 나도 평생 신경 쓰였다. 수년 동안은 내가 특별하다고, 남들과 다르게 살기로 선택했다고 나를 설득할 수 있었다. 사실상 나는 내가 우월하다고 믿고 싶었다. 예술가는 아니라도, 마티스 같은 천재는 아니라도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p.280)<br>&nbsp;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의식. 미안하지만 나는 이런 자만심을 용서해줄 마음이 1도 없다. 내가 음악, 미술, 문학, 다 합해 예술과 어학을 너보다 훨씬 잘 이해하기 때문에, 너보다 낫다, 우월하다는 마음이 차별을 낳고, 차별이 혐오를 낳고, 혐오가 또 무엇을 낳고, 무엇이 아브라함을 낳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최종적으로 나치를 낳는다. 알리야 살레도 일흔두 살. 이제 곧 죽을 늙은이라 다행이지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어중이떠중이 가운데 한 명이 말씀드립건대, 히틀러가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레바논 근현대를 살면서 그리 많은 이스라엘의 폭격을 맞아도 유대인 천재 작가, 시인, 철학자, 작곡가, 화가, 그리고 홀로코스트만 이야기할 뿐 이스라엘의 대 레바논 공격을 비난하지 않는다. 라비 알라메딘이 미국인이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반유대주의자로 찍힐 거 같거든. 하긴.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지. 근데 똑똑이가 그걸 몰라요. 우월하다고? 사실은 위험한 거야, 대단히.&nbsp;라비 알라메딘, 그리고 알리야. 너넨 정말 속물이야, 이것들아!<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10/95/cover150/k18213503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109531</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소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 [모든 저녁이 저물 때]</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28184</link><pubDate>Thu, 11 Jun 2026 04: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2818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670588&TPaperId=1732818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5440/54/coveroff/8935670588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670588&TPaperId=1732818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모든 저녁이 저물 때</a><br/>예니 에르펜베크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길사 / 2018년 07월<br/></td></tr></table><br/>.&nbsp; 작년에만 에르펜베크의 책을 세 권 읽었다. &lt;카이로스&gt;가 2024년에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았다고 해서 관심을 두었는데 정작 인상깊게 읽은 책은 &lt;그곳에 집이 있었을까&gt;였다.&nbsp; 딱 내 마음에 맞는 작품을 읽었다. 20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지역, 그러니까 중부와 동유럽 지역의 현대사를 지낸 한 아기, 소녀, 청년, 중년, 노년의 이야기. 시대는 프란츠 요제프 1세 시절, 1902년 봄과 여름 사이에 태어난 여자 아이.&nbsp; 아이는 스페인이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갈리시아에서 열여덟 살의 유대인 어머니와 가톨릭 교도 즉 유럽 원주민 아버지 사이에서 맏이로 난다. 유대 어머니가 갓 태어났을 때 이 가정의 비극이 시작했다. 유대 어머니의 어머니, 그러니까 1902년에 난 아이의 어머니. 이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 그녀와 남편이 거실에 있고 아이는 보모가 아이방에서 돌보고 있을 무렵 어수선한 기척이 나 창 밖을 내다보니 집 밖 사람들이 무리 지어 달리면서 고함을 질렀다. 순간 덧문도 닫지 않은 1층 창문에 첫번째 돌이 날아 들어왔다. 남편이 문을 살짝 열고 내다보니까 그곳에 평소 친하게 지내던 안드레이가 있어 그를 불렀더니 안드레이는 못 본 척해버렸다. 두번째 돌이 유리창을 깨고 날아들어 그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 남편이 부모한테 졸업선물로 받은 괴테 전집 9권 책등에 맞았다. 그래서 조금 상처를 입은 괴테 전집 9권은 &lt;모든 저녁이 저물 때&gt;가 끝날 때까지 계속 등장한다.&nbsp; 이어 안드레이와 청년들이 집 현관문 앞에 들이닥쳐 도끼질을 하기 시작한다. 부부는 피신할 수밖에 없다. 2층 아기방을 두드렸다. 보모는 문을 걸어 닫은 채 아이의 부모에게 아이를 건네주는 것도, 아기방으로 들어오는 것도 거부했다. 긴박한 순간에 부부는 할 수 없이 2층과 지붕 사이의 다락방으로 피신했고, 그 순간 도끼질에 산산조각이 난 현관문을 박차고 청년들이 들이닥쳐 집안을 사정없이 박살내기 시작했다.&nbsp; 다락방에 숨었다 해도 발각나 폭행을 당할 것이 틀림없어 부부는 맨손으로 천장을 뚫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조금 구멍을 낸 사이에 다락방까지 다가온 청년들이 문짝을 도끼질했다. 겨우 뜯어낸 지붕으로 먼저 아내를 올려보낸 남편이 점프를 했고, 순간 다락방의 방문이 도끼질 두어번에 조각이 나버렸으며 뛰어오른 남편의 팔을 붙잡은 그녀가 힘을 주어 끌어올리는 바로 그때, 안드레이와 함께 들이닥친 청년이 남편을 향해 거침없이 도끼를 휘둘러 그를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그녀가 죽을 힘을 다해 남편의 팔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쑥, 남편의 팔만 아내가 있는 지붕 위로 불쑥 솟아오르고 그냥 고기 덩어리가 된 나머지 부분은 2층 창문에서 거리로 내던져졌고, 지나가던 행인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바로 이 순간에 유대인 과부가 된 여인은, 아이에게, 훗날 1902년에 난 아이에게, 아버지는 어느 날 집을 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고, 아마도 미국으로 갔을 거라고, 미국 아니면 파리나 베를린에서 살고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아이는 평생 그런 줄 알고 살았다.<br>&nbsp; 이 아이가 갓난 아이였을 때, 아버지가 사실 미국에도, 파리에도, 베를린에도 가지 않고 유대인 거주지역 안에 있는 집에서 안드레이를 비롯한 폴란드 청년들에게 난도질을 당한 채 죽어버린 다음 어머니가 남편의 상점을 이어 운영했는데, 아이가 점점 자라 당연한 듯 상점에서 일을 도왔을 것이다. 열여섯 살이나 열일곱 살이었을 때, 갈리시아 지방 칼 루드비히 철도의 35km 구간을 책임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최하위 그러니까 11등급 철도 공무원 청년이 상점에서 유대인 여주인의 딸을 알게 되었고 그녀에게 청혼했다. 청년은 매우 가난했으며 그럼에도 살기 위하여 이곳저곳에 빚을 질 수밖에 없었는데, 혹시 결혼하면 유대인 여인이 내줄 혼인 지참금으로 빚을 갚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정작 오직 법률적으로만 결혼하는 날, 청년에게 축하한다는 말이 없는 거야 뭐라 할 수 없어도, 주변에 침묵이 퍼지는 걸 확인하는 일은 편하지 않았다. 그건 보편적으로 종말과 관련한 ‘무엇’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었다.&nbsp; 그의 아버지는 법률혼 때도, 아기 그러니까 아버지의 손녀가 출생했을 때도 오지 않았다. 길이 너무 멀고 돈이 많이 든다고만 했다. 아내, 그러니까 아버지가 미국이나 아니면 파리, 베를린으로 떠난 줄 알고 있던 아이가 커서 혼인을 한 여자의 외할아버지도 오지 않았다. 손녀가 이교도와 결혼하는 날. 그는 길을 떠나 손녀를 축복하는 대신,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 신부를 위해 죽은 자를 애도하는 의례인 시바를 치루고 있었다. 조상의 신이 보자면 그녀 또한 이미 생사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에.<br>&nbsp; 이 젊은 부부가 법률적으로 혼인을 하고, 아홉달이 지나 딸을 낳고 나서, 이제 아빠가 된 청년은 자기 주변에 침묵만 깔린 것을 확실히 알아챌 즈음해서, 아내가 가져온 지참금으로 자기 빚을 다 갚을 수도 없고, 최하위인 11등급 공무원에서 10등급으로 승진 심사를 통과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nbsp; 그럼에도 아이는 점점 자라 벌써 세상에 나와 여덟 달이 되고 처음으로 겨울을 맞았고, 그리고, 죽었다. 자다가 담요가 두꺼웠나, 똑바로 누워 재웠는데 사레가 들었나, 아팠는데 그것을 몰랐나. 그렇게 죽었다. 유아돌연사. 그건 지금도 잦은 빈도로 일어난다.&nbsp; 아이의 엄마, 아버지가 미국으로 간 줄 알며 산, 아니면 파리나 베를린으로 떠난 줄 알고 산 엄마는 그냥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등에 책가방을 메고 집은 나설 어린 여자 아이, 열살 먹어 쉬지 않고 조잘대는 꼬맹이, 청년들의 눈길을 한 없이 즐기는 처녀애, 그리고 늙은 여자가 될 자기 딸이 흙 세 줌과 함께 땅에 눕혀지고 그 위에 흙을 부은 거였다. 그렇게 땅 속에 죽은 아이를 묻고 돌아온 젊은 엄마는 유대인 관습에 따라 현관문 앞에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녀의 할머니한테 유일하게 물려받고 싶어했던 발 받침대, 어린 시절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들을 때면 늘 앉곤 하던 발 받침대를 옆에 두고 꼬박 일곱 날을 기대 앉아 있을 것이었다.&nbsp; 아이가 죽었나, 싶었을 때, 그녀는 집안의 물이란 물은 모두 바깥으로 쏟아버렸다. 죽음의 검은 천사가 검을 물에 담아 씻을 테니까. 담요로 거울을 덮고 모든 창문을 열어 놓았다. 아기의 영혼이 되돌아오지 않고 영원히 날아가 버릴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도 아기는 가버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젖이 돌아 가슴이 뭉쳤다. 땅 속에 묻혀버린 아이를 위한 젖. 너무 많이 갖고 있는 젖 때문에 그녀도 죽어버리고 싶었다. 만일 가능하다면 조상들의 신과 거래하여 자신의 생명과 그녀의 몸에서 태어난 생명을 교환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신은 그녀가 건넨 것을 결코 받으려 하지 않았다.<br>&nbsp; 그러나, 소설은 모든 가능성을 포함한다. 여기서 막간극이 벌어진다.&nbsp; 만약 예를 들어, 아이가 죽어가던 순간 그날 밤에 어머니나 아버지가 창문을 열어젖히고, 바깥 창틀에 쌓인 눈을 한 줌 퍼다가 아기의 옷 속으로 밀어 넣었더라면, 그 순간에 창을 열고 은은하게 빛나는 눈을 바라보거나, 추위에 오그라든 창틀이 삐걱대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그런 영감이 떠올랐을 수 있었을 텐데, 만일 정말로 창틀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한 줌이라도 퍼다가 아기의 가슴 그러니까 심장 부위에 밀어 넣어 자극을 했더라면 아마도 아기는 불현듯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을 것이고, 어쩌면 소리를 지르며 울었을지도 모르는데, 둘 가운데 뭐가 됐든 아기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하고, 아기의 피부는 온기를 회복하면서 눈은 아기의 가슴에서 녹아버렸을 것이다.&nbsp; 다만, 만약이다. 만약 그러했더라면.&nbsp; 작가는 결심한다. 창작자의 권한으로 만약이었던 것을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라고 결심해버린다. 그리하여 때는 1918년. 아이는 16년 전인 1902년에서 1903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죽은 것이 아니라 1918년에서 1919년 사이의 겨울,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해 전 국민이 곤궁의 골짜기로 떨어졌을 무렵, 이제 극도로 좁아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전근해 온 아버지를 따라 여전히 고도의 위용을 자랑하지만 조금의 식량을 얻기 위하여 밤새도록 배급소 앞에서 줄을 서야 하는 도시에서 살고 있다.&nbsp; 그러나 아이는 결코 행복하지 않다. 이 나이가 아이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처음 만나 사랑을 시작했던 시기. 그렇다고 아이에게 당연히 연인이 생기는 건 아니다. 패전해 곤궁에 떨어진 왕년의 제국 도시 빈에는 스페인 독감이 돌아 아이의 절친한 친구도 죽어버리고, 도시에서 넘쳐나는 빈에서 운구용으로 쓰이던 전차를 타고 공동묘지로 향한다. 죽은 친구의 애인, 전장에서 독가스를 마시고 돌아온 남자를 연모하던 아이는, 남자에게 온몸을 던졌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일 주일을 견딘 후에, 1919년 1월 26일, 23시 17분경, 알저 거리 4번지, 북위 48.21497도, 동경 16.35231도, 빈 종합병원 앞에 멈춘 택시 안에서, 우연히 만난 의대 3학기에 재학 중인 페르디난트 G. 씨로 하여금 서로 합의된 내용에 따라, 아이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갖다 대고, 정확히 그 순간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자, 마치 짖는 소리에 화답하듯, 정말로 방아쇠를 당겨버리게 해서, 죽었다.<br>&nbsp; 이렇게 아기는, 소녀는, 젊은 여성은, 중년 부인은, 노인은 다섯 번의 삶을 20세기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비엔나, 프라하, 모스크바, 동베를린을 거쳐 역사를 관통한다.&nbsp; 무엇보다 문장, 글이 매혹적이다. 배수아의 가필이 있었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전에 인상깊게 읽은 &lt;그곳에 집이 있었을까&gt;를 떠올리게 만드는 빼어난 글과 20세기, 한 문장도 허투루 읽지 못하게, 그렇게 몰입하게 되는 작품. 이런 걸 뭐라 해야 하나? 아름답다고? 비슷한 느낌이다.&nbsp; 에르펜베크, 이제 이이의 단행본은 한 권 남았다. 아쉽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5440/54/cover150/8935670588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54405400</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놀러 갈 때 갖고 가기 딱 좋은 책 - [헨리 슈거]</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26397</link><pubDate>Wed, 10 Jun 2026 05:2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2639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737699&TPaperId=1732639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912/42/coveroff/k17273769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737699&TPaperId=1732639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헨리 슈거</a><br/>로알드 달 지음, 허진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01월<br/></td></tr></table><br/>.&nbsp; 아홉 편의 단편소설을 실은 소설집.&nbsp; 로알드 달이 &lt;찰리의 초콜릿 공장&gt;을 쓴 어린이 소설 작가인 줄 알면서도 읽기 시작한 건 개브리얼 제빈의 작품 &lt;섬에 있는 서점&gt;에서 특별한 단편소설 작가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출판사 “교유서가”의 로알드 달 베스트 단편 시리즈 1번 《맛》을 읽어보니까 흥미가 돋았다. 재미있고 특색있는 대중소설가가 쓴 단편들. 특히 도박이나 내기 같은 장면은 달만큼 인상적으로 묘사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특징적이었다. 그래서 로알드 달 베스트 단편 시리즈 세 권을 올해 안에 모두 읽어 보기로 작정을 했고, 순서가 헷갈리는 바람에 2번을 건너뛰고 3번 《헨리 슈거》를 먼저 읽었다.<br>&nbsp; 한 번에 탁, 말해 버리면, 전작만 못하다. 시리즈에 번호 1을 괜히 주는 게 아니었나비여?&nbsp; 《맛》은 이야기했듯이 내기와 도박 장면이 참 근사했다. 물론 《헨리 슈거》에도 표제작 &lt;헨리 슈거의 놀라운 이야기&gt;에서 도박장, 카지노 장면이 나오고, 주인공 헨리 슈거가 무려 3년에 걸친 요가 수행으로 투시력을 확보해서 기껏 한다는 일이, 누가 로알드 달 아니랄까봐, 카드 뒷장만 본 채 어떤 카드인지 알아 맞히는 거라서 평생 카지노에 들락날락하며 1억 파운드가 넘는 돈을 버는 이야기가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아홉 단편의 맥은 조금 허황된 이야기들, &lt;찰리의 초콜릿 공장&gt;을 어른 판으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nbsp; 어른 판이라고? 그렇다. 어른 판이라면 당연히 허리 아래 이야기를 피할 수 없지? 그리하여 맨 앞에 실은 &lt;로제트 부인&gt; 속 로제트 부인은 피도 눈물도 없는 포주. 게다가 주인공도 아니다. 스태그, 스터피, 윌리엄. 이렇게 세 명의 영국 전투기 조종사들이 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공군과 격추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휴가를 받아 이집트 카이로로 놀러가서 카이로의 이름난 포주 로제트 부인을 찾아가 벌이는 활극. 활극도 시거를 입에 문 채 총 쏘고 말 달리는 활극이 아니고, 로제트 부인의 유곽으로 쳐들어가 세계각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열네 명의 아가씨를 해방시키는 이야기. 해방이라 해서 정말로 해방, 즉 매춘업 업종을 바꾼다는 게 아니라 그저 로제트 부인의 무지막지한 폭리로부터 해방일 뿐이기는 하다. 뭐 스토리 전개는 나름대로 재미있기는 하다. 그걸로 끝이라서 문제지만.<br>&nbsp; 또다른 허리 아래 이야기로 &lt;대역전&gt;이 있다. 크게 개구멍이 나 있는 산울타리 덤불을 사이에 이웃한 두 가정. 제리-사만다 부부와 화자 ‘나’인 빅-메리 부부.&nbsp; 사건은 제리-사만다 부부가 파티를 여는 날 밤에 시작한다. 빅이 보기에 사만다가 그렇게 어여쁠 수가 없다. 관상을 보니 사만다 역시 남자를 무척 밝히는 스타일이기는 한데 절대로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 갈 성격이 아니다. 그래서 유혹할 수 없다. 불행하게도 사만다의 남편인 제리와도 절친 사이다. 그러니 친구의 아내와 한 침대에 오르는 건 정말 안 될 일이다.&nbsp; 하지만 세상에 안 될 일이 또 뭐가 있을꼬?&nbsp; 빅, 이 개 아들 놈은 발상 전환 모드에 들어간다.&nbsp; 통박을 굴려보니까 절친 제리가 빅의 어여쁜 아내 메리한테 매우 높은 수준으로 끌리고 있는 거 같다. 그럼에도 자기와 같은 이유로 함부로 껄떡대지 못하고 있는 듯한 눈치. 앗따, 바로 이거다.&nbsp; 빅이 제안한다. 마치 자기 직장 동료 가운데 누군가가 실제로 저지른 일을 들은 것처럼. 바로 스와핑.&nbsp; 스와핑은 스와핑인데 두 부부, 즉 네 명의 합의하에 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새벽 한 시에 옆집 남자 둘이 서로 침대를 바꾸어 들어가 한 시간 동안 한 번씩 하고 두 시에 다시 원위치하는 것. 이 과정에 돌입하고 정말로 그런 일을 벌이는 분량이 만만치 않은데 그걸 다 소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여간 제리와 빅은 그렇게 한다. 화자가 빅이니까 책에는 빅과 사만다의 침대 장면만 살짝 나온다. 아참,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제리의 물건이 빅보다 훨씬 크고, 빅이 아래로 휘어져 있는 반면 제리는 위로 휘어졌으며(이건 다른 작품에서 나오는 이야기였나?), 지속 시간도 비교하자면 무척 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미리 이야기를 주고받아, 여자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최대한으로 빅은 제리의, 제리는 빅의 침대 루틴을 지키기로 했음에도,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어느 새 자기 루틴으로 방사를 치루었는데, 처음엔 뻣뻣하던 사만다의 몸이 나중에 배배 꼬이면서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이렇게 ‘좋아’를 네 번 외친 다음에, 아이구 미국인들이란, 뒷처리도 하지 않고 다시 잠에 빠져버린다. 아, 드러. 아니, 드러운 건 아니지만, 거 좀 척척하니 찝찝하지 않아?&nbsp; 문제는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식탁에서 벌어진다. 화자 빅과 메리의 대화. 흠. 이건 알려드릴 수 없지.&nbsp; 박완서의 단편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놀랍지? 현관을 마주보고 있는 아파트의 두 남자. 하루는 어울려서 떡이 되도록 술을 퍼마시고 아뿔싸, 의도치 않게 오직 헷갈려서 서로 상대방의 현관을 열고 들어간다. 이미 밤은 깊어 두 집의 여사님들은 벌써 잠에 떨어진 상태. 그래 두 남자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주섬주섬 옷을 벗고 침대 속으로 파고 들어 아내(인줄 아는 옆집 여자)의 몸을 더듬다가 위로 올라가 일을 치룬다. 그런데 놀랍기도 하지. 두 남자가 비슷한 수준의 상투적 전희에 이어 거의 비슷한 속도와 유지 시간, 그리고 아주 정확하게 같은 방식의 뒷처리 후에 잠에 빠지더라는 거. 박완서 시절이니까 천민자본주의의 절정기에 물화, 정형화된 가정의 단면을 비튼 소설이다.&nbsp; 반면에 미국 가정을 무대로 하는 영국인 소설가 로알드 달은 그렇지 않다. 사회성이 쏙 빠진 흥미 본위의 절반 대중소설. 그래서 재미로 치면 조금, 아주 조금 윗길이기는 하지만 기대하지 마시라. 절대 결말을 일러드리지는 않을 터이니.<br>&nbsp; 그런데도 이 책을 &lt;찰리의 초콜릿 공장&gt; 류라고 하는 것은, 그로테스크한 환상이랄까, 하여튼 그 비슷한 묘사가 넘치기 때문이다. 그게 소년시절을 지나고 있는 시절이라면 재미있고, 놀랍고, 빨려들면서 읽을 수 있겠지만, 대가리 다 커서 이제 인생에서 유별날 것이 별로 없다는 걸 아는 성인이라면, 이게 무슨 허황되고 헛된 이야기야, 타박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nbsp; 하여간 나는 그랬다.&nbsp; 그럼에도 시간 죽이는 데는 끝내줄 거 같다. 여행길이라면 즐겁게 가방에 넣고 가라고 추천. 당신의 정서함양을 위한 교양도서는 아니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5912/42/cover150/k17273769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9124292</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탈mask 또는 그렇게 보임 - [위대한 신 브라운 /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날개가 있네]</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24598</link><pubDate>Tue, 09 Jun 2026 05:1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2459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12137264&TPaperId=1732459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93/19/coveroff/k81213726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12137264&TPaperId=1732459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위대한 신 브라운 /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날개가 있네</a><br/>유진 오닐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6년 03월<br/></td></tr></table><br/>.&nbsp; 음. 이 두 편은 유진 오닐이 쓴 작품에 국한하자면 망작일세. 다른 극작가가 썼으면 훌륭한 작품이겠지만 천하의 오닐의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다. 아, 오해하지 말기. 내가 최근에 본 연극이 몇 십 년 전 일이다. 이런 문외한이 하는 말이니 1도 믿지 않아야 마땅하다.&nbsp; &lt;위대한 신 브라운&gt;에서는 노골적으로 탈, 마스크가 나오고, &lt;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날개가 있네&gt;에서도 조현병이 심각한 여자 주인공 엘라는 콩고 탈을 보고 경끼를 일으키는 장면이 나온다. 엘라의 진짜 탈은 그깟 콩고 탈이 아니라 흑인, 백인으로 세상을 가르는 인종의 문제, 그 문제에 함몰하여 빠져나올 줄 모르는 엘라 본인이 쓴 탈이다. 라고 나는 주장한다.<br>&nbsp; &lt;위대한 신 브라운&gt;에는 두 명의 탈 쓴 이가 나온다. 주인공 윌리엄 브라운. 애칭 빌리. 그리고 디온 앤서니. 두 명 다 출중한 젊은이들.&nbsp; 디온의 아버지 앤서니 씨는 큰 건축회사 사주. 몽상가이면서 예술적 기질이 넘치는 디온은 자신의 내면을 지배하는 약한 자아를 감추기 위하여 매사 냉소적이고 자신감이 넘쳐 세상을 조롱하는 듯한 가면을 가슴에 달고 다닌다. 빌리는 자기 아버지 브라운 씨가 앤서니 씨의 도급업자로 시작해 동업자의 말석에 끼워주어서 그런지 디온에 대하여 열등감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고 사실 실력도 디온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빌리는 자신감 넘치는 야심찬 모습의 탈을 지니고 있다.&nbsp; 두 등장인물은 늘 가슴에 달고 다니는 탈을 썼다 벗었다 하며 극을 이끌고 있다. 벌써 인물들을 열거하니 누가 더 우위에 있게 될 줄 딱 드러난다. 당연히 빌리. 속이야 어떻든 간에 겉으로 자신만만해서 신뢰감을 주는 빌리가 자연스레 성공해 앤서니 씨의 회사를 인수하고 사명을 “브라운 앤드 선”으로 고쳐버렸다. 이 동안 솜씨 좋고 머리도 좋은 디온은 빌리도 사랑해마지않는 마거릿과 결혼해 날이면 날마다 술과 도박에 미쳐 자기 재산을 홀라당 말아먹어 버렸다.&nbsp; 착한 마거릿이 디온에게 좋은 말로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먹고 살 거냐고 바가지를 살짝 긁는다. 디온은 진짜 싫었지만 빌리에게 가서 자리를 얻으려 한다. 그래서 마거릿이 빌리에게 가 자리를 부탁하고, 디온의 실력이면 속으로는 모셔오고 싶어할 정도라, 빌리는 버선발로 달려가 디온을 모셔온다. 디온의 직업? 건축사.&nbsp; 일찍이 고등학교 시절, 빌리는 마거릿의 그림자만 봤다 하면 선 자리에서 꼿꼿하게 얼어붙을 정도로 짝사랑했다. 그게 지금도 그렇다. 좋아했지만 고백하지 못했다. 마거릿이 예술가 기질이 넘치면서 어딘가 우울하게 보이는 디온한테 반해 디온과 사귀었고 결혼까지 했다. 빌리는? 탈을 쓴 빌리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서든지 디온의 탈을 빌리가 쓴다면? 당연히 마거릿은 빌리를 디온으로 알고 남편이니까 뭐든지 다 해준다.&nbsp; 여기까지 얘기해도 뭔가 일이 생기겠지? 맞다. 생긴다. 살인? 흠. 너무 나갔다. 그건 아니고 빌리의 집, 빌리의 응접실에서 세상 살 기력이 모두 빠진 디온이 팍 고꾸라져 죽었다. 심근경색이나 뭐 비슷한 거겠지. 여태 디온의 가슴에 매달려 있던 그의 탈. 그걸 빌리가 낚아챈다. 빌리는 디온의 시신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처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위에서 말했지. 빌리가 디온의 탈을 쓰면 마거릿, 십대 시절부터 자신의 몸뚱이와 다른 한 부분을 꼿꼿하게 만들었던 마거릿이 자신을 남편 디온으로 알아본다고. 그래서 디온의 탈을 쓰고 마거릿의 집으로 찾아가고 뭐 그렇다.<br>&nbsp; 탈(mask) 이론.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주장한 건데, “마스크는 시인의 분기된 자아”로 시에 나타나는 시인의 비밀스러운 자아와 구분해야 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한국 예이츠 저널, 2019)&nbsp; 그러니 이 작품의 탈은 예이츠의 주장하고는 별개로 차라리 척 러셀이 감독하고 천재적인 코미디언 짐 캐리가 주인공을 한 영화 &lt;마스크&gt;의 스탠리 입키스와 더욱 유사하다. 탈을 쓰면 자신의 속마음, 실체와는 전혀 다른 인격으로 행위하고, 타인들도 자신을 완전히 타인으로 봐주는 것.&nbsp; 세상 사람 다 탈을 쓰고 살지만 아무래도 좀 과하다.<br>&nbsp; &lt;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날개가 있네&gt;는 흑인 남자와 백인 여성으로 이루어진 부부 이야기이다.&nbsp; 백인들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흑남백녀 간의 혼인. 반대로, 즉 백남흑녀는 그나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봐준단다. 물론 지금 시절이 아니고 20세기 때 이야기다. 1967년에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당대 특급 배우들인 스펜서 트레이시, 캐서린 햅번, 시드니 포이티어가 출연한 명작 &lt;초대받지 않은 손님&gt;이 나왔을 당시에도 흑남백녀의 혼인을 두고 난리가 벌어졌다고 들었다. 작품 속에서도 백인 아가씨의 부모, 스펜서 트레이시와 캐서린 햅번이 상당히 진보적 성향의 부부지만 열네 살이나 더 많은 흑인 홀아비 박사님을 사위감으로 데려왔을 때 처음엔 당황하고 이어서 결혼에 찬성하지 않았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nbsp; 하물며 이 희곡을 발표한 것이 &lt;초대받지 않은 손님&gt;이 나오기 42년 전인 1925년이었으니 당시에는 어떠했을지 안 봐도 비디오.&nbsp; 주인공은 흑인 청년 짐 해리스와 백인 여성 엘라 다우니. 장소는 뉴욕.&nbsp; 둘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동네 친구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때 무대의 막이 올라간다. 어려서 아직 사춘기도 맞지 않은 짐과 엘라는 나름대로 첫사랑을 한다. 동네의 흑백 아이들도 나름대로 친하게 지내고, 찬하다기보다 허물없이 지낸다. 아이들은 짐과 엘라가 서로 좋아하는 것을 보고 그 나이에 맞게 놀려대고, 엘라는 애들한테 바락 화를 내니, 구석에서 그 모양을 바라보던 어떤 할애비가 이랬다지?&nbsp; “그런데 참, 이번 기집애는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nbsp;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엘라 눈에는 도무지 짐이 차지 않았다. 예쁜 백인 여자애가 집에 돈 많고 똑똑해서 장래 변호사를 지망할지라도 흑인 남자애를 좋아하기는커녕 말 한 마디라도 나누고 싶겠냐고. 이미 사춘기를 훌쩍 지난 무렵인데. 엘라 역시 보통의 백인 여자애와 다를 바 없어 이미 백인 권투선수 쇼티한테 몸과 마음, 줄 건 다 준 눈치다. 당시에 가장 인기있던 스포츠가 복싱. 복싱의 인기는 이후 60년이 넘게 간다. 쇼티도 동네 여자애들은 다 건드린 모양이다. 이 가운데 하나가 엘라였을 뿐.&nbsp; 세월이 더 가면 엘라가 낳은 쇼티의 아이가 죽었다. 아이가 죽자마자 쇼티는 엘라를 모른 척해버렸다. 갑자기 자유로워진 쇼티는 다른 아가씨를 찾아가고, 절망하는 엘라 앞에 나타난 남자가 바로 더러운 흑인 짐. 짐 크로 해리스. 왜 하필이면 짐의 두번째 이름으로 ‘크로’를 붙였는지 거 참.&nbsp; 짐은 고등학교 시절에 유급을 한 번 먹은 것처럼 연달아 변호사 시험에 낙방중이다. 분명히 다 아는데 막상 시험장에 가서 답안을 쓰려면 머리 속에서 정답이 서로 막 헝클어져 조리있는 답안을 작성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매번 그랬다. 뭐 그럴 수 있지. 이럴 때 엘라를 만났고, 엄마와 누이동생 해티가 반대하는대도 불구하고 결혼해버린다. 그리고 곧바로 프랑스로 이민을 떠난다. 둘은 결혼 전에 미국 안에서는 흑남백녀가 도저히 살 수 없을 거 같아 그런 건 하나도 허물이 되지 않는 나라로 떠나 살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다.&nbsp; 그러면 잘 살 것 같지? 파리에도 미국인은 득실거렸고, 거기서도 흑남백녀는 완전히 왕따를 당했으며, 따라서 엘라는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은 채 홀로 극한의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파리를 떠나 시골로 가도 마찬가지였다. 아예 방안에 틀어벅혀버린 엘라. 이러다 사람 하나 잡을 거 같아서 이민 2년 만에 다시 귀국길에 오른다.&nbsp; 이미 정상궤도를 벗어난 엘라. 이제 유진 오닐은 자기 전공분야를 만났다. 약간 정신질환이 있는 여성. 그것도 혼인한 여성을 오닐만큼 잘 묘사하는 작가는 세상에 없으리라. 그리고 이건 비극으로 이어질 수밖에. 애초 오닐을 읽으면서 해피 엔드는 기대 난망이겠지만.&nbsp; 이 드라마가 사랑 이야기? 사랑을 못 이루게 하는 인종 문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심리적 궤멸을 향해 오랜 시간을 치닫는 불행한 여성의 궤적, 그리고 그것 때문에 희생당하는 주변 인물, 즉 오닐과 오닐의 어머니가 용해된 플라스크 속 액체인 듯했다. 뭐 그랬다는 거다. 믿을 필요 없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93/19/cover150/k81213726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931994</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파란 휴지 줄까, 빨간 휴지 줄까? - [그림자 밟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22799</link><pubDate>Mon, 08 Jun 2026 05:2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2279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185014578&TPaperId=1732279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298/78/coveroff/118501457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185014578&TPaperId=1732279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그림자 밟기</a><br/>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14년 06월<br/></td></tr></table><br/>.&nbsp; 1954년생 어드리크는 1972년 다트머스 대학에 입학했는데 이때 아홉 살 연상의 인류학자, 작가, 원주민 연구 프로그램 책임자인 마이클 도리스의 수업을 듣는다. 그리고 그와 사랑에 빠진다. 이후 동부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가방끈을 늘리는 동안 도리스의 뉴질랜드행 등 두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문학적 파트너십으로 단편소설을 함께 쓰며 연인의 관계를 돈독히 해 1981년 결혼에 이른다.&nbsp; 이때 도리스가 한부모가정 자격으로 입양한 세 자녀가 있었고, 어드리크와의 사이에도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태아 알코올 의존 증후군이 있는 입양한 첫째는 23세에 차에 치어 사망했다. 4년 후에는 입양 셋째 사바가 아버지 도리스를 아동학대 혐의로 고소했고, 이 사건으로 부부는 별거에 들어가 다음해인 1996년에 이혼했다. 1997년에는 마이클 도리스가 자살했다. 이후 입양 딸이 도리스가 평소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했으며 루이스 어드리크 또한 학대를 방관했다고 증언했다.&nbsp; &lt;그림자 밟기&gt;를 읽고 루이스 어드리크를 위키피디아 검색해보니, 이 책이 어드리크 부부와 입양한 삼남매 이야기 가운데 성적 학대를 제외하고 픽션을 더해 쓴 소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주민 출신 인류학자, 작가 대신 적어도 미국 내에서는 잘 나가는 화가로 바꾸고, 남편에 의한 아내에 대한 가스 라이팅을 더 구체화한 작품으로.<br>&nbsp; 작품의 주인공은 아이린과 길버트 부부. 길버트는 작품 속에서 약칭 ‘길’이라고 불린다.&nbsp; 만일 내 생각대로 루이스 어드리크가 위 세 입양아와 부부 사이를 소재로 소설을 썼다면 아이린은 자신을 모델로 한 치파웨족 인디언. 길은 클라스마족, 크리족, 자기 땅이 없는 몬태나 치페와족이 뒤섞인 혈통이라 미국 당국으로부터 원주민 등록이 미루어지고 있는 1/4 원주민이다. 원주민 등록을 하면 미국 정부와 원주민 협약 상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심지어 대학에 진학할 때에도 우선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 길은 그걸 받지 못한다. 그래도 그림을 그리고, 비싼 값에 미국 전역으로 팔려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것 없이, 부자는 아니지만 콜로라도에서 궁상스럽지 않게 살고 있다.&nbsp; 아이린은 19세기 아메리카 원주민을 그린 화가 조지 캐틀린에 대한 논문을 마무리하고 있다. 결혼 후 아이 셋을 얻어 첫째가 특히 과학에 천재가 있어 대학 강의를 듣는 13세 플로리언, 둘째가 원주민적 삶과 생존에 관심이 많은 11세 딸 리엘, 막내가 6살배기 아들 스토니. 이 가운데 둘째 리엘은 배 아파 난 딸이 아니라 친척이라고 했으니 입양한 모양이다. 입양과 관계없이 동등하게 키운다. 하지만 리엘은 부모와의 사이에 얇은 막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br>&nbsp; 실제 생활에서 전남편 도리스가 어드리크보다 결코 적지 않은 나이인 아홉 살이 더 많다. 아이린과 길 부부도 정확한 차이를 드러내지 않지만 나이 차이가 좀 있다. 모임에서 길이 아이린을 만났고, 둘은 첫눈에 호감이 생겼으며, 길은 아이린에게 모델을 해달라고 제안했다. 이때 아이린은 대학에 다니고 있을, 다니기 시작할 때였는데 학비는 집이나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더라도 당장 돈이 아쉬워 그렇게 하기로 했다.&nbsp; 아무리 화가 앞에서 예술을 위한 일이라 하더라도 남자의 시선이 머무는 공간에서 누드로 있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길은 아이린에게 다가와 피부, 윤곽선, 머릿결, 젖꼭지를 유심히 바라볼 뿐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했다. 길을 처음 보는 순간 호감이 있었던 데다가 훌륭한 매너까지 가지고 있는 걸 확인했으니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아이린. 이들은 머지않아 연인관계로 접어들고, 원래는 에드워드 호퍼를 연상시키는 화풍으로 인디언보호구역과 풍경으로 시작했다가 아이린을 만나고 아이린의 초상과 인물화로 성공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nbsp; 다만 말이 초상화이지 아이린의 모든 모습이 다 그림으로 그려져 미국 각지를 돌며 전시를 하고 있었던 거다. 당연히 다수의 누드도 들어 있고, 그냥 포즈만 취하지 않고, 샤워하는 아이린, 누워 엑시터시를 감각하는 아이린, 술이 꽐라가 되어 충혈된 눈과 풀린 몸가짐의 아이린, 섹스 후의 젖은 몸을 적나라하게 벌리고 있는 아이린, 엉덩이 사이에 꽃 한 송이를 꽂고 엎드린 아이린, 하복부와 벌린 허벅지 마치 &lt;세상의 탄생&gt;과 흡사한 특별 부위만 노출한 아이린. 이런 그림만 있다는 게 아니라 이런 그림들도 아이린의 초상 시리즈에 포함되어 있다. 그것들이 인터넷 검색만 하면 누구나, 언제, 어디서도 볼 수 있다. 실제로 큰아들 플로리언은 어머니의 초상화를 잔뜩 검색해 보고 있다가 아이린에게 들켜 화들짝 놀라 삭제하기도 했다.&nbsp; “괜찮아. 그림인데 뭐. 그러나 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nbsp; 아이린이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였다.<br>&nbsp; 길은 확실히 화가로의 재능이 있다. 하지만 재능은 그를 천천히 따분한 인간으로 만들기 시작했고, 정말 인생의 따분함을 느끼기 시작하자 감정을 만회하기 위하여 더 일에 몰두했고, 성공과 관계없이 과로로 녹초가 된 밤에는 처음에는 가끔, 그러다가 차츰 자주 과음을 하기 시작했다. 부창부수라, 아이린도 길을 따라 어느덧 술을 많이 마셨고, 당연히 알코올 의존증을 겪게 되었으며 이것으로 남편을 지치게 만들었다.&nbsp; 남편을 지치게 만드는 범 가운데 하나. 일찍이 첫 아이 플로리언을 낳은 1994년. 길은 아이를 키우면서 기념이 될 만한 일기를 써보라고 두꺼운 표지의 빨간색 일기장을 사주었다. 아직까지 쓰고 있다. 몇 권이 되겠지. 똑 같은 빨간색 표지의 일기장. 이 가운데 최근에 쓰고 있는 건 오랜 서류를 모은 캐비닛의 뒤쪽에 보관하고 있다. 아이린은 속으로 말한다.&nbsp; “당신은 오랜 수색 끝에 이 일기장을 발견했을 거야. 내가 바람 피우는지 알아내려 읽었을 거고.”&nbsp; 상대가 바람 피우는지 배우자가 의심한다면 다 된 부부다. 이 집도 그렇다. 부부가 차츰 권태로워지고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그래서 상대를 지치게 만들면 별 생각이 다 들게 되리. 그리하여 남편 길은 (어드리크의 전남편 도리스처럼)아이린과 아이들을 몇 번 때렸고 (그러나 리엘을 성추행하지는 않았으며), 이건 미국 법에 어긋나는 일이라 경찰에 고발하기 전에 심리상담사에게 상담을 받았다. 이후 손찌검은 하지 않지만 살면서 큰 소리 한 번 치지 않을 수 없고, 위협적인 몸짓 역시 한 번 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인데, 결국 다시 한번 큰아들 플로리언의 머리통을 후려갈길 예정이다.&nbsp; 이미 가정, 특히 부부 사이는 다 된 것으로 판단한 아이린은, 남편 길이 읽고 있다고 확신하는 빨간 색의 일기장에 소설 한 편을 쓴다. 세 아이 전부 아버지가 다른 남매. 특히 막내는 부부가 프랑스 여행 중에 만난 남자와의 베드씬까지 상세하게 적어 놓았다. 사실이 그렇냐고? 천만에. 아이린이 딱 한 번의 혼외정사로 혼인의 순결을 깨뜨리긴 했지만 안간힘을 다해 그 실수를 잊고 살려 애쓰며 살고 있다. 길은 성격이 지랄 같아서 문제이고 신경정신적으로 작지 않은 결함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적어도 혼인의 순결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오히려 자신의 순결함이 배우자의 그렇지 못함을 캐려고 하는 집착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nbsp; 하여간 이렇게 해서 길은 아이린이 씨 다른 아이 세 명의 자녀를 만들었다고 확신하지만, 어떻게 아느냐, 그걸 알게 된 내력은 결코 밝힐 수 없다. 아내가 쓴 일기를 읽었다고 자백해야 하니까.&nbsp; 아이린의 고민. 이혼을 원하지만 진심으로 바라지는 않는다. 자신이 바람을 피웠다고 남편이 믿게 빨간 표지의 일기책에 불륜 소설을 쓰지만 정작 이혼하면 먹고 살 일이 걱정이다. 그렇다고 조지 캐틀린에 관한 논문에 열심인 것도 아니다. 박사가 되어야 취직할 수 있다며 이혼에만 집착할 뿐 이혼 후 아무 계획이 없다. 남편이 자기가 불륜행각을 벌였다고 믿게 만들려고 일기장을 통해 가스라이팅을 감행한다. 아빠한테 얻어맞아 혹이 난 플로리언의 이마 사진을 찍었지만 보관만 할 뿐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결말이 그 꼴이 나는 거다. 어떤 꼴인지 알려드리지 않겠지만.&nbsp; 남편 길이 왜 자신의 외도를 의심하게 되었을까에 관한 묘사는 1도 없다. 신경정신적 질환인 편집증, 즉 의처증이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쩌면 아이린이 벌인 단 한 번의 외도를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내 추측은 알고 있다는 데 한 표. 이혼 경력이 있는 루이스 어드리크는 전적으로 아이린 편이다. 그걸 읽는 독자들도 어드리크의 문장에 현혹되어 전적으로 복장이 터진다. 뻥!<br>&nbsp; 그러면 아이린의 진짜 모습은? 은행 창고에 있다. 미니애폴리스의 웰즈 파고 은행. 안전보관소 데스크에서 신분증을 제시하면 안내원이 지하 층의 은빛 창살을 열고 보관함 앞까지 데려다 준다. 그러면 아이린이 핸드백에서 자신의 열쇠를 찾아 보관함을 꺼내 열쇠를 비틀어 그 속에서 파란 공책을 꺼내 책상에 놓고, 자신은 의자에 앉아 진짜 자신의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nbsp; 이렇게 책은 남편이 보라고 쓰는 열린 빨간 일기와 진짜 자신의 내면을 밝히는 닫힌 파란 공책으로 구분한다.&nbsp; 망조가 든 가정. 심리상담사 앞에서 씨 다른 아이들 때문에 대판 부부싸움을 하고, 그날 밤 길은 창문 밖으로 자신이 그리고 있는 모든 그림을 던져버린다. 피 같은 술병도. 그것이 쌓인 눈 속에 퍽퍽 꽂혔으니 다음날 우연히 이 집 앞을 걸어갈 노숙인이 있다면 얼마나 횡재 같았을까? 그리고 다음 날 길은 자진해서 신경정신과에 입원한다. 집안에 평화가 찾아오지만 수입은 발생하지 않는다.&nbsp; 몇 달 후, 길이 퇴원해 집에 돌아온다. 신경이 죽은 듯한 길은 오랜만에 가족 동반해 6월의 호숫가로 피크닉을 떠나고, 소설 &lt;그림자 밟기&gt; 역시 대단원을 향해 막바지 스타트에 들어간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298/78/cover150/118501457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2987877</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오발탄</category><title>비둘기 날개, 그리고 한 여인의 초상</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22212</link><pubDate>Sun, 07 Jun 2026 21:4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2221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2319&TPaperId=1732221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952/12/coveroff/8932912319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2300&TPaperId=1732221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952/11/coveroff/8932912300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br>&nbsp;2017년에 쓴 잡문. 8월 4일에 헨리 제임스가 쓴 &lt;비둘기의 날개&gt; 독후감을 올릴 예정이다. 읽는 내내 &lt;여인의 초상&gt;이 막 떠올랐다. 그래서 생각난 김에 옛 노트 자락을 들췄다. 언제나 그렇듯이 전에 써 놓은 걸 다시 읽는 일은 꽤 창피한 일이다.<br><br><br><br>&nbsp;원어 제목이 &lt;The Portrait of a Lady&gt;. 이 책을 읽어가면서 상권의 중간쯤 들어가면 책의 한글 제목은 당연하게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lt;한 여인의 초상&gt;으로. &lt;여인의 초상&gt;과 &lt;한 여인의 초상&gt;은 당연히 다르다. 주인공 여인이 이사벨 아처라는 이름의 재색을 겸비한 미국 태생 여자로 앞으로 긴 세월을 영국에 살게되고, 그러나 모든 여자를 대표하지 못한다. 따라서 당연히 &lt;한 여인의 초상&gt;이라고 해야 하는데..... 요새 나한테 미운털이 콱 박혀있는 출판사 창비가 이런 짓 하나는 정말 잘해서 정말로 &lt;한 여인의 초상&gt;이라고 제목을 달고 똑같은 책을 찍었다. 비슷한 것이 모파상이 쓴 &lt;여자의 일생&gt;. 그것도 원어로는 &lt;한 인생&gt; 또는 &lt;어떤 인생&gt;이지만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lt;여자의 일생&gt;으로 했다가 그냥 굳어져 우리나라도 덩달아 &lt;여자의 일생&gt;으로 굳어졌다고 들었다. (아마 예전 메모에도 그렇다고 썼을걸?)&nbsp;내가 왜 굳이 별거 아닌 것 가지고 서두를 떼냐하면, 이 이사벨 아처가 젊은 시절에. 이종사촌이 자기 아버지한테 받아야 하는 상속금 가운데 7만 달러를 본인은 모르는 것으로 하고, 이사벨이 상속받게 해주는데, 이걸 읽으면서 나는, 정말로 처절하게 "나한테는 왜 곧 죽어버릴 돈 많고 자식없는 이모부나 삼촌이 없느냔 말이다!"라고 절규했으며 애먼 마누라한테도 "혹시 나 모르는 너네 삼촌 가운데 돈 많고 장가 안 든 양반 안 계시냐?"고 했다가 타박만 오지게 먹어버리고 말았다.&nbsp;7만 달러가 그까짓 것 얼마나 되냐고? 계산해드리지. 때는 1850년대. 기분 좋게 1860년이라고 가정하여 그때 돈 7만 달러가 지금 돈으로 얼마쯤 될까, 라는 것을 계산하기 위해 150년 전이라고 뚝 잘라 생각하자. 그 동안의 평균 이자율을 4%로 본다. 고전을 읽어보면 유럽 각국에서 이자율은 아예 4%로 고정된 것 같다.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를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하나같이 연 4%인지. 20세기 초반과 중반 전쟁시기를 거치면서 무지막지한 이자율을 보인 적도 있지만 겸손하게 그냥 4%로만 보겠다. 환율 또한 겸손하게 1달러 당 1,000원으로 하자. 그럼 마이크로소프트 엑셀 파일을 여시라. 그리고 이렇게 입력해보시라.&nbsp;+70,000*(1.04^150)*1,000&nbsp;(입력 했으면 enter)​&nbsp;그때 돈 7만 달러는 지금 우리 돈으로 최하 251억원과 같은 수준이다.&nbsp;머리 좋고 얼굴 예쁘다는 걸로 이종사촌 마음에 들어 가만히 앉아서 251억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여자 얘기다. 나한테 251억 말고 200억 원만 있고, 하루에 백만원 씩 쓰면서 30년 동안 살 수 있다고 가정하면, 제일 먼저 마누라한테 92억원을 뚝 떼주고 그만 살자고 하겠다. 그럼 마누라도 여보 당신과 살면서 생전 이렇게 고마운 일은 여태 없었수, 하며 즐겁게 제 갈 길로 갈 거 같지 않은가. 그 다음 날부터 난 정신 없을 거다. 하루에 백만원씩 써제끼느라고.&nbsp;그래, 물론 안다. 세상은 60억년 전에 지구가 생겼을 때부터 단 한 번도 공평한 적이 없어서 나한테는 그런 일이 죽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걸. 맞아, 어찌 왕후장상의 씨와 내 씨가 같을 수 있겠는가.<br>&nbsp;위에서 이렇게 썼다고 해서 이 책 &lt;여인의 초상&gt;이 그저 그런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오산. 미국인이지만 생의 많은 부분을 영국에서 산 헨리 제임스가 쓴 귀신 나오는 소설 &lt;나사의 회전&gt;이 전혀 생각나지 않을 참 재미있는 소설이다. 근 1,000 쪽을 넘어가는 긴 책을 정말 단숨에 읽게하는 작가의 신공이 놀랍다. 다만 내가 이렇게 갑자기 하늘에서 돈벼락을 맞은 신디(폭킹)렐라 얘기는 참 좋아하지 않는지라 나하고 궁합이 맞았다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 재미난 책을 폄훼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nbsp;아, 나도 죽을 때는 이사벨 아처의 이모부처럼 근사하게 죽고 싶은데. 돈을 많이 남겨서가 아니다. 죽는 모습이 정말 품위있게 폼난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952/11/cover150/893291230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9521122</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숫눈 못 밟는 마음 - [기역은 가시 히읗은 황토]</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17706</link><pubDate>Fri, 05 Jun 2026 04:4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1770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25293&TPaperId=1731770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080/29/coveroff/893642529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25293&TPaperId=1731770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기역은 가시 히읗은 황토</a><br/>김용만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br/></td></tr></table><br/>.&nbsp; 빠른 56년 잔나비띠 시인. 임실 덕치마을의 가난한 농가에서 6남매 가운데 셋째로 났는데, 그 험한 시절에 아이들한테 손찌검 한 번 안 하고 큰소리 한 번 안 치는 천생 지게 같은 아버지와, ‘양글이’라는 별호를 단 작은 체수와 화려한 입담이 야무졌던 어머니 덕분에, 가난 때문에 고생은 했을지라도 하여간 우애는 좋게 살았던 모양이다.&nbsp; 학교는 전주의 영생대학 국문과에 들어가 학교 이름이 바뀌어 전주대학 국문과를 졸업하지 않았을까 싶다. 졸업한 후에 희망대로 학교 교사가 되지 못했으니 그저 되는대로 책도 읽고, 시도 써보고 이것저것 하면서 살았겠지. 그러다 서른살이 오고 서울로 올라갔다. 거기서 고향 아는 사람들을 따라 아파트 현장일도 하고, 잡지사에도 잠깐 다녀보고, 구로노동자문학회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문학공부를 시작했다고, 세계일보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말했다. 그래서 이이의 농사짓는 시 속에 간혹 노동시도 섞여 있다.&nbsp; 1990년, 35세 때 부산노동자문학회에 속한 간호사와 결혼해 이후 줄곧 부산에서 살았다.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지역에서 일하기가 쉽지 않아 그저 너댓 명 두고 철물 가공업을 하는 작은 가게 소위 마찌꼬바에 들어가 성실하게 일을 배우기 시작해 무려 30년을 넘게 그렇게 산다. 시간은 쏜살같이 날아간다. 그렇게 영세 철물 가공공장 노동자로 30년 넘게 지내다가 은퇴를 하루 앞둔 2016년 12월 24일에 야구장 철망 보수작업을 하다가 휴대전화를 받으니, 아이쿠, 위암이란다.&nbsp; 마침 전에 누이동생이 소개해 사 둔 완주 위봉산 자락에 텃밭이 달린 작고 낡은 집이 있어서 치료와 항암 과정을 마친 후 그곳에 들어가 지금껏 거기서 농사짓고 산다.&nbsp; 시업은 1987년에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해 2026년에 두번째 시집 《기역은 가시 히읗은 황토》을 냈다. 데뷔 후에 첫 시집을 발표하고 그 속에 마저 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 시집에 담았다.<br>&nbsp; 사는 게 다 그렇다. 이스라엘이 미국 대통령을 꼬드겨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킨 것보다 손톱을 바투 깎아 나물 무칠 때마다 기름이니 된장이니, 청양고추 다진 것들이 닿을 때의 아리고 아린 손끝을 더 괴로워하는 거. 사는 거, 징그러운 거.<br><br>&nbsp; 가시<br><br>&nbsp; 산초나무 가시 하나&nbsp; 외약손 손가락에 박혔다&nbsp; 일주일간 함께 지냈다&nbsp; 손톱 밑 가시라더니&nbsp; 돋보기 쓰고도 보이지 않는&nbsp; 이 작은 가시 하나&nbsp; 받아줄 수 없어&nbsp; 괴로워하다니&nbsp; 엄살떨다니&nbsp; 결국 곪아터지다니&nbsp; (p.10 전문)<br><br>&nbsp; 짧으면서도 할 말 다했다. 둘째 행 “외약손”은 왼쪽 넷째 손가락이 아니라 그냥 왼손의 사투리. 작은 가시 박이면 거 참 신경 쓰이지. 돋보기를 써도 안 보일 정도로 작은데 따끔따끔하면 그걸 그냥 놔둬? 부처님이네. 나는 일단 가시 박인 부위 전체를 알코올 소독하고 손톱깎이로 따끔거리는 부위 전체를 막 후벼 파서 없애 버리는데 이것도 사람마다 다른 모양이다. 뭐 내 성질이 좀 별나서 그러겠지.&nbsp; 위암 환자인 김용만이 농사도 잘 짓는다. 아무래도 어려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자기도 지어본 가락이 있어 도시 사람들보다 적응하기 수월했겠지. 그래도 농사는 힘든 일이다. 나 아는 농촌 출신 도시 사람은, 세계적으로 흉작이 와 식량무기화 수준이 오지 않는 한 다시는 농사 짓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힘든 일이다. 김용만이 감자 농사도 좀 했던 모양이다.<br><br>&nbsp; 감자 캤다<br><br>&nbsp; 묵정밭 감자 캤다&nbsp; 약도 안 하고&nbsp; 퇴비만 넣었더니&nbsp; 감자가 고르지 않다&nbsp; 그래도 첨 농사치고는 솔찬하다&nbsp; 앞집과 옆집, 또랑 건너 최씨 아재&nbsp; 산 밑 할머니, 주말에나 왔다 가는 이층집 나눠주고&nbsp; 대전 해숙이, 형님네, 명희네&nbsp; 한봉지씩 보내고 나니&nbsp; 잔챙이만 남았다&nbsp; 괜찮다 잘 짓든 못 짓든&nbsp; 나누는 것도 농사다<br>&nbsp; 나는 학교 다닐 때 언제나 앞줄에 섰다&nbsp; 그래도 기죽지 않고 잘 살았다&nbsp; 큰 놈은 잔챙이가 키운다&nbsp; (p.12 전문)<br><br>&nbsp; 김용만이 6남매, 4남2녀. 해숙이와 명희가 여동생. 그리고 형님네. 형이 둘 있다. 맏이한테는 ‘큰형님’이라 올림말을 한다. 그냥 형님은 둘째, 자기 바로 윗형이다. 서울 사는 김용구. 큰형님은 시골에 살아(p.90) 굳이 농사 지은 거 보낼 필요 없다. 초등학교 선생이지만 시골 사는 건 시골 사는 거니까. 누구냐 하면 이름 좀 알린 섬진강 시인 김용택. 대전 해숙이는 바로 아래 동생. 군산 복숙이는 둘째 여동생. 그러면 명희는 남해 사는 막둥인가? 아니면 막둥이의 딸? 뭐 이집 족보를 대강 추리하면 이렇다. 시인의 아내는 아직 부산에 살아 자기도 주민등록이 부산으로 되어 있다가, 나중에 아내마저 은퇴하고 완주 산골로 올라와, 너는 만날 남의 시만 읽고 자기 시집은 한 권 내지도 못하느냐, 하면서 바가지 득득 긁는다. 그렇게 산다. 그래서 시인들아, 나 한테 시집 좀 보내지마, 울상을 하기도 하며. 늙어서 귀엽게.&nbsp; 두번째 시집이라도 등단 후 발표하지 않고 그냥 써 둔 시들이 많았겠지. 그래서 아직 부산 살며 아들 동해, 딸 도연이와 살 때 지은 시도 몇 편 들어 있다.<br><br>&nbsp; 기분 좋은 밤<br><br>&nbsp; 아내 퇴근이 늦는 밤이면&nbsp; 가끔 우리는 저녁을 시켜 먹는다&nbsp; 짜장면 하나&nbsp; 짬뽕 곱빼기 하나&nbsp; 전화해놓고&nbsp; 신이 난 동해는&nbsp; 베란다 창가에 붙어 있고&nbsp; 아빠 돈 있느냐고&nbsp; 도연이는 자꾸 묻는다<br>&nbsp; 아들딸 앞에 두고&nbsp; 국수 가락 잘라주며&nbsp; 소주 두어잔 받아 마시는&nbsp; 기분 좋은 밤<br>&nbsp; 아내가 가끔은 늦어도 좋다&nbsp; (전문. P.20)<br><br>&nbsp; 김용만은 영세 공장의 주임이고 아내는 간호사. 맞벌이하는 집이다. 시를 가만 읽어보면 평소에 이집 안주인, 여자는 돈벌이도 하면서 온갖 가사를 전담하는 모양이다. 엄마가 늦게 와서 어쩌면 아빠가 그냥 밥 짓고 차려주기 귀찮아서 짜장면 시켜 먹었을 수도 있지만, 밥은 당연히 여자가 하는 거라 엄마 기다리기 싫어 주문음식을 먹는 것일 수도 있다. 이왕이면 첫번째 경우였으면 더 좋겠다. 이왕이면 아내도 좀 늦게 퇴근해 집에 들어왔을 때 네 식구가 함께 먹었으면 좋겠다. 동해는 짜장면 먹고, 아빠와 도연이는 짬뽕 나누어 먹고, 엄마가 탕수육 한 접시 홀랑 다 먹었으면 더 좋았을 그림.&nbsp; 이렇게 살다가, 은퇴 며칠 앞두고 위암 진단. 이어서 치료. 그리고 완산으로 낙향. 홀로 낙향했다.<br><br>&nbsp; 선글라스<br><br>&nbsp; 혼자서도 살림 잘하고 산다며&nbsp; 아내가 선글라스 하나 사줬다&nbsp; 도수 들어간 비싼 걸로&nbsp; 그런데 산중에 사니&nbsp; 자랑할 사람이 없다&nbsp; 그래서 소양이랑 산책 갈 때 쓰고 간다&nbsp; 산길 오르며 감나무에게&nbsp; 산길 내려오며 참나무에게 자랑한다&nbsp; 그래도 사람이 아니어서&nbsp; 좀 시시하다&nbsp; (p.68 전문)<br><br>&nbsp; 부산 살 때 가끔 시인이 아내 대신 밥도 짓고, 반찬도 만들고, 국이나 찌개도 끓여 밥상 좀 차렸겠지? 혼자 병 고친다고 완산 산골에 들어가 있는 남편한테 비싼 선글라스도 사 가져오는 거 보니까. 다행이다. 그래야지. 이러다가…. 아내마저 은퇴하고 이제 남편 곁으로 왔다. 설마 아주 오지는 않았겠지. 천생 도시 사람이 단번에 시골살이 할 수야 없겠지. 여전히 부산 살며 완주에는 왔다갔다 하겠지.<br><br>&nbsp; 차마<br><br>&nbsp; 퇴직하고 산골 내려와&nbsp; 아내 곤히 잠든 밤&nbsp; 홀로 깨어 서늘히 시집 읽는다&nbsp; 밤새 눈 내려 쌓이고&nbsp; 언제 그랬냐는 듯&nbsp; 하늘에 별들 깊다&nbsp; 문밖을 나서려다&nbsp; 눈 귀한데 살다 온&nbsp; 아내 위해 차마&nbsp; 마당에 내려서지 못했다&nbsp; (p.96 전문)<br><br>&nbsp; 부산 아줌마인 아내라서 평생 눈구경이 몇 번 없었을 거라, 잠 깨어 숫눈 가득 펼쳐진 마당을 처음 밟아보라는 늙은 남편의 마음이 곱네. 아내도 이 마음 꼭 알아주었으면 더 좋겠다.&nbsp; 근데 어라, 이제는 완주 완산에서 부부가 아주 사는 모양이네? 이런 시를 쓰는 거 보니까.<br><br>&nbsp; 핑 다녀오세요, 했다<br><br>&nbsp; 아내가 십이일간 유럽 여행을 갔다&nbsp; 나는 안 갔다&nbsp; 나는 유럽보다 봄이 오는 우리 마을, 내 작은 집이&nbsp; 더 좋다&nbsp; 긍게 안 갔다&nbsp; 그래서 늦은 밤 터미널에 아내 내려주고&nbsp; 핑 다녀오세요, 했다&nbsp; (p.101 전문)<br><br>&nbsp; 오늘은 시인의 가정사를 한 스토리로 해서 독후감을 써 보았다.&nbsp; 이런 장면보다 좋은 시들이 훨씬 많다. 그걸 다 읽어드리지는 못하겠고, 딱 한 수만 소개하자.<br><br>&nbsp; 산길에서<br><br>&nbsp; 다시 또 봄은 왔는데&nbsp; 어떻게 앉아만 있냐&nbsp; 겨우내 녹슨 호미 걸어놓고&nbsp; 어찌 책만 보냐&nbsp; 저 앞산 진달래&nbsp; 산벚꽃 팡팡 터지는데&nbsp; 환장 없이 앉아만 있냐&nbsp; 매급시 가슴 울렁이는데&nbsp; 내게 진정하라니&nbsp; 그게 할 소리냐&nbsp; (p.61 전문)<br><br>&nbsp; 8행의 “매급시”는 “맥 없이”의 사투리이기도 하고 시어이기도 하다. &lt;선글라스&gt;에서 시인과 함께 산책을 나간 ‘소양이’는 시인이 기르는 시고르자브종 강아지.&nbsp; 엇다 모르겠다. 딱 한 수만 더 읽어드리겠다.<br><br>&nbsp; 고백<br><br>&nbsp; 또랑 건너&nbsp; 최씨 아재네&nbsp; 비닐하우스 집 짓고&nbsp; 콘크리트 쳤다&nbsp; 온종일 땅 고르고&nbsp; 터 닦아 레미콘 받았다&nbsp; 수고했다며 십오만원 주길래&nbsp; 한동네 살며 그럴 수 없다&nbsp; 손사래 친 후&nbsp; 대문 나서기도 전 후회했다<br>&nbsp; 오만원이라도 받을 것을&nbsp; (p.16, 전문)<br><br>&nbsp; 30년 넘게 철물 가공, 용접 같은 영세 공장 노동일을 했으니 손끝이 맵겠지. 비닐하우스 짓고 콘크리트 타설하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겨. 그래 하루 종일 일 해주고 막걸리 잔도 좀 얻어먹었으니 같은 동네에서 같은 사투리 쓰는 사람끼리 됐다, 이런 마음이었겠지. 그러나 그럼에도 섭섭한 건 어떡해. 속으로 그랬겠지. 내가 염병을 한다고 손사래까지 쳤어, 그래. 뭐 사는 일이 다 그런 거여. 십오만원 준다고 그걸 덥석 받아오면 또 이게 사달이 나거든. 거기서 다시 오만원이나 십만원은 돌려주면서, 집에 돼지고기에 쐬주 한 병 사가려면 이걸루다 충분허요, 하면 좋았을 것을, 그쟈?<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080/29/cover150/893642529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0802939</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한때 전지현 대역배우였던 작가 - [조연 여배우]</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15926</link><pubDate>Thu, 04 Jun 2026 04: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1592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22039426&TPaperId=1731592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511/70/coveroff/k22203942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22039426&TPaperId=1731592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조연 여배우</a><br/>등구운 지음, 이기선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06월<br/></td></tr></table><br/>.&nbsp; 1983년생 타이완의 배우, 모델 겸 작가. 국립정치대학에서 한국어학과 광고학을 복수전공하고 영국 에식스대학 드라마 스쿨에서 연기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 전지현이 타이완에서 코카콜라 광고를 찍으러 갔을 때 172cm, 52kg에 신체 사이즈 32/24/35를 유지하던 등구운이 전지현의 대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고. 많은 연극, 드라마, 영화, 광고에 출연한 배우인데 내가 원래 연얘가 중계를 거의 듣지 않는 편이라 어느 정도 스타였는 지는 모르겠다.&nbsp; 하여간 한국어를 전공해서 그런지 자기 이름 鄧九雲도 타이완 발음 ‘덩주윈’ 대산 우리 발음인 ‘등구운’으로 읽어달라고 스스로 부탁해서 작가 이름을 박은 것이라 한다. 우리말 외에 타이완 사람이 자주 그렇듯이 만다린어는 기본이고 법으로 국가언어 가운데 하나로 지정한 영어도 모국어 수준에 일본어도 우리말 정도는 할 줄 안다.&nbsp; 위키피디아에는 등구운이 영국의 에식스대학 드라마 스쿨에서 연기 석사를 취득했다하고, 중국의 바이두 백과는 영국의 이스트 15 연기학교를 졸업했다고 하는데, 이스트 15가 에식스 대학에 포함되어 있는 기구인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영국에서 학위를 따 왔음에도 타이완으로 돌아오니 작업도 들어오지 않고, 기껏 얻어걸린 드라마에 출연중 사고가 나 스태프 한 명이 죽는 바람에 촬영 중단이 되어버린 일화가 나온다. 이것도 아마 픽션이겠지.&nbsp; 위키피디아 등구운 페이지에는 “이 항목에는 인생 경험에 대한 정보가 부족합니다. 기사에 대한 정보를 확장해주세요.”라는 당부의 말이 적혀있다. 젊은 작가들이 자기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하물며 여배우는 더 하겠지. 그것도 인기 관리의 전략일 수 있으니 더는 모른 척하자.<br>&nbsp; 두 자매. 황청黃澄과 황첸黃茜. 띠동갑이다. 165cm, 56kg의 외양을 자랑하는 미인 동생 황청은 자기보다 더 잘생긴 것 같은 나이 차 많이 나는 언니 황첸한테 업혀 자랐다. 말이 그렇다는 거다. 그렇게 언니 겸 이모 겸 엄마 노릇도 해가며 살았다. 집안에 네 가족이 찍은 사진이 있다. 엄마, 황청을 안은 황첸, 아빠 순으로 앉아서 찍은 사진에서 엄마는 왼쪽, 아빠는 오른쪽, 황첸은 아래쪽에 눈을 두고,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바라보는 건 황청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황청이 여섯 살 때 사라졌다. 엄마 입에서는 한 번도 아버지 이야기를 듣지 못했고, 언니한테는 십년 이상이 훌쩍 지나간 후에, 그 인간이 술을 엄청 퍼마셨으며, 집을 나간 이후에도 자기한테만 몰래 와서 돈을 얻어가고는 했단다.&nbsp; 황청이 본인은 그리 예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입술이 좀 짝짝이처럼 생긴 바람에, 대학시절에 일본배우 OO을 닮았다는 이야기가 소문이 나서, 그 소문을 들은 방송국에서 찍어간 적이 있었다. 몇 주 후에 일본 배우가 광고 촬영차 타이안을 방문했을 때 조명을 맟추어 볼 대역을 요구하여 22시간 동안 8천 위안을 받기로 하고 대역을 맡았다. 커피숍 한 달 알바비를 하루에 받을 수 있는데 안 할 이유가 없지 싶어서. 그러네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손만 나올 대역배우 자격으로 황청이 남자 배우의 뺨을 때리는 장면을 찍어야 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의 왼쪽 뺨을 오른손으로 후려 갈리니 미안하기도 하고, 얼마나 아플까 싶기도 해서, 아프지 않으세요, 얼마나 아프세요, 막 이런 말을 해야 했는데, 남자배우는 그 역시 조그마한 소리로 괜찮습니다. 더 실감나게 세게 때리셔도 됩니다. 그래서 다시 촬영을 시작했을 때는 정말 실감나게, 빨리 끝내는 것이 덜 때리고 덜 맞는 일이다 싶어 마구마구 후려쳤지만 감독이 컷을 외칠 때마다 얼굴이 부은 남자가 서둘러 냉찜질을 하면서도 황청을 향해, 손바닥이 아프지는 않았느냐고, 이렇게 묻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가.&nbsp; 물론 이 남자는 작품의 뒤쪽으로 가면 이제 이름을 날리는 유명 배우가 되어 황청과 커플을 이루어 드라마를 찍게 되는데, 드라마에서 두 명 다 커플 배역을 너무 자연스럽게 연기해, 진짜 커플로 소문, 스캔들이 나 그걸 은근히 즐기는 가짜 연인으로 지내기도 한다.<br>&nbsp; 아빠를 쫓아버린 엄마는 두 딸과 조용히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는 사람이 애하고 혼자 사는 사람끼리 만나 가정으로 이루어 볼 생각이 없느냐면서 한 남자를 만나보라고 권유했다. 린 선생. 엄마가 만나보니 큰 키에 섬세하고 자상한데다가 믿음직 한 것이 마음에 딱 들었다. 하지만 린 선생이 세 모녀가 사는 집에 와서 보니까 엄마가 아니라 첫째 딸 황첸이 마음을 아프도록 폭 찔러버린 거였다. 그리하여 린 선생은 황첸에게 잘 해주었는데 그것이 점점 커져 둘은 연인으로 발전해버렸다.&nbsp; 황첸은 린 선생을 만날 때, 자주 동생 황청과 함께 외출했다. 황청의 나이가 아직 사리분별을 하지 못할 때라 엄마와의 관계는 어느 새 잊어버리고 그냥 린 선생이 황첸 언니의 애인, 그것도 내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잘 사주는 좋은 애인이며, 다만 너무 좁은 자동차를 가지고 다니는 게 좀 불만인 남자 이상이 아니었다. 하여간 언니는 린 선생과 좋은 시간을 많이, 오래 보낸 모양이다. 그러면 탈난다. 탈 났다. 황첸의 배 속에서 린의 씨톨이 알을 만나 착상을 해버린 것. 린 선생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는 그냥 두고 볼 것이다. 만일 아이를 낳는다면 황첸과 가정을 이루면 되는 거고, 그렇게만 되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아직 혼인 전이니 여성이 임신중단애 관한 권리를 주장하면, 아이가 있는 돌싱남 입장에서 혼인 불가 통보로 이해하고 임신중단을 막을 수 없다. 이후 성실하게 뒤처리와 계속 연인의 관계를 이어갈 수 있으면 그게 차선이다.&nbsp; 황첸은 어린 아이를 좋아했다. 낳고 싶었다. 그래서 고민, 고민을 하다가 더 이상 엄마 모르게 연인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고 판단하여 엄마한테 린 아저씨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했고, 어머니는 또 한 번 배반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재단 가위를 가져와 황첸의 머리카락을 여기저기 싹둑싹둑 잘라버렸다. 자기 방에 박혀 꼼짝도 하지 않던 황첸이 침대위에 모로 누워 물끄러미 동생 황청을 보더니 너도 잘라줄까? 했고, 황청이 자기만 긴 머리를 하고 있는 것도 좀 이상해 그러라고 했다. 그래서 황첸이 황청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렸는데, 이게 임신중절을 하기 전인지 한 뒤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 일 이후에 황첸은 엄마한테 질려 보따리를 싸 독립해 원룸으로 나가버린다.<br>&nbsp; 우리의 주인공 황청은 대역배우를 끝내고 소극장 연극 &lt;불면증&gt; 오디션에 참가, 섬세하고 신비로우면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미지를 원한다는 극단의 요구에 부응하여 합격한다. 세 명의 여주인공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불순한 친한 척’ 속의 비틀림과 경쟁이 불타올랐고, 그렇게 연습을 해 드디어 초연의 막이 올라갔을 때, 관객석의 관객 절반 이상이 황첸 언니의 학교 연극반 동기들이었다. 황청은 친구도 초대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오지 않을까봐. 원래 성격이 이렇다.&nbsp; 첫 공연이 끝나자 평소 황청과 황청의 연기를 시답지 않게 보던 단장조차 “오늘은 황청의 무대였어.”라고 촌평을 했을 정도의 성공.&nbsp; 황첸도 무대 위의 동생을 보니 내면에서 뭔가 넓게 퍼져 나가는 듯한 모습이었고, 이제는 동생의 삶에 개입할 자격도 이유도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관객으로 존재하기만 하면 되리라고. 근데 그게 쉬워? 12살 차이나는 동생, 그것도 어려서부터 자기한테 기대고 어리광도 부리고, 그러던 아이한테. 이 무렵 황첸은 ‘캉’이란 새로운 남자를 사랑하기 시작해, 작품이 진행될수록 결혼하고, 인공수정을 통해 아이를 낳으려고 애도 쓰고, 한 여자 아이를 입양한 후 캉의 시민권이 있는 미국에 가서 살다가 다시 타이완으로 돌아온다.&nbsp; 이후 황청이 미인대회 2등상을 타고, 타이완에서 제일 유명한 기획사에 들어가 영화 조역을 따지만 대가로 영화감독의 손을 타게 된다. 당연히 황청만 모르는 지저분한 소문도 다 났겠지. 그리하여 결정한 것이 연기력을 확장하기 위해 연극의 본거지, 셰익스피어의 고장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거였다. 이게 등구운의 이력과 매치되는 부분이다. 여태 히트작 하나 없는 등구운이 무슨 돈으로 영국유학? 엄마 같은 언니 황첸과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부자 형부 캉이 뒤에서 팍팍 지원을 해준 덕분이다. 아, 나도 소싯적에 이런 누나, 매형 있었으면.<br>&nbsp; 영국에서 돌아온 황청. 이제 남은 건 황청이 스타, 아니면 적어도 상당한 수준의 작품의 배역을 한 번 멋있게 연기해보는 일. 그리고 가능하다면 연애에서도 성공을 해야겠지. 그렇게 될지 안 될지는 밝히지 않겠다. 연기는 인류가 행위했던 가장 오랜 예술 장르. 그것이 어떻게 예술이 되는지 궁금하신 분은 읽어 보시면 좋겠다. 글도 잘 쓰고, 가끔 등장하는 러브씬도 과하지 않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511/70/cover150/k22203942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5117044</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전환과 환원, 그리고 시스젠더 - [디트랜지션, 베이비]</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14345</link><pubDate>Wed, 03 Jun 2026 05:0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1434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037676&TPaperId=1731434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870/77/coveroff/k852037676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037676&TPaperId=1731434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디트랜지션, 베이비</a><br/>토리 피터스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25년 04월<br/></td></tr></table><br/>.&nbsp; 1981년생 백인 미국인. 일리노이주 에반스턴에서 교수 아버지와 변호사 어머니 사이의 아들로 나 시카고에서 성장했다. 햄프셔 칼리지를 거쳐 아이오와 대학에서 예술석사, 디트머스 대학에서 비교문학 석사를 취득했다. 도미니카 공화국에 교환학생으로 간 적 있고, 우간다에 체류했을 때는 트랜스를 위해 호르몬 치료를 받을 때였는데 동성연애 등에 관한 우간다의 개별문화를 조사하다가, 우간다 의회가 반동성연애법안이 제의하는 바람에 위협을 느껴(추정)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nbsp; 트랜스 여성, 즉 MF 트랜스젠더로 살고 있다.&nbsp; 2021년에 결혼한 아내와 함께 뉴욕에서 살다가 지금은 콜럼비아 산타마르타에서 터를 잡았단다. 나같은 이성애자는 모르겠지만, ‘결혼한 아내’라는 표현은, MF 트랜스젠더인 토리 피터스가 여성 또는 트랜스 여성과 동성결혼을 했다는 의미다. 여성간 동성결혼의 경우 배우자는 서로를 아내라고 부른다. 즉 부부는 두 아내로 구성된다. 그렇게 알고 있다.<br>&nbsp; 나는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에 관해 별 관심이 없다. 주변에 눈에 띄는 성소수자도 없다. 만일 있다면? 당연히 똑 같은 대우를 하겠다. 안 할 이유가 없으니까. 물론 속으로 조금 궁금한 게 있겠지. 그래도 하나의 질문 없이 그들과 일상의 관계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nbsp; 내가 아무리 자연스럽게 그들을 대한다 해도, 나도 모르게 언어나 행동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것을 그들이 눈치채고 기분 나빠 할 수 있겠지. 그것까지는 나도 어찌 할 수 없다. 그저 솔직하게 말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더 이상은 없다. 그들에게 신경쓰지 않는 것이 최대로 배려하는 것이라고 믿는다는 뜻이다.&nbsp; 하지만 성소수자들은, 당연하게 많이 예민할 것이다. 다수자들이라면 아주 사소해 모른 척하고 지나칠 것에도 상처를 입을 수 있다. 그러면 어떡하지? 모르겠다. 다수자들은 내 옆, 주위의 사람들도 당연히 다수자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말과 행동에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혹시 말할 수도 있겠지. 먼저 자신이 소수자라고 밝히면 더 세심하게 말하고 행동하겠다고. 하지만 이럴 때마다 일일이 커밍아웃하는 소수자도, 그걸 듣고 언행에 조심하는 것도 사실 좀 웃기다. 인종이나 젠더의 경우라면 탁 보는 순간 일종의 규범, 언행의 범위를 결정할 수 있어 자연스레 조절할 수 있으나, 다수자 입장에서 눈치채기 아주 어려운 성 소수자 배려는 그래 더 힘든 것 아니던가?&nbsp; 나와, 내가 아는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속으로는 몰라도 겉으로는 하나같이 그들과 어떤 형태로도 성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주장한다. 반 정도는 있으나마나 자신한테 중요하지 않다고 하고, 나머지 반은 진저리를 치며 싫어한다. 지금 한국 꼰대 남자들의 수준이다. 젊은 세대의 시각으로 진짜 꼰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꼰대 세대한테는 이것도 많이 발전한 거다. 그렇게만 알면 좋겠다.<br>&nbsp; 이 책은 미국의 톱5 출판사에서 펴낸 첫 트랜스젠더 작가의 책이라고 한다. 토리 피터스도 이게 첫 작품이라는데, 일곱 개 중요 문학상의 후보로 올라 이중 하나 PEN/헤밍웨이 상을 받았다.&nbsp; 근데 내가 왜 이 책을 읽기로 결정했을까?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해서 ‘첫빠따’로 읽을 정도로 혹 한 이유는 뭐지? 다른 도서관에도 한 권 있어서 빌려 읽으면 될 텐데 굳이 희망도서를 신청했다는 건 어떤 계기가 있었다는 뜻. 모르겠다. 잊었다.&nbsp; 제목 “디트랜지션Detransition”은 이 책에 국한해 이야기하자면, 엄마 뱃속에서 나왔을 때는 아들로 호적에 입적시켰는데, 자라면서 성정체성이 여자인 것을 알게 되어 여성으로 전환transition 해, 여성으로 한동안 살다가 또 뭔가 자각을 했는지 다시 남성으로 복원 또는 환원detransition한 사람을 일컫는다. 전환과 환원을 위하여 다량의 호르몬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트랜스를 위하여는 에스트로젠을, 환원을 위해서는 테스토스테론을 주사해야 하는 모양이다.&nbsp; 주목할 것은 트랜스 여성이 되느라 에스트로젠 처방을 6개월 정도 받으면, 진짜로 그런지 트랜스들의 대화법이 그런지 하여간 고환이 쪼글아들어 후에 디트랜스를 해 다시 남성이 되더라도 영구 임신 불가능 상태가 된단다. 물론 디트랜스 기간 동안 테스토스테론을 투여해 성기능은 원상으로 돌리더라도 그렇다는 말이다.<br>&nbsp; 이 책에서 MF 트랜스를 해 여성 에이미가 된 인물이 등장한다. 에이미는 같은 MF트랜스 여성 리즈와 서로 아내로 살다 헤어졌다. 에이미가 여성이 된 직후, 여성으로 살기 위한 거의 모든 하드, 소프트 웨어를 리즈가 가르쳐 주었다. 이런 경우에 리즈는 에이미의 트랜스 엄마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이때 리즈는 사업에 성공해 돈이 무척 많은 개자식하고 살고 있었는데, 자기 아파트를 가지고 살던 에이미가 돈 많은 개자식의 폭행을 당하며 살던 리즈를 구해준 구석도 없지는 않다.&nbsp; 이렇게 살다가 에이미가 어느 하루, 선언하기를, 이제 우리는 찢어져야 하는 게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길인 거 같다고,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하기 위하여 나는 다시 남자로 돌아가야 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하여 대판 싸웠겠지. 말이 그렇지, 아름다운 이별이 그렇게 많아? 이들도 서로 웬수 상태가 되어 헤어졌다. 뭐 다 그렇듯이.<br>&nbsp; 리즈의 문제는 도무지 혼자 있을 줄 모르는 거다. 혼자 만의 삶, 고독으로부터 도망을 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거. 그런데 트랜스 여성이 만날 수 있는 남자들은 시스젠더 여성인 아내와 살다 모험을 즐겨보려고 길거리로 나선 남자뿐인 거 같다. 그래서 트랜스 여성한테 “남자는 다 개”라는 명제가 참이다. 리즈도 두 명의 유부남에게 큰 실연을 경험했으며, 지금 또 한 명의 잘 생기고 매혹적인 유부남 개자식과 밀회를 즐기고 있다. &lt;디트랜지션, 베이비&gt;의 막이 오르면 리즈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유부남 개자식의)BMW에 앉아서 콘돔을 사러 편의점에 간 그 개자식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nbsp; 그냥 보통의 한국 남자 꼰대들이 알고 있는 거라면, 매체를 통해 그나마 정보를 알게 되는 트랜스 여성들은 우리나라에서 또는 태국까지 원정을 가 음경과 고환을 제거하고, 주름진 주머니까지 싹 잘라버린 다음에 고환이 있던 서혜부에 구멍을 내 직장 위쪽으로 질을 만든 사람으로 알았을 듯하다. 그러나 책의 두 주인공급 트랜스 여성들은 음경과 고환을 달고 있다. 호르몬 주사를 많이 맞아 생식능력은 없지만 책을 읽어보면 음경이 발기도 되는 모양이다.&nbsp; 그런데 이런 상태, 유방이 부풀고 젖꽂지가 도톰함에도 음경이 달린 트랜스 여성만 찾는 남자를 구하는 방법은? 20세기에는 자기들끼리의 커뮤니티가 있었겠지. 지금은 미국의 경우에 데이팅 앱에 접속해 취향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nbsp; 나는 이런 거 모르고 살아도 괜찮은데, 자꾸 이렇게 알려줄 필요 없는데도 정보가 넘친다.&nbsp; 하여간 지금 리즈가 만나는 BMW 타는 수캐는 사실 HIV 양성반응자이다. HIV 환자하고 다르다. 그래도 조금 위험한 사람이다. 리즈한테는 치명적이지 않다. 리즈는 에이즈 예방약을 복용했다. 그걸 피임약이라고 일컫는다. 리즈는 에이미와 결혼시절에 자기 아이를 그렇게 키우고 싶어 했다. 위스콘신의 선량한 백인 엄마들이 지닌 여성성에 대한 갈망을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다.<br>&nbsp; 에이미가 에임스라는 이름의 남자로 환원한 후에 프로그래머로 광고회사에 들어갔다. 한 시절 아름다운 여성으로 살 수 있었을 만큼 고운 외모를 가진 남자이니 직장 안에서 여직원들한테 인기가 많았겠지? 그렇다. 그러다가 하루 여성 상사 카트리나가 에임스에게 자기 집으로 업무를 가지고 좀 오라고 했다. 남성 상사가 여직원한테 그런 지시를 내렸으면 즉시 성희롱 관련해 직장 윤리위원회 회부감이지만 여성 상사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 뭐 이것도 성차별이기는 한데 그냥 넘어가자.&nbsp; 이혼해 넓은 집을 혼자 사용하고 있는 카트리나가 에임스를 부엌으로 데려가 음료를 제공하기 위하여 커다란 냉장고를 열고 고개를 수그려 둥근 엉덩이가 눈 앞에 활짝 드러나자, 갑자기 충동이 인 에임스가 코와 입술을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직급도 높은 카트리나의 엉덩이에 탁 밀착시켜 바지 속에서 은은히 흘러나오는 냄새를 흠향하기 시작했고, 원래 그쪽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카트리나도 점점 고양되는 성적 흥분을 이겨낼 수 없었다.&nbsp; 이미 여성의 몸으로 여성과의 섹스를 알고 있는 에임스. 카트리나는 에임스와의 관계에서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자기 계좌의 모든 돈을 한 장의 수표에 써서 넘겨줄 수 있고, 자기 소유의 서초동 7층 건물의 등기소유권도 넘겨줄 수 있을 만한 엑스터시, 진정한 오르가슴 중에서도 오르가슴의 왕을 배알하게 된다. 그러니 둘이 쉽게 떨어질 수 있어? 계속 몇 달 연애를 하더니, 카트리나가 덜컥, 임신을 해버렸다.<br>&nbsp; 트랜스여성을 졸업했지만 아직 아버지라는 틀에 적응하지 못한 에임스. 도저히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거 같지 않다. 카트리나는 정상 가정을 만들지 못하면 당장 임신중단을 선택할 거 같고, 그래도 아이는 갖고 싶다. 이때 에임스 머리에 탁 떠오른 인물이 평소에 아이를 갖고 싶어 애달캐달하던 트랜스 시절의 아내 리즈. 에임스는 서둘러 리즈에게 전화를 걸고, 만나 고민을 호소한다.&nbsp; 아이를 낳고, 셋이 키우자고. 트랜스 여성과 디트랜스 남성, 그리고 시스 여성이.&nbsp;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가족관계가 생기려 하는데 어떻게 흘러갈지 그것 참.&nbsp; 하지만 워낙 내가 이 동네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충격적인 스토리라도 도무지 재미를 느낄 수 없다. 알지 못하는 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서 오히려 더 재미있어야 하건만, 일단 이들과 공감하는 데 문제가 있어서 그랬던 거 같다. 트랜스나 퀴어 하여간 성소수자들이 읽으면 공감하고 잘 썼다고 할 수 있을 거 같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870/77/cover150/k852037676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8707759</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벽을 비집고 나가면 거기가 지옥 - [세 번째 경찰관]</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12402</link><pubDate>Tue, 02 Jun 2026 05: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1240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76020&TPaperId=1731240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694/98/coveroff/893247602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76020&TPaperId=1731240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세 번째 경찰관</a><br/>플랜 오브라이언 지음, 이정화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02월<br/></td></tr></table><br/>.&nbsp; 플랜 오브라이언. 처음 듣는 이름이다. 아일랜드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것 같다. 완성한 소설은 다섯 편 밖에 안 되는 과작 작가인데도 그렇다.&nbsp; 1911년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에서 영국 관세청 공무원 아버지와 북아일랜드 민족주의자 집안 출신 어머니 사이의 12남매 가운데 (아마도) 둘째 아들 ‘브라이언 오놀란’으로 태어나 더블린에서 학교를 마쳤다. 당시 남학교는 거의 비슷했던 모양이라, 폭력과 체벌이 상습적으로 벌어지던 청소년 시절을 꿋꿋하게 견뎌냈지만 평생의 트라우마로 작용했는지 더블린 대학을 졸업하고, 소설도 쓰면서 공무원 생활을 하는 나머지 평생을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nbsp; 이이가 멀쩡한 본명을 두고 여러가지 필명을 사용한 건, 당시 아일랜드 공무원은 정치적 중립이 필수사항이라 가끔 신문에 기고를 하는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단다. 이어 소설도 몇몇 다른 이름으로 발표했지만 함께 일하는 사무실 사람들은 내놓고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다들 이이 작품인 줄 알았다고. 자기가 공무원이면서 공무원 사회를 우스갯거리로 삼고 그랬다나.&nbsp; 알코올 중독자는 끝이 좋지 못하다. 술 많이 마시면 작건 크건 반드시 사고를 치게 된다. 오브라이언은 술을 마셨다 하면 주로 주둥이에 발동이 걸려 높은 양반들과 조직에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누구나 인정하는 업무처리 능력을 보였다니, 그것 참 별일일세. 인후두암에 걸린 오브라이언은 그러나 1966년 만우절날 심장마비로 갔다. 이이의 아빠가 열두 아이들을 남겨놓고 일찍 죽는 바람에 소설 쓰는 형하고 열 명의 동생을 먹여 살리는데도 애썼다는 좋은 형, 오빠였다. 동생들 가운데 잘 큰 아이들도 많다. 위키피디아에 다 나온다. 요즘엔 검색만 하면 안 나오는 게 없어.<br>&nbsp; &lt;세 번째 경찰관&gt;을 뭐라고 해야 할까? 포스트모던인데 이렇게만 말하면 아쉽다. 이거나 저거나 다 포스트모던이다, 하면 될 정도로 범위가 너무 넓어서 탈이라. 성인용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토끼굴을 타고 땅속 나라로 떨어지는 앨리스. 검은 금고를 찾아 저택의 비좁고 깊은 창문을 뚫고 들어가는 ‘나’가 일단 땅속 나라로 들어가거나 창문을 뚫고 들어가 검은 금고를 찾기 위해 경찰서를 찾아가면 본격적인 모험이 시작되는데, 모험도 모험 나름이지, &lt;세 번째 경찰관&gt;은 아이들 읽는 책이 아니라서 별의 별 말도 안 되는 발명품도 나오고, 희한한 이론도 등장하고, 결국 이름 없는 ‘나’는 재판 없이 교수형을 선고받아 목 매달리려던 순간 기적적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래서 해피엔드일 거 같지? 안 알려드린다.&nbsp; 왜 ‘나’가 자기 발로 경찰서를 찾아가는 지 알아보자. 놀랍게도 이 일은 살인 사건과 관련 있다.&nbsp; ‘나’는 그렇게 젊지 않다. 오래 전에 태어났다고만 나오는데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간에는 확실하게 젊지 않다. 아버지는 진정한 농부였고 어머니는 손님이 별로 많이 찾지 않는 술집 주인이었다. 그래도 시골에서는 제법 부유한 농장을 꾸리고 있었고, 형편도 넉넉했으며, 세 가족은 나름대로 충분히 행복했다고 기억한다. ‘나’는 어머니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아버지는 남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로 말도 잘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해에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양치기개가 순서대로 죽었다. ‘나’는 졸지에 고아가 됐고, ‘나’는 어른들에 의하여 곧 기숙학교로 보내졌다. 오브라이언이 생이 끝나는 날까지 지긋지긋하게 생각했던 폭력과 체벌의 난장판인 남자 기숙학교로. 근데 책에서는 기숙학교에서 고생하는 장면은 한 컷도 나오지 않는다.<br>&nbsp; 열여섯 살이 되던 3월 7일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다. 학교에서 마지막 두 페이지가 없는 드 셀비의 책 &lt;금빛 시간&gt; 초판을 발견한 날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부터 남은 평생을 드 셀비를 연구하는데 사용한다. 그리고 결국 ‘나’가 저지른 치명적인 범죄도 드 셀비를 위하여 벌인 짓일 수 있다. ‘나’가 학교에 있는 동안 농장과 술집은 ‘존 디브니’라는 남자가 맡았다. 그는 변호사 사무실이 고용해서 농장과 술집을 경영하고 대신 변호사 사무실로부터 월급을 받아 생활한다. 이이의 급료는 아버지가 사망 전에 모든 비용을 현금으로 이미 지불한 총 자금에서 나온다.&nbsp; 20세에 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집에 가는 대신 몇 달 동안 드 셀비의 저서 같은 것도 더 구할 겸 견문을 넓히려 여행 중에 큰 사고를 당한 ‘나’는 왼쪽 다리 대신 나무 의족을 단 채 집에 돌아왔다. 근데 존 디브니는 말로만 곧 그만두고 집에 갈 거라고 하더니 끝내 그럴 마음이 없이 뭉개버린다. ‘나’가 서른 살이 될 무렵 디브니와 ‘나’는 좋은 친구로 이름을 내기 시작해 동네 사람들이 “아일랜드를 통틀어 제일 가는 두 크리스천”이라는 평판을 받을 만큼 겉 보기에 좋은 친구였지만 세상의 어떤 두 사람도 사실 이 두 사람만큼 서로를 격렬히 싫어할 수 없을 정도로 원수지간이었다.&nbsp; 농사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나’는 드디어 “드 셀비 색인”의 원고를 다 썼다. 이때 디브니가 살살 꼬이기 시작한다. 책을 내라고. ‘나’ 수준의 향토 연구자가 책을 내려면 자가 출판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다고 하니, 디브니는 50년 동안 가축거래 사업을 하다가 은퇴를 했으나 여전히 대리인을 통해 사업을 하고 있는 이웃 매더스 노인에게 돈을 빌리라고 설득한다. 3천 파운드 이상의 현금은 틀림없이 가지고 있을 거라나.&nbsp; 그리하여 어느날 밤, 존 디브니와 ‘나’는 속이 빈 쇠막대로 직접 만든 자전거 펌프(디브니)와 삽(‘나’)을 가지고 매더스 노인 집 근처로 갔는데, 노인과 딱 마주치자마자 먼저 디브니가 노인의 뒷목을 힘차게 가격해 거의 목숨을 끊어 놓았고, 이어서 ‘나’더러, 끝장을 내, 나지막하게 말했고, ‘나’는 삽날로 매더스 노인의 턱을 한 번, 두 번, 세 번… n번 찍어 완전히 보내 버린 후, 미리 파놓은 땅 속에 파묻어 버렸다. 노인을 정신없이 찍는 동안 디브니는 노인의 집에 들어가 검은 금고를 어디다 숨겨 놓았다. 이런 세상에.<br>&nbsp; 몇 년 후, 디브니가 금고를 숨긴 장소를 알려주어 ‘나’는 그것을 찾으러 노인의 집에 다시 들어갔는데, 에그머니, 한 방에서 의자에 앉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매더스 노인과 맞닥뜨리고 만다. 그와 조금 이야기를 하다가 금고를 찾으러 집 밖에 나가 노인이 일러준 곳의 경찰서로 가는데, 거기에 경찰관 세 명이 있으니, 첫째가 플렉 경사요, 둘째가 순경 맥크루스킨이고, 셋째가 순경 폭스가 된다. 그러니까 책의 제목 “세 번째 경찰관”은 순경 폭스라는 말씀.&nbsp; 그런데 여기까지, 즉 ‘나’가 경찰들을 만나는 순간, 본격적인 책읽기의 고난의 행군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모르시지? 이제부터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br>초판 표지<br>&nbsp; 예를 들어 첨부한 아일랜드 원서의 표지처럼 한 사람이 거울을 들고 더 큰 거울 앞에 서 있으면 n개의 자기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자기 모습을 보는 행위는 빛의 속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거울과 거울 사이라면 빛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도 아주아주, 아주아주 짧지만 일정 시간이 필요하니까 거울 속에 n번 반사되어 아주 작은 ‘나’는 시간이 거꾸로 흘러 좀 젊은 ‘나’의 모습일 거란 것.&nbsp; 빛의 속도? 초속 30만킬로미터. 거울과 거울 사이가 1미터라면 왔다 갔다 하는 거리는 2미터. 빛이 2미터를 왕복하는 시간은 2/300,000,000 초. 혹시 이 시간을 zero 0이 아닌 건 확실하니까 거울 속 나를 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실 분 있나? 그럼 이 책을 읽지 마시라. 3억 분의 2초는 zero 0이다. 그래서 이걸 주장하는 맥크루스킨의 말은 틀렸다.&nbsp; 이 허들을 넘어가도 여전히 골 좀 썩일 일이 쌔고 쌨다. 나 같은 경우엔 각주 보는 일이 너무 힘들다. 드 셀비의 주장을 자주 인용하는데, 이 내용에 대해 오브라이언이 주석을 많이 첨부했고, 주석의 글씨가 너무 작아, 나는 주석 읽기를 포기했다. 이제 눈이 전 같지 않다. 그걸 읽어야 지금 ‘나’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될 터인 것을 알고도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독자는 다른 이유로 헤맬 것이다.<br>&nbsp; 하여간 재미있는 책이란 건 확실하다. 읽는 일이 좀 고되서 그렇지. 힘내서 한 번 도전해볼 만한데 다만 읽은 다음에, 아니면 읽는 중에라도 내 욕은 하지 마시기 바랄 뿐이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694/98/cover150/893247602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6949865</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헝가리 최후의 왕에 관한 익살극 또는 피카레스크 소설 - [죔레는 거기에]</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10534</link><pubDate>Mon, 01 Jun 2026 05: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1053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82032812&TPaperId=1731053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55/98/coveroff/k582032812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82032812&TPaperId=1731053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죔레는 거기에</a><br/>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02월<br/></td></tr></table><br/>.&nbsp; 2024년 작품. 모두 11장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다 합해 11개의 문장이겠지? 아니다. 나도 놀랐다.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한 크러스너호르커이는 다 읽어봤는데, 모든 작품 가운데 가장 짧은 문장으로 &lt;죔레는 거기에&gt;를 시작한다.<br>&nbsp; “더 이상은 불을 때지 않겠다.”<br>&nbsp; 이렇게 결심한 사람은 주인공 카다 요제프. 오늘 1월 6일에 92세가 된 노인이다. 이 정도로 나이가 든 노인이 주인공이면 많은 소설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사망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크러스너호르커이도 그럴까? 안 알려드린다. 재미있는 책이니 직접 확인하시라는 의미에서. &lt;뱅크하임 남작의 귀향&gt; 때부터 알아봤는데, 그거 말고도 &lt;헤르쉬트 07769&gt;처럼 크러스너호르커이 역시 종말론적인 무게감 넘치는 작품이 아닌, 읽으면서 키득거릴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는 작품도 썼다. 이 책에서는 주인공 자체가 익살극이다.<br>&nbsp; 카다 요제프의 가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헝가리 역사를 13세기까지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이 당시 몽골의 오코타이 칸이 헝가리 왕국을 점령하고 벨러4세에게 철군의 조건으로 아름다운 공주 욜란더를 자신의 아들이자 위대한 칭기즈칸의 손자인 카단 칸의 아내로 맞았다. 그런데 혈통이 문제다. 카단 칸은 노랑머리 여인과의 혼인 사실을 몽골의 왕족한테 보고하지 않았고, 벨러4세 역시 이 혼인을 교황이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알아 숨겼으나, 카단 칸과 욜란더 사이에 아들이 생긴다면 헝가리의 아르파드 왕가를 이어갈 보험으로 사용할 수 있겠다고 여겼다.&nbsp; 카단 칸이 욜란더를 지극히 사랑해서 철군과 함께 돌아가지 않고 헝가리 땅에 살며 성姓 ‘카단’에서 n자를 삭제해 카다라는 이름으로 가계를 이루어, 아름다운 욜란더의 남편이자 아들 카다 벨러의 아버지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카다는 5년 후에 숟가락을 놨다. 아직 법적으로 혼인한 적이 없는 욜란더는 이후에 폴란드의 한 공작과 다시 결혼해 갔고, 아들은 헝가리 왕 벨러4세가 거두어 철통 같은 보안 속에서 자라며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신자가 되려면 세례를 받아야 하는 법. 이때 헝가리 왕가 아르파드 가문의 카다 벨러라는 이름을 받아, 이후 750년간 혈통을 유지해왔으나, 망한 왕조의 왕가들이 늘 그러하듯, 이 후손들도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겼으니, 마지막 아들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카다 요제프 되시겠다.<br>&nbsp; 문제는 1944년의 일. 19세기 후반부터 1차세계대전 종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란 이름으로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황제들에게 지배를 받은 헝가리 사람들은, 2차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다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망령을 떠올렸다. 불안은 근거 없이 찾아오는 법. 과거의 그들이 종전과 혼란의 틈을 타 다시 헝가리를 넘볼지도 모른다는 다급 및 조급증이 생겨 1944년 6월, 당시 왕이 없는 헝가리 왕국의 섭정을 맡은 호르티 미크로시가 아르파드 왕가의 유일한 후손인 젊은 카다 요제프를 부다 성으로 불러서 갔더니, 그곳에는 호르티 섭정을 위시해 총리와 장관들, 독일국가를 대표한 사복입은 사람 한 명과 국회의장, 세르디 유스티니안 대주교 추기경 등이 모여, 카다 요제프를 헝가리 왕국의 적통을 이어받은 왕위에 오르는 대관식을 거행해주었다. 이렇게 주장한다.&nbsp; 즉 자신은 벌써 왕이며, 이때 에스테르곰 대주교 추기경이 자기 머리 위에 아르파드 왕조의 창업군주 이슈트반1세가 만든 왕관을 씌어 주었으며, 대관식이 끝난 후에는 섭정이 직접 관을 내려 다시 추기경에게 보관하라고 당부했단다. 호르티 섭정은 카다 요제프가 헝가리 왕국의 왕임은 사실이지만 지금 세계정세가 급변하고 있어 이를 널리 공포하지 못하는 점을 감안하여 이 영광스러운 대관의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은, 신임 왕 카다 요제프1세를 포함하여 모두 대관식과 새로운 왕의 즉위를 엄중한 비밀로 유지하기 바란다고 당부, 사실상 명령을 내렸다.<br>&nbsp; 다른 것도 아니고 왕위에 관한 것을 함부로 입에 올렸다가는 한 생명 골로 가는 건 식은 죽 먹기라서 누구보다 당사자인 카다 요제프 본인이 이 나이가 되도록 합죽이가 됩시다, 합! 입을 다물고 살았건만, 21세기 들어 세월이 하수상해지고 헝가리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자 위기감을 느낀 일부 세력들이 어떻게, 어떻게 카다 요제프의 정체를 알아내 일차 왕림하면서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익살극 또는 피카레스크 소설의 막이 올라간다.&nbsp; 그들은 92세의 노인이지만 그 나이치고 상당히 건강한 수준이며 정신도 멀쩡한 것처럼 보이는 할배를 꼼짝도 하지 않고 상당한 시간을 그저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경의를 표하고 싶어서 이곳에 왔다고, 이제부터 당신을 섬길 것입니다, 폐하, 당신 앞에서는 앉지도 않겠습니다, 이렇게 예를 차리는 거였다. 이때까지 만해도 노인은 불을 때지 않는 실내에서 난로 위에 전기 풍로를 올려놓고 감자국수를 끓이고 있었는데, 그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다시 전열기로 달려가 국수가 냄비 바닥에 눌어붙지 말라고 휘휘 젓고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겠지.&nbsp; 그들이 결국 알아낸 걸까? 이제 막 영국 여왕으로부터 성 조지기사단의 검을 받았고, 오래전에 이미 그 기사단에 선출되었다는 것을?&nbsp; 그럼 이들은 누구일까? 첫번째 방문에는 모두 여덟 명이 왔다. 늙은 요제프는 일곱인지 여덟인지 헛갈리지만. 그들을 직업별로 보면 전기 관련 기술자, 기타치는 유랑가수, 자동차 도장공, 토종 종마 사육사, 말단 경찰, 고문 회계사, 체구가 다부진 퇴역 원사, ‘교수’라고 불리는 전직 고등학교 역사 교사. 이들 가운데 기타치는 유랑가수의 이름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이 양반이 시도 썼으니 유랑가수라고 해도 좋겠지. 기타도 치지만 동유럽 전통악기 발랄라이카도 연주하고 작곡도 한다. 이들 가운데 가장 오래 폐하께 충성을 바치는 인물. 그럼, 이름이 어디서 왔는데!&nbsp; 이 모임의 이름은 KP. 헝가리어로 Koordinalt Platform, “조율된 플랫폼.” 왕정복고 플랫폼 회원들이다.<br>&nbsp; KP 단원이 두번째로 방문을 했을 때, 요제프는 옷장 위에서 성 조지기사단의 검을 꺼내 보여주며 영국 여왕이 기사 작위를 수여하며 자신한테 보낸 편지, 사실은 편지 봉투를 보여준다. 에게를로바 시, 탄치치 미하이 거리 23/d번지. 아, 또 주소가 나온다. 헤르쉬트 07769에 이어. 세번째 방문 때는 훨씬 많은 단원들이 모였는데, 이때는 헝가리인이 미국으로 밀반출했던 이슈트반1세의 왕관을 1978년 1월에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가 되돌려줄 때 요제프에게 보낸 편지의 복사본도 보여준다. 당연히 원본은 훼손 방지를 위해 숨겨 놓았단다.&nbsp; 카다 요제프의 집안도 헝가리의 세게드에서 살다가 19세기 말에 미국 디트로이트에 자리를 잡았고, 마지막에는 카다 집안의 법적 상속자로 아내와 함께 지금 살고 있는 동네의 언덕 제일 꼭대기에 있는 집, 미하이 거리 23/d번지로 옮겨왔다. 슬하에 딸 하나만 두어 카다 가문의 맥은 자신 대에서 막을 내려야 할 터. 그래도 자기가 카다 가문이 헝가리 아르파드 왕조의 맥을 이은 것처럼 두 외손자 가운데 하나가 대를 이어 왕조를 물려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신이 아무리 위대한 아르파드 왕조를 계승하고 이미 1944년에 대관식까지 한 정식 왕이기는 하지만 세월이 변했으니 폐하라는 거북한 호칭 말고 그저 “요지 아저씨”라고 불러주기를 청한다.<br>&nbsp; 여기서 독자가 결정해야 할 것은, 요지 아저씨가 주장한 것들, 성 조지기사단의 검을 영국 여왕으로부터 받았고, 이미 기사단 신분으로 기사 작위도 얻었으며, 벌써 대관식을 거행한 정식 왕이기 때문에 새롭게 대관식을 여는 번거로운 절차 말고, 그냥 왕의 자리, 왕의 의자가 있으면 뚜벅뚜벅 걸어가서 앉기만 하면 끝난다는 주장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거다. 이에 따라 소설을 이해하는/따라가는 방법이 다를 수 있을 텐데, 한꺼번에 두 가지 선택을 다 감안하면서 읽으면 더 재미나다. 한편으로는 정식 왕으로서 안타까운 일이 될 수도 있고, 또 한 편으로는 노망난 후안무치의 설레발꾼이 벌이는 난장판을 구경할 수 있어서 넘치게 즐길 수 있으니까.&nbsp; 근데 자신이 왕이라고 주장하거나, 왕을 참칭하는 행위는,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서 사실 목숨을 내놓고 주사위를 던져야 할 만큼 무시무시한 작업이다. 아무리 헝가리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고 경제적으로도 불안하지만 감히 21세기 민주공화국에서 왕정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다니,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크러스너호르커이 말고 다른 한 명을 고르라면 작가가 직접 감사의 말을 전한 토마스 핀천 정도. 또 있나? &lt;황제를 위하여&gt;를 쓴 이문열?&nbsp; 크러스너호르커이의 팬이여, 일독을 망설이지 마시라.<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55/98/cover150/k58203281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4559880</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크로테스크하고 시니컬한 노랫말 - [결혼식 / 소시민의 칠거지악]</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05256</link><pubDate>Sat, 30 May 2026 05:5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0525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82135152&TPaperId=1730525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78/94/coveroff/k58213515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82135152&TPaperId=1730525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결혼식 / 소시민의 칠거지악</a><br/>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이승진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6년 02월<br/></td></tr></table><br/>.&nbsp; 브레히트는 좀 읽었다. 웃긴게, 나는 작곡가 쿠르트 바일을 통해 브레히트를 알게 된 점. 이 책에서도 &lt;결혼식&gt;보다 &lt;소시민의 칠거지악&gt;을 읽기 위해 골랐는데, 독일어로(움라우트 표기 생략) Die Sieben Todsunden der Kleinburger, 일곱가지 죽을 죄. 이것 역시 쿠르트 바일이 작곡한 같은 제목의 오페라를 먼저 들었다. 근데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더라는 것. 이 작품이 바일이 브레히트한테 오페라 작곡을 위한 대본 성격의 희곡이 아니라, 발레극의 대본을 써달라고 해서 망명지인 파리에서 일부일 만에 썼다고, 역자 해설에 나온다. 해설을 읽은 다음에야 오페라가 이해가 되는 거였다.<br>&nbsp; 브레히트는 나치의 마수를 피해 모스크바에서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을 지나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매카시 선풍이 불자 고국인 독일의 동베를린으로 귀환한 공산주의자. 그리하여 &lt;소시민…&gt;의 칠거지악, 일곱가지 죽을 죄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돈을 벌고 큰 집을 짓는 성공을 하기 위하여 저지르면 안 되는 죄목을 노래한다. 아주 지독한 반어법을 썼다.<br>&nbsp; 첫째. 불의를 저지를 때 게으름을 피우는 행위&nbsp; 둘째. 자신의 상품성을 해칠 우려가 있는 자만&nbsp; 셋째. 비열함에 대해 분노를 표하는 행위&nbsp; 넷째. 스스로를 해하는 절제 없는 폭식&nbsp; 다섯째.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랑&nbsp; 여섯째. 배척당할 수 있게 탐욕을 드러내는 행위&nbsp; 일곱째. 더러운 방식으로 성공한 행복한 사람을 시기하는 행위<br><br><br>&nbsp; 죽을 죄가 저러니 가사를 읽고 도무지 이게 무슨 내용인 줄 꿈 속에서나마 알아차릴 수가 있었으랴. 안나 1과 안나 2는 같은 사람으로 봐도 좋은데, 이들이 성공을 위하여 루이지애나에서 도시로 흘러든다. 출발한 곳 루이지애나에서 부르는 노래가 첫번째 죽을 죄. 이것이 서곡. 1곡은 그냥 도시. 뉴올리언스 정도로 보면 된다. 이곳에서부터 안나 자매는 온갖 나쁜짓을 하는 데 게으름이 없다. 2곡은 멤피스. 카바레 댄서로 취직을 하고, 3곡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영화배우를 한다. 4곡의 필라델피아에서 스타가 되었는데 안나2가 먹성이 좋아 살이 찌기 시작해 폭식이 죽을 죄가 되는 것이고, 5곡은 보스톤에서 부자 남자 에드워드와 가난한 남자 아돌프 가운데 부자를 꼬인다. 이어 6곡으로 가면 테네시, 부자 남자 에드워드는 안나2 때문에 거렁뱅이가 됐고 이를 비관해 권총자살 해버렸다. 이어서 두어 명의 남자도 목을 매든지 빌딩 옥상에서 자유낙하 해버렸다. 마지막 7곡에서 두 안나는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다시 루이지애나로 돌아와 큰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산다. 나는 행복하니까 시기하지 말라는 것. 흠, 그랬군.&nbsp; 그런데 &lt;소시민…&gt;은 단연 무대 공연을 보아야 한다, 라고 주장하고 싶다. 유튜브에 Seven deadly sin을 검색하면 화려한 영상으로 볼 수 있다. 웃기고, 그로테스크하며 한편으로는 험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브레히트-바일 콤비가 원래 좀 그렇다.<br>&nbsp; 사실은 원래 책의 목적인 &lt;소시민의 칠거지악&gt;보다 &lt;결혼식&gt;을 훨씬 재미있게 읽었다.&nbsp; 단막극. 결혼식이 막 끝나고 신혼부부 마리아와 야콥의 집에서 축하연을 하며 생긴 일이다. 처음엔 정상적인 파티로 시작하지만 점점 엉망진창이 된다. 야콥은 아마추어치고 자신의 손재주에 자만심이 있어서 집안의 가구를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 아교도 자기가 끓여 나무를 붙였는데 극의 후반으로 가면 이 아교에서 나는 냄새가 등장인물들을 환장하게 만들어버린다. 근데 이건 나중 일이고 처음엔 축하연에 모인 사람들이 전부 자기 이야기만 떠들어댄다. 그러니 소통도 없고 오직 시끄러울 수밖에. 그리고 당연히 말하는 사람과 듣지 않는 사람과 또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도 생길 수밖에. 그게 점점 심해지면 나중엔 신랑, 신부, 마리아와 야콥 사이에도 껄끄럽게 변한다.&nbsp; 각자 떠들어대다가 드디어 춤 출 시간이 되지만, 전통적으로 제일 첫 춤은 신혼부부가 마빡을 맞대고 추어야 하거늘 각자 다른 파트너를 골라 춤을 추기 시작한다. 조금 후에는 사람들이 기대고 있는 가구가 뿌지직 부러지거나 다리가 떨어지거나 하여간 뭔가가 다 망가지기 시작한다. 사람들 사이도 마찬가지. 마리아의 동생은 손님으로 온 남자와 즉석 연애를 시작하고, 하객 한 명은 마리아가 결혼하기도 전에 임신을 한 것을 은근히 비꼰다. 이 시절이 1920년대라서 혼전임신이 상당한 수치였던 모양이다. 사태가 심각해진데다가 앞에서 말한 아교 냄새, 악취가 진동해 축하객들이 모두 퇴장한다.&nbsp; 드디어 둘만 남은 신혼부부. 이들은 젊은 사람답게 금방 화해하고, 이제 남은 게 딱 하나 있지? 그걸 치루기 위하여 야콥이 마리아를 번쩍 들고 침실로 가서, 침대 위에 내려놓는 순간, 와지끈, 침대마저 부서지고 만다.&nbsp; 역자 이승진 원광대 명예교수는 이 작품을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비판, 개인의 소멸 같은 말을 보태 설명하고 있다. &lt;소시민…&gt;은 그렇게 해석을 해야 감상이 가능하지만, &lt;결혼식&gt;은 그저 재미있는 코미디로 생각하고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다. 브레히트 참 매력 있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78/94/cover150/k58213515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789449</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 땅이면 만주 땅은 우리 땅? - [오픈 시티]</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03359</link><pubDate>Fri, 29 May 2026 05: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0335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39065&TPaperId=1730335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762/35/coveroff/893643906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39065&TPaperId=1730335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오픈 시티</a><br/>테주 콜 지음, 한기욱 옮김 / 창비 / 2023년 11월<br/></td></tr></table><br/>.&nbsp; 1975년에 미국 미시간주에서 나이지리아 부모의 네 자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아마도 테주 콜이요루바족인 거 같은데, 나이지리아의 소설가 가운데 이보족이 아닌 종족은 테주 콜이 처음이다. 치누아 아체베,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치고지에 오비오마, 전부 이보족이다. 따라서 작품 속에 종족간 분쟁에 따른 피해가 등장하지 않는 유일한 나이지리아 작가이기도 하다.&nbsp; 나이지리아의 있는 집 사람들은 대개 영국이나 미국으로 가서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귀국해 고급관리 등 지배계층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테주 콜의 부모도 미국으로 가서 대학에 다니다가 테주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단 엄마와 어린 테주만 먼저 나이지리아에 돌아온다. 아빠는 MBA를 딴 뒤에 귀국해 가족과 합류했다고 위키피디아에 쓰여 있다. 테주 콜은 17세가 되자 자기 출생지인 미시간 칼라마주로 돌아가 칼라마주 칼리지에서 학사, 이후 미시간 주립대인 것 같은데 거기 의과대학에 진학했다가 중도작파하고 런던 대학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으로 가서 미술사 석사를 받았다.&nbsp; 그리하여 이이가 쓴 첫 장편소설 &lt;오픈 시티&gt;의 주인공 줄리어스도 (컬럼비아 대학이 있는) 뉴욕의 종합병원에서 정신의학과 전임의 과정을 수료 중인 나이지리아계 미국인으로 설정했다. 요루바족이기는 한데, 아빠가 나이지리아 요루바족, 엄마는 금발의 독일 여자로 설정했다. 유럽-아프리카 혼혈로 한 이유는, 작품 속에 줄리어스가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가서 3주 정도 산책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인 듯 보인다.<br>&nbsp; 내가 왜 이 책을 골랐을까? 무려 1년 가까이 도서관 관심도서로 올려놓았던 건 또 왜?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 지금을 잊었지만.&nbsp; 하여간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장편소설일 경우에 메모할 준비를 딱 마친 상태에서 읽기 시작하는데, &lt;오픈 시티&gt;는 애초에 메모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인공이 도시를 산책하면서 세상 오만 것에 대하여 사색하는 장면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이야기를 먼저 읽었다. 산책? 색깔과 방향은 다르지만 로베르트 발저나 W.G. 제발트의 문법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 싶었던 거다.&nbsp; 그래서 지금 이틀 전에 읽은 책의 독후감 쓰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 반면에 읽을 때는 좀 더 집중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뭐 다 좋을 수 있나, 어디.&nbsp; 책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주인공 줄리어스가 참 나쁜 의사새끼라는 거였다. 학부 3학년 시절 은사였고 지금은 친구로 지내는 사이토 교수를 찾아가 “그에게 최근의 상담 사례 중 하나를 들려주었다.” 오순절교회파라는 보수적인 기독교들로 “그들의 하나뿐인 열세살짜리 아들이 나중에 심각한 불임 위험을 야기하는 백혈병 치료를 곧 받을 예정이었다. 소아과 의사가 그 가족에게 건넨 조언은 소년의 정액을 냉동 보관했다가 아이가 성인이 되어 결혼했을 때 아내와 인공수정을 하면 자식을 가질 수 있다는 거였다.”&nbsp; 이걸 지난 시절의 은사한테 이야기해준다고? 의사의 비밀준수 의무는 내다 버렸어? 세상에 둘도 없는 지성으로 묘사하는 은사 사이토는 그걸 듣고 자빠졌어? 뭐 좀 이상하다.&nbsp; 저 뒤에 가면 정신의학과 의사들도 환자에게 “미쳤다”라는 말을 환자에게 직접 하는 건 아니지만 자기들끼리 있으면 그런 용어를 사용한다면서, 사실 정신의학과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내용이 남들한테 인상깊게 해 줄 수 있는 스토리가 무척 많다고 지껄이기도 하는데, 이런 걸 듣는 초기 우울증 예비환자가 될랑말랑한 인간은 더럽게 기분이 나쁘더라는 거, 나빠지더라는 거. 가뜩이나 (특히 우리나라 또는 내 경우) 상담의 진입장벽이 높은 진료과목이 정신의학과인데, 거기 전임의 과정에 있는 새끼 의사이자 불과 1년 후에 개인병원을 동업해 개업할 작자가 이런 수준이니 기분이 좋을 턱이 없지.&nbsp; 그렇다. 저 위에 말한 오순절교회파 가족의 열세살짜리 소년 이야기 하나가 아니라 몇 개가 더 나온다. 그러면서 조금의 거리낌도 없다.&nbsp; “나는 친구들이 바라는 대로 그들에게 내 환자들에 관해, 외계인의 방문과 정부의 감시, 벽 속의 목소리, 가족의 음모에 대한 의심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줬다. 정신질환, 특히 편집증 환자의 공포에서 비롯되는 유머러스한 이야기는 언제나 많았다.” (p.396~397)<br>&nbsp; 딱 위의 생각을 먼저 해서 그렇지 사실 이 책에는 생각해볼 거리가 많다.&nbsp; 특히 이스라엘과 유대인, 그리고 미국에 의하여 자행되는 폭력이 그렇다. 이 독후감을 업로드할 때는 전쟁이 끝났는지 아직 진행중인지 모르겠는데, 지금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을 상대로 벌인 전쟁, 그리고 이스라엘의 레바논 남부지역 점령 여부를 보고 있자면, 작중 브뤼셀에서 줄리어스한테 아프리카인 철학자이자 PC방 점원인 파루크가 하는 말이 틀린 게 없다는 생각도 든다. 뭐라 했느냐 하면:&nbsp; “미국이 알카에다야.” 이어서 “미국은 일종의 알카에다야.”&nbsp; 911 테러로 뉴욕의 쌍둥이 빌딩을 폭파한 알카에다가 아니라 그들과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중동과 아프리카 일부에서 전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폭력의 근거는 2차 세계대전 앞뒤로 독일 나치에 의하여 학살당한 유대인 6백만명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 6백만명의 목숨을 등에 업고 팔레스타인 사람을 학살했고, 땅을 빼앗았고, 그걸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2천년 전에 자기 조상들이 살았다는 이유로. 그럼 우리나라의 조상 가운데 한 국가인 고구려가 중국의 지린성, 헤이룽장성을 지배했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중국인, 만주인, 몽고인, 여진인 등을 다 몰아내고 깔고 앉아도 되겠네?&nbsp; 파루크는 계속 말한다.&nbsp;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나치 수용소를 지었나? 그리고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어떡하고? 유대인이 아니라서 그들의 죽음은 의미가 덜한 건가? 육백만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를 말해줄게. 그건 유대인이 선택된 민족이라서야. 캄보디아인들은 잊어. 미국 흑인들은 잊어. 이게 유일무이한 고통이야 하는 식이지 (중략) 유대인들은 세상을 침묵시키기 위해 그 숫자를 이용해. 난 사실 정확한 숫자가 뭔지 아무 관심 없어. 젠장, 모든 죽음은 고통이야.” (p.248~249)&nbsp; 평소 내가 하던 이야기와 매우 비슷하다. 자기 종족들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고 자기들도 다른 종족을 죽여도 된다고 믿는 이스라엘. 나는 현대의 이스라엘이 싫다. 테주 콜도 이스라엘을 싫어하는 거 같은데 스스로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 여차하면 이스라엘을 싫어하는 것이 “반유대주의”를 주장한다고 몰매를 맞을 수 있단다. 우리나라는 모르겠는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상당히 근거가 있을 거 같다.<br>&nbsp; 이렇게 테주 콜, 또는 주인공 줄리어스는 뉴욕과 브뤼셀 거리거리를 산책하면서 주로 폭력에 대한 심사숙고를 펼쳐간다. 그러다가 저 뒷부분에 가면 줄리어스도 뉴욕의 거리에서 10대 청소년 세 명에게 얻어 터지고 발로 차여 꿰매거나, 이가 부러지거나 빠지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엉망이 되고 손을 밟혀 퉁퉁 붓고, 휴대폰과 지갑을 뺏기는 강도를 당하기도 한다.&nbsp; 그리고 이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읽을 분들을 위해 어떤 것인지 지금 밝힐 수 없지만 줄리어스 역시 한 인간을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만들 폭력을 저지르기도 했다. 자신이 의도적으로 잊고 살았거나, 그것이 피해자에게 그렇게 중요한 폭력이었는지 감을 잡지 못했거나, 잊지도 않았고 감을 못 잡지도 않았지만 굳이 끄집어내어 죄책감에 시달리기 싫었을 수도 있다.&nbsp; 결국 누구나 폭행을 당하고 폭행을 저지르며 산다. 그렇게 살기는 한다. 나는 아니라고? 그걸 누가 알아. 폭력인 줄 모르면서 저지르는 폭력. 그걸 당신은 한 번도 저질러보지 않았다고?&nbsp; 사는 건 복잡하다. 아주 어려운 일이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2762/35/cover150/893643906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7623594</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기대가 너무 컸다 - [생활수업]</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01106</link><pubDate>Thu, 28 May 2026 05:0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30110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22030400&TPaperId=1730110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854/21/coveroff/k52203040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22030400&TPaperId=1730110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생활수업</a><br/>왕웨이롄 지음, 조은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08월<br/></td></tr></table><br/>.&nbsp; 《책물고기》를 읽고 백일이 지나 다시 왕웨이롄을 읽는다. 인상깊은 작가였나보다. 이이의 이름이 눈에 밟히자마자 서슴지않고 집어 들었다. 그런데 기대가 크면 언제나 기대만큼 미치지 못한다. 사는 게 다 그런 거니까. 《책물고기》가 2015년, 《생활수업》이 2022년. 7년 후의 작품들. 그동안 왕웨이롄은 광저우의 한 대학에서 교수로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직업이 있으면 아무래도 긴 작품을 쓰기 힘들겠지. 전작에는 작품이 제법 긴 분량의 단편을 실은 소설집이었던 반면, 이번 책엔 한 편 정도만 분량이 있고 나머지 일곱은 그렇지 않다. 페이지 수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다.&nbsp; 뭐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제일 긴 작품 &lt;침묵천사&gt;가 제일 기억에 남고 어제 읽었는데 오늘 새벽에 독후감 쓰려니 &lt;침묵천사&gt; 말고는 기억에 남은 작품이, 아쉽게도, 없다. 다시 뒤적이면 생각이야 나겠지. 하지만 탁, 떠오르는 게 없는 바에 새삼스레 또 뒤적이고 싶지 않다. 그제 읽은 주이현의 소설집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는 미리 페이지 표시를 해둔 인용 빼고 전부 기억이 나 바로 전에, 한 십분 전쯤에 독후감을 썼다. 그러니 왕 선생은 조금 더 분발하셔야겠네. 웃자고 하는 얘기다. 열 받지 마시라.<br>&nbsp; &lt;침묵천사&gt;. 대학 다니며 연애를 해, 작가가 말한대로 쓰자면, 섹스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더니 아이가 말을 하지 못한다. 듣는 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발성 기관에 하자가 있는 거 같다. 너무 젊어서 결혼을 하면, 예전 봉건시대야 의무사항이라 이냥저냥 평생 살 수 있었다고 쳐도, 지금 시대는 한 때의 기분 또는 흥분에 좌지우지된 경우가 많고, 이 커플 역시 젊음 특유의 불길을 감당하지 못해 결혼과 출산까지 이른 전형적인 젊은 부부로, 사는 내내 폭풍 같은 부부싸움으로 일관하다가,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 아들이 나온 것에 결정적으로 실망한 아내가, 자기 인감도장 찍은 이혼서류를 내밀고 그냥 나가버렸다. 이래서 홀아비와 어린 아들 둘만 사는 가족과 아파트가 무대.&nbsp; 작가가 남자니까 이 홀아비의 직업도 글 쓰는 걸 업으로 하는 착해 빠진 남자. 중국은 대부분 맞벌이 부부. 이 집도 부부가 함께 벌어 아파트 융자금을 갚아 나갔다. 그러다 아내가 나가버려 혼자 벌이로 융자금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아파트를 팔까 했지만, 아들 샤오이한테 엄마의 기억이 담긴 집을 지켜주고 싶어 어떻게 할까 궁리하다가, 남는 방 하나를 월세 주기로 했다. 이를 알고 아빠의 절친이 자기 고향 친척 가운데 괜찮은 여성 샤오징을 소개해 함께 살기 시작했다.&nbsp; 그러면 한 집에 열 살 정도 먹은 사내 아이와, 아이 아빠, 그리고 비교적 젊은 여성이 동거하는 입장. 뭔가 사건이 터질 것 같지? 게다가 아빠는 여지없이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점잖고, 예의 바르고, 영낙없는 책상물림에, 떠난 아내 이후에 다른 여자를 안아본 적도 없는 순정파이자, 아이고 모르겠다, 하여간 그렇다. 말 못하는 아이야 제목대로 침묵하는 천사니까 착하기 이를 데 없고, 이런 집에 함께 살기로 절친이 보증한 여성이니 또 말 해 뭐할까, 이하 동문이지. 이 정도면 읽으면서 이들이 한 가정을 이루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그렇게 생각대로, 순서대로, 각본대로 똑바로 간다면 어찌 왕웨이롄일소냐, 하는 심정도 든다. 그렇겠지?<br>&nbsp; 중국의 저 북서쪽 끝자락 산시성 사람 윌리엄 왕의 솜씨가 좋다. 읽는 맛도 있고 다 그런데, 전작 《책물고기》 만큼은 아니었다. 혹시 모른다. 저번엔 기대하지 않았고, 이번에 기대가 너무 컸는지도.<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854/21/cover150/k52203040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8542142</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누군가 유심히 읽기 시작했다 -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299213</link><pubDate>Wed, 27 May 2026 05: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29921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5089&TPaperId=1729921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15/94/coveroff/893204508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5089&TPaperId=1729921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a><br/>주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01월<br/></td></tr></table><br/>.&nbsp; 주이현. 드디어 2000년생, 21세기 출생 작가의 책을 읽는다. 아직 동국대 문창과를 졸업하지도 않았는데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데뷔하더니 벌써 소설집을 냈다.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에는 데뷔작을 포함해 모두 다섯 편의 중단편을 실었다.&nbsp; 나는 이 책에서 &lt;보아&gt;를 제일 먼저 읽었다. 네 번째 순서로 실린 작품이다. 2024년 6월 웹진 &lt;비유&gt;에 발표했던 작품이라고 적혀 있다. 이어 다음 날 아침에 데뷔작이자 표제작 &lt;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gt;부터 순서대로. 일정상 퇴근 시간에 맞추느라 제일 짧은 거 하나만 더 읽고 가자, 싶어서 고른 것이지 뭐 특별한 이유는 없다.<br>&nbsp; &lt;보아&gt;를 읽으면서, 앗, 또 한 명의 문제 작가가 나온 건가? 이렇게 생각했다. 강렬한 문장들. 첫 문단부터 그러했다. 두번째 문단은 이렇게 시작한다.<br>&nbsp; “내가 홀로 먹고 자고 걸을 수 있는 작은 사람이 되었을 때, 너는 이미 기체와 빛으로 존재하기를 그만 둔 뒤였지. 그러는 대신 너는 그늘과 그림자로 존재하기를 택한 것 같았다. 너는 나의 눈이 닿지 않는 먼 곳에서, 일방적으로,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너를 절대로 돌아볼 수 없었어. 그래도 나는 네가 나의 뒷면에, 내 시선의 반대편에, 모든 종류의 사각지대에 늘 머무르고 있음을 알았다.”&nbsp; (p.256)<br>&nbsp; 보아? 어릴 적부터 두각을 나타낸 스타 가수이자 탤런트 보아, 권보아? 그이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지은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이해하는 보아는, 화자를 보는 인격이다.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 비슷한 것. 예컨대 내가 거울을 보면 거울 속의 또다른 내가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내가 누군가로부터 ‘보임’을 당할 때, 그 보는 행위를 하는 사람 비슷한 것. 어쩌면 또다른 나. 프레임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무한 공간 속의 나.&nbsp; 사실 나를 관찰하는 무엇에 관한 생각은 누구나 한 번씩 하는 거 아닌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일단 나는 그렇게 짐작하고 읽었다. 하지만 조금 더 읽어보면 위 인용문에서 화자 ‘나’가 “홀로 먹고 자고 걸을 수 있는 작은 사람이 되었을 때”는 정말로 젖먹이가 유아로 성장했을 때를 뜻한다. 저 1950년대 장용학 식으로 말하자면 화자 ‘나’에게 이름이라는 속박이 주어져 ‘나’의 행복이 거덜난 순간과 비슷할 수 있다. 그렇게 화자 ‘나’는 유아가 되고, 소년이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간다. 이때 ‘나’ 앞에 다시 등장한 보아. 이때는:&nbsp; “나는 내 주변의 어떤 아이들을, 어떤 어른들을, 나아가 어떤 행인들을 띄엄띄엄 건너다니는 너를 어떤 식으로 바라봐야 할 지,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 지, 어떤 식으로 소화해내야 할지 늘 고민스러웠지. 보아, 네가 내게서 떠나 있던 동안, 내가 어떤 시간을 견뎌왔을지 상상해본 적 있어? 없다면 당장 시작해봐. 어땠을까? 나는 슬펐을까? 외로웠을까? 두려웠을까? 반대로 아주 멀쩡했을 수도 있지만, 전부 아니야. 나는 화가 났다. 늘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nbsp; 이렇게 주이현은 자신의 격동하던 학창 시절을 화자 ‘나’와 보아를 통해 이야기한다.<br>&nbsp; 다음날, 일찌감치 출근한 열람실에서 이이의 데뷔작을 읽는다. &lt;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gt;. 역시 강렬한 문장들. 예를 들어보자.<br>&nbsp; “무심코 돌아본 곳에 묽은 액체처럼 엎질러진 자신의 흔적들이 보일 때, 멈추지 않고 한 뼘씩 앞으로, 도 아래로 흘러가는 그것의 궤적을 발견할 때, 가슴속에서 무언가 밝고 따뜻한 기운이 차오르곤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그러나 율은 정작 그런 것들이 궁금한 적이 없었다. 율이 진정 알고 싶었던 것은, 율에 의해 모서리부터 젖어가고 있는 루와 주안의 입장, 생각, 감상 들이었다. 그들을 향해 조금씩 가까워지는 율의 발소리가 그들의 머릿속에서도 제대로 울려 퍼지고 있는가, 들리고 있는가, 눈치채고 있는가, 대비하고 있는가, 무엇이, 바뀌어가고 있는가, 율은 그런 것이 궁금했다.”&nbsp; (p.80~81)<br>&nbsp; 한 컷을 중첩에 중첩을 보태 묘사하며 긴 문장 속에 담는다. 긴 문장을 읽으면서 즐거울 수 있는 때는 문장 안에 리듬감이 담겨 있을 때일 경우가 많다. 그러면 문장이 길더라도 독자가 알아서 호흡을 유지하며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의미를 나름대로 짐작할 수 있다.&nbsp; 내가 우스개로 자주 말하는 “소설작법”에 의하면 긴 문장은 지옥이다. 그러나 간혹 사실이 아니다.&nbsp; 하여간 데뷔작이자 표제작 &lt;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gt;인 P시는, 아마도 작가가 직접 경험해본, 또는 우연히 살던 곳(이나 근처)에서 벌어졌을 수도 있는 땅꺼짐, 싱크홀을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보이는데, 이제껏 내가 매체에서 읽어보지 못한 정도의 대규모 싱크홀이 발생해 P시의 상당한 부분이 꺼진 땅 속에 함몰되는 광경을 담았다. 하지만 정작 작가의 시선은 “설탕조각처럼 부서져 내리는 콘크리트 잔해에 뭉개져 죽어버”리는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있지 않고, 성별이 확실하지 않은 등장인물 루, 주안, 그리고 율의 이탈離脫에 있다.<br>&nbsp; 연달아 읽은 이 두 작품에 국한해 말하자면, 나는 주이현에게 반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책을 더 읽었다. 그래서 좀 허탈했다.&nbsp; 주이현은, 아직 졸업을 하지 않은 학생이라고 면피하려는 생각이 있었을까? 제일 마지막에 실은 &lt;백야의 문은 얼어붙지 않으며&gt;만 이야기해보자. 데뷔 즉 등단 여부를 따지지 않고, 일단 책을 냈으면, 독자가 그 책을 읽으려면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이건 곧 프로페셔널, 즉 프로 작가여야 한다는 뜻이다. 주이현도 전업작가로 나선 걸로 아는데, 전업작가가 120쪽에 육박하는 짧지 않은 분량의 “습작”을 독자에게 읽어보라고 내놓으면 안 되지. 프로면 프로답게 전에 쓴, ‘쓴’이 아니고 ‘써본’ 습작 정도는 노트북에서 말끔하게 지워버리고 새로 시작할 수 없었을까?&nbsp; 길게 썼다가 지웠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서.&nbsp;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독자가 주이현의 작품을 유심히 읽기 시작했다. 또 한 독자가 주이현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고, 다른 또 한 명의 독자가 주이현의 작품을 유심히 읽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런 것도 무겁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건필을 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15/94/cover150/893204508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159463</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레싱은 휴머니스트 - [사랑하는 습관 - 도리스 레싱 단편선]</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297380</link><pubDate>Tue, 26 May 2026 05: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29738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1011113&TPaperId=1729738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6480/6/coveroff/893101111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1011113&TPaperId=1729738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사랑하는 습관 - 도리스 레싱 단편선</a><br/>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08월<br/></td></tr></table><br/>.&nbsp; 도리스 레싱을 읽으면서 지금 읽고 있는 책/작품이 해피엔드로 끝나기 바라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레싱이 심술 사나운 성격이라 그런 건 아니고, 사람의 심상과 마음의 변동, 이에 따른 행동의 이중성 같은 것을 솔직하게 묘사한다. 그게 너무 솔직한 바람에 독자는 자기 가슴 속 저 깊은 곳에 박아 놓고 절대 꺼내 보고 싶지 않았던 지나간 실수, 잘못, 악의, 행위 같은 것들을 기어이 들춰내게 만든다. 정말 가차없는 칼날이다.&nbsp; 나는 레싱을 사십대 말에 읽기 시작했는데 단 한 번도 즐겁게 읽지 못했다. 읽고 난 다음에는 어김없이 어딘가 좀 불편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작가. 독자에게 결코 친절을 베풀려 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작가로 새겨져 있다. 하긴 자신의 일생이 참 다사다난, 다양해서 그럴 수 있겠다.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하여간 그랬다.&nbsp;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이 소설집 《사랑하는 습관》을 읽으면서, 일곱 편의 단편과 두 편의 중편 소설을 읽으면서, 왜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작품들이 대개 그랬다. 등장인물의 감정의 변화, 그걸 변심이라 부르던, 질투라고 하던, 그냥 변덕이라고 여기던 간에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해할 수 없는 변화, 결국 생각과 행동의 일관을 깨뜨리는 현상, 전에는 아마 이해하기 힘들었던 변화가 이제는 등장인물이 그렇게 바뀔 수밖에 없다고 공감하게 되고, 그래서 슬퍼진 거 같다. 내가 내 마음, 정서의 변화를 이야기하며 “것 같다”라고 하는 심정을 이해해주면 좋겠다.&nbsp; 레싱의 작품을 읽으면서 우울해지는 대신 슬퍼지는 건, 기본적으로 작가의 시각이 사람 존재를 긍정하는 쪽이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한다. 남자가 습관적으로 바람을 피워도, 여자가 의도적으로 남자에게 상처를 주어도, 레싱은 딱 한 장면을 강조하여 드러난 것만 비난하려 하지 않는다. 그건 당사자의 바꿀 수 없는 성향일 수도 있고, 환경 때문에 그렇게 처신할 수밖에 없을 수도 있으며, 또한 많고 많은 사람 사는 일에 그런 것도 생길 수 있다고 여긴다.&nbsp; 사람들이 도리스 레싱을 연상하면 페르시아 출생과 아프리카에서의 성장, 제1,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 결혼, 가정, 모성, 계급, 이데올로기의 진보성 그리고 페미니스트로 구분 또는 특징지우려 하는데, 이제 나는 이이의 이런 모든 성향을 다 합해 휴머니스트라 말하고 싶다.&nbsp; 레싱에 대한 내 생각이 이렇게 바뀔 줄 나도 몰랐다. 처음 읽은 이이의 작품이 아마 거의 대부분 독자들과 비슷할 텐데, &lt;다섯째 아이&gt;, 이어서 &lt;런던 스케치&gt; 이런 순서로 읽었다. 하여간 불편한 작품들. 지금 다시 읽어도 불편할 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암울하고, 무겁고, 두렵기도 하고, 내가 레싱의 책이 눈에 띌 때마다 읽게 될 줄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을 만큼 거리감이 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레싱에게 휴머니스트라고 하게 됐을까? 여전히 레싱은 비극적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비극 속에서 슬픔을 발견하고, 가끔 슬픈 비극은 아름다움을 만들기도 한다. 혹시 내가 그걸 본 것일까? 설마. 어떻게 불편한 레싱 안에서 아름다움을 본다는 것인지. 나도 나를 모르겠다. 그러나 봤을 것이다.&nbsp; 이 책은 1957년에 초판 출간한 것을 번역한 것이다. 이후 1979년에 레싱은 다른 작품들을 추가해 《19호실로 가다》라는 제목으로 다시 내놓았다. 문예출판사는 1979년에 추가한 작품들은 따로 골라 《19호실로 가다》로, 이전 초판본은 원래대로 《사랑하는 습관》으로 냈다. 그래서 《사랑하는 습관》의 대부분은 2차 세계대전 중이거나 끝나고 얼마되지 않은 1950년대 초반까지가 시간적 공간이다. 런던은 맹렬하게 공습을 받고 있어서 3년간 연애하던 약혼자를 특별한 이유 없이 걷어찬 아가씨의 집에 폭탄이 떨어져 아버지가 산산이 부서져 죽은 이야기도 나오고, 전쟁이 끝나고 독일의 동계 휴양지로 여행간 영국인 연인이 아직 패전의 응결을 해소하지 못한 독일인과의 관계도 이야기한다.&nbsp; 전후의 불안정한 시대. 뭐든지 다 불안했던 시기. 절정기를 누리기 시작한 아메리카와 달리 전반적으로 가난한 유럽인들, 동쪽에서부터 거침없이 밀려들기 시작한 볼셰비키 물결로 그리 될 수밖에 없었던 냉전의 시작, 스탈린의 죽음을 애도하는 영국 시민들, 젊은 남성들이 전쟁터에서 죽는 바람에 공급과잉이 되어버린 젊은 아가씨들, 아직도 군데군데 폐허로 남은 옛 시가지, 이 와중에 큰 돈을 번 새로운 부르주아, 아직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옛 귀족 떨거지들. 이런 것들이 모두 레싱의 레이더에 걸린다. 여전히 조금은 암울하고, 무거우며, 전망도 보이지 않지만 삼십대 막바지에 이른 레싱은, 내가 잘못 읽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어려운 시절을 겪으며 일찍 달관했는지 조금씩 휴머니스트가 되고 있었던 모양이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6480/6/cover150/893101111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64800691</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드러나는 날 것의 삶 - [뜨거운 피]</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295596</link><pubDate>Mon, 25 May 2026 06: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29559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42831525&TPaperId=1729559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064/46/coveroff/k54283152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42831525&TPaperId=1729559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뜨거운 피</a><br/>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빛소굴 / 2023년 02월<br/></td></tr></table><br/>.&nbsp; 2년 전에 네미롭스키 선집의 1번으로 출간한 《무도회》를 재미있게 읽고 네미롭스키를 더 읽어봐야겠다, 마음을 먹었다가 금세 잊은 적 있다. 이번달에 책을 읽다가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 여행 중에 늘 가지고 다니지만 정작 집중해 읽지는 못하는 책이 네미롭스키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아차, 아우슈비츠에 끌려가 도착 며칠 만에 디프테리아에 걸려 죽은 이이를 그동안 잊고 있었구나. 그리하여 단박 읽기로 결정한 것이 저번에는 소설집이었으니, 이번엔 장편소설 &lt;뜨거운 피&gt;였다.<br>&nbsp; 주인공 화자의 이름은 실베스트르. 그러나 30년 전쯤 ‘나’를 사랑한 아리따운 아가씨가 내가 이탈리아의 곤돌라 뱃사공을 닮았다고 하면서 붙여준 별명이 ‘실비오’였다. 그래서 이 시골 동네의 별로 친하지 않은 주민들은 ‘나’를 실베스트르라고 원래 이름으로 부르고, ‘나’와 친하게 지내는 이웃과 친척은 대개 실비오라고 한다. 독후감은 실비오라는 3인칭 별명으로 쓰겠다. 나는 3인칭으로 쓰는 게 편하다. 이유는 그것뿐이다. 편해서. 편한 건 거의 언제나 좋은 거니까.&nbsp; 사실 이 소설의 중요한 스토리 가운데 하나가 누가 실베스트르에게 실비오라는 별명을 지었는지, 이걸 추리하고 맞추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독후감에 입도 벙긋하지 않을 터이다. 이 책, 나는 내 취향에 맞아 재미있게 읽어 오랜만에 별점 만점을 줄 수 있을 정도, 웬만하면 당신도 직접 ‘아리따운 아가씨’가 누구인지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럼 이게 추리극일까? 읽기에 따라 그럴 수 있겠다. 혼외 연애를 둘러싼 치정극이라면 그게 제일 재미있는 추리극 아닌가? 그럼 작품 속 이야기를 소개해보자.<br>&nbsp; 장소는 프랑스 중부의 고집 센 농부들이 모여 사는 농장지대. 주민들은 대개 비사교적이며 형편이 넉넉하다. 자기 땅에서 이웃을 경계하며 살아가는 것이 오랜 관습으로 굳어져 남의 일에 자신이 끼어들지 않게 매사에 조심한다. 외부인에게 배타적이고, 커뮤니티 안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짓을 저질러 따돌림을 받으면 거의 암묵적 압박을 받아 헐값에 자기의 땅과 시설을 다른 주민들에게 팔아 치우고 타지로 떠날 수밖에 없게 유도한다. 농민들 대다수가 그러하듯이 땅 욕심이 많아 이런 경우가 생길 때마다 새롭게 큰 농장주가 한 명씩 생긴다. 에밀 졸라의 작품 &lt;대지&gt;에 나오는 푸앙 가문 사람들을 연상하면 아마 비슷할 지도.&nbsp; 실비오는 늙고 가난한데다가 홀아비 신세. 아니, 결혼한 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숲 깊은 허름한 집에서 은둔하며 말년을 보내고 있다. 실비오는 젊은 시절 이 답답한 고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마자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 받아 그걸 차근차근 팔기 시작한다. 젊은 청년이 부동산을 급하게 파는데 그게 제값을 받을 수 있겠어? 그리고 이런 완고한 동네 사람들이 땅을 팔아 현금을 만들어 자기 고장을 뜨려고 하는 청년에게 제 값을 주고 그걸 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관습이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상상도 할 수 없었을 터이지만, 어머니 정도는 실비오가 얼마든지 구워 삶을 수 있어서 과감하게 그렇게 했다. 실비오는 현금을 가지고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에 가서 사업을 벌였다. 구리, 향신료, 금 등. 취급품목은 화려했으나 용기와 배포만 있지 경험은 하나도 없는 초짜 사장은 당연히 탈탈 털려 불과 2년 만에 집에 돌아와, 잠깐 연애를 해 실베스트르 대신 실비오라는 별호를 얻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와 늙어가고 있다.<br>&nbsp; 그래도 실비오가 성격이 올바라 책을 시작하는 가을 저녁 무렵 그의 작은 집에 사촌 에라르 부부와 아이들이 놀러 와서 불 앞에 모여 가벼운 펀치를 마시고 있는 것으로 막이 올라간다. 프랑수아와 엘렌 사이에 맏딸 콜레트가 있고, 아래로 두 아들과 어린 딸을 두어 2남2녀의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있다. 콜레트와 이웃 사람들이 보기에 자기 부모, 프랑수아와 엘렌 부부는 평생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며 조금의 도덕적 실금도 가지 않은 채 결혼 20여 년이 지나도록 진실한 사랑을 유지하고 있는 모범가족이다. 오늘 모임은 콜레트의 약혼자 장 도랭을 실비오 아저씨에게 소개하기 위한 것.&nbsp; 실비오가 보기에 사위 후보 장이 장인자리 프랑수아와 비슷한 성격인 듯하다. 예민하고 섬세하며 거의 여성적이고 아내가 지배하기 쉬운 남편 스타일. 매사에 조심스럽고 비사교적이며 수줍음을 타기까지 하는 부류의 남자들.&nbsp; 이 가족모임에서 콜레트는 습관적으로 자기 부모가 결혼하게 된 과정을 이야기해달라고 조른다. 핑계김에 그걸 요약해보자.<br>&nbsp; 엘렌의 아버지, 그러니까 콜레트의 외할아버지는 결혼을 두 번 했다. 첫째 아내가 낳은 딸이 엘렌. 두번째 아내도 첫 결혼에서 얻은 딸 하나를 데려왔다. 세실 쿠드레. 세실이 엘렌의 의붓 언니. 계모는 기가 센 여자였던 반면에 세실은 어디가 좀 모자라 보인다는 평을 얻었다. 집에서 결혼시키기 위해 몇 번 맞선 자리를 마련했지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앉아 있기만 해서 서른이 넘도록 결혼하지 못하다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훗날 갓난 여자 아이를 입양해 이름을 브리지트 드클로라고 짓고 나름대로 잘 키우다가 브리지트가 성년이 될 즈음 일찍 세상 떴다.&nbsp; 프랑수아의 아버지는 프랑수아를 원래 세실과 결혼시키려 했다. 그래 부자가 엘렌의 집에 가보니 뚱한 성격의 세실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아 그냥 돌아가려고 현관문을 열자 눈 오는 날 양 볼이 빨갛게 얼었으면서도 짓궂은 남자 아이들과 눈싸움을 하는 생기 넘치고 매력적인 열세 살 소녀가 눈에 띄었다. 사랑은 종종 한 눈으로 결정된다. 프랑수아도 마찬가지였다. 이 아이가 누구인지 알게 된 프랑수아는 곧장, 지금은 아니지만 아이가 적당한 나이 열여덟 살이 되면 꼭 결혼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일단 공부를 좀 해야할 것 같아 파리로 떠나 열심히 일했다.&nbsp; 당시 엘렌은 행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늙어 병이 들었고, 계모는 엘렌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아마도 엘렌은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탈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순 살이 넘은 부자 늙은이를 선택해 열일곱 살 때 결혼을 했다. 당연히 둘 사이에 아이는 생기지 않았고, 남편은 모르겠는데 아내 엘렌의 마음 속에 사랑은 한 오라기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래도 아내라는 의무는 다 하겠다고 다짐한 엘렌. 이이는 남편이 죽을 때까지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가히 홍살문이라도 하나 세워줄 만했다. 결국 심판의 날이 왔을 때, 남편은 엘렌에게는 그저 형식적인 정도의 유산만 물려주고, 자기가 평생 모은 거의 전부의 재산은 자기 가문의 형제, 조카들에게 유증해버렸다.&nbsp; 과부가 된 엘렌. 지금 프랑수아가 오면 당장 결혼할 수 있을 터인데 그는 보헤미아에서 교사로 지내고 있어 적어도 1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기다렸다. 젊디 젊은 남녀, 프랑수아와 엘렌. 그토록 먼 거리에서 각자 홀로 지내며 정말 멀리 떨어진 연인만 사랑하고, 생각하고, 서로를 연상하면서 몸을 달래고 있었을까? 이렌 네미롭스키는 이 문제를 집요하게 캐묻는다. 그럴 수 있었을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는 사람 사는 일에 집중해, 사람의 본질을 탐구하는 이렌 네미롭스키. 가히 눈이 매섭다.&nbsp; 엘렌은 이 과정을 뺀 채 조만간 결혼하는 딸 콜레트에게, 그리하여 아빠가 프랑스로 돌아오자마자 결혼해 너와 세 동생을 낳고 편안하게 살고 있단다, 라고 언제나처럼 이야기를 마친다.<br>&nbsp; 얼마 지나지 않아 콜레트는 장 도랭과 결혼해 도랭의 집이자 직장인 풍차 방앗간, 물랭뇌프에서 산다. 방앗간 아래로 거품이 이는 녹색의 아름다운 강이 흐르는 곳. 실비오도 가끔 그곳에서 송어낚시를 하고 그랬다.&nbsp; 콜레트. 실비오가 엘렌의 아이들 가운데 제일 아끼는 당조카. ‘당조카’는 북한말이고 당질이 옳은 표현이라는군. 하여간 콜레트 당질은 아빠를 닮지 않아 웃는 눈과 큰 입에 불꽃의 뜨거움을 품고 있는 아이였다.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엄마 아빠의 가정처럼 남편 장 도랭과 즐거운 신혼을 보내던 콜레트. 그렇게 깨를 볶는 신혼을 지내고 있을 거라 누구나 생각하던 시기. 장 도랭은 이틀 예정한 출장을 갑자기 하루만에 마치고 다음날 밤에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차에서 내려 방앗간 옆을 흐르는 강변의 나무 다리를 건너려는 순간, 어느 검은 그림자와 몸싸움이 벌어졌고, 애초 예민하고 섬세하여 완력이 세다고는 할 수 없는 장은, 다리 구간에서 난간이 없는 곳까지 밀려가 강에 빠져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다.&nbsp; 이야기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급류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여태까지 이렌 네미롭스키가 숨겨왔던 모든 비밀들이 이제부터 하나씩 베일을 벗기 시작해 사람이 산다는 것의 날 모습이 드러나는데, 허, 그것 참.<br>&nbsp; 왜 여태 네미롭스키를 잊고 있었던 것인지.<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1064/46/cover150/k54283152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0644602</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문명 몰락, 그래도 희망은 있다 - [스테이션 일레븐]</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292547</link><pubDate>Sat, 23 May 2026 05: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29254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32535282&TPaperId=1729254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690/57/coveroff/k53253528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32535282&TPaperId=1729254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스테이션 일레븐</a><br/>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16년 07월<br/></td></tr></table><br/>.&nbsp; 에밀리 세인트존 페어뱅크스는1979년에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머빌 섬에서 캐나다인 사회복지사 엄마와 미국인 배관공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번째 이름 세인트존은 할머니의 성씨 성 요한에서 가져왔다는데, 엄마의 엄마인지 아빠의 엄마인지는 영어로 알아낼 수 없다. 이 사람들이 그런 개념이 별로 없다.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낸 가족은 역시 작은 섬인 덴먼 섬으로 이사해 청소년기를 홈스쿨링으로 통과한다. 학교도 다녔는지 위키피디아에 18세에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유명한 토론토 댄스 시어터 학교에서 현대무용을 공부했지만 잘 안 된 모양이다. 그래 이이의 사진을 보면 작은 얼굴에 귀여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 체형이 무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커졌는지, 기대치를 재능이 받쳐주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무용을 그만두고 소설쓰기를 시작, 2002년부터 작품을 발표해 &lt;스테이션 일레븐&gt;이 네 번째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이 내셔널 북어워드, 펜 포크너 소설상, 베일리스 여성 소설상 후보로 지목되었다가 미끈덩, 바나나 껍질을 밟았지만 대신 공상과학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아서 C 클라크상과 토론토 도서상을 받았다고. 받은 문학상의 상금보다 더 대박을 친 것은 HBO Max가 &lt;스테이션 일레븐&gt;을 10부작 드라마로 만들어 방송했다는 거. 그게 펜데믹 신드롬 중이던 5년 전, 2021년 12월이었다.&nbsp; 에밀리 세인트존 페어뱅크스는 “Executive Recruiter”라는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잘 나가는 회사원 케빈 맨델과 결혼해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로 이름이 바꾸고 딸 하나를 두었지만, 2022년 갈라섰다. 이혼 후 뉴욕에 살고 있다는데 2025년에 한 책방에서 로라 바리소지라는 사람과 재혼했다. 배우자의 이름만 보면 동성 결혼인 것 같다.<br>&nbsp; 이 책은 2014년에 출간했다. COVID-19 이전 시절이지만 이미 세상은 SARS를 겪은 후. 인수공통전염성 바이러스 질환으로 중국 윈난성에서 발생한 바이러스를 SARS-CoV-1이라 명명했다. 약 1년간 지속한 펜데믹에 8천4백여 명이 감염되었으며 치사율은 11%였다. 이후 17년만에 중국 우한에서 두 번째 변종 바이러스 SARS-CoV-2를 확인했으니 이것을 코로나 바이러스라 했다.&nbsp; 에밀리 맨델은 바이러스로 인한 인간의 소멸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썼다. 이것을 소재로 비슷한 내용의 소설을 쓴 사람이 맨델 한 명은 아니겠지만 그런 작품들 가운데 돋보이는 수준이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중국과 인근 동남아시아를 제외하고 SARS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나라가 캐나다였다. 251명의 환자가 발병해 이 가운데 43명이 사망, 평균보다 높은 치사율인 17퍼센트를 기록했으니 이런 작품이 나올 만했을 듯하다.<br>&nbsp; 작품은 한겨울 밤 &lt;리어왕&gt;을 공연하는 토론토의 엘긴 극장에서 시작한다. 주인공 리어 역을 맡은 배우는 51세의 아서 리앤더. 연극을 하고 있지만 사실 영화배우로 더 명성을 높였다. 한때 잘 나가던 영화배우답게 세 번 결혼했고 지금 세 번째 이혼 소송중이다. 이이가 맨델처럼 브리티시컬럼비아에 속한 작은 가상 섬 델리노 출신으로 (작가처럼)무용이 아니라 연기를 배우러 뉴욕으로 향했다가 젊은 시절엔 사서도 한다는 고생 끝에 단역에서 시작해 한때 스타라고 불리기도 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찌그러져 이제 뉴욕 브로드웨이도 아니고 토론토에 와서 리어를 공연하고 있는 신세다.&nbsp; 공연일. 아침부터 아서는 피곤했다. 사흘 동안 불면증이 심했다. 나른하고 탈수증세가 있는 아서. 그럼에도 스크램블드에그를 만들어 먹고 샤워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극장에 출근했다. 눈보라가 다가오고 있다는 일기예보가 맞는지 회색빛으로 하늘이 무겁게 내려 앉아있다. 아서는 &lt;리어왕&gt; 공연만 끝나면 캐나다와 미국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스라엘로 떠나겠다고 결심했다. 두번째 처 엘리자베스와 아들 타일러가 살고 있는 곳. 함께 살지는 못하겠지만 자주 타일러를 보고, 함께 여행하고, 캠핑도 가고, 영화 속 행복한 부자관계를 연출할 생각이다. 그러나 아서에게 행복은 주어지지 않는다.&nbsp; 4막, 왕이 실성하는 장면에서 머리에 꽃을 꽂고 남루한 넝마를 입은 리어왕, 아서는 대사 없는 배역인 어린 시절의 코딜리아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글로스터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표정이 변하더니 몸이 휘청거렸다. 기둥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지만 거리가 맞지 않아 팔이 기둥에 세게 부딪혔다.&nbsp; “허리 아래로는 켄타우로스야.” 아서가 엉뚱한 대사를 하고 있는 것을 관객석 제일 앞자리에서 보고 있던 전직 파파라치, 연예담당기자이자 지금은 응급구조사가 되기 위하여 배우고 있는 건장한 남자 지반 차드하리가 알아챈다. 지반의 머리 속에는 생명의 골든타임이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차올랐고, 객석에서 벌떡 일어났으며, 뒷자리에 앉은 관객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망설이지 않고 무대로 뛰어올라가, 아서를 똑바로 눕히고 맥이 없음을 확인하더니, 기도를 확보한 다음 심폐소생술, CPR을 시작한다. 곧이어 객석 중에 회색 정장을 차려입은 노신사가 무대에 올라 지반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말했다. “심정전문의 월터 지코비요.” 정수리에 머리카락이 얼마 없다. “지반 차드하리입니다.”&nbsp; 조금 후 응급구조대가 도착해 두 시민을 뒷자리로 밀려가고 아서는 병원으로 후송되지만 그 전에 지코비 박사는 선고했다. “밤 9시 14분. 사망했습니다.”&nbsp; 무대 위 응급상황을 알아차리고 심폐소생술을 한 용감한 시민이 누구인지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고, 급성 심장발작으로 사망한 아서 리앤더는 모스크바에서 도착한 여객기 안에서 조지아 바이러스에 감염된 2백여 명의 치명적 호흡기 전염병 보균자가 득실거리는 종합병원으로 실려갔고, 북미에서 처음으로 죽음의 펜데믹이 시작하는 바로 그날, 그 시간이었다.<br>&nbsp; 이야기는 대부분 이날의 공연에 직간접으로 관련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긴 일이다. 문명의 몰락은 그렇게 왔다. 조지아 바이러스. 인간의 문명을 모두 파괴해버릴 공포의 바이러스가 왜 하필 조지아에서 시발했을까? 이오지프 스탈린의 고향이라서? 그건 모르겠고 하여간 순식간에 바이러스는 전 세계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잠복기간이 겨우 몇 시간.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나흘, 보통 사람이라면 이삼일 안으로 몸에서 생명을 뽑아가는 바이러스가 토론토를 덮쳤다. 이건 뉴욕과 LA를 비롯해 모든 미국의 대도시도 마찬가지라는 말과 같다. 토론토 사람들은 차를 타고 도시를 벗어나기 위해 고속도로를 메웠고, 이미 가득 찬 공항 행 고속도로 위에서 추운 겨울 폭풍을 차 안에서 견디다 몇몇은 행복하게도 가스 질식으로 죽었으며 몇몇은 가솔린이 다 떨어진 다음에 얼어 죽었다. 대부분은 걸어서 공항까지 도착했지만, 공항에는 “바이러스 감염지로 출입을 금함”, 이라는 경고문이 쓰여 있을 뿐이라 기력이 다해 그냥 길 위에 쓰러져 유행병 증상으로 체온이 올라 죽었거나, 얼어 죽었거나, 하도 하가 치밀어 열 받아 죽어버렸다.&nbsp; 화가 지망생 시절에 아서와 결혼한 첫번째 아내 미란다 캐롤은 이혼 후 선박회사에 입사해 맹활약한 끝에 중요한 경영진의 한 사람이 되었는데, 평생 그림 대신 그래픽 노블을 만들었으니 &lt;스테이션 일레븐&gt; 이 책의 제목이다. 작품을 최고급 종이와 잉크로 자비 출판해 2권 열 세트 한정으로 만들었다. 이 가운데 두 세트를 전남편 아서에게 선물했다. 아서는 이 중 한 세트를 이스라엘에 사는 아들에게 보냈고, 한 부는 가지고 있다가 무대에서 심장질환으로 죽은 후, 대사 없는 어린 시절의 코딜리아 역을 하던 아역배우 커스틴 레이먼드의 손에 들어간다.&nbsp; 지금까지 등장한 주요 인물. 바이러스에 의한 인간문명의 몰락 이후에 삶을 이어갈 사람이, 이스라엘에 살다가 아버지의 장례에 참석하려고 토론토행 비행기를 탔다가 현지 공항의 바이러스 오염 때문에 아이오와 공항에 내려 목숨을 구한 아서의 아들 타일러. 코딜리아 역을 했던 아역배우 커스틴. 그리고 바텐더를 하면서 응급구조대원이 되기 위하여 생명연장기술을 배우고 있는 지반 차드하리.&nbsp; 여기에 한 사람을 더 보태야 한다. 아서의 가장 친한 친구 클라크 톰슨. 한 시절 아서와 함께 연기를 공부했지만 도중에 길을 바꾸어 잘 나가는 경영 컨설턴트가 된 현명한 남자. 문명 몰락 이후에는 바이러스가 침공하지 않은 새번시티 공항에서 지난 문명을 위한 박물관을 만들고 책이 끝나는 문명 후 19년, 일흔 살이 될 때까지 박물관의 큐레이터로 지낸다.<br>&nbsp; 바이러스로 인한 문명의 몰락. 인구의 대부분이 한 번에 사라지면 제일 먼저 닥칠 것은 약탈과 싸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살인일 수밖에 없는데. 이런 행위 모두 각자가 자신의 삶을 이어가기 위한 수단이며, 자기 DNA의 연속을 위한 본능이다. 세상은 또다시 남자가 지배할 것이다. 최선의 미덕은 힘과 무기가 되리라는 건 자명한 상식이다.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은 이런 야만을 견디기 쉽지 않았을 터. 이이가 만든 것이 유랑극단. 문명은 이미 사라졌을지언정 아직 예술을 기억하는 사람은 셰익스피어를 전문으로 공연하고,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단원을 모아 소규모 단위로 모여 사는 씨족과 부족 수준의 커뮤니트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한다.&nbsp; 물론 이들도 다른 인간들의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무기를 들고 보초도 서고 경계도 하며 유랑의 길을 떠돌며 산다. 그래도 작가 맨델이 포기하지 않은 것은,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 문명 몰락 이후에도 누군가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대표적인 문명이라고 하면 그것은 “빛”. 아서의 아들인 것이 확실한 새로운 영적 지도자가 찾고자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빛이지만, 남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구하려 하는 빛은 어둠을 환하게 밝힐 수 있는 진정한 빛, 전기였다. 그걸 누가 만들어내는지는 직접 확인하시옵고.&nbsp; 문명 몰락. 은근히 재미있다. &lt;스테이션 일레븐&gt;도 그렇고, 좀비에 의한 문명 몰락을 그린 콜슨 화이트헤드의 &lt;제1구역&gt;도 그렇고.<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690/57/cover150/k53253528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6905721</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20세기 초 미국의 가난하고 외로운 삶 - [기차의 꿈]</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290693</link><pubDate>Fri, 22 May 2026 05: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29069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02033169&TPaperId=1729069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710/61/coveroff/k402033169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02033169&TPaperId=1729069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기차의 꿈</a><br/>데니스 존슨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br/></td></tr></table><br/>.&nbsp; 데니스 헤일 존슨. 미국 국무부와 미국 정보부, CIA 등에서 일한 아버지 때문인지 1949년에 서독 뮌헨에서 출생해 필리핀, 일본, 미국 워싱턴 DC 교외에서 살았다. 아이오와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과정인 아아오와 작가 워크숍에서 레이먼드 카버를 사사하며 예술석사 MFA를 취득했다. 그러나 20대 시절 존슨은 약물과 알코올에 흠뻑 젖어 살아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었던 창작마저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약물과 알코올은 인간에게 치명적이다. 중독자들도 그걸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 그러나 존슨은 스물아홉 살 때인 1978년에 완전 금주를 시작해 성공했고, 83년엔 기타 약물도 끊어버렸다. 여간한 독종이 아니다. 시, 소설, 단편소설, 희곡, 에세이 등을 남겼다. 이름난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두 번 퓰리처 상 최종심까지 올라갔다. &lt;기차의 꿈&gt;도 두 권 가운데 하나.&nbsp; 지긋지긋하지도 않나, 세 번 장가들었고, 좋아했던 술이 나중에 심통을 부렸던지 2017년 5월 캘리포니아에서 간암으로 죽었다. 죽고 나서야 미국 의회도서관 소설상을 받았다. 출판사 다산책방은 당연히 판매 목적이겠지만 이렇게 평가했다. “미국에서 가장 영예로운 문학상.” 믿거나 말거나.<br>&nbsp; &lt;기차의 꿈&gt;은 장편소설이라 주장하지만 노벨라, 중편 정도로 봐야 옳을 듯하다. 주인공은 로버트 그레이니어라는 남자. 막이 올라갈 시점은 1927년 여름. 아이다호 팬핸들 스포켄 국제철도 공사장. 흑인 노동력을 대신해 철도 가설을 위하여 대거 수입한 인력이 중국인. 이 현장에서도 중국인 노동자가 회사 창고에서 물건을 훔쳤다고 의심을 받아 그를 죽여버리려는 백인 노동자들이 무리를 이루었다.&nbsp; 이 가운데 세 명, 철도회사 간부 시어스와 노동자 젤루이스 그리고 그레이니어는 모이강에 건설중인 50피트 높이의 다리를 중국인을 끌고 올라가 다리 아래 흐르는 급류에 던져 버리려 했다. 다리 꼭대기까지 끌고 가기는 했는데 잠깐 숨을 돌리는 사이에 중국인이 잽싸게 철골 빔을 타고 내려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시어스 씨가 권총을 네 발 발사했지만 이미 사라진 다음이었다.&nbsp; 그레이니어는 찜찜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기가 중국인을 직접 처형하려고 해서? 천만의 말씀. 그레이니어가 가책을 느낄 만큼 착하고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가 도망치면서 자기한테 강력한 저주를 내렸을까봐 그게 걱정이 될 뿐이다. 그 다음에야 자신이 괜히 광적이고 폭력적인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을 알아차렸다. 아내 글래디스가 갓난 딸 케이트를 넉 달 전에 낳았다. 애 키우는 젊은 남자가 옳고 바른 일만 해도 아차 하는 사이에 부정탈 게 많고 많은데 함부로 처형 팀에 합류하다니. 이거 뭐가 잘못된 건 확실하다.&nbsp; 아니나 다를까, 큰 산불이 나고, 그게 자기가 힘들여 번 돈으로 마련한 1에이커의 땅에 지은 오두막과 밭까지 번져 아내와 딸은 흔적도 없이 타 재가 되어버렸다. 그건 좀 나중 일이지만.<br>&nbsp; 1917년 여름이면 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nbsp; 그레이니어가 일하는 철도 공사현장에는 전쟁 이야기도, 참전하자는 동요도 없이 지나갔다. 그런 세월이 아니라 그런 장소였다. 중국인 처형 미수가 있고 41일이 지나 이들이 만든 다리를 기관차가 빽빽거리며 달려 지나갔다. 깊이 60피트 협곡 위 112피트 길이의 허공을. 이 다리를 건설해서 철로를 11마일 단축할 수 있었다. 그레이니어는 일이 끝나 한편으로 슬픈 마음이 들었지만 다른 동료들처럼 환호와 환성을 질렀다.&nbsp; 이어서 1920년에 워싱턴주 북서부 로빈슨협곡 다리 보수공사를 거쳐 심슨 컴퍼니를 따라 숲으로 들어가 목재 운반일을 했다. 이때가 35세. 여름 일이 끝날 무렵 그간 받은 돈을 모두 집으로 보냈는데도 성실한 그레이니어가 받을 돈이 무려 4백달러에 달했다. 때마침 오한 환자가 급증해 1897년 독감유행처럼 번질까봐 산꾼대장이 보너스 4달러를 주며 산꾼들을 집으로 보냈다. 집에 가보니 이미 아내와 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다음.<br>&nbsp; 유타 아니면 캐나다에서 태어난 그레이니어는 어린 시절에 부모가 모두 죽어 혼자가 되었다. 1886년에 그레이트 노턴 철도를 타고 새로운 가족이 될 아이다호 프라이 마을에 있는 고모네 집으로 들어온 소년은 고모부의 성 그레이니어를 따랐고, 이름도 고모부와 같이 로버트 그레이니어로 정했다. 프라이 마을에는 철도 공사를 위하여 백명 너머 중국인들이 살았다. 1893년에 철도가 완공되자 프라이 사람들은 중국인들을 마을에서 추방해 이들은 서쪽 30마일 떨어진 몬태나로 가 훗날 차이나베이슨이란 동네를 이루었다. 로버트의 고모와 고모부는 이미 세상을 뜬 1899년에 프라이는 이턴빌과 합병해서 보너스페리로 불렸다. 로버트는 보너스페리 학교에서 글과 셈하는 법을 배웠으나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다. 이 소년이 살아온 이야기. 작가 정여울은 그걸 파노라마라고 평했다. 고독한 남자가 살아온 파노라마 같은 삶의 이야기? 20세기 초반에 그런 사람이 한 둘 있었던 건 아니지만 뭐 그런가 보다, 그냥.<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710/61/cover150/k402033169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7106135</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폴짝 뛰어서 평평하게? 그저 립서비스 시 - [축 생일]</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288793</link><pubDate>Thu, 21 May 2026 05:4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28879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4597&TPaperId=1728879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279/3/coveroff/893204459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4597&TPaperId=1728879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축 생일</a><br/>김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09월<br/></td></tr></table><br/>.&nbsp; 김선우. 1970년생, 하다가! 70년 개띠가 벌써 쉰여섯 살이야? 아이쿠. 여태 나 혼자 늙어가는 줄 알았구나 싶었다. 김선우. 강릉에서 나 춘천에 있는 국립 강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지만 아마 교사 생활은 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어디선가 그렇다고 읽은 거 같다. 정확한 것도 아니고, 중요하지도 않다. 20대 시절에 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해 여러 권의 시집과 산문집, 그리고 소설도 썼지 아마? 이이의 인터뷰를 보니 소설도 출간했단다. 시집 앞날개에 소설 출간을 경력으로 소개하지 않은 걸 보니까 만족스럽지는 못했나 보다.<br>&nbsp; 《축 생일》 초판이 2025년 9월에 나왔다. 쉰다섯 살의 시인. 나는 이 시집이 처음 읽는 김선우이다. 그래 전에는 어떤 시를 썼는지 전혀 모른다. 한 편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을까? 모르겠다. 요즘 인터넷 좀 돌아다니면 넘쳐나는 것이 시들이니 뭐 한 두 편은 읽어봤을 수도 있겠지. 시들을 제대로 옮긴 건지 아닌지는 다음으로 하자. 그래서 그렇게 읽은 걸 싹 무시하면, 이 시집이 처음으로 읽는 김선우다.&nbsp; 처음에는 시들이 통통 튄다. 김선우가 사용하는 다른 말로 하면, 폴짝거린다. 폴짝거려?&nbsp; 한 생명체가 도약하는 모습을 “폴짝이다”라고 쓰는 건 해당 생명체가 작은 몸집을 가지고 있을 때 어울린다. 기린, 코뿔소, 히말라야 야크, 코끼리가 폴짝거리는 모습은 여간해 상상하기 힘든다. 대신 쿵쿵거린다라고 할까? 시집에서 제일 앞에 배치한 시부터 폴짝인다.<br><br>&nbsp; 폴짝인입니까?<br><br>&nbsp; 나도요 폴짝! 우리는 반가워서 폴짝폴짝 뜁니다<br>&nbsp; 그쪽 우물은 얼마나 깊었나요? 하늘은 동그랬나요?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육각형이었나요? 희미한 햇빛이 아주 잠깐 우물 바닥을 비추고 사라질 때나 뚝뚝 끊기는 바람이 어깨에 닿을락 말락 머물다 가버릴 때 당신도 두 손 꼭 맞잡고 우물하늘을 올려다보았나요? 우물 속에선 내내 하늘을 쳐다봤죠 햇빛과 바람이 거기서 들어오니까…… 당신도 우물이 모든 걸 보내준다고 믿었나요? 그랬죠 그럴 수밖에요 내가 우물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우물이 나를 사랑해서…… 충분하진 않지만 그래도 햇빛과 바람이……내게로 온다고…… 때로는 특별한 은총이라 느끼기도 했고요 우물하늘 바깥에 무엇이 있을까?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오른손으로 왼 손등을 찰싹찰싹 때렸죠 왼손으로 왼뺨을 철썩철썩 때렸죠 의심하는 자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음…… 글쎄요<br>&nbsp; 폴짝, 우리는 서로의 눈물을 닦아줍니다&nbsp; &nbsp;(부분. p.9)<br><br>&nbsp; 시가 길다. 개구리 한 마리의 우물 탈출 서사. 우물을 사랑하고 우물도 나를 사랑했지만 그래도 우물 밖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한 나머지 바락바락 벽을 기어올라 “제기랄! 하늘이 이토록 드넓은 거였다니!” 눈알이 툭 튀어나온 채 햇빛과 나부끼는 바람 속에서 우물과 우물 사이를 뛰어다니며 폴짝폴짝 웃고 또 폴짝폴짝 울며, 이런 젠장! 경탄과 경악을 하는 우물 안 개구락지였던 한 생명체를 시인은 폴짝인人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시인이 말하는 “폴짝인의 서(序)를 소개하자면:&nbsp; 『우물 안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노력, 결국 우물에 포섭되고 만다네』&nbsp; 포섭되지 않기 위하여 개구리는 우물벽을 바락바락 기어올라 우물이라는 구조에서 탈출해야 한다. 새롭지는 않다. 20세기 초부터, ‘헤르만 허세’의 &lt;데미안&gt;에 의하면, 새는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하여 죽을 똥을 싸왔으니까. 어떻게 하면 우물에서 기어 나올 수 있을까? 서울국제작가축제가 있던 2016년, 지금부터 10년 전에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br>&nbsp; “저는 여전히 책만큼 훌륭한 학교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어서, 가끔 중고등학생 독자들이 작가님이 우리 나이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살거 같아요? 라고 물어오면 이렇게 대답해요. ‘보나마나 학교는 때려칠 거고, 도서관에서 죽치며 살겠지. 거기가 제일 근사한 학교니까.’”<br>&nbsp; 인터뷰 당시 김선우가 46세. 아직 완경기에 달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밝혔듯, 남편의 스케쥴, 아이들 대학입시, 아파트 평수, 승용차 차종 등에 겁나게 신경 쓰는 시절이며, 이미 시인으로 이름을 낸 입장에서 팍, 말해버린 것이겠지. 근데 이렇게 무책임한 말을 중고등학생 독자들한테 했다니. 왜, 자기 딸 아들 더러 먼저 학교 때려치우라 그러지 않고? 10년 전에는 몰랐겠지. 이런 멋진 말을 하면서 점점 꼰대가 되어가는 거라는 걸. 물론 이미 시인이 된 자기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지만, 질문을 하는 어린 독자는 자기는 시인이 말하는 것을 왜 따라하지 못할까,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음을 깊이 숙고해봐야 하는 거 아니었을까? 인터뷰에서 이 이야기를 아예 꺼내지 말든지.&nbsp;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가도 다 좋을 수 없다는 건 시에 나오지 않는다. 우물 밖으로 기어 나오기를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황새, 너구리, 뱀이 우글우글거리는 것도 모른 채 개구리는 폴짝폴짝, 폴짝폴짝, 뜨겁게 서로를 응원하며, 폴짝폴짝, 폴짝폴짝 저마다 갈 길을 가는지, 시인이 그것도 봤대? 세상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을 걸?<br><br>&nbsp; 산골, 폴짝인들<br><br>&nbsp; 착취당하고 싶지 않아&nbsp; 착취하고 싶지도 않아&nbsp;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를 착취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어요&nbsp; 착취를 묵인하는 소비&nbsp; 착취를 조장하는 소비를 하고 싶지도 않고요&nbsp; 꺼림칙해요&nbsp; 그뿐이에요<br>&nbsp; 그래서 폴짝, 도시로부터 폴짝폴짝, 산골로 폴짝!<br>&nbsp;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지구에 해로운 건&nbsp; 동물종 가운데 인간밖에 없다고요<br>&nbsp; 폴짝, 폴짝폴짝, 폴짝폴짝폴짝,<br>&nbsp; 사는 동안 있는 힘껏 내 삶을 책임지고 싶어요&nbsp; 그래봤자 완전히 자유로워지긴 어렵지만&nbsp; 최소한의 폭력&nbsp; 네, 그 정도라도 되면 좋겠어요<br>&nbsp; 그래서 폴짝, 도시로부터 폴짝폴짝, 산골로 폴짝!&nbsp; &nbsp;(전문. p.22~23)<br><br>&nbsp; 이것 참. 누군가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착취하고, 누군가로부터 착취당하는 삶. 착취를 묵인하고 심지어 착취를 조장하는 소비. 이것이 도시의 삶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고 딱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래 더 무섭다. 슬며시 세상살이를 이것과 저것으로 양분하는 행위.&nbsp; 착취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시인은 도시인에게 폴짝, 개구락지 뜀박질을 권유한다. 시골로 가라! 자연으로!를 외친 루소 같아? TV에 나오는 자연인 같기도 하고. 산골로 가면 완전히 자유로워지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폭력, 참을 수 있는 수준만 행하고 견디면서 살 수 있다는데, 그것 참.&nbsp; 김선우가 딸 여섯 조르륵 낳고 마지막으로 아들 하나 만든, 우스운 옛 습속의 딸부잣집 중 한 명이어서 그런지, 아마도 지긋지긋했을 것 같은 게마인샤프트에서 벗어나는 로망이 있는 것 같다. 우물을 탈출하는 개구리, 착취 행위의 최소화를 지향하는 산골행. 지금 김선우는 어디서, 어느 산골에서 살아? 하긴 그건 문제가 아니다. 자기도 산골에서 살고 싶은 마음을 시로 쓴 것일 수 있으니.&nbsp; 산골 생활 우습게 알지 마시라. 이 시는 산골로 폴짝, 한 마디를 위해 사용 수식한 단어들이 너무 컸다. 착취, 조장, 소비, 지구, 인간종, 폭력. 산골에서는 이런 단어들을 그래도 견딜만한 수준이 될 거라고? 정말? 독자들은 조심하시라. 산골. 다른 말로 하면 정글이다. 단어가 아닌 진짜 폭력, 자연에 의한 심각한 폭력이 눈을 크게 뜬 채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걸.<br>&nbsp; 내가 말을 험하게 해서 그렇지 김선우가 진심으로 바라는 건 시에서 읽히는 첫인상, 선한 탈출과 선한 산골행일 것이다. 나도 알면서 일부러 부정적 측면을 강조한 건 아니고, 폴짝 뛰쳐나가는 행위, 자유에는 반드시 조건이 따라붙는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폴짝, 뛰쳐나가면 좋지. 그래서 성공하기만 하면. 학교를 때려치우고 교실 대신 도서관에 가서 진짜 스승이 빼곡 들어찬 책 속을 유영할 수 있으면 더 큰 시인이 될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자기 생각을 새파란 고등학생 독자한테 얘기해줄 수도 있지. 도시에서 착취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에 빠진 청년 제위께 산골로! 마치 도시 속 브나로드 운동처럼 외칠 수도 있고.&nbsp; 좋다. 폴짝 뛰어 도약에 성공해 우물탈출을 했다 하자. 그럼 만날 수 있는 건 평평. 한자어로 쓰면 平平. 21세기 김선우 식 평등이다. 그것을 노래한다.<br><br>&nbsp; 평평으로<br><br>&nbsp; 平&nbsp; 어떤 것을 올리든 고르게&nbsp; 고르게 하려는 의지&nbsp; 한쪽으로 기울어지면&nbsp; 다른 쪽에 무게를 더하려는 의지<br>&nbsp; 平平&nbsp; 고르게&nbsp; 고르게 될 때까지&nbsp; 작고 가벼운 쪽으로&nbsp; 희미한 반짝임 쪽으로&nbsp; 선한 눈물의 방향으로&nbsp;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는 쪽으로&nbsp; 끊임없이 중심축을&nbsp; 이동하려는 의지<br>&nbsp; 平平平&nbsp; 마침내 저울이 지렛대가 되는 의지<br>&nbsp; 平平平平&nbsp; 고르게&nbsp; 고르게&nbsp; 고르게 하려는 의지를&nbsp; 지켜내려는 의지<br>&nbsp; 그때 비로소&nbsp; 자유는 자유&nbsp; &nbsp;(전문. p.29~30)<br><br>&nbsp; 폴짝 뛰어서 만든 평평한 세상. 미륵이 도솔천을 건너 환생했다. 이렇게 오해하지 마시라. 김선우가 노래하는 건 세상이 고르게 평평평평, 이런 상태가 된 미래 또는 약속이 아니다. 마음 속에서 세상을 평평평평 고르고 고르며 고르게 하고자 하는 “의지”, 즉 마음만 그렇게 먹으면 자유로워진다는 선언이다. 행동은 완전하게 별개다. 시인은 왜 행동까지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행동, 즉 운동과 운동에 이른 성취까지 해야 혁명이 이루어질 터인데 말이지. 그걸 내가 어찌 알겠노? 뭐 사정이 있겠지.&nbsp; 폴짝폴짝 뜀박질도 그렇고 땅만 열나게 갈고 갈아, 다지고 다져 평평하고 평평하며 평평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시인. 시인의 동지, 동무들이 함빡 모였던 저 어둠의 시절에 이런 시 읊었으면 정말 조리돌림 당했을 텐데. 말과 생각만 혁명이고 그것을 위해서 무얼 해야 하는지는 전혀 발언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기소장을 받기 딱 좋았을 지도 모른다. 솔직히 이건 그저 립 서비스잖아?&nbsp; 노래하기는 좋지만, 평평한 세상을 “어떻게” 만들자는 발언은 잃어버린 식어버린 운동시. 앙꼬 없는 찐빵. 오아시스 없는 사막. 불알 빠진 껍데기.<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279/3/cover150/893204459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2790312</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