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팬지 폴리틱스
프란스 드 발 / 황상익 / 바다출판사 / 1982 / 302쪽
(2017.
9. 12.)
침팬지를 보며 한편으로 매료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동물원을
찾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유인원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 인간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깊어진다. 인간과
침팬지 사이의 비슷한 점은 겉모습만이 아니다. 침팬지의 눈을 주의 깊게 똑바로 들여다보면, 지적이고 자신만만한 인격이 우리를 응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만약 그들이 동물이라면 우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P.17)
인간과 동물 사이의 차이를 메울
수 있는 일련의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 고든 갤럽은 유인원이 거울 속의 자신을 인식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이런 형태의
자기인식이 결여되어 있어, 거울 속에 비친 대상을 그저 누군가 다른 개체라고 치부해버린다. 볼프강 쾰러는 독창적인 지능실험을 통해 침팬지가
원인과 결과를 어느 순간 갑자기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또한 제인 구달은 야생 침팬지가 자기 스스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야생 침팬지는 수렵을 해서 고기를 섭취하고, '전쟁'을 일으켜 자신들의 세력범위를 확장시키며 서로를 잡아먹기도
하였다. 게다가 수화 형태로 많은 기호들을 가리친 가드너 부부의 시도가 성공함으로써 침팬지들은 놀랍게도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너무나도
비슷하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이 연구는 유인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 많은 사실을 확실하게 밝혀냈다. 인간이
유인원의 마음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P.17)
침팬지들 사이에서 놀라운 사회적 조작이 사례를 많이
목격한 나는 침팬지에게 단순히 '고도로 지능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팬지가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것처럼 보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목적성을 가지고 생각하는' 능력이다.
(P.60)
우리는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과거의 경험을 새롭게 조합시키는 능력을 표현하는 데 '추리력'
혹은 '사고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달리 적합한 단어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시행착오를 통해 특별한 행동을 시험해보지 않고서도 침팬지들은
그들 머릿속에서 선택의 결과를 가름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신중하고 합리적인 행동을 보인다. 영장류들은 수많은 사회적 정보를 고려하며 상대방의
의도와 기분에 민감하게 잘 조율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진 높은 지능이 복잡한 집단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진화되어 있다고 추측한다. '사회적
지능 가설'로 알려진 이 개념은 우리 자신의 계통에서 벌어진 막대한 뇌 용량의 팽창에도 적용될지 모른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기술적인
창의성은 부차적인 발전이다. 영장류 지능의 진화는 꾀로 상대방을 이기고, 속임수 전략을 감지하고, 상호 이익이 되는 타협을 이루며, 자신의 삶에
이득이 되는 사회적 연대를 증지시키기 위한 필요성에서 출발하였다. 침팬지들은 이런 영역에서 분명히 뛰어나다. 그들이 가진 기술적인 재주는
인간보다 떨어지는 것이 확실하지만, 그들의 사회적은 능력도 그렇다고는 쉽게 단정하지 못하겠다.
(P.61)
동물들의 야망은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 매슬로는 1936년에 '지배 충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대부분의 동물 행동학자들은 그 용어를
꺼려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마카크 원숭이와 침팬지를 연구해온 나는 이 용어에 대해서 아무런 꺼리낌이 없다. 내가 관찰해온 동물들은 분명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으려고 애썼다. 제인 구달의 말을 다시 한번 인용해보자. "아주 분명하게도, 다수의 수놈 침팬지들은 높은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는데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하며, 심지어 중상을 입을 위험마저 무릅쓴다." 권력욕이 동물원의 동물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P.240)
사람들은 종종 자기가 한 행동의 목적을 나중에야 발견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사춘기
시절에 우리는 부모에게 반항하고 도전한다. 한참 뒤에야 우리는 그러한 행동을 '독립하기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동기를 분명히 의식하고서 부모와 갈등을 벌인 것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정체도 분명치 않은 무의식적 동기였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남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길 원하고 그걸 위한 전술도 개발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거나 이야기하는 것조차 회피할지도 모른다. 네덜란드의 사회심리학자 마우크 멀더는 '인간은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만족을 얻으며 타인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일련의 실험을 통해 밝혔다. 그러나 동시에 '권력'이라는 단어의 주변에는 일종의 터부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우리가 권력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할 때는 '책임을
지고 있다.' '권위 있는 지위에 있다'거나 혹은 '힘겨운 결단을 통해 남을 돕고 있다'는 따위의 표현을 즐겨
쓴다.
(P.246)
인간은 말하는 영장류이지만 행동은 침팬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말다툼도, 도발적인 언어폭력, 항의와 간섭, 화해의 언사 등 여러 형태로 언어를 활용하지만, 침팬지는 그것들을 언어가 아닌 형태로 표현하는
것뿐이다. 인간이 말 대신 행동으로 무언가를 표현할 경우에는 침팬지와 더욱더 유사해진다. 침팬지는 비명과 큰소리를 지르고, 문을 두드리고,
물건을 던지고, 도움을 청하고, 나중에는 우호적인 접촉이나 포옹으로 무마하려 한다. 우리 인간들도 보통 의식적인 결정 없이 그러한 형태의 행동을
모두 연출한다. 이러한 행동들의 동기를 볼 때 인간과 침팬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P.247)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칭하였을 때, 그는 자신의 말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지 잘 몰랐을 것이다. 우리의 정치적 활동은 인간과 가까운
친척과 공유하는 진화적 유산의 일부처럼 여겨진다. 만일 내가 아넴에서 연구하기 전에 누군가 이와 동일한 이야기를 했다면 너무 교묘한 유추라며
그런 발상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넴에서의 연구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의 기원이 인류의 역사보다 더 오래됐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내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간의 행동 패턴을 침팬지에게 투영한 것이 아니냐고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옳지
않은 것이며,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에 가깝다. 침팬지들의 행동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인간을 또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P.272)
대략 5세기 전에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군주나 교황, 또는 메디치나 보르기아 같은
세도 가문의 정치적 술수를 묘사했다. 불행하게도 칭찬받아 마땅한 그의 실감나는 분석은 종종 그들의 정치적 음모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한 것으로
오해받았다. 한 가지 이유는 그가 경쟁과 갈등을 부정적인 요소가 아니라 건설적인 것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권력을 둘러싼 동기를
부정하거나 은폐하려는 태도를 최초로 거부한 사람이었다. 기존의 집단적 허위에 대한 폭로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도리어 인간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됐다.
인간을 침팬지와 비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모욕적이거나, 혹은 그 이상의 죄악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동기를 더욱 동물적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팬지들 사이에서 권력 정치는 단지 '나쁘다'거나 '더럽다'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넴 집단에 사는 침팬지들에게 논리적 정합성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민주적 구조도 안겨주었다. 모든
파벌들은 일시적인 권력 균형을 이를 때까지 영향력을 계속해서 찾는다. 그리고 이런 균형은 서열상의 지위를 새롭게 결정한다. 다소 유동적인 지위가
'고정'될 때까지 관계는 계속해서 변한다. 이 같은 서열의 공식화가 어떻게 화해 가운데 일어나는지를 보게 되면, 집단 내의 서열이 공식화가
어떻게 화해 가운데 일어나는지를 보게되면, 집단 내의 서열이 경쟁과 충돌을 제한하는 '응집적' 요소임을 이해할 수 있다. 육아, 놀이, 협력
등은 그로인해 찾아오는 안정 상태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수면 아래의 상황은 늘 유동적인 상태이다. 권력의 균형은 매일매일 시험되며, 만일
그것이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도전이 일어나고 새로운 균형이 찾아올 것이다. 결국 침팬지들의 정치도 건설적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로
분류되는 것을 명예롭게 여겨야만
한다.
(P.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