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광개토대왕비(碑)와 관련해서 가장 논란이 많은 32자.


 이에 대해 19세기 말 일본학자들은 "백제와 신라는 이전부터 고구려의 속신으로서 조공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조선반도에 침입하여 백제를 쳐부수고 또한 신라를 토벌하여 그 두 나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며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는다. 여기에 대해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 ~ 1950)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것은 위에서 1) '래(來)'는 '오다'라는 뜻의 동사가 아니라 '~ 이래'처럼 특정 시점으로부터 현재까지로 시간을 제한하는 허사(虛辭) 성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실질적인 동사는 '도(渡)'라는 점, 그리고 2) 뒤의 '以爲臣民'은 '以(此)臣民'에서 대상을 나타내는 목적어 '此'가 생략된 형태인데 3)이 문장의 대주어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므로 그 토벌의 대상인 왜나 백제는 상식적으로 '以爲臣民'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_ 정인보, <조선사 연구 下> , p896


 이러한 설명을 바탕으로 위당은 해당 문구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백잔(백제)과 신라는 이전에는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줄곧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 이래로 바다를 건너오기에 (대왕은) 백잔과 왜구를 쳐부수고 신라로 하여금 이들을 신민으로 삼게 하였다. _ 정인보, <조선사 연구 下> , p895


 아직까지도 광개토대왕비의 해당 문구와 관련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결국 문제는 숨겨진 주어의 문제인 듯하다. 우리 말의 특성상 주어는 명시적으로 표현되기보다 암묵적으로 문장 내에서 해석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의 실증사학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 논란 아닌 논란이 되버린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의 연장선상에서 국민의 힘과 윤석열 대통령의 저열한 '주어 없음'의 해명을 바라보게 된다. 명확하지 않은 표현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놓고 자신의 본의가 아니라는 식의 해명 속에서 일제 식민주의자들의 역사 왜곡을 발견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들이 벌이고 있는 현대사의 왜곡을 생각한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다...


 [관련기사] 또 '주어 없음'으로 빠져나가려다... '나경원 시즌 2' 실패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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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3-04-26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경원 당시 새누리당 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BBK를 설립하였다고만 언급되어 있지 ‘내가‘ 설립하였다고 되어 있지 않다. 이것을 ‘내가 설립했다‘라고 광고하는 것은 명백히 허위˝라고 주장했다. 정당 논평사의 ‘레전드‘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우리말은 영어와 달리 주어를 일일이 넣지 않고 생략하는 경우가 매우 흔한 데다, 이 경우는 맥락상 주어가 이명박 본인이라는 게 너무나도 분명하다는 점을 판사까지 지낸 공당의 대변인이 몰랐을 리 만무했다.

이런 철면피한 대응을 본받아 새누리당의 후신인 국민의힘에서도 검사 출신 대변인이 똑같은 수법을 써보려 했지만, 이번엔 주어가 확실히 들어간 녹취록 원본이 공개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나와같다면 2023-04-26 2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사를 듣고 제일 먼저 떠오는게 2007년 나경원의 ˝주어 없다‘ 였습니다
그 사건이 정신적으로 타격이 되었나봐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벼락처럼 떠오른걸 보니..

겨울호랑이 2023-04-27 06:58   좋아요 1 | URL
말장난도 아니고 일반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어법에 대해 영문법의 기준을 적용시켜 위기를 모면하는 저들의 행태가 이제 지긋지긋하네요. 법 없이도 도덕,윤리적인 기준으로 잘 돌아가는 사회에 법의 기준을 들이대면서 비상식적으로 망쳐가는 저들의 끝은 결코 좋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渼沙_常水 2023-04-27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펑가함을써 민족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좋은 주제입니다. 물론 자긍심만을 추구하려는 일본의 역사왜곡이 문제이지만요. 그러기에 누구라도 수용 할 수 있는 개관적인 근거와 논리가 필요합니다. 요즘뿐 아니라 어느시대에도 정치꾼들의 말은 명분도 대의도 없이 그저 利만을 추구하는 이전투구인지라 뉴스도 안봅니다. 何必曰利하는 그런 사람들 이야기 말고 책속의 좋은 이야기만 하였으면 합니다. 좋은책 소개 항상 감사 합니다

겨울호랑이 2023-04-27 09:0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전체적인 흐름과 사실을 바탕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이로부터 역사적 교훈을 끌어내어 오늘의 우리가 살아가야 할 지표로 삼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 신념을 위해 역사를 왜곡, 해석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진실에 바탕을 둔 신념과 신념을 위해 짜집기 한 사실. 점차 엇나가는 두 길 사이에서 혼란과 갈등이 생겨나는 것 같네요... 渼沙_常水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잊지 않겠습니다
416가족협의회 지음, 김기성.김일우 엮음, 박재동 그림 / 한겨레출판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4월 16일, 너희가 구명조끼 입고 서로 격려하며 공포에 떨면서 구조를 기다릴 때, 이틀 동안 아무도 너희를 구하려 하지 않았단다. 너희가 자랑스러워하던 대한민국이 말이다. 아직까지 진상 규명도 없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구나. 너희들의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과 가족들의 분노, 아픔만 있을뿐. _ 4.16가족협의회,<잊지 않겠습니다>, p88/572

4.16 세월호 9주기. 세월호의 아픔이 치유되지 않았고, 진실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이유로 정권이 교체되었고(물론, 세월호가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촛불혁명으로 이뤄낸 새 정부에서 가졌던 희망도 실망으로 바뀌어, 이제는 더 큰 절망속에 우리가 밀려난 듯하다.

각본대로 움직이는 정치인들이 싫고 그런 정치인들이 좌지우지하는 이런 나라도 싫은데, 사람들은 이제 너희들을 잊으라고 재촉하는 것 같구나. 처음엔 모두 우리를 위로해주며 관심을 가져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를 보는 시선들이 너무나 따갑고 차가워. _ 4.16가족협의회,<잊지 않겠습니다>, p210/572

세월호의 비극이 정권 교체의 빌미가 되었음을 강하게 의식해서인지, 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관심과 소외로 대처하는 공권력 앞에서 또다른 역사의 퇴보를 지켜봐야하는 우리의 처지에서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제는 기억해야 하는 이들이 더 늘었지만, 분명한 것은 망각이 기억을 이겼을 때, 기억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더 커질 뿐.

이제 시간이 계속 흐를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김주열 학생의 주검이 떠오르며 4.19가 시작되었듯 해마다 4.16이 되면 아이들의 죽음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 어떤 방법으로든 해마다 아이들과 희생자들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_ 4.16가족협의회,<잊지 않겠습니다>, p566/572

글의 마지막은 지난 2016년 제주도 출장 당시 제주도 앞 바다를 촬영한 사진으로 마무리한다. 여객선 바깥의 검푸른 바다는 바라만 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러웠는데, 서서히 검은 바다 속으로 잠겨야 했던 아이들과 탑승객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차디차고 컴컴한 바닷속에서 구해달라며 엄마, 아빠를 찾았을 너를 생각하면 아직도 엄마는 잠을 잘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어. 뜨거운 물에 씻을 수도 없더구나. 엄마는 너 따라가고 싶어도 아직 갈 수가 없어. _ 4.16가족협의회,<잊지 않겠습니다>, p396/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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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4-17 09: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제 아침, 4.16이네 하고 마음이 가라앉았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04-17 09:45   좋아요 3 | URL
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기억해야 하는 사건이 참 많습니다...
 

13-18. 葉公語孔子曰 : "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者 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섭공이 공자에게 일러 말하였다. "우리 무리 중에 대단히 곧은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양을 훔쳤는데, 아들인 그가 그것을 입증하여 유죄가 되었습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우리 무리 중의 곧은 자는 당신네 곧은 자와는 다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여 숨겨주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하여 숨겨줍니다. 곧음이란 그 속에 있는 것이외다." _ 도올 김용옥, <논어 한글역주 3> , p358


 용산 대통령실이 미국 CIA에 의해 기밀 문건이 도청되었다는 뉴욕타임스(NYT) 기사에 대해 정작 대통령실은 가짜뉴스이며, 국익을 해지는 거짓 선동과 정치 공세라고 맞서고 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 많이 답답했으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논어 論語>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미국 언론인 NYT가 같은 무리(미국)의 정부의 잘못을 비판한 것은 곧음(直)이 아니기에, 국익(國益)이 아닌 정치적 올바름을 선택했다는. 이제야 정부의 행태가 조금은 일관성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아무리 공자가 위대한 스승이라도 훔쳐간 양이 공자의 양이라도 같은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안보면에서 미국이 전략적 동맹관계에 있다지만, 이와는 별개로 경제면에 있어서는 IRA법안 등을 구실로 국내 반도체, 자동차산업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훔쳐간 것이 우리 기밀이어도 한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손자병법 孫子兵法>의 <용간 用間>편에서 첩보 활동은 적에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술 중 하나다.


 현명한 군주와 어진 장수가 군대를 움직여 적을 이기고 적보다 공을 이룰 수 있는 까닭은 [그들보다] 먼저 [적진의 상황]을 알았기 때문이다. 먼저 안다는 것은 귀신에게 기댈 수도 없으며 일의 표면에 의지할 수도 없으며 추측에 시험해볼 수도 없으며, 반드시 사람에게서 취해서 적의 상황을 알아내는 것이다. _ 손자, <손자병법> , p313


 [관련기사] : http://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25677 대통령실, "미국 도청 거짓... 민주당 국민 선동 급급"


 이미 상대는 우리에게 적(敵)을 대하듯 경제면에서 우리를 압박하고 있는데 그들을 감싸면서 '불순한 세력' 탓을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미국에 대한 굴종은 사대(事大)고, 송양지인(宋襄之仁)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마저도 인식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그들은 일광(日光)횟집 앞에서 도열하는 것을 의(義)로 아는 무리들에 다름 아니다...


 양공은 말했다. "군자는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그를 곤궁에 빠뜨리지 않고, 다른 사람이 전열을 갖추지 못했을 때 북을 두드리지 않는 법이다." 자어[司馬子魚]가 말했다. "전쟁이란 승리하는 것을 공으로 삼아야 하거늘, 어찌 일상적인 말을 하십니까? 당신 말처럼 하면 [틀림없이] 노예가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게 될 뿐이니, 또한 무엇 때문에 전쟁을 하십니까?" _ 손자, <손자병법>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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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질 결심>은 사랑의 기호들에 관한 감상의 영화다. 박찬욱의 감상법은 기호들을 할 수 있는 한 공격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힘을 이용해 자신 앞에 놓인 논리적인 명제들, 논리적인 그림들, 논리적인 세계의 체계들을 파고들 수 있는, 놀랄 정도로 폭력적인 방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저물어가는 해. 밀려오는 파도. 지연된 시간. 모래 구덩이 속의 서래. 물에 젖어 무거워진 해준의 신발. 정훈희의 '안개'. 이것이 폭력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인가.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인가. _ 프리즘오브 프레스, <프리즘오브 PRISMOF 특별호 : 헤어질 결심>, p19


 오랜 알라딘의 이웃분으로부터 책선물을 받았다. 영화 <헤어질 결심>을 인상깊게 보시고 책선물을 해주셔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헤어질 결심>을 다시 떠올린다. 평론가 정성일의 글처럼 영화는 수많은 상징과 의미로 연결되어 있다. 복잡한 수식처럼 얽힌 이들 관계를 소거(消去)한다면 최후에 남는 것은 '사랑 이야기'다. 정성일은 본문에서 사랑의 기호들을 설명하면서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 ~ 1951)의 논리를 따라간다. <헤어질 결심> 뿐 아니라 박찬욱 감독의 전작으로부터 이어오는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으로 작품 세계를 바라본다. 이 같은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헤어질 결심>의 사랑 이야기는 조금 더 명확하게 보인다. 철처하게 계산된 서래의 움직임 속에 놀아나는 해준. 지쳐가는 해준에게 서래는 스스로 영구미제(永久未濟)의 인물이 되며, 해준에게 잊혀지지 않는 자신의 사랑을 새긴다.


 서래는 해준을 해파리로 만든다. 서래는 해준을 재우면서 최면을 걸듯이 말한다. "바다로 가요. 물로 들어가요. 당신은 해파리에요. 눈도 코도 없어요, 생각도 없어요." 서래가 해준을 잠재울 때, 그때는 아직 사랑의 시간이 아니다. 더 기다려야 한다. 서래는 차를 운전해서 바닷가로 달려가며 해준에게 전화한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그들은 비 오는 날 사찰을 방문할 때에도 아직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해준만이 서래를 사랑하고 있었다. 팜 파탈 서래의 계산 안으로 들어온 형사 해준을 해파리로 다루는 것은 얼마나 잔인하고 냉정한 최면인가. _ 프리즘오브 프레스, <프리즘오브 PRISMOF 특별호 : 헤어질 결심>, p17


 서래가 자신의 생각을 가장 극적으로 실현해낸 이포 바닷가를 보면서 영화를 볼 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의 '영원회귀'와 '힘(권력)에의 의지'를 생각하게 된다. 


[사진] 영화 <헤어질 결심> 이포 바닷가 (출처 : 아이뉴스24)


 "힘의 마력. 필요도 아니고 욕망도 아니고 힘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인류의 수호신이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즉 건강, 음식, 주택, 오락을 줘보라. 그들은 여전히 불행하고 불만스러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력적인 존재가 기다리면서 채워지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 이 마력적인 존재를 만족시켜보라. 그러면 그들은 거의 행복하게 된다. 인간과 마력적인 존재가 행복할 수 있는 최대한 정도까지." _ 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 제4부, 262절


  해준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남기기 위해 마침내 해준을 붕괴(崩壞)시킬 정도까지 몰아붙이는 서래. 그것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하나의 의지가 아닐까. 서래는 자신의 의지를 세우기 위해 밑으로 들어간다. 태양이 모래밭 위에 걸리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가 서래를 덮지만, 그 순간 서래가 느끼는 감정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자신의 뜻이 이뤄지는 극한의 쾌감이 아니었을까.


 

 인류의 오류 역사의 결과로서 니체가 도달한 이 영원회귀의 앎은 지금까지 오류를 산출해 온 힘에의 의지가 거기서 스스로의 맹목적 성격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 - 더욱이 그 맹목적인 힘에의 의지에 의해 인식하는 것이었다. 인식과 오류가 그 극한에서 수렴한다.  그러나 힘의 놀이는 거기서 영구적인 정지 상태에, 완전한 균형 관계에 들어서는 것이아니다. 위대한 정오, 태양이 천정에 걸리는 것은 순간이며, 더욱이 그 순간을 그것으로서 인식할 수 있는 자에게 있어서만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이 한순간이, 요컨대 세계가 인식에 의해 빛나고 니체의 메모를 끌어들이자면 "쾌락의 절대적 과잉"이 증명되는 이 한순간이 되돌아오게 되면 이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 _ <니체사전> '영원회귀' 中 , p414


  서래가 바닷가에서 '힘에의 의지'를 관철시켰다면, 그 의지를 둘러싸고 덮는 것은 파도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 그렇지만, 그 파도는 어느 것 하나도 같지 않다. 서로 다른 높이와 소리, 세기를 가진 저마다 다른 파도는 '영원의 상' 아래에서 끊임없이 해준 곁에 머무르려는 서래의 의지를 덮는다.  


 다른 한편 니체는 세계의 본래적인 존재 양태를 부단한 '생성'으로서 파악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 '힘에의 의지'의 형이상학 구상은 '영원회귀'와 결부된다. 즉 세계가 일정한 '힘의 중심들'의 상호 작용으로 성립해 있다고 한다면, 무한한 시간 속에서는 모든 조합이 실현될 수 있으며, 또한 이미 실현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것이 회귀한다는 것은 생성의 세계의 존재의 세계로의 극한적인 접근이며 고찰의 정점이다"라고 말하고,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각인하는" 것 -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힘에의 의지다"라고 하고 있다. _ <니체사전> '힘에의 의지' 中 , p643


 그렇지만,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의 만남은 항상 같은 결과를 낳지 않는다. 마치 자기 유사성을 가진 프랙탈(fractal)처럼, 서래를 덮은 파도는 그 다음 파도에 영향을 미치고, 다시 그 다음 파도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또 다른 생성(生成)을 이룬다. 그렇게 만들어낸 변화의 양상들이 부분과 전체의 자기 유사성으로 표현되며, 서래의 죽음은 하나의 사건으로 해준에게 사랑이 되어 남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림] 망델브로 집합(출처 : https://www.researchgate.net/figure/A-Mandelbrot-set-M-2-for-the-family-f-x-c-x-2-c-5-The-boundary-of-the-black_fig1_263911584)


 앞서 평론가가 말했듯, <헤어질 결심>은 사랑의 기호에 관한 영화다. 때문에, 어느 기호에 중점을 두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관점과 해석이 가능하다. 오늘 이 페이퍼에 올린 해석도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이고, 이 관점도 다듬어지지 않아 거친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글을 올리는 것은 먼저 좋은 선물을 주신 이웃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미련한 생각에서 조금은 나아지는 과정의 발자취를 남겨야겠다는 생각때문이다...


 어떤 복소수 C에 대해 식 f(z)=z2+C로 정의된 복소 다항식 f가 있다고 하자. 임의의 복소수 z0을 고르면 반복, 즉 함수 f를 계속 적용하여 수열 z0, z1, z2...를 얻을 수 있다. 어떤 경우 (C>=2) 얻은 수열은 무한대로 다가가는 반면, 어떤 경우에는 유계 상태, 즉 0으로부터의 고정된 거리 내에 머물러 있다... 만일 z0을 고정하고 C에 대해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하면 어떻게 될까?  그 결과가 망델브로(Mandelbrot set)이다. z0=0으로 잡았을 때 수열이 유계로 남아 있는 C 전체의 집합이 정확한 정의다. 망델브로 집합도 대중적인 상상을 사로잡는 복잡한 프랙탈 모양을 갖는다. _ 티모시 가워스 외, <The Princeton companion to Mathematics 1> , p414


 보라, 그대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만물이 영원히 되돌아오며, 우리 자신도 더불어 영원히 되돌아온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이미 무한한 횟수에 걸쳐 이미 존재했으며, 모든 사물 또한 우리와 함께 그렇게 존재해왔다는 것이 아닌가. _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 제3부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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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4-04 01: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영화 ‘헤어질 결심‘에 이토록 깊은 뜻을 알게 하시다뇨!
감탄이 절로 나오네요~~
사랑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참 다양한데 이 영화를 꼭 다시 봐야겠어요.
겨울호랑이님의 페이퍼가 책선물 주신 분에게 보내는 최고의 감사인사인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04-04 08:10   좋아요 3 | URL
페넬로페님 격려의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영화에 담긴 감독과 작가의 의도를 제가 제대로 파악했는지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워 집니다. 저 스스로도 작품 내의 더 많은 장치들과 알레고리들 중 많은 부분을 놓친 것을 알기에 더욱 그렇네요...ㅜㅜ 부족함이 많은 생각입니다만, 하나의 가능성 정도로 이해해 주시고, 페넬로페님께서 참고 정도만 하시고 작품을 즐기신다면 그것으로 이 페이퍼는 충분히 제 몫을 다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페넬로페님 좋은 하루 되세요!

잘잘라 2023-04-04 08: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극한의 쾌감‘이 궁금해지는 글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대신할 수 있는 무엇‘을 상상하게 된달까요. 너무 오래 덮어두었던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생각을 이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3-04-04 08:26   좋아요 2 | URL
서래의 선택이 제3자의 눈에는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선택의 길이 죽음의 공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서래의 눈은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모래 밑으로 내려가는 선택을 통해 해준의 마음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는 선택. 어쩌면 그것은 종교적 예수의 선택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더 큰 것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 그런 희망이 그를 따르는 이들을 만들고 종교를 만들었다면, 서래 또한 자신의 선택 순간에 일종의 황홀경, ‘엑스터시‘를 느끼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그냥 가벼운 제 생각이고 추측입니다. ^^:) 잘잘랄라님 덕분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나와같다면 2023-04-04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니체의 ‘영원회귀‘와 ‘힘(권력)에의 의지 까지 대단한 사고의 확장이고 <헤어질 결심> 리뷰입니다!

2023-04-04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올주역강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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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뢰복 괘에 대한 정이천의 해설.

아직 (지뢰)복이 오지 않은 것을 보면 (산지)박이 끝나지 않은 듯하다. 더 내려갈 곳이 없는 듯한데 극에 이르지 않았다면 과연 어디까지 가야하나 싶기도 하지만.

극점이 변곡점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사물에 박진(박탈되어 사라진다)의 이치는 없다. 박이 극에 달하면 복이 오고, 음이 지극하면 양이 생겨나게 되어있다. 양이 위에서 극한까지 견디다 박탈당하게 되면 그것은 다시 아래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서괘전」에서 위에서 궁하면 아래로 돌아온다(반하)라고 말한 바의 것이다. 그래서 복괘가 박괘 다음에 오게 된것이다. 괘의 모양을 한번 살펴보자! 일양이 오음의 아래에서 생겨나고 있으니 이것은 음이 극하면 양이 되돌아온다는 이치이다. 10월에 음이 성하여 극한에 달했다가, 다음 달 11월 동지冬至가 되면 일양이 땅속에서 다시 생겨나기 때문에 복이라고 한 것이다. 양은 군자의 도이다. 양의 사라짐이 극한에 달하다가 다시 양이 돌아오는 것은, 군자의 도는 사라지는 것 같다가도 다시 자라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괘는 선으로 돌아온다는 뜻이 된다.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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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3-03-31 0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뭔가 위로가 되는 말씀이네요

겨울호랑이 2023-03-31 16:19   좋아요 1 | URL
네 어려울 때는 위로가, 잘될 때는 경계가 되는 경구라 생각됩니다. 지금은 위로가 되네요...

2023-03-31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31 1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31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31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