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척의 배 - 트로이아 전쟁의 여성들
나탈리 헤인스 지음, 홍한별 옮김 / 돌고래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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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앞으로는 혼자 있을 때가 없으리란 걸 알았다. 전쟁이 끝나면 남자들은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여자들은 목숨만 빼고 모든 걸 잃었다.



수많은 영웅들을 배출한 트로이아 전쟁의 서사는 웬만하면 모두 꿰고 있을 것이다.

남자들의 시선으로 남자들의 전쟁담과 모험담을 이야기하는 트로이아 전쟁.

<천 척의 배>에선 남자들의 그늘에 가려져서 한 문장으로 표시되었던 <여자>들의 시선으로 트로이아 전쟁을 그려낸다.

트로이아 전쟁은 테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 앞으로 황금 사과를 던지면서 시작됐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한 여신의 고달픔에서 비롯되었다면?





'가이아'는 대지의 여신이었다. 그녀는 인간들의 무게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나날이 늘어가는 인간들은 대지 위에서 자라나는 모든 것들을 파괴했다.

풍요로움으로 가득했던 가이아는 더 이상 인간들의 파괴와 무게를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제우스에게 자신의 고통을 덜어달라 말했다.

모든 신들의 왕 제우스는 그의 첫 번째 아내 '테미스'와 계획을 짰다.

"인간이 너무 많아." 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게 많지."

"가이아가 당신한테 고통스럽다고 했군." 테미스가 말했다. "인간의 무게가 가이아가 지탱하기에 너무 버거워."




대지에서 인간들을 효과적으로 없애는 방법은 바로 '전쟁'이었다.

가이아의 고통으로부터 시작된 '전쟁'의 기운은 '황금 사과'로 장전되었고, 왕자로 태어났으나 트로이아를 멸망시킬 거란 예언 때문에 양치기의 아들로 자란 파리스는 권력과 지혜 보다 아름다움을 선택했다.

아가멤논이 이끌고 온 그리스 대군은 철옹성 같은 트로이아를 바로 함락 시킬 거라 생각했지만 이 전쟁은 10년을 끌게 된다.

트로이아가 불타는 광경으로 시작한 <천 척의 배>는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여자들의 시선으로 전쟁을 이야기한다.

스파르타의 왕이 왕비를 잃었다는 이유로, 100명의 왕비가 왕을 잃어야 했다.

"메시지를 들었잖아, 안테노르. 오늘 밤에 활동을 개시할 걸 알잖아."

"아닐지도 몰라." 안테노르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딘가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고만 했어."

"어딘지 알잖아." 테아노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 목마 안에 있어. 틀림없어."

안테노르가 테아노의 말을 들었다면,

프리아모스가 헤카베의 의심을 받아들였다면,

수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의 말을 듣지 않아서 긴 세월을 신들에게 놀아났다..

아들과 남편을 잃고, 노예가 되어 트로이아를 떠나야 했던 여자들.

헬레나 하나 때문에 남편과 아들을 전쟁터로 내보내야 했던 여자들.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오지 못한 남편과 아들을 가진 여자들.

외간 남자랑 바람난 여동생 때문에 전쟁의 제물로 바쳐진 딸을 가진 여자.

오랜 세월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던 여자.

아폴론의 수청을 거절함으로써 능욕 당하고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하지만 아무도 예언을 기억하지 못해 미친년처럼 살게 된 여자.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구혼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여자.

님프였지만 양치기 남자를 사랑해서 아이까지 낳았지만 그 남편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에게 미쳐서 버림받은 여신.

모든 신들에게 왕따 당해서 속상했던 여신.

인간을 품고 풍족하게 해주었지만 인간들의 탐욕에 지쳐버린 여신.

아들 하나 때문에 많은 아들과 남편과 딸들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던 여자.

아킬레우스 못지않은 영웅의 아내였지만 자기 부모를 죽인 남자의 아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잃고, 그 남자의 노예가 되어야 했던 여자.

수많은 여자들의 목소리로 듣는 트로이아 전쟁을 읽는 내내 깊은 슬픔과 상실감이 느껴졌다.

끝없는 인내와 고통을 느끼게 되는 <천 척의 배>

그 어떤 트로이아 전쟁을 그린 이야기에서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을 <천 척의 배>로 느꼈다.

목숨 빼고 모든 것을 다 잃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트로이아 전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신들의 안배에 놀아난 인간 남자들.

현명한 여인들의 말을 새겨 들었다면 이런 전쟁은 없었을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신들의 뜻을 어찌 꺾을 수 있을까 싶다.

모든 것은 현명한 자들과 어리석은 자들의 엇박자의 춤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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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요약 금지 - <뉴요커> 칼럼니스트 콜린 마샬의 변화하는 한국을 읽는 N가지 방법
콜린 마샬 지음 / 어크로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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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의 시선보다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시선을 궁금해한다.

밖에서 한국을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항상 '그것이 궁금하다'

이유가 뭘까?

한국에서 유행이 얼마나 빨리 자나가는가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사람들이 그 유행에 얼마나 민감한가일 수 있다.

한국인들은 늘 어느 정도 유행을 따라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는 것 같다.



토종 한국인들보다 더 많이 한국의 다양한 면에 관심을 가진 저자 콜린 마샬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몰랐던 사실들까지 깊이 있게 알게 되어 우선 놀라웠다. 저널리스트라는 그의 직업정신도 있었겠지만 얼마큼 관심을 가져야 이런 사실들까지 꿰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한국에 관심이 많았던 저자는 한국에서 살아온 지 10년이 되었다.

그동안 기고했던 글들을 책으로 엮으며 편집부는 이 책의 제목을 <한국 요약 금지>로 정했다.

제목 때문에 궁금했던 책이었다.

과거부터 주변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서 그런지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보다는 외부의 칭찬이나 믿음을 더 중요시 여기며 산다.

지금 한국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국가이며 문화강국의 토대를 쌓는 중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것을 지키며 그 토대 위에 새로운 것을 쌓기 보다 다른 나라의 것을 차용하고 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콜린 마샬은 정곡을 찌른다.

이탈리아 카페를 모방한 스타벅스를 모방한 카페들이 즐비하고, 국산 자동차 보다 외국제 차들이 넘쳐나고, 전통 가옥들보다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다.

게다가 모든 인구와 문화가 서울 중심인 나라다.

이런 모습은 부정적이고 안타까운 모습이자 우리가 앞으로 해결해 가야 할 구시대의 산물들이기도 하다.




최근 글로벌 미디어가 파악한 트렌드를 보면 한국에서 발생하는 여러 개인의 자살만큼이나 주목해야 할 자살이 있다. 그건 바로 '한국이라는 국가 자체의 자살'이다.



많은 사회는 인류가 오랜 기간 발전시켜온 여러 요구가 갑자기 그저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전락해버릴 때마다 어려움에 직면했다. 대한민국은 어떤 답을 가지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한국에 살다 보면 이전에 살던 나라에서 사용하던 모든 물건이 한국판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최신 K-pop보다는 80~90년대 가요를 좋아하고, 일본과 한국과의 오랜 감정싸움도 잘 알고 있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본거지인 신촌에서 생활하며 여러 독서모임에도 참석하고, 우리말 겨루기를 즐겨 보고, 떡튀순을 좋아하며, 한국 영화와 책에도 조예가 깊다.

나보다 짧은 시간을 한국에서 보낸 사람인데도 나보다 한국의 정세를 잘 꿰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한국은 이런 나라라고 단정 짓지 않는다.

한국인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알고 한국의 미래를 걱정하지만 우리가 잘해낼 거라는 것도 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우리가 외국인들의 시선에 왜 그리 신경을 쓰는 건지, 왜 그들의 반응에 민감한지에 대해 마음이 쓰였었다.

<한국 요약 금지>를 읽으면서 그 답답함에 대한 답을 얻은 거 같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검증하기 보다 다른 나라의 시선을 통해 우리가 잘 가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거 같다.

좁은 땅덩어리에 살면서 수많은 곡절을 겪으며 5천 년 역사를 이어 온 대한민국인들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한반도의 좁은 시선이 아닌 세계인의 시선으로 검증받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잘 해나가고 있는지.

우리가 우리 것을 잘 지켜내고 있는지.

우리가 우리 것만 고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잘 섞어가며 살고 있는지.

이 좁은 땅에서 태어난 수많은 재주꾼들이 자신들의 활동 영역을 잘 넓혀가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콜린 마샬은 이런 한국인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사람 같다.

그의 글은 무조건 비판적이지도 않고, 무조건 칭찬만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런 걸 예상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몰랐던 우리를 만났던 시간이었다.

내가 몰랐던 나 자신을 친하다고 생각해 보지 못했던 주변인에게 정확하게 확인한 기분이다.

그래서 마음이 즐겁다.

문제가 많고, 화나는 일들이 많은 요즘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늘 옳은 길로 가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임을 <한국 요약 금지>로 확인했으니까.

그리고 그걸 알아주는 지인이 있다는 사실이, 그 지인이 감정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위로가 된다.

한국은 긴 역사 너머로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살아낸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끈기와 인내와 재주가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나라다.

그러니 엄청난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그것을 잘 넘어갈 수 있는 생존의 기술을 가졌다.

이 스킬을 발전시키고자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갈구한다.

단 기간에 빠르게 성장한 만큼 사람들의 정서와 생각들도 빠르게 바뀌었다.

그 간극에서 벌어지는 대립은 우리가 쌓아온 스킬로 잘 넘겨야 하는 고비다.

한국에 오래 살수록 궁금해지는 것은 바로 이 나라가 마침내 스스로의 힘을 깨달았을 때 과연 어떤 모습일까라는 것이다.

나도 이것이 궁금하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힘을 깨달아가는 와중에 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견뎌낼 것이다.

한국인은 위기에 강한 민족이니까.

한국을 겉만 훑고 쓴 글이 아니라 뼛속까지 우려낸 느낌의 글이다.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이 어떤 곳인지 다른 나라 사람의 눈으로 검증받고 싶은 사람들이 읽어 보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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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 항해하는 글쓰기 - 망망대해를 헤매는 고독한 작가를 위한, 르 귄의 글쓰기 워크숍
어슐러 K. 르 귄 지음, 김보은 옮김 / 비아북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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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작가는 내면의 귀로 자신의 글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한다. 쓰면서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브래드버리, 몰입하는 글쓰기>로 글쓰기에 대한 열망의 불꽃을 일으켰다면 <르 귄, 항해하는 글쓰기>로 글쓰기의 기술을 연마하면 좋을 것이다.

 

이 글은 르 귄이 진행했던 글쓰기 워크샵의 내용을 담은 것으로 르 귄의 글쓰기 조언과 가이드, 연습 문제와 함께 읽어보면 좋은 책들 그리고 합평회에 관한 가이드북이다. 게다가 이 책으로 열심히 작법한 사용자들의 피드백을 반영한 스토리텔러를 위한 작법서다.

단, 영어로 쓰는 작법서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글쓰기와 조금 다른 부분도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핵심만을 뽑았기에 군더더기 없이 바로 실전에 응용하며 글쓰기 연습을 하기에 좋은 작법서다.

 

들리는 글을 써라.

시대에 맞는 문법을 공부해라.

문장 길이를 조절하여 리듬과 속도를 다양하게 바꾸어라.

형용사와 부사 없이 간결하게 쓰기.

정보를 보이지 않게 설명하는 법을 연습할 것.

초고는 꽉 메워 쓰고, 퇴고는 대담하게 건너뛰어라.

 

위 글은 내가 참고하기 위해 요약한 것으로 책을 읽은 사람들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혼자 독학하기보다는 글쓰기 모임에서 교제로 사용하면 좋을 거 같다.

연습문제를 써서 서로의 글을 읽으며 문장을 다듬어 보면 더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거 같다.

책 마지막에 있는 합평회에 관한 부록 글도 있으니 뜻이 맞는 사람들과 글쓰기 모임을 진행해 보는 것도 좋은 거 같다.

 

책을 읽으며 아쉬웠던 부분이 있는데, 이 작법서가 영어로 쓰기에 관한 것이라 우리말로 쓰기에 대한 예시문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챕터에서부터 리듬감 있는 글의 예문이 번역본이라서 영어로 읽었을 때의 그 리듬을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이 책을 바탕으로 우리글에 맞는 예문들이 담겨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항해하는 글쓰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첫 번째 "들리는 글을 써라" 이다.

잘 읽히는 글은 소리가 탁월하기 때문이라는 르 귄의 말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요즘에 영화 한 편을 보는 느낌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그건 곧 이야기가 흡입력이 있고 묘사가 탁월하다는 걸 뜻한다.

하지만 르 귄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작품은 이미지가 아닌 소리를 지닌 작품이었다.

영상미가 있는 글은 급 피곤함을 주지만 영롱한 소리를 가진 글은 깊은 울림을 남긴다.

 

 

문법과 도덕성은 연관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도덕적 의무란 언어를 사려 깊게 잘 사용하는 것이다.

 

 

 

규칙을 깨기 위해서는 규칙을 알아야 하듯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문법을 알아야 한다.

기본이 없는 글은 진정한 글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문법도 모르면서 글을 쓴다고 말할 수 없다는 르 귄의 말이 가슴에 탕탕 총알처럼 박혀왔다.

 

나는 '글쓰기의 항해술'이라는 내 표현이 마음에 드는데, 사실 스토리란 마법의 배다. 자기가 갈 경로를 알고 있다. 키를 잡은 사람이 할 일은 배가 자기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뿐이다.

 

 

나는 계획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지 뭔가 글감이 떠오르면 무턱대고 쓰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쓰다 보면 원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삼천포로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그렇게 흐지부지된 경우가 많다.

플롯 짜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것에 몰입하다 보면 내 아이디어가 보잘것없어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르 귄의 이 한 마디가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내가 나에게 맞지 않는 짓을 하다가 그대로 멈춰 버린 이유를 이 말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무조건 쓰기만 했어야 했다. 삼천포로 빠졌어도 계속 쓰고 또 써서 결말을 내야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읽어가며 수정하고, 구두점을 잘 찍고, 리듬과 속도를 맞추며 간결하게 다듬고, 과감하게 건너뛰기를 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뭐라도 한 편 완성을 했을 텐데...

 

새해 들어 글쓰기 책을 두 권 읽었다.

<브래드버리, 몰입하는 글쓰기>는 내 안에서 꺼져가던 불씨를 어렵사리 살려냈고

<르 귄, 항해하는 글쓰기>는 포기했던 것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줬다.

 

뭐든

그냥 닿는 법은 없다.

이 두 권의 책이 내게 같이 도달한 이유가 있을 거 같다.

 

수많은 플랫폼이 열려 있고

이제 뗏목을 띄우는 법을 알았으니

그저 나아가는 길 밖에...

 

뭐라도 하면

뭐라도 되겠지.

 

작법서, 글쓰기 책 백날 읽어봐야 소용없다.

써봐야 한다.

 

뭐라도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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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록
프리키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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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편의 단편이 담긴 <기생록>

아주 정신없이 빠져들게 하는 매력 있는 단편이다.

 

<국가 생명 연구소>

 

사람의 머리에 칩을 심는 게 아니라 파스처럼 붙여서 정적을 쉽게 조정하고 제거할 수 있는 기술을 발명한 당사자가 그 입장이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일까?

아무리 좋은 의도로 연구했어도 살상 무기로 사용하는 순간 그 좋은 의도는 사라지고 마는 것.

요즘 <더 보이즈>란 미드에서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조직에서 감추고자 하는 비밀이 누설될 순간에 머리가 터져서 죽는 장면을 보게 됐는데 아무리 좋은 것도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의 손에 주어지면 나쁘게 사용되는 법이다.

6편 중에 제일 정교한 느낌을 주는 단편이었다.

 

<이웃을 놀라게 하는 방법>

전편에 나온 인물과 이어지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래서 연작 느낌이 나는 단편이다.

이 단편 읽고 아파트에 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동주택은 이래서 무서워 ㅠ.ㅠ

 

<이 안에 원귀가 있다>

복수라는 건 정말 무의미한 것 같다.

최고의 복수는 상대방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아닐까?

원귀가 된 소년이 참 안타까우면서도 소름 끼쳤던 이야기.

 

<소녀 사형 집행관>

제목은 뭔가 있어 보였는데 내용은 그닥 잘 살리지 못한 느낌이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는 한 편의 영화가 뚝딱 만들어지는 느낌이었다.

 

<괴물 사냥꾼>

차후에 새로운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느낌이다.

새로운 변종 괴물이 된 괴물 사냥꾼의 또 다른 활약을 기다려 본다.

잘 다듬으면 호러 판타지 시리즈물이 나올 거 같다.

 

<기생록>

6편의 단편들 중에 왜 이 이야기를 제목으로 썼는지 알 거 같았던 단편.

6편 중에 제일 이야기의 구성이 좋았다.

여기에 살을 좀 보태서 장편으로 만들어져도 좋을 거 같다.

 

프리키 작가는 처음 만나는 작가님인데 <봉제 인형 살인사건>시리즈를 쓴 다니엘 콜 작가와 결이 비슷한 거 같다.

장편이 아닌 단편이라 짧게 끊어지는 호흡으로 불안감과 공포감을 조성하기는 쉬웠지만 급 마무리한 느낌 때문에 이야기의 몰입도가 좀 떨어진다.

리고 캐릭터들이 전부 복수심에 불타고 있다. 그 복수심 때문인지 절제되지 않은 감정에서 분출하는 포악함이 널을 뛰어서 읽는 동안 내내 불편한 심기가 가시지 않았다.

단짠단짠이어야 할 맛에 짠맛만 들어간 느낌이다.

독자가 조금 쉬어갈 구간을 만들어 줬으면 더 좋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프리키 작가가 구상한 이야기의 소재들은 정교하게 다듬어서 장편으로 숨 고르기를 한다면 좋은 작품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 거 같다.

6편 모두 호러 영화의 지문 없는 시나리오 같은 느낌이라 눈앞에서 영상이 휙휙 지나가는 느낌이 난다.

 

호러블한 이야기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

정교한 이야기 보다 호로록~ 읽히는 공포와 잔혹을 원하시는 분들께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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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와 빈센트 -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스페셜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윤동주 지음, 빈센트 반 고흐 그림 / 저녁달고양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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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화집을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나는 시도 필사도 관심이 없던 차였다.

시가 마음에서 멀어진지 오래였고, 글은 악필이라서 거의 쓰지 않고 키보드 입력만을 일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필사의 열풍 속에 나도 글씨 연습을 해보고 싶었다.

나라는 인간은 약간의 강제성이 동반되어야 하기에 <동주와 빈센트> 필사단을 모집했을 때 덜컥 신청을 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시화집이 내게 닿았다.

 

4주 동안 일주일에 한 번 필사한 문장을 인증해야 하기에 나는 조금이라도 나은 글씨를 쓰기 위해 오랜만에 글씨를 연습을 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윤동주의 시는 중학생 때부터 줄곧 외우고 다녔던 시들이 몇 편 있었다.

뇌리에 박힌 시들의 강렬함이 내 감정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는 기분에 노출되었던 그 시기를 되돌아보며 한층 차분해진 마음으로 짚어보는 윤동주의 시들이 이젠 더 이상 그때의 격렬한 감정은 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대신 그때는 깨닫지 못했던 아픔, 고통, 희망, 절망, 염려로 다가왔다.

 

 

어른이 되어 한때 좋아했던 시들 앞에 다시 서 보게 되니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못 쓰는 글씨를 쓰겠다고 여기저기 산재해 있던 노트들을 쌓아두고 이리저리 굴러다니 던 필기구들을 모아 놓고

드럽게 급한 성격을 다스리며 한 자 한 자 천천히 쓰려고 얼마나 나를 다독였는지...

 

글씨가 널을 뛰고, 연필을 쥐어 본 지 삼백만 년은 된듯한 손가락에 다양한 펜들의 감각을 익히는 시간이 지나고

필사의 미션을 완성해 가면서 윤동주의 시 맞은편에 담긴 고흐의 그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쩜 이렇게 딱 맞는 그림을 넣을 수 있었을까?

누가 이런 기획을 했을까?

그 많은 그림과 시들 사이를 얼마큼 다녀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시와 그림을 찾아낼 수 있는 걸까?

 

 

고흐의 다양한 그림들 앞에서 내가 알던 고흐에 대한 감정이 달라짐을 느낀다.

'자화상'과 '해바라기'의 강렬한 모습으로 기억되던 고흐의 모습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윤동주의 시들도 '서시'와 '별 헤는 밤'으로 각인되었던 어린 날의 윤동주에서 벗어나

다양한 감정을 그려낸 시들 사이를 거닐며 그가 살다간 시대의 느낌을 오롯이 느끼고 있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발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두 사람의 자화상이 서로를 위로해 주는 거 같다.

한 사람은 글로

한 사람은 그림으로...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두 거장의 만남이 21세기에 이루어졌다.

윤동주의 시가 고흐에게 위로가 되고, 고흐의 그림이 윤동주에게 힘이 되어 주었을 거 같다.

그들이 동시대를 살아서 서로 교류할 수 있었다면...

 

어쩜 닿을 수 없는 그곳에서 서로의 작품을 통해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저녁달고양이 출판사의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시리즈가 궁금하다.

한 달 한 달 사 모아서 마음도 다스리고 내 글씨도 다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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