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8월 독서정산


이번 달 내 손을 거쳐갔던 책들

 1. 밀란 쿤데라 저, "소설의 기술", 민음사(2013) 

 2. 릭 핸슨 외 1명 저, "붓다 브레인", 불광출판사(2010)

 3. 단 하자비 저, "현상학 입문", 길(2023)

 4. 우자와 히로후미 저,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 사월의책(2016)

 5.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저, "죽어가는 자의 고독", 문학동네(2012)

 6. 버나드 윌리엄스 저, "윤리학과 철학의 한계", 필로소픽(2022)

 7. 전기가오리의 출판물

 8. 카를로 로벨리 "THE ORDER OF TIME", 펭귄북스(2019)


참 이것저것 많이 붙잡았다. 다만, 완독한 책은 거의 없다. 산만했던 내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다. 우선 쿤데라의 책 "소설의 기술"


저번 달에 완독한 책이다. 삶에 방향성을 잃은 듯한 요즘 10여년 전 나를 사로잡았던 작가, 작품들을 다시 가까이해보자며 붙잡았던 쿤데라의 책 중 하나. 발췌하면서 단상이라도 남겨야겠다 싶었는데 절반 정도 하다가 그만뒀다. 인간의 망각된 부분을 찾아가는 것, 실존을 탐구하는 것, 상대성과 애매성에 기초한 세계의 모델인 소설... 좋다. 그렇다 치자,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하지만 그의 소설이 상대성과 애매성에 기초한 이 세계에서의 나의 갈등과 결단에 대해서 말해주는 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 갈등과 결단은 내가 내 삶의 구체성, 맥락을 곱씹으며 내가 나의 내면을 천천히 들여다봐야만 갈무리가 지어지는 거니까. 사실상 나를 방기한 탓에 발생한 다양한 문제들, 또는 지금 내 위치에서 조금 더 가까이 존재하는 문제들과 관련해 쿤데라의 저 말들은 내 삶과 너무나 멀게 만 느껴졌다. 그냥, 지금 읽을 때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책은 괜찮은데 이 책을 붙잡게 된 데에 대해서는 단상을 조금 남겨야겠다.

나는 차가 없다. 주위 친구들 보면 직장을 다니는 녀석들은 거의 다 차를 몰고 다니는데 나는 아직 살 생각이 없다. 차의 편안함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그 돈 주고 사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보다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직접 걸어 다니는 데에서 오는 여러 이점이 아직은 좋기 때문인 것도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대다수의 공간이 굉장히 자동차 친화적인 곳으로 계속해서 구조화되고 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회적 비용이 충분히 내부화되지 못하고 외부화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자동차 친화적 공간으로 도시 공간을 구조화하기 위해 들어가는 다양한 비용들(도로, 주차장, 각종 신호 체계 시설 등), 끊임없이 들리는 자동차 소음, 환경오염, 교통사고 등 이제는 마치 디폴트값인듯 되어 문제인지조차 잘 인지되지 못하는 다양한 요인들. 과유불급이라 하지 않나. 자동차와 관련해서 좀 그런 상태가 아닌가 싶어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붙잡은 게 이 책이다.


한 달의 독서생활을 돌아보며


악순환의 한 달이었다. 회사에서 일에 털리고 스트레스가 가득한 채로 집에 돌아오니 누워서 핸드폰을 쳐다보는 시간이 유독 더 길어졌고, 몸과 마음이 많이 망가졌다. 산만해져 이것저것 책을 붙잡았지만 정작 완독한 건 없었다. 이러려고 이 회사에 들어온 게 아니었는데.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인 이상, 솔직히 돈은 좀 적게 받아도 상관없지만 워라벨이 훼손되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번에 다시 확실히 느꼈다. 직장 생활에 어울리는 인간은 아니라는 것, 이 회사를 다닐 때 내 우선순위는 확실히 워라벨이라는 거. 

실패하면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회사생활을 하며 변해가는 내 모습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데, 가장 큰 이유는 책과 글이 삶에서 점점 멀어졌고, 그에 따라 내가 사라져가는 것 같다는, 퇴화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별 수 없다. 회사에서는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는 만큼으로만 하고 나머지는 크게 신경쓰고 싶지 않다. 날씨도 선선해졌으니 다시 책과 글을 삶 가까이에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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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1.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이다. 분량도 많지 않고 서사도 단순해 읽는 게 어렵진 않았으나, 파고들수록 난해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소설도 주제보다는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면 쓸 생각이야.”(11)라고 소설 속 화자가 말했던 것처럼 형식의 독특함 때문이었을까. 예술(영화, 문학, 연극 등)을 다룬 예술(소설)이라는 점, 허구와 현실을 뒤섞는 서술 방식을 사용했다는 점이 그랬다.

 

2. 이야기해보고 싶은 키워드는 읽고 해석함으로써, 고민하고 씀으로써 치유되는 문학’, ‘여성의 성장 서사’, 노년과 소수자‘, ’전쟁과 정치에 대한 것 등등 꽤 여럿 있었다.

서사는 짧은 분량 상 단순하다. 영화 제작자 고모리와 여배우 사쿠라’, 소설가 겐자부로가 고모리의 주도로 미하엘 콜하스의 영화화를 시도하다 실패하지만 30년 후에 다시 모여 갈무리한다는 이야기다. 서사의 핵심이랄 수 있는 ‘8밀리 판 애너밸 리영화의 무삭제판에 담긴 진실은 초반부터 끊임없이 간접적으로 제시되고 있어서 솔직히 이야기 자체가 흥미진진하진 않았다. 외적으로 몰입감을 부여하는 갈등도 얼마 없는데다가 사쿠라의 정서적 혼란같은 중요한 내적 갈등마저 간접적으로만, 드물게 제시될 뿐이어서 잔잔하게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고모리는 () 미국, 독일, 중남미, 아시아의 제작 팀이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을 각각 영화로 제작해서, 클라이스트 탄생 200주년에 맞추어 동시에 상영할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했다.“(37)

 

막 소녀기로 접어들 무렵의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시키는 대로…… 그것도 미국 군인의 끔찍한 …… 강요로 만들어진 것에 대해 오래 생각하고 내린 결론으로 늙은 여자가 계획하는 일에, 분명히 협력해줄 것이라고 했네.”(20)

 

3. 앞서 이 소설의 왠지 모를 난해함이 형식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예술을 다룬 예술이라는 사실 자체에서 난해함이 오는 건 아니었다. 그건 형식 자체에서 왔다기보다는 형식에서 파생된 효과에서 왔다.

겐자부로가 소설에서 다룬 예술은 허구의 것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진짜로 있는 것들이다. 애드거 앨런 포의 애너밸 리라던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라던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도 그렇다. 문제는 이런 작품의 역할이 소설에서 내부적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이 작품들을 텍스트 외부에서 어느 정도 끌고 와야만 그 역할이 이해가 되고 갈무리가 된다는 점일 것이다. 내가 느낀 난해함은 여기에서 일부분 왔다. 포의 애너밸리’, 나보코프의 롤리타’,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모두 읽어본 적이 없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애너밸 리는 포가 자신의 사촌이자 아내였던 버지니아 클렘이 죽은 후 그녀를 기리며 쓴 사랑 시이고, ‘롤리타는 나보코프가 애너밸 리에 많은 영향을 받아 쓴 소아성애자 험버트에 관한 이야기다. 겐자부로의 소설에서 애너벨 리는 그런 점에서 포의 시에서의 상징보다는 롤리타에서의 님펫에 가까운 의미로 쓰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물론 겐자부로의 소설에서 애너벨 리이자 롤리타는 사쿠라이고 험버트는 마거섁 교수겠다. 이렇게 소설 안에서 차용된 각종 작품들의 맥락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겐자부로가 도대체 이 작품을 왜 끌고 왔는지, 이 작품의 특정 구절들이 소설 안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게 되어있다는 게 난해함의 한 이유였다.

형식적인 난해함 중의 다른 한 요소는, 겐자부로가 현실과 허구를 뒤섞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직조했다는 점이었다. 히카리는 실제 겐자부로의 아들이고 와타나베 교수도 실제로 있었던 사람이다. 읽다 보면 소설의 화자는 겐자부로 자체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소설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겐자부로처럼 보이는 이 소설의 화자는 정말 겐자부로인가? 그 의도를 알진 못하겠지만 오히려 이런 질문을 노리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소설의 화자는 작가와 무관할 수 있는가? 무관하지 않다면, 이렇게 쓴들 무슨 상관이랴, 라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역자가 해설에서 언급하듯 작가는 문체를 다듬는 일로 앙가제한 것이며 소설의 리얼리티를 구체화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문학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문학을 현실과 인생으로 만들어나가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4. 주제는 많지만 나는 역자 박유하 교수가 해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문학과 치유라는 키워드에 집중해보고 싶었다. 역자는 다음과 같이 적절히 요약한 바 있다.

 

영화 제작 과정이 모두에게 하나의 치유 과정이 되고 있다는 것이 오에가 발견한 새로운 형식일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위무하는 예술로서의 문학과 영화에 대해 쓴 소설이기도 한 것이다.”(236)

 

마거섁 교수의 의도를 소설 내용만으론 명확히 알긴 어렵다. 하지만 그는 사쿠라에게 자신의 기묘한 성적 취향을 강요한 가해자이자 갈 곳 없는 그녀를 돌본 보호자였다. 그녀는 보호자이자 가해자였던 그에게 느꼈던 양가적이고도 혼란스러운 감정 때문에 트라우마를 갖고 고통을 받으며 살았는데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클라이스트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 각색하는 과정에서 자기 경험과 감정, 진실, 실체를 조금씩 마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맥락에서 사쿠라는 영화의 주인공을, 여성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바꿔버린다.

 

이건 정말 대수확이에요! ‘메이스케 어머니환생한 메이스케를 보좌하는 역할로 봉기에 참가한 것이 아닐 거예요. 억울하게 죽은 메이스케의 리스베트 역할도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녀가 진정한 봉기의 주동자였어요. 이건 내 영화예요!”(83)

 

사쿠라 씨는 복수의 일념에 불타 분노하고, 울부짖는 여성으로서의 메이스케 어머니가 자신이 원하던 캐릭터라고 말하고 있어.”(88)

 

사쿠라는 영화의 주인공의 이미지를 설정하면서 동시에 자신 또한 새롭게 만들어나간다. 사쿠라에게는 자신이 점령군의 성적 노예가 아니었다는 확인이 필요했는데 그 계기를 작가의 어머니와 소설 속 여성에 대해 생각하는 일을 통해 찾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쿠라는 가엾은 고아가 아닌 강한 여성으로 자신을 이미지화하고 그 여성을 연기하는 일로 새로운 자신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231, 해설)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사쿠라의 내면과 내적 변화가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하게 암시되고 있다는 점은 특히 아쉬웠다. 사쿠라가 겐자부로 어머니의 연극 공연에 관심을 가지고 특히, ‘넋두리를 통해 자기가 맡은 캐릭터의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과정이 어떻게 보면 그 변화를 드러낸다고 할 수도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좀 부족해 보인다. 어쨌든 사쿠라는 메이스케 어머니의 위치를 끌어올리고 그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는 그 역할에 자신을 이입했으며 이렇게 소설을 각색하고 영화를 기획하면서 조금씩 치유된다. 이는 와타나베 교수 사후 무기력해졌던 겐자부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렇게 점차 용기를 내고 진실에 다가갔을 때, 약간은 준비되지 않은 채로 마주한 현실은 그녀에게 버거웠던 것 같다.

 

굵은 알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교토의 호텔에서 들은, 꿈을 꾸며 우는 소녀의 호흡으로 그 울음소리는 이어졌다.”(184)

 

애너벨 리 영화를 찍는 순간에 데이비드는 사쿠라에서 저지르면 안 될 짓을 저질렀다. 고모리는 이 영화의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인생이 걸린 문제이며 그 문제와 직면해서 근본적인 치유로 나아가야 할 관문이라는 생각에 무삭제판을 사쿠라에게 보여줬다고 주장한다. 난 이 장면을 보면서, 작품을 재해석하고 특정 인물에 자신을 대입함으로써 찾아오는 예술이 지닌 치유의 효과가 있지만 그 치유는 갑작스러운 꺠달음보다는 점진적이고도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일종의 성장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게 사쿠라는 영화를 준비하며 조금은 치유되었지만, 여전히 과거의 상처를 직시할 정도는 되지 않았고, 그렇게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타격은 사쿠라가 정신병동에 가야 할 정도였다. 다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30년 동안 계속한 영화에 대한 생각이라고 고모리가 말했던 것처럼, ‘미하엘 콜하스 계획이 갑작스러운 사건들 때문에 무너진 뒤로도 그녀는 계속해서 영화를 생각했다. 그리고 겐자부로의 동생 아사에게서 메이스케 어머니캐릭터 구체화를 위한 넋두리의 구절들을 계속해서 보고받아왔다. 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계속 예술을 읽고, 보고, 만지고, 재해석하고, 각색함으로써 사쿠라가 점차 상처를 받아들이고, 응어리진 부정적 정서를 분출하고, 회복해왔다는 사실을 뜻한다. 원초적 상처가 강렬할수록, 상처에 약을 바르고, 딱지가 앉는 것을 보고, 새살이 돋는 것을 보기까지 정말 지난한 노력과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건 맞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그 과정에서 예술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다.

 

“’넋두리로 풀어내고 싶은, 엄청난 응어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넋두리, 숲 속, 숲 주변의 여자들이 총출동해서 너도 나도 울며 몸을 흔들고, 반나절이나 감동했던 거지. () 토지의 여인들 모두에게, 오래된, 그야 말로 봉기가 있었던 그 옛날부터 비탄이며 분노가 쌓여왔다는 것이지! 그리고 사쿠라 씨는, 마음을 정했다는 식으로 말했어. 30년 전, ‘미하엘 콜하스 영화를 찍으려고 했다가, 연극 공연 이야기에 감동받았을 때, 실은 자신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불안했다고. 그러나 지금은 자신에게 그만큼의 비탄과 분노의 경험이 있다고. 지금이야말로 그걸 하고 싶다고.”(199)

 

5. 사쿠라의 모습은 이런 생각을 하게 했다. ‘이렇게만 하면 금방 바뀐다, 너도 할 수 있다고 외치는 빠름과 강박의 시대지만 인간은 그와 맞지 않다. 변화는 천천히 온다.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에서 나만 이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이렇구나라는 소속감과 안정감을 주고, 더 나아갈 수 있는 동기와 용기, 구체적인 모습을 제공하는 예술(소설 등)은 중요한 역할을 해낼 수 있다. 개인에게 방법론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이렇게 하라), 정서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느꼈다) 또한, 읽고 쓰는 일이 단기적으로는 삶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것 같지만, 길게 봤을 때는 변화와 성장을 위한 최선의 길이고 그것은 묵직하게 꾸준히 했을 때만 천천히 찾아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느끼게 됐다. 겐자부로에게 소설쓰기도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게 아닐까. ‘소속감, 안정감, 치유, 변화와 성장과 같은 키워드의 맥락 속에서.

 

6. 한 번이 아닌, 여러 번 회독하다 보면 늙는 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나이와 다르게 보이는 외모, 또는 일부 신체의 특성, 어떤 인격적-행동적 특징은 변화와 성장 뿐 아니라 성숙, 나이듦이라는 키워드와도 연결될 수 있는 것들이다)나 사쿠라 뿐만 아닌 겐자부로와 고모리의 관점에서의 치유와 변화, 성장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뤄둬야 겠다.

 

7. 앞서 말한 것처럼, 문학과 치유라는 관점에서, 사쿠라의 내적 변화가 조금은 두루뭉술하게 묘사된 것도 좀 아쉬웠고(예술을 읽고, 재해석하고, 각색하는 과정 자체가 내적 변화의 과정이기도 하겠지만, 솔직히 그런 식으로 유추되는 사쿠라의 내면만으로는 예술과 치유와의 관계가 매우 피상적으로 묘사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적어도, ‘가해의 복잡한 동기를 묻지 않았을지 언정 피해자의 복잡한 심리다층적으로 묘사할 필요는 있었다. - 이나라) 이 소설에서 묘사된 여성상 자체도 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소설에서 묘사된 여성상(분노, , 원혼)을 보며 다음의 구절과 야나기 무네요시가 떠올랐는데

 

관조적인 영화 성장영화에서 주로 앞세워지는 것은 여성의 피해상황과 무력함인 경우가 많다. 혹시 이들 영화가 전시하는 이미지는 이미 한국영화가 순수하고 상처받은 존재로 표상해왔던 여자아이 이미지의 반복이 아닐까? 이때 아이는 순수하기 때문에 세계의 질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세계의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순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는 아이는 상처받은 존재이기에 순수하고, 순수하기에 상처받는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이나라, ‘성장하는 여성, 달라지는 여성서사’)

 

사쿠라의 모습에서 위 구절의 이미지가 떠올랐다면 좀 지나친 걸까. 이런 이미지의 한계는 소설 내부에서 미하엘 콜하스 계획의 주인공이 메이스케가 아닌, ‘메이스케의 어머니가 됨으로써, 그리고 여성이 봉기의 주동자가 됨으로써 어느 정도 극복이 시도되는 것 같긴 하지만 이는 허구속으로의 도피가 될 여지는 없는 걸까. 다만, 이렇게 읽어버리면 소설이나 예술의 가치가 폄하될 것이다. 그 극복의 시도 자체에서의 의의를 찾는 식으로 읽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하 엔야 코라야

돗코이 잔잔 코라야

봉기에 나섭시다

우리들 여인들이여 봉기에 나섭시다

속지마라, 속지 마라!

하 엔야 코라야

돗코이 잔잔 코라야”(219)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의 정서라는 말을 사용한 사람이자, 한의 정서와 비애미를 한민족 예술의 본질적 특징으로 규정했던 사람이다. 그렇게 볼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한민족 예술을 한의 정서나 비애미로만 설명할 수도 없고, 그런 행위는 역설적으로 숙명론을 끌고올 수도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나는 이런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야기가, 소설 속의 여성의 이미지와 매우 흡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여성이 봉기의 주동자가 됨으로써 무력함이라는 이미지는 극복될 지언정, ‘피해받는 여성, 상처받은 여성, 그럼으로써 원한이 쌓이고 안에 분노와 한이 쌓인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극복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여성의 이미지도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비판과 똑같은 비판이 적용될 수 있겠다)

 

어머니가 위엄 있는 의상에 큰 가발을 쓰고 메이스케 어머니의 넋이 되어 울부짖듯 분노에 심은하듯 노래를 계속하던 모습 전체가 기억 속에 온전히 되살아나 지금 나와 함께 있었다.”(219)

 

불굴의 저항심을 가진 여성이 한 번은 봉기하여 승리했지만, 다시 한 번 새 시대의 권인 대참사와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요. 그 싸움에서도 이겼지만, 함께 봉기한 무리들과 헤어지고 나니, 아들은 구세력에 의해 돌에 눌려 죽고, 자신은 강간, 윤간을 당한 겁니다. 절망감으로 탈진해 누워 있는 여인에게, 좋았느냐고 묻는 남자가 있었던 거예요…… 이후로도, 세상이 어떤 식으로 변하더라도 여인들에게는 변하지 않는 고난이 이어지는 거지요.”(171)

 

치유와 성장의 서사 안에서 사용하기 쉽고, 또 벗어나기 어려운 이미지이긴 하지만

 

8. 희망이 없는 건 아니나, 역시나 사는 일은 지난하다는 말로 이번 글을 갈무리해야겠다. 그렇기에 이런 고민과 행동이 가치있는 거겠지만 말이다. 어떻게 하면 읽고 쓰면서 성장하며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사쿠라처럼, 30년을 뭔가에 몰입하고 그에 대해 고민하며 살 수 있을까. “폭력을 경험하고, 폭로하고, 고백하는 인간을 피해자로 환원하지 않고 인간으로 출현할 수 있게 하는 이미지와 픽션의 전략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이나라, 위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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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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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인간 또라이 아냐?'

책을 덮은 후 미시마 유키오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고는 내 내면에서 이런 소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실제 내면에서 솟아오른 소리는 저 문장보다 조금 더 과격하고 환멸감이 담긴 표현이었지만 말이다. 다만, 저 '또라이'라는 표현에는 환멸감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적 재능을 향한 긍정적 평가도 들어있으니 부정적이기보다는 양가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2. "가면의 고백"에 등장하는 화자처럼 병약하고, 허약하고, 기질이 예민한 캐릭터가 낯설지는 않았다. 조모의 과보호는 주로 여성들 사이에서 자란 니체를 떠오르게 했고 허약하고 기질이 예민한, 자아에 관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은 홀든 콜필드를 떠오르게 했다. 다만, 이 책의 화자는 동성애자이기까지 하다는 점에서 본 적이 없는 특별한 캐릭터였다. 솔직히 좀 신선했다.


3. 미시마를 찾아보면 따라다니는 키워드들이 있다. '탐미주의자', '우익', '남성문학', '할복' 등. 이 중에서도 나는 미시마가 할복을 했다는 사실이 좀 충격적이었던 탓에, "이것은 역시 미시마의 자화상, 자전적 소설이라고 받아들이는 편이 옳을 것이다."(235)라는 사에키 쇼이치 평론가의 말처럼 이 소설에서 미시마를 찾아 읽어보고자 했다. 즉, 이 소설을 미시마의 자화상처럼 여기고 도대체 미시마의 어떤 요소가 '할복', 나아가 '우익', '전쟁', '남성', '죽음'과 같은 비교적 부정적인 가부장적 모습들로 이어지게 된 것인지에 의문을 품고 읽었다.

이런 또라이스러운(부정적 의미의) 모습에도 어떻게 한국에서 잘 읽히는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건지도 궁금했다. 또한, 이 작품이 미시마의 자화상이자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라면, 작품의 화자가 내적 갈등과 혼란을 어떻게 마주하고 극복할 것인지, 극복이 아니라면 어떻게 실패하는지, 성장하긴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함께 가지고 읽었다.


4. 미시마는 왜 읽히는 걸까. 미시마 할복 사건에서 느끼는 쇼킹함의 영향도 있지만 이 책이나 "금각사"에서 엿볼 수 있는 그의 탐미주의(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체)의 영향이 더 큰 듯하다. 책의 초반부에서는 그 유려한 문체가 자아도취로 느껴져 거부감이 있었으나 중반 이후로 넘어갈수록 서사의 몰입도가 증가함과 동시에 문체에 대한 거부 반응도 거의 사라져버렸다. 관념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고 좋은 문장을 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0대에 썼다는 "금각사"는 이 탐미주의가 어떻게 더 농익었을까 궁금해질 정도로.

 

"그 손이 나를 두렵게 한 방식은 현실이 나를 두렵게 했던 바로 그 방식과 같았다. 나는 그 손에 본능적인 공포감을 느꼈다. 사실 내가 공포를 감지한 것은 이 가차없는 손이 내 마음속에 고발하고 소추하는 무언가였다. 이 손 앞에서만은 아무것도 위장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소노코라는 또 하나의 존재가, 이 손에 저항하는 내 유약한 양심의 유일한 갑옷, 유일한 방탄복이라는 의미를 꺼내 들고 나섰다. 나는 반드시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것이 나의, 예의 깊은 밑바닥에서 느꼈던 양심의 가책보다 더더욱 깊은 밑바닥을 가로지르는 당위가 되었다…"(143)

 

5. 미시마의 대리인으로 볼 수 있는 화자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는 화자 자신이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것은 실로 교묘한 완성성을 띠고 처음부터 내 앞에 서 있었다. 무엇 하나 빠진 것 없이. 무엇 하나, 후년의 내가 나 자신의 의식이나 행동의 원천을 그곳에서 찾아보아도 빠진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완벽한 형태로. 내가 어린 시절부터 인생에 대해 품었던 관념은 단 한 번도 아우구스티누스풍의 예정설의 선을 벗어나지 않았다."(23)고 직접 말할 정도로 화자 자신을 잘 설명하는 키워드들이다.

"첫번째는 '분뇨 수거인과 오를레앙의 소녀(잔다르크)와 병사의 땀'이고, 두번째는 '분장욕', 세번째는 동화 속에서 '살해되는 왕자'에 관한 이야기이다.”(255) 그렇다면 이 키워드들은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나는 이 키워드들이 화자의 '동성애적 기질', '남성성에 대한 갈망 및 욕망', '사드마조히스트적 성향'을 드러낸다고 봤다. 거칠게 보면 동성애적 기질은 거짓 자아에 대한 관념적 갈망, 남성성에 대한 갈망 및 욕망은 가지지 못한 것을 향한 동경, 사드마조히스트적 성향은 죽음을 향한, 비애-비장의 미와 관련된 성적 충동과 관련된다.

앞으로 돌아가 보자. 화자의 어떤 점이 미시마의 '우익', '남성', '할복', '전쟁', ‘죽음과 같은 비교적 가부장적인 모습들로 이어지게 된 걸까? 헬스에 빠진 이후 강인한 육체와 남성성에 대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미시마의 모습은 이 소설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허약하고, 병약했던,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소설 속의 화자 또한 강인한 육체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남성성에 대한 갈망이 많은 캐릭터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욕망, 갈망은 동성애적 기질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기에 조금 더 복잡하긴 하지만 말이다. 소설 속의 화자가 미시마의 자화상이라면, 미시마도 분명 강인한 육체, 남성성과 관련된 트라우마가 있을 테고, 그것을 갈망했기에 헬스로 몸을 단련하고 그것을 촬영하는 등의 행동을 했을 테다. 자신을 오롯이 인정하고 사랑하기보다 가지지 못한 것을 향한 열등감, 콤플렉스를 지녔고, 그것을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해결, 표출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군대도 사기를 쳐 빼 먹은 사람이 우익으로 빠진 이유도 이와 무관하진 않겠다. '전쟁', '우익'이라는 키워드는 비틀린, 부정적 가부장 상과 어울리는 단어니까.

'할복', '죽음'은 화자가 지닌 사도마조히스트적 성향과 관련지어 볼 수 있다. 화자는 인간의 육체를 유물론적으로 해체해 보는 걸 좋아한다. 또한, 그 해체의 과정에서 피학-가학성을 곁들이길 좋아한다. (화자가 자주하는 것 자체가 그 가학의 과정이고 미시마는 실제로 성 세바스티안을 오마주하며 화살에 찔리는 피학성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피학과 가학 사이에는 성적 충동과 죽음에의 충동이 복잡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이런 충동이 어떻게 죽음을 어떤 대의, 비장함, 비애의 미와 연결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런 미시마였기에, 그만큼 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하던 그였기에 할복을 할 수 있던 거 아닐까.


6. 하지만 동성애적 기질, 남성성에 대한 갈망 및 욕망, 사드마조히스트적 경향은 그 자체로는 중립적인 키워드로 볼 수 있다. 동성애 기질은 사랑의 한 스타일일 뿐이고 남성성에 대한 갈망 및 욕망은 그걸 지니지 못한 사람으로서 욕망 할 수 있다. 허약하고 나약하게 자랐기에 강한 남성성을 갈망하는 것도 이해못할 일은 아니다. 사드마조히스트적 성향도 하나의 성적 스타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기질과 성향을 수용하고, 때로는 내적으로 잘 해소하면서도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어나가는 일일 테다. 그러나 소설의 화자는 그것을 내적으로 잘 해소하지도 못했고,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기보다 끝까지 타인을 기만하고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이 단상의 초반에 언급했던 성장의 관점에서 보자면, 소설의 화자는 성장하지도("나의 아름다운 정원"의 동구처럼), 마주하지도(마주하고 수용한 "호밀밭의 파수꾼"의 콜필드처럼), 실패하지도(실패하고 절규하는 "포트노이의 불평"의 포트노이처럼) 않았다. 철저히 가면 아래 자신을 숨기며 타인을, 나아가 자신도 기만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끊임없이 흉내 내고 자신을 기만하고, 인공적인 노력을 하고 정상성을 욕망하고, 자기를 수치스러워한다. 과도한 자의식으로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자기가 바라보는 관념의 세계에 빠져 사는 화자에게 맨 얼굴의 삶은 없었다. 가면이 곧 삶이었다. 맞지 않는 가면을 쓴 만큼 내면은 뒤틀렸다. (이런 삶이 곧 미시마의 삶이 아니었을까) 화자는 왜 자신과 결혼하지 못했을까를 묻는 소노코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노코는 아직 세상을 잘 몰라. () 세상이라는 건 서로 좋아하는 이들끼리 언제라도 결혼할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아. () 그리고 나는 그 편지 어디에도 확실하게 결혼할 수 없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어. () 그렇게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소노코는 급하게 결혼을 해버렸고."(212)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자기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에게 원인이 있는 게 아니라 상황 탓, 정황 탓, 명확하게 말하지 않은 자기 말을 지레 짐작으로 넘겨짚고 다른 사람과 빠르게 결혼을 해버린 상대방 탓을 해버린다. 히라마키를 풀었다가 다시 두르는, 젊고 아름다운 사내를 본 순간 "욕정에 휩싸"이고 "소노코라는 존재를 잊어"버리는 데다가 "저렇게 웃통을 벗은 모습으로 여름이 한창인 거리로 뛰어나가 야쿠자들과 한판 싸움을 벌이고, 날카로운 비수가 저 하라마키를 뚫고 그의 몸통에 꽂히고, 저 더러운 하라마키가 피범벅으로 아름답게 물들고, 그리고 그 피투성이 시신이 들것에 실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상상을 하는 화자는 "지금까지 온 영혼을 기울여 쌓아올린 건축물이 참혹하게 무너져내리는"소리를 들음에도, 재빨리 "가면으로 다시 돌아와, 얼어붙을 듯한 의무관념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이상한 질문이기는 한데, 당신, 이미 해보셨죠? 그런 거. 물론 이미 다 아시겠죠? (…)"

즉각 그럴싸한 대답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응…… 알지. 미안하지만."

"언제쯤?"

"작년 봄에."(227)

 

그는 이렇게, 소설이 끝나는 순간까지 도망쳤다.


7. 소설 속의 인물이니까, 타인의 삶이니까, 어떻게 보면 이렇게 쉽게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정상성'의 압박에서 얼마나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건지, 조금은 더 진실한 나의 모습으로 살고 있긴 한 건지를 묻는다면 떳떳하게 답할 수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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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7월 독서정산


1. 밀란 쿤데라 저, "소설의 기술", 민음사(2013), 완독 


쿤데라 소설을 읽기 전에 봤으면 좋았겠다 싶었다. 추상적이고 난해할 수 있는 그의 소설에 대한 길잡이 역할이 가능한 책이어서 그렇다. 그가 생각하는 소설의 정의, 윤리와 기능을 엿볼 수 있었고 그가 소설을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인지, 왜 그렇게 소설을 썼던 건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앎'을 통해 어릴 적 그를 향해 막연하게 가지고 있었던 환상이 많이 사라졌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다가오기 때문일까, 그가, 그의 소설이. 아니,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다시 읽어보니 웃기다. 쿤데라는 실존적 상태만을 묘사하려고 했을 뿐, 그 부조리와 애매모호함을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견뎌내야만 하는 건 결국 나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일 테다.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맥락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달을 돌아보며


1. 바빴다. 바쁜 만큼 퇴근 후 퍼졌고, 도파민에 전 현대인 답게 퍼진 시간에 휴식을 취한 게 아니라 핸드폰을 무엇보다 많이 찾았다. 많이 찾아야 할 건 책이었는데 말이다. 말의 목을 잘라낸 김유신처럼 과감한 결단을 통해 좋지 않은 습관을 없애고 싶은 욕망이 강한 요즘이다. 대학생 때 조금이라도 핸드폰에 신경을 쓰는 게 자각 될 때면 카카오톡을 한 달 지우고 살기도 했는데, 그때의 내 모습이 조금은 그립다.


2. 쿤데라를 읽자고 다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고 기사가 났다. 워낙 베일에 쌓여있던 사람인 데다가 장수까지 한 탓에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좋게 살다 갔을까, 죽기 전에 삶이 후회되진 않았을까, 세상을 떠나가던 순간에 그의 곁에는 누가 있었을까,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이었을까, 란 몇 가지 호기심 어린 질문이 지나갔을 뿐이었다. 몇 달 전에 아리안 슈맹이 쓴 "밀란 쿤데라를 찾아서"란 책을 도서관에 신청해 도착했는데 아직 빌려보진 못했다. 개인적으로 쿤데라라는 인간과 관련된 책이 더 나왔으면 좋겠다만, 소설이 작가와는 독립된 작품으로서만 인정받길 바랐던 그의 바람을 생각해보면 흠... 뭇사람이 왈가왈부하지 않고 쿤데라라는 사람 자체는 잊어주길 바랐을 사람이니까.


3. 어느 군 부대의 비서실에서 일하던 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기이하고도 현학적인 제목에 매력을 느껴 사령관실에 책장에 꽂혀있던 진중문고본을 손에 쥐고 한참을 쳐다봤다. (주말에 청소를 하러 나왔을 때였다)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더듬거리며 좇다가 한동안 니체에 빠졌던 기억도 난다. 물론 책도 쭉 다 읽어버렸고. 나는 당시 왜 쿤데라 소설에 기묘한 감정을 느꼈을까, 그리고 왜 빠져들었을까. 앞서 언급한 막연한 환상(현학적인 개념에 취해)의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실존적 갈망을 소설에 투사한 영향이 가장 컸던 것 같다.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의 세계(나를 짓누르는 책임과 도덕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욕망.


8월에 읽고 싶은 책


The Order of TIme은 계속 읽고, 오랜만에 쿤데라의 참존가를 읽을까 싶기도 하다. 일단 소설의 기술 발췌를 해야 하긴하는데. 붓다 브레인을 조금씩 읽고 있고 보통의 불안도 완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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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다가올 세계에서는 플로베르의 발견이 마르크스나 프로이트의 혁신적인 생각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계급투쟁 없는 미래, 정신 분석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있어도, 이제 머지않아 모든 독창적이고 개인적인 생각을 뭉개 버리고, 그렇게 하여 근대 유럽 문화의 본질 자체를 질식시킬 통상적인 생각, 컴퓨터에 입력되어 매스미디어에 의해 전파되는 통상적인 생각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많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야 하고, 따라서 관심을 끌어야 한다는 절대적 명령의 필요성에 비추어 볼 때 매스미디어의 미학은 키치의 미학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매스미디어가 점점 더 우리 삶을 포위하고 그 속으로 스며듦에 따라 키치는 우리 미학, 우리 일상적 삶의 방식이 되어 버립니다. (...) 오늘날 모더니티란 매스미디어의 엄청난 활력과 혼동되고, 현대적이라는 것은 시대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 획일적이고자 하는, 가장 획일적인 것 보다 한층 더 획일적이고자 하는 필사적인 노력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쿤데라 소설의 기술 민음사 223-224


<쿤데라가 예루살렘 연설을 90년대 초반에 했다. 잡스의 혁신 - 스마트 폰의 등장 - 이후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나 잘 설명하는 말을 20년 전에 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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