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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ㅣ 창비시선 357
함민복 지음 / 창비 / 2013년 2월
평점 :
며칠 전에 어쩌다가 함민복의 시집을 두 권이나 샀다고 했다. 원래 계획은 한 권 사서 읽어보고 좋으면 더 사 읽으려고 했는데, 한 권 사고 시간이 지나 벌써 함민복 한 권이 책꽂이 읽을 책 칸에 꽂혀있는 걸 깜박 하는 바람에 다른 시집을 더 산 거다. 인생이지 뭐.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에 관해서는 할 말 다 해 보탤 건 없지만,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과 연관해서 몇 마디 하면, 이제 쉰두 살이 된 시인이 아직도 여전히 강화도에 살고 있다는 거, 실제는 모르지만 하여튼 시 속에선 장가든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 그리고 이젠 어머니의 품속에서 (완전히는 아니지만)거의 떠났다는 거.
이 시집의 초판 간행이 2013년. 이명박 씨가 2013년 2월 24일 자정부로 대통령 직의 만기를 채웠으니, 시집 속의 시는 반은 이명박의 전봇대 정부 시절에 쓴 거겠다. 그리하여 노무현 씨의 자살, 이명박 씨의 4대강 사업 또는 대운하, 후쿠시마 원전 사고, 구제역 돼지 생매장 등 실제 상황이 드디어 등장을 한다. 물론 함민복은 진보 진영 쪽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고, 난데없이 <방울>에서 1970년에 죽은 전태일과 무려 24년 후에 생을 마감한 시인 김남주, 2010년에 세상을 뜬 (내가 존경해마지않는)리영희, 2011년의 김근태를 소환하기에 이르는데, 좀 생뚱맞다. 이들을 한데 묶어 “사람 길 지키려 치열했던 방울들 / 작아 큰 울림”을 냈다고 노래한다. 어찌 네 명 뿐일까. 이 사람들에게 ‘작아 큰 울림’을 냈다고 하는 건 물론 시인 마음이지만 글쎄 우리 현대사에서 이들은 ‘크고 커서 큰 울림’을 내지 않았을까? 물론 시적 표현이라면 할 말 없지만. 이왕 이런 이야기 나왔으니까 하는 얘긴데 이젠 더 이상 이미 죽은 네 명 같은 희생자 또는 자연사한 선각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상을, 어느 시인이 있어 노래해줄까. 희생자나 선각자들을 요구하지 않는 세상이 그리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누가 선언할 수 있을지 못내 궁금하다.
이외에 이제 농촌을 무대로 한 시들과, 살고 있는 강화군 화도면 동막리 161번지 양철집 근방의, 바다와 뻘을 포함한 자연을 그린 시들이 많이 등장한다. 시는 연애와 비슷하다.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과 연애할 확률이 높은 것처럼, 가까운 곳을 노래하는 것이 편하니까 이런 모습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특히 시에 관해선 완전 초보인 내가 생각하기에, 함민복이 보다 실제 삶의 시에 천착을 했더라도 섣부른 참여시보다 좋았을 것 같지만, 시인이 시를 쓰는 소재나 제재를 선택하는 건 전적으로 시인 마음대로이니 불만은 없다. 뭐 다행이긴 하다. 한 나라의 전직 대통령한테 대학교수이자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동화작가이자, 삼국지 번역자이자, 교과서 편찬위원인 박상률처럼 ‘쥐박이’니 뭐니 하지 않아서. 하긴 함민복이 일단 시만 보자면 박 씨처럼 몰상식하게 거친 말을 함부로 입에 담을 인격이 전혀 아니긴 하다.
그러나, 시집이 나온 2013년, 함민복처럼 시를 쓰는 것이 얼마나 효용이 있을 것인지에 관해 나는 회의having doubt했다. 그냥 예를 들기 위해 두 번째 실린 시 <달>의 전문을 인용해보자.
보름달 보면 맘 금세 둥그러지고
그믐달에 상담하면 움푹 비워진다
달은
마음의 숫돌
모난 맘
환하고 서럽게 다스려주는
달
그림자 내가 만난
서정성이 가장 짙은 거울 (전문)
읽는 순간 그림이 딱 그려진다. 착한 시. 시인 스스로가 말하듯 서정성이 깊은 시를 21세기에도 쓰는 것이 과연 필요하고 바람직할까. 이런 시들이 몇 편 연속적으로 주로 1부에 등장한다. 그래 시들을 읽다가 처음엔 과연 효용이 있나, 의심했고, 이어서 조금씩 마음이 바뀌어, 누군가가 소위 ‘착한 서정시’를 그래도 이어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라고 결정했다.
이런 시를 몇 편 읽다가 갑자기 <동막리 161번지 양철집>이란 시가 눈에 보인다. 모르긴 몰라도 시인 자신의 집 아니었을까. 번지수까지는 몰라도 시인이 사는 곳이 동막리니까, 그렇게 유추했고, 저 앞에서도 그냥 시인이 이 집에서 산다고 한 번 해본 것인데, 또 아니면 어때, 일개 서생의 잡스런 독후감일 뿐이니. 하여간 이 시에 재미난 장면이 나온다. 바다가 보이는 집에 사내가 개를 한 마리 키우면서 산다. 사내가 먹는 것이 개가 먹는 것하고 같지만 단지 먹는 때와 장소가 다를 뿐이다. 어느 날, 시인은 전화를 받고 외출을 하면서 개 목줄을 풀어주고, 집 잘 보고 있어, 타이른 다음 몇 날을 지내고 왔다. 그랬더니 문득 드는 생각.
전화기 속 세상을 떠돌다 온 사내가 놀란다
기다림에 지친 개가 제 밥을 놓아
새를 기르고 있는 게 아닌가
이제
바다가 보이는 그 집의 주인은 사내가 아니다 (부분)
이것 역시 그림이 딱 그려지는 편안한 시. 아마 서울이겠지. 하여간 외출을 해서 며칠 만에 집에 와보니 개밥그릇, 흠. ‘개밥그릇’은 고등학교 시절 영어선생 별명이라 함부로 쓰기 좀 캥기는 바지만, 하여간 개밥그릇에 남은 밥알을 먹기 위해 새들이 모여 있었나보다. 그걸 시인이 보니까, 하긴 그래서 시인이겠지만, 개가 제 밥으로 새를 기르고 있다고, 그래서 진짜 집주인은 시인이 아니라 개라고 한다. 재미있는 시다.
기본적으로 함민복의 시는 ‘가난의 시’ 범주에 든다고 한다. 어디서 읽었더라. 시집의 해설인가, 아니면 인터넷 서핑 중에 읽었나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 돈이 뭔가. 숫자. 지갑과 호주머니를 채우는 지폐뭉치가 아니라 통장에 기입되어 있는 숫자. 그럼 지구의 무게는? 그것도 숫자? 여기 한 저울이 있어 감히 지구의 무게를 재고 있는 게 있다. 정말로 있다. 재미있는 역설. 일부를 인용하며 독후감을 끝낸다.
앉은뱅이저울
물고기 잡는 집에서 버려진 저울 하나를 얻어왔다
저울도 자신의 무게를 달아보고 싶지 않았을까
양 옆구리 삭은 저울을 조심 뒤집는다
삼 점 칠 킬로그램
무한천공 우주의 무게는
0이더니
거뜬히 저울판에 지구를 담은
네 무게가 지구의 무게냐
배짱 크다
지구에 대한 이해 담백하다
몸집 커 토막 낸 물고기 달 때보다
한 마을 바지락들 단체로 달릴 때 더 서러웠더냐
목숨의 증발 비린내의 처소
검사필증, 정밀계기, 딱지 붙은 기계밀정아
생명을 파는 자와 사는 자
시선의 무게에서도 비린내가 계량되더냐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