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난일기 - 서구와 인디언 문명의 충격적 만남 서양문학의 향기 4
카베사 데 바카 지음, 송상기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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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이 재미나다. 카베사 데 바카. 설마 내가 스페인 말을 아는 건 아니고, 책 뒤편 역자 해설에 써 있기를 '카베사 데 바카'를 우리 말로 하면 '암소 대가리'란다. 그게 성姓이다. 문득 생각나는 서양신화. 일찌기 크레타의 미노스 왕의 왕비로 미노스와의 사이에 아리아드네, 데우칼리온 등을 낳은 정숙했던 왕비 파시파에. 엉뚱하게 남편 미노스가 포세이돈한테 괘씸죄에 걸리는 바람에 황소한테 홀랑 반해 가짜 암소 탈을 쓰고 그 속에 들어가 황소와 교접해 황소대가리를 한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았으니 여기서 바로 암소 탈의 대가리를 일컫는 거랑 어째 좀 비슷한데, 알겠습니다. 억지로 얘기 만들지 않고 (오늘 낮술 한 병 하려 휴가 냈거든요)주방에 가서 냉수 한 사발 마시고 정신 차리겠습니다.


 이거, 이를테면 지리학적 보고다. 작가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가 16세기 초반, 조선에선 중종반정에 성공해서 바야흐로 신권정치가 판을 치기 시작해 백성들에 대한 무한수탈이 시작되고 정부에선 그깟 백성은 전혀 관심없이 정쟁에만 온 정력을 기울이기 시작하던 무렵, 스페인의 탐험가들은 그리 크지도 않은 배에 귀족과 군인과 수도사와 상인과 공증인과 학자와 말horse을 태우고 화승총과 대포로 무장한 채 본격적인 아메리카 수탈에 나서기 시작했다. 물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찾아서가 아니라 금과 보석이 넘쳐나는 엘도라도를 찾기 위해.

 1527년 6월 17일, 스페인의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 제독 역시 스페인 왕의 명령을 받들어 당시의 지명으로 플로리다, 지금의 플로리다부터 태평양에 이르는 미국 남부와 멕시코 전역을 "정복하고 통치하기 위하여" "배 다섯 척과 6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나갔다." (5쪽)

 쉽게 얘기해서 본격적인 대항해와 식민지 개척 시대가 열리는 과정이다. 대서양엔 프랑스 해적, 영국해적, 이탈리아 해적, 그리스 해적, 선장 잭 스패로우가 이끄는 이름도 떠르르한 캐러비안의 해적 등이 드글거렸고, 해적들은 쨉도 아니게 만들 위대한 자연의 심통, 겨울 폭풍까지 아 대항해의 곤고함도 그리 가비얍지만은 아니했던 거디다. 이렇게 곤고한 항해로 수탈 당하고, 거덜이 나고, 숱하게 죽어나간 채 아메리카에 도착했으니 어느 정도는 눈깔에 뵈는 것도 없긴 했을 건데, 하이고, 기독교인을 자청한 이들이 아메리카에 발을 딛고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원주민들에게 강요했던 건 예수를 믿으라는 거하고, 금과 보석을 찾는데 무료로 노동력을 제공하라는 강요,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금과 보석에 대한 무자비한 수탈과 이에 수반한 학살, 거기다가 자비롭게도 드런 세상 조금이라도 빨리 하직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유럽형 전염병을 선물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원주민들은 이 책에서도 나오듯이 산으로 산으로 또 산으로 그들의 삶의 터를 옮기고 산 꼭대기에서 위대한 건축물 피라미드와 마추픽추를 건설했던 거 아니냐.


 이 책은 그런데 스페인의 만행보다도, 그 가운데 책의 제목과 같이 아메리카 원시림 속에서 조난 당한 사람들의 일기를 쓰고 있다. 위에서 말한 600여 명의 정복자 또는 정복하려고 했던 이들 가운데 겨우 세 명이 살아남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 책을 쓴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다. 그를 비롯한 생존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노예로 생활하다가 병들어 죽어가는 원주민 이마빡에다 기독교식 성호를 그어주게 되고, 성호를 긋자마자 병자의 병이 금새 낫는 관계로 졸지에 주술사로 고속 승진도 하고, 입을 것이 없어 홀라당 벗고 다니기도 하고, 죽은 백인 동료들의 고기를 육포로 만들어 주린 배를 채워가며 꾸역꾸역 6년이던가 7년이던가를 아메리카 원시림 속에서 버텨낸다. 그러다가 어떻게 하염없이 가다보니까 어? 태평양 연안까지 걸었고 거기엔 정말 전형적이고 규범적인 스페인 식민주의자, 즉 살인마 기독교도들가 득시글해서 그들에게 구조되어 다시 겨울 폭풍과 해적들의 위협을 뚫고 스페인으로 귀향하는 거까지.

 읽을 만하시겠지? 근데, 물론 읽을 만하고 재밌기도 한데 전적으로 내 취향으론, 알고는 안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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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2-22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낮술 한 병 잘 하셨습니까? 낮술 마시면서 책 읽는 기분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Falstaff 2017-02-22 10:45   좋아요 0 | URL
술은 독서의 가장 큰 적입니다. 낮술 마시면 일단 자빠져 한숨 자고, 기어일어나 해장국 한 그릇 하고, 얼떨떨한 상태로 좀 있다가, 해가 뉘엿뉘엿 지면 그때서야 책읽기가 가능하지요. ㅋㅋㅋ
올해 200병 프로젝트는 아직까진 잘 진행하고 있습죠. 다 덕분입니다. ㅎㅎㅎ
 
오레스테이아 3부작 을유세계문학전집 77
아이스킬로스 지음, 김기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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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던 작품이다. 서양 소설을 읽어보면 물론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아이네이스> 만큼은 아니지만 이 책의 세 작품에 진정한 주인공인 오레스테스의 친모살해와 저주받은 방랑에 관해 무지하게 많이 나온다. 그러니 언젠가 이 책을 읽어보게 예정되어 있었다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책은 세 희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 난 그리스 비극에 대하여, 역사적인 위대성과 뭐 비슷한 기타등등에 대해 언급할 재주도 없거니와 관심도 별로 없어서, 언제나 그렇듯이 감상만 적을 뿐이다.

 <아가멤논>은 타이틀 롤 아가멤논이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에서 아르고스로 개선해서 죽을 때까지. 그가 왜 죽었느냐, 하는 점이 두고두고 호사가들에게 얘깃거리를 만든다. 트로이로 전함을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바람이 하나도 불지 않아 배가 항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예언에 따라 자신의 큰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하고 출정해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로 하여금 불타는 증오, 죽음이 아니면 끌 수 없는 증오의 불길에 휩싸여 살해하게 되었는가, 사촌 아이기스토스의 입장으로 보면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가 자신의 아버지 티에스테스한테 티에스테스의 아들을 죽여 그 고기를 먹게한 복수로 아가멤논을 죽게 했는가, 그리고 20세기 후고 폰 호프만스탈의 시각으로 보면 골치 아프게 딸이나 아버지 또는 형제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아가멤논이 10년 동안 전장에 나가 수십명의 현지처들과 진탕 즐기고 있는 사이에 독수공방을 지키던 클뤼타이메네스트라가 하고한날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르며 견디다가, 견디다가, 견뎌내다가 도무지 참을 수 없어 사촌 시동생 아이기스토스와 붙어먹었는데 재수없게 아가멤논이 죽지 않고 살아서, 그것도 전리품으로 트로이의 미녀 예언자 카산드라를 데리고 귀향을 하니 아이기스토스와의 불붙었던 밤을 잊지 못해 그냥 도끼로 까버렸는가, 하는 것들. 참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거리지만 그거 뭐 아름답지도 아니하고, 아름다기는커녕 잔혹무비한 누아르 작품을 그리도 여러 사람들이, 그렇게도 오랜 세월 동안 이러니저러니 숱한 이바구를 풀어낸 건, 바로 <아가멤논>에 이은 두번째 작품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혜성같이 등장하는 오레스테스가 아버지를 죽인 자신의 생모 클뤼타이메네스트라의 머리통을 똑같은 방법으로, 즉 도끼로 까버리기 때문이리라.

 하여간 참 잡것들이다. 이 비극의 내용을 전부 믿는다면, 자신의 아버지한테 아들의 고기국을 먹인 잔인무도한 행위를 복수하기 위해 흉악무도한 짓을 한 아트레우스의 큰아들 아가멤논을 척살한 아이기스토스한테만 동의할 수 있겠다. 동양에서도 은나라 주왕이 희창의 맏아들 백읍고를 죽여 고기를 푹푹 삶아 몸에 좋은 곰탕이라고 희창한테 줬는데 희창은 그게 백읍고의 고기로 만든 걸 알면서도 궁을 향해 절을 두번 한 다음에 말끔히 다 먹고 나중에 힘을 길러 은 주왕을 불태워 죽여 은을 멸하고 주나라를 세워 주 문왕이 된 적이 있으니 충분히 동의할 만하지 않겠는가. 근데 천만의 말씀. 자기 배 아파 딸을 낳고 근 이십년 동안 금이야 옥이야 귀하고 귀하게 키워 절세의 미녀에다가 심성 고운 천하의 재원을 만들어놨더니 바람이 안 불어 배가 뜨지 않는다고 그걸 죽여? 조금만 더 기다리면 어디가 덧나? 하긴 클뤼타이메네스트라의 심사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근데 왜 아가멤논 없는 사이에 둘이 붙었을까? 복수에 활활타는 두 남녀가 의기투합하다보니 몸도 투합한 걸까? 그렇겠지 뭐. 그거 말고는 정당한 사유가 없다. 정말? 아니지, 아냐. 이미 남녀지합의 '즐거움을 아는 몸'들이, 이 표현을 어디서 가져온 건지는 다들 아시겠고, 하여간 나이 먹어 이제 즐거움을 아는 몸들이 오직 딱 그거 하나, 즐거움을 위하여 같은 침상을 썼다고 해도 그게 뭐, 조금 그렇지만 이상한 건 아니다.

 아하, 그래서 수백년 동안 이야기 거리가 되겠구나.

 근데 내가 실망한 것이, 마지막 작품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오레스테스의 저주가 넘 황당하게 풀린다는 거. 하긴 21세기 독자가 그렇게 생각할 뿐이지 서기 전 5세기 사람이 읽고 연극을 보기엔 심금을 울리는 대단한 설명일 수도 있으리라.

 솔직한 평. 위대한 작품이지만 소포클레스보단 재미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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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
그웨나엘 오브리 지음, 임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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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출판사 열린책들이 좀 웃긴 건, 저번 다니 라피에리에르가 쓴 <남쪽에서>도 그렇고 이 <페르소나>도 그렇고, 충분히 읽어볼 만한 수준을 넘어서 내 수준으로 판단하길, 좋은 책들을 아주 빠른 시간 안에 절판시키는 점. 왜 그러게? 회전율을 빠르게 가져가기 위해서다. 일정 기간에 자기들 생각보다 잘 팔리지 않는 책들은 빨리빨리 단종시키고 대신 다른 책들을 줄지어 찍어내는 거다. 그러다 대박상품 하나 건지면 장땡. 장땡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이익을 만들어줄 책이 아니면 두번 생각할 필요없이 얼른 잘라버린다. 회사 경영을 위해선 대단히 잘 하는 짓이지만, 그러려면 차라리 라면장사를 하든지 하다못해 빤스 장사를 하지 왜 하필이면 책장사를 해서 잘 팔리지는 않지만 좋은 책들을 조져버리는지 참. 원작을 찍은 출판사와 일정 기간 계약을 해 다른 출판사에서라도 다시 찍을 수 있는 방법까지 원천 말살하고 말이지. 하여간 열린책들 사장을 비롯해 경영진들이 장사 하나는 잘 한다고 인정할 수밖엔 없다. 근데 대개 이런 회사들이 직원들 봉급은 존나 짜게 줘요. 혹시 이 글 보시는 열린책들 전직 현직 직원 있으시면 내 말 맞는지 틀리는지 과감하게 답글 바람.

 서양 사람들의 가족관계, 특히 다 자라서 성인이 되어 출가한 자식들과 부모의 관계는 우리나라와 달라 어떻게 보면 참 바람직하기도 하고, 여러 면에선 정말 야박하기도 하고 그런데, 우리말로 <가면>이란 의미의 제목 <페르소나>에서 등장하는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그나마 우리 정서하고 좀 맞는 면이 있다. 무슨 면이냐 하면, 늙은 아버지가 돈도 없으면 참 큰 짐이란 거. 귀찮고 가끔가다가는 피곤하지만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못하고 내 가족들하고도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데다가 거의 언제나 남들이 내 부모에 대해 알까봐 좀 캥기는 거까지.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이런 아버지가 정신착란에다가 알콜 의존증, 만성 우울증에라도 걸려 있어 신경정신과 병동에 줄창 입원해 있고, 퇴원하더라도 언제 어디서 다시 발병할지 아무도 모른다면, 아무리 날 낳아준 아버지라도, 장독대에 정한수 한 사발 받아놓고 신령님 산신님 동해바다 용왕님, 불쌍한 우리 아빠 어서빨리 그저 편안하게 세상 하직하게 해주십소사, 치성이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 한 번이라도 없었을까. 그런 심정 모른다고? 그럼 당신은 세상 행복하게 살았다.

 이런 부녀 이야기. 엄마는 정신 이상 아버지한테 학을 질려 일찌감치 도망가고, 뒤 이은 레지에로 소프라노 가수 출신 새엄마는 넘쳐 흐르던 아빠 재산 몽땅 챙겨 이혼해버리고, 아빠의 정신이상과 알콜 의존증, 우울증, 이상행동이 너무너무 참을 수 없던 손위 고모들은 아예 인연을 끊어버리고, 유일하게 아빠를 돌보던 할아버지 역시 순리에 순응하느라 일찌감치 숟가락 놔버린 상태, 그래도 세월은 흘러흘러 '난' 결혼을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십대에 도달한 딸아이 하나를 둔 엄마가 되고, 아버진 가난과 고독과 우울로 노트와 종이조각과 호텔의 메모지 등에 빽빽하게 글을 써놓고 죽음이란 축복을 받는다.

 이게 인생. 그럼 얘긴 끝나지만, 오브리는, 1980년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카라오케를 '오부리'라고 칭하기도 했는데 여기선 그 오부리가 아니라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오브리는 위에 써놓은 한심하기도 하고 그냥 살아가는 얘기기도 하지만, 한심하게 살아가는 대부분 인간들의 삶이 그렇듯 가슴 찡하게, 소리굽쇠를 울렸을 때 귀청을 통해 심장까지 함께 떨게 하는 그런 류의 공감을 특별한 강조점도 없이 그저, 얘기한다.

 좋은 소설. 하지만 이젠 커피도 파는 중고책방에 가야, 그것도 운이 좋아야 구할 수 있다는 점이 아쉽다. 열린책들, 먹고 살 만하면 절판 결정 좀 쉽게 하지 마라, 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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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chmann 2020-03-29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마다 상황이 다르니 일반화할 수 없지만 보통 해외책은 국내에 5-8년 단위로 저작권 계약됩니다. 어느 정도 팔린 책이라면 다시 계약금내고 재계약하지만 충분히 팔리지 않은 책은 재계약하면서 다시 재계약금 내기가 쉽지 않죠. 그런 책은 그냥 안팔리는 책이라도 한번이라도 내준 것이 고마와야 하는 책이죠. 무조건!!! 쓰신 글 보니 2017년에 이미 절판되었는데 오늘 커피도 파는 중고서점에서 저는 지금이라도 뒤늦게 한 권 구했네요. 여전히 4부나 꽂혀있는데 모두 사용흔적 없는 새 책들을 더 이상 정상 판매할 수 없으니 땡처리한 듯.

Falstaff 2020-03-29 18:37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저는 책 내는 회사 사정은 전혀 모르는 그냥 독자거든요.
그런 애로가 있었군요. 고맙습니다. .... 그래도 좋은 책은 돈이 좀 안 벌리더라도 어떻게.... 그냥 꿈 한 번 꿨습니다. 하하하....
 
아우스터리츠 을유세계문학전집 19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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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0년 나폴레옹은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해 마렝고 전투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푸치니 작 <토스카> 2막에서 철없는 카바라도시가 공국의 늑대 스카르피아 앞에서 목청껏 불렀던 Vittoria! Vittoria! 바로 그 장면), 이어서 1805년 이번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아우스터리츠에서 묵사발을 만들어 버리며, 1809년에도 다시 바그람에 가서 오스트리아를 깨박내고 말아 이를 대개 나폴레옹 3대 승전이라 칭한다. 난 제목만 보고 나폴레옹이 2대 1로 싸워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쌍코피나게 했던 전투가 벌어진 지역, 아우스터리츠를 생각했다. 글을 쓴 사람이 전에 읽은 <토성의 고리>의 작가 W G 제발트, <토성....>이 하도 기막힌 기행문으로 만든 소설이라 이번엔 제발트가 아우스터리츠 지역을 산보, 도보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낀 걸 써놓았겠다 싶었다. 그럴 수 있겠지? 근데 아니다. 사람 이름이다. 사람 이름이 아우스터리츠라면 참 희한하긴 희한한 이름이다. 유대인이란다.

 <토성....>을 읽을 때까지, 난 작가 배수아가 쓴 제발트 이야기를 떠들어보며 스스로 제발터리안이라고 칭하는 신인류들이 많다는 얘기를 보고,나, 말러리안, 바그네리안 비슷한 종의 인간들이겠지, 코웃음치고 그랬는데, 이번에 아주 제대로 화들짝 놀라, 이래서 제발트, 제발트 하는 모양이구나, 실감을 했다.

 

(출처 : 구글 검색하다 젤 맘에 든 거)


 보시라. 제발트인데 왼쪽 눈꼬리는 아래로 쳐졌으면서 왼쪽 입매는 위로 솟아있는 모습이 뇌졸중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체적으로 잘 생긴 외모에 지적이고 생각 자체도 고매하고 조금은 고리타분한, 그래서 곁에서 보기에 좋거나 옆집 이웃으로 살기에도 좋지만 같이 살려면 골치 깨나 아플 그럴 인종으로 보이며, <아우스터리츠>를 쓰기에 아주 적절한 모습이다. 내가 젤 싫어하는 게 외모를 보고 사람 판단하는 건데, 이렇게, 하이고, 여기서 '이렇게' 다음에 '잘 쓴'이라고 이어가고 싶지만 이런 대단한 텍스트에 나같은 시중잡배에다가 아마추어 독자가 잘 썼네 아니네 왈가왈부하기가 애초에 송구스러울 정도의 글을 만든 사람은 얼굴도 한 번 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 맞지? 그래서 사진 한 번 올려봤다. 내가 제발트 실물 사진을 본 소감은, 책이 좋으니 아무 이유 없이 사람도 존경스러 보인다.

 내가 지금 터무니 없이 한 인간과 작품을 과장하고 있는 게 아니다. 21세기에도 이렇게 글을 쓰는 작가가 있으며, 깊은 사색이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한 가지 이유로 21세기 역시 살 만하다.

 난 좋은 책일수록 책의 내용이나 기타 여러가지를 이야기하지 않는데, 이 책에 관한 독후감을 쓰면서 여태까지 내가 얘기한 것이라곤 제발트 찬가 말고는 하나도 없다. 책에 관심이 있는 분, 주저하지 마시고 이 책을 선택하시라. 감동은 작가와 독자의 코드가 맞아야 하는 일. 그래서 당연하게 당신의 감동까지 내가 책임지지는 않는다.

 나? 난 저 영감한테, 취.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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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2-10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전 요즘 제발트 <공중전과 문학> 읽고 있어요. ㅎㅎ 이 책은 아직 안 읽어봤는데 다음에 읽어봐야겠습니다.

Falstaff 2017-02-10 09:47   좋아요 0 | URL
옙, 잠자냥 님도 좋아하실 거라 믿습니다. ㅎㅎㅎ

아수라 2017-02-17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토성의 고리는 읽어봤고 아우스터리츠는 안 봤는데요. 지금 당장 딱 한가지를 선택하려고 하거든요^^;
아우스터리츠를 살까요. 호랑이들이 제 세상인 나라를 살까요? 호랑이 리뷰도 맘에 들어서 눈여겨 두고 있거든요^^

Falstaff 2017-02-18 08:39   좋아요 0 | URL
헉!
ㅋㅋ 대단히 곤란한 질문인데요, <호랑이...>는 스토리 <아우스터리츠>는 뭐 거시기, 이렇게 둘이 완전히 다르거든요. 아.... 고민고민.
그리고 <호랑이...>는 오프라인에서 재정가 도서로 가격이 다시 책정, 상하 두권에 10,800 원 주고 새책 사셨다는 분의 쪽지 받고, 심장병 도지는 줄 알았습니다.
한 권 추천이면 <아우스터리츠>인데요, 오프라인에서 재정가 도서 발견하시면 그것도 주저하지 마세요. ㅎㅎㅎㅎ
 
슬픈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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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참 잘 읽은 연애소설. 역시 소설의 기본은 연애소설이고, 연애소설 가운데서도 제일 매력이 있는 건 불륜이다. 아, 고정들 하셔. 난 불륜을 저질러본 적도 없고 앞으로는 신체기능 상 매우 어렵겠지만(물론 약물의 도움을 받는다면야!), 아니 오히려 그래서 그런가 아무것도 모르는 처녀 총각들이 사랑인지 육체적 갈망인지 가늠하기 힘든 충동 때문에 야밤에 담 넘고 테라스까지 기어올라 온갖 환상적인 싯구를 읊는 것보다 세상살이 왠만큼 아는 지긋한 것들끼리 어떻게 지펴놓은 은근한 군불이 어느새 활활 타올라 뒤늦은 사랑 말고는 나머지 몽땅 다 태워버리는, 노래가사 말마따나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대마소, 그런 불륜 얘기가 맘에 든다.

 모니카 마론. 그의 책은 당연히 처음 읽는 것이고 이름마저 처음 들었다. 그러나 <슬픈 짐승>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이거 말고 그의 책 중 2017년 2월 현재 발매하고 있는 유일한 다른 책 <올가의 장례식날 생긴 일>을 보관함에 담아놨고 올해 10월 정도에 읽을 거 같다. 물론 내가 잘 읽은 건 역자 김미선의 유려한 한국어 문장의 덕도 크겠지만 마론이 그려내는 사랑과 삶의 스펙트럼이 내 혼을 완전히 빼놨다.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젊었을 때는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시작하는 <슬픈 짐승>. 첫 문장을 읽을 땐, 하이고 타령 하네! 더이상 상투적일 수 없는 유치한 작품일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었다는 걸 고백하고, 지금부터 차근차근 내가 <슬픈 짐승>에 빠져들었던 이유에 대하여 얘기해보겠다.....까지 썼는데, 완전 아마추어 독자가 책에 빠진 이유를 밝히는 것이 대한민국의 문화창달과 시민복지에 이바지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그냥 감상만 적어보기로 한다. 역시 사람은 제 주제를 잘 알아야 하는 거니까.

 위 문단에서 첫 문장을 써놓았지만, 바로 이어지는 것이 현재 자신은 젊었을 때의 생각과는 달리 죽지 못하고 지금 백살이며 아직도 살아 있고 어쩌면 아흔 살일 수도 있는데 아마 백살이 맞을 거라고 하면서 누군가로부터 받는 약간의 연금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다는 걸 밝힌다. 내가 원래 눈치없는 아마추어 독자라서 이런 정보를 접수하자마자 주인공 '나'는 빼도박도 않고 나이가 최하 90살이라고 확정한 상태에서 글을 읽기 시작했다. 이 작품의 처음 간행 연도가 1996년. 그럼 '나'는 적어도 1906년 이전에 태어난 여자다. 맞지? 처음엔 불륜에 관한 소설이라며 왜 나이 같은 걸로 변죽을 울리느냐 하면, 사실 이건 변죽이 아니라 심각한 진실을 이야기한 것인데, 인간 혹은 작가 혹은 책의 주인공 '나'의 경우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 "사랑"이 들어올 수 없는 상태, 또는 치명적인 사랑이 나로부터 떠나버린 상태를, 살고는 있으되 살고 있지 않은 구십세나 백세의 노인이라 칭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설의 기본에 입각해 주인공은 틀림없이 1906년 이전 태생의 독일 여인이라고 가정하고 책을 읽었으니 앞부분의 매 순간 곳곳에 지뢰밭처럼 두뇌가 펑펑 터지는 거 같은 느낌이 들었을 수밖에. 아, 난 아직 멀었다.

 짧은 소설이라 그나마 좋은 얘기로 '불륜'이고 미국드라마 과학수사대CSI 식으로 얘기하자면 '치정'이 내용이란 거 말고는 스토리에 관해서 더 소개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몇가지 책을 읽는 힌트만 살짝, 힌트래봐야 진짜 노인이 주인공인줄 알았던 아마추어가 내놓는 힌트에 불과하지만 하여간 그런 걸 좀 얘기하자면, 나를 둘러싼 터무니없는 조건 때문에 불가능했던 소망이 정작 가능해지자 그 소망을 이루고싶은 간절함이 사라지는 모습. 스코틀랜드 경계에 로마 황제가 세웠던 하드리아누스 방벽과 독일을 베를린 장벽으로 대신하는 분단상황과 분단 해소 후 사람들 간에 얽히고 설킨 애정관계 인간관계 가족관계 기타등등의 관계, 관계, 관계들. 만일 1970년 쯤에 갑자기 대한민국이 평화통일이 되었다면 남으로 내려와 (북으로 올라가) 새로 혼인을 하여 가족을 이룬 자들 간의 관계, 관계, 관계, 그 혼란함. 이런 것들 다 숙고해봄직하지만(마치 출판사 책소개에 나온 거처럼) 그러나 두 남녀의 불륜에만 촛점을 맞추어 나름대로 아름답지만 끔찍한 연애를 보는 것도 에이그, 짜리리리 하다.

 참고하실 건, 죽여주는 베드 씬 같은 건 나오지도 않는다. 그런 기대 애초 접으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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