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과 닭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소설집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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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보다 뛰어난 브라질 소설가

소설가 배수아가 반해서 번역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그의 단편 소설집 달걀과 닭

배수아 작가가 리스펙토르에 빠지게 된 이야기



소설가 배수아가 반한 소설가

 

이 작품집을 안읽기로 했다가 읽기로 한 이유가 있다

안읽어야지 했던 이유는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된 저자의 작품 나에 관한 너의 이야기라는 걸 몇 년 전 구해 읽고 아 이 작가는 내 꽈가 아니구나 싶어 밀쳐 놓았었다.

그랬는데 이건 왜 읽었냐 하면

이 책을 먼저 읽고 있던 어느 분의 소개글과 본문 가운데서 따온 문장들에 대한 감상의 영향이 지대했다. 앞에서 읽었던 그 작품과는 뭔가 궤가 다른 작품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번역자가 배수아 작가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긴 했다.

배수아 작가는 자신의 소설 북쪽 거실의 표지 그림을 리스펙토르의 해외 판 표지 화가 그림으로 할 정도로 리스펙토르의 작품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짐작 된다. 그 사실은 옮긴이의 글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아울러 옮긴이의 말을 읽어나가보자니 좀 더 집중해서 읽어봐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리스펙토르는 외교관과 결혼했지만 외교관의 아내라는 틀에 박힌 삶을 벗어나

작가로 살기 위해 남편을 떠났다. 두 아들을 키우며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삶을 살았다.


그녀는 현재 브라질에서 여성 카프카라는 타이틀을 달고 현대 브라질 문학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으나 그녀가 남편과 이혼 후 귀국했을 당시 대다수 출판사들은

그녀의 작품을 외면했다. 남미문학하면 쉽게 보르헤스를 떠올릴 것이다.

클라리시의 작품을 읽고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에 소개한 엘리자베스 비숍은 이렇게 말했다.


보르헤스는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녀처럼 탁월하게 훌륭하지는 않습니다.”



번역한 배수아 작가의 리스펙토르 작품에 대한 간략한 평이다


예측할 수 없는 부조리와 돌연함으로 가득한 그녀의 글은

구조나 플롯으로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내가 받은 느낌은,

전체 이야기가 하나의 덩어리로, 한꺼번에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녀가 오랫동안 이해받지 못하는 작가, 오해받는 작가였던 것은 이상하지 않다.

클라리시가 죽기 직전에 발표된 마지막 소설 별의 시간에는,


이글은 (독자들이) 읽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작가에 의해) 쓰이고 있다는 진술이 나온다.

내게는 그 말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글쓰기의 핵심처럼 들렸다.


단 몇 줄의 설명으로 감이 올지 모르겠으나 어떤 독자는 어렴풋이 짐작할지도 모르겠다아 이 작가는 내 꽈구나, 또는 내 꽈가 아니구나 하는.


이 단편집에는 26편의 단편들이 실려있다. 옮긴이의 말을 보자면 '달걀과 닭'이 대표 단편으로 작가 역시 인정한 모양이다. 리스펙토르 생애 단 한 번 있었고 사후에 공개된 인터뷰에서 그는 표제작 달걀과 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 작품 중에서 나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기는 하다 그게 달걀과 닭이다


대부분의 독자는 이 말을 듣고 금방 떠오른 생각이 있을 것이다.

작가 본인이 써놓고 작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무슨 궤변이냐 그러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대표작일 수가 있느냐 할 것이다.


옮긴이 배수아는

'달걀과 닭'은 희게 번득이는 빛의 칼날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런 칼날에 베이는 것을 사랑한다. 라고 했다.


'달걀과 닭'의 일부를 옮겨와 본다


그러면 닭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달걀은 닭의 위대한 희생이다.

달걀은 닭이 일생 동안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이다. 달걀은 닭이 영원히 닿지 못할 꿈이다. 닭은 달걀을 사랑한다. 그러나 달걀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른다. 자신 안에 달걀이 있음을 안다면, 닭은 스스로 조심하게 될까? 자신 안에 달걀이 있음을 안다면, 닭은 닭으로서의 상태를 상실해버린다. 닭으로 존재함은 생존을 의미한다. 생존은 구원이다. 왜냐하면 삶은 없는 것처럼 보이기에. 삶은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기에. 그러므로 닭이 할 일이란, 오직 계속해서 생존하는 것뿐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생존이란, 죽음으로 이르는 삶에 대항하여 투쟁을 유지하는 것이다. 닭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는 바로 그것이다. 닭은 우울해 보인다.

12


어떻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나 역시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여기에 실린 26편의 단편들이 모두 '달걀과 닭'과 같을까? 감히 말하자면 나는 표제작인 '달걀과 닭' 이 한 편을 예외작으로 놓고 싶다. 이 한편 때문에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라는 작가를 리스트에서 지워버리는 건 섣부른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나머지를 모두 읽고 남겨 두던가 아니면 대~충 읽어도 괜찮다고 본다.


귀 너머에는 소리가 있다.

시각의 먼 끝에는 풍경이 있으며, 손가락의 끝에는 사물이 있다-그곳으로 나는 간다.


나의 머나먼 끝에 내가 있다.

, 애원하는, 궁핍을 겪는 나, 매달리고, 통곡하고, 한탄하는 나.

294


다소 시적인 문장을 포함하고 있는 그곳으로 나는 간다 와 같은 작품은 단 두 페이지에 불과 하다. 이처럼 단 몇 페이지에 불과한 작품이지만 충분히 읽어볼 만한 작품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표제작에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우화스럽기도 한 이라는 작품에서도 리스펙토르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고 본다.



작품 외적인 이야기로 좀 빠져서, 배수아 작가가 어떻게 리스펙토르에 빠지게 되었나 하는 장면을 요약해서 옮겨와 본다.


브라질 상파울루 공항에 도착했을 때, 검은 표지의 책 한 권이 내게 건네졌다.

G.H.에 따른 수난

열 페이지 정도를 읽을 때까지도, 머릿속에서는 계속, 얼마나 기이한 제목인가, 하는 생각만이 맴돌았다. 얼마나 기이한 문장들인가. 얼마나 기이한, 이야기 없는 이야기인가. 그리고 얼마나 기... 목소리인가. 그리고 고백하자면, 열 페이지 정도를 넘길 때까지는 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할지 아니면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할지 머뭇거리는 상태였다.

지금 G.H.에 따른 수난은 내 의식에 가장 깊게 달라붙은 책 중의 하나로 내게 어둡고도 둔중한 충격이었다.

지금 G.H.에 따른 수난, 카프카 이래로 가장 신비한 작품이 될 것이다.


그리고 리스펙토르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포르투갈어 교사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자신은 G.H.에 따른 수난을 네 번이나 읽었지만,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다음 날, 열일곱 살 난 소녀가 왔다. 소녀는 G.H.에 따른 수난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배수아 작가의 팬이 아니라도 이렇게 설명되어지는 작품이라면 한번쯤 호기심의 감각이 반짝하지 않나? 하지만 나 역시 힘주어 말해지고 있는 기이하다는 표현에 한편으론 달걀과 닭을 떠올리며 안읽을게 뻔하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 생각은 책을 들춰보면 확인되는 일이다. 가까운 시일 안에 번역 출간 된다니 한번 기다려 확인해 볼만한 일이다. 어쨌든 참 궁금하기는 하다.

제발트 번역을 통해 국내에 제발디언 바람을 일으켰던 배수아 작가가 이번에는 리스펙토르 바람을 불러일으킬지 흥미롭다.


참고로 리스펙토르 생애에 단 한번 19772, 상파울루 TV 와의 텔레비전 인터뷰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어서 주소를 올려 놓았다. 이 인터뷰는 작가의 부탁대로 사후에 공개 되었다.


https://youtu.be/ohHP1l2EVnU

 

리스펙토르는 자신의 글에 대해


내가 글을 쓰는 것은 타인에게 어떤 종류든 만족감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라고 했다.

저자의 말과 같이 리스펙토르를 당신이 읽는다면 일반적인 독서를 통해 얻게 되는 만족감 같은 건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때론 독서를 통해 불만족 하고 불편한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그런 작품을 만나는 경험이 오히려 더 즐겁지 아니한가 한다면 이상한 놈이 되려나.


여하튼 뭔가 이야길 하긴 한 것 같은데 딱히 한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낯설기만 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라는 작가의 소개에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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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테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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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오늘 소개하고 살펴볼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작품이 국내에 처음 번역된 것은

1992년으로 보인다. 그때 번역된 한 권 이후 다시 번역, 출간되기 시작한 것은 2001년 문학과지성사에 의해 꾸준히 소개되고 있다.

지금까지 대략 14권의 작품이 출간되었는데 국내에 소개된 기간과 작품 수에 비하면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는 작가는 아닌 것 같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무래도 일반적 소설의 형식이랄수 있는 서사 위주의 소설이라기 보다 시적인 문장과 관념적 내용으로 일부의 열혈독자층만이 읽는 작가로 매김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모든 작품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키냐르 작품을 대부분 출간해온 문학과지성사 편집부에 따르면 국내 파스칼 키냐르의 독자층은 대략 2000명 정도라고 번역가 송의경은 이야기 한다.

 

번역가 송의경은 키냐르 전문 번역가라 할 수 있는데 14권 가운데 11권을 번역했다. 송의경이 말하는 키냐르 작품의 특징은 이따금 탄성을 지를 만큼 아름다운 촌철살인의 문장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때론 작품이 미로와 같아서 길을 헤매기도 하는데 그래서 한 문장 한 문단

아무데나 펼쳐 읽어도 무방하다라는 말도 곁들인다.

씨앗에 꽃이나 나무가 들어가 있듯이 한 문장 한 문단에도 키냐르가 온전하게 들어가 있다는 비유를 했는데 적절한 것 같다.




일단 부테스는 어떤 인물이냐를 알아야 한다. 부테스는 음악 소리에 끌려 물에 뛰어든 자이다

키냐르는 그리스 신화에서 착상하여 음악과 물에 뛰어든다는 행위를 절묘하게 섞어 시를 읽는듯한 소설을 써냈는데 그게 키냐르의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런 면이 독자들로 하여금 낯을 가리게 하는 걸 수도 있다.

본 영상에서는 작품 자체에 대한 설명보다 이 작품을 읽은 느낌을 지극히 주관적으로 아무렇게나 떠들어 보겠다. 뭔가 아삼삼한? 읽을 꺼리를 찾는다면 파스칼 키냐르를 추천한다. 물론 모든 작품이 아삼삼한 건 아니다. 특히나 가장 최근 프란츠 출판사에서 출간된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라는 작품은 전통적 소설 방식이라고 하니 그 점 참고 하기 바란다.


먼저 본문의 일부를 읽어 본다.

 

그는 어디로 가는가? 이름들 자체보다 훨씬 더 절박한 음들이 들려오는 곳으로 간다.

 

부테스는 왜 물에 빠져 죽는가?

우리는 마른 데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 음악의 본질을 성찰하는 제아미의 노에서 침묵의 고수인 노인도 물로 뛰어든다.

그 역시 자살한다. 그 역시 익사한다.

우리가 영위하는 삶이란 희미한 빛 속의 움직임에 불과했던 오래된 바다에 비한다면 낯선 육지와도 같은 것이다.

산다는 것은 오직 포만의 운명을 지녔을 뿐이다.

24p

 

본래의 음악이란 무엇인가? 물로 뛰어드는 욕망이다.29

 

 

이 책을 한마디로 정의 하자면 음악과 뛰어듦에 관한 이야기다

어떤 음악에 꽂혔다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부테스처럼 음악에 이끌려 어디론가

정신을 팔아버리는 지경에 이르는 경험을 한다. 풍덩 하고 음악에 빠져버린다는 이야기다.

그런 경험을 시적 소설로 형식화한 읽을 꺼리가 궁금하다면 키냐르 꽈인 것이고 무슨 뜬구름 잡는 멍멍이 소리냐 하면 키냐르는 읽지 마시라.

 

어떤 소설은 뭔가를 상상하게 하고 어떤 소설은 인정하게 만든다. 뭔가를 상상하게 만드는 소설은 옆사람에게 뭐라고 추천하기가 쑥스럽거나 어렵다. 왜냐면 뭔가 살짝 제정신이 아니거나 몽상이나 하는 모자란 놈으로 보일까 싶어서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라고 따지듯 물어오는 상대에겐 개뼉다귀 같은 구체적인 걸 던져줘야 물지 않는데 두루뭉술한 걸 보여주면 사정없이 물어버리거나 개무시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책추천도 상대를 봐가며 해야하는 것이다.

 

종종 해외 토픽 같은 뉴스를 통해 해안으로 올라와 죽는 고래들을 본다. 물에 뛰어드는 행위나 물 밖으로 뛰어드는 행위나 그 주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세계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이므로 같은 행위이고 향하는 세계도 결국은 같은 곳일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음악을 듣고 홀리듯 가고자 하는 세계는 고래로 치자면 물 밖이고 인간으로 치자면 물 속인 것이다. 귀소본능이랄까 우리가 잉태된 곳은 양수가 가득한 물속이었으니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건 당연할지 모르겠다.

 

음악을 듣고자 하는 것은 청각적 감각에 의탁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시각보다 청각에 먼저 귀를 트고 청각이라는 감각은 사망 후에도 가장 오래 살아 있다고 한다.

 

키냐르의 글들을 읽다보면 어느순간 다른 세계로 몽상이나 망상에 빠진다. 내용과 상관없이 내 생각대로 침잠하다 문득 다시 현실의 본문으로 돌아온다. 그런 순간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그런 틈이 풍부한 글들을 찾아 이 책 저 책 찾아 헤매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뛰어들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눌 때, 뛰어들지 못한 자는 죽을 때 까지 뛰어드는 자와 뛰어 듦에 대한 미련과 연모에 괴로워 한다. 오직 뛰어들지 못한자들만이 무모함이라며 손가락질 하지만 그것은 뛰어들지 못하는 비루함에 대한 자기변명이다.

뛰어든다는 것은 취하는 것이다. 그것에 취해서 정신이 마비되어 빠져버리는 것, 그 순간 자신이 죽는다는 것 조차 감각하지 못하는 것.

키냐르는 자신이 집안 대대 이어온 음악가의 삶을 살지 못했다는 생각을 평생 안고 살고 있다. 그래서 그는 끊임 없이 그 주위를 배회하며 음악에 대한 글들을 썼을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아름다우며 동시에 "음악혐오"와 같은 작품을 써내게 했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나는 앞에서 상상하게 하는 소설이 있다고 했다. 키냐르의 어떤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소설과는 상관없는 상상에 빠진다. 인정해야만 하는 현실의 여기가 아닌 저 어딘가로 몽유병 환자처럼 떠다닌다. 키냐르의 작품은 그렇게 부유하게 한다. 상상으로 뛰어들게 하고 빠지게 하여 부테스가 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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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미친 바보 - 이덕무 산문집, 개정판
이덕무 지음, 권정원 옮김, 김영진 그림 / 미다스북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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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문집은 이덕무의 청장관전서(1966) 가운데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수 있는 글들을 뽑아 정리한 것으로, 책 곳곳에서 이덕무의 인품과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그중 한 구절을 소개한다.


명예와 절개를 세울 수만 있다면, 비록 바람과 서리가 몰아치고

파도가 밀려와 거의 죽게 된다고 할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또 인간 세상의 쌀과 소금같이 자질구레하지만 사람을 얽매는 물건에 대해서도

거의 초탈하여 깨끗이 벗어버리겠다.

229

 




적절한 비교일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고 드는 이덕무라는 선비의 이미지는

외롭고 높고 쓸쓸했던 시인 백석의 모습이 오버랩 되더란 것이다.

물론 터무니 없는 것일수도 있으나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의 한구절을 옮겨와 본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에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이덕무는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가난해서 반 꿰미의 돈도 저축하지 못하는 주제에 이 세상의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고, 어리석고 둔해서 한 권의 책도 제대로 꿰뚫어보지 못하는 주제에

오랜 세월이 담긴 경전과 역사책과 이야기책을 다 보려고 하는구나. 이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바보다. , 이덕무야! 아아, 이덕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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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논어로 병풍과 이불 삼아 한겨울 밤을 나는 것이나

영양실조로 여동생을 일찍 보낸 그의 가슴속에 어떤 감정이 실려 있었는지

감히 짐작조차 어렵겠지만 막연하게나마 상상해 보기도 했다.

서얼 출신이라는 태생적인 한계와 그로 인한 빈한함에서 오는

장남으로써의 책임감을 다하지 못하는 자괴감이 그 자신 속에 숱한 응어리를

쌓게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일생은 굳고 정한 갈매나무처럼 당당하고 꿋꿋했다.


이덕무는 평생 읽은 책만 2만 권이 넘었고, 직접 베낀 책만 해도 수백 권이 넘는다고 한다. 그만큼 책을 사랑했고, 책을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 그런 그의 독서에 관한 생각은 조금 남다른데가 있었으니 한번 새겨들어보자.

 

일과로 책을 읽으면서 네 가지 유익한 점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는 지식을 넓히고

깊게 알아서 옛일에 통달하고 뜻과 재주에 도움이 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첫째, 조금 배가 고플 때 책을 읽으면 소리가 두 배로 낭랑 해져서

책 속에 담긴 이치와 취지를 잘 맛보게 되니 배고픔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둘째, 조금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기운이 소리를 따라 몸 안으로 흘러들어와

편안해져 추위도 잊을 수 있게 된다.


셋째,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은 글자와 함께

하나가 되고 마음은 이치와 더불어 모이게 되니, 천만 가지 생각이 일시에 사라져버린다.


넷째, 기침이 심할 때 책을 읽으면 기운이 통하여 막히는 것이 없게 되니

기침 소리가 순식간에 그쳐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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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되면 책읽기로 하나의 도를 터득했다고 할만하지 않을까. 우리는 책 한 권을 읽더라도 거기에서 꼭 뭔가에 통하는 법을 얻지 못하면 시간 낭비만 한 것처럼 전전긍긍하지 않나. 물론 몇백 년 전 선비의 책읽기와 현대인의 책읽기는 개인적 상황이나 시대 상황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다르긴하지만 어떤 필요와 목적성에 치우친 독서라면 한번쯤 돌이켜 볼만할 것 같다.


벗에 대하여


이덕무는 스스로를 평가할 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세상 물정에 어둡고 처세에 졸렬한 나같은 사람을 이해해주는 이를 만나면,

산수를 논하고 문장을 이야기하며 민속과 가요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되풀이하며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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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러 서얼 출신과 교우했던 이덕무의 친구에 대한 글을 한 편 소개해 본다


나를 알아주는 벗


만약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의 벗을 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10년 동안

뽕나무를 심고 1년 동안 누에를 길러 손수 오색실을 물들일 것이다. 10일에

한 가지 빛깔을 물들인다면 50일이면 다섯 가지 빛깔을 물들일 수 있으리라.

이것을 따뜻한 봄볕에 내놓고 말려서 여린 아내에게 부탁해 백 번 달군 금침

바늘로 내 벗의 얼굴을 수놓게 하리라. 그런 다음, 고운 비단으로 장식하고

예스러운 옥으로 막대를 만들리라. 이것을 가지고 뾰족뾰족하고 험준한 높은

산과 세차게 흐르는 물이 있는 곳, 그 사이에 펼쳐놓고 말없이 서로 바라보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 때면 품에 안고 돌아오리라.



요즘 사람들의 인간관계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좀 오버스런 면도 있겠지만

출신의 한계에서 오는 교유하는 사람의 폭이 넓을 수 없었던 이덕무에겐 그만큼 주위 친구라는 존재가 각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흔히 동호인이라 말하는데 그런 동호인들이 모이면 공통의 관심사가 대화의 소재가 된다. 그런 이야기로는 몇 날 며칠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책 좋아하는 사람 책이야기, 커피 좋아하는 사람 커피 이야기 자전거 좋아하는 사람 자전거 이야기... 나 역시 자전거 타는 사람들과 만나면 어제 그제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해도 시간 가는줄 모른채 몇 년을 그렇게 보내기도 했으니까.

 

마음에 맞는 시절에 마음에 맞는 벗과 만나 마음에 맞는 말을 나누며 마음에

맞는 시문을 읽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어째서

이런 지극한 즐거움이 드문 것인가. 이러한 즐거움은 일생에 단지 몇 번 찾아올 뿐이다.


가만 돌이켜보면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만 세상에 많다고 그 사람들을 모두 만날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하더라도 자의든 타의든 사람들은 늘 떠나고 오기를 반복한다. 그 가운데 주위에 남아 관심사를 오래 논하는 사람을 얻기란 이덕무의 한탄처럼 일생에 단지 몇 번 찾아오는 진귀한 일이 맞다.


책과 쓸쓸함에 대하여


책을 읽는다는 일은 따지고보면 쓸쓸한 일이다.

오로지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이고 타인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덕무는 이 책읽는 쓸쓸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눈 오는 새벽이나 비 내리는 밤에 다정한 벗이 오지 않으면,

누구와 마주 앉아 이야기할 것인가. 시험 삼아 내 입으로 글을 읽으면 듣는 것은 내 귀요,

내 손으로 글을 쓰면 구경하는 것은 것은 내 눈이라.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았으니 이제 다시 무엇을 원망하랴.


모름지기 벗이 없다고 한탄하지 마라. 책과 함께 노닐면 되리라.

120


쓸쓸함 따위의 감정은 헌신짝 버리듯 버려서

갖추고 있어선 안되는 것인냥 하는데 어쩌면 쓸쓸함이나 혼자됨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책읽는 행위와 친해질 수 없을지 모른다. 어찌보면 책읽는 즐거움을 알게 된다면 책 읽는 고독한 시간이 오히려 수많은 미지의 사람들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일처럼 흥미진진한 일이 될 것이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되겠지만 사람들 속에 있어 쓸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나 책과 함께 책 속으로 들어가 쓸쓸하지 않는 것이나 선택은 각자의 취향과 사정에 따라 하게 될 것이다.

갈수록 책과 멀어지는 시대에, 당장 이 유튜브로 책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어찌보면 아이러니 같은데 이런 시대에 책에 미친 바보 선비를 소개하는 것도 좀 바보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세상에도 이덕무처럼 인생을 건너는 사람이 있다면 모두가 다 바보라고

손가락질하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이백여 년 전을 살다간 한 선비와 같은 발자취를

흉내라도 내는 누군가를 만나는 건 실낱 같은 희망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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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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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아마 그때는 2003년 초겨울 무렵이었다.

도서관에 꽂힌 계간지에서 처음 김애란 이라는 작가의 단편을 읽었다. 그동안 책으로 묶인 작품은 거의 읽었지만 내게 김애란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그 겨울 읽었던 '나는 편의점에 간다'를 꼽는다.

지금에 와서 무엇이 그렇게 주저없도록 만들었냐 하면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시절 단편을 읽으며 받은 와아 잘썼다 하는 몰입감이 좋았는지 모르겠다.




첫 소설집 앞날개에 실린 작가의 사진처럼 세상 무서울 게 없어 보이는 앳된 표정처럼 당시 김애란의 작품은 그렇게 발랄하고 톡톡 튀는 느낌이 있었다.

삶의 애환마저 김애란 식 유머와 해학으로 바꿔놓는 솜씨에 많은 독자들이 애정하지 않았나 싶다. 아니나 다를까 꽤나 오래전 홍대앞 어느 카페에서 작가의 육성을 확인하는 순간의 느낌 역시 그러했다. 딱 그럴 나이가 아니었냐 하는 건 게으른 짐작이다.


작가의 개인사를 잘 모르지만 또 그 개인사가 작품에 얼마나 반영되는지도 모르지만 또 그런 개인사가 아니더라도 작가 역시 나이를 먹고 세상과 삶에 지치기도 하므로 작품 역시 어느 정도의 나이듦은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딱히 말 할 수는 없는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 김애란 식의 유머랄까 해학이 사라졌다고 나는 언젠가 썼었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던 이런 느낌이 작품만 읽고 가질 수 있는 작가에 대한 오해였음이 이번 산문집의 다음 문단을 읽고 밝혀졌다. 2016년에 창비 50주년을 기념해 쓴 것으로 간주 되는 글이다.


그중 최근에 깨달은 한 가지는 유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데뷔 초, 저는 선배들의 이야기가 너무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루한 사람이 아니야', '나는 무거운 사람이 아니지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했고, 스스로 재치에 우쭐거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역사를 공부하고 또 경험하며 때론 농담이 불가능한 시기도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게 동시대인들의 죽음과 연결될 땐 더 그렇다는 것도요. 그러니 만일 언젠가 제 소설에 명랑한 세계가 가능했다면 그건 제가 특별히 건강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특별히 밝은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찧고 까불며 놀 수 있는 마당을 선배들이 다져줬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내 농담이 선배들의 진담에 빚지고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_136p


그랬던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발랄한 김애란의 작품은 짐짓 안그런척 하느라 일부러 힘을 주고 썼던 것이었다. 작가의 말대로 본인이 특별히 건강하다거나 밝은 사람이 아니어서 깨닫게 된 이후 쓴 작품들에 나는 예전의 그 김애란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아쉬움을 가졌던가 보다. 이제 불필요한 오해가 걷혔으니 괜한 아쉬움 같은 것 없이 있는 그대로 김애란의 소설들을 봐나갈 수 있을 것 같다.


허구의 말들인 소설만 읽다가 그 허구를 떠받치고 있던 작가의 실재 삶과 이야기가 담긴 첫 산문집을 반갑게 펼쳤다.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 책날개의 작가 사진을 보고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그동안의 책들을 꺼내 프로필 사진들을 살펴 본다.

앳되고 발랄한 첫 사진부터 중년의 작가가 된 최근의 사진 사이에는 작가로써 몇 권의 책을 묶어냈고 더불어 그 역시 우리와 다를바 없는 지지고 볶는 생활인으로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한듯 했다.



2


소설가 김애란의 첫 산문집이다.

산문집을 위한 산문들이 아니라 그동안 여기저기 기고하거나 써두었던 글들을 묶은 것으로 보인다. 멀게는 2005년부터 가깝게는 2018년 사이의 글들이다.

, , 우리로 나눈 각 장을 통해 작가의 유년기 같은 가정사와 친한 문인들과의 에피소드 그리고 해외나 국내 여행 등을 통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동안 작품 외적으로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던 독자라면 한번 읽어볼만 하다. 개인사가 녹아든 작품은 어떤 배경으로 역할을 했는지 등등 깨알같은 에피소드들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이를테면 국수가게를 했던 어머님 이야기나 그 국수가게의 어떤 장면이 녹아든 작품이야기라든지 또는 헌책방에서 원래 사려고 한 책도 아닌 책을 사들고 온 이야기와 그 책 안에 끼워져 있던 대출표 주인공들의 연애사를 확인해보고자 직접 전화까지 한 이야기라든가... 아니면 급전이 필요해 책에 그어놓은 밑줄을 밤새 지워 중고책으로 팔아야 했다는 우리와 다를바 없는 찌질한 이야기들도 자백하고 있다


그 외에도 입담 좋은 작가답게 시시콜콜한 옛날 이야기를 친절하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김애란이란 작가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걸 굳이 알 필요는 없겠지만 작가론과 작품론을 따로 논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으니 한층 더 작가를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좋은 읽을거리가 아닌가 싶다.



3


시나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그것 이외에 에세이라고 하는 개인사적 글을 써 출간을 한다. 어떤 작가는 본업이랄수 있는 시/소설 보다 에세이가 더 좋은 경우도 있고 에세이가 본업을 못따라가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때론 너무 많은 에세이를 펴내는 바람에 본업인 시/소설까지 덩달아 평가절하 되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작가들의 에세이를 그리 달갑게 보지 않는 편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소설 이외에 달리 작가의 개인사적 면모를 살펴볼 기회가 없었던 차에 첫 산문집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겠다. 나같은 김애란을 애정하는 독자라면 기꺼이 읽어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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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눈송이 봄날의책 세계시인선 2
사이토 마리코 지음 / 봄날의책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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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그러니까 10여 년도 더 전에 도서관에서 낡은 시집을 만났다. 국내 시집

들이 잔득 꽂혀 있는 서가에서 책등을 건성으로 훑어보다가 낯선 저자 이름에

시선을 멈추었다. 낯설다기보다 분명 한국 현대시 시집들일 텐데 일본인 저자

시집이 있었다. 누가 잘못 꽂아 놓았나 했다. 시집을 빼 살펴봤다.

솔직히 시를 읽어보기 전엔 일본인이 한국시를 써봤자 뭐 얼마나 썼겠어 하는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미열

 

나무에게서 사람에게로 옮는 병이 있다. 땅에다 깊이

뿌리박으면서 하늘을 날고 싶다는 병에 걸리는 이가 있

. 몸통을 쪼개 갖고 자기 나이테를 보고 싶어지는 병

이 있다. 자기 몸에다 많은 새들을 앉게 하고 싶어지는

. 잎사귀 수만큼의 눈빛들을 살랑거리며 서 있고 싶다

는 병. 거기에 서고 싶다는 병. 같은 데서 날마다 새롭게

기다리지 말고 늦지도 말고 서 있고 싶다는 병.


_부분


이 시뿐만 아니라 다른 몇몇 시들을 읽어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외국인이

사용하는 어휘가 맞나 싶을 뿐만 아니라 그 어휘의 사용법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름만 지우고 보면 그냥 한국인이 쓴 꽤나 잘 쓴

한국시라고 나는 그렇게 읽었다.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실린 시를 처음에 썼을 때는 먼저 일본어로 쓰고 나중에 한국어로 고쳤다. 그러다, 쓰면서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 나오자 다른 말로 바꾸어 쓰고 또 한국어로 번역하기 쉬운 말을 골라서 쓰게 되었다. 그다음에는 처음부터 한국어로 생각하고 한국어로 쓰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시인의 말


손때를 꽤나 탄 듯한 낡은 시집을 빌려와 읽어보고 이 시집은 꼭 소장해야할

시집이구나 생각하며 여러 방면으로 중고시집을 구할 수 없을까 찾아봤지만

이미 절판된 시집이라 중고시집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출판사 측에 재출간

문의도 해보았으나 재발간 의사 없음이란 답변만 돌아왔다. 도서관에 가야 겨우

시집을 볼 수 있던 그 당시, 도서관에 앉아 시집을 뒤적일 때 드는 생각은 일단

빌려 가서 잃어버렸다고 하고 다른 방식으로 변상을 하면 어떨까 하기도 했다.

그후 어쩌다 한번씩 중고책 검색으로 찾아보았으나 시집의 종적은 찾을수 없어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고 포기한지가 또 몇 년이 흘렀을 것이다.

 

그러던 중 20182월 어느 날은 살다 보니 이 시집을 이렇게 다시 보는 날도 다

있다니 했던 날로 기억된다. 한편으로는 그 옛날, 도서관에서 빌려 읽던 순간의

흥분은 어쩌면 재발간된 이 시집의 표지를 여는 순간 영원히 사라지겠구나 하는

묘한 감정이 흐르기도 했다.


단 하나의 눈송이라는 제목으로 재발간된 이 시집은 페소아의 불안의 서라는 멋진

책으로 알게 된 봄날의 책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시집에는 "입국"에 수록되어있던 다신’, ‘하지날’, ‘여름’, ‘서울개’ ,‘서울의 야경

등 다섯 편이 빠졌고 후쿠시마 원전사고 때 쓴 신작 시 세 편이 새로 추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시집에는 일부 시에 대한 기억을 더듬은 간단한 글이 후미에 첨부

되어 있어 "입국"을 능가하는 풍부한 시집이 되어 더욱 그 감회가 새롭다.

눈보라에 대한 글을 일부 옮겨와 본다.


일본어에는 눈송이에 해당하는 낱말(고유어)이 없다. 한자로 설편(雪片)”이라는 낱말이 있긴 하지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아니다. 이 시를 쓴 것은 다만 눈송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어서였다.

이 시를 썼을 때는 아마 실제로 눈이 내리는 계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나는 쓰고 싶은 낱말이 하나 있으면 그것을 계기로 술술 쓸 수가 있었다. 낱말 하나만 있으면 어디까지나 걸어갈 수 있었으며 또 어디에서 멈추면 되는지도 자연스럽게 알았던 것 같다.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언어와 만나 그것을 스스로 사용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_일부



앞서 말했지만 저자의 이름을 지우고 보면 과연 외국인이 한국어로 쓴 시가 맞나

싶을 만큼 그의 한국어 구사는 훌륭했었다. 그런 그가 일본으로 돌아가 그동안

한국 문학을 번역 소개하는 번역작업을 해왔다는 소식 또한 반가웠다. 그가

번역한 황정은이나 한강 그리고 조세희 박민규의 일본어 판 작품은 일본 독자

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을지 괜시리 궁금키도 했다.


이렇게 십여 년 그 이상 오매불망 구하던 시집이 아주 마음에 드는 새로운 장정

으로 도착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첫사랑을 다시 만난 기분이랄까,라고

할 만큼 호들갑을 떨고 싶은 심정은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동감할 것이다.

아울러 재발간을 수락해준 사이토우 마리코 님과 귀한 시집을 재발간 해준

<봄날의 책> 측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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