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야셴, <조조와 양수>
천야셴이 <삼국지연의>를 쓴 나관중의 귀싸대기를 후려쳤다. 적어도 조조와 양수에 관해서 그렇다는 거다.
아, 천야셴이 누구냐고? 우리말 독음으로 하면 진아선陳亞先. 1948년에 중국 후선성 웨양, 악양에서 출생한 경극 작가이다. 웨양, 하면 우리한테 두보의 <등악양루登岳陽樓>를 연상하게 하는 동정호를 품은 곳이다. 혹자는 노숙과 관우 사이의 기싸움, 물론 <삼국지연의>에선 관우가 월등하지만 하여간 두 명장 간에 기싸움을 벌일 때 노숙의 진영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송나라 시절 명장 중의 명장 악비(岳飛)하고는 관계 없으니 그냥 참고만 하시라. 세 살에 고아가 되고 온갖 고난 속에서 소학교와 중학교까지 마친 후에 창고 안에서 잠을 자는 등의 끝없는 가난 속에서도 스무 살이 넘을 때까지 밤마다 반딧불과 눈의 공을 쌓아 “글로써 나라에 보답할 포부”를 키웠다가 오히려 당국에 체포당해 곤욕을 치루었고, 이때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쓴 장문의 반성문과 탄원서를 본 향촌 간부가 학교 교사 자리를 알선해주어 조금씩 신세가 펴기 시작했다고 역자 해설에 쓰여 있다. 중국은 지방의 작은 도시에도 연극이 생활 깊이 자리를 하고 있어서 천야셴 역시 지방 극단을 통해 극작의 길로 접어들었다가, 1986년에 잡지 《극본》에 의하여 발탁되어 1987년에 <조조와 양수>를 전제 했으며, 이게 1988년에 중국 극작가에게 최고의 영예인 전국 극작가 협의회 최우수 극본상을 받으며 전국구 스타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어서 상하이 경극원에서 같은 해 12월 이 작품을 경극으로 각색해 “역사적인” 초연을 한다.
조조야 새삼스레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당대의 영웅, 위나라 초대 황제 조비의 아버지. 그럼 양수는? 뼈와 뼈 사이에 얇은 막으로만 이어진 닭의 갈비, 즉 계륵의 일화를 낳은 한나라 말기의 벼슬아치다. 그러나 우습게 보지 마시라. 철저한 계급 사회였던 당시에 어쨌거나 한 때는 옥새를 갖고 있기도 했던 원술이 외삼촌이며, 어쩌면 조씨 가문보다, 아니면 조씨 가문만큼 위세가 등등했던 양씨 가문의 수장 양표의 아들로 자를 덕조(德祖)라 했다. 흠. 자가 너무 크다. 무슨 왕 같다. 그것도 새로운 시절을 만든 큰 왕에게나 주는 조상 조(祖)자를 자의 뒷자로 했으니 말이다.
집안도 이리 빵빵한데 머리 또한 총명하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벼슬길에 올랐겠지.
하지만 천야셴은 픽션 작가. 나관중 역시 픽션 작가. 천야셴이 나관중을 답보할 필요는 없다.
곽가라는 인물이 있다. 조조 수하의 난다 긴다 하는 참모 가운데 총애를 받던 출중한 인물로 서기 207년에 죽었다. 죽기 전에 열세가 분명한 원소와의 관도대전에서 큰 역할을 한 바 있어 조조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지만, 아쉽게도 적벽대전을 한 해 앞두고 숟가락 놨다. 적벽대전에서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겠지만 백만 병사를 몰살시키는 참패를 당한 조조는, 곽가가 있었더라면 분명코 전투에 이겼을 것이라고 한탄을 했다고 하는데 뭐 그런가 보다. 그리하여 조조는 한가위인 음력 8월 보름날에 곽가의 산소를 찾아 친히 성묘를 하고 그를 아쉬워하는 장면으로 이 극작은 시작한다. 술 한 잔 올리고 명색이 승상이라 차마 부하 참모에게 절할 수는 없어서 그만 마치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가 다가오니 바로 양수. 이래서 조조와 양수는 둘의 관계가 끝장나기 3년 전에 처음 만나 의기투합 했다고 천야셴은 픽션이란 거짓말을 꾸미기 시작한다.
실제로 양수는 이미 늙어 후계를 지정해야 하는 조조의 심경을 읽고 적장자 둘째 아들 조비(맏이 조앙은 완의 장수를 치러갔다가 습격을 당해 아비의 옷을 입고 조조로 분장해 달아나다가 아비 대신 죽고 만다) 대신 삼남 조식, 후세 사람은 조조, 조비, 조식을 3조라고 칭하며 괜찮은 왕가로 거론하는 거 같은데, 양수는 1조 조의 후계로 2조 비 말고 3조 식을 응원, 후원, 조언, 기타 등등 하다가 처음엔 몰랐지만 2조 비로 1조 조의 마음이 정해지자 언젠가는 손을 봐야할 인물로 꼽힌 듯하다.
게다가 정말로 총명하지만 하는 말이 꼭 뒤끝이 있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참으로 재수없다, 라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희한한 재주가 있었던 것은 확실한 듯하다. 이 부분에서 나는 평소에 우리나라의 잘 나가는 논객 진陳모 씨를 떠올리고는 했다. 그렇다. 양수나 진모씨나 정말 반성해야 할 것이 있었다. 진짜 옳지 않은 건 자기가 돈이 많다고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아는 것이 많다고 교만해지는 것이다. 그들은 이점을 스스로도 모르고 있는(있었던) 거 같다. 이건 내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어디선가 읽고 꼭 출처를 기억해야지, 하고 각오는 했지만 슬그머니 어디서 읽었는지 잊은 내용이다. 진 씨가 하는 얘기 가운데 빠지지 않는 거 가운데 이런 게 있다. 오른손 둘째 손가락으로 자신의 해골을 톡톡 건드리면서 “걔네들은 이게 모자라잖아요.” 양수는 그러지는 않았다. 대신 적어도 <삼국지연의>를 읽어보면 신기하게도 자신의 생사여탈을 가지고 있는 자의 비위를 극도로 상하게 하는 대단한 재주가 있었을 뿐. 그것도 다 지적 교만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천야셴은, 다른 사람의 의견은 몰라도 내가 생각하기에, 픽션 적인 진리를 만들기 위해 조조와의 관계를 악화시키려는 목적으로 매개/촉매 역할을 하는 인물 한 명을 만들었다. 조조의 손에 의하여 참형을 당하는 산둥반도 바로 아래에 위치한 북해의 태수 공융의 아들 공문대. 공문대를 양수의 수하로 만들고 양수가 조조의 병참 참모로 처음 부여받은 목표인 쌀과 병마의 조달을 위해 일하다가 대성공을 거두고 돌아왔으나 비서 공손함의 모함으로 공문대를 직접 베어 죽이게 한다. 정사 <삼국지>는 모르겠고, <삼국지연의>에서 조조 말년에 두통이 심해졌을 때 자다가 환각을 보는 증상이 나타나 칼을 휘둘러 내시 한 명을 죽이는 장면이 있다. 천야셴은 이 일화를 차용해서 조조가 의심해 공문대를 죽이고 이를 변명하려고 몽유 증세로 꾸몄다고 하고, 이에 완벽한 천재로 분한 양수는 그것을 이용해 조조로 하여금 자신의 애첩을 죽이지 않을 수 없게 머리를 쓰는 것으로 연출했다.
어차피 픽션에서 사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양수가 45세에 죽었고, 당시 45세라면 잘 하면 증손까지도 볼 나이라서 자기는 조조의 손에 죽지만 손자는 조씨 왕조인 위나라 이후 전국 통일을 이루는 사마씨의 진나라 서진, 증손은 동진에서 중용되는 등 세세손손 문중의 영광을 이어가지만, 인생무상이라, 서진과 동진, 중국 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왕족과 귀족들의 목숨이 초파리처럼 날아갔던 시절을 만나 그만 동진 시절에 대가 끊어지고 만다. 당연히 조조의 후대인 조씨는 벌써, 벌써 단체로 몰살을 당한 이후다. 세상이 다 그렇지 뭐.
양수와 조조 사이에 한중 땅에서 있었던 닭의 갈비살, 계륵에 관해서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마와 양배추가 들어간 춘천 닭갈비 말고 진짜 뼈와 뼈 사이에 얇은 막 밖에 없는 닭의 갈비에 관한 이야기가 양수를 상징하는 건 나도 알지만 세상에 이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 그래 거기에 관해선 거론하지 않겠다.
희한하게도 단골 알라딘에선 이 책을 판매하지 않는다. 교땡과 응24에선 팔고 있다. 아주 색다른 해석이라 진짜 읽으면 정말 신선하다. 천야셴이 양수를 과하게 띄워준 점은 있지만 그건 작가의 권한이니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말로 번역한 <삼국지>를 무지 많이 읽은 내 입장에서는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근데도 공융의 아들 공문대는 생소한 걸 보니 <삼국지연의>가 장대하긴 장대한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