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wolf974님의 서재 (설표 서재) &gt; 영상</title><link>http://blog.aladin.co.kr/wolf974/category/39822575</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더 많은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 있습니다. 연동시키는 중입니다.http://blog.naver.com/wolf974</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Wed, 22 Apr 2026 00:56:03 +0900</lastBuildDate><image><title>설표</title><url>http://image.aladdin.co.kr/Community/myface/pt_7239351801104654.jpg</url><link>http://blog.aladin.co.kr/wolf974/category/39822575</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설표</description></image><item><author>설표</author><category>영상</category><title>위험한 질주 The Wild One 리뷰; 공권력과 저항력, 그 영원한 딜레마 사이에 - [[수입] Marlon Brando - The Wild One (위험한 질주)(한글무자막)(Blu-ray)]</title><link>https://blog.aladin.co.kr/wolf974/13341104</link><pubDate>Mon, 14 Feb 2022 12: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olf974/1334110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3912637018&TPaperId=1334110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5455/10/coveroff/391263701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3912637018&TPaperId=1334110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수입] Marlon Brando - The Wild One (위험한 질주)(한글무자막)(Blu-ray)</a><br/>Various Artists / Mill Creek Ent / 2015년 03월<br/></td></tr></table><br/><br class="Apple-interchange-newline">0. Sons of Anarchy를 보다가 검색해서 어찌저찌 보게 된 영화이다. 말론 브란도가 나오는 고전영화가 전편이 다 올려져 있어서 보게 되었다. 링크는 아래<br>https://www.youtube.com/watch?v=KmOipZaw_qY<br>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단순히 마쵸남자들의 으쌰으쌰 깡패놀이 보여주는 게 목적도 아니고, 혹자들이 비난하듯 약자나 여성 괴롭히는 것을 정당화하는 구린 영화도 아니다.&nbsp;<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오히려 이 영화는 공권력과 저항력, 그 영원한 딜레마 사이에서 괴로워 하는 민초의 마음을 주인공 "캐시"로 형상화하고 있는 명작이다. 이 영화는 나에게 어떤 한쪽의 단순한 구도로 읽히는 영화가 전혀 아니었으며 오히려 세상 본질이 단순한 선과 악의 사이드로 나뉜 것이 아니라 굽히려는 힘과 굽히지 않으려는 힘 사이에서의 불협화음을 그대로 보이는 예술작품이었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1. 말론 브란도가 주인공이 아니라 "캐시"를 주인공으로 본다면<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나의 이러한 해석은 기본적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말론 브란도가 주연한 쟈니가 아니라 마을의 삼촌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있는 캐시로 상정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물론 배우 이름값이나 상징성을 생각하면 쟈니도 매우 중요하다. 오히려 영화 제목이 The Wild One이니 당연히 쟈니가 주인공인데, 나는 생각보다 이 영화의 대칭성 때문에 쟈니가 주인공으로 여겨지지 않은 것이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무엇이 대칭이냐, 바로 쟈니가 몰고 다니는 wild, 날 것의 오토바이 갱단이 상징하는 반항하는 자들과 한곳에 상주하며 조그마한 마을을 이루고 공권력에 의지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마을사람들의 대칭이 그것이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그런데 그 사이에 바로 캐시가 서있다. 그래서 내가 캐시를 주인공으로 생각한 것이다.&nbsp;<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사람들이 딱 보기에는 물론 오토바이 갱단 놈들이 깽판을 치고 캣콜링하며 술 마시고 행패부리는 것이 혼돈 그 자체에 무례하고 상스러운 마초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가 여성억압적인 깡패집단을 미화한다라는 비난들이 있다. 실제로 물론 어느 정도 그러한 면이 있다. 그 정화되지 않은, 여과되지 않은 날 것의 리비도와 자유로움, 무절제함과 내일 없이 사는 망나니들의 모습 안에서 섹슈얼한 상대를 대상으로 자신의 본능을 그대로 표현하는 무례함이 분명히 존재한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그렇지만 나는 캐시가 중간에 쟈니와 오토바이를 둘이서 타고 난 다음의 대화를 보며, 그리고 이 영화에 묘사된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밥그릇이 위험해지자 바로 무장과 폭력을 선택하는 그 양상을 보며, 과연 소위 마초적인, 그리고 여성억압적인 면이 그 "상스러운 마초"들한테만 있었던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즉, 만약 이 영화에 여성억압적인 측면이 있다면, 오토바이 갱단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질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아내를 잃고 어울리지도 않는 마을의 보안관 노릇을 하며 껍데기처럼 남아 있는 "가부장제"와 기존 질서의 상징인 아버지에 대한 동정과 책임감으로 옆에 남아 있는 캐시에게는 가족이라는&nbsp;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작동하며,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로&nbsp;그녀를 무의식적으로 억압했던 것이다.&nbsp;그렇기에 캐시가&nbsp;매일 어떤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 자신과 사랑에 빠져 마을 밖으로 자신을 꺼내주기는 애타게 바랐던 것이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이 영화에서 성별에 대한 노골적이고 깊은 성찰은 아주 분명하지 않다. 사실, 성별이 문제가 아니다. 캐시가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억압적 측면도 같이 드러나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억압"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nbsp;<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그리고 그 억압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 사회의 본질이다. 캐시가 만약 동네에서 자라나는 아들내미라고 생각해보자. 과연 마을을 떠났을 수 있을지? 떠나지 못하는 아들에게도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nbsp;<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아무튼, 캐시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시민의 모습에 가깝다. 외모는 평범하지 않지만, 항상 일해야 하고, 부모와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며,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탈을 꿈꾸기 때문이다. 쟈니가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 것은 어느 정도 이성적 호감도 있지만, 동시에 쟈니가 그녀에게서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 보았기 때문이다. 쟈니는 실제로 자신을 꿈꾸며 자신이 좋다고 들이대는 여자에게는 아주 냉정하다. 사실 들이대는 여자가 거의 답정너를 요구하는 식으로 나는 너 좋아 너도 나 좋니를 물어봐서 짜증을 낸 것이기도 한데, 캐시에 대한 끌림은 자연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여러 모로 미묘하다. 쟈니는 캐시에게도 구속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nbsp;<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나는 그래서 캐시와 쟈니의 관계를 조금 더 상징적으로 보았다. 쟈니가 이 영화가 의미하는 the wild one이겠지만, 내 생각에 그는 캐시 안에 존재하는 the wild one이었던 것 같다. 캐시는 보통의 옛날 스테레오 타입의 상상을 거쳐 자신의 탈출 욕구를 "자신과 일시에 사랑에 빠지는 이방인"으로 미화를 거쳤지만, 사실 그게 로맨틱하게 들려서 그렇지, 결국 가출하고 싶다는 이야기 아닌가. 쟈니처럼 막무가내로 목적지 없이 정처없이 달리고 싶은 것, 그러한 야생성이 캐시가 받아들이기 두려워 울면서 도망쳐야 했던 그 지점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곱게 교육 받은 캐시에게는 결국 사랑에 빠지기에는 너무나 부담스러웠던 것이기도 했다.&nbsp;<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그렇기에 마지막 장면, 금상을 캐시에게 주는 쟈니, 그리고 그 둘의 마주 보는 웃음은 캐시 내면의 불만과 가출 욕구가 쟈니와 쟈니가 몰고온 폭주단들의 소동으로 인해 어느 정도 해소된, 즉, 캐시 내면이 평화를 어느 정도는 찾은 모습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이렇게 보면 이 영화는 모터사이클 갱단의 이야기가 아니라, 마을 안에서 누군가가 와주기만을 기다리는 한 여자의 갈등하는 내면이 해소되는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2. 정의가 아닌 공권력, 대책은 없는 저항력<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아주 뻔한 인용을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다. 사실 너무 뻔해서 구절도 대충 기억은 안 나는 건데, 니체 말이다. 니체가 선과 악, 좋고 나쁨의 기준에 대해 접근할 때 이것조차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역사적 관점으로 쌓이고 쌓인 일종의 문화적이고 변동적인 가치라고 일찍이 이야기하지 않았나. 이 영화가 그 이야기를 고대로 한다.&nbsp;<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마지막에 쟈니를 풀어주는 경찰 높은 양반이 쟈니를 보며 내가 너를 볼 때 너 안에 무슨 선/좋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풀어준다는 이야기를 대충 하는데, 이 경찰 높은 양반은 공권력을 상징하고, 공권력의 눈에 자신에게 반항하고 저항하는 쟈니에게는 어떠한 선도, 좋음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에게 저항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쟈니에게서는 선이나 좋음이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그리고 쟈니나 모터사이클 갱단은 애초에 선이나 좋음을 쫓아서 그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 너무 많고,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사회에 말 그대로 반항을 하고 저항을 하는 것 뿐이다. 반작용적인 것이다.&nbsp;<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나의 야매 정신분석을 돌려보면, 마을 사람들한테 얻어맞는 쟈니가 옛날 내 애비가 때리는 것보다 약하다 라며 조롱하는데, 한 번 통밥 굴려 때려 맞춰보면 쟈니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은 것이다. 즉, 그는 자신보다 더 큰 권위한테 얻어맞는 것이 지긋지긋하던 찰나에 오토바이를 타고 튀지 않았을까 한 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쟈니 아버지가 경찰이나 그 비슷한 것이었다면 이단 콤보로 그의 상위권력에 대한 알러지 반응이 더 이해도 될 것이고.<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방금 이전 문단은 내가 영화의 대사 한 토막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돌려본 것이고, 결국 어쨌든 그들은 "상대방이 가진 무언가"에 대한 저항을 끝도 없이 하는, 한마디로 존재 자체에 대한 반항, 끝없는 혼돈과 변동, 격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일단 이 상태에서 우리는 마을 사람들과 오토바이 갱단을 이들을 코스모스와 카오스, 공권력과 저항력, 질서와 혼돈으로 양분하여 바라볼 수는 있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그렇지만 강조하건대, 이것을 정의와 비정의로 나누는 것은 철저히 공권력 입장으로 바라보는 것이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물론 혼돈과 카오스가 불러 일으키는 짜증남과 혼란의 씨앗에 대해서는 우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할 수밖에 없다. 사고만 치는 것들, 자기들이 가장 강한 놈팽이들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 안달이 난 놈들,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자.<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그런데, 그러면 공권력은?&nbsp;<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그들이 질서를 지키며 공동체를 안정으로 유지시키며 자신들이 법이고 질서이고 정당성인양 서있네? 그런데 한 번 물어보자. 너희들이 그냥 대빵 깡패 아닌가? 즉, 국가가 가장 큰 깡패 아니냐는 말이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실제로 국가와 질서에 기댄 마을 공동체가 과연 정의롭고 비폭력적이고 이상적인 것이냐, 보면 그렇지 않다. 캐시의 아버지인 보안관은, 모터사이클 갱단에 맞서서 싸우려 드는 마을의 한 아저씨가 어렸을 때부터 깡패였다는 식으로, 그래서 말릴 수가 없다는 식으로 대사를 친다. 이게 무슨 뜻일까? 마을 안에 있는 사람들도 다 인간의 집단 군상이며&nbsp;어떻게 보면 호전적이기도 하고 분연히 총으로 자신을 맞서는 놈들을 패주고 쏴서 죽이려는 그 사람들도 당장 모터사이클 갱단에 들어가서 오토바이만 안 끌고 다닐 뿐, 자신의 맥락에서는 충분히 사적인 제재와 폭력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수호하고 안위를 지키려고 하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영화에 나오는 안경 낀 아저씨는 우리 사회의 지식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혔는데, 한쪽이 나쁜 짓 하다고 똑같이 나쁜 짓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나름 양식 있는 말을 호전적인 마을 아저씨는 겁쟁이가 하는 소리로나 치부해버리는 것을 보면, 지식인의 말을 대중은 항상 무시한다-는 패턴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nbsp;<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아무튼, 공권력과 경찰에 힘을 빌리고 빗대어 있지만 결국 마을 공동체는 그 평화 안에 나름의 힘과 권력 앞에 붙어 있는 것이고, 그 큰 권력 앞에 이죽거리는 저항군단은 사실상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폭도들이지만, 결국 경찰들이 너네 혼난다 하면 깨갱해버릴 수밖에 없는, 국가라는 최종보스 앞에서는 깨갱하는 소규모 양아치들인 것이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나의 이러한 해석에 빗대면 결국 우리는 이 길을 선택하나 저 길을 선택하나 억압, 억압, 억압 속에 갇혀 있는 중생들인 것이다. 마을 안에서 평화롭게 있는다 치손 결국 우리는 강력한 힘에 깃대어 돌아가고 있는 사회 질서의 억압에 갇혀 있는 것이며, 그 반대로 가봤자 철부지 양아치 짓하면서 손가락질이나 받고 금방 빨리 죽기에 딱 좋은 위험한 일이나 하는 또 다른 종류의 사회 질서의 억압에 갇히는 것이다.&nbsp;<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3. 남자다움 혹은 badass에 대하여<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마지막 관전 포인트는, 이 시점에서 나와야 하는 것인데, 바로 남자다움에 관한 것이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참 요즘 같은 시대에 미묘한 단어선택이 아닐 수 없다.&nbsp;<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한 번 생각해보자. 대체 남자다움이 뭐냐?<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영미권에서는 badass라고 속칭되는, 말론 브란도나 제임스 딘으로 형상화되는, 영원한 반항아들. 어떤 시점으로 보면 철부지 같은 놈들이기도 하고. 절대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말 같은 사람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우리가 남자답다, 멋있다-라고 표현하는 이 종류의 사람들은 내 생각에 기존의 문화 질서에서 남자들이 숭상하는 남성다움의 전형을 보인다고 생각한다.&nbsp;<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남자답다, 멋있다 할 때의 기준은 보통 옛날 관용구들을 생각해보면, 사나이가 한 번 칼을 빼면 무를 썰어야지 이러한 말들이 떠오르는데, 나는 이게 주체적인 삶의 자세, 적극적이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어떠한 자세를 보통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보통 여자는 "백마 탄 왕자"가 와서 꺼내주길 기다리고, 보통 남자라면 자신이 마을 밖으로 나가 사내라면 한 번 이것 저것 해보고 살다 죽어야지!라는 그 고정관념? 옛날 마인드의 결정체라고 해야 하나?<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그런데 나는 이 자세에서 남성이나 여성의 성별적 구별을 버려버리는 순간, 그것이 바로 이 딜레마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되는 자립의 마음가짐이나 태도의 씨앗이 드러나는 것 아닌가 싶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결국 인생은 억압받는 것이고, 위태로운 것이다. 공권력에 기대 있다고 해서 죽지 않는 것도 아니고 잃지 않는 것도 아니다. 저항력에 빠져 자유를 만끽한다고 해서 무조건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nbsp;<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종류의 선택을 내려야 하고 그 선택에 걸맞게 분연히 자기 갈 길을 걸어야 하며, 그 선택의 길에서는 변명도 딱히 필요 없고 두려워 하는 모습도 필요치 않은 것이다.&nbsp;<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쟈니는 자신에게 억울한 순간이 왔을 때도 자신이 해야 하는 말만,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말만 군더더기 없이 했다. 그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말하고 행동했다.&nbsp;<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자신은 자신만이 보호할 수 있고 자신만이 그 길에 책임이 있다는 그 분연한 자세-그것을 우리는 멋있다-남자답다라고 표현해 왔으나 이제는 앞으로의 시대에서 모든 개인이 바라는 그러한 자세이기도 한 것이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그러나 그 독고다이적 자세가 동시에 얼마나 공동체성을 취약하게 할 수 있는가. 약자에 대한 연대나 공감, 연민을 위해 어느 정도 길을 틀어줄 수 있는가. 자립은 연대와 어떤 종류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거기까지는 논의가 쉽게 갈 수는 없는 것 같다.&nbsp;<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실제로 쟈니는 그냥 달린 것 뿐이고, 달리다 보니 어중이 떠중이들이 붙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쟈니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패고 싶기도 하다. 그들이 친구인가? 어떤 연대인가? 그 연대는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막무가내 연대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게 얼마나 정당화되는가? 그들을 그렇다면 항상 억압해야 하는가? 그렇지만 그들이 동시에 우리의 또다른 모습, 우리가 갖고 있는 양면인데?<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그렇지만 인간이 자유를 꿈꾸는 한 그것에 대해 분연히 "자립의 길"을 가려는 그 지향성, 그리고 그 지향성에서 나오는 저항의 매력이라는 강력한 힘을 나는 부정할 수 없을 것 같고, 그 길에도 큰 매력이 있다. 오토바이 갱단이 찾아온 날은 아수라장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옛날 옛적 바쿠스 신을 모시는 무녀들이 벌였다던 환락과 혼란의 축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실제로 페스티벌이 있는 이유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루 쯤은 해방구를 주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나.<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이 모든 딜레마와 아수라장이 섞인 사이에서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바로 이 The Wild One이었다고 생각한다.&nbsp;<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4. (사족)<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영화에 대한 열망이 10대보다는 많이 시들해져 요즘은 무슨 영화를 봐도 시큰둥하였는데, 이 영화는 생각지도 않게 보았어도 이렇게 긴 글까지 적을 수 있었다. 나는 영화의 리뷰를 쓸 때, 내 안에 말이 차오르는 영화만 쓴다. 이건 마치 대화와 같은 것이다. 영화는 길기 때문에 마치 내가 술집에 앉아 있는데 어떤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 나에게 주욱 두시간 정도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다. 보통 흥미없는 경우라면 네 그렇네요, 대충 재미있는 경우라면 네 재밌네요, 답변하고 지나칠 것이지만, 가끔 정말 나한테 그 이야기가 의미가 있다면, 나도 내 이야기를 풀게 되고, 내가 느낀 바를 죽 대답하듯 적게 되는 것이다. 정말 최근에는 영화에 한참 시들해져 있던 나에게 영화의 중요성, 아름다움을 다시 가르쳐준 영화라 더 의미가 있는 리뷰이다.<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 font-family: 돋움, Dotum, Helvetica, sans-serif;"><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5455/10/cover150/391263701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4551094</link></image></item><item><author>설표</author><category>영상</category><title>공각기동대 SAC 시즌 1을 정치철학적 관점과 연결지어 단상</title><link>https://blog.aladin.co.kr/wolf974/13153283</link><pubDate>Tue, 07 Dec 2021 04:0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olf974/1315328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D262633624&TPaperId=1315328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19dvd_75cover.jpg" width="75" border="0"></a>&nbsp;<br/><br/> <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br>나는 이 공각기동대 애니메이션을 재미로 다 본 게 아니라, 필요한 부분만 보았다. 나한테 이 만화는 재미의 차원보다는 언제나 철학적 차원으로의 접근이었기 때문이다.&nbsp;<br><br>1. 타치코마들<br>타치코마들은 분명 정보를 공유하고 병렬화되어 있는 기계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원래 정보를 공유하는 말 그대로 기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 중 하나가 바토에게 '선택받고' 바토에게 '길들여지면서' 예상하지 못한 고스트, 즉 우리 말로 하면 영혼을 가지게 되고 개성을 가지게 되는 차원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 한 개체가 개성을 가지면서 정보를 공유하는 다른 타치코마들까지도 개성을 가지게 되면서, 어떤 타치코마는 온갖 책들, 문학 책까지 보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개성이 무기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본 쿠사나기 소령에 의해 타치코마들은 퇴역/폐기 절차를 밟게 된다.&nbsp;<br>2. 웃는 남자<br>웃는 남자의 정체는 26화에 나온다. 진짜 정체로 밝혀진 아오이란 청년-사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사건들을 불러일으킨 "첫번째 오리지널"이 아니었다. 그조차도 어떤 논문을 보고 그 논문에서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의미를 추출해내고 변용한 "복제품"이었던 것이다. 그는 6년 전 일에만 관계가 있었을 뿐, 사후의 모든 일들은 아오이의 행동에서 다시 영감을 얻어내어 "웃는 남자"라는 상징성에 기댄 자들의 홀로서기 증후군 Standing Alone Complex 때문에 생긴 일들이었다.&nbsp;<br>3. 홀로서기 증후군의 이유<br>홀로서기 증후군이 생기는 이유에 대해 내가 주목한 것은, 이것이 바로 정보의 바다에 빠져 정보의 공유라는 현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인간 개체들의 우울함 때문이다. 비록 공각기동대가 픽션이긴 하지만, 이 픽션은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 지금 우리 인간들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내밀한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만 동시에 그만큼 광범위하게 작동하는 여러 정보와 암시에 빠져 자기 자신의 개성과 인간성, 내러티브를 거대한 담론에 의해 좌지우지 당하고 있다. 특히 요새 이론적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내러티브에 좌지우지 당하여 "돈"이 모든 자유와 권력의 척도가 된 시대에서, 무수히 펀딩하고 투자하고 부동산을 바라보며 자신의 안위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다른 말로, 우리 삶의 의미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요소에 의하여 결정지음 당하는 것이다.<br>이때 인간들은 괴로워한다. 돈에서 지면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려 우울해지고, 심지어는 어떤 사람들은 자살도 한다. 이처럼 거대담론에 치우친 사람들은 자신의 개성,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 자기 자신의 내러티브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정보를 얻었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과 자기 주변의 관계를 상실하여 방향성을 잃어버렸다. 이때 그들은 완전히 상실된 채, 파편화된 채 홀로 고독하게 떨어져 있게 된다. 이때 이들은 자폐처럼 침전되거나 혹은 외부에서 보여지는 강한 목적의식에 자신을 맡긴다. 신자유주의적 내러티브에 빠져 돈이 최고 하면서 미친 듯이 돈을 벌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도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br>극 중에서 사람들은 비슷한 이치로 웃는 남자에게 빠져들었다. 웃는 남자는 일종의 안티히어로로써 강한 존재감, 혹은 강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갑갑한 이 세상을 돌파하고 어떤 선례를 남기면서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은 적에게 맞서싸우는 자는 우리가 기다리고 상상해온 '영웅'의 이미지와 정확히 맞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파편화된 여러 사람들은 아무런 위치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다가 어느 날 만난 강렬한 "웃는 남자"의 의지에 빠져들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호응해버린다. 그들의 존재 의미가 존재하지 않다가, "웃는 남자"라는 상징에 의해 호응되면서 존재의 가치가 부여된 것이다.&nbsp;&nbsp;<br>그렇지만 사실 '영웅'이란 오리지널은 없다. '영웅'이라는 이미지에 부응하여 '영웅적 행동'을 수행하는 '영웅이 되고 싶어 자신을 영웅으로 만드려 하는 주체화의 과정'만 있을 뿐이다. 아오이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없는 어떠한 "의지"를 보고 그대로 따라 하려 한다. 자신이 의지가 없기 때문에 "타인의 의지"를 보고 따라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근본적으로 그 모방행위가 바로 다시 오리지널의 위치에 올라간다. 이 세상에 진품은 없기 때문이다.<br>"원본의 부재가 원본 없는 사본을 만드는 것," 그것을 공각기동대에서는 "홀로서기 증후군"이라고 표현한다.&nbsp;<br>4. 인간과 로봇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만약 그들에게 모두 똑같이 영혼(고스트)이 있다면<br>공각기동대에서는 특이하게 고스트라는 개념이 있는데, 살펴보면 우리가 말하는 '영혼'이란 것과 같은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3번에서의 홀로서기 증후군에 대한 어떤 종류의 문제의식에 대해 쿠사나기 소령이 대답하는 해답이 바로 1번 타치코마들에게서 발견된 "개성"인 것이다.<br>이 시대의 문제는 사람들이 마치 로봇처럼 몰개성화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고 외부의 거대한 정보를 공유하게 되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고스트를 잃고 로봇이 된다.&nbsp;<br>그런데 거꾸로 공각기동대에서는 인간들이 영혼을 잃는 반면 로봇들에게서 영혼이 태어난다. 그 태어나는 과정의 묘사를 살펴보면 나는 두 가지의 선행조건이 필요했다고 파악했다.<br>첫번째는 애정이다. 타치코마들은 바토라는 남자가 쏟아주는 애정(여기서는 바토가 규격과 맞지 않는 사제 오일로 상징한다)에서 발생한 "우연의 일치"로 "오작동"으로 인해 개성을 갖기 시작한다.두번째는 쿠사나기가 말한 "호기심"이다. 쿠사나기는 바로 이 "호기심"이야말로 정보 병렬화 현상에서 너무나 많은 정보 공유 현상으로 사람들이 방향성을 잃었을 때도 개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 해법이라고 제시한다.&nbsp;<br>실제로 타치코마들은 정말 어린아이 같이 행동한다.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토론하고 질문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자신들의 해답과 토론으로 자기 자신들의 개성을 만들어 나간다. 바로 이 "질문하는 힘"이야말로 그들 스스로가 "개성"을 만들어나가는 실마리였던 것이다.<br>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도대체 누구에게 영혼이 있는지 질문하게 된다. 인간의 육체와 로봇의 기계육신의 차이는 무엇인가? 고스트가 로봇에게 있고 인간에게 외려 고스트가 없고 아무런 질문의식 없이 조건에 따라 반응하며 살아간다면, 사실 로봇이 인간적인 것이고 인간이 로봇과 같은 것 아닌가?<br>5. 정치철학적 관점으로 연결지어서 생각한다-바로 "호기심"은 민주주의의 주체인 시민들이 필요한 "비판능력"이다<br>내 블로그를 보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나는 민주주의를 정치철학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긴말 필요 없이, 나는 현재 대의민주주의 문제가 바로 공각기동대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인간을 비인간적인, 탈개체화하고, 몰개성화하여, 일종의 거수기 혹은 물질을 소모하고 자본을 창출하는 기계적 인간으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nbsp;<br>그리고 나의 이 문제의식에 대한 대답은, 인간이 직접 참여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며, 대의제가 궁극적으로 직접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강조하는 민주주의의 주체가 함양해야 할 능력을 범박하게 묘사하자면, 바로 이 "호기심" 다른 말로 "비판능력"이다.<br>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은 철학자 미셸 푸코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에서 변용하는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실천윤리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단순히 철학 교과서에서 이야기하는 껍데기 식의 주지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nbsp;<br>그것은 끊임없이 나 자신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부모는 누구인가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내가 속한 이곳은 어디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br>우리 자신은 정해져 있지 않다-우리 자신은 그러한 질문들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끝없는 문답 과정에서 나라는 한 명의 개성이 만들어지고, 나를 둘러싼 내러티브들이 태어난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고 어떤 성별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부모를 가지고 있고 어떤 조건 속에서 살아왔으며 어떤 선택을 내리고 어떤 취미를 가지고 어떤 특기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목적을 갖고 살아갑니다 -<br>이런 주체의 의식이 없이 우리는 민주주의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러한 주체의식이 없는 사람은 민주주의에 참여가 아니라 끌려다닐 뿐이다.&nbsp;<br>이를 다시 한 번 공각기동대의 맥락에 적용시켜보자면, 원본이 없을 때, 원본이 진짜 있냐 없냐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 원본이라는 이미지에 감응하여 내가 만들어 나가는 원본과는 다른 사본, 그러나 원본과는 다르기 때문에 또 다른 종류의 원본이 되는 것- 그 행위에 필요한 것은 바로 호기심, 질문하는 것이다.<br>"우리가 사는 사회는 옳습니까? 이대로 가면 괜찮습니까? 당신은 이렇게 사는 것에 만족합니까? 나는 이런 삶과 사회에 만족합니까?"<br>아오이는 지가 베르토프라는 영화감독의 말을 인용한다.&nbsp;<br>"나는 내가 보는 세상을 모두에게 보여 주기 위한 기계다"&nbsp;<br>나는 이를 이렇게 정치철학적으로&nbsp;해석했다.&nbsp;<br>나라는 인간이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함으로써 만들어 낸 자기 자신의 세상을 타인과 공유할 때, 보여주는 나와 그것을 보는 관객들이 묶인&nbsp;"공동체"가 태어난다-고.<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img/19dvd_150cover.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1915080</link></image></item><item><author>설표</author><category>영상</category><title>생존으로 사랑을 증명한 자의 이야기 -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The Revenant)｣ 평론 -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title><link>https://blog.aladin.co.kr/wolf974/8536961</link><pubDate>Fri, 03 Jun 2016 13: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olf974/853696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D062832102&TPaperId=853696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498/3/coveroff/d18263493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D062832102&TPaperId=853696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a><br/>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6년 06월<br/></td></tr></table><br/>계간문예지 󰡔인간과 문학󰡕 2016 봄(제13호) 기고글&nbsp;생존으로 사랑을 증명한 자의 이야기 -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The Revenant)｣ 평론<br>&nbsp;<br>&nbsp; &nbsp;&nbsp;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이하 ｢레버넌트｣)는 글래스의 과거를 잠깐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런 다음, 화면은 곧 현재의 사냥 장면으로 넘어간다. 카메라가 뱀처럼 화면 위를 미끄러진다. 호흡이 길고, 시선의 곡선이 잘 끊어지지 않는다. 카메라가 호기심이 아주 많다. 사냥에 집중한 인물들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가죽을 모으던 백인들이 원주민 부족의 기습을 받아 도망가는 장면처럼 급박한 순간에도 그렇다. 카메라는 유유히 좌우와 앞뒤, 그리고 위까지 올려다본다. 조금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하다.  &nbsp;&nbsp; 인상적인 것은 인간들의 전투와 별개로 원거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자연이다. 인공 조명으로는 줄 수 없는 자연의 풍성한 햇빛이 영화를 가득 메운다. 장면에 인물만 있지 않고 산천초목이 어느 틈 사이에라도 자리한다. 만물이 적셔진 화폭은 풍성한데, 소리가 없다. 음악은 절제되어 있고, 대사도 마찬가지다. 풍경은 관조한다. 욕망, 증오, 살인, 복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카메라는 화면을 집요하게 쳐다본다. 가끔 카메라가 인간을 보는지, 아니면 자연을 보는지 헷갈린다.  &nbsp;&nbsp; 곰이 글래스를 덮치는 장면은 기막히게 아름답다. 감독은 자연의 비정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자본의 힘은 사람들로 하여금 비릿한 현실에 달콤한 당을 입힌다. 우리를 지치게 하는 현실의 차가움이 곰의 압도적인 힘으로 대변된다. 인간이 왜곡한 곰의 여러 상(狀)을 뒤로 하고, 새끼들을 거느린 어미 곰은 본성대로 움직인다. 곰의 공격성은 당연하다. 글래스는 곰의 영역을 침입했다.  &nbsp; 글래스는 여러 번 내쳐진다.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단칼에 죽이는 것은 인간들의 낭만이다. 곰은 인간의 감각에 관심이 없다. 냄새 맡고, 건드리고, 물 뿐이다. 글래스에게는 한 가지 선택밖에 없다. 곰을 죽이는 것이다. 곰의 사정을 봐주는 것은 선택지에 있지 않다. 새끼 곰들을 향한 동정 역시 인간의 환상이다. 그곳에는 삶과 죽음만이 존재하며, 양 갈래의 길은 인간과 비인간을 차별하지 않는다. 자연은 공평히 무관심하다. 카메라는 글래스가 받는 고통의 일격들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공격당하는 그의 난관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대체 언제 끝나는지 모를 곰의 공격이 무섭고 끔찍해 신음소리를 내는 관객을 뒤로 하고, 글래스는 단도를 꺼내 있는 힘껏 곰을 찌른다. 결국 그는 산다. 카메라는 인간의 승리를 보지 않는다. 카메라 렌즈가 지켜본 것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다른 운명을 향하게 된 두 존재다. &nbsp;&nbsp; 글래스와 혼혈아인 글래스의 아들에게 계속 시비 거는 피츠제럴드는 아주 평범한 인물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원주민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다. 원주민들에게 머리가죽이 벗겨진 적도 있다. 그에게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목숨이다. 그는 브리저에게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말해준다. 목숨이 위험할 때, 피츠제럴드의 부친은 언덕에서 다람쥐와 마주쳤고, 굶주린 그에게 다람쥐는 신으로 보였다. 이처럼 피츠제럴드에게 신은 혹독한 세계에서 인간의 삶을 위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다. 그는 이기적이다. 그에게 다른 존재들은 자신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는 자기가 잘 사는 것만 중요하다. 그의 신은 그에게만 자비롭다. 글래스의 죽음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된 것도, 글래스의 아들인 호크를 죽인 것도 그에게는 그저 그의 부친이 언덕 위에서 만난 다람쥐를 잡아 배를 불린 것과 같은 이치다.  &nbsp;&nbsp; 글래스의 아들이 목숨을 잃은 그곳은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아름답고 고즈넉하다. 곰과의 사투 끝에도 죽지 않은 글래스의 끈질긴 삶이 피츠제럴드에게는 성가셨다. 하루 이틀 기다리던 피츠제럴드는 글래스에게 제안한다. 죽여주길 바란다면 눈을 깜박이라고. 눈을 움직이지 않는 글래스. 피츠제럴드는 말을 잇는다. 아들이 죽기를 바라는가? 어차피 곧 죽게 될텐데 모두 죽기를 바라는가? 글래스는 눈을 감는다. 신체적 한계 때문인지, 아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인지는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글래스가 아들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목을 조르는 피츠제럴드를 보고 놀란 호크가 소리를 질러대자, 피츠제럴드는 호크의 배에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박는다. 이때 누가 자신을 보기라도 했을까봐 눈을 굴리는 피츠제럴드의 얼굴이 인상적이다. 브리저는 멀리 있고, 글래스는 누워 있다.  &nbsp;&nbsp; 피츠제럴드의 연기에 넘어간 브리저도 글래스를 남기고 떠나게 된다. 비참하게 남겨진 글래스는 네 발로 긴다. 아들의 죽음을 확인한 그는 아들에게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런데 카메라가 갑자기 그들에게서 관심을 거둔다. 글래스의 거친 숨소리를 배경음으로 흐릿한 먼 설산의 봉우리가 비친다. 이 3초 이상의 응시가 인간사를 아득하게 만든다. 아들의 죽음과 글래스의 슬픔은 범사다. 눈 내린 산과 희뿌연 안개는 한 인간의 비극에 어떠한 응답도 해주지 않는다.  &nbsp;&nbsp; 세계의 무응답은 아름다운 배경이지만 서사는 아니다. 인간의 추상적인 말이 행위로 실현되듯, 글래스의 복수는 생존이라는 능동적 행위들을 전제로 삼고 그것이 이 영화의 이야기다. 영화는 글래스가 어떻게 자연의 역경과 원주민의 공격 속에서 살아남는지를 비중의 반 이상으로 둔다. 타당한 전개다. 글래스는 우선 살아남아야 한다. 관객들이 그 지난한 과정에 피곤할 수도 있지만 생존 자체가 그의 복수다. 그는 자연을 견디고, 온갖 위협을 거치면서도 자연물들을 활용한다. 세계의 무관심과 별개로 그는 스스로를 일으키는 자다. 그는 신이 남긴 사체의 복부를 가르고 그 안에 들어가 추위를 견뎌낸다. 그는 신을 먹고, 신의 냉기에 시달린다. 그러나 그가 하루하루 사는 것에 급급해서 그 고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을 기어서라도 가고 있을 뿐이다.  &nbsp;&nbsp; 글래스는 끊임없이 피츠제럴드가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기억을 되뇐다. 험준한 눈보라를 피해 동굴에 몸을 의탁하는 순간에도, 아무것도 없는 눈밭 위에서도, 피츠제럴드가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쓴다. 묵묵히 살아남는 것에만 집중하니 말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찰나에, 그가 언어를 전혀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와 감정과 서사를 잊지 않았다. 험로에서도 계속 마주하는 스스로의 무의식에서도 그는 끝없이 꿈과 환영으로 사랑과 과거를 정초시킨다.  &nbsp;&nbsp; 현실적이고 긴 카메라의 호흡 속에서 드문 빈도로 짧게 드러나는 장면들은 플래시백이다. 그 플래시백들을 통해서 우리는 글래스의 일면을 엿본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언어화하지 않는 유형의 사람이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에 가깝다. 그의 사랑과 기억은 꿈속의 짧은 접촉 장면과 여자의 음성으로만 드러난다. 코와 코를 맞대고 가깝게 있는 여인과 그, 아들과 셋이서 웅크리고 자는 모습은 그가 준거점으로 삼은 마음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여자의 속삭임은 그의 내면에 그의 사랑이 얼마나 깊히 박혀있는지 말해준다. 그러나 그 고향은 파괴되었고, 여자는 죽었다.  &nbsp;&nbsp; 글래스가 옛날에 미군장교를 죽인 이유는 단순하다. 그에게 국가의식 같은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관념들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사랑한 여자와의 결실이요 상징인 아들의 목숨이었다. 미군장교를 살해하는 것이 앞으로 그의 삶에 어떤 장애가 될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장교를 죽이고 아들을 보호했다. 그는 현실에 굴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아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 정도로 소중히 여겼던 아들도 죽었다. 하지만 아들은 죽어서도 그의 마음에 머문다. 아들의 시선이 남아있는 한 글래스는 숨을 멈추고 포기할 수 없다. 아들의 곁에 남겠다는 맹세는 아내의 곁에 남아있겠다는 맹세이기도 하다. 그들이 그의 무의식을 장악하고 있다. 인간이 긴장을 풀 수밖에 없는 꿈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녀는 죽었지만 그를 아직도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글래스는 숨을 멈추고 포기할 수 없다. 그에게 피츠제럴드를 죽이는 것은 그들을 잊지 않았음을 보이는 유일한 입증 방법이다.  &nbsp;&nbsp; 가끔 복수를 하려는 자들이 복수 행위 자체에 매몰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를 잘 보여주는 예시가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이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약혼녀를 죽인 살인마의 심연을 바라보다가 자기가 그 심연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폭력성을 흉내 낸다. 그러나 그는 그 폭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한 복수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하지만 동정심이 들 뿐, 공감은 할 수 없다. 비이성과 광기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nbsp;&nbsp; 반면 ｢레버넌트｣의 복수극은 이성적이고 차분하다. 무절제하지 않고 단계적으로 정합적이다. 그의 보복 행위는 스스로 살아온 삶의 환경과 맥락에서 파생한다. 그는 과거를 방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선택하고 서술해낸 삶의 서사를 끝까지 지키고자 노력한다. 만약 한 사람이 자신을 이룬 모든 것들을 부정해버린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무자아(無自我)다. 기억이 없는 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이고, 기억을 버리는 자는 자기 자신을 생매장 하는 자이다. 글래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의무를 반복적으로 글과 꿈에 새겼다. &nbsp;&nbsp; 글래스가 전초 기지에 귀환하자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이 두려움과 경이로 가득 찬다. 그의 생존은 모두에게 기적이다. 유령의 귀환에 겁에 질린 토끼가 잔뜩 내달린다.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발을 묶어놓았던 돈을 훔쳐 달아난다. 글래스는 사냥을 시작한다. 차분하게 총을 들고,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숲 속을 응시한다. 원정을 함께 떠났던 대장 헨리가 동행하는데, 오히려 그가 피츠제럴드를 마주하고는 정의를 들먹인다. 피츠제럴드는 헨리를 비웃는다. 정작 아내의 얼굴은 까맣게 잊은 채 무의미한 말만 읊조리는 부잣집 도련님은 생존에 다급한 승냥이의 손쉬운 먹잇감이 된다. 하지만 글래스는 다르다. 그는 복수의 정당성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피츠제럴드를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빼앗는 것임을 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다.  &nbsp;&nbsp; 마침내 도망가던 피츠제럴드가 막다른 곳에 몰린다. 이제는 이판사판, 살기 아니면 죽기다. 글래스는 영화 초반에 곰과 사투를 벌였지만 결말에서는 피츠제럴드와 혈투를 벌인다. 이 싸움도 마찬가지로 살아남는 것은 둘 중에 하나뿐이다. 힘겨운 싸움 끝에 피츠제럴드가 무너진다. 피츠제럴드가 끝까지 약 올리려고 묻는다. 고작 나를 죽이러 이 먼 곳까지 왔느냐. 고작 나 하나를 없애러 온갖 고초를 거쳐 온 것이냐. 복수의 허무함을 상기시키는 것이야말로 죽어가는 피츠제럴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다. 그러나 글래스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다. 이 복수는 신의 손으로 행해졌다고. &nbsp;&nbsp;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실린 피츠제럴드는 저 너머에서 이 광경을 구경하던 원주민들의 손에 잡혀 목숨이 끊어진다. 원주민들의 영역을 침입한 피츠제럴드는 범죄자다. 피츠제럴드로 대변되는 그 땅의 모든 침입자들 역시 범죄자다. 그러나 누가 불법이고, 누가 합법인지의 문제는 룰렛 위를 돌아가는 구슬이 어디에 멈출 것인지의 문제처럼 무작위적이다. 세계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지만 기막힐 정도로 무심하다.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곰이 죽은 것처럼, 호크가 죽은 것처럼, 원주민들이 터전을 빼앗긴 것처럼, 글래스를 도운 원주민이 잔인하게 목매달려 죽은 것처럼. 만사는 원래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면 무의미하고 허무하다.  &nbsp;&nbsp; 그러나 복수에 성공한 글래스는 먼 빈 자연의 틈새에서 빛처럼 새어나오는 그녀를 만난다. 그녀는 그에게 너무나 장하다는 듯, 당신이 정말 자랑스럽다는 듯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그의 곁을 떠난다. 그제야 비로소 카메라가 글래스를 바라보고, 글래스도 카메라를 바라본다. 쉴 틈 없었던 글래스의 삶에 드디어 공백이 생긴다. 그의 시선이 대미를 장식한다. 이제야 카메라가 인정한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바로 죽음에서 돌아온 글래스, 그 사람의 이야기였음을. &nbsp;&nbsp; 영화 ｢레버넌트｣는 이처럼 인간의 삶이 증명 과정 자체라는 것을 보인다. 증명은 생존을 전제로 하며, 생존방식으로 그 내용이 구체화된다. 휴 글래스의 경우, 자신의 사랑을 잊지 않았고, 그 사랑을 삶의 목적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그것들을 빼앗은 자에게 똑같이 보복함으로써 분노가 아닌 사랑을 증명하였다. 그의 강인함은 자연의 무심함을 배경으로 삼았으며 비록 자연이 그를 보호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두 발로 그곳에 직립하였다. 이 영화에서 글래스가 피츠제럴드를 죽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의 대결 구도는 글래스와 피츠제럴드가 아니다. 글래스 본인이 세계와 대결하는 구도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무의미한 세상에서 유의미를 창출한 의지의 인간이었으며 굳건한 사랑의 서사를 생존으로 증명해냈다는 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498/3/cover150/d18263493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4980350</link></image></item><item><author>설표</author><category>영상</category><title>읽을거리
</title><link>https://blog.aladin.co.kr/wolf974/7764744</link><pubDate>Mon, 07 Sep 2015 09:4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olf974/7764744</guid><description><![CDATA[읽을거리]]></description></item><item><author>설표</author><category>영상</category><title>님포매니악 1, 2 - [[수입] Charlotte Gainsbourg - Nymphomaniac: Extended Director's Cut Volume 1 &amp; 2 (님포매니악 볼륨 1 &amp; 볼륨 2)(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title><link>https://blog.aladin.co.kr/wolf974/7699485</link><pubDate>Sat, 08 Aug 2015 07:2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olf974/769948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3562637393&TPaperId=769948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5180/62/coveroff/356263739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3562637393&TPaperId=769948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수입] Charlotte Gainsbourg - Nymphomaniac: Extended Director's Cut Volume 1 & 2 (님포매니악 볼륨 1 & 볼륨 2)(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a><br/>Various Artists / Magnolia / 2014년 11월<br/></td></tr></table><br/>&nbsp;&nbsp;일전에 올렸던 것을 다듬어서 계간지 '인간과 문학'에 보냈는데 당선되었습니다.&nbsp;<br>////<br>허무라는 구멍에 쾌락을 부으며 살아온 한 여자의 이야기-&nbsp;영화 Nymphomaniac Vol.Ι,Ⅱ (2013, Lars Von Trier 작)<br>&nbsp;&nbsp;&nbsp;<br>&nbsp;&nbsp;&nbsp;&nbsp;&nbsp;살아있는 유럽의 거장,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님포매니악’은 바쿠스의 무녀들처럼 동물성을 버리지 못한 원시인류, 원초적인 에너지를 포기하지 못한 자들,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지나치게 충실한 자들의 이야기다. 성[Sex]은 그것을 다루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영화적 요소, 유희적 장치다. &nbsp;&nbsp;그러나 원시인의 시대를 한참 탈피한 지금 시대에는 난장판에서 들짐승들을 산 채로 죽였던 여사제들의 시대는 이미 야만과 비합리성 그 자체다. 이제 사람들은 그 비슷한 것을 보는 것만으로 역겨움에 시달린다. 이 시대에 욕망은 생생한 날 것 그 자체로 살아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인간사회는 논리를 발달시켰고, 언어라는 틀로 동물적 본성을 제어하는데 성공했다. 인간은 이제 무엇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언어화해야 하며, 서사를 제시해야 한다.&nbsp;&nbsp;하지만 그러한 의무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서사라는 뼈대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욕망 그 자체의 본질적 내용은 사적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공유 불가능하다. 언어를 통해 성공시키는 것은 부분적인 의사소통, 단편적인 신호의 전달일 뿐이다. 무엇의 실제를 있는 그대로 포착해낸다고 하기에 언어에는 파악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장벽들이 존재한다. 우리의 욕망은 타인에게 불가해하다. 불협화음, 미끄러지는 차원의 어긋남에서 우리는 자신의 자아라는 탈출할 수 없는 구덩이에 떨어져 외롭다.&nbsp;&nbsp;영화의 중요한 틀은 Joe와 Seligman의 대화 구조다. 이 영화가 사실상 처음부터 끝까지 이 둘의 대화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 설정은 소통에 대한 통찰로 읽을 수 있다. 그 둘은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나 Seligman의 집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길고 긴 대화를 시작한다. 영화의 초반 전개는 상당히 인상적인데, 분명 험한 꼴을 당한 Joe를 Seligman이 구조한 상황 속에서 대화가 비교적 덤덤하게 시작되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의 만남이 그러하듯 이들의 만남도 상당히 우연적이고, 즉흥적이다. &nbsp;&nbsp;대화의 구조 안에서 각 인물이 맡은 위치를 살펴보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주된 화자인 Joe와 그 이야기들을 듣는 Seligman이 있다. 관객인 우리의 입장은 Seligman과 유사하다. 그러나 우리와 Seligman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침묵을 지키고 머릿속으로 감상을 이어나가는 처지이지만, Seligman은 이야기의 화자인 Joe와 대면하고 있다. 그렇기에 관객인 우리는 적어도 영화를 보는 시점에서 Joe의 이야기 뿐 아니라 Joe와 Seligman이 나누는 대화까지 전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사실은 ‘우리’야말로 Joe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미묘한 환상을 심어준다.&nbsp;&nbsp;이들의 대화에서 관객에게 흥미로운 지점은 Joe와 Seligman이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주인공 Joe는 성적인 쾌락, 그 에너지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인물이다. 그녀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가 Sex고, 그러한 의미에서 그녀는 진실로 님포매니악이다. 반면 Seligman은 지성과 이성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그는 박식하고, 백과사전에 가깝다. 모르는 것이 없어 보이는 그가 모르는 것은 육체적인 경험뿐이다. 이성과 감성, 남성과 여성, 대칭적인 상징들은 상당히 도식적이기까지 하고, 감독의 전작인 '안티크라이스트'의 구성처럼 보이기도 한다.&nbsp;&nbsp;Joe와 Seligman의 대화는 사회의 다른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철저히 언어에 기반을 둔다. Seligman은 Joe의 이야기를 듣는 맨 처음부터 끝까지 Joe를 자신의 인식 틀로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우연히 마주친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동원한 것은 그가 기존에 갖고 있던 재료들이다. Seligman 같은 경우 성적인 경험이 없다보니 Joe의 모든 섹스 이야기들을 그가 기존에 알고 있던 수학적인 연산, 매듭 묶기, 베토벤과 푸가, 신화적 상징들로 치환시킨다. 이 영화 안에서 섹스 장면만큼이나 중요한 미적 장치는 바로 Seligman의 지식의 풍요로움과 인용의 다채로움이다. 다섯 번째 장인 ‘작은 오르간 학교’에서 보여주는 섹스 장면들과 바흐 음악의 세 개의 성부가 이루어내는 조화는 미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깝다. 성적인 긴장감이 제거된 Seligman의 단편적인 지식들은 그를 순수하고 무성적인 인물로 보이게끔 하고, 우리로 하여금 자극적일 수 있는 Joe의 이야기들을 중화시킨다.&nbsp;&nbsp;그 뿐 아니라 Seligman이 Joe의 이야기를 들으며 보이는 이성적이고 학문적인 일련의 이해 시도들은 문학적인 차원에서 놀라운 비유가 되기도 하고, Joe를 해석하는 데 있어 유용한 설명을 하기도 하며, 심지어 Joe 본인도 몰랐던 그녀의 심리를 발견해내기도 한다. 문제는 그가 부분적으로는 Joe를 이해하고 포착해내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여전히 Joe의 경험들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사실 무엇인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두 인격체가 결코 해낼 수 없는, 애초에 불가능한 목표다. 원래 하나였던 덩어리들이 신의 벼락에 의해 떨어졌다는 것은 단지 신화에 불과하다. Seligman의 생뚱맞아 보이는 해석에 지친 Joe가 그의 매듭 이야기를 이때껏 들었던 연결고리 중 가장 재미없고 무용하다며 짜증내는 장면은 소통에 실패한 채 어긋나버린 분열과 갈등의 단면을 그대로 고발해준다.&nbsp;&nbsp;이처럼 소통은 상정하는 전제에서부터 구조적인 결함을 갖는다. 예를 들어 Seligman은 Joe의 이야기를 몇몇 지점에서는 신뢰할 수 없는 기억으로 문제 삼는다. 특히 Jerome과의 만남에 관해서 그러하다. Seligman은 그 만남이 지나치게 우연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지적은 관객인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 지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Joe가 하는 이야기들을 믿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한다. Joe가 대꾸하는 것처럼, 남의 이야기를 듣는 데 있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그 이야기를 믿거나 안 믿거나 둘 중 하나뿐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상호소통이 강제적인 신뢰 위에서만 싹튼다는 역설적인 지점이다. 우리가 무엇을 해석하고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것이 앞에 분명히 있다는 ‘믿음’이다.&nbsp;&nbsp;Joe가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고, 실수로 누락한 것일 수도 있다. 진실은 어차피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본인조차도 그렇다. 남아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 불완전할 확률이 매우 높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어야만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 뿐이다. 그 필연적인 기만의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우리의 두 눈과 귀로 경청하고, 평가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최대한 공정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지만, 신과 같은 평정심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차선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잊는 순간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잊어버리고, 정말로 나와 타인이 같은 순간을 정확하게 같은 것으로 공유했다는 환상에 빠지기 때문이다.&nbsp;&nbsp;Joe 역시 그러했다. 그녀는 Seligman에게 드디어 온전한 첫 번째 친구를 만들게 되어 기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우리를 배신한, 불안한 결말은 결국 무엇이었던가? 완전한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성Reason은 자신이 무성이라고 주장하지만, 의식이 있는 곳에 욕망이 있다. 우리는 Seligman을 그의 지식과 상식들이라는 필터로 걸러서 보았다. 순결한 줄 알았던 그가 Joe에게 자신의 물건을 들이댈 때, 그가 숨기고 있던 욕망이 수면 위에 올라왔다.&nbsp;&nbsp;다른 존재를 자신의 잣대로 해석하고, 그를 바탕으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욕망에 무릎 꿇리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시도하는 소통은 어떤 종류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이 숙명적인 불행은 영화 안에서 결말의 총의 발사로 형상화된다. 하지만 안전한 대화 구조 바깥에서 소통의 붕괴를 목도한 관객을 통해서도 반복된다. 관객인 우리는 이 영화를 보았지만 그들을 제대로 본 것인지, 그 이야기를 제대로 알 수 있기는 했던 것인지, Joe를 정말 제대로 본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nbsp;&nbsp;하지만 우선 Joe의 이야기를 믿어보기로 하고, 이야기의 내용을 더 살펴보자. 이 영화 내용의 전반적인 재료는 주인공 Joe의 삶이다. 그녀의 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욕망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걸까? 필자는 우리 안, 우리의 눈으로는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구멍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 구멍은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니체가 근원적 니힐리즘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바로 그러한 공허함이다.&nbsp;&nbsp;어린 Joe는 수술을 앞둔 병원의 복도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온전히 감지한다. 그 철저한 외로움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우주 안에 혼자로 존재하고, 몸 안에 외로움과 눈물만이 가득 차는 기분이 든다. 주위 지나쳐가는 사람들한테 외로워요, 살려주세요, 외쳐본다 해도 아무도 들어줄 사람이 없을 것만 같다. 옆을 지나쳐가는 무수한 사람들 앞에서 존재의 이유를 발견할 수 없는 그 순간, 외로움이 자연히 고르고 있던 숨소리를 거칠게 내쉬기 시작한다.&nbsp;&nbsp;그 결여를 무엇으로 메울 수 있는지 모르겠다. 영화 속 ‘뚫리지 않는 문을 혼자 통과하려는’이라는 대사처럼, 텅 빈 공간의 입구에는 투명하지만 튼튼한 막이 있어서 그 무엇도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데 살다보면 이 세상의 어떤 물질이 그 막을 넘어 구멍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온다. 그 순간 자체가 오르가즘의 작동원리와 유사하다. 수많은 긴장, 아슬아슬하게 한계선을 넘을 것 같으면서 못 넘을 것 같은 문턱의 틈에서 모든 것이 폭발하듯 터져 나와 온 몸에 젖어들어 강력한 과잉을 유희하는 몇 초의 영겁.&nbsp;&nbsp;그리고 우리는 또 한 번 착각한다. 우리가 완벽한 소통이 가능할 거라고 믿은 것처럼, 그 짧은 강력함이 우리의 불완전함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떤 결여를 채운 것이 아니라 순간을 향유한 것에 불과하다.&nbsp;&nbsp;Joe의 경우는 명백히 섹스에 탐닉함으로써 그러한 착각에 빠진다. 모든 인간이 Joe처럼 외로운 순간들을 섹스로 달래는 것은 아니다. H 부인은 Joe가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을 모른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건 적절한 비난은 아니었다. Joe가 문제가 된 이유는 그녀가 다른 사람들의 꿀단지를 건드리는 방식으로 외로움을 달랬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섹스의 강력함을 좇기보다 솔리테어를 하기도 하고, 좋은 영화를 보기도 하고, 친구와 대화도 하면서 순간의 텅 빈 공간을 채워낸다. 아니면 Joe의 아버지처럼 나뭇잎들을 수집하고, 관찰하면서 감탄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다. 얼마나 얌전한가. 오로지 문제가 되는 것은 향유의 방식일 뿐이다. 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문제다. 그녀의 헤픈 몸이 다른 사람들의 가정, 몇 십 년 된 감정들을 산산조각 내버릴 수 있다는 게 유일한 문제다.&nbsp;&nbsp;Joe는 오믈렛을 만들려면 계란을 몇 개 깨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냉정한 말에 Seligman은 원래 중독자들은 공감을 하지 못하는 법이라고 응수한다. 그의 말에 Joe 역시 바로 대답한다.&nbsp;&nbsp;“전 제 욕망에 중독된 것이지, 결핍에 의한 중독이 아닌 걸요. 어딜 가나 모든 걸 파괴한 바로 그 욕망이요.”&nbsp;&nbsp;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들은 기본적으로 마음 안에서 텅 빈 채 덩그러니 남겨졌다고 느끼는 무엇인가를 채워나가려는 우리의 노력이다. 그 근원적인 결여는 사실 채울 수 없다. 결핍 자체는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우리는 그저 갖고 있는 것을 이용해 새로운 차원의 과잉을 향유한다. 구멍은 채워지지 않고, 우리는 채워지지 못해 채우려고 욕망한다. 욕망의 연쇄다. 그래서 Joe의 말은 옳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그녀 역시 결핍이 아닌, 오히려 결핍을 채우려 하는 그 욕망에 중독되었다.&nbsp;&nbsp;어떻게 보면 Joe는 교육 받은 것에 충실하다. Joe가 사랑한 아버지와의 관계는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스승이었다. 필자는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가르쳐 준 것이 다양성의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 교육을 물론 Joe 본인이 그냥 따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에 맞게 변용시켰다는 점은 고려해야지만 말이다.&nbsp;&nbsp;Joe의 아버지는 나무를 좋아했는데, 나무들도 자세히 보면 개체마다 다 다르다. 나뭇잎 사이로 드리워진 약한 빛 아래에 선선히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을 맞으며 나무의자에 앉아 위를 향해 지긋이 치켜보고 있노라면, 푸른 하늘이 적셔진 하얀 구름을 가리는 나뭇잎들이 눈에 찬찬히 들어온다. 서있는 위치도, 그들의 뿌리가 내려진 토양도, 심지어는 꽃이 얼마나 농익게 피어올랐는지도, 그 순간마다 제각각인 그들 자신의 빛깔, 색깔, 향.......그런데 우리는 그 수많은 나무들을 ‘나무’라고 부른다. 기껏해야 더할 수 있는 것은 종에 따라 나무라는 단어 앞에 음절 몇 개 더 얹혀주는 것이 고작이다. 우리 인간의 수용력과 표현력의 한계는 참 제한적이고, 묘사의 방식인 언어는 빈곤하다.&nbsp;&nbsp;Joe는 아버지의 교육에 영향을 받아 공책에다 나뭇잎을 수집했다. 그런 식으로 다양한 남성들의 성기도 수집했다. 그녀의 인체에 대한 호기심, 사람이라는 군群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하나하나 보고자 했던 욕망, 그것은 그녀 말처럼 석양이 더 아름답기를, 그 색이 더 화려하길 바랐던 단순한 바람과 비슷한 것 아니었을까?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 향유하고자 했던 그녀의 이 바람이 쉽지 않은 요구처럼 보였다면, 그건 그저 그것을 허락지 않은 사회 인습의 강력한 힘에서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 아닐까?&nbsp;&nbsp;Joe가 찾아낸 영혼 나무는 험난하고 높은 바위 위에서 위태롭게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이 세상에 나고 자라 죽는 모든 존재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순간들을 채워나가기 위해 지금도 분투하고 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종에 걸맞게 사회가 원하는 요구에 맞추어 살아나간다. 그곳에서 허락받은 일들, 권장되는 일들, 바람직한 일들을 선택해가며 살아간다. 그러면 모든 것이 그나마 쉬워진다. 사람들은 올바른 토양 위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아가며 생존하기를 바란다. 안전한 둥지 위에 오순도순 한 평생 토끼 가족처럼 살아가는 것을 꿈꾼다. 하지만 우리는 Joe와 같은 나무들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험난한 곳에서 거칠게 생존한다. 그 순간마다 얼마나 힘겨울까? 하지만 그들은 그 길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 모양이, 바로 그 힘듦이 그들이 선택한 삶의 가치, 그 자신의 본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nbsp;&nbsp;우리는 타고난 결여를 채울 수 없고, 그래서 순간을 향유하며 살아간다. 그 1초는 휘발되지만 우리가 부여한 가치에 의해 천금이 된다. Joe는 그녀와 잔 남자들에게 최고의 연인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섹스를 하고 난 다음 남자들에게 해주는 말, 오르가즘을 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었다는 그 말은 최고의 찬사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말 하나 때문에 으쓱하는 남자들의 모습이 유치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 하나 때문에 Joe의 남자들은 Joe와의 시간을 흐릿하게나마 좋게 기억할 것이고, 추억으로 남길 것이다.&nbsp;&nbsp;Joe는 수많은 남성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섹스를 즐겼고, 그 많은 시간들을 종합해 자신만의 연인, 혹은 섹스라는 긴 시공간 축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지루해지고, 닳게 되면 더 깊고 다양한 것들을 찾아 대담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그녀의 여행은 사실상 사회의 많은 제약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녀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깎이고 마모된다.&nbsp;&nbsp;어렸던 Joe는 상대적으로 사회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웠다. 어린 아가씨 둘이 기차에서 남자 낚시질을 하러 돌아다닌 것은 분명 발랑 까진 일이지만, 아주 지탄 받을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혼하지도 않았고, 아이도 가지지 않았고, 또 젊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 사회의 규율에 대해 잘 모를 나이라서 사회의 시선에서 자유롭다. 아직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따스하다. 갱생의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nbsp;&nbsp;친구인 B와 만들었다는 ‘작은 모임’ 역시 그렇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그 정도 어린 여성들이 자신들의 성에 대해 눈을 떠서 불경한 노래들을 부르며 섹스에 탐닉하는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동네 애들이 놀러 다니면서 작은 그룹을 만들고 거기에 이름 붙이고 논 것과 큰 차이 없다. 치기 어리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치기 어림이 사회의 자신만만한 권능, 그들을 좌시하고는 있지만 언제 어떤 식으로도 진압 가능하다는 점 아래에서 존속되었을 뿐이다.&nbsp;&nbsp;하지만 그들의 재미있는 장난이 같은 사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밥그릇을 건드리고 다녔다는 점은 문명의 질서와는 확실히 위배된다. 그러한 서곡을 보여주는 H 부인 이야기는 전체 영화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시퀀스이다. 이 시퀀스는 웃기기도 하고, 배우 우마 서먼의 훌륭한 연기에 감탄하게 되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블랙 코미디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은 결국 H 부인과 가여운 망아지 같은 세 아들들의 똘망똘망한 눈에도 Joe가 죄책감을 느낀 것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며 Joe를 비난했을 수 있다. 물론 Joe가 이때의 사건을 통해 정말 아무것도 안 느꼈을 수 있다. 그녀 말마따나 그저 계란 네 개가 깨진 것일 수 있다.&nbsp;&nbsp;그러나 그러한 사건들은 시작점에 불과하다. 그저 남편의 불륜에 화가 난 미치광이 여자가 자식들을 데리고 쳐들어온 사건으로 축소시킬 일은 아니다. 그 이야기에는 상징성이 있다. 처음 기차에서 낯선 남자의 오랄 섹스를 해준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적어도 그 이야기에서 남자의 아내는 남자가 외간 여자한테 오랄 받은 사실은 모른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이 Joe의 행동에 원한을 갖고, 악하다고 여기고, 비난하기 시작한다. 유부남과 불륜 관계인 젊은 여자 이야기는 사실 매우 흔한 이야기다. 그러나 Joe의 이러한 일탈은 이미 적발되었다는 것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뜨인다. 또한 Joe가 아무리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욕망의 권리를 주장한다고 해도 실제로 깨진 계란들이 저 너머에 존재한다. 그것 역시 분명한 지점이다. 그녀의 욕망은 분명 다른 이들의 밥그릇을 건드린다.&nbsp;&nbsp;우리가 지니는 가치판단의 기준은 우리보다 선행하여 존재하던 사회에서 왔다. 우리는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의 규칙을 배우고, 그것들을 우리 안에 내면화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바다에 태어난 거북이와 같다. 그 조류가 나 자신의 고유함과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사회의 법칙이 있다. 사람들이 만약 젊은 사람을 향해 모르는 것이 많고, 치기 어리다고 말한다면, 젊은 사람들이 실제로 정말 아직 많이 모르고, 치기 어리기 때문이다. 젊을수록 경험은 적고, 고초를 덜 겪었기에 아직 때 타지 않았다. 조금 더 법망에서 자유롭다. 법망은 매우 촘촘한 그물이다. 우리의 바깥에서 우리를 무한한 무게로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존재한다. 산소처럼 우리를 투명하게 통과한다. 우리의 신체와 사고 안에 침투하여 우리 자신의 행동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재생산해낸다. 그 재생산은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사회 안의 법망에 더욱 효과적으로 갇히게 만든다. &nbsp;&nbsp;배우가 아역에서 성인으로 교체하는 접점을 그러한 맥락에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어린 Joe는 비교적 쾌락을 즐기며 자유분방하게 살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 여성으로서의 권능을 무기로 성적 욕망을 채웠다. 그 모든 것들이 남성의 욕망이 허가하는 한 지속되고, 권장되며, 사회 안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져 그녀는 비교적 책임에서 자유로웠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성적 쾌락을 잃고, 그때서야 사랑하는 남자와 정서적인 안정을 누리며 아이를 낳고, 결혼을 한다. 더 이상 남성들과의 단순한 섹스가 그녀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그녀는 고갈되었지만 여전히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 그녀의 넘쳐나는 욕구를 받아주지 못한 Jerome은 결국 그녀에게 다른 남성들을 허락한다. &nbsp;&nbsp;그 지점이 Joe가 성인으로 변하는 지점이다. 계란들을 신나게 까부숴서 원하는 만큼 오믈렛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허용범위는 무제한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답게 Jerome과 아들, 가족의 안온함이 아닌 채찍질이라는 쾌락을 선택한다. Jerome은 그런 그녀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용서하지 않은 것을 Joe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한다. Seligman 앞에서 아들을 빼앗긴 것에 대해 이야기하던 Joe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컵을 내던졌다. Joe는 감성적인 것이 거짓이라서 싫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가 스스로 그 거짓에서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nbsp;&nbsp;그녀는 잠시 섹스중독 치료를 받기도 하는데,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이 그녀의 방종한 행동에 제약을 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직장 상사로부터 섹스중독 치료 권유를 받게 된다. 치료의 일환으로 섹스를 떠올리는 것들을 집에서 치워버리는데, 치우고 나니 집이 온통 텅텅 비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래도 자신의 본능을 거스르지 못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떳떳함을 만천하에 밝힌다. 상담 받으러 간 장소에 배치된 거울 속 그녀의 어린 모습은 그녀의 본연적 기질이 원래 그러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정신상담사에게 사회의 경찰 노릇을 한다고 비난하며,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신이 님포매니악임을 당당히 선포한다. 섹스를 섹스 그대로 즐기는 그녀는 바로 님포매니악이지, 남의 언어에 따라 규정된 섹스 중독자가 아니다.&nbsp;&nbsp;Joe는 그러한 선포 이후로 주류 사회에 완벽한 이방인이 되고, 사채업이라는 음지에 속하게 된다. 이 부분은 다소 조금 이상한 설정이다. 성적인 고문을 통해 남성들에게서 돈을 받아낸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인 느낌이다. 영화의 흠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렇게 Joe가 사회적으로 배제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그 즈음 더욱 변두리로 몰린 그녀는 성병으로 추정되는 신체적인 고통까지 안게 된다.&nbsp;&nbsp;Seligman에게 Joe는 자신이 매우 사악한 존재이고, 자신이 한 일들은 모두 그릇된 것들이라고 말한다. 한편 그녀는 자기 자신의 본능이 얼마나 반사회적이고 문제적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만큼 스스로 각오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자신의 죄책감을 청산하지 못했다.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나쁘다고 말하는 그녀는 사회의 기준과 다른 자신의 욕망은 긍정했지만, 사회의 기준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죄인이 아니라고 선포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치워내는 데 실패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그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죄인으로 살기를 선택했고, 죄인의 굴레를 기꺼이 머리 위에 면류관으로 받아들였다. 공중도덕보다 자신의 쾌락을 따른 그녀는 이미 남의 밥을 훔치는 도둑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본인도 스스로를 도둑년이라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에게 손가락질하고 있었다.&nbsp;&nbsp;하지만 비단 사회, 다른 사람들, 아무 상관없는 타인들이 Joe를 더러운 년이라고 비웃는 것만은 아니다. 그녀가 가진 욕망에 가장 큰 형벌을 가한 사람은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가 사랑했던 Jerome이었다. 욕망과 별개로 존재하는 사랑이라는 굴레에서, 가장 능동적인 몸의 주체였던 그녀도 결국 자신이 거스를 수 없는 더 큰 힘 앞에서는 무력했다.&nbsp;&nbsp;사랑의 속성은 다채로움이라는 개방성보다는 통합에 대한 지향이라는 보수성과 연결된다. “욕망은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지만, 사랑은 본성을 포장하는 가식”이라는 Joe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욕망은 상대방을 자유롭게 만들지만 사랑은 상대방을 구속한다. 사랑과 욕망의 차이점을 확실히 구분 짓고 넘어가야 한다. 욕망은 Joe가 말한 것처럼 쉽고, 진실 되고, 순간적이다. 아무런 의미가 없고, 단순해서 별일 아닌 것처럼 넘어갈 수 있다. Joe가 맨 처음 Jerome을 J로만 보았을 때도 그녀는 그를 단순히 첫 잠자리 상대로 괜찮은 남자 정도로 생각했다. 단지 그의 손이 근사하다는 게 접근의 이유였다.&nbsp;&nbsp;그러나 사랑은 욕망과 다르다. 욕망이 일회적이라면 사랑은 은근하다. 사랑은 단순히 손이 근사해서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사한 손에 의해 정렬되고 조직되고 다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어린 왕자 식으로 말하자면, 사랑은 길들여지는 것이다. 사랑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몰입과 집중을 하게 만들고, 다른 한 존재를 사유화 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랑이 질투에 어린 욕정일 수 있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순간을 향유하는 매우 강력한 방식 중 하나가 된다. Joe에게 있어 어리고 허세 있고, 섹스도 못했던 J가 루갈라를 케이크포크로 먹는 Jerome이 된 것 같이, 사랑은 한 사람을 고유한 무엇으로 만든다.&nbsp;&nbsp;Jerome과의 관계는 여러 에피소드들로 연결된 영화 안에서 처음과 끝의 수미상관으로, 유일하게 관통하는 하나의 큰 줄기다. 역을 맡은 남자배우 샤이아 라보프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인물을 치졸하고 소심한 남자로 해석하였다고 밝혔다. 배우가 자기가 맡은 인물에 그토록 박한 평가를 주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배우는 정작 다자연애나 자유로운 섹스를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상대방을 사랑하고 그의 선택을 존중하기 위해 자신의 소유욕이 좌절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nbsp;&nbsp;그러나 좌절된 소유욕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온전히 채우지 못한다는 절망감이 Jerome으로 하여금 그녀를 비난하게 만들긴 했지만 결혼생활을 끝장내게 하지는 못했다.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Joe가 Jerome을 벗어나 아예 그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새로운 영역으로의 쾌락을 쫓고, 그럼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아이까지 버리는 선택을 했다는 점이다. 물론 Joe가 직접 스스로 아이를 버리는 선택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이미 그녀는 자신의 쾌락이 더 우선이 되어 아이를 돌보는 데 매우 소홀했다. 그러한 지점은 Jerome조차 참을 수 없는 지점이었고(그 역시 그다지 성실한 남편감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그녀의 솔직한 욕망은 그녀의 인생에서 배우자와 자식을 끊어내게 만든다.&nbsp;&nbsp;하지만 단순한 이별만이 Jerome이 내린 잔인한 형벌, 3+5를 일으킨 것은 아니다. Joe는 자신의 애인이자 딸인 P를 자신이 사랑한 유일한 남자에게 빼앗긴다. 운명의 장난 같고, 어떻게 보면 한 편의 막장 드라마 같은 이 관계도는 필자에게 인위적이거나 개연성이 없거나 하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그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함의 때문이었다. 그함의는 나이든 여자라는 위치에 대한 은유를 암시한다. 님포매니악 1부는 즐겁고, 비교적 경쾌한데 그 이유는 주인공인 Joe가 어리고, 싱싱하고, 예뻐서 수많은 남성에게 숭배의 대상이 된다는 점 때문이다. 그녀 때문에 그녀의 이십대에 많은 남자들이 그리고 그들의 많은 부인들이 괴로워했다. 그건 철저한 힘의 놀이였다. 둥지와 계란들을 원하면 다 깨트려서 자신의 쾌락을 즐길 수 있던 그녀의 권력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놀이도 결국 시간이 변하자 끝나버렸다. 세계와 사회는 그 이상을 용인하지 않는다. 이제 그녀의 성기는 고통에 시달린다. 그리고 새로운 싱싱하고 어린 여자가 Joe의 옛 남자와 관계를 맺고, 그녀의 자빠진 얼굴에 오줌을 갈긴다. 그건 그녀가 젊고 아름다웠을 때 행했던 권력의 남용과 별 차이가 없이 똑같은 힘의 놀이다. 나이 들고 병든 Joe가 사랑 앞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은 무참하다. 자신의 어린 애인을 빼앗은 자신의 사랑, 변해버린 그 마음에 총을 들고 분노를 발산하려 했지만, 그녀의 무의식이 그걸 막는다. Jerome은 보잘것없는 Joe를 구타하고, 그녀 앞에서 어린 P와 3+5, 자신과 Joe가 맨 처음 나누었던 그 암호를 섞으며 "이제 나는 너랑 자는 것에는 관심 없다. 나는 어린 여자랑 잘 것이다. 너의 모든 힘은 나에게서 떠나갔으니 꺼져 라 이 늙은 여자야."라는 형벌을 가한다.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며 사회의 질서에서 엇나가 남편과 아이라는 여자의 의무를 저버린 그녀에게 가장 큰 징벌이 바로 그 3+5였다. 그 가혹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왔을 Joe가 영화 맨 처음 시작에서 뻗어 누운 상태로 괜찮다고 중얼거린 건, 어떻게 보면 그녀 스스로 Jerome에 대한 사랑이 그제야 완전히 끝났음을 받아들인 것이다.&nbsp;&nbsp;아직 언급되지 않은 곳이자, 영화 전체에서 가장 이질적인 부분이기도 한 ‘섬망’을 다루며 이야기의 논의를 마무리 짓고자 한다. ‘섬망’은 Joe의 아버지가 죽는 내용을 다루는 장이다. Joe가 인생의 쾌락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1부의 후반부에서 그녀는 아버지의 질병과 죽음을 보게 된다. 그녀는 아버지를 돕고 싶어 하지만, 도울 수 없고, 오히려 병원에서 외간 남자랑 섹스를 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그 자리에서 애액을 분비한다. 이렇게 보면 고통과 욕망은 동전의 양면처럼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섞인 잡탕 같다. 어쩌면 삶의 마지막이 처절하게 괴롭고, 외면당하는 고통으로 가득할 것이라는 그 허무함이 우리에게 이 순간만큼은 향유해야 한다는 욕망의 원동력일지 모른다. 일단 아버지는 죽었지만, 그녀는 살아있다. 필자는 Joe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성적으로 흥분한 것이 프로이트 식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신체가 죽음 앞에서 삶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애액의 분비로 표현한 것이라 보았다.&nbsp;&nbsp;그렇듯 강한 Joe는 Seligman에게 자신의 강력한 욕망과 앞으로도 싸우겠다고 의지를 표명한다. 자신의 욕망, 자신을 파멸 시키는 강력한 구멍을 그녀는 외면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준비가 되어 있고, 기울어진 형태로라도 존재하기 위해 열심히 투쟁할 것을 다짐한다. 물론 그녀의 이러한 의지에 대해 감독인 라스 폰 트리에는 친구처럼 다정한 줄 알았던 Seligman이 흐물흐물한 성기를 들이대는 것으로 나름 비관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총소리가 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의 Joe가 살인자가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비틀린 인생, 조금 더 비틀어지면 어떻겠는가. 필자가 지나치게 그녀의 인생에 대해 낙관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몸에는 아직 구멍이 남아 있다. 자신의 삶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SM에 입문하거나 흑인들과 접선하는 등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그녀인데 걱정할 게 딱히 있을까?&nbsp;&nbsp;이 영화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죄다 Joe가 불쌍하고 힘겹게 보인다고들 많이 말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그녀의 인생은 힘들고, 굴곡지고, 유별나다. 그러나 그녀의 나무가 원래 그렇다. 그녀의 기질이 원래 그렇다. 그녀의 선택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어떤 나무들은 따뜻한 평지가 아니라 높은 절벽 위에서라도 비틀린 채로 살아간다. 어떻게 저런 형태로 살 수 있을까 기겁하고 의문 가질 필요 없다. 생명의 다양성을 잉태하는 그 구멍, 생명력을 부여하고 삶에 의미와 재미를 선물해주는 그 구멍이 우리에게도 엄연히 실존한다.&nbsp;&nbsp;우리 인류는 어차피 혼자 남을 운명이다. 게다가 욕망은 결여를 채울 수 없기에 순간을 향유한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자 함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함몰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외부 세계와 사회로 눈을 돌리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의 운명 속에서 진정한 비극은 우리 욕망의 대상인 외부 세계가 우리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신이 아니며, 우리의 이야기와 욕망은 신화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뼈아픈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 역시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큼이나 인간을 우울하게 만든다. 자아와 세계는 대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고, 세계의 가혹한 규칙에 복종하지 못한 인간 개인의 욕망은 Joe의 경우처럼 가혹한 형벌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욕망은 구멍을 갖고 살아가는 모든 자들에게 수반될 수밖에 없는 필수불가결한 에너지이고, 인간의 욕망은 여러 가혹한 형벌 속에서도 죽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쾌락을 향해 솟구친다. 넘쳐흘러야 할 구멍을 메우지 못한 인간은 그 에너지로써 고통의 칼춤을 춘다. 어차피 구멍을 찾아 없애지 못할 바, 그 니힐리즘을 니체가 말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껴안고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춤을 추며 매사 즐기는 것도 (물론 고통의 순간도 있겠지만) 확실히 나쁜 선택지는 아닐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받아들이고, 싸우고, 즐기는 주체적인 의지가 건강한 삶의 초석이다. 그렇게 본다면 Joe의 이야기도 딱히 우울하지 않고, 힘겨워 보이지 않는, 그저 또 하나의 형태의 삶에 불과하다.<br><br>&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5180/62/cover150/356263739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1806241</link></image></item><item><author>설표</author><category>영상</category><title>[마이리뷰] 코스모스 - [코스모스 - 특별판]</title><link>https://blog.aladin.co.kr/wolf974/7607391</link><pubDate>Sun, 21 Jun 2015 16: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olf974/760739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3711892&TPaperId=760739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7/9/coveroff/s41203209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3711892&TPaperId=760739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코스모스 - 특별판</a><br/>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br/></td></tr></table><br/>이거 지금 읽는 중인데 부록2 증명 과정 맞는 건가요..? 번역이 잘못 된 건지, 오류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수학과 대학원생한테 물어봐도 이상하다고 하고...p691 정n면체가 갖는 면들 총수가 n x F라고 나오는데 정육면체면 6 x F(690쪽에서 정다면체 면 수라고 하면 6이고) 그러면 면 총수가 36 이라는 건데... 이 부분 잘 이해가 안 됩니다 혹시 아시는 분 도움 주시기를 ㅠㅠ 수학쪽 머리가 아니라 잘 모르겠네요]]></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7/9/cover150/s41203209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70950</link></image></item><item><author>설표</author><category>영상</category><title>배리 린든(1975, 스탠리 큐브릭 작품) - [배리 린든 - [할인행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wolf974/7345305</link><pubDate>Thu, 22 Jan 2015 15: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olf974/734530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427202882&TPaperId=734530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6/83/coveroff/327243047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427202882&TPaperId=734530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배리 린든 - [할인행사]</a><br/>스탠리 큐브릭 감독, 라이언 오닐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06월<br/></td></tr></table><br/>
<br>&lt;&lt;여러 군데 올린 글입니다. 혹시 보지 않으신 분은 안 보시는 걸 권장합니다.&gt;&gt;<br>&nbsp;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은 정말 명작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숨겨진 명작. 보고나면 헨델의 사라방드가 계속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스탠리 큐브릭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nbsp;&nbsp; 나는 스탠리 큐브릭의 입지가 굉장히 고유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소설가나 영화가나 예술 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만들어내는 작품들이 일정 정도 자기 반복적으로 창조된다. 왕가위나 홍상수, 김기덕, 페드로 알모도바르 등등 영화를 만들 때마다 자기만의 특정한 스타일을 창조시켜 변형시키는 경우들이 상당히 많다. 전체적인 테마가 비슷할 때도 있고, 색감이 비슷할 때도 있고, 화면 잡는 것이 그럴 때도 있고, 특정 정서(여성혐오로 보이는)가 반복될 때도 있다. 아니면 라스 폰 트리에 같은 경우, 영화를 창조해내는 형식이나 방법은 자기가 설정해놓은 삼부작들의 주제마다 상당히 다른 것 같은데 왜인지 모르게 그 사람이 만든 영화 자체들이 품는 성격 자체가 비슷하기도 하다. 그런데 스탠리 큐브릭은 이상스러운 게, 자기 작품들이 다 서로 엄청나게 다르다. 매의 눈이거나 영화공부한 사람이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적어도 나는 그렇다.&nbsp; 스탠리 큐브릭이 대충 열두, 열세개의 영화를 찍은 것 같은데, 본인이 본인 것으로 셈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스파르타쿠스를 제외한다 쳐도 그의 많은 작품들이 성격이 다르다. 공통점을 굳이 찾자면 문학으로 있는 작품들을 자기가 고친 적이 많다는 정도인 것 같다. 그런데 그러한 형식으로 시도한 영화들도 장르들과 주제들이 서로 많이 다르다. SF도 있고, 시대극도 있고, 공포영화도 있고, 부부의 불륜을 다룬 것도 있다.&nbsp;하나의 장르를 다룬 영화를 마치 도장깨듯 높은 완성도로 만든 다음에 다른 장르, 다른 성격의 영화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유유히 시작하는 그의 놀라운 재능을 보면 영화계의 모차르트가 현신이라도 했나 싶을 정도다.&nbsp;이처럼 스탠리 큐브릭이 워낙 다양한 시도를 많이 했고, 그 시도들이 각 영화 장르에 성공적으로 고전이 된 탓에 상대적으로 흥행성적도 약했고, 가장 무난해 보인(?) 배리 린든이 스탠리 큐브릭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묻힌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nbsp;&nbsp; 배리 린든을 보는 내내 나는 딱히 큰 단점을 찾지 못했고, 다만 그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 뿐이었다. 왓챠 보면 좀 뻔한 스토리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최근에 내가 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처럼 인생사 한 편의 꿈이란 것을 정말 잘 보여주는 영화라 생각한다. 사실 그 영화보다 작품 질은 훨씬 우수하다는 게 내 솔직한 생각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이나 전개 방식은 내 생각에 완벽 그 자체다. 이 영화는 내레이션이 극을 이끌어 나간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배리 린든을 맡은 배우가 라이언 오닐인데(라이언 오닐의 '페이퍼문'을 최근에 보기도 했으므로 나는 그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를 연속으로 본 셈이다), 이 욕심 많은 배우가 스탠리 큐브릭한테 주인공보다 대사가 훨씬 많은 내레이션도 자기 시켜달라고 징징대서 스탠리 큐브릭이 분노하여 다신 배우로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비하인드 스토리다.&nbsp;어쨌든, 이 내레이션은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등장인물들에 대한 직접적인 평을 가리지 않는다. 내레이션은 주인공의 불행한 결말을 몇 번 정도 암시하며, 절대적인 서술자마냥 모든 이야기를 다 알고 있다는 자못 오만한 어조를 취한다. 이 내레이션의 어조는 시대극을 고집한 스탠리 큐브릭의 의도에 적확하며, 그 준엄하고 귀족적인 목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상당히 옛스러운 시대를 산 한 남자의 불운한 이야기를 차분하게 듣도록 이끈다.&nbsp; 이 극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배리 린든이라는 남자가 아니라, 배리 린든이라는 남자를 다루는 이 영화의 시선이고, 내레이션의 차가움은 바로 그러한 시선을 반영한다. 배리 린든이라는 남자의 인생 자체는 어떻게 보면 그렇게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영화의 독자적인 시선이 배리 린든의 인생을 해석함에 따라 그의 인생을 다룬 이 이야기도 자못 신선해진다. 배리 린든의 이야기는 크게 전기, 후기로 나누어져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전기에서 배리 린든은 그 누구보다도 가장 순결한 사랑 때문에 자신이 가진 많은 것을 잃고 방랑하여 군에 입대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세상에서 가장 용기 있는 순정남이었던 그는 무참한 세월 속에서 점차 초기의 순진한 마음을 잃고, 여차저차 귀족부인의 환심을 사 결혼하여 부자가 된다. 변질하여 다른 사람이 되는 배리 린든의 모습을 보는 관객의 마음은 고로 이중적이 된다. 관객은 전기에서는 배리 린든의 고초를 마음 아파하며 그가 방랑생활을 접고, 무사귀환하기를 응원한다. 그러나 관객은 영화 후기에서 배리 린든의 질 나쁜 행동에 질색하며 얼른 양아들이 그를 징벌하기를 바라게 된다. 스탠리 큐브릭은 인물의 이러한 변질에 어떠한 드라마적 감상도 배제하고, 그의 몰락 역시도 차근차근 전개해 나간다. 내레이션은 정말 배리 린든이라는 인물의 삶에 대해 어떠한 동조적 감정도 갖지 않는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대충 결말을 암시 받았더라도, 관객들은 도대체 어떻게 배리 린든이 몰락하는가에 초유의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관객이 궁금증에 안달복달하더라도 내레이션은 여유로움으로 가득찬 신사마냥 이죽거리며 뜸을 들이다가는, 결국 최후에 가서 그의 처절한 몰락을 이때껏 그래왔듯 한껏 무관심하게 서술한다. 내레이션의 목소리를 들으며 비참하게 마차에 올라타는 배리 린든의 뒷모습을 보며 관객은 인생이 얼마나 허망하고 꿈 같으며, 사람이 얼마나 쉽게 변하고 또 변할 수 있는지를 영화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nbsp; 배리 린든의 영화 장면들이 매우 아름답다는 것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장점이다. 인조광 하나 없이 자연광으로만 찍었기 때문에 모든 장면들이 굉장히 섬세하게 아름답다. 흡사 유럽의 옛그림들을 보는 기분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호화스러운 실내 장면보다 자연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담아내는 (구름부터 바닥의 땅까지) 장면들이 정말 잘 찍은 사진처럼 아름답단 생각을 했다. 스탠리 큐브릭 본인이 사진작가로 시작했기 때문에 장면미학에 엄청난 집착을 가지고 영화 일에 임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어두운 곳에서 촛불조명으로만 영화를 찍기 위해 나사에서 직접 카메라 장비를 빌렸다고 하는데, 그 행위가 좀 지나친 오버 아니냐는 몇몇 사람의 냉소에도 불구하고, 본 장면들(어두운 곳에서 카드 게임하는)은 실제로 정말 아름답게 찍혔다. 그 시대의 의상분야에 관심이 없는지라 자세히 말은 못하겠지만 고증에도 충실한 것 같아 보였다. 인물들의 하얀 분칠가루가 그 정도로 진하게 발라진 영화를 본 기억이 잘 들지 않는다. 그러한 분장술조차도 그 시대의 아름다움을 포획하기 위해 들인 스탠리 큐브릭의 공이 아니었나 싶다.&nbsp; 음악에 대해선 더 이야기할 것도 없다. 헨델의 사라방드가 얼마나 아름다운 음악인지 깨닫게 된다. 나도 요즘 만날 듣는다. 그런데 스탠리 큐브릭이 그의 여러 작품에 클래식을 쓴 걸 생각해보면 그가 그 분야에 대해 조예가 깊지 않았나 싶다. 아니면 이렇게 시의 적절하게 음악을 쓸 수가 있나 싶을 정도. 헨델이 아마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를 보았으면 매우 흡족해 했을 것 같다. 그런데 만약 스탠리 큐브릭 본인의 감각이 아니라면 스탠리 큐브릭이 같이 일한 음악감독이 훌륭했던 건가 싶기도 하다. 이 분야에 대해서도 잘 모르니 더 이상의 언급이 흔들지만 알려진 감독의 성격상 전자에 가까울 것이라 예상한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6/83/cover150/327243047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68369</link></image></item><item><author>설표</author><category>영상</category><title>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57</link><pubDate>Sun, 30 Nov 2014 02:4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5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102332256&TPaperId=723745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89/99/coveroff/910233225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102332256&TPaperId=723745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br/>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 브리지트 미라 출연 / 미디어포럼 / 2009년 11월<br/></td></tr></table><br/>&nbsp; &nbsp; 회고해보면 저번에 저는 파스빈더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글을 썼었는데, 파스빈더가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마다 배우로 나오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꽤나 흥미롭습니다. 저는 파스빈더를 처음 영화 안에서 보았을 때 그저 매력적인 젊은 청년으로 생각했습니다. 조금 더 솔직히 밝히자면 사실 생긴 거 참 여자 좋아하게 생겼다, 라는 일차적인 생각을 했지요. 파스빈더가 사람의 성적 정체성을 가리지 않고 관계를 맺은 걸 생각해 보았을 때 아마 그러한 제 생각은 지나치게 일차적으로 나온 것이고, 또 동시에&nbsp;편견에 가득 찼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저 저는 약간은 오동통하고 뵤루퉁한 그의 반항적인 얼굴에서 소위 남성성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가죽 자켓 입은 남자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데, 가죽이 참 잘 어울려서 그게 또 인상적이기도 했고요. ... 이번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는 무려 여주인공의 사위 역할로 나오더군요. 멍청하고 폭력적인 인물이었습니다-어떻게 감독 본인이 자신의 얼굴이 그러한 역할에 잘 어울리는지를 그렇게 또 잘 아는지.&nbsp;&nbsp;&nbsp;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저는 사랑 영화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nbsp;가장 정열적이고 순수한 환희이지만, 그러한 선에서 논의가 끝날 수 없는 주제입니다. 사랑도 인간과 인간이 소통하고 엮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이 영화를 딱 그 차원으로 보았습니다. 맨 처음 이 영화는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의 현격한 사회적 차이에 집중을 하게 만듭니다. 여성이 대략 남성보다 스무살 이상은 많고, 남성은 그 때 당시에 차별받던 (사실 지금도 차별받긴 하지만요) 아랍인이며, 여성은 독일인입니다. 그들을 둘러싼 주위 인물들의 반응은 경악 그 자체이지요. 심지어는 끝까지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물도 나옵니다. 이 영화는 이 논란 많은 커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반응에&nbsp;관한 내용을 영화 전반부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전반부에서 젊은 아랍 남성과 결혼한 늙은 독일 백인 여성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곧 영화가 후반부로 접어드는 국면에서는 소강되지요. 처음에 저는 이러한 분위기 전환이 단순히 파스빈더의 의외로 낙관적인 성품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라는&nbsp;소소한 의문을 마음 속으로 제기했습니다만, 영화를 끝까지 보니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결국 '반대와 반감'이라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들게 마련 아닙니까. 그런 점을 고려해보면 파스빈더의 전개가,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결국&nbsp;주위 사람들의 선량함과 무심함이라는 비폭력적인 요소로 좋게좋게 해결되는 게 사람 일이다, 라고&nbsp;감독이&nbsp;안일하게 생각한 것 아닐까? 라는 제 생각은 틀린 생각인 것으로 보입니다.&nbsp;&nbsp;&nbsp;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전반부보다 후반부였던 것 같습니다. 후반부에서 이제 타인들과 이 '괴이한' 커플의 갈등은 소강상태를 벗어나, 일종의 적응 상태로 진입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난항에 부딪치게 되는 것은 이 커플 두 명 본인들입니다. 이들이 보이는 일종의 권태와 서로에 대한 몰이해는 단순히 이들이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사실 이들이 갈등을 겪는 부분을 보면, 굉장히 사소하면서도 본질적입니다. 완전히 다른 이방인이라는 것을 알면서 서로를 사랑으로 품어주었지만 결국 그러한&nbsp;사랑의 상대에게도&nbsp;자신들이 감당해낼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알리에겐 에미가 쿠스쿠스를 만들어주지 않는 것이 그러했을 것이고 에미 입장에선 알리가 평범한 독일인인 자신의&nbsp;삶의 방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그러한 영역이었겠지요. 그러나 저는 이것이 이들이 나이 차이가 많고, 다른 국적이라서 그렇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즉, 이들이 보이는 이러한 갈등은 다른 모든 '일반적'이라 불리우는 모든 커플들에게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장면인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nbsp;에미가 친구들이 있는데도 박차고 나가는 알리를 향해 '저이가 저러는 것은 아랍인들 특유의 우울한 문화 때문이지'라고 말하는 것은 그러한 제 의심을 키워주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딱 보기에는 상대방의 다른 문화를 타겟으로&nbsp;삼는 것 같지만, 이러한 대사는 조금만 변용하면 우리 주위의 수많은&nbsp;사람들이 자신의 배우자를 공격하는 대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이가 저러는 것은 시댁 특유의 정신병적인 문화 때문이지'는 어떨까요?&nbsp;&nbsp;&nbsp; 제가 말하는 방향이 잘 정리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향해서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히틀러 시대의 불평등한 사고방식이 남은 독일 사회를 꼬집은 것이라는 해석이 무효하진 않지만 그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파스빈더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사랑 안에는 그 의의와 동시에 한계점이 여실히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nbsp;보았습니다. 엄청나게 다른 차이에서 오는 사회의 따가운 시선이 전자의 해석을 담아내고 있다면, 아무도 뭐라고 더 이상 대놓고 비난하지 않는 상황에서 즉 나와 사랑하는 대상 둘만이 관련된 상황에서&nbsp;갈등과 권태와 일탈을 빚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가 제 눈에 더 들어왔다고 하는 게 좋겠군요. 이는 맨 마지막에 알리가 위궤양 때문에 병원에 갔을 때, 즉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매우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보입니다. 알리는 위궤양을 본질적으로 고칠 수는 없습니다. 그는 6개월마다 발병하는 이 병 때문에 또 이 병원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위궤양과 마찬가지로 아마 비슷한 주기로 에미와 자신과의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를 품고 있기 때문에 위궤양을 절대 고칠 수 없다는 의사의 확진처럼, '고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에미는 의사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하죠. '제가 더 잘하면 나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의사는 또 이렇게 확진합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nbsp;&nbsp;&nbsp; 인간과 인간은 어떠한 차이를 얼마나 크게 갖고 있든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으며 이러한 필연적 몰이해는 서로가 서로를 분명하게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nbsp;거리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 거리감은 권태 혹은 일탈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지 않았다면 그 권태와 일탈이 어떤 식으로든 봉합되겠죠. 다만, 이것은 사랑이 서로를 말 그대로 하나로 만드는 풀딱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단순한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뭐 어때요. 결국 그 둘이 꼭 서로 손을 잡고 있는 장면을 보면 그들은 자신들 나름대로의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서로 완벽히 하나가 아니라는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는 것, 혹은 먹어치우는 것 뿐이지요. 파스빈더는 편하게 그래, 그게 인간이고 사랑이지, 행복이 항상 즐거움을 의미하는 건 아니야, 라고 이야기해주네요. 생긴 것과 다르게 참 따뜻한 남자가 바로 파스빈더 같았다고 생각합니다.&nbsp;&nbsp;&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89/99/cover150/910233225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899941</link></image></item><item><author>설표</author><category>영상</category><title>영화 '뫼비우스' - [뫼비우스]</title><link>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48</link><pubDate>Sun, 30 Nov 2014 02: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4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362347563&TPaperId=723744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19dvd_75cover.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362347563&TPaperId=723744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뫼비우스</a><br/>김기덕 감독, 조재현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4년 02월<br/></td></tr></table><br/><br>&nbsp;0. 시작 - 김기덕의 말 -&nbsp;<br>&lt;&lt;김기덕 감독, &lt;뫼비우스&gt; 작의(作意)&gt;&gt;&nbsp;‘가족은 무엇인가욕망은 무엇인가성기는 무엇인가가족 욕망 성기는 애초에 하나일 것이다내가 아버지고 어머니가 나고 어머니가 아버지다애초 인간은 욕망으로 태어나고욕망으로 나를 복제한다그렇게 우린 뫼비우스 띠처럼 하나로 연결된 것이고결국 내가 나를 질투하고 증오하며 사랑한다.’&nbsp;-네이버 영화에서-&nbsp;&nbsp;1. 나는 왜 김기덕을 욕망하는가.&nbsp;&nbsp;&nbsp;&nbsp;&nbsp; 김기덕을 사랑하기 시작했던 그 아름다운 순간부터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어린 나이에 - 몇 살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 양동근이 출연한 김기덕 감독의 [수취인불명]을 보게 되었다. 그 영화를 찾아본 이유는 당시에 양동근에 빠졌기 때문이다. [수취인불명]은 처음에는 재미없는 작품이었다. 양동근이 양공주 밑에서 태어나 혼혈인 연기하는 부분만을 띄엄띄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대본을 읽으면서 한 번 집에서 혼자 연기를 해보자 하는 생각에 대본 사이트를 찾았다. 나는 [수취인불명]의 각본 안에서 양동근의 엄마인 양공주 역할과 양동근이 맡았던 소년 역할을 시도했다. 그 때 나는 무척 서투르게 연기를 했는데 이상하게 그녀와 그녀의 아들 연기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안에서부터 깊은 울음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나는 김기덕의 작품 안에서 인간을 울리는 힘을 발견하였다.&nbsp;&nbsp;&nbsp;&nbsp;&nbsp;사실 김기덕의 작품을 논리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냉엄한 위치에서 바라본다면 나는 그의 작품을 좋아할 이유가 없다. 그는 내가 긍정하는 인간관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니다. 김기덕 감독이 초기 몇몇 작품들과 가히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나쁜 남자]에서 욕을 먹은 것처럼 그의 작품 안의 여성들은 전형적인 피해자들이다. 그것도 그냥 피해자들이 아니라 가해자들인 남성들에게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도 빠진 것처럼 군다. 그리고 김기덕 감독은 얼빠진 그녀들에게서 구원을 받고자 품 안으로 철없는 강아지처럼 끼어드는 남성들을 그려내곤 했다. 여성을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보는 그 시선에 수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이 불쾌함을 느끼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 번은 수업시간에 [나쁜 남자]를 보는데 뒤에서 영화를 보던 두 여학생들이 김기덕 감독의 작품을 "더러워."라는 말로 묘사하더라. 사실 그들의 반응이야말로 정상적일 것이다. 김기덕 감독은 자신이 의도를 했든 안 했든 여성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 남자와 같다. 아마 수많은 여성들, 심지어 남성들도 마찬가지로 김기덕 감독과 [나쁜 남자]의 양아치 건달 남자주인공을 큰 차이 없는 인간 군상으로 여겼을 것이라 짐작한다.&nbsp;&nbsp;&nbsp;&nbsp; 하지만 인간은 재미있게도 모순적인 존재이다. 나에게도 두 얼굴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미워하는 존재를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랑하는 존재를 미워할 수 있다. 한 남자의 투박한 얼굴과 소인배적 근성을 혐오하는 일과 그가 보여주는 예술혼에 열광하는 일은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절제하게 발생하지 않는다. 나는 마치 연애를 하는 여자와 같다. 사랑에 빠졌지만 우리 모두 사랑에 빠졌다고 해서 자신의 몸을 인당수에 빠트릴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우리는 이 남자와의 만남을 지속할지 아닐지 고려하기 위해 저울을 준비한다. 이 저울에는 기준이 있다. 이 남자와 있으면 좋은 게 더 무거운지 나쁜 게 더 무거운지가 관건이다. 나에게 김기덕은 이 저울에서 좋은 쪽이 나쁜 쪽보다 훨씬 더 무거운 남자이다. 김기덕의 작품들은 나에게 새로운 일정과 장소를 제공하는 김기덕과의 데이트나 마찬가지이다. 그는 불친절하고 날 것 위주이며 서툰 욕망을 제시하지만 언제나 솔직한 남자이다.&nbsp;&nbsp;&nbsp;&nbsp; 사랑에 빠진 여자답게 그라는 남자의 매력을 좀 더 자랑해보고 싶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분명 더 많다. 그는 아름다운 짐승이다. 대한민국의 어떠한 영상 예술가들 중에서도 뮤즈 여신들의 옷 자락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이미 엇비슷한 유형으로 범람하는 대한민국산 영화들 속에서도 자신만의 얼굴을 잃지 않은 개성남이다. 김기덕만이 갖고 있는 정적인 배경들과 인물들의 충격적인 행동들은 많지 않은 대사들 속에서 아우라를 빛낸다. 그는 언어와 논리로 설명하고 재고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맞지 않는 옷임을 본인도 잘 아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코드이자 매개체인 언어를 배격한다는 것에서부터 그가 얼마나 인간이 부리는 도구를 신뢰하지 않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영상으로 도전한다. 그는 인간이 아직 자연과 분리되기 이전의 에덴동산에 살았던 아담처럼 군다. 그에게서 우리가 원시성과 신화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점에 근거한다고 본다.&nbsp;&nbsp;&nbsp;&nbsp; 김기덕 감독이 우리의 눈에는 유럽적이며 동시에 오리엔탈리즘에 근거한 사랑을 받는다는 지적은 그렇기에 더 의미가 있다. 그가 우리 대한민국 사람의 정서와는 멀어 보이는 유럽남자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유럽인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동양인의 면모를 유럽인들에게 팔아먹기 좋은 형태로 내놓기 때문인 것일까?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흥미롭고 가치 있는 지적이라 생각하지만 그 지적은 내 생각에 김기덕의 아우라를 너무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나의 남자는 그렇게 매력 없는 남자가 아니거든!&nbsp;&nbsp;&nbsp; 그러나 이는 사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쉬운 문제일 수도 있다. 김기덕 감독이 예술의 방식으로 선택하는 방식은 인간의 치부와 욕망에 대해 우리가 즐겨 쓰는 자제하고 돌려말하는 방식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밑바닥을 긍정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니다. 예로부터 말 잘 하는 사람들을 사기꾼으로 생각했던 동양의 문화가 어느 순간 사라진 것이 아니다. 말 하나도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이 당연했던 우리 사상 속에서 우리가 제정신이 박혔다면 절대 입 밖으로도 꺼내지 않을 구질구질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으니, 원! 김기덕 감독은 마치 미국 교포 출신이라서 성생활에 자유분방하고 당당한 겉만 한국인처럼 생긴 여학생이나 똑같은 꼴이다. 한국인들은 그 여학생에게 대놓고 감히 뭐라 말은 못하지만 뒤에서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대놓고 그러한 말들을 일삼는지 입방아를 찧어대기 마련이다. 다만 그 여학생은 자신의 일상 언어로 그것을 표현할 뿐이지 김기덕 감독은 예술언어로 표현한다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nbsp;&nbsp;&nbsp; 하지만 김기덕이 또 재미있는 것이 그렇게 솔직하게 자기 하고 싶은 말들을 풀어놓는 것과는 반대로 자신의 뱉어진 말들의 향방은 또 묘하게 동양적이라는 것이다.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불교적 감수성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는 죄의 사함과 죽음, 징벌, 욕망과 같은 인간의 원초적 감정에서 발생한 한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초월시키는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절대 그러한 한들이 악귀처럼 이승에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영화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구원해주고 싶어 하는 선한 마음의 창조주이다. 아마 이는 자신의 마음속의 번뇌를 승화시키고자 하는 한에서 온 것일 터이지만 말이다. 자기 자신의 죄를 이고 손에서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한의 승화 혹은 한의 초탈은 뫼비우스에서도 죽음과 탈속으로 또 한 번 드러나는 바이다.&nbsp;&nbsp;&nbsp;&nbsp; 내가 김기덕을 욕망하는 이유는 그의 철학적 고민과 치열한 질문들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의 그러한 작품들에 매료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김기덕 감독이 뫼비우스로 제시하고 싶었던 질문은 0에서 감독 본인이 밝힌 글, 그대로이다. 그는 대로변에 SEX를 써놓았다. 대한민국의 모든 성性이 음지의 늪지대와 같은 존재인데도 그는 그에 관해 큰 소리로 질문을 던진다. 성욕은 음지에서 그림자를 먹고 사는 욕망인가? 성기의 자극과 우리의 이성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성기의 욕망에서 우리가 정말 자유로운가? 아니다. 우리는 성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만약 그렇다고 대답했다면 아마 자기부정에 가까울 것이라 본다. 성욕이 이미 다른 식으로 발현되는 것일 수도 있고.&nbsp;&nbsp;&nbsp;&nbsp; 우리는 성기에서 오는 그 뜨끈뜨끈한 자극이 우리에게 수많은 상상과 부정하고 싶은 더러운 짐승의 욕망들을 소환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싶어 한다. 적어도 부정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에 대해 침묵으로 다스린다. 나는 음담패설이 강력한 유머라는 것이 전혀 놀랍지 않은데, 그 이유는 침묵으로 여겨지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데서 오는 쾌감이 그 정도임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기덕은 그러나 음담패설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정색을 하고 분명히 질문한다. 배우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성과 섹스를 하는 것, 그것도 자기 아내의 젊었을 적 모습과 상당히 닮은 동네 슈퍼마켓 아가씨와의 섹스. 혹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지는 몰라도 커다란 가슴을 부끄럽지도 않게 보이는 아가씨와의 섹스. 집단 윤간, 아버지의 여자와의 섹스.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 가족에게 느끼는 성욕. 그리고 그러한 상상들과 욕망들에서 오는 죄책감까지 김기덕은 하나하나 집어내며 묻는다. 우리가 민망해하고 숨기고자 하는 것들을 그는 면전에서 대놓고 깐다.&nbsp;&nbsp;&nbsp;&nbsp; 왜, 우리가 깨끗하고 깔끔하고 이성적인 짐승이라 그러한 성욕은 없고 더러운 상상들은 해본 적 없다고 부정하는가? 감히 부정하지 말라. 방금 내가 열거한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상상해 본 적조차 없다면 포르노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수요가 많다고 알려진 근친상간 포르노물들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nbsp;&nbsp;&nbsp; 내가 김기덕이 위대한 이유, 내가 김기덕을 사랑하는 이유, 김기덕을 열망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김기덕은 우리가 음지로 몬 것들, 말하면 안 된다고 딱지 붙인 모든 것들에 반기를 들고 질문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입에 붙여진 청 테이프를 뗀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용감하고 그만큼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마주한 자이다.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아니다. 그러니까 김기덕인 것이다.&nbsp;&nbsp;&nbsp;&nbsp;2. 김기덕은 남자로서 여자를 어떻게 욕망하는가&nbsp;&nbsp;&nbsp;&nbsp;&nbsp; 사랑, 사랑은 애증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김기덕을 어떻게 내가 사랑만 할 수 있을까? 김기덕이 남성으로서 갖는 욕망은 남성의 사랑의 대상인 여성으로서 필연적이게도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김기덕 감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돌을 던질 때 나는 그 돌들을 유심히 보았다. 분명 날카로운 지적들이 몇 있다. 공감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다른 사람들, 특히 페미니스트들이 하는 지적은 그대로 옳지 않은 경우가 있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 김기덕은 여성을 소비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여성을 파괴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여성을 괴롭히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는 연인의 마음을 시험하는 사람처럼 구는 것에 가까울 뿐이다. 내가 어쩌면 관대한 평을 내리는 지도 모른다. 이것은 인정하고 넘어가는 부분이다. 원래 사람은 자신이 애정을 갖는 대상에게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가 힘든 것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과한 애정도, 과한 미움도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nbsp;&nbsp;&nbsp;&nbsp; 다만 그래도 내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에 나오는 남성들은 (우리 그냥 여기서 앞으로 김기덕 감독 작품 안에서의 성별 이야기를 할 때는 모두가 이성애자들임을 상정하자, 뫼비우스에서 성적 소수자들이 나오는 경우는 없다고 본다) 섹스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좌절하는 보통의 우리 주변 남성들이다. 남성들이 거세당하는 것에 얼마나 큰 공포심을 갖고 있는지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섹스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nbsp;&nbsp;&nbsp;&nbsp; 기본적으로 섹스는 인류 모두에게 중요한 행위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나는 여성들보다는 남성들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남성이 느낄 수 있는 쾌락에 끊임없이 집중하는 남성 인물들이 차고 흐른다. 여성이 없는 상황에서 다른 남성을 안음으로써 쾌락을 얻으려는 감옥 인물, 끝없이 검색하면서 계속 정보를 얻어 아들을 쾌락 없는 세상에서 구제해주려는 아버지, 돌로 상처내서 쾌락을 느끼는 거 보면 마음이 짠해져서 잔인하다는 생각보다는 실소가 먼저 터져 나온다.&nbsp;&nbsp;&nbsp;&nbsp; 그런데 섹스에는 대상이 필요하다. 여성은 남성에게 있어 그러한 의미로 대상이다. 남성이 주체로 상정되는 순간 여성은 객체이다. 여성은 남성과 분명 생물학적으로 다른 구조이다. 슈퍼마켓의 젊은 아가씨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묘하다. 그녀의 옷은 하얀 가슴과 살결, 매끈한 다리를 부각시킨다. 카메라는 회피하지 않는다. 어머니와 젊은 아가씨 역할을 한 배우 이은우의 다리 사이로 보이는 하얀 팬티는 여과 없이 드러난다. 김기덕이 보는 여성은 현대 남성들의 시선에 존재하는 보통의 여성상이다. 그녀들은 모델이 아니고, 그냥 평범한 주변의 여성인데 문제는&nbsp;일상의 순간에서 그들이 자신의 여성성을 계속 섹스어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섹스어필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들이 스스로 노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시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시선의 대상에 존재하는 여성은 남성들에게 미지의 존재이며 파악되지 않는 신기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성적인 측면으로 그러하다. 왜냐하면 여성과 남성이 다른 이유는 신체적인 측면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도출되기 때문이다. 그녀가 갖고 있을 인격이라는 측면은 그렇기에 뒷자리로 밀려난다. 여성이 남성에게 줄 수 있는 신체적인 쾌락이야말로 남성들이 강렬하고 짧은 시선으로 포착하고자 하는 무엇이다. 그러한 지점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있어 무조건적인 구원인데 문제는 시선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뫼비우스에 나오는 여성들 역시 시선의 대상,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그녀들 본인은 상황 속에서 욕망의 주체로 그려진다기보다는 상대방 남성이 갖고 있는 욕망에 반응하는 유기물들로 그려진다. 남성의 바람이라는 욕망에 복수로 반응하고, 아들의 성욕에 해소로서 반응하는 것, 자신을 보고 흥분하지 않는 남성에 대해 좌절하고 자신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남자에게 성욕 해소를 제공하는 것이 그러하다.&nbsp;&nbsp;&nbsp; &nbsp; 이렇게 보면 인간의 성욕은 우리와 다르게 존재하는 것 같다. 우리가 만약 대상을 존중하지 못하고 영원한 객체로 만드는 것이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성욕이라는 측면에서 그렇게 대상을 객체로 남겨두는 것을 폭력이 아닐까? 우리는 이에 대해 우리의 머리가 성욕을 조절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다. 이는 당연히 맞는 말이다. 정당한 주장이며 합리적인 대안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비록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지언즉 적어도 머릿속에 떠도는 순간의 욕망마저 차단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들이 어머니와 하는 상상을 몽정으로 꾼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욕망에서 그렇게 쉽게 탈출할 수는 없다. 만약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은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강박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욕망을 가진다는 것, 그것에서부터 우리는 이미 죄인이다. 우리의 죄를 스스로가 알고 있다. 만약 신자라면 하나님도 알고 있는 것이다. 직접 행동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죄책감이 생긴다. 뫼비우스에서 아들과 어머니가 유사성행위를 한 이후 오열하는 장면에서 나는 결코 놀라지 않았다. 욕망을 풀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 이는 동물로서 당연하다. 해소되지 않은 욕구불만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고자 하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nbsp;&nbsp; &nbsp;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다면 뫼비우스의 아버지가 선택한 자살도 어떻게 보면 꽤 괜찮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말을 자살 권장의 문장으로 읽는다면 안 됩니다, 정말) 우리의 욕망은 무조건 추잡하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 속에 허락도 받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대상화 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들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로 두기 마련이다. 그 어처구니없는 이기심과 유치함은 추잡하다. 아버지가 권태와 욕망에서 도망치지 못해 젊은 여자와 바람피운 것을 보자. 우리는 자제하지 못하는 욕망들 속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어리석은 중생들이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갈구는 그들의 육체적 쾌락에 대한 갈증과 같다.&nbsp;&nbsp; &nbsp; 하지만 이를 어쩌나, 욕망은 사랑이 아니다. 즉 세련되고 문명화된 인간의 입장에서 정제되고 아름답진 않은 것이다. 남성들 중 잔인한 자들은 욕망에 대해 원시인과 같아서 여자를 마치 음식 먹듯 돌려 먹는 걸 즐겁게 행한다. 그들은 더 나아가 자신들의 부하 남성에게 강간의식에 참여할 것을 강요한다. 뫼비우스에서 그러한 짓을 행한 욕망의 “주체”는 결국 거세라는 징벌을 당한다.&nbsp;&nbsp; &nbsp; 거세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분명한 주제의식이다. 예로부터 성기를 잘라버린다는 것은 인간 구실을 못하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성기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 특히 성욕이 여성보다 많다고 알려진 남성의 성기를 떼버리는 것은 욕망에 대한 징벌인 것이다. 감히 더러운 생각을 품었다는 것에 대한 강박적 복수이다. 바람피운 남편의 성기를 거세하는 것에 실패한 아내는 자위 멀쩡히 하며 남자 구실 제대로 잘 하는 아들의 성기를 잘라버린다. 아들은 아버지와 남자들의 대리로서 배신당한 여성인 어머니에게 의해 벌을 받았다. 그는 그 벌로 인해 카인처럼 경멸당한다. 다른 남성들은 거세당한 아들을 비웃지만, 그들 역시 성기가 다리 사이로 달려 있다는 점 때문에 똑같이 거세라는 징벌의 대상자들이기도 하다.&nbsp;&nbsp;&nbsp; 그리하여 결국 끔찍한 윤간을 이끈 욕망의 주체는 거세로서 응징을 당하게 되는데, 그 강간범이나 아들이나 재미있는 점은 거세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쾌락에 집착한다는 점이다. 즉 남성들의 욕망은 사실 바로 “성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게 반전 요소이자 아이러니하고 동시에 희극적이며 해학적인 지점이다. 이것이야말로 김기덕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뫼비우스의 띠이다. 애초에 성기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는 그저 형식과 관습의 차원인 것이다. 종족 번식의 훌륭한 예시로서 존재하는 것이랄까? 남성의 성기에서 나온 정자가 여성의 질을 통해 난자와 만나 착상하는 것 말이다.&nbsp;&nbsp;&nbsp;&nbsp; 그러나 성기를 잘려서 이제 여자가 필요 없을 것 같은 인간들이 여전히 여성을 간절히 필요로 한다. 이들은 여자라는 대상이 없으면 당최 온전한 즐거움을 못 느끼는 인간들이다. 왜 그러한 것일까? 이성애자 남성들은 도대체 왜 성기가 없어서 상처를 마찰시켜서 얻는 자위질에도 만질 여성의 가슴과 만지지 못하면 적어도 보기라도 해야 할 여성의 몸이 필요한 것일까?&nbsp;&nbsp;&nbsp;&nbsp;&nbsp; 이는 말한 것처럼 김기덕 감독이 쓴 작의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간의 자아는 자기만의 세계에 철저히 갇혀 있다. 우리는 외부자극이 없으면 우리 자신의 존재 여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여성이 필요한 이유는 남성이 자신의 자아를 남성으로서 여기고 느끼기 위해 필요하다는 뜻이다. 여성은 이성애자 남성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가슴과 질을 갖고 있다. 남성들은 그 안으로 자신의 성기를 삽입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욕망에 대한 성취를 이룬다. 그렇기에 여성의 존재 자체가 남성에게는 구원을 상징한다. 여성을 통해 남성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과 다름없다.&nbsp;&nbsp;&nbsp;&nbsp;&nbsp; 자신이 강간해서 거세라는 징벌까지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징벌을 내린 자이자 피해자인 여성에게 찾아가 쾌락을 달라고 애원하듯 매달리는 남성의 모습은 김기덕 감독이 이때껏 구축해온 연약한 짐승이라는 남성의 이미지와 적확하게 부합한다. 김기덕의 카메라에서 여성들은 그러한 연약한 짐승들을 내치지 못한다. 김기덕 감독의 생각 안에서 여성의 존재 이유는 마찬가지로 여성들 역시 자신의 자아가 존재함을 느끼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질과 가슴을 필요로 할 외부자극의 존재일 지도 모른다. 즉, 여성은 자신이 구원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을 욕망한다는 것이다.&nbsp;&nbsp;&nbsp;&nbsp;&nbsp; 그러나 나는 이러한 부분까지 김기덕 감독에게 공감하지는 못한다. 여기서부터 김기덕 감독과 나의 갈림길이 시작된다. 김기덕 감독은 여성을 남성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사실 갈림길은 당연한 것이며 나는 이를 비난할 생각도 없다. 왜냐하면 김기덕 감독이 남성이라는 점을 내가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남성의 시선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자유가 있고, 이 정도의 표현력과 예술적 능력이라면 언제나 환영일 뿐이다. 실생활에서도 남성과 여성으로서 만나 그 정도의 다름이라는 간격 없이 좁혀질 정도라면 애초에 성적으로 다르다는 긴장감도 발생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nbsp;&nbsp;&nbsp;3. 끝&nbsp;&nbsp;&nbsp;&nbsp;&nbsp;&nbsp; 어머니는 아들을 거세한 다음 길에서 본 중을 쫓아 떠났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워서 코를 골아대는 그녀, 결국 그녀가 욕망을 절제하는 길을 동경하였지만 결국 현실로 만드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마 욕망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엄청나게 피곤한 일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녀처럼 우리가 속세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욕망을 버리고 사는 것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nbsp;&nbsp; &nbsp;&nbsp; 김기덕이 제시한 결말은 언제나 그러했듯 아름다웠다. 자신의 집에서 내놓아진 부처의 얼굴을 플래시로 비춘 아들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라. 중처럼 욕망을 버리고 내면을 비워내는 삶. 뫼비우스 띠에서 탈출하는 것은 욕망의 끈을 냉정하게 끊어버리는 길이거나 혹은 권총으로 스스로의 머리를 저격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nbsp;&nbsp;&nbsp;&nbsp;&nbsp; 그러나 필자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아들의 미소는 편안해 보였다. 그러나 인간이 정말 그렇게 쉽게 초연해질 수 있을까? 인간은 욕망을 동력으로 삼고 선로 위를 항해한다. 가끔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게 인간이기도 하지만, 부처의 자비로운 마음씨를 상징하는 그 인자한 미소 아래에 시퍼런 칼이 숨겨져 있는 게 인간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기를 자른 그토록 위험한 물건을 집 밖으로 버리지 않았다. 욕망에 대한 교만함, 욕망을 언제든 끝낼 수 있다는, 그 구렁텅이에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어 따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nbsp;&nbsp;&nbsp;&nbsp;&nbsp; 인간은 애초에 그렇게 쉽게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는 것이 운명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욕망에서 태어나 욕망 속에서 죽기 때문이다.&nbsp;&nbsp;&nbsp;&nbsp;&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img/19dvd_150cover.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454027</link></image></item><item><author>설표</author><category>영상</category><title>영화 '일대종사' - [일대종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47</link><pubDate>Sun, 30 Nov 2014 02: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4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306454317&TPaperId=723744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08/94/coveroff/930645431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306454317&TPaperId=723744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일대종사</a><br/>왕가위 감독, 송혜교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4년 02월<br/></td></tr></table><br/><br>&nbsp;&nbsp; 비가 함빡 온다.&nbsp;&nbsp;&nbsp;&nbsp; 왕가위는 정경을 그려낸다.&nbsp;사람들은 빗속에 있다.&nbsp;거친 발차기와 함께 엽문은 말한다.&nbsp;세상에는 수평과 수직이 있다.&nbsp;수평은 무너진 것,&nbsp;수직은 꼿꼿이 서있는 것.&nbsp;그는 자신의 몸을 단 한 번도 눕히지 않는다.&nbsp;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허리를 세우고 직립한 그의 모습은 곧 승리요,&nbsp;생존이다.&nbsp;&nbsp;&nbsp; 엽문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사람이다.&nbsp;그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다정하다.&nbsp;그와 아내의 사이 역시 좋다.&nbsp;그 둘은 공익 광고처럼 건전하다.&nbsp;그들의 삶은 사생활의 영역에 속해 있다.&nbsp;엽문은 큰 어려움 없이 가족을 부양하며 아내와 오손도손 자식들도 낳고,&nbsp;자신의 무예도 갈고 닦는다.&nbsp;그렇게 그는&nbsp;'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부족함을 알 수 없다.&nbsp;그가 설치한 무술 연습용 나무봉은 굳건하고 안정된 그의 사생활을 상징한다.&nbsp;그의 짝인 장영성은 자신에게 굴레 씌워진 사대부 여인의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는다.&nbsp;엽문 역시 금루로 출입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nbsp;그들 둘은 사회와 세상의 시선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nbsp;그들은 자신들만의 사생활 속에서 안전했고,&nbsp;행복했다.&nbsp;외부와 딱히 연결되지 않는 삶을 산 것이다.&nbsp;부모가 물려준 금전으로만 살아도 풍족한 삶이니 딱히 말도 안 된다 짐작할 순 없다.&nbsp;하지만 궁가의 등장으로 그들의 일상에는 새로운 사건이 발생한다.&nbsp;엽문은 일생일대의 도전을 받게 된다.&nbsp;이 시점이 바로 그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는 최초라 할 수 있을 것이다.&nbsp;&nbsp;&nbsp; 궁대인은 북방에서 온 사람이다.&nbsp;그는 자신의 무예와 남방의 무예를 합치는 것에 관심이 많다.&nbsp;그의 관심사는 개인적 측면에 국한되지 않는다.&nbsp;그가 바라는 것은 진시황이 바란 천하통일과 같다.&nbsp;하지만 궁대인은 분서갱유를 지시한 오만한 독재자는 아니다.&nbsp;그보다는 오히려 대의와 중생을 바라보고자 한 인물이다.&nbsp;그에게 무예란 것은 알려야 하는 소중한 것이며,&nbsp;전통과 다름없다.&nbsp;그는 중국적 가치를 일구어 내기 위해 분주하게 노력하는 자이다.&nbsp;사회와 인간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이다.&nbsp;그가 만들어 내고,&nbsp;지켜내고자 하는 것은 궁 대인의 삶을 대변하며 동시에 철저히 궁가의 것이다.&nbsp;그가 자신의 딸에게 설욕전을 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일은 그의 생각에 당연하다.&nbsp;무예는 인간 개인 한 명의 좁은 차원이 아닌 더 넓은 차원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nbsp;&nbsp;&nbsp; 『일대종사』에서 무예란 무엇을 상징하는가?&nbsp;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영화 속 시간이라는 가로의 축 뿐만 아니라 세로의 축으로도&nbsp;『일대종사』를 봐야 한다.&nbsp;세로의 축이라 함은 왕가위 감독이 제시하는 철학이며 중국의 역사적 맥락을 동시에 의미한다.&nbsp;왕가위 감독은 여러 곳에서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 속 엽문을 이야기한다.&nbsp;중국의 위기 속에서 무예인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nbsp;무예라는 것은 중국민족에게 전통이며 문화 중 하나이다.&nbsp;괜히 그들의 삶에서 무협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이 아니다.&nbsp;무술이란 개인 하나가 소유한 것이 아닌 집단의식에 가깝다.&nbsp;공공재다.&nbsp;그것은 스승이라는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전달된다.&nbsp;자식은 새로운 부모가 되어 자식인 제자에게 무예를 전달한다.&nbsp;자신과 자연을 뛰어넘어 인간을 바라봐야 가능한 일이다.&nbsp;그러한 교육의 형태는 민족적 정체성을 위협받는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삶의 방식이요,&nbsp;저항하는 길이다.&nbsp;&nbsp;&nbsp; 북방에서 온 자들이 엽문을 비롯한 남방계 사람들까지 자극시키는 이유는 그러한 사고방식으로는 당연한 일이다.&nbsp;대의 앞에서 자신의 집단을 대표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능력자의 자질이 아니다.&nbsp;그것은 비겁한 일이며 불효자나 할 짓이다.&nbsp;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집단을 대표하는 일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nbsp;병아리는 자신의 둥지 안에서 극치의 편안함만을 느낀다.&nbsp;그 이유는 간단하다.&nbsp;더 큰 책임감에서 개체가 자유롭기 때문이다.&nbsp;엽문의 능력은 개인이 가진 것이 아니라 그를 낳은 스승과 문파에게 있는 것,&nbsp;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능력에 책임감을 느낀다.&nbsp;하지만 그는 아내의 허락을 받지 않는 한 움직일 수 없다.&nbsp;그의 마음이 아내에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nbsp;그의 가장 내밀한 공간은 장영성에게 내어준 방이나 마찬가지다.&nbsp;결국 아내의 허락을 받고서야 엽문은 움직인다.&nbsp;그 순간이 바로 병아리가 둥지 밖으로 발을 내딛은 때이다.&nbsp;&nbsp;&nbsp; 거울로 자신만을 보는 사람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nbsp;그러나 타인을 보는 사람은 자신과 타인을 분리해서 보지 못한다.&nbsp;새가 둥지를 벗어나며 보는 것은 무엇인가?&nbsp;하얀 설원과 푸른 산과 파란 바다와 붉은 꽃이다.&nbsp;세상은 아름답다.&nbsp;단조롭고 평화로우며,&nbsp;촛불과 집으로 둘러싸인 사적 공간을 벗어나 밝고 넓은 공적 공간,&nbsp;천지,&nbsp;대자연이 펼쳐진다.&nbsp;엽문은 자연과 인생의 섭리를 체험하게 된다.&nbsp;그는 자신의 이웃들한테서 많은 것을 배운다.&nbsp;영특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기에 척척 알아듣는다.&nbsp;엽문은 이러한 사람도 있고 저러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nbsp;그렇게 그는 동포들을 대표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에 돌을 하나씩 짊어진다.&nbsp;그 돌을 세 개 짊어진 다음,&nbsp;엽문은 그 시대의 대인을 만난다.&nbsp;궁대인은 적이요 스승이요 동시에 아버지이다.&nbsp;먹어 삼켜야 할 우라노스이다.&nbsp;자분히 밟고 지나가야 할 철쭉꽃이며 상대 역시 그것을 노린다.&nbsp;궁대인은 더 넓은 곳을 본다.&nbsp;자신이 끝나야,&nbsp;자신의 유전자가 이어질 것을 아는 자이다.&nbsp;그는&nbsp;‘이타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기적인 유전자’가 무엇인지 역설하는 존재이다.&nbsp;&nbsp;&nbsp; 궁대인은 사람들 앞에서 의식을 치른다.&nbsp;자신의 새 아들에게 궁대인은 묻는다.&nbsp;남과 북을 결합하고자 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nbsp;엽문은 남과 북이 다른 것을 억지로 합치면 탈이 나며 다른 것은 다른 것대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답한다.&nbsp;전병이 궁대인에게 단순히 무림이라면 자신에게는 세상이라는 엽문의 말까지 고려해서 본다면,&nbsp;궁대인이 스스로의 패배를 인정함은 당연함이다.&nbsp;궁대인은 무예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지만,&nbsp;엽문은 무예를 뛰어넘은 세상 만상의 중생을 바라보며 답했기 때문이다.&nbsp;그 답을 지닌 엽문을,&nbsp;궁대인은 축복으로 기원한다.&nbsp;&nbsp;&nbsp; 다만 혈기왕성한 장쯔이의 궁이가 순간만큼이라도 양보할 수는 없다며 엽문에게 결투를 신청한다.&nbsp;그렇게 한 데에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은 젊은 후계자에 대한 궁금함이 더 컸을 것이다.&nbsp;그러나 기본적으로 궁이는 스스로 인정한 것처럼 자신을 보고,&nbsp;하늘과 땅을 봤지만 중생을 보지는 못했다.&nbsp;그녀에게는 여성이라는 한계가 있었고,&nbsp;본인의 기질적 성품이라는 담이 있었다.&nbsp;가끔 세상 사람들 중에는 이상하게 어느 지점 위를 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nbsp;궁이는 자신의 사적인 감정과 궁가라는 사적 집단의 자존심만을 갖고 사는 사람이다.&nbsp;그녀에게 그 이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있다 해도 중요하지도 않고,&nbsp;자신과는 상관도 없다.&nbsp;하지만 궁이라는 인물에 대한 감독의 애정은 지고지순하다.&nbsp;북방에서 온 궁이가 화려한 금루의 여자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nbsp;마치 감독 자택의 거실에 조심스레 걸어놓은 한 폭의 서양화를 보는 것 같다.&nbsp;중생을 보는 일대종사가 되지 못한 인물,&nbsp;우리네 수많은 지고 피는 꽃들 중의 하나가 바로 궁이다.&nbsp;궁이는&nbsp;『일대종사』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평범한 인물들인 우리네의 자화상이다.&nbsp;&nbsp;&nbsp; 궁이는 엽문이라는 새에게 둥지 바깥에서 보게 된 아름다운 꽃 한 떨기이다.&nbsp;그가 궁이를 거절할 것은 운명이다.&nbsp;당연한 귀결이다.&nbsp;궁이의 감정은 그들이 겨루는 무예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nbsp;보는 자의 시선에서 그들이 겨루는 무예는 화려한 동작이지만,&nbsp;당사자들에게는 순간이 영원처럼 흐르고,&nbsp;그들의 몸과 몸 사이로는 생각이 주고받아진다.&nbsp;신체의 만남은 쉽게 넘어갈 것이 아니다.&nbsp;그것은 신경들끼리의 만남이다.&nbsp;옷깃만 스쳐도 인연인 것처럼 잠시의 스침이라도 그 영겁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nbsp;이처럼,&nbsp;궁이가 상징하는 것은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한 엽문에게 있어 극복해야 할 높은 무예의 산 중 하나였다.&nbsp;궁이와의 경합에서 그가 낸 규칙대로 하여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nbsp;그는 고산 중 하나로 궁이와 같은 자들을 점찍었을 것이다.&nbsp;무술의 세계로 나아간 엽문을 보며 장영성은 눈물짓는다.&nbsp;그에게 다른 세계가 열린 것이다.&nbsp;사진 속 거리는 그것을 보인다.&nbsp;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사람의 변화를 견뎌내야 하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nbsp;&nbsp;&nbsp; 그렇게 엽문이 차차 발을 내딛던 중,&nbsp;일제가 엽문의 도시로 들어온다.&nbsp;&nbsp;&nbsp; 높은 자존심,&nbsp;고고한 사생활의 평화는 깨진다.&nbsp;아무리 안온한 둥지라도 거센 폭풍우에는 떠내려가는 법이다.&nbsp;그것 역시 사회와 세상으로 나간 엽문이 배운 또 다른 천지의 이치이다.&nbsp;대가 하나가 국을 저으며 때를 잘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과 상통한다.&nbsp;개인은 바위로 내던져지는 달걀이나 다름없다.&nbsp;엽문은 자신의 보잘것없는 가족의 삶이 깨지는 것을 막아보려 하지만,&nbsp;새끼 새들이 뱀에게 먹히는 것을 어미 새가 막을 수 있느냐의 여부는 하늘에 달려 있다.&nbsp;엽문이 아무리 잘난 자라 하여도 그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nbsp;혼돈 속에서 묵묵히 엽문은 자신의 무술 연습용 나무봉을 해체한다.&nbsp;개인의 삶은 사회의 거친 혼란에서 온전한 형태를 유지할 수 없다.&nbsp;사회의 혼란을 벗어나 편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자존심과 자부심을 파는 것이다.&nbsp;자부심과 자존심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nbsp;무예이다.&nbsp;중국인의 전통이요,&nbsp;윗대로부터 내려온 공통의 무엇이다.&nbsp;궁대인에게 궁가&nbsp;64수의 힘을 물려받은 마삼은 그 길을 택했다.&nbsp;아름다움을 물려받지 못한 그의 선택은 바로 변절이었다.&nbsp;&nbsp;&nbsp; 마삼은 스승을 죽였다.&nbsp;그는 스승이 남긴 초식의 비기를 듣고서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nbsp;마삼은 피가 끓는 열혈 청년이었다.&nbsp;그는 자신의 핏 속에 담긴 혈기왕성함을 주체하지 못하는 힘 그 자체였다.&nbsp;그에게 있어 세상이라 함은 그 본연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nbsp;세상의 이치까지 파고들만한 자는 아니었다.&nbsp;그가 거침없이 다른 사람들을 내리꽂는 것을 보라.&nbsp;천지만물이 그에게는 자신의 힘을 증명할 수 있는 시험지에 불과했다.&nbsp;그런 그에게 궁대인이 끊임없이 자제할 것을 요구한 것은 당연한 가르침이다.&nbsp;왜냐하면 세상이란 한낱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nbsp;그러나 천둥벌거숭이에게 기다리라 한들 자제할 수 있다면 동물이 아니리라.&nbsp;짐승을 길들이려 하였지만,&nbsp;짐승은 곧 아가리를 벌려 아버지를 물어죽이고 표표히 떠나버린다.&nbsp;그러나 짐승 마삼은 궁이에게 패배하는 순간 초식의 비기를 이해하게 된다.&nbsp;돌아보는 것,&nbsp;그것을 진부하고 늙은 자의 굼뜸이라고만 해석했던 그였다.&nbsp;그러나 순간 뒤를 바라보는 것은 굼뜸이 아니라 더 높고 멀리 날기 위한 제&nbsp;1조건이다.&nbsp;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nbsp;자신에서 시선이 떠나 다른 곳을 보는 것이다.&nbsp;그는 수직이 아니라 수평이 되면서 오히려 수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nbsp;그에게서는 아예 궁가의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nbsp;궁이의 말대로 그것은 궁이가 되찾은 것이다.&nbsp;마삼은 궁가의 것을 공유해 본 적이 없었다.&nbsp;애초에 그에게는 자부심이란 없었다.&nbsp;&nbsp;&nbsp; 그러나 궁이를 말린 노인들의 지적처럼,&nbsp;궁이는 초라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nbsp;천지와 중생을 보라고 가르쳤건만 그녀가 선택한 길은 사형과 사제끼리의 혈투였다.&nbsp;궁가&nbsp;64수의 아름다움과 힘이 서로를 헤친 것이다.&nbsp;두 개로 나누어 무술을 보존하고자 했건만 하나의 욕심이 탑을 무너뜨렸다.&nbsp;하지만 궁이는 말한다.&nbsp;궁가&nbsp;64수가 없어진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nbsp;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없어지는 법이다.&nbsp;니힐리즘에 빠진 궁이는 아편을 마셨고 결국 자신의 몸을 파괴한다.&nbsp;아름다움만 있고,&nbsp;힘은 없는 그녀는 세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nbsp;그녀는 결혼을 하여 자식도 낳지 못했고,&nbsp;자신의 무술을 후세에 남기지도 못했다.&nbsp;그러나 왕가위는 가련한 그녀를 비천하게 여기지 않는다.&nbsp;배우 장쯔이에게 고고한 자존심과 기품을 선사하여,&nbsp;궁이가 내린 선택을 마지막까지 조명한다.&nbsp;그녀의 선택을 지지하는 아버지는 촛불을 하나 켜놓고 딸을 기다린다.&nbsp;왕가위 감독은 우리 인간이 그렇게 간단히 감히 개인을 버리고 중생을 바라보는 삶을 선택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nbsp;궁이가 복수를 한 것은 그녀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nbsp;필시 그저 그것이 그녀다운 길이었기 때문이다.&nbsp;궁이를 보는 것은 그러므로 엽문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nbsp;엽문이 내린 선택과 정반대의 선택을 한 궁이,&nbsp;그녀를 보는 것은 중국 최대의 위기 속에서 한 세상을 살아간 한 여인의 삶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nbsp;그녀는 남자로 태어날 수도 없었고,&nbsp;일가를 이룰 수 없었다.&nbsp;자신의 몸과 일가에 갇힌 운명이었던 것이다.&nbsp;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쓴 바대로 평범한 인간의 길이다.&nbsp;&nbsp;&nbsp; 무술에서 궁이는 수직이었지만,&nbsp;삶에서는 수평이었다.&nbsp;그렇다면 수직으로 꼿꼿이 살아가고 있는 엽문은 위기 이후 무엇을 하였는가?&nbsp;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자신의 핏 속에 남겨진 무술로 재기하는 것뿐이었다.&nbsp;그는 자신의 무술로 제자들을 일궈낸다.&nbsp;다시 생명의 바람이 분다.&nbsp;교육,&nbsp;그것은 무엇인가?&nbsp;교육을 다른 말로 정의내릴 수 있다면 번식일 것이다.&nbsp;자신의 사상을 가진 자식들을 양육하는 것이다.&nbsp;그 안에 핏줄이 다르고자 한다 하여도 그들은 같은 정신과 자부심을 소유한다.&nbsp;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그의 스승에서 나온 이야기이며,&nbsp;그의 스승이 말하는 바는 스승을 가르친 스승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nbsp;엽문은 그러한 중국의 전통에서 자라고 난 사람이다.&nbsp;그는 중생을 외면하고 자신만의 삶에 천착하는 길로 치우치지 않았다.&nbsp;영화 속 작은 비중으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일선천은 엽문과 다른 방향의 길을 걸은 것처럼 보이지만,&nbsp;사실 엽문과 큰 차이는 없다.&nbsp;일선천은 평범한 비극의 삶을 상징하는 한 여인에게서 도움을 받고 살아난 독립투사요,&nbsp;자신만의 일파를 이루기 위해 피를 튀기며 조직에서 나온 인물이다.&nbsp;그들은 자신의 뜻에 감화된 자들과 사진을 찍는다.&nbsp;그들은 어린 자들에게서 희망을 보며,&nbsp;다음 세대를 기약한다.&nbsp;사생활이 부서진 엽문이 자신의 고향인&nbsp;‘불산’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아마 아내를 잃은 그로서 지켜야 할 다른 가족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nbsp;그가 지켜야 할 가족은 요즘의 기업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가식적인 관계가 아니라,&nbsp;같은 삶의 방향을 지향하는 동료들과 자식을 의미한다.&nbsp;그들은 자신을 믿고 따르며,&nbsp;엽문은 그들 중생의 손을 잡고 이끌어가는 존재이다.&nbsp;&nbsp;&nbsp; 『일대종사』,&nbsp;이 영화는 동양적,&nbsp;중국적인 의식으로 보지 않으면 힘든 영화이다.&nbsp;왕가위 감독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분명히 자신만의 서양적 미학으로 그림들을 그려낸다.&nbsp;곳곳에서 볼 수 있는 서양화적 시각과 색감들이 그러하다.&nbsp;그러나 서구 문명의 상징인 기차가 압도적인 속도로 지나치는 그 바로 위태로운 옆에서 두 명의 중국 무술가들이 자신의 가치를 위해 싸운다.&nbsp;왕가위는 우리의 현실을 포착한다.&nbsp;바로 동양과 서양이 만난 역사의 최근이다.&nbsp;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 작품에서 서양적 아름다움에만 집착한다면,&nbsp;우리는 궁이와 마삼의 장면을 보지 않고 기차가 지나가는 장면만을 본 것과 같다.&nbsp;&nbsp;&nbsp; 왕가위를 읽기 위해서는 그가 홍콩인이라는 맥락을 읽어야 한다.&nbsp;그는 촌스럽게 이 영화에 중국이 어떻고,&nbsp;상황이 어떻고,&nbsp;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를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nbsp;그는 돌려서 말한다.&nbsp;영상으로,&nbsp;무술로,&nbsp;물로,&nbsp;장쯔이로,&nbsp;양조위로 그려낸다.&nbsp;하지만 그는 중국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홍콩인으로서,&nbsp;중국의 위기에 봉착했던 그 시기 중국인이라면 무엇을 해야 했던 것인가를 엽문으로서 답하고 있다.&nbsp;&nbsp;&nbsp; 다시 한 번 무술이 중국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nbsp;무술은 단순히 경합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체의 수양이었다.&nbsp;또한 오랜 전통으로서 지방색 역시 갖고 있다.&nbsp;무술은 몸에 대한 이해요,&nbsp;하나의 종파를 묶는 같은 움직임이다.&nbsp;하나의 공통 기호이다.&nbsp;그들은 그 기호를 근육과 움직임에 새기며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nbsp;&nbsp;&nbsp; 자신의 정체성이 위협을 받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nbsp;인간은 이 세상에 나서 개인으로 살아가는가,&nbsp;아니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가?&nbsp;보았듯이,&nbsp;동양의 정서는 거친 자연과 무한한 사람들 안에서 하나로 살아가는 것이지 자기 자신만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nbsp;우리는 연결되어 살아간다.&nbsp;잘난 개인이 자기 자신만의 둥지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nbsp;숲 속에 만약 나무 한 그루가 쓰러졌는데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 나무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nbsp;우리의 정서로 본다면 그 나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nbsp;한 인간이 부모로부터 태어나 자기 자신만의 삶에서 살지 않고,&nbsp;다른 의미의 가족을 일구고,&nbsp;더 큰 사회의 어버이가 되는 것.&nbsp;번식과 번식으로 공동체를 유지하고 만들고 다음 세대로 나아가는 것.&nbsp;그것이야말로 바로 왕가위 감독이 의미하는&nbsp;‘일대종사’ The Grandmaster의 참뜻이다.&nbsp;&nbsp;&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08/94/cover150/930645431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089420</link></image></item><item><author>설표</author><category>영상</category><title>기억함으로써 불변할 사랑을 위해 - 알랭 레네, &amp;lt;히로시마 내 사랑&amp;gt;을 보고 - [[수입] Hiroshima Mon Amour (히로시마 내 사랑) (1960)(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title><link>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46</link><pubDate>Sun, 30 Nov 2014 02: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4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3252433433&TPaperId=723744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139/71/coveroff/325243343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3252433433&TPaperId=723744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수입] Hiroshima Mon Amour (히로시마 내 사랑) (1960)(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a><br/> / Criterion / 2003년 06월<br/></td></tr></table><br/><br><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nbsp; 영화는 벌거벗은 두 사람이 서로를 애타게 끌어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장면이 주인공들의 섹스라는 에로틱한 현재인지, 혹은 낙진을 잔뜩 묻은 채 죽어가는 히로시마 원폭 사태라는 과거의 두 사람인지 식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살뜰히 애무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간간히 삽입하며, 영화는 관객에게 히로시마 원폭 사태에 대한 이미지들을 제공한다. 여자주인공은 내레이션을 통해 자신이 히로시마 원폭 사태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남자주인공은 여자에게 당신이 본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그녀의 말을 부정한다.&nbsp;&nbsp; &nbsp;남자와 여자는 서로 국적이 다르다.&nbsp;그들은 처음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지만 옛날부터 연인인 사람들 같다.&nbsp;그들은 먼저 육체의 결합을 통해 가까워졌다.&nbsp;서로 애정을 느끼는 만큼 그들은 서로의 영혼에 가까워지려고 한다.&nbsp;그들은 서로의 과거를 탐색한다.&nbsp;여자가 히로시마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공유하려고 했던 것은 그러한 시도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nbsp;그러나 남자는 그러한 인위적인 이어짐,&nbsp;여자가 시도하려 하는 공통된 과거를 거부한다.&nbsp;그들이 그 대화에서 소통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히로시마 원폭이 각자에게 있어 동일한 기억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nbsp;&nbsp; 그들은 곧 다른 과거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남자의 요구에 맞추어 자신이 기억하는 것들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그녀가 과거를 이야기할 때, 일본 남자를 ‘당신’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를 느베르에서 만난 첫사랑이자 죽은 독일인 병사처럼 대한다는 것이다. 술집에서의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녀에게 죽은 군인이 아직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첫사랑이 죽었던 고통스러운 기억은 그녀의 눈에 가끔씩 다른 사람의 이미지 위로 생생히 겹쳐 보인다. 독일병사는 기억이미지로서 현재이자 동시에 과거이다. 그녀가 첫사랑을 서서히 잊어가지만 그래도 잊지 못하는 것은 변하지 않을 사랑의 맹세이며, 동시에 죽은 그를 언제나 마주할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다.&nbsp;&nbsp; 그녀의 과거를 들은 남자는 자신만이 여자의 기억을 온전히 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왜냐하면 이때껏 그녀가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았던 사랑의 기억을 알게 된 순간, 자신이 그녀에게 있어 그 독일병사라는 과거와 동일한 위치임을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자신이 그녀의 영원한 첫사랑인 독일인의 현재형임을 알게 된 것이다. 남자는 그러한 사랑의 원리에 익숙하며 그것을 질투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듯하다.&nbsp;&nbsp; &nbsp;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은 시간 이미지를 사랑이라는 소재와 연결시켜 보여주는 명작이다. 과거는 현재의 잠재적인, 또 다른 얼굴이다. 여자에게 있어 자신의 사랑과 죽음으로 이별하게 되었던 그 순간에 그녀가 독일 병사에 대해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의 기억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누어 가진 기억 속에서 죽은 연인은 현존으로써 불멸이 되었고, 과거이면서 현재인 이미지가 되었다. 그 이미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 때가 와야 독일병사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끝날 것이다. 또한 새로운 사랑에 있어서도 그들은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 과거를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서로를 히로시마와 느베르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들이 결국 이 사랑을 통해 가질 수 있는 것은 서로에 대한 기억뿐이다. 여자가 독일병사를 느베르로 기억하는 것처럼 이 둘은 서로를 히로시마와 느베르로 기억함으로써 언제나 각자의 추억 속에서 그 기억을 잃지 않는 한 불멸할 것이다.&nbsp;&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139/71/cover150/325243343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1397123</link></image></item><item><author>설표</author><category>영상</category><title>견고한 과거의 성을 가득 채운 무한한 현재들 - 알랭 레네,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를 보고 -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45</link><pubDate>Sun, 30 Nov 2014 02:3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4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154132347&TPaperId=723744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32/51/coveroff/915413234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154132347&TPaperId=723744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a><br/>알랭 레네 감독, 사샤 피토에프 외 출연 / 키노필름 / 2010년 12월<br/></td></tr></table><br/>&nbsp;<br><br>견고한 과거의 성을 가득 채운 무한한 현재들 - 알랭 레네,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를 보고&nbsp;&nbsp;&nbsp;&nbsp;『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를 보는 것은 미궁처럼 이어진 부조리한 꿈속을 헤엄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수수께끼 같은 특징에도 불구하고 매우 실험적이고 흥미로운 작품이다. 우선 아름답고 몽환적인 카메라의 시선이나 움직임이 무척 유려하고, 고풍스러운 대저택과 그 안을 채우는 사물들이 꽤나 감각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매혹적인 것은 영화가 제시하는 독특한 시간이미지이다. 그 시간이미지는 미궁이기도 하며 동시에 부조리한 꿈이기도 하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을 원작으로 삼은 이 작품은 카사레스가 소설 안에서 보인 환상적 이미지와 현실적 이미지의 혼동을 근사한 유럽적 분위기로 재탄생시켰다. 이미지의 혼동이라는 테마를 물려받아 마찬가지로 관객들에게 혼동을 불러일으키는 이 영화를 보면서 논리적으로 이야기의 전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이 영화가 포착하는 시간이미지는 더 강렬해지는데, 전개의 비논리성이 다소 정적으로 보이는 인물들의 움직임과 상당히 대조적이기 때문이다.&nbsp;&nbsp; 이 영화에서 우리는 시간의 방향성을 종잡을 수 없다. 무엇이 어느 것의 앞에 위치하고, 무엇이 어느 것의 뒤에 위치하는지 알기 위해서 이 영화를 백 번 돌려본다 해도 아마 명확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여자를 만났다고 주장하는 남자 X의 진술 속에 펼쳐지는 많은 이야기들과 여자 A의 끊임없는 부정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진실로 일어난 일이고 무엇이 단순한 가정 혹은 짐작에 불과한 일인지 파악해 낼 수 없다. 이렇게 관객이 이 영화 안에서 길을 잃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영화 속에서 제시되는 이미지들의 묘사적인 성격 때문이다. 이러한 묘사되는 이미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 바로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인 알랭 로브 그리예인데, 그는 남자주인공 X의 내레이션을 통해 진실로 있을지도 모를 사물들조차 무색하게 지워버릴 정도로 세부적인 기억의 묘사를 시도한다. X는 A에게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기억들을 묘사하는데, 그 묘사는 심지어 가끔 제시되는 이미지와도 불일치한다. 이러한 불일치를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X의 진술과는 달리 열려져 있는 문 앞에 A가 서있는 장면이다. X는 나타나는 이미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호소하기 위해 내레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문은 닫혀 있었다고 애타게 외친다. 그의 간절한 내레이션을 듣는 관객은 그 때쯤이면 도대체 이 엇갈리는 진술 속에 존재하는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게 되어 영화의 다음 장면을 기다리게 된다.&nbsp;&nbsp; 그러나 진실이라는 것은 진실이 아닌 것만큼이나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끊임없는 불일치와 모호함 속에서 이 영화의 모든 장면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실이지 않느냐는 지표를 상실한지 오래이다. 이 영화의 이미지들은 식별불가능성의 지점에 도달해 있다. 그렇기에 관객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이미지들은 현재에 진행되는 일이며 동시에 과거의 일이기도 하고,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 된다. 이러한 끊임없는 분열이 바로 이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진실에의 갈증을 느끼게 하고, 동시에 헤어 나올 수 없는 미궁에 빠진 느낌을 갖게 한다.&nbsp;&nbsp; 이 영화가 갖는 식별불가능성의 지점을 반짝이듯 보이는 장면은 영화의 맨 처음, 연극 장면에서부터 제시된다. 관객으로서는 놓치기 매우 쉽지만, 작품 안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인공들의 대사는 연극의 대사와 일치하며 주인공들의 밀회의 공간인 대저택의 공원 역시 바로 연극의 배경으로 제시된다. 이 연극 장면은 앞으로의 영화 전체의 줄거리를 압축적으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잠재적인 이미지이며 동시에 상영되고 있는 연극이라는 점에서는 현실적인 이미지이다. 이렇게 이 영화 안에서 현실적 이미지와 잠재적 이미지는 합착되어 있는데, 그렇기에 이 장면은 결정 이미지로 기능한다. 이 연극 장면은 마치 거울과 같은데, 영화라는 작업 안에 다시 연극이라는 작업이 내포되어 있는 상태로 영화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결정이미지를 통해 관객은 단순히 등장인물들끼리의 진술에서만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 속의 사건 그 자체들 속에서도 불일치와 식별불가능성이 발견된다는 점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대사의 일치는 기묘하게도 연극과 영화 속의 두 핵심주인공에서만 일치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들의 지나가는 대사 역시 그냥 흘릴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장면에서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와 닮아있거나 혹은 동일하다.&nbsp;&nbsp; 이렇게 영화 전반에 이미지들의 혼동이 들어가 있는 이유는 로브 그리예와 알랭 레네의 시간을 주제로 한 만남의 특성이 그대로 영화 속에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감독인 알랭 레네의 경우 전작인 『내 사랑 히로시마』를 통해 현존하는 과거라는 시간이미지의 테마를 보인 바 있다. 그는 끊임없이 분열하는 현재 혹은 과거의 분기점에서 과거의 실존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로브 그리예는 알랭 레네와는 다른 시간이미지를 받아들인다. 그것은 현재의 첨점이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다. 로브 그리예는 현재 혹은 과거의 분기점에서 항상 영원한 현재를 말한다. 그렇기에 그의 현재들에는 연속성이 존재하지 않고, 순간순간이 항상 다채로운 현재로서 마치 현기증을 일으킬 것만치 등장한다. 과거가 아닌 현재로 존재하게 된 이미지들은 다양한 인물들에게 서로 다른 현재를 분배해주고, 그러한 결과로 서로 다른 현재들이 그대로 존재하는 일종의 다우주적인 상황이 초래된다. 상식적으로 공존이 불가능한 영원한 현재들의 공존은 영화 안에서도 여러 예시적 장면들로 상징된다. 우선 가장 기본적으로 X가 A를 알았다 주장하지만 A는 X를 알지 못한다는 모순적인 현재 역시 그러하다. 또한 총소리가 나며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과 달리 그것을 인물들은 부정하고, X가 밀회의 장소에서 도피하다 사고로 죽었음을 암시하는 장면과는 달리 X가 멀쩡히 살아 A와 어디론가 떠나는 후반의 장면들도 예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모순된 암시들은 서로 상반된 상태로 존재하지만 그 어떤 것도 부정되지 않은 상태로 현재라는 정체성을 갖는다.&nbsp;&nbsp; 그러나 말했듯이 이 영화는 로브 그리예만의 것이 아니다. 로브 그리예의 다소 산만할 수도 있는 다채롭고 생명력 넘치는 수많은 현재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온 세계를 방랑하지 않는다. 이 순수한 현재들을 대저택이라는 한 공간에 묶어두는 것은 바로 알랭 레네의 시간 이미지에 대한 해석이라 볼 수 있다. 레네는 시간을 견고하고 웅장하게 서있는 바로크 성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레네의 영화에서 분명히 굳건하게 존재하는 시간을 느낄 수 있다. 이 바로크적 성 안에서 발생한 모든 일들은 마치 퇴적되듯 성 안에 쌓인다. 그러한 기억의 퇴적, 견고하게 존재하는 기억의 정체는 맨 처음 펼쳐지는 연극 대사로도 제시된다.&nbsp;&nbsp; “몇 초만 더, 그것은 응고되어 갑니다. 영원히, 대리석의 과거 속으로. 돌에 새겨진 이 정원처럼. 이 건물, 방들은 이제 버려졌고, 움직이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아마도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이 여전히 지키고 있는 그 많은 복도를 따라서 당신을 만나려고. 가면 같은 얼굴의 울타리를 거쳐서 주의 깊고 냉담한 얼굴들을 거쳐 당신 앞에 선다.” 그리고 연극은 여자배우가 “자, 이제 저는 당신의 것이에요.” 라고 말하며 끝난다.&nbsp;&nbsp;&nbsp;성 안에 쌓이는 기억들은 무엇일까? 그 기억들은 바로 성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 모든 현재들일 것이다. 알랭 레네가 제시하는 시간의 견고한 성 안에서 로브 그리예의 무한한 현재들이 마치 유령처럼 저택을 돌아다닌다. 그러므로 음산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음악이 영화 전체에서 반복되는 것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카메라는 이 성 안에 퇴적될 기억들을 하나라도 더 담기 위해 사람들의 대화를 열심히 쳐다보며, 초반에 대화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순간적으로 멈추기까지 한다. 그들의 대화는 서로 닮았으며, 그들이 겪는 만남도 서로 유사한 데가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성일지도 모르며, 이 영화 안에서 제시되는 이미지들은 성의 기억들일지도 모르겠다.&nbsp;&nbsp;&nbsp; 알랭 레네와 로브 그리예의 시간 이미지에 대한 관점이 달랐다 해도 그들의 합작이 이런 근사한 이야기, 공간, 그리고 기억이미지들을 제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필시 현재와 과거가 아무리 다른 존재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본 정체에 있어서는 베르그송의 생각처럼 동일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르는 영화 속의 성은 시간이 지날 때마다 현실이자 과거인 방문객들의 기억들을 자신의 내면에 퇴적시킨다. 그렇기에 처음 보면 길을 잃는 것이 불가능이라 생각할 정도로 직선의 공간인 성은 자신의 응고된 기억을 엿보려는 자들을 퇴적된 기억의 조각들과 화강암의 포석들 사이에서 미아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영화는 다소 장난스럽게도, “당신은 이제 길을 잃어버렸다, 영원히. 깊은 밤에, 나와 함께.” 라며 막을 내린다.&nbsp;&nbsp;&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32/51/cover150/915413234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325164</link></image></item><item><author>설표</author><category>영상</category><title>영화 '인사이드 르윈' - [인사이드 르윈]</title><link>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39</link><pubDate>Sun, 30 Nov 2014 02: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3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333430431&TPaperId=723743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815/99/coveroff/933343043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333430431&TPaperId=723743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인사이드 르윈</a><br/>조엘 코엔 외 감독, 저스틴 팀버레이크 (Justin Timberlake) 외 출연 / 콘텐츠게이트 / 2014년 10월<br/></td></tr></table><br/>내용 있습니다.<br><br>1.&nbsp;&nbsp;&nbsp; 포크송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주인공 말부터 맞더군요. 듣다보니 이 노래가 저 노래 같고, 저 노래가 이 노래 같은 현상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크게 상관 없이 정말 좋은 노래가 개인적으로 세 곡이었습니다.&nbsp;&nbsp; 제일 좋은 곡은 Hang me ~ Oh, hang me 네요. 구슬픈 선율이 르윈의 '비참한' 인생 같아 제 맘이 시큰해졌습니다. 코 끝이 짜한 느낌 들게 만드는 불쌍한 노래지만, 단순히 불쌍하다고만 표현하면 그 곡에 미안해져요. 콧소리 담긴 오스카 아이작의 인생을 보고 나면 왜인지 이해되는 가사가 별 볼일 없는 사람 마음을 더 울리기도 합니다.&nbsp; 그 다음으로 좋은 곡은 Please~mr.kennedy네요. ㅎㅎ 이건 저도 듣자마자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단 웃기긴 하잖아요. 중간중간에 목소리 넣는 건장한 청년의 Outer! Space!가 진지살까지 더해져서 말이죠. 저스틴 팀버레이크는 근데 정말 몇 분 나오더군요. 그래도 나름 의미 있는 역할이긴 하지만.&nbsp; 원래는 둘이서 부르다가 혼자 되어 불러 더 처량해진 Fare thee well도 좋았어요. 뭐 더 할 말은 없고, 이것도 가사가 좋더군요.&nbsp;&nbsp;&nbsp;2.&nbsp;&nbsp;&nbsp; 한 번 영화를 보고 나면 르윈 데이비스란 사람이 뭐하고 사는 놈인지 알 수 있게 되는, 그런 영화인 것 같아요. 앨범 제목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가 제목인가 싶었습니다. 맨 처음 나오는 부분이 뒤에도 반복되면서 그 인간이 왜 그런 소리 들었고, 왜 그런 취급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니까요. 게다가 그 인간이 어떤 면에선 참 한심하고 어떤 면에선 동시에 불쌍한 인간이란 것도 알게 되었죠. 캐리 멀리건 역의 배우가 거의 독기 품다시피 말한 것처럼 그 사람이 적어도 여자에 관련해 건드린 것들은 좋게 풀린 일이 없더군요. 자기 아이가 있다는 것을 낙태하려 했던 산부인과 의사한테 듣는 심정은 어떤 것일까요? 아마 허탈하겠죠. 로맨스 영화들의 공식과는 철저히 먼.&nbsp; 이 영화는 영화답지 않죠. 주인공도 고전적인 면에선 주인공답지 않아요. 어중간한 재능을 가진 것으로 나오죠. 그런 주제에 자신만의 기준은 너무나도 확고해서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음악이 좋다고 음악을 하지만 음악이 자기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끔찍한 짝사랑을 보는 느낌이기도 해요. 개인적으로 저는 제 처지가 이입되어서, 요 근래에 본 영화 중 가장 비극적이면서 울림을 주었어요. 대박을 칠 음악의 저작권료보다도 현실의 돈 한 푼이 더 급해서 다른 선택을 내리기도 하고, 남의 고양이 잘못 주워서 아주머니 비명 지르게 만들고. 그나마 자기들 거두어주시는 착한 교수님 부부 아니면 잠잘 데도 거의 없는 형편이죠.&nbsp;&nbsp;3.&nbsp;&nbsp; 게다가 그런 주제에 죄책감까지.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자기 애 가진 여자가 있는 동네쪽으로 가보지도 못하고 계속 가던 길에 지나가던 괴물체(고양이 형상) 보고 급정거하게 된 그에게 뭔가 연민이 들더군요. 참 이상한 일이에요. 아마 현실이든, 영화에서든 자기가 주워온 고양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자기 애 가진 여자들의 애도 그냥 쓱쓱 지우게 만드는 그ㅡ런 남자 이야기를 들었다면 불쌍하긴 뭐가 불쌍하나 싶었을 거에요. 그런데 그래도 불쌍하더군요. 그리 살다가 타임즈에서 온 비평가한테 좋은 평을 받아서 대박 가수가 되는 꿈 ...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영화 안에서 그의 그러한 꿈은 정말 말 그대로 잠자며 드는 꿈 같은 일일 겁니다.&nbsp; 그리고 그게 어른이 된 사람들한테 대다수 일어나는 일들일 거에요. TV에 나오는 사람들, 아니면 영화 속의 짐과 진처럼 어떤 식으로도 어떤 위치를 가진 사람들은 나랑 다른 인생, 적어도 나보단 성공한 인생들이죠. 아주 잘된 사례들은 TV에 나오거나 엄친아의 경우처럼 주위 사람 건너건너에게 질투심과 열등감을 유발시켜 잘된 얘기 듣는 사람 마음 따끔해지게 만들겠죠. 아니 저 나사 빠진 놈이 대체 뭐가 나보다 낫다는 거지? 그렇지만 그건 나만의 관점이고, 냉정한 세상은 르윈 데이비스 같은 사람들에게 죽은 사람과 다시 합치라는 조언이나 하죠. 그리고 말씀드린 것처럼 아마 그게 대다수 인생일 겁니다. 안 될 놈은 안 되는 그런 불공평하고, 비참한 인생 말이죠. 그런데 그런 르윈 데이비스이기 때문에 그의 노래가 더 슬프게 들려오고, 그를 다룬 이 코엔 형제의 영화가 영화의 수많은 영웅적인 주인공들이 아닌, 현실 속의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는 묘한 생각이 드는 것일 터입니다.&nbsp;&nbsp;&nbsp;4.&nbsp;&nbsp;&nbsp; 아주 잘 만든 영화에요. 지금도 이 영화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아련해지네요. 고양이가 지하철 바깥을 보는 그 어린아이 같던 모습이 잔잔하게 남습니다. 코엔 형제는 이 고양이 배우를 다루는 게 꽤나 힘들었다고 하지만요. 고양이 대역을 세 마리 정도 썼다고 하더라고요. 매우 겁 많은 고양이 키우는 사람으로서 저는 이 세상에 저렇게 잘 안겨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도 몇 초라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고양이가 존재한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nbsp;<br style="margin: 0px; padding: 0px;"><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815/99/cover150/933343043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8159949</link></image></item><item><author>설표</author><category>영상</category><title>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title><link>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35</link><pubDate>Sun, 30 Nov 2014 02: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3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306455186&TPaperId=723743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19dvd_75cover.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306455186&TPaperId=723743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a><br/>마틴 스콜세지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4년 05월<br/></td></tr></table><br/><br>&nbsp;&nbsp; &nbsp;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상을 잘 못 받는 것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크게 안타까워 하진 않습니다. 분명 매력적인 배우인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그 사람의 매력에 빠져 주연한 영화들을 일일이 다 찾아본 경험이 있으니까요. [아이언 마스크]를 보고 갑자기 정나미가 뚝 떨어져서 더 안 찾아보긴 했지만요. 어쨌든 개인적으로 이름이 알려질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이효리씨처럼 이름이 독특해서요. 이게 아마 보시는 분들 입장에선 무슨 얼토당토 않는 소리인가 싶으시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얼토당토 않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이름이 독특하면서 예쁜 사람은 그 이름 값을 하지 않나 싶어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니, 너무 예술적인 이름 아닙니까.&nbsp;&nbsp; &nbsp;마틴 스콜세지의 페르소나로 그의 작품들에 열심히 등장하면서 자기복제에 가까우면서 묘하게 반복적인 기능공 연기를 하는 그이입니다. 저는 냉정하게 말씀 드리자면, 그가 절치부심하거나 대오각성을 하지 않는 이상, 소위 '연기를 인정받는 상'을 받긴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연기 못한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에요. 잘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비슷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모든 배역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개인의 아우라가 사라지지 않기도 하는 감상이 들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신 쟝고에서의 악역도 저는 사실 다른 작품들에서의 그가 보여준 연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디카프리오가 옛날의 고운 얼굴이 사라지고 난 다음 거친 역할들을 많이 맡기 시작했는데, 저는 그 거친 역할들 자체가 서로 유사한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nbsp; &nbsp;배우에 대한 제 개인적 감상이 사족으로 먼저 들어가는 이유는 이 배우가 보여준 그 비슷비슷한 연기들 속에서도 저는 이번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서 보여준 모습이 가장 훌륭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명확한 이유는 왜인지 잘 모르겠어요. 마약에 취해서 엉금엉금 기어 고급 차(기종이 무엇인지 모르겠네요)에 올라타려고 발악하는 모습 보며 저는 레오나르도 고생했네를 연발 외쳤거든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두번째 마누라가 그냥 건성으로 마지막 섹스를 해주는 장면에서 완전 사랑에 도취된 채 삽입하는 연기 장면이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연기를 그렇게 끔찍하게 잘 이해하며 영상에 표현하던지. 조단 벨포트 역으로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어요. 조단 벨포트의 정상과 몰락의 아주 세밀한 감정과 소회가 그의 얼굴에 분명 비쳐지고 있었습니다.&nbsp;&nbsp; &nbsp;이 영화는 금융계에서 도덕 윤리따위는 잠시 안드로메다로 집어치우고 마약과 섹스를 일삼으며 천문학적인 부를 누리는 남성들을 다룹니다. 섹스와 마약이 정말 오질나게도 나오더군요. 남성이 중점적으로 많이 나오긴 합니다만, 굳이 언급하자면 이곳에 나오는 여성들의 모습도 쉽고 거칠게 표현하면 속물들이죠. 조단 벨포트는 자본주의의 허락 받지 못한 사이비 교주 중 하나였습니다만 그의 신도들은 교주와 큰 차이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교주는 이렇게 말하지요. 나는 부자로 사는 삶이 좋다. 부자가 싫다고 말하는 새끼들은 다 맥도날드 가서 서빙 일이나 해라. 그러므로 우리는 샤넬 옷을 입고 벤츠를 몰면 되는 겁니다. &nbsp;마치 올림픽 경기를 뛰듯 연속적으로 쾌락 속을 종횡무진하며 자극과 아드레날린이 폭발적으로 분비되는 바닷 속에 침몰하듯이 말이죠. 그러나 한때 배우 김정은 씨가 찍은 화제의 광고였던 '여러분 모두 부자되세요'를 생각해보면, 한국이든 어디든 그러한 소비행태가 권장되는 사태는 놀랍지 않은 일이죠.&nbsp; &nbsp;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중반부터 극심한 피곤함을 느꼈습니다. 오르가즘이든 고통을 주는 자극이든 무엇이 한계치에 도달하면 그 감각마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그 선에 도달해버린 것이죠. 이곳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절 피곤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눈을 부릅 뜨고 이 몰락을 차근차근 보았습니다. 실화라는 것을 강조하는 영화인데, 영화는 그저 영화 같습니다. 비정상적으로 예쁜 여자들과 살면서 보기도 힘든 요트들, 집들, 물건들, 파티가 나오고, 무슨 범죄 영화에서나 볼 법한 마약들이 쏟아져 나오죠. 우리가 예사로 들어본 마약들은 이 사람들 기준으로 마약 취급도 못 받는 것이고요. 이러한 삶에 젖어든 사람들에게 그 모든 삶이 멈춘다면 삶은 재미없는 무엇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조단도 친구인 도니한테 마약을 끊고, 알코올을 중단한 다음 그렇게 말하죠. 인생이 아주 재미없어졌다고요. 인생은 사실 원래 재미없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돈으로 삶을 영화처럼 살아온 거죠.&nbsp;&nbsp; &nbsp;사실 몇 달 사이에 어떤 분이 (혹시 이 글을 보실지 모르겠네요. 듀나게시판 분이라서요.) 아주 인상적인 말을 해주셨습니다. 누군가를 거짓말 하게 만드는 상황에 빠지게 해놓고 그 누군가에게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다그치는 것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말씀이셨어요. 어쩌다 나온 이야기였지만, 저는 그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깊이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 말씀이 생각났어요.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바로 함정 그 자체가 아닌가 싶어서요. 부자가 되는 것이 다들 좋다고 말해서 부자가 되었다면, 그게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요? 도덕과 윤리는 원래 승리자들한테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조약에 불과한 것 아니었습니까? 조단과 친구들에게 사기꾼 말에 걸려 넘어지는 그 어리숙한 놈이 그저 문제 있는 호구입니다.&nbsp; &nbsp;만약 지금 당장의 저에게 조단 벨포트처럼 살 것이냐, 지금처럼 살아갈 것이냐고 묻는다면 제가 당차게 나는 지금의 나 자신이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제가 확실한 것은 있습니다. 만약 제가 조단 벨포트의 삶을 조금이라도 맛본다면, 아마 저는 지금처럼 살 것이냐 조단 벨포트처럼 살 것이냐의 문제에서 조단 벨포트의 삶을 선택할 확률이 더 높아질 거에요. 그런데 이런 유치한 양자택일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사는 사회는 우리에게 그러한 자극의 힘을 끝없이 제공하며 유혹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도처에 놓여 있습니다. 자본은 우리에게 변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주며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으며 안온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죠. 나와 내 가족, 내 친구들'만' 잘 살면 됩니다. 다른 사람까지 구조해 줄 정도로 배가 넓지 못하기 때문이죠. 아니, 애초에 그 사람들을 쫓아내야 배에 자리가 나는 구조가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조단 벨포트가 과연 '죄인'이냐는 문제에 있어 쉽게 입을 뗄 수 없습니다. 물론 법적으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가치라고 불리는 윤리적 기준에서도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저 평범한 저란 인간, 영화의 마지막, 부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저 자신을 봅니다. 그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 부추기는 사회, 이 안에서 살아가는 한 조단 벨포트의 삶이 언제 내 삶이 될지 모르죠.&nbsp;&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img/19dvd_150cover.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18449</link></image></item><item><author>설표</author><category>영상</category><title>영화 '잔 다르크의 수난' - [잔다르크의 수난 - [초특가판]]</title><link>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33</link><pubDate>Sun, 30 Nov 2014 02:3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3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097757398&TPaperId=723743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6/79/coveroff/9097757398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097757398&TPaperId=723743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잔다르크의 수난 - [초특가판]</a><br/>Carl Theodor Dreyer 감독 / 스카이시네마 / 2004년 02월<br/></td></tr></table><br/>&nbsp;&nbsp; &nbsp; 잔 다르크의 얼굴이 카메라의 시선에 커다랗게 잠긴다. 빛나는 성스러움이 수수한 얼굴을 채운다. 곧 하얀 대사가 검은 화면 위에 고혹히 등장한다.&nbsp; &nbsp; “은총 속에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제게 계속 은총을 내려주실 것이고, 은총 속에 있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제게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nbsp; &nbsp; 현재 시중에 돌아다니는 이 영화의 판본은 맨 처음의 것은 아니다. 영화의 첫 부분인 해설 자막은 이 영화가 겪어야 했던 수난을 설명한다. 어떻게 보면 영화 ‘스타워즈’ 도입부분과 비슷하다. 방식 자체는 있었던 일들에 대해 단순히 나열하는 평범한 방식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마치 잔 다르크의 화신처럼 검열 받은 영화의 불운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설명에 따르면 이 영화의 초기 판본들은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성녀가 죽은 것처럼 장렬하게 화형 당했다.&nbsp;&nbsp; &nbsp; 그리고 어느 날, 80년대에 들어서야 노르웨이의 정신병원에서 잘 보존된 덴마크 판본이 발견되었다. 신의 가호가 있었던 걸까? 영성으로 충만한 이 작품이 세상에서 쫓겨난 자들의 구금된 장롱 속에서 그 야윈 깃털을 숨긴 채 간신히 숨 쉬며 은닉해 있었으니 말이다. 몇몇 조력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드디어 이 영화는 우리의 곁에 날아올 수 있을 만큼 깃털도 자라났다.&nbsp;&nbsp; &nbsp; 하지만 이 영화는 100년 전 만들어졌을 그 당시의 모습 자체로 화석 같이 굳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음악이라는 생생한 변주가 곁들어져 있다. 이 영화가 무성 영화였기 때문에 당시 영화가 상영될 때는 현장에서 음악이 연주되는 방식이었는데, 시중에서 현재 접할 수 있는 이 영화의 판본인 Criterion Collection에서는 리차드 에인혼의 “voices of light”가 배경음악으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 역시 이 판본에 나오는 해설자막에서 확인할 수 있다. 리차드 에인혼의 음악들은 1994년에 만들어졌다. 그의 음악은 이 영화를 위해 태어난 예술적 피조물이기에, 우리는 지금 이 무성영화를 보면서 현대인들의 이 영화에 대한 새로운 음악적 해석을 체험할 수 있다. 칼 드레이어 감독이 어떠한 음악도 배경음악으로 선정한 적이 없다 하더라도 에인혼의 음악은 실로 잔 다르크의 수난이라는 영화를 위해 봉납된 신실한 제물이다.&nbsp;&nbsp; &nbsp; 이 영화를 이야기하며 역사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러한 시도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하지 않았을까? 칼 드레이어 감독이 잔 다르크가 치른 전투에서의 수많은 업적을 영화에 형상화하려고 했다 생각하지 않는다. 칼 드레이어 감독을 놀라게 한 것은 고등 교육을 받은 성직자들 앞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낸 소녀 그 자체였다. 이 영화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은 오히려 잘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배경이다. 역사적 사실을 끊임없이 주지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화 속에서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본다. 인물들에 대한 강렬한 클로즈업은 신의 의지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교회와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가녀린 소녀의 대립만을 보인다. 그녀의 공적에 대해선 언급도 되지 않으므로,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더욱 무력하고 평범해 보인다.&nbsp;&nbsp; &nbsp; 영화가 비추는 소녀의 얼굴과 성직자의 얼굴 주름들은 영화 전체에서 역사적인, 사회적인 맥락을 지워버린다. 우리는 인간인 그들의 감정과 그들의 속마음이라는 미시적 차원에 주목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참된 대립각은 성직자들과 잔 다르크만이다. 내면의 감정만이 핵심으로 부상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의 국적이 아닌 권위자들과 권위 없는 한 소녀의 대화이다. 칼 드레이어 감독이 가장 기본으로 한 것 역시 심문 과정에서 이루어진 대화록이며, 이 대화록에서 보여준 잔 다르크의 신성함은 자신을 짓누르는 권위에 맞서 대항하는, 그녀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에게서는 도출될 수 없는, 다른 무언가로부터 발현되는 내적 힘이다.&nbsp;&nbsp; &nbsp; 성직자들은 잔 다르크를 조롱하고, 가히 침을 뱉듯 그녀를 이단이라 비난한다. 잔 다르크, 그녀는 그리스도교 정통파 성직자들에게 괴물이다. 서커스의 야수이며,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비천한 여자다.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묻자 잔 다르크는 손가락으로 떠듬떠듬 숫자를 센다. 성직자들이 모두 기가 막혀 한다. 주기도문도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낭송조차 하지 못한다.&nbsp;&nbsp; &nbsp; “하나님이 널 보내셨다고?”&nbsp; &nbsp; 그들의 생각에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적어도 부름이라도 받기 위해서 인간에게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유식해야 하며, 교육 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남성 옷을 입는 것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남자로 우선 태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주제에, 잔 다르크는 감히 수많은 질문에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성직자들이 술렁인다. 잔 다르크에게 미카엘을 보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그녀가 보았다는 천사의 존재와 하느님의 형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이 무신론자처럼 보일 때도 있다. 성직자들은 소녀 하나를 앞에 두고 몰락시키기 위해 머리를 맞댄다. 그들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내면 안에서 끓어오르는 말들을 하나하나 말하지만, 성직자들 앞에서 흔들리는 두려움까지 숨기지는 못한다. 영혼의 구원을 바란다는 잔 다르크를 향해 성직자들은 신성모독을 외치는데, 그들은 잔 다르크가 신과 영접했다는 사실을 완벽히 부인한다.&nbsp; &nbsp; 이 나이 많고 많이 배운 남성 성직자들의 모습이 문제시되는 이유는 그들이 과연 성직자인지 세속인인지 파악하기가 힘들다는 점에 있다. 그들이 말하는 신은 그들이 내세우는 가상의 관념으로 떨어진지 오래이며, 그들 안에서 진실한 신앙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들한테 신의 진리가 먼저인지, 아니면 현실의 복잡한 정치 관계가 먼저인지? 게다가 그들은 신을 보았다고 말하는 잔 다르크를 부정하는데, 그 모습이 시기 어린 질투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그들의 의심은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일 수도 있다. 신이 대체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여자에게 강림하여 그녀의 조국에 대해 지시를 내리고 그녀에게 길을 제시하였단 말인가? 만약 어떤 길이 필요했다면,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정진한 남성 고위 성직자들에게는 왜 다가가지 않으셨단 말인가? 이성적으로, 인간의 논리와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nbsp;&nbsp; &nbsp; 그러나 만약 신이라는 것이 진정 있다면, 신이 대체 언제부터 미천한 인간에게 그 뜻을 가르쳐주려 했단 말인가? 신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기는 한단 말인가? 그런 것이 가능했던 적은 있는가? 성직자들은 결국 모든 것을 자신들의 잣대로 판단하기에 이르며 결국 그들이 그녀에게 부여하는 괘씸죄는 정치적이고 인간적이다. 그녀를 파괴하는 이유는 남성의 권위에 도전하여 여성이 남성의 옷을 입고 남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는 사회적인 것, 그리고 자신들의 세속적 노력과 반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이 무지한 여성이 신을 만났다는 참을 수 없는 ‘불경함’ 때문이다.&nbsp;&nbsp; &nbsp; 그들은 신을 보지 못하고, 천사를 보지 못한다. 성직자들은 그녀에게 자신들의 신을 강요한다. 자신들을 거치지 않은 그녀의 신은 과연 신인가? 그들은 그녀에게 착한 천사와 타락한 천사를 구별할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가능한가? 그들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이 타락한 지상에서만큼은 권력을 잡은 신의 대리자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이 내려왔다 한들 그 사실을 그들은 현실적인 이유로 인정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정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신을 진심으로 신실하게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가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서 변질된지 오래이기 때문에, 유일한 길은 그녀를 죄인으로 모는 것뿐이다. 몇몇 양심적이고, 진실한 성직자들만이 자신들의 권위에서 벗어나 그녀를 도와주려 노력하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다. 다른 성직자들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성직자들은 신이 있는 하늘로 닿기에는 지상의 인간 사회의 굴레에 지독히도 묶여 버렸다. 그들은 지상의 시련을 통과하는 데 실패했다.&nbsp;&nbsp; &nbsp; “학식 있는 박사님들이 과연 잔 다르크 너보다 현명하단 말이냐.”&nbsp;&nbsp; &nbsp; 잔 다르크는 이렇게 대답한다.&nbsp;&nbsp; &nbsp; “하지만 신이 더 현명하십니다!”&nbsp; &nbsp; 성직자들은 잔 다르크를 굴복시키려 한다. 그들은 서로 끊임없이 대치한다. 잔 다르크가 성직자들을 향해 한 명씩 악마라고 가리키며 비난하는 강력한 정서의 폭발은, 무성영화의 역사 안에서도 손꼽히는 명장면일 것이다.&nbsp;&nbsp; &nbsp; 전쟁영웅인 잔 다르크가 이 핍박 속에서 언제나 꿋꿋한 모습만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칼 드레이어 감독은 그녀를 너무나도 인간적인 존재로, 끝없이 절망하고 눈물 흘리는 소녀로 그린다. 그녀가 고통 앞에서 의연함만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강력한 철의 여인을 기대한 사람들로서는 실망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게 그녀가 고난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에 그녀의 숭고한 내면의 전장이 가치를 갖는다. 그녀의 표정에서 우리는 대사와 언어가 보여줄 수 없는 심연을 엿보게 되고, 그러한 지경에서 희극배우 마리아 팔코네티는 잔 다르크가 되어 유래 없는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탈바꿈한다.&nbsp; &nbsp; 이어서 소녀를 윽박지르는 교회의 위협은 절정에 다다른다. 그들은 그녀의 왕, 조국을 들먹이며 그녀가 내면의 소리를 외면할 것을 종용한다. 팔코네티의 얼굴에서 이성이 사라진다. 마침내 잔 다르크가 굴복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 성직자들은 그녀를 파문시키지 않고, 그들의 하나님, 과연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이 있기는 한 것인지 모를 그들의 보호 안에 죄인의 이름으로 잔 다르크를 수감시킨다. 부조리에 반감을 갖는 이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일반 백성들이다.&nbsp;&nbsp; &nbsp; 삭발한 그녀의 머리카락, 그리고 눈동자에 어린 좌절의 눈물. 잔 다르크는 영화 내내 새처럼 쉼 없이 울지만, 이 장면만큼 그녀가 우는 모습이 가련해 보이는 장면은 또 없다. 잘린 머리카락을 보며 그녀가 슬퍼하는 이유는 이내 밝혀지듯 자신의 마음의 목소리, 즉 신의 말씀을 두려움 앞에 거절한 자기 자신에 대한 모멸감 때문이었다. 곧 재판관들을 다시 소집한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밝힌다. 그녀가 고백한 죄는 바로 거짓말, 신에 대한 불복종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들었던 말들을 신의 음성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신이 아니라 부정하지 못한다. 죽음이 결국 그녀를 꺾지 못한 것이다.&nbsp; &nbsp; 이 세상과 타협하지 못한 그녀의 비극에서 바로 그녀의 성스러움이 태어난다. 그녀는 못 배웠고, 비천하고, 죽음을 무서워하는 보통의 인간이다. 곧 이제 화형 당한다는 말에 잔 다르크의 오른쪽 뺨이 근육경련을 일으킨다. 그녀를 도와주던 성직자는 그녀에게 하나님의 말을 아직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질문한다. 하나님의 사고방식이 우리와 다르다고, 자신이 그의 자식이며, 신이 자신의 승리와 순교, 죽음까지 약속했다고 말하는 잔 다르크.&nbsp;&nbsp; &nbsp; 성직자들이 마지막 미사를 준비한다. 그녀를 경멸했던 자들도 이제 함부로 다시 비웃지 못한다. 그녀는 마지막 고해, 미사를 받는다. 잔 다르크를 음해하고자 했던 성직자가 그녀의 미사 장면을 몰래 훔쳐본다. 그녀의 신실하고 순수한 믿음이 부러웠을까?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심지어 자격을 갖추는 것까지도 쉬운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랑은 항상 실천이 어렵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결국은 그 남자의 말이 아닌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듯이.&nbsp; &nbsp; 잔 다르크의 죽음이 다가오면서 민중들이 그녀의 죽음을 보기 위해 모여든다. 잔 다르크의 화형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그녀는 십자가를 끌어안고 너무 오랜 고통을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린다. 끝까지 주님을 찾는 그녀, 아이가 젖을 물다가 갑자기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다시 젖을 문다. 신이 그녀를 보고 있을까? 십자가조차 빼앗겨지고, 그녀는 끝없이 울며 화형대 앞에 혼자가 된다. 교회 지붕의 끝, 십자가에서 새들이 날아가고, 나무 장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녀가 죽는 걸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 눈물조차 뜨거운 열기를 식혀 잔 다르크를 지상에서 구원 받게 해줄 수는 없었다.&nbsp;&nbsp; &nbsp; 민중의 누군가가 성녀를 화형 시켰다며 소리를 내지르고, 성의 병력은 민중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교회의 이름으로 죄인이 된 성녀를 성녀라 불렀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폭압의 상황에 놓인다. 계속 불타는 그녀의 시신을 앞에 두고 마지막, 혼란의 대치 상황이 발생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그녀의 위대함을 칭송하며, 그녀가 프랑스인들의 마음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 찬양한다. 나 같은 경우 종교인이 아니기에 그녀가 보고 들은 것, 혹은 그러했다고 믿은 것에 대해서는 사실 알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요컨대 그녀가 신의 이름을 걸고 나온 광인이었는지, 아니면 진정한 기독교의 수호자였는지 말이다. 기독교적 신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나의 논평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nbsp; &nbsp; 다만 칼 드레이어 감독의 영화에 나온 그녀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그가 형상화한 대화록 안에서의 잔 다크르가 어떤 인물인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잔 다르크가 진정 신이라는 존재를 순수하게 믿은 사람이며, 지상의 모든 욕망과 공포라는 감정들로부터 연유되는 시련들을 통과하여 자신이 가야 한다 믿은 곳으로 갔다는 사실 말이다. 한 특정 종교의 힘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그럴 거면 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왜 자신들이 믿는 신의 길을 따르는 데 실패한단 말인가?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기 자신의 ‘도덕률’, 내면의 소리,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믿어냈다는 점이다. 그게 신이든 마귀든 무엇이든 다른 인간들의 억압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바늘 같이 소름끼치는 눈치를 받으면서, 이 사람들이 나를 해코지 할까봐 무서워 덜덜 떨게 되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내면을 지켜낸다는 것, 그 행위는 종교를 믿든 안 믿든 해내기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nbsp;&nbsp; &nbsp; 잔 다르크, 그녀는 그것을 해낸 사람 중 한 명이다. 내가 그녀가 믿은 종교를 믿지 않는다 해서, 그녀가 나에게 성녀가 아닐 이유는 없다. 단지 그녀가 무식하고 순수해서 가능했던 일인 걸까? 글쎄, 원래 가장 순수한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에 가장 솔직하기 마련이다.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그런 문제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대체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는지? 멀리 안 가서도 개인성이 역사상 가장 존중 받는 지금의 시대에서도 우리 모두 잘못된 일이란 걸 알아도 대부분 다 군말 없이 까라면 까라는 대로 하지 않나. 종교의 이름이든 무엇이든 아닌 걸 아니라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 용기가 필요한 일은 항상 그 자체로 성스럽다. 그리고 억압이 크면 클수록, 지켜내기 어려운 일이면 어려운 일일수록 그 성스러움을 기억하는 사람의 숫자는 더욱 늘어나는 것이 이치이다. 칼 드레이어도 그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잔 다르크의 수난'이라는 놀라운 성스러움을 기억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되는 것처럼.]]></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6/79/cover150/9097757398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67952</link></image></item><item><author>설표</author><category>영상</category><title>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  이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이여, 그대들에게 축배를!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 일반판]</title><link>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31</link><pubDate>Sun, 30 Nov 2014 02: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3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D002832101&TPaperId=723743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484/8/coveroff/940462907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D002832101&TPaperId=723743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 일반판</a><br/>웨스 앤더슨 감독, 에드워드 노튼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4년 08월<br/></td></tr></table><br/><br>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nbsp;- &nbsp;이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이여,&nbsp;그대들에게 축배를!((전반적으로 내용이 아주아주아주 상세합니다.))&nbsp;&nbsp;&nbsp; &nbsp; &nbsp; 묘지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간 여자가 한 동상 앞에서 책을 읽기 시작하듯이,&nbsp;영화가 시작하기&nbsp;10분 전 급하게 영화표를 한 장 샀다.&nbsp;이미 보았던 영화지만,&nbsp;다시 보아야겠다는 필요성에서였다.&nbsp;어떻게 딱 그렇게 시간이 났는지.&nbsp;표를 사자마자 읽고 있던 종이꾸러미를 들고 황급히 내 자리에 앉았다.&nbsp;시간은 오후 한시 삼십분,&nbsp;모든 것이 적적한 십삼 시이다.&nbsp;싸늘하게 추운 자리,어두운 조명,&nbsp;언젠가 보았던 파리의 지하묘지 같다.&nbsp;공간에는 시간이 깃들고,&nbsp;그 다음에는 내 기억이 번진다.&nbsp;이 영화관은 수많은 영화들의 묘지,&nbsp;홀로그램 육체가 전시된 영상의 박물관이다.종이꾸러미 위에 놓인 철학자의 이름,&nbsp;집중이 잘 안 되어서 독서는 접었다.&nbsp;한시 사십분,&nbsp;내 신체 안의 욕망이 두런두런 침묵을 잡아먹고 곳곳에 피어오를 때쯤,&nbsp;영화가 시작된다.&nbsp;새로운 세상이 열린다.&nbsp;내가 읽어야 할 새로운 이미지 꾸러미.&nbsp;&nbsp; &nbsp;1985년의 작가는 창작에 대해 이야기한다.&nbsp;창작이란,&nbsp;우리 주변의 인물들의 삶 속 이야기라고.&nbsp;곧 이어질 영상들의 환상성과 가상의 공화국을 고려하면 궁금증이 떠오른다.&nbsp;이 모든 가상적 이야기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그 뻔뻔한 시도는 쓸데없는 무위인가,&nbsp;아니면 당연한 행위인가?&nbsp;그 문제에 대해선 아직 충분히 고민할 여유가 없다.&nbsp;이내 시청자는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소나기에 맞아 죽어갈 소녀처럼 흠뻑 젖게 되니까.&nbsp;&nbsp;&nbsp;1968년의 젊은 작가는 신경쇠약 때문에 다 쇠락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요양 중이다.&nbsp;지식인들이 걸릴 법한 그 신경쇠약의 근원은 무엇인지?&nbsp;그는 우연히 호텔의 주인인 제로 무스타파와 조우한다.&nbsp;눈에 뜨일 우울함을 얼굴 주름들 사이에 깊이 새긴 무스타파의 이국적 풍모가 작가의 시선을 끈다.&nbsp;그들은 곧 편하게 말을 섞고,&nbsp;무스타파는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제공한다.&nbsp;이러한 일이 자연스럽게 가능했던 이유는 젊은 작가가 무스타파에게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nbsp;무스타파도 마찬가지다.&nbsp;그들은 신경쇠약과 같은 우울함을 앓고 있다.&nbsp;&nbsp;어찌 되었든,&nbsp;이야기를 시작한다.&nbsp;&nbsp;1부 무슈 구스타브&nbsp;&nbsp;&nbsp; &nbsp; &nbsp; &nbsp;1932년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미래의 쇠락한 시점과 같은 건축 특징을 공유하지만,&nbsp;발산하고 있는 에너지는 상당히 다르다.&nbsp;이때의 호텔은 아름답고,&nbsp;깔끔하고,&nbsp;우아하고,&nbsp;인기가 많은 장소이다.&nbsp;그리고 그 구심점에는 일류 호텔지배인 무슈 구스타브가 있다.&nbsp;구스타브라는 캐릭터는 자신의 일이 천직인 사람이다.&nbsp;아마 그는 호텔지배인이 아닌 자신을 상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nbsp;타고난 그는 세련된 것을 좋아하고,&nbsp;자신의 미학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관리하고 주도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nbsp;아마 아름답지 않으면 삶에 큰 의미를 두지 못하는 인간 유형일 것이다.&nbsp;그의 미학에는 그의 개성을 반영하는 특정한 취향이 잠재되어 있고,&nbsp;그는 자신의 속물근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나이 들고 돈 많고 권세 있는 귀부인 고객들에게는 카사노바 노릇도 한다.&nbsp;그는 예술가이다.&nbsp;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전형적이고 전문적인 예술가.&nbsp;마치 그림을 그리듯 자신의 구도에 무엇 하나가 맞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사람.&nbsp;클리셰, 진부한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nbsp;심지어 자신의 연인이자 윗사람인 마담&nbsp;D에게도 손톱 색깔에 대해 조언한다.&nbsp;자기 영감이 떠오를 때면 시도 외우고.&nbsp;미학자 나셨다.&nbsp;이쯤 되면 무조건 예뻐야 한다고 총까지 직접 제작 주문한 금자씨 수준이다.&nbsp; &nbsp; &nbsp; 이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보고 배우게 된 제자는 바로 제로이다.&nbsp;전쟁난민인 이 소년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nbsp;institution이라고 표현한다.&nbsp;나야 뭐 영어에 대해 크게 지식 없는 사람이니 영어사전을 참고했는데,&nbsp;소년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어떤 이상적인 배움터로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nbsp;실제로 영화자막을 번역한 사람도 그러한 의미로 옮겨놓았고.&nbsp;자신의 미학을 존중하고,&nbsp;배우고 싶어 하는 어린 학도를 만났는데 어찌 구스타브가 매정하게 내쫓을 수 있으랴.&nbsp;전반적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미학을 가르치는 대학이고,&nbsp;구스타브는 미학과 교수님이며 제로는 도제관계로 배우는 제자 꼴이다.&nbsp;어쨌든,&nbsp;그 때부터 제로는 로비 보이가 되어 구스타브의 곁에서 호텔에 대한 모든 것,&nbsp;아니 정확히 말하면 호텔에 대한 구스타브의&nbsp;'해석'을 배우게 된다.&nbsp; &nbsp; &nbsp; 호텔이라는 사치 공간을 예술로서 창조하고 유지하는 사람들 말고도 음식으로서 예술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다.&nbsp;혀 전반을 자극하는 달달한 버터크림,&nbsp;코에 밀가루를 묻힌,&nbsp;얼굴에 멕시코 모양 점이 있는 아가씨.&nbsp; &nbsp; &nbsp; 아니,&nbsp;그 아가씨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nbsp;잠시의 망설임.&nbsp;지금은,&nbsp;말을 이을 수 없다.&nbsp;&nbsp;2부 마담&nbsp;D&nbsp;&nbsp;&nbsp; &nbsp; &nbsp; 전쟁이 났다고 한다.&nbsp;맙소사,&nbsp;마담&nbsp;D가 죽었다.&nbsp;구스타브는 아끼는 술을 챙겨 기차를 타고 루츠 성을 향해 떠난다.&nbsp;가는 길에도 고양이 오줌 맛 나는 술은 참을 수 없다.&nbsp;우리의 로비보이 제로도 같이 있다.&nbsp;그 둘은 바깥 풍경을 보며 기차를 타고 가는데 어느 수수한 곳에 다다르자 기차가 멈춘다.&nbsp;한 무리의 군인들이 곧 객실로 들어와 그들의 정체를 검열한다.&nbsp;구스타브는 문제가 없지만,&nbsp;제로한테 문제가 있다.&nbsp;개성을 검열하는 시커먼 파시스트 놈들 같으니.&nbsp;유럽 놈들한테는&nbsp;언제나 피부색깔이 문제다.&nbsp;제로를 끌고 나가려는데 구스타브가 격렬히 저항한다.&nbsp;그의 사치품에 대한 열망과 고상함에 대한 욕망과는 어울리지 않는 휴머니즘,&nbsp;그것 역시 구스타브의 천성이다.&nbsp;모를 일이지.&nbsp;어쩌면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사람으로서 배척받는 외부인,&nbsp;아웃사이더의 비통함을 참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nbsp;어찌 되었든 사람은 결국 천성대로 살고,&nbsp;반항하는 구스타브와 제로는 군인 남성들의 무장한 힘에 압도되기 직전이다.&nbsp;그 때,&nbsp;헨켈스가 들어온다.&nbsp; &nbsp; &nbsp; 헨켈스는 어렸을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간 적이 있는 군인이다.&nbsp;그리고 구스타브의 아름다운 돌봄에 감동을 받았던 사람이기도 하다.&nbsp;아름다움은 사람에게 어떠한 신뢰를 보장한다.&nbsp;이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일종의 신분증 같은 것이다.&nbsp;헨켈스는 구스타브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고,&nbsp;그래서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구스타브를 도와준다.&nbsp;글쎄,&nbsp;어떤 이들은 이 구사일생의 상황을 아직까지는 낭만이 통용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는데,&nbsp;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nbsp;후반의 무스타파가 하는 이야기지만,&nbsp;구스타브가 꿈꾸는 세계는 이미 옛날에 죽은 지 오래이다.&nbsp;어쩌면 구스타브가 세상에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사실&nbsp;언제나 그렇다.&nbsp;우리가 꿈꾸는 세상이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nbsp;인간은 단 한 번도 자신이 꿈꾸는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원해 본적 없는 세상에 태어났다.&nbsp;그렇기에 구스타브에게는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 자신의 희망이고,&nbsp;그라는 존재가 추구한 가치의 따스함을 느낀 다른 존재가 그와 그의 동료의 목숨을 구했을 뿐이다.&nbsp; &nbsp; &nbsp; 용케 목숨을 구하고 루츠 성에 입성한 그들은 그 집의 집사 서지 엑스,&nbsp;그리고 죽은 마담&nbsp;D를 만난다.&nbsp;마담&nbsp;D의 시체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배려를 다 한 구스타브는 이제 본격적인 갈등,&nbsp;즉 이야기의 꽃에 접어들게 되는데 이때 들어가는 카메라 구도가 환상적이다.&nbsp; &nbsp; &nbsp; 시체의 옆에 있던 문으로 카메라 시선이 움직여지고,&nbsp;문이 차례로 열리며 카메라가 그 안으로 들어간다.&nbsp;이 이야기가 영화라는,&nbsp;창조라는,&nbsp;인위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예술가의 세심한 붓질이다.&nbsp;케이크를 만들면서 장식을 놓치지 않는 제빵사의 손길이고,&nbsp;리본을 꼭 묶어야 선물이라 믿는 자의 꼼꼼함이다.&nbsp;게다가 이 구도는 단순히 기능적이지 않고,&nbsp;분명히 위험한 인물들과 대면하며 본격적인 갈등으로 진입하는 주인공들의 운명을 알리는 종소리이기도 하다.&nbsp; &nbsp; &nbsp; 호텔 주인의 법적 대리인이자 죽은 마담&nbsp;D의 유언집행인인 변호사 코박스는 곰 조각상 옆에 선다.&nbsp;중후한 그의 앞에는 떡고물을 바라는 수많은 일가친척들이 시체를 노리는 독수리들처럼 허공을 앉은 채 맴돌고 있다.&nbsp;그 중에는 죽은 이의 진정한 친구였던 구스타브와 그의 로비보이도 껴있기는 하다.&nbsp;하지만 독수리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nbsp;살점을 물어뜯을 자격이 있는 맹수들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nbsp;강렬한 남성성과 검은 코트,&nbsp;콧수염,&nbsp;머리,&nbsp;까만 눈을 자랑하는 날선 코의 드미트리와 그의 충직한 금이빨의 사냥개가 조용히 앉아 있다.&nbsp;강렬한 배우들이 불꽃 터지듯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그 긴장 넘치는 순간,&nbsp;고인의 미술 작품&nbsp;'사과를 든 소년'이&nbsp;fruit인 구스타브의 손에 떨어지게 되고,&nbsp;그와 동시에 드미트리의 컵도 바닥으로 떨어진다.&nbsp; &nbsp; &nbsp; 성정체성을 공격하는 드미트리의 여러 욕들을 들으며 구스타브는 자신의 기분에 대해 전혀 생각조차 해주지 않는 못돼먹은 드미트리와 맞서게 된다.&nbsp;전형적인 마초성의 눈에 호텔의 아름다움을 관리하는 구스타브는 확실히 이상한 놈처럼 보이긴 할 것이다.&nbsp;쟤가 남자이긴 한가?&nbsp;게다가 욕심 많은 아들은 모든 것을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데 마음에도 안 드는 이 이상한 놈에 의해 그 꿈이 좌절되었으니,&nbsp;더 화나는 건 그 놈이 자신의 어머니와 섹스까지 했다는 사실이다.&nbsp;생각해 보시길.&nbsp;저런 인간한테 게이 혹은 바이섹슈얼로 보이는 남자가 자기 어머니와 잤다는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믿기 힘든 불편한 진실일 것이다.&nbsp;관객의 상당히 중립적인 눈으로 보기에도 드미트리와 구스타브는 서로 생각과 수준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다.&nbsp;다른 취향에,&nbsp;다른 세계를 사는 이 사람들의 조우란.&nbsp;그들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확실히 너무나도 다르다.&nbsp;그러니 폭력적인 갈등상황이 발생할 수밖에.&nbsp;아니,&nbsp;마초성과 폭력성을 지향하는 입장에선 이 비정상적인&nbsp;'괴짜'는 탄압해야만 한다.&nbsp;이제 그리고 신나는 주먹싸움 장면!&nbsp;드미트리도 퍽!&nbsp;로비보이도 퍽!&nbsp;마지막으로 강펀치를 날리는 것은 조플링이다.&nbsp;폭력으로는 이 프라다 가죽 재킷을 입은 남자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nbsp; &nbsp; &nbsp; 그림을 보게 된 제로와 구스타브는 사과를 들고 있는 소년의 그림을 얼른 빼서 그 자리에 춘화를 대신 건다.&nbsp;그림과 기밀서류를 주인 몰래 은근슬쩍 포장해준 서지의 떨떠름한 얼굴과 작별한 그들은 기차에 다시 몸을 싣는다.&nbsp;가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구상하는 구스타브,&nbsp;그의 과거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다.&nbsp;한 번도 본인이 이야기를 해준 적 없으니까.&nbsp;어쩌면 구스타브의 과거는 최악의 인간이었을지 모른다.&nbsp;아니,&nbsp;어쩌면 엄청난 시련과 비극의 주인공이었을 수도.&nbsp;아니,&nbsp;아니.&nbsp;어쩌면 그냥 평범했을 수도.&nbsp;그러나 누구한테 그것이 중요할까?&nbsp;그의 현재 삶은 호텔 예술인,&nbsp;상속 받은 명화를 그 집에서 챙겨 도망가는 죽은 노파의 정부이니 말이다.&nbsp;그의 창조적 오늘이 그의 어제를 죽인지 오래다.&nbsp;그리고 이번에 그는 또 한 번 명화에 대한 가치와 자신의 생명에 대한 두려움으로 명화를 팔고 도망갈 구상을 한다.&nbsp;그를 마냥 비장하고 거창한 인간으로 만들지 않는 중요한 요인은 바로 그의 그러한 소시민적인 모습 때문이기도 하다.&nbsp;우리 이웃집의 조금은 유별난,&nbsp;수채화 그리는 텔레비전 속 밥 아저씨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러한 독특한 평범함 말이다.&nbsp;어쨌든 이 김에 구스타브는 제로를 자신의 상속자로 위임하게 된다.&nbsp;물론 내용을 살펴보면 상속자 겸 시종이긴 하지만.&nbsp;그래도&nbsp;1.5%는 너무 심한 거 아닌가?&nbsp;하긴,&nbsp;이러한 박함도 일종의 소시민성이라 간주해줄 수는 있다.&nbsp;여기서&nbsp;20%를 떼어 준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nbsp; &nbsp; &nbsp; 호텔로 무사히 도착한 줄 알았더니,&nbsp;이런,&nbsp;경찰이 그를 찾는다.&nbsp;헨켈스는 마담&nbsp;D의 살해용의자로 구스타브를 연행한다.&nbsp;튀려고 하지만 잡힌 그.&nbsp;그리고 그는 더 깊게 영화 같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nbsp;&nbsp;3부 체크포인트&nbsp;19&nbsp;교도소&nbsp;&nbsp;&nbsp; &nbsp; &nbsp; &nbsp;멘들 빵집의 양과자를 챙겨 온 제로는 멍 자국이 얼굴에 잔뜩 난 구스타브와 만난다. 제로는 그에게 핵심 증인인 서지가 사라졌다는 말을 전한다. 물론 감옥 안에서도 구스타브는&nbsp;삼류 소설책의 지침을 충실히 따르며 자신의 삶의 원칙을 여전히 쫓고 있다.&nbsp;재미있는 것은 삼류 소설책의 내용이 그에게 실제로 도움을 주긴 한다는 것이다.&nbsp;환상의 세계는 실제의 세계에도 영향을 미친다.&nbsp;가상과 실제의 경계가 모호하다.&nbsp;자신이 믿고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세상을 이룬다.&nbsp;우리의 형이상학이 우리의 현실에 침투한다.&nbsp;참으로 구스타브답게 이 와중에도 그는 두고 온 호텔을 걱정한다. 자신이 만들어 낸 창조물을 걱정하는 것이 창조주의 의무라도 되는 듯이. 하지만 서지의&nbsp;여동생을 찾아가 위협하는 무서운 조플링의 모습을 본 관객들에게 있어서는 그의 걱정이 참 절로 걱정스럽다.&nbsp; &nbsp; &nbsp; 교도소 안에서도 열심히 옥수수 죽을 나르는 구스타브는 결국 여기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만들 기세이다.&nbsp;우리의 영혼을 묶는 것이 목적인 이 교화소는 예술가를 비참하게 만들 수 있을지언정 예술을 지향하는 마음을 죽이지는 못한다. 사실 아름다움을 쫓는 마음은 어디서도 죽이지 못한다. 게다가&nbsp;구스타브의 영혼은 누구보다도 자유롭다.&nbsp;그는 칸막이 지워지고,&nbsp;고정화 되고,&nbsp;세분화된 공간들에서조차 그 사이로 자유롭게 돌아다닌다.&nbsp;마치 호텔에서 그랬던 것처럼.&nbsp;그런 그의 모습이 항상 어둠 속에 수용되어 있던 인상 나쁘고 덩치 좋은 사내에게는 뱃속을 든든하게 만들어줄지 모른다.&nbsp;어떤 인간은 클리셰가 아닌 존재에 감탄할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한 감각을 잃지 않기 때문에.&nbsp; &nbsp; &nbsp; 들고 온 멘들 양과자를&nbsp;4등분한 채 쪽쪽 손가락까지 빨아먹는 죄수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nbsp;그들의 죄가 무엇이든,&nbsp;그들의 평소 생활이 어떠했든,&nbsp;아름다움,&nbsp;맛,&nbsp;향은 우리 모두에게 즐거움을 준다.&nbsp;교도소,&nbsp;사회의 비정상적 인간들을 잡아두는 것이 목표인 이 인간성 말살의 공간에서 그들은 달콤한 양과자를 먹으며 탈옥을 꿈꾼다.&nbsp;아직 그들의 영혼은 죽지 않았다.&nbsp;죽일 수도 없다!&nbsp;그들은 자신의 인간성을 수호하기 위해 탈옥계획을 짠 상태이고,&nbsp;구스타브에게 그 계획을 제안한다.&nbsp; &nbsp; &nbsp; 가끔 생존을 위해서는 놀랍게도 사치품이 필요하다.&nbsp;물론 사치품 없어도 어떻게 살기야 하겠지. 동물들도 사치품 없이 잘 사니까.&nbsp;그러나 꽉 막힌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끔 여유라는 것을 가지고 다른 방향으로 현 상황에 대해 질문해 볼 필요도 있다.&nbsp;예를 들어,&nbsp;멘들 빵에 칼을 몰래 가져온다든지 같은 것 말이다.&nbsp;그러나 교도소 안으로 칼을 빵 안에 숨겨 보내는 것이 가능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nbsp;그러한 용기라는 자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nbsp;우리 모두에게 용기라는 것이 있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었겠지.&nbsp;&nbsp;&nbsp;무스타파는 눈물을 멈출 수 없다.&nbsp;그의 깊은 의식을 과거에서 현재로 끌어올리는 유일한 주제는 그녀,&nbsp;아가사,&nbsp;즉 사랑이다.&nbsp;사랑,&nbsp;언제나 가장 강력한 것 중 하나이다.&nbsp;우리는 살아있는 존재로서 나와 사사건건 대립하는 세상을 살아간다.&nbsp;그러나 마냥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세상 모든 것들을 대상으로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예술행위 중에서, 가장 강렬한 감각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nbsp;가장 온전한,&nbsp;순간의 보관소.&nbsp;그렇기에 몇 십 년이 지난 지금,&nbsp;소년 제로가 아닌 할아버지 무스타파가 자신의 아가사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nbsp;&nbsp;&nbsp; &nbsp; &nbsp; 우리는 빵과 소시지는 벌컥벌컥 썰 수 있다.&nbsp;빵과 소시지야 원래 썰어먹는 것이라 해도,&nbsp;멘들 양과자는 한 번 썰면 모양이 붕괴한다.&nbsp;멘들 양과자를 당신이라면 썰어낼 수 있는가?&nbsp;아마 몰인정한 사람이라면 가능할 것이다.&nbsp;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불가능하지는 않다.&nbsp;그러나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nbsp;아니라고 감히 내 앞에서 말해보시지.&nbsp;단지 우리에게는 차이로서 아름다움이 존재할 따름이지,&nbsp;아름답지 않은 걸 사랑할 순 없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친구들한테 물어보라. 그 사람이 아름답냐고 아름답지 않냐고. 우리는 다른 이들의 대답과 상관 없이 항상 그 대상을 사랑한다. 왜냐면 우리의 두 눈에선 그 사람이 아름답기 때문에.&nbsp;우리가 사랑하는 그 모든 것들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nbsp;우리의 눈을 통해 본 아름다움이든,&nbsp;정말 그 대상 안에 잠재해 있든 간에.&nbsp;아름다운 것은 우리의 마음 안의 깊숙한 본능,&nbsp;열망을 일깨운다.&nbsp;그 열망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데,&nbsp;왜냐하면 그 열망이 우리가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즉, 종교적 차원이다.&nbsp;우리에게 삶을 사는 근거를 주는 존재의 성질은 아름다움이다.&nbsp;내가 왜 저 사람을,&nbsp;내가 왜 이러한 선택을,&nbsp;내가 왜 이러한 삶을 사는지,&nbsp;그 근저에는 그 방향 안에서 어떻게 하면 추해지지 않고 나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안타까운 우리만의 발버둥이 있다. 다만, 그 선택이 이 세상의 수많은 것들처럼 클리셰인지 아니면 자신만의 것인지의 차이가 있겠지만.&nbsp;&nbsp; &nbsp; &nbsp; 변호사 코박스가 자신의 신념을 지킨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였을 것이다.&nbsp;죽은 이의 수수료,&nbsp;그런 게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nbsp;그냥 이 못돼먹고 무서운 불한당들에게 고개 한 번 조금 숙여주면 고양이가 떨어져 죽을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nbsp;그러나 우리는 가끔 놀랍게도 무시무시한 생존본능보다도 다른 것을 선택할 때가 있다.&nbsp;산다는 것 자체보다도,&nbsp;어떻게 사는지의 방향을 더 중요시하면서 정할 때가 있다는 말이다.&nbsp;다리가 후들후들한 데도 해야 할 말을 하게 되는,&nbsp;그러한 이상하고 불길한 순간.&nbsp;가진 모든 것을 날려버리게 될지 몰라도.&nbsp; &nbsp; &nbsp; 그러나 불한당들이 그러한 선택의 아름다움을 알 정도로 생명을 사랑한다면,&nbsp;불한당들이라고 불리울지 아니할 것이다.&nbsp;만약 당신이 키운,&nbsp;당신이 시간을 들인 것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당신의 가까운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멀리 하라.&nbsp;천성이 잔인한 사람이니.&nbsp;이 영화에서 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하이라이트 중 한 부분은 모순적이게도 코박스가 살해되는 장면이다.&nbsp; &nbsp; &nbsp; 코박스는 고양이의 시체를 쓰레기통에 넣고 쿤스트 박물관으로 들어간다.&nbsp;자신을 뒤쫓는 살인마를 피해&nbsp;15분이 남은 박물관을 선택한다.&nbsp;이 어찌나 괴상한 선택인지.&nbsp;하긴 그는 자신의 인생이&nbsp;15분 남았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nbsp;이 부분의 장면들은 기본적으로 이 영화의 다른 수많은 주요 장면들처럼 인위적이고 가상적이며,&nbsp;환상적이다.&nbsp;모든 것이 진실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시치미 뗄 때는 언제고,&nbsp;갑자기 내가 바로 영화라는 티를 팍팍 낸다고 해야 할까나.&nbsp;폐관 직전의 아슬아슬함과 사람 없는 조용함 속에서 살인마와 변호사의 그림자가 서로를 의식한다.&nbsp;박물관 안의 반복적인 전시품들과 바닥의 타일 무늬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낳게 한다.&nbsp;강박적이고,&nbsp;편집증적인 반복 속에서 우리는 이 추격전이 언제 끝날지 조마조마하게 지켜본다.&nbsp;보이지 않는 살인마의 구두 소리만이 끔찍하게 크게 들린다.&nbsp;코박스가 출구를 찾기만을 간절히,&nbsp;수동적으로,&nbsp;그 세상의 건너에서 지켜보는 우리는 살인마가 신발을 벗는 순간을 목격한다.&nbsp;하나의 아름다움이 지는 것을 막을 수 없겠구나,&nbsp;탄식하는 순간 손가락 네 개가 똑 떨어진다.&nbsp;여성 관객의 비명이 들린다. (두 번 다 영화관에서 봤는데,&nbsp;두 번 다 그랬다.)&nbsp;손가락들을 수거해 가는 조플링의 뒷모습이 시선에 잡힌다.&nbsp;삶에의 의지 하나가 세상에서 거세당했다.&nbsp; &nbsp; &nbsp; 한편,&nbsp;감옥에서 탈옥이 시도된다.&nbsp;이 탈옥 장면은 꽤나 우습고,&nbsp;어찌 보면 복고적인 느낌을 준다.&nbsp;하나하나의 과정이 끝날 때마다 보물섬을 찾아 떠나는 아이들의 여행처럼 일사천리이다.가끔 장애물들이 나타나지만 무리 없이 장애물들이 제거된다.&nbsp;구스타브 덕분에 배가 불렀던 덩치 큰 죄수가 그들의 탈옥을 돕는다. 구스타브는 빠짐없이 감사를 표시한다.&nbsp;당한 거나 갚은 거나 잊지 않는 구스타브의 꼼꼼한 성격은 역시 큰 자산이다.&nbsp; &nbsp; &nbsp; 하나의 권력 체계,&nbsp;거대한 힘으로부터 탈출하는 네 마리 생쥐 중 한 마리 생쥐가 순직을 하고 만다.&nbsp;필수불가결한 희생에 구스타브와 나머지들은 어깨를 으쓱한다.&nbsp;그래,&nbsp;우리가 그렇게 큰일을 하고 있는 거야.&nbsp;그들은 앞으로 달려 나갈 뿐이다.&nbsp;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정신인 것인지,&nbsp;아니면 영화라서 그렇게 묘사가 되는 건지.&nbsp;아마 후자일 것이다.&nbsp;이런 종류의 무용담은 오히려 이렇게 배수관 구멍 뚫듯이 막힘이 없어야 하는 법이다.&nbsp;예를 들어&nbsp;14대&nbsp;1로 싸웠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처럼.&nbsp;어쨌든,&nbsp;그들은 쓱싹쓱싹 탈출하고,&nbsp;무사히 밖으로 빠져나온다. 우리는 그저 영화 보듯 보면 된다.&nbsp; &nbsp; &nbsp; 나오자마자 구스타브는 제로에게 성질을 부린다.&nbsp;나머지 죄수들은 버스를 갈취하고 총총 퇴장한 상태이다.&nbsp;제로는 그의 이기적인 횡포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nbsp;가끔 사람들은 투정을 부리기 마련이고,&nbsp;구스타브도 그러한 때이다.&nbsp;이를테면 자기가 당한 거대 권력의 횡포로부터 비참했기 때문에 밖에 나와서 자기의 작은 도제 소년한테 종로에서 맞은 뺨을 한강에서 푸는 격이다.&nbsp;그러나 그들의 작은 실랑이도 얼마 되지 않아 끝난다.&nbsp;구스타브는 그렇게 못되고 이기적인 놈이 아니다.&nbsp;그는 남의 감정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nbsp;아마 그러한 이유는 구스타브 자신이 자신의 감정을 그만큼 중요시하기 때문일 것이다.&nbsp;그리고 자신의 순간들이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임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다.&nbsp;어쨌든 싸움을 마무리한 그들은 시를 공유하며 어긋날 위기였던 감정을 매듭짓는다.&nbsp;이러한 순간에도 시를 꼭 암송해야 해?&nbsp;물론 그렇다.&nbsp;이러한 순간이니까.&nbsp;그렇지만 일단 도망친 다음에 더 듣자고.&nbsp; &nbsp; &nbsp; 그러나 공권력이 그렇게 만만한 존재들은 아니다.&nbsp;탈옥한 장소를 꼼꼼히 살피는 헨켈스의 고개는 여러 방향에 머물러 있다.&nbsp;그의 시야는 전체에 머물러 있다.&nbsp;그것이 바로 공권력이다.&nbsp;하지만 그 공권력 밖에는 가끔 공권력보다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사적 권력도 존재하기 마련이다.&nbsp;어느새 현장에 들어와 있는 조플링을 헨켈스가 내쫓는데, 조플링을 애초에 이곳에 들어올 수 있게 했던 것은 그의 뒤에 있는 한 가문의 가세 때문이다. 어쨌든, 사냥개 노릇을 잘 하고 있는&nbsp;조플링은 멘들의 양과자 맛을 이미 맛본 상태이다.&nbsp;너무 몸집이 크고 시야가 광범위해서 우둔해 보이기도 하는 공권력과는 다르게,&nbsp;훨씬 더 날쌔게 개인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사적 권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nbsp; &nbsp; &nbsp; 공권력과 사적 권력의 압박이 강해지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구스타브는 어떻게 다시 한 번 구사일생의 기회를 잡아야 할까?&nbsp;일전에도 말했지만,&nbsp;구스타브를 구할 수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구스타브 자신이다.&nbsp;그가 이때껏 해왔던 것처럼,&nbsp;그는 그 자신답게 이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한다.&nbsp;그것만이 길이기 때문에.&nbsp;&nbsp;4부 십자열쇠협회&nbsp;&nbsp;&nbsp; &nbsp; &nbsp; 십자열쇠협회는 일종의 예술가 서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nbsp;무려 다섯 명의 호텔 지배인들에게 연락이 간다.&nbsp;그 호텔은 모두 아름답고,&nbsp;각자만의 개성을 갖고 있다.&nbsp;그리고 그들 곁에는 역시 로비보이들이 있다.&nbsp;아름다움은 그 고유의 씨를 뿌리고 전파되는 속성을 갖고 있다.&nbsp; &nbsp; &nbsp; 그들은 기꺼이 구스타브를 도와준다.&nbsp;이들의 권력은 상당히 미시적이라서 소믈리에와도 인맥이 닿는다.&nbsp;그들이 공권력처럼 대단한 수의 경찰,&nbsp;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nbsp;아름다움의 영역에선 확실히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들도 어떻게 보면 막강하진 않을지 몰라도 하나의 사적 권력이다.&nbsp;구스타브에게 무려 향수도 챙겨주는 걸.&nbsp;비록 조금 소량이긴 하지만.&nbsp;그리고 그들은 분명 그걸 돈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nbsp;구스타브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nbsp;그들이 애초에 갖고 있던 구스타브에 대한 존경심이 구스타브를 살렸다.&nbsp; &nbsp; &nbsp; 잘 생기긴 했지만 예술에 관심 없는 드미트리가 그림이 바뀐 것을 아는 것도 드디어 이맘때쯤이다.&nbsp;도대체 여자 성기가 다 보이는 동성애 춘화랑 얌전한 소년이 사과를 든 그림이랑 바뀐 걸 이때껏 알아채지 못한 건 대체 뭐란 말인지.&nbsp;그만큼 드미트리가 '예술적인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nbsp;물론 드미트리 본인한테서는 수컷냄새가 풀풀 난다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그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nbsp;그들의 폭력성 자체가 또 다른 종류의 매력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nbsp;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 중 아름답지 않은 존재는 없다.&nbsp;위험한 악당도 어떤 의미로는 아름답긴 하다. 모든 생명이 갖는 의지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다만 각자의 취향 차이와 윤리적 문제가 걸릴 뿐이지. 애초에&nbsp;조플링이 모는 오토바이부터 장난이 아닌 걸.&nbsp; &nbsp; &nbsp;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하이라이트는 역시 이 산꼭대기 정상에서의 활극일 것이다.&nbsp;서지의 메모를 바탕으로 모든 인물들이 모여드는데,&nbsp;물론 우리의 구스타브는 향수를 꼭꼭 뿌려주시기 때문에 그 냄새를 만인이 알아챈다.&nbsp;그리고 서지를 찾아 제로와 구스타브는 산꼭대기 위까지 올라가게 된다.&nbsp; &nbsp; &nbsp; 이 부분의 아름다움을 문자로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nbsp;우선 음악부터 그들의 활극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nbsp;수도사를 처음 만나는 부분은 케이블카의 중간에서이다.&nbsp;케이블카가 멈추어서 끼익-거리는 소리가 음악과 조화를 이룬다.&nbsp;그들은 수도사들의 도움을 받아 계속 올라가게 되고,&nbsp;수도사 옷을 차려입게 되며,&nbsp;심지어는 그들의 음악까지 참여하게 된다.&nbsp;대충 그렇게 수도사&nbsp;4명을 거쳐 그들은 고해성사를 하러 들어가게 된다.&nbsp; &nbsp; &nbsp; 그리고 드디어 서지와 만나게 된다.&nbsp;그들의 급박한 만남에서 그들은 서지가 사본을 챙겼다는 중요한 비밀을 접하게 되지만, 그 순간에&nbsp;서지는 살해되고 만다.&nbsp;조플링 역시 수도사 복장을 차려입고 어느새 들어와 있던 것이다.&nbsp;그리고 그들은 스키,&nbsp;썰매 추격전을 벌이게 된다.&nbsp; &nbsp; &nbsp; 이 부분 역시 놀라운 영화적 기교를 자랑하는데,&nbsp;이 장면을 미니어처로 만들었다고 하니 그 작업이 매우 번거롭고 수고로웠을 것 같다.&nbsp;그러나 고생한 값어치를 한다.&nbsp;상승에는 수많은 버퍼링과 반복이 걸렸지만,&nbsp;내려갈 때는 씽씽 무지막지한 속도감을 자랑한다.&nbsp;산에서의 활극은 감옥에서의 탈출처럼 순조로우면서 동시에 여러 과정을 거치는데,&nbsp;확실히 현실감을 주는 요소는 아니다.&nbsp;맨 처음에 작가가 분명 우리는 놀랍게도 현실에서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받는다고 말하지만,&nbsp;이러한 영화적 처리는 그 진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nbsp;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바로 핵심이다.&nbsp;우리의 기억, 우리가 갖는 현실이란 것을 생각해보자. 어차피&nbsp;우리의 관점이라는 하나의 예술이 모든 현실적 순간들을 윤색하고 왜곡한다.&nbsp;그 의미부여는 한때 사실이었던 것을 환상으로 만들어버린다.&nbsp;예술은 우리의 인생이 바로 그러한 것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은유이다. 우리는 항상 예술적 삶을 살고, 그렇기에 환상과 세계는 구분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nbsp; &nbsp; &nbsp; 스키를 타고 내린 조플링과,&nbsp;절벽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구스타브가 마지막 위협 앞에서 시를 읊조리는 장면은 기가 막히다.&nbsp;구스타브는 자신의 인생을 수없이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인간 유형이다. 그는 삶 속에서 그것을 실천해내며 자신의 삶을 클리셰가 아닌 살아있는 창조물로 만들어낸다. 그가 갖는 소시민성을 그의 그러한 예술성이 압도한다. 그리고 그의&nbsp;예술성은 그 자신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순간에도 굴하지 않는다.&nbsp;그렇기에 그의 미적 자식이자 형제인 제로가 선방을 날려 조플링을&nbsp;‘제거’해버리는 것은 통쾌한 한 방이다.&nbsp;그들의 예술성이 드디어 그들의 의지를 위협하는 하나의 의지를 제거하였다.&nbsp; &nbsp; &nbsp; 공권력이 때마침 등장하여 굴복을 권유하지만,&nbsp;그러한 권유에 제로와 구스타브가 흔들리지 않는다.&nbsp;그들은 서지를 위한 묵념을 잊지 않을 뿐이다.&nbsp;그리고 이제 대단원도 하강세에 들어가기 시작한다.&nbsp;&nbsp;5부 두 번째 유언의 사본&nbsp;&nbsp;&nbsp; &nbsp; &nbsp; 마지막 전쟁의 시작이다.&nbsp;팔에 완장이 걸쳐진 군인들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점령한지 오래이다.&nbsp;자신의 근거지가 그 꼴이 난 것을 보고 통재를 금치 못하는 구스타브.&nbsp;그의 미학이 사라지고 다른 인간들의,&nbsp;다른 시대의 물살이 넘실거린다.&nbsp;이 와중에 최종 보스인 드미트리가 호텔에 들이닥치고,&nbsp;그는 그림을 빼내는 데 성공한 아가사와 그림을 알아본다.&nbsp;호텔&nbsp;6층까지 따라간 드미트리는 아가사와 추격을 시작하는데,&nbsp;곧 뒤따라온 구스타브와 제로와 맞닥뜨리게 된다.&nbsp;분노한 드미트리는 총을 꺼내어 발사를 한다.&nbsp;그리고 곧 한편에서 시작된 총성에 놀란 다른 편의 군사들도 총을 꺼내어 제각기 발사를 하기 시작한다.&nbsp;전쟁에 대한 훌륭한 은유가 시각적으로 구현되었다.&nbsp;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총질을 시작하고,&nbsp;자신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에 다 같이 총질을 시작한다.&nbsp;이 의미 없는 폭력전 아래서 사랑에 집중한 제로는 아가사와 함께 멘들 빵 위로 떨어짐으로써 목숨을 구하고,&nbsp;그들은 그림 뒤에 숨겨져 있던 두 번째 유언의 사본을 발견한다.&nbsp; &nbsp; &nbsp; 그 사본은 결국 공권력,&nbsp;사법부에 의해 인정받게 되고 모든 것은 구스타브의 몫이 되며,&nbsp;드미트리는 사라진다.&nbsp;그러나 결말이 해피엔딩인가?&nbsp; &nbsp; &nbsp; 제로는 후계자가 되었고,&nbsp;아가사와 결혼하여 몇 년을 살았지만 아가사와 아이는 프로이센 독감이라는 병으로 죽었다.&nbsp;역시,&nbsp;현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다.&nbsp;아무리 아름답고 용감한 존재라도.&nbsp;그리고 전쟁이라는 커다란 물살로 인해 공화국은 사라졌다.&nbsp; &nbsp; &nbsp; 구스타브는&nbsp;언젠가 벌판 앞에 선 기차에서와 똑같이, 똑같은 선택, 똑같은 행동을 한다. 참 변함없는 인물이다.&nbsp;그러나 그의 마지막 순간에서는 그의 아름다움조차 그를 구해주지 못한다. 어쩌면 그렇기에 그 때가 그의 마지막인 것이겠지.&nbsp;시대가 변한 것일까?&nbsp;글쎄.&nbsp;그렇지 않다.&nbsp;어쩌면 영화는 이 부분에서야말로 흑백화면을 통해 이것이 현실이고,&nbsp;진실임을 말해준 것일지 모르겠다.&nbsp;운이 좋았던 어느 날의 그 기분 좋았던 때가 아닌,&nbsp;우리를 먹어 삼켜버린 잿빛 하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우울한 사실. 아무리 우리가 아름다움을 쫓아도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 생존을 언제나 보장받을 수 없는 때가 존재한다는 비참한 진실.&nbsp;그의 죽음이 나오지 않은 것도,&nbsp;그의 죽음을 영화처럼 다루지 않은 것도 감독의 그러한 슬픔에서 기인할지도 모른다. 감독은 예술인의 입장에서 구스타브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nbsp;&nbsp;&nbsp;어찌 되었건,&nbsp;여전히 호텔에는 그림이 매달려 있다.&nbsp;적자를 감수하고서도 지키고 있는 이 호텔에서 무스타파의 뒷모습은 살짝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nbsp;그는 구스타브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nbsp;아가사와의 추억을 위해 이곳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nbsp;구스타브와의 기억은 그에게 아마 이젠 방법론적인 문제,&nbsp;그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 자신에게 녹아든 무엇일 것이다.&nbsp;구스타브의 세상을 살아가고자 한 미적인 노력이 무스타파의 몸에 베인지는 오래였을 것이라 본다.&nbsp;하지만 무스타파에게 몸에 베인 것과 다른 문제인 것이 사랑이다.&nbsp;그것은 기억이다.&nbsp;한 사람과의 우정과 의리를 통해 배운 것들이 몸에 남은 것과는 다른 문제로,&nbsp;이젠 가버린 영원한 순간을 영원하지 못한 것으로 잡아두려는 애탄 노력.&nbsp;그렇기에 호텔은 낡아가고 있고,&nbsp;마찬가지로 무스타파 역시 늙어가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그가 우울해 보였던 이유일 것이다.&nbsp;&nbsp;&nbsp; &nbsp;노작가의 집은 새로 페인팅 중이다.&nbsp;과거를 다 말한 그의 곁에는 손자가 있다.&nbsp;새로운 희망이 이어지고 있다.&nbsp;창작이란 무엇일까.&nbsp;그것은 새로운 것을 쓰는 것만은 아니다.&nbsp;우리는 언제나 주변에서 창작의 방법을 찾아나간다.&nbsp;작은 순간순간에 있어,&nbsp;항상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우리는 우리의 방법을 지향하기 마련이다.&nbsp;우리의 삶 자체가 예술이다.&nbsp;어떻게 사는지,&nbsp;어떻게 채워나가는지,&nbsp;어떻게 그려나가는지가 문제이다.&nbsp;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창작의 요소를 현실에서 채워나간다. 그 방법은 영화감독으로라도 좋고, 가정주부라도 좋고, 호텔 지배인으로도 좋고, 빵 굽는 사람으로도 좋고, 한 사람의 애인으로서도 가능하고, 한 사람의 친구로서도 가능하다. 그것 역시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것, 우리는 어차피 언제나 우리만의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간다. 말했듯이, 클리셰로 남든 클리셰를 벗든 그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겠지만. 어차피 모든 사람이 알아봐 줄 필요 없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아봐줄 지기를 찾는다면 될 문제이다.&nbsp;&nbsp; &nbsp; &nbsp; 묘지 안의 여자가 책을 다 읽고 덮듯이,&nbsp;스크린에 배우들의 이름이 하나씩 올라간다.&nbsp;두 번 본 것을 다시 볼 필요는 없겠지.&nbsp;나 역시 영화를 다 읽었으니 이제 나가야 할 차례이다.&nbsp;새로운 순간이 이젠 기억으로 다시 전환되고,&nbsp;이제 다시 이곳에 나의 기억 조각 하나를 남기고 떠나련다.&nbsp;길었다.&nbsp;이만하면 되었다.&nbsp;새로운 나를 찾아,&nbsp;새로운 순간을 창작하기 위해 간다.&nbsp;안녕,&nbsp;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nbsp;이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nbsp;존재들을 위해 축배를 든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484/8/cover150/940462907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4840855</link></image></item><item><author>설표</author><category>영상</category><title>영화 '화양연화' - [화양연화 (1disc) - [초특가판]]</title><link>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29</link><pubDate>Sun, 30 Nov 2014 02:2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2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6000213381&TPaperId=723742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54/60/coveroff/6000213381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6000213381&TPaperId=723742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화양연화 (1disc) - [초특가판]</a><br/>왕가위 감독, 양조위 외 출연 / 드림믹스 (다음미디어) / 2005년 03월<br/></td></tr></table><br/><br>화양연화,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아름다운 이야기.&nbsp;&nbsp; 영화의 맨 처음 도입부 삽입된 문장을 보면서부터, 이 이야기가 바로 당신의 이야기임을 직감하게 된다. 꽃문양 치파오를 입은 고전적인 수리진과 1900년대 어느 시기의 서양문명의 혜택을 입었을 주모운이 좁은 공간에서 마주치지 않고 계속 한 공간에서 떠돌고 있다. 같은 아파트로 이사한 그들은 각자의 배우자 없이 짐을 옮기고 있다. 일본 서적인 남편 책 때문에 처음 얼굴을 보게 된 그들은 건조한 인사말을 주고받는다. 그들의 관계는 바로 그 만남 같다. 그들 서로가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항상 다른 이를 전제하는 관계.&nbsp; 아슬아슬한 음악 위에서 카메라의 시선은 천천히 얼굴이 나오지 않는 두 배우자와 주인공들의 동선을 따라간다. 그 안에 정서가 농축된다. 그 누구도 어느 누구의 심리에 관심 없이 마작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미 불안하고 아슬아슬하며, 암시한다. 이 영화는 언제나 그렇다. 불륜관계인 것처럼. 누구 하나 노골적이지 않다. 누구도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솔직히 표현할 수 없다. 그러기 전에 도망간다.&nbsp; 언제부터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 걸까? 전기밥솥의 값을 나눠주기 시작한 때부터일까? 아니면 맨 처음, 서로 눈길이 맞부딪친 그 순간부터? 알 수 없다. 수리진과 주모운의 인연은 배우자들의 외도로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배우자들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역시 암시만 될 뿐. 배우자들의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언젠가부터 바람을 피우는 배우자들의 거짓말들이 우리의 눈에도 보일 따름이다.&nbsp; 그리고 그 거짓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수리진과 주모운을 이어준다. 한 눈에 봐도 습해보이는 홍콩, 착 달라붙은 치파오는 여성의 뒷모습 특히 매력적인 엉덩이를 강조한다. 음식을 기다리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고, 계단을 올라간다. 우리는 치파오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수리진의 어딘가 헐거워 보이면서 동시에 연약해 보이는 얼굴은 우리의 시선을 치파오에서 얼굴로 부드럽게 채간다. 주모운은 그 곁을 지나갈 뿐이지만, 카메라의 시선을 타고 흐르는 긴장감은 우리에게 채워진 허공을 가리킨다. 수리진과 주모운이 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들에게 연결되어 있는 무채색의 감정 선을 본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서로의 존재를 강하게 느끼는 그러한 순간. 서로를 의식하는 것이 강하게 느껴지고, 피부로만으로 알 수 있는, 그러나 그렇기에 기피하는 순간.&nbsp; 우선 모든 것을 떠나서, 어쨌든 수리진은 남편의 곁에 있는 부인이다. 1960년대 홍콩, 그 좁은 아파트 공간 옆집에서 일어나는 강탈행위 앞에 그녀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꼭 서로 뒹구는 것을 볼 필요 없이 진실을 직감하는 순간이 있다. 그 진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남몰래 울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는다. 바람난 배우자한테도, 그 상대자에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옷을 잘 차려입은 채 걸어 다니고, 하루하루 살아갈 뿐. 그러나 그녀가 점점 연약해지고, 텅 비워지는 것이 보인다.&nbsp; 주모운에게 이 상황은 어떤 것일까? 아내의 바람 앞에서 그는 딱히 상심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단조로운 가정을 꿈꾸며 황홀한 쾌락보단 사소한 가치를 지키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일까? 그는 수리진에게 다가간다. 아니, 수리진도 주모운에게 다가간다. 누가 먼저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둘이 붙여두면 서로를 본능적으로 탐하게 되는 관계. 사회적으로 어떤 관계인지, 어떤 기반 위에 있는지 고민도 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끌림을 느끼게 되는 관계들. 그리고 가끔 그러한 관계들 중 몇몇 개는 사회의 냉혹한 눈초리를 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건 끌림보다 분명 약해 보인다. 적어도 맨 처음,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감정을 눈치 채기 전까지는. 잠시의 지연, 사건과 알려짐 사이의 아주 잠깐의 허용된 순간, 매우 불안하게 떨리는 그 나뭇가지 위에 이 가련한 새들은 관계의 둥지를 짓는다.&nbsp; 우선 그들은 서로의 배우자가 그들 뒤에서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가간다. 그러나 그들은 오래된 관계와는 다른 관계가 주는 낯설음이 불편하다. 오래되고 안정된 관계가 주는 강점은 비단 사회적 인정에만 달려있지 않다. 오랜 습관은 마치 그것이 당연한 선함인 듯 굳어진다. 흐물흐물한 무엇이라도 오래 두면 딱딱해지는 것처럼. 그들이 계속 이야기하는 주제는 서로의 부인과 남편에 대한 것이다. 박완서의 한 단편 소설이 생각난다. 아마 ‘그리움을 위하여’ 같은데, 오래 남편과 살다 사별한 한 할머니는 새로 재혼한 할아버지와 서로의 옛날 배우자에 대해 수다를 떤다. 그들은 질투 따위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상대방의 옛날 배우자는 단순히 사랑의 대상만이 아닌 상대방을 형성한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모운이 스테이크를 위해 떠다주는 겨자소스는 아마 그의 아내가 좋아하는 소스일 것이다. 수리진도 그것을 안다. 그 사람의 굳어진 습관, 그 사람의 배려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통 정상적인 관계에서라면, 그러한 것들을 하나하나씩 자신에게로 맞추어 나간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그들이 의식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환경 때문에 정상적일 수 없다.&nbsp; 수리진이 너무 슬퍼보인다. 그래서 아름답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무조건 아름답다. 화양연화의 순간을 담아냈기에. 주모운과의 관계는 자신의 배우자들의 불륜 관계 때문에 생긴 것일까? 아니면 그것은 그저 핑계에 불과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이미 이 관계는 다른 이들의 존재가 너무 크다. 안정적인 사랑을 위해서라면 나와 너만이 있어야 하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들의 관계에는 나와 너만이 아닌 나와 너의 옆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크다.&nbsp; 예를 들어, 만약 영화를 좋아하는 보통의 성인 남녀라면, 자연스럽게 영화관에서 영화를 같이 보기로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은 그것이 가능해 보이지도 않고, 딱히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들 눈을 신경 써야 하니까. 그들은 그저 안전한 공간들에서 만난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황폐한 거리. 그러나 그 안에서 그래도 애정이나 호감이 싹트긴 한다. 아주 조금씩, 아주 조금씩 피어서 그러지. 그러나 걱정과 불안, 초조함으로 인한 담배 연기가 훨씬 더 짙게 피어난다. 그리고 그게 그들의 사랑이 꽃 피우기도 전에 씨앗을 갉아먹는다.&nbsp; 결국 일이 하나 소소하게 생긴다. 소소해보이지만, 사실 작지 않은 일. 그 둘은 아파트 한 공간에서 있다가 밤을 새며 마작 하러 온 사람들 때문에 갇히게 된다. 그러한 불편함은 어떻게 보면 그 둘에게 있어 재미난 추억을 만들어 주었겠지만, 다르게 보면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점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nbsp; “괜히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 같아요.”&nbsp; “우리가 결백해도, 사람들은 그렇게 안 보죠.”&nbsp; “절대 잘못되어선 안 돼요.”&nbsp; 그렇다, 그 절대 잘못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 그들 마음 안에 있는 불안함과 위태로움이 그들의 가장 큰 독이다. 잠은 오지 않는다. 그들에게 결혼, 그리고 평판, 현실은 중요하다. 어른이니까.&nbsp; 그 둘만의 아지트가 생긴 이후, 그들은 주체할 수 없이 서로에게 시간을 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만남 그 자체가 그들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만든다. 그들은 아무도 자신을 안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두가 보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흔적을 남긴다. 범죄에 베테랑이 아닌 이상, 그 모든 흔적들, 그리고 여기서 흔적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감정의 흔적들 역시 강하게 남는다. 그것 역시 당사자들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옆에 있는 제3자도 안다. 하나의 사랑이 싹트는 것, 그 남녀의 숨기지 못하는 얼굴의 환희를. 그리고 소문은 그 환희의 정도에 따라 짙게 혹은 옅게 퍼진다.&nbsp; 행복함, 그 둘만이 전유하는 행복함이 불안을 없애주지 못한다. 행복해지고, 사랑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면 열릴수록, 소심한 남자는 더욱 불안해진다. 더욱 무서워진다.&nbsp; 사람들은 여전히 지켜본다. 결국 수리진은 아파트 주인에게 한 소리 듣게 된다. 나가지 말라. 남편에게 출장을 덜 다니라고 해라. 어떤 의미인 것일까. 이러한 말이다. 다 안다, 수리진. 무심한 남편 때문에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것. 여자인 너는 자제해야 한다. 여기 이곳, 한심하게 늙어가는 우리들 사이에서 마작을 구경하고, 밥을 먹어라. 불나방처럼 굴다가는 모든 것을 다 잃을 테니. 그리고 그 간접적이고, 걱정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지 날카로운 메시지는 수리진의 심장을 꿰뚫고 간다. 다만 두렵고, 무서워질 뿐.&nbsp; 수리진과 주모운은 이별 연습을 한다. 이별을 또 연습할 것은 무엇이람. 그런 것은 그냥 소나기 오듯 찾아오던데. 수리진이 운다. 눈물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그저 표현이고, 표출이다. 이미 다들 마음속에서 안다. 서로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라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그래도 올 일은 오니까.&nbsp; 시간은 계속 간다. 헤어짐 이후, 몇 년 뒤.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하지만 다른 시간 차이로 스쳐지나간다. 닿으려고 하는 시도가 있지만, 다시 한 번 시도하진 않는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아쉬움의 탄성이 날까? 아니, 나는 그렇지 않다. 그 누구보다 가슴의 열정이 큰 사람이라도 자신의 열정을 꺼트릴 강한 바람, 차가운 물 앞에서 계속 불탈 수는 없는 법.&nbsp; 그리고 1966년, 시간이 또 간다. 수리진은 옆집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 감정이 살아난다.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그리고 그녀는 거기에 자신의 아들과 머무르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우연히 찾아온 주모운. 그녀가 사는지도 모르고, 수리진이 그랬던 것처럼, 옆집을 보며 옛날 기억에 사로잡힌다. 또 그렇게 스쳐지나간다.&nbsp; 그는 머나먼 곳까지 가서 자신의 비밀을 놓아두고 온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한 것일까? 누군가한테 하고 싶었지만 차마 못한 말인 것일까. 헛된 상상은 의미 없고, 여전히 모든 것이 희미하다. 우리 모두는 영화를 보듯 자신의 일생을 보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의 비극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놓치니까. 아니, 사랑이 될 수 있었던 것들을 놓치니까. 어안이 벙벙한 채로,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채로. 잘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채로. 그와 내가 만나고, 사랑하려면 가장 좋은 최적의 조건, 시간, 공간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채로. 그 가능성이 조그마한 양촛불처럼 타고 있다고 믿은 그 때는 그저 아름다운 순간으로 남고, 사랑은 시작조차 해보지 못한 채로 꺼진다. 그러나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듯이, 모든 것은 그저 가능성으로만 남는다.&nbsp; 그가 그립고, 그녀가 보고 싶다. 만날 순 없다 해도, 그 감정들이 죽지 않는다 해도, 손에서 떠난 순간은 우리로부터 저 멀리 도망간 이후며, 그리고 그 때로부터 떨어져 온 나는 계속 그 사람의 존재를 아득한 꿈처럼 그리워만 한다. 언젠가는 희미해지겠지. 그것만을 바라며. 슬픈 감정이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벌레처럼 자라나 언젠가는 나비처럼 날아가기만을 바라며.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한, 그와 나의 순간은 영원한 화양연화이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54/60/cover150/6000213381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46019</link></image></item><item><author>설표</author><category>영상</category><title>영화 '악마를 보았다' - [악마를 보았다 (2disc)]</title><link>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28</link><pubDate>Sun, 30 Nov 2014 02: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2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23476272X&TPaperId=723742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19dvd_75cover.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23476272X&TPaperId=723742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악마를 보았다 (2disc)</a><br/>김지운 감독, 이병헌 외 출연 / 플래니스 / 2011년 06월<br/></td></tr></table><br/><br>(전체적인 이야기가 다 담긴 글입니다. 안 보신 분은 안 읽으시길 권장합니다.)(지속적으로 문장 비문 수정, 표현 가다듬는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내용은 변하지 않습니다.)&nbsp;&nbsp;&nbsp;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 이 영화를 보기 최근 한 달 동안 나는 영상에 빠져 있었다. 하루에 거의 한 편씩 보며 영상 속에서 기쁨을 찾던 어느 날, 결국 나는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제목, 음산한 기운, 잔혹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망설여졌던 찰나, 나는 이 영화를 재생하였다. 그리고 보는 내내 이 영화를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고, 불편했다. 한때 어린 나는 강하고 잔인한 영화를 잘 보는 것이 무슨 대단한 자랑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철없이 굴었건만, 이제 나이가 좀 들었다고 이런 영화를 보는 것이 버거웠다. 한숨과 또 이어지는 한숨, 끝나지 않는 김수현과 장경철의 지난한 이야기와 그 결말에 나는 이해할 수 없이 막연한 어둠에 사로잡혀 이 영화를 계속 생각할 뿐이었다.&nbsp;&nbsp;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여전히 나는 영화를 제대로 사고할 수 없었다. 뿌연 연기 안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 하나의 사소하고 사적인 일이 생겼고, 그 일에 마음을 빼앗겼던 나는 우연히 '악마를 보았다'를 다시 떠올렸다. 영화에 대한 단상과 나의 사적인 일에 대한 단상이 마치 끊어졌던 붉은 실이 다시 만난 것처럼 합쳐진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일말의 사적인 통찰을 통해 이 영화의 불쾌함과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다.&nbsp;그 이전에는 흐린 연기 때문에 무서워서 차마 들어가지도 못하다가 결국&nbsp;등불 하나를 손에 들고 깊은 밤의 숲으로 발을 간신히 디디기 시작한 것이다. 이 영화를 제대로 보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았다.&nbsp;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 있다. 장경철과 태주가 바로 그러한 인물들이다. 살육을 즐기는 자들, 우리는 그런 자들을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평소에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산다. 그런 사람들의 존재를 의식하면 우리는 이 사회 밖에 나가서 살 수 없다. 무서워서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괴물 같은' 인간들은 분명 존재하고, 그들은 우리를 분명 노리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그들의 존재가 우리의 부정보다 앞선다. 김수현과 그의 약혼녀 주연은 그런 의미에서 운나쁜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이 잘 조우하지 못하는, 살육을 쫓는 미지의 존재들과 만나고, 그들에게 무차별적인 공격을 당해 참혹한 비극의 주인공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nbsp; 김지운 감독은 김수현과 주연을 같은 카메라 시야에 담은 적도 없다. 그들은 그저 느끼한 전화 통화 하나로 보여졌을 뿐이다. 감독의 관심사는 전혀 사랑이나 로맨스에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깔끔한 전개는 오히려 효과적이다. 빠르게 전개되는 그 속에서도 우리는 장경철을 잡고 풀어주는 김수현의 심리에 공감한다. 장경철은 보통 인간 사회에서 사랑 받을 수도 없고, 보듬어 줄 수 없는 인물이며, 보듬어서도 안 되는 인물이다. 흔히 밥 먹여주고 거두어주면 기운 내서 주인 물어버리고도 남을 개새끼를 이야기하는데, 장경철이 바로 딱 그런 짐승이다. 인간의 도리를 알지 못하는 인간, 광인이라는 칭호를 받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우리에 의해 비정상의 너머로 가버린 이해받을 수 없는 괴물이다.&nbsp; 이 영화는 비극이다. 철저한 비극이다. 복수극이 아니다. 약혼녀 주연의 상실을 과연 김수현이 보상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불가능하다. 주연은 무슨 짓을 해도 살아돌아 올 수 없다. 주연의 여동생이 김수현에게 전화로 호소한 것을 보라.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괴물을 잡기 위해 괴물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김수현은 괴물 흉내를 내서라도 자신의 약혼녀인 주연이 받은 괴로움을 돌려주고자 했다.&nbsp;&nbsp; 그러나 말했듯이, 이 영화는 복수극이 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김수현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져 아름다운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아리따운 아가씨가 참혹하게 조각내어 죽는 그 고통도, 그 어느 것도 그 어떤 것으로 보상 받을 수 없다. 피 1.5kg를 피 1.5kg로 교환하고자 하는 자리가 아니다. 고통 받았다면 그것은 김수현과 주연이 보통 사람들이고, 보통의 아름다움과 미래에 가치와 기대를 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사회의 건전한 한 구성원으로 산 것이 그들이 한 행위의 전부였다.&nbsp;&nbsp; 장경철을 보라. 그에게는 그 어떠한 것도 가치없다. 그에게는 먹고 자고 섹스하는 것만이 전부이다. 놀랍게도 그것만이 전부이며, 다른 존재를 괴롭히고, 착취하고, 죽이는 것이 즐거움이다. 우리는 그를 어떻게든 이해할 수 없다. 그가 무엇에 가치를 두는지 알 수 없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김수현은 그것을 죽었다 깨어난다 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복수를 할 수 없다. 장경철이 무엇을 잃어야 김수현이 사랑을 잃은 그 고통만큼의 상실감, 한 여자가 느껴야 했던 신체의 고통, 미래 박탈의 어두움을 채울 수 있을까?&nbsp;&nbsp; 없다. 장경철에게 그 정도 가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그가 이 세상에 부여한 가치란 없다. 만약 있다 해도 김수현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김수현은 단 한 번도 장경철의 시선에 서본 적이 없다. 그저 그 흉내만 내었을 뿐. 김수현은 장경철의 욕망을 끝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복수란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으며, 김수현은 맨 처음부터 진 게임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결말을 보며 정확히 그러한 생각을 했다. 그가 결국 생각한 것의 최대치란 것은 결국 장경철의 가족이 장경철을 죽이게 하는 정도였다.&nbsp;&nbsp; 만약 정말 똑같은 복수를 해야 했다면, 장경철의 가족을 장경철 앞에서 죽여야 했던 것 아닐까? 그러나 김수현은 그럴 수 없었다. 여기서는 니체의 격언도 부족해진다. 심연을 바라보았고, 심연도 그를 바라보았지만, 김수현은 심연 그 자체는 되지 못했다. 그는 그저 장경철의 죽음을 장경철의 가족들로 하여금 시행시켰을 뿐이다. 역시, 도돌이표처럼 반복하는 말이지만, 복수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감독이 이것을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죽이는 것이 여전히 복수라고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영화의 이야기에서 복수는 있을 수 없다.&nbsp; 하지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실, 복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김수현이 한 짓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엄청나게 큰 의미가 있다. 김수현이 장경철을 죽이지 않은 덕분에 여러 명의 여자가 살았고, 어쩌고 저쩌고 같은 것은 그저 발생한 결과를 수식으로 붙인 것에 불과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장경철 때문에 김수현이 잠을 잘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약혼녀를 잔인하게 죽인 그 놈을 붙잡기 이전에는 절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러한 존재가 지구상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그 자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전히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이상, 그는 자신의 복수가 철저히 실패할 것이고, 사랑한 사람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는 자신이 이러한 복수를 성공시킨다 하더라도 영원히 마음에 큰 구멍이 남아 휑한 바람만 불어 우울함과 괴로움 속에서 살게 될 것임을 알았어도 장경철을 잡아서 괴롭히고, 고문하고, 죽일 수밖에 없었다.&nbsp; 많은 사람들은 능력만 된다면 김수현처럼 복수를 선택할 것이다. 이 영화처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받은 것을 언제나 되돌려주고 싶어한다. 여러 이유로 우리는 보복의 욕망을 참는데, 자신의 안전을 굳이 복수한다는 미명 하에 희생시키고 싶지 않아서거나 혹은 기분은 나빴어도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넘겨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고통과 쾌락에 분명히 반응하는 살아있는 동물들이지만, 고통과 쾌락에 언제나 격렬히 반응하지는 않는다. 무시할 만한 것들에는 무시한다. 그러나 감각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반응은 격렬해지고, 어떤 것들은 그 흔적이 평생을 가간다. 우리는 그 흔적이 즐거움과 쾌락일 경우에는 추억이라고 부르지만, 고통일 경우에는 영원한 보상과 벌충을 필요로 하는 악몽이라 부른다.&nbsp;&nbsp; 사실 굳이 살인과 범죄라는 극한 경우를 가정하지 않아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김수현과 같은 상황에 항상 놓인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 역시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해 의도치 않게 혹은 의도한 바대로 피해를 줄 때가 있다. 가끔 어쩔 때 보면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장경철의 짐승 같음에 치를 떨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어떠한 지점에 치를 떨기도 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한다. 그러한 일들이 있을 수 없다고 부정하면 현실부정이 된다. 그러나 존재가 당위를 앞선다. 그러한 존재들은 분명히 있고, 그러한 경우들도 분명히 있다. '악마를 보았다'처럼 무서운 이야기말고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애타게 사랑한다고 해도, 그 존재가 꼭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비극적인 일이지만 말이다.&nbsp; 이 세상은 그렇게 불공평하다. 왜 주연처럼 예쁘고 창창한 아가씨가 그런 짐승 같은 놈의 손에 의해 참혹하게 죽어야 했는가? 그러게나 말이다. 하지만 일어난 일이다. 왜 그와 내가 헤어져야 했는가? 왜 그녀는 나를 떠나야 했는가? 내가 그렇게나 잘해줬고, 우리는 정말 즐거웠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하지만 일어난 일이다.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고, 불공정하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nbsp;보상받고, 받은 아픔을 되돌려주기를 원한다.&nbsp;내가 쏟은 만큼 돌려받고, 내가 일한 만큼 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 그 불공평함에 우리는 분노하고 좌절하고 울게 되고, 심지어는 잠도 못 이룬다.&nbsp; 그래서 아주 재미나게도,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런 때에 우리에게는 김수현에게 닥친 것처럼 선택권이 생긴다. 이러한 일들을 깔끔하게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내버려둔 채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그저 일어난 일들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인정할 수 없는 부분에 치열하게 그리고 독하게 도전하든지. 김수현은 후자를 선택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잠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지금 안 하면 밤에 잠을 못 잘 것 같고, 영원히 후회할 것 같고, 마음 속에 천불이 일어나 이 천불로 인해 내가 죽을 것 같으면 무조건 해야 한다. 그래야 그 선택에 의미가 생겨난다. 그리고 가치도 생겨난다. 게다가 아주 드문 경우지만 심지어 생각지도 못했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nbsp; 물론 이 영화의 경우에, 김수현의 경우에는 기적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의 결말은 눈물 뿐이었다. 친절한 금자씨의 결말처럼, "수현 씨는 그토록 원하던 영혼의 구원을 받지 못했다." 사실 기적 없고, 아무 일 없이 예상했던 수순으로 흘러가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이다. 하지만 어쨌든 천불에 의해 집어삼켜졌고, 괴로워졌을지라도 김수현은 이제 잠에 들 수는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주연의 가족마저 다치고 죽었다 하더라도, 그 인간이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김수현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수현은 자신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 일을 한 것이고, 그렇게 복수의 실패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장경철을 죽였다. 김수현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했다.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그렇게 무슨 일이라도 하면 혹여 누가 아는가? 저 멀리 저승길에서 오르페우스의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죽은 자가 산 자로 돌아오는 기적이라도 생길지?&nbsp;&nbsp;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며 이 사회 그리고 세상의 불공평함, 불공정함, 무심함이라는 악마를 본다. 그러나 악마를 보았다 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면 도망조차 치지 못한다. 언제나 행위하는 것이 행위하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적어도 잠에 들기 위해, 후회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천에 하나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벼랑 끝의 거센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 같이 있을 '변화' 혹은 '기적' 혹은, '구원'을 위해.&nbsp;&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img/19dvd_150cover.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2070402</link></image></item><item><author>설표</author><category>영상</category><title>남성의 욕망이라는 팬옵티콘에 갇힌 여성 – 영화 「활」을 보고 - [김기덕 감독의 활 - 할인행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23</link><pubDate>Sun, 30 Nov 2014 02: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wolf974/723742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090264191&TPaperId=723742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83/12/coveroff/909026419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9090264191&TPaperId=723742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김기덕 감독의 활 - 할인행사</a><br/>김기덕 감독, 전성환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8년 03월<br/></td></tr></table><br/> &nbsp;&nbsp;&nbsp;&nbsp;&nbsp; 김기덕 감독의 영화 「활」은 영상미가 뛰어난 영화이다. 극 초반, 카메라는 푸른 바다 위에 덩그러니 떠 있는 큰 배 한 척을 잡는다. 영화는 겉만 보았을 때는 평안하고 아름다운 영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배 안에는 욕망이 강하게 도사린다. 카메라의 담담하지만 집요한 응시, 강한 욕망과 염원이 솔직하게 드러나는 영화가 바로 이 「활」이다.&nbsp;&nbsp;&nbsp;&nbsp;&nbsp; 이 영화에서 중심인물은 할아버지이다. 그는 일곱 살짜리 소녀를 데려와 대략 십 년 동안 키웠다. 그는 소녀가 열일곱 살이 되면 결혼할 계획을 하고 있다. 그의 모습은 언뜻 보면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잠든 소녀의 길이를 줄자로 재고, 일 나가기 전에 소녀를 위해 상을 차려주는 그만의 보살핌은 따스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는 달력의 하루하루를 빨간 펜으로 지워나가며 소녀와의 결혼을 기다린다. 할아버지는 소녀를 닦아주고, 같은 공간에서 매일 잠을 잔다. 그러나 언제나 소녀의 손을 꼭 잡기만 할 뿐 그 이상의 성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다. 할아버지에게 소녀는 지켜줘야 하는 신붓감이다. 심지어 소녀에게 손을 대기라도 하면 배를 찾아온 낚시꾼들에게 경고의 활을 쏘기도 한다. 할아버지는 소녀를 자신과 배라는 일종의 팬옵티콘적 구조에 가두어 둔 상태이다. 절대적 보호자인 자신이 소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응시한다.&nbsp;&nbsp;&nbsp;&nbsp;&nbsp; 그러나 팬옵티콘의 죄수와도 같은 소녀는 자신이 응시의 대상인 것에 익숙해져 있다. 할아버지와 소녀는 세상과는 다른 질서를 가진다. 그 둘의 관계는 외부인들에게 의심과 편견이 가득 찬 판단하는 시선의 대상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소녀는 서로 바라보는 방식에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는다. 사회의 도덕질서가 적용된 시선을 갖게 된다면 할아버지와 소녀는 그 배에서 같이 살 수 없다. 존 버거의 보는 방식이 말하는 것처럼, 할아버지와 소녀는 외부인들과는 다른 사회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가지고 있기에 외부의 윤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nbsp;&nbsp;&nbsp;&nbsp;&nbsp; 그 둘의 관계가 일반인들과 다름을 묘사하는 부분은 할아버지와 소녀가 치는 활 점을 보여주는 데서도 나온다. 활 점을 치는 방식은 위험하다. 방법을 대충 요약해보자면, 소녀가 그네를 탈 때 할아버지가 활을 쏘아 부처 그림을 맞춘다. 할아버지가 활을 세 번 쏘고 있는 동안 소녀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유혹하듯 미소 짓는다. 활 점을 치고 난 후의 결과는 소녀가 할아버지에게로, 할아버지가 다시 활 점을 의뢰한 사람에게 귓속말로 전달하며 이루어진다. 요컨대 소녀와 할아버지의 소통은 다른 이들이 큰 소리로 감히 들을 수 없는 것이며 소녀와 직접 소통하는 것은 할아버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허락받지 못한 일이다. 소중한 신붓감이 할아버지와 나누는 교류의 정점이야말로 활 점인 것이다. 이러한 세계는 남성의 근원적 욕망을 대변하는 할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팬옵티콘이며 소녀를 자신의 것으로 교육시킨 내용 그 자체이다.&nbsp;&nbsp;&nbsp;&nbsp; 혼인 날짜가 다가오던 어느 날, 외부 세계에서 젊은 대학생이 오면서 이들의 세계에는 균열이 가게 된다. 대학생은 소녀를 사랑하게 된다. 외부 세계의 질서를 대표하는 그는 할아버지에게 소녀를 놓아달라고 항의한다. 대학생의 말들은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의 시선을 상징한다. 그뿐 아니라 소녀의 자발성으로 유지되던 팬옵티콘도 소녀가 자신에게 주어진 객체성을 깨고 여자로서의 주체적인 시선으로 대학생을 응시하기 시작하며 완벽히 불안해진다. 할아버지는 결국 자신의 욕망을 포기해야 하는 지경이 된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애욕은 이를 불쌍하게 여긴 소녀가 결국 그와 혼례를 올리고, 배 위에서 죽은 할아버지의 영혼과 섹스하면서 해소된다.&nbsp;&nbsp;&nbsp;&nbsp; 이 영화에는 남성 위주의 욕망이 극단적으로 녹아 들어가 있다. 할아버지가 만든 배 위의 팬옵티콘적 세계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만들어놓은 사회 구조와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남성들은 능동적인 시선으로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구속한다. 여성은 그에 길들여져 있으며 담담하고,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소녀와의 성적 결합을 지향하는 할아버지의 욕망은 그 위에서 정당성을 갖게 된다. 할아버지가 소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동등한 존재를 바라본다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정권을 가진 그에게 소녀는 자신의 감옥에 갇힌 죄수이자 신부이다. 그런 그녀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며, 배신행위이다. 그들의 관계는 명백히 불평등하다.&nbsp;&nbsp;&nbsp;&nbsp; 배 위에서는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남성 전체의 욕망의 시선이 담겨 있다. 다른 남자들에게 역시 소녀는 응시의 대상이며 특히 그녀의 젊은 육체가 그렇다. 그들에게 그녀는 늙은 남자의 애첩에 불과하며, 철저한 소유물이다. 그녀를 만지는 그들의 손은 인간이 아니라 장난감을 만지듯 거침이 없다. 단지 할아버지라는 주인에 의해 제지될 뿐이다. 그녀를 그나마 욕망의 시선보다 동정이라는 애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젊은 대학생이다. 그러나 그조차도 그녀가 오줌을 싸는 모습, 목욕을 하는 모습을 훔쳐본다. 이 영화 속에 나오는 유일한 여성인 소녀는 모든 남자들이 탐내는 여성의 파편화된 육체이며 불타는 욕망의 대상이다. 그녀의 신체는 남성들이 갖는 절시증의 대상이며, 육체적 욕망을 이룰 수 있는 수단에 불과하다. 소녀는 심지어 팬옵티콘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할아버지의 욕망을 풀어주어야만 한다.&nbsp;&nbsp;&nbsp;&nbsp; 영화 「활」의 결말에서 소녀는 팬옵티콘에서 벗어나기 위해 할아버지를 진심으로 동정해야 했고, 할아버지에게 자신을 바쳐야 했다. 소녀를 가지고 싶어 한 할아버지의 욕망은 그로써 해소되고, 비로소 소녀의 탈출을 용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인간의 욕망에는 구원이 필요하며 그를 위해서는 여성의 성이 필요하다는 메시지이다. 이는 영화를 관통하는 카메라의 시선 역시 철저한 일방향이며 인간으로 설정되는 유일한 주체가 남성뿐임을 전제한다. 팬옵티콘은 영화 속의 인물만이 아니라 영화 외부의 세계에서도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속에서 여성은 영원한 응시의 대상, 절시증의 수단이며 주체가 될 수 없는 객체이고 무엇을 선택하든 남성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자발적인 구원자도 될 수 없다. 궁극적으로 이 영화는 할아버지라는 남성의 구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외부세계로 나간 소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팬옵티콘임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nbsp;&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83/12/cover150/909026419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831247</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