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은 어떠한 이미지 그 자체다. 그러니까 가짜들이 추구하는 이미지들 - 화려한 삶, 달콤한 말, 부, 그리고 보여지기 위한 명예-의 총합 그 자체인 것이다. 매일매일 내적 갈등을 겪고 그리고 관계에서 갈등을 겪고 또 욕망이 좌절되어 힘들어하는 실패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면, 할에게는 그러한 요소는 없어보인다. 욕망하고, 원하는 것을 취한다. 이 모든 이미지가 허상에 기반한 것으로 밝혀졌을을때 할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남긴 것은 엄청난 빚더미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재스민이 원하는 것은 이미지 그 자체 였을지도 모른다. 완전이 아닌 완전해 보이는 이미지 말이다. 드와이트와의 만남에서 재스민은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그가 가진 이미지였다. 목표가 명확해지자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거짓도 정당화 되었다. 한편, 같이 영화를 본 N은 재스민이 자주 쓰는 단어 중에 하나가 humiliate라는 것을 지적해냈다.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을 기반으로 한다. 그녀는 온전히 타인에게 보여지는 이미지를 위해 사는 사람이었고 이것이 그녀의 삶을 이루는 근간이었다. 

 진저의 삶은 어떤 면에서 매우 인간적으로 보인다. 그녀는 살아가지만 그 삶은 항상 실패에 가깝다. 남자친구와 다시 만나게 되었지만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 마지못해 내린 결정이었다. 그것은 현실에 기반한 우리의 삶이 그다지 완벽할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 일지도 모른다. 진저의 집 문 옆에 걸려있던 원앙새 한쌍 그림은 그야말로 아이러니였다. 완전한 사랑을 상징하는 원앙새 그림과 달리, 두 여자의 사랑은 완전하지 못했다. 칠리의 사랑은 현실에 기반하고 있었으나 엉망이었고, 이미지를 현실로 만드는데 실패한 재스민은 그 그림이 걸려있는 집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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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언어가 생겨나기 전에 모든 것은 하나였다 호랑이이자 사슴이었고 산이자 바다였으며 건축가이자 의사였다 빛이자 어둠이었던 이 모든 개념은 세상의 탄생과 함께 분화되어 다시는 하나가 되지 못한다 사람들의 무의식은 이같이 파편화되기 이전의 총체적인 하나됨의 세상을 기억하고 있고 이것을 절대자 혹은 신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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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는 절대자가 정해놓은 틀 안에서의 안정감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그 열매를 입으로 가져간 인간은 절대자의 손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되지만,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야하는 방랑자적인 위치에 놓이게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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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4 - 국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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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게되고, 그것이 확장되어 국가가 형성된다. 국가라는 틀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시대 초월해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플라톤은 <국가>에서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통해 국가 형성의 기반인 정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올바른 지도자상과 국가 체제를 그려낸다. 자금으로부터 약 2,500여년 전에 쓰여진 책 이지만 인간사회에 내제된 보편적인 문제를 날카롭게 바라보는 통찰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사점을 제시해주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고전이 가지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국가>를 읽는 동안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소크라테스가 살던 아테네의 상황이 묘하게 겹쳐졌다. 

 20세기 대한민국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 선언 이후 한반도는 감격적인 해방을 맞이한다. 그러나 타인의 힘을 빌어 얻은 독립은 절름발이와도 같은 것이었다. 해방 후에도 친일 행위에 적극 협력했던 이들이 국가의 경영을 이어받게 되었다. 이들은 6.25전쟁과 반공을 국시로 삼아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의 보호자를 자처한다.

 친일이라는 맨 얼굴을 반공의 가면으로 가린 그 누군가는 군부의 힘으로 권력을 얻기에 이른다. 독재자는 경제적 성장과 같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며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대상을 교묘히 제거해갔다. 언론을 통제하거나 혹은 입맛에 맞는 언론을 살아남게끔하는 정책은 불의를 정의로 탈바꿈시키는 그들의 전략이었다. 그를 이어받은 정권 역시 5.18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이 참여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붙이는 일련의 행위들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6월 항쟁을 통해 대한민국은 이러한 사슬을 끊을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다. 그러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역사의 흐름은 한순간에 고쳐지지 않았다. 독재정권의 평화적 민간이양의 주인공은 아이러니하게도 1980년 5월이 광주에서 민간인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댄 게엄군 사령관이었다. 반공과 안보의 승리였으나 이는 곧 불의의 승리이기도 했다. 

 기원전 5세기경 아테네

 2,500여년전 그리스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하면서 스파르타에 의해 30인의 참주가 지배하는 정부가 세워지게 된다. 민주정을 택하고 있던 아테네 시민들은 참정권을 박탈당했으며, 더 나아가 참주들은 권력에 위협이 될만한 인물들을 제거하기에 이른다. 다행이도 아테네의 세력이 회복되면서 참주들은 축출당하고 아테네는 민주제로 복귀하게되지만, 오늘날과 같은 삼권이 분립된 민주공화제라기보다는 중우정치에 가까웠던 아테네의 민주제는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만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이성과 정의가 비이성과 불의에 패배함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처럼 불의가 정의를 대체하는 세상에서 지식인들이 행동할 수 있는 양식은 두가지였다. 지극히 현실주의자가 되어 상황을 옹호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은 이상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테네의 소피스트들은 전자에 해당했으며, 상대주의적이며 회의주의적인 논변을 펼쳤다. 3.1운동이 좌절되자 항일운동에서 노선을 바꾸어 국민개조론을 주장했던 친일 지식인들처럼 말이다. 소피스트들은 불의를 정의로 포장해 이득을 취하는 삶이 오히려 정의를 지키려다가 손해는 삶보다 나은 것이라는 논지를 펼친다. 심지어 불의야말로 궁극적인 정의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책의 서두에 등장하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이러한 소피스트의 논지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다. 아무래도 권력자들이 불의를 통해 자신의 이득을 취하고 그것을 합리화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국가>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가치관의 혼란이 절정에 이른 시기에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있으며, 이런 것들을 지켜나갈때 이상적인 국가체제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체가 욕망에 지배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여긴 소크라테스는 이와 유사하게 이상적인 판단력을 가진 지배자가 국가를 이끌어 가는 것을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할 정치체제로 묘사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은 <국가>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그리던, 혹은 플라톤 자신이 추구하던 국가의 이상향을 이와 같은 철인정치로 정의한다. 폭정을 가져온 참주제와 스승을 죽음으로 몰고간 민주제에 대해 플라톤은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할 수 밖에 없었다. 참주제는 권력을 통해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한 것으로, 민주제는 자유를 넘어선 방종에 가까운 체제로 기술된다.

 친일이 반공으로 탈바꿈하는 상황이나, 군사 독재가 경제성장이라는 성과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현상, 스파르타에 의해 세워진 참주제가 체제를 유지하기위해 시민들을 탄압하는 것, 중우정치에 빠진 민주제가 소크라테스를 죽인 것과 같은 사건들은 현실에 정의가 존재하는지에 대해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정의야말로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말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철인정치를 통해 국가가 공동의 선을 추구하며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고 믿었다.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가지는 의미는 공동체 형성에 기반이되는 신뢰를 회복시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상대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인 관점이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는 있겠지만,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상호 신뢰를 통한 안정적인 국가 체계를 만들어내는 도구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는 식의 상대성을 주장하기되면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해결하기위한 '기준'이 사라지는데, 이는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보다는 해체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에서 포퍼의 지적처럼, 철학자들도 인간인 이상 실수할 수가 있을 뿐만아니라, 만약 실수하게 된다면 그에대한 비판과 개선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철인정치의 체제가 소크라테스의 이상과 같이 운영될지는 미지수이다. 자신들만이 유일한 정의라고 믿었기에 체제에 대한 비판을 금지했던 공산주의가 소멸한 것과 같은 종류의 문제를 내포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국가의 방향성은 시민들 스스로가 결정해야하는 것이지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도자의 선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해져버린다면, 시민들은 판단력을 상실하고 그것은 아테네의 중우정치와 다를바가 없어지고 만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비록 시작은 온전하지 못했만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선거를 통해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하는 수준높은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 그러나 독재권력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회복시켜야한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명확한 지향점을 찾기가 쉽지 않아보인다. 이를테면 오늘날 이슈가 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같은 거대 자본의 논리는 효용성을 중시한 나머지 인간성을 말살하는 문제점을 만들어 냈지만, 우리나라의 대기업이 세계시장에서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규모의 경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현대 사회가 더욱 복잡해지고 한가지만을 고려해서 문제를 해결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가>의 철인정치를 다른 방식으로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것은 바로 민주국가 시민 개개인이 지성과 책임감을 가진 철학자와 같이 되는 것이다. 같은 민주주의 체제를 가지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내는 나라가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는 곳이 있다. 같은 전술을 사용한다고 가정할때, 일류의 축구팀과 동네축구팀을 구분하는 것은 결국 선수 개개인의 기량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체제 역시 그 체제 자체가 잘 설계되어야하는 것은 자명하며 더 나아가 개개인들이  그 체제를 운영하기에 적합할만큼 높은 수준을 가져야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한 부분만 덧붙이고 마무리하려고 한다. 기존의 <국가>와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맥락이나 의미 등이 가다듬어져 정말 읽기 쉽게 번역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는 번역자가 원전을 언어적으로 번역할 수 있는 능력 뿐만 아니라 원전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상당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2,500년전 그리스, 그리고 라틴어라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은 번역을 독자에게 선물한 천병희 선생님께 경의를 표하며 여러모로 부족한 <국가>의 읽고 쓰기를 마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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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위한 철학 - 세상에 단 하나뿐인
브랑코 미트로비치 지음, 이충호 옮김 / 컬처그라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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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뉴욕의 MoMa(Museum of Modern Art)에서는 해체주의자 건축 (Deconstructivist Architecture)라는 제목으로 프랑크 게리, 다니엘 리베스킨트, 렘콜하스, 피터아이젠만, 자하하디드, 쿱 힘멜브라우 그리고 버나드 츄미가 참여한 전시회가 열렸다. (해체주의에 대한 이미지 및 정보)


 1980년대는 합리와 이성만으로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때였다. 그도 그런 것이, 효율성과 합리성을 내세웠던 도시계획이 당초의 예상과는 다르게 슬럼화되는 현상을 보였던 것이다. 또한, 콘크리트와 철골 그리고 유리로 대표되던 현대 건축물이 지역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대량으로 증식되어 각국의 도시들은 그 특유의 매력을 잃어갔다.


 합리성을 넘어선 복잡성, 사각의 그리드 내에서의 형태적 구속을 넘어서는 방법론을 찾기 위해 건축가들은 건축 바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합리성이나 형태적 구속을 뛰어넘기 위한 근거가 필요했고 그래서 철학과 손을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새로운 이슈를 만들어내 자신이 그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젊은 건축가들이 선택한 '정치적'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1900년대 중반까지 살았던 르 꼬르뷔제같은 현대 건축 거장들은 철학적 용어를 즐겨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이야기한 것은 오히려 건축 그 자체였는데, 이를테면 자유로운 평면과 입면 혹은 건축적 산책로 같은 것이었다.  조금 더 후대 사람이었던 루이스 칸 역시 servant-served(보조하는-보조받는) space라는 용어를 사용해 그의 관심이 건축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확인 시켜주었다.


 이런 현대 건축 거장들의 접근과는 달리, 후대 건축가들은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 철학적 용어에 손을 내밀기 시작한다. 이른바 해체라 불리는 철학적 방법론은 언어의 의미는 고정적이지 않고 변화한다는 논지를 끝까지 발전시켜, 중심의 해체, 주체성의 해체와 같은 이슈를 만들어 냈다. 이는 이항분리적이고 수직구조안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 - 이를테면 합리성을 숭배하면서 만들어내는 독선적인 태도, 남성의 여성에 대한 억압, 나아가서는 국가간의 억압 등- 들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였고, 합리성이라는 틀에 갖혀버린 건축은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면서 이러한 개념들을 차용했다.     


 결과론적으로 해체주의적 건축은 어떠한 측면에서는 성공하기도, 다른 측면에서는 실패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현상은 2000년대에 미국 부동산 경기가 거품 효과로 인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 처럼 보였을때, 이런 해체주의적인 건물들이 제법 많이 지어지고 계획되었다는 것이다. 거품이 꺼지고 불경기가 찾아왔을때, 사각의 틀에서 벗어난 해체주의적 건물을 짓는데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외관이나 형태 그 자체를 해체하는 방법론은 결국 경제성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건축 공간에서 위계의 해체라는 방법을 통해 새롭게 떠오른 주제도 있었다. 이른바 탈중심성이라고 부르는 이 주제는, 좀 더 열려있기를 원하고 또 상호간의 소통이 필요한 공간에 적극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SANAA에게 프리츠커상(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을 안겨준 롤렉스 러닝센터는 공간적으로 열려있으며 또 이용자들의 소통을 유발하는 탈중심적 건물의 예가 될 수 있겠다. (롤렉스 러닝 센터 / 롤렉스 러닝 센터 관련 설명 및 이미지 / 탈중심성의 또 다른 예)


 이러한 1990년대에 해체주의와 함께 건축에서 유행처럼 번졌던 (그러나 이제는 조금은 퇴색한 듯한) 철학에 대한 관심을 지적하면서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을 밝힌다. 자신들의 형태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철학적 용어의 남용을 막고, 건축가나 학생들에게 논리를 기반으로한 철학적 접근은 무엇이며, 또 철학의 담론이 건축에 어떠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 책은 명확한 독자를 염두해두고 쓰여졌다. '독자들 - 건축가, 건축 실무자, 학생 - 에게 설계 작업에서 맞닥뜨리는 더 광범위한 철학적 문제들을 인식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서문에서 밝힌 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교양으로 철학과 건축을 접하기에는 조금은 난해할수도 있겠다. 건축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실체를 다루는 분야이기 때문에 텍스트를 읽는 것만으로는 철학이 건축과 어떠한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보편적으로 읽힐 수 있는 책이 되려면 풍부한 시각적인 도판이 첨부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건축과 철학의 관련성을 통시적이며 또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다. 전문 지식의 분업화가 완전히 정착된 오늘날에 두 분야에 대해 수준 이상의 지식을 갖추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건축과 철학의 관계를 해박한 지식으로 풀어내는 여정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이 책이 주는 의미는 충분하리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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