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책을 읽거나 술 취해 있거나, 잔다. (Falstaff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술, 밥, 책, 음악</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ue, 15 Sep 2026 22:12:06 +0900</lastBuildDate><image><title>Falstaff</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295542772587509.jpg</url><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Falstaff</description></image><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추천할 만한 - [소금이 왜 바다에 있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517139</link><pubDate>Tue, 15 Sep 2026 04:2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51713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22139217&TPaperId=1751713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69/74/coveroff/k12213921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22139217&TPaperId=1751713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소금이 왜 바다에 있지</a><br/>브리기테 슈바이거 지음, 박광자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6년 06월<br/></td></tr></table><br/>.&nbsp; 작가 브리기테 슈바이거의 내력을 읽어보니 &lt;소금은 왜 바다에 있지&gt;와 딱 같다고는 할 수 없어도 상당한 부분이 섞여 있다. 이 책이 슈바이거의 첫번째 작품이어서 자신의 경험을 많이 포함시켰겠지. 브리기테 슈바이거는 1949년에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 프라이슈타트에서 출생했다. 우리가 아는 오스트리아의 대도시 빈과 짤스부르크 사이에 있는데, 직선 코스는 아니더라도 하여간 두 도시와 거의 비슷하게 떨어진 곳이다.&nbsp; 책의 내용과 비슷한 건, 아버지가 소도시의 유지였던 의사라는 것과,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해 심리학, 독문학, 영문학 등을 공부했지만 다음 해인 1968년에 결혼을 하는 바람에 때려 치웠고, 4년 만에 이혼했다는 거. &lt;소금이 왜 바다에 있지&gt;는 주인공 화자인 ‘나’의 결혼 당시부터 이혼이 종결될 때까지를 그리고 있다.&nbsp; 실제의 슈바이거는 1968년부터 72년까지 스페인 출신의 남편을 따라 마요르카 섬과 마드리드에서 살다가 73년 이혼하자마자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교육학을 공부한 반면에, 작품 속의 ‘나’는 결혼 이후에 줄곧 린츠에서 살다 이혼한다. 린츠? 출신지인 오버외스터라이히주의 주도이자 오스트리아 제3의 도시이며, 아름답기로 이름이 높아 모차르트가 자신의 서른여섯 번째 교향곡의 표제를 붙인 도시.&nbsp; 나는 린츠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니, 린츠를 발음하면 어딘지 밝은 기운이 나는 것 같아서, 좀 산뜻한 작품 아닐까 하는 기대도 했으나, 슈바이거는 생전에 책 속의 ‘나’처럼 우울증에 시달렸고, 신경정신과 쪽으로 질병이 있어서 2010년, 61세의 나이에 빈의 도나우 강변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단다. 투신 자살로 판정해 종결한 걸로 보인다. 책에서도 ‘나’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건 확실하고, 신경정신과 전문의가 입원을 권유할 정도는 아닌 약한 수준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 같다.<br>&nbsp; ‘나’의 결혼생활을 그린 작품이란 건 위에서 이야기했다. 첫 장면을 결혼식 날 아침에 시작한다. 가족은 할머니와 부모, 그리고 ‘나’. 이렇게 4인 가족. 의사이자 동네 유지인 아버지는 어제 이발소에 가서 이발도 하고 면도도 깔끔하게 했다. 대개 남자들이 그렇듯이 벌써 식장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지 한참이건만 엄마는 오래 시간을 끌면서 꽉 끼는 드레스의 지퍼를 올리기 위해 애를 쓰다가 간신히 잠글 수 있었다. 할머니는 시실리 화산에 관광을 다녀온 이후에 관절염이 심해져 이젠 계단을 오르내릴 때는 비스듬히 발을 디뎌야 한다. 그래도 시간에 맞춰 아래층으로 내려왔는데, 정작 새신부인 ‘나’는 여전히 2층 ‘나’의 방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상태로 침대에 발랑 자빠져버렸다.&nbsp; 남편 롤프. 아버지는 롤프가 참하고 괜찮은 녀석이라 하고, 어머니는 폴프를 보면 자랑스럽다는데, 할머니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얌전한 혼인이라고 말한다. 근데, 할머니의 삶의 지표인 얌전함과, 이 ‘얌전한 혼인’은 얌전한 결혼식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얌전한 ‘결혼생활’을 말하는 걸까? 책을 다 읽은 다음에 생각해보면 좀 헛갈린다.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다. ‘나’는 확실하게 얌전한 결혼식에 임하려 한다. 놀랍게도 1960년대 후반에 벌써 아무도 기대하지 못했는데, ‘나’는 말 그대로 남편이 될 롤프 외에는 성교를 해본 경험이 없다. 그러니 적어도 이쪽 방면으로만 말할 것 같으면 할머니가 바라는 대로 얌전한 신부인 건 맞는 말이다.&nbsp; 하지만 이 결혼에서 독자가 제일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주인공 ‘나’가 결혼식 하는 날 출발할 시간에 웨딩드레스까지 입은 상태에서 그냥 다시 침대에 벌렁 누워 버렸다는 거. 결혼식장에 가기 싫다는 말이다. 당신이 여성이라면 대부분 인생에 많아야 서너 번 밖에 없을 결혼식날, 웨딩드레스가 혹시라도 구겨질까봐 애달캐달 하는 게 정상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나’는 절대로 하느님을 믿지 않지만 혼례미사 때 신부神父한테 거짓말을 해버린다. 신부가 뭐라 중얼거리더니,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또는,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뭐 이런 질문이었겠지, 대답을 하라고 해서 얼떨결에 “예”라고 말해 버렸던 거다. 속마음은 “아니요”였음에도 그렇게 말했으니 틀림없이 거짓말, 십계명을 어긴 거다.<br>&nbsp; 롤프와 ‘나’의 친구 가운데 두 명을 소개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nbsp; 먼저 카를. ‘나’의 부모가 롤프에 대한 평가를 할 당시에 ‘나’가 전하는 부모의 의견을 말했더니 카를은 이렇게 말했다.&nbsp; “너네 부모님하고는 다르게 생각하지만 (결혼을 앞둔 너한테는) 노 코멘트.”&nbsp; 카를은 대학을 졸업하고 학생들에게 인권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 인권 관련해서 실제로 지역에 있었던 인물과 사건을 예로 들었더니 아이고 이런, 그날 이후부터 교사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외톨이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실제로 있던 일까지는 모르겠는데, 아직 직계가족이 생존해 있는 사람의 실명을 거론했으니 뭐 그럴 수도 있기는 하겠다. 카를은 시인. 자주 ‘나’에게 편지도 보내고 그러지만 그걸로 끝인 나이 많은 친구. 결혼을 하고 싶어하는 여성이 있어도 집안 반대가 심해 부부가 되지 못하니 그건 전적으로 카를이 알코올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카를은 작품이 끝날 때쯤 자진해 알코올 치료 병동에 입원하고, 퇴원 후 2년 동안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으면 애인과 애인 가족이 결혼을 허락할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다.&nbsp; 다른 한 명은 알베르트. 예전에 카를이 말하기를, 알베르트야말로 한 교실에 있는 게 창피하지 않은 유일한 친구, 라고 평가했다. ‘나’의 고종사촌, 고모의 딸 힐데와 연애를 했다. 힐데는 TV 아나운서를 꿈꾸었지만 그것도 딴따라라고 (1960년대니까) 집안에서 반대를 하는 바람에 깨끗하게 포기하고, 대신 크지 않은 집과 알베르트를 구입했다. 정말로 알베르트를 “구입했다”라고 슈바이거가 썼다.&nbsp; 그런데 문제는 ‘나’가 롤프보다 알베르트를 훨씬 전부터 더 마음에 들었다는 점.<br>&nbsp; 왜 ‘나’가 롤프와 멀어졌을까? 롤프는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 독자가 읽기에 그렇다는 것이지 정말 롤프의 마음이 그런 거란 말은 아니다. 롤프는 꽉 짜인 인생을 사는 인간형이다. 규격이 있으면 규격에 맞춰 자신의 삶 전체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사람. 이것도 나쁜 삶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나’하고는 극적으로 맞지 않는 취향인 걸 너무 늦게 알았겠지.&nbsp; 롤프는 공대를 졸업했다. 1학기를 다니다가 자신이 의학에 더 흥미를 느낀다는 걸 알았지만 끝내 공과대학을 졸업한 걸로도 모자라 박사학위까지 취득했으며, 그것도 아쉬워 디플롬 엔지니어 Diplom-Ingenieur학위까지 얻어, 오스트리아의 국책 철강회사에 다닌다. 그러면서 몇 년 후에 어느 직급으로 승진하고, 또다시 몇 년 후에 임원, 중역이 되고 등등의 계획이 다 있다. 하지만 두 개의 학위를 취득한 날 ‘나’는 괜히 썰렁한 기분이 들어 이제는 화요일 저녁엔 더 이상 그와 잘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을 정도이니 애초에 결혼을 하지 않아야 했던 것일 수도.&nbsp; 결혼 전에 어느 날, 롤프의 팬티가 심히 거슬려서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제 마법이 풀린 순간이었다. 마법이 사라지면 사랑은 어떻게 되지?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마법이 사라지면 사랑은 삶이 되고, 더 곰삭아서 정이 되는 거지. 원래 사랑의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건 다들 아시잖아? 사랑만 파먹고 살 수는 없어 다시 먹고 사는 삶이 이어지는 거고, 시간의 이끼가 부드럽게 껴서 “사랑보다 더 슬픈” 정이 돈독해져 평생 그걸로 사는 거지.&nbsp; 그러나 아직 19세, 너무 젊거나 어렸던 ‘나’는 몰랐다. 스무살이 되고, 스물한 살이 되고 더 나이를 먹어도 롤프는 그저 돈을 벌어오는 남자일 뿐. 반면에 ‘나’는 다니던 대학도 때려치우고 한 남자의 살림 도우미, 즉 식모이면서 벌어오는 돈을 사용하는 창녀. 근데 창녀한테는 포주가 있어야 하는 법. 좋다, 포주는 롤프, 네가 해라. ‘나’는 의사가 된 알베르트와 정신없이 외도를 시현하기에 이른다.&nbsp; 이 장면에서 ‘나’가 가사도우미와 창녀와 다를 바 없다는 걸 롤프에게 따지고 드는 일로 이 작품을 페미니즘 소설로 읽는 독자가 무척 많아 데뷔작임에도 출간과 더불어 오스트리아와 유럽에서 큰 선풍을 일으켰다는데, 그건 1970년대에 그랬다는 것이지, 지금 관점에서 보아도 페미니즘 소설로 읽힐까? 내가 읽기로는 그저 처음부터 잘못된 결혼이 망해가는 모습을 그린 소설인 것 같다. 롤프 입장에서는 애초에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사랑해 결혼하고, 어쨌거나 돈을 벌어와 복지를 주면서 결혼 초부터 계속 삐걱거린 여자를 만나 이마에 뿔이 돋는 결과만 얻은 남자. 이를 전적으로 주인공 화자 ‘나’의 시각으로 보니까 원래 밴댕이 소갈딱지를 가진 속 좁은 남자로 보이는 불운한 사람이다. 이이가 정말 불운한 이유는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하여 차마 밝힐 수 없어 아쉽다.&nbsp; 작품의 앞 부분을 읽으면서 그냥 그런 소설, 별점을 잘 주어도 셋 정도로 여겼다가, 후반을 읽기 시작했는데, 확 느낄 수 있던 것은 건조하면서도 공감을 전해주는 문장이 매력적이라는 거. 신경이 서서히 몰락해가는 과정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것 등등, 명작은 아닐지언정 한 번 읽어볼 만한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드릴 말씀은, 한 번 읽어보시라고.<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69/74/cover150/k12213921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697482</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한 번 읽고 말 책도, 지금 읽은 것이 인생의 마지막도 아닐, 필생의 책, 책 중의 책 - [일리아스]</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514905</link><pubDate>Mon, 14 Sep 2026 05: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51490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22833575&TPaperId=1751490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656/30/coveroff/k922833575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22833575&TPaperId=1751490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일리아스</a><br/>호메로스 지음, 이준석 옮김 / 아카넷 / 2023년 06월<br/></td></tr></table><br/>.&nbsp; 네 번째 읽는 &lt;일리아스&gt;일 듯하다. 중학생 때 처음 읽은 건 당시 수준으로는 꽤 두꺼운 책으로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목동 파리스한테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묻는 것부터 시작해 트로이 목마 사건에 이은 멸망까지 망라했으니 호메로스가 아니고 트로이 전쟁과 그리스 신화 같은 것을 소년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기획물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그 이야기가 재미 있어서 밤을 꼴딱 세우지는 못해도 늦은 밤까지 책을 들고 앉았던 것이 기억날 정도이니 처음부터 나는 &lt;일리아스&gt;에 폭 빠졌던 것이 틀림없다. 성인이 된 이후에 천병희와 유영의 번역서를 거쳐, 지금 호메로스 서사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따고 현재 방송통신대학 교수로 재직중인 이준석의 번역으로 다시 읽었다.&nbsp; 하지만 최근에 읽은 &lt;일리아스&gt;라고 해도 족히 10년은 넘어, 이제 이 책의 스토리는 삼천만의 기본상식이 되었을지언정 사실 정작 읽으려고 하면 무수하게 등장하는 신과 사람과, 특히 등장인물들의 전사前史에 관한 내용을 알지 못하면 지독하게 진도가 나가지 않을 터인데, 다행스럽게도 지난 10년 사이에 그리스의 다른 고전, 예를 들어 에우리피데스, 아이스퀼로스, 아리스토파네스 등을 통해 각종 버전의 트로이 전쟁 전후사에 대해 조금의 이해를 마련해 두어, 이번 이준석의 번역서를 읽으면서는 여간해서 각주를 읽지 않아도 무리가 별로 없었다. 이건 정말 기분 좋은 경험일 수밖에. 이 기분 좋은 감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오히려 장면, 단락, 문장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읽게 되어, 24권 754쪽을 읽는데 사흘 반을 사용했다. 문장마다 이 문장이,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가 인물의 어떤 전사, 또는 후사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지 음미할 수 있는 것, 이건 일종의 자잘한 기쁨이었을까?<br>&nbsp; 책을 읽자마자 스마트폰 앱 ‘북적북적’에 별 넷을 기록한 건, 일개 하찮은 독자에 불과한 내가 서양 문학의 고전 가운데 고전인 위대한 호메로스의 작품을 별 하나라도 훼손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고, 기원전 5세기에 나온 창작물, 그리하여 이후 2천년 이상 수많은 예술작품의 영혼의 기원이 되어왔던 이야기라는 측면보다, 현재의 시점에서 본 ‘전쟁소설’ 또는 ‘전쟁 서사시’라면, 즉 호메로스라는 이름값을 빼고, 완전히 근현대인 입장에서 작품으로 읽었으면 어땠을까, 궁리했다는 뜻이다.&nbsp; 도저히 그럴 수는 없지만 &lt;일리아스&gt;에서 신화를 제거하고 오직 인간들이 만드는 피 터지는 전쟁으로 본다면, &lt;일리아스&gt;는 오직 힘세고, 빠르고, 칼과 활을 잘 쏘는 영웅들의 싸움으로 일관한다. 갈등의 가장 큰 축은 그리스 군과 트로이아 군 사이의 다툼에 있는 것보다 더 크게, 작은 전투의 전리품이기도 했던 여자 포로를 빼앗아가고 뺏긴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사이에 있다. 10년을 끌어온 전쟁의 명분 역시 트로이아의 왕자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한 파리스가 스파르타를 다스리는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를 꼬드겨 데려감으로써 그리스 연방에게 수치를 주었다는 거다. 즉 전쟁 발발부터 이들은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은 명분으로 시작한다.<br>&nbsp; 여기에 신들이 개입한다. 그리스 쪽에는 헤라, 포세이돈, 이 막강한 신들을 포함해 아테네와 헤파이스토스가 붙고, 막강한 헤라, 포세이돈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중량감이 떨어지는 아폴론,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아레스 등 A자로 시작하는 신들이 합세한다. 그리고 신들의 신 제우스. 이 양반은 겉으로 보면 트로이아를 슬쩍 미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킬레우스의 엄마이자 바다의 신 네레우스의 딸인 테티스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뿐, 은근히 그리스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nbsp; 왜 신들을 언급하느냐 하면, 작품 속에서 신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것 때문. 트로이아 군을 함빡 이끌고 그리스 선단 바로 앞까지 진출해 끝이 휘어진 그리스 배를 향해 횃불을 던지며 화공을 도모하는 트로이아 최고의 영웅 헥토르. 그가 쏟아지는 화살과 창날 속에서도 큰 부상을 입지 않고 선봉에 서서 숱한 그리스의 소영웅들을 도륙낼 수 있었던 건, 전쟁의 신 아레스가 활기를 부어 넣어주었기 때문이고, 부상을 입어 여차하면 마지막 치명적 일격을 당할 순간에는 아폴론이 짙은 안개를 부어 넣어 위기를 모면하게 해주었다, 하는 식으로, 작가가 스토리를 만들어가기에 가장 편한 장치를 마련해주는 역할을 한다. 에우리피데스의 전매특허였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하고 비슷하지?&nbsp; 작품의 대전환의 계기가 되는 것이 아킬레우스와 함께 전쟁에 나온 파트로클레스의 죽음.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레스의 죽음을 부여잡고 슬피 울다가 천추의 원수가 된 헥토르를 죽이기 위하여 잠도 안 자고, 밥도 한 그릇 안 먹고, 물이나 포도주 한 잔도 안 마신 상태에서 엄마 테티스 여신이 절름발이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한테 부탁해 가져온 투구와 갑옷을 떨쳐 입고 죽음을 모르는 명마가 이끄는 마차에 오른다. 근데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으며 잠도 안 잔 필멸의 인간이 이런 상태로 전투를 할 수 있겠어? 이때 제우스가 등장한다. 모든 신의 아버지 제우스는 전령을 통해 신들의 음식인 넥타르 등의 즙을 짜 아킬레우스의 입에 흘려 넣는다. 그러니 아무리 끼니를 걸러도 사기 충천해 단칼에 트로이아의 영웅들을 도륙할 수 있었던 것이다.<br>&nbsp; 그런데 이번에 &lt;일리아스&gt;를 읽으면서 내가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던 동아시아의 소설이 있었으니 호메로스보다는 1천8백년 이후 사람인 나관중이 쓴 &lt;삼국지연의&gt;. 월탄 박종화 번역의 &lt;삼국지&gt;를 읽은 것이 우연하게 첫 &lt;일리아스&gt;를 읽은 해 여름방학 때였다. 이후 &lt;삼국지&gt; 번역본도 꽤 읽었다. 최근 번역은 민음사에서 최고 발행부수를 자랑하다가 지금은 판권계약이 해제된 이문열 평역. 번역과 평역은 많이 다르다. 월탄 번역에서는 황건적의 두령 장각이 환술, 요술 같은 것을 사용해 숱한 야수들을 불러 적진을 향해 돌진하게 만드는 반면, 이문열 평역은 해당 부분을 적절하게 자신의 시각으로 바꾸어 원본과 다른 장면을 만들어 낸다.&nbsp; 아울러 월탄 번역에서는 다분히 도교적 장면도 속출한다. 도교? 맞다. 아니, 맞는 거 같다. 하도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듯하다. 이런 장면이 &lt;일리아스&gt;에서 신들의 출현과 뭐가 다르냐, 하면 별로 할 말은 없지만, &lt;삼국지&gt;에서 환술, 요술과 도교적 상상의 세계는 말 그대로 조미료 수준이다. &lt;일리아스&gt;에서 신들이 하는 역할을 &lt;삼국지&gt;에서는 누가 할까?&nbsp; 놀랍게도 군사軍師라고 일컫는 전략가의 몫이다. 조조한테 탈출한 유비가 관우, 장비를 만나 유표한테 몸의 의탁하자, 유표는 작은 신야성을 맡겼는데 여기서 만난 거의 최초의 전략가가 서서.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는 조조군의 대군이 짓쳐오니 서서는 긴 장대에 낫 비슷한 것을 매달아 유비군을 갈대밭 속에 숨겨 놓았다가 조조군이 행군할 때 적군의 발목을, 발목만 끊어 놓는다. 이거 그냥 두고 갈 수도 없잖아. 죽지 않고 번히 살아 있으면서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전우를 어떻게 내버려둘 수 있겠느냐고. 그리하여 어쨌거나 승리 또는 조조군의 진격을 조금 멈춘 유비군은, 조조의 계략에 의하여 서서를 조조에게 넘길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른다. 조조의 땅에 사는 늙은 서서의 엄마가 아들한테 자신을 보살피러 오라고 당부하는 거짓 편지를 보낸 거다. 덕의 사나이라고 지칭하는 유비가 어찌 안 보낼 수 있느냐는 말이지. (서서의 모친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달려온 아들의 어리석음을 크게 꾸짖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한다.) 서서는 길을 떠나며, 죽어도 조조를 위하여 꾀를 내지 않을 것임을 맹세한 다음에 걸출한 전략가를 추천하니 그 사람이 바로 제갈량. 이후 &lt;삼국지&gt;는 유비, 조조, 손권 또는 유비, 관우, 장비의 무대에서 제갈량 1인 주인공의 극으로 완벽하게 전환한다. 진짜 제갈량의 독무대. 실제로 제갈량이 죽은 이후 &lt;삼국지&gt;는 무지 지루해진다. &lt;삼국지&gt;의 진짜 영웅은 힘세고, 칼과 창, 활에 능숙하며, 적장의 머리를 단칼에 베는 장수들이 아니라 전략가들이라는 점을 지금 강조하고 있는 거다.&nbsp; 하지만 &lt;일리아스&gt;에서는 전략가들의 지략 대결을 전혀 볼 수 없다. 조조 측에서는 가후, 정욱, 순욱, 순유. 유비 측의 제갈량, 방통, 마량. 손권 측의 주유, 노숙, 육손. 이런 인물들은 그리스의 여러 도시에서도, 불쌍한 프리아모스 왕의 수하에서도 딱 한 명씩 밖에 없다. 그리스 군의 네스토르와 트로이아 군의 플뤼다마스. 하지만 이들은 전력가라기보다 예언자에 가깝다. 그나마 그리스 군은 네스토르의 조언에 귀를 기울리건만, 트로이아는 현명한 예언자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전통이 있다. 그래서 망하는 것이지만, 위대한 호메로스는 이것이 다 정해진 운명을 따르는 순서로 생각하는 것 같다. &lt;일리아스&gt;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필멸의 인간이 맞을 운명. 이건 신의 뜻도 아니다. 신조차 이 운명을 어길 도리가 없었으니, 이 그리스 신들의 전통은 수백년이 지나고 등장할 기독교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을 걸?&nbsp; 하여간 전략이 없는 전쟁소설을 읽는 건 그리 매력적이지 못하다. 오직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주먹과 깡통 머리통만 가진 영웅들의 난투극. 저 앞에서 말했듯 스마트폰 앱 북적북적에서 별 넷을 준 이유, 즉 별 하나를 제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전쟁에서의 전략의 부재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매복도 없고, 화공도 없고, 협공도 없고, 동맹군 간의 이간도 없는 전쟁극.&nbsp; 물론 호메로스의 작품을 이렇게 볼 필요는 없겠다. 그리고 &lt;일리아스&gt; 역시 딱 한 번 읽고 내버려 둘 작품도 아니다. 이 책 한 권을, 특히 동양의 독자가 한 번 읽고 그걸 기념할 수 없을뿐더러, 만일 나처럼 소년을 위해 읽히기 편하게 편역한 책이 아니고, 천병희나 이준석의 원본 번역을 처음 접했다면, 7백쪽이 넘는 분량을 한 방에 읽기도 쉽지 않을 듯하다. 그래도 읽는 게 훨씬 좋다. 이후 독서량이 늘어감에 따라 저절로 트로이아 전쟁 앞뒤 이야기를 보탤 수 있게 될 것. 그럴 때 다시 읽으면 첫번째보다 훨씬 맛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nbsp; 말이 필요없는 명작. 한 번 읽고 말 책도 아니고, 지금 읽은 것이 인생의 마지막 &lt;일리아스&gt;도 아닐 필생의 책일 수도 있는, 책 중의 책.<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1656/30/cover150/k922833575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6563045</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괜히 핑계를 대자면… - [무덤의 천사 - 이디스 워튼 기담집]</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508640</link><pubDate>Fri, 11 Sep 2026 04: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50864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31378&TPaperId=1750864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254/94/coveroff/893743137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31378&TPaperId=1750864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무덤의 천사 - 이디스 워튼 기담집</a><br/>이디스 워튼 지음, 김지혜.정윤희 옮김 / 민음사 / 2025년 09월<br/></td></tr></table><br/>.&nbsp; 19세기를 달리던 영미 여성 작가들 가운데 고딕 작품을 쓴 사람이 무척 많다. 이디스 워튼도 마찬가지. 전에도 워튼의 고딕 소설을 읽은 거 같은데 잘 생각나지 않는다.&nbsp; 《무덤의 천사》를 재미있게 읽었다. 기담奇談이라기보다 고딕이 어울릴 정도의 작품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고, 이디스 워튼이 괜히 이디스 워튼이 아니라서 우리말로 읽는 문장도 물론 역자의 개입이 필연적이겠지만 썩 마음에 들었다.&nbsp; 하지만 독후감을 쓰려는 지금, 작지 않은 문제가 있으니, 단편을 모은 소설집은 가끔 장편으로 읽는 도중에 곁다리로 읽는 수가 있다는 점. 특히 이번 책처럼 기담이나 장르 단편일 경우엔 여지없이 그렇다. 날은 갈수록 더워지고 집에서 메모까지 해가면서 책 읽다가 마나님한테 걸리면 “영차, 조금만 더해, 하바드 가야지!” 놀림이나 당할 거 같아, 장편은 도서관에서 읽고 집에서는 독후감을 쓰고 남는 시간에 (장르) 소설집을 읽는 경우가 흔한데, 이것도 술 한 잔 마시는 날이면 독후감이고 소설집이고 간에 하루 이틀 미루어지는 게 또한 문제다.&nbsp; 《무덤의 천사》도 읽기 시작해 닷새 만에 마지막 작품을 다 읽었는데, 독후감을 쓰려니, 읽을 때는 분명히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건만, 막상 감상을 쓰려고 하니 쓸 게 읎네, 읎어.&nbsp; 이거 마음먹고 오랜만에 읽은 이디스 워튼이건만 참 면목이 없다. 그렇더라도 출판사 제공 책 소개 같은 걸 가져올 수는 없으니 차라리 애초에 이쯤에서 별점 4, 라고 간단히 말을 마치는 것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핑계지, 핑계.<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254/94/cover150/893743137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2549493</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오르페오가 왜 하계로? - [떠나지 못하는 여자 - 린다 B를 위한 진혼곡]</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506439</link><pubDate>Thu, 10 Sep 2026 05: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50643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76987&TPaperId=1750643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6396/27/coveroff/895467698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76987&TPaperId=1750643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떠나지 못하는 여자 - 린다 B를 위한 진혼곡</a><br/>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02월<br/></td></tr></table><br/>.&nbsp; 얇은 장편소설. 문학동네가 신공을 펼쳐 널럴하게 편집하고도 240여 쪽에 불과하지만,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예전 독재체제 하의 알바니아에서 사는 일. 여기에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가 다시 한 번 우정 출연한다.&nbsp; 먼저 죽은 아내를 다시 살려내기 위하여 지하세계로 내려간 오르페오 이야기. 둘이 깨를 볶으면서 살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가 너무 금슬이 좋아 저 올림푸스에 사는 신들 기분이 조금 언짢을 정도였나 보다. 질투의 신이 이를 배 아파해서 뱀 한 마리한테 주문을 걸어 에우리디케의 발뒤꿈치를 칵 깨물게 시킨다. 당연히 에우리디케는 30분도 넘기지 못하고 하데스의 나라로 떨어지고 말았지. 슬픔에 겨운 오르페오는 온 종일 수금만 켜고 세상을 돌아다니니 온갖 짐승과 신들도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려대는 바람에, 좋아, 한 번 기회를 주지, 오르페오로 하여금 땅 아래로 내려가 에우리디케를 데려올 수 있게 딱 한 번의 배려를 해준다.&nbsp; 오르페오가 그 깜깜한 지하세계로 어떻게 내려가? 그때 수금과 함께 가져간 것이 겨우살이. 겨우살이 가지 끝에서 빛이 반짝거렸다나, 뭐라나. 하여간 이때 오르페오의 전기를 읽은 서양 사람들이 어처구니없이 성탄절에 현관을 이 겨우살이로 장식을 하는 거란다. J.G 프레이저가 쓴 &lt;황금가지&gt;에 나오는 이야기.&nbsp; 하여간 지옥문까지 내려갔더니 입구를 지키고 있는 짐승이 대가리 세 개 달린 개 케르베로스. 헤라클레스가 아닌 이상 케르베로스 뒷다리에 된장을 바를 힘이 있는 인간은 없는지라, 오르페오는 현명하게도 자기 주특기를 살려 수금을 연주해 깊은 잠에 들게 해놓고 드디어 하데스를 만나 여차저차하니 에우리디케를 내 놓으슈, 단판을 지었다. 그랬더니 이제 전형적인 그리스 신화에서의 신들의 장난을 시작한다.&nbsp; 좋다. 데리고 땅 위로 올라가라.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다. 천 개가 조금 넘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동안 너 오르페오는 뒤를 돌아 에우리디케를 쳐다보지 말아라. 만일 뒤돌아보면 네 아내는 다시 지하 세계로 거꾸로 떨어져 박힐 것이다.&nbsp; 여기까지는 다 아시지? 이제 결말. 계단 기어오르면서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오한테 “넌 나 안 보고 싶었니? 여기까지 쳐 내려와서 어떻게 네 마누라 얼굴 한 번을 바라보지 않는 거니?” 바가지 득득 긁는다. 아내의 바가지 반, 아름다운 아내의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반. 그래서 기껏 다 올라가놓고 막바지에 이르러 오르페오가 고개를 휙, 돌리고,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목뼈, 경추가 비틀리는 순간, 에우리디케는 다시 명부로 똑 떨어진다는 얘기.&nbsp; 근데 내가 좋아하는 건 이탈리아의 소설가 체사레 파베세의 이야기.에우리디케가 바가지를 팍팍 긁으니, 이것 참, 앞으로 죽을 때까지 이 바가지를 계속 긁히며 살아? 에우리디케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다시 생명을 얻는다 해도 어차피 또 죽어야 할 텐데 죽을 때의 고통을 한 번 더 겪으라는 말이심?&nbsp; 오르페오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nbsp; “여기서 끝내자!”&nbsp; 하면서<br>&nbsp; &lt;떠나지 못하는 여자&gt;에 출연하는 에우리디케 정도의 여성은 작품의 부제 “린다 B를 위한 진혼곡”에서 이름을 밝힌 린다. 린다가 극작가이자 주인공인 루디안 스테파를 흠모하는 건 틀림없다. 처음에는 작가와 팬 수준 정도였다가, 점점 루디안의 여자가 되는데, 아니다. 작품의 스토리와 보조를 맞추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낫겠다.&nbsp; 첫 장면. 주인공이자 화자 ‘나’ 루디안 스테파가 당 위원회의 소환 명령을 받아 출석하러 간다. 그가 생각하기를 아마도 공연 허가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희곡 작품에 뭔가 문제가 있어서, 또는 어린 연인 마제나와의 관계 때문 아닐까 싶다. 때는 1980년대, 40년이 넘게 통치한 알바니아의 독재자 앤베르 호자 시기. 알바니아 땅에서 벌어지는 어떠한 일이라도 정부가 모르는 게 없던 시절. 그래서 연인 마제나와 싸운 것도 영 께름칙하다. 모든 커플이 그렇듯이 도무지 말로 따져 마제나를 이길 수는 없고, 가뜩이나 급한 성질에 뭐라 표현을 하긴 해야겠어서 그냥 한 방 콱 쥐어박았으면 좋겠는데 차마 그럴 수 없어 일단 머리채를 휘어잡았다가, 이봐, 정신차려, 손찌검은 절대 안 돼, 하는 정언명령이 들리는지라, “넌 정신분열증 환자야! 아니면 스파이든지!”라고 한 것이 언짢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마제나가 경찰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루디안이 나한테 스파이라고 했어요, 고발을 하면, 이거, 농담하는 게 아니고 정말로 큰일 날 수도 있는 거다.&nbsp; 게다가 진짜 연인도 있었다. 얼마 전부터 여자 의사하고 비혼으로 살고 있었는데, 여자가 오스트리아 학회에서 수면기술, 의학용어로 하자면 마취기술 개선을 위한 워크샵에 참석하러 떠나는 걸 루디안이 극구 반대했다면 결혼까지 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아, 이 의사가 다시는 책에 등장하지 않는 걸 보니, 아마도 오스트리아나 서유럽의 한 나라로 망명을 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nbsp; 이런 여자 관계 때문 말고도 공연을 기다리는 희곡 속에 유령이 등장하는 것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의심스럽다. 알바니아는 엄연히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행해지는 자유국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심해질수록 인민들의 자유는 더욱 커진다는 진리를 세계에서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나라, 알바니아. 근데 이런 자유의 나라에서 감히 극중에 유령이 등장해? 유물론의 나라에서 말이지? 그런 같은 맥락에서 루디안, 너 혹시 신도 믿는 거 아냐? 이렇게 따지면 루디안이 비록 완벽하게 무신론자이기는 하지만 도대체 변명할 마땅한 거리가 없을 수도 있다. 심문관이 우기면 말인데.&nbsp; 인민의 모든 행위를 알고 있는 정부가 불렀으니 분명 곱게 보내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믿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다. 잘 나가는 극작가거든.<br>&nbsp; 이러저런 생각을 하며 도착한 당 위원회. 그럼 뭐가 문제였을까?&nbsp; 저 까마득한 시절, 지금부터 4~50년 전 알바니아가 군주제였던 때 옛 왕실 측근 집안 출신의 아가씨가 자살을 해버렸다. 지금은 안 그렇지만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나라의 유서 깊은 가문 아가씨가. 이 집안 모든 가족들은 오랜 세월 지방도시에서 유배중이다. 유배? 좀 센 단어구나. 소련에서의 유배와는 달리 그냥 한 지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정시키는 상태. 군인들 위수구역 이탈금지 정도로 생각하면 딱이다. 근데 자살한 젊은 아가씨의 책, 최근에 공연을 마친 루디안 스테파의 희곡 작품을 실은 책에, 공연을 했던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에 가지도 않았음에도 그 책에 작가 루디안의 자필 서명이 쓰여 있다. “린다 B에게. 저자의 추억을 담아.”라고 쓴 헌사와 함께.&nbsp; 서명을 해 줄 수 있고 당연히 팬 미팅하면 습관적으로 해주는 헌사도 써줄 수 있건만, 문제는 “저자의 추억을 담아”라는 글귀. 헌사를 읽어보면 누구나 루디안과 자살한 린다 B 사이에 공통의 “추억”이 개입되어 있는 거다. 그러니 당 위원회, 일종의 정보국에서는 옛 군주제 정권의 핵심 가문의 일원과 인기 극작가와의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지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고 봐야 마땅하다, 라고 당 위원회의 판사 등 당의 사람들은 주장한다.&nbsp; 어떻게 루디안의 책이 린다 B의 손에 들어갔을까? 린다가 루디안의 팬이라는 건 앞에 얘기했고, 그이 공연을 보고 싶고, 책도 읽고 싶은 린다는 고등학교 동창한테 연극도 보고, 책도 사서 사인까지 받아 달라고 부탁해 그렇게 한 거다. 이 와중에 그 염병한 친구년이 루디안한테 접근해 안다리후리기를 걸어 자빠뜨렸으니 친구가 누군고 하니 지금껏 시간 날 때마다 함께 침대에 오르는 어린 미제나.&nbsp; 그러니까 미제나는 린다가 보기에 자신과 루디안 사이의 매개인이다. 당장은 아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떻게 말하게 되었으니, 미제나와 루디안 사이의 몸 접촉 모두를 이야기한 건 아니고, 키스했다, 정도. 린다와 미제나 둘 모두 레즈비언 성향이 1도 없지만 루디안의 입술이 닿은 미제나의 입술에 린다는 입을 맞춘다. 루디안이 린다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고 하니까 린다도 미제나의 단추를 풀고 가슴을 만져보고, 자기 단추를 풀어 미제나의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대본다. 이런 방식으로 미제나를 통해 루디안과의 접촉을 상상해보는 거겠지.&nbsp; 린다는 미제나가 건강검진을 하러 갈 때 함께 따라가서 유방 촬영을 한다. 유방암이 걱정스러워서? 아니다. 유방암에 걸리고 싶어서. 걸렸으면 좋을 거 같아서. 그 정도 되어야 지방도시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해 루디안이 사는 수도 티라나로 갈 수 있으니까. 이런 린다 B가 죽었다. 자살해버렸다.&nbsp; 그러면 하데스가 통치하는 하계下界로 들어가버린 린다 B를 위하여 누군가가 수금을 켜면서 케르베도스를 잠재우며 땅 아래로 내려가야 하겠지? 이런 방식으로 지난 엔베르 호자 정권 시절의 알바니아를 비틀어버리는 이스마일 카다레. 근데 읽는 내내 의아했던 건, 카다레가 그리스 신화를 자주 가져다 쓰는 건 알겠는데,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는 조금 무리 아니었나?<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6396/27/cover150/895467698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63962753</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거미줄, 실핏줄 같은  섬세함과 사색의 푸가, 그게 전부 - [눈부신 안부]</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504211</link><pubDate>Wed, 09 Sep 2026 04: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50421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99375&TPaperId=1750421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688/62/coveroff/8954699375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99375&TPaperId=1750421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눈부신 안부</a><br/>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05월<br/></td></tr></table><br/>.&nbsp; 40대에 접어든 이해미는 헝가리 출신 사진작가 안드레 케르테스의 전시회장에 들어섰다. 한달 전까지 만해도 제법 알려진 신문사의 기자로 재직하던 해미는 저널리즘이 정체가 어떤 모습인지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염증을 견디지 못하고 일단 다음 직업에 대한 준비 없이 무턱대고 신문사에 사직서를 던지고 나와 버린 것. 우연히 이 때 안드레 케르테스의 사진전이 열린다는 걸 알고 거의 한 달째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출근 도장 찍듯 전시관에 가서 폐관시간까지 똑 같은 사진을 관람하던 차였다.&nbsp; 이곳에서 우연히 우재를 닮은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 해미한테 케르테스의 사진을 처음 소개해준 대학 동기생. 해미는 사회학과를 다니고, 우재는 약학과를 다녔을 때 문학 동아리에서 만났다. 이십대 초반. 서로 들뜨고 갈급했던 시기. 그러나 연인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우재는 2학년 겨울방학 때 입대했고, 연상의 연인에게 실연을 당했으며 제대해 복학할 당시 해미는 모든 학부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눈 앞에 둔 상태였다. 함께 캠퍼스에 있을 때에도 둘은 서로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거나, 적어도 두 명 가운데 하나는 연애를 하고 있어서 그저 인연이 안 되는 괜찮은 애 정도로 여기고 말았을 수도 있었겠지. 그게 벌써 근 20년 전이다.&nbsp; 오랜 세월 만나지 않았으면 사실 아는 척을 하더라도 짧은 인사 후 이어갈 말이 떠오르지 않는 서먹함이 뒤따르는 법. 미해도 우재도 벌써 이 정도는 이해할 나이. 미해는 전시장에서 나온다. 근 한 달 동안 매일 들른 전시관 현관 앞에서 오늘따라 전시회 포스터를 오래 바라보고 있던 이미해. 작품에는 안 나오지만 왜 하필이면 우재를 만난 오늘 늦은 오후에 그동한 숱하게 스쳐 지나가기만 하던 포스터를 유심히 보고 서 있었을까? 벌써 서먹서먹한 사이가 됐고, 연락도 거의 없었던 젊은 시절 조금 가까이 지낸 동아리 친구 우재와의 시간을 만들어볼 속셈이 정말 하나도 없었을까? 하여간 얼마 지나지 않아 우재가 전시관에서 나오고, 미해를 발견하고, 혹시 이해미? 아는 척에 이어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My Funny Valentine”을 들으며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 S의 결혼식이었나?”로 시작해서 “아, 너는 결혼했어? 소식을 들은 게 없어서 못 갔는데, 혹시 했다면 미안.” 이러저러한 얘기 끝에 둘 다 공히 마흔 살에 접어들도록 아직 미혼 상태인 것을 확인한다.&nbsp; 마흔살이 되면 고향에 가서 약국을 열겠다는 어릴 때부터 우재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곧 제주로 내려가 약국을 개업하겠다는 말은 이 모든 일상적 이야기의 뒤에야 할 수 있었겠지. 미해도 제주에 있는 우재의 집에 가 보았다. 기말시험이 끝난 학기 말에 동아리 선배들이 MT 겸해서, 매번 가던 대성리나 새터 같은 곳에 질렸다고 돌발적으로 제주에 있는 우재의 집으로 가보자고, 돌발적인 결정을 내렸고, 그 기회에 미해 역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가 보았다. 그때 알았다. 제주의 이국적인 야자수 가로수들이 사실은 원산지가 제주가 아니고, 제주를 관광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저 민주공화당 시절의 정치인이 야자수 묘목을 도입해 제주에 심은 것이라는 것을.&nbsp; 독자는 이때까지 눈치채지 못한다. 외국의 나무가 제주도에 입식되어 그곳에서 몇 십년 터를 잡고 제주의 한 모습으로 고착했으니 이제는 외래 야자수도 제주의 것이 아닐 수 없다는 신호를 준 것이라는 점을. 그저 마흔 살의 해미와 우재가 늦게나마 만나서 관계를 이루어갈 수도 있겠다는 느낌만 받을 정도로 프롤로그는 끝난다.&nbsp; 그럼 여태까지, 독후감의 반 정도를 프롤로그 이야기하느라 소비한 건가? 그렇다.<br>&nbsp; 해미의 가족은 이제 부모와 해미, 해미의 동생 해나, 이렇게 네 명 남았다.&nbsp; 해미가 열한 살이었을 적에 가족은 부천에서 서울로 이사했고, 아이들도 당연히 전학을 해야 했다. 이때는 해미한테도 언니 해리가 있었다. 해리는 해미한테 전학 왔다고 쫄지 말라고, 턱을 수평 이상으로 들고 다니라는 의미로 말했다.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해미가 애들 사이의 기준이 될 거라면서. 정작 언니는 벌써 중학교에 다니지만. 언니 해리는 공부도 잘하는 범생이. 학교에 결석하면 안 된다는 엉뚱한 집념에 싸인 20세기형 모범생 언니한테 해미는 종종 “아파도 조퇴하겠다는 말도 못하는 바보 멍청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이때가 아마 1994년 12월 7일이었고, 가족이 이사와 살던 곳이 아현동 근처였던 모양이다. 학교 수업 도중 교사에게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말한 모범생 해리한테 담임은 얼마나 아프면 모범생 해리가 조퇴를 신청할까, 안쓰럽게 생각해 곧장 이를 허락했고, 학교를 나온 해리가 오후 두시 50분경 도시가스 저장고 부근을 지나던 때 갑자기 굉음과 함께 저장 가스가 폭발하는 바람에 부근에서 사망하거나 실종된 50명 가운데 한 명이 돼 버리고 말았다.&nbsp; 공부도 잘하고, 마음씨도 곱고, 집안에서도 좋은 맏이였던 딸이 갑작스럽게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된 후부터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균열이 발생했다. 이건 어떤 면에서 정상적인 결과인데, 당연하다는 말이 아니고, 사고와 상실을 당한 가족들 사이에서 흔하게 발생하는 서로에 대한 미움과 책임 전가가 부부 사이의 끊이지 않는 격렬한 싸움으로 변질된다는 뜻이다. 숱하게 많은 부부가 이 비슷한 일 때문에 갈라서고, 그보다 더 많은 가정이 오랜 시간의 고통 속에서 어찌어찌 지내다가 세월과 함께 기억이 흐려질 때까지 질긴 삶을 이어간다.&nbsp; 해미네 가족도 그랬다. 엄마와 아빠는 극렬하게 부부싸움을 벌이기 시작했고, 둘 사이의 크레바스는 도무지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부부는 헤어지기 직전에 이혼만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공무원이었던 아빠가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청에 부임 신청을 해 받아들여졌고, 독어교육을 전공한 엄마는 신학 석사 학위 취득을 목표로 이제 둘 남은 딸들과 독일의 대학도시인 G시로 떠나 2년 동안 지내기로 했다. 물론 해미 친가에서는 말도 많았다. 죽은 맏딸의 보상금으로 엄마가 딸들 데리고 독일에 가서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가족을 해체시키려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친척의 시각으로는 충분히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아빠가 나쁜 남편은 아니라서 이런 말이 쑥 들어가게 만들었던 모양이다.<br>&nbsp; 엄마가 비록 대학도시이기는 하지만 하필이면 소도시 G시를 고른 건,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엄마의 큰언니 오행자 박사, 해미한테는 큰 이모가 G시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형제는 나이 순서대로 이모, 쌍둥이 외삼촌 둘, 그리고 막내로 엄마가 있었다. 전라남도에서는 아쉽지 않게 먹고 살던 외갓집의 맏딸, 엄마는 언니가 한 명이라 그냥 언니라고 부르면 될 텐데 꼭 큰언니라고 불러 해미 역시 큰이모라 하는 것이 입에 붙은 이모. 전남 지역에서는 손꼽히게 공부를 잘해 수재라고 불렸던 이모는 오래 전부터 독일에서 (독자가 보기에 아마도) 작은 내과 의원의 개업의인 듯했다.&nbsp; 그러나 시작은 미미했으니, 오행자 큰이모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갑자기 외할머니가 중병에 들어 전라남도 강진 부근의 넓고 넓은 들이, 외할머니의 병원비로 다 날아가버리기 시작했는데, 아직 우리나라에 의료보험이 없던 시절, 집에 오래 가는 병자가 한 명 생겼다 하면 집구석 거덜나는 건 오직 시간 문제였을 뿐이다. 우리 집구석도 이런 집 가운데 하나라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그렇게 망가진 집안은 아주 회복할 수 없거나, 비슷한 수준에 다시 오르기 위하여 적어도 두세 세대가 필요한 거 같다.&nbsp; 한 순간에 거덜난 집구석에서 맏이로 큰이모가 선택한 것은 이제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서독 파견 간호사, 간호조무사가 되어 비행기를 타는 일. 큰이모는 독일에서 거구의 독일 환자들의 대소변을 받아내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직무 관련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아 간호조무사에서 정식 간호사를 거쳐 계속 의학공부에 몰두, 드디어 내과 의사가 될 수 있었다.&nbsp; 그리하여 아마도 1995년, 미해가 열세살 겨울부터 열다섯 살 겨울이 될 때까지 미해는 독일 G시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 책의 절반 이상이 이 시절 독일 G시에서의 일이며, 특히 독일 파견 간호사 및 간호조무사 출신 여사님들과 그 가족의 이야기로 꾸몄다.<br>&nbsp; 해미와 동생 해나는 독일에서 자연스럽게 마리아 이모의 딸이자 반half독반한 혼혈 레아, 한 살 위 한국계 독일인 한수와 친구가 되고, 해미와 해나도 독일어를 능숙하게 쓸 수 있는 수준이 되지만, 스토리의 핵심은 뇌종양 전력이 있는 간호사 선자 이모의 첫 애인 KH를 찾는 일이다. 언제 뇌종양이 재발해 생을 마쳐야 할 지 모르는 말수 없는 억척어멈 선자이모의 아들 한수는, 엄마가 죽기 전에 이미 떠난 파독 광부 출신 아빠가 아니라 엄마가 십대 시절 사랑했던 KH라는 이니셜의 연인을 찾아, 가능하다면 독일로 초청해 한 번이라도 만나게 해주고 싶다. 착한 아들 답게 간절히 바란다.&nbsp; 그리하여 한수와 레아, 그리고 미해가 일종의 탐정 놀이 비슷하게 선자 이모의 첫사랑 KH를 찾는 여정을 담고 있다. 이 여정은 해미가 열세 살이었던 1994년부터 시작해 마흔 살인 2020년 경까지 계속된다. 20여 년 동안 찾았다니까 결국 문제의 KH, 이미 고인이 된 선자이모의 첫사랑이자 벌써 노인이 된 KH를 찾게 된다는 말이지? 그렇다. 독자는 이제 해미가 거동마저 불편한 KH를 만나고 그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까지 모두 본 다음에, 프롤로그에 이어 다시 에필로그에서 각본대로 해미가 우제를 만나는 장면으로 책을 덮게 된다.&nbsp; 그리하여 어떤 면에서는 추리소설 기법으로 작품을 진전시키는데, 아오, 백수린의 거미줄 또는 실핏줄 같은 문장이라니. 그렇게 섬세하고 깔끔하고 사색적인 문장이 아주 제대로 감성을 폭발시켜, 독자는 간질간질한 섬세함과 사색과 고독 속에 질려서 까무러쳐 버리기를 몇 차례인지도 모른다. 질리고 질려서 책의 중간도 오지 않아, 무지하게 지루한 난관까지 만나는데, 애초 이런 작품들로 독서생활을 시작한 독자들은 연신 감탄을 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에나, 꽃노래도 삼세번이건만 같은 또는 비슷한 귀절을 매끄럽지 않은 둔주법, 푸가로 연주해대고 있으니, 귀 밝지 않은 절대 음치더러 도무지 뭘 하라고 하는 말이고 문장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이 정도 얘기했으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감이 잡히시지? 하여간 아마추어가 읽기에 그랬다는 거니까, 백수린의 많은 팬들이 읽기에 기분 나쁜 독후감이라도, 세상에 같은 의견만 있어도 좋지 않은 법이라는 선에서 이해해주시기를 앙망할 뿐이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1688/62/cover150/8954699375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6886280</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소설가 울프는 숭배할 만하지 - [미츠 - 블룸즈버리의 마모셋]</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501949</link><pubDate>Tue, 08 Sep 2026 03:4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50194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32137123&TPaperId=1750194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91/48/coveroff/k23213712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32137123&TPaperId=1750194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미츠 - 블룸즈버리의 마모셋</a><br/>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메이 옮김 / 코라초프레스 / 2026년 04월<br/></td></tr></table><br/>.&nbsp; 어슬렁어슬렁 개가실을 걷다가 ‘시그리드 누네즈’의 새 책이 신착도서 책상에 꽂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와 얼른 집어 들었다. 다른 건 하나도 안 보고 작가 이름만 탁, 봤다는 건데, 왜냐하면, 누네즈 책 읽고, 와따 이거 대낄이네, 감탄해본 적은 없어도 괜히 읽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망친 책 역시 한 권도 없었기 때문이다. 즉 망쳐도 평타. 얼마나 안정된 작가이냐는 말이지.<br>&nbsp; 책을 다 읽은 다음에 &lt;미츠&gt;를 검색해보니까, 출판사 코라초프레스가 처음 찍은 책이란다. 2026년 4월. 그래서 더 유감이다. 출판사가 처음 낸 책인데, 이왕이면 내 마음에 쏙 들어서 출판사도 좋아할 독후감을 쓰면 참 기분이 좋을 텐데 차마 그리할 수가 없다. 이건 누네즈 때문도 아니고, 출판사 때문도 아니고 더군다나 역자 메이 때문도 아니다. 불과 몇 주 전에 퓰리처상을 받은 마이클 커닝햄의 작품 &lt;디 아워스&gt;를 읽어서 그렇다.&nbsp; 가뜩이나 작품과 삶이 노출될 대로 노출된 버지니아 울프가 1941년 3월 28일 아침에 외투 주머니 가득 무거운 돌을 잔뜩 집어넣고 3월 말이라 해도 여전히 차갑기만 한 우즈강 속으로 맨발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작품을, 불과 몇 주 전에 읽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던 거였다. 게다가 &lt;미츠&gt;에서도 중요한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이랄 수 있는 언니 버네사의 젊은 맏아들이자 천하의 바람둥이인 ‘줄리언 벨’이, 1년 동안 중국 우한 대학의 영문과 교수로 갔다 와서 또다시 스페인 내전에 자기 발로 갔다가 두 달만에 폭탄 파편에 맞아 죽을 것도 홍잉이 쓴 야~한 책 &lt;영국 연인&gt;을 통해 알고 있던 거고, 버지니아-레너드 부부, 언니 버네사-클라이브 벨 부부의 자유분방한 성생활, 혼인 중 버지니아와 비타 섹빌웨스트와의 동성애 등등 이미 거의 다 들은 내용을 다시 한 번 읽는 것이 그리 반갑지 않았기 때문이다.&nbsp; 무엇보다 이제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할 때나 떠올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이 더 이상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원래 영국 귀족 끄트머리 태생으로 어릴 때부터 손 끝에 물 한 방울 묻힐 필요 없이 자란 버지니아 스티븐 양. 은수저를 입에 물고 머리 꼭대기에 허연 소기름을 뒤집어쓰고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최하 연 수입 5백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확보할 수 있었던 환경에서 자란 똑똑이 아가씨였다가, 유대인의 핏줄을 타고 났으니 귀족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주머니에 금화 떨어질 일 없는 부잣집 레너드 울프와 결혼해 자기 결정에 의하여 맨발로 우즈강으로 들어갈 때까지 전형적인 부르주아로 삶을 누린 사람.&nbsp; 당연히 아무리 돈이 많고 신분이 높아도 행복하지 않다. 부르주아도 충분히 불행할 수 있고, 고독할 수도 있고,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날마다 밤을 하얗게 새울 수도 있다. 아니다. “~할 수도 있다”가 아니라 정말로 “~한다.” 그러나 &lt;미츠&gt;의 시대적 상황이 1934년부터 39년까지. 간전기의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해 성경에 쓰인 대로 어미 배 속에서 낙태되지 못한 것을 슬퍼할 정도로 살기 팍팍했던 시절에, 이 버지니아-레너드 울프 부부는 바버라-빅터 로스차일드 부부의 초청을 받아 케임브리지에 있는 로스차일드 저택으로 차를 몰아 행차한다. 여기서 남아메리카 원산인 암컷 유인원 한 마리를 처음 만나고, 원래 동물을 좋아했던 레너드의 눈에 들어왔다가, 몇 달 후에 로스차일드 부부의 해외여행 기간 동안에 암컷 유인원을 울프 부부가 맡아 키우기로 하는데, 이 유인원이 ‘미츠’라고 이름지은 마모셋이다.<br>마모셋<br>&nbsp; 잔디밭 건너편에서 발견한 잿빛의 조그만 생물. 얼마 전에 빅터 로스차일드가 런던의 중고품 가게를 지나다가 우연히 쇼 윈도우에서 발견해 아내 바버라의 생일선물로, 가게 주인이 사들인 가격의 열 배도 넘게 주고, 즉 달라는 대로 에누리 없이 다 주고 사온 생물체이다. 그러나 바버라는 동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전혀 관리를 안 했다. 결과 마모셋은 뼈 발육에 장애가 발생하는 구루병도 있는 거 같고, 윤기가 나지 않는 털은 거칠고 건조해 보였으며, 군데군데 상처가 아직 완치되지도 않았는데 주로 쇠사슬을 걸었던 목 부근의 피부가 쓸려 있었고, 드문드문 털도 빠진 상태였다.이렇게 1934년 7월 19일 밤의 첫 장면에서는 그저 울프 부부가 로스차일드 저택에 놀러가 미츠를 한 번 본 것으로 끝난다. 케임브리지에서 런던으로 돌아오는 승용차 속에 앉은 버지니아. 이이는 생각한다.&nbsp; “그래도 로스차일드 부부에게는 부러워할 만한 것이 많았다. 부는 아니었다. 울프 부부는 부를 경멸했으니까. 그보다는 미래, 9월에 태어날 아기, 그들 앞에 펼쳐진 삶 전체였다. 한마디로, 젊음.”&nbsp; 빅터 로스차일드 3세 남작이 레너드 울프보다 딱 서른 살 젊다. 그리고 이때, 1934년에 첫번째 아내 바버라는 임신중이었으니 로스차일드의 부 보다는 임신중인 것이 더 부러울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울프 부부는 결혼 때부터 딩크로 살기로 딱 합의를 했던 건데 그렇게 22년을 살아 이제 쉰두 살, 완경을 맞은 상태에 이제 와서 태어날 아기 타령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nbsp; 게다가 당대 세계 최고 부자였던 은행왕 로스차일드 가문의 부를 부러워하지 않는 건 좋다 이거지. 근데 부를 경멸한다고? 유대인 족속이? 속으로는 아니겠지만 겉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 우리처럼 없는 집구석에서 사는 인간들은 백 년을 살아도 이렇게 딱 부러지게 말 못한다. 지들 스스로도 부르주아의 일원이니까, 집에 가면 침모, 식모, 찬모, 마당쇠, 집사 등등 하인, 하녀가 수두룩하고, 부부 가운데 한 명이 하인, 하녀에게 관대하면 다른 한 명은 혹독하게 살 수 있는 것들이나 자기 마음대로 글자로 쓰는 거다. 폼도 나고 뭐 그렇지.<br>&nbsp; 버지니아는 조상 대대로 이어져내려온 영토와 혈통, 수 세기에 걸쳐 배양된 교양과 전통을 가진 자기네 집안 같은 귀족이 지금껏 사회 정의나 공동선을 위해 어떤 식으로 힘이 되었는 지는 말할 수 없었단다. (p.60) 그러나 (앞 인용에 바로 연결해 쓴 것처럼) 버지니아가 끝내 포기하지 못한 건, 푸른 피를 향한 찬미였다. 푸른 피? “내 몸에는 푸른 피가 흘러요.” 프로야구단 삼성 라이온즈? 아니고, 각주에 쓰인 대로 옮기자면 “귀족의 고귀한 혈통을 말한다.”&nbsp; 귀족이 1930년대에 국가와 민족과 국민과 세계평화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이바지하는 지는 모르고, 아마도 이바지는커녕 도움되는 일도 하나 하지 않는다고 믿지만, 버지니아는 자신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고귀한 혈통에 대한 자부심은 포기하지 못했고, 오히려 찬미했다. 내 말이 아니라 시그리드 누네즈가 쓴 것에 의하면.&nbsp; 레너드 울프는 몰라도 버지니아는 확실히 귀족 출신의 부르주아 말석에는 앉는 부류. 그래도 빅터 로스차일드나 동성애인이자 깊은 우정도 나누고 있는 비타 섹빌웨스트 앞에서는 절대 돈 좀 있다고 입도 벙긋하지 못할 수준이다. 그래서 시그리드 누네즈는 쓴다.&nbsp; “울프 부부에게는 로스차일드 부부를 비롯해 화려한 생활을 하는 지인이 많았다. 한번은 버지니아가 비타의 시싱허스트성城에 갔다가 돌아와 ‘내가 중산층 출신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부끄럽다’고 선언한 적도 있었다.”&nbsp; 이러면 앞에서 “울프 부부는 부를 경멸했다.”라고 쓴 건 백퍼 구라지? 글쎄 그렇다니까. 이 책이.<br>&nbsp; 시그리드 누네즈가 동물주의자인 건 아실 걸? &lt;친구&gt;에서 조금 냄새를 피우잖아. 이 책에서는 미츠라는 이름의 마모셋이 등장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약 4년간, 4년 조금 넘는 세월을 쓴 작품으로, 이 기간 동안 히틀러가 전쟁 위협을 하고, 영국은 히틀러를 달래기 위하여 협정을 맺어 체코 일부를 점령하게 내버려 둘 때까지인데 사실 나도 울프 부부가 정말 마모셋을 길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길렀나 보지 뭐. 그냥 믿자. 돈 안 든다.&nbsp; 그래서 사실 미츠는 울프 부부의 애완동물일 뿐이고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누네즈의 동물주의는 여전하다.&nbsp; 울프 부부가 미츠를 데려오기 전에 핑카라는 늙은 개를 키웠다. 근데 부부가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오는 날을 맞춰 죽어버렸다. 잘 묻어주고 이제 13개월 된 스패니얼 암컷 강아지 셸리를 입양했는데, 100페이지에 이 강아지를 보고 버지니아 울프가 하시는 말씀이,&nbsp; “대단히 고상한 외모”지만 “과연 지성이 있을까?”&nbsp; 개한테 지성을 함양시키려면 ABC를 가르쳐야 하나, 미적분을 가르쳐야 하나? 성문기초영어 먼저? 아니면 공통수학의 정석이 먼저?&nbsp;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숭배할 만하지만, 나는 계급적 인간으로 버지니아 울프는 별로 좋지 않아서 말이지.<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91/48/cover150/k23213712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9914863</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오발탄</category><title>에잇, 콱 버리고 말았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500771</link><pubDate>Mon, 07 Sep 2026 17: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500771</guid><description><![CDATA[<br><br><br>&nbsp; 몇 권인 줄 모르겠는데, 위에 사진 찍은 거 말고, 딱 한 컷 분량의 책도 다 버렸다. 책 쌓아 놓는 거, 이거 욕심이다. 책 때문에 방에서 뭘 어쩌지 못하겠다. 그래서 버렸다. 아쉬울 거 같지? 속이 다 시원하다. 최근 5년 동안 읽은 책, 읽지는 않더라도 생각이 나 특정 부분을 찾아본 책, 서재에 인용한 적 있는 책 기타 등등, 이런 거 다 빼버리니까 90퍼센트는 그저 그냥 가지고 있는 책이더라. 그걸 버리기로 마음 먹었다.&nbsp;&nbsp; 그거 참 신기하지. 정말 책을 버리려고 하면 아내가 그러지 말란다. 버리는 거 말고 다른 방법도 있을 거라고. 있지, 알지. 근데 귀찮다. 이번에 버린 책 중에는 끝내주는 작품도 제법 있을 걸? 그래도 뭐, 내가 버리겠다는데.&nbsp;&nbsp; 다음 번에 날 잡아서 버릴 책 목록 중에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lt;2666&gt;도 끼어 있다. 오늘 다 해치우려 했는데 몇 번 힘쓰니까 혈중 알코올 농도가 떨어져 영 힘이 없더라고. 달라고 하지 마시라. 택배 포장하고, 우체국 가서 보내고, 시간 잡아먹고, 모두 귀찮은 일이다.&nbsp;&nbsp; 이제 내게 남아 있는 황석영은 &lt;장길산&gt;하고 &lt;오래된 정원&gt; 두 개, 바르가스 요사는 &lt;천국은 다른 곳에&gt;, 볼라뇨는 &lt;야만스러운 탐정들&gt; 뿐이다. 이런 식으로 정리하니까 대강 책꽂이가 균형이 맞혀진다. 이럴 줄 진작 알았다. 그러면서 여태 하지 못했던 게 바보스럽다. 다 욕심이었다.<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907/pimg_639243986478926313.jpg</url><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500771</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강박이 어떻게 비인간을 만드는가 - [가스등]</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99481</link><pubDate>Mon, 07 Sep 2026 05: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9948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31335&TPaperId=1749948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494/97/coveroff/893743133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31335&TPaperId=1749948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가스등</a><br/>패트릭 해밀턴 지음, 민지현 옮김 / 민음사 / 2025년 05월<br/></td></tr></table><br/>.&nbsp; 영국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패트릭 해밀턴은 작가이자 수습 변호사 아버지와 그의 두번째 아내, ‘올리비아 로이’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던 엘렌 아델 호클리와의 사이에서 1904년에 태어났다. 전형적인 중산층 속물계층인 부모. 아버지 월터 버나드는 자신이 위대한 작가라고 떠들고 다녔지만 잘 봐줘도 평범한 작품을 몇 개 만들어냈으면서도 스코틀랜드 왕위의 적정 상속자라고 평생을 술 마시고 꼬장부리다가 갔다. 속물이기는 마찬가지였던 엄마도 콧대가 하늘을 찔러 하인들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식들은 최상류사회의 일원으로 키우려 했으나, 아버지가 알코올 의존증 덕분에 가산을 좋은 술 마시는 데 탕진하여, 열다섯 살의 패트릭을 웨스트민스터에서 퇴학시키는 것으로 사실상 집구석은 문을 닫았다고 봐도 좋겠다.&nbsp; 패트릭 해밀턴은 이 시기, 열다섯 살 때부터 시와 산문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누이동생 랄라도 ‘다이애나 해밀턴’이라는 예명으로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고.&nbsp; 위키피디아는 이이의 작품 성향을 “전간기 런던의 거리문화를 디킨스적 방식으로 보고 있으며, 가난한 이들에 대한 강한 동정심과 신랄한 블랙유머”를 그린다고 소개했는데, 오늘 소개하는 두 편의 희곡이자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인 &lt;가스등&gt;과 &lt;로프&gt;와는 좀 먼 평가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br>&nbsp; 패트릭 해밀턴은 작품 가운데 &lt;가스등&gt;이 영국과 미국에서 각기 다른 감독에 의하여 영화로 만들어 졌는데, 이 중에서 1944년에 미국의 조지 큐커 감독이 잉그리드 버그만과 샤를 부아이에를 캐스팅해 제작한 흑백영화가 널리 알려져 있고 나도 이 영화를 보았다. 하도 오래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하여튼 허연 달덩이 같은 얼굴의 키와 덩치가 가히 발할의 브륀힐트 급인 잉그리드 버그만이, 그녀의 어깨 정도까지 올 정도로 그냥 보통 체격인 남자 샤를 보아이에의 가스라이팅에 하릴없이 곤경에 빠지는 장면이 좀 어색했던 게 기억나지만, 너무 오래됐다, 그동안 쌓인 두 명배우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세월을 거치면서 왜곡되었는 지도 모른다. 샤를 부아이에가 보통 배우인가, &lt;가스등&gt; 말고도 &lt;역사는 밤에 이루어지다&gt;와 &lt;애련&gt; 등에서도 명연을 보여준 옛 시절의 명배우.근데 샤를 부아이예와 함께 등장하는 파트너, 소심한 캐릭터를 소화하기엔 피지컬이 너무 좋은 잉그리드 버그만. 그래도 당시 영화 전문가들이 보기엔 이 커플이 괜찮은 조합으로 보였나 보다. 훗날 &lt;개선문&gt;에서도 라비크와 조앙 마두 역으로 다시 한 번 은막 위에 모습을 비치는 것을 보니까. 아휴, (배우로서의 자질을 말하는 ‘체급’이 아니라 신체적)체격이 덜 맞는 이유로, ‘안 맞는다’고 하면 눈이 삐었다고 할 분도 계실 것 같아서 그냥 내 생각일 뿐이라는 걸 꼭 밝혀야겠다.&nbsp; 하여간 버그만이 이 영화 찍고 10여 년 있다가 율 브리너의 파트너로 &lt;아나스타샤&gt;를 찍었을 때도 율 브리너의 박박 대가리가 어깨 근처에 오니까 열을 받은 브리너가 버그만한테 무참하게 댁댁거렸다는 건 유명하다. “난 절대 계단 위에 올라서 연기하지 않을 거요!”&nbsp; 사실 잉그리드 버그만이면 &lt;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gt;처럼 상대 배역이 적어도 게리 쿠퍼 정도 되어야 비로소 어울리는 커플이랄 수 있지 않을까? 다른 거 말고 비주얼 상으로는.<br>&nbsp; 예전에 영화 한 편, 그것도 더빙한 “명화극장”을 보고 몇 십 년만에 원작인 희곡 &lt;가스등&gt;을 읽는다. 우리나라 서점에서 작가 패트릭 해밀턴을 검색하면 이 책 한 권만 뜨는 걸로 보아 우리나라 초역일 거 같은다(아닐 수도 있다). 읽어보니 이런 수준의 작품이건만 왜 이리 더디게 번역을 했을까? 잘 안 팔리는 희곡 장르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말로만 가스등이지 사실 몇 년 전부터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이후에 비로소 영화 &lt;가스등&gt;도 새롭게 알려져 이제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그저 이렇게 짐작해본다는 말이다.&nbsp; 이제 원작을 읽으니 과연 두 주인공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물론 중요하지는 않지만 이게 궁금했던 것도 뭐 이해는 하시겠지?&nbsp; 남주 잭 매닝엄은 키가 크고 외모가 준수한 45세 정도의 남자. 잘 차려입고 지나치게 말끔하다. 살면서 아내 벨라를 쉼없이 가스라이팅 해왔으니까 당연히 무지하게 권위적이고, 자기보다 아래쪽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권위적이라기보다 위압적이라고 하는 편에 가깝다. 이게 다 이유가 있다. 원래 출신이 범죄자. 그것도 희대의 보석, 19세기말 기준으로 1만5천 파운드 이상 나가는, 아홉개의 ‘발로 루비’로 장식한 브로치를 강탈하기 위하여 앨리스 발로라는 이름의 노부인 집에 잠입했다.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마부들의 곤궁한 삶을 지원하는 데 열심이었던 노부인을 초저녁에 칼로 찔러 무참하게 살해하고, 낭자하게 피를 흘리며 죽어 넘어진 노부인을 무시한 채 밤새도록 집안을 뒤졌지만 애초 목표로 했던 발로 루비 아홉 개가 박힌 브로치를 찾지 못해 도망할 수 없었던 내력이 있다.&nbsp; 이것이 15년 전의 일. 이후 10년 이상, 오스트레일리아에 살면서 현지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해 아들 딸 낳고 잘 살았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자신의 과업, 아홉 개의 발로 루비가 박힌 브로치, 이걸 어쩌나. 어쩌면 콧대 높은 범죄자의 자존심인 줄도 모른다. 그걸 손에 넣기 위하여, 15년 전부터 아직도 궁리하고 있는 것이 도대체 집 어디에다 숨겼을까, 하는 것이었다. 벽과 벽 사이의 공간을 만든 작은 손 금고가 있을까? 방이나 허술한 창고의 바닥 한 부분을 뜯어내면? 많고 많은 가구 가운데 어느 허술하게 보이는 가구의 저 깊고 깊은 속에 장치한 비밀 서랍일까? 그의 고민은 깊어 가고 나이를 먹을수록 찾고야 말겠다는 집념은 더 커진다. 그리하여 그동안 번 돈을 몽땅 가지고 혼자 본명 시드니 파워를 ‘잭 매니엄’으로 바꾸고 영국에 잠입한 상태.&nbsp; 앨리스 발로 부인의 집을 사야 한다. 그래야 집을 홀랑 뒤져 보석을 찾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돈이 모자란다. 자기 돈으로는 발로 부인의 옆집을 살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필요하다. 발로 부인 집을 사기 위하여 서른 두 살 먹은 과부인지 노처녀인지 하여간 돈 많고 미인인 벨라를 유혹해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 매닝엄은 벨라로 하여금 예전 앨리스 발로 부인의 집을 사게 하고, 신혼여행 이후 줄곧 그 집에서 거주하며, 아름다운 벨라한테 쉼없이 가스라이팅을 가해 이제 다 시들어버리게 만들어버렸다. 이 상태에서 막이 올라간다.<br>&nbsp; 예를 들어, 잭 매니엄이 벽에 걸려있기는 하나 관심있게 쳐다보는 사람 한 명 없는 초상화 한 점을 슬쩍 집어 내려, 아내 벨라가 물건을 자주 가져다 두는 특정한 장소에 슬쩍 두고, 벨라한테 묻는다.&nbsp; “어, 벽이 비었네. 당신이 초상화를 뗐군.”&nbsp; 벨라는 자기가 안 그랬으니, 안 그랬다고 해야 할 밖에. “아닌뎁쇼?”&nbsp; 그럼 매니엄은 집에 두 명 있는 하녀 하나하나 불러 네가 치웠니, 물어보고, 당연히 하녀들 역시, 아닌뎁쇼, 라는 대답이 나오면 성경에 키스를 함으로써 진실임을 담보하라고 압박한다. 뭐 꿇릴 것이 하나도 없는 하녀들이야 못할 일이 없다. 그래 성경의 양가죽 표지에 입술을 때고 쭉쭉 키스를 박는다.&nbsp; 이후에 벨라한테, 그래도 당신이 안 그랬다고?&nbsp; 벨라 역시 자기가 안 그런 것이 확실하니까 입술을 뾰죡하고 내밀고 자기도 하녀들의 침이 묻은 성경 양가죽 표지에 쭉쭉 키스를 할 밖에. 그러나, 여태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매니엄이 자기가 숨겨놓은 벨라의 장소에 가서 초상화를 가져오면, 벨라는 틀림없이 자기가 그렇게 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장소에서 초상화가 나왔으니, 자기가 잠깐 정신이 빠진 사이에 그런 짓을 했다고 믿게 된다. 물론 처음이었더라면 안 그랬겠지만, 이런 적이 어디 한 두 번이어야지.&nbsp; 남편이 사준 결혼 반지, 예물 시계, 중고지만 어여쁜 브로치, 하다못해 어제 식료품 가게에서 가져온 영수증까지. 오늘도 영수증 좀 보자고 남편이 슬쩍 물어봤다. 분명히 책상 위에 던져 놓았는데 귀신이 곡을 하는지 그것도 없어져 버렸다. 그건 자기가 아니면 버릴 사람도 없는데, 점점 내가 미쳐가는 건 맞는 모양이다. 이런 것이 가스 라이팅. 전부 남편 매닝엄이 한 짓. 이렇게 아내를 미친 여자로 만들어 집에서 합법적으로 쫓아내 정신병원으로 보낸 다음이면 마음 놓고 집을 뒤져 문제의 보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nbsp; 근데 이게 정말로 될까?&nbsp;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 15년 전 앨리스 발로 살인사건 당시 초짜 수사관으로 심증은 가지만 발언권이 별로 없어 본격적으로 수사하지 못했던 형사가, 이제 경위 정도의 계급이 되어 다시 이 집을 방문한다. 그래도 사건의 해결이라는 관점보다, 어떻게 특정인을 계속적인 강박으로 인해 비인간이 되게 만드는가를 관찰하는 것이 이 작품을 읽는 포인트가 될 것이다.&nbsp; 재미있다.&nbsp; 앱 북적북적에 별 넷 반 주었다. 두번째 작품 &lt;로프&gt; 역시 재미있지만 조금 번잡해서 반 깎았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494/97/cover150/893743133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4949781</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더할 나위없이 미국적인 - [맨해튼 비치]</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93098</link><pubDate>Fri, 04 Sep 2026 04: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9309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57435&TPaperId=1749309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0562/32/coveroff/895465743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57435&TPaperId=1749309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맨해튼 비치</a><br/>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08월<br/></td></tr></table><br/>.&nbsp; 세 번째 읽는 제니퍼 이건으로 이렇게 단정하면 곤란하지만, 이이의 작품을 더 재미있게 해주는 진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범죄. 아주 대놓고 범죄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내 경우에 이건을 읽은 코스가 자잘하고도 상습적인 좀도둑질로 시작해, 각종 지능적인 사기를 거쳐 이번에는 합법적, 반쯤 합법적, 완전히 불법적 업소를 거느리는 폭력 조직까지 발전하면서 재미의 도를 높여갔다. 당연히 범죄가 스토리 라인은 아니지만 하여간 재미를 증폭시키는 인공조미료 역할을 단단히 한다.<br>&nbsp; 책에서 제일 먼저 소개할 인물은 에디 캐리건. 이름만 봐도 탁 아일랜드 사람이다. 아버지는 아일랜드에서 결혼해 딸 브리앤을 낳고, 브리앤의 엄마가 죽고나서 뉴욕으로 이주했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 도착한 아버지는 외로운 곳에서 혼자 살 수 없어 여인을 만나 에디를 낳았다. 그리하여 브리앤과 에디는 이복 남매. 훗날 친남매보다 더욱 돈독한 정을 쌓고 살지만 어릴 때는 그럴 기회도 없었다. 에디의 엄마도 에디가 네 살이 되던 해에 티푸스에 걸려 생을 마감해버렸다. 아버지는 어린 두 아이를 감당할 수 없어 브리앤을 뉴저지에 사는 외가에 보내고, 에디는 뉴욕 가톨릭 소년 보호소에 들여보냈다. 가슴이 천 길 나락으로 떨어졌겠지만 그때뿐, 에디의 인생에서 다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다.&nbsp; 소년 보호소에서의 에디. 가톨릭 집안의 아이들을 모은 보호소니까 주로 이탈리아와 아일랜드 가정의 아이들일 터인데, 아일랜드 아이들이 대다수인 것 같다. 남자 아이들이 모인 아동 보호소는 작은 정글. 이곳에서는 저절로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할 수밖에 없다. 에디는 완력 보다는 사슬을 감은 문 틈새로 빠져나가는 능력, 원숭이처럼 가로등을 기어오르는 능력, 후디니 같은 탈출 묘기에 능했다.&nbsp; 보호소 아이들은 열 살이 넘으면 낮에 밖으로 나가 자잘한 일을 해 돈을 벌기도 했는데, 에디는 좀 먼 동네에 가서 우연히 해바라기를 하고 있던 휠체어를 탄 노신사 드비어 씨를 만나 말동무도 해주고 카드 게임인 세븐카드 스터드도 배운다. 드비어 씨가 에디의 숨겨진 또다른 재주를 발견했는지 자신이 밑돈을 대주고 작은 포커게임판에 입성시켜 게임을 하게 하고, 매일 전날 한 게임을 복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드비어 씨는 신사. 그는 에디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1920년대니까 감안해 읽자.&nbsp; “절대 사기는 안 돼. 단 한 번이라도. 사기는 어린 여자의 처녀성 같은 거야. 한 번 했건 백 번 했건 차이가 없다고. 타락한 건 마찬가지야.”&nbsp; 이 시절에 에디는 보호소 동기 가운데 중요한 두 명이 이스트 강에 빠진 것을 건져 목숨을 구해준다. 존 더넬런과 바트 시헨. 둘은 성인이 되어 대공황 시절에 존은 부둣가의 작은 보스이자 도박판을 관리하는 하급 갱단 두목, 바트는 주검사 사무실 소속 검사. 에디는 이들과 달리 보호소에서 나온 후에 보드빌에 관심을 두어 그곳에 진출, 작은 쇼에 출연해 보호소에서 계발한 자기의 재주를 공연하면서, 아름다운 코러스 겸 백댄서 애그니스와 사랑에 빠져, 미네소타에 사는 처가 식구들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해 맏딸이자 작품의 주인공 애너를 낳고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답지만 자기 몸을 거의 운신도 하지 못하는 장애 아이 둘째 딸 리디아를 낳는다.&nbsp; 원래 성실한 성격의 에디는 극장주의 눈에 띄어 극장 하나를 관리하면서 주식에 관심을 두어 주식 중개인이 되고자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이때 신용거래로 주식 매수와 매도에 뛰어들어 큰 부자는 아니지만 아일랜드인 커뮤니티에서는 부자 소리를 듣는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대공황. 한 방에 거덜이 난 캐리건 가족은 집도 작은 아파트의 6층으로 이사하고, 근사한 차도 팔고, 갖고 있던 거의 모든 것을 팔며 하루하루 지내게 되는데, 왕년에 목숨을 구해준 존 더넬런의 수하에 들어가 이것저것 심부름을 하며 푼돈을 벌다가 존의 한참 위 보스인 덱스터 스타일스에게 발탁되어 주로 돈 세탁에 관계된 일을 하며 다시 넉넉한 생활을 잠깐 누린다. 스타일스 씨와의 면담에서는 그의 철학대로 가족을 데리고 스타일스 씨 집을 방문했는데 이때 에디와 함께 간 가족이 에너 캐리건, 맏딸이었고, 스타일스 씨는 한 겨울에 추위를 무릅쓰고 맨발로 맨해튼 비치에 발을 담근 에너가 아마도 마음에 들어 에디를 고용한다.&nbsp; 에디는 열한 살 때 휠체어의 노신사 드비어 씨한테 어쨌든 사기 행각은 하지 말라는 교훈을 배웠던 터. 그간 스타일스 덕분에 잘 먹고 여유있게 살고, 무엇보다 둘째 딸 리디아를 위하여 전신 마비용 휠체어를 사 줄 수 있었지만 늘 자신의 일이 법 앞에 떳떳하지 못했던 것이 찜찜했던 모양이다. 존 더넬런의 출연 목적은 에디와 딸 애너가 덱스터 스타일스와 관계를 맺게 하는 것과 비슷하게, 바트 시헨을 구해준 건 에디와 스타일스 사이에 균열이 발생해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을 하게 만드는 데 있다. 결국 에디는 바트 시헨에게 정보를 제공한 대가로 이탈리아 갱단의 고위 세력가 덱스터 스타일스에게 터미네이션을 당한다. 에디 자신도 결국 그렇게 될 줄 알고 가족에게 쇼핑백에 가득 든 현금과 예금통장을 남기고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 버린 후, 온몸을 철제 체인에 감겨 무척 깜깜한 3월의 맨해튼 앞바다에 산 채로 수장을 당하는데, 보드빌 시절에 에디가 뭘 공연했다고? 후디니가 뭐?<br>&nbsp; 작품의 주인공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이제 열아홉 살이 된 에너 캐리건이 브루클린 해군 공창에서 거대 군함에 쓰일 부품 규격을 재는 일을 하다가, 잠수해 선박을 수리하거나 조사하는 다이버 일에 관심을 갖게 되어 기어이 다이버가 되는 과정이 주를 이룬다. 여태 소개한 내용은 에너가 아직 어린 시절에 국한한다.&nbsp; 애너가 하고 싶었던 다이버는 1940년대 초반의 미국에선 여성이 진입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제니퍼 이건은 앤드리아 모틀리 크랩트리라는 퇴역 육군 여성 심해 다이버를 발견하고 이이를 모델로 해서 어떻게 다이버가 될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를 비롯해, 다이버가 되기 위한 수련 과정, 당시 여성으로 과정을 감당하는 동안 가장 큰 장벽으로 여겨졌던 것을 충분히 취재했으리라. 여기에 독후감 초두에 썼듯이 인공조미료를 듬뿍 뿌려주기 위하여 이탈리아계 갱단의 최고 우두머리, 아마도 아흔 살은 넘은 듯 보이는 미스터 Q씨와 작품의 또다른 주인공인 Q씨의 바로 아래 직급 정도로 보이는 덱스터 스타일스를 등장시킨다.&nbsp; 덱스터 스타일스 역시 맨해튼 비치에서 이탈리아 음식점을 열었던 평범한 이탈리아 가정의 아들로 일찌감치 하이틴 시절에 Q씨 수하에 들어가 힘 깨나 쓰다가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다운 여성 해리엇 베링어와 결혼한다. 덱스터도 훌륭한 갱 조직을 운영했지만 오랜 세월 그렇게 잘 나가게 된 건 처가집인 베링어 가문의 막강한 정치적, 경제적 끗발과, 베링어 가문과 Q씨의 묵언에 의한 이해관계가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덱스터가 아무리 갱이지만 그래도 사나이답고, 자기 나름대로 의리 같은 것이 있더라도 미국 작가의 작품 속에 갱단 두목도 아니고 두세 번째 두목이라면 작품이 끝날 때까지 곱게 살아있기 힘든 문학적 운명에 처해있기 십상인데 이 작품에서도 그럴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안 가르쳐드린다.&nbsp; 하여간 세월이 지나 자기가 처단한 에디 캐리건의 맏딸 애너, 일찍이 자기 집에 온 애너를 품평하기를, 용감하고 강한 아이라고, “얘들이 우리보다 더 강해요. 쟤들이 그걸 모르니 우리로선 다행이지요.”라고 했던 건 이미 잊었지만, 다이버가 되고 무엇보다 특별나게 아름답지는 않아도 충분히 성인이 된 다음에 덱스터 나이트클럽에 와서, 아무도 함부로 앞에 나타나지 못하는 덱스터의 테이블에 턱 나타나서, 그의 뇌리에 에너를 고용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 젊은 여성이 한 시절, 그렇게 믿고 일을 맡겼던 에디 캐리건의 맏이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br>&nbsp; 그러나 아무리 재미있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내가 스마트폰 앱 북적북적에 별 다섯을 채우지 않은 것은, 예상했던 미국식 결말을 향해 착착 다가가기 때문이다. 마지막 반전이 혹시나 있을까 싶어 휙휙 날아가는 심정으로 후다닥 읽게 만드는 필력이라 할지라도, 할리우드 영화나 미국 소설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미국식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허탈해지는 심사를 숨기지 못하겠더라고.&nbsp; 작품 속에서 미국 상선이 독일 유보트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당하는 장면도 나온다. 침몰하는 엘리자베스 시먼호에서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한 선원들은 여지없이 테오도르 제리코가 그린 &lt;메두사호의 뗏목&gt; 꼴이 났더라도, 독자는 정의로운 미국인이 결코 인육 섭취 같은 극단적인 생존을 거부할 것이란 것도 알고 있고, 중요한 등장인물은 결국 끝까지 생존해 평온한 삶을 유지하리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다. 그래서 작가가 기대했던 긴장감은 아쉽게도 애초에 1도 없었단 거다.&nbsp; 씩씩하고 강인한 애너가 사랑이라기보다 한 순간의 욕정에 더 가까운 심정으로 살아생전 처음으로 맛본 엑스터시를 수반한 진짜 섹스를 통해 임신을 했을 때도, 다이버 일을 계속하기 위하여 임신중단을 결심하고, 공창에서 만나 친구가 된 넬을 통해 산과 의사를 찾아가 클로로포름 마취를 위해 마스크를 덮는 순간까지, 독자는 용감하고 강한 애너가 끝내 안 그럴 줄 알면서, 결국 출산을 선택할 줄 알면서도, 임신중단 수술을 받기 바랐지만, 제니퍼 이건은 단칼에 독자, 나의 바람을 거절해버렸다. 미국의 독자는 아직까지 속으로는 임신중단을 원하지 않거나, 적어도 임신중단 시행을 내놓고 이야기하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제일 보수적인 나라가 미국이잖아.&nbsp; 만일 유럽의 여성작가였다면,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였다면 아마도 단칼에 처리해버리고 말았을 거 같다. 왜 애너는 여러 사람 힘들게 출산을 선택했을까? 미혼모이며, 고모 브리앤의 도움이 없으면 결국 다이버 일도 중단할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상태였음에도. 혹시 모르지. 제니퍼 이건도 그걸 바랐지만 애너 캐리건이 바라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을지도. 내가 임신중단을 지지했던 건, 만일 당사자 애너가 내 딸이었다면, 이라고 가정했을 때 그랬다는 뜻이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0562/32/cover150/895465743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05623291</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BL로 다진 솜씨, 인상깊은 - [창궐 - 제171회 나오키상 수상작]</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90723</link><pubDate>Thu, 03 Sep 2026 04:4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9072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02135167&TPaperId=1749072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348/26/coveroff/k50213516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02135167&TPaperId=1749072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창궐 - 제171회 나오키상 수상작</a><br/>이치호 미치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6년 01월<br/></td></tr></table><br/>.&nbsp; 이치호 미치, 1978년에 오사카에서 출생한 일본 소설가. 여성이고 본명은 밝히지 않았다. 오사카에 있는 간사이 대학 사회학부를 졸업하고 잡지 같은 곳에 글을 쓰면서 데뷔, 주로 남성 청소년의 동성애를 그린 BL소설가로 활동했다. 여러 작품이 만화로 나와 있어서 아마존 검색하면 화면이 숱하게 넘어간다. 2020년엔 대표작이라는 &lt;예스 오어 노 오어 하프&gt;가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nbsp; 회사원으로 일하는 동안에도 글을 썼다고 하는데, 지금도 회사에 다니는 지는 모르겠고, 하여튼 그때는 평일에 서너댓 시간 글을 쓰고 주말에는 쉬느라 외출도 삼가했다 한다. 이쯤 되면 슈퍼우먼 맞다.<br>&nbsp; 2021년, 이이가 마흔세 살 때 소설집 《스몰 월드》로 순문학 작가 데뷔를 해 주목을 받았고, 《창궐》로 2024년에 나오키 상을 수상해 내가 읽게 되었다. 최근에 읽은 다섯 권의 일본 작품 가운데 세 권이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작품이고 《창궐》을 포함해 두 권이 나오키 상 수상작이다. 여러 번 말한 것 같은데, 일본 현대소설을 읽어보고 싶으나 아는 것이 없어서 일본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문학상 수상작을 선택해 읽어보았다. 앞서 읽은 책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사실 이 책을 끝으로 당분간 일본 현대소설하고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별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nbsp; 이치호 미치가 알려진 BL 작가. BL도 당연히 사랑인 건 마찬가지니까 사람의 섬세한 감정선을 묘사하는 데 특화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책에 실린 여섯 단편들이 섬세하면서도 극단적이지 않다. 등장인물도 청소년이거나 젊은 청년 세대가 많이 등장해, 읽는 중에 틀림없이 작가가 젊은 층일 것이라 여겼는데 1978년생이란 걸 알고 놀랐다. BL 작가 출신이라지만 《창궐》 작품 중에 동성애 장면은 안 나온다.<br>&nbsp; 《창궐》 속에 &lt;창궐&gt;이라는 표제 작품은 없다. 나오키 상을 받은 것이 2024년. 우리나라에서도 엔데믹을 선언한 시기. 그러니까 여섯 작품은 모두 펜데믹 시절에 쓴 것이라고 봐도 좋겠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을 터이니. 실제로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처음에 실린 &lt;날개가 다른 새&gt;에서 가끔 마스크를 쓴 사람이 보이는 장면이 보이고 천천히 밤의 유흥가에 손님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마지막 작품 &lt;잔물결 드라이브&gt;에서는 이제 자기 얼굴을 보이기 싫은 경우에 가끔 마스크를 쓰는 정도. 마스크 쓰는 것이 펜데믹 시기에 익숙했던 터라 예전처럼 경원받지 않는 수준이다. 그러니까 펜데믹이 지나갔거나 거의 막바지에 달했다는 뜻이겠지.&nbsp; 그러고보니 그렇구나.&nbsp; &lt;날개가 다른 새&gt;는 오사카 시절 중학생 시절 그저 알고 지냈던 동창 유토와 나기사. 유토는 원하지 않는 전공을 1년 하다가 때려 치우고 도쿄에 와서 주점 삐끼를 하며 살고 있던 차. 나기사는 파파카쓰, 나이 많은 남자와 사귀면서 돈은 받는 아가씨, 우리말로 원조교제 비슷한 걸 해서 먹고 산다. 나기사가 유별난 것이 도쿄에 와서도 오사카 사투리를 구태여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점. 사실 특별한 건 아니다. 나중에 굳이 사투리를 쓰는 이유도 자기 입으로 말하지만 소개하지는 않겠다.&nbsp; 근데 유토가 생각해보니 나기사는 오사카 고향에서 이미 죽은 걸로 알려져 있다. 그것도 험하게. 안나 카레리나처럼 정거장에 도착하기 위해 천천히 속도를 줄여 들어오는 기차에 몸을 던진 것도 아니고, 힘차게 달려오는 열차를 향해 건널목에서 뛰어들어 거의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신체 훼손을 당해 죽은 것이 틀림없다. 근데 지금 도쿄에 와 있으니, 정말로 나기사인지, 아니면 나기사의 도플갱어인지 막 헛갈린다. 하여간 죽은 게 맞다. 그게 정말로 나기사였는지 아닌지는 다음으로 하고.<br>&nbsp; 반면에 마지막 작품 &lt;잔물결 드라이브&gt;는 화창한 토요일에 한적한 교외 역에서 트윗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딱 보면 소위 번개? 번개 맞다. 그것도 첫 번개. 어쩌면 마지막 번개. 당연히 처음 보는 사람들이고 나이와 성별도 각양각색이다. 계정이름이 ‘오이 정말 싫어’,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 ‘마리골드’, 중년 남자 ‘팥빙수’. 소녀 같은 분위기의 ‘케이트 모스’ 그리고 승합차를 가져와 이들의 이동을 책임질 나이 많은 남자 ‘동물원의 겨울’. 모두 다섯 명.&nbsp; 이들이 모인 이유는 집단 자살을 하기 위해서이다. 자살 방법은 번개탄. 진짜로 번개탄을 피우기 전에 독한 수면제를 몇 숟가락 퍼먹거나 산토리 위스키 같은 술을 왕창, 그러나 절대 토하지 않을 정도만 퍼 마시겠지. 어차피 번개탄의 일산화탄소에 중독이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토하긴 할 터이지만 그거야 죽기 바로 직전이니 알 바 없고. 그리하여 이들은 승합차에 올라 죽음의 장소로 이동하는데, 한 가지 작지 않은 문제가 있으니 이 가운데 케이트 모스가 불과 열두 살의 꼬마였던 것. 죽기에는 너무 어리잖아? 그래, 사실 더 큰 문제는 이게 아니다. 문제의 실행 장소에 가 보니 이미 다른 차가 한 대 와 있고, 동물원의 겨울 님이 운전석에서 내려 짙은 선팅이 된 차에 다가가 들여다보니, 차에 탑승한, 아니지, 탑승했던 사람들 모두 이젠 불이 꺼진 번개탄의 일산화탄소를 충분히 넘칠만큼 흠향하고 벌써 저승행 특급을 탔던 거다. 이후에 어떻게 됐는 지는 당연히 안 알려드리고.<br>&nbsp; 그러니까 첫 작품과 마지막 작품은 모두 죽음, 죽음 가운데서도 자살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그것 참, 시원하게 탁 이야기하면 틀림없이 스포일러라서 그럴 수도 없고, 밝히지 않으면 싱겁기 그지없는 독후감이 될 터. 그래도 결론을 말할 수는 없다. 재미있는 책이니 읽어 보시라고.&nbsp; 다른 작품도 괜찮다.&nbsp; 만일 당신이 여성이고, 우연히 정말 마음에 드는 외모의 한 남자를 보았는데, 그 남자가 하필이면 배민 배달원이라서 예컨대 짜장면과 탕수육 세트를 주문하거나 아구찜 작은 것을 앱으로 주문하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그가 음식을 가지고 올 확률이 있을 경우, 정말로 딱 내 마음에 드는 남자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크게 먹고 싶지는 않지만 햄거버나 파스타를 주문해보고 싶을까, 아닐까? 나는 남성이라 여성 마음을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안다. 그럴 수 있고,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거. 다만 &lt;로맨스&gt;의 주인공 유리처럼 도무지 절제가 되지 않고 남편이 집에 있는 휴일 빼고 하루에 두 번씩 주문을 해대면 그건 집착이라고 생각할 뿐.&nbsp; 근데 세상 일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몇이나 있지? 유미도 이래저래 헛물만 켠다. 오라는 남자는 안 오고 영 이상하게 생긴 남자만 줄창 올 뿐만 아니라 이 못생긴 배달원은 유미가 자기한테 반해서 주구장천 KFC에 양념 반, 프라이드 반을 오더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어째? 어쩌긴 뭐가 어째, 당연히 사고가 생기고 말지. 동네 소문이란 소문도 활랑 나 버리고.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냐? 그걸 이치호 미치가 참 귀신 같이, 재미있게 포착한다. BL로 다져진 솜씨가 거 참 녹록하지 않네. 이름을 기억해 둘 작가.<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348/26/cover150/k50213516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3482691</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내가 아는 킨케이드의 아빠가 아닌 걸? - [애니 존]</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88254</link><pubDate>Wed, 02 Sep 2026 04:1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8825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4175X&TPaperId=1748825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9882/13/coveroff/895464175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4175X&TPaperId=1748825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애니 존</a><br/>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07월<br/></td></tr></table><br/>.&nbsp; 에세이가 아닌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소설은 2021년에 문학동네가 &lt;루시&gt;의 정소영 번역으로 출간해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 이어서 1년 후에 찍은 소설이 &lt;애니 존&gt;. 이 외에도 전에 읽은 킨케이드가 &lt;내 어머니의 자서전&gt;하고 &lt;미스터 포터&gt;. 그러니까 &lt;애니 존&gt;이 네 번째 읽는 킨케이드라는 말인데, 이이가 발표한 첫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분량은 사실 ‘장편’이라 말하기 민망하지만 구성으로 보면 장편인 건 맞는 듯.&nbsp; 그러나, 실제로 자기 주변, 부모와 자신을 포함한 경험담 비슷한 걸 쓰는 데 특화된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짧지는 않은 장편을 미리 세 권 읽었으면, 앤티카 바부다 섬의 세인트존스 사람들과 부모 이야기는 다 읽은 셈이다. 2005년 현재 3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던 작은 도시라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저러하게 얽히고설킨 관계를 맺고 있으며, 유별난 혼인과 혼외자 같은 것까지 몽땅 알고 있는 처지에서 &lt;애니 존&gt;을 읽게 된 꼴이다.<br>&nbsp; &lt;애니 존&gt;은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 애니가 열 살 때 시작한다. 세인트존스 디킨스베이 스트리트 주택가에서 아버지가 손수 지은 집의 지붕을 수리하는 동안, 때마침 여름방학이라서 한참 외곽 지역인 포트 로드에서 살았던 짧은 이야기부터.&nbsp; 왜 여기서 작품을 시작했을까? 어린 나. 이제 죽음에 관하여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마당에서 보면 저기 공동묘지가 보인다. 열 살 먹은 애니는 무덤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무서워한다. 언제 다시 애니 앞에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미 죽은 사람이 때로는 꿈에도 나타난다. 엄마는 자신이 낳은 애니의 오빠를 포함해 아는 죽은 사람이 많다.&nbsp; 얼마 후 시내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어느 날 애니보다 어린 ‘날다’가 엄마 품안에서 죽는 일이 생긴다. 엄마 친구의 빼빼 마르고 고열에 시달리던 딸. 날다의 호흡이 거칠어지자 엄마와 엄마 친구가 아이를 의사 베일리 선생한테 데려가던 중에 엄마 품에서 축 늘어져 그걸로 끝이었다. 날다의 엄마는 울기만 해서 엄마가 염을 비롯해 장례 일습을 맡았다. 애니는 보았다. 엄마가 손으로 죽은 날다의 얼굴을 쓰다듬고, 물로 몸을 씻기고, 옷을 입히고 그렇게 죽은 아이를 만진 것을. 그 손으로 애니 자신의 머리를 빗질하고, 음식을 만들어 애니의 몸 속에 집어넣게 하는 것이 끔찍했던 기억.&nbsp; 이어서 죽은 여러 사람을 떠올린다.&nbsp; 애니보다 두 살 더 많지만 작은 체격의 지진아 소니아. 애니가 무척 좋아한 아이라서 소니아가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괴롭혔던 아이. 임신중이던 소니아의 엄마도 갑자기 죽었다. 2년 동안 더 같은 반이었지만 이후로는 도무지 말을 걸 수 없었다. 엄마가 그렇게 죽어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지다니, 너무 망신스러운 일 같았다.&nbsp; 날다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길 건너 이웃인 미스 샬럿이 엄마와 서서 이야기하다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 이 일이 있고나서 애니는 장례식을 쫓아다녔다. 그래서 죽은 사람을 숱하게 보았는데 그저 호기심 때문에 그렇게 했을 뿐이다. 이웃 학교에 다니던 곱추 여학생이 죽었을 때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묻히기 전에 곱사등을 한 번 만져보고 싶었단다.<br>&nbsp; 2장으로 넘어가면 이제 아빠가 등장한다. 엄마보다 서른 다섯 살이 더 많은 늙은 아빠. 집도 짓는 큰 목수. 집안의 자잘한 모든 불운은, 아빠가 사랑했지만 결혼은 하지 않은 수많은 여자들 가운데 아빠의 아이를 낳은 누군가가 엄마와 애니한테 저주를 걸어 해를 입히고자 하기 때문에 생긴 일로 친다.&nbsp; 그러나 우리는 안다. 사실 저메이카 킨케이드 본인이 아빠가 사랑했지만 결혼은 하지 않은 여자가 낳은 딸이라는 것을. 이미 아빠의 사랑이 식어 엄마 손을 잡고 찾아간 아빠는 엄마도, 친딸 킨케이드도 마치 소가 닭 보듯 했다는 것도. 이런 것들에 관해 킨케이드와 엄마도 별로 앙심을 품지 않고 살았다는 것도. 같은 처지의 여자들이 한두 명이 아니며, 그저 앤티카 바부다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는 것까지.&nbsp; 그러니 &lt;애니 존&gt; 2장부터 등장하는 아빠가, 부모 가운데 특히 아빠가, 엄마보다 서른다섯 살이나 더 많아 무척 늙었을 아빠가 애니와 더 돈독한 정을 나누는 걸 보고 의외라고 생각할 수밖에. 아무래도 처음 쓰는 장편소설이라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쓰기가 좀 뭐했던 건 아닐까 싶다. 솔직히 미혼모가 키우는 혼외자 가정이라는 게 그리 자랑은 아니잖아, 1949년생이라면.&nbsp; 이후 애니 존이 사는 이야기는 이미 다른 작품을 통해 다 한 번씩은 읽은 내용이다. 학교에서 공부를 잘 했고, 열일곱 살이 되어 더 높은 공부를 하기 위하여 영국 유학길에 오르고 기타 등등. 성숙해가면서 가랑이에 터럭이 돋고, 초경을 하고, 가슴은 그다지 커지지 않는 이야기까지. 딱 하나 이 책에 나오지 않는 건, 열일곱 살 때 영국이 아니라 미국 뉴욕주 한 가정에 ‘루시’라는 이름의 입주보모로 들어가 사는 이야기만 빼고.&nbsp; 그래서 이 책을 2022년에 읽지 않고, 다른 킨케이드의 작품을 제법 거친 다음에 읽으면, 별로 재미있지 않다. 139쪽에 본문이 끝나는 짧은 소설임에도 심지어 지루해지기까지 했다. 그저 자기 스토리에 자잘한 변주를 한 작품으로 읽힐 뿐. 한 작가의 소설은 역시 발표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니까. 그렇게 읽었으면 확실히 더 재미있었을 터이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9882/13/cover150/895464175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8821361</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당신의 여름은 견딜 만했기를 - [여름의 사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85627</link><pubDate>Tue, 01 Sep 2026 05: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8562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24815&TPaperId=1748562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091/99/coveroff/893642481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24815&TPaperId=1748562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여름의 사실</a><br/>전욱진 지음 / 창비 / 2022년 09월<br/></td></tr></table><br/>.&nbsp; 전욱진이 누군가 했더니 한때 수필집 《선능과 정릉》을 쓴 시인이구먼. 선능은 올해 명예교수가 될 응식이네 2층집이 있던 동네, 내가 졸업한 대일고등학교가 저 정릉동 산 꼭대기에 있어서, 선능과 정릉, 두 능 다 이름만 들어도 지긋지긋한 곳이라 읽어볼 생각도 안 했던 책이군. 하긴 에세이 모음집이면 애초에 읽을 엄두를 내지도 않았겠지만. 전욱진의 “선능과 정릉’은 아마 우리가 ‘선정릉’이라 부른 삼성동 거기를 말했던 듯하다. 아니면 말고.&nbsp; 별의 별 곳을 다 뒤져도 전욱진의 개인정보는 1993년 서울생이란 거밖에 안 나온다. 그럼 내 작은 아이하고 동갑일세. 왜 애꿎게 작은 아이 나이를 흘리는가 하면, 힘들여 시 쓴 시인한테 미안한 말이지만, 읽기는 어렵지 않게 읽히는데 정작 어떤 뜻을 전하려고 하는지 그게 매우 헛갈린다는 거다. 전田旭鎭 시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요즘 책방에서 이름을 낸 시인들의 시집 거개가 좀 그런 편이라서, 혹시 시 쓰고 읽는 일에도 세대 차이가 있는 거 아닐까, 이런 난감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요즘 시를 전보다 확실히 드물게 읽는다. 가면 갈수록 시 읽기가 더 난감해진다. 그만큼 시에 대한 애정도 식어가는 것 같아 나도 아쉽다.<br>&nbsp; 이 시집의 시들이 다 어떤 뜻인지 모르겠다는 건 아니다. 가끔은 읽자마자 탁 이해가 가는 시도 있다.<br><br>&nbsp; 와사비<br><br>&nbsp; 물 맑은 냇가에서&nbsp; 서늘하게 자라&nbsp; 뿌리를 갈아 만들고&nbsp; 일본산이 유명하다나요<br>&nbsp; 특유의 매운 맛과 향이 있는데&nbsp; 혀가 아리고 콧등은 시큰하며&nbsp; 눈에는 눈물이 핑 돈다면서<br>&nbsp; 그러니 많은 양을 한꺼번에&nbsp; 입에 넣어선 안 됩니다.<br>&nbsp; 그러나 적당하면 알싸함 뒤에&nbsp; 은근한 고소함을 느낄 수 있지요&nbsp; 흰 살 생선을 칼로 저미는&nbsp; 사람이 그랬습니다<br>&nbsp; 그때 나란히 앉아&nbsp; 그 얘기를 들으며&nbsp; 함께 기다리던 사람과는 이제&nbsp; 만나지 않는 사이가 되었고요<br>&nbsp; 그때는 동그란 눈을 같이 하고선&nbsp; 이게 생선의 비린 맛을 없애고&nbsp; 과연 감칠맛은 살리는 거군요<br>&nbsp; 다시 와서 먹는데&nbsp; 맛있네요&nbsp; (전문. p.64~65)<br><br>&nbsp; 딱 그림이 그려진다. 일식집 바. 소위 ‘다찌’라고 부르는 곳. 좀 됐겠지, 전에 둘이 와서, 그게 옛 애인이 됐건, 그냥 친구가 됐건 하여간 둘이 와서 다찌에 앉아, 회를 떠주거나 초밥을 만들어 한 점씩 건네주던 요리사가, 이게 생와사빈데요, 하면서 이야기를 했겠지. 시집이 나온 게 시인이 스물아홉 살이니까 틀림없이 둘이서 일식집 다찌에 앉아 회 또는 초밥을 먹었던 것도 20대였을 거다. 그래 요리사가 설명해주는 걸 나름대로 재미있고, 새로운 지식이기도 하고, 또 진짜로 먹어 보니까 그럴 듯하게 맞는 말이기도 해서 딱 기억에 남았겠지. 그러나 그 사이에, 예전과 오늘 사이에 나 아닌 둘 가운데 하나가 내 곁을 떠났고, 오늘은 나 혼자 와서 회 또는 초밥을 먹었는데 외롭긴 했겠지만 맛은 그대로네. 하는 시. 이왕이면 전에 함께 온 사람이 옛 애인, 그냥 조금 사랑한 사람 말고 가슴이 미어지도록 죽고 살 만큼 사랑했던 이였으면 어땠을까? 뭘 어때, 그랬으면 아예 다시 와 볼 생각도 안 했겠지.&nbsp; 이 시, 쉽다. 다 이랬으면 좋겠다.&nbsp; 이런 시? 한 페이지만 넘기면 또 나온다.<br><br>&nbsp; 휴일<br><br>&nbsp; 거울 앞에 나 아니고 노동이 서 있을 때&nbsp; 누군가 날 부르는데 노동이 고개 들 때&nbsp; 곰살갑게 식탁 앞에 앉아 있을 때&nbsp; 일인용 침대 위에 포개어 누울 때&nbsp; 그게 나의 내부를 계속 궁금해할 때&nbsp; 그래 나도 펑하고 보여줄까 고민할 때쯤<br>&nbsp; 쉬는 날이 온다<br>&nbsp; 정오쯤 일어나서&nbsp; 햅쌀을 안치고<br>&nbsp; 거실 바닥 쓸고&nbsp; 화분에 물도 주고 하는 날<br>&nbsp; 쓸모없는 나절을 꼭 보낸 다음&nbsp; 사랑하는 소리를 듣고 내는 날<br>&nbsp; 노동한테 이겨먹기 위해&nbsp; 내가 제일 가엽다는 생각 하나로&nbsp; 누구 하나 미워할 필요 없이도<br>&nbsp; 간신히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날&nbsp; (전문. p.66~67)<br><br>&nbsp; 이 시도 즉각 접수된다. 휴일 전경. 혼자 사는 청년의 휴일 하루. 아주 바람직한 청년이군. “거울 앞에 나 아니고 노동이 서” 있으면 내가 곧 노동이라 휴일을 기다리고 기다리는 노동자 신분이겠군. 하여간 다각도로 싱숭생숭할 때 휴일이 온다나? 착한 청년이라니까. 오정쯤에 일어나 대강 얼굴에 물 묻히고 나가서 삼각김밥에 라면 사 먹는 게 아니라 햅쌀 안치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이런 청년 있으면 당연히 사위감으로 눈 여겨봄 직하다. 그리고 곧장 청소도 하잖아. 장가들면 아내 고생은 안 시키겠네. 이렇게 자잘한 거 해주는 남편이 진짜 귀염 받는 거다.&nbsp; 그건 그런데, 다른 시들도 전부 이렇게 쉽고 편하지는 않다는 거.&nbsp; 좋건 싫건 간에 오늘이 9월 1일, 하여간 어쨌거나 오늘부터 가을이다. 드디어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왔다.” 그러나 아직도 겁나게 덥지? 좋다. 이 시집의 제목도 “여름의 사실”이니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를 기억하며 전욱진의 여름 노래 하나 들어볼까?&nbsp; 여름은 장마전선이 북쪽으로 밀려 올라가면 그때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리하여,<br><br>&nbsp; 몬순<br><br>&nbsp; 실바람에 거뜬히도 걷는 이가 많은&nbsp; 강변에는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과&nbsp; 그의 아들애로 보이는 사람도 있다<br>&nbsp; 손잡고 이어진 둘을 내가 지날 때&nbsp; 자주 강을 건너는 기관차도 지나고&nbsp; 어머니가 무슨 말을 들려주었는지&nbsp; 아들애가 말 따라 큰 소리 내더니<br>&nbsp; ‘따우 호아’는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nbsp; 아이 어머니는 ‘기차’라고 일러준다&nbsp; 고향에서 쓰던 말인가보다<br>&nbsp; 그렇게 같은 말소리가 거듭&nbsp; 어린아이로부터 생겨나더니&nbsp; 강을 가로지르는 긴 빗소리&nbsp; 불어오는 물바람도 미지근히&nbsp; (전문. p.16)<br><br>&nbsp; 이 시도 수월하게 읽힌다. 난 어지러운 시는 이제 어려워서 별로 끌리지 않는다. 고르고 고른 시 역시 그래도 빨리 접수되는 시였구나. 이 대목에서 한 번 웃어야 하는데 시 읽는 소양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 거 같아서 웃는 것도 좀 민망하다.&nbsp;&nbsp; 근데 나로하여금 곤혹스럽게 만드는 게 2연 첫 행. “손잡고 이어진 둘을 내가 지날 때.”&nbsp; 손잡고 이어진 둘은 틀림없이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과 아들애로 보이는 사람이겠다. 그런데 내가 이런 둘을 지나가? 여기서 ‘내’가 ‘나의’ 즉 소유격 일인칭대명사? 아니면 강변이니까 강보다는 좀 작은 내川? 이건 좀 알아야 시를 그나마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근데 모르겠다는 말이다. 다문화 모자가 등장하는 거야 뭐 제목을 “몬순”이라 해 놓았으니 제대로 된 몬순이 흔한 나라를 떠올리게 하는 기구일 터이니 알아듣겠는데, 그래서 강을 가로지르는 길고 긴 비, 몬순이 올 것일진대, 저 “이어진 둘”이 뭐냐, 이거다. 처음엔 “이어진 돌”이라 읽어 징검다리 비슷한 돌다리로 알았지 뭐야. 이런 형광등 같으니라고. 혹시 이어진 둘이란 것이, 동남아에서 온 어머니와 다문화가정의 아들. 그러니 이것도 우리나라의 아열대화 비슷한 걸 떠올리게 쓴 것일까?&nbsp; 글쎄 이런 건 시인한테 물어봐도 안 가르쳐준다니까? 당신 생각이 맞습니다, 이러고 말 걸?&nbsp; 하여간 장마, 이젠 기후변화로 장마를 극한 몬순이 끝나면 곧바로 들이닥치는 게 폭서다.<br><br>&nbsp; 폭서<br><br>&nbsp; 슬그머니 볕이 그늘로 들어온다&nbsp; 팔월 목전에는 볕도 버거운가보다&nbsp; 그늘은 기꺼이 자리를 내주고&nbsp; 처지와 사정을 서로 묻고 답하며&nbsp; 처음 만난 사이에도 알록달록한데&nbsp; 지나가던 바람이 어디 길을 묻길래&nbsp; 책을 덮고 내가 먼저 가르쳐준다&nbsp; (전문. p.17)<br><br>&nbsp; 이 시도 재미있다. 더 좋은 건 짧기까지 하다는 거.&nbsp; 8월에는 볕도 버거워 그늘이 기꺼이 자기 자리를 내준다는 건, 그늘에 햇볕이 쳐들어와버렸다는 뜻이겠지. 덥겠다. 더워도 오지게 덥겠다. 8월 더위는 충분한 습기를 머금고 있어서, 축하합니다, 오후 세시 현재 습도 89퍼센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저 숨이 턱턱 막힐 터인데, 이상하게 시는 그리 덥지 않다. 그건 바람이 지나가면서 묻는 길을, 내가 책을 탁, 덮으며 갈 길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하여간 책을 덮으면서 길 가르쳐주는 일 하나는 시원하잖아.&nbsp; 당신의 여름도 그나마 견딜 만했기를 바란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091/99/cover150/89364248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0919935</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네미롭스키는 여기까지 쓰고 죽었다 - [돌체]</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82240</link><pubDate>Mon, 31 Aug 2026 03: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8224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02833054&TPaperId=1748224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937/9/coveroff/k70283305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02833054&TPaperId=1748224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돌체</a><br/>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3년 06월<br/></td></tr></table><br/>.&nbsp; 8월 말일이니 오늘을 기점으로 어쨌거나 여름은 간다. 펄펄 끓는 8월에만 세 번째로 네미롭스키를 업로드한다. 맞다, 더워서 내가 조금 미쳤다.&nbsp; 세 번의 네미롭스키에서 두번째, &lt;6월의 폭풍&gt;은 재미없었다. 이야기가 분량에 비해 너무 방만하고, 등장인물도 수다한 바람에. 그런데 &lt;돌체&gt;를 읽고 전작이 재미없던 것이 다 이유가 있구나, 탁 알아챘다. 지난 주 독후감에 말했다시피, 네미롭스키는 2차세계대전 발발 이후에 모두 5부작을 &lt;프랑스 모음곡&gt;이란 제목으로 구성해서 1권 &lt;6월의 폭풍&gt;, 2권 &lt;돌체&gt;를 썼고, 3부는 대강의 스토리만, 4부와 5부는 제목만 정했다고 했다. 이건 &lt;6월의 폭풍&gt;을 한 편의 완결된 장편소설로 읽으면 나처럼 별 재미없는 작품으로 받아들이기 십상이라는 뜻이다. 물론 각 권을 각각의 한 작품으로 읽어도 되기는 하겠지만 1권부터 5권까지 마치 대하소설 비슷하게 읽는 게 훨씬 바람직할 터였다. 물론 작가가 작품을 쓰는 도중에 세상을 떠서 애초에 불가능했지만. &lt;6월의 폭풍&gt;은 그러니까 5부작의 1권답게 앞으로 펼쳐질 스토리의 단초들이 가능한 한 많이 나와야 하니 독자 기준으로 조금 난삽하게 느꼈겠다.&nbsp; 2권 &lt;돌체&gt; 역시 한 권의 독자적인 장편소설로 읽힌다. 그러다가 작중 조금씩 어딘지 친숙한 분위기가 느껴질 때쯤 아하, 전편의 특정인물이 이 장소, 이 등장인물하고 연결이 되는구나, 알아채게 된다. 이럴 때 독자는 당연하게 자잘한 즐거움을 배로 느끼는 게 보통이기도 하고.<br>&nbsp; &lt;6월의 폭풍&gt;은 1940년 6월 4일에 시작한다. 그로부터 한 열 달 후인 1941년 봄. 중부 프랑스의 작은 읍, 면 단위의 뷔시. 시내도 아니고 작은 농촌이 주 무대이다. 특히 부르주아 앙젤리에 가문. 이 앙젤리에 가문의 집도 독자가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렇지 &lt;6월의 폭풍&gt;에 한 번 등장한 적이 있다. 코르뱅 은행에 다니던 잔과 모리스 미쇼 부부가 뷔시 방면으로 피난을 가 며칠 묵은 집이 바로 앙젤리에 저택. 그리고 프랑스 말로 뭐라 하는 바람에 1권 읽을 때는 잘 몰랐는데 앙젤리에 저택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 소작인 집의 주인이 브누아 라바리. 미쇼 부부의 외동 아들이자 죽어가는 프랑스군 부상병 장마리 미쇼가 몇 달 동안 요양을 해 완쾌한 집이다. 거기서 도시의 예쁘장한 대학생이기도 했던 장마리와 사랑을 만들어간 마들렌은 지금 집주인 브누아 라바리와 결혼해 아이도 하나 있다. 1권에서 약혼자 브누아는 프랑스 포로로 잡혀갔다가, 독일 땅에서 탈출해 뷔시의 집까지 걸어서 온 신체 건강한 공산주의자다. 그래서 귀족, 부르주아 알기를 개떡 같이 안다.&nbsp; 앙젤리에 가문에 지금은 두 부인만 산다. 포로로 붙잡혀 독일로 끌려간 가스통 앙젤리에의 어머니와 아내. 어머니는 앙젤리에 부인, 아내는 ‘뤼실’이라고 하자.&nbsp; 뤼실은 남편 가스통과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다. 당시에는 대지주의 딸이었지만 아버지가 잘못된 투자를 하는 바람에 재산을 날려 결혼과 동시에 남편 가스통은 아내 뤼실을 돌 같이 알기 시작했다. 이런 단계에서 대학 시절을 보낸 디종에 사업상 드나들다 모자 판매점에서 옛 대학 시절 첫사랑이었던 여자를 만나 발작적으로 연애를 시작해서, 연애를 한 김에 혼외자도 하나 만들었다. 씨를 책임지기 위하여 가스통은 도시 변두리에 작은 집을 마련해 일년의 절반 정도는 사업 명목으로 디종에서 보내고 있다. 물론 뤼실도 이를 알지만 엄마 앙젤리에 부인은 전혀 모른다.&nbsp; 앙젤리에 부인은 전형적인 시어머니로 돈도 없이, 돈만 바라고 결혼한 것처럼 보이는 며느리 뤼실을 지극히 미워한다. 말도 거의 없다. 하는 꼴이 고운 것도 하나 없고 특히 뤼실이 책 읽는 꼴을 못 본다. 책을 폈다 하면 곧바로 타박이다. 할 일이 얼마나 없으면 책을 꼬나보고 그 모양이니? 상추쌈 먹는 모양도 꼭 시어미를 째려보는 것 같고.<br>&nbsp; 드디어 1941년 봄. 독일군이 뷔시에 세 번째로 들어왔다. 독일군은 점령지 주민에게 두려움, 존중심, 혐오감을 갖게 했고, 프랑스 시민으로 하여금 그들도 필요한 것이 있을 게 틀림없으니 독일군의 돈을 갈취해 그들을 이용해서 바가지를 씌우고 싶어하는 짓궂은 욕망을 갖게 만들었다. 책에 나오는 네미롭스키의 독일군은 우리가 그동안 영화를 통해 숱하게 본 악랄한 나치, 게슈타포가 아니다. 이 책의 역자 이상해가 번역한 베르코르의 작품 &lt;바다의 침묵&gt;에 등장하는 파리 주둔 독일군 장교처럼 매너 좋고, 기품 있으며 예술을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할 줄도 아는 신사도가 몸에 밴 사람들. 중부 프랑스에서는 볼 수 없는 금발 머리에 창백한 피부와 깊숙한 눈동자를 지닌 꽤 큰 덩치의 젊은 사나이들.&nbsp; 기억하시라. 지금 프랑스의 절은 남자들은 거의 모두 전쟁터에 나가서 근 2백만 명이 포로로 잡혀 독일 땅에서 박박 기며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전쟁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꽤 그럴듯한 저자가 쓴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인류학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전쟁은 필연적으로 인구, 특별히 남성 인구의 감소를 가져와 여성으로 하여금 (본능적으로)출산 욕구를 높인다고 한다. 영양상태가 좋지 않은 소나무일수록 솔방울을 많이 매달듯이. 젊은이라고는 여성들만 바글거리는 뷔시의 시골 동네에 젊고 잘 생기고 깨끗한 옷을 입은 남자들이 떼로 들어왔으니 여성들 마음이 어떻겠어?&nbsp; 이런 독일병사와 연애를 하는 양장점 여자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죠?”라고 묻는 뤼시 앙젤리에에게 말한다.<br>&nbsp; “뭐가 어때서요? 독일인이든 프랑스인이든, 친구든 적이든, 그 사람은 어쨌거나 남자예요. 전 여자고요. (중략) 여기 남자하곤 질이 달라요. 피부도 부드럽고, 치아도 하얗고, 키스할 때도 신선한 숨결이 느껴져요. 이곳 남자처럼 술 냄새가 나진 않죠. (중략) 전쟁과 그 모든 격변이 우리 삶을 너무 복잡하게 만들어놨어요. 남녀 사이에는 그딴 거 다 소용없어요. 영국인이든 흑인이든 내 맘에만 든다면, 그에게 절 바칠 거예요. 가능하다면 말이예요. 제가 혐오스러우세요? 물론, 그렇겠죠. 당신은 부자에다 제가 알지 못하는 즐거움도 누리실 테니” (p.141)<br>&nbsp; 이 인용문에 내 메모가 달렸다. “마음에 드네.”&nbsp; 근데 문제는, 독일군이 주둔을 하긴 했는데, 많은 병사들을 재울 장소가 없다. 사병들은 그냥 회관 하나 빌려서 자라고 하면 되겠지만, 부사관이나 장교, 그것도 위관, 영관, 장군 등의 계급을 나누어 그에 걸맞은 침실을 확보할 도리가 없다. 호텔 비슷한 것도 없는 동네. 그리하여 저 시골집, 불과 몇 달 전에는 프랑스 부상병 장마리 미쇼가 병을 다스리던 라바리의 집에는 열아홉 살 먹은 통역 장교 쿠르트 보네 중위가 묵고, 앙젤리에 저택에는 기병대 지휘장교인 부르노 폰 팔크가 들어가게 됐다. 앙젤리에는 지주이자 부르주아 저택, 라바리는 앙젤리에의 소작인 집. 그러니까 같은 중위라고 해도 쿠르트 보네가 아무래도 끗발로 쳐서 부르노 폰 팔크한테 한참 밀리는 것처럼 보이지? 그렇다. 지금 파리를 통치하는 군사령관의 친위참모가 폰 팔크를 가장 사랑하는 삼촌이고, 쿠르트 보네는 루이 14세 시대에 독일로 쫓겨간 프랑스 혈통이란다.&nbsp; 보네가 들어가 지내는 소작인 집의 주인 브누아는 조금 의처증 기질이 있다. 있을 수밖에 없게 생겼다. 포로로 잡혀간 딱 그 세월 동안 자기 집에 부상병 장마리가 와서 지금의 아내 마들렌이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를 해 주었다는 걸 동네 사람들과 누이동생한테 들어 알고 있던 터. 이제 새롭게 새파란 독일 어린 놈이 집에 와서 젊은 아내가 아이한테 젖 먹이는 광경을 못 본 척하고 있다는 말이지. 그래서 사고가 나겠어, 안 나겠어?&nbsp; 하지만 작품의 진짜 줄거리는 부부 사이에 사랑이라고는 1도 없으면서 결혼생활을 이어가다가 남편이 저 멀리 독일도 아니고 프러시아 지역의 포로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있는 뤼시와, 그 집에서 달달한 사랑을 엮어갈 수도 있는 잘 생기고 훤칠하고, 피아노 연주가 수준급인 음악적 자질이 대단한 작곡가 선생 부르노 폰 팔크 중위 사이에 있다. 이거, 연애를 해야 해, 말아야 해? 요즘 소설이라면 연애는 모르겠고, 한 번 하기는 틀림없이 할 것 같은데, 1942년에 여성 작가가 쓴 작품이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이렇게 재미난 건 내가 알려드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계시지?&nbsp; 네미롭스키는 여기까지 쓰고 아우슈비츠에서 티푸스에 걸려 죽었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1937/9/cover150/k70283305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9370958</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글에 향기를 불어넣는 사람? - [비자나무 숲]</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76492</link><pubDate>Fri, 28 Aug 2026 03:5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7649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23905&TPaperId=1747649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99/84/coveroff/893202390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23905&TPaperId=1747649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비자나무 숲</a><br/>권여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03월<br/></td></tr></table><br/>.&nbsp; 12년 전에 권여선을 읽고 또 찾게 될 줄은 몰랐다. &lt;레가토&gt;가 그만큼 싫었다. 나를 뒤돌아보게 하지 마. 특히 그 방면으로는. 이렇게 &lt;레가토&gt;를 싫어하며 살다가, 그래서 도서관 서고를 서성거리며 권여선의 책 앞에서는 그냥 핑, 지나쳤다. 안 읽을 거야. 하지만 세월이 지났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는 읽어볼 수도 있는 일이겠지 싶어 고른 책이 소설집 《비자나무 숲》. 재미있게 읽었다. 그동안 거대 서사의 뒷 이야기는 사라지고 이제 사는 이야기, 도무지 실제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안 일어난다고도 할 수 없는 진짜 같은 이야기들. 이런 것을 우리는 픽션이라 부르고, 소설이라고도 하는데, 이리도 마음에 드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lt;레가토&gt;는 뭐하러 썼을까? 하긴 시절이 권의 가슴 속에 맺혀 자기 좀 이야기해달라고 할퀴고 뜯으면 안 쓰고 배기지 못했겠지.&nbsp; 이 책 초판이 2013년. 참 나. &lt;레가토&gt;가 불과 1년 전인 2012년에 나왔다. 내가 이 1년 터울을 넘기 위해 무려 12년을 쏟았으니.<br>&nbsp; 1965년생 안동 권씨. 하다못해 초등학교 소사 자리라도 하고 싶으면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인동 장씨 아니면 안 되는 동네가 안동이다. 60년대 안동 출신 안동 권씨 댁 공부 잘하는 따님. 근데 하필이면 그토록 어지럽고 깡패 같던 80년대 이 시절에 서울로 홀로 유학 왔으니 그것도 팔자소관이다.&nbsp; 안동이 고향이면 괜한 선입견이 드는 데, 집안이 엄했겠네, 하는 거. 근데 우리말 위키피디아 보면, 이이의 희망사항이 술을 1주일에 두 번, 나이 들어 좀 골골해지면 1주일에 한 번 마시는 거라고. 그러니까 《비자나무 숲》을 발표할 당시인 2010년부터 11년 까지는 마흔 다섯에서 여섯이었으니 술에 관한 한 인생의 황금시절이라, 1주일에 대여섯 번, 한 번에 최하 소주 두 병은 자셨겠구나. 술은 희망사항대로 1주 한 번이나 두 번으로 줄이더라도, 그것보다 먼저 담배 좀 끊었으면 좋겠다. 이 책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뭐 진짜 그렇겠는가만, 모든 작품에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씬이 나오는 거 같다. 이렇게 맛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 좀 더 오래 살아 좋은 글 많이, 많이 써달라는 독자의 바람 때문이다. 이건 괜한 오지랖 아니지?<br>&nbsp;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단편이 제일 앞에 배치한 &lt;팔도기획&gt;이다. 팔도? 팔도, 하면 역시 팔도 비빔면 아냐? 근데 책에서는 ‘팔도기획’이라는 기획 출판사. 기획출판이라 하니 뭔가 특집 기획, TV 같은 데서 자주 쓴 그런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겠지만, 이 팔도기획은 주로 자비 출판하려는 아마추어 작가 지망생의 글을 그래도 책 비슷하게 꼴을 잡아주고 문장도 나름대로 매끄럽게 교정해 책 비슷하게 만들어 주는 회사. 또는 큰 회사의 경우엔 어림도 없고, 그저 작은 회사의 10년사, 20년사 같은 거, 그룹사보다 훨씬 작은 중소업체 사장/회장/고문들의 회고록 대필 같은 것을 이름난 기획사에 비해 염가로 서비스해주는 업체를 말한다.&nbsp; 회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대표가 있겠고, 사실상 홍팀장이 사무실 전권을 가지고 있다. 아래로 영업담당 박부장과 선배인 정작가, 화자 ‘나’인 김작가가 근무한다. 뭐 당연히 ‘나’ 김작가는 최저시급 수준의 급여를 받는 거 같다. 그러면서 영업담당 박부장이 물어오는 기획물의 꼭지도 쓰고, 손님 오면 커피나 홍차 또는 계절에 따라 컵빙도 쪼르르 달려가 사 와야 하는 따까리 노릇도 한다. 사무실의 홍일점이라도 네 명 가운데 하나니까 굳이 홍일점 운운도 민망하다.&nbsp; 어느날 오후 4시 15분, 팔도기획에 방문객이 온다. 안경을 쓴 키가 작은 여자가 큼직한 가방을 메고, 옷차림은 교복처럼 단정하게 입은 20대 후반으로 보인다. 원고를 가지고 왔단다.&nbsp; 원고를 가지고 와?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서는 홍팀장.&nbsp; “저희 출판사에서는 성심성의껏 고객님의 자비출판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nbsp; 그러나 방문객은 홍팀장 대신 ‘나’ 김작가와 이야기하고 싶어하고, 김작가한테 본심, 이 회사에 일할 자리가 있으면 취직하고 싶단다. 국문과를 나왔고, 대학원도 1년 다녔는데 소설을 쓴다고. 실생활에서는 이런 무작정 지원자가 있으면 1695번에 한 번 정도 취직이 가능하다. &lt;팔도기획&gt;도 평범한 회사여서 당연히 집에 보냈지만, 능력있는 영업부장 박부장이 한 번에 무려 두 개의 대형 프로젝트를 물어와 당장 작가님을 한 명 보충해야 할 처지가 되어, 방금 본 윤모 선생한테 득달같이 전화해 책상 하나를 맡긴다. 정말 데뷔를 한 소설가인지, 아니면 그저 소설을 쓰는 사람인지는 확실하게 말하지 않지만, 데뷔 여부가 뭐가 중요한가, 그저 소설을 쓰면 소설가, 소설을 쓰는 사람이지, 그러면 됐지.<br>&nbsp; 박부장이 물어온 것 가운데 하나가 잘 나가는 프랜차이즈 업체 “팔도닭발”의 나이든 회장이 이제 삶을 정리하기에 앞서 자기가 살아온 회고록을 내고 싶다는 거였다.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업체의 이름이 같은 ‘팔도’기획이라서 유난히 관심을 끌어 적지 않은 개런티로 계약을 했단다. 이렇게 해서 팔도닭발에 전력투구 시작. 무엇보다 회장이라던가 하는 노인과 인터뷰를 하고, 녹음한 것을 풀어야 하며 필요하면 사진도 몇 장 박아야 할 터, 선배 정작가가 신입 윤작가한테, 출발하자고 했지만, 소설가 윤작가가 하시는 말씀이:&nbsp;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nbsp; 자신은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 소설을 쓰는 사람이 할 일은 글에 향기를 불어넣는 거란다. 글의 향기. 몇 번 이야기했는데, 여기서 “글의 향기” 말고 “글의 냄새”라고 썼으면 어땠을까? 하여간 윤작가는 글의 향기를 불어넣는 사람이고, 글을 쓰자면 먼저 큰 그림, 구성을 잡아야 하니 자기는 함께 출장을 가지 않고, 그 시간에 구성을 짜겠단다.&nbsp;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nbsp; 녹취한 것을 가지고 왔다. 이제 녹취를 풀자고 권하는 선배 정작가. 아니나 다를까.&nbsp; “저는 여기에 글을 쓰러 왔습니다.”&nbsp; 이러니 이게 일이 되겠나?&nbsp; 근데 여기서 파박,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 있다. 거의 모든 업무 지시에 I would prefer not to, 하지 않으려 합니다,로 일관하는 필경사 바틀비. 사실은 저 앞에서 벌써 바틀비가 전두엽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팔랑팔랑 나부끼기 시작했었다. 나도 35년간 회사생활 했는데, 아무리 일을 잘 해도 이익창출을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는 게젤샤프트 집단에 이런 특출나고 독립적인 조직원이 하나라도 끼어 있으면 여지없이 삑사리 난다. 속으로는 윤작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백퍼 동의하고 응원까지 마다하지 않지만, 아후, 저러다 윤작가가 오래 못 가지, 하는 걱정도 한 소쿠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고비를 몇 번 더 넘기고 드디어 한 번만 더 참으면 무릎 도가니에 사리가 생길 위기감에 사로잡힌 까마득한 선배님 정작가 입에서는 모진 말씀이 튀어나오고야 만다.&nbsp; “그럼 나가! 나가, 이 쌍년아!”&nbsp; 어찌저찌 회고록은 나왔다. 젊은 시절 오만가지 고생을 한 붉은 손 빈 주먹의 사나이에서 팔도닭발의 총수가 되기까지의 성공담. 이렇게 일이 다 끝나고 그 잘난 윤작가의 원고도 누군가 한 번 들춰봤겠지? 그게 어땠을까? 입에 달고 다니던 말처럼 “글에 향기를 불어넣어”주었을까? 안 알려줌.<br>&nbsp; 다른 작품도 좋다. 과하게 폭력적인 딱 하나 &lt;소녀의 기도&gt;는 빼고.&nbsp; 괜히 권여선에게 미안하다. 하필이면, 글이 안 좋아서가 아니라 등장인물의 고뇌 속 시절이 하도 지긋지긋해서 정나미가 떨어진 &lt;레가토&gt;를 먼저 읽은 내 잘못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마음에 드는 작품을 쓴 작가인 걸 몰라봐서. 아무쪼록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좋은 작품 많이 쓰기 바란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499/84/cover150/893202390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998436</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암호, 천재들의 경합 - [암호 해독자]</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74436</link><pubDate>Thu, 27 Aug 2026 04: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7443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4993&TPaperId=1747443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26/63/coveroff/893746499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4993&TPaperId=1747443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암호 해독자</a><br/>마이자 지음, 김택규 옮김 / 민음사 / 2026년 06월<br/></td></tr></table><br/>.&nbsp; 마이 자, 한자어 이름 ‘麥家’, 1964년 용띠 아저씨. 저장성 복양현에서 나서 언제 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17년간 장교로 군 복무를 했다 한다. 중국은 사회 기반 곳곳에 군부가 개입하고 있어서 말이 장교로 군복무이지 사실 사회부문에서 일했을 수도 있다. 책 읽는 독자한테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군대에 있으면서 인민해방군 공병기술 아카데미 무선학과를 졸업하고 1986년부터 집필,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데 이때도 나이로 보면 군 장교였을 터이다. 이후 1991년 인민해방군 예술 아카데미 문학과를 또 졸업하고, 1997년에 청두 TV 방송국 드라마 부서에서 각본을 썼단다. 그리하여 이이의 데뷔작품인 &lt;암호해독자&gt;는 기본적으로 군사조직에 속해 있고, 모든 정보기관을 망라하는 핵심 기관에서 적국의 암호를 해독하는 일을 맡은 천재의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다분히 TV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도 수긍이 간다.&nbsp; 이어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해 중국의 다양하고 유명한 문학상을 차곡차곡 받는 등, 성가를 높였다. 하여간 중국이란. 위키피디아에 웃긴 이야기가 있어서 그대로 복사해왔다. 중국어 해독이 어려워 AI가 번역한 우리말이다.<br>&nbsp; 2014년 10월 15일, 마이 자이는 베이징에서 시진핑 중앙위원회 총서기가 주최한 "문학예술 작품 심포지엄"에 참석해 시진핑의 연설을 들었다. "우리의 예술은 사회주의 예술이며, 애국심과 당에 진리, 선, 미의 정신을 증진해야 한다." 회의 후 시진핑은 마이 자와 악수하며 그를 칭찬했다: "당신의 '음모'와 '메시지'를 봤습니다. 당신은 첩보극 1위입니다.”<br>&nbsp; 심포지엄에 가서 시진핑의 훈화를 들은 것이 위키피디아에 적시할 정도의 영광이었다. 게다가 시수석이 칭찬까지 했으니 아마도 어구를 글로 써서 금박 입혀 표구까지 해 놓지 않았을까 싶다.&nbsp; 하여간 &lt;암호해독자&gt;는 1991년에 작품을 쓰기 시작해 2002년에 완성, 출간했으니 무려 11년간을 절차탁마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11년 동안 죽자사자 소설을 쓴 건 아니고, 예술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방송사에 들어가서 일 하는 동안 틈틈이 작업을 했을 터이니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br>&nbsp; 작품은 1873년에 한 청년이 퉁전을 떠나 서양 유학길에 오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룽容씨 가문의 7대손이자 막내인 룽쯔라이容自來. 서양에 가서 새로 지은 이름은 존 릴리. 릴리의 할머니인 노 마님은 큰 소금상을 했던 거대가문의 당당한 주인으로 슬하에 9남7녀를 두었는데, 릴리가 노마님의 9남 가운데 막내인지, 아니면 손자들 가운데 막내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노마님이 나이를 많이 자셔서 잠도 없으면서 잠만 잤다 하면 꼭 길고 긴 꿈을 꾸었는데, 좋은 꿈도 있지만 가위눌리는 꿈도 숱했던 지라 이의 해몽에 큰 관심을 가졌다. 당시 많은 해몽가 가운데 서양, 아마도 잉글랜드에서 온 백인 청년을 가장 신뢰해서, 백인 청년이 언젠가는 중국을 떠날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한 노마님은 떠나기 전에 자기 후손 가운데 가장 총명한 룽쯔라이를 청년의 할아버지한테 보내 해몽법을 배워 오라고 시켰다. 그리하여 몇 달 동안 배를 타고 멀미를 해가며 노 대가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전보로 노마님이 운명해버렸다는 연락이 먼저 와 있었다. 쯔라이는 당장 귀국하는 대신 대학에 가서 몇 과목을 청강해본 후에 그곳에 남아 더 공부를 하기로 결심해, 슬라브인과 터키인 선생한테 기하학, 수론 그리고 방정식 즉 대수를 배웠으며 밤에는 바흐의 3대 제자가 가르치는 과목을 청강해 음악도 배우기에 이르렀다.&nbsp; 7년 후인 1880년, 막 따낸 포도 수십 광주리와 함께 귀국선에 오른 릴리가 도착했을 때는 엄동설한이었는데, 사람들은 이이를 보고, 변발을 깎고, 서양식 옷을 입었으며, 포도가 푹 익어 술로 변한 와인을 입에 달고 살면서, 새 지저귀는 소리를 섞어서 말을 할 뿐만 아니라 이상한 이름으로 자기를 부르라더니 급기야 소금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소금상 가문의 천재, 머리가 좋으니 당연히 숱한 아들 가운데 앞으로 소금상의 대를 이어야할 인간이 소금 냄새를 맡지 못한다? 아, 이를 어째?&nbsp; 노마님은 죽기 전에 천재 수준으로 머리가 좋은 릴리에게 벽장에 든 은덩어리를 주라고 유언을 해, 릴리는 그걸 다 팔아 만든 거금으로 인근 C시에 학교를 세워 ‘릴리 학당’이라고 했다. 이 학당은 후에 남중국의 명문 N대학의 전신이 된다.<br>&nbsp; 릴리 학당은 당시 파격적으로 중국 사회를 놀라게 했으니, 여성의 학당 입학을 허락한 거였다. 하지만 어느 집에서도 자기네 딸을 학당으로 보내, ‘내돌리’지 않았다. 따라서 처음엔 여학생 전부가 룽씨 집안의 딸들이었 수밖에. 이 가운데 릴리의 큰형이 예순 살 먹어서 애첩한테 얻은 아이, 즉 릴리의 조카딸이 무지하게 총명해 아이를 본 릴리는 열일곱 살이 되자 고모네 사촌오빠와 함께 케임브리지에 유학을 보냈다. 갓 나았을 때부터 머리가 하도 커서 대두大頭라고 부르다가, 워낙 숫자에 밝아 수동 계산기 주판을 붙여 대두주판籌板이라 하기도 했다. 케임브리지에 들어가보니 원래 재능이 있던 수학과 더불어 언어에도 재능이 있는 게 밝혀져, 일곱나라 언어에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어까지 합해 여덟 나라 말을 자유자재로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유학 5년만에 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이듬해부터 2년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로 날아가 라이트 형제 팀과 합류, 최초의 비행기 날개를 설계했다. 원래 이름이 룽유잉容幼英, 서양식 이름으로 애버커스 릴리로 불렸다.&nbsp; 신해혁명 후 귀국해서 C시의 N대학 수학과 주임교수로 일하다가, 이 때가 이미 마흔을 바라보던 나이의 룽박사는 늦게 린林씨 남자와 혼인을 했으나, 노 릴리를 능가하는 천재는 곧 끊어지고 말았다. 가뜩이나 노산인데다 아이가 기형적으로 큰 머리통을 달고 있어, 룽박사는 몇날 며칠을 과다한 출혈과 지독한 산고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룽교수의 고통을 지켜보던 노 릴리는 이렇게 말했다.&nbsp; “태어난 녀석은 황제 아니면 악마일 거요.”&nbsp; 유잉은 마지막으로 출산을 위해 발버둥을 치다가 간이 터져 죽었단다. 내 의학 상식으로는 아무리 독한 난산이라도 간과는 별로 상관이 없을 듯한데, 모르지, 의학이 그리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출산을 위해 간에 치명적인 약물을 투여했을 지도. 하여간 희대의 천재 한 명이 그렇게 갔다.<br>&nbsp; 유잉이 죽으면서 살려낸 아들은 이름도 없었다. 친가인 린씨 집안은 C시에서 재산규모가 어마어마한 명문가이지만 어미를 죽이고 나온 대가리만 큰 자손을 호적에 올리는 걸 거부했다. 그저 별명으로 큰 대가리 달린 귀신이란 뜻의 대두귀大頭鬼라고 불러, 외가인 룽씨 집에서도 그렇게 쓰는 줄 알았다. 이 대두귀는 열두 살 때부터 스무살에 죽을 때까지 근 십 년간 최소 열 건의 살인을 저질렀고, 몰래 담을 타 데리고 와서 논 여자가 백 명을 헤아렸다. 이 가운데 앙심을 품은 기생 하나가 사람을 사서 지나가는 대두귀의 등짝에 비수를 꽂는 바람에 죽었다. 천재의 아들 역시 천재를 지녔으나 다른 방향으로 천재를 보여 죽음에 이르렀고, 큰대가리귀신의 게임값을 물어주기 위하여 엄마의 삼촌 노 릴리의 곳간마저 휑하게 비어벼렸다는 걸 끝내 대두귀는 알지 못했으리.&nbsp; 어쨌건 장례를 마쳐 이제 집안에 없었던 인간으로 취급할 즈음, 이게 웬일, 배가 볼록한 정체불명의 여인이 N대학의 노 릴리를 찾아가 대두귀의 아이라고 주장했다. 릴리는 자기 아들 룽샤오라이, 작은 릴리가 잠시 머물고 있던 고향 퉁전으로 비밀리에 보내 몸을 풀게 조치해주었다.&nbsp;&nbsp; 지금 처음 소개하는 작은 릴리. 노 릴리의 아들이고, 노 릴리의 좋은 머리를 타고 난 인물로 나중에 N대학의 총장까지 오른다. 대학에서 자리를 잡자 아버지와는 달리 친척 등을 대학에 두지 않고 멀리 하여 훗날 청렴한 천재의 면모를 보이는 중요한 조연을 한다. 그럼 주연은? 아직도 안 나왔다.&nbsp; 이 임신한 여성의 배 속에 든 인물이 주인공이다. 1932년경 대두귀의 씨를 받아 임신한 여성은 대두귀처럼 머리가 큰 아들을 낳는 동안, 대두귀의 어머니처럼 죽고 말았다.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 확신하지 못했던 룽씨 사람들은 아이를 보자마자 완전히 죽은 대두귀가 다시 나온 듯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자기네 집안 씨도 아닌 버려진 아이. 그리하여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그냥 도깨비, 사귀死鬼라고 하고, 늙은 하인 부부에게 거두어 키우라고 했다.&nbsp; 과거에 노부인의 꿈 해몽을 해주던 서양 청년이 이젠 늙어 양洋선생이라 불렸다. 아이한테 어찌 도깨비라 할 수 있겠느냐, 싶어서 대두귀의 아들이니 대두충大頭蟲이라 하며 자기가 데려다 키웠다. 룽씨 집안 사람들이 흉한 일 이후에 다시는 들어가지 않던 배나무 정원, 이원梨園의 작은 건물에서. 이 대두충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근데 이제야 나왔다. 늙은 꿈 해몽가 양선생은 오직 하나, 이 대두충에게 영어로 말하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들고, 서양 철학의 큰 가지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교 철학을 몸에 배게 만드는 역할을 하다가 1944년에 숨을 거두며 중요한 조연, 작은 릴리에게 편지 한 장을 보내고 늙어 죽는다. 그걸 정리하면 이렇다.&nbsp; 아이의 천부적 자질이 대단하다. 남에게 괴팍하고 냉담한 것 빼고는 아이의 할머니와 두 물방울의 물처럼 서로 흡사하다. 머리가 남다르고 이해력이 높으며 강하고 침착한 성격이다. 이제 열두 살. 누군가의 보호와 사랑과 교육이 필요하며, 진짜 이름을 지어주는 것도 필요하다.&nbsp; 그리하여 작은 릴리가 대두충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산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지만 특히 작은 릴리의 아내에게 대단히 큰 정을 느껴, 평생 사모님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걸 굳이 이로 손가락을 물어 뜯어 혈서로 쓴 것을, 얼마 후 사모님이 보고 감격 먹는다.<br>&nbsp; 작은 릴리는 대두충에게 대두충 대신 진전金眞이라는 이름을 주었다가, 남자가 여자 이름을 가지면 더욱 재주가 뛰어나게 된다는 얘기가 생각나 곧 진전金珍으로 수정한다.&nbsp; 그리고 공부를 시켜보니, 이게 천재도 천재 나름이지, 여태 살면서 이런 천재는 본 적이 없을 정도. 나이는 겨우 중학교에 가야 하지만 실력은 고등학교를 넘어 대학에서 수학을 수강해도 최상위 등급은 우습게 받을 정도이다.&nbsp; 릴리는 중국의 유학파. 작은 릴리 역시 유학파라서 때마침 N대학 수학과에 적을 둔 대단한 학자 시스 교수의 지원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 하는데 그만 어린 시절에 양선생을 따라 어린아이한테 맞지 않는 약초를 오래 복용해서 그랬는지 심각한 신장병에 걸려 미국행이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지상 최고의 선진국 미국에서 인공지능, 그러니까 컴퓨터 공학 비슷한 걸 하라는 시스 교수의 희망, 권유가 꺾이고 말았다.&nbsp; 이 책은 순문학이라기보다 추리물에 가깝다. 그러면 유대인 시스 교수도 무슨 꿍꿍이가 있겠지? 세상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의 최고 천재를 그냥 놔둘 턱이 없다. 누구라도 발견하기만 하면 자기 욕심대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하게 만들고 싶은 것이 이런 동네 종사자들 아닌가? 그러나 대두충, 진전, 후에 진전이 작은 릴리이게 부탁해 룽씨 성을 얻어 룽진전이 되는 주인공은 세계 과학의 발전이 아니라 중국의 정보기관에서 적 X국에서 만든 암호, 퍼플코드와 블랙코드를 해독하게 되는데….<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26/63/cover150/893746499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266382</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하, 왕자의 자동차, 이걸 우짜까? - [6월의 폭풍]</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72327</link><pubDate>Wed, 26 Aug 2026 04: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7232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833054&TPaperId=1747232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937/7/coveroff/k61283305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833054&TPaperId=1747232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6월의 폭풍</a><br/>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3년 06월<br/></td></tr></table><br/>.&nbsp;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인 이렌 네미롭스키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어떤 죽음을 맞았는지는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짐작할 수 있을 듯. 다만 아우슈비츠에서 이이의 영혼이 굴뚝의 흰 연기로 빠져나가지 않고, 한 달 만에 디푸스에 감염되어 죽은 것만 조금 다르다. 이 때가 1942년. 여전히 나치의 전성기, 거꾸로 말하면 이제 전장마다 연속적인 패전만 남았을 시절. 결국 독일이 완전히 패배해서 거의 유일신 비슷한 자리를 누렸던 히틀러조차 지하 요새에서 권총 자살로 시신마저 찾지 못할 줄은 전혀 몰랐다.&nbsp; 전쟁이 터지자 네미롭스키는 자신이 본 전쟁의 모습을 원고지에 옮기기로 마음먹고 약 1천페이지 분량의 5부작으로 구상했단다. 이 5부작의 제목을 &lt;프랑스 모음곡&gt;이라 정했다고. 첫 작품이 지금 독후감을 쓰려 하는 &lt;6월의 폭풍&gt;이고 두번째가 &lt;돌체&gt;. 두 작품은 완성이라기보다 초고를 써서 출간은 하지 못하고 가방에 넣어둔 채 체포되어 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맞았다. 3, 4, 5부 &lt;포로&gt;, &lt;전투&gt;, &lt;평화&gt;는 메모만 있거나 제목으로만 남았다.&nbsp; 네미롭스키의 두 딸은 가방을 물려받고 차마 열어보지 못한 채 20세기 끝 무렵까지 그저 보관만 했단다. 원고를 발견한 후에도 엄마가 직접 퇴고하지 않은 작품을 출간하기가 망설였다가, 집필 65년 만인 2004년에 &lt;프랑스 모음곡 Suite Fransaise&gt;라는 제목으로 빛을 보았다고. 짧게 말해서 작가 만큼이나 기구한 운명의 작품이다.<br>&nbsp; 작가도 기구한 운명을 맞았고, 작품도 기구한 세월을 보내다가 늦게 출간했으니 이런 비극적 내력을 가진 작품이라 당연히 굉장하겠지, 이런 기대는 일단 접고 책을 읽는 것이 좋다. 나도 별 기대하지 않고 읽었다. 기대가 크면 의례 실망하게되더란 것을 익히 경험해봤기 때문에. 근데 말이 그렇지, 사실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는 건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작품마다 독자의 심금을 콕콕 찌르는 네미롭스키의 미완성 5부작 가운데 첫 작품이라는데 그걸 기대하지 않기도 쉽지 않잖아?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솔직한 감상.&nbsp; 작품은 1940년 6월 4일 밤부터 8월까지.&nbsp; 1940년 5월 10일에 프랑스 국경을 침범한 독일은 마지노선을 우회해 눈에 보이는 프랑스군을 거덜을 내며 파죽지세로 전진, 6월 13일에 파리를 함락한다. 함락을 눈 앞에 둔 파리 시민은 전쟁이 터졌으니 당연히 지대지, 공대지 폭격을 시작할 것이고, 그 결과 파리는 잿더미가 될 것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어제, 6월 3일 밤에 개전 이래 처음으로 파리에 폭탄이 떨어져 건물이 폭싹 무너지고 사람도 여럿 상했다. 여기에 전선에서 프랑스군의 퇴각 소식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하자, 파리 시민들은 공포에 휩싸여 일제히 파리를 벗어나 서부 또는 남부 지역으로 피난을 떠났다. 부르주아와 고급 공무원들은 자신들의 차에 고가의 가구며 은식기 등을 싣고, 중산층 이하 사람들은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국도를 거의 메우다시피해 피곤한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nbsp; 근데 문제는 이 장면이 새롭지 않다는 것. 피에르 르메트르가 쓴 &lt;우리 슬픔의 거울&gt;에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오르부아르 3부작” 마지막 작품인 만큼 범죄 스토리를 곁들인 전쟁 개시와 피난 행렬,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조건들의 모습을 르메트르 만큼 흥미진진하게 묘사하는 작가도 드물 터, &lt;6월의 폭풍&gt;에서 가장 중요한 피난 장면을 읽으면서, 어째 좀 싱겁다, 간이 덜 됐네, 하는 생각을 하지 않기도 어려울 듯. 이해하시겠지, 지금 뭔 말을 하는지.<br>&nbsp; 6월 5일 아침에 몇 대의 차를 몰고 파리를 떠날 첫번째 페리캉 가족.&nbsp; 노 페리캉 씨가 이 집의 전성기를 만들었다. 여러가지 사업을 벌여 대단한 자본을 마련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돈이 노 페리캉 씨를 좇아오는 것처럼 보였을 정도였단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재산이건만 리옹의 말테르 가문에서 또다시 거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파리 굴지의 부르주아로 우뚝 섰지만 그것도 옛 이야기, 지금은 너무 고령으로 걷지 못해 휠체어에 앉아 신의 안식만 기다리고 있는 처지. 게다가 정신도 온전하지 못해 숨을 쉬고 있으면서도 수시로 천국을 왔다 갔다 하는 신공을 갖는 수준에 올랐다. 말테르 가문의 유산을 상속받으면서 여동생과 재산 다툼을 벌인 일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 얼마 안 있어서 죽을 예정인데, 죽음의 침상에서는 그 여동생에게 마른 지역이든가 하여간 지방의 넓고 넓은 토지와 성에 육박하는 저택을 유증하고 숨이 넘어간다.&nbsp; 노 페리캉 씨의 아들 아드리양 페리캉은 국립 박물관의 관리자로 근무하고 있는 보수주의자이며 가톨릭적 사고에 젖은 인물로, 마흔일곱 살 먹은 고집 센 아내 샤를로트와 금슬도 좋지, 이제 겨우 두살배기 다섯째 아이이자 넷째 아들 에마뉘엘을 두었다. 아내가 마흔다섯 살에 낳았으니 그 시절에 힘들었겠지? 에마뉘엘 말고, 첫째가 생각이 바른 필리프로 부르주아 신분에 맞지 않는 교구 신부를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있다. 필리프는 할아버지가 세운 소년보호시설 ‘프티 르팡티’의 아이들 서른 명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섰다가 책에서 제일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둘째는 열여덟이었다가 며칠만에 열아홉 살이 되는 철없는 위베르. 피난길에 애국심에 불타 가족으로부터 도망해 프랑스군에 접촉했다가 괜히 민폐만 끼치고, 도망 중에 애먼 총각딱지만 떼는 인물. 3, 4, 5번 아이들은 소개할 만하지 않다.&nbsp; 이 집안의 유모가 아들 셋을 두었다. 유모는 세 아들 모두 전쟁터에 보내, 한 명도 징집당하지 않은 페리캉 부부가 결코 곱게 보이지 않지만, 자기 손으로 키운 아이들이라 차마 그런 마음을 내색하지 못한다.<br>&nbsp; 유명하고 잘 팔리는 쉰 살배기 소설가 가브리엘 코르트. 그리고 그의 연인 플로랑스. 젊은 플로랑스는 솔직하다. 자기가 늙고 아랫도리 힘 빠진 꼰대와 어울리는 건 가브리엘이 적어도 플로랑스의 복지와 사치를 부담한다는 조건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확고한 마음가짐이 되어 있다.&nbsp; 이 유명하고, 자기가 자신을 판단할 때 대단히 고귀한 신분인 속물 덩어리 소설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최고급 대접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다. 피난길에 나서도 마찬가지. 첫 숙박지인 여관에 가서도 지붕 밑 더운 다락방을 얻자 주둥이가 댓발이 나와 그냥 뛰쳐나오는 바람에 개고생을 한다. 이렇게 손에 물 안 묻히고 살던 인간들은, 전쟁이나 피난, 이런 곤혹스러운 시절을 만나면 살기가 팍팍해진다. 평소에 뭘 해봤어야지. 엄청나게 돈이 많고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출마한 경력이 있는 작가가 멀리 걷기를 해봤나, 풀밭 위에서 야영 한 번을 해봤나, 이래저래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어떻게 연줄이 닿는 장소에만 가면 꼭 캐비아에 상파뉴로 목젖을 적셔야 마땅하다.&nbsp; 코르뱅 은행의 최고 주주 코르뱅 씨. 물론 아내도 있지만 정부 아를레트도 있다. 코르뱅의 입맛에는 무조건 무용수가 딱이다. 아무리 예쁜 외모를 가졌어도 무용수가 아니면 접수하지 않는다. 이 하층계급 출신의 부르주아는 자신이 신세를 고칠 때 부잣집 딸인 아내와 결혼한 것이 대단히 중요한 계기였던 만큼 절대 헤어질 마음이 없다. 그럼에도 아를레트는 일단 코르뱅의 피난 차를 타고 안 내리며 버틴다. 그래서 결국 피난길에 나서는데, 이 아를레트 때문에 차에 타지 못해 걸어서 피난을 떠나야 하는 직원이 있었으니 잔과 모리스 미쇼 부부.&nbsp; 아를레트는 파리를 벗어나 저 멀리 가서 코르벵 가족과 만나기 전에 알아서 차에서 내려, 잘 아는 동네의 잘 아는 호텔에 여장을 푼다. 거기서 다시 파리로 귀환하기 전에 귀엽게 생긴 프랑스군 지원병이었던 위베르 페리캉 군을 만나 아이를 유혹하여 기꺼이 딱지를 떼준다.&nbsp; 미쇼 부부한테는 전쟁터에 나간 아들 장마리가 있다. 미쇼 부부는 걸어서 피난을 가야하는 처지지만 부부, 특히 엄마 잔의 마음 속에는 늘 장마리가 걸려 속이 쓰리다. 장마리는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고 트럭에 실려 퇴각하던 중, 곳곳에 포탄이 터져 망가진 도로 위를 달리는 트럭이 이곳 저곳에 쾅쾅 부딪힐 때마다 머리에 충격을 입고, 다리의 상처도 터져버려 곧 죽어도 별스럽지 않을 위급상황에 떨어진다. 이 상태로 시골의 한적한 동네에서 보살핌을 받게 되는데, 죽을까 살까? 미쇼 부부한테는 은행장 코르뱅의 미션이 있었다. 언제까지 피난지의 지점에 도착해 업무를 계속하라. 그러나 파리 시민 거의 대부분이 쏟아진 피난길에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폭격도 수시로 있었는데 어떻게 가나? 게다가 사실 거기도 폭격을 맞아 다 불타버리고 말았거늘. 그리하여 8월에 다시 파리로 도착하여, 코르뱅의 지시를 이행하지 못한 사유로 부부 두 명 다 장렬하게 해고당하고 만다.<br>&nbsp; 이런 이야기들. 등장인물이 몇 명 더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돈과 골동품, 미술품에만 관심있는 샤를 랑줄레. 평생 부르주아로 살며 없는 사람들 내려보며 그들을 천박하다고 여겼던 인간이 피난 길에서 기꺼이 야비한 도둑질을 서슴지 않는 광경. 죄를 받았는지 결국 대가리가 터져 폭포수 같은 선지피와 골수를 흩뿌리며 죽는 라스트 씬까지 다양하게 연출하는 한 세상 등등.&nbsp; 고집세고, 배타적이고, 가끔 잔인하게 변하기도 하지만 당연히 사람들을 도와야 할 때가 되면 그렇게 하기를 서슴지 않는 시골 사람들도 등장하고, 부르주아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중산층 사람들은 시골의 드난살이 하는 아가씨와의 사이에 애정도 생기고 그렇다. 이런 자잘한 이야기는 섬세한 이렌 네미롭스키가 아무래도 르메트르보다 윗길이겠지? 그렇다.&nbsp; 지금 깊게는 아니지만 조금 고민하고 있는 것이 &lt;6월의 폭풍&gt; 다음 작인 &lt;돌체&gt;를 읽어? 말아? 하는 것. 하, 이걸 우짜까?<br>&nbsp; 이 책에서 제일 웃긴 장면. 고명한 소설가 가브리엘 코르트가 애인 플로랑스한테 톨스토이의 &lt;전쟁과 평화&gt;에 대하여 한 마디 꽝.<br>&nbsp; “소설에서 주인공들에게 주어진 이런 겸허의 교훈보다 더 유익한 건 없어. 생각 안 나? &lt;전쟁과 평화&gt;에서 시골 아가씨들이 웃으면서 길을 건너다가 앙드레 왕자의 자동차 앞을 지나가. 그러다가 그 아가씨들이 자기들에게 말을 거는 왕자를 발견하지. 운운” (p.43)<br>&nbsp; 앙드레 왕자? 웃겼다.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을 말한다. 러시아의 공작 또는 공을 불어는 모르겠고 영어로 하면 Prince라고 쓴다. 그걸 그냥 왕자로 번역한 것. 그러면 도스토옙스키의 &lt;백치&gt;에서 유로지비급 주인공 미시킨 공작도 미시킨 왕자냐? 알렉산드로 보로딘의 &lt;이고르 공&gt;도 왕자여?&nbsp; 하나 더 있지?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 앙드레 왕자는 1812년 나폴레옹 전투 때 기치를 높이 들고 “올라!”를 외치며 전장을 누빌 예정이다. 거기서 심한 상처를 입고 연인이며 간호병으로 참전한 나타샤의 보살핌 속에 죽을 운명의 남자인데, 그 시절에 웬 자동차? 모르긴 해도 ‘쿠페’라는 마차의 종류일 터. 역자 이상해 씨는 &lt;전쟁과 평화&gt;를 읽어 보셨을 터인데 우짜 이런 실수를 하셨을꼬? 그것보다 편집부는 교정도 안 보고 뭐 했니?&nbsp; 아니, 어쩌면 몰라. 네미롭스키, 또는 가브리엘 코르트가 플로랑스의 무식함을 비꼬느라 일부러 왕자니, 자동차니 했을 지도. 그렇다면 이런 것 좀 각주 달아 가르쳐주면 안 됐을까?<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1937/7/cover150/k61283305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9370777</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수준작이지만 내 취향은 아니네 - [현대일본희곡집 11]</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70060</link><pubDate>Tue, 25 Aug 2026 05: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7006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82137630&TPaperId=1747006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19/75/coveroff/k48213763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82137630&TPaperId=1747006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현대일본희곡집 11</a><br/>한일연극교류협의회 엮음 / 지만지드라마 / 2026년 03월<br/></td></tr></table><br/>.&nbsp; 2002년에 한일연극교류협의회가 발족을 하고 2024년에 열한 번째 “현대일본희곡 낭독공연”을 했다. 그래서 2024년에 《현대 일본 희곡집 11》을 출간했어야 하는데, 이 책의 두번째 작품인 &lt;오토라고 불리는 일본인&gt;의 저작권자를 수소문하지 못해 차일피일하다가 올해 2026년에 뒤늦게 열한 번째 희곡집을 선보이게 됐다고 한다. 나는 《현대 일본 희곡집 10》을 희망도서 신청해서 읽고, 현대 일본 희곡의 모든 작품 가운데 다섯 편을 골랐으니 당연히 수준이 높겠지, 싶었던 기대가 딱 맞아떨어졌을 정도로 즐겁게 읽은 기억이 나서, 이번에도 출간 사실을 알자마자 득달같이 희망도서 신청해 읽었다.&nbsp; 《현대 일본 희곡집 10》은 출판사 연극과인간에서 찍은 반면에 《현대 일본 희곡집 11》은 지만지드라마에서 POD 책으로 판매한다. POD Printed on Demand. 원래 뜻은 독자가 주문을 하면 그때부터 프린트 작업에 들어가 공급해준다는 건데, 사실은 그렇지 않고, 애초에 아주 적은 양의 책만 초판을 찍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이 초판을 구입하지 못할 경우가 생길 수 있어서 도서관은 POD 책을 희망도서로 사주지 않는 것이 원칙인데, 내가 《현대 일본 희곡집 10》을 신청해 다니는 도서관에 구비해 놓아, 시리즈 10번에 이어 11번, 연속성을 무시하지 않고 고맙게 사주어 읽었다.&nbsp; 《현대 일본 희곡집》 시리즈는 한 권에 다섯 편의 희곡을 담는다. 이번에도 다섯 편. 이제 “현대 일본희곡 낭독 공연&gt;의 희곡집을 싸그리 읽는다면 모두 11권에 55편의 희곡을 읽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한국극예술학회에서 《한국현대대표희곡선집》 시리즈를 낸 적 있지만 아쉽게도 시리즈 2번에서 그치고 말아 아쉬운 바가 크다. 이 시리즈야말로 매년 출간하는 게 곤란하다면 격년이나 올림픽 또는 월드컵 열리는 해마다 열 편 정도의 대표 희곡을 선정해 독자에게 꾸준히 소개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고, 딱 그만큼 아쉽다. 나도 이 시리즈를 통해 이젠 우리나라 거장 또는 중견 희곡작가들을 알게 되었다. 처음 희곡 읽기 시작할 때 딱 맞는 입문 코스일 터인데.<br>&nbsp; 그러나, 이번 《현대 일본 희곡집 11》는 지난 번에 읽은 열 번째 희곡집과 비교해서 나하고 맞지 않는다. 조금 덜 맞는다고 말해야 하나? 하여간 그렇다. 모두 다섯 편의 희곡 가운데 제일 앞에 실린 &lt;아버지 돌아오다&gt;를 빼고 나머지 네 편이 전부 일본이 저질렀거나 관계한 전쟁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근현대사에서 일본이 참여한 전쟁이라면 1894년 중일전쟁, 1905년 러일전쟁,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과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한 태평양전쟁. 1차 세계대전에서도? 그렇다. 이때 일본은 독일편이 아니라 영국편, 즉 협상국의 일원으로 1914년 8월, 독일에 최후통첩에 이은 선전포고까지 하고, 독일과 전선을 이루어 총과 대포를 쏘면서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지만 주로 해군을 이용해 협상국의 함정을 보호하고, 오스트레일리아 병력을 호송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물론 그런 척하면서 중국의 칭다오와 남태평양 군도 일부를 꿀꺽 삼켜버렸지만. 아마 이때 일본의 진짜 속셈은 영토, 즉 식민지 확장이었을 거다. 스스로 작은 섬나라라고 하면서 중국과 러시아와 싸워 승리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면서 대만에 이어 조선까지 식민지로 삼아 눈에 뵈는 게 없었을 당시니까 무슨 짓을 못 했을꼬.<br>&nbsp;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두번째 작품 &lt;오토라고 불리는 일본인&gt;은 주무대가 상하이와 도쿄. 2차세계대전 발발 직전의 상하이에서 시작해 1940년대 초엽의 도쿄까지가 본문이고 이후 1944년이 배경인 에필로그가 붙는다. “오토라고 불리는 일본인”은 작품에서 그냥 “남자”라고 나오고, 존슨이라고 불리는 독일인과 송宋부인이라 불리는 미국인이 이 남자를 “오토”라고 호칭한다. 이 세 명을 포함한 여러 등장인물의 정체는 공산주의자. 이 가운데 미국 이름 존슨이라 불리는 독일 남자는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하여 조국 독일을 버리고 지금은 소비에트 혁명가로의 삶을 산다. 히틀러의 파시즘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어머니와 누이가 사는 독일로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는 신념에 불타는 사나이. 이이는 그러나 상하이와 도쿄에서 좋은 술 때려 마시고, 예쁜 여자들과 연애하며 척 보기에 혁명가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호화스러운 삶을 산다.&nbsp; 존슨이 상하이에 일본 아사히 신문 특파원으로 온 오토라는 남자를 스파이로 스카우트해 만주와 몽골 지역을 포함한 중국 내 일본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다. 진짜 목적은 중국이라기보다 러시아 진출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이었겠지. 오토라는 일본인도 공산주의자이기는 하지만 일본인 특유의 민족주의적 개념을 간직한 인물. 이 자가 정말 실재했던 인물이라고 해설에 나온다. 본명이 오자키 호쓰미. 1901년에 태어나 1944년에 스파이 혐의로 사형에 처해졌다고. 오토든 오자키든 간에 이 사람은 일본 사람 대부분을 위하여 일본을 배신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파시스트가 권력을 잡고 있는 한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고, 전쟁의 결과 일본과 일본인의 크고 또 큰 피해를 막을 수 없을 터이니, 일본 군부와 파시스트 권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신념.&nbsp; 희곡을 쓴 사람이 기노시타 준지(1914~2006)라는 인물인데, 1962년에 쓴 희곡으로는, 그 당시 일본인의 세계관이 어땠을 지 몰라도, 딱 그 당시(1930년대 초엽 ~ 1944년)에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를 받은 조국의 역사를 가진 독자가 읽기엔 어딘지 좀 가렵다. 이 오토라고 불리는 일본인이 생각하는 “대부분의 일본 사람”과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포함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여 더 그런가 보다.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하면 단시간 안에 크게 패배할 게 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결코 조선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조금 더 확장하면 기껏 쳐들어가 수백만 명을 학살한 중국 내 일본 점령지역에 관해서도 침묵한다.<br>&nbsp; 마지막에 실린 &lt;조지 오웰 – 침묵의 소리&gt;도 불만이다.&nbsp; 무대는 영국. 소설을 쓰기는 했지만 악평에 시달리고 인기도 없어서 늘 배가 고픈 에릭 아서 블레어, 필명 조지 오웰.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BBC의 아시아 방송 담당 어시스턴트 프로듀서로 취직한다. 아다시피 오웰이 인도 태생이다. 한 살 때 영국으로 돌아와 학교를 마치고 버마에서 1년 여 군사경찰 일을 해 이때의 경험으로 &lt;버마 시절&gt;과 &lt;코끼리를 쏘다&gt;를 썼다. BBC는 출생 내력과 책을 보고 인도 담당으로 발탁한 것. 이때 인도 송출 방송 담당자로 인도 출신 여성 베뉴와 남성 찬드라가 있었다. 베뉴와 찬드라는 인도에서 교육을 받고 영국과 영어에 관심이 높아 런던에 와서 일을 하고 있으나 특히 찬드라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하여 이 한 몸 다 바치기를 소원하는 인물이다.&nbsp;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일본군은 차근차근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더니 지들이 알렉산더라도 되는 줄 알고 인도를 향해 전진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 인도의 식민 모국인 영국에서는, 조지 오웰조차, 영국 정부는 그저 인도인들한테 미끼만 던지고 있었을 뿐인데 대 파시스트 전쟁에서 독일과 일본의 파시스트들만 물리치면 인도를 독립시켜줄 것이라고 굳세게 믿었다고, 극작가 스즈키 아쓰도는 주장한다. 그러니 당연히 인도인 등장인물 베뉴와 찬드라도 그렇게 믿겠지? 아니다. 스즈키가 이 작품을 초연한 때가 2002년. 이미 영국이 인도를 어떻게 했는지 뻔히 알고 있는데 설마 그렇게야 믿었겠어?&nbsp; 글의 목적상, 찬드라는 인도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영국을 등지고 일본이 인도를 점령해야 한다, 라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이런 건 영국 입장에서 처음 겪는 일이 아니다. 양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꾀하기 위하여 독일과 은밀히 손을 잡으려 애쓴 아일랜드 사람들 이야기를 우리는 안다. 인도인 찬드라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뿐.&nbsp; 여기에 다른 이슈가 하나 더 붙는다. 자기가 당시의 화제작품 &lt;하켄크로이츠의 밤&gt;을 쓴 머레이 콘스탄틴의 아내 캐서린 콘스탄틴이라고 주장하는 여성 캐서린 버데킨. 사실 캐서린은 19세기의 조지 엘리엇처럼 남자 필명 머레이 콘스탄틴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여성이 글을 쓰면 하잘것없다는 평을 듣기 십상이라 생각해 그랬다는데, 조지 엘리엇 시절은 모르겠지만 20세기 들어 &lt;자기만의 방&gt;을 주장한 버지니아 울프 이후 시절에도 남성의 이름을 사용해야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럴 만하니 이렇게 상정했겠으나, 아마도 이 작품에 식민지 인도, 유색인, 그리고 여성, 이렇게 지배-피지배, 코즈모폴리탄-플래닛 비슷한 구도를 만들기 위한 구성 아니었을까 싶다.&nbsp; 여기서도 일본인 극작가 스즈키 아쓰도는 영국 식민지 인도만 열라 떠들면서, 일본의 식민지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는다. 심지어 일본이 인도를 점령해 인도에서 영국인을 몰아내면 인도를 독립시킬 것이라는 환상을 인도 출신 지식인인 찬드라가 믿고 있다고 설정했으니 좀 웃기지 않나? 이런 의미에서 이번 《현대 일본 희곡집 11》은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는 말씀.<br>&nbsp; 이 책에 실린 작품 가운데 세 번째 희곡 &lt;호기우타&gt;가 흥미로웠다. 핵전쟁 이후 폭망한 일본 간사이 지방의 생존자를 무대에 올려 부조리극처럼 만든 작품. 프랑스 희곡에서 읽은 것 같은 기시감이 들지만 정확하게 어떤 작품인지 지금 떠오르지 않아 탁 꼽지 못해 안타깝다. 기억이 도무지 전 같지 않아서 이거 영 스타일 구긴다. 앗, 생각났다. 프랑스가 아니고 루마니아의 극작가 외젠 이오네스코가 쓴 &lt;왕은 죽어가다&gt;와 비슷한 느낌이 나는 작품.&nbsp; 제일 앞에 자리를 준 기쿠치 간의 &lt;아버지 돌아오다&gt;는 스타일이 조금 오래 되어 이젠 덜 재미있고, 네번째 실린 &lt;가타부이&gt;는 엿새 전에 읽은 다카야마 하네코의 아쿠타가와 상 수상 소설 &lt;슈리의 말&gt;처럼 하마터면 전쟁 바람에 종족의 씨가 마를 뻔했던 류큐인, 오키나와 사람들 이야기다. 30년에 걸친 미국 지배에서 다시 일본령으로 귀속한 1972년의 한 가족.&nbsp; 초장에 말했듯이 일본의 대표 희곡 가운데 다섯 편을 골랐으니 작품의 수준이야, 내 취향에 맞건 맞지 않건 간에, 꽤 높은 편이겠다. 그래도 제일 중요한 건 내 입맛이라서, 이번 현대 일본 희곡집 시리즈에는 실망했다고 말해야겠다. 그래서 조금 미안하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19/75/cover150/k48213763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0197572</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불멸의 라틴아메리카 아방가르드 시인 - [바라모]</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68205</link><pubDate>Mon, 24 Aug 2026 05: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6820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4969&TPaperId=1746820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23/76/coveroff/893746496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4969&TPaperId=1746820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바라모</a><br/>세사르 아이라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26년 05월<br/></td></tr></table><br/>.&nbsp; 1949년생 아르헨티나 소설가, 에세이스트, 번역자, 평론가. 대표적인 다작 작가라고 한다. 출간한 책이 백 권이 넘고, 1년에 두 권에서 다섯 권까지 활발하게 발표하고 있다는데, 우리나라에 소개된 세사르 아이라는 이 책 &lt;바라모&gt;가 유일하다.<br>&nbsp; 작품의 주인공 바라모 씨를 소개하자면, 1923년에 쉰 살 정도니까 1873년 정도에 파나마 콜론 시에서 그래도 연줄이 좀 있는 파나마 남자 튜뇬 데 바라모 씨와 광동어를 사용하는 중국인 엄마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파나마에서는 운하 개통으로 유럽의 아시아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게 반어법인지 그냥 웃자고 하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다.&nbsp; 하여간 운하 건설과 개통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의 다양한 곳과 심지어 동유럽 각지에서 노동자들이 유입되고, 서유럽에서는 주로 엔지니어들이 몰려와 극한 남초 현상이 빚어져 남자들이 결혼하기가 하늘에서 별 따기만큼 힘들었다 한다. 그리하여 바라모가 나이 들어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빌빌 거리자, 아직 살아 있던 아버지 튜논 데 바라모 씨 연줄로 정부 청사의 말단 자리에 넣어주었다. 말단 공무원이 돈을 벌면 얼마나 벌겠나, 그건 파나마도 마찬가지여서 장가도 들지 못하고 이 나이, 쉰이 될 때까지 가장 한심하고 전형적으로 교과서 적인 남자 루저의 삶을 살고 있었다. 죽, “연줄로 간신히 일자리를 얻어 근근이 살아가며 어머니 집에 들어 앉아 혼자 가족도 없이 살아가는” 형국이다.<br>&nbsp; 독후감의 시작을 이렇게 했다고, 이 작품을 서사 위주의 중편 정도 분량의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오 산이다. 아무쪼록 독자는 처음부터 긴장을 좀 하고 책을 여는 편이 좋다. 미리 이렇게 말해두는 것이 좋을 듯싶다.&nbsp; 바라모가 정부청사에서 퇴근하는 길. 날은 한 달의 마지막 날. 봉급 받는 날이라서 퇴근 전에 경리과에 들러 월급을 받았다. 누런 얇은 봉투에 넣은 현금, 지폐와 동전까지 일일이 세서 담은 봉급을 받는 건 과거의 K 스타일이고, 파나마 P 스타일은 봉투도 없이 그냥 지폐와 동전을 건네주면 그걸 손에서 손으로 받아 그냥 주머니에 쑥 집어넣고 갈 길 가면 되는 모양이다.&nbsp; 근데 바라모 씨는 이 시간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대략 열 시간에서 열두 시간에 걸쳐 긴 시를 한 편 쓴다. 놀랍게도 이전에는 시를 써본 적도 없고, 쓰기는커녕 반 세기 동안 읽어본 적도 없다. 이런 사람이 길고 긴 시를 썼는데, 써 놓고 덧붙이거나 수정한 부분 하나 없이 완성한 것도 모자라, 시가 이날 이때까지 “현대 라틴 아메리카 시의 걸작으로 찬사 받는” 위대한 &lt;아기 예수의 노래&gt;라는 작품으로 중판, 3판, 4판… n판까지 영원무궁토록 찍은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숱한 평론가와 시인들은 이 작품을 “언어적 측면에서 가장 대담하면서도 실험적인 아방가르드의 기원이자 정점”이라고 단정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놀랠 노자다. 바라모는 심지어 이 한 작품에 자기 문학적 인생을 다 소비해 다시는 시를 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곳에서 영혼이나마 편히 안식하기를.&nbsp; 작품의 시작이 위와 같다. 그러면 독자들은 &lt;바라모&gt;는 바라모 씨가 문제의 시를 쓰게 되는 전말이 작품의 주요 스토리가 될 것이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게 맞다. 하지만 어떻게 시를 쓰게 되는지 그 이야기를 납득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걸? 그러면 머리에 쥐 한 번 나 보자.<br>&nbsp; 시작은 바라모가 근무를 마치고 경리과에 가서 월급을 받을 때였다. 그는 월급을 받는 순간 알았다. 월급으로 받은 지폐 가운데 100페소짜리 두 장이 위조지폐라는 것을. 바라모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위조지폐를 손에 쥐어본 적이 없다. 본 적도 없다. (그런데 그게 위조지폐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나 외국에 놀러갔다가 길바닥에 떨어진 100달러짜리 위조지폐를 주운 적 있다. 딱 집어 든 순간, 이게 위조지폐구나, 말로만 듣던 100달러짜리 위조 노트구나, 금방, 거의 본능적으로 알겠더라고.) 그러니 바라모의 월급 속에 100페소짜리 위조지폐를 받았다는 걸 알게 된 건 의심하지 말자(나는 호텔 바에 가서 위스키 한 잔 마시고 위조지폐로 의심되는 돈을 냈다가 무슨 검사를 한 지배인이 위조라고 알려주어 앉은 자리에서 (웃어야 할 거 같아서 웃으며) 박박 찢어버렸다).&nbsp; 바라모는 말단 공무원. 그냥 시민이라도 그럴 텐데 심지어 공무원이 위조지폐를 사용하거나, 심지어 가지고 있다는 것만 들켜도 당장 감옥행일 것 같다. 바라모는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지도 못하는 한심하고 난처한 상태로 접어든다. 마찬가지로 살면서 단 한 번도 시를 써 본 적이 없다. 시 말고도 다른 어떤 장르의 문학 작품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본 적도 없다. 이래서 결국 어떻게 위조지폐와 시라는 관계가 상호 개체성과 보편성을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 작품의 핵심(p.108). 아이고, 나도 지금 “개체성과 보편성”이라고 쓰긴 썼지만 써 놓고 다시 읽어보니까 갑갑하기 그지없다.&nbsp; 이 두 장의 위조지폐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나’ 바라모 씨한테 왔느냐, 하는 문제. 이것들은 “새로운 이질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바라모에게 도래했단다. 이질성? 여태까지는 가져본 적도, 손으로 만져보거나 눈으로 본 적도 없는 위조지폐라는 금단의 것이 무려 두 장이나, 지금 바라모의 오른쪽 호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이질성.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br>&nbsp; 퇴근하느라 청사의 정문을 나서니 광장. 자기 앞에 8미터짜리 검정색 세단 관용차가 길을 막고 탁, 정지한다. 자동 창문이 아니어서 운전수가 손잡이를 뱅뱅 돌리니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며, 검은 피부의 운전수가 바라모에게, 노련한 도박꾼인 바라모의 어머니가 딴 돈을 건네준다. 1페소짜리 지폐와, 지폐를 감싸 반으로 접힌 종이조각. 검정색의 8미터짜리 관용 세단 때문에 바짝 긴장했던지 갑자기 당이 떨어진 바라모는 빨간 젤리를 1페소짜리로 사 먹으려 하다 우여곡절 끝에 먹지 못하고 길가 나뭇가지 끝에 걸어 놓았고(책의 마지막쯤 다시 등장한다), 종이에는 알아보지 못할 암호 같은 것들이 마구 쓰여 있다. 이게 무엇일까? 혹시 복권 당첨 번호? 그러나 숫자는 보이지 않는 걸?&nbsp; 여기서 눈치 빠른 독자는 알아 챘어야 했다. 바라모가 쓴 시가 “실험적인 아방가르드의 기원이자 정점”이라는 평가. 그런데 1페소짜리 지폐를 감싼 종이에 쓰여 있는 것이 마치 암호 같은 이해하지 못할 문자들. 아방가르드 시를 읽어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 현대시를 읽기 위해서는 암호해독기가 필요하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러니 적어도 시가 이 종이에 쓰여진 암호 같은 문자와 조금은 연결이 되겠구나, 이걸 눈치채지 못한 형광등이 누구? 맞다. 나였다. 아이고, 이런.&nbsp; 바라모의 직업은 종합청사에 근무하는 말단 공무원. 박봉에 시달리느라 장가들 생각도 못하고 여전히 엄마 집에서 빌붙어 사는 쉰 살 중늙은이. 1920년대 쉰 살이면 꼬부랑 할배인 건 파나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려고 바라모가 선택한 부업이 작은 동물 박제 만들기. 이 부업이 바라모가 책을 내게 만들어주는 신공을 부릴 지 누가 알았겠느냐고. 1920년대 파나마에서는 저작권 개념도 없었고, 그래서 숱한 인쇄소가 중소 출판사를 겸하던 때인데, 이날, 즉 바라모가 월급으로 위조지폐 두 장을 포함해 받은 그날 밤에, 이 출판사 사장 세 명과 카페에서 우연히 만나 자기 부업을 이야기하자, 박제에 관한 책을 내라고, 원고료 2백페소를 주겠다고 해서 그는 나중에 불세출의 시 &lt;아기 예수의 노래&gt;가 될 원고를 쓰게 되는 것.&nbsp; 그러면 시는 어떤 내용이기에 “언어적 측면에서 가장 대담하면서도 실험적인 아방가르드의 기원이자 정점”이라는 평가를 들을까? 아, 이건 결코 알려드릴 수 없다. 이게 핵심이라서. 다만 노련한 도박꾼 어머니의 침대 매트리스 영수증하고 관련이 있다는 말만 찔끔 일러드릴까? 그래도 될까 싶지만 뭐 이 정도야.<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23/76/cover150/893746496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237611</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나오키 상 수상작, 너마저 - [열원 - 162회 나오키상 수상작]</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62975</link><pubDate>Fri, 21 Aug 2026 05: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6297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139871&TPaperId=1746297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80/92/coveroff/k17213987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139871&TPaperId=1746297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열원 - 162회 나오키상 수상작</a><br/>가와고에 소이치 지음, 김진아 옮김 / 마르코폴로 / 2026년 05월<br/></td></tr></table><br/>.&nbsp; 1978년에 일본 가고시마 긴코초에서 태어난 가와고에 소이치는 오사카에서 자라 교토의 류코쿠대학 문학부 역사학과를 다니다 때려치웠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학 다니다 중퇴해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일본에서 대학 중퇴는 좀 드문 경우라고 들었다. 그렇게 이야기한 사람이 대학 중퇴가 왜 드문 일인지는 말해주지 않아 이유는 모르겠다. 뭐 그런가 보다. 이후 밴드 활동도 하고, 우편 주문 회사에 다니기도 하면서 소설을 썼다는데 &lt;열원熱源 Heat Source&gt;로 2019년에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상 가운데 하나인 나오키 상을 받았다.&nbsp; 나오키 상. 그게 이번에 가와고에를 고른 이유다. 일본 현대소설을 좀 읽고 싶어 했다. 근데 아는 작가와 작품이 없어서, 일본의 현대 문학도 틀림없이 주목할 만한 작가를 보유하고 있을 터인데 널리 알려져 내가 읽은 재미있는 소설책이 없었다는 게 늘, 조금 불만이었다. 일본 작품을 읽어 보기로 작정을 하고, 널리 알려진 일본의 문학상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책 세 권을 읽었다. &lt;헌치 백&gt;, &lt;도롱뇽의 49재&gt; 그리고 &lt;슈리의 말&gt;. 세 권 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그래서 나도 성질이 나서, 아쿠타가와 상 시상식과 같은 날, 같은 건물의 위층에서 시상한다는 일본의 또다른 유명 문학상인 나오키 상을 받은 작품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출간 기준으로) 신작을 골라 읽은 것이 &lt;열원&gt;이다. 출판사 마르코폴로에서 2026년 6월에 초판을 찍었다. 아쿠타가와 상은 주로 순문학에서 수상작을 선정하고, 나오키 상은 문학성과 더불어 대중성도 감안한다고 들었다. 뭐 그런가 보다.<br>&nbsp; 그런데 말입니다, 출판사 마르코폴로가 낸 번역서하고 나는 도무지 합이 맞지 않는 거 같다. 최근에 읽은 마르코폴로 책이 도메니코 스타르노네, 아베 코보, 크리스타 볼프, 엘사 모란테 등인데, 어째 즐겁게 읽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역자들이 대개 이제 문학 서적 번역을 시작하는 분들이 많아서 그랬는지 그들의 노고에 비해 글이 잘 읽히지 않았다고 할까? 오해하지 마시라. 그분들의 외국어 실력에 관해 논하자는 말이 아니라, 번역을 해 우리말로 만든 문장이 그리 매끈하지 않았다는 정도를 말하는 중이다. 이 책에서도? 아쉽지만 그렇다. 예를 들어보자.&nbsp; 서장序章은 1945년 8월 15일. 어제 일왕이 항복선언을 해서 전쟁이 끝났다. 소비에트 군은 그럼에도 아직 일본군이 사할린 섬 남쪽을 지배하고 있다고 판단해 상륙전을 벌이기로 작정한다. 소비에트 군? 공산주의 군대로 유라시아 대륙 서쪽에서 파시스트 나치들을 섬멸하고 곧바로 동쪽으로 이동해 파시스트 일본군을 뿌리 뽑으려 대륙간횡단열차를 타고 집결해 타타르 해협을 앞에 둔 소베츠카야가반 항구의 부두. 해협 건너 사할린 섬이 아련하게 보일 듯하다. 중대장 소로킨 대위가 중대원 앞에 나서서 연설한다. 그 초두.<br>&nbsp; “한 가지 전달 사항이 있다. 어제 14일, 일본이 항복했다. 오늘 정오에는 황제 폐하께서 직접 라디오 방송으로 국민에게 이 소식을 알리실 예정이다.” (p.14)<br>&nbsp; 나는 화들짝 놀랐다. 이게 한 장 넘겨 새로운 페이지의 첫 줄에 쓰여 있어서 나는 앞 페이지에서 갑자기 장면전환을 해 일본군 진영인 줄 알았다. 명색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시행하는 스탈린 치하의 붉은 혁명 군대 중대장이, 그것도 무려 몇 년 동안 레닌그라드에서 쥐와 개와 사람의 시신을 먹어가며 파시스트 나치들을 버텨내고 드디어 베를린을 함락시킨 혁명 군대가 “오늘 정오에 황제 폐하께서 소식을 알리실 예정”이라고?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nbsp; 원작의 작가 가와고에 소이치는 일본 태생의 일본인이니까 자기네 왕한테 존대를 바치는 습관 때문에 의례 그렇게 썼더라도, 비록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도, 그걸 우리말로 번역하려면 정말로 소비에트 붉은 군대의 중대장이 적국의 왕한테 했을 법한 단어를 써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일본 왕 이름이 스탈린이기라도 한 거야?&nbsp; 그리고 일본에서만 쓰는 단어가 있다. 이걸 적당한 우리말로 번역해야 하건만, 일본식 한자어가 따라붙은 걸 그대로 사용해 우리나라 국어사전에 없는 단어가 곳곳에 짱박혀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네이버 국어사전을 아예 열어놓고 읽는 불편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역자는 뭐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하다보면 그럴 수 있다고 치고, 그럼 교정교열을 책임지는 자들은 뭐한 거임? 메모를 해 놓지 않아 딱 어떤 단어라고 예를 들 수 없어서 증거를 내밀라고 하면 그건 못하겠다.<br>&nbsp; 작가 가와고에 소이치의 역사관도 마음에 안 든다.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폴란드인 민족학자 브로니스와프 피우수트스키가, 이 인물은 황제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15년 유형에 10년 위수 판결을 받아 사할린에서 죽을 고생을 한 실제 인물인데, 도쿄에 출장을 와 도쿄 인근 와세다의 유명한 벚꽃 구경을 갔다. 난만한 벚꽃의 흐드러진 낙화. 상상이 가시지? 그걸 보더니 1905년 러일 전쟁 피해자를 연상한다. 그리하여 폴란드 혁명가가 동반한 일본인 하세가와한테 말하기를:<br>&nbsp; “지난 전쟁 때 9만 명에 가까운 일본 병사가 죽었네. 전쟁으로 인한 부상자는 15만 명이 넘지. 그자들은 분명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와 거기서 사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을 거야.” (p.385)<br>&nbsp; 염병을 한다. 조선과 만주를 점령하기 위한 기초공사로 러시아의 손을 때게 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 것을 진짜 몰랐을까? 그것도 남의 나라 조선의 제물포 앞바다에서.&nbsp; 함께 있던 하세가와도 한 마디 한다.<br>&nbsp;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죽거나 다쳤겠지. 하지만 전쟁터에서 스러진 러시아 병사들은 일본의 사쿠라를 모두 베어내고 강을 메워버리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p.385)<br>&nbsp; 이러니 내가 열폭을 하겠어, 안 하겠어? 만일 러시아가 일본한테 이겼으면 어땠을까? 1917~18년 러시아 혁명 후에 우리나라도 소비에트 연방에 자동 귀속될 수도 있었지 않을까? 그놈이 그놈이지 뭘.<br>&nbsp; 진짜 주인공은 야요마네쿠후. 사할린, 일본말로 가라후토 출신의 아이누 족이다. 그냥 아이누, 순록을 기르는 오로크, 개썰매를 타는 니쿠분 족 등 선주민들이 자기 땅의 개념 없이 모여 살던 섬이었다. 그러다 와진이라 칭하는 일본인들도 오고, 동쪽의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주로 죄수들을 유형보내 실질 지배를 하려 했던 러시아 사람들도 와서 살던 곳. 고아 야요마네쿠후는 큰아버지와 열두 살 연상의 사촌형이 키웠다. 진짜 자식보다 더 잘 해주는 것이 아이누의 당연한 습속. 아홉살 때 러시아-일본 조약으로 사할린이 러시아의 영토에 합병되자 홋카이도에서 살다가 마을이 연달아 콜레라, 두창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절반 너머 인구가 줄자 일본 여권을 내서 다시 사할린으로 넘어왔다.&nbsp; 이 야요마네쿠후도 실제 인물이다. 나도 독후감 쓰기 위해 이것저것 검색해보다가 폴란드인 브로니스와프 피우수트스키와 그의 아이누 아내, 그리고 두 자손 모두 실재했던 인물인 걸 알고 아이고 깜짝이야, 했다는 것 아닌가 말이지. 야요마네쿠후는 세계최초로 남극점 도달을 목표로 하는 남극탐험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는데, 이게 왕립이나 국가에서 정식으로 지원하는 탐험대가 아니라 전직 일본군 위관 장교가 이끄는 사립 탐험대라서 썰매개 관리자 자격으로 다녀왔단다.&nbsp; 작품 속에서는 어린 열다섯 살 시절에 동네에서 제일 예쁜 열일곱 살 아가씨 카사라스이한테 사랑고백하러 가는 친구 시시라토카와 함께 가 주었다가 자기가 먼저 고백하는 바람에 평생 시시라토카만 만났다 하면 주먹다짐을 하는 우정을 닦게 된다. 시시라토카는 모르겠고, 이들과 함께 삼총사를 이루는 열살의 명민한 소년 센토쿠 다로지 역시 실제 인물이다. 그러니 출연진의 절반 정도는 실제 인물로 봐도 좋다.&nbsp; 책은 1880년대부터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순간까지 사할린과 홋카이도에 살던 아이누의 삶과, 그들에 대한 문명의 지배 그리고 미래. 같은 의미에서 유럽인의 문명과 문화, 우월하다는 인식으로 그들에게 지배당하는 나머지 인종의 삶과 미래 같은 걸 다루고 있다. 당연히 부처님 말씀이 아닐 수 없지만 색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실제 취재를 통해 쓴 것 같아 생생한 편이다. 읽기 쉽게 진도도 팍팍 나가지만 뭐 그게 다다. 아이누 이야기를 하면서 기껏 그게 다다, 라 하고 마는 건 아이누 인들하고 척이 져 그런 게 아니고, 제일 앞에서 말했듯이 어째 나하고는 합이 맞지 않는 작품이라서.&nbsp;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작품들도 그렇고, 나오키 상을 받은 이 책도 마음에 안 들고. 나오키 상 받은 책 한 권만 더 읽어보고 일본 소설을 더 읽을지 말지 정해야겠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80/92/cover150/k17213987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3809255</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19세기도 아닌 18세기 코미디인 것을 유념하시라 - [감성 여행]</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60936</link><pubDate>Thu, 20 Aug 2026 04:3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6093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76160&TPaperId=1746093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01/87/coveroff/893247616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76160&TPaperId=1746093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감성 여행</a><br/>로런스 스턴 지음, 김정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05월<br/></td></tr></table><br/>.&nbsp;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 영국 소설. 내가 왜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 영국 소설을 읽었느냐 하면, 작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로런스 스턴이기 때문이었다. 18세기의 한복판 1759년에 &lt;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 (이하 “트리스트럼 섄디”로 씀)&gt;. 하긴 50년 전에 벌써 다니엘 디포와 조너선 스위프트가 각각 &lt;로빈슨 크루소&gt;와 &lt;걸리버 여행기&gt;를 써서 영국 소설의 전통을 세계만방에 고한 적이 있었으니 &lt;트리스트럼 섄디&gt;가 나온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닐 수 있었겠다.&nbsp; &lt;트리스트럼 섄디&gt;와 &lt;감성 여행&gt; 두 권으로 짐작하건대, 로런스 스턴은 전형적인 희극 작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독자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희극이 아니라, 물론 &lt;트리스트럼 섄디&gt;를 읽은 후의 감상이지만, 대단히 독특한 어법으로 무장한 희극 작가, 그래서 18세기 중엽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이것 참, 로런스 스턴이 정말 포스트 모던하지 않은가, 혀를 차게 됐더란 것. 그런 장면 하나만 소개한다.<br>&nbsp; 을유문화사가 찍은 을유세계문학전집 51권, &lt;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gt;의 제1권, 제12장은 작가 로런스 스턴의 실재 친구를 모델로 한 인물, 유지니어스의 훈계, 채무를 오래 이행하지 않다가 어느 한 순간에 인생 훅 가는 수가 있다는 설득을 귓등으로 듣다가, 드디어 채무자들의 기습 공격을 받아 그리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 교구 목사 요릭 이야기이다. 스턴은 이 목사님 요릭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대리석 묘비명을 흉내 낸 가로로 긴 직사각형 안에 “애재哀哉라, 가여운 요릭!”이라 썼고, 이어지는 두 페이지를 아무런 글자 없이 그냥 검은 색으로 덮어 씌워 버렸다.&nbsp; 그런데 도박을 즐긴 죄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을 갚지 못해 죽은 목사의 이름이 ‘요릭’? 그렇다. 하지만 당신이 아는 그 요릭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lt;햄릿&gt; 5막에 나오는 전직 덴마크 궁정 광대이자 땅에서 사토장이들이 파낸 해골 바가지로 등장해 햄릿의 대사 “아아 나의 가여운 요릭! 나는 그를 안다네, 호레이쇼.” 한 마디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해골 바가지가 된 인물. 아니, 해골 바가지. &lt;트리스트럼 섄디&gt;의 요릭이 &lt;헴릿&gt;의 요릭이라는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요릭이라는 성姓이 흔한 이름이 아니라 독자는 저절로 덴마크 궁정 광대의 후손일 수도 있겠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멈출 수 없을 터. 근데 이 해골 바가지 이야기가 너무 긴 거 같지? 다 이유가 있다. 로런스 스턴이 &lt;트리스트럼 섄디&gt;를 쓰고 9년이 지나 발표한 또다른 희극 소설 &lt;감성 여행&gt;에서 이 요릭이라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 그러니까 셰익스피어의 &lt;햄릿&gt;에서 딱 한 번이기는 하지만 연극 역사에서 T.S. 엘리엇이 주장한 “객관적 상관물”의 대표적이고 고전적 예시가 &lt;트리스트럼 섄디&gt;의 한 등장인물로, 객관적 상관물과는 전혀 관계없는 조연으로 나왔다가, &lt;감성 여행&gt;에 다시 출연하는 거다.&nbsp; 이걸 적당하게 섞기 위하여 셔츠 여섯 벌과 검은색 실크 바지 한 벌만 트렁크에 넣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여행에 나선 요릭은 트리스트럼 섄디의 아버지인 월터 섄디의 친구이며, 당연히 트리스트럼과도 스스럼없는 사이로 설정했다. &lt;감성 여행&gt;에서 요릭의 직업은 분명하지 않다. 확실한 건 &lt;트리스트럼 섄디&gt;처럼 교구 목사는 아니라는 것.<br>&nbsp; 하여간 화자이면서 주인공인 ‘나’ 요릭이 불과, 그저 21마일 떨어진 도버행 역마차에 오르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다음날 정기선을 타고 해협을 건너 칼레에 도착, 본격적인 프랑스 여행을 시작하는데, 첫 장면, 그러니까 영국인 요릭이 프랑스 땅 칼레에 도착해 처음 눈에 띈 사람이 성프란치스코 수도회 수도승. 그러나 수도승이기도 하고 일흔 살은 되어 보이는 걸승乞僧, 빌어먹는 거지 중이기도 하다. 그 중을 보면서 요릭은 단단히 결심한다. 단 한 푼도 주지 않겠다고. 흠. 그러면 영국 국교 목사라고 해도 믿을 만하긴 하네.&nbsp; 이 프란치스코파 걸승을 시작으로 프랑스의 곳곳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과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로런스 스턴 또는 요릭은 말한다. 한가한 사람들이 외국 여행을 하는 이유가 있으니, 첫번째가 육신이 병약해 좋은 공기와 물을 찾아 떠나는 것이고, 둘째가 정신이 우매하거나 불가피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자신을 포함한 “감성적 여행객”들은 필요에 의해 길을 나서는 것이고 때로 긴요한 사정이 있어서. 솔직히 무슨 말인지, 어떤 뜻인지 모르겠다. 필요에 의해 해외 여행을 하는 것을 왜 “감성적”이라고 부르는 지. 그냥 대충 좋게 이야기하기 위하여 막 던지다가 “감성적”이라는 말이 그럴 듯해서 “감성적 여행객”이라 한 거 같다. 하긴 아무러면 어떠냐.<br>&nbsp; 하여간 프랑스 땅 칼레에 와서 첫날을 여관에서 묵었다. 원래 군인이었다가 45세까지 부대낌만 많은 군대생활을 정리하고 수도원에서 안식의 성소를 찾은 프란치스코회 소속 걸승, 여관 주인 데상 씨, 여관에서 만난 틀림없이 좋은 배경을 지닌 것 같은 26세 정도로 보이는 여성, 지난번에 칼레에 들렀을 때 친해졌지만 3개월 전에 죽어 6마일 떨어진 성당 부속묘지에 매장된 로렌조 신부 등등의 이야기를 희극 소설의 재치로 써내려 간다.&nbsp; 이 가운데 아무래도 가장 재미있는 건, 칼레의 여관에 숙소가 모자라 좁은 침대가 둘 놓인 요릭의 방에서 26세의 귀족(처럼 보이는, 진짜로 백작의 조카로 밝혀지는) 여성과 이이의 하녀, 이렇게 세 명이 잠을 자야 하는 상황일 터인데, 21세기에 사는 현대인 입장에서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뭐 그리 읽을 만하지 않다. 흥미롭지도 못하고.&nbsp; 요릭의 여행은 계속되어 아미앵을 거쳐 파리에 도착한다. 때마침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7년 전쟁을 하고 있던 터. 이를 이제야 알아챈 로런스 스턴은 허겁지겁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프랑스 백작과 요릭을 만나게 해놓고, 백작으로 하여금 프랑스의 어떤 곳이라도 갈 수 있으며, 그곳에 해당 관청과 모든 공무원들은 요릭을 위하여 최고의 서비스를 하라는 특별 여권을 장만해준다. 이렇게 해 놓으니까 이제 일개 여행객인 요릭도 자연스럽게 프랑스의 귀족과 사교계에 진입하게 됐고, 그의 현란한 입놀림으로 프랑스 사교계에서도 한 번 적당히 접대하고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파리를 떠날 때까지 지극한 관심을 쏟아붓게 된다.<br>&nbsp; 이럭저럭 재미있을 거 같지? 그러나 정말로 책을 읽으려 마음먹었다면, 다시 한 번 이 책이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에 나왔다는 점을 고려하시기 앙망함. 비극이라면 동서와 고금을 통틀어 슬픈 건 모든 사람이 슬픈 거니까 여전히 셰익스피어도 읽고, 소포클레스도 읽는 것이지만, 희극은 조금 다르다. 희극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과 문화에 따라 웃음 코드가 각각 개별적이다. 서양 사람들이 웃고 즐길 내용에서 동양 사람들이 눈에서 소금물을 짜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이런 현상을 빗대 일찍이 톨스토이 백작이 이렇게 말한 거다.&nbsp; “행복한 가정은 다 고만고만하게 행복하고, 불행한 가정은 참 가지가지로 불행하다.”&nbsp; 맞다. 내가 억지로 가져다 붙인 말이다. 하여간 희극 소설이라고 해서 18세기 영국인이 아닌 21세기 한국인도 마찬가지로 키득거릴 수 있다는 보장이 1도 없으니 그저 주의하기 바란다는 정도. 내 독후감 말고 다른 사람들이 쓴 책 읽은 소감을 다양하게 구경한 다음에 책을 선택해도 결코 늦지 않으리.<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01/87/cover150/893247616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018797</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1923, 1949 그리고 199X년의 그녀들 - [디 아워스]</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58993</link><pubDate>Wed, 19 Aug 2026 04:4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5899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4984422&TPaperId=1745899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7723/87/coveroff/893498442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4984422&TPaperId=1745899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디 아워스</a><br/>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비채 / 2018년 12월<br/></td></tr></table><br/>.&nbsp; 1952년에 신시내티에서 난 용띠 아저씨 마이클 커닝햄은 캘리포니아 L.A 인근에서 자라 캘리포니아 최고 명문 스탠포드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글 좀 쓰는 사람들한테는 무지 유명한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에서 예술 석사 학위를 얻었다. 여기 동문 가운데 누가 있느냐고? 존 치버, 필립 로스, 그리고 경애해 마지않는 매릴린 로빈슨 등등. 이 명단 가운데 마이클 커닝햄의 이름도 당당하게 올라 있다. 이이는 졸업 후에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로 활약하고 있고, 나이가 많아 아직도 하고 있는 줄은 모르겠는데 예일 대학 문예창작 수석 강사를 하고 있든지, 했든지 그렇다. 예일 대학이 미국 코네티컷, 뉴욕하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래서 그런지 &lt;디 아워스&gt;에서 클러리서 본, 옛 남친이자 현 남사친 로버트로부터 ‘델러웨이 부인’이라고 불리는 가장 중요한 주인공이 뉴욕에서 산다. 즉 작품의 1/3 이상이 뉴욕을 배경으로 펼쳐진다.<br>&nbsp; 다음으로, &lt;디 아워스&gt;에는 세 명의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다. 장유유서라 생년이 빠른 순서로 소개하자면 제일 언니가 버지니아 스티븐 울프, 가운데가 로라 지엘스키 브라운이고 막내가 클러리서 본. 아다시피 버지니아 울프는 동 시대의 이름난 귀족 출신 여성 작가 비타 섹빌웨스트와의 동성애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적이 있다. 가운데 로라 브라운은, 동성애적 성향이 있는 지 전혀 모른 채 태평양 전투에 참전한 용사이자 세 살 어린, 친동생의 학교 동기동창 댄 브라운하고 결혼해, 맏아들 리치를 낳고 1949년 현재 둘째 아이를 임신중인데 훗날 딸을 낳을 예정이다. 막내 클러리서도 처음엔 자신이 동성애적 성향이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열여덟 살 시절에 열아홉 먹은 리처드와 처음 경험을 했는지 그냥 시늉만 하다가 끝났는지 조금 헛갈린다. 확실한 건 훗날 틀림없이 남자하고 잤고, 그래서 임신을 했으며, 아빠 얼굴은커녕 이름도 모르면서 살아갈 딸 줄리아를 출산한다. 확실하게 첫사랑인 리처드는 자기 제자들과 바람 피우기 여념이 없을(예정인) 올리버와 불 같은 연애를 하면서 곁을 떠나버리고, 이젠 샐리와 1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함께 살고 있다. 클러리서의 딸 줄리아 역시 아무거나 예쁜 옷만 입으면 완벽하게 어울릴 일생에 몇 년 안 되는 짧은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중이지만 만날 남성용 스웨터에 가죽 부츠만 신고 다니면서 엄마 클러리서가 질색을 하는 나이 든 여자와 연애중이다.&nbsp; 작은 언니 브라운 부인의 자녀도 그러냐고? 흠. 이거 중요한 힌트인데, 좋다 알려드리지. 1949년에 엄마 배 속에 들어 있던 딸은 다 커서 음주운전 차에 사고를 당해 현장에서 즉사하고, 훗날 간경화로 생을 마감할 남편의 1949년 생일날 엄마와 함께 아빠한테 줄 케이크를 굽던 리치는 동성애자로 큰다. 당연히 로라 브라운 역시 엉겁결에 옆집 여자와 키스를 하는 바람에 자신 역시 동성애 인자가 있음을 알게 되고, 버지니아 울프의 책에 집착하던 것처럼 극도의 우울증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시간적 공간인 199X년까지 멀쩡하게, 건강하게 살아 있다. 성격이 무진장 까다롭다고 소문이 나서 그렇지.<br>&nbsp; 이 작품 속에 동성애자 밀도가 대단히 높다. 나도 책을 다 읽고 독후감을 쓰기 위하여 위키피디아에서 커닝햄을 검색해볼 때까지는 몰랐다. 커닝햄이 동성애자이고 동성 결혼도 했단다. 위키에는 배우자의 이름도 나오지만 구태여 그것까지 따 올 필요는 없겠다. 하기는 앞부분에서 리처드가 게이라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nbsp; 199X년 6월의 어느 날. 이 날은 리처드가 커루더스 상을 받는 날이다. 오후 여덟 시에. 커루더스 상이 무엇인가 하면, 주로 시나 소설에 뛰어난 업적을 이룬 시인, 작가에게 주는 상으로 알년에 한 번, 뭐 이런 식으로 정기적으로 시상하는 것이 아니라 경력을 봐서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만큼 중요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 나타나면 그때 심사해서 주는 대단한 상이다. 워낙 가끔 시상하기 때문에 일반인들 사이에서 별로, 거의 알려지지 않아서 조금 그렇기는 해도.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리처드의 옛 애인이자 여사친이며 절친이기도 한 델러웨이 부인, 클러리서 본은 주변 친지들을 모시고 오후 다섯 시에 그럴 듯한 파티를 열 예정이다. 당연히 파티 전문 케이터링 업체에 의뢰하여 늦어도 네시 반에는 식음료가 완비될 것이고, 딱 하나 미진한 것이 있었으니 1925년에 진짜 델러웨이 부인이 그러했듯이 꽃이 풍족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클러리서가 직접 뉴욕 시내로 나가 단골 꽃가게에 가 장미를 한 아름 사오는데, 길에서 만난 (초청장을 보내지 않은)여러 동성애 남녀이자 나름대로 문학, 영화계에서 어깨에 힘 좀 준다는 사람에게 오늘 파티에 오라고 권했던 참이다.&nbsp; 이 사람들을 초청하면서 이들과 리처드의 관계를 연상하는 대목에 접어들면, 리처드, 놀랍게도 동성애자에게 냉소적이다. 샐리와 근 20년간 동거하는 클러리사한테 이런 오랜 동거는 “클러리서의 나약함을 드러내고 여자 전체를 욕보이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한 기억. 근육질의 남자들끼리 하는 사랑과 실연을 다룬 로맨스 소설을 써서 역겨울 만큼 많은 돈을 번 게이 작가 월터 하디를 향해서는 “어린 소년들을 유혹하는 남자들보다 영원히 젊은이로 남으려고 애쓰는 게이들이 세상에 더 해롭다”고 말했다. 월터가 46세로 제법 나이 들었지만 여태 캡을 쓰고 나이키를 신는 만년 소년 행세를 하는 게 꼴 보기 싫었겠지. 근데 알고 보면 리처드가 천성적으로 악담에 관해 일가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엄마를 닮아서. 딸뿐 아니라 아들한테도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은 아빠가 아니라 엄마거든. 그래서 리처드도 게이가 됐나? 그건 모르겠다. 내가 알기로 동성애가 유전 형질은 아닌 거 같은데.<br>&nbsp; 여기서 맏언니 버지니아 울프의 시계는 1923년. 바야흐로 오랜 침묵 끝에 야심차게 &lt;델러웨이 부인&gt;을 집필 중이다. 물론 곧 완성해 발표할 것이고, 평단의 사나운 손톱에 너덜너덜해질 예정이지만 대중들도 이이의 후속작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작품은 런던의 집이 아니라 버지니아의 엄마가 죽은 어린 시절에 발병한 조현병과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하여 살던 런던 교외 지역에서 쓰기 시작한다. 런던까지 기차 타고 당시 속도로 30분 거리. 책의 프롤로그는 1941년에 외투 주머니에 큰 돌을 집어넣고 템즈 강으로 걸어 들어가 자살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울프의 무대는 하여간 1925년의 하루다.&nbsp; 둘째 언니 로라 브라운은 &lt;델러웨이 부인&gt;을 열심히 읽고 있는 1949년 남편의 생일날이다. 지난 밤에도 새벽 두시까지 책을 읽느라 아침에 남편 미역국도 끓여주지 못해서 화가 나 있었다. 그래 아들 리치하고 둘이서 생일 케이크도 굽고 얼떨결에 부인병에 걸린 옆집 여자와 입술을 마주치기도 한 이상한 날, 그래도 &lt;델러웨이 부인&gt;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해서 버틸 수 없게 되자 오후에 차를 몰고 변두리에 있는 호텔에 들어가 두 시간 여 동안 읽어 버린다. 집에 돌아와 성공적으로 자잘한 생일 밥상과 생일축하를 하고 드디어 밤이 몰려오자 홀로 욕실에 들어 약장에 든 수면제 한 통을 손에 쥐고 한참 고민에 빠졌던 브라운 부인.&nbsp; 막내는 별명이 델러웨이 부인이니까 브라운 부인보다 더 울프 부인과 흡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니다. 나름대로 똑 부러지고 사건이 벌어지면 수습도 할 줄 아는 현명한 52세 여성이다.&nbsp; 뭐 다른 소설책 아니면 영화로 &lt;디 아워스&gt;를 보셔서 스토리야 더 잘 아시겠지만, 이 작품을 보다 더 버지니아 울프와 연결시켜주는 것은, 내가 읽기에, 마이클 커닝햄이 구사하는 문장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내가 읽기에 울프를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나게 쓰기 위하여 커닝햄도 무지하게 연습을 했을 것 같다. 물론 나야 울프나 커닝햄이나 다 번역문으로 읽어서 단언할 수도 없고, 게다가 &lt;델러웨이 부인&gt;을 읽은 지도 꽤 오래 전이라 스토리마저 가물가물한데 문장까지 확실하게 그렇다, 주장하기는 사실 어렵다. 그래도 하여간 문장을 읽은 느낌이 비슷하다고 하고 싶다. 나 말고 또 이렇게 읽은 분이 있나 싶어서 책가게 독자서평을 뒤져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아마 내 느낌도 분명히 헛다리겠다. 에휴, 얼마나 더 읽어야, 언제나 눈이 띄어질꼬.<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7723/87/cover150/893498442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7238779</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바람의 섬, 외로운 사람들 - [슈리의 말 - 제163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56958</link><pubDate>Tue, 18 Aug 2026 03: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5695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22831053&TPaperId=174569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197/18/coveroff/k62283105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22831053&TPaperId=1745695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슈리의 말 - 제163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a><br/>다카야마 하네코 지음, 손지연 옮김 / 소명출판 / 2023년 02월<br/></td></tr></table><br/>.&nbsp; 연달아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품 세 편을 읽었다. &lt;헌치 백&gt; 독후감 초두에 밝혔듯이 일본 현대 소설을 좀 읽어볼까 싶어 작품을 고르는데 유명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품 몇 편을 무작위로 선택한 거였다. 아쿠타가와 상은 ‘신인’이 아니라 ‘신진’ 작가들의 중단편 소설 중에서 당선작을 골라 상품으로 지금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회중시계와 상금 백만 엔을 준다고 한다. “신진” 작가라는 점이 괜찮거나 좋은 일본 “현대” 소설을 선택할 수 있는 기재일 거 같아서 일단 세 편을 골랐는데, 결론만 말하면 나와 그리 맞지 않았다는 것. 책, 작가를 고르는 것도 쉽지 않다.&nbsp; 다카야마 하네코는 1975년생 소설가. 2020년에 &lt;슈리의 말&gt;로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으니 당시 나이 45세. 얼핏 ‘신진’이라는 수식이 어울릴 것 같지 않겠지만, 이이가 소설을 서른 살이 넘어 쓰기 시작했고 주로 SF 장르에 종사한 관계로 순소설로는 말 그대로 신진이라 할 수 있었겠다. 도야마 현에서 나서 도쿄에 있는 다마 미술대학 회화과를 다니며 일본화를 전공했다 한다. 이후 샐러리맨 생활을 하면서도 그림을 계속 그렸지만 그 방면으로는 별다른 정보가 없다. 30대가 되어 글 쓰는 일에 본격적으로 마음을 두어 34~35세에 성인 대상 소설 수업을 들으며 처음으로 소설을 썼다고. 이후 SF 소설을 주종목으로 여러 문학상을 받으며 성취를 이루다가, 한 출판사 편집자가 “현실 속 장소를 무대로 해서” 소설을 써보자고 제안해 쓴 것이 &lt;슈리의 말&gt;이란다.&nbsp; &lt;슈리의 말&gt;은 애초 독립국 “류큐”였다가 메이지 시대 때 일본에 편입된 오키나와를 무대로 하는 소설인데, 굳이 오키나와를 선택한 이유는 이이가 일본 프로야구, 특히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열렬한 팬인데 이 팀의 동계훈련 장소가 오키나와라서 거기 구경 갔다가 마음에 들어 소설로 쓰게 된 거란다. 우리나라의 삼성 라이온스도 전지훈련을 오키나와에서 하는 바람에 친숙하다고, 서문 격인 “한국의 독자 여러분께”에 썼다.<br>&nbsp; 오키나와는 말 그대로 비운의 땅, 비운의 섬이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 군국주의와 일왕에 대한 충성, 일종의 가스라이팅 때문에 입은 섬 주민들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고, 종전 후에도 무려 30년 동안 미군정의 지배를 받는 등 ‘비운’이라는 단어 하나 가지고는 설명하기 힘든 지역이다. 메도루마 슌의 소설집 《물방울》에 오키나와의 참상과 지형 같은 것이 잘 묘사되어 있다. 다른 작품의 독후감을 쓰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실례이지만 오키나와를 무대로 한 작품이란 측면에 국한해 말하자면 《물방울》이 &lt;슈리의 말&gt;보다는 몇 길 위쪽이니 참고하시면 좋겠다.&nbsp; 제목에 나온 슈리首里는 오키나와 시내의 한 행정구역. 태평양전쟁 당시 최대 교전 지역으로 도시가 거의 초토화되어 전쟁 이후에 옛 정취를 살려 다시 세우다시피 한 곳이다. 워낙 태풍이 잦고 고온 다습한 지역이라 소박한 성城과 건축물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 가운데 미나코가와라는 곳은 전후 외인주택 지구였다가 지금은 내국인과 아시아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이 숙소로 많이 이용하고 있다고. 여기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일본 본토 출신의 노년 여성 요리順 씨의 자그마한 콘크리트 주상복합 건물이 있다. 젊은 시절부터 민속학에 매진한 시민 연구자로 나이가 든 상태에서 미나코가와로 이주해 이 건물 1층에 사설 오키나와 자료관을 열었다.&nbsp; 이 소설에 나오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을 겁나게 외로운 사람들이다. 요리 씨 역시 마찬가지.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평화운동, 자연운동에 큰 관심을 쏟는 바람에 가족과 제법 심한 거리감이 있었다. 심지어 자연운동을 하면서는 집을 나가 산 속에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기도 했는데, 때마침 일본에 이런 공동체가 종종 테러를 저지르는 바람에 주민들과 매우 서걱거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나이가 좀 들어 오키나와에 정착해 섬 곳곳을 다니며, 이걸 필드 워크라고 표현하는 모양인데, 유물이나 유품, 고대인과 전쟁 당시 죽은 이들의 뼛조각 같은 것들을 모아 전시관에 보관하고, 자료를 작성했다.&nbsp; 나이가 더 드니, 본토에 사는 딸 미치途도 엄마 혼자 살게 두기 거시기해서 섬으로 이주해 함께 살며 시내에 작은 치과병원을 개원했다. 딸도 두 아들이 다 커서 이제 자기들의 가정을 꾸린 데다가 과부가 된 상태라 뒤돌아볼 것이 없었다.<br>&nbsp; 이 자료관에 무보수 자원봉사자 비슷한 신분의 여성 미나코未名子가 거의 날마다 와서 자료 정리에 힘을 보탰으니, 바로 소설의 주인공이다. 십여 년 전 중학생 시절에 낯가림이 심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에 가는 날보다 이곳에서 보낸 날들이 더 많았던 여성. 한참 힘든 시기였던 10대 중반부터 요리 씨에게 흠뻑 매료된 소녀였다. 무엇보다 여태 자기한테 요리 씨만큼 한 사물이나 사건에 관해, 사는 일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고 진심을 다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일찍 세상을 떴고, 아버지는 속마음과 달리 천성이 겉으로 상냥한 성격이 아니었다고. 하여간 전에는 이 섬의 역사와 문화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미나코는 요리 씨의 영향을 받아 자료를 정리해가면서 대단한 관심이 생기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요리 씨는 이미 노년. 자료 관리 역시 아날로그에서 벗어나지 못해, 예전 도서관 목록함이 그랬듯이 분류 카드를 일일이 손으로 작성하여 한의원의 약 서랍 비슷하게 생긴 자료함에 보관해 왔다. 미나코는 해당 유물, 유품을 카드와 함께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어 SD 카드에 담아 보관하기에 이른다.&nbsp; 이 자료관은 관람 요금을 받지 않는다. 사실 요금을 받을 만큼 자료가 충실한 것도 아니다. 전쟁 중에 워낙 가혹한 폭격을 맞아 초토화되어 제대로 남아 있는 것도 없고, 학술적으로 민속을 전공한 것도 아니라 전문성 역시 자신할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것을 요리 씨 스스로도 잘 알아 그렇게 조치한 것이겠지. 요리 씨가 건물주라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이유겠고. 그렇다고 국가나 지자체에서 보조금을 받는 것도 아니라서, 완전히 노쇠한 요리 씨가 자료관을 운영하지 못할 상태가 되면 저절로 폐쇄해야 하는 처지이다. 마니코가 비록 아버지한테 작은 단독주택 한 채를 물려 받기는 했지만 수입이 없으면 살 수 없으니 당연히 다른 직업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인터넷과 TV 홈 쇼핑이 득세하면서 미나코가 다니던 업체가 문을 닫아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가 몇 달 전에 취직을 했는데, 이 직업이 조금 묘하다. 다카야마 하네코가 SF 작가라서 가능했을 듯한 직업.&nbsp; 세상 곳곳에는 외로운 사람들이 많다. 이 가운데 유독 일본어를 배웠으며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방법으로 화상일지언정 대면해 대화하고 싶은 소수의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작품에서는 문독자問讀者 라고 지칭)을 상대로 퀴즈를 내는 일을 한다. 작품 속에는 세 명의 고객이 등장한다. 반다, 폴라, 그리고 기바노. 반다는 조국에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천재로 지금 지구를 맴도는 인공위성에 ‘혼자’ 탑승하고 있는 우주인. 폴라는 가족과 떨어져 남극의 빙하 밑 까마득한 해저에서 일하는 잠수정 승무원, 기바노는 전쟁 지역의 지하 셸터에서 생존해 있는 사람. 전부 극도로 외로운 이들이다. 그러나 모두 괜찮은 사람들.<br>&nbsp; 미나코의 삶이 이렇다.&nbsp; 이 시절, 어린 시절부터 미나코에게 의지가 되어주던 요리 씨는 급격히 늙어가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확실하고, 건물 3층의 수상쩍은 장소, 괴이한 공간에서 혼자 근무하는 미나코도 지역 사람들한테 소외당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시기에, 미나코가 사는 슈리의 단독주택에 커다란 털 뭉치 비슷한 짐승이 한 마리 들어와 웅크리고 있었다. 동물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는 미나코는 문독자 가운데 한 명이 기바노로부터 그게 말이란 것을 알아내고, 말 중에서도 오키나와 토종 말로, 일반 경주마나 마차 끄는 말과 완전히 다른 독특한 말이란 것도 알아낸다. 그리하여 작품의 제목이 &lt;슈리의 말&gt;이 되는데, 정말 이런 말이 있기는 하겠지만 하여간 뭐 좀 그렇다. 말이나 등장인물이나. 오키나와에 관해서라면 더욱 그러하고. 사람도 외롭고, 말도 외롭고.<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1197/18/cover150/k62283105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1971855</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무솔리니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서 - [제0호]</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55096</link><pubDate>Mon, 17 Aug 2026 04:4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5509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9275&TPaperId=1745509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7102/12/coveroff/893291927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9275&TPaperId=1745509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제0호</a><br/>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br/></td></tr></table><br/>.&nbsp; 아휴, 세월이란. 에코 읽은 지가 벌써 8년이 됐다. 이이의 마지막 소설 작품이라는 &lt;제0호&gt;는 이런 책이 있는 줄도 모르고 세월만 잡아먹었다. 그러고 보니 이 책 초판이 2018년 말이네. 그러면 내가 “이젠 움베르토 에코는 읽을 만큼 읽었다.”라고 뻥치고 다닐 때쯤. 그러니 나온 줄도 몰랐지.&nbsp; 움베르토 에코. 무지하게 재미있다. 그런데 읽기는 쉽지 않다. 마음 단디 먹고, 각도 좀 잡고 읽으면 한 해 여름밤 정도는 책임질 수 있는 즐거운 지옥을 만날 수 있는 작가, 기호학자, 수수께끼 내는 스핑크스이자 미학자. 왜 “즐거운 지옥”이냐고? 그거야 읽어보시면 알지.&nbsp; 우리나라에서 움베르토 에코, 하면 역자 이윤기를 빼놓고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 이윤기의 번역이, 세상에나, 일본보다 우리나라가 더 빨랐다는 거 아닌가 말이지. 이윤기가 얼마나 이에 대해 자랑을 해댔는지 아직도 모습이 눈에 훤한 거 같다. 모쪼록 영혼이나마 평화 속에서 쉬고 있기를.&nbsp; 근데 엉뚱한 곳에서 일이 벌어진다. 우리나라의 속도전에 기겁을 한 단체가 있었다. “일본 에코 학회”. 이윤기 번역의 &lt;장미의 이름&gt;이 나오고 아마도 1년 이상이 지난 후에 일본어 번역판이 나왔는데, 에코 학회가 보기에 그것도 매우 빠른 번역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리하여 일본 에코 학회가 정기 학회를 열면서 우리나라 U. 에코 대표선수로 이윤기를 초청했다. 아마도 이윤기, 안 갔을 걸?&nbsp; 내가 놀라 자빠진 건, 아다시피 이윤기는 이탈리아어를 못하는데도 &lt;장미의 이름&gt;을 그리 빠른 속도로 번역했고, 그리스어도 모르지만 &lt;그리스인 조르바&gt;를 순식간에 번역하는 놀라운 신공을 자랑했던 인물. &lt;장미의 이름&gt;의 영어본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중역본이었을 걸? 아니면 Sue me! 이탈리아어를 일본어로 직역한 일본 에코 학회보다 더 빨리 번역본을 깔아 놓은 이윤기와 열린책들의 신공이여, 영원할지어다. 비행기 타고 일본에 가면 에코 학회에서 한 마디 해야 할 터, 아마 천하의 이윤기도 조금 쫄리지 않았을까? 그래서 안 갔을 거 같다. 아니면 말고.&nbsp; 왜 애꿎게 이윤기 타령인가 하면, 이 책 &lt;제0호&gt;의 역자 이세욱 역시 이탈리아어를 우리말로 번역할 정도는 아닌 거 같아서. 서울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주로 프랑스 책을 번역한 베테랑이다. 베스트셀러 중의 베스트셀러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미셸 우엘벡 등을 번역해 돈을 좀 만졌을 테고, 이탈리아 작가로는 알렉산드로 바리코의 아름다운 소설 &lt;이런 이야기&gt;와 움베르토 에코의 &lt;프라하의 묘지&gt;와 &lt;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gt; 등을 번역했다. 그렇다고 내가 이이의 이탈리아어 직역을 믿는 건 아니다. 못 믿을 확정적 증거도 없지만 우리나라 출판계와 열린책들을 보아 그렇게 생각한다. 2018년에 나온 책이면 본격적으로 이탈리아어 전공자들이 번역을 시작했을 땐데 왜 중역을 의뢰했을까? 특히 이탈리아어 번역은 글 좋은 사람도 꽤 있었을 텐데. 뭐 사정이 있었겠지.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니까 한 마디 했다. 책 부록 “옮긴이의 말”이 좀 아니꼽기도 했고. 뭐 사는 일이 다 그렇지.<br>&nbsp; 작품은 1992년 6월 6일, 토요일 오전 여덟 시에 시작한다. 주인공은 이탈리아 남자로는 색다른 이름 ‘콜론나’인 50세 남자. 자칭 루저. 콜론나의 불행은 할머니가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를 혼용하는 지역인 트렌티노 알토 아디제 지방 사람인 것에서 시작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할머니한테 독일어를 배우고 날로 쓰매 편안하게 됐기 때문에, 대학 1학년 때 학비를 벌기 위하여 독일어 책을 번역하는 일을 시작했고, 독일어 사용자가 별로 없어서 영어나 불어 번역보다 높은 보수를 즐겼으며, 자연스럽게 독일어를 전공했다.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늘 좋은 일만 있으면 책 읽는 사람 언짢을까봐 대학에서 제일 권위적이고 학점 짜고, 질투 많은 늙다리 꼰대 디 사미스 교수를 만나게 됐다. 이 양반의 강의 주제는 “루터가 성서를 어떻게 독일어로 번역했는가?”였다. 루터가 16세기 초 사람. 그럼 중세 독어잖아?&nbsp; 견디다 못한 콜로나는 교수에게 하이네 작품에 들어있는 아이러니에 관해 학위 논물을 쓰겠다고 제안했다가 주위의 권유를 듣고 포기했다. 아예 학업 자체를 포기해버렸다. 번역 일을 하면 책 속에 다 쓰여 있는데 뭐 하러 돈 들여 강의를 들어야 하는지, 하는 의문이 들어 핑계 김에 때려 치웠다. 이후 스위스 알프스 지방에서 진짜 돌대가리를 위해 가정교사를 하다가, 돌대가리의 엄마, 위 앞니가 뻐드러지고 코 밑에 수염이 숭숭 난 엄마가 지긋이 손을 잡고 한 번 하자는 걸 뿌리쳤더니 다음날 바로 해고당한 후부터 싸구려 글쟁이 일을 시작했다. 좋은 말로 프리랜서. 주로 지방신문에 공연과 순회극단에 관한 기사와 평을 팔았다.&nbsp; 이후 이 도시 저 도시 옮겨 살다가 문제적 인물 시메이가 불러 쉰 살의 나이에 밀라노로 온 거다. 시메이가 콜론나의 오랜 출판계 관련 일을 한 경력, 대학출판사의 교정작업과 일반 출판사의 원고 채택, 심지어 대필작가 이력을 어떻게 알았는지, 이미 쉰 살, 우리나라 같으면 아무리 실력이 있다 하더라도 나이 탓하며 채용을 꺼릴 만도 한데, 그를 불러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한 권 대필하라는 청탁을 하는 거였다. 그것이 두 달 전인 1992년 4월 4일, 월요일. 앗차, 너무 나갔다.<br>&nbsp; 6월 5일. 그러니까 어제, 콜로나 주변에 큰 사건이 하나 있었다. 이거, 얘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엣다 모르겠다. 콜론나의 진짜 직업이 시메이의 이름으로 회상록을 한 권 써주는 건데, 겉으로는 시메이가 새 신문을 만드는 단체의 이른바 데스크 역할을 하는 거였다. 근데 이 신문사, 아직까지 정식 신문사는 아니고 준비 모임 혹은 예비 신문사의 직원 한 명이 밀라노의 골목에서 등에 칼을 맞아 피살당한 시체로 발견됐고, 그리하여 직원 전부 경찰로부터 신문을 받았으며, 여차하면 다른 직원을 포함해 콜론나 역시 다음 피해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집에 들어와서, 술도 세지, 위스키를 반 병이나 꿀꺽꿀꺽 마신 걸로도 모자라, 엣다 모르겠다, 잠이나 실컷 자야겠다 싶어 컵에 물을 받아 수면유도제 스틸녹스를 삼키고,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에 빠졌다가 오늘, 6월 6일 오전 여덟 시에 일어난 터였다.&nbsp; 근데 수도가 나오지 않는다. 개수대도, 세면대도, 샤워실에도, 심지어 변기도 물이 안 나온다. 화들짝 놀란 콜론나. 우왕좌왕하다가 옆집 아줌마랄까 할머니네 현관을 두드려 “이 집도 물 안 나와요?” 물었고, 아줌마랄까 할머니가 원 별 말을 다, 하면서 무작정 콜론나의 집으로 밀고 들어오더니, 저 깊숙한 곳에 있는 배수 꼭지를 틀어 시원하게 물이 나오게 하는 거였다.&nbsp; 앞에서 썼지? 어제 밤에 분명히 컵에 물을 받아 스틸녹스를 한 정 먹고 잤다고. 그럼 이게 무슨 일? 설마 형체도 드러내지 않고 집안에서 이상한 장난을 친다는 집요정 폴터가이스터의 해코지? 아닐 걸? 어제 신문사 직원을 죽인 일당 가운데 몇 명이 틀림없이 콜론나의 집에 잠입해 집안을 뒤졌을 거다. 한 사람이 죽었고, 사람들을 모은 시메이는 벌써 모습을 감추었는데, 이 마당에 그들이 나를 죽이는 건 일도 아닐 듯하다. 목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섬뜩하다. 집 밖에 나가는 건 위험한 일. 뒤져보니 주방에 크래커 몇 상자와 고기 통조림, 어제 마시다 남은 위스키 반 병이 있다. 죽음의 공포가 기억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그리하여 콜론나는 두 달 전, 4월 6일부터 믿을 수 없이 상세하게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시메이 주필을 처음 만난 날부터.<br>&nbsp; 시메이는 신문은 신문인데, 결코 창간하지 않을 신문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콜론나가 할 일은 창간하기로 해놓고 신문을 내기 위해 1년간 준비작업을 하면서 겪은 일을 책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신문의 제호는 “도마니Domani” 내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콜로나가 쓸 책의 제목도 &lt;내일을 알려면 어제를 보라&gt;. 한 저널리스트의 회상록. 좀 골치 아프지? 결코 창간하지 않을 신문을 창간하기 위하여 1년 동안 진행하는 작업이라니.&nbsp; 시메이가 주장하기를 자기 신세도 콜론나와 별로 다르지 않단다. 절대로 나오지 않을 신문이 곧 나올 것처럼 사업을 벌이는 책임을 맡은 자. 퓰리처 상 후보에 오를 만큼 저널리즘에서 업적을 쌓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루저. 그저 잡지사 편집장이었던 인물.&nbsp; 그가 제안하는 콜로나의 보수가 엄청나다. 1년 동안 매달 현금 6백만 리라. 장부에 기입하지 않고 현금으로 주겠단다. 즉, 세금이 한 푼도 없다. 게다가 책의 원고를 완성하면, 다시 말해 창간 준비 활동을 끝내고 6개월 이내에 다시 현금으로 천만 리라를 추가로 주겠단다. 그러면 1년 반 사이에 현금 8천만 리라가 넘게, 세금 한 푼 없이 챙길 수 있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이미 나이든 콜로나는 남쪽의 편안한 작은 섬으로 이민을 가 남은 여생을 조용히 살 수 있겠구나. 얼른 미끼를 문다.&nbsp; 그러나 이 책의 진짜 핵심은 음모론. 이탈리아 현대사에서 가장 큰 음모론이라면 누구? 당연히 두체Duce. 베니토 무솔리니. 이이가 정말 파르티잔한테 잡혀서 총살당한 거 맞아? 총살 이후에 밀라노 광장에 시신으로 던져졌다가 성난 군중의 발길질에 시신마저 훼손당한 채 다시 주유소 철골에 거꾸로 매달린 후에 매장당한 것이 틀림없냐고. 혹시 그 무솔리니는 독재자가 자신을 닮은 대역 아니었을까? 아돌프 히틀러가 지하실에서 권총자살한 시신을 누가 본 적 있어?&nbsp; 혹시 소비에트 연방의 유럽 적화를 저지하기 위하여 극우 성향을 가진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미국을 비롯한 진영에서 비밀리에 살려 두었다가 민중들의 화가 삭은 다음에 다시 전면에 내세우든지 아니면 정신적 지지대로 명성만 유지한 채 제2의 반공세력 또는 파시즘, 나치즘으로, 소비에트 측의 진출을 방지하려고 했던 거 아니야? 히틀러는 나이가 많아 일찍 죽어 틀어졌지만, 적어도 무솔리니는 1970년에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극좌 테러, 극우 테러가 극에 달했을 때까지는 아르헨티나쯤에서 살아 있었을 지도 몰라.&nbsp; 당연히 사실과 다른 그냥 음모설이다. 그뿐이다. 하지만 말을 이렇게 만들어 확장하는 것이 조금은 어색해도 재미는 있다. 한 번 읽어보시라. 이 책 이후에 움베르토 에코는 단 한 편의 소설도 더 쓰지 않았으니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 읽어볼 만하지 않은가.<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7102/12/cover150/893291927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1021283</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괜히 오스틴, 오스틴 하는 게 아닌가비여? - [맨스필드 파크]</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49911</link><pubDate>Fri, 14 Aug 2026 05:3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4991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3660&TPaperId=1744991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054/37/coveroff/893746366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3660&TPaperId=1744991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맨스필드 파크</a><br/>제인 오스틴 지음, 김영희 옮김 / 민음사 / 2020년 05월<br/></td></tr></table><br/>.&nbsp; 오랜만에 찾은 제인 오스틴. 이제 &lt;이성과 감성&gt;만 읽으면 대충 알려진 오스틴은 다 읽는 셈이구나. 그건 까치밥처럼 좀 내버려 둬야겠다. 한 작가의 작품을 싹 읽어버리면 섭섭하다. 비록 오스틴이 잉글랜드 국가대표 소설가 4인방으로, 조지 엘리엇, 조지프 콘래드, 헨리 제임스와 함께 제일 맏언니/누나로 꼽히는 인물이지만 나와는 좀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 그냥 착하고 예쁜, 절대로 빼어나게 아름답지는 않지만 수수한 수준은 확실하게 넘는 예쁘고 젊은 아가씨의 연애 성공담이, 그것도 19세기 초를 무대로 하는 구식 연애 이야기가 21세기 독자한테 그리 화끈하게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근데 확실한 건, 19세기 독자들이 읽었다면 정말 재미있고 흥미진진했을 거라는 점. 모르긴 하지만 당시 수준으로 치자면 막장 드라마였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의 재미있음. 이건 인정하지 못하겠다. 달리 잉글랜드 국가대표 소설가라고 하겠느냐고. 특히 선역이건 악역이건 간에 등장인물의 심리묘사 같은 건 확실히 돋보인다. 이 책도 마찬가지.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 양이 바람둥이인줄 뻔히 아는 헨리 크로퍼드 씨가 청혼할 때, 처음엔 당연히 거세게 거절했지만 점차 혹시 저이가 정말로 마음을 착하게 먹기로 결심을 한 건 아닐까, 마음이 왔다 갔다 망설이는 수준까지 진전되는 과정이 거 참, 그럴 듯하다는 말이지.&nbsp; 변죽 울리지 말고 드라마 이야기로 곧장 넘어가자.<br>&nbsp;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저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의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아직 바스티유 감옥이 멀쩡하던 1780년대 초반에, 바다 건너 그리 크지 않은 잉글랜드라고 하는 섬나라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헌팅던이라는 마을 워드 첨지댁엔 저절로 아우라가 펼쳐지는 것처럼 아름다운 세 자매가 살았으니 첫째는 맏이라 그냥 워드 양이라 부르고, 둘째가 물론 눈썹 하나 정도의 차이지만 제일 예쁜 마리아 양이었으며, 막내가 둘째와 비교해도 아쉬울 것 없는 미모의 프랜시스 양이었다. 근데 이 나라에서 혼인이라는 경사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 상대 집안이 동산, 부동산이 얼마나 많은 가문이며, 혼인 상대자가 남자라면 얼마나 많은 재산과 만일 작위 같은 것이 있다면 그걸 물려 받을 수 있는지 여부가 제일 중요했고, 여자일 경우에도 외모의 아름다움보다 친정에서 가져올 수 있는 소위 지참금이라고 일컫는 현금이 얼마나 많은지 여부였다. 워드 첨지 댁이 제일 아름다운 둘째 딸 마리아에게 줄 수 있는 재산이 7천 파운드 정도였는데, 그만하면 아주 상급 부르주아라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시골 향사, 소위 젠트리 계급에서는 웬만큼 방귀 좀 뀐다, 하는 수준이었겠다?&nbsp; 지나던 길에 우연히 마리아 양을 한 번 보고 넋이 나가버린 노샘프턴 카운티에 있는 맨스필드 파크의 젊은 주인장인 토머스 버트럼 경이 그만 오금이 저려와 단박에 청혼을 해버리고 말았다. 토마스 경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근사한 저택과 대단한 수입으로, 비록 정식 귀족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준남작에 하원의원이었지만, 워드 가문 입장에서는 쉽게 넘겨다볼 수 없는 높으신 양반이었던 것. 혼인만 했다하면 마리아 양은 단박에 남작부인 반열에 올라 평생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건 당연하고, 물 한 방울이 뭐야, 손끝 하나 까닥하지 않아도 집안일까지 착착 알아서 돌아갈 정도라, 감히 청혼을 거절할 계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마리아 양이 빼어난 미모를 가지기는 했지만 천성이 태평하고 게으르기 짝이 없으며 세상에 오직 자기 하나만 아는 인간이었는데, 혼인을 통해 팔자가 펴자마자 천성이 저절로 발전, 진화해, 하는 일 없이 그냥 자식만 넷을 쑥쑥 뽑아냈다. 맏이가 아빠 이름을 물려 받은 톰. 엄마처럼 무사태평에 낭비벽이 심해 일찌감치 속을 썩였지만 그래도 책에서는 남녀상열지사에 관한 한 어지럽지는 않았다. 둘째가 에드먼드인데 이 아들이 부처님 가운데 토막. 이튼을 거쳐 옥스포드를 졸업하고 둘째아들 답게 군인이나 성직, 적과 흑 가운데 성직을 택해 성공회 목사가 될 예정. 셋째와 막내가 딸 마리아와 줄리아. 둘 다 굉장히 이기적이고 자기 마음먹은 대로 하지 못하면 잔뜩 골을 부리는 철딱서니들. 짐작하시겠지?<br>&nbsp;&nbsp;워드 집안의 다른 딸로 말할 것 같으면, 맏이 워드 양은 둘째 마리아가 버트럼 부인이 되고 6년이 지나 돈 한 푼 없는 노리스 목사와 오직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혼인을 감행했다.&nbsp;이를 불쌍하게 여긴 마리아의 남편 토머스 경은 맨스필드 교구의 성직록(이거 설명하자면 복잡하니 그런 게 있구나 하는 수준에서 넘어가자)으로 노리스 부부에게 연 1천파운드의 수입을 보장해주어 아주 넉넉하지는 못해도 그냥저냥 당시 잉글랜드 향사 수준에서 남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아쉽게도 무자식상팔자의 즐거움까지 누리게 됐다. 혹시 모르지. 슬하가 비어서 그나마 괜찮은 복지를 누리며 살 수 있었는지도. 그러나 이런 자잘한 행복도 잠시. 노리스 목사가 덜컥 병이 들어 몇 년 지나지 않아 과부가 됐으며, 여태 살던 목사 사택에서도 계속 살 수 없어 동생 집 가까운 곳 자그마한 집을 얻어 그곳에 머물며 1년 365일, 하루에 적어도 열 두어 시간 동안 맨스필드 파크에서 노닥거리며 밥도 먹고, 동생 옷도 얻어 입고, 석탄도 조금씩 꿍치면서 무진장 빈대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원래 강퍅한 성질도 있었지만 생활의 손톱에 할퀴어 점점 성격이 모질어진 늙은이로 변해갔으니 이이도 불쌍한 인간…이라고? 웃기는 이야기. 세상에 생활의 손톱이 노리스 여사한테만 할퀴고 지나가는 거야? 원래 성질 머리가 못된 사람이지.&nbsp; 막내 프랜시스 양은 맏언니 노리스 부인보다 훨씬 못한 남자를 만나 혼인해 해군 정박지가 있는 포츠머스 부근으로 이사했다. 이때 토머스 경은 노리스 목사한테 베풀었듯이 해병대 소속 프라이스 대위한테도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생활에 도움이 될 정도의 지원을 하려고 했으나, 준남작 경과 해병대 대위 사이의 격차가 너무 커서 관련자에게 경의 신분으로 한낱 대위의 복지를 부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였느냐 하면, 준남작 경 입장에서 자신의 지위, 도리, 자존심상 체면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런데 프랜시스 양, 이젠 프라이스 부인이 열을 받겠어, 안 받겠어? 포츠머스로 이사한 프라이스 부인은 이후 두 언니하고는 딱 연을 끊어버리고 어영부영 11년을 살았다. 프라이스 부부가 금슬이 좋아서 그랬는지, 썩어도 준치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을 당해 현역 복무 불가능 판정을 받아 제대해 거의 알코올 중독자 수준이 되었건만 그래도 해병대 출신이라 체질이 더할 나위 없이 건강체질이라서 그랬는지 프라이스 부인의 배에 아홉 번째 아이가 자리를 잡고 얼마 안 있어 막 밀고 나올 거 같았을 때,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던 프라이스 부인 프랜시스는 두 언니한테 절절한 편지를 보내기에 이르렀다. 두 언니가 편지를 읽어보니 그동안 자기들 한테 한 행실은 괘씸하지만 글자 한 자, 한 자가 어쩌면 그렇게 눈물이 앞을 가리게 썼는지 화해를 해줄 수밖에 없었고, 이제 나올 아이의 후원자가 돼 달라는 프랜시스의 간청 대신 둘째 아이이자 맏딸인 작품의 주인공 패니를 데려와 보살피겠노라 일렀다.&nbsp; 이런 제안은 노리스 부인의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사실 패니를 데려와 레이디 버트럼의 말벗 또는 몸종 비슷한 용도로 데리고 있으려는 것이었다. 이제 누가 패니를 돌볼 것인가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이때는 아직 노리스 부인이 과부가 되기 전이었는데, 원래부터 떠들고 일을 꾸미는 한에서는 자애롭고 후하게 베풀며 지시하는 데 능하지만, 누구보다 돈을 좋아하고 친지들의 돈을 쓰는 법과 자기 돈을 아끼는 법을 잘 아는 부인인지라, 자신은 남편의 통풍 치료 때문에 아이를 맡을 능력이 없다고 한 마디로 패니를 맨스필드 파크에 떠넘겨버리고 만다. 아니, 마는 건 아니고 시시때때로, 주야장천 맨스필드에 머물면서 눈에 패니가 들어올 때마다 타박하고, 구박하고, 잔소리하고, 하여간 때리는 것만 빼놓고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을 다 해대는 못된 중년이었다가 못된 늙은이로 변해간다.<br>&nbsp; 이렇게 해서 우리의 주인공 패니 프라이스 양이 갓 열 살이 되어 저 거친 해군들의 천국이자 해군 함정의 집합소였던 병영도시 포츠머스에서 꼬박 1박 2일 동안 마차를 타고 맨스필드 파크에 도착하게 되니 모두 3부 48장 가운데 이제 1부 1장과, 2장 초입까지 끝났을 뿐이다.&nbsp; 패니 프라이스 양을 소개하자면, “사람을 사로잡을 수는 없어도 크게 거스르는 점도 없는 소녀.” 그냥 평범하게 착한 아이라는 뜻이겠지. 나이에 비해 작은 편이고 빼어나게 예쁜 구석도 없다지만, 아직 덜 자라 앞으로 어떻게 변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점을 눈치 빠른 독자는 벌써 알아챈다. 무엇보다 해병대 대위 출신 퇴역자 집안의 아홉 아이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행동거지가 어색하기는 해도 상스럽지 않고, 목소리도 곱고 말하는 표정이 귀여웠단다. 간단하게 말해 꿔다 놓은 작은 보릿자루. 그러나 아이를 맞는 버틀럼 가족들은, 속셈이야 어떻건 간에 겉으로 보면 잘 생기고, 용모 빼어나고, 잘 먹고 운동 많이 하고 잘 자니 심신 발달 상태 훌륭하고 사람 응대하는 솜씨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 이때 셋째이자 맏딸 마리아가 12세, 막내 줄리아가 11세. 맏이 톰과 둘째 에드먼드는 각각 17세와 16세. 근데 에드먼드가 성격이 참하다는 거지? 패니하고 여섯 살 차이네? 흠. 오스틴 좀 읽은 독자는 첫눈에 알아본다. 결국 에드먼드와 패니의 연애가 이야기의 줄기가 되겠군 그래. 설마. 그렇게 뻔한 스토리일 리가 없지. 그래도 제인 오스틴인데. 그랴? 정말? 뭐 첫 느낌이 그랬다는 거다.<br>&nbsp;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지긋지긋한 건, 첫째가 돈 타령. 누가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서 결혼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남자 또는 상속받은 남자가 내 남편이 될 수 있는지, 내 아내가 될 여자는 얼마나 많은 지참금을 가져올 수 있는지에 제일 커다란 방점을 찍는 거. 그걸 읽는 일이었으며, 둘째가 3부 앞 장면의 가장 큰 스토리로, 징글징글하게 싫어도 청혼을 단칼에 거절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상대가 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지도 말하지 못하는 고구마 백 개였다. 이 두가지 빼면 나머지는 19세기 초엽에 쓴 작품이라 넘길 수 있을 정도. 하긴 내가 고른 두 가지도 당시 작품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수 있지만, 고구마 정도가 하도 심해 굳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게 된 건지 모르겠다.&nbsp; 제인 오스틴, 하여튼 재미있다. 이번 달엔 어떻게 마음에 드는 작품을 별로 읽지 못해 괜히 시간만 버린 거 같은 생각이 들던 차에 제인 오스틴의 옛 노래 한 곡조 들으니 속이 다 뻥 뚫리는 느낌. 그래. 언제나는 아니지만 클래식이 좋기는 좋아.<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4054/37/cover150/893746366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0543764</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음중양, 양중음의 도롱뇽 - [도롱뇽의 49재 - 2024 제171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47822</link><pubDate>Thu, 13 Aug 2026 05:1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4782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72037984&TPaperId=1744782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894/84/coveroff/k87203798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72037984&TPaperId=1744782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도롱뇽의 49재 - 2024 제171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a><br/>아사히나 아키 지음, 최고은 옮김 / 시공사 / 2025년 02월<br/></td></tr></table><br/>.&nbsp; 이 책을 읽은 계기. 일본 현대 소설은 참 안 읽는다는 생각이 팍 들었음. 그러면 우리 현대 소설은 좀 읽니? 안 읽는 편은 아니다. 중국 현대 소설은 제법 읽는다. 유독 일본 작품에 인색한데, 다 이유가 있다. 도서관 서가에 꽂힌 일본의 소설책은 어떻게 고를 때마다 좀 이상하다. 수사, 폭력, 추리, 엽색 아니면 좌절의 극치 같은 거라 읽다가 그냥 덮은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장르 소설이 아니더라도 나하고 유난히 맞지 않는 책이 많다. 분명히 일본의 요즘 작가 중에도 괜찮은 사람이 꽤 있을 텐데 어째 눈에 띄지 않는 거다. 그래서 잔머리 굴리기를, 일본에서도 권위 있다고 하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작품이라면 현대 일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를 안고 처음 빌린 책이 &lt;헌치 백&gt;. 읽고 아직 한 달도 안 됐건만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조건 삼세판. 이번에도 아쿠타카와 수상작을 골랐으니 바로 &lt;도롱뇽의 49재&gt;, 눈물겹지?&nbsp; 아사히나 아키. 朝比奈秋. 성이 朝比奈. 이름은 가을秋. 1981년 일본 교토에서 출생한 의사. 전공은 소화기. 불 끄는 소화기 말고, 식도부터 저 아래 항문까지 인간과 우주가 직통하는 유일한 관을 다 고치려고 하는 의사다. 지금은 전업의사로 일하면서 짬이 나면 소설도 쓴다. 근데 아마 의사보다 소설가로 더 유명할 걸?&nbsp; 이이는 자기 나이와 의사라는 거, 소설 써서 상 받았다는 거 빼고 전부 비공개다. 심지어 인터넷의 어느 자료를 보면 “그녀는”이라고 해서 윽, 가을秋가 여자 이름이야? 하고 사진을 유심히 보면, 여자인 것도 같고, 남자인 것도 같아 막 헷갈리다가 수상 내역을 읽어보니, 일본 역사상 순수문학 신인상 트리플 크라운을 이룬 최초의 남자 작가란다. 그럼 남자 맞겠지 뭐.&nbsp; 작가의 젠더가 이 책에서는 은근히 궁금하다. 책 읽을 때는 그랬는데 검색해보고 현직 의사라는 걸 알고 나니 허탈. 그럼 젠더를 알 필요도 없었네. 왜냐하면, 의학적으로 매우 드문 케이스의 일란성 쌍둥이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br>&nbsp; 오래 전, 하마기시 집안의 며느리 쓰와코가 아이를 낳았다. 첫 아들. 경사났다. 시절이 시절이었으니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자. 건강하고 통통한 보통 체격의 사내 아이 가쓰히코(남자 아이 이름이 ‘코子’로 끝나? 거 참). 하여간 첫 아이 덕에 하마기시 부부는 보통의 신혼가정처럼 행복했다. 그러나 이것도 불과 몇 주. 몇 달이 지나면서 아기의 팔 다리가 점점 여위고 눈도 움푹 패인 것이 영 조짐이 좋지 않았다. 아이를 들쳐 업고 병원에 가서 조사를 해봤더니 생후 6개월 아이가 완연한 영양실조 증상을 보이는 거다. 골밀도까지 감소해 입원조치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거 같아서 일단 입원을 시키고, 혹시 위장에 문제가 있을지 모르니까 위 내시경 검사도 했다. 다 큰 어른도 힘들어 하는 내시경을 6개월 아이가 하려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까. 근데 별 이상이 없다. 여기서 반전.&nbsp; 아이의 위에서 내시경 관을 꺼내지 않고 그냥 관찰을 계속하던 의사가 오른쪽 위벽이 조금 부풀어 오른 것을 발견했다. 저게 뭐지?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현상이다. 의사는 즉각 X선 검사를 지시했고, 검사 결과 그건 위장 오른쪽 빈 복강에 낯 익은 작은 뼈들이었다. 마치 열빙어처럼 생긴 뼈들. 일식 집에 가면 안주로 내주는 시샤모. 그것처럼 생긴 작은 뼈를 자세히 보면 등뼈도 있고, 둥근 두개골도 있고, 골반 비슷하게 생긴 것도 있다. 아오. 아이 몸 안에 다른 태아가 자리잡고 들어 있는 거였다. 이를 ‘태아 내 태아’라고 하며, 나도 이런 현상이 아주아주 드물게 일란성 쌍둥이 여아에게 있는 줄 알았는데 남아 일란성 쌍둥이 몸 속에 들어 있는 거다. 이 태아 속 태아는 벌써 세상 구경을 한 형제의 몸 속에서 형제의 몸에 있는 산소와 영양분을 빼앗아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니 가쓰히코는 날이 갈수록 비쩍 말라갈 수밖에. 의사는 당장은 곤란하고 조금 더 자라게 내버려둔 다음에 태아 속 태아가 바깥 세상에서도 생존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후에 외과수술로 적출해 인큐베이터에서 더 성장시킨 후 퇴원,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조치했다. 그 아이 이름은 와카히코.&nbsp; 그런데 당시 가쓰히코 몸 안에, 정확하게 말하면 이번엔 왼쪽 옆구리에도 다른 낭포가 존재했었다. 그러나 척추, 손가락뼈, 안구, 머리카락, 이만 남기고 나머지는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거나, 가쓰히코에게 흡수당했을 거라고 의사들은 추측했다. 그걸 몸에서 뺐는지 그냥 내버려두었는지는 책에 나오지 않는다.<br>&nbsp; 태아를 품고 있던 태아 가쓰히코는 자기가 품었던 와카히코 때문인지 평생을 빌빌거리며 살았다. 물론 신체 건강의 측면에서 보면 그랬다는 말이다. 유아기 때 치명적 영양손실이 평생을 갔을까? 하여간 5년에 한 번씩은 대학병원에 장기 입원하는 사이클을 갖고 살면서도 대학의 철학 교수까지 역임하다가 책 중간 조금 지나 명이 다해 간다. 반면 와카히코는 엄마 배 속에서 열 달, 형 배 속에서 열두 달, 인큐베이터 속에서 또 몇 달을 지내서 그런지 만사가 여유만만하고 태평인 심성을 가져 덩달아 몸도 아주 건강하다. 가쓰히코와 달리 머리 쓰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지 회사택시를 운전한다.&nbsp; 두번째 일은 와카히코 부부한테 벌어진다. 이들은 정상적으로 혼인하고 임신해서 딸을 낳았다.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보니 딸들을 낳았던 거였다. 두 딸은 가쓰히코와 와카히코처럼 한 명 속에서 다른 한 명이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샴 쌍둥이처럼 몸이 붙은 상태였다. 붙기는 붙었으나 거의 정확하게 결합해 각각 신체의 반을 소유하는 형태. 작가는 이를 “완전 결합 쌍생아”라고 표현했다. 야누스. 일본만화 &lt;마징가 Z&gt;의 악당 주인공 아수라 백작 비슷하다. 겉으로 보면 한 몸이지만 왼쪽과 오른쪽에 각기 다른 인격이 들어 있다. 뇌도 당연히 다르고 시각, 시력도 다르다. 일란성 쌍둥이지만 임신 상태에서 합체하는 과정에서 비틀렸는지 어깨를 봐도 오른쪽은 굽어 있고 왼쪽은 솟아 있다. 두 몸이 하나로 합친 것이니 골격이 일반 사람보다 크고, 두툼한 몸을 가지고 있다.&nbsp; 자세하게는 묘사하지 않았지만 두개가 있는 장기도 있고, 하나이지만 상대적으로 엄청 큰 장기도 있다. 심장은 하나, 폐는 둘. 자궁은 큰 하나이지만 분리된 상태로 질을 공유한다. 그러면 섹스와 임신은 가능하겠지? 천만의 말씀. 두 여자가 한 남자를 공유 또는 공동으로 사랑하기 전에는 어림도 없다. 자궁이 커서 생리 때마다 박리되는 표면적이 커 유난히 심한 생리통을 겪는다.&nbsp; 이들의 이름. 오른쪽은 슌, 왼쪽은 안.&nbsp; 처음에 독자는 이들이 결합 쌍생아인 줄 모르고, 화자 ‘나’가 있고 자매 슌이 등장하는 줄 안다. 그러다가 점점 이상해진다. 결국 이들이 결합 쌍생아, 완전한 형태의 샴 쌍둥이라는 걸 알게 되는 경악을 겪게 되는데, 그래서 나처럼 경악을 경험하시라고 모른 척하려 했으나, 출판사 책 광고에 다 나오는 걸 내가 굳이 숨길 필요가 없을 거 같아서 밝히는 거다.<br>&nbsp; 이 이후에는 자매들이 세상을 사는 것, 큰아버지 가쓰히코의 죽음과 장례, 화장 과정. 그리고 이들처럼 완전한 결합 쌍생아의 의미를 찾아 나선다.&nbsp; 음양도라는 것이 있다. 검은색과 흰색으로 만든 태극 모양의 그림. 태극은 태극인데 흰색 태극의 중앙에 검은 점이 있고, 검은 태극의 중앙에 흰 점이 있는 거, 보셨으리라 믿는다. 그걸 각각 양중음, 음중양이라고 한단다.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이 되고,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이 되는 것. 이런 대극, 커다란 극이 결국 하나의 원을 이룬다는 건데 서로 물려 있는 태극이 도롱뇽과 비슷한 모습이라고.&nbsp; 그러면 49재는 뭘까? 제사? 아니다. 불교에서 재를 올린다, 할 때의 재齋. 이제 윤회의 끈을 풀어 영원히 생로병사의 환을 그리지 말라는 축원이다. 가쓰히코/와카히코 그리고 슌과 안의 음중양, 양중음의 회전을 그만 두자는 것일까? 그건 독자 마음이겠지.<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894/84/cover150/k87203798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8948452</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쓰느라 애쓰셨다 -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45849</link><pubDate>Wed, 12 Aug 2026 04: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4584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42635280&TPaperId=1744584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8925/0/coveroff/k54263528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42635280&TPaperId=1744584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a><br/>정지돈 지음 / 워크룸프레스 / 2019년 04월<br/></td></tr></table><br/>.&nbsp; 여섯 편이 실린 소설집. 출판사 워크룸프레스의 ‘입장들’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 앞 번호에는 1번 이상우, &lt;warp&gt;와 2번 정영문, &lt;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gt;가 있다. 이상우의 &lt;warp&gt;는 어디서 한 번 읽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그렇다.&nbsp; 이상우, 정영문에 이어 정지돈이라면 이 시리즈 읽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여기에 정영문이 끼었다? 좀 터울이 있을 텐데. 하긴 예술 하는 사람들끼리 그깟 터울이 대수랴. 잘 어울려 한 판 잘 때려 놀면 그걸로 장땡이지.&nbsp; 내가 읽은 정지돈은 꼴랑 세 권 밖에 안 되지만 모두 2020년 이후에 출간한 책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는 2019년. 이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내가 정지돈을 계속 읽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을까? 반 이하의 확률로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반 이상의 확률로는 이 책이 마지막 정지돈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고.<br>&nbsp;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memex. 나는 이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 지 모르겠다. 사전을 뒤져봐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아 일단 읽기 시작했는데 저 뒤에 가니까 memory와 index를 합해서 만든 조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일부 소설가들이 사용한다고 하는 메모철을 일컫는 건가? 뭐 비슷한 거겠지. 꼰대식 어법으로 하면 일종의 카드. 작가 특히 장편 작가들이 유용하게 사용한다는 카드. 이 정도면 될 거 같다.&nbsp; 이 다음 문제는 그럼 메모리 인덱스를 나열하면 그걸로 소설이 될 수 있을까?&nbsp; 독자는 조심해야 하리. 특히 창작작업과 관련 없이 오직 독서를 즐기는 아마추어 독자의 경우에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코피를 쏟거나 놀림을 받기 십상인 것이 눈에 훤하니 입조심이 필수이다. 될 수 있는 대로 이렇게 말하라. 당연히 소설이 될 수 있고, 이 책도 분명히 소설이라고.<br>&nbsp; 그러나 작가와 독자인 나 사이에, 관심의 공집합이 거의 없는 게 문제였다. 말 그대로 시, 공, 장르를 넘나드는 메타 픽션인데, 어떻게 그것들이 하나도 내 관심사에서 벗어나 있는지 그것도 놀라울 정도. 나는 작가의 memex를 보는 것보다 작가의 memex들이 적절하게 이합집산, 내부 투쟁을 거쳐 이 책 보다는 순한 읽을 거리로 등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 소양으로는 이게 잘 쓴 소설인지, 아닌지 그걸 구분하는 것부터 기대 난망이다. 하여간 정지돈, 글 쓰느라 애썼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8925/0/cover150/k54263528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89250073</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이걸 오타 내는 건 또 처음 보네 - [라 스토리아 1]</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43918</link><pubDate>Tue, 11 Aug 2026 04: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4391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62137057&TPaperId=1744391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91/96/coveroff/k36213705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62137057&TPaperId=1744391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라 스토리아 1</a><br/>엘사 모란테 지음, 나윤덕 옮김 / 마르코폴로 / 2026년 04월<br/></td></tr></table><br/>.&nbsp; 엘사 모란테. 1912년 8월에 출생한 이탈리아의 소설가, 시인, 역자, 소년도서 작가. 출생이 좀 헛갈린다. 위키피디아에는 엘사의 어머니가 어떤 가계에서 출생했는지가 먼저 나온다. 교사 일을 하던 아르마와 아우구수토 모란테의 딸이란다. 그런데 어머니 아르마가 이탈리아 북부 도시 모데나의 유대인이다. 그럼 엘사 모란테 입장에서 보면 외할머니가 유대인이고 어머니는 반 유대인. 아버지는 엘사 모란테가 10대 소녀가 되었을 때 알게 되었는데, 동네 이웃 프란체스코 로 모나코 아저씨였단다. 그래서 엄마의 성 모란테를 갖게 된 모양이다. 이런 특별한 출생 비화는 &lt;라 스토리아&gt; 우리말로 역사, 이야기, 사연이라는 제목의 소설 속에서 중요한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의 내력과 비슷하다.&nbsp; 아버지인 이웃 아저씨가 엘사 모란테를 제대로 지원해 줄 수는 없었겠지. 옆집 아줌마 보는 눈도 있었을 터이니. 그리하여 거의 독학 비슷하게 공부를 해서 1930년대 중반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 66번으로 나온 &lt;아서의 섬&gt;을 발표해 스트레가 상을 받는 성공하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이탈리아에서는 알아주는 작품인 &lt;라 스토리아&gt;를 출간한다.&nbsp; 1941년에는 동료 소설가이자 영화 평론가인 알베르토 모라비아와 결혼하는데, 1941년. 아무래도 좀 불안한 것이 이탈리아 파시스트 당의 일 두체, 두령님 무소리니가 히틀러의 유대인 박멸작업을 돕지 않을 수 없었던 시기. 반의 반 유대인인 엘사 모란테 입장에서는 검거되어 죽음의 수송열차를 타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을 테고, 그리하여 로마 외곽의 허름한 피난 창고 건물에서 일정 기간 머무는데, 이것 역시 책 속 한 장면으로 들어 있다. 근데 이이의 남편이 알베르토 모라비아였구나. 음. &lt;경멸&gt;을 읽고 고구마 백개 먹은 듯한 답답함에 질려버린 작가. 그리하여 정작 대표작인 &lt;순응주의자&gt;를 도서관 관심도서 목록에 올려만 놓고 수 년째 곁눈질도 하지 않은 작가. 핑계김에 조만간 읽긴 읽어봐야겠다.<br>&nbsp; &lt;라 스토리아&gt;는 1941년부터 1947년까지 7년간 이탈리아 로마와 로마 부근의 피난처에서 살던 이다 만쿠소 부인 주변의 이야기이며 이이의 시각에서 직접 경험한 로마의 2차세계대전의 역사라고 생각하면 되겠다.&nbsp; 1941년 1월. 다하우가 고향인 독일 병사 군터가 등장한다. 몇 년 후 다하우는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생체실험 및 대량 학살로 크게 이름을 떨칠 생체실험실이 있던 장소로 기억되겠지만, 사실 군터가 고향을 떠나올 때까지는 5~6천 명의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치료하는 이상적인 의료기관이어서 오히려 고향 사람들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하여간 금발의 훤칠한 키와 절도있는 몸가짐을 한 앳된 외모의 독일군인은 절망적인 눈빛을 한 185cm의 늘씬한 몸에 맞지 않는, 독일군치고는 우스꽝스런 복장을 하고 있었다. 소매가 깡충하고 바지 기장도 많이 모자란 군복을 입을 건 뭐람? 그건 입대 후에 키가 자랐기 때문이다. 로마에 온 건 아프리카로 파병하기 위하여 잠시 대기하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시골 출신 군터 입장에서 아프리카라니, 그건 마치 지구를 벗어나 은하계에 접어드는 듯한 기분을 갖게 했다. 놀라운 흥분감.&nbsp; 군터는 독일 사창가에서 딱지를 떼 적이 있다. 로마에서도 사창가를 찾아 나서서 골목을 배회하다가 들어간 곳이 반지하 선술집. 이때 이탈리아 사람들이 독일군인에게 좋은 감정을 갖지 않았나 보다. 선술집 남자들이 혐오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째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 군터는 그래서 더 호기롭게 포도주를 시켜 벌컥벌컥 마셨고, 한 잔 더 시켜 다시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그래도 남자들의 눈매가 기분 나빠 추가로석 잔의 포도주를 연달아 들이켰더니 이젠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던 거다. 그렇다고 쪽팔리게 총독의 병사가 토해버릴 수 없으니까 일단 술집에서 나와, 한 건물 계단 옆에 쭈구리고 앉아 있었다.<br>&nbsp; 시간이 좀 지났다. 마침 이 건물에 사는 초등학교 교사 이다 라문도가 군터와 마주쳤다. 남편의 성씨는 만쿠소. 서른 일곱 살. 과부. 외모로 보면 빈약한 상체와 투실한 하체가 균형이 맞지 않는 중년여성. 당시에 30대 중반이면 충분히 중년이었다. 그래도 아직 내면은 어린 아이 수준이다.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 빼고 세상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1903년생 염소자리. 산업, 예술, 예언, 광기, 어리석음의 별을 타고 났지만 별로부터 받은 건 조금의 광기과 어리석음 뿐이었다.&nbsp; 아버지는 공산주의자. 엄마는 유대인. 원래 이름을 ‘아이다’라고 지으려 했지만 행정절차 중에 알파멧 A가 빠지는 바람에 아이다에서 이다가 되었다. 1919년인가 20년에 교사시험에 합격하고, 마지막 여름방학 때 지참금 없이 약혼한 남자 알피오 만쿠소와 혼인했다. 시칠리아 메시나 출신 1898년생 남자로 방문 외판원이어서 돈을 잘 벌어오는 건 아니었지만 사이에 씩씩한 말썽꾸러기 아들 안토니오, 애칭으로 니노, 닌누추, 또는 닌나리에두를 낳았다.&nbsp; 계단참에 쓰러져 침을 흘리며 잠을 자던 독일군 군터의 눈에 들어온 중년 여인. 자기 동정을 가지고 간 매춘부도 형편없이 나이든 여인이었다. 그러니 술이 깨지 않은 군터가 보잘것없는 상체와 풍만한 하체를 가진 이다를 직업 여성으로 여길 수도 있었겠지. 그리하여 군터는 독일의 히틀러 군대 군인의 위압감으로 이다의 허리를 두른 채 이다의 집으로 억지로 몰고 가서, 물론 이 과정에 이다의 만만치 않은 저항이 있긴 했지만 하여간, 했다. 일을 마친 후 가지고 있던 장식용 칼을 나이 많은 아주머니에게 선물인 셈쳐서 건네 주고 그냥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갔다. 이게 독일군 군터의 마지막 장면이다. 딱 한 장면에서만 나온다. 삼일 후에 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 전선으로 날아가다 폭격을 맞아 죽을 운명이었다. 낙하산을 타고 탈출하는 대신 엉뚱하게 이다의 자궁에 자기 DNA가 절반 들어간 수정란 하나를 착상시켜놓은 건 당연히 몰랐다. 이날부터 아홉 달 후에 이다의 둘째 아들이 태어난다. 아이의 이름은 할아버지와 같이 주세페라고 짓는다. 아이가 옹알이할 때 주세페 대신 우세페라고 해서, 기록자 역시 아이를 우세페라고 쓴다. 우세페의 씨 다른 형 니노 역시 우세페라고 하고, 세상에 둘도 없는 우의를 갖는다. 기특하게도.<br>&nbsp; 주인공 엄마 이다는 어릴 때 많이 긴장하거나 위급한 순간이 닥치면 갑자기 과호흡을 동반한 강박 상태에 돌입하는 이상 상황을 벌였다. 당시 의과학으로는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해서 그냥 기질이 있는 것으로 치부했다. 이런 기질을 아빠 이름도 모르는 늦둥이 주세페가 물려 받았다. 물려 받기만 하면 괜찮은데 이를 더 발전시켜 규모를 확장해버렸으니 문제다. 그건 나중에 계속 나올 터. 여기에 좀 유별나달까, 특별하기 때문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질도 있고, 어릴 때부터 전시 상황에 살면서 죽음에 처하거나 죽어가거나 하는 모습에 많이 노출된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작품 중의 소아 정신과 의사 누구도 정확하게 진단, 처방하지 못하지만 21세기라면 치유가 가능했을 것 같다. 하여간 이런 일종의 정신 질환이 있다고 보면 된다.&nbsp; 그러나 아이는 세젤예 소년이며, 가장 명랑하고 사람 잘 사귀는 귀여움 덩어리. 어려서부터 말썽꾸러기이지만 누구보다 자신한테 친절한 형 니노, 그가 데려온 개와 친숙하게 자라 동물의 심정에 밝은 아이로 성장한다.&nbsp; 하지만 엄마 이다는 자신의 반 유대인 혈통에 관하여 점점 더 큰 불안에 휩쓸리고, 니노는 일찍이 일 두체에 대한 충성으로 자원입대하기로 결정을 하고 집 나간 문제아. 때를 맞춰 로마 공습으로 집이 폭삭 무너지자 로마 시내 외곽 습지의 텅 빈 피난처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nbsp; 그리고 빠질 수 없지만, 이젠 좀 식상한 홀로코스트. 파시스트에서 공산주의 혁명가로 변신한 후 이탈리아 내 반 독일 레지스탕스로 변모한 니노. 이렇게 엘사 모란테는 자기 주변에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었던 2차세계대전의 모습을 차곡차곡 작품 속에 담았다.<br>&nbsp; 그게 다다. 다는 아니다. 여기에 이다 가족사도 포함해야 하니까.&nbsp; 이탈리아 예술 장르에 ‘베리즈모’라고 있다. 주로 치정살인극을 말한다. &lt;라 스토리아&gt;에는 치정은 없다. 그러나 참 많이 죽어 나간다. 군인과 유대인은 군인과 유대인이라서 죽어 나가지만, 전쟁의 주변에 있다가 폭격을 맞지 않더라도 참 잘, 다양하게 죽는다.&nbsp;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작 내가 이 책을 지겹디 지겹게 읽게 만든 것은 작품 속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에피소드를 왜 그렇게 길고 자세하게 묘사하느라 지면을 사용했을까, 하는 것. 이 에피소드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nbsp; 한 무정부주의자 유대 청년이 탄압을 피해 집을 나왔어. 그러다가 잡혀서 고문을 받은 후에 이동 중 탈출했어. 이후에 이다 가족과 잠깐 어울렸다가 오랜만에 들른 이다의 아들 니노를 따라 혁명 파르티잔 집단으로 들어가, 아직 덜 죽은 독일군을 징 박은 발뒤꿈치로 얼굴을 자근자근 밟아 죽였어. 부모 형제가 다 수용소에서 죽었거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제대로 살지 못하고 부르주아 아버지한테 받은 재산을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삼촌에게 다 주고 로마로 와서 모르핀 중독자로 살며 죽음이 어서 오기만을 기다려. 근데 왜 독자가 이 남자, 카를로 비발디의 생을 자세하게 알아야 하는 건데? 이런 불만.&nbsp; 읽다가 읽다가 지루할 때쯤, 마침내 나는 책갈피 한 장을 붙였다.&nbsp; 2권 274페이지. 앞에서 말한 카를로 비발디의 유대 본명이 다비데. 다비데와 함께 라디오를 듣고 있던 동료 가운데 한 명이 쏘아붙였다. 또 허무한 무정부주의를 일갈했던 모양이다.&nbsp; “너한테 부르주아는 좇이란 거잖아!”&nbsp; 두 권짜리 장편소설에 딱 한 장 붙인 메모. 나는 거기에 이렇게 썼다.&nbsp; “좇? 책 읽다, 읽다 이걸 오타 내는 건 또 처음 보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91/96/cover150/k36213705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0919607</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다양한 소재, 낯선 장소 이야기 - [여러 개의 북을 두드리며]</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42186</link><pubDate>Mon, 10 Aug 2026 04:4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4218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62138164&TPaperId=1744218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70/45/coveroff/k26213816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62138164&TPaperId=1744218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여러 개의 북을 두드리며</a><br/>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04월<br/></td></tr></table><br/>.&nbsp; 올가 토카르추크. 노벨 문학상을 탄 후로 이이의 픽션 작품을 재미있게 읽었다. 우리말로 나온 픽션은 다 읽은 거 같다. 이번에도 토카르추크의 신간이 나왔다는 걸 알자마자 곧바로 희망도서 신청해서 도서관 ‘첫빠따’로 읽었다. 도서관 새 책을 읽는 기분이 꽤 근사하다는 건 다들 아실 터. 흐뭇하다. 본문만 554쪽에 이르지만 하루 반나절 만에 후딱 읽었다. 팍팍 읽힌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토카르추크가 어떤 식으로 픽션을 쓰는지 선 경험이 있는 분들은 “팍팍 읽힌다”가 어떤 의미인 줄 훨씬 짐작하기 쉬우실 듯하다.&nbsp; 《여러 개의 북을 두드리며》는 2018년에 폴란드에서 최초 출판한 《기묘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17년 전인 2001년에 발표한 책이다. 그러니까 훨씬 언니-책이다. 토카르추크는 이 때부터 “기묘한 이야기”를 썼다. 특히 앞 부분에 실은 작품들이 그러하다.<br>&nbsp; 책을 선도하는 작품 &lt;눈을 뜨시오,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gt;로 말하자면, 작가와 주인공과 독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원래 ‘실험적인 작품’은 대개 기묘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세계근대문학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힌 실험적이라서 기묘한 이야기는 카프카가 쓴 풍뎅이, 잠자 이야기 아닐까? 이 작품도 그런 의미에서 기묘하다.&nbsp; 주인공은 틀림없이 추리소설 애호가 C. 사무직 직장 여성이고, 딸과 아들을 키우며 아직도 나이든 남편과 놀랍게도 이혼하지 않고 살고 있다. 지지고 볶는 가정사 이야기는 제쳐두자. 더 중요한 건, C가 추리소설을 샀다는 것.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 산 건 아니고, 그저 서점에 들러 다른 건 그만두고 표지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말라붙은 핏자국을 연상케 하는 기묘한 빛깔의 어두운 배경, (중략) 귀퉁이를 직각으로 마감한 황금빛 서체”를 보니까 이 책이 자기가 선호하는 추리소설인 것이 틀림없다고 믿어서 비자 카드 긁었다. 이 책의 제목? 모른다. 독자는 그냥 추리소설이라는 것만 안다.&nbsp; 추리소설의 주인공, 하여간 사건을 만드는 건 ’추리소설계의 여왕’이라 불리는 노 작가 울리카. 이 노 작가가 플랑드르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작은 고성을 가지고 있다. 수십권의 추리소설을 출간했고, 그게 다 베스트셀러라서 아무리 작더라도 아름다운 성을 상속받아 계속 소유할 수 있었다. 쉬운 일 아니다. 유럽의 성을 소유했던 옛 귀족의 후손들 대부분 성의 유지비와 세금이 무서워서 다 팔아버렸을 걸? 하지만 울리카는 아니었다. 이제 늙어 마른 나뭇가지처럼 바싹 마르고 왜소한 노파. 이이의 후손이 있는지 없는지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하여간 자신이 죽은 다음에 밤나무 숲을 포함해 이 성을 ‘추리소설 작가들을 위한 창작 센터’로 만들어달라고 유언을 해 놓은 상태. 벌써 집필실과 토론실 같은 부대시설도 다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드디어 토론을 위하여 유럽과 미국에서 추리소설 작가 몇 명이 도착한다.&nbsp; 영국인 롱펠로. 매섭게 추운 날 오픈카를 직접 운전해 몰고 도착한 프랑스 여성 안마리 뒤라크. 왜소하고 비대칭적 외모의 프루흐트 씨, 마지막으로 미국에서 온 흑인 청년 ‘루 어쩌고.’ 여기에 울리카까지 합해서 다섯 명이 며칠 동안 회합을 연다. 추리소설이니까 살인 또는 살인이 저질러진 상황이 나올 것이다. 이렇게 책을 산 독자 C는 믿고 있다.&nbsp; 근데 아무도 안 죽는다. 이 당대의 추리 소설가들은 날마다 모여 ‘살인놀이’라는 게임만 하고 진짜로는 다른 사람한테 살인 목적으로 손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는다. 부비트랩을 설치하지도 않고, 독약을 조제하거나 와인 잔에 바르지도 않는다.&nbsp; 우리의 C는 바쁜 와중에도 언제 이들이 서로 죽이려 기를 쓰고, 언제 진짜로 죽는 장면이 나오는지 조바심을 바치지만 결코 죽지 않은 채 지루한 살인놀이만 하고 있다.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정말 재미없는 게임. 그리하여 C는 열을 잔뜩 받아 직접 이들이 모임을 하고 있는 플랑드르의 아름답지만 작은 성에 찾아가 하나 하나씩 직접 살해하기 시작한다. 독자가? 책 안으로 들어가서?&nbsp; 그렇다니까. 그리하여 이 작품은 추리소설이 아니라 환상문학이 되는 것이고, 토카르추크의 전편을 읽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웃으면서 그것 참 재미나네. 할 수 있겠다. 이런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이 앞에서부터 네 편에 달한다.<br>&nbsp; 그런데 나는 이런 환상 소설 장르를 부담 없이 읽기는 하는데 좋아하는 수준은 아니다. 그냥 보통의 순소설을 더 선호한다. 이 책에서도 제일 마음에 든 것이 아홉번째 실린 &lt;체 게바라&gt;와 열번째 작품 &lt;나이트&gt;였다.&nbsp; &lt;체 게바라&gt;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가 아니라 누군가의 별명. 시절은 1981년 12월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조를 정부가 탄압해 그단스크뿐만 아니라 폴란드 전국 각지에서 동맹 총파업을 벌였던 시기. 화자 ‘나’는 바르샤바 대학에 (아마도)재학중이면서 자원봉사자였다. 재미있게도 자원봉사자도 파업에 동참했단다. 자원봉사자도 파업권이 있다? 자원봉사자가 노동자 자격을 갖추려면 반드시 임금노동을 해야 하는데 뭐 그랬던 모양이다.&nbsp; ‘나’는 대학 부속병원에서 세 명의 성인을 맡아 돌보았다. 여기서 성인이 어떤 성인을 가리키는 말인지 헛갈린다. 성인成人adult인지 성인聖人saint인지. 왜냐하면 ‘나’의 보스 M은 이들을 일컬어 “고객” 또는 “미치광이”나 “광인들”이라 부른다. 아다시피 러시아 문화권에서는 성스러운 바보, 조현병 환자들을 성인saint으로 여기는 경향이 조금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유로지비. 도스토옙스키가 쓴 &lt;백치&gt;의 주인공 미쉬킨 같은 사람이 대표적. 하여간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이다.&nbsp; 그리하여 이 작품은 ‘나’가 세 명의 성인과 만남을 갖는 이야기이다. 이 가운데 첫번째 만난 사람, 즉 환자가 체 게바라. ‘나’는 카페에서 담배를 피우며 체를 기다리고 있었고, 조금 있다가 드디어 체가 등장했는데, “허리에는 탄띠를 흉내 낸 띠를 두르고, 철제 군용 식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를 걸친 채” “Heil Hitler”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어서 “노동에 경이를 표하라, 동포들이여!”&nbsp; 카페 손님들은 익숙하다. 그들은 체 게바라를 향해 비웃는 듯하면서도 너그러운, 혹은 약간의 다정함이 섞인 미소를 짓고, 가끔은 누군가가 “안녕, 체 게바라!”라고 받아준 다음 원래의 분위기로 돌아간다.&nbsp; 이 늙은 조현병 환자는 자신의 기억을 1945년에 닫아 놓고 산다. 그래야 안전하다고 여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체 게바라를 바라보는 ‘나’는 불안하다. 언젠가 그에게 불행이 닥칠 것 같아서. 체 게바라 자신도 가끔은 이렇게 생각한다.&nbsp; “아마 내가 진짜 미친놈인가 봐.”&nbsp; 두번째, 세번째 성인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br>&nbsp; 열번째 실린 작품 &lt;나이트&gt;의 나이트는 knight, 체스의 말 가운데 하나. 등장인물은 부부. 그리고 그들이 키우는 대형 암컷 개 레나타. 결혼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 이제 노년은 아니지만 부부는 서로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서로 안다. 그리하여 이들은 결혼생활의 전환이라도 마련하고 싶었을까? 한 겨울에 폴란드의 바닷가, 그러니까 북해일 것이 틀림없는 몹시 추운 바닷가 펜션으로 2박3일 여행을 왔다. 하지만 더 이상 이들 사이에, 사실은 그만큼 산 많은 부부들이 늘 그러하다는 것을 모른 채, 서로가 서로에게 집중하지 않고, 더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그저 서로 편한 일만 한다.&nbsp; 그나마 이 부부에게 아직 남은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체스. 실력으로 말하자면 아내 쪽이 조금 더 윗길이다. 그래도 집중하지 않으면 쉽게 이길 수준은 아니라서 이들은 추위와 무지한 강설에 길이 막혀 일주일 동안 체스를 둔 적도 있다. 이 바닷가의 펜션에 도착해서도 이들은 결국 체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지금부터 TV를 볼 것임을 뻔히 알고, 아내가 2층 침실에 틀어박혀 잠도 자지 않으며 나오지 않을 것을 안다. 그런데 TV를 보는 꼴도, 자는 척하는 꼴도 보기 싫다. 그러니 남은 건 체스.&nbsp; 체스를 두다가, 일단 게임을 멈추고 내일 다시 하자는 데 동의한다. 와인도 좀 마시고, 침실로 들어 서로의 몸을 더듬지만 이내 그것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nbsp; 이들 사이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무엇이 있을까.&nbsp; 손길이 닿아올 때마다 느껴지던 짜릿한 전율, 우연한 스침, 애타는 갈망, 오랜 기다림 끝에 맞닿던 두 손, 향기에 취하는 설렘, 그 향기에 얼굴을 파묻을 때의 포근함, 눈빛 하나로 서로의 생각을 헤아리던 일, 같은 순간 같은 생각을 나누던 기적, 고요하고 흔들림 없는 친밀함, 귓불의 모양 만으로 황홀해하던 나날, 밤마다 식물처럼 서로의 몸을 기어오르며 상대의 몸을 마치 내 껍질인 듯 여기던 순간들, 불꽃놀이, 동화 속 마법,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이 모든 것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이제 둘 다 안다.&nbsp; 다음날, 이들은 다시, 어쩌면 마지막으로 체스를 계속 두려 한다. 그러나 흰 나이트 말이 사라졌다. 레나타가 어디로 물고 가버린 모양이다. 결국 체스마저 이들 사이에서는 둘 수 없는 상황. 그러나 이게 끝은 아니다.<br>&nbsp; 재미있게 읽었다. 다양한 소재와 다양한 주제, 그리고 폴란드와 바르샤바라는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람 사는 이야기. 어떻게 거기서도 사람 사는 일은 이다지도 비슷한지.<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70/45/cover150/k26213816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704531</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열여섯, 내가 제일 예뻤을 때 - [아름다운 여름]</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36768</link><pubDate>Fri, 07 Aug 2026 05: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3676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62031446&TPaperId=1743676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291/94/coveroff/k16203144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62031446&TPaperId=1743676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아름다운 여름</a><br/>체사레 파베세 지음, 이열 옮김 / 녹색광선 / 2025년 10월<br/></td></tr></table><br/>.&nbsp; 파베세의 책이 나왔다는 걸 알자마자 득달같이 희망도서 신청했다가 벌써 신청한 이용자가 있어서 이제야 읽었다. 이 책 이전에 두 권의 파베세를 읽었는데 둘 다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lt;레우코와의 대화&gt;가 신선해 늘 기억하겠다 마음먹었다가 순식간에 잊고 지낸 것이 미안해 더 찾게 된 거 같다.&nbsp; 1949년 작품 &lt;아름다운 여름&gt;은 1950년, 잊지 말자 6.25가 터진 해에 이탈리아의 최고 문학상이라고 일컫는 스트레가 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광고를 읽고 더욱 기대가 부풀었다. 그러면, 기대가 크면 위험하다. 그걸 알고도 기대를 품지 않을 수 없었으니 정작 읽고 난 다음에 흠, 기대가 너무 컸군, 이러면서 좀 불만을 갖는 것도 이해가 가지? 뭐 사는 게 다 그렇잖아.<br>&nbsp; 열여섯 살 아가씨 지니아의 성장소설은 아니고, 젊은, 젊어도 가장 꽃다운, 물론 1950년 이전의 시각으로 볼 때 가장 꽃다운 젊음을 구가하는 소녀의 한 시절 이야기. 당연히 첫사랑과 첫경험. 그리고 자기 마음 같지 않은 사랑.&nbsp; 구태여 스토리를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1940년대 후반. 2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가 괜히 쌍코피만 터진 패전국으로 아직 회복되지 않은 체제 안에서 열여섯 살의 청소년들은 학교 대신 공장의 직공이나 정비공 등으로 돈을 벌어야 했고, 기존 윤리도 급격하게 변화하던 시기를 맞아 방황했던 청소년들의 초상.&nbsp; 주인공 지니아는 아직 부모의 간섭을 받아야 마땅한 청소년이지만 안타깝게 부모는 세상에 없다. 오빠 세베리노는 발전소에서 중앙 스위치를 담당하는 야간 전담 근무자. 우리나라에는 교대근무가 보통이지만 서양에는 아예 야간근무를 조건으로 근로계약을 맺는 일도 흔하다. 이 말은 오빠가 회사에 출근하는 밤에 지니아의 활동이 자유롭다는 뜻도 된다. 지니아 역시 학교 대신 시내에 있는 부티크 숍에 다니면서 돈을 벌어 자기 옷, 화장품, 액세서리 등을 사는 데 쓴다. 아무리 오빠라도 이런 용처로 돈을 달라고 하기는 좀 그렇다. 세베리노는 낮에 잠을 자기 때문에 지니아가 점심을 차려주고, 설거지와 집 청소를 전담한다. 이런 일이 즐겁기도 하다. 안주인처럼 혼자서 집을 꾸미는 일. 생각보다 괜찮은 모양이다. 물론 당신이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라 194X년의 지니아 한테.<br>&nbsp; 지니아의 친구로 로사, 티나, 클라라 등이 있다. 얘네들하고 밤에 춤추러 나가면,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남자애들이 둘이서 들판에 가자고 한단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보리밭에 함께 가자”는 뜻이다. 마음이 여려 들판에 가자는 걸 싫다하지 못하는 로사가 하루는 공장에서 도망쳐 지니아한테 와서 고민을 털어놓았다. “어떻하니, 나 임신한 거 같아 무서워 죽겠어.”&nbsp; 지니아는 동요한다. 친구들 모두 여기까지는 아니지만 원인이 되는 행위는 해 본 것 같은데 자기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든다. 다행스럽게 로사는 그냥 기분이 그랬다는 것이고 별 일 없다. 괜히 소외된 듯한 감정이 들었던 지니아는, 그래도 열여섯 살이면 너무 빠르다고 믿기로 한다. 그렇게 스스로 설득하건만 마음 한 구석의 굴욕감은 사라지지 않는다.&nbsp; 서양 사람들은 친구 사귀는데 나이 차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열아홉에서 스무 살 사이의 아멜리아는 키가 크고, 엉덩이 부분이 풍만하다. 말처럼 갸름한 인상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외모의 아가씨. 지금은 실직 중이다. 아멜리아가 지니아에게 접근한다. 암만해도 오빠 세베리노한테 관심이 있는 것처럼 읽힌다. 그러나 아니다. 알고 보면 정확하게 실직도 아니다. 나름대로 일 해서 적지 않게, 물론 충분하지는 않지만 많이 모자라지도 않는 돈을 번다. 나쁜 직업도 아닌 것 같다. 바로 모델. 희한한 걸음걸이로 런웨이를 누비는 모델이 아니라, 얼굴이면 얼굴, 몸이면 몸, 대개는 얼굴을 포함한 전신 그림을 그리기 위한 예술 모델. 옷을 입기도 하고 누드 모델이기도 하다. 다 한다.&nbsp; 시절은 여름. 아멜리아는 덥다는 이유로 스타킹을 안 입는다. 예쁜 원피스만 입는다. 제법 날이 지나 지니아가 보니까 아멜리아가 겉으로는 명랑해 보여도 사실은 꽤 처량한 처지인 것 같다. 스타킹도 덥다고 안 입는 것이 아니라 없기 때문이고, 늘 예쁜 원피스만 입는 것도 옷이 그거 단 한 벌밖에 없기 때문인 거 같다.&nbsp; 그럼에도 지니아는 하루에 겨우 한 두 시간 모델을 해주고 돈을 제법 받는다는 것에 혹해서 자기도 한 번 모델을 할 수 있을까, 말을 보탰다가 정말로 바르베타라는 이름의 회색 턱수염을 기른 뚱뚱한 남자 화가의 아뜰리에에 가서 얼굴 모델을 해본다. 화가는 싸가지없게 스케치를 여러 번 하더니 모델료 대신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퉁 쳐버린다. 아멜리아가 말한다. 앞으로 바르베타는 모델로 너를 계속 찾으려 할 거야. 아이스크림으로 모델료를 대신할 수 있는 너를 놓치지 않을 거라고.<br>&nbsp; 이렇게 해서 지니아는 또래의 친구들, 다리를 절고 집에는 먹을 것도 하나 없는 티나, 당구만 잘 치는 백수 피노와 들판에 나갔다가 임신했는 줄 알고 벌벌 떠는 로사, 별 존재감 없는 클라라와 약간의 거리감이 생기고 줄곧 아멜리아와 함께 하기 시작한다.&nbsp; 모델 아멜리아. 당연히 이런 저런 화가와 친한 사이이고, 화가 가운데는 젊은 화가도 있다. 포르투갈에서 온 로드리게스와 이탈리아 시골 출신의 귀도. 여자 모델 두 명과 귀도의 집에서 사는 두 남자가 서로 어울리기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지니아와 귀도는 서로 사랑하게 되는데, 뭐 사랑이 다 그렇지. 40년대건 2020년대건 비슷하겠지. 사랑하다가 이런저런 사달도 만나고, 젊은이들이니 사달의 충격파도 그만큼 크겠고, 실수도 하겠고, 뭐 그러면서 자라는 거라고?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nbsp; 역자 이열이 사진작가인 모양이다. 이 책이 그가 번역한 첫 문학작품. 내가 주장하는 바, “번역도 습작이 필요하다.” 그냥 해보는 말이다. 다른 상도 아니고 스트레가 상을 받은 대표작인데 어찌 다른 작품보다 덜 재미있게 읽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해본 말이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291/94/cover150/k16203144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2919493</link></image></item><item><author>Falstaff</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방랑하는 유대 늑대, 그리고 유대 개 - [개와 늑대]</title><link>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35052</link><pubDate>Thu, 06 Aug 2026 05:3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underhorn/1743505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22935823&TPaperId=174350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512/17/coveroff/k42293582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22935823&TPaperId=1743505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개와 늑대</a><br/>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3년 09월<br/></td></tr></table><br/>.&nbsp; 네미롭스키를 찾아 읽는 중이다. 처음 읽었을 때부터 좋은 인상을 받았다가 그간 잊고 있었던 작가. 그게 좀 미안했는지 굳이 찾아서 읽고 있다. 1903년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부유한 유대인 가족의 따님으로 태어난 작가. 책의 앞 날개에는 그러나 네미롭스키가 불행하고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소개한다. 금융가였던 아버지? 쉬운 말로 전세계 어떤 민족도 흉내내지 못하는 천재를 보여주는 대표적 유대인 직종, 고리대금업자로 시작해 입지전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말이고, 부르주아의 아내 자리에 오른 어머니는 네미롭스키를 유모의 손에 맡긴 채 “자신의 삶을” 누렸다고 해도, 외롭기는 했겠지만 정말로 불행했을까? 나름대로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 자기 민족의 재앙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그건 불행한 거니까. 나름대로.<br>&nbsp; 앞날개의 문구를 시비하는 건 이유가 있다.&nbsp; 작품의 초기 무대가 우크라이나의 한 도시. 시대는 190X년. 유대인에게 이 도시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nbsp; 강과 가까운 도시 아래쪽은 불가촉천민과 같은 취급을 당해 마땅한 유대인과 불량배, 가난한 장인, 음침한 가게의 세입자, 유랑민이 모여 살고 동네엔 언제나 더러운 유대인 소년들이 질러대는 고함으로 넘실거렸다.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자들이 지옥의 암흑과 불길에 휩싸여 허우적대는 곳이라 해 마땅한 지역.&nbsp; 언덕 위에 있는 선민들의 거처는 고급 저택의 광휘에 싸여 있는 발할이라 불러 마땅한 곳. 아래쪽 아이들은 열 살 먹도록 한 번이라도 이 동네에 놀러 와본, 아니 그저 지나가본 적이라도 있을까 말까 한 금단의 장소. 20세기 초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니콜라이 2세 황제 시절에는 유대인이 거주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아 이 언덕 위의 저택 지역에는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저 법령이 그랬다는 의미. 어느 민족보다 돈에 집착한 유대인들은 러시아 관리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의 뇌물을 공여하는 대가로 조금씩 이 지역에 자리 잡기 시작했으며, 유럽의 여러 왕가에끼자 돈을 빌려줄 정도의 부르주아들이 이웃집에 사는 것을 시비하거나 질투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귀족이나 부르주아는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nbsp; 시의 중앙부근에는 평온하고 창백한 빛이 비치는 평민들이 차지했다. 중앙이라 해도 언덕과 가까운 곳에는 의사, 변호사, 귀족의 영지 관리인 같은 이들이, 아래쪽과 가까운 경계에는 주로 위쪽과 아래쪽을 뛰어다니며 중개인 역할을 하거나 기타 장사치, 양복장이, 약사 등이 모여 살았다.&nbsp; 책 앞날개의 작가 소개를 보면 이렌 네미롭스키는 어린 시절에 적어도 잘 먹고, 잘 먹는 수준을 떠나 게토 지역의 어린 아이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의 맛과 영양을 지닌 음식만 골라 먹었을 것이며, 고급 모피로 만든 모자, 외투, 토시, 신발 등의 의류,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벽난로 같은 시설로 아무리 겨울이라도 아래 동네 아이들과 비교해 힘든 것이라고는 1도 모른 채 지나왔을 터. 그럼에도 불행하다고 활자를 박았으니, 그래, 이렌도 나름대로 불행하긴 했겠지. 그렇겠지.<br>&nbsp; &lt;개와 늑대&gt;의 주인공 아다 시너. 작가 이렌 네미롭스키와 비슷한 나이로 생각하면 된다. 1903년? 아버지는 이스라엘 시너. 엄마는 먼저 죽었다. 시너는 도시의 중간지역이기는 하지만 아래쪽 게토와 인접한 곳에 사는 중개인으로 먹고 살기 위하여 비트, 설탕, 밀, 농기구 등 유통할 수 있는 모든 품목을 취급한다. 때로는 비단과 차, 터키 과자, 석탄, 아시아 과일, 볼가강에서 잡은 캐비어 같은 비싼 것들도 있기는 하다. 어떤 경우라도 중개인한테 요구되는 자질, 빠른 말투, 요란한 몸짓, 다급함, 비굴함, 고집스러움, 간청이나 애원하는 기술, 그리고 경쟁자를 비방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돈을 벌어 함께 사는 책상물림 장인과 하나밖에 없는 딸 아다를 먹여 살리기 위한 비즈니스 측면에서 그렇고, 아다를 위하여는 세상 둘도 없이 헌신적인 아버지. 뭐 세상의 아버지들 대부분이 그렇듯이.&nbsp; 오직 자식을 위하여 일하고, 살고, 희망을 품는 시너는 정말로 유대 족속 답게 아다가 만일 음악이나 예술, 배우 쪽으로 재능이 있다면 자기 살과 뼈가 도륙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이루어 주기 위하여 스위스, 독일,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려는 욕심에 충만해 있다.&nbsp; 이때 삼촌이 죽었다. 유대인이라면 동생이 죽을 경우에 당연히 동생이 남긴 식구들, 제수와 조카들을 형이 거두어야 한다. 그래서 졸지에 군식구가 셋 늘어 탐탁치 않지만, 엄마 없는 딸을 돌볼 여자가 필요한 때라서 별 불만 없이 거두었다.&nbsp; 숙모와 사촌이 도착했다. 여기서 이렌 네미롭스키의 착오가 생긴다. 이때 아다가 일곱 살. 사촌 릴라 언니는 한 다섯 살 정도 나이가 많고, 말썽꾸러기 벤이 여섯 살(p.31). 저 뒤쪽으로 가면, 아다와 숙모 일행의 거주지가 파리로 바뀌고 난 다음에 갑자기 아다가 17세, 벤이 21세로(p.140) 휘까닥 뒤집어진다. 근데 그냥 모른척하고 지나가도 좋으니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렇게 알고 말자. 뭔가 이유가 있겠지.<br>&nbsp; 본격적인 사건은 이 도시에서 포그롬, 유대인 탄압과 린치 사건 때 벌어진다. 포그롬?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집단 폭행과 학살은 유대인의 계급과 상관없이 벌어졌는데, 사실 그건 나치가 본격적으로 권력을 잡은 후에 “수정의 밤” 같은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만행이었고, 190X년 우크라이나의 한 도시에서 있었던 작품 속의 작은 포그롬은 비록 사납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중류 또는 하류 게토 지역의 유대인을 대상으로 했던 모양이다. 폭도들이 귀족, 부르주아가 사는 동네에는 함부로 발자국을 찍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시너 씨와 외할아버지, 숙모는 릴라 언니를 천주교도 친구집으로 보내고, 벤과 아다는 먼지투성이 건물의 다락방으로 피신시켰다.&nbsp; 어린 아다와 벤은 밤새도록 먼지가 켜켜이 쌓인 곳에서 배고픔에 시달리다가 날이 밝아오는 새벽녘에 그곳을 나온다. 집으로 가던 중, 아무리 어려도 위험한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려 몸을 피해 달려간 곳이 사나운 남자들이 훨씬 적은 언덕 위였다. 그곳에서 아다는 생전 처음으로 아름답고 아름다운 저택을 구경한다. 세상에 사람 사는 곳에 이런 건물이 있을 수 있으며, 심지어 그 건물이 사람이 직접 들어가 사는 집이라는 것에 깜짝 놀란다. 문패를 보니 한 번 더 놀라서 집주인이 “시너”씨. 이런, 자기네와 멀기는 하겠지만 친척이다. 배는 고파 죽겠지, 모자도 없이 창들을 넘느라 아다도 벤도 상처나고 피도 좀 흐르고, 옷도 찢기고, 머리카락은 다락방의 먼지와 엉겨 함부로 삐죽삐죽 솟구치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음에도, 그냥 담장을 넘어 현관으로 가서 벨을 누른다.&nbsp; 이럴 때 뭐라 한다고?&nbsp;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nbsp; 하여간 멀고 먼 친척 집에 용감하게 쳐들어간 아다와 벤은 걸진 아침을 얻어먹고, 노할아버지가 아다의 아버지 이스라엘 시너의 이름을 들은 바 있어서, 이 유력 가문 전속 거간꾼 중의 한 명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처음으로 특별한 (부와 안락함 같은)쾌감을 발견한 아다의 눈에 고귀하고 독특한 울림을 가진 미지의 이름, 해리 시너라고 하는 옷 잘 입은 아이가 눈에 들어왔고, 보자마자 이 낯선 이름의 소년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거였다.<br>&nbsp; 윗동네 시너 가문은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에 큰 공장을 운영했고, 노할아버지의 둘째와 셋째 아들은 파리에서 탄탄한 국제 은행을 설립해 막강한 부를 거머쥐고 있었다. 이런 집안에 전담 중개인 자리에 오른 이스라엘 시너 씨, 아다의 아버지는 돈 좀 만졌겠지? 그렇다. 큰 부자는 아닐지언정 제법 돈을 벌어, 포그롬 때 충격으로 장인이 시름시름 앓다가 곧 세상 하직한 이후 중간 지역의 도시 중앙으로 이사했고, 가만 보니까 딸 아다에게 미술적인 재능이 대단한 걸 알아챈다. 마침 배우가 되고 싶어 안달하는 조카 릴라가 있어서 숙모 역시 시너 씨를 살살 긁어 숙모와 아이들 셋이 파리로 유학하기에 이른다. 이 때가 1914년 5월. 그리고 석달 후에 뭐? 맞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진다. 그러니 이들 앞에는 고생길이 훤할 수밖에.&nbsp; 더욱 아쉬운 건, 우리의 시너 씨는 이들을 보내고 나서 작품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한 마디가 없이.&nbsp; 근데 전쟁이 터지고, 이 식구들은 죽어라 고생길로 접어들었을 때, 릴라가 재주도 좋지, 런던 이튼을 졸업한 해리 시너가 파리 중심가의 저택에서 호화롭게 사는 것을 알게 되고, 해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저 동쪽 늑대의 피를 물려받은 아다는(해리는 기껏해야 개라는 의미도 되고 뭐 그런데) 후끈, 어린 시절의 사랑이 달아오른다. 야수는 자기 몸에 그런 피가 흐르는 지도 모르고 살았으나 이제 눈을 뜨게 되었으니, 기대하시라 개봉박두?<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2512/17/cover150/k42293582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5121750</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