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일기 -1-, 2014년 11월 첫째 주. 2014년 11월 1일~11월 8일

 

  왓챠라는 어플을 깔고 난 다음, 깨달았던 것은 내가 생각보다 영화를 별로 보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물론, 뭐 양이란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건 책이랑 똑같은 문제다. 나는 다독한다는 사람에 대해 큰 가치를 두진 않는다. 중요한 건 어떤 책을 어떻게 읽었느냐의 문제니까. 그래도 내가 생각보다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건 마치 제대로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서는 몸무게를 꼭 재봐야 하는 것과 똑같은 수준으로 필요한 작업이었다.

 

  어쨌든, 내가 어떤 영화를 보았는지 왓챠를 통해 확인하고 난 다음, 이제부터 영화를 정말 작심하고 봐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시험 기간 같은 예외 경우를 제외하고는 영화를 하루에 한 편씩은 보아야겠다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걸 일지처럼 작성하고 공유하는 작업을 해야겠다 결심했다. 모르지, 이렇게 쓰다보면 세상에 영화동지가 늘어날 수도!

 

  살짝 언급을 하고 지나가자면, 영화 각각에 대한 자세한 감상은 사실 평글로서 길게 써야 하는 것이 정석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상만을 채취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다음이 11월 첫째 주에 내가 본 영화 목록이다.

 

11월 1일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밤', 루이스 브뉴엘의 '어느 하녀의 일기'

11월 2일 :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

11월 3일 :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11월 4일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일식' (한국어 제목 : 태양은 외로워)
11월 5일 : 마이클 마키마인의 '콜걸' (스웨덴 영화제)
11월 6일 : X
11월 7일 : 얀 트로엘의 '마지막 문장' (스웨덴 영화제)
11월 8일 : 로만 폴란스키의 '테넌트'

 

  이 정도를 보았다.

 

  날짜별로 정리하자면, 11월 1일에는 시험이 끝난 다음 날이라 집에 앉아서 영화를 보았다. 요즘 내가 빠진 배우가 프랑스 대여자배우 쟌느 모로이다. 쟌느 모로가 나온 두 영화를 11월 1일 날 몰아보았다.

 

  11월 6일에는 안타깝게 영화를 보지 못했다.

 

  11월 5, 7일에는 이화여대 모모에서 스웨덴 영화제를 통해 무료로 스웨덴 영화들을 볼 수 있었다.

 

  감독별로 정리하자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들은 정말 예술작품 그 자체였다. 큰 화면으로 정말 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이었다. 만약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두 가지이다. 그것은 장면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미학의 문제, 그리고 영화의 서사와 그 가지를 통해 스며나오는 정서(내용이라는 단어로 압축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의 문제이다. 그 두 개를 다 이루어내면 그 사람은 예술인이다. 전자에만 도달한 사람은 기술인이고, 후자에만 정통한 사람은 투박한 사람일 수 있다. 어느 쪽이나 예인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이미 어떤 한 지경을 찍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의 장면 호흡은 정말 길고, 주로 풍경화에 가깝다. 인간을 도시의 눈으로 관찰하는 그의 시선은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방황을 찍어낸다. 그리고 종국에 인물이 사라진 그곳에서는 장면을 꽉 채우고 폭발할 듯 이글거리는 일식과 같은 정서가 흘러나온다. 여백의 미를 아는 사람이랄까? '밤'의 마지막 장면, '일식'의 마지막 장면, 특히 '일식'의 마지막 장면은 지금도 종종 다시 돌려본다.

 

  코엔 형제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좋아하는 감독들은 아닌데, 그들이 예술인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차원은 아니다. 잘 만든다. 그런데 어떤 지점에서는 사실 취향이란 문제도 강력하게 작용한다. 이들은 내 기준에서는, 상당히 균형 잡힌 이들이고, 나는 그게 마음에 안 든다. 이들은 웨스 앤더슨과 비슷하다. 그들은 나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정말 잘 만들었다, 라는 말이 나오지만 마음 깊은 곳을 톡 건드리진 못한다. 그런데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는 내가 본 이들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았다. 자세히 이야기하면 스포일러니 굳이 더 나가진 않겠지만 예술과 창작에 뜻이 있는 모든 사람의 고통과 고민, 부조리와 모순을 잘 묘사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정말 에스파냐가 낳은 최고의 명감독이다. 그는 특히 여자 이야기를 다룰 때 있어서 상당히 좋은데,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언뜻 산만할 수 있지만 결국은 종점을 향해 가는 길을 착실히 밟는 영리한 영화다. 더 할 말은 없고, 사실 이 사람의 영화는 '귀향'이 정말 좋다. 관심 있는 분 꼭 보시기를.

 

  '콜걸'의 경우는 애매하다. 상당히 투박하다. 문제가 있을 정도로 투박하달까. 장면미학이 독자적으로 구성되지 않은 감독이었다. 데뷔작이었던 듯 하지만, 훌륭한 감독들은 데뷔작으로도 장면미학을 구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마지막 결말은 매우 좋았다. 역시 스포일러에 가까우니 말은 안 하겠지만, 특히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 결말이라는 것만 언급하는 정도로 끝내겠다.

 

  얀 트로엘 감독 같은 경우 보고 나서 너무 놀랄 정도로 영화가 세련되었었다. 내가 정말 영화를 하루에 한 편씩 보아야 하는 이유를 절감하게 해준 영화였다. 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이러한 수준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들이 있다. 장면미학적으로 이미 독자적인 경지를 구축해 놓은 감독이었다. 정말 기가 막힌, 만약 판소리였다면 내가 얼씨구 외쳤을 정도로 좋은 장면들이 있었다. 또한 그의 영화적 시선에는 정서가 고밀도로 농축되어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에만 충실한 한 이기적인 남자의 정서를 어찌 그렇게 훌륭하게 짜놓았는지. 감탄만 하면 지겨우니 다시 여기서 줄이는 것으로.

  

  로만 폴란스키의 '테넌트' 같은 경우는 상당히 기대하고 봐서 그런지 기대보단 이하였다. 물론 잘 만들었다. 못 만들진 않았는데, 솔직히 어떤 지점부터는 조금 뻔한 이야기 같았다. 감독의 괴기하고 정신분열적인 정서를 느낄 순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것조차 조금 뻔한 형식과 뻔한 내용 같기도 했다. 다시 보면 평가가 달라질 순 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 본인이 연기를 인상적으로 해낸 것은 소소한 재미의 한 요소이기도 하다.

 

  

  길게 썼다. 사실 작품 하나하나만 따지면 훨씬 더 길어야 하지만 인상 위주라서 이 정도로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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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유난히 센 날이면 한강 물결도 거칠다. 순종적으로 한 방향으로만 강너울을 푸아 뱉어낸다. 먹구름이 잔뜩 껴 물조차 검어보이는 길을 걷던 내 눈에 누군가가 매우 밝은 조명으로 시커먼 강가를 비추는 것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영영 못 찾겠구나."라는 문장을 조립했다. 물 위로 무엇이라도 떨구면 곧 저 멀리 헤엄쳐 가버릴 정도였다. 찾기를 포기한 듯 빛의 깜박임은 곧 무기력해졌고, 나도 시선을 거두었다. 수면에서 물살인지, 불은 살점인지 구분치 못할 무엇인가를 보기라도 할까 비겁하게 두려워 하며 그곳을 벗어났다.

  예전에 동호대교에서 시작해, 동호대교로 돌아온 짧은 산책을 한 적 있다. 가기 전에는 없던 새로운 광경이 있었다. 원래 한강을 거니노라면 자전거를 타는 점들과 걷거나 뛰는 선들을 빼고는 그닥 바뀌는 배경이라곤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구급차가 서있었고, 저 머지 않은데도 아득한 강가에 하얀 천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중히 덮어놓은 무엇인가가 뉘어져 있었다. 얼굴을 보이지 않고 모자만 차분히 눌러쓴 남자 두 명이 곁에 적장자들처럼 서있었다. 죽은 것과 산 것의 차이는 바로 이 지표면 한 장의 차이였다. 나는 지금 위에서 걷고 있지만, 언제 저 아래 누워 하얀 천을 덮고 시퍼렇게 웃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2015년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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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물 붓기를 바라는 소년 같은 화분에게

말캉한 피붓가를 치나친 온갖 의미없는 존재들은

어제오늘 지나간 한 결의 바람소리와 다르지 않고

그는 내일, 그 다음 내일도 볼 태양의 얼굴 같은 그녀만 기다린다


어느덧 알아버렸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아야만 했던

언제나 사랑은 손가락 안에서 스챠버린 매끈한 잉어 비늘

남아버린 것은 잡으려는 욕망, 휘발될 간절함, 곧 이을 절망 뿐

현실은 무너져버린 집터, 그러니 남은 색분토로 그녀의 얼굴을 그려 짓는다


그리운 그녀의 얼굴이 어제 본 그 햇살과 같았는지 기억은 희미하고,

어떻게 용케 건네받은 냄새 어린 손수건 조각만 콧자락에 있어

지치지도 않고 이름과, 향과, 눈방울을 떠올리며 미소 짓고

다시 만나 서로의 목에 주름진 붉은 입술을 비빌 날만을 꿈꾼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도 이미 많은 것을 보았으니,

잘랑이며 시리운 물가조차 곧 미지근해지고

은근하게 데워진 불가조차 곧 잿만 남으리


차라리 아예 영원히 어긋난 길을 걷는 게 나을 것이라

이번의 사랑은 다른 여자와는 다르게 그 끝조차 보지 않기를,

그만의 사랑은 다른 경우와는 다르게 그 시작도 오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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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과제로 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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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벼움과 무거움이 교차하는 60년대 서울의 겨울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을 읽고심리주의 비평 중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개념으로 분석


 

 

목차

 

Ⅰ. 서론 - 가벼운 욕망의 젊은이들, 무거운 이별을 한 남자와 우연히 만나다

 

Ⅱ. 가벼운 남자들, 그리고 지나치게 무거운 한 남자

1. 두 젊은이의 욕망을 둘러가는 대화

2. 세상을 포기한 우울한 남자

 

Ⅲ. 결론 - 인간의 저열한 밑바닥인가, 인간 본성의 나약함인가

 

Ⅳ. 참고문헌

 

 

 

Ⅰ. 서론 - 가벼운 욕망의 젊은이들, 무거운 이별을 한 남자와 우연히 만나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은 짧은 단편이다. 김승옥의 대표적인 글 중 하나인 이 단편은 도시화가 진행된 서울을 배경으로 밤에 우연히 만난 스물다섯의 두 남자와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전개된다. 막 아내를 잃은 삼십대 중반의 남자의 절절한 괴로움과는 대조적으로 그것이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 없다는 듯 남의 불행을 부담스러워만 하는 두 젊은 남자의 심리는 독자의 눈에 비양심적이고 무책임하게만 보인다. 하지만 무기력하게 흐느적거리는 김승옥의 서울에서는 그 모든 인간적 양심이 휘발되어도 놀랍지 않게만 느껴진다.

  이 소설을 제대로 비평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서울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시대의 서울이 갖고 있는 도시화의 모습, 그 안에서 파편적으로 분열되고 고립된 개인상의 끔찍한 외로움이야말로 김승옥이 그려내고 싶었던 일면들 중 하나일 것이다. 이미 앞서 이러한 서울의 도시적 공간과 그 안의 소외된 모습을 상징과 모티프로 분석한 논문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서울, 1964년 겨울」을 읽으면서 그러한 거대한 흐름을 전제로 하되, 개인들의 심리 양상에 집중하고 싶었다. 필자의 눈에 극중 인물들의 모습은 단지 서울이라는 공간에서만 가능한 행동들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기보다 그들은 프로이트 식으로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과 문명 안의 괴리에서 끝없이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초로(草露)의 인간들에 가까웠다.

  필자는 본론에서 「서울, 1964년 겨울」을 심리비평의 방법 중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인 개념을 이용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그러한 분석에서 마주칠 수 있는 인간의 깊은 심리에서 복잡한 사회와 스스로를 분리시켜 무책임한 회피와 단순한 쾌락만을 목적으로 하는 일면, 진지하고 밀도 깊었던 인간관계의 붕괴로 깊은 슬픔에 빠져 죄책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일면, 그리고 그러한 인물들의 어색하고 낯선 만남을 이야기해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Ⅱ. 가벼운 남자들, 그리고 지나치게 무거운 한 남자

 

1. 두 젊은이의 욕망을 둘러가는 대화

 

  「서울, 1964년 겨울」의 도입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황당하다. 25살의 젊은 두 남자는 배경이나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이다. ‘나’는 시골 출신에, 고등학교만 마치고, 원하던 직업을 못 구해 구청 병사계에서 일하는, 게다가 성병에도 한 번 걸려본 적 있는 사람이다. 반대로 대학원생이라 자신을 소개한 ‘안’이라는 인물은 집도 잘 사는 것처럼 보인다. 공통점 하나 없어 보이는 이 두 사람은 만나서 파리와 움직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외간 사람들이 보기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를 소재를 그들은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무의미함은 무의식에 숨어있는 그들의 욕망을 은근 드러낸다.

  날아다니던 파리의 이미지가 꿈틀거리는 것으로, 그리고 "그 여자의 아랫배가 조용히 오르내리는 것"이라는 이미지로 움직여 갈 때, 우리는 젊은 남성의 의식 언저리에 있는 성적인 욕망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배운 사람이라는 '안'은 그것을 음탕한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린다. '안'의 낙인에 '나'는 속으로 발끈해 본다. '안'은 '나'의 욕망에서 좀 더 나아가 데모를 이야기한다. 같은 생명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인적인 욕망만이 아닌 사회적인 욕망까지 읽어낸다. 그가 받은 교육의 힘으로 짐작된다. '안'은 서울이 모든 욕망의 집결지라고 답을 내린다.

  '안'의 진술은 상당히 정확하다. 서울은 무수한 개인들의 욕망들을 담아내고 있는 거대한 공간이다. 이 문명 공간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다. 그 질서는 산업화, 현대화의 질서다. 빠른 속도로 변하는 이 공간은 그 안에 있는 개인들을 포근히 안아준다기보다는 소외시켜 버린다. 사방이 막혀버린 벽 같은 어느 선술집은 서울 안에서 소외된 전망 부재의 공간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 공간은 동시에 인간에게 남아있는 본능과 욕망을 부채질한다. 서울 곳곳에 있는 아리따운 아가씨들을 위시한 광고들은 조용히 젊은 사내들을 향해 미소 짓고 있다.

  문명의 고고함과 문명 안에 잔존하는 개인의 욕망은 프로이트적인 관점에서는 당연한 병존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여러 편리함과 생명 유지를 위해 문명을 이룩했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 자신의 본능을 억눌러야 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여러 욕망이 규제되지 않는 한, 평화로운 문명을 이룩해 진보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인간 본능의 억제를 프로이트는 문화적 '욕구 불만'이라고 묘사한다.

  「서울, 1964년 겨울」에 나오는 이 두 청년 역시 욕구 불만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서투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도하던 그들은 결국 의미 없는 대화만이 서로가 무리하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방식임을 깨닫는다. 꿈틀거림, 삶과 생에 대한 에너지는 그들이 갖고 있는 진짜 욕망이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외설적이고 음탕한 것이 된다. 지성인인 '안'은 그러한 욕망에 더욱 예민하다. 음탕하다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욕망을 더 구체적으로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내면의 욕망에서 비롯된 인간 본능의 진지함을 피하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나'가 '안'을 곯리려고 시작한 의미 없는 대화가 더 편하게 이루어진다. 평화시장 앞의 가로등들, 화신백화점 육층의 창들, 물건 파는 여자의 모습,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들이야말로 그들이 아무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들의 대화는 의미 없는 부분을 항해하다가 생(生)으로 귀환한다. 욕망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다시 욕망으로 돌아온다. 대화는 욕망을 둘러 이루어진다. 그들이 왜 지금 그 늦은 시간에 밖에 나왔는지 밝히는 부분에서 그들이 자그마하게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욕구가 암시된다. '나'는 하숙방에 들어앉아 벽이나 쳐다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안'은 밤거리에 나와 풍부해지는 느낌, 살아있는 느낌을 얻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고 밝힌다.

  젊은이들은 욕구불만을 양산하는 문명의 질서 속에서 더 나은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들의 욕구 자체가 모두 해소되고 밝혀지는 것을 기대하진 않는다. 그저 이 외로운 거리 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존재가 또 몇 있다는 공감을 원한다. 그 단편적인 감정의 공유와 사소한 쾌락의 충족만이 그들이 원하는 바다. 자그마한 위로를 받고 싶어서 나온 그들이 만약 원래 계획대로 정식으로 한 잔만 하고 헤어졌다면, 아마 그들은 자신들의 무의미하고 가벼운 욕망만을 갖고 다시 원래의 삶으로 복귀했을 것이다.

 

2. 세상을 포기한 우울한 남자

 

  이 젊은이들은 예상치 못한 인물을 한 명 더 만나게 된다. 가벼운 욕망만을 가진 그들의 곁에 다가온 인물은 서른대여섯 살로 보이는 한 사내다. 그 사내는 가난뱅이 냄새가 난다는 서술자의 표현처럼 빈약하고 약하고, 우울해 보인다. 그는 중국 요릿집으로 두 명의 젊은이들을 데리고 가서는 비싼 음식을 시킨다. 부담스러울 것 같은 묵직한 이야기를 금방이라도 뱉을 것처럼 보이는 그의 얼굴 앞에서 두 젊은이들은 어색해 죽을 것만 같다. 술자리에서 재미있게 접근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이렇게 곧 죽을상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는 '나'의 진술은 의미심장하다. 가벼운 쾌락끼리의 만남은 가볍게 끝나지만, 진지하고 묵직한 존재와의 만남은 그 이상을 요구한다. 복잡한 문명의 질서 속에서 보잘것없는 욕망의 가벼운 해소만을 바라는 개인들에게 과한 마음의 짐은 기필코 사양해야 할 무엇이다.

  사내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는 아내와 자기가 맺었던 즐거운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재밌게 같이 살았던 아내가 급성 뇌막염으로 죽었다고 한다. '안'과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 사내로부터 빨리 벗어날 궁리만 한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는 분명하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쾌락 자아에 따라 쾌락 생산에 매진하고 불쾌는 회피한다. 마찬가지로 현실 자아는 유용한 것을 추구하고, 손상을 당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말을 통해 젊은이들이 사내의 불행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그들은 즐거움을 쫓는다. 하지만 인생에서 맛볼 수 있는 슬픔과 비애는 전염병처럼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내가 아내의 시체를 팔아 받은 돈을 흥청망청 쓰기 시작하자 '안'과 '나'는 죄책감도 없이 그의 불행에 승차한다. 그들은 넥타이를 사주겠다는 사내의 제안을 거절하지도 않고, 심지어 사내에게 제안해 성적 욕구를 풀러 종로 3가로 가자고까지 한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여자의 뱃살을 생각하는 ‘나’에게 음탕하다고 무안을 주던 ‘안’의 묵은 속내가 그때야 잠시 엿보인다. 억압되어 있던 욕구를 남의 불행에서 비롯된 돈으로라도 해소하려는 '안'의 가벼움에 사내는 그때서야 처음으로 경멸하듯 젊은이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린다.

  두 젊은이에게 사내가 사랑한 아내의 죽음은 그들이 지나가다 마주하게 된 화재와 성질이 비슷하다. 그들이 보는 화재는 큰 사건이고, 그 안에서 분명 누군가가 막대한 손해를 입었을 테지만, '안'이 말한 것처럼 그들에게 그 화재는 화재 자신의 것이지 누구 한 특정한 개인의 것이 아니다. '안'의 것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기에 그들은 화재에 흥미가 없다. 그들은 화재에 그러한 것처럼 사내의 아내의 죽음에도 마찬가지의 태도를 취한다. 사내의 아내와 사내가 가진 관계는 그 둘만의 것이기에 두 젊은이는 사내의 철저한 슬픔에 아무런 흥미가 없다.

  하지만 사내는 다르다. 프로이트는 두 사람이 맺은 관계가 깊은 애정에 묶여 있는 만큼 외부 세계에서 자신들을 고립시키는 경향이 더 강하다고 말한다. 사내가 아내의 친정이 정확히 어디였는지 모르는 것을 그 예시로 들 수 있다. 부부는 서로에만 몰두했었다. 프로이트는 사랑을 인간이 문명으로의 통합을 지향해주는 기능을 하는, 일종의 문명의 발명품이라고 보았다. 부부생활은 지속적인 성생활을 보장하고, 즐겁고 안락한 남녀의 생활을 상징한다. 그러나 사내에게 그러한 삶은 끝났다. 아내는 죽었고, 그는 죽은 아내의 시체를 판 대가로 돈을 받았다. 그 돈을 가지고 무엇이든 즐기려고 노력하는 사내의 모습은 그가 가졌던 사랑이라는 관계의 무거움으로부터 애타게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는 곧 돈을 치워버린다. 화재 속으로 돈을 던져버린 사내는 아내에 대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에게 쾌락을 줄 수 있는 돈에서부터 벗어난 그는 곧 자신의 직업이 하는 대로 월부 책값을 받기 위해 한 집을 찾아가지만, 그곳에서 방문을 거절당한다. 세속적인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수단과 단절되고, 자신이 세상에서 직업으로 삼았던 일에서마저 거절당한 그는 자신의 세계 중 가장 큰 일부였던 아내를 애타게 부르짖는다. 그때서야 그는 자신이 맺었던 관계 중 가장 가까웠던 존재가 이 세상에서 부재하다는 사실을, 자신이 아내의 시체를 팔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았다는 사실에 처절하게 직면한다.

  혼자 있기를 두려워하던 사내가 혼자 있게 된 여관방에서 자살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역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인생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고통을 일시적으로 완화시킬 수단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 중 가장 강력한 방법은 현실을 적으로 간주하고, 현실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현실이 그가 도전하기에 너무 강력하므로 그곳에서부터 회피하거나, 은자가 되거나, 아니면 사내처럼 죽어버리는 것이다. 자살은 결국 사회와 자신으로부터의 완벽한 단절을 상징한다. 그가 그러한 방식으로 세상과 단절할 정도로 괴로울 수밖에 없던 이유를 고민하면, 죄책감이라는 감정 때문일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자기 징벌을 하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 중의 하나가 죄책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에게 죄책감은 엄격한 초자아와 초자아의 지배를 받는 자아 사이의 긴장을 의미한다. 그의 논의를 따라 생각해보면, 문명이 우리 안에 있는 공격 본능을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낸 그 양심이 사내를 죄책감이라는 창으로 공격했을 수 있다. 아니면 자신의 일부분일 만큼 깊은 관계였던 아내를 잃었다는 상실감 그 자체도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지나친 우울증에 빠진 사내는 여관방에서 죽어버렸고, 옆에서 동반하던 젊은 두 남자는 이 사고를 무참하게 방관 하였다. 그들은 사내가 가진 끔찍한 슬픔은 회피하려 했고, 사내가 베푼 즐거운 돈놀이에는 기꺼이 참여했다. 문명이 제공하는 거대 질서 안에서 익명성을 보호받은 그들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다. '안'은 사내를 혼자 놓아두면 죽지 않았을 줄 알았다고, '나'는 죽을 것이라고 예상도 못했다며 비겁하게 자신들을 비호한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사내의 자살에서도 아무 책임 없이 떠난다. 하지만 언젠가 그들도 십년 후 서울 어느 거리를 힘없이 거닐지도 모를 일이다.

 

Ⅲ. 결론 - 인간의 저열한 밑바닥인가, 인간 본성의 나약함인가

 

  필자는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을 심리주의 비평 중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을 이용해서 분석해보았다. 소설 안에는 억압된 욕망으로 인해 생길 수밖에 없는 욕구 불만을 서울의 길거리를 가볍게 부유하며 해소하는 청년들이 있다. 그들은 인간 소외를 부추기는 도시화된 서울이라는 문명에 짓눌려 있지만, 그 안에서 꿈틀되는 성과 생에 대한 에너지를 갈망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그들과 반대로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한 사내의 큰 절망도 있었다. 하지만 두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그 사람에게서 받아낼 수 있는 쾌락은 다 취하고, 옆에 있어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소통은 피해버렸다. 프로이트식의 쾌락원리에 따라 두 명의 젊은이는 자신들의 쾌만을 쫓았고, 낭떠러지로 달려가는 한 사람을 막을 수 있었는데도 막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형상화된 두 젊은이의 잔인한 면모는 인간의 저열한 밑바닥인가, 아니면 인간 본성의 나약함인 걸까?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성이 파괴적이고, 성적인 것을 열망하는 단순한 원리를 가진 것에 대해 원래 인간은 고상한 존재가 아니므로 딱히 실망할 필요도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필자도 인간을 고상하거나 날 때부터 선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소설에 나타난 ‘안’과 ‘김’을 악하다고 비난할 의도는 없다.

  그러나 저열한 밑바닥을 보여준 것은 아닐지라도 김승옥이 그려내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그것은 인간 본성의 나약함을 그린 것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문명과 본능의 충돌은 결국 인간이 완벽한 행복,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왜 어려운지에 관해 설명하는 유용한 틀 중 하나일 뿐이다. 발전한 서울은 더 많은 인구를 껴안고, 더 많은 욕망 충족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 안에서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외롭다. 파편화된 인간들은 나약해져 있고, 무기력해져 있다. 다른 인간에 대한 무관심은 그들이 다른 이를 위해 해줄 무언가는 애초에 없거나 불가능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들에게 사내의 아내가 죽은 사건은 비극이긴 하지만 그들이 참견할 비극이 아니다. 자신들의 상처와 손실이 아니면 신경 쓸 것 없다는 생각에는 자신의 것만을 지키기에도 바쁘다는 인식이 숨어있다.

  프로이트가 인간 심리의 원리를 다소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 보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소망하는 완벽한 행복, 기대한 것과 결과물의 온전한 일치가 어렵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원하는 것을 항상 가질 수만은 없는 취약함을 안고 살아갈아야 할 우리의 자세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저 상황에서 ‘안’과 ‘나’가 다른 태도를 취했다면 한 명의 사람이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다. 그렇게 보면 김승옥의 소설은 서울의 비겁한 60년대를 고발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김승옥이 보여준 1960년대의 서울이 외롭고 고독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책임에서 도망가게 종용하는 곳이었다면, 지금 2010년대의 서울은 어떠한 장소인가? 여전히 나약한 인간 본성을 가지고, 수없이 일어나는 비극들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는 핑계를 대며 비겁하게 도망가고 회피하는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면, 서울을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에게 제각각 ‘안’과 ‘나’와 같은 성질이 있는 것은 아닐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Ⅳ. 참고문헌

 

김승옥, 『무진기행』, 일신서적출판사, 2007

송준호,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제29집』, 2006

Freud Sigmund 지그문트 프로이트, 윤희기 옮김, 『프로이트 전집 13 무의식에 관하여』, 1997

Freud Sigmund 지그문트 프로이트, 김석희 옮김, 『프로이트 전집 15 문명 속의 불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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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의 벽 (반양장) 문학과지성사 이청준 전집 4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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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과제용으로 제출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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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사회, 개인에 대한 깊은 고민을 바탕으로 나온 문학적 결실 - 이청준의 「소문의 벽」을 읽고

 

 

  필자는 이청준의「소문의 벽」을 한 문장, 두 문장 읽으면서 70년대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소설의 정취에 빠져들었다. 이 소설은 전형적으로 매우 잘 쓰인 중편소설이다. 처음에는 정체불명의 상태로서 읽는 이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한다. 중반에서는 진상을 밝힘으로써 전반부에서 깔아놓은 여러 고민들을 심화시킨다. 결말은 미해결 상태로 마무리 지어지며 여운을 남긴다. 완급이 잘 조절되어있고, 읽는 중간에 지루할 틈이 없다는 점에서 읽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흥미의 면에서만 성공한 작품은 아니다. 작품 전반에서 형상화되어 있는 주제의식 역시 무척이나 흥미롭다.

 「소문의 벽」은 잡지에서 일하는 '나'를 중심으로, '나'가 우연찮게 기이한 인물인 '박준'과 조우하여 그의 사정을 알게 되는 것이 주된 줄거리다. '박준'은 맨 처음 정신병원에 들어갔을 때는 실제로 정신이상자가 아니었지만, 정신이상자인 척 한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이라도 말해야 한다는 강한 열망을 거세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준'이 지쳐 나가떨어지긴 했지만, 이처럼 무엇인가를 반복적으로 말하고 싶어 하는 열망은 모든 예술가들의 기본 정신이다. 만약 건조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세상을 살아가며 겪는 경험들에도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런 사람에게 예술이 굳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언젠가 그 사람의 가뭄 같던 심장에 단비가 내려 그 굳은 땅이 촉촉해질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박준'과 같은 섬세한 영혼에게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일촉즉발의 상황이 큰 충격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그 충격을 계속 마음에 되새기고, 골수까지 세뇌하여 자신의 입과 손에서 그 잔재들을 흘려왔다.

  그의 연약함은 무엇이라도 말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좌냐 우냐를 골라서 대답하라고 윽박질렀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 그는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더 큰 문제는 그 어떤 진술조차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혐의 받고, 유죄선고 받은 채 기다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박준'은 도망쳐 나올 수 없는 그 공포 속에서 용의자로 질식하고 있었고, 그 모든 의식에서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신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병원의 의사 역시 그의 진술을 딱지붙이고, 하나의 길로 몰아갔다는 점에서 그가 도망치고자 했던 정신검열의 억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검열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도처에 있다. 예술가로서 그가 쏟아낸 진술의 노력은 같은 문학계 안에서도 검열 받는다. 개인적이고 사변적으로만 보인다면서 ‘박준’의 글을 받아들이지 않은 '안형' 역시 일종의 검열권력으로 작용한다. '안형'은 자기 자신의 경우에는 양호하다며, 그저 생각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주변의 시선이나 사익을 위해 편집을 하는 경우도 있음을 '나'에게 주지시킨다. 하지만 사회적인 요구를 전면적으로 표시하지 않고, 사회의 양심을 앞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박준'의 소설을 자격이 없다고 단정 짓는 '안형' 역시 여전히 하나의 검열로 작용한다. 이러한 ‘안형’에 대한 '나'의 내면적 반발은 예술의 형식이라는 문제에서 작가 이청준이 예술의 자유로움을 갈망했음을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발화된 말이 갖은 검열에 걸리는 것은 숙명적일지 모른다. 필자는 작가 이청준이 왜 이 단편의 이름을 「소문의 벽」이라고 지은 것인지 고민했다. 어떤 말이든 입으로 나가면 다 소문이 되어버리기에 작품을 통해서 한 말만이 진정한 대화가 된다는 '박준'과의 인터뷰 내용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모든 말들은 검열을 통해 비뚤어지고 왜곡된다. 아무리 진의를 말하려 한다 해도, 진의와는 상관없는 다른 현실의 압력들에 의해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니라 소문이 된다. 웅성거리는 그 말들은 참이지도 않고 오히려 소문으로만 나돌아 다니며 진짜를 가리고, 위선으로 위력을 발휘한다.

  이 왜곡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필자는 왜곡이 생기는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언어는 원래 실제를 반영하지 않고 굴절한다. 하지만 이청준은 '나'의 입을 빌어 그 시대의 암울함을 강조한다. 그는 소설에서 '박준'이 받은 전짓불빛 비슷한 것이라도 안 받아본 사람은 없지만, 그 강도가 더함에 따라 사람들이 받을 수밖에 없는 고통은 더 커진다고 말한다. 이렇게 강도 높은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압력 속에서 꿋꿋이 자기진술을 펼칠 수 있을까? 그 시대 같이 고통스러운 시절에 손쉽게 글을 쓰는 이들은 자신이 감당해내야 할 고통의 몫이 없기 때문에 수준이 시원치 않으리라고 '나'의 입을 빌어 이청준은 그 시대를 진단하고 있다.

  그 시대에는 또한 단순히 당시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전쟁이라는 민족 간 상잔의 비극에서 발생한 상처도 안은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때였다. 부지기수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판국에, 우와 좌 중 하나를 눈 가리고 선택해야 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극도로 피곤한 검열의 철저한 희생자들이었다. 그 지옥 같던 시간이 지난 6,70년대의 현실에서조차 피해자들은 그 지독한 상처를 위로 받을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대한 감정적 이해보다는 과학과 이성이라는 이름 아래 다른 사람을 치료하겠다는 명목으로 또 다른 이름의 권위가 상처자리를 지져놓았다. 민족상잔의 시대는 가고, 새로이 부여받은 권위가 다른 사람을 제 멋대로 진찰했다. 확고한 믿음에서 비롯된 확신은 '박준'과 같은 사람들을 실험실의 하얀 쥐 다루듯 하였고, 결국 실패가 된 실험은 그를 희생양 삼은 것과는 별개로 결국 나중에 어떤 식이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뻔뻔스러운 변명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런 의사의 무책임한 태도에 ‘나’가 깊은 환멸을 느낀 것도 의사의 태도가 그 당시 사회지도층들이 자신들의 권위주의에서 발생한 민간인의 피해나 민주주의의 후퇴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대충 눙친 것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있어 가장 치열한 검열이자, 가장 무서운 고민은 그처럼 힘든 시대에서 그들이 취해야 할 진정한 의무가 무엇이냐는 문제다. 자신만이 꿈꾸는 세계를 유아적으로 몰입할 것인지, 사회의 비참한 현실을 밝히고 싸우기 위해 문학과 예술을 그 발판으로 삼을지의 문제는 쉽지 않은 이야기다. 이청준은 '박준'의 이야기를 통해 단순한 이분법을 경계하고, 인간이 발화로 삼는 모든 개인적인 이야기에는 결국 인간 사회의 현실이 녹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또한 다른 이름의 검열이 되어 형편없는 시세 속에서 무의미하게 굴러가는 잡지에 대한 회의로 일을 그만 두는 '나'의 모습을 통해, 현실이란 낙인으로 예술을 검열하는 당대의 현실도 꼬집었다.

  이렇게 보면 「소문의 벽」은, 단순히 소통에 실패한 한 광적인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끝으로 갈수록 예술가의 관점에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소설이다. 그 과정에서의 흥미유발도 잃지 않고, 주제의식도 놓치지 않은 이 훌륭한 중편이 탄생하기까지 작가 이청준이 자신이 몸담은 예술이라는 길과, 자신이 속한 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개인으로서의 접점을 얼마나 치열히 고민하고 형상화해냈는지 그저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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