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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힘의 시대 - 대화로 재구성한 20세기 양자 물리학의 역사
루이자 길더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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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양자물리학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고 했더니 친구 중에 하나가 양자물리학이야말로 이 시대의 종교라고 이야기한다. 상당부분 동의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각 이상의 것을 동원해야 겨우 이해할 수 있을까 말까한 체계이니까 말이다. 이성적인 이해를 통해 본질로 깊숙하게 들어가다보면 어느 지점에서는 선택을 해야하는 순간이 온다. 이걸 믿어야하나?  

 양자물리학의 세계는 신비롭다. 원자보다 더 작은 양자-전자,광자 등을 포함하는 최소 단위의 총칭-의 세계에서는 고전물리학의 논리가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게된다. 가장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는 빛이 파동이냐 입자이냐에 관한 것인데, 고전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이 둘의 경계가 명확한 반면 양자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이 둘의 경계가 모호하기 짝이 없다. 우리가 보는 가시적인 세계에서는 파동은 파동이고 입자는 입자일 뿐이다. 그러나 미시 세계에서 양자는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하다. 

 이런 모호함, 그리고 경계 없음 이상으로 놀라운 것은 조건이 완벽하게 주어져도 양자의 세계에서는 양자의 위치를 확률적으로 밖에 파악할 수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조건이 완벽하게 주어지더라도 그 정확한 결과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조건을 통해 정확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고전물리학 체계를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기에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물리학은 양자물리학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마치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통해 우주의 중심은 지구라는 천동설 패러다임을 흔들어 놓았듯, 양자물리학은 조건을 알고 있으면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고전물리학에 근거한 신념 체계를 깨트려 놓았다. 양자물리학은 모든 것을 결정론적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사고체계를 바꿔놓았다. 인간의 이성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겸손 혹은 무기력함을 심어준것이다.

  이 책 만으로 양자물리학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양자 물리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는 출발점으로는 적당할지 모르지만, 이 책을 통해 현대 물리학의 체계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양자물리학은 우리가 쓰는 일상어로 설명되어질 성질의 것은 아니다. 물리학의 체계는 수학적인 설명이 필요하고, 양자물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수학에 대한 학습이 필요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양자물리학에 호기심이 생기는 사람들은 더 다양한 책들- 특히 수식으로 설명하는- 을 접해보기를 바란다.

 구체적인 양자물리학의 체계에 대한 이해라는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물리학의 거장들의 대화와 사고의 흐름은 꽤나 흥미로운 부분임을 부인할 수 없다. 보어, 보른, 파울리,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드브로이, 봄, 오펜하이머, 파인만, 벨과 같은 기라성 같은 물리학의 거장들의 대화가 이 책을 수놓고 있다면 물리학에 관심있는 그 어느 누가 이 책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생생한 대화들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그 자리에 동참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 일으킨다. 

 이들의 대화는 물리학이 어떠한 수식 체계 이전에 하나의 신념체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인슈타인은 평생동안 양자물리학이 이야기하는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신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마디였다. 물론 아인슈타인의 신념과는 달리 양자물리학의 불확실성이 양자의 세계를 설명하는 적확한 체계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말이다. 물리학자들은 자신의 신념체계를 논증하기도하고, 타인의 체계를 이어받기도 하며, 또는 반박하면서 물리학의 체계를 더 정교하게 가다듬고 있다. 

 왜 많은 학자들이 왜 눈에도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의 원리를 밝혀내는 것에 자신의 인생을 바친 것일까. 몇가지 생각이 든다. 이 체계를 밝혀냄으로 효용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그 자체가 세상을 설명하는 지적 유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호기심이야말로 그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우주의 시작과, 형성에 대한 물음에 답해줄 가능성이 있는 몇 안되는 도구가 바로 양자 물리학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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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말러 : 교향곡 2번 & 드뷔시 : 바다 [2CD]
드뷔시 (Claude Debussy) 외 작곡, 아바도 (Claudio Abbado) 지휘 / DG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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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오 아바도, 카라얀을 이어 베를린 필을 이어받은 시대의 마에스트로. 언젠가 위암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는 베를린필을 내려놓고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가지 끝에 매달린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낙엽이 떠오르는 그의 몰골을 보면서 그의 건강을 염려하는 동시에 생명을 걸고 지휘하는 듯하는 경건함이 느껴졌다. 인생은 어떻게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끝은 결국 죽음으로 정해져있고, 얼마만큼의 시간을 미룰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영원히 살 수는 없는 법. 그는 무엇 때문에 저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서 마지막 악장을 지휘하는 것일까. 하필이면 곡의 제목이 부활이다. 육체는 쇠락해가지만, 음악은 즉 그의 정신은 더 선명해진다. 이 음반에는 삶과 죽음을 오가는 이야기거리가 있다. 그래서인지 더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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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하비 리벤스테인 지음, 김지향 옮김 / 지식트리(조선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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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불확실한 현대사회에서 의지하는 가장 큰 기준 중 하나가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해당 분야의 전공자들의 의견일 것이다. 그런데 그 전문가들의 의견이 객관적인 사실이 아닌 자신을 후원하는 이익집단의 요구사항이라면? 차라리 '이게 다 돈때문이야!' 라고 이야기하는게 오히려 마음이 편할 정도로 객관적인 기준마저 돈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역사를 우리는 이 책에서 보게된다.

 1900년대를 전후로 미국 사회에서 끈임없이 제기되었던 음식물과 영양소에 대한 소비구조의 근원을 파해친다. 개략적인 패턴은 다음과 같다.

0.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듯한 실험 결과를 발표한다. 
1. 그 발표 중에서 우리의 건강에 관계된 요소를 부각시킨다. 
2. 부각된 요소은 부족할시에 우리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고 조작되고, 충분한 양을 섭취하면 건강한 삶은 물론 장수할 수 있다고 선전된다. 
3. 촉진된 소비로 관련 기업이 돈을 번다.
4. 0-3의 패턴이 무수히 반복된다.

 이 책을 읽다보면 객관적인 사실이라는게 존재하는가하는 의문이 든다. 이를테면 비타민이라는 것 이름부터가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생기넘친다는 의미의 vital이라는 파생된 vitamin이라는 단어는 마치 이 성분을 충분히 섭취해야지만 생기있는 삶을 살 것 같은 환상을 우리에게 심어준다. 이러한 환상은 대중의 소비욕구와 기업의 시장개척과 맞물려 비타민 관련 산업을 부추기게되고 그 사이에서 영양학자들은 비타민이 함유된 제품들을 선전하며 적지 않은 돈을 손에 쥐게되는 것이다.

 애매하게 밝혀진 과학적 사실과 과학자들의 부와 명예에 대한 욕구, 그리고 기업가들의 욕심과 소비자들의 맹목이 만들어낸 음식에 대한 어리석은 믿음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 책에 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이 과연 십수년전 미국에서만 존재하는 이야기들일까? 음식뿐 아니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결과물이라고 믿는 수많은 선택 중에서 과연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행위들이 없는 것인지는, 글쎄, 나는 오늘날 이러한 일이 없다고 확신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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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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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가 성장하고 자신이 누군지 고민할때 즈음에 이 편지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구나. 오늘 아빠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책을 읽었단다. 오늘날을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이 책의 저자는 현대 사회를 유동하는 세계라고 표현하더구나. 어떤 가치도 고정되있지 않고 액체 마냥 흘러다닌다는 것이지.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해서 한가지 가치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도태됨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액체 마냥 빠르게 유동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구나. 

 나는 이런 세상을 인스턴트 라면에 비유하고 싶다. 출출할 때 먹는 라면 만큼 맛있는게 없지. 거기에 계란과 치즈까지 넣었다고 생각해보렴. 갑자기 배가 고파지는구나. 그런데 라면만큼 빠르게 조리되고 입맛을 자극하면서도 열량은 큰, 그러나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음식도 없는 것 같다. 세상은 마치 라면처럼 재빠르게 끓어오르고 또 소비된단다. 그리고 그 맛은 꽤나 입맛을 자극하지. 이런 인스턴트 라면과 같은 문화적 컨텐츠들이 쉴새없이 만들어지는 요즘이다. 가끔 라면을 먹을 수는 있지만 매일 이러한 것을 섭취한다면 우리의 건강은 자신도 모르게 나빠지게 될거야. 오늘날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과 해악은 인스턴트 라면을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한단다. 

 유동하는 그리고 인스턴트 식품과 같은 세상에서의 인간관계는 어떠할것 같니? 이 시대는 sns를 통해서 그 어느때 보다 서로가 긴밀하게 엮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은 외롭기 때문에 사람들과 소통하기 원하고, 그래서 이런 sns는 사람들의 이러한 욕구를 해소시켜줄 수 있은 도구로 각광 받고 있지. 온라인 인간관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오가고 있구나. 이 책에서는 sns가 우리가 가진 본질적인 외로움을 해소시켜줄 수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의견에 찬성하면서도 나는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단다. sns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고 말이야. 너가 너 자신의 모습을 진솔하게 보여줄 수 있다면 자칫하면 공허해질 수 있는 sns를 진정한 인간관계를 이룰 수 있는 보조적인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아빠도 sns를 통해 너의 엄마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어. 물론 온라인을 통해서 좁혀진 정신적인 간격만큼 육체적으로도 좁혀디는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말이야.

 결국은 아빠는 이렇게 생각한단다. 어떤 도구에도 너 자신이 매몰되어서는 안된다고 말이야. 아무리 거대한 온라인의 세계가 있다고 해도 결국 그것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니까. 너가 진정한 우정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그 교류의 창이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니. 어떠한 방식으로도 사람들과 우정 그리고 사랑을 나누는 일을 멈추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너가 이 편지를 읽을때쯤이면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거라 생각한다. 아빠는 어릴적부터 막연하게 꿈꿔온 건축가라는 인생을 살고 있지만 이 삶이 항상 꿈꿔오는대로 진행되어 왔던건 아니란다. 아직도 내가 추구하는 건축을 완성해나가고 있는 입장이라 조심스럽지만, 젊은 시절에 열정을 바쳤고 또 여전히 이 일을 사랑한단다고 이야기할 수 있단다. 어떤 일을 선택하든 나는 너가 오랜시간동안 식지않을 열정을 쏟을 무언가를 찾았으면하는 마음이야. 이 책에서도 그러더구나. 우리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삶 하나하나가 예술작품이라고. 비록 생물학적으로 너를 만들어낸 것은 엄마와 아빠이지만 너만의 인생 일정표를 만들어가면서 너의 삶을 스스로 창조해 갔으면 좋겠구나. 

 물론 세상은 너무나도 불확실하단다. 그렇기때문에 이 책의 저자도 이 세상을 유동하는 현대라고 부르는 것이겠지. 어떠한 일도 확실하게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은 냉혹한 현실이다. 그러나 너가 힘들때 아빠가 옆에서 힘이 되어줄게. 그리고 아빠도 너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가족들이 항상 힘이 되어주었단다. 힘들때야말로 서로의 사랑과 소중함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닌가한다. 무엇보다도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구나. 이렇게 불확실한 시대야말로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 서로 기대며 나아가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건 그저 가족 간에 머무르는게 아니라 나의 주변사람들을 돌아보며 함께 갈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정말 소중하게 지니고 살아가야할 가치들이 무언가 다시한번 깨닫게 되었단다. 우선 인간 그 자체보다 세상에 중요한 것은 없다는 신념, 즉 모든 체계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도구라는 것이지. 그러면서도 우리를 서있게하는 지구에 대한 존중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단다. 이 터전이 없다면 우리도 살아갈 수 없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이뤄지는 진실한 소통을 빼놓을 수 없겠지.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나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고 나만의 인생을 창조해가는 것을 잊지 말고 꾸준히 이루어 갔으면 좋겠다. 항상 아빠가 응원할게. 사랑한다.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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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ame 2012-10-21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음 이건 끝까지 읽지 못했다.. 먄..

일개미 2012-10-21 15:46   좋아요 0 | URL
딸래미에게 쓰는 44개의 편지 중에 첫번째...아 오글거려...
 
[가족 기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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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이전의 우리나라는 유교적 가르침을 숭상하는 국가였다. 효와 충와 같은 수직적인 인간관계를 근본으로한 이 체계는 예의와 같은 포장지로 잘 싸여져 겉으로 보기에는 군더더기 없는 상품과 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한정된 자원을 소수의 기득권이 차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의미와, 그 안에서 발생하는 억압을 숨김으로서 안정적인 사회를 만드는 목적이 숨어있었다. 


 이 책은 가족 안에 숨어있는 억압적인 구조에 대해 밝힌다. 서로에 대한 애정과 믿음으로 구성되어야할 가족 안에 숨겨진 권력구조와 욕망을 파해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남성의 성적 욕구를 합법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처첩제와 거기에서 발생하는 적자와 서자의 구조는 그 시대의 가족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문제 중에 하나였다. 처는 권력이 있었으나 사랑받지 못했고, 첩은 사랑받았으나 대를 잇지 못했다. 높은 사회적인 지위에 대한 욕망과 육체적인 욕망이 두개로 나뉘어 처와 첩에게 투영되었다. 분리된 두개의 자아 처첩으로 대응되어 끈임없는 갈등을 겪었고 그 두개를 동시에 취하기 위한 처와 첩의 보이지 않는 다툼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홍계월전, 옥루몽)


 여기서 태어난 자식들은 필연적으로 화목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의 자식들은 사랑받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아버지에게 실망을 느꼈을 것이고, 첩의 자식들 역시 첫째 부인에게 억압받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면서 분노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흐르는 적자와 서자의 수직적 위계는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시키켰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들의 왜곡된 자아는 유교의 충이나 효와 같은 가치로 표면적으로는 봉합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갈등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이미 가정에서의 불합리와 수직구조를 체화했다면, 이들은 사회에서 어떠한 행동양식을 보여왔을까. (홍길동전)

 

 권력을 가진 이는 처첩을 두고 이를 통해 왜곡된 가족관계를 만들어냈다면, 일반 서민들 다른 방식으로 왜곡된 가족관계를 만들어냈다. 원앙새 한쌍과 같이 아름다운 가정을 꾸린 사람도 있었겠지만, 남존여비를 기반으로한 유교사상은 서로 소통하는 가족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가부장 중심의 작은 독재사회를 만들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지금도 내려오는 부모님과는 겸상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가부장제의 수직적 위계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가부장의 권한에 따라 온 가족이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흥부전, 쥐 변신 설화, 옹고집전)

 

 한편, 일찍이 과부가 된 여성들은 재가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며 평생을 살아가야했다.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양반의 숫자를 제한해야했기에 과부들이 재혼한다는 것은 양반의 숫자를 늘리는 일이고, 과부의 재혼은 국가적으로 억압당했다. (열녀함양박씨전)


 이러한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하는 욕망이 있었지만, 그것은 이 땅이 아닌 상상의 나라에서 실현되거나 혹은 실패하게된다. (홍길동전, 최고운전) 


 그러나 이렇게도 생각해본다. 그들이라고 가족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가족구성원간에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니까 말이다. 어쩌면 그토록 억압적인 가부장제라는 틀을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족체계가 유지된 것은 그래도 부모가 자식을, 그리고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가끔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부모와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 (여우누이, 심청전)


  어디선가 재미있게 들었던 이야기들이 실은 그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들의 이중적인 행동과 약자에 대한 억압이 드러난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해주는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로만 여겨지던 전래동화가 실은 이면에 감추어진 시대상을 보여주는 거울이었던 것이다. <가족 기담>이라고 이름 붙은 이 책을 읽고 난 소감은 눈앞에서 선혈이 낭자하는 B급 공포영화의 소름끼침이라기보다, 김기덕의 영화와 같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가감없이 보여주기에 느껴지는 공포스러움에 가까웠다. 아니,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던 현실에 대한 이면의 것을 알게 되었을때 느껴지는 무기력감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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