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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옷의 세계 - 조금 다른 시선, 조금 다른 생활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11월
평점 :
[시옷의 세계].김소연.마음산책.
읽은시기: (2016.1.1~2016.3.14/1회독)
메모작성: 2016년 3월 24일
김소연의 시를 좋아했다. 왜? 냐고 물으면 정확하게 왜라고 답할만한 이야기는 없지만, 김소연의 시를 좋아한다.
<수학자의 아침>과 <눈물이라는 뼈> 두 개의 시집을 귀퉁이를 접어가며 읽었다. 차분히 읽은 날도 있었고, 버스 안에서 읽은 날도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시읽기 모임`에 가져갈 시를 정하느라 급하게 읽어 내려간 적도 있었다.
<시옷의 세계>를 읽기 시작한 것은 어려운 책들 속에서 헤매다가 조금 쉴 수 있는 편한 책을 고른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묵직했고, 그에 따라 읽는 속도는 더뎌졌다. 하루에 한 꼭지씩 읽다가 띄엄띄엄 읽기도 하다가, 마지막에는 어떤 필요에 의해 목적의식적으로 읽게 되었다. 조금은 전투적으로.
그렇게 읽게 된 것은 황인찬의 시집을 읽고, 그가 나온 팟캐스트를 하나 듣고 난 후였다. 나는 아직 `황인찬`이라는 이 시인이 시인들의 세계 안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황인찬의 시를 읽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라는 것을 조금 더 진지하게 대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고(황인찬의 시에 대해서는 이후에 글을 쓸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김소연의 <시옷의 세계>를 읽는 태도도 덩달아 변하게 되었다.
<시옷의 세계>는 시인이 `시옷`으로 시작하는, `시옷`으로 이루어진 단어와 말에 대해 이야기 하는 글의 모음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시의 세계` `시인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글들의 저변에는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흐르고 이다. (때로는) 어떤 확신도 느껴진다.
시인의 상상력이란, 정확하고 과학적인 증표와 징표를 통해 징후를 밝혀내는 논리적 과정이다. 그러니까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표현은 틀린 표현이다. 상상력이 정확하다는 표현이 오히려 더 옳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에 숨겨진 공간들, 그 경계의 영역들 그 이상한 미지의 세계에 대해 느끼는 우리의 모호함을 시인은 상상력의 힘으로 정확하게 호명해낸다. pp. 45~46
독자의 상상과는 조금 다른 `상상력`에 대한 정의를 통해 시인은 시의 역할과 영역을 넓혀 놓지만 그 `인식`을 넘어 시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명확하게 이야기 하지 못한다. 시인 스스로도 그것이 어떤 효용을 가지는지 자신은 없다.
내 시에 눈물이라는 시어가 많아졌다. 그게 타자의 눈물이었다는 건 다행한 일이다. 타인이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나는 울음을 듣는다. 누군가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릴 때, 나는 나의 무용함을 직시한다. 그 눈물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채 방면한다. 위로하지 못한다. 아니, 위로의 무능함에 나 또한 울고 싶어진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시를 쓴다. p.125
하고 싶은 유일한 말을 그래서 시에다 적고는 한다. p108
나는 시의 진실됨에 대해 비관하는 사람에 속한다. 시의 미묘한 나약함에 대해서 어떤 때는 눈물겹고 어떤 때는 지겹고 어떤 때는 그게 진짜 가능성 같지만, 사실은 대체로 그게 참 치욕스럽다. p175
물론 예술 자체가 효용성으로 환원될수는 없다. 그렇다면 시는 무엇을 위해서 쓰여지는 걸까? 시인은 왜 쓰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것은 언어가 숨겨진 공간과 경계의 영역을 드러내고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그 언어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시인의 숙명 혹은 윤리라고 받아 들이는 것이 시인의 태도라고 느껴졌다. 그렇다면 다시 `윤리`라는 건 무엇일까?
사실, 우리 시는 이상과 김수영 이래로 1인칭 자의식의 각축장이었다. 그러나 이 1인칭은 정말로 1인칭인가. `나`라는 개체는 생활 속에서 정말로 실재하는가, `나`와 `나 밖의 것들`이 지닌 유기적인 그물망 속에서 왜소해져가는 1인칭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수많은 `나`들의 집합 속에서 희미해져가는 `나`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p.225
1인칭에 대한 물음으로 `내`가 희미해진다고 시인은 이야기 하지만,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시인의 자의식에 대한 낭만화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 라는 불편함을 느낀다. 정말 시인은 1인칭의 시를 넘어설 수 있을까? 윤리적으로 그래야 한다는 당위로서 말고, 머릿속에서 내린 결론 말고,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문장이 자신의 `전부`라고 이야기 하는 시인이 `나`를 고작 문장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시인이 자신의 시를 수많은 개체들의 종합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에 심기가 불편해진다. 모호함은 끝까지 모호함으로 남아야 한다.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은 자신이 모르는 채로 남겨두어야 한다. 불가지론이라 할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세계에 대한 어떤 윤리를 가져야 한다면 나는 그런 태도라고 생각한다.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라서, 늘 이런 고민을 한다. 음악처럼 휴지休止를 기호적으로 가질 수도 없고 영화처럼 음악을 배경에 깔면서 운치를 보탤 수도 없는, 모든 걸 언어로만 해결해야 하는 참 가난한 시의 형식에 대한 고민, 이 가난한 형식을 육체로 알아 거북이처럼 등에 업고 어떻게 하면 다른 시야를 제시하는 문장을 쓸지에 대한 고민, 형식의 한계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짊어지려 할 때에 새로운 시야를 얻을 수 있다. p195
시인의 자의식은 물론 좋다. 작은 책 안에서, 작은 책으로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싶어하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비교적 다양한 장르의 표현물을 만드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 온 나의 결론은 어떤 장르든 그 나름의 한계와 아쉬움은 있다는 것이다. 우습지만 영상 만드는 사람들끼리 가끔하는 우스개는 글쓰는 사람들이 부럽다는 것이다. 그냥 상상한 걸 쓰면 되고, 돈도 별로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뭐가 더 어렵고 더 어렵지 않고, 그것을 우리가 가늠할 수 있을까?
물론 시인으로서 자신의 장르에 대해 웅변하고 싶은 마음은 있겠으나, 사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화가 조금 났다. 우리는 모두의 한계 안에 갖혀 있다. 그런 한계에 대한 인식을 다른 장르와의 차별성을 통해 그리고 낭만적 우월성으로 획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어쨌든 우리는 저마다의 한계 안에서 어떤 진실에 가닿고자 노력하는 이들이다. 설마 그것을 시인의 역할이라고만 한정하고 있지는 않으리라 본다.
위에서 언급했던 황인찬 시인이 출연한 팟캐스트를 듣다가 `시가 애초에 아주 1인칭적인 장르여서...`라고 언급하는 부분을 들었다. 이 1인칭 부분이 불편하던 차에 두 시인이 다른 방향을 가르키고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이 책을 전투적으로 읽게 한 계기였다. 시를 진지하게 공부해 본 적은 없었고,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갑자기 진지해진 것도 그것 때문이다. 당분간은 `시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시집 그 자체`도 열심히 읽어나갈 생각이다. 시 혹은 시의 세계가 어떤 윤리를 구현하려는 것이 궁금해졌고, 그것은 어떻게 세계에 기여할 수 있을지 조금이라도 엿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김소연의 시가 좋았다. 여전히 좋다. (`시옷의 세계`가 안타깝게도 그 좋은 느낌을 약간 희석시키기는 했지만) 다음에는 김소연의 시가 왜 좋은지 조금 더 이야기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