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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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편의 단편소설을 담은 작품집. 1925년 6월에 제임스 아널드 호로위츠 James Arnold Horowitz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설터는 애초에 직업군인으로 전투기를 몰았다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사냥꾼들>이란 소설을 써 작가의 길을 걷는다. 처음에는 필명을 ‘제임스 설터’로 하다가 나중엔 법원의 등기부를 고쳐 정식 이름으로 삼았다고 하니 이이가 ‘뉴저지 설터 씨’의 시조가 되겠다. 위키 백과를 보면 설터의 대표작으로 어제 내가 악평을 했던 <스포츠와 여가>를 꼽았다. 나의 문학적 소양이 여태 형편없다는 것이 백일하에 증명이 된 셈이긴 하지만, 나는 여전히 <스포츠와 여가>에서 독자가 구경할 만한 것은 그의 간결하고도 섬세한 문체뿐이라는 주장을 취소할 생각이 없다. 지금 막 《어젯밤》을 읽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책을 읽고 제일 처음 느낀 소감은 제임스 설터가 단편소설을 위해 특화된 작가가 아닐까, 싶은 것이었다. 설터의 작품 속에 커다란 담론 같은 건 없다. 애초에 그런 것들을 담을 의도 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설터가 줄곧 관찰했던 것은 커플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세하지만 치명적인 떨림이다. 이 떨림은 살면서 누구나 한 번 이상은 경험해보는 일이지만 이 현상이 결코 같은 떨림은 아니다. 필립의 떨림은 금발머리 가정교사를 보고 결혼 15년 만에 찾아온 벼락같았던 사랑이고, 중년의 부유한 과부 테디에게는 열다섯 살에 첫 경험을 하게 해준 무명 소설가였지만 지금은 편지에 답장도 해주지 않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브라이언한테는 아내의 귀고리를 빼앗아 매단 채 장인과 환담을 하는 유엔 직원 패밀라다.
  이 떨림의 공통 현상은 애정, 그리움, 안타까움, 후회, 잔상, 추억 같은 것들. 그리하여 설터가 내놓는 그림 속에 ‘현재의 뜨거움’은 없다. 있다면 오직 과거나 잘못된 사랑, 즉 불륜인 경우다. 열 개의 모든 작품은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남녀가 등장한다. 그리하여 유일한 주제는 사랑. 만개하지 못했거나, 이미 시들어버린 것 등.
  설터의 단편은 말 그대로 ‘단편적’이다. 단 하나의 에피소드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써내려 간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사랑이 하필이면 결혼 피로연 때 섬뜩하게, 내일이면 또다시 볼 수 없는 한 순간의 혜성처럼 떠오르고, 전신에 암이 퍼져 모르핀으로 연명하는 아내의 요청으로 모르핀 치사량을 주사한 밤에 연인을 불러들여 뜨거운 밤을 보내고, 20년 만에 다시 만난 옛 시절의 연인이 너무 비대하고 추한 모습으로 변해버려 서둘러 돌려보내는 등, 딱 단편소설을 쓸 만큼의 주제로 작품을 만들었다. 여기에 꼭 필요한 문장들과 절제된 수사법만 사용하니 단편으로도 짧은 분량이면서 호소하는 바는 매우 강하다. 전형적인 단편소설을 읽는 느낌. 분위기는 전혀, 완전히 다르나 황순원이 이런 주제로 썼으면 설터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면 이해하실 수 있을 듯.
  오랜만에 깔끔한 번역 단편소설들을 읽었다. 물론 단편소설이 다 이래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완전히 내 스타일의 작품들을 모아놓았다. 그간 외국 작가들의 단편은 별로 읽지 않았으나 골라 읽은 것들 대부분 괜찮거나 훌륭한 단편집이었다.
  다만 단편소설, 특히 번역한 단편일 경우 독자의 취향이 매우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을 선택하시겠다면 조금 신중해질 필요는 있다. 어쨌든 나는 《어젯밤》을 마지막으로 설터는 더 이상 읽지 않으려 했지만 마음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제임스 설터. 이 독특한 문법을 가지고 있는 작가를 조금 더 관찰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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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7-23 09: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년전에 이 책 읽었는데 왜 언급하신 줄거리가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까요?
요약하신 줄거리를 보면 엄청 재미날 것 같은데요.
사놓고 안읽은 책이 수두룩한데 읽었던 책을 또 읽어야 할까요?
삶은 .. 어렵습니다.

이만 총총.

Falstaff 2021-07-23 09:24   좋아요 3 | URL
단편소설이 아쉬운 점입니다. 읽을 때는 참 절절하게 읽는데 오래가지 않는다는...
단편이 애초에 주제에 집중하는 형식이라 그러지 않을까 싶어요. 저도 얘기하신 현상이 아주 자주 생깁니다. ㅎㅎㅎ 어렵지 않으면 삶이 아닙지요. -_-;;

잠자냥 2021-07-23 09:3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어젯밤>은 별 다섯 개짜리 단편집 맞습니다. 전 이 책으로 설터를 처음 만났기에 오! 하고 계속 읽었답니다. 두 번째로 읽은 게 <가벼운 나날>이었는데요, 이 작품도 장편임에도 좋았어서, 오호! 그래 계속 읽는 거야! 하면서 신나게 읽었습죠... 그런데 <스포츠와 여가>는 좀 뜨악했습니다. ㅎㅎㅎ 장편은 <가벼운 나날> 단편은 <아메리칸 급행열차>까지는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Falstaff 2021-07-23 09:36   좋아요 2 | URL
오호, 고맙습니다. 한 번 따라가보겠습니다. ㅋㅋㅋ

stella.K 2021-07-23 11: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황순원과 그만 읽으시려다가 조금 더 관찰하시겠다니
확실히 그냥 지나치기엔 아까운 작가인가 봅니다. 저도 관찰해 보도록 합죠.^^

Falstaff 2021-07-23 12:13   좋아요 2 | URL
크... 언제나 그렇듯이, 특히 단편인 경우에는 조금 더 한데요, 독자와의 합이 맞아야 장땡입니다!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1-07-23 13: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일단 주문해 놓은 <스포츠와 여가>부터 읽어야할텐데, 그럼 다른 작품 읽고 실망할 가능성은 별로 없겠군요. 다행일까요 ㅋ

Falstaff 2021-07-23 13:16   좋아요 2 | URL
크....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그렇겠습니다. ㅎㅎㅎㅎ

새파랑 2021-07-23 15: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셀럽 두분이 🌟5개라니 이건 뭐~~ 기대되는군요~!!

Falstaff 2021-07-23 15:30   좋아요 4 | URL
헥, 셀럽이라니요. 평생 처음 들어봅니다.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하여튼 별 다섯 개라도 합이 맞지 않으면 꽝이란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1-07-23 15:55   좋아요 3 | URL
셀럽! 크하 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치겠다! ㅋㅋㅋㅋㅋㅋ
살다살다 저도 셀럽 소리 처음 들어봅니다! 현실에서 저는 올드패션드입니다만! ㅋ
책 읽기로 셀럽이 되는! 오직 이 알라딘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7-24 08: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2017년에 읽었는데 이해,공감이 안갔어요.ㅜ 저는 단편이 참 어렵네요. 줄거리 거의 기억안나고 부부들 이야기가 많았던것만 기억나네요. 셀럽 두 분이 별5개ㅋㅋ
합이 맞지 않은 것보다는 당시 제 상태가 너무 빈약해서ㅠ 이해를 못한걸로...

Falstaff 2021-07-24 20:59   좋아요 1 | URL
에구, 빈약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나 싫으면 무조건 싫은 거지 조건이 어딨어요. ㅋㅋㅋㅋ
 
스포츠와 여가
제임스 설터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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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의 초사이언, 사이오 님이 2017년 9월부터 2021년 3월까지 무려 3년 반 동안 사진과 더불어 책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시는 바람에, 명색이 서재 친구라면 이건 읽으라, 좀 읽어보라는 압력 같아서 선택했다. 다만 안타까운 건, 구입할 때 보관함에서 곧바로 장바구니로 옮기는 바람에 땡투를 못 했다는 점. 자리를 빌려 미안한 마음을 표시해본다.

 

  많은 독자들의 주목을 끈 미국 작가 제임스 설터. 그런데 어째 손이 가지 않아 차일피일 일독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하긴 내가 모르는데 다른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책 표지가 좀 선정적이라 그랬나? 그랬을 수도 있다. 더구나 이 책 뒤표지에 큰 글씨로 무엇이라 쓰여 있는가 하면,

 

  “빛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정교한 은 세공품
  심장을 건드리는 것 같은 쓸쓸한 포르노그래피“

 

  물론 카피야 어차피 독자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목적으로 쓰는 거지만 나처럼 진중한 독자는 슬립 차림의 예쁜 아가씨 표지와 포르노그래피임을 강조한 카피로 인하여 오히려 읽어볼 생각을 못 낼 수도 있음을 좀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왕 포르노그래피임을 강조하려면, 그거 있잖은가, 내용도 카피에 좀 걸맞았으면 오죽 좋겠는가. 이게 포르노그래피면 세상에나, 미셸 우엘벡, 필립 로스, 우리나라의 김혜나, 장정일은 빨간책 대마왕이겠네. 그러니 그걸 기대했다면 애초에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 좋다.
  곧바로 읽은 감상을 이야기해보자.
  설터. 처음부터 마음을 끌어당긴다. 그의 문장이 그렇다. 여간해 감상이 섞이지 않은 건조한 문체. 9월, 휴가가 끝나 귀경 행렬로 붐비는 파리의 기차역이다.

 

  “9월. 빛이 넘치는 이런 나날들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 8월 내내 텅텅 비다시피 했던 이 도시가 이제 다시 움직인다. 새로 채워지고 있다. 식당은 모두 다시 문을 열고 상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전원에서, 바다에서 차들로 빽빽했던 도로여행에서 돌아온다. 기차역이 몹시 붐빈다.”

 

  간결한 문장들. 이제 다시 움직이고 있고 사람들은 돌아오지만 문장은 마치 사진을 찍어 놓은 듯 딱, 자리 잡힌 채 고정되어 있는 느낌. 이제 어느 누가 있어 여기에 훅, 바람을 한 번 불거나, 긴 둘째손가락을 한 번 딱 마주치기만 하면 갑자기 생명이 불어넣어져 활기를 띌 거 같은 풍경에서, 화자 ‘나’는 오히려 하행열차에 오른다.
  1967년에 미국 작가가 쓴 소설. 그럼에도 무대가 프랑스여서 그런지 묘사는 다분히 프랑스 적 에스프리의 향취가 배어 있다. 파리를 떠난 열차는 세송 역, 몽트로 역, 상스 역, 생쥘리앙뮈소 역을 거쳐 환승역인 라로슈에서 잠깐 쉬고 ‘나’의 목적지인 인구 만 오천 명의 작은 마을 오툉 역에 멈춰 ‘나’는 내린다. ‘나’의 목적지는 구시가지 로마 성곽 바로 위에 자리한 위틀랜드 하우스. 대문의 철제 장식에 VAINCRE OU MOURIR, 승리하라, 아니면 죽으라, 1950년에 한반도로 전투 병력을 파병하며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가 자기 병사들에게 한 말이 적혀있다. 크리스티나와 빌리 위틀랜드 부부가 미국인인 ‘나’의 프랑스 체류에 얼마든지 이용하라고 빌려준 집이다.
  이 집에 근사한 구형 자동차 들라주 52년형 컨버터블을 타고 도착한 미국인 청년 필립 딘. 드디어 주인공이 등장한다. 삶에 반항하느라 예일대를 중퇴해버린 천재. 탁월한 지성을 가지고 있어 대학에 입학을 해보니 가르치는 것이 너무 쉬운 것들만 있어서 자신만의 삶의 스타일을 개발하기 위해 프랑스 유람을 왔단다. 아버지는 저명한 연극비평가로 미국 내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명문가 출신 남자. ‘나’는 10월의 어느 날 필립과 오툉 시내의 한 카페 포이에 들러 식사를 했고, 거기서 프랑스 주둔군으로 와 있는 흑인 미국 육군 병사를 애인으로 둔 주말 아르바이트 종업원 안마리 코스탈라가 눈에 들어오는데, 필립 역시 이 터틀넥 스웨터에 검은 스커트, 가죽벨트를 한 안마리를 보더니 이렇게 이야기한다.
  “저 여자는 여러 주 동안 저에 대한 꿈을 꾸었을 겁니다.”
  안마리 코스탈라.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10월 8일 생. 지금은 방년 18세. 서른 두 살의 필립 딘과 안마리는 곧장 연인관계로 접어들어 빌린 들라주 52년식 컨버터블을 타고 프랑스 전역을 누비며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에 빠져들기 시작하는데, ‘나’가 아무리 보아도 필립은 처음부터 안마리를 자신의 아내감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은 반면, 안마리는 당연히 둘이 결혼해 딸 아들 낳고 평범한 가정의 주부가 되리라 믿는다.
  이들이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 곳이 리볼리 가의 호텔. 저녁을 먹고 고전적이고 널찍한 방에 들어 함께 샤워하고, 침대에 대각선으로 누워 한 번 하고는 잠에 떨어진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더. 음. 나는 이렇게 아침의 섹스를 시작하는 건 처음 읽어봤다.
  “흐릿한 잿빛, 아주 이른 시각이다. 그녀의 입 냄새가 고약하다.”

 

  이렇게 해서 연애 소설이 통상 그렇듯이 둘의 사랑이 끝날 때까지를 그렸다. 초두에 얘기했듯 있어서 보거나 들은 대로 기록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조한 문체로 적어놓은 작품을 읽기가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래 분량에 비해 시간 소모가 많았고 간혹 지겹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처음 읽는 작가는 한 번에 두 권 이상을 구입하지 않는다. 그런데 쇼핑의 간격이 길어서 그랬는지 설터의 작품은 어쩌다 보니 두 권을 샀고, 지금은 소설집 《어젯밤》을 읽고 있다.
  <스포츠와 여가> 읽기를 마치면서 이젠 설터는 끝, 이라 단정해 별 기대 없이 소설집을 펼쳤다가, 아 이런, 그렇다. 만일 우리말로 번역한 역자가 역자의 문체로 쓴 것이 아니라면, 설터의 문체는 장편보다 단편에 훨씬 어울리는 건 아닐까. 난 여기서 “단편에 훨씬 어울린다.”라고 쓰고 싶다. 그러나 주장을 할 수준이 아니라서 이렇게 얘기하고 마는데, 이제 겨우 단편 두 개를 읽었을 뿐이지만, <스포츠와 여가>도 이렇듯 몇 개로 잘라서 나누어 썼더라면 독자가 읽기도 훨씬 편하고, 더 아름다운 문장으로 만들어진 단편‘들’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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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7-22 09: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스포츠와 여가>는 전 별로였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설터는 단편이 좋은 작가 같아요. 그래서 <어젯밤>이 훨씬 좋았고요(단편 모음집에서도 <아메리칸 급행열차>보다는 <어젯밤>이 낫습니다.). 장편 중엔 <가벼운 나날>이 가장 낫더라고요. 물론 저는 번역된 장편 중 <사냥꾼들>은 아직 읽지 않은 상태에서 비교한 것입니다만. ㅎㅎ

Falstaff 2021-07-22 09:39   좋아요 3 | URL
내일 <어젯밤> 독후감 올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당분간 설터는 제 목록에 없을 거 같습니다. 장편을 쓸 때도 단편을 여러 편 겹쳐 쓰는 식으로 부분을 잘라 썼더라면 어땠을지 모르겠더군요. 하여튼 아쉬운... ㅎㅎ

잠자냥 2021-07-22 09:48   좋아요 3 | URL
연속해서 먹으면(?) 안 되는 작가가 있는데, 설터도 그 부류 중 하나 같아요. 연속해서 읽으면 넘나 질린다능; ㅋㅋㅋㅋ

아, 그리고 설터 문장 요즘 같은 날씨에 읽기 힘들지 않으세요?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7-22 10:27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ㅋㅋ 요즘 같은 날씨에 <수영장 도서관> 읽는 것보다는 훨씬 덜 쫄려요! ㅋㅋㅋㅋㅋㅋㅋ
<수영장 도서관>은 독후감 쓰기도, 아이고, 말을 말아야지.... ㅋㅋㅋㅋ

잠자냥 2021-07-22 12:48   좋아요 5 | URL
아, 써주세요 <수영장 도서관>! ㅋㅋㅋ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습니다요!

저, 얼마나 야한지 궁금하다고 쿨캣 님인가 쟝쟝 님이 그러셔셔 차마 타이핑 치긴 뭐하고 사진 찍은 게 있거든요? 근데 그거 페이퍼로 올리려다가.... 에휴 관뒀습니다(제 서재 알라딘에서 블라인드 처리할까 봐?ㅋㅋㅋㅋ). 19금이 아니라 29금이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7-22 13:10   좋아요 1 | URL
저도 게이 러브씬은 차마 인용하지 못하겠고요, 대신 경험담 하나 올렸답니다. ㅋㅋ

- 2021-07-22 22:02   좋아요 2 | URL
(수영장도서관을 두리번 거리며 담는다 ㅋㅋㅋ)

잠자냥 2021-07-22 22:08   좋아요 2 | URL
쟝쟝!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야 아니야 기대하는 그런 거 아니야~~~~

- 2021-07-22 22:17   좋아요 1 | URL
왜욧! 전 엄연히 29살 넘었다구욧!!!!

Falstaff 2021-07-23 08:50   좋아요 1 | URL
장쟝님, 당연 29 이상이시겠지만, 여자 남자 베드씬하고 느낌이 아직은 다릅니다. 이것도 차별이냐, 하시면 할 말 없는데요, ^^;;; 아직 좀 낯설어서 그렇다고 이해해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ㅋㅋㅋ 궁금하시면 직접 읽어보셔야 할밖에요.
맨 그런 거만 나오는 건 아니고요, 두 장면 정도만 으 이건 아직은 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고요, 나머지는 참 억세게 장황합니다. 여름에 고문당하기 아주 적당한 책입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7-23 09:37   좋아요 1 | URL
네, 폴스타프 님 말씀처럼 뭔가 그 에로틱한 거 기대하시면 안됩니다;; 쟝쟝님...에로틱하 거 찾으시면 다른 거 읽으세요. ㅋㅋㅋㅋ

아니, 근데 폴스타프 님! 두 장면 정도만 그랬어요? 전 세 장면인데.... ㅋㅋㅋㅋ

독서괭 2021-07-22 10:2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엇 저 어제 아이책 중고로 주문하면서 같이 담을 책 찾다가 이책 주문했는데요 ㅋㅋ 저도 syo님 덕에 이 표지가 굉장히 익숙합니다ㅋ

Falstaff 2021-07-22 10:39   좋아요 3 | URL
ㅎㅎㅎㅎ 사신 건 꼭 읽어야 합니닷! 그리고 별 세 개를 줘서 그렇지 읽을 만하긴 합니다. ^^;;;

다락방 2021-07-23 07: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사이오 님은 ㅋㅋㅋ 제가 모르는 알라디너라고 생각했지 뭐예요? 쇼님도 셜터 좋아하는데 초사이어인이 또 있구먼.. 했는데 이 분이 그 분이군요? ㅋㅋㅋㅋ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7-22 22:10   좋아요 3 | URL
우리가 아는 사이오.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7-23 08:51   좋아요 0 | URL
syo 님은 자기 이니셜이 여러가지로 불리는 걸, 지금 은근히 즐기고 있답니다. ㅋㅋ

잠자냥 2021-07-23 09:37   좋아요 0 | URL
아니 그런 걸 다 아는 사이오?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7-23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 님 왜 수영장 도서관 리뷰 안 올리셨어요.... 흑 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7-23 09:43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그건 다음 주 금욜에 올라옵니다.
몇년 전에 이 루틴 한 번 깼다가, 저역자한테 을매나 귀싸대기를 얻어 터졌는지, 하이고, 그 담부터 재수없어서 애초에 정한 스케쥴을 무조건 따르고 있답니다.
 
티레시아스의 유방 20세기 프랑스 희곡선 8
기욤 아폴리네르 지음, 장혜영 옮김 / 연극과인간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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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욤 아폴리네르. 이 이름을 처음 들어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이이가 쓴 작품을 읽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시집 《알코올》 정도가 유명하다. 시의 번역은 반역이란 믿음을 가지고 있던 나는 왜 유명한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유명한 《알코올》을 알고는 있었으나, 믿고 있는 바(시의 번역은 반역)를 깨지 못해 구입을 포기했었다. 이러던 차에 눈에 띈 것이 바로 <티레시아스의 유방>. 이 작품은 십 몇 년 전에 프랑시스 풀랑의 오페라 작품, 필립스에서 낸 한 장짜리 음반으로 들어본 적이 있다. 그때 아주 힘들었던 기억. 풀랑이라 하더라도 일인극 <사람의 목소리>는 수월하게 들어서 무턱대고 도전했다가 아이고, 새치 생겼다.

오자와 세이지,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


  먼저 기욤 아폴리네르의 한 살이를 좀 보자. 이이는 폴란드에서 망명한 어머니와 이탈리아 장교 아버지 사이에 로마에서 태어났다. 가족 모두 기욤이 열아홉 살 때인 1899년에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고, 1901년에 독일 귀족의 가정교사를 했다고 하니, 당시 가정교사라는 위치를 생각해보면 겨우 입에 풀칠하며 학교나 보내줄 수 있는 중류 집안 출신이었던 듯하다. 하여튼 밀레니엄과 벨 에포크 호시절을 만나 시, 비평, 에세이 등을 발표하는 문필가로 활약하다 지난주에 소개한 <위뷔 왕>의 작가 알프레드 자리, 막스 쟈콥 등의 작가, 피카소, 브라크, 블라멩크, 마티스, 루소 등의 화가 등과 어울려 당시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전위 예술에 참견하게 된다. <티레시아스의 유방>도 이 약소한 질풍노도의 초기였던 1903년에 초고를 쓰고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에 서막과 수정을 거쳐 초연한 작품이다.
  세월은 아폴리네르 역시 비켜가지 않아서 이이는 세계대전에 포병으로 참전했다가 1916년에 포탄 파편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르메트르의 <오르부아르> 수준은 아니고) 제대한다. 이때 극을 완성해서 공연까지 한 것. 이후 1918년에 부상 치료 때문에 허약해진 체력이 당시 유행했던 스페인 독감을 견디지 못하고 그길로 생을 다했으니 그나마 작품의 초연까지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아무리 바빠도 희곡을 읽기 전에 티레시아스, 그러니까 테이레시아스가 어떤 인물인지를 먼저 알고 있는 편이 좋다. 지금부터 위키 백과에 나오는 것을 대폭 각색해 소개한다. 테이레시아스는 양치기 에베레스와 님프 카리클로의 아들로 테베에서 태어났다.
  이 아이가 자라 몇 살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빠가 양치기니까 아마도 양을 돌보기 위해 펠로폰네소스의 킬레네 산에 갔다가 뱀 한 쌍이 교미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뱀이 왜 정력제라고 불리는지 아는가? 교미하는데 근 70시간을 쓴다. 징그럽지? 그건 테이레시아스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함부로 휘두른 회초리에 하필이면 암컷이 맞아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그랬더니 배꼽 아래에 여태까지 거꾸로 매달렸던 신체부위가 몸속으로 쑥 들어가더니 그 자리에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동시에 유방이 돌출되어 여자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테이레시아스는 7년 동안 여성으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산다.
  세월은 쏜 살처럼 빨라 어느덧 7년이 흐르고 다시 킬레네 산에 갈 일이 있어 갔다가 또다시 한 쌍의 뱀이 나타나 훤한 대낮에 테이레시아스 앞에서 교미를 하고 있었다. 7년 전의 실수가 생각난 여사님은 이번엔, 뱀들을 보면서, 그래, 사랑 한 번 맺기가 얼마나 힘든데 쯧쯧 계속 애써라, 하고 미물을 살려두었다. 그랬더니 모세의 기적이 다시 덮이고 몸속으로 들어갔던 게 쑥 나오면서 아이를 길러낸 유방이 쪼그라들더니 다시 남자가 되어버렸다.
  이때 이야기가 되느라고, 저 올림포스에서 제우스와 헤라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남녀가 자리 깔고 운우의 정을 나눌 때 누가 더 희열을 맛볼 수 있느냐는 문제를 놓고 서로 침을 튀고 있다가, 여신 중의 여신 헤라가 여자와 남자 입장에서 해볼 거 다 해본 테이레시아스가 생각나 그를 불러다 물어보았다.
  “이봐, 넌 알 거 아니냐. 둘 중에 누가 더 좋디?”
  그래 테이레시아스가 답을 하기를,
  “인간에게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기관이 모두 열 개가 있사온데, 이 중에 아홉 개는 여자의 몸에, 딱 한 개가 남자의 몸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자가 남자보다 최대로 아홉 배의 쾌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할 수 있사옵니다.”
  이 말을 듣고 심통 맞고 괜히 열 받기 잘하는 헤라가 테이레시아스의 눈알을 파버리는 형벌을 내린다. 근데 왜 화가 났을까? 여자가 남자보다 아홉 배 더 즐거워한다는데. 하여튼 괜히 의문의 1패를 당한 느낌이 든 제우스. 그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테이레시아스에게 당시엔 가장 훌륭한 축복 가운데 하나였던 예언의 능력을 주고, 다른 인간보다 일곱 배 더 오래 살 수 있는 특권을 내린다. 이렇게 해서 졸지에 제우스를 모신 신당의 주연급 박수가 된 테이레시아스가 하루는 오이디푸스 앞에 나타나 누가 오이디푸스의 선왕인 라이우스를 죽였는지 알려주는 일은, 다들 아시지?

  테이레시아스의 유방은 이런 모습이다.

요한 울리히 크라우스의 판화, 1690

 

  그럼 극은 어떻게 전개되느냐. 이게 문제인데, 저 위에서 십 몇 년 전에 풀랑이 음악극으로 만든 같은 작품을 듣다가 머리에 쥐가 나서 새치까지 생겼다고 했다. 이번에는 기욤 아폴리네르가 쓴 원작을 읽다가 몽매에, 주화입마에 빠져버렸다. 아폴리네르가 서문에서 주장하기를, 이 작품은 20세기 들어 사람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인구증가를 지구 멸망의 근원으로 보고, 어서 어서 피임 없는 사랑을 해 가을밭에서 무 뽑듯이 쑥쑥 아이들 많이 낳으라는 취지로 만들었다고 하고, 해설을 쓴 역자 장혜영도 “이야기의 주제는 한마디로 인구증가를 위한 출산 장려이다.”라고 선언을 하는데 어떤 생각으로 극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내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 앙드레 브르통이다. 아시다시피 초현실주의 문학의 대표선수. 그런데 기욤 아폴리네르의 <티레시아스의 유방>도 마찬가지로 초현실주의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희곡 속에서도 온갖 알 수 없는 대화와 선언과 샤우팅과 코러스가 등장하고, 비록 초연에는 물자와 인력이 부족해 생략했지만 음악까지 곁들여진다. 사람이 안에 들어간 종이 인형극으로 공연한 것 같기도 한, 이해하기엔 매우 수상한 희곡.
  아, 암호해석의 어려움을 피해 시에서 희곡으로 도피했거늘, 희곡에서마저 또다시 암호해독기를 빌려와야 하나? 참 세상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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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7-20 09: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폴스타프 님이 쓰신 마지막 두 줄 읽기 전에 이 리뷰 읽다가 속으로 ‘어머 뭐야 초난해한 시에서 탈출했는데 이건 한술 더 뜨네?‘ 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아니 근데 왜 헤라는 승질이 났을까요? 9대 1이면 좋을 텐데, 100대 1이 아니라서 그랬나...? 하여간 승질머리하곤 ㅋㅋㅋㅋ

Falstaff 2021-07-20 10:01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그러게요. 다 인생입죠. ㅋㅋㅋㅋㅋ 다행인 건 우리나라 희곡은 많이 편하다는 겁니다. 물론 아직까지 제가 읽은 것들만 얘기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만.

헤라가 내기에 남자가 더 좋아한다는데 만 원 걸지 않았을까요? 하여튼 헤라 없었으면 그리스 신화가 아주 빈곤해졌을 겁니다. ㅋㅋㅋㅋ 근데 궁금하긴 궁금해요. 만 열세 살 이후 평생토록. 여자는 얼마나 (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좋을까, 하는 거요.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7-20 10:08   좋아요 2 | URL
다음 생에는 올랜도 폴스타프로 거듭나십시오- ㅋㅋㅋㅋ

Falstaff 2021-07-20 10:12   좋아요 2 | URL
걍 이렇게 살다가 가겠습니다.
ㅋㅋㅋㅋㅋ 전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겁니다. 물고기 자리는 윤회의 마지막이라고 하더군요. 음메 좋아라!!!!

mini74 2021-07-20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제목이. 기욤 하면 저는 마리 로랑생과 미리보다리 말곤 ㅠㅠ 이런 책을 쓰기도 했군요 ㅎㅎ 테이레시아스가 나오는군요 *^^*

Falstaff 2021-07-21 07:35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럼 저보다 많이 아시는 건데요. 저도 이 책이 처음 읽어보는 아폴리네르랍니다. ^^;;
 
경멸 알베르토 모라비아 Alberto Moravia 시리즈 1
알베르토 모라비아 지음, 정란기 옮김 / 본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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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들의 높은 평가가 아니더라도 ‘경멸’이란 제목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선택했을 것이다. 격렬하면서도 매력적인 단어 아닌가, 경멸. 작가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베니스 출신 유대인 건축가의 아들로 로마에서 태어나 병약한 청소년시기를 보내고 주로 시나리오를 쓰면서 30대를 지내는데, 이 때 영화 <율리시스>의 제작에 함께 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 <경멸>이다. 그러나 소설의 내용을 경험담이라고는 할 수 없고, <율리시스>를 만들면서 친구이자 소설가, 영화감독인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율리시스>의 감독이자 스스로도 대본작가였던 마리오 카메리니와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를 현대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토론했던 걸 자료로 쓰지 않았을까 싶다.

 

  에밀리아와 리카르도 몰티니는 결혼하고 2년 동안 완벽한 신혼시절을 보낸 젊은 부부. 리카르도가 작품의 화자 ‘나’다. 리카르도는 극작가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맹렬한 습작의 시기를 보내면서 신문사에 영화평론을 쓰거나 다른 잡문을 기고해 쥐꼬리만 한 원고료를 벌어 생활을 해왔다. 그러니 좁은 원룸에서 얼마나 춥고 배고팠겠는가. 로마라서 그렇게 춥지는 않았을 거라고? 눈 밝은 독자들아, 그냥 좀 넘어가자. 하여튼 이들은 가끔 비누나 화장지 같은 생필품을 살 푼돈이 부족할 지경을 당하기도 했지만 서로의 사랑으로 역경을 이겨나가며 힘든지도 모르고 산 세월이었다. 나도 비슷한 신혼을 지내봐서 이해한다, 이해해.
  그런데 리카르도가 보기에 착한 아내 에밀리아는 유난히 집에 대해 강한 애착을 지니고 있었다. 가난한 가정의 딸로 태어나 중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공부를 작파한 채 돈을 벌기 위해 타이피스트로 일했던 에밀리아는 유독 집 없는 설움을 많이 탔다. 그래 ‘나’ 리카르도는 아파트를 분양받기로 결정을 하고 2년 동안 모아둔 돈과 대출을 받아 에밀리아 이름으로 계약으로 해 첫 중도금을 지불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곧바로 두 번째 중도금을 어떻게 마련할까, 하는 고민으로 눈꺼풀 아래가 거멓게 변해버렸다. 바로 이때 등장한 인물, 영화 제작자 바티스타의 의뢰로 시나리오를 집필하게 되고 생활이 좋아져 두 번째 중도금은 물론이고 소형이기는 하지만 마이카의 꿈도 이루게 된다.
  그래 바티스타가 ‘나’와 에밀리아를 초대하여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2차로 자기 집에 가서 술 한 잔씩 하자고 제의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직 자동차를 사기 전이라) 2인승 비싼 스포츠카로 자기가 먼저 에밀리아와 함께 가 있을 테니까 ‘나’는 택시를 타고 쫓아오라고 제안한다. 맨살이 드러나는 단 한 벌뿐인 검정 드레스를 입은 에밀리아는 불안이 깃들고 몹시 불편해 보였으나 ‘나’는 바티스타의 제의를 거절하지 못해 그의 뜻대로 하게 하는 일이 생긴다. 어쨌든 이리하여 아파트에 입주하게 된 부부는 아직 완공하지 않은 자기 아파트를 보러 갔다가 먼지 쌓인 벽돌 바닥에서 어느 때보다 폭풍같이 격렬하고 기묘한 사랑을 나눈다. 그런데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뜨거운 사랑이었음을.
  얼마 후, 바티스타는 ‘나’에게 독일에서 온 유명 영화감독인 레인골드(Rheingold: ‘라인의 황금’이란 뜻의 ‘라인골트’를 이탈리아식으로 발음한 것일 듯)를 소개하고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를 영화화할 예정이니 레인골드와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라고 일을 준다. 계약서와 즉각 선수금까지 건네주면서. 그러면서 아내 에밀리아와 함께, 작가 모라비아 스스로가 탄압을 피해 1940년대 초를 견뎌냈던, 카프리 섬에 있는 자기 별장에 가서 시나리오 작업을 할 것을 제의하고, ‘나’는 별 생각 없이 수긍해버린다. 일단 피렌체까지 가는 도중에도 바티스타는 에밀리아와 함께 차를 타고 가고, 에밀리아는 이번에도 매우 불편한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호소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바티스타의 뜻에 따르게 된다.
  이 과정에 ‘나’ 리카르도와 에밀리아 사이에는 지난 2년간 상상도 하지 못했던 간극이 생겨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져 있음을 확인한다. ‘나’는 에밀리아의 집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극작가로의 꿈을 포기했다고 생각하는 한편, 에밀리아는 ‘나’의 집에 대한 욕구 때문에 시나리오 작품을 쓰게 되고 이 와중에 자신에게도 마땅하지 못한 일을 시킨다고 생각한다.
  오직 자기중심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멍청한 ‘나’ 리카르도는, 독자들이 벌써 알고 있는 이유 때문에 아내 에밀리아로부터, “나는 너를 경멸해.”라는 더 이상 모욕적일 수 없는 말을 얻어 처먹고 만다. 이 책이 320쪽까지인데, 리카르도는 그걸 285쪽에 와서야 거의 이거 아닐까 짐작을 할 정도니까, 둘 가운데 하나다. 리카르도가 저능아든지, 모든 일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소시오패스든지.
  여기에 책의 중간 부분인 12장부터 등장하는 레인골드의 별 색다르지 않은 <오디세우스>의 현대적 해석을 가져와 율리시스-페넬로페의 관계를 지식인-평범한 여인, 아내를 사랑한 남자-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아내 등으로 대척점에 있는 부부관계를 설정하면, 이걸 리카르도는 ‘나’-에밀리아의 관계에 대입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또 당연히 레인골드의 해석을 부정할 수밖에 없게 진행한다. 근데, 말은 똑바로 하랬다고, 도대체 이게 뭐가 중헌디?

 

  재미없는 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중요한 주제는 왜 아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까. 그걸 넘어 경멸한다고까지 말한 정도가 되었을까 하는 것. 그걸 다 큰 사내새끼가, 얼마나 징징대는지, 아이고 징그러워라. 남자는, 공부하고 글 쓰는 거 말고, 적어도 인간관계 특히 부부 심리학에 관해서는 백치에다가, 여자는 남편한테 찍소리 한 마디 안 하다가 문제가 곪아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 가서야 그냥 뻥, 터뜨리고 마는 남성 의존형 인간이다. 왜 진즉에 하루 날 잡아 너, 이리 좀 와봐. 해놓고 따따부따 하지 못해 이 사달을 만드느냐고. ‘나’, 리카르도는 결국 아내 에밀리아가 왜 자기를 경멸하는지 알았다가 다시 자신의 뜻대로, 자기 편한 쪽으로 해석한 채 결말을 맺게 된다.
  그리고 리카르도의 심성보다 더 역겨운 마지막 장면. 어떤 씬인지 치명적 스포일이라 얘기는 못하겠고, 세상에서 가장 쉬운 문학적 해결 방법으로 싸놓은 거 닦았다는 말만.
  작가, 알베르토 모라비아. 내가 알던 그 사람 맞나? 맞다. 읽기 전부터 알았다.
  ㄷㄹㅂ 님은 읽지 마시기를. 혈압 터져 일찍 먼 길 가시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내가 다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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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7-19 09: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폴스타프 님 주구장창 징징대는 커플 *경멸* ㅋㅋㅋㅋ ㄷㄹㅂ 님 읽게 해보고 싶네요. ㅋㅋㅋㅋ

아, 뭐예요 마지막에 자살(죽음)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Falstaff 2021-07-19 09:34   좋아요 2 | URL
읽으셨남요?
글쎄 이 책이 워낙 좋은 독자평을 즐기고 있어서 돈과 시간을 들여 읽지 마시라는 말씀은 못 하겠고, 거 참.
하여튼 이런 내용은 제가 제일 경멸하는 플롯입니다! ㄷㄹㅂ 님은 정말 읽으시면 안 됩니다. 부들부들... ㅋㅋㅋㅋ

잠자냥 2021-07-19 09:54   좋아요 2 | URL
아니요, 저는 안 읽었습니다. ㅎㅎㅎ 안 읽을 것 같습니다!

다락방 2021-07-22 21:39   좋아요 0 | URL
잠자냥 님 가학적 성향이 있으신 겁니까?! 😱

잠자냥 2021-07-22 22:09   좋아요 0 | URL
다부장님 제가 좀….?! 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1-07-19 10: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이런 스타일이 좋던데 역시 폴스타프님은 화끈하신거 같아요 😎

Falstaff 2021-07-19 10:44   좋아요 3 | URL
아오, 전 내내 지겹게 읽다가, 마지막 충격적인 결말 때문에 완전 빡쳤습니다.
근데 너그럽게 생각하니 아예 처음부터 영화를 위한 소설로 쓴 거 같아서 그나마 별점 하나를 더 보태준 겁니다.

결국은 어떤 작품이든지 재미나게 공감하며 읽은 사람이 제일 좋은 겁니다. 어차피 취미생활일 뿐인걸요. ㅋㅋㅋ

독서괭 2021-07-19 10: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읽지 말라고 하시는데 읽고 싶어지는 이 리뷰 뭐죠? ㅋㅋㅋ ㄷㄹㅂ님의 반응도 궁금해요 ㅋㅋ

Falstaff 2021-07-19 10:50   좋아요 2 | URL
흑흑흑... ㄷㄹㅂ 님만 읽지 마시라 했어요.
다른 독자들 리뷰가 워낙 좋은 거에 쫄아서 마음과 달리 읽지 말라는 말은 차마 못했답니다. 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1-07-20 02: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맞아,... 올해 제가 읽은 책 중에서 찌질남 1위에 등극한 남자 주인공입니다.
모라비아는 혹시 이 책의 주인공에 당대 이탈리아의 지식인의 모습을 대입한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진짜 센세이셔널 했을것 같기도 하더라구요. 이게 우리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 하면서 항의가 빗발쳤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얘기는 없더군요. 그냥 사랑얘기로 본다면 저도 비추천입니다.

Falstaff 2021-07-20 08:42   좋아요 1 | URL
ㅎㅎㅎ 반갑습니다!!!
둘 다 답답한 젊은 부부입니다만 남자 쪽이 더 찌질해서 읽는 내내 고구마도 아니고 급성 변비 걸릴 거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7-22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읽으면서 수천번 쌍욕할 것 같긴 하지만 어쩐지 읽고 대차게 까는 리뷰를 쓰고 싶기도 하네요 ㅋㅋ
그나저나 줄거리는 데미 무어 주연의 영화 <은밀한 유혹> 생각나게 하네요. 그 영화도 뭥믜 스러웠는데.. 사람들 왜 죄다 그렇게 바보같은 선택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개그우먼 김신영이 꽁트 하면서 했던 대사인데,
“너도 바보 선배도 바보 다 바보다!”
생각나네요. 아 속터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7-23 08:54   좋아요 0 | URL
ㅋㅋㅋ 여러가지로 안 읽으시는 것이 건강에 좋습니다. 더구나 지금처럼 한여름 삼복 더위엔 더욱 그렇습지요. 절대 속 안 터지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7-24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사람 다 짜증 답답했지만 저는 참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
그래 너 이리와봐라. 따따부따! 이걸 왜 못하는지 그게 참 답답해서요...ㅋㅋ

Falstaff 2021-07-24 21:02   좋아요 1 | URL
특히 서재 동무님들께서 좋다고 하신 책을 이렇게 후지게 이야기하는 데에는 조금쯤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아마 이해하실 듯. ㅋㅋㅋㅋㅋ
뭐 사는 게 다 그렇지요.
그나마 타협하느라 별점 하나 정도는 더 올라갔을까요? ㅎㅎㅎ 저도 몰겄습니다.
 
레베카 (초판 출간 80주년 기념판)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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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리 소설의 교과서.
  이렇게 말해도 좋다. 추리 소설을 한마디로 하면 “작가가 독자에게 도전하는 진검승부”다. 작가는 독자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곳곳에 다 마련해둔다. 독자는 책을 읽어가며 작가가 숨겨놓은 힌트(흔히 이걸 복선이라고 한다)를 찾기도 하고 못 찾기도 하면서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을 내린다. 내 경우엔 마치 보물찾기처럼 예상하지 못한 곳에 숨은 힌트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기 때문에 추리 소설을 읽는 시간이 다른 장르보다 훨씬 많이 걸린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독자는 자기가 기대했던 결론과는 다른 결말을 원한다. 추리소설의 독자는 애초에 약간의 피학적 기질이 있는 법이라서. 이때 독자가 원하는 ‘다른 결말’은, 애초 자신이 기대했던 바를 능가해야지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앞에 나열했던 힌트와 어긋나게 결말을 초래한다면 실망을 할 수밖에.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는 결말 부분에서 내게 두 번 무릎을 치게 했다. 거의 완벽하게 숨은 복선을 다 찾았다고 자신하면서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을 기대했다가, 연달아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이게 추리 소설을 읽는 기쁨이다. 그래서 나는 <레베카>를 추리 소설의 교과서라고 상찬하는 것이다.

 

  <레베카>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제 중년에 접어들어 스위스쯤으로 보이는, 스위스라고 생각하는 건 책을 끝까지 다 읽은 사람만이 알 수 있으나 그건 다음으로 하고, 영국 땅을 벗어난 장소에서 스물한 살 시절 신혼의 여름을 보냈던 맨덜리 저택에 관해 꾼 꿈 이야기. 프롤로그다. ‘나’가 아닌 ‘우리’는 스스로 유배 생활을 선택해 살면서 영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날이면 날마다 배달되어 오는 영국신문을 탐독하며 살고 있다. ‘나’의 꿈속에서 맨덜리 저택은 굳게 닫힌 철문과 황폐해 잡목과 잡초에 굴복해 과거의 영광을 다 잃은 모습이다. 우리, 나와 그는 그곳에서 신혼의 백일 남짓을 지내며 불의 시련을 겪어낸 셈으로 그동안 공포와 고독, 좌절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왜 그들이 맨덜리 장원을 떠나 이국에 머물게 되는지, 오랜 시간 전, 화려하기 이를 데 없던 맨덜리 저택에서 있었던 불과 공포와 고독과 좌절의 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두 번째 부분은, 보잘것없는 가문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한 ‘나’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인 벤호퍼 부인에게 동반자 역할을 해주는 대가로 연간 90파운드의 임금을 받는 피고용인 신분으로 부인을 따라 몬테카를로에 와서 영국의 거대한 맨덜리 장원의 소유자인 맥시밀리언 드윈터 씨를 만나 결혼하는 내용, 드윈터(de Winter) 씨는 일 년 전에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사건이 생겨 그때까지의 기억을 다 잊고 싶어 하는 인물로, 몬테카를로에 온 것도 기억을 지우기 위한 일이었다고 한다. 일 년 전의 사건이라고 함은,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아내 레베카가 자신의 보트를 타고 한밤에 바다로 나갔다가 침몰해 죽은 일이었다.

 

  마지막은 6백 쪽 가운데 4백 쪽 분량으로 이탈리아에서의 신혼여행을 끝내고 맨덜리 저택으로 돌아온 ‘나’가 경험하는 4개월에 관한 이야기다. 이제야 사실상 맨덜리 저택의 지배자이자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레베카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레베카는 (종종 그랬듯이) 밤에 혼자 보트를 타다가 전복사고가 일어나 바다에 빠져 행방불명 된다. 두 달 후 시신은 영지에서 70킬로미터 떨어진 에지컴 해변에서 발견했는데 근해에 많이 돌출된 암초에 부딪혀 찢기고 수생생물에 훼손당해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으나 남편 드윈터 씨가 직접 신원을 확인해 영지 교회의 지하에 안장한 상태다.
  여기서 독자는 정당한 의문을 품는다. 바다에 빠진 시신을 두 달 후에 발견했다니. 시신이 훼손되어 알아볼 수도 없었을 터인데 유전자 감식이 없던 시절, 어떻게 신원을 밝혔을까. 나는 믿었다. 레베카는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죽었다고 알려진 후 약 1년 반도 안 된 시점에 레베카는 영국 또는 외국의 모처에서 아직도 여전히 맨덜리 저택을 조종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드윈터 가문에 의하여 어느 음침하고 은밀한 곳에 유폐되어 있을 수도 있고. 독자의 머리는 갈수록 미로를 헤맨다.

 

  저택과 장원의 모든 종사자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결코 스물한 살 먹은 새 드윈터 부인의 의견을 참고하려 하지 않는다. 집안의 모든 일에 관해 그들이 하는 말이라고는, “돌아가신 드윈터 부인께서는 …… 하셨습니다.” 일 뿐. 영지 소유자인 맥심이 태어나기 전부터 저택에서 일해온 집사 프리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미 죽은 레베카를 가장 숭배하는 건 레베카가 결혼해 저택에 들어올 때 함께 와 일을 시작한 댄버스 부인. 사람들은 뛰어난 솜씨로 거대한 집안의 살림을 꾸려나가는 댄버스 부인을 “참 대단한 사람, 다만 기름칠이 안 되어 뻣뻣하다는 게 문제”로 볼 정도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최적의 방법을 찾아내지만 과거에 함몰되어 누구라도 레베카의 자리, 드윈터 부인의 지위를 대신할 수 없다는 맹목을 가지고 있으니 ‘나’와는 처음부터 사이가 좋기를 기대할 수 없는 인물이다.

 

  이 맨덜리 저택이 책에 등장하고 상당 부분 나는, 겨우 스물한 살 먹은 화자 ‘나’가 마흔두 살의 남편 맥심 드윈터에게 하는 역할은, 저택의 코커스패니얼종의 개 재스퍼가 ‘나’에게 주는 위안 정도밖에 안 된다는 생각, ‘나’가 당연한 권리로 해고하거나 징계할 수 있는 시녀장 댄버스 부인이 시시때때로, “특히” 무도회에서 자신을 크게 물 먹인 일을 인내하고 있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는 하도 답답해서, 이런 작품이 어떻게 듀 모리에의 대표작이랄 수 있을까, 할 정도였다. 심지어 지루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안심하시라. ‘나’의 한심한 행동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이야기는 ‘나’에게 큰 수모를 안긴 무도회 다음날, 드윈터 영지에 독일 함부르크 상선이 좌초하면서 큰 변곡을 만나 이른바 소용돌이를 이루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어려서 레베카와 함께 자란 사촌 잭 파벨까지 등장해 결정적인 반전을 준비하는데, 파벨이 내가 기대했던 결말에서 한 번 더 도약한 결론으로 향하게 만든다. 이 ‘도약 결론’을 읽고, 대부분의 독자가 그렇겠지만, 나는 추리 소설 작가가 내는 수수께끼를 너무 도식적으로, 상투적으로 해석해오지 않았나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서두에 말했듯이 작가는 독자에게 줄 수 있는 모든 힌트는 다 보여준다. 독자가 추리 소설을 ‘즐기고 싶다면’ 드러나는 힌트를 최대한 ‘다양하게 해석해야 할 의무’가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독자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하지만 반성하지 않는다. 의무를 수행하지 ‘못할 때’ 독자는 작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반전이라는 상쾌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니까. 나는 대프니 듀 모리에의 이 예상 밖 결론, 천재 악녀 레베카의 기상천외한 조롱을 읽고, 자빠졌다.
  세상에 이런 작가가 있고, 이런 뒤집기를 감행하는 레베카가 있다니.

 

  <레베카>는 명품이고, 추리 소설의 교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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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7-16 09: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리뷰를 읽고 레베카를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책은 충분히 재독할 가치가 있으니까요. 아하하하하하하.
저는 레베카 읽고서 와, 이게 바로 소설이지 이게 바로 소설이야! 했었어요. 사실 초반에 화자가 등장할 때 뭐랄까..약간.. 어쩌라는건가..의 마인드로 읽었었거든요. 저 역시 읽다가 뒤통수 맞았었습니다. 크-

Falstaff 2021-07-16 09:20   좋아요 3 | URL
그러니까 독후감을 좀 괜찮게 썼다는 말씀이지요? ㅋㅎㅎㅎㅎㅎ
진짜 재미있는 추리소설입니다. 이 장르가 말이 쉽지 제대로 쓰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와, 정말 오랜만에 읽은 대박 추리소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거의 다락방 님의 강권 비슷한 추천으로 골랐다고 하더라고요. ㅋㅋㅋ

잠자냥 2021-07-16 09:59   좋아요 3 | URL
우리 주정뱅이 폴스타프 님 그 전에 <브라이턴 록> 읽으셔서 이 작품이 더 좋았던 게 아닐깝쇼?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7-16 10:02   좋아요 2 | URL
아하, 그럴 수도 있겠네요.
상대적으로 기대치가 낮아져서 더 빠져버렸나? ㅎㅎㅎㅎ

잠자냥 2021-07-16 10: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진짜 마지막에 레베카의 그 광기어린 조롱! 카타르시스 대박입니다. 아, 악녀(?)인데도 너무나 멋진 베카언니! 꺄오~~~~

Falstaff 2021-07-16 10:18   좋아요 4 | URL
아이고, 저도 드윈터와 함께 거품 물고 자빠졌다니까요!
진짜 대박입니다. 세상에나....
실생활에선 베카 언냐하고 (격이 딸려서) 함께 못 사는 게 행복이란 걸 알았습니다!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7-16 13:55   좋아요 4 | URL
아 저 이 책 읽었는데...마지막 레베카 그 광기어린 조롱이 뭔지 모르겠어요. 아 궁금해서 도서관 들렸다 가야겠습니다.

Falstaff 2021-07-16 14:09   좋아요 4 | URL
쿨캣님 / 그거 있잖아요. 아, 입이 근질근질해서 참...

다락방 2021-07-16 17:16   좋아요 4 | URL
쿨캣님 저도 광기어린 조롱이 뭐였지? 싶어서 다시 읽어야겠어요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7-16 20:05   좋아요 4 | URL
도서관가서 후반부 읽고 집에 들어왔습니다 ㅋㅋ
ㅋㅋ 그걸 광기조롱이라 하신거군요! 아 후련해요. 다락방님도 얼른 읽어보셔요. 아마 아시는 내용일텐데 단어 연결이 안되는걸거에요~😚

Falstaff 2021-07-16 20:53   좋아요 3 | URL
아, 우리의 쿨캣 님은 드디어 주화입마에 빠지셨습니다.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금요일이잖아요. 근데 금욜 오후에 하고 많는 좋은 데 다 놔두고 도서관 가서 ‘광기어린 조소‘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여러부우우운!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7-16 22:02   좋아요 3 | URL
책이 어찌나 너덜너덜 하던지요 ㅋㅋㅋㅋ 4년전 읽은 책이라 다시 읽으니 또 새롭더라구요~~주말 즐겁게 보내시고, 술도 맛나게 드세요~^^

독서괭 2021-07-16 13: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레베카>를 뮤지컬로 먼저 접했는데요. 원작소설도 재미있더라구요. 뮤지컬이 원작의 분위기를 잘 살린 것 같습니다. 아 뮤지컬 보러 가고 싶다..(뜬금)

Falstaff 2021-07-16 13:34   좋아요 2 | URL
근데요, 옥주현이 레베카가 아니라면서요? ㅋㅋㅋㅋㅋ (농담입니다.)

전 뮤지컬 못봤습니다. 갑자기 등장한 관크 박멸운동도 마땅하지 않고요. 어느 날 갑자기 관객 엄숙주의가 몰아쳐 공연 보는 데 정나미가 좀 떨어졌습니다. -_-;;

coolcat329 2021-07-16 13: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별5 참 재밌게 읽었지만 이렇게 극찬을 하시니 당황스럽네요 ㅋ 다시 읽어야하나... 싶어요. 위에 다락방님처럼요...ㅋ

Falstaff 2021-07-16 14:10   좋아요 5 | URL
그래서 이런 추리소설, 그리고 스포일 극단혐 작품의 경우엔 따로 다 읽은 사람들의 이야기방이 있어야 한다니까요!!! ㅋㅋ

새파랑 2021-07-16 15: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로써 레베카 vs 레이첼의 대결은 레베카가 이긴 거네요~!!

Falstaff 2021-07-16 15:56   좋아요 4 | URL
옙. 제 경기장에선 베카 언냐가 1승.
하지만 다락방님의 링에선 이첼 언냐가 1승.
아직까지는 1:1 동점입니다. ㅋㅋㅋㅋㅋ

붕붕툐툐 2021-07-16 20: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방학에 읽을 책을 더이상 늘리면 안되는데! 명품, 교과서란 말에 혹하지 않을 수가 없네용!!

Falstaff 2021-07-16 20:46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결론은 제가 책임지지 않는 거, 잘 아시지요? 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7-19 08: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읽었어요!!!! 아, 정말 재미있어요!!!

Falstaff 2021-07-19 08:59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이런 댓글이 참 좋습니다. 기분도 좋고, 어깨도 으쓱으쓱하고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