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아래 글에 대한 정보를 우선 밝히겠다. 


(1) 저번 신자유주의 수업에서 교수님이 내주신 양식에 따라 제출한 기말 시험 답안지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세 권 중 내가 선택한 두 권은 다음과 같다. 본론에 쓰이는 인용문은 바로 다음 두 텍스트에서 나오는 인용들임을 밝힌다.

 

(ㄱ) Introduction by Plehwe from The Road from Mont Pelerin: The Making of the Neoliberal Thought Collective

(정확한 인용은) Mirowski, P., & Plehwe, D. (2009). The making of the neoliberal thought collective.













 

책 “몽페를린 소사이어티로부터의 길, 신자유주의 집단 사고 형성 과정에 대하여”에서 나오는 플류의 서문  

 

[노트] 음 우선 저자의 이름을 플류? 무엇이라고 읽을까… 선생님은 플류라고 읽었던 것 같은데 가물가물… 그리고 thought collective가 신자유주의적 집단 사고 ..? 음 나는 사실 집단 지성 이런 느낌이 들었는데 다시 보니 아닌 것 같아서 이렇게 바꿨다. 확실히 본문 내용은 (오스트리아-미국 신자유주의들이 어떻게 자기 패거리의 세를 불렸는지에 대한 내용이라서…)

 

2.     Dardot and Laval’s The New Way of the World: On Neo-Liberal Society

(정확한 인용은 )Dardot, P., Laval, C., & Elliot, G. (2014). The new way of the world: On neoliberal society.















(ㄴ)     다르도와 라발의 책 “세계의 새로운 질서: 신자유주의 사회에 대하여”

 

[노트] 이 책 진짜 좋다. 꼭 필히 번역되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2) 이 수업은 할배교수에 의해 진행되었는데 할배교수는 좀 심하게 과장해서 말하면 진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선생님 급일 정도로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특히 그 진가가 빛난 게 이 기말 시험인데, 보다시피 위의 두 책들은 이론서이기 때문에 비교가 쉽지 않다. 일반적 경우라면 그냥 각자 책에 대해 대략의 큰 주장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어떤 것이 더 우월한지 근거를 대라 정도일 텐데, 할배교수는 진짜 짬밥 장난 아니신지라 그 전개 양식부터 정말 논리적으로, 학생이 이론서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체크될 수 있는 답을 쓸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으며, 각 내용에 대한 이해가 100프로 선행되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시험지 양식을 제공하였다. 그 양식은 다음과 같다.

--

(ㄱ) A와 B에 나오는 결론을 쓰시오. 그리고 그 결론의 증거들을 찾아 쓰시오.

(ㄴ) 둘 중에 더 합당한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고르시오. 그 이유를 설명하시오.

(ㄷ) (그리고 여기서부터 정말 소위 쩌는데) 만약 당신이 A를 골랐다고 친다면,  A의 약점/혹은 B의 강점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진술하시오.   

(ㄹ)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생각하기에 A가 더 나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 약점을 상쇄할 만한 강점은 무엇이었는가를 설명하라는 뜻)

--

보다시피 텍스트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절대 쓸 수 없는 답지들이고, 내가 봤던 모든 서술식 평가문항 중 가장 이론적으로 완벽하다.

 

(3) 만약 내가 저번 학기에 썼던 답지들 중 가장 만족할 만한 글이라면 주저없이 나는 이 글을 꼽는다. 왜냐하면 이 답지들은 보다시피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그만큼 완벽한 만점을 뽑아낼 수 있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ㄱ) 부분을 제외하고 모두 만점을 받았는데, (ㄱ) 부분 같은 경우도 결론과 그 결론의 증거들 중에서 둘이 중첩적으로 이루어진 탓에 내가 결론의 증거들에 일부러 몰빵했기 때문에 몇 점이 깎였을 뿐, 하자는 없었다. (나는 답이 중첩적으로 이루어지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았기 떄문에 의도적으로 이렇게 썼다) 즉, 나는 이 질문지를 봤을 때 교수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해 썼고 텍스트에 나오는 말들을 적절히 인용하여 내가 해당 질문지에 맞는 답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할배 교수도 이 답안지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다음과 같은 부분/전체 코멘트를 달아주었다. “Exellent answer; well-written, thoughtful, creative, and excellent”, “This was a superb exam, showing mastery of understanding of both readings.”

 

(4) 내가 위의 같은 교수 코멘트를 단 이유는 자랑하기 위함(…)도 있지만 그건 소소하고, 전체적으로 가장 중요한 건 이 글의 이 책들에 대한 정확도가 적어도 아주 그릇되게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담보하기 위함이다. 내가 이 글을 번역해 쓰는 가장 큰 목적은 위의 이 두 책들과 그에 대한 내 분석을 한글로 번역하여 한국 사람들에게 신자유주의 책과 그 내용에 관련해 미국/유럽(내가 넣진 않았지만 나머지 하나는 미국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의 책이었다.) 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담론의 일부를 공유하기 위함을 밝힌다. 내용 적인 측면에서 나는 현재 신자유주의를 아나키즘 이론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석사논문으로 쓰려고 하는 사람인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고, 이 두 개의 책 특히 다르도와 라발의 책은 내게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밝히는 바이다. 두 번째 목적은 교수가 교사로서 제출한 시험지 양식의 뛰어남이 공유되어 많은 서술형 문제지를 작성하는 교사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그리고 글쓰는 학생들은 이에 어떻게 답을 해야하는지의 하나의 예시를 보이기 위해서이다. (특히 한글과 영어 공용으로) 내가 백프로 잘 쓰지 않았고 이상하게 쓴 부분도 있지만, 이 글은 다른 내 영어 글보다 꽤나 정확하게 쓰여진 글이다. 인용도 많았고. (….)

 

본론

질문항은 교수의 질문지. 답은 내 답지.

 

A.   The Main Conclusions of the Works

A.    저작들의 주요 결론을 말하시오.

 

(a)   몽페를린~ 관련

Plehwe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에서 매우 중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의 세계적이고, 다채롭고, 그만큼 모호한 성격을 사학적 관찰로 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이 현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신자유주의는 같은 목적 하에 모인 수많은 지식인들에 의해 사전에 충분히 준비되어 장기적으로 진행되어온 프로젝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사람들과 조직들 간의 중요한 네트워크들 뿐 아니라 헤게모니 차지를 향한 신자유주의의 부상을 위해 꼭 필요한 지식 영역, 사회적 지위를 갖춘 모임들, 국경, 그리고 문화를 가로질러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 채널들” (3쪽)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지 않고서 신자유주의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점이 바로 그가 몽페를린 소사이어티를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이유이다. 몽페를린 소사이어티는 오랜 기간 신자유주의를 형성시켜온 매우 중요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a)   Introduction by Dieter Plehwe from The Road from Mont Pelerin

: The main conclusion of Plehwe is that since neoliberalism has been considerably influential all over the world, we need to examine its cosmopolitan, diverse, and obscure characteristics through historical observations. Above all, if we examine it attentively, we can find out that neoliberalism is a well premeditated, long-term project by various intellectuals, who share the same goal.

According to Plehwe, it is impossible to understand neoliberalism thoroughly without knowing the fact that there have been “crucial networks of people and organizations as well as channels of communication cutting across knowledge domains, social status groups, borders, and cultures that were crucial to the rise of neoliberalism to hegemony” (3). That is one of the main reasons why he primarily deals with Mont Pèlerin society; it is a crucial organization which has shaped neoliberalism for a long time.

 

(b)  다르도와 라발의 책에 관련해

다르도와 라발은 개인과 국가가 정치 이슈가 아닌 경제적 요소들에 집중해온 이래로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약화시켜왔다고 결론짓는다. 저자들은 신자유주의 사회를 비민주적인 사회로 규정하며 국가와 개인 차원에서의 두 가지의 방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첫번째는, 사람들이 국가 차원에서 자치적인 통치성(governmentality)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상황에서 파생되어선 안 되고 완전히 새로운 상상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들은 정부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야 하지, 사람들을 통제하면 안 된다고 보는 시각을 견지한다. 두번째로, 그들은 주체화의 실천으로 ‘받아치는 행동(counter-conduct)’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개인 사업 모델을 따르는 현재 주체화 양식의 대안” (316쪽)으로, 개인의 수준에서 저항하는 양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이 두 가지의 방안은 사회적 조건과 인간 행동의 일반 준거 양식이라는 두 방향에서 모두 기능하는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모색한다.

 

(b)   Dardot and Laval’s The New Way of the World: On Neo-Liberal Society

: Dardot and Laval conclude that neoliberalism undermines democracy since individuals and states have prioritized economic factors, not political issues anymore. The authors define the neoliberal society as anti-democratic and suggest two solutions according to the level of state and subject. First, people need to invent autonomous governmentality on the state level, which should be invented not from current contexts but novel imaginations. They argue that government should be for people, not controlling them. Second, they suggest ‘counter-conducts’ as practices of subjectivation. It should be “the present alternative forms of subjectivation to the model of personal enterprise (316)”, which would be a recalcitrant way on the subject level. Both suggestions aim for escaping neoliberal rationality, which has become a general standard for social condition and human behavior.

 

B.    Supporting Evidences for A

A의 결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제시하시오.

 

(a)  몽페를린~ 관련

Plehwe는 1947년 이래로 중대한 신자유주의 조직 중 하나로 자리해온 몽페를린 소사이어티를 깊이 파고든다. 그에 의하면 왜 그렇게나 다양한 신자유주의자들이 한곳에 모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두 가지 관심사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고립되었다고 느꼈다. … 두번째는, 하이에크와 다른 이들은 고전자유주의가 이론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는 길은 뜻이 맞는 지성인 모임에서 집중적인 토론을 통해서라 보았다.” (16쪽) 몽페를린 소사이어티가 시작될 즈음 신자유주의자들은 정책 행정에 사회적 계획을 적용하는 지식인들(케인스 학파)에게 수적으로 불리했다. (16쪽) 신자유주의자들이 여러 모로 불리했고, 전체주의와 같은 사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몇 십 년에 걸친 신자유주의적 지성인들을 키워내는 장기적 전략을 계발하기로 동의했다.” (15쪽)

이러한 맥락에서 몽페를린 소사이어티는 신자유주의가 매우 오랜 기간 형성되어온 집단적 사고의 의도적 결과물이라는 증거물로 존재한다. 이 조직은 매우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싱크탱크였는데 “초학문적이고 … 학제간으 넘나들며… 초학문적이라 설명될 수 있는 집단의 노력”(5쪽)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국적과 학문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의 발전을 위해 몽페를린 소사이어티로 모여들었다. 저자는 몽페를린 소사이어티 지도자들의 자세한 명단, (19쪽) 간략한 역사와 만남 장소들 (17)쪽을 보여주는데, 이는 이 조직이 초국가적이고 국제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보인다. 하지만 몽페를린 소사이어티가 다양한 구성원을 자랑했음에도 그들이 몽페를린 소사이어티 안에서 같은 목적을 공유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집단응집성을 바탕으로 “신자유주의적 사고 집단을 이끄는 구성원들의 국제적 명망은 싱크탱크와 다른 조직들을 확장하고 설립하는 데 있어 필요한 기금 형성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6쪽). 한마디로 몽페를린 소사이어티는 같은 목적을 공유하고 신자유주의를 전파시키는 데 성공한 지식인들의 중요한 사례 중 하나이다.

 

: Plehwe delves into the Mont Pèlerin Society, which has been one of the crucial neoliberal organizations since 1947. According to him, the reason why such diverse neoliberalists gathered in the same place is that they shared two considerations: “First, the (neo)liberals felt isolated … Second, Hayek and others believed that classical liberalism had failed because of crippling conceptual flaws and that the only way to diagnose and rectify them was to withdraw into an intensive discussion group of similarly minded intellectuals” (16). At that time around when MPS begins, neoliberalists were outnumbered by the others who apply social plans to policymaking (16). Since neoliberalists were aware of the disadvantaged conditions, and willing to stand against ideologies such as totalitarianism, they “agreed on the need to develop long-term strategies projected over a horizon of several decades, possibly to involve several generations of neoliberal intellectuals” (15).

MPS, in the context, is an evidence to prove that neoliberalism has been a deliberate outcome of collective thought for a long time. It was a think tank full of diversity because there was “the collective effort (which) can be described as transdisciplinary, … interdisciplinary, … and transacademic” (5). People from a variety of nationalities and professional fields co-operated for the development of neoliberalism within MPS. Plehwe shows readers the detailed list of MPS leaders (19), its brief history and several meeting locations (17), which implies it has been transnational and cosmopolitan. Even though MPS has various members, however, they share the goal in the statement of aims of the MPS. Based on its cohesiveness, “the international reputation of leading members of the neoliberal thought collective has worked wonders in local fund-raising efforts to establish or expand think tanks and other organizations” (6). In short, MPS is a great example of intellectuals who share the same goal and succeed to empower neoliberalism.

 

(b)  다르도와 라발의 책에 관련해

다르도와 라발은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약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를 가능하게 한 신자유주의의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신자유주의는 “구성주의적 사업”이다. 두 번째, 시장질서는 경쟁을 기초로 한다. 세번째, 국가는 경쟁을 위한 수호자로 기능하고 있다. 네번째, 사람들이 인간 자본 혹은 사업체들로 취급받고 있다. (301, 302쪽)

경쟁이 신자유주의 사회의 규범이 된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경쟁 속에서 다른 이들을 제치고 승자가 되는 것에 실패하였다. 신자유주의 이론에 따르면 이들은 성공적인 인간 자본이 아니기에 사회는 이러한 “패자”들을 돌볼 책임을 지니지 않는다. 이러한 논리는 패자들이 보호받을 수 없는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한다. 그렇기에 “신자유주의는 ‘부차적 시민(sub-citizens;일반 시민보다 그 권리가 덜 적용되는 것을 뜻함)과 ‘비시민(non-citiznes)’이라는 사회적 배제 구조를 강화한다.” (304쪽)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정치적 자유를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인 개인적 자유 (다른 말로, ‘사유재산)’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306쪽)

다르도와 라발의 결론은 우리가 경제적 요소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에 맞설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형식의 통치성과 주체를 만들기 위해 푸코의 이론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푸코에게서 여러 표현을 빌린다. 대안으로서의 통치성을 “발명” (312쪽)해야 한다는 표현은 기존의 좌파이론이나 사회주의로부터 만들어질 수 없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저자들은 책에서 제3의 길이나 블레어주의 같은 좌파이론의 실패를 설명한다. 그들은 “지배적 합리성에 노골적 종속을 주장한” (183쪽) 신자유주의 좌파였지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저자들은 “통치는 정확히 ‘배치’”이며, 이때 “배치는 사람에 반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개념” (132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푸코에 기반해 정부에 관한 의견을 개진한다. 다른 말로, 정부란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하지 통제하거나 조종해선 안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들은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주권을 형성할 자주적 통치성을 개발하고자 한다.

다른 해결책인 ‘받아치는 행동’이란 주체화의 훈련양식이다. 이는 주체적 수준에서의 조치이며 마찬가지로 푸코의 개념에서 비롯한다. 신자유주의적 사회의 인간이 인간 자본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저자들은 ‘받아치는 행동’과 같이 저항할 수 있는 윤리적 방법을 제안한다. 이것은 “비행(잘못된 행동)”과는 다른데, 비행은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받아치는 행동’은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행동에서 자유롭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타인에게 자신들의 행동이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319쪽) 하는 적극적인 행동양식이다. 즉, ‘받아치는 행동’은 주체적 차원에서 신자유주의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다.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거부함으로써 사람들은 그들을 인간 자본으로 포획하려는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다.

 

(b)  Dardot and Laval’s The New Way of the World: On Neo-Liberal Society

: The authors claim that neoliberalism undermines democracy, based on its characteristics as follows: First, neoliberalism is a “’constructivist project’”; second, the market order has a basis on competition; third, the state functions as a guardian for competition; and, fourth, people are treated as human capital or enterprises (301, 302).

Since a competition has become a norm of neoliberal society, there are many people who fail to outrival others in the competition. According to neoliberalism, they are not successful human capital, and society does not have responsibilities to take care of those ‘losers.’ This logic brings about the social inequality in which losers cannot be protected. Therefore, “it strengthens social logics of exclusion that manufacture a growing number of ‘sub-citizens’ and ‘non-citizens’” (304). In the circumstances, people do not pay attention to political liberty since there is only “individual liberty, understood as a faculty left to individuals to create a protected domain for themselves (their ‘property’)” (306)

Dardot and Laval’s conclusion is that we need an alternative to the current neoliberal governmentality, which too much focuses only on economic factors. They rely on Foucault’s theory to make solutions in the new form of governmentality and subject. As they borrow the expressions from Foucault, the alternative governmentality should be “invented” (312) since it cannot be found from existing socialism or left theories. (The authors criticize the left theories’ failures in their book, such as ‘the third way’ or ‘Blairism’. They were neo-liberal left “suggesting outright submission to the dominant rationality” (183), not solving underlying problem of neoliberalism) They examine the idea of government based on Foucault, who argue “governing precisely consists in ‘disposing things’” and it should be “understood that by ‘things’ is meant not things as opposed to people” (132). In other words, the government should help people, not control nor manipulate them. In this context, the authors seek a way to invent the autonomous governmentality in which people could be its direct sovereign.

The other solution, ‘counter-conducts,’ is practices of subjectivation. It is a treatment on the subject level, relying on Foucault’s concept. Since human in neoliberal society has become a human capital, they propose an ethical method to be resistant with ‘counter-conduct.’ It is different from ‘misconduct,’ which implies the passivity. ‘Counter-conduct’ is an active movement in which “people seek both to escape conduction by others and to define a way of conducting themselves towards others” (319). In other words, ‘counter-conduct’ is to disobey neoliberal order on the subject level. By denying neoliberal order, people can escape from the attempt of neoliberalism, which tries to make them human capital.


C.    Which work offers the most sound or superior conclusion?

둘 중의 하나를 고른다면, 어떤 텍스트가 더 설득력 있는가?

 

나는 다르도와 라발의 책을 골랐다.

 

 

D.   What reasons can you offer to support your assessment in response to Question C.?

그 텍스트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비록 Plehwe의 관찰이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배경지식을 알기에는 그 의의가 크나, 현재 신자유주의 사회를 바꾸기 위한 대답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의 결론은 신자유주의가 왜 현재 성공적인지를 설명하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다르도와 라발은 현 신자유주의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가능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국가와 개인들이 시장 질서에서 행동과 사업의 내용을 규정하는 신자유주의 합리성에 매몰된 문제를 분석한다. 그 다음 그들은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질서에 저항하기 위한 국가적/주체적 차원의 다른 방안을 제시한다.

더욱이 Plehwe의 역사적 관찰은 다르도와 라발의 연구에 비해 범위가 좁고 그 깊이가 얕다. 그는 신자유주의의 주요 시작점으로 몽페를린 소사이어티를 주로 다루지만 다르도와 라발은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더 심오하고 넓게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사회에서 경쟁의 중요성과 같은 중요한 신자유주의 개념을 고안한” 허버트 스펜서와 같은 몽페를린 소사이어티 이전의 인물들에 주목한다. (다르도와 라발, 29쪽) 게다가 그들은 “1947년의 몽페를린 소사이어티의 창발이 종종 신자유주의의 탄생으로 잘못 인용된다. … 1938년 8월 26일에서 5일 간 열린 월터 리프만 학회가 진정한 탄생의 순간이다.”라고 밝힌다. (다르도와 라발, 49쪽)

한편, Plehwe는 몽페를린 소사이어티 이전의 신자유주의 기원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의 글에서 월터 리프만 학회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그 학회를 “경제학자, 철학자, 사회학자들의 느슨한 모임” (Plehwe, 12쪽)으로 묘사하며 이를 “보통 몽페를린 소사이어티의 선임격으로 간주되는” 모임이라고 규정한다. (Plehwe, 12쪽) 몽페를린 소사이어티만 부각시킴으로써 질서자유주의/독일식 자유주의(ordoliberalism)과 같이 몽페를린 소사이어티를 배경으로 삼지 않는 다른 신자유주의 이론들에는 소홀한 경향을 보인다. 즉, 그의 단편적인 시각은 더 넓고 깊은 신자유주의를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이다.

Even though Plehwe’s observation is meaningful to know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neoliberalism, it is not a sufficient answer to change the current neoliberal society. His conclusion is good enough to explain how neoliberalism is so successful now, but it does not contain any prospects of how to overcome neoliberalism. On the contrary, Dardot and Laval make readers see possible ways to reform the current neoliberal society. They analyze the problem that states and subjects are subject to neoliberal rationality, which reproduces and manages their behavior and projects on the logic of the market. Therefore, they propose that states and subjects should find out the other way to resist the dominant neoliberal order.

Moreover, Plehwe’s historical observation is narrower and shallower than a research of Dardot and Laval. Plehwe mainly deals with MPS as a pivotal starting point of neoliberalism, while Dardot and Laval dig into the more profound and broader origin of neoliberalism. For example, they pay attention to the past before MPS, such as Hebert Spencer, who “introduced some of the most important themes of neoliberalism-in particular, the primacy of competition in social relations” (Dardot and Laval, 29). Besides, they argue that “the creation of the MPS in 1947 is often incorrectly cited as marking the birth of neo-liberalism … it was the Walter Lippmann Colloquium held over five days from 26 august 1938” (Dardot and Laval, 49).

On the other hand, Plehwe did not pay attention to the origin of neoliberalism before MPS. I am not saying that Plehwe did not mention Walter Lippmann Colloquium in his article. However, he describes Colloquium as “a loose group of economists, philosophers, and sociologists” (Plehwe, 12), and defines it as “often regarded as the precursor of the MPS” (Plehwe, 12). By only highlighting the MPS, Plehwe loses other neoliberal theories which are not mainly based on MPS, such as ordoliberalism. In short, Plehwe’s narrow approach lacks opportunities to explain neoliberalism deeper and broader. 

 

 

E.    How might the author NOT judged to be superior in Question C reply to the reasoned defense expressed in your response to Question D?

어떤 지점에서 보면, D에서의 답변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면서 C에서의 선택이 다른 선택보다 더 우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한 지점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라.

(한마디로 D에서의 문제점을 방어하고 C에서 내놓은 답변의 약점을 진술하라는 말)

 

다르도와 라발의 결론은 현실에 적용하기에 기술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그들의 답안은 실용적이라기보다는 이론적이다. 푸코의 논의에 기대어 그들은 새로운 통치성과 ‘받아치는 행동’ 양식의 새로운 발명을 주장한다. 하지만 어떠한 종류의 통치성과 ‘받아치는 행동’이 존재해야 하는지에 관해 분명한 답을 주지 않고 있다. 가능이나 하긴 한 건지를 보여줄 역사적 예시가 없다. 세부사항들은 독자들에게 미궁으로 남았으며, 남은 부분은 우리가 채워나가야 한다.

게다가 다르도와 라발의 결론이 신자유주의에 관한 깊은 배경지식을 토대로 삼는다 하더라도 Plehwe의 몽페를린 소사이어티에 대한 풍부한 설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오스트리아-미국 신자유주의 학파에 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그는 몽페를린 소사이어티의 전반적 형성 과정을 소상히 밝히며 이 조직의 영향력과 중요성을 밝힌다. 다르도와 라발이 신자유주의를 전반적으로 탐구할 동안 Plehwe는 몽페를린 소사이어티의 역사를 분석하고 이 조직의 국제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구성원 명단을 제공한다. 그의 접근법은 오스트리아-미국 신자유주의 학파가 자신들의 영향력을 오랜 기간 쌓아온 과정을 매우 성공적으로 소개한다.

 

Dardot and Laval’s conclusions lack technical and realistic methods to apply their solutions to reality; they are theoretical instead of being practical. Based on Foucault’s argument, they merely suggest that we should invent new governmentality and ‘counter-conduct.’ However, they do not have clear answers of what kind of governmentality and ‘counter-conducts’ should exist; there are no historical examples which show if it is possible or not; details are left in mystery for readers, and now it is their task to fill the remaining parts.

Moreover, although Dardot and Laval’s conclusion has a more in-depth basis on neoliberalism, Plehwe’s detailed description of MPS is beneficial for readers to understand Austro-American neoliberalism especially. He concentrates the whole process of MPS and reveals its importance and the reason why it has been so influential. While Dardot and Laval examine neoliberalism generally, Plehwe analyzes MPS’ history and offers a detailed list of members to show the cosmopolitan characteristics of MPS. His approach is useful in the sense that it successfully reveals that Austro-American neoliberalism has developed its clout for a long time.

 

F.     What rejoinder to the reply you provided to Question E can you provide in defense of your judgment of which work was superior?

E에서 내놓은 답변을 어떻게 응수해야 당신이 선택한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보다 낫다고 설득할 수 있는가? (다시 E를 비틀어보라는 말)

 

         비록 다르도와 라발의 결론이 추상적이긴 해도 그들은 현 신자유주의 사회를 극복할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들은 현 상황이 완전히 새로운 대안으로 극복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사람들을 억압하고 조종해 온 이상 그들은 지배질서로 사람들을 조종하지 않을 새로운 통치성을 고안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새로운 종류의 통치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통치성의 근본이 될 주권을 만드는 과정에 직접적으로 개입시킬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는 사유재산에 의거한 ‘부차적 시민’이나 ‘비시민’과 같이 사람들이 동일한 정치권 권리를 갖지 못하는 상황을 방지할 자립적인 통치성을 통해 민주주의를 구원하고자 한다.

또한 이는 주체에 관한 그들의 다른 해결책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주체들은 ‘받아치는 행동’을 해야 한다. 비로 저자들이 역사적 사건들에서 예시를 주고 있진 않으나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부터 그 예시들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예시들은 사실상 다른 말로 하면 시민 불복종이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에서부터 사회 질서에 저항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공유경제가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받아치는 행동’의 일환이라고 본다. 공유경제는 경제의 개념을 소유와 비교하기로부터 빌리고 공유하는 것으로 전환시킨다. 다르도와 라발이 우리에게 큰 청사진을 제공해 준 이상 우리는 남은 부분을 우리 자신의 ‘받아치는 행동’으로 채워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다르도와 라발의 논의는 신자유주의 이론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까지 다루며 신자유주의의 전반적인 구조와 영향력을 설명한다. 그들은 신자유주의가 경쟁을 중시하는 합리성을 구축해냈고, 국가와 주체들로 하여금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하에 자기통치를 하도록 유도했다. 비록 저자들이 단 하나의 신자유주의만 집중적으로 파지 않았으나 그들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깊은 통찰은 이를 더 넓은 시야에서 조망하고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Even though Dardot and Laval’s conclusions are abstract, they offer direction for people to overcome the current neoliberal society. They have a point that the current situations should be treated with a completely new alternative. Since neoliberal governmentality has oppressed and manipulated people, they should design new governmentality which would not control people under the dominant order. Therefore, the form of new governmentality should guarantee people to participate directly in the process of making sovereignty, which would be the source of governmentality. It is a valuable perspective since it emphasizes autonomous governmentality to save democracy in which everyone has equal political rights and no one gets excluded as noncitizien or subsitizen based on their properties.

Also, it is similar when it comes to their other solution about subjects; that subjects should do ‘counter-conduct.’ Even though they do not give an example of it from historical events, we can imagine these examples from our everyday. It is, in other words, civil disobedience; people can resist oppressive social order in their lives. For example, I think people who focus on sharing economy are doing ‘counter-conduct’ against neoliberalism. They try to change the concept of the economy from owning and comparing to burrowing and sharing. Since Dardot and Laval suggests a big blueprint for all of us, we could fill the remaining part with our ‘counter-conducts.’

Also, Dardot and Laval’s discussion explains the overall structure and effects of neoliberalism, covering not only one neoliberal theory but also others. They reveal that neoliberalism has constructed rationality which highlights competition, and made states and subjects self-govern them under the neoliberal governmentality. Although it does not concentrate on only one neoliberalism, their examination on liberalism is valid to explain it in a broad s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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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I. 서론


II. 자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1. 감각을 통한 물리적 범위 형성

2. 언어를 통한 사회적 위치 형성


III. 자아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1. 마음이 그려낸 세상 

2. 예술적 자아론


Ⅳ. 결론: 규정된 경계를 뚫고 나아가는 예술적 삶을 위하여


참고문헌 


Ⅰ. 서론


세상에 태어나 만난 가장 큰 인연은 누구인가? 필자는 주저 없이 ‘자기 자신’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나 자신이 누구인가 고민해보면, 나의 의지만 오롯한 진정한 주체도 아니요, 주변 요소들로만 이루어진 단순 합성물도 아니다. 나는 나의 의지와 외부의 지형이 만나 만들어졌다. 그러한 스스로를 바탕으로 한 평생을 살아가니, 자기 자신이야말로 가장 귀하고 특별한 인연이지 않을까? 필자는 그러한 자기 자신을 ‘자아(自我)’로 고정하여 이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만들어져 있지만 앞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수동적 운명을 따르지만 능동적으로 나아가는 이 존재를 고찰해보고 싶다.

 

이 논문의 관심은 100년의 삶을 사는 인간이 자아를 떠날 수 없다는 전제조건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만들어져 있다. 그 사실을 통렬히 아는 것이 첫 번째 작업이다. 자아는 인생을 주재할 수 없다. 우리는 영원히 세상에 남을 수도 없고, 언젠가 죽어서 해체되어야만 한다. 그런 허무함이 순리다. 그것을 받아들인 다음 우리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불교에서는 해탈을 주장한다. 모든 업력을 청정시켜 열반에 이르는 것이 불교 사상의 큰 종착점 중 하나이다. 윤회의 업을 끊고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철저한 없음이 우리가 언젠가 도래할 종착지라면, 우리의 삶은 지금 왜 이렇게 펼쳐져 있는가? 정녕 내가 사는 지금 이 삶에 아무 의미도 없단 말인가? 이것들이 다 순간이고 가짜라면,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다 착각에 불과하단 말인가?

불교에 의하면 우리는 깨달음을 통해 이 세상 만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이 바로 연기론의 핵심 내용이다. 그래서 나누어진 실체는 가유(假有)다.[주석1]  하지만 우리의 일상 삶은 그러한 진리에 의거해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 사회는 자아라는 하나의 고정된 개체, 즉 헛된 의식을 상정해 작동한다. 우리는 그러한 분별의식을 필수 전제로 세상을 산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우리가 육체와 언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함을 엿볼 수 있지만 우리 자체가 무한해질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한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으로서 ‘종적 환상’을 산다. 종적 환상[주석2]은 큰 그림에서 보면 미몽이지만, 우리의 작은 눈에서는 삶의 터전이다. 그 종적 환상이 우리를 인간으로 승인한다. 그 기준에서 벗어난다면 인간이 되지 못한다.

 

어떤 정해진 절대 기준이 우리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임의적으로 고정된 기준이 우리를 만들었음을 알아야 한다. 깨달음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것이 가짜라는 허무의식에 빠졌다면 온전히 깨닫지 못한 것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다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다음으로 자신이 앞으로 스스로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모든 것의 기반이 허무지만 그것이 바로 예술적 자아가 갖는 무한한 가능성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내는 것이 곧 인간을 만드는 것이며, 인간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임을 알게 된다. 즉, 만들어졌기 때문에 앞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참된 해탈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정리해보자면,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 지점은 자아가 물질적으로도, 사회적(혹은 관념적)으로도 제약받아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몇몇 사상을 살펴보면 물질과 정신을 이분한 상태에서 정신의 자유를 설파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의 자아가 실상 양 측면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본다. 동서양의 여러 논의를 참고하여 그 점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다음 두 번째 지점에서는 자아의 능동적 측면을 이야기하려 한다. 첫 번째 지점에서 자아가 형성되었다는 수동적 측면에 집중한 것과 반대된다. 자아라는 그 얼기설기한 화합물들이 한 발짝 전진하여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그에 따라 세계도 변화시키는 예술적, 창조적 주체라는 관점이 필자의 최종 결론이다.


Ⅱ. 자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1. 감각을 통한 물리적 범위 형성

 

자아라는 말을 필자는 일종의 자기 정체성이라고 받아들인다. 나는 누구인가? 이 말을 더 정확히 풀어쓰면 “나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이다. 앞의 ‘나는’의 나와 뒤의 ‘내’라는 나가 같은 존재인 것일까? 자기동일성을 지닌 나라는 주체는 누구인걸까? 아니, 그 주체는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 자아를 언제부터 나 자신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걸까? 어쨌든 분명한 것은, 여기에서 그 둘을 같은 것이나 혹은 적어도 유사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면 논의가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가 논의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지는 자기 동일성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는 동일성을 가지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이다.

 

필자는 자아가 스스로를 자각하고, 단 하나의 존재로 의식하기 위해서 필요한 첫 번째 단계가 자아와 외부의 충돌이라고 본다. 자신은 남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경계의 설정이다. 경계는 외부와의 지속적인 충돌을 통해 정립된다. 무한히 펼쳐져 있고 평화롭게 겹쳐질 수 있다면 경계선이 생길 이유가 없다. 그러니 유한한 영역 안에서 충돌들은 자연스럽고, 그것을 감지하게 해주는 것이 우리의 감각이다. 그렇지만 감각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감각은 금방 흘러가버리고, 현재에서 벗어나버리기 때문이다. 감각을 묶어내고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언어이다. 무차별적으로 발생하는 감각들을 의미에 따라 묶어내고 분류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해야 그때 비로소 자아가 태어난다. 하지만 언어는 다음 항목에서 더 상세히 이야기를 하고, 이곳에서는 우선 감각만 논의하겠다.

 

감각은 외부 대상들의 존재를 자신에게 알려주는 지표이다. 또한 자신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알려준다. 자아가 누구인지를 질문하고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남들과 분리되어 있고, 그렇기에 남들과 자신 사이에 선을 그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필요성은 자신 아닌 다른 존재가 분명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나온다. 감각은 인간이 자신과 자신 아닌 다른 것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자극들이다.

 

사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세상과 조우하는데 이때부터 감각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 심지어 엄마의 뱃속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도 감각은 존재한다. 불교에서도 태아 때부터의 육체 형성을 인정하는데, 이를 이전 생의 업이 태아의 뱃속으로 수정된다고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이 단계에서 앞으로의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 신체가 형성된다. 이 육입처(六入處)라 불리는 것들을 통해 현실화된 기관들은 삶에서 접촉(觸)을 낳고, 그 접촉은 느낌, 집착 등을 연속적으로 발생시킨다.3 불교에서는 이것이 무아를 깨닫지 못한 무명에서 비롯된 집착으로 설명한다. 그렇기에 궁극적으로는 해방되어야 할 윤회의 끈이다. 중요한 점은 신체 기관이 다른 것들과 만나는 일종의 입구 역할, 시작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업이 끊어지지 못하고 재생산된다. 그 입구에서 발생된 감각들을 통해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세계와 분리해내고, 나의 테두리가 어디까지인지인지 확인한다. 그렇게 해서 아집이 발생한다. 감각은 세상과 자신을 분별시킨다.

단지 불교철학에서만 감각과 자아의 발생을 연결짓지 않는다. 프로이트 역시 감각을 자아가 세계와 자신을 분리시키는 작업 중 하나로 보았다. 미국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1956년 생)는 자신의 책에서 [주석4]프로이트의 저서 󰡔On Narcissism󰡕[주석5]에서 나온 빌헬름 부쉬(Wilhelm Busch)의 시 「발두인 발라민(Balduin Bahlamin)」중 한 행을 인용한다. “어금니의 좁다란 구멍 안에서만 영혼이 머물고 있는 것이다.(Einzig in der engen Höehle, des Bachenzahnes weilt die Seele)”[주석6]이다. 해당 구절이 나온 맥락은 버틀러가 후에 󰡔자아와 이드󰡕라는 글로 발전한 프로이트의 사상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 글에서 프로이트는 육체의 고통이 육체적인 자아발견의 전제조건[주석7]이라고 밝힌다.


두 논의를 살펴보면 감각은 이중으로 설명된다. 불교에서 감각은 우리가 이전 생에 지은 업의 결과이며 다시 그 다음 업을 잇게 하는 연결고리이다. 감각은 우리로 하여금 경계 짓게 만들어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다소 부정적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한편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일단 우리 스스로의 존재를 ‘자아’로 키워내는 것이 감각이다. 극심한 분열과 그로 인한 고통으로 세상과 자아 사이의 경계지점을 나타내주는 필수요소이다. 자아가 다른 것들과 접촉할 수 있는 입구는 육체이고, 그 육체로 인한 감각이 매개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접촉을 통해서 발생된 호오의 느낌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 움직이게 하는 힘을 산출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프로이트의 관점이 상통한다.

감각의 역할을 주로 살펴보았는데, 감각을 경험하는 방식과 그 대상에 여러 가지가 가능하다는 점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사람들은 주로 시각에 의존해 세상의 다른 존재들을 관찰한다. 그러나 그 뿐 아니라 자신의 몸도 만져보고 탐구함으로써 육체를 체험한다. 자신의 몸에 관심을 가지게 됨으로써 자신의 몸의 경계를 알게 된다. 그것의 기능과 작용을 파악한다. 기본적으로 감각은 우리로 하여금 어디까지가 팔부터 목, 다리부터 허벅지인지를 파악하게 만든다. 그 뿐 아니라 어디를 어떻게 만지면 좋고, 어디를 어떻게 만지면 아픈지도 알아낸다. 자신이 갖고 있는 기관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이 구조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살핀다. 한마디로, 감각이라는 느낌 작용은 우리 자신의 테두리를 실험하고 시도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총체적인 능력의 선이 어디까지인지도 확인하게 돕는다. 세상과의 분별 뿐 아니라 자신의 한계도 측정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육체적 고통이 생기면 우리의 온 신경이 집중한다. 이처럼 고통이라는 감각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고통을 호소하는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있는지, 왜 그런 일이 생긴 건지 필사적인 관심을 쏟는다. 고통은 강렬한 감각으로써 그에 필적하는 관심과 집중을 요한다. 고통과 비슷하게 아주 인상적인 감각일수록 충격이 배가된다. 보통 강렬한 감각이 발생하는 이유는 자신을 이루는 경계가 이때껏 마주치지 못한 강한 힘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감각경험 중 보편적으로 강렬한 것이 단연 고통이다. 고통은 그 어떤 감각보다도 효율적으로 경계선을 느끼게 해준다. 불교에서 고통에 주목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아집으로 인해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느낀다고 하는 불교의 설명은, 우리가 자신의 경계선에 속박되어 있을 때라고 말한다. 유한한 자기 자신에 머무르면 우리는 제한되고, 제약받기에 끝없이 고통 받는다. 우리가 거스를 수 없는 어떠한 강하고 압도적인 힘에 억눌려지거나 적어도 자신과 준하는 힘에 의한 저항을 통해 피곤할 정도의 긴장을 겪기 때문이다. 즉, 자신을 향한 세계의 여지없는 폭력과 대면하는 것이 바로 고통이다.

그렇게 생긴 고통, 혹은 감각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놀라운 진리는 이 세상이 명백히 자신의 뜻과 생각에서 어긋나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세상과 자신은 분리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가 스스로 어떤 존재인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게 해준다. 우리는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들이다. 세계는 굳건할 뿐 아니라 강력해서 자아로 하여금 좌절을 맛보게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외부의 세계에는 우리를 능가하는 큰 힘이 작동한다. 자아로 하여금 자신의 힘이 미약함을 느끼게 한다. 구부려질 수 없는 그 힘 앞에 자아는 외부의 것과 자기 자신이 철저히 다르다는 이질성을, 그리고 자신의 약한 힘으로는 그 강한 힘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가져왔던 세상에 대한 의지를 버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고통이다.

 

불교가 인간이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가? 자신의 경계선이 지어질 때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고, 그로 인해 자신의 것인 줄 알았던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다. 세상이 우리를 내동댕이칠 때마다 우리는 고통을 경험한다. 강력한 감각들을 경험한다. 그것은 분열의 경험이기도 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해탈을 한다면 자아의 경계선에서도 해방되어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경계선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아라는 한 존재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가장 분명하게 느끼는 사건이다. 그것은 존재의 아픔이며 실존적 고통이다. 존재가 세계라는 시공간 안에서 겪는 물리적 범위 설정의 문제이다. 그리고 감각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2. 언어를 통한 사회적 위치 형성

 

그러나 이러한 감각을 가졌다고 해서 우리가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이르다. 우리가 보통 의미하는 자아가 되기 위해서는 연속성이 필요하다. 동일성은 시간적 지속성을 요구한다. 이제 남은 하나의 것, 인간이 스스로에게 자기동일성을 부여하기 위한 한 가지 전제 조건은 바로 언어다. 수많은 감각경험들이 인간으로서의 내가 가진 경험들이 되기 위해 단지 언어를 기다린다. 감각적 계기를 통해서 자신과 외부 세계를 구분하고, 경계를 지어 범위를 설정했다면 이제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바로 해석과 공유, 분별을 위한 의미화이다. 이 의미화 작업을 통해 언어는 매순간 범위 지어진 한 개체를 묶어내어 인간 사회 안으로 진입시킨다.

이제 인간이 해야 할 작업은 바로 사회 안에서 살아나갈 자신을 규명하는 일이다. 자기가 이때껏 느껴온 자신을, 감각으로 범위 지어진 자신을 말로 풀어내고, 말에 빗대어 이해를 시키는 시도이다. 자신이 세계와 다르고,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고, 얼마나 다른 존재임을 피부로 느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한 감각은 모든 순간들에서 이루어진다. 생물학적 원리로 물질계에 현현된 존재들이라면 기초적으로 갖고 있는 성질이다. 동물 중 인간이 자신을 하나의 개체가 아닌 종족 구성원으로 인식하기 위해, 이제 우리는 순간에만 작용하지 않고 일관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사회적 근거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자아 설정의 작업이 가능할 인간의 생체적, 사회적 나이가 어느 때인지 생각해보면 아마 사춘기 때일 것이다. 여러 모로 자신의 몸 뿐 아니라 다른 세계들에 대한 경험도 어느 정도 쌓아둔 상황이고, 자신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나이이기도 하다. 그것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언어의 습득 정도가 성숙해졌을 때이다. 물론 사람의 성숙도와 축적된 경험의 양에 따라 자아를 고민하는 문제가 더 이르게 찾아올 수도 있고, 더 늦게 찾아올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때껏 스쳐지나간 경험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언어를 이용해서 규명하고 생각하는 작업, 자기 자신을 언어로 물어보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그 자아 형성의 순간이라는 점이다.

 

언어는 우리로 하여금 사회 안에서 스스로를 경계 짓게 만든다. 감각이 실존적이고 물리적인 세계 차원에서 경험적인 범위 설정을 하게 만든다면, 언어는 인간 사회의 구조 안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설정하게 만든다. 이는 자아가 사회 속의 한 개체로서 안정성을 획득하도록 만든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허망한 언어에 우리 스스로를 묶어버리는 무명의 극치일지 모른다. 계속 변하며, 연결성에 의존한 존재를 하나의 위치로 귀속시키기 때문이다.

 

언명은 인위적 고정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엄마’가 되기도, ‘아빠’가 되기도, ‘연인’이 되기도 한다. 그 이름에 해당하는 수많은 의무들이 이름을 따라온다. 그 단어를 차용해서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일이다. 사회로부터 발생한 언어에는 사회가 기대하는 수많은 의무와 제약조건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로 자신을 안전하게 위치 짓는 것에만 한정되지 않고, 스스로가 안정화 되게끔 유도한다.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의무가 따라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그 역할을 찾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기대되는 것들에 스스로를 맞추어나가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회라는 인간 생태 안에서 일정한 위치에 안착하여 그에 따른 여러 명시적, 암묵적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 사회에서 좋은 친구라 불리는 여러 덕목과 의무를 잘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이름값을 잘 수행한 대가가 그로 하여금 유능하고 신뢰할 만한 사회 구성원이 되게 만든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감각 자체는 어떻게 보면 자아 형성 의미를 주지 못한다. 감각은 휘발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언어로 이루어진 사회를 구성해서 만들어 나가는 동물이기 때문에 휘발되는 감각들조차 가치와 연결되어야만 고정된다. 언어가 감각을 만나면 그 감각경험들에 의미가 부여되고 그 부여된 의미에 따라 경험들이 분류가 가능해진다. 즉, 묶이게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서 동일한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자아는 그 동일한 것들 위에 정체성을 다지게 된다. 그 근본은 매우 가변적이다. 하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것의 기원을 따지기보다는 현상적 측면에 기대어 살아간다. 무한함이 진리이지만 우리에게는 유한한 삶이 주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들이 비록 허상일지라도 마음 놓고 의존하는 것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위험천만하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안전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후기철학에서 언어의 이러한 기능 및 역할을 논의한 바 있다. 특히 필자가 인상적으로 본 부분은 언어 혹은 언어게임이 본질적으로 공적이라는 점[주석8]과 관련해서이다. 언어 그 자체가 공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독자적인 것을 말할 수 없다. 사적인 경험을 그 자체로 드러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독자적으로 개발해낸 것은 사용될 수 없다. 아무리 표현해본들 수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이라는 독자성을 언어화해서 정체성으로 삼을 수 없다. 어차피 공적인 언어가 개입하면 모든 사적인 것들은 파괴된다.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인 언어는 단순히 인간을 사회적인 맥락에서 정의 내리는 데 도울 뿐 아니라 한 개인으로 하여금 개별 언어의 특성과 그 언어가 쓰이는 맥락에 종속되게 만든다. 그 언어가 쓰이는 문화라는 배경이 우리의 자아를 묶어버리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어떻게 탄생되는지 보면 이해가 쉽다.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 한국어를 쓰며 한국 문화에 포섭되는 것을 보라. 한국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한국의 문화와 접하는 것이고, 태어날 때부터 한국어를 모국어로 삼는 사람들은 한국어가 불러일으키는 모든 상(像)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상들이 바로 그를 그로 만들기 때문이다.

 

부연설명하자면 우리가 사적 경험으로 얻은 내적 감각이라 해도 그것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인 언어로 인해 공적인 틀에 포섭된다. 애초에 의미가 그렇게 주어진다.[주석9] 그 의미는 우리가 자유롭게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맥락에서 파생된다. 우리는 텍스트이며,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맥락이 우리를 사회라는 인간 공동체 안의 한 개인으로 인정한다. 언어를 통해 사회 안에서 자신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이 작업이 다른 말로 사회화이다. 이 작업들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자아를 가진 한 인간이 태어난다.

 

Ⅱ. 자아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1. 마음이 그려낸 세상

앞에서 자아가 만들어지기 위해 필요한 두 조건들을 고찰해보았다. 자아는 외부 환경과 사회 맥락에 의해서 특정하게 경계 지어진 존재이며 그 경계선을 따라 정체성을 형성한 결과다. 한 사람이 어떤 특정한 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규정되어야 하고, 한계 지어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감각과 언어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자아는 가변적이다. 제한적이고, 외부에 의존적이다. 우리의 자아는 무한한 활동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우리의 실상이 무한한 것과 별개이다. 우리라는 존재는 물질과 세계의 엄연한 장벽에 의해 가로막힌다. 또한 우리는 사회라는 맥락 안에서 타인들에게 인식되고, 다시 자신도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 언어라는 사회화 작업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 하나의 자아로 탄생한다. 스스로를 대상화시킨 자아는 이제 그것을 바탕으로 타인과 세계에 접속한다. 우리는 외부 맥락에서 끝없이 자아라는 경계선을 인식 받고 있는, 여러 한계를 통해 선이 그어진 존재들이다. 세계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 의미도 공급받지 못한다. 우리는 구성물이고 만들어진 존재들이다.

 

하지만 가장 재미난 이야기는 지금부터이다. 그 제작의 과정은 일회적이지 않다.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변화해나갈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서조차,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변화 속에서 지각도 못한 채 계속 바뀌고 있다.

이때까지의 논의는 우리를 공포에 빠트릴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주체성과 일관성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나라는 정체성도 결국 내 손이 아닌 다른 자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나는 그들의 영향력 속에서 항상 내 자신의 위치를 지정받고 있다. 얼마나 무기력한가? 얼마나 수동적이고 나약한 존재인가? 나란 없는가? 미래도 정해진 것인가? 아니, 모든 것이 짜인 시나리오에 불과한가?

 

여기서 다시 불교의 논의를 끌어올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오온의 인연화합물이라고 이야기한다.[주석10] 이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경계와 조건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형성물이라는 이야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고정된 나라는 생각이 허상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 법이 있다는 믿음도 다 허상, 공(公)임을 아는 것이다. 즉, 법무(法無)이다. 자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열쇠가 그곳에서 비롯한다.

 

우선 자아를 만들어낸 기준들이 감각과 언어라는 가변적인 경계로 인함을 안다면, 그 경계를 지워내는 작업이 가능해진다. 그 작업은 불교에서 말하는 공과 직면하려는 노력을 통해 가능하다. 개체의 경계를 지워내면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바로 무한의 마음, 공의 마음[주석11]이다. 모든 것은 사실상 거대하고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단 하나이다. 우리는 단지 그 중 조각내어 이어진 일시적 파편들이다. 그곳에서부터 우리의 여러 한계가 생성될 뿐, 우리를 이루는 진짜 정체는 단 하나의 일심(一心)임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갖는 분별의식조차 사실은 이 일심, 거대한 심층 아뢰야식에서부터 나온다. 즉, 세계는 마음이 그려내는 거대하고 지속적인 작품이다. 흥미로운 점은 불교에서 설명하는 아뢰야식의 작동 기제를 살펴볼 때, 아뢰야식이 일방적으로 세계에 관한 모든 상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이므로 근본적인 마음이 모든 현상을 그려내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 그려내는 과정에서 그 구체적인 상은 의식이나 말나식의 활동인 현상세계의 업이 남긴 종자가 아뢰야식에 심어지고, 다시 그 심어진 종자들이 기반인 아뢰야식에 떨어지고, 그 떨어진 것이 싹을 틔워 다시 현상으로 올라오는 구체적인 전개를 따른다. 이 과정을 다른 말로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이라고 한다.[주석12] 이것은 모든 것이 만들어진 과정들이 계속 순환되고 있음을 보인다.

이처럼 이 세상을 만들어내는 일심의 끊임없는 활동성을 이해한다면 왜 우리를 만들어낸 조건들이 가변적인지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만큼 앞으로 우리가 충분히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충만함에 도달할 수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 구체적인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업력의 중요성이다. 만약 우리가 여러 흐름에만 이끌린다면 우리가 심는 업조차 타성적인 것을 있는 그대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자아에 대한 통찰을 가지고 변할 수 있다는 혹은 열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이때까지의 반복을 끊고 다른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만약 불교에서 해탈하기 위해 수행을 강조한다면, 필자는 그것을 진정한 주체성의 확보라고 이해한다. 여기에서의 주체성은 단순히 하나의 실체적 개체만을 상정하는 유아론적 아집을 전제로 삼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주체성은 무아라는 통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 명확히 아는 작업은 자신이 연결된 하나의 망에서 어느 특정한 지점 위에 올라와져 영역 지워졌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자신의 현재 지점, 위치, 경계선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즉, 자기 자신의 흐름과 역사를 아는 것이 바로 세상을 읽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그 공부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갑자기 어디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이때까지 먼저 존재해온 많은 것들의 합임을 알게 된다. 그것을 향한 수행법 중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관(觀)이 일맥상통하는데, 자신에게 흐르는 모든 것들을 관한다는 의미는 자신과 관련한 모든 것을 살핀다는 자기배려[주석13]와 유사하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마음 작용과 우리 자아의 경계선을 잘 살필 때,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산물이며 우리를 지금 여기 있게 한 많은 것들이 무엇인지 볼 수 있게 된다. 이 세상은 일심이 그려낸 무한한 그림이며 그 수많은 부분들은 서로 끝없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중 자아는 연결된 무한의 조각들 중 아주 임의적이고 우연한 곳에 놓인 존재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읽어야만 자신이 독자적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연결고리들이 수없이 얽혀져 표현되는 하나의 장(場)임을 알 수 있다.

 

그때서야 그 다음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넘어선 다른 존재를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특정한 텍스트의 산물이다. 그렇기에 이것이 재배열, 재위치화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변이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게 만든다. 나는 변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달라진 내가 행하는 업이 다시 이 일심을 변화하게 만든다. 달라진 일심은 새로운 세계의 상을 그리고, 그 상이 다시 새로운 자아의 장을 형성한다. 이 세상은 이처럼 끝없이 창조되는 현재진행형 무대인 것이다.

 

2. 예술적 자아론

 

이 부분에서 한 번쯤, 세상을 다르게 만드는 능동적 작업 중 하나를 예시로 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주디스 버틀러가 이야기한 젠더 패러디 개념이 그러한 작업을 설명한다. 성소수자들은 젠더 개념 아래에서 패러디 작업을 시도했다. 이들의 패러디는 선행적으로 만들어진 경계 안에서 의미가 고착화된 언어를 자신만의 새로운 의도로 재사용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활용을 통해 언어에 따라 고정되어 있던 정체성이 사실 특정 권력에 의해 생성된 경계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주석14] 많은 퀴어들(우리말로 성소수자들)은 처음에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질서에서 배제되는 정체성을 지녔다. 그들이 이성애자 남성/이성애자 여성으로 설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성애자 체계에서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며 여자와 자식을 낳는 존재이고,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며 남자와 자식을 낳는 존재였다. 이는 마치 상식처럼 여겨졌는데, 감각적으로 분별된 생물학적 차이와 언어로 규정된 남성과 여성의 이분 체계가 이를 공고히 했다. 그래서 그 구분 속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비정상인들로 취급받았다. 영어 퀴어(queer)의 원뜻은 ‘이상한, 괴상한’이라는 사실을 알면 이해가 훨씬 쉬워진다.

  

하지만 ‘퀴어’들은 곧 그러한 이분 체계의 틈을 노리게 된다. 여성이 남성 역할을, 남성이 여성 역할을 흉내 내는 식으로 패러디를 시도한다. 그러한 패러디의 충격은 곧 당연시된 경계로 보인 체계가 사실은 인위적 구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고, 결국 기존의 이성애 중심 질서는 그 권위와 확실성을 도전받기에 이른다. ‘퀴어’라는 용어가 확장하여 중립적인 의미로 성소수자들 전반을 가리키게 된 것도 기존에 쓰이던 단어의 맥락이 다른 식으로 변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를 의미한다)라는 언어가 등장하여 성소수자들을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들이 행한 저항이 얼마나 새로운 개념의 확장을 일구었는지 체감할 수 있다.

 

이처럼 기존에 만들어진 세상과 반대되는 그 무엇을 꿈꾸기 위해서는 저항을 해야 한다. 저항을 한다는 것은 먼저 기존의 자신을 억압하는 규칙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신이 이곳에서 어떻게 낙인찍어져 있는지, 그리고 자신을 형성하는 이 세계가 얼마나 위압적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즉, 자신과 자신의 주변 지형을 잘 알아야 한다. 푸코는 이것과 관련해 자기배려라는 윤리적 방법론을 이야기한다.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하면서 중요한 것은 세계와 인연을 끊고, 또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것으로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정확하게 세상에서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와 자신이 속해 있는 필연적인 체계를 헤아리는 것이다."[주석15]


주디스 버틀러가 젠더 관점을 극복하기 위해 이야기한 패러디 기법의 근본적 성격은 무엇인가? 자신을 잘 안 다음에 비트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 과정을 통해 기존을 전복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뒤집을 때 확신하는 것은 그것을 뒤집는다 해도 모든 것이 멸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성애 중심주의가 아닌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주장할 때,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와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모든 것이 만들어진 것이고,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괴와 전복이 허용될 수 있다. 그러한 주장은 많은 사람들을 우려스럽게 만들 수 있기도 하고, 어쩌면 허탈하게 만들기도 한다.[주석16]

하지만 철저한 무, 혹은 공을 직시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두 가지, 해탈하고 열반에 가든가 아니면 이 세계에 남아 끝없이 세계 속 하나의 개체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만들고, 우리의 파괴도 우리가 만든다. 이 세계를 우리의 마음이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 집중한다면 이 세상은 우리가 창조하고 만들어내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이러한 예술론이 우리로 하여금 드디어 자유로운 주체가 되도록 한다. 유희와 예술을 통해 모든 것이 무라는 니힐리즘 개념을 극복할 수 있다고 설명한 니체가 이러한 사상의 대표주자이다.

 

니체는 예술이 진리보다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은 인간이 꾸는 종적 환상 너머를 응시한다. 우리의 삶은 인간이라는 특정한 종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꾸며낸 무수한 오류들에 영향 받는다. 이 모든 것은 일종의 인간적 왜곡이지만, 적어도 우리가 만들어낸 것들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 우리 자신의 관점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집착을 버릴 수 있게 되고, 자신을 억누르는 힘들로부터 해방된다. 그리고 그때서부터 적극적인 창조의 시대가 개막한다. 왜냐하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의 가치, 방향 모두 직접 자아가 스스로 창조하고 지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공과 허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야말로 니체가 말하는 위버맨쉬이다.[주석17]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예술론은 한편으로 윤리론이요 존재론이다. 인간으로 태어나고 만들어진 우리가 모든 것을 돌아보고 나면 인간이라는 가치조차 누군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푸코와 니체가 한 계보학적 작업의 의의가 그에 있다. 경로를 추적하면 신화화되었던 것들이 사실 역사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 모든 것들도 앞으로 변한다. 모든 언어적 개념과 물리적 경계로 빚어진 이 세상이 우리의 현재 행동에 따라 영향 받고 다시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나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누구냐 그 정체성을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 다른 존재들이 아닌 이 태도를 푸코는 일종의 현대적 태도로 이해한다.

"그러나 보들레르에게서 현대성은 단지 현재에 대한 관계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 정립해야 하는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자발적인 현대적 태도는 필연적으로 금욕주의와 결합되어 있다. 현대적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의 흐름 속에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복합적으로 공을 많이 들여서 세련되게 만들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현대적이 된다는 것은 보들레르 시대의 표현을 따른다면 멋부리는 것dandysm이다. 다음과 같은 잘 알려진 구절들을 상세하게 떠올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천박하고, 저속하고, 비열한' 본성에 대한 구절들, 스스로에 대한 인간의 필연적인 반항에 대한 구절들, 가장 끔찍한 종교보다 더 전체적으로 '열정 있고 교만하지 않은 제자들'에게 부과된 '우아한 교리'에 대한 구절들, 마지막으로 그의 신체, 그의 행위, 그의 감정과 정열, 그의 실존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댄디의 금욕주의에 관한 구절들 …… 보들레르에게서 현대인은 자기 자신, 자신의 비밀, 자신의 숨겨진 진실 따위를 발견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니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창조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주석18] 현대성은 ‘인간을 자기 자신의 존재로부터 해방시키지 않는다’. 현대성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생산하라는 과업을 떠맡는다."[주석19]

 

 

철학과 윤리가 예술의 창조성과 만날 때, 예술가들은 이제 단순히 특정 직업인으로 남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작업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의 방법적 표본이 된다. 푸코에게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1821년 생)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실의 진실과 자유의 실행 사이를 오가는 힘겨운 상호작용[주석20]”, 그것이야말로 현재를 새롭게 창조해내는 자유로의 몸짓, 예술적 자아론이다.

Ⅳ. 결론: 규정된 경계를 뚫고 창조하는 예술적 삶을 위하여

 

본 논문에서는 우선 자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고찰하였다. 비록 아집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지 몰라도 자아는 감각으로 물리적 범위를 형성하고, 언어로 사회적 위치를 확립한다. 그렇게 해서 인간 사회 안에서 인간으로 기능하는 하나의 자아가 탄생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우연한 존재이며 가변적이다. 불교에서 우리를 오온의 연기화합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 진리를 더도 덜도 말고 표현한다. 얼기설기 붙여져 규정되고 제한되는 바가 바로 현재의 나를 만든다. 그렇게 규정된 경계는 인간이 적어도 사회 안에서 안온하게 지낼 수 있는 쉼터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러한 자세는 안일하다. 본질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소 괴롭더라도 우리의 인생이 공이며 가(假)임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를 이루는 경계성이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일심으로부터 생성되며, 그 무한한 마음이 세계와 소통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방치하는 것, 나아가 이 세계를 방치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저 변하는 대로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다면 그것은 자신을 배려하지도 않는 것이며, 세상을 배려하지도 않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그려내고 있고, 그래서 우리가 하는 모든 창조적 행위가 다시 이 세상을 그려낸다는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가 자신의 위치에서 더 좋은 ‘나’와 ‘세상’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를 발견한다. 불교에서는 “신(信)이 깊어지면 지(智)가 깊어진다”[주석21]는 말을 한다. 자기 자신을 만든 규칙과 일심을 믿고 그에 소통하면 다시 자신을 만들어내는 규칙과 일심이 변화한다. 그 와중에 자아가 서있다.

허무함과 허상은 긍정해야 하는 것이지, 부정해봤자 자기기만이다. 물론 미약하고 연약한 자신의 어깨에 세상이라는 너무 무거운 짐이 올라와 힘들 수 있다. 하지만 그 무거워 보이는 무한성을 그리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깃든 마음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의 유한성을 사랑하고 긍정하게 된다. 우리의 유한성이 가진 한계는 우리를 답답하게 만들지만, 그 유한성이야말로 우리가 세계의 무한함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현세를 긍정하는 여러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이 세계를 어떻게 보냐에 따라 이곳은 극락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만약 인간이 현세를 긍정하고자 한다면, 가장 바른 길, 즉 정도(正道)는 무엇일까? 자문자답하자면, 바로 인간이 속한 인간 사회 안에서 인간의 길을 충실히 걸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이때의 충실함이 무조건적인 ‘네’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또한 반발심과 반항심에 차서 앞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니요’만 외치는 것도 아니다.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낙타의 길도 아니고 사자의 길도 아니다.

 

다만 우리의 몸짓은 어린아이처럼 가볍고 무용수처럼 즐거워야 한다. 자신이 가변적이고 우연한 고리 중 하나라고 해서 자신을 쓸모없는 무한 개 중 하나라 볼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자신의 실존을 형벌처럼 받아들 필요도 없다. 끝없이 말하고, 춤추고, 이야기하고, 소통하면 된다. 그것이 바로 가변성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언제나 변화할 수 있음을 즐겁게 받아들이자. 지금의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것, 자기 자신을 행복에 다다르게 하고, 앞으로의 자기 자신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계속 살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창조다. 창조는 무책임한 행위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을 살피지 않는 배려 없는 태도도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이 세상인 것을 알고, 자신의 기준을 세워 완벽히 자립하는 것이 창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불행한 삶을 살면서 불행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동시에 행복한 삶을 살면서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그만큼 존재한다. 어떤 세상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나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 그저 당신이 혼자가 아니며 당신과 이 모든 세상이 하나라는 것만 알면 된다. 그러면 당신이 그리고자 하는 세상을 향해 당신의 삶이 펼쳐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규정된 경계를 뚫고 창조하는 예술적 삶의 본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Ⅴ. 참고문헌

김용준, 이유선, 황설중, 임건태, 이병철, 󰡔로티의 철학과 아이러니󰡕, 아카넷, 2014.

박병철,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의 초대󰡕, 필로소픽, 2014.

한자경, 󰡔불교철학과 현대윤리의 만남󰡕, 예문서원, 2010.

한자경, 󰡔불교철학의 전개, 인도에서 한국까지󰡕, 예문서원, 2010.

Butler, J. 김윤상 옮김,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인간사랑, 2003.

Butler, J. 조현준 옮김, 󰡔젠더 트러블󰡕, 문학동네, 2008.

Foucault, M. 정일준 편역,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 새물결, 1999.

Foucault, M. 심세광 옮김, 󰡔주체의 해석학󰡕, 동문선, 2007.

단행본 꺽쇠 󰡔 󰡕

[주석]

 

한자경, 불교철학의 전개, 인도에서 한국까지, 예문서원, 2010, p51.

 

2.한자경, 불교철학과 현대윤리의 만남, 예문서원, 2010, p66. 이 책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일정한 공통성에 의해 갖는 종적 환상이라는 개념을 빌려왔다.

 

3.한자경, 불교철학의 전개, 인도에서 한국까지, 예문서원, 2010, p61.

 

4.주디스 버틀러, 김윤상 옮김,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인간사랑, 2003, p119

 

5.한국어 번역 제목은 나르시시즘에 관한 서론이다. 지그문드 프로이트, 윤회기 옮김, 무의식에 관하여, 열린책들, 1997 참고

 

6.주디스 버틀러, 위의 책, p475

 

7.주디스 버틀러, 위의 책, p120

 

8.박병철,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의 초대, 필로소픽, 2014, p208

 

9.박병철, 위의 책, p215

 

10.오온은 색수상행식으로 이루어진 인연화합의 축적물이다. 이 오온에 관련한 설명은 한자경, 불교철학의 전개, 인도에서 한국까지p32에 자세히 나와 있으므로 참고가 가능하다. 여기서 대략적으로 요약을 하자면, 우리가 흔히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단일하거나 결정된 요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들이 임의적으로 만나 형성되었다는 무아론(無我論)의 원리라 할 수 있다.

 

11.한자경, 불교철학과 현대윤리의 만남, 예문서원, 2010, p27

 

12.한자경, 위의 책, p39

 

13.자기배려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1926년 생)가 자신의 후기 이론에서 윤리적인 삶의 방향을 모색하며 이야기한 개념이다. 자기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적 작업으로, 불교에서 하는 수행법인 관과 유사한 지점이 있어 언급하였다.

 

14.주디스 버틀러, 조현준 옮김, 젠더 트러블, 문학동네, 2008, p350

 

15.미셸 푸코, 심세광 옮김, 주체의 해석학, 동문선, 2007, p567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본 책에서는 이 부분을 푸코의 강의록 중 <타자들>에서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16.이성애중심 체계를 기반으로 한 결혼 제도, 가족 제도에 대한 회의가 바로 잇따를 수 있다

 

17.김용준, 이유선, 황설중, 임건태, 이병철 , 로티의 철학과 아이러니, 아카넷, 2014, pp231~233. ‘위버맨쉬는 흔히 초인으로 알려져 있다. 위 책은 로티 철학을 설명하는 책이지만, 미국 철학자 리차드 로티(1931년 생)가 어떻게 니체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설명하는 부분에서 니체 철학을 잘 설명하는 부분이 나와 인용하였다.

 

18.밑줄은 필자가 본 논문과의 연결성을 강조하기 위해 첨가하였다.

 

19.미셸 푸코 외, 정일준 편역,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 새물결, 1999, p190 본 책 중 <계몽이란 무엇인가>의 한 부분이다.

 

20.미셸 푸코 외, 위의 책, p189

 

21.한자경, 불교철학의 전개, 인도에서 한국까지, 예문서원, 2010,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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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철학사론 - 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
이규성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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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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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성실하고 세계에 충실했던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을 삶의 방향과 연관하여 고찰 - [한국현대철학사론] 2장을 읽고 박지원, 홍대용과 연결 지어서

 


 

  필자는 [한국현대철학사론] 2장에 나오는 대종교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박지원, 홍대용의 사상과 연결 지어 평가하기 전에, 우선 스스로가 지녔던 고민을 서론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 고민은 다음과 같다. 필자는 왜 철학을 공부하는가? 이유는 하나다. 신체기관을 멀쩡히 가지고서도 자신의 참된 의지로 그것을 움직이지 못하는 종속에서 탈출하고자 함이다. 삶은 언제든 감옥이 될 수 있다. 정신을 놓치고 살다보면 현대화의 급류에 휩쓸려 갈 곳 없이 길을 잃어버린 채, 발이 묶여서는 곧 자신의 향방마저 잃게 된다. 그 지점에서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 지 고민을 멈춘다면 우리는 주변의 거시적인 흐름을 아무 생각 없이 쫓아간다. 그것들을 쫓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가고 있는 이 길이 어디를 향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이 자신의 길인가? 이때까지 스스로 발걸음을 멈추어 생각하고, 판단하고, 따져보고, 마음먹어서 행동한 적은 있었던가?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고민조차 하지 않고 무작정 걸어온 것은 아닌가?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스스로에게 자율과 독립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 삶의 주인은 정녕 스스로가 맞는 것인가?

  철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잠시 멈추어서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힘을 갖는다. 철학 공부의 의의가 바로 그곳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만약 철학 공부를 통해서도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 공부에 의미가 있는 것일까? 철학이라는 이름에 도취해 버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철학 속에서도 공허한 타인의 말들만을 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철학 공부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건설하려 했던 초심을 잃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러한 고민을 하고 있던 것이 바로 최근의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필자는 ‘한국철학’ 수업을 들으며 홍대용을 만났고, 박지원을 만났으며, [한국현대철학사론]을 읽으면서는 독립 운동의 최전선에 서있었던 대종교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고고히 비주류의 길을 택한 홍대용과 박지원, 일본의 압제 속에서도 자신들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대종교인들의 정신이야말로 철학 공부를 그저 허황된 남의 이야기로 만들지 않고, 현실의 행위로 변환시킨 진정한 선비의 그것이라 평할 수 있었다.

  대종교의 인물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혼란스럽고 격변이 심했던 시대인 1800년대 말과 1900년대 초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시기의 사람들은 몰려오는 국내외의 여러 문제들과 직면하였다. 기성 사대부의 부패한 세도 정치와 외부에서 밀려오는 국가적, 민족적 억압은 한반도의 사람들에게 심각한 위기이었다. 그처럼 경황없는 세태가 그들로 하여금 치열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고민을 멈추었다면 남은 선택지는 외부의 억압과 부조리한 권력에 굴복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행동하는 지식인들은 굴복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미 그 시기에 한반도 내부에서는 신분제에 대한 회의와 저항의식, 개개의 개체를 그 자체로 정당하다고 옹호하는 정신 등이 동학 농민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동학 농민 운동은 안타까운 실패에 봉착하였다. 이러한 실패를 딛고 민중적 지성들은 점차적으로 자신들을 짓누르기 시작한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으로 그 의지를 이어나간다. 대종교에 참가한 인물들은 외부적 측면에서는 나라와 민족 모두가 공존하며 상생하는 원리를 지향하였고, 내부적 측면에서는 한민족의 근원적 뿌리를 단군사관으로 삼는 문화적 기초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제로 당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지식인들 중 많은 수가 대종교에 사상적 근간을 두고 활동하였다.

  중요한 것은 그 때 당시 대종교인들과, 대종교에 관여한 독립 운동가들의 정신에 유가적 전통이 잠재한다는 점이다. 내외합일을 이룩하여 자신의 기초를 잡고 그를 바탕으로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유가의 살신성인하는 정신이 당시의 독립 운동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투쟁을 지속하도록 이끌었다. 그들의 이러한 자세는 홍대용, 박지원 같은 조선 후기의 실학파들이 지향한 선비가 가져야 하는 자세와 유사성을 갖는다.

  조선 후기 실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인 홍대용과 박지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속한 시대상을 알 필요가 있다. 당대에는 노론에 해당하는 주자학자들이 정파의 위치를 주장하며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그들의 편협한 습성은 당시 사회경제학적으로 불합리한 수취제제로 고통 받던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주자의 말을 숭상하고 예와 도에 천착하는 것 말고는 당시 급변하는 시대 정세에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옆의 청나라로 들어오는 새로운 문물들에 대해서도 명에 대한 절개를 지켜야 한다며, 청나라를 오랑캐로 쉽게 낙인찍고 경계했다.

  이러한 폐쇄적이고 답답한 시대 속에서 홍대용과 박지원은 사회 주도층이 무시한 백성의 실질적, 현실적 괴로움에 귀를 기울였다. 노론 명망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당대의 기준으로는 좋은 신분에 해당한 그들이 당시의 주류를 부정하였다. 그들은 기 철학을 바탕으로 주자학자들이 중시하는 초월적 이(理)가 아닌, 세상의 만물을 창조하는 무한한 기(氣)의 발현에 집중하여 현실의 세태를 중요시 하였다. 그들이 그러한 생각을 쫓아 그것들을 글로 남기고, 사회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이유는 그들이 선비들이 가져야 할 자세인 내적인 성실함과 외적인 충실함을 다하였기 때문이다.

  홍대용과 박지원, 이 두 학자가 속한 실학파와 대종교를 위시한 독립 운동가들의 공통점이 바로 유학에서 말하는 선비의 자세라고 볼 수 있다. 실학파와 독립 운동가들은 세상의 민초들이 내는 고통의 신음소리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소급해보면 유가의 근원이자 선현인 공자와 맹자의 정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무릇 선비라면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는 긴장된 의식을 지녀야 한다고 말했고, 맹자는 군주가 무엇을 즐기고자 한다면 백성과 함께 즐겨야 참된 가치가 있다는 ‘중락衆樂’,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정신을 이야기했다. 이 두 명의 이야기를 조합하면 선비는 백성과 민중의 즐거움을 위하여 정진하고, 노력하는, 그리하여 끝없이 긴장하는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긴장하는 사람으로서는 매사 경계를 놓지 말아야 하니 벅차고 고된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자는 단호히 죽은 뒤에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 진정한 선비라고 말한다. 이러한 점을 보면, 막중한 책임의식과 사명의식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면 감히 스스로를 선비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가의 선비정신은 결연히 실학파와 독립 운동가들로 이어져 당대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발현되었다.

  하지만 처한 위치가 다른 만큼 실학파와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이 취한 구체적인 행동 양상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홍대용과 박지원은 당대의 사회경제적 측면에서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여러 이론을 제시했다. 그들이 이야기한 한전제와 같은 토지개혁제도가 그러하다. 그들이 대안을 내놓으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높이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초월하여 더 넓은 차원의 평등을 이야기하지는 못했다. 박지원은 한전제를 이야기하며 토지 소유에 상한선을 두었다. 이는 그가 사대부의 권익을 인정하는 측면이 있었음을 보인다. 반면 대종교의 해학 이기는 토지 공개념을 주장하여 사적인 매매를 전면 금하고, 국가의 공적 매매만을 허용하는 급진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독립 운동가들이 실제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일제에 투쟁했다면, 홍대용과 박지원이 당대 사회 문제의 개혁을 위해 그 정도 차원의 실천을 보여주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독립 운동에 힘썼던 홍암 나철이 자신의 죄가 막중하다며 자살한 것과 비교해 홍대용, 박지원은 자신들의 사회 개혁적 사상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비교적 완만하고 애매한 식으로 글을 쓰는 경향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특히 그렇다. 물론 시대상의 위급함이 어느 쪽이 더 중하고 급했나를 고려한다면, 홍대용과 박지원의 선비 정신이 독립 운동가들에 비해 부족하다고 쉽게 평가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의 선비 정신이 1900년대의 대종교 독립 운동가들에 비하면 아직 신분적 질서에서 훨씬 덜 자유로웠다는 것을 파악할 수는 있다.

  박지원, 홍대용과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서 사상적 유사성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 될 수 있다. 그들은 기(氣)를 중심으로 하는 철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현 세계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 노력했다. 이(理)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자들이 종종 이의 절대성을 강조하여 기(氣)의 측면을 위계상 아래의 것으로 보고 경시한 경향이 있는 것과 다르게 기 철학은 인간 개별을 옹호하고, 현실적인 측면에 중점을 두는 데 활용되었다. 또한 실학자들이나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이나 유가적 전통에 가장 충실하였다고 볼 수는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적 근거를 불교, 도교, 양명학 등 유가 밖에서 찾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들은 유, 불, 도의 주요 개념을 가지고 고유한 내외합일의 관계를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의 맥을 나눈다.

  대종교의 인물 중 하나인 서우 전병훈의 경우, 그는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도교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가 해석한 [천부경]에서는 장자가 이야기한 내성외왕의 정신과 유사한 ‘겸성(兼聖)’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한다. 이는 초월적 수련과 정치적 실천을 종합하려는 방향을 의미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그는 신체를 다스리는 수련법을 익혀서 몸 안에 흐르는 생명 에너지를, 정신의 자유를 위한 형식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이처럼 대종교에서 인간의 몸 안에 내재한 생명원리를 그 자체에서는 완전한 것으로 긍정하고, 그를 바탕으로 외부를 향한 실천을 강조한 부분은 도가적이면서도 기 철학 중심적인 사고를 드러낸다.

  그러나 기 철학을 중심으로 하였다고 해서 대종교의 사상이 개별자들 각각에게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다. 기 철학을 통해 행동해야 할 윤리적 실천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전제가 되는 것은 인간이 만물의 모든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실천적 원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만유와 인간은 본원이 같고, 그렇기에 우주적 연대성이 윤리적 실천의 근본 원리로 작용해야 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더 나아가면 대종교에서 주장한 만민평등권과 인민주권론에 대한 지향, 공동의 연대 의식이라는 개혁적 성격도 엿볼 수 있다. 해학 이기가 민권의 보편적 원리를 심화해서 이야기한 것이 비슷한 맥락이다. 또한 실제로 대종교의 이러한 홍익인간정신,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그 생각이 대종교의 사람들로 하여금 단순히 민족적 차원에서 생각이 머물지 않고,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 나아가게끔 하는 사상적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홍대용, 박지원의 경우에도 유가를 중심으로 하고는 있지만 불교, 도교, 양명학, 묵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홍대용은 철저한 주기론자, 그것도 기일원론자로서 궁극적인 생명원리는 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노장의 사상에 특히 영향 받았다. 노장 사상에 따르면 사람과 사물이 생겨나는 것이 천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천지는 광대한 공허이고, 시간과 공간 역시 그 시작과 끝이 없다. 그 텅 빈 곳을 가득 채운 것이 바로 무한량의 기(氣)다. 홍대용은 그 기(氣)가 내포하고 있는 생명력에 중점을 두었고, 만물과 인간이 동등하게 같은 기(氣)를 나누어 가진 것이므로 모든 것들의 기본은 같다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세계관에서 안과 밖의 구분은 무의미하며, 누가 더하고 누가 덜하다는 식의 차별과 위계의 원리는 통하지 않는다.

  박지원의 경우도 비슷하다. 노장사상과 불교의 영향을 받아 우주적 차원의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였다. 그러한 시야를 통해서 만물의 평등성을 이야기하는 개방적인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였고, 그를 바탕으로 당대 사회의 좁은 인습을 비판하였다. 신분 안에 존재하는 낡은 구분과 구별에 따른 폐단을 지적하고, 고통에 시름하는 백성들의 처지에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 과정에서 기(氣)의 발현인 우주 그 자체를 긍정하고, 맹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들의 식(食)과 색(色)이라는 본성 그 자체를 존중하여, 그것을 충족시켜주고 같이 즐길 줄 아는 것의 중요성에 눈 떴다.

  이처럼 실학파들과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이 기 철학을 중심으로 하려고 했던 이유는 그들이 처해있던 사회적 맥락이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대안 제시를 요구할 정도로 급박한 시국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理)를 인정하는 상태로 주기론적 입장을 견지하는지, 아니면 기일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는지와 상관없이 그들이 기(氣)라는 실체적 존재에 방점을 찍은 것은 부정적인 현실 세계를 빨리 바꾸어야 할 긴요한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당시의 세상이 도탄에 빠진 상황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주리론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성리학자들에게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기의 긍정과 그를 통한 자유와 평등성에 대한 이야기를 바깥에서 찾고, 검토함으로써 자신들의 사상을 주체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려 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실학파들과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은 크게 유교에서 지향하는, 세상의 일에 근심하며 백성과 사회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해 항상 긴장하는 선비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 또한 그 사상적 바탕을 기(氣)에 방점을 둔 철학으로 삼고, 동시에 다른 사상이나 학파에서 이야기하는 평등성과 겸애 같은 중요한 정신을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자기들의 것으로 삼은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크게 본다면, 당시 사회에서 개방적이고 개혁적이었던 실학파 홍대용과 박지원의 주체적인 기 철학자로서의 면모가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에게 계승되어 독립 운동이라는 자립적이고 굳건한 활동과 한민족의 시조로 단군을 삼은 종교적인 색채로 발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우리가 삶의 방향성으로 취할 수 있는 지점은 무엇인가? 홍대용, 박지원이 당시의 시대 맥락에서 실학을 주장한 것과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이 압제 속에서 자신들의 철학을 지켜낸 것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다시 우리의 현실 문제와의 연결고리로 나아갈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그들처럼 사는 것은 매우 지난하고 힘겨운 일일 수 있다. 특히 대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식의 노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사회적 활동을 멈추고 ‘무상’의 본원으로 수렴하는 자기변형의 노력을 요구한다. 그렇게 생명의 본원에 접한 자는 차별성이 없는 본원의 덕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다시 현실적 상황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 내적 수렴과 외적 활동의 종합적 구조는 언뜻 들어서도 고차원적이고 부단한 수행을 전제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을 과연 소수의 지식인이 아닌 만민이 해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기 위한 굉장한 주체성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러한 정도로 힘든 수행을 담보하여야 얻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떠받들고 존경하는 독립 운동가들이 그러한 주체적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과연 그렇게 자신의 몸을 던져 주권을 수호하고 자유를 쟁취하려는 행동을 취할 수 있었을까? 홍대용과 박지원이 세상의 불의와 불합리함, 부조리함이 버겁다는 이유로 그 답답한 시세에 지성과 주체성을 팔고 노론 대작으로 살았다면 지금과 같은 의미로 우리에게 남아 있었을까? 그들이 쉽게 포기했다면, 우리가 그들의 삶에서 배울 점이 남아 있었을까?

  그들의 삶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그들이 남의 삶을 살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시대를 초월한 어떤 종류의 정신성을 쫓지 않았고, 시대 속에서 호흡하면서 그 시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만 하는 실천을 쫓았다. 그것이 그들이 바탕으로 삼은 기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세계와 자신들의 위치가 서로 어긋나 있다 하더라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고, 그를 통해 세계를 변형시키려는 최선을 다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내적인 곳에서는 성실성을, 외적인 곳에서는 충실함을 다하려 한 자세와 관련이 있다. 홍대용과 박지원은 자신들의 시대적 맥락 안에서 끊임없는 저술 활동과 대안 제시를 위한 공부를 통해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으며, 대종교의 독립 운동가들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목숨을 위협받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정신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깨달음을 대종교 윤리 교훈집 [참전계경]의 한 구절과 연관 지어 이야기하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안주하는 생각은 크게는 인간의 본성을 멸하고, 작게는 의지를 멸할 수 있다. 본성과 의지를 다 멸하면, 존망을 분별하지 못한다.(安念者, 大可滅性, 小能滅志, 性與志俱滅, 存亡難辨.)”

  무너지지 않는 의지로 본성을 실현시키는 데 있어서 독약인 것은 안주하는 생각이며, 안주하는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남들의 말에 휩쓸려 자신의 목소리를 잃는다는 것과 같다. 그러한 처지에 놓인 사람은 자신이 죽고 사는 존망의 문제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길을 잃어버린 처지와 같다. 우리 역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안주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비록 고난의 여정일지라도,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어느 날 죽어버리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끝없이 현실의 문제들을 살피며 자신과 세계에 성실함과 충실함을 다하여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라면 충분히 유의미할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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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이청준」 - 눈길, 서편제, 벌레 이야기 사피엔스 한국문학 중.단편소설 4
이청준 지음, 김준우 엮음 / 사피엔스21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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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과제 //


너무나 커서 숨기지 않으면 흘러넘치는 어머니와 자식의 빚에 대하여 - 이청준의 「눈길」을 소설의 구성요소 중 주제를 중심으로 분석


  이청준의 「눈길」이 이야기하는 주제는 매우 분명하다. 소설의 끝에서 독자는 주인공 '나'와 노모 사이에 자리한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 연민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의 백미는 그러한 주제를 한 번에 다 보이는 데 있지 않다. 부끄럼 타는 여인처럼 속살을 조금씩 드러내는 데 있다. 모친을 향한 사랑과 연민이라는 주제는 흔하고 대중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이 소설이 그 주제를 어떻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루는지 그 접근법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이 소설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면, 드러내 놓고 환하게 빛나는 모자의 사랑 때문이 아니다. 그토록 선명한 것을 어둠 속에 꼭꼭 숨기고 안 보려고 한 아들의 심정과 그런 못난 아들을 탓하지 않는 어머니의 강인함이 엮여져, 그들의 사랑이 역설적으로 얼마나 뜨겁고 강한 것인지, 오히려 얼마나 외면하기 힘든 것인지 드러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주제가 노골적으로 노출되었다면 눈물이 흐를 만큼의 감정을 자극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이 소설은 자신의 주제를 열심히 숨기려고 한다. 주인공이자 노인의 아들인 '나'라는 서술자의 상당히 건조한 진술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 

  '나'는 이 소설의 맨 처음 1장만 보면 무척 무정한 사람으로 보인다. 아내에게 말하여 먼저 어머니를 찾아뵙자고 말한 것이 본인이면서, 막상 오고 나서는 노모의 곁을 최대한 빨리 떠나려고 기를 쓴다. 하지만 막상 간다고 하니 딱히 잡지도 않는 노모를 보며 '나'는 불현듯 짜증이 올라와 자리를 피해버린다. 이 단편 소설은 1장에서부터 많은 것을 암시한다. '나'는 어머니를 최대한 떠나려고 한다. 그러면서 또 어머니의 반응을 신경 쓴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다는 고백이나 자세한 심경을 '나'의 서술에서 발견할 수는 없다. '나'는 감정을 토로하거나 있었던 일을 전부 밝히지 않는다. 시골집의 풍경을 묘사하는 어휘는 풍부하지만, 막상 인물 간의 이야기에서는 인색하다. 이러한 서술 방법이 오히려 무뚝뚝한 아들을 잘 형상화한다. 그렇다고 그저 무뚝뚝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이 군다. '나'는 어머니와 자신 사이에는 서로 빚진 것이 없다는 말을 계속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매정함을 정당화하지만 그러한 반복적 진술은 그의 억압된 심리를 언뜻 보여준다. 

  소설이 전개되면서 모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윤곽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러기까지 몇 가지 징검다리가 있다. 여느 방문처럼 왔다 빨리 갈 수 있었는데, 노인이 생전 안 하던 말을 꺼낸다. 바로 노인이 넌지시 바라는 소망, 지붕을 고치고 싶다는 바람이다. '나'는 노인이 자신에게 무엇을 행여 해달라고 할까봐 매사 초조해했다. 서로에게 빚이 없다는 '나'의 강한 인식은 그 자신의 무결함을 강조한다. 소설 안에서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주벽으로 패가망신한 형의 뒤처리를 자신이 해야 했다는 억울함, 그리고 자신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많은 것을 상실해야 했다는 아픔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서는 그저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만 언급되지만, 집을 잃어버리고 난 후 찾아간 골목에서 황망히 헤매던 소년의 발걸음에서 상실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역경들을 디디고 지금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자신이 장남의 책임을 건실하게 해냈다는 그 사실 하나야말로 그가 내세우는 정당성이자 동시에 생색내기다. 그는 혼자만의 계산속으로, 이때껏 자신이 당한 것, 억울한 것이 많음을 어머니도 알아서 자신에게 함부로 무엇이든 요구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머니가 당신의 집도 지붕 개량 사업에 참여하면 어떻겠냐고 말하니 그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는 꿋꿋이 자신이 빚이 없으니 아무래도 상관없고, 바로 올라가 버리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한 명의 인물이 더 있는데, 바로 아내다. 이 외부 인물이야말로 그 둘 사이를 매개하여 정확히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감정이 묻혀 있었는지 알려주는 일등 공신이다. 그녀는 끝없이 어머니에게 말을 거는데 그것이 다 남편으로 하여금 자신의 숨겨진 마음을 살펴보게 하려는 배려다. 자신의 마음을 꿍쳐둔 아들이나 모친이나 아내가 꾹꾹 찔러대니 그제야 진심이 흘러내린다. 노인은 귀여운 며느리가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에 대답하다 보니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게 된다. 반대로 아들은 관심도 없는 척 하지만 그 둘의 이야기에 귀를 한껏 쫑긋 기울이며 듣고 있다. 그리고 제발 아내가 그만 두었으면, 어머니가 그만 말을 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내의 대화를 통해 그도 기억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간다. 예전, 망해버린 집 앞의 골목으로 찾아와 서성대는 그를 거두어서 밥을 먹이고 재워 보낸 어머니와의 기억이 바로 그 과거다. 망한 집에서 아들을 위해 해준 일을 살펴보면 어머니의 상당한 정성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지금 그렇게 차갑다는 게 못 믿길 정도다. 하지만 아들의 입장에서는 그 이후로 본인이 겪은 고초가 여러 가지 있어서 어머니와 자기 사이에 빚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무엇이 더 있다. 바로 어머니의 심경이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숨기려 드는 못난 남편을 위해 아내가 그것을 파내려는 순간, 어머니도 망설이고, '나'도 헛기침으로 끊어낸다. 어머니에게 숨겼던 마지막 사랑의 빚을 아는 순간, 이때까지 의지해 온, 서로에게는 빚이 없다는 계산식을 뒤흔들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대화가 결국 터지고 만다. '나'가 졸음기에 빠져 그만 잠이 들었는데, 그 아들을 내버려두고 아내랑 어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소설 안에서 어떻게 며느리와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는 생략되어 있다. 필자는 그 부분이 참 인상 깊었다. 깜빡 잠에 들어버린 아들을 내쳐두고 둘이서만 이야기하게 된 것이 참 재미지면서도, 왜 그러한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깊은 속내로 들어가기까지 아들이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불가능해서 그러지 않았나 싶다. 아들도 그렇고 노모도 그렇고 그 정도로 깊은 사랑의 이야기, 숨겨 왔던 깊은 아픔과 슬픔을 서로를 두고 마주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며느리도 필요한 존재였다. 그들이 의식을 갖고서, 둘만 있을 때는 항상 할 수 없었던 이야기가 이제야 진심의 차원으로 진입한다. 어린 아들을 보내놓고 같이 걸었던 길을 혼자 돌아가던 어머니는 눈길에 난 발자국들을 보면서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앞으로 갈 데 없는 것을 걱정했던 것이 아니라, 잠시 부끄러움을 가라앉히고 갈 생각했다는 어머니의 황당할 정도로 강인한 모습은 아들의 얄팍한 계산으로도 숨기지 못할, 아들이 어머니에게 받은 엄청난 빚의 무게를 가리킨다. 

  감수성 좋은 독자라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흘린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모친에게 받은 빚이 너무나 커서 아들은 그걸 볼 수조차 없었다고. 그리고 독자는 각자의 어머니를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참 영리한 소설이다. 주제는 참 보편적인 것인데 기필코 그걸 숨기려는 아들의 이야기로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어머니에 대한 부채의식을 긁어내니 말이다. 갚을 것 없다고 말하는 못난 아들과, 한사코 사양하고 숨기는 어머니의 답답할 정도로 강인한 체념이 동시에 호흡하는 이 무덤덤한 소설이야말로 어머니와 자식의 사랑 혹은 빚이라는 주제를 잘 형상화해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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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청목 스테디북스 64
이상 지음 / 청목(청목사)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학교 과제로 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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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함으로 날개를 부르짖은 청년의 이야기 - 이상의 「날개」를 소설의 구성요소 중 작중인물의 이해와 서술자의 종류를 바탕으로 분석


   이상의 대표작인「날개」의 주인공 '나'는 언뜻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의 행동은 전반적으로 괴이하다. 멀쩡한 젊은 청년이라고 보기 힘들다.「날개」의 독자들에게는 작중인물인 '나'를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대체로 초점은 ‘나’에게 맞추어져 있고,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만이 독자가 가진 실마리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꼼꼼히 살펴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파악이 쉽지 않다. 작가 이상의 성격이 독특하고 개성적이었던 만큼 그의 작품 속 인물 역시 한 편의 수수께끼 같다.

   이상은 소설「날개」의 ‘나’라는 인물을 구현하는 데 있어 크게 두 가지 접근법을 취한다. 하나는 보여주기 방식이다. 이상이 인물의 행동을 보여줄 때는 주로 ‘나’가 위주이며, 다른 인물들의 행동 묘사가 보이는 경우는 ‘나’가 등장하는 장면과 관련할 때뿐이다. 인물들의 특정한 행동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 그 이유를 부연설명 하는 법은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나’를 둘러싼 여러 상황들을 간접적으로 추측하게 된다. 어느 것도 명확한 형태를 가지고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접근법은 의식의 흐름을 통한 내면 묘사다. ‘나’의 의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을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날개」를 읽으면서 ‘나’의 적나라한 의식과 마주한다.

   이 두 가지의 접근법은 단순하게 이등분으로 구별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기보다는 서로 엮여져 있는 상태로 ‘나’라는 인물을 형상화한다. 인물의 행동과 내면 묘사가 한데 섞여 펼쳐지는 쪽에 가깝다. 그러한 작가의 묘사방법을 통해 독자가 그려낼 수 있는 '나'라는 인물은 기본적으로 소리 내어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생각만 한다. 생각도 단편적이다. 외부의 자극에 순간적으로만 반응한다. 어느 소설에서도, 어느 이야기에서도 이처럼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젊은 남성을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무기력한 인물이 많다 치더라도, 자신의 무기력함에 아무런 감정조차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은 드물다. 그는 자기의 행동을 변명하지 않는다.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한 지점이「날개」의 주인공 ‘나’를 독자로 하여금 비정상적이고 인상적인 인물로 기억되게 한다.

   ‘나’에게는 자존심도, 이해력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속없다는 점에서 마냥 어린아이 같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얼마나 예민한 존재인지 안다면 그러한 비유도 적절하지는 않다. 그는 아내가 키우는 한 마리의 개 같다. 자아가 없는 것 같다. 아내가 반찬을 부실하게 챙겨주면 군소리 없이 그대로 받아먹는다. 그래서 쪽쪽 말라간다. 아내가 옷을 챙겨주지 않으면 또 그대로 옷 한 벌을 입고 다닌다. 코르덴 양복 한 벌로 잠도 자고 밖으로 외출도 한다. 그는 어쩌다가 한 번씩 아내를 찾아오는 내객들의 정체를 궁금해 한다. 내객들이 아내에게 돈을 지불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하지만 질문은 일회성에 불과하다. 그 이상 더 나아가지 않는다. 물음은 연장되거나 심화되지 않는다. 회피해버린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노라면 으레히 내 머리는 그냥 혼란하여 버리고 하였다. 잠들기 전에 획득했다는 결론이 오직 불쾌하다는 것뿐이었으면서도 나는 그런 것을 아내에게 물어보거나 한 일이 참 한 번도 없다. 그것은 대체 귀찮기도 하려니와 한잠 자고 일어나는 나는 사뭇 딴사람처럼 이것도 저것도 다 깨끗이 잊어버리고 그만두는 까닭이다.(17)”

   ‘나’는 천치처럼 군다. 그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아내가 자신에게 아달린을 먹여 온 것을 알고 물어보러 집에 들어온 그는 "내 눈으로는 절대 보아서 안 될 것을 그만 딱 보아 버리고 만 것이다.(34)"와 같은 상황에 부딪친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이 소설 안에서 아내가 내객과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는 결국 자세히 언어화되지 않는다. '나'의 사소한 일거수일투족, 그가 아내의 화장품에 비치는 빛들을 갖고 놀고, 불장난 치는 것 따위는 상세하게 다루어진다. 그가 이불 안에 들어가서 사색하고, 게으른 동물로 사는 이야기도 친절히 다 나온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흐릿한 한 문장으로만 넘어 간다. 아내는 내객과 함께 있을 뿐, 정확히 어떻게 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나’의 말에 의하면 아내는 내객과 자신이 같이 있는 모습을 '나'가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생기면 아내는 꼭 화를 낸다. 그래서 '나'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래서 나는 보면 아내가 좀 덜 좋아할 것을 그만 보았다.(30)"고 하는 식으로 표현한다. 그 장면은 ‘보지 말아야’ 하는 것이고, ‘아내가 안 좋아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묘사에서 짐작할 수 있는 점은 ‘나’ 자신의 가치판단이 미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나’가 그러한 장면을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가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제시된 금기나 선을 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뉘앙스가 된다. 무력하고 나약한 ‘나’는 자신의 물질적인 생존을 아내에게 완전히 맡겨버린 것처럼, 남성으로서의 자존심도 아내에게 미뤄버린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자는 ‘나’라는 서술자의 진술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사회를 스스러워 하고, 인간의 삶을 스스러워 하는 그가 마치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과연 진심인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러한 지점에서 필자의 생각에 ‘나’는 신빙성 없는 서술자이다. '나'는 선택적으로 상황을 본다. 이야기를 할 때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위에 쓴 것처럼 아내와 관련해서 자기가 보고 싶지 않은 점은 최후까지 보려 하지 않는다. “뒤이어 남자가 나오는 것 같더니 아내를 한아름에 덥석 안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35)” 정도의 상황이 되어서야 ‘나’는 아내가 “밉다”(35)고 말한다. 그제야 그의 속내가 간신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미움도 잠시, 아내가 억수 같이 퍼붓는 독한 말들에 그는 망연자실하여 도망쳐버린다. 어디를 돌아다니는지도 모르게, 어떻게 갔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얼이 빠진 상태로 돌아다니다가 스스로의 자아에 질문을 던진다. “너는 인생에 무슨 욕심이 있느냐고.(36)” 하지만 그는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도 어려웠다.”는 말로 자신의 질문에서 또 한 번 도망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한다. 직시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날개」의 결말은 비극적이다. 그는 자신과 아내를 ‘절름발이’로 묘사한다. 그와 아내 둘 다 사지가 멀쩡하다는 점에서 그러한 비유는 일종의 자기합리화이다. 어디 딱히 문제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나’가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딱지 붙이지 않는 한 스스로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변명할 길이 없다.

   이 글을 최종적으로 정리하자면, 이 소설은 겉보기에는 한 사람의 철저한 미약함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미약함이 아닌 욕망에 방점이 찍혀져 있다는 게 필자의 결론이다.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삶에 갖는 욕심이나 욕망은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아내에게 지고, 아내 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자기 자신은 거세시키고, 지워나간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이 한 편의 총체적 역설처럼 느껴진다. 무능과 무력, 나약함과 미약함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오히려 한 청년이 자신의 생에 갖는 괴로움과 아내에 대한 애착이 엿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게 사실 욕망이 죽지 않고 살아있음이 소리 없이 드러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자신에게 사라진 인공의 날개가 다시 돋아나서 한 번 더 날아보길 바란다. 날개 없는 그가 취할 수 있는 선택권은 그 어디로도 날아가지 않는 것, 무력하게 제자리에 쓰러져 있어야만 했던 것뿐이었다. 날개 꺾인 새는 언제나 날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날고 싶다는 소리조차 차마 낼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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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날개(이상 단편집)』, 청목,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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