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꼬꼬(Rococo)는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의 한 극단적인 형태를 발전시킨다. 로꼬꼬의 '예술을 위한 예술'은 어떤 점에서 19세기의 그것보다 오히려 더 순수하고 본원적인데, 그것은 예술의 품속에서 휴식을 취하려는 경박하고 피곤하고 수동적인 사회에서 저절로 우러난 자연스러운 태도이기 때문이다. 로꼬꼬는 미의 원리가 무제한의 지배권을 가지는 사교문화의 마지막 국면을, 또 아름답다는 것과 예술적이라는 것이 동의어로 통하는 최후의 양식을 대변한다.(p68)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3> 中 


 아르놀트 하우저 (Arnold Hauser, 1892 ~ 1978)가 내린 로코코에 대한 표현 - 예술을 위한 예술과 사교문화 - 에 따르자면,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d'Autriche, 1755 ~ 1793)를 로코코의 여왕으로 표현한 슈테판 츠바이크 (Stefan Zweig,1881 ~ 1942)의 평가는 적절하다 생각된다. 츠바이크는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Marie Antoinette>에서 로코코 문화를 정점으로 이끈 그녀의 삶을  일반적으로 알려진 악녀(惡女)의 이미지가 아닌 다른 관점에서 보여준다.


 로코코, 이 지나치게 세련되고 섬세를 극대화한 고대적 문화의 개화(開化), 이 한가로운 손과 도락을 즐기는 유약한 정신의 세기는 몰락하기 직전에 하나의인물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세기는 왕비의 모습 속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될 수 있는 세기였고, 이 로코코의 여왕으로서 이상적인 여자가 바로 마리 앙투 아네트였다. 근심 없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근심 없고, 낭비가들 중에서도 가장 낭비가 심하고, 멋지고 애교있는 여자들 중에서도 가장 사랑스러운 멋쟁이이며 애교 덩어리였다.(p122) <마리 앙투아네트 : 베르사유의 장미> 中


 <마리 앙투아네트 :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슈테판 츠바이크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죄과를 두 가지로 나누어 평가한다. 용서 받을 수 있는 죄과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과. 츠바이크는 역사 속 인물의 삶에 대한 평가가 한 개인과 역사 속 지위에 따라 다르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림] 마리 앙투아네트(출처 : 위키백과)


 너무나도 경솔하게 역사의 엄청나게 거대한 사명 앞에 나선 것, 유약한 마음으로 가장 격렬한 세기의 논쟁 속에 휘말려들어간 것은 그녀의 죄과, 부인할 수 없는 죄과이다. 그러나 용서 받을 수 있는 죄과이다. 보다 강한 성격이라고 하더라도 거의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시험이었기 때문이다.(p120)... 이러한 부박한 인생관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의심할 여지없이 그녀의 죄과이지만 동시에 그녀가 산 시대 전체의 죄과이기도 하다. 바로 그 시대정신에 완전히 휩쓸려들어감으로써 마리 앙투아네트는 전형적인 18세기의 대표자가 된 것이다.(p122)  <마리 앙투아네트 : 베르사유의 장미> 中


 용서 받을 수 있는 죄가가 준비없이 나약하게 역사의 흐름에 선 것이라면, <마리 앙투아네트 : 왕비의 비밀 일기 Marie-Antoinette: Carnet secret d'une reine >에 담긴 다음의 대목은 용서 받을 수 있는 죄가의 한 표현이 될까.


  1775년 6월 25일, 베르사유. 무엇보다도  루이와  프랑스에 후계자를 안겨주어야만 나의 지위가 확고해진다는 것을 물론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편은 계속해서 침실에 들어오지 않고 나는 그이가 남편으로서 의무를 다해주기를 절망적으로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부담을 안겨주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다정하고 매력적으로 남편을 대하고 있지만, 하루하루 세월이 흐르니 심리적인 압박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 : 왕비의 비밀일기> 中


 아내로서, 다른 한 편으로서 왕비로서 자신의 위치를 고민하는 한 인간의 나약함을 츠바이크는 용서할 수 있는 죄가로 표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는 무엇일까. 그것은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잘못이 아닐까. 결국, 츠바이크의 평가에 따르자면 인간적인 부족함은 용서받을 수 있는 죄(罪)이지만, 역사에 선 공인(公人)의 부족함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되는 듯하다. 


 1789년 6월 7일, 베르사유. 루이와 나는  날이 갈수록  힘드는 새로운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상황이 쉴새 없이 나빠지고 있으니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다. 왕에게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왕비인 나의 지지가  필요하다. 전국에 기근이 창궐하고, 삼부회 의원들의 영향을 받은 백성은 점점 더 과격해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다. 당장라도 폭동이 일어날 듯한 이 위태로운 분위기를 견딜 수 없다. 남편은 프랑스의 국왕이고, 그것은 신의 의지다. 그의 백성 중  누구도 왕을 대신해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마리 앙투아네트 : 왕비의 비밀일기> 中


 1789년의 사람들은 프랑스인뿐 아니라 인간 전체를 해방시키고자 했다. 그들의 시도에는 데카르트가 자신에 앞서 사고된 모든 것을 기피했던 것과 유사한 것, 즉 불합리함과 특수성이라는 낙인이 찍힌, 그들 이전의 프랑스사에 대한 부정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사회를 근본적으로 손질해야 한다는, 문자 그대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프랑스 합리주의 철학과 결부되어 있으므로 프랑스혁명에 선행하는 것이었다.(p146)... 프랑스에서 구체제에 대한 관념에 특별한 힘이 부여하게 될 시간적 연속성의 단절에 대한 그토록 강렬한 느낌은 1789년의 사람들의 합리주의적이고 의지주의적인 급진주의와 불가분의 것이었다. 그들이 하고자 한 것은 자신들의 행동으로 이성 위에 사회를 재창설하는 것이었다.(p147) <기억의 장소 3 : 프랑스들 1> 中


 그렇지만, 역사 속에서 한 인물의 위치를 인간적인 측면과 공적인 측면으로 완전히 분리해서 평가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한 개인의 사상이 그가 가진 사회적 위치에서 행동으로 표현되고, 역사에 발자취로 남긴다고 본다면, 이들을 분리해서 바라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다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기를 살펴보자. 이 일기에는 고대하던 어머니가 된 마리의 기쁨이 표현되며, 우리는.이 일기를 읽으면서 마리가 (왕비로서) 큰 일을 완수했고, 수고한 자신을 위해 작은 선물을 마련한 느낌을 받는다.


[사진] Chateau de Versailles (출처 : https://www.systemair.com/hr/o-nama/reference/chateau-de-versailles-france/)


 1785년 6월 25일, 베르사유.  어머니께서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행복해하셨을까! 왕비의 임무를 완수한 이래 나는 드디어 나 자신이 되었다. 얼마 전부터는 친구들과 함께 트리아농에  내 거처도  만들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배치되어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곳이 되었다... 심지어 거기에 너무도 매력적인 작은 마을도 만들었다. 농부 부부도 고용해서 염소와 양, 수탉과 암닭,  멋진 암소 등 진짜 농장에서 볼 수 있는 가축도 모두 기르게 했다!! 이런 전원의 삶이, 짐승 소리와  꽃피는 자연이  나를 감동하게 한다. 궁정의 예법이나 위선 따위와 멀리 떨어진 이곳의 삶은 무척 평화롭다. <마리 앙투아네트 : 왕비의 비밀일기> 中


 그렇지만, 그녀에게 '작은 선물' 은 결코 작은 선물이 아니었다. 개인의 감수성을 위한 왕가의 과도한 지출은 프랑스 재정을 파탄으로 이끄는데 일정부분 기여를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츠바이크가 말한 용서받을 수 있는 죄과와 용서받을 수 없는 죄과의 경계는 모호하다 여겨진다. 전원의 삶을 동경하여 작은 마을을 조성한 왕과 왕비의 취향은 베르사유를 더 화려하게 물들이며 로코코 문화를 정점으로 이끌었고, 그들 자신들의 삶과 함께 사라져갔고, 그 사이 파탄난 프랑스 재정은 수많은 이들을 굶주림과 죽음으로 이끌었다. 왕과 왕비의 취향과 감정으로 인해 고통을 원치 않았던 수많은 이들의 삶도 격랑 속으로 내처졌음을 생각한다면 용서의 경계는 과연 존재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리가 얻은 명성과 그로 인해 지불해야 했던 대가를 비교해본다면 과연 개인적으로도 성공적인 삶이었을까 하는 의문도 함께 떠올리게 된다.

 

 계몽주의 말기에 신고전주의와 전(前) 낭만주의 감수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얼굴이다. 1774년에서 1789년까지 베르사유를 지배한 젊은 부부에 의해 도입된 이런 두 사조들은 베르사유를 놀랍게 변화시켰다. 고상하고 세련된 개조는 루이 16세 덕분이다. 서가, 모형선박과 전기나 증기기관 수집품들, 위대한 인물들의 조상들, 동양철학자들과 경제활동에 대한 헌정품들, 수제품 작업장 등. 다른 한편 그리스풍인 동시에 양탄자 일색으로 꾸미기 위해 계속 보수된 내실들은 왕비의 취향이다. 또한 일드프랑스의 작은 마을이 베르사유에 옮겨져 재조성된 것도 그녀의 취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작은 마을은 사람들의 말처럼 리본으로 장식된 가짜 초가집이 아니었다. 그곳은 시골영주의 저택에 딸린 실제 촌락에서 일하면서 명사들과 더불어 소일거리를 즐기는 생활을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농가와 젖 짜는 곳, 낚시터, 물레방아, 비둘기장 등과 함께 실제로 농경이 이루어지고 별도의 바이이(bailli)와 순찰대가 다스렸다.(p209) <기억의 장소 2 : 민족> 中


 어느 시대에서 보더라도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이 되는 대신 그녀는 자기 시대의 특질을 여실히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자신의 내면의 힘을 무의미하게 써버리는 동안에도 사실 하나의 의미를 실현시켰다. 즉 그녀 가운데서 18세기가 완성되고 그녀와 더불어 18세기가 끝났다.(p123)  <마리 앙투아네트 : 베르사유의 장미> 中


 용서할 수 있는 죄과와 용서할 수 없는 죄과의 문제는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잘못은 루이 16세의 잘못이기도, 당시 지배계급이었던 귀족과 성직자들의 잘못이기도 하다. 체제의 문제 속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작은 곁가지에 불과하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정도는 지나친 것은 '로코코의 여왕'이라는 시대의 상징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만일 어느 시골 귀족의 부인으로 살았더라면, 같은 인성(人性)을 가졌더라도 역사에 미친 파급력을 훨씬 작았을 것이다. 물론, 역사적 사건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역사의 층위들이 교차해야 하기에 개인의 역할은 제한적이겠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기와 평전을 통해 역사적 인간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엄중한 재판정에 서는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기준은 오늘날의 지도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더 무겁게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사마천(司馬遷, BC 145 ? ~ BC 86 ?)의 <사기열전 史記列傳>의 일부를 옮기며 이번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몽념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잘못도 없이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한참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내 죄는 실로 죽어 마땅하다. 임조에서 요동에 이르기까지 장성을 1만여 리나 쌓았다. 공사 도중에 어찌 지맥 地脈을 끊어놓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바로 나의 죄다." 그러고는 약을 삼키고 자진했다.(p732)... 태사공은 평한다."... 진나라가 처음 제후들을 멸할 때는 천하의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못했다. 전쟁의 상흔도 채 가라앉지 않았을 때였다. 몽념은 명장으로서 이런 때에 백성의 궁핍을 구제하고 노인과 고아를 부양해 모든 백성을 안온하게 만드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강력하게 간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황제의 야심에 영합해 공사를 일으켰다. 이들 형제가 죽임을 당한 것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어찌 지맥을 끊은 탓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사기열전 1 : 몽념 蒙恬열전> 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굿모닝북스 투자의 고전 5
찰스 P. 킨들버거.로버트 Z. 알리버 지음, 김홍식 옮김 / 굿모닝북스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런 풍요감에 들뜬 기간에는 자산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데 기초한 투자소득보다는 부동산 가격과 주가의 상승에서 발생하는 단기 자본 이득을 추구하는 투자자들이 점점 늘어나게 된다... 이어서 하나의 사건이 터지는데, 정부정책 변화나 어제까지만 해도 성공적이라고 여겨지던 회사가 별다른 설명도 없이 파산하는 사건과 같은 일이 벌어지면서, 자산가격은 상승 행진을 중단한다. 자산의 매입을 대부분 차입금으로 조달했던 일군의 투자자들은 결국 대출자금에 대한 이자 지불액이 자산에서 나오는 투자소득보다 커지는 순간,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이나 주신의 투매자로 돌변한다... 이들의 투매는 자산가격의 급락을 초래하게 되고, 패닉과 붕괴가 뒤따를 수도 있다.(p37)

코로나 19바이러스 팬더믹(Pandemic)에 세계자산시장이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고 있는 모습이다. KOSPI 지수가 1600선 아래로 떨어지는 등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이제는 시장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 많은 비가 내리면 공장에서 몰래 버리는 오염수에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는 것처럼, 코로나19가 당긴 방아쇠가 위태롭게 달리던 세계경제를 패닉에 빠뜨리고, 이로 인해 민간경제가 큰 타격을 받는 것같아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당분간은 집값을 잡기위한 추가적인 부동산 대책은 필요 없을 것 같다는 정도가 아닐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리 앙투아네트 - 왕비의 비밀 일기
뱅자맹 라콩브 지음, 이나무 옮김 / 이숲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770년 5월 17일. 베르사유. 내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단 한 사람이 바로 내가 어제 공식적으로 결혼한 남자라는 사실은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이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인가.  나는 폐하께서  왕자보다 내게 더 관심을  보이신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이다. 신부님도 어머니도 나를이런 상황에 대비하도록 가르쳐주시지 않았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들은 내가 남편과 친밀한  시간을  보낼  기회를  전혀  주지  않는다. 내가 조금 더  대범해지고,  내가 먼저 남편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마리 앙투아네트 : 왕비의 비밀일기」에는 오스트리아 황녀로 낯선 프랑스 땅으로 시집 온 이국의 공주의 시선이 잘 담겨있다. 개인의 감정이 아닌 국가의 이익을 위한 정략 결혼 속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에게 관심없는 남편과 그럼에도 왕비로서의 의무 사이에 많이 힘들어한다.

1775년 6월 25일, 베르사유. 무엇보다도  루이와  프랑스에 후계자를 안겨주어야만 나의 지위가 확고해진다는 것을 물론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편은 계속해서 침실에 들어오지 않고 나는 그이가 남편으로서 의무를 다해주기를 절망적으로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부담을 안겨주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다정하고 매력적으로 남편을 대하고 있지만, 하루하루 세월이 흐르니 심리적인 압박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결혼 후 15년이 지나서야 겨우 의무감에서 벗어나 편안함을 느끼는 그녀의 고백에서 우리는 「마리 앙투아네트 :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그녀를 ‘로코코의 여왕‘이라 칭한 슈테판 츠바이크의 수식어가 무색해짐을 느낀다.

1785년 6월 25일, 베르사유.  어머니께서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행복해하셨을까! 왕비의 임무를 완수한 이래 나는 드디어 나 자신이 되었다. 얼마 전부터는 친구들과 함께 트리아농에  내 거처도  만들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배치되어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곳이 되었다... 심지어 거기에 너무도 매력적인 작은 마을도 만들었다. 농부 부부도 고용해서 염소와 양, 수탉과 암닭,  멋진 암소 등 진짜 농장에서 볼 수 있는 가축도 모두 기르게 했다!! 이런 전원의 삶이, 짐승 소리와  꽃피는 자연이  나를 감동하게 한다. 궁정의 예법이나 위선 따위와 멀리 떨어진 이곳의 삶은 무척 평화롭다.

일기에 담긴 마리 앙투아네트의 글에는 많은 개인적인 감정이 드러난다. 우리는 이 일기를 통해 널리 알려진(그러나 사실이 아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를 말한 세상 물정 모르는 왕비의 모습 대신 남편을 사랑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국가를 걱정한 혁명기를 살다간 왕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1789년 6월 7일, 베르사유. 루이와 나는  날이 갈수록  힘드는 새로운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하기만 정치상황이 쉴새 없이 나빠지고 있으니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다. 왕에게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왕비인 나의 지지가  필요하다. 전국에 기근이 창궐하고, 삼부회 의원들의 영향을 받은 백성은 점점 더 과격해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다. 당장라도 폭동이 일어날 듯한 이 위태로운 분위기를 견딜 수 없다. 남편은 프랑스의 국왕이고, 그것은 신의 의지다.  그의 백성 중  누구도 왕을 대신해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루이 15세의 정부 뒤바리 부인에 대한 부정적 묘사 속에 드러난 베르사유 궁정사회의 느슨한 분위기, 반면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급박함 속에 서 드러나는 지배층 인식의 한계 또한 느낄 수 있다. 개인과 공인으로서의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의 짧은 일기를 통해 그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03-17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17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0-03-17 2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호님의 글을 보니...

읽다만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
전기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겨울호랑이 2020-03-18 08:01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츠바이크의 치우치지 않은 판단과 통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레삭매냐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지난 14일 화이트 데이를 맞아 딸아이에게 작은 선물을 했습니다. 아이는 사탕꽃다발을 원했기에, 화원에 들렀지만 사탕꽃다발을 찾지 못하고 나오던 중 흥미로운 식물이 눈에 띄었습니다. 파리지옥.

어렸을 때 벌레를 잡는 식물로 책으로만 접했던 파리지옥을 눈앞에서 직접 보니 정말 신기했습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아이도 좋아할 것 같아 주저하지 않고 바로 가져왔습니다. 예상대로 아이가 파리지옥을 보자마자 격하게 반가워하며, 바로 집에 있는 「벌레잡이 희귀식물 백과」를 꺼내서 좋아했습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니 선물로 잘 구입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른 한 편으로, 촉수를 건들이면 잎을 다무는 파리지옥의 모습을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트리피드의 날」이 떠올리게 됩니다. 걷는 식물 트리피드가 인류의 재난을 틈타 새로운 지구의 지배자가 된다는 다소 우울한 내용의 SF 소설을 떠올린 것은 파리지옥의 움직임 때문이겠지요. 먹기 위해 키우던 식물이 유성에 의해 대다수 인간들이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오히려 인간을 사냥한다는 설정도 놀라웠지만.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들의 서로 다른 대처가 생생했던 작품으로 기억됩니다. 식물이면서도 움직이는 트리피드는 영화 「워킹 데드」 속 좀비처럼 움직이면서도 학습을 통해 발전하는 모습은 영화 「쥬라기 공원」속 벨로시랩터를 떠올리게 됩니다. 물론, 이번에 구입한 파리지옥은 트리피드처럼 걸어다니지는 않기에 해를 끼치지는 않겠지요...

화이트데이와 파리지옥의 조합은 다소 엉뚱해 보이지만, 받는 아이가 만족하면 좋은 선물이라는 생각을 했던 지난 주말이었습니다. 이웃분들 모두 건강한 한 주 보내시고, 아내에게 준 화이트데이 꽃다발 사진을 마지막으로 짧은 페이퍼를 줄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의 '자유' 전통 - 신유학사상의 새로운 해석 이산의 책 4
윌리엄 시어도어 드 배리 지음, 표정훈 옮김 / 이산 / 199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세기 서구에서는 중국이 자기 혁신의 능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하지만,  17~18세기의 유럽에서는 보다 낙관적인 중국관(中國觀)이 일반적이었다. 제수이트(Jesuit, 정식 이름은
The Society of Jesus,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하는,  당시로서는 최신 중국 관련 정보들이 대체로 호의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18세기 유럽의계몽주의자들이 자신들 특유의 합리주의적인 철학사상에 입각하여, 중국을 철인왕(哲人王)이  이성에  따라서  도덕적으로  다스리는  국가라고 이상화시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서구 여러나라들의 동양을 향한 극성스런 세력 확대가 포화상태에 달했고, 계몽적인 정치가 행해지고 있는 문명화된 중국에 대한 예전의 선망도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p171)


나는 각 개인이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 아고 사태에 대해 평가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인 것이다(這是個人的自由). 만일  이 자리에서  내 생각을 말하라고 한다면, 첸무 교수가 지적한 용어 곧 개인의 자유와 ‘인권‘은 서구적인 동시에 그에 못지 않게 중국인들의 제2의 천성‘ 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것은 애당초 중국인들에게  그렇게  낯선  용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p1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