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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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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문장은 익숙하고, 상상은 도발적이며, 제기는 쿨하다. 단편이 이렇게 술술 읽혀도 되나 싶게 책장은 잘도 넘어간다. 맹랑한, 발칙한 그녀, 그녀들. 천운영의 등장이 스멀스멀 기는 포동포동 살찐 애벌레 같았다면, 정이현의 그것은 따끈따끈한 패스트푸드 같다. 더러는 은희경식 냉소가 엿보이기도 하고. 오늘의 여성문학이 다채로워지고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총 8편의 단편 중, 표제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과 함께 ‘신김연실전’이란 부제가 붙은 ‘이십세기 모단걸’이 맘에 든다. 이십세기 모단걸에서 맘에 드는 한 대목. ‘진실은 오직 하나, 그녀가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는 것뿐. 모든 걸 끊고, 모질게 끊고,’ 아무도 가지 않은 곳으로 홀연히 사라져 버린 그녀, 오~ 멋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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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말
박정애 지음 / 한겨레출판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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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깊은 곳에 낡은 책장이 하나 있어 한 살, 두 살 내가 나이를 먹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조금씩 색이 바래져 가고 켜켜이 손때며 세월의 흔적이 쌓여가고 간혹 새로운 이름들이 슬금슬금 비비대며 나타나 간지럼을 태우며 짜투리 공간이라도 내달라 응석을 부리고.. 팽창 또 팽창, 그러다 어느 쨍한 날..

만에 하나라도 먼 훗날 내가 소위 글이라는 걸 쓰게 된다면 김형경처럼 아릿하고 정직한 글을, 박완서처럼 뭉실뭉실 연륜이 넘쳐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말들이 축적되고 축적되었다가 '그래 삶이란 별 거 아니구나' 하는 걸 온생으로 통감하고 관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때라면 글을 써도 좋겠단 막연한 바램이 있었다.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우연찮게 박정애라는 이름을 발견한 것은 인연이다. 그녀의 두번째 소설이라는 <물의 말> 삼분의 일쯤 읽었을 때였던가? 무심히 보아 넘겼던 저자의 약력을 다시 들쳐보았다. 그리고 나의 눈을 붙들어 맨 것은 '70년'이라는 그녀의 출생년도였다. 적어도 마흔 쯤은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들면서 약간 시샘하는 맘도 생겨났다.

70년생/74년생.. 우습지. 되지도 않게 샘이 났다. 전혀 새로울 것이란 없다. 그럼에도 참 잘 쓰여졌다. 묘사나 이미지 대신 그녀가 선택한 것은 이야기인 것처럼 보인다. 군데군데 구성의 산만함이 눈에 띄고, 인물들이, 이야기가 넘쳐나는 느낌이 들기도하지만 그럼에도 잘 쓰여졌다. 기본에 충실한 글쓰기 - 탄탄한 구성에 맛깔나게 버무러진 언어들.

내 생에 단 한 번도, 부당한 폭력 앞에 신경이 갈기갈기 찢길 만큼 분노했던 순간에도, 정말이지 단 한 번도 남성이 되기를 꿈꾸었던 적은 없었다. 윤회를 믿는 건 아니지만, 다음 생이라는 것이 있어 원친 않지만 다시 인간이란 종으로 태어나야 한다면 그 때에도 여성이고 싶었다.

<물의 말>을 읽고 그런 생각이 더 강해졌다. 단지 같은 성이라서 더 많은 연민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개의할 바 아니다.

그녀가 보내준 '님이 이모'에게서, 그녀가 엮어준 인연의 실타래 속에서 나이 든다는 것도, 산다는 것도, 운명이니 하는 것 따위도 나쁘고 힘겹기만 한 것은 아니잖아 하는 삶 앞에서 도도해질 수 있는 얼마간의 용기를 훔쳐냈다. 깊은 숨을 쉬고 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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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집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9
손석춘 지음 / 들녘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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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집 - 한 아름다운 사회주의자의 삶에 관한 진솔한 기록.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이사이 책장을 덮고 진지한 사색의 시간을 가지거나 누군가와 갑론을박의 치열한 토론을 거쳐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내처 달렸고,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책장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이 책을 끼고 다녀야했을런지도 모른다.

식민지 조국에서 청년으로, 이 땅의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는 진부하긴 하지만 결코 외면하거나 간과할 수는 없는 문제이며, 현대사 속의 남로당이나 박헌영의 지위에 관한 문제(가령 박헌영은 종파주의자인가? 혁명의 순교자인가?) 지도와 대중의 문제, 혁명의 순결성과 품성의 문제.. 삶의 굽이굽이에서 그가 고뇌하고 천착했던 기록들을 더듬어 가는 길이 그리 녹록치만은 않다.

구성에 있어 일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익히 아는 인물들의 등장이나 역사적 사실에의 진지하고 사실적인 접근들은 혹시? 하는 생각을 품게도 하지만 그래도 이는 픽션일 것이다.

그가 남로당 출신의 월북자이면서 박헌영을 전적으로 신뢰했었다는 것, 그로 인해 항무투의 혁명정신을 전통으로 삼는 북로당과 조직운동 중심의 활동을 했던 남로당 사이의 갈등관계에서 심정적 편향을 보이기도 하고 사적인 기록이라 때론 축약되고 비약된 면이 없잖아 있을지라도 한 인물을 통해 반세기를 아우르는 빼앗겼던 역사를 반추해 봄은 의미 있는 일이다.

반쪽의 역사는 결국 불구에 다름 아니다. 사상이나 이념의 자유가 억압당하고, 올바른 역사관이 정립되지 못한 사회는 죽어있는 사회다. 겸허한 자기반성과 이성적인 접근이 행해지고, 처절한 죽음들을 부활시켜야 한다. 그러한 과정이 선행되고 사회적 합의를 이뤄낼 때 통일이든 혁명이든 다가오지 않을까? 두 살박이의 아장걸음으로, 조급증은 버릴 것.

비록 픽션이라 할지라도 이 책에 담긴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서술은 고증의 단계를 거친 것으로 보이며 관련 자료에의 접근이 제한적인 현실에서 작가가 많은 공을 들이고 아주 오랫동안 준비해 왔을 것임이 짐작된다.

혁명이란 모든 사람들이 잘 살게 아름다운 집을 짓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미완의 혁명 속에서 교훈을 찾고 인류가 성숙해 가는 기나긴 여정에서 온전한 사회주의를 내와야 한다고 말한다.

엄준한 자기비판으로 생을 마감하는 순간 그는 실패는 했으나 그른 것은 아니라고, 매순간 삶을 사랑하고, 한계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노라고, 그 한계라는 것이 언젠가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반드시 무너질 것임을 확신한다고 했다.

그의 희망은 그가 일생을 바쳤던 진리와 아직 오지 않은 세대, 그들의 순결함과 열정이다. 그의 마지막 유서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아직 오지 않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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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 - CJK - 죽은자를 위한 미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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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글을 좋아한다. 담백하고 정갈한 맛은 덜하지만 그의 문장에선 잘 익은 식초 향, 톡 쏘는 겨자 맛이 난다. 간헐적으로 그가 내게 주는 즐거움은 무방비 상태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와 키득거림, 때론 약간의 불편한 심기로 드러난다.

<레퀴엠>에서의 그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전쟁을 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 시도도 벤자민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에서 형식을 따왔다고 밝히고 있는 이 책의 구성도 매 챕터마다 옮겨놓은 짤막한 기도문에 한결 부드러워진 그의 문장까지.. 이러한 요소들이 적절한 어우러짐을 통해 서정적이며 동시에 비장한 아름다움을 띤다. 마치 한 편의 긴 서사시처럼..

무엇보다 첫 장인 ‘키리에 - 병사들의 죽음’ 챕터는 마지막 책장을 덮고 깊은 숨을 내쉬는 그 순간까지 짙은 여운으로 남는다.

다시금 파병설로 시끌시끌하다. 무엇을, 누구를 위한 전쟁이며 파병인지. 전쟁에 부여할 당위성이 존재하기나 한 건지 이 작은 한 권의 책으로 인해 우리 안의 야만과 파시즘 돌아보고 성찰케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은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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