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아이즈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엄지영 옮김 / 창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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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만타 슈웨블린. 이름 슈웨블린Schweblin으로 짐작하면 20세기에 독일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 와 정착한 집안인 거 같다. 1978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졸업 후에 소설 쓰기에 전념한다. 2002년에 <소란의 핵심>을 발표해 데뷔했으며 이후 부커상 외국어부문 최종심에 두 번 오르는 등 맹활약을 하면서 국내외의 다양한 문학상을 섭렵해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은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문학 객원교수로 지내고 있다. <리틀 아이즈>가 처음 읽는 슈웨블린인데, 2018년 작품으로 번역 기간을 거쳐 2020년에 두 번째 부커 인터내셔널상의 최종 리스트에 올랐던 작품이다.


  우리나라에는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지만 미역국 먹은 후에 번역을 해 2021년 창비에서 나왔다. 창비는 책의 띠지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올 겨울에 어울리는 단 한 권의 SF∙공포소설

  스산하고 고요하게 숨통을 조여오는 서스펜스”


Samanta Schweblin


  출간 전에 창비_인스타를 통해 가제본 본을 독자에게 뿌렸으나, 무료로 작품을 읽은 독자들이 놀랍게도 인터넷 책방 독자리뷰에 만점을 주지 않는 무례를 저질렀다. 나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서 띠지에 어떻게 쓰인 지 모르는 상태에서 읽었건만, 이걸 SF∙공포소설이라고 주장하면 거 참, 게다가 숨통을 조여오는 서스펜스 우짜고 한 건 그저 웃자고 했던 일 같다. 우리 모두 다 함께 웃자고.


  처음엔 나름대로 긴박하고 경박하게 흘렀다. 장소는 미국 인디애나주의 사우스벤드라고 하는 작은 마을. 동네에 요주의 인물로 점 찍힌 맹랑한 고등학생 카티아와 에이미의 그룹에 새롭게 로빈이 들어왔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셋은 피의 맹세를 하고 평생 함께 할 것임을 기념하기 위한 의식으로 서로 자기 가슴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리하여 부모가 직장에 간 틈을 이용해 로빈의 집에 가서, 넓은 거실에 모여 앉았고, 로빈이 조금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쫄기는 싫어서, 셋 모두 훌러덩, 브래지어를 풀렀더니, 덜러덩, 가슴이 아래로 툭 떨어졌는데, 이걸 향해 서 있던 동물 인형의 눈이 깜빡, 하는 순간 카메라에 찍혀버렸다. 카티아가 인형한테 누구 가슴이 제일 예쁘니? 하고 물어보고, 로빈이 위저 보드의 알파벳을 가져오니까 인형이 단어를 조립해 만들어 보이기 시작한다.

  “금발”

  카티아가 당연한 결과라는 듯 자랑스럽게 웃었으나, 저런 저런. 인형은 계속 글자를 만들어 나간다.

  “개 같은 년들.”

  셋은 학교에서 생물 수업을 함께 듣는 좀 모자란 욍궁둥이 수전을 입에 올리며 걔를 왕따시키는 건 물론이고 어떻게 돈까지 갈취할 것인지 따따부따 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자기들이 몹쓸 짓을 하고 있어서 욕을 먹을 만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욕을 듣는 거하고는 다른 일이니까. 인형이 글자를 조립하는데:

  “너희는 내게도 돈을 줄 것이다. 녹화된 가슴 한 쪽에 400 총 2,400달러”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로빈도 억지로 웃는 시늉을 했다. 에이미가 누구한테 받을 거냐고 물으니까, 인형은 또다시 단어를 쓰기를,

  “돈을 주지 않으면 가슴 영상을 수전에게 이메일로”

  이제 심각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형은 계속 쓴다.

  “나는 똥싸는 로빈 엄마와 자위하는 로빈 여동생 영상도 가지고 있다. 각 6장씩.”

  여태 인형 또는 애완동물 겸해서 스스로 움직이는 동물 인형을 집안에 갖춰 놓았더니, 세상에나, 이게 특정 앱으로 연결된 사람의 명령에 의하여 움직이는 장치였던 거다.


  ‘켄투키’라고 부르는 이 인형의 외형은 두더지, 토끼, 까마귀, 판다, 용, 부엉이 등이고, 몇 번째 버전인지는 모르겠으나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인 아르헨티나 멘도사 여자 알리나는 멕시코 비스타르모사에서 지낼 당시 신품을 279달러 주고 구입했다. 알리나 같은 사람을 ‘켄투키의 주인’이라고 하자. 반면에 스페인어를 쓰는 라틴아메리카의 아줌마 에밀리아는 고액의 연봉을 받고 홍콩으로 일하러 간 아들이 상당한 돈을 주고 얻은 IP를 통해 독일 중부의 에르푸르트라는 작은 도시에 사는 코걸이를 한 아가씨 에바의 켄투키와 연결을 했다. 스스로 인형이자 관찰자 켄투키가 ‘되는’ 대가였다. 즉, 알리나는 켄투키가 있는 공간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게 하기 위하여 279달러를 주고 인형을 샀으며, 엄마 혼자 두고 홍콩에 돈 벌러 간 에밀리아의 아들은 엄마가 심심하지 않게 다른 사람이 사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도록 돈을 지불한 것. 책의 제목 ‘리틀 아이즈’는 인형의 얼굴에 박힌 조그만 두 눈알을 의미한다.

  별의 별것을 다 보겠지?

  제일 앞에 나오는 불량소녀 예비자 로빈의 집에 있던 켄투키는 보아하니 초기 모델 같은데, 그게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 켄투키 주인이 켄투키가 된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은 채 엄마는 화장실의 문을 열어 놓은 채 용변을 보았으며, 여동생은 켄투키가 옆에 있거나 없거나 그냥 자위를 해버렸고, 불량소녀 셋도 켄투키 앞에서 훌러덩 브래지어를 벗어 던져버렸다. 켄투키가 된 사람은 원격지에서, 지구 반대편일 수도 있는데, 어느 곳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그걸 다 보면서 녹화를 떠 놓았고 그걸 빌미로 이제 로빈에게 2,400달러, 약 3백만원을 갈취하려 하는 거다.

  뒤에 보면 녹화를 뜨기 위한 소프트웨어는 앱이 지원하지 않는다. 개발자가 이런 경우도 예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요가 방법을 창출하는 법. 사람들은 곧바로 태블릿의 장면이나 영상을 휴대폰으로 다시 찍거나 녹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켄투키가 된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에밀리아 같은 경우엔 자기 주인 에바가 잘 생기기는 했지만 좀 지저분하고 면도도 며칠 안 한 거 같고, 털이 숭숭한 거구의 애인 클라우스와 짙은 밤을 보낸 아침 둘 다 홀랑 벗은 채 거실을 돌아다녀도 클라우스의 큼지막한 음경도 모른 척하려 애쓴다. 반면에 에바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클라우스가 에바의 지갑을 뒤져 지폐 몇 장을 꺼내는 걸 본 순간에 돌변, 어떻게 하면 에바에게 클라우스가 돈을 훔쳐간 걸 알려줄 수 있는지 갑작스런 흥분에 휩싸인다. 자기가 보기엔 명백한 절도행위니까. 독일 에르푸르트 경찰서 전화번호도 찾아보고, 에바의 집을 둘러보다가 알게 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볼까 고민도 하고.

  이런 경우는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 사는 그리고리도 마찬가지여서, 이 청년은 전문적으로 IP가 날아간 켄투키의 IP를 새로운 ‘켄투키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판매를 하고 있는 일종의 중개상인데, 일을 하다가 브라질 북부의 외딴 마을에서 납치, 유괴된 아이를 발견하고는 구출해주기 위해 아이의 엄마, 관계 경찰서에 신고를 하는 등 갖은 애를 쓴다. 그래서 아이가 탈출에는 성공하지만 혹시 켄투키의 이런 기능을 이용해 아이의 부모가 자기도 모르는 돈벌이를 한 건 아닌지 조금은 의심하면서, 아직은 법 테두리를 벗어난 건 아니지만 일종의 범죄일 수도 있는 IP 중개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는 일도 있다. 세상에는 언제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거거든.


  다른 거 다 놔두고, 정말로 자기 집 안에 자신과 가족 모두를 관찰할 수 있는 타인의 눈을 두고 싶어하는 사람이 전 세계에 그렇게 많을까? 작 중간 이후에는 켄투키가 전세계적으로 대유행을 하는 걸로 설정이 되어 있는데, 나는 좀 회의적이다. 아직 화상전화가 일상수준에 오르지 않은 일.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을 것이다. 변기에 앉아 유튜브 보며 매화타령을 하고 있다가 마침 힘차게 방귀가 나오기 바로 직전에 전화벨이 울렸고, 습관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른 순간, 같이 도봉산에나 가자고 좋은 마음으로 바깥 사돈이 전화를 준 것이었는데 아뿔싸 하필이면 이때 아까 나오려던 힘찬 방귀가 진동을 해버렸으면 그걸 어째? 아니면 덥디 더운 여름날 윗도리를 벗고 소파에 앉았는데 전화가 오면, 전화 한 통 받자고 허겁지겁 와이셔츠 입고 넥타이 메고 슈트 찾아 입어야 하는 거야? 최종 면접 보고 결과 기다리는 회사에서 온 전화일 수도 있잖아. 그런데 집안에, 켄투키가 된 인간이 접속을 했으면 어떤 시간이든지 자기 사생활을 거의 완전히 노출해야 하는데 말이지. 이게 가능하다는 전제부터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건 말았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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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2-30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화타령에 빵 터졌습니다. 그 어찌 나랏님 거시기를...ㅋㅋㅋ
근데 가제본 받은 사람들 조차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니 거 참...

Falstaff 2024-12-30 11:32   좋아요 1 | URL
예전에 어른들이 많이 얘기하지 않았나요, 매화타령? ㅋㅋㅋ
창비는 안 그럴 거 같았는데, 책 팔아먹기 전에 가제본 판을 먼저 뿌리더라고요. 영숙이 <아빠한테 갔었니?> 시절부터 그러기 시작한 거 같은데, 좀 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뭡니까, 모양 빠지게. 하긴 창비도 옛날 창비지 지금이야 뭐 창피잖아요, 창피. <창작과 개피>
 
날개 달린 두약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32
구레이 지음, 김우석 옮김 / 연극과인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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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늦가을에 구레이를 처음 읽고 1년만에 또 구레이를 읽는다. 전에는 멀리 떨어져 살지만 이젠 고속열차가 생겨 80분이면 도착하는 허베이성의 늙은 아버지와 베이징에서 전동칫솔 사업을 하는 아들과의 관계, 참 오랜 세월지지고 볶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그린 <물이 흘러내린다>이었고, 이번엔 아버지가 죽어 제사를 지내는 와중에 왕년에 춤선생을 하던 병든 어머니와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온 아들 나생羅生의 서걱거리는 관계를 묘사한 <날개 달린 두약>이다. 두약杜若은 어머니의 이름 ‘방두약’에서 가져온 제목이다.


  75세의 모친. 반백 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한 집에서 산 부부답지 않게 모친은 죽어 누워 있는 고인에게 별로 정도 없고, 애틋하지도 않고, 애도하고 싶은 마음도 나지 않으며, 전혀 슬프지도 않다. 오히려 조문객이 올 때마다 빈소 위에 향을 살라 향 연기를 맡을 때마다 눈물도 나고, 콧물도 나고, 조금만 심해도 기침을 콜록거리는데 이때마다 요실금으로 요도에서 티스푼 두 개 이상의 오줌이 질금, 새 나온다. 심할 때는 한 큰 술 15cc까지 왈칵. 그리하여 방두약 여사가 입을 만한 바지는 다 냄새가 나고, 젖어 있어서 입을 것도 없다. 75세라 무릎이 말을 듣지 않아 재채기할 때마다 화장실 드나들기도 힘들어 딸도 아닌 아들을 부른다. “나생아! 얘가 어디 갔어? 나생아, 내 말 안 들리니?” 그래서 대답을 하면, “요강 좀 가져와라.” 요강을 침대 뒤편에 놓으면 내려와서 졸졸졸, 한 시절 수돗물을 쏟던 것 같은 맹렬하고도 맹랑한 음향 대신 이젠 일흔다섯의 노파답게 졸졸졸 흘리다가 바지 올린 힘도 없어서, 나생아, 다시 아들을 불러 바지를 추켜달라고 하는 방여사.

  평생 아내한테 다정다감하게 이야기해본 적도 거의 없고 그저 방에 틀어박혀 책과 신문과 잡지와 하여간 뭔가를 읽고, 뭔가를 쓰기만 하던 남편이 죽었는데 뭐 내가 슬퍼하거나 좋은 곳으로 가라고 빌어줄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방두약 여사는 자신이 생전에 부조, 부의금을 특정 집안에 얼마를 했으니, 그이도 이번에 적어도 몇 위안의 부의금을 내야 마땅할 터, 얼마나 가져왔나, 이것이 궁금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것도 있겠지. 오랜만에 아들이 왔으니 오히려 더 힘이 없어 보이고 싶고, 실제보다 훨씬 약해 보이고 싶은 마음. 지 아비를 닮아 무뚝뚝한 성격이지만 이런 어미한테 무뚝뚝한 친절이라도 지가 도리상 베풀지 않을 수 있어? 하는 마음. 거기다 하나 더. 문상객이 오면 문상이나 하고 부의금 내고 그냥 가면 되지, 꼭 여사를 찾아서 애도를 전하는 인간들한테는 자신이 얼마나 깊은 슬픔에 싸여 있고, 평소에 늙은 부부가 서로 얼마나 의지를 하며 살았는지, 또한 죽어 누워있는 남편과 방두약 여사와 아들 나생이 지극하게 화목한 가정이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때문에 문상객이 오면, 주로 방여사 젊은 시절에 여사한테 춤을 배우던 학생들이었는데, 춤이라 해도 정식 중국춤이나 현대춤 말고, 공장 다니던 여공들 가운데 제일 나이도 많고 춤도 잘 추던 여사가 어린 또는 젊은 여공들에게 춤을 가르쳐준 수준이기는 하지만, 제자 앞에서 아들 나생이 자기한테 얼마나 잘 해주는지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깊다. 그리하여 자기가 오줌 눈 요강을 씻어 오라고 부탁이 아닌 지시를 하고, 이를 짐작한 아들도 아무 대꾸 없이 씻으러 가는 걸, 이렇게 씻어라, 저렇게 씻어라, 요강 앞에 표시난 곳을 위로 해서 두어라, 별의별 사소한 것까지, 차마 식모한테라도 그러지 않을 잔소리마저 쏟아낸다. 나생은 장례식만 끝나 훌쩍 떠날 것이니 이 지긋지긋한 잔소리와 의무를 후딱 해치우기는 하는데, 이게 그리 오래갈 것 같지는 않지?


  그런데 극작가 구레이로 말할 것 같으면, 베이징공과대학과 대학원에서 생화학을 전공한 후 제약회사의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무대의 꿈을 버리지 못해 극작과 연출의 세계로 뛰어든 인물이다. 자기가 쓴 극작을 자기가 연출해 무대에 올리기 위해 직접 극단도 만들어서. 나도 대학 다닐 때 물리학과에 다니며 연극에 빠져 살던 친구한테 힌트를 얻어 희곡을 읽기 시작했지만, 21세기의 소장 작가군에 든다는 구레이는, 내가 단 두 작품만 읽어보아 확언할 수는 없지만, 처음엔 그리 심각하지 않게 시작했다가 점점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는 것까지는 당연한데) 도무지 설핏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방두약 여사는 일흔다섯 살을 만나 뇌졸중을 겪고 있는 상태라 의식이 좀 혼미하다. 문상객이 가져온 부의금 봉투를 열어 금액을 확인하며 좋아하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화려했던 젊은 시절이 눈에 보이고, 그때 그 장면이 젊은 배우들이 나와 (상중임에도) 젊은 두약과 함께 실제로 춤을 추기도 하며, 당시의 멤버이지만 이미 고인이 된 아가씨 역시 등장하는 등, 관객과 독자 입장에선 눈 앞에, 머리 속 무대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 어떤 상황인지 매우 애매해진다. 눈알을 크게 뜨고 활자를 하나하나 다시 읽어봐도 마찬가지. 이럴 때는 얼른 책 뒤로 넘어가서 해설을 읽어보는 것이 제일 낫다.

  작품은 두 가지 스토리로 나뉘어 전개된다. “하나는 젊은 방두약의 춤, 친구들, 딸의 죽음, 그리고 남편의 이야기. 다른 하나는 아이(어린 시절 죽은 딸 나잉잉)가 읽어주는 소설 속 노인과 모친의 오버랩이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상가집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것들, 내가 앞에서 말한 향냄새, 요실금, 부의금 금액 같은 거 말고, 후반부 들어 관객과 독자를 헛갈리게 만드는 요인이 두 가지라는 것인데, 이게 굳이 관객과 독자를 이해시키고자 하지 않는다. 관점은 오직 하나. 작품의 주인공인 방두약 여사의 관점이다. 그래서 결국엔 돌이키지 못하게 망가져버린 가족간 관계이기는 하지만 한때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까지 포기했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되는 거다.

  대개 이런 연극을 보고 나오면서 옆에서 함께 연극을 본 친구가 “어땠어?” 하고 물으면 도무지 할 말이 없다. 분명히 한 편 잘 보고 재미도 있었는데 그걸 언어로 만들어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경험은 다들 한두 번씩 가지고 계실 듯. 이 작품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구레이는 한 작품을 공연할 때마다 디테일을 계속 수정해간다는데, 아마도 대본을 수정할 때마다 관객들은 조금씩 더 미궁에 빠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런 연극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장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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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2-27 0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사만타 슈웨블린, <리틀 아이즈>
화요일. 김이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목요일. 스타니스와프 렘, <우주 순양함 무적호>
금요일. 티파니 D. 잭슨, <그로운>

자목련 2024-12-27 09:20   좋아요 0 | URL
한국 소설을 선택하는 기준 같은 게 있으실까요?
문득, 궁금해서요^^

Falstaff 2024-12-27 12:04   좋아요 1 | URL
거르는 작가들이 많습니다. 요즘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리는 작가들도 거의 다 한 권 씩 읽어본 거 같은데요, 어떻게 두 번 읽게 되지는 않더군요. 한 엄마 배에서 나온 씨 다른 형제 자매들 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 작가들은 탐색중입니다. 출판사를 보고, 미리보기 통해서 문장을 어떻게 쓰는가도 보고 뭐 그렇습니다. 특별한 건 없고요. 다들 비슷하시리라 생각합니다.

yamoo 2024-12-27 17:49   좋아요 0 | URL
공선옥 작가의 작품들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Falstaff 2024-12-27 17:52   좋아요 1 | URL
공선옥은 제가 63 토끼 여사님들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이이 막 서른 됐을 때부터 좋아했으니까 찐팬 맞습니다.

hnine 2024-12-28 1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큰술 15cc... 본문에도 그렇게 써있나요? ㅋㅋ 작가 경력을 보니 이해가 갑니다.
혹시 제약회사 재직 시절 요실금 관련 연구를 했던 경력이 있는 건 아닌지.
그러니까 이 책의 주인공은 아들이 아니라 두약 여사님이신 건가요?

Falstaff 2024-12-28 17:44   좋아요 0 | URL
설마 본문에 그게 나왔겠습니까. 걍 제가 쓴 겁니다. ㅋㅋㅋ
넵. 방두약 여사가 주인공이라 할 수 있겠네요. ^^
 
창백한 말 페이지터너스
보리스 사빈코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빛소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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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스 빅토로비치 사빈코프. 복잡한 인물이다. 1879년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서 바르샤바 지역 군사판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897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학생폭동 또는 학생 파업에 가담해 1899년에 퇴학당한 후 나중에 베를린과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했다. 일찌감치 사회주의 혁명에 뜻을 두어 숱하게 체포, 구금, 유배, 탈출을 반복한 그는 1904년 러시아제국 내무부장관 비체슬라프 폰 플레베와 1905년 모스크바 총독 새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왕자의 암살, 폭탄테러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세바스토폴 감옥에서 간수와 옷을 바꿔 입고 유유히 탈출에 성공한다고, 이때 대신 감방에 머문 간수가 사빈코프로 오인받아 교수형을 받았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오는데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다. 하여간 이 테러 이후 사회주의 혁명당 테러리즘 분과는 점점 힘을 잃었고 사실 테러의 필요성이나 지지도 현격하게 줄어든 상태였다. 탈옥 후 프랑스로 망명을 떠난 사빈코프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군에 입대했지만 1917년 2월 혁명 이후 급하게 러시아로 귀국했다. 1917년 2월 혁명, 율리우스력으로는 3월 8일에 발생한 혁명으로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고 러시아 공화국이 들어섰으나, 사실상 정부는 무주공산. 유럽 각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러시아의 혁명가들은 서로 권력을 먼저 차지하기 위하여 급거 귀국길에 올랐으며, 그 유명한 블라디미르 레닌의 봉인열차도 이 시기에 있었던 일인데, 같은 기차를 타지는 않았지만 레닌, 트로츠키, 제르진스키와 동시에 러시아 땅을 다시 밟았다.

  1917년 러시아 공화국의 임시정부에서 남서부 (내전) 전선의 위원과 잠깐 전쟁부 차관보로 지내기도 한 사빈코프는 쿠데타에 가담한 혐의로 관직에서 떨려나가고 사회주의 혁명당에서도 퇴출당한다. 이후 10월 혁명을 거쳐 볼셰비키가 권력을 차지한 다음에는, 도무지 뜻을 같이 할 수 없는 볼셰비키에 저항하는 무장세력, “조국과 자유 수호 연합”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건 엄연히 반혁명 세력으로 혁명의 대세를 무시한 대가로 조직은 와해되고 사빈코프도 다시 유럽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폴란드와 소련의 전쟁에 가담하기도 했지만 폴란드 정부에 의하여 다시 추방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계속했다. 역시 정점을 찍는 그의 뻘짓은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에 가담해 볼셰비키에 맞서 싸웠다는 점일 것이다. 볼셰비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해도 명색이 테러리즘을 주장하고 실천했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선봉에 섰던 아나키즘의 대표적 인물이 어찌하여 러시아 부르주아 잔재들과 뜻을 합칠 수 있었는지, 나도 이 대목에서 헛웃음만 나왔다.

  영국의 비밀정보국과 은밀한 협력을 하고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존경의 찬사를 보내기도 한 사빈코프를 소련 비밀경찰은 내버려둘 수 없었을 터. 1924년에 소련 보안당국은 한때 사빈코프의 공모자들을 이용하여 그를 소련으로 유인해 체포, 기소하여 법원은 사형을 선고했으나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10년형으로 감형, 모스크바 루비얀카 감옥에 구금했다. 이곳에서 공식적으로는 사빈코프가 교도소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해 삶을 마감했다고 발표했지만, 사실은 스탈린이 사빈코프를 과하게 인간적으로 대하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하자 국가안보부 요원들이 그를 창밖으로 집어 던진 거 아닌가, 이런 의혹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보리스 빅토로비치 사빈코프는 전형적인 귀족출신의 혁명가였다. 젊은 시절엔 자신의 목숨을 걸고 테러리즘에 경도하다가 정작 혁명이 발생하여 콩고물이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그걸 볼셰비키들이 다 차지할 것처럼 보이니까 여태 자신의 투쟁 대상이었던 부르주아, 귀족들과 합세해 반혁명 세력으로 당당하게 백군의 기치를 들고 내전에 임한 인물. 그는 러시아 지역에서 테러의 중요성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으며 스스로도 더 이상 테러작전을 수행할 동력을 상실했던 1909년에 롭쉰이라는 필명으로 <창백한 말>을 출간하여 테러리즘에 대한 회의를 드러낸다. 비록 사빈코프가 적극적으로 주창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이는 무정부주의를 지지하면서 볼셰비키 소비에트에 반대하느라 정신없었던 인물을 우리는 한 명 알고 있다. <카탈로니아 찬가>에서의 조지 오웰. 결국 오웰의 의견이 옳은 것으로 판명이 되긴 했지만 당장 프랑코 파시스트군과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 적이 눈 앞에 도사리고 있는데 오히려 총구를 거꾸로 들고 볼셰비키만 비판하는 데 열을 올린 일을 나는 아직도 이해하기 힘들다. 이런 면에서 사빈코프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아무리 그렇다고 백군에 가담해?


  그러나 작품 <창백한 말>은 제법 근사하다. 문장이 간결하다. 암살용 비수 같다.

  작품은 모스크바가 고향인 러시아 출신의 테러리스트가 쓴 일기 형식의 기록이다. 일기니까 화자는 당연히 ‘나.’ ‘나’는 190X년 3월 5일 저녁에 대영제국 국민이자 엔지니어, 조지 오브라이언이라는 이름으로, 터키와 러시아를 여행할 목적이라는 명목 하에 1등칸 열차를 타고 도착했다. 3킬로그램의 다이너마이트를 직접 들고. 폭탄을 가지고 왔다는 건 작품 초반에 등장인물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실제로 지금 ‘나’를 비롯한 테러리스트들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모스크바 총독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공을 처단하기 위하여 ‘나’를 연모하는 화학자 에르나도 조직원의 한 명인데, 이이가 맡은 일이 폭탄을 만드는 것이며, 작품 속에서도 폭발의 위험을 무릅쓰고 폭탄제조 광경이 소개되기 때문이다. 하늘색 눈동자에 굵게 땋아 내린 숱 많은 머리카락을 가진 에르나를 ‘나’ 조지는 “오래 전에 내게 몸을 맡긴 여자”라고 소개한다. 에르나는 조지를 사랑하지만 조지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젊은 장교의 스무살 먹은 젊은 아내이자 분방한 사랑을 향유하고 있는 옐레나라는 여성한테 빠져 있다. 그래도 조지는 에르나와 키스하고, 함께 잔다. 물론 언젠가 자신과 함께 할 것이라는 에르나의 기대도 냉담하게 무지르고 만다. 조지에게 삶에서 중요한 건 없다. 어떻게 보면 거의 완벽한 허무주의자. 그래서 테러리즘에 그토록 빠져들 수 있겠지.

  조지를 팀장으로 하는 테러 소집단은 모두 다섯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지와 에르나, 그리고 세 명의 승용마차 마부 표도르, 바냐, 하인리히. 공장 직공 출신 대장장이였던 표도르는 아내가 황제의 공권력에 의하여 살해당했다. 하인리히는 대학에 다니다가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 테러리즘에 합류했고, 바냐는 종교적 이유로 좀 복잡하다. 에르나는 사는 일이 수치스럽다는 것이 내세우는 이유다. 조지는 앞에서 말한대로 허무주의자. 그는 테러의 대상인 모스크바 총독을 전혀 증오하지 않고 원망하지도 않는다. 그에 대하여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총독은 오직 그에게 반드시 죽여야 하는 대상일 뿐. 무엇을 위해? 테러 자체와 혁명을 위해. 테러 자체를 위한 테러. 이게 조지의 삶의 이유. 실제로 중앙위원회에서 안드레이 페트로비치라는 노 혁명가가 페테르부르크에서 3등 열차를 타고 직접 모스크바에 도착해 조지에게 총독 암살을 당분간 미루라고 해도 그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다. 일단 살인의 마음을 정하고 그것이 테러 자체를 위한 일이라고 단정했으면, 자신과 동료의 목숨을 걸고 반드시 죽여야 하는 인물이다.

  이런 조지가 변해야 <창백한 말>은 끝난다. 어떻게 변할까? 그저 힌트만. 종교적 이유, 사랑과 희생에 관한 성서적 담론을 입에 달고 다니는 바냐. 그리고 조지가 사랑하지만 결코 조지만 사랑하는 건 아닌 유부녀 옐레나. 이 두 명을 통해. 그리하여 결국 중앙위원회에서 임무를 준 테러를 깨끗하게 거절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뻔한 내용이지만 거기까지 끌고 가는 문장의 힘이 단단하다. 여지없이 암살자의 칼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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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속에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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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티안 크라흐트는 2020년에 세 권을 읽고 4년만이다. 이래서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크라흐트 네 권을 모두 읽었다. 1966년 스위스 베른에서 출생해 스위스, 독일, 미국의 각급학교를 다녔고 최종적으로 뉴욕의 사립 예술대학인 사라 로렌스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세계 각국을 누비고 다니며 온갖 것을 경험했는데, 세계 각국이란 동남아, 서아시아, 아프리카 등을 망라한다. 부럽지? 그럼 당신도 부잣집 아이로 태어날 걸 그랬지? 크라흐트의 아버지 크리스티안 시니어는 스위스의 잘 나가는 출판사 수석 대표였다. 주니어는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영락없이 양아치였는데 이제 나이 들어 수염도 좀 기르니까 제법 교양 넘치는 얌생이 유럽인처럼 보인다. 2021년까지 모두 여섯 편의 소설 가운데 두 편은 아직 번역하지 않았다. 그것도 나오기만 하면 읽어보겠지만 어째 소식이 없다. 문학과지성사와 크라흐트 대리인 간의 계약을 끝난 거 같다. 새 출판사가 얼른 찍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속에: 이후 “여기 있으리”라고 씀. 염병한다고 제목을 이렇게 길게 쓰고 자빠졌는지 원 참.>은 대체역사소설. 만일 어떻게 했더라면, 만일 어떻게 안 했더라면, 으로 시작하는 역사소설인데, 대표적인 것이 최인훈의 <태풍>과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 대개 “어떻게 안했더라면”이다. 만일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지 않아 태평양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그래서 조선이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인데 내선일체 사업을 워낙 고도로 치밀하게 진행해 조선 사람들이 죄다 자기도 일본사람인 줄 알고 있다면? 뭐 이런 식의 이야기.

  <여기 있으리>의 전제사항은 1917년의 레닌이다. 같은 해 2월(구력 기준. 서기력으로는 3월) 혁명이 일어나고 마음이 바빠진 레닌은 제정을 무너뜨린 뒤에 들어선 러시아 공화국을 얼른 접수하기 위하여 망명중이던 스위스 취리히에서 사실은 열차를 전세내 타고 갔지만 스테판 츠바이크마저 잘못 알고 있던 ‘봉인열차’를 타고 독일을 관통해 덴마크에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스웨덴으로 건너가, 다시 열차로 스웨덴 관통, 핀란드 관통, 완전히 초토화된 러시아도 관통해 모스크바까지 달려 가야 했건만, 작품에서는 레닌이 그냥 스위스에 머물렀으며, 레닌의 직업이 프로 혁명가인만큼 소비에트 혁명을 엉뚱하게 스위스에서 일으켜 수십 년간의 전쟁을 치룬 후 마침내 취리히와 바젤, 뉴베른에서 소비에트 SSR, 스위스소비에트공화국을 건설했다는 전제다.

  당시 러시아는 원인 불명의 대형, 초대형 폭발사고가 나는 바람에 중앙 시베리아의 쿤구스카에서 민스크에 이르는 드넓은 지역이 몽땅 바이러스에 오염되고 말았다. 이래서 끝없는 툰드라 평원과 우랄 산맥의 비옥한 밀 곡창지대가 영원히 사람이 살지 못하는 죽음의 땅으로 바뀌어 러시아 제국은 유독한 먼지와 죽음을 부르는 검은 재만 횡행하는 거대한 황무지가 되고 말았다.

  웃긴 건, 영국, 독일의 부르주아들이 바로 아랫동네인 스위스 빨갱이들이 자기 나라에도 공산주의 바이러스를 옮길까봐 덜덜 떨다가 그냥 동맹국이 되어 버린 것. 독일은 여전히 반유대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영국도, 사실은 전 유럽이 조금 차이는 있지만 반유대적이기는 했는데, 하여간 똘똘 뭉쳐 소비에트 스위스와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지 백년에서 조금 모자란 96년. 그러니까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은 단 한 번도 평화의 공기가 어떤 맛인지 경험해보지 못했으며, 전쟁으로 인한 무기의 발달을 뺀 문화적 발전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심지어 글자 문화도 대화 문화로 급속도로 바뀌었다. 그래서 주인공 ‘나’처럼 글자를 쓸 줄 알고, 직접 메모까지 해가며 사는 인간은 구경하기도 힘들다.

  영국하고 독일이 동맹을 맺었다는 건 말했고, 그러면 SSR과 동맹을 맺은 나라들은? 오렌지색 군복을 입은 공포의 대상 힌두스탄과 놀랍게도 저 동쪽에서 진군해 지금 뉴민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한국. 대오스트레일리아도 있다. 하여간 2차 백년전쟁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전세계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든지, 아니면 소비에트 씨를 말려야 끝날 예정이다. SSR 인민들은 이 전쟁이 삶의 의미이자 목적이며 자신들은 전쟁을 이어가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어린 시절부터 말끔하게 세뇌가 되었다. 전쟁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지구에서 계절의 구분, 사철의 변화(비슷한 말인가?), 밀물과 썰물, 해수면의 파도, 달의 주기적 변형 같은 것도 사라져버려, 동양의 힌두스탄인들은 지금을 칼리 유가, 악마 칼리의 시대라고 부른다.

  근데 스위스소비에트공화국은 인구가 영국과 독일보다 적다. 적어도 많이 적다. 그런데 무슨 전쟁? 그리하여 SSR은 아프리카에서 똘똘한 인간들을 데려와 계급과 관계없이 병사로 육성했다. 아니, 병사로 육성한 다음 스위스로 데려왔다. 화자 ‘나’도 말라위 출신이다. SSR, 소비에트에서 인종차별이라는 건 없다. ‘나’는 SSR 군대, 그중에서도 뉴베른의 스위스 5군단 당 지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쉬운 얘기로 베른의 새로운 지명 뉴베른에서 제일 높은 고위급 당원이다. 군단장도 ‘나’가 작성한 보고서, 그것도 아니고 그냥 전화 한 통이면 목이 달아날 수 있다. 왜 전화 한 통이냐 하면, 문자언어가 급격하게 소멸하고 구술언어 중심의 사회라서 그렇다. 아직 영국과 독일은 책과 문학에서 수준 높은 문화를 소유하고 있어 SSR을 저급인류, 시골뜨기 문맹자라고 선전하고 있다. 지나간 소비에트에서 문학은 사실상 죽은 상태였으니까 단박에 이해가 된다.

  ‘나’ 스위스령 잘츠부르크 혁명위원회에게 브라친스키 대령이라 불리는 폴란드 유대인을 체포해달라고 전보가 왔다. 브라친스키가 운영하는 점포에 가보니 유리창이 깨져 있고 벽에 붉은 글씨, 찍어서 냄새를 맡고 돼지 피라는 걸 알았는데 그걸로 큼지막하게 “죽어라, 유대인!”이라 쓰여 있다. 그리고 브라친스키는 사라졌다. 놀랍지?


  ‘나’는 큰 꿈을 키우고 있다. 독일이 8년 동안 점령하고 있던 뉴베른. 철저하게 파괴괸 이곳에 극장을 세울 것이고, 소비에트 위원회 건물을 웅장하게 지을 것이며, 공장과 국립은행도 문을 열 것이다. 붉은 칠 위에 하얀 십자가를 그린 미사일을 만들어 영독귀축을 무너뜨리기 전까지 바젤에서 밀라노까지 일곱 시간에 주파할 수 있는 지하 철도를 개설한 것이다. 알프스를 관통하는. 그러니까 SSR은 다른 건 몰라도 정밀기계와 땅굴 파는 거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왜 난데없이 땅굴 이야기를 하느냐고? 이유가 있지. 뉴바젤에서 대령이라 불리는 브라친스키가 바로 이 알프스 지하 요새로 들어갔기 때문에. 나도 여태 몰랐는데 정말로 스위스에는 알프스 지하 요새가 있다고 한다. 19세기 말부터 요새를 만들기 시작해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시기가 오자 방치하다시피 했다가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맹렬하게 파고 또 파기 시작했단다. 히틀러 성격으로 봐서 중립국이라고 사정을 봐주리라 여기는 건 지독하게 순진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사실은 스위스 지형이 북한하고 비슷해서 그곳에 쳐들어가 완전한 승리를 얻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스위스는 알프스에 땅굴을 파고 또 파서 대외적으로 스위스 사람인들의 저항정신을 과시하는 상징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난공불락이 아니고 아예 공격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요새. 이 속에 브라친스키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가 생활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SSR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소비에트의 노예가 되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

  요새 안에서 브라친스키는 뉴바젤의 당 지도원 동지 ‘나’에게 항변한다.

  “반혁명이니, 반공산주의니, 이단이니, 그런 건 전부 애들 말장난에 불과하니까. 당신을 스스로를 재교육할 필요가 있어요. 알고 계시나요? 당신은 스위스의 노예라고요.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훈련받고 노예로 만들어진 거죠.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답니다. 당신의 어린 시절은 한 편의 위조입니다. 세계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타르망귄이 고망귄을 지배한다’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타르망귄이 고망귄을 지배한다’는 말은 “털 없는 흰 원숭이가 털 없는 검은 원숭이를 지배한다는 뜻이다. 여전히 ‘나’처럼 피부색이 검은 인간은 노예라는 말. 소비에트에서는 소수의 엘리트가 모든 인민을 지배한다는 것이겠지. 결국, 세상에 바뀐 건 하나도 없다는 것도 되고.

  나는 그러나 작품의 반 밖에, 반 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결국 브라친스키도 허망하고 허망하도다 하는 것을.

  크리스티안 크라흐트는 흥미롭다. 과작은 아니지만 소설 말고 다른 글을 많이 쓴다. 그래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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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날아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6
랠프 엘리슨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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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랠프 왈도 엘리슨은 1913년 3.1절날 오클라호마 시티에서 태어났는데, 아빠 루이스 앨프리드 엘리슨이 당시 흑인답지 않게 소설 읽기를 즐겨하는 바람에 당시 유명 소설가 랠프 왈도 에머슨의 이름을 따 둘째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아버지는 랠프가 세 살 때 사고로 죽고, 1920년대 들어 인디애나주로 이사한 앨리슨 가족은 20년대 흑인 가정답게 고생깨나 했으며, 랠프 엘리슨 역시 버스 차장, 구두닦이, 호텔 보이, 치과 보조원 같은 일을 섭렵하면서도 열공, 닥공을 감행해 “미국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작가가 되었고, 조각가이자 음악가이자 문학 교수로서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역자 해설)

  1936년에 뉴욕으로 옮긴 20대의 엘리슨은 긴 세월동안 복잡한 관계를 맺은 리처드 라이트와 인연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데, 그쪽으로 가도 괜찮은 밥벌이를 할 정도의 실력이었던 음악, 조각과 조금, 많이는 아니고 조금 멀어지기 시작한다. 리처드 라이트가 누군가. 미국 흑인 문학의 1세대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 <미국의 아들>에서처럼 라이트의 작품은 폭력도 한 방법이라며 흑인의 저항성을 중요한 흑인 문학적 요소로 생각한다. 반면에 엘리슨은 저항보다는 백인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폭력이나 차별을 그대로, 물론 문학적 시각으로 보여주려 한다. 이런 방법상 문제로 라이트하고 관계가 복잡해진다는 뜻이다. 정치적으로 라이트는 공산주의에 적극적이어서 공산당에 입당했고, 엘리슨은 입당해서 당 내 일을 하기도 했지만 조용한 편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소비에트가 아프리칸 미국인을 배신했다고 판단해 이에 대한 반발로 엘리슨은 미국 문학사에 이름을 남기게 할 <보이지 않는 인간>을 썼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인간>은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의 190번과 191번으로 짧지 않은 품절기간 동안 그걸 읽어보려고 동네 헌책방을 기웃거렸던 것이 기억난다. 그 작품이 미국 공산주의, 라기 보다는 미국 노동조합에 들어가 열성적으로 일하며 인정받지만 결국 드러나지 않는 차별을 발견하는 흑인 이야기이다. 요즘 자주 사용하는 말 “투명인간 취급” 당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참전을 결정한 미국의 군대에 지원한 랠프 엘리슨.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흑인도 전투에 참가했다는 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입대한 흑인병사한테 미국과 미군은 총기를 지급하는 걸 꺼려했다, 라는 증거가 많다. 주로 태평양 전쟁에 배치된 흑인 병사들은 일본군과 직접 싸우는 것보다 보급품 하역 같은 힘을 쓰는 일에 많이 투입되었다. 랠프 엘리슨 역시 신체검사 결과 1A 급을 받아 당연히 징집될 줄 알았는데 전쟁터가 아닌 미국 상선에 입대해 국제화물과 승객관리 일만 잠깐 하다 왔다. 여전히 미국은, 버스 안에서 덩치 우람하고 알통이 울퉁불퉁한 젊은 백인 남자가 서 있는데 재수없고 기분 나쁘게 임신한 흑인 여자가 좌석에 앉아 있다는 이유로 겁나게 두드려 패던 시기였다. 이러니 보이지 않는 인간이 어디 한 둘이었겠어? <보이지 않는 인간>을 출간한 1952년에도 미국은 이하동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인간>은 1953년에 전미 도서상과 전미 신문제작자 협회가 주는 러스웜 상을 받았으며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최고의 상징”의 자격으로 시카고 디펜더 상을 받는 큰 영예를 얻었다. 이게 랠프 엘리슨한테 크고 큰 부담으로 작용할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 리처드 라이트나 제임스 볼드윈처럼 투쟁적이지 않고 문학 자체에 중점을 둔 엘리슨한테는 소설작업이 차별적인 세상에 대항하는 무기가 아니라 성취해야 할 지향점이었기 때문에 전작 <보이지 않는 인간>을 능가하지 못하는 작품이라면 차마 발표하기를 꺼려했던 결벽증 비슷한 증세였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이후에 장편소설 한 편도 완성하지 못한 채 죽는다. 책 뒤의 작가 연표를 보면 1999년에 “존 F. 캘러헌이 랠프 엘리슨의 두 번째 장편소설 『준틴스(Juneteenth)』를 편집하여 출간했다.”라고 나오는 바, 결국 엘리슨의 미완성 유고, 쓰던 중에 죽어서 미완성이 아니라, 쓰다가 만 작품을 편집해서 출간했다는 말이다.


  이 소설집 《집으로 날아가다》도 초판 출간이 1996년이다. 이 책도 “유고 단편집”이라고 표현했는데, 1940년대부터 50년대까지 잡지에 발표했던 것도 있고, 쓰기는 했지만 발표하지 않고 책상 서랍에 꿍쳐 두었던 것을 새로 실은 것도 있다. 당연히 어디다 싣지 않고 보관만 했던 것은 잡지 발표작보다, 기분상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덜 좋다. 딱 한 편 빼고. 맨 앞에 실린 <광장의 파티>. 이 단편은 화자 ‘나’가 백인 소년이다. 찬 겨울비가 내리는 밤, 한 무리의 남자들이 에드 삼촌의 집에 오더니 광장에서 파티가 열린다고 소리쳤고, 삼촌은 나더러 함께 가서 보자고 불러 소슬소슬한 비를 맞으며 광장까지 뛰어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광장에 가서 보니까, 보잘것없는 모닥불 앞에 검둥이 청년이 웃옷을 벗은 채 불을 쬐고 있었으며, 청년을 둘러싼 백인 남자들이 욕설과 악담을 퍼부었다.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크게 바람이 불어 전신주가 부러지면서 전선이 끊겨 바닥에 닿았고, 젖은 땅을 따라 고압의 전류가 운이 좋지 않은 백인 여성의 발을 타고 전신을 관통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 흥분한 사람들은 흑인 청년한테 휘발유를 쏟아 붓고 그냥 불을 붙여버렸다. 다중의 백인들이 흑인 한 명을 불태워 죽이는 현장. 이것을 광장에서 벌이는 파티라고 한 거다. 평소 같으면 백인과 흑인이 거의 같은 수로 시간을 보내는 평화로운 광장. 그러나 이런 미친 테러를 규탄하거나 막고자 하는 흑인은 이 시간에 광장에서는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머지 작품들도 좋다. 위에서 말한 “덜 좋았다” 하는 것은 랠프 엘리슨 치고 좀 덜 좋았다는 뜻이지 품질이 처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거의 같은 주제로 쓴 단편 열넷을 재미있게 읽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수없이 얘기한 바와 같이 뭐? 맞다. 꽃노래도 삼세번. 그런데 비슷한 열네 작품을 한꺼번에, 앉은 자리에서 읽어보시라. 엉덩이 배기는 건 다음 문제고 눈알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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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12-24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이지 않는 인간은 읽었어요. 그런데 내용이 가물가물해서 찾아보았더니 읽은지 거의 10년이 되어가더라고요. 10년 마다 읽은 책을 다시 읽을 수도 없고 참...
랄프 왈도 에머슨을 따라서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오늘 알았네요.

Falstaff 2024-12-24 16:24   좋아요 0 | URL
다시 읽을 책을 다시 읽는 일.... ㅎㅎㅎ 그거 굉장히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그냥 제껴버리는 것도 좋은 선택일 거 같습니다.
연말입니다. 언제나 처럼 늘 행복하세요!

케이 2024-12-26 1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이지 않는 인간> 은 대학 시절 읽었는데 번역이 최악이기로 유명한 책으로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저에겐 참으로 재미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너무 백인 남성 위주의 영미 문학에 절여진 까닭인지 일단 주제와 전개가 너무 어색하여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았어요. 겨우 겨우 끝까지 읽긴 했지만 다신 못 읽겠단 생각을 했어요. 안 읽겠단 얘기를 참 길게도 했습니다 ㅋㅋ
20대까진 전쟁영화 좋아해서 많이 봤는데, 이긴 전쟁에는 백인 잘생남들 위주로 출연시키고 진 전쟁인 베트남전에는 흑인이 많이 나오네?? 라는 생각 종종 했는데 실제로 2차 때는 흑인이 전면전에 나서지 못했던 것이었네요.
저희 부모님 두분이 다 전라도 출신이시라 지역 차별을 바로 옆에서 많이 보고 느꼈는데, 인종 차별은 훨씬 더 심하겠지요.
가장 비겁한 게 절대 바꾸지 못하는 것에 대해 차별하는 것이란 생각 요즘 자주 합니다.
즐거운 연말 되세요!

Falstaff 2024-12-26 16:20   좋아요 1 | URL
앗, 이긴 전쟁에선 백잘생남! 그걸 몰랐습니다. 노먼 메일러가 쓴 <나자와 사자>에서 아마 전투원 가운데 흑인이 없던가 극히 드물던가 그랬을 겁니다. 메일러는 작가 이전에 기자였으니까 그대로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보이지 않는 인간>이 예전에 번역본이 나왔었군요. 그 책이 품절이라 오래 기다렸다가 읽는 바람에 커진 기대 때문에 ㅎㅎㅎ 그래도 좋은 작품이라고 기억하는 데요.
전라도 가족이시군요.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은 아직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아 매우 아쉽습니다. 주위에 자기 정체성을 숨기는 전라도 출신 분을 많이 봤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낌새가 보이면 걍 확 치받아 버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