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형태의 죽음 의례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는 느낌을 죽어가는 신자들의 마음속에 불어넣는다. 이것이야말로 그 의례의 실제적 기능이다. 이와 별도로 현재 죽어간다는 것은 상당히 무정형적 상황에 놓여 있으며 사회적 지형도에서 빈자리로 표시된다. _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죽어가는 자의 고독>, P36


  연의의 첫영성체 교리를 계기로 성(聖) 금요일 미사를 다녀왔다. 가톨릭 전례에서는 부활절(Easter Sunday) 직전 3일을 각각 성목요일(Maundy Thursday), 성금요일(Good Friday), 성토요일(Holy Saturday)로 보내고 있으며, 각각의 요일과 요일 사이는 '수난', '죽음' ,' 부활'이라는 사건에 대응한다. 그 중에서도 금요일은 수난의 정점, 죽음의 요일에 해당한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 1897 ~ 1990)의 말처럼 미사 전례를 통해 신자들은 수난과 죽음을 재현하고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성금요일 미사 복음 중 절정은 예수의 죽음이다. 4대 복음서에 기술된 예수가 남긴 마지막 말은 서로 다르다. 때문에, 복음서마다 조금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은 조금은 원망하는 듯한 분위기가 든다면, -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마르 15:35) - 루카 복음에서는 죽음 너머의 생명의 분위기가 -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 요한 복음에서는 죽음 자체로 완성이라는 느낌을 개인적으로 받게된다 -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 


 세월호 8주기를 앞두고 맞이한 성금요일에 개인적으로 <요한복음>의 내용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죽음의 순간 아버지에게 호소하는 공관복음과는 달리, 죽음이라는 사건을 직시하는 모습이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 채 해결되지 않은 사건을 잊을 수 없다는 개인적인 생각때문일까. 잘 모르겠지만,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싶다. 해결되지 않았기에 그들을 잊어서는 안되며, 그들의 빈자리를 아직 채울 수 없다는 생각도 함께 한다.


. 2014년 세월호가 침몰 후 2016년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며 촛불을 들었건만, 그로부터 5년이 지나도록 선체 인양 이외에 달라진 것은 없는 상황. 이제 다시 깊은 밤이 시작되기에 8주기를 맞이해서 더 깊은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제 시작될 밤이 얼마나 깊은 어둠이며, 얼마나 길게 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잠들지 않고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을 마음 깊이 간직하며. 남은 유족들이 온전하게 그들에게 남겨진 상처를 치유받을 때까지. 그리고, 우리 사회가 세월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2) 


 죽음 자체는 위협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기나긴 꿈 속으로 떠나가고 세상은 사라진다. 두려운 것은 죽어가는 고통이며, 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산자의 상실감이다... 죽음은 한 인간의 종말이다. 남는 것은 그 혹은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던 것, 즉 산 자가 가진 기억들이다. _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죽어가는 자의 고독>,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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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6 0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16 0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i74 2022-04-16 0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도하는 마음 미안한 마음 ㅠㅠ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ㅠㅠ 기억하기 잊지 않기 깨어있기. 기억하겠습니다 ㅠㅠ

겨울호랑이 2022-04-16 08:52   좋아요 2 | URL
세월호는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던 배가 눈앞에서 침몰했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가 있더 여겨집니다. 큰 재난 상황에서 사건 당시 사실보도도 원인규명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시간이 흐른 뒤에도 제대로 사건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 현대사의 모든 문제가 응축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로마 제국 쇠퇴의 첫 번째 징후이자 원인으로 꼽히는 오만방자한 근위병의 수도 앞서 언급한 1만 5000명을 넘지 않았다. 근위대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창설되었는데, 이 영리한 황제는 자신이 찬탈한 통치권을 그럴듯하게 채색해 주는 것은 법률이지만, 그것을 유지해 주는 것은 군사력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보호하고 원로원을 위협하고 반란을 방지하거나 초기에 진압할 목적으로 강력한 근위대를 주도면밀하게 형성해 나갔다. _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1> , p118


 약 50년의 기간 동안 25명의 황제가 옹립된 군인 황제 시대(軍人皇帝時代, Military Anarchy, CE 235~284). <로마제국 쇠망사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의 저자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 1794)은 로마제국의 쇠퇴 원인의 처음을 근위대에서 찾는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황제의 권위를 보호하는 근위대. 황제는 근위대의 보호 아래 자신의 권한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근위대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제공하면서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으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황제-근위대'의 밀월관계는 끝나게 되었고, 3세기의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Marcus Aurelius Severus Alexander Augustus, 207~235)에 이르러서는 근위대 뿐 아니라 지방군단마저 권력에 도취되기에 이른다. 군단의 추대없이는 황제가 될 수 없는 상황. 이는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명분없는 황제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군대에게 전적으로 의지했을 때 어떠한 혼란이 오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전제 군주에게 봉사하는 막강한 근위대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지만, 종종 왕좌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황제들은 이런 방식으로 근위대를 궁정과 원로원까지 진출시킴으로써 그들이 황제의 힘과 시민 정부의 허약성을 깨닫게 만들었다. 근위대는 황제의 약점과 악행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경멸하게 됨으로써, 명확한 실체가 없이 가상적으로 형성되는 권력에 대해 적당한 거리감과 신비감이 있을 때만 유지되는 존경심과 경외심을 잃었다. _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1> , p119


 세베루스 황제는 감사의 뜻에서, 혹은 잘못된 정책 탓에, 혹은 필요에 의해서 군대의 규율을 느슨하게 해 줄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의 허영심은 금반지를 끼는 영예를 받게 되자 더 높아졌고, 할 일 없는 병영에서 처와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허용되자 더욱 안일한 생활로 빠져들었다... 그들은 곧 힘든 군대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응당 해야 할 복종도 견딜 수 없게 되었으며, 오히려 국가에 압력을 행사하는 집단으로 변질되었다. _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1> , p141


 윤석열 당선인이 자신의 측근 한동훈 검사장을 초대 법무부장관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여야를 막론하고 많은 비판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 로마 제국의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군인 황제 시대와 그 배경을 떠올리게 된다. '로마법'이 유명했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의 지배는 군사력으로 해야 했던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 BCE 63~ CE 14)도 할 수 없었던 '법 기술자'에 의존하는 권력의 시대. 검찰 권력이 태동된 6공화국에서 검찰은 돌격대장이었다면, 이제 그 돌격대장이 정권 그 자체가 되었다는 현실을 절감하게 된다. 


 그(율리아누스)가 두려워할 이유는 충분했다. 세계의 황제 자리에 앉았지만 그에게는 친구는 고사하고 아첨꾼도 한 명 없었다. 근위대조차도 자신들이 손수 추대한 황제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시민들은 모두 그의 즉위를 재앙이자 로마라는 이름에 먹칠을 한 사건으로 생각했다. 지위가 높고 재산이 많아 몸을 사려야 했던 귀족들은 속마음을 숨기고 황제의 꾸며낸 정중함에 만족과 의무가 혼합된 거짓 미소로 응답했다. _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1> , p122


 노태우 정권 시절은 검찰 출신들의 전성기였다. 5공 시절부터 정치검사와 정치군인들이 서로 어울리는 것을 '육법당'이라고 비꼬았는데, 6월항쟁 이후 군 출신들이 누리던 권력을 6공의 황태자 박철언, 안기부장 서동권, 청와대 비서실장 정해창 등 경북고를 나온 검찰 출신들이 차지했다. 검찰사상 최악의 사건이라 할 1991년의 유서대필 사건은 바로 이런 구도에서 발생했다. 과거에는 정권 핵심이나 안기부가 기획한 사건을 검찰이 법률적으로 뒤치다꺼리를 해주었다면 이제는 검찰이 전면에 나서서 정권의 위기를 돌파했다. _ 한홍구, <사법부> , p412/454


 

관련기사 : [사설]법무에 논란 많은 한동훈 지명… ‘檢공화국’ 비판 왜 자초하나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20413/1128692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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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2-04-15 12: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격하게 깊이 공감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4-15 12:11   좋아요 2 | URL
transient-guest님, 공감에 감사합니다...

초란공 2022-04-15 12: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돌격대장이 권력 그 자체‘란 말씀이 앞으로의 5년을 특징짓는 말인듯 싶습니다. 안철수측은 (이미 예견되는 일이었지만) 본인이 팽당할 것이라는 걸 본인만 몰랐을 것 같구요.

겨울호랑이 2022-04-15 12:40   좋아요 3 | URL
네... 제 생각이 틀리길 바라봅니다만... 오늘 오전에 안철수와 당선인 긴급 회동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뭔가 단단히 잡힌 듯 합니다...

레삭매냐 2022-04-15 13: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무엇을 해도 항상 상상초월
이라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
네요.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말이죠.

자신들이 캠코더라는 말로
비판하던 시절은 깡그리 잊어
버렸나 봅니다. 기대가 없어서
그런지 그냥 그런가 보다 싶네
요.

겨울호랑이 2022-04-15 13:19   좋아요 3 | URL
정말 취임도 하기 전인데, 벌써 임기 중후반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요... 하는 일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이런 일이 계속 되다보면 둔감해지는 것이 더 걱정이 됩니다. 이슈로 이슈를 덮는다고 하지만, 이런 점에 있어서는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인생은 사는 데 뜻이 있는 거요. 부귀영화야말로 헛된 꿈이오."

 "실패한 사람의 자기 위안 아닌가요?" "나는 가끔 거지가 부러울 때가 있소. 그들은 자유인이니까." "정말 자유인일까요?" "아암, 자유인이지요. 그들에게는 집착할 집도 없고 가족도 없고 한 끼 걱정만 하면 되니까."

 "그들은 가진 자보다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어요. 무형유형으로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유는 저당 잡히게 마련이니까, 내 얘기가 틀렸단 말인가요?"

 "그래도 모든 사람은 유형무형은 많은 것을 가지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인간들은 미망(迷妄)에 빠져서 고통스러워하지." _ 박경리, <토지 19> , p197/634


  <토지> 독서챌린지 37주차. 이번 주 독서챌린지 주제는 ''내가 만약 소설 속 인물이었다면?" 이지만, 이에 앞서 이번 주에 읽은 책 내용을 먼저 정리해보자. <토지 19>에서는 윤국과 양현의 결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찬하와 오가타가 아들 쇼지를 데리고 만주로 여행을 간다. 그 중에서 영광과 유인배와의 대화, 찬하와 오가타와의 대화 중에서 공통된 소재가 있는데 바로 '자유 自由'다. 이들이 말한 자유가 무엇일까? 나라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개인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 중에서도 경제적인 자유일까, 정치적인 자유일까 등등. 


 용무가 없는 여행이란 항상 그러한 것이지만 그것은 일종의 탈출이다. 그러나 배를 탔을 때나 기차를 탔을 때는 그것이 탈출이기보다 유리(遊離)현상으로 나타난다. 탈출하는 대지를 잃기 때문에 개체에 응결되는 자각과 동시에 운명과의 수직선을 그리며 불확실한 의식의 세계는 확대된다. 그것은 죽음의 행로가 이러할지 모른다는 쓸쓸함이며, 자유의 개념이란 결국 개체에 대한 인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_ 박경리, <토지 19> , p290/634


 <토지>에서 언급된 자유가 '일체의 구속이 없음'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라면, 이들은 정말 '자유' 자체를 원했을까, 아니면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태'를 원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거지는 가진 것이 없기에 오히려 구속받지 않을 수 있었던 반면, 찬하와 오가타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속박될 수 밖에 없다는 역설. <토지>에서 말하듯 자유란 절대적인 상태가 아닌 관계에 대한 인식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에 대해 에리히 프롬 또한 연장선상에 있는 듯하다.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 1900~1980)은 <자유로부터의 도피 Escape From Freedom>에서  더 큰 자유가 오히려 사회에 대한 더 강한 결합으로 이끌기에 결과적으로 자신을 얽매이는 것으로 해석한다.  프롬의 결론에 따르면 마치 망망대해에서 갈증에 못 이겨 마신 바닷물이 더 큰 갈증을 불러오듯,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가 더 큰 강압으로 돌아오게 된다. 사회로부터의 분리불안이 사회의 간섭을 희망한다면,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 ~ 1873)의 <자유론 On Liberty>은 자유를 위한 사회의 간섭을 정당화한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이뤄지는 사회의 간섭과 강제는 아이러니 하지만, 지금 우리가 직면한 현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책의 주요 주제는 인간이 타인이나 자연과의 원초적 일체감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자유를 얻으면 얻을수록, 인간이 '개인'이 되면 될수록, 자발적인 사랑과 생산적인 일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결합시키거나 아니면 자신의 자유와 개체적 자아의 본래 모습을 파괴하는 끈으로 세계와 자신을 묶어서 일종의 안전보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_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 p25/226


 인간의 개체화 과정 전체가 의존하고 있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방금 말한 의미에서 개성을 실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지 못하면,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그때까지 그들에게 안도감을 주었던 기본적인 관계를 단절당하면, 이 불균형 때문에 자유는 견딜 수 없는 부담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자유는 의심과 동일해지고, 의미와 방향을 잃은 삶과 동일해진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이나 세계와의 관계가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더라도 불안을 없애주겠다고 약속하면, 자유에서 벗어나 그 관계 속으로 도피하거나 복종으로 도피하려는 강력한 경향이 생겨난다. _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 p34/226


 자신을 노예로 파는 것은 자유를 포기한다는 말이다. 한번 이렇게 하고 나면 나중에 다시는 자유를 누릴 수 없다. 그 결과 이는 자신을 팔아버리는 행위도 허용해주는 원리, 즉 자유의 목적을 자기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자유 상태에 있을 때 누리는 이점을 향유할 수 없다. 자유의 원칙이 자유롭지 않을 자유 free not to be free까지 허용하지는 않는다. 자유를 포기할 자유는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자유의 원칙은 우리가 자유를 포기해서는 안 되며 자유를 버리는 것과 같은 의미의 자유는 함부로 누리지 못하도록 제한을 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원칙 안에서 각 개인은 행위자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무제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_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 선집> <자유론> , p408/962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 1909~1997)의 설명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 벌린의 설명에 따르면, 소극적인 의미의 자유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유는 '당위'가 된다. 자신의 자유뿐 아니라 타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적극적인 개입. 이러한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유의 기원을 찾기 위해 우리는 계몽시대의 '도구적 이성'까지 거슬러 가야 한다..


 이사야 벌린 Isaiah Berlin의 정의에 따르면, 소극적 자유란 '타인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각자가 자기 뜻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태'이며, 이에 비해 적극적 자유란 '합리적으로 결정하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개인의 상태나 능력'을 뜻한다. 그는 자유의 근본적인 의미는 타인들에 의한 사슬로부터, 감금으로부터, 노예 상태로부터의 자유에 있으며, 그 나머지는 이런 의미의 확장이거나 은유일 뿐이라고 본다.... 벌린이 적극적 자유를 문제 삼는 이유는, 그것이 함축하는 '이성에 따른 자기 지배 혹은 자기실현'의 의미가 자유를 이해하는데 혼란을 초래하고 나아가 자유를 억압하는 명분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성의 주체로서의 '자기'의 범주를 국가나 민족 공동체로 확장하게 되면, '자유롭기 위한 강제'의 역설이 '참된' 자유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_ 문지영, <자유> , p116/252


 국가에 봉사하는 '관직'의 의무에 합당하게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이성의 '사적' 사용이라 일컫고, 반면 그런 관직의 의무에서 벗어나 단지 '식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개진하는 것을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 일컫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성의 '사적' 사용은 도구적 이성을 가리킨다. 그런 경우 공동체의 구성원은 '단지 수동적 태도만 취하게 하는 기계적 장치'의 일부로 기능하며, 이성 사용의 보편타당성 여부를 따져서는 안 되고 국가의 명령과 관직의 의무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반면 이성의 '공적' 사용에서는 생각과 표현의 자유가 전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이다._임마누엘 칸트 외, <계몽이란 무엇인가> , 해제, p25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정언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을  

'근대화(近代化)'라는 명목으로 국가 단위에서 이성(理性)을 강요했을 때 발생하는 도구적 이성의 문제. 이것은 근대화(Modernization)에서 비롯한 현대사회의 문제점이 아닐까. 현대사회의 불안과 소외, 이것을 <토지 19>에서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토지> 초반부에서 목매달아 죽은 여인의 원혼이 서린 나뭇가지가 병에 효험이 있더라는 전근대적인 분위기가 사회 전반을 지배했다면,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사회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현대사회의 문제로 대체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가 서희로 대표되는 1세대 남짓의 시간 동안 발생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변화가 우리 사회의 필요가 아닌, 외부의 필요에 의해 강제된 것이기에 충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없었음도 당연할 것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며, 작품 속 인물들을 다시 들여다 보자. 내가 만약 소설 속 인물이었다면?


 이성의 광기는 오늘날의 이성을 특징짓는 명백한 기형성을 훨씬 능가한다. 이성은 인간을 통해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세계의 질병에 대해 반성해야만 자신의 합리성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러한 자기 비판 속에서 이성은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진리의 원칙을 고수하고 그 밖의 어떠한 동기도 지향하지 않음으로써 동시에 스스로에게 충실하게 된다. 자연 지배는 인간 지배로 전환되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성의 자연성은 지배하려는 경향 속에 내재되어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역설적으로 이성을 자연으로부터 소외시킨다. 따라서 이성은 화해의 도구가 되는 경우에만 동시에 도구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진보와 퇴보라는 방향의 변화는 철학이 어떻게 정의되어왔는지를 반영한다. _ 막스 호르크하이머, <도구적 이성 비판> , p218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자유의 상실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선택권마저도 더 이상 시민으로서의 우리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보호 권력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문제들은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세 가지 불안 요인으로 종합된다. 첫 번째 두려움은 삶의 의미의 상실, 즉 도덕적 지평들의 실종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는 만연하는 도구적 이성 앞에서 소멸하는 삶의 목표들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자유/자결권의 상실에 관한 것이다. _ 찰스 테일러 , <불안한 현대사회> , p32/294


 <토지 19>의 시대적 배경은 1940년 초중반이다. 급격한 사회 변화와 함께 전쟁이라는 한계 상황. 이러한 이중고 앞에서 등장인물들은 각각 저마다의 방식으로 대처해나간다. 남매로 자란 윤국과 양현에게 결혼을 강요하는 서희, 친구의 아들을 입양해 키우고 이 사실을 아들에게 알리지 않는 찬하. 이들의 모습이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이들에게 다른 좋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절박한 상황 속에서 가까운 이들과 헤어지지 않으려는 필사의 노력을 서희와 찬하의 모습에서 읽을 수 있기에 하나의 방편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후 전개되는 <토지>의 내용을 알고 작품 밖에서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다. <토지 19> 안에서 이야기되는 '자유'라는 근대 이데올로기와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함께 생각하며, 작품 속 인물들의 선택을 이해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자유'와 관련해서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 AD 354~430)는 '자유의지'를 선(善)과 악(惡)을 판단할 수 있는 중간선으로 생각한다. 다만, 인간은 한계가 있는 존재이기에 절대선에 이르기 위해서 인간이 따라야 하는 것이 '신의 길'임을 함께 말한다.  또한, 노자(老子, Laozi, BC571 ?~?)는 무위(無爲)를 통해 '도(道)'를 따를 것을 이야기한다. 이들 모두가 '분리'가 아닌 '따름'을 통해 더 좋은 결과를 지향한다면, '분리'를 통해 억압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근대의 '자유'는 어쩌면 우리를 더 큰 강제로 이끄는 다른 수단일지도 모르겠다.  '~으로부터의(from ) 자유(freedom)'가 아닌 어떤 상태로의 자연스러운 귀의를 통한 궁극적인 자유가 우리에게 더 큰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닐런지...


 48. 누구든지 넉넉한 정도 이상으로 바라면 물욕이다. 이러한 물욕은 곧 탐욕이고 탐욕은 곧 부정한 의지이다. 그러므로 부정한 의지야말로 모든 악의 원인이다. 만약 그것이 자연본성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자연본성을 보존해 줄 것이고 자연본성에 해로울 리 없으며, 따라서 부정할 까닭이 없다. 따라서 모든 악의 뿌리가 자연본성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고, 이 말로도 자연 사물들을 (나쁘다고) 공격하려는 사람들을 논박하기는 충분하다고 본다(p370)... 52. 그러니까 사람이 무지해서, 올바로 행할 것을 선택하는 자유의지를 갖추고 있지 못하거나, 육의 습관이 저항하기 때문에 죽음의 유산의 광폭한 위력이 어떤 면에서 천성적으로 뿌리를 내려 사람이 무엇을 해야 올바로 행함인 줄은 알고 그렇게 하기 원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할 능력이 없거나 한다. _아우구스티누스, <자유의지론> , p377


 도를 따름으로써 성인-군주는 이원성의 세계를 다스릴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뚜렷이 구분되는 측면들과 계기들은 서로를 해치려고 싸우지 않는다. 그보다는 상호 주고받음을 통해 협력한다. 이것은 유익한(그리고 리드미컬한) 효력의 교환으로 이어진다. 이 효력(德)은 군주에 의해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에서 펼쳐지고 공동체에 결실을 가져오기 때문에 점점 커지는 "위신(德)"의 형태로 "그에게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조차도 그가 주었던 것을 얻는 것이다. 도와 그것의 효력인 덕은 가장 넓은 차원에서는 세상 전체에 "작용하고" 있다. _ 한스-게오르크 묄러, <도덕경의 철학> , p70/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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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 성가 161번. 성체를 찬송하세.


   1) 하늘에 별들을 누가 셀 수 있는가

   2) 강변에 모래알 헤아릴 수 있는가

   3) 바다에 물방울 누가 셀 수 있는가

   4) 논밭에 이삭 수 누가 알 수 있는가

   5) 나무에 잎사귀 헤아릴 수 있는가

   6) 영원과 무궁을 깨달을 수 있는가


   후렴 : 이만큼 무수히 성체(聖體)를 찬송하세 


 성가듣기 : https://maria.catholic.or.kr/musicfiles/mp3/2004090161.mp3


 얼마 전 주일학교 개학을 맞아 딸아이와 함께 참여한 어린이 미사 중 들었던 성체성가 <성체를 찬송하세>. 성인 성가로 듣던 음색, 빠르기와는 다르게 경쾌하게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다소 엉뚱하게도 <금강경 金剛經>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끝을 알 수 없는 진리(眞理) 앞에 한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을 성가와 금강경에서 발견하게 된다. 


어수선했던 2022년의 3월도 다 지나갔지만, 모르는 사이 봄은 우리 곁에 와있었다. 들판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작은 꽃을 보며, 영원(永遠)의 시간 앞에 필멸(必滅)의 인생을 생각하게 된다...



無爲福勝分 第十一 제11분 함이 없음의 복이여, 위대하여라!


11-1. "須菩提! 如恒河中所有沙數, 如是沙等恒河 !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수보리야! 갠지스강에 가득찬 모래알의 수만큼, 이 모래만큼의 갠지스강들이 또 있다고 하자! 네 뜻에 어떠하뇨? 이 모든 갠지스강들에 가득찬 모래는 참으로 많다 하지 않겠느냐?"


11-2. 須菩提言 : "甚多, 世尊!  但諸恒河尙多無數 何況其沙?" 수보리가 사뢰었다 : "참으로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모든 갠지스강만이라도 너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거늘, 하물며 그 모래 수이겠습니까?"


11-3. "須菩提! 我今實言告汝. 若有善男子善女人, 以七寶 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 得福 多不?" "수보리야! 내 지금 너에게 진실한 말로 이르노니,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여기 있어, 칠보로써 그 모든 갠지스강의 모래수만큼의 삼천대천세계를 채워 보시한다고 한다면, 복을 얻음이 많겠느냐?"


11-4. 須菩提言 : "甚多, 世尊!" 수보리가 사뢰었다 : "정말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11-5. 佛告須菩提 :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 등을 받아 지니게 되어, 그것을 딴 사람들에게 잘 설명해 준다면, 이 복덕은 앞서 칠보의 복덕보다 더 크리라." _ 김용옥,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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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22-03-30 00: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글을 읽으며 저도 한번 생각해보게 되네요. 평화를 빕니다 🙏

겨울호랑이 2022-03-30 00:06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라파엘님께서도 평안한 밤 되세요! ^^:)

페넬로페 2022-03-30 0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간만에 성가를 듣습니다^^
성가의 가사를 금강경에 비유하시다니👍👍

겨울호랑이 2022-03-30 00:09   좋아요 2 | URL
페넬로페님 감사합니다. 머리로 생각한 것은 아니고, 그냥 성가를 듣다보니 떠오르더군요... 아무래도 제가 분심(分心)이 많은 듯 합니다... ^^:)
 

South Korea’s president-elect starts with an unpopular personal project

Yoon Suk-yeol wants to move the presidential office. Citizens would rather he focus on the economy


 한국 대통령 당선자, 인기없는 개인 프로젝트 시작. 윤석열은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고 싶어하지만, 국민들은 대통령이 경제에 집중하길 원한다


 The Economist의 이번주(2022.3.16)에는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과 관련한 기사를 위와 같은 제목으로 내보냈다. 기사의 상세내용은 원주민인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내용이니 별도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기사의 마지막에 담긴 The Economist의 관점은 이번 사안을 바라보는 세계적인, 그리고 객관적인 시선을 잘 담아내고 있다고 여겨져 옮겨본다.  


With his popularity already at a historic low for an incoming president, Mr Yoon may find that his attempt to bring the people closer actually drives them farther away.

 윤 대통령 당선자는 차기 대통령 지지도가  이미 기록적으로 낮은  현상황에서, 국민들과 가까워지려는 그의 노력이 실제로는 그들을 더 멀리 쫒아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사안에 대해 객관적인 사실 보도와 함께 냉정한 평가는 언론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가 현재 우리의 언론에는 없기에, 우리는 우리나라의 문제를 바라볼 때마저 외신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서글픈 현실에 서 있음도 함께 깨닫게 된다. 179년 전통의 <The Economist>와 한국 중앙일보에서 발간하는 <이코노미스트>. 각각의 발음은 큰 차이없지만, <이코노미스트>가 표제에서 던진 '윤석열 시대 개막, 살림살이 좀 나아질까'에 대한 답(答)을 <The Economist>의 소기사 제목에서 발견하면서 현재 시점에서 결코 넘을 수 없는 언론권위의 차이를 마음 깊이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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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3-27 22:3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귤이 회하를 건너면 낑깡이 된다는
말을 J일보에서 만드는 이름만 비
슷한 잡지에서 그대로 보여주네요.

이름이 아깝네요.

겨울호랑이 2022-03-27 22:28   좋아요 6 | URL
<이코노미스트>를 <The Economist>의 번역본으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이외로 꽤 많더군요... 차라리 기사를 그대로 번역이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얄라알라 2022-03-28 11: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둥지를 틀지 않은 다른 많은 분들도 겨울 호랑이님 글 구독할 채널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3-28 11:27   좋아요 2 | URL
에고 제겐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제 이웃분들께서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시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글에 비해 넘치는 걸요... 얄라얄라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갱지 2022-03-28 14: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 그나마 국민들 마음을(영어로라도) 알아주는 데가 있어 좀 위로가 되는 듯은 한데, 낯은 뜨겁네요.

겨울호랑이 2022-03-28 14:56   좋아요 2 | URL
네... 더 큰 문제는 아직 임기 시작도 전이라는 점이겠지요...

초란공 2022-03-28 18: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두 잡지가 같은 것이 아니었군요^^;; 다음 정부 수장이 다시 청와대로 오려면 또 다 뜯어 고치고 이동하고 이중으로 문제가 보입니다. 단순히 ‘재배치‘라고 말하는 인간이 있다는게 놀랍기도 하고요. 하지만 당장 앞으로 벌어질 일에 비하면 이건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몸풀기 수준인가 싶기도 하구요... 상당히 두렵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3-28 18:50   좋아요 3 | URL
사안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고, 언론사(또는 사주)의 배경에 따라 어느 부분에 방점을 두는가에 따라 언론의 논조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 상황과 중대성, 긴급성의 측면에서 봤을 때 어느 것도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는 ‘용산 이전‘ 문제는 답답하게 보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눈에 뻔히 보이는 문제에 힘을 소모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정말 소중한 우리의 가치가 무속과 돈문제와 연관되지 않는다면 5년이라는 시간동안 보존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도 함께 가져봅니다...^^:)

초란공 2022-03-28 19:04   좋아요 3 | URL
대통령 후보 경선할 때였던가요... 당사자의 입에서 자신있게 ‘밀턴 프리드만‘이란 이름이 나왔을 때부터 식겁하기 시작했던 것 같네요. 여기에 박정희를 존경한다는 당대표까지... 종합세트지요. 그래도 희망을...!!

겨울호랑이 2022-03-28 19:12   좋아요 3 | URL
그렇지요... 단순히 밀턴 프리드먼의 사상을 이해하고 우리의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기를 고민하기 보다 자신이 뱉어놓은 말을 덮기 위한 인용구로 유명학자의 사상 일부를 가져다 쓴 것에 대해 저 또한 걱정하게 됩니다... 사실, 당선자가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는지 모호했을 때 걱정하고 우려하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은 그저 로또에 당첨된 졸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네요...